소설리스트

2화 (25/29)

  2.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가을의 초입을 앞둔 하늘은 여느 때보다도 깨끗하고 맑았다.

도운은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만끽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화창한 날씨,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 그리고 자신의 손 위로 뻗어오는 다정한 온기까지. 하루의 좋은 출발이었다.

해일의 손가락이 손등을 간지럽히자 도운이 손을 맞잡았다. 살며시 깍지를 끼며 해일을 바라보는데 운전 중인 그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해일은 잠시 손을 뗄 일이 생겨도 금세 다시 잡아오며 애정을 표현했다. 반지를 열심히 끼고 다니는 것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네 번째 손가락을 집요하게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저 안쪽에서 내릴게요.”

회사에 가까워지자 도운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공원 주차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일은 흔쾌히 구석진 곳으로 차를 몰았다.

혹여 회사 사람들과 마주칠까 봐 도운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내려주기를 원했다. 도운의 걱정을 알아챈 해일은 아침의 짧은 드라이브 데이트를 지속하기 위해 나름대로 타협했다.

나무 그늘이 진 곳에 차가 멈춰 서자 도운이 가방을 챙겨 들었다. 문고리에 손을 걸며 다녀오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해일이 손목을 붙잡아왔다.

“서운하게.”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여유로웠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려는 도운에게 해일이 말했다. 한쪽 뺨을 가만히 내밀자 도운이 포시시 웃었다. 그리고 쪽.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한 번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몸을 움직이지 않자 귀여운 웃음소리와 함께 쪽, 쪽쪽, 여러 번 뽀뽀가 날아왔다.

해일은 고개를 돌려 도운의 입술 위로 가볍게 키스했다. 잠시 얼굴이 떨어진 사이 두 사람은 시선을 끊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넥타이 조금 비뚤어졌는데.”

해일이 도운의 넥타이로 손을 올렸다. 비뚤어지지 않은 걸 알면서도 도운은 씩 웃으며 턱을 살짝 들고 상체를 내밀어 보였다. 해일은 셔츠 깃과 넥타이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눈을 맞춰오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깊은 키스를 시작했다.

“으…… 응…….”

입술끼리 부드럽게 문지르자 금세 젖어들었다. 통통한 아랫입술을 빨아들이고 이로 살살 물어 자극하자 대번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 부근에 머물던 해일의 손이 도운의 뒷덜미로 향했다.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감겼던 도운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도운은 계속 눈을 뜨고 있던 해일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고는 눈동자를 굴렸다. 창밖을 살피는 것 같았다. 해일은 잠시 입술을 떼고 손가락으로 볼을 톡 쳐 주의를 끌었다.

“아무도 안 봐. 사람 없잖아.”

“그래도…….”

입술이 떨어진 사이 도운이 몸을 뒤로 빼자 심술 난 해일은 아예 한쪽 팔을 조수석에 기대며 다시 입을 맞췄다. 해일의 기세에 상체가 뒤로 완전히 넘어간 도운은 해일의 혀가 밀려들어 오자 급격히 숨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밀어냈다간 얼마나 놓아주지 않을지 잘 알았기에 도운은 순순히 키스에 응했다.

“음…….”

위아래 입술을 감쳐물고 혀로 입천장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감각이 황홀했다. 해일이 도운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팔뚝을 어루만지고, 어깨로 올라와 목까지 쓸어 올리고는 다시 등으로 내려갔다.

장단을 맞춰주고는 있지만, 점점 깊어지는 입맞춤에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몸을 쓰다듬는 손길에 배 속으로 미약하게 열기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해일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거친 숨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이, 이사님……, 흐…….”

“응.”

“읏, 가야, 해요. 이제…….”

시계를 흘긋거린 도운이 간신히 말을 잇자 해일이 마지막까지 입술을 길게 물어 당기고는 간신히 몸을 뒤로 물렸다.

“보내기 싫어지네.”

정말 참기 힘들다는 듯이 말을 뱉은 해일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을 풀며 도운의 넥타이를 다시 만져 주었다. 이번엔 정말 흐트러져 있었다.

“이사님도 출근하셔야 하면서.”

“하루 빠지면 되죠.”

“저는 사원이라 그게 안 되거든요.”

“하아. 괜히 취직시켰어.”

이제 와 후회해도 늦었다며 도운이 웃었다. 광대 위로 길게 패는 귀여운 보조개. 햇살보다 더 따사로운 미소에 해일이 도운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이걸 어떻게 밖에 내보낼 생각을 한 거지. 누가 흑심 품을지 알고.”

“누가 저한테 흑심을 품어요.”

말도 안 된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해일은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도운의 앞머리를 빗기듯 쓸어 넘겼다. 드러난 이마에 뽀뽀를 여러 차례 한 뒤가 되어서야 보내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손을 핸들 위로 올렸다.

“오늘 신입 비서 오는 날이라고 하셨잖아요. 늦지 않게 가보세요.”

“그래야죠. 먼저 들어가요.”

“그럼…… 이따 저녁에 뵈어요.”

도운은 주변에 기척이 없나 짧게 살핀 뒤, 차에서 내렸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들어가라는 해일의 손짓에 도운은 하는 수 없이 먼저 뒤를 돌았다. 도운이 저 멀리 길을 건너가 건물 안으로 총총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해일은 그제야 차를 움직일 수 있었다.

* * *

엘리베이터에 오른 도운은 화끈거리던 제 볼과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열을 식히기 위해 노력했다. 해일의 스킨십이 날이 갈수록 거침없어지고 있었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았다. 주말 내내 그렇게나 해놓고도 성에 차지 않는 것일까. 심지어는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와중에도 키스를 나누다 흥분해 아랫도리를 마구 문질러왔었다.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뜨겁고 단단한 그의 것에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 바로 한 시간 전의 일이었는데.

출근 직전 잠깐의 키스로도 금방 불이 붙는 해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해일은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금욕적으로 보였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도운에게 그걸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그와 계약 관계로 매여 있을 때를 생각해 보아도 그랬다. 단둘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몸을, 민감한 부위를 매만지며 욕구를 표현하곤 했기에.

도운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야한 생각을 해서 그런지 괜히 표정도 이상해 보였다. 물고 빨린 입술 또한 부어 보였다. 세수하듯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올라가서 찬 음료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가방을 내려두고 잠시 숨을 돌렸다. 컴퓨터 전원을 켠 뒤 탕비실에 다녀오려고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서도운 씨.’ 하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찍 왔네?”

“안녕하세요, 심 과장님.”

“그래도 나보단 더 빨리 와야 되지 않나?”

다짜고짜 시작되는 트집에 도운은 그저 머쓱하다는 듯 웃었다.

“맡은 일도 많은데 일찍 와서 하면 좀 좋아. 그치?”

“아…… 내일은 좀 더 서두르겠습니다.”

“농담한 건데. 또 딱딱하네. 이거 괜히 한 소리 했다고 쿠사리 먹는 거 아냐?”

그는 뭐가 웃기는지 혼자 큭큭 웃더니 도운의 책상 위로 파일 하나를 던졌다. 그러곤 오전 중으로 정리하라는 말과 함께 사무실을 떠났다. 아마 출근 시간 직전까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노닥거리다 돌아올 것이다.

도운은 단전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해일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있다. 바로 저 인물, 자신의 상사 심 과장 때문이었다.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탕비실로 향한 도운은 커피를 내리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출근 시간까지는 20분이 넘게 남아 있었다.

사실 출근 시간은 문제가 아니다. 그저 심 과장이 심술을 부리는 것일 뿐이다.

심 과장이 해운문화재단에 온 것은 이제 한 달로 얼마 되지 않았다. 남들보다 조금 앞서 과장을 달며 이곳으로 이직해 온 그는 원래 성격이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능력에서 기인한 것인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그랬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중심적이었으며 또 권위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성향을 도운에게 가장 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이스커피를 텀블러에 한가득 담고 자리로 돌아왔다. 조금씩 홀짝이며 심 과장이 던지고 간 파일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심 과장이 마무리해야 할 일을 도운에게 미룬 것이었다. 도운은 다른 할 일도 있었으나 괜히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이 일부터 서둘러 마무리하기로 했다.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조용하던 사무실은 55분이 되어서야 복작이기 시작했다. 도운은 하나둘씩 등장하는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잠시 숨을 돌렸다. 제 뒷자리에 앉는 사원 하나가 사무실을 짧게 훑더니 슬쩍 의자를 끌어 도운에게 붙었다.

“심 과장님은 또 9층 가셨어요?”

“그러신 것 같네요.”

“복지팀에 꿀단지라도 숨겨두셨나.”

그가 장난스레 입술을 비죽이며 웃었다. 그러게요, 하고 답하는 도운에게 때마침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오늘 퇴근 맞춰서 데리러 갈 테니 기다려요.]

해일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그 짧은 한 줄을 읽은 도운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졌다. 별다른 내용도 아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

출근하자마자 당한 속상한 일이 서서히 녹아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판을 누르는 움직임이 신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세상 사람들 모두 자신의 연인에게 이렇게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일까 궁금해질 정도로, 스스로의 행동이 생소하게만 느껴진다.

‘어리광부리지 말고 힘내자.’

이렇게나 자신만을 생각해 주는 연인이 있는데. 이런 일로 지칠 수는 없었다. 도운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다짐을 하며 열의를 다졌다.

* * *

경매에서 산 그림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문화재단의 로비와 사무실이 있는 층 곳곳에 전시되었다. 그날 경매는 제대로 즐겨보지 못하고 집으로 가느라 흐지부지되었지만, 해일과 도운이 도록을 보고 골랐던 몇 가지의 그림은 대리인이 알아서 구매해 온 모양이었다.

도운은 점심시간을 틈타 산책도 할 겸 로비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올라오며 그림을 하나씩 구경했다. 도운이 직접 입찰했던 그림은 문화재단 팀이 있는 층에 전시되었다. 흰 바탕색에 왼쪽으로 치우쳐진 곳엔 두툼한 세로 선이 흐릿하게 그려져 있는 단순한 그림이었다. 멋진 작품이었으나 도운은 어쩐지 그림을 볼 때마다 그날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힐 것만 같았다.

괜히 볼을 문지르며 다른 층으로 가려던 도운은 걸려온 전화에 발걸음을 멈췄다. 발신인은 비서실에서 함께 일하던 박 대리였다. 오랜만에 걸려온 반가운 전화에 도운은 냉큼 전화를 받으며 옥상 공원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가벼운 안부를 나눴다.

“다른 분들은 잘 계세요?”

―네, 다들 잘 지내고 있어요. 아, 차장님 사모님 임신하셨다는 얘기 들으셨죠. 벌써 막달이라 차장님도 휴직 내셨거든요. 인원 충원 없었으면 하반기는 진짜 죽을 뻔했어요.

“아, 정말요? 저도 연락드려 봐야겠어요, 조만간.”

도운은 벤치에 걸터앉으며 말을 이었다.

“새로 오신 분은 어떠세요?”

해일의 팀에 새로운 비서가 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해일에게 물어보았는데, 별다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음, 괜찮은 것 같아요. 일단 잘생겼거든요.

박 대리의 솔직한 말에 도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잘생겼어요? 남자친구도 있으시잖아요.”

―나도 무슨 흑심이 있다는 건 아니에요.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고 다른 남자가 잘생기면 안 되는 건 아니니까.

정작 박 대리도 웃겼는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다 끝엔 큭큭 웃음을 흘렸다.

―농담이고, 도운 씨 처음 왔을 때 보는 기분이에요. 되게 열의 있고, 많이 배우려고 하고.

“하하, 그래요? 다행이다. 하반기엔 진행되는 프로젝트도 많잖아요.”

―빨리 배우길 바라야죠. 다행히 몇 주 가르쳐 본 바로는 무경력 신입치곤 일머리도 아주 괜찮은 편이에요. 난 뭐, 사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어서 누구든 온 것만으로도 살 것 같지만.

그는 정말 안심되고 후련하다는 듯이 긴 숨을 내쉬었다. 도운이 있을 때도 비서실은 항상 바빴다. 청영의 거의 모든 사업이 해일의 손을 거쳐 가는 것과 다름없는 실정이었기에 쉴 틈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타 부서와의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도운이 들어오고 1년 만에 퇴사하였고, 이젠 또 휴직하는 사람이 생기니 충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시의적절하게 괜찮은 사람이 들어왔다. 박 대리는 그것만으로도 아주 만족했다. 제발 자신의 상사가 신입을 겁주지만 말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사장님도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세요.

“어, 그래요? 저한텐 별다른 말씀이 없으셔서 사실 궁금했어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요. 사장님이 회의도 참석시키시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세요.

그건 해일이 처음 도운을 가르칠 때도 했던 일이었다.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무턱대고 회의부터 데려가 시험해 보는 그가 처음엔 얼마나 무서웠는지. 신입 비서는 나름대로 해일의 테스트에 잘 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오찬 가시는데 실장님까지 셋이 나갔어요. 아, 생각해 보니까 성이 도운 씨랑 똑같다. 서재혁 씨거든요. 둘이 진짜 닮은 것 같아요.

박 대리는 서재혁과 도운에게서 공통점을 많이 느끼는지 재차 닮은 것 같다고 말했다. 성까지 같다는 얘기를 들으니 도운 또한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신변잡기로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한산하던 옥상에 한 무리가 들어왔다.

“어, 서도운 씨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도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 과장이었다.

“저 대리님, 제가 또 연락드릴게요.”

―응 그래요. 다음에 통화해요.

급하게 전화를 마무리하자 심 과장이 다가와 물었다.

“여자 친구?”

“예? 아닙니다.”

“에이, 여자 친구 맞구만. 반지도 있잖아.”

심 과장은 사 들고 온 커피를 쭉 빨아 마시며 실실 웃었다. 도운은 자신도 모르게 반지를 다른 손으로 숨기며 따라온 다른 사원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복지팀 사람들이었다. 어째 심 과장은 문화지원팀 사람들보다 복지팀 사람들과 더 가까워 보였다.

“샌님같이 생겨서 여자 친구 없을 줄 알았는데, 돈 많은 여자인가 보지?”

“요즘 젊은 애들은 이런 외모 좋아하지, 왜.”

자신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조금 불편해 도운은 머쓱하다는 듯 웃었다.

“통화한 게 여자 친구는 아닙니다.”

“그래?”

심 과장은 사실이 뭐가 되었든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눈웃음을 이렇게 살살 치면서 통화하길래 여친인 줄 알았지.”

아……. 그는 도운의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했다. 주변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며 팔을 툭 치고 말렸다. 장난이지, 장난. 심 과장은 낄낄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도운은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본인이 장난이라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여기 더 있다가는 안 될 것 같아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저는 이만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일부러 표정을 숨기기 위해 허리를 푹 숙여 인사한 뒤 빠른 걸음으로 심 과장에게서 벗어났다. 꼭 도운을 향한 것만 같은 기분 나쁜 웃음과 속닥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옥상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오는 도운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 * *

깜깜한 밤이 찾아왔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도운은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녹이며 긴장을 풀었다. 씻고 나와 잠옷으로 갈아입는데 하품이 절로 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침대에 눕고 싶어 잠옷 단추를 하나씩 꿰며 슬리퍼를 끌고 안방으로 향했다.

해일은 침대에 기대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도운의 기척을 느끼자 자신의 옆자리에 누우라는 듯 이불을 살짝 들어 보였다. 도운이 미소를 지으며 침대로 쏙 들어갔다.

해일은 책은 더 읽지 않을 생각인지 그대로 덮어 협탁에 내려두고는 전등을 껐다. 도운에게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며 팔을 베고 모로 누웠다. 그의 손이 도운의 가슴 위로 올라와 꼭 어린아이를 재우듯 토닥거렸다.

“피곤합니까?”

“수요일은 조금요.”

도운이 눈을 비비며 하품했다. 아기새의 부리처럼 벌어지는 입술에 해일은 피식 웃으며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고 보니 벌써 재단에 다닌 지 반년이 훨씬 넘었네요.”

“와, 그러게요. 벌써 그렇게 됐다니. 시간 정말 빠른 것 같아요.”

“일은 어때요. 많이 힘들어요?”

단번에 ‘아닙니다.’ 하고 답했어야 했는데 사실이 그렇지 않다 보니 대답을 망설이게 됐다.

심 과장이 온 이후로 회사 일은 그리 녹록지 않다. 농담하는 것처럼 사람 속을 살살 긁어대니 어디다 대고 하소연할 수도 없고. 도운은 해일을 올려다보았다. 해일에게는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잠시 생각했다.

“많이 힘든가 보네. 지원팀이 진행하는 사업이 다른 팀보다 많긴 하죠. 재단이 시작 단계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해일은 도운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걱정 어린 시선이 떨어졌다. 그의 목소리에서 미안한 감정이 묻어나오는 것을 느낀 도운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는 듯 말했다.

“아니에요, 이사님.”

“아니긴. 대학원도 병행하고 있으니 힘들 만도 하지.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드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도운은 되레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회사도, 학교도 모두 해일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다닐 수 없었을 텐데. 힘든 티를 내고 말았다.

아무 걱정 없이 공부를, 일을 할 수 있는 편안한 환경. 그리고 긍정적인 영향까지 모두, 조금이라도 이사님에게 보답할 방법이 있다면 그건 자신의 위치에서 일이라도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사님만 있으면 하나도 안 힘들어요.”

도운이 천천히 답하며 해일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품을 파고들자 해일도 도운의 등을 감싸 안았다. 진심이었다. 따뜻한 품속은 도운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이 품속에서는 어떤 힘든 일도 견딜 수 있었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

힘들어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언제든 기대도 좋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 이런 사람의 곁에 머물 수 있어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도운은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품을 파고들다 못해 이마를 가슴에 비비며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다고, 감정적으로 괴로웠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던 마음을 애써 지워버렸다. 마른침을 삼키며 울컥거리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해일의 온기를 느끼고, 해일의 체취를 깊게 들이마시는 것으로 위로를 받았다.

“재단 일, 비서실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어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척 목소리를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비서실보다 일이 적다기보다도…… 처음에 비서실에서 많은 일을 소화하는 법을 배워서 그런지, 재단 일에 빨리 익숙해진 것 같아요. 확실히 처음을 어렵게 배우면 이후 일은 비교적 쉬워지는 것 같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괴로울 뿐, 일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운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말을 마쳤다. 잘 적응했다는 말에 해일은 기특했는지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까지 아주 잘해줬습니다.”

해일이 머리카락 위로 입술을 눌렀다.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도운의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였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죠.”

“문화재단 일이 좋아요?”

“네, 좋아하는 분야이기도 하고…….”

“나랑 일할 때보다 더 좋아요?”

“……네?”

생각지도 못한 종류의 질문에 도운이 해일의 가슴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랑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 정도로?”

“그런 건…… 아닌데요.”

도운은 반 농담이라는 것은 느꼈지만 뜬금없는 부분에서 답지 않게 질투하는 해일에게 당황하고 말았다. 해일에겐 도운이 이렇게 당황해 허둥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 질 나쁜 취미가 있었다.

“무, 물론 이사님과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나보다 일이 더 좋아지면 안 되는데.”

“설마 제가 이사님보다 일을 더 좋아하겠어요…….”

말도 안 된다는 말투로 도운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억울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전 이사님이랑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은데, 왜 제 마음을 몰라주세요?”

예상치 못한 깜찍한 대답에 해일이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미소 지으며 도운의 말랑한 볼을 살살 꼬집었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생물이 있다니. 거기다 바로 자신의 품 안에서 재잘거리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이 행복했다.

“이사님이 재단 이름도 해운이라고 지어주셔서 저는 애착이 갈 수밖에 없는 걸요. 이런 선물을 누가 또 받아보겠습니까.”

“그래. 잘 알겠습니다. 금방 재단 이사장까지 갈 텐데 애사심 가지는 거 좋지.”

해일은 그리 말하며 도운의 볼에 뽀뽀했다. 도장을 찍듯 누르다 못해 볼을 빨아들였다. 으아아, 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느낌에 도운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귀엽긴.”

그는 도운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하며 체향을 맡았다. 도운은 간지럽다고 칭얼거리며 해일의 몸을 더 세게 안았다.

해일이 정말 자신을 특급 승진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인가 조금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고, 아직 재단을 잘 이끌 수 있을지 확신도 없었다. 도운은 일부러 다른 화제를 꺼냈다.

“새로 오셨다는 비서분은 어떠세요?”

“음, 글쎄요. 빠릿빠릿하긴 한데, 실수가 좀 잦은 것 같네요.”

해일은 신입 비서를 떠올리며 짧게 감상을 말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비서 서재혁은 비서실에서 차근차근 일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해일의 눈이 높은 탓에 부족한 점도 많이 보였으나, 아직 판단하기엔 시기상조인지라 천천히 지켜보려던 참이었다. 비서실은 워낙 일이 많고 바쁜 곳이니 잘만 따라오다 보면 아마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업무 능력이 향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못하진 않으니 우선은 두고 보려고 합니다. 우리 팀은 항상 인력난이기도 하고.”

“일 너무 많이 시키지 마시고 잘 대해주세요. 힘들어서 그만둔다고 하면 어떡해요.”

도운이 걱정스레 말했다. 해일은 내심 도운이 비서실에 있을 때 많이 힘들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서재혁에겐 면접 때부터 비서실 일이 타 부서보다 힘들 것이라 미리 경고를 하긴 했다. 물론 매일같이 야근을 한다는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일이 많아서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정도로 그만둘 사람이면 그런 사람인 거겠지.”

그렇게 대답했지만, 서재혁은 쉽게 그만둘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힘들어하긴 해도 곧잘 따라왔고, 사장의 밑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는 듯했다. 팀원들과 금세 친해져 어우러지는 걸 보니 성격 또한 모나지 않고 붙임성이 좋아 보였다. 다들 그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크게 이변이 없는 한은 조만간 소속감을 키워주어 완벽히 해일의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할 생각이었다.

“박 대리님이 후배 왔다고 엄청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박 대리랑 가깝게 지내는 모양이네요. 그렇게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주고받고.”

“그냥 근무 중간에 잠깐 수다 떠는 정도예요.”

“근무 중간에 그러는 거면 더 문제지.”

해일의 장난기 섞인 말에 ‘점심시간에만 그랬는데…….’ 하고 도운이 변명을 해왔다. 졸렸는지 말끝이 늘어지는 것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해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듯한 도운은 혹여 박 대리에게 불똥이 튈까 또 슬쩍 말을 돌렸다.

“저는 처음 입사했을 때 어떠셨어요? 음…… 일을 어떻게 했다든가, 사소한 것들요.”

화제를 돌리려 꺼낸 질문이었는데 막상 물어보고 나니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해일을 올려다보는 도운의 두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렸다. 호기심 어린 표정.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해일에게 다 보였다. 원하는 대로 칭찬을 해주며 뽀뽀와 함께 건전한 밤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글쎄.”

“아…….”

“이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

해일은 오늘따라 조잘조잘 말이 많아지는 도운을 괴롭히고 싶었다. 그의 손이 잠옷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파고들어 엉덩이를 세게 쥐었다. 한쪽 볼기를 가지고 놀 듯이 주물럭거리더니 곧 양쪽을 한 손에 잡아 튕기듯 장난을 쳤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요…….”

도운은 어깨를 움츠리며 잡힌 엉덩이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얼거렸다. 해일은 움찔 떨리는 엉덩잇살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도운은 비서실 입사 초기, 해일이 자신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집착적으로 만져대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자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살살 흔들다가 손끝을 세워 말랑한 살을 꾹 누르니 아프기는커녕 쾌감의 씨앗이 심어진 듯 뜨거워졌다.

두 사람은 서로가 정염에 휩싸이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어젯밤에도 색사를 가진 데다 주말이 되려면 아직 며칠은 더 남은 상태였다. 이틀을 연달아서 하는 건 몸에 무리가 가겠지만 피어오른 열기를 무시하고 잠드는 것 또한 이 연인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도운이 먼저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턱을 치켜들며 키스를 바라는 눈을 하자 해일이 다급하게 입술을 맞붙였다.

“흐으……응…….”

“음…….”

길게 이어지는 키스를 나누던 중간, 해일이 도운의 몸 위로 올라타며 자신의 상의를 벗었다. 도운은 저도 모르게 해일의 아래로 손을 뻗으며 몸을 붙여왔다. 도운의 잠옷 위로 부어 있는 유두를 긁어내린 해일은 떨리는 신음에 급히 옷을 벗기고 맨살을 맞댔다.

또다시 길어지는 밤이었다.

* * *

“도운 씨. 아까 보낸 파일 좀 이상한데?”

심 과장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이었다. 도운이 주춤거리다 고개를 빼며 물었다.

“아까 보낸……, 몇 시쯤이요?”

“아까 있잖아, 그거. 거 뭐냐. 낮에 보낸.”

파티션에 조금 가려져 있었지만 심 과장의 눈가는 언뜻 보였다. 주름이 질 정도로 힘을 줘 구긴 미간. 두 눈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 파일을 살피며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이 손을 허공에 대충 휘젓고 있었다.

도운은 곧 점심시간 직전에 보낸 파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지금 시간은 5시 반, 팀원들이 업무를 마무리하며 서서히 퇴근을 생각하는 때였는데. 이제 와 파일을 확인하고 도운을 불러대는 그의 의도가 빤히 읽혔다.

“2번 시트 값이 안 나오는데?”

“적용 다 해뒀는…….”

“아예 안 먹는다니까. 이리 와 보라고.”

그가 도운의 말을 가로막았다. 후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쉰 도운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 과장의 자리로 가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댄 그가 도운을 껄렁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제가 한 번 봐도…….”

이번에도 역시나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마우스를 던지듯 밀어주었다. 도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마우스를 쥐었다. 두 번 세 번 확인한 뒤 보낸 파일이기에 문제가 있을 리 없을 텐데. 도운이 그리 생각하며 화면을 확인하며 이리저리 클릭해 보았다. 역시나 자신이 만든 파일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가 뭔가를 잘못 만져 적용 범위가 좁아진 듯했다.

설령 문제가 있다 한들 클릭 몇 번으로 해결될 일이었다. 굳이 자신을 불러가며 신경질을 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도운은 무어라 따지기보다 그냥 대신 드래그해 식을 적용한 뒤 마우스를 놓았다.

“식을 이상한 걸 쓰네…….”

꼭 혼잣말한다는 듯이 심 과장이 중얼거렸다. 제일 기본적인 식이었는데 괜한 트집을 잡고 있다. 본인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 텐데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가.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넘쳐흘렀다. 대신 도운은 짧게 미소만 지었다.

“아래 공란은 뭐야? 다 빼먹네, 아주.”

“선적 문제 때문에 공란으로 두라고 하셨었습니다.”

“내가? 아아. 엉. 알겠어.”

도운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때에 한 번 더 붙잡듯 심 과장이 물었다. 자기가 지시했던 상황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못 하는 척한 건지. 도운은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알겠다고 대답하는 그의 말투에서 귀찮음이 뚝뚝 묻어 나와 더더욱 불쾌해지기만 했다.

매일 아침 마음을 다잡는 것이 무섭도록 심 과장은 이상한 뚝심으로 도운을 건드려왔다. 대체 무슨 불만이 있는 것일까. 사사건건 도운을 걸고넘어졌다.

처음엔 새로 부임하게 된 상사가 위아래 서열을 잡기 위해 기 싸움을 하는가 싶어 조금 엎드리던 도운도 지속되는 괴롭힘에 지쳐가고 있었다. 꼭 남들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수준으로 속을 긁어 답답한 마음을 어디에 토로하기도 어려웠다.

심지어 개인적인 잡일에도 도운을 부려먹었다. 원래 회사란 게 이런 곳인가. 비서실에 있을 땐, 그리고 심 과장이 문화지원팀에 오기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의 등장 하나로 사무실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만 같았다.

간신히 야근을 면한 도운은 퇴근길에 해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 끝에 나오는 목소리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딱딱한 기계음뿐이었다. 이런 날은 조금 더 우울했다. 퇴근하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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