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6/29)

  3.

며칠 뒤,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팀원들은 슬슬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운 또한 대학원에 가야 했기에 빠른 퇴근을 위해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대리, 오늘 맥주 어때.”

심 과장은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직원을 붙잡으며 말했다.

“부장님, 오늘 다 같이 맥주 한잔 어떠십니까? 지원팀 거국적으로 회식 한번 가지시죠. 날도 선선하니 좋은데.”

그것도 모자라 아예 전체 회식을 잡으려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회식…… 주말을 앞둔 오늘 회식이라니. 참여해야 한다면 도운은 대학원 수업을 뺄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분위기를 끌어보려던 심 과장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운을 보며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아, 서도운 씨는 오늘 안 된다고 했나?”

“대학원 수업이 있긴 한데…….”

“어쩔 수 없지, 뭐. 도운 씨 빼고 갈까? 부장님, 가실까요?”

“…….”

따돌리는 유치한 짓을 하는 게 도운의 눈에 보였다. 회식에서 빼주면 이쪽은 감사할 따름이다. 도운은 애써 표정을 숨기며 가방을 챙겼다. 도운이 한 수 접는 것으로 보였는지 심 과장은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곧장 무너지고 말았다.

“오늘은 안 되는데. 우리 애 데리러 가야 돼.”

부장은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고 무신경한 목소리로 답했다. 첫째 딸이 수학여행 갔다 오는 날이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급히 차 키와 가방을 챙겨 드는 걸 보니 거짓말이 아니었다.

“너희끼리 한잔하든가. 카드 줘?”

“앗, 저도 오늘은 약속이…….”

사원 하나가 멋쩍게 웃더니 말했다. 애인을 3주 만에 보는 거라며 발을 슬슬 뺐다. 이렇게 되니 오늘 회식은 자연스레 파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심 과장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눈치를 보던 도운은 부장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트가 있다던 사원도 도운의 뒤를 졸졸 따라 나오며 말을 붙였다.

“도운 씨, 저 T 역까지만 태워주면 안 될까요?”

“네, 태워드릴게요.”

“고마워요.”

도운은 흔쾌히 대답했다. 어차피 가는 길목이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도운의 뒤통수로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이 따라붙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사무실을 떠났다.

* * *

“시간이…….”

일에 몰두하던 해일은 문 전무가 중얼거리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문 전무는 피로했는지 눈 앞머리를 문질렀다.

“벌써 8시가 다 돼간다.”

“그러네.”

“난 일에 미친 놈은 제정신이 아닌 거라고 생각해…….”

그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해일은 그저 피식 웃어 보였다. 매번 저리 시비를 걸어오는 것도 이젠 익숙했다. 문 전무는 확인하던 파일을 확 덮으며 책상 위로 내던졌다.

“이 시간까지 근무라니. 난 칼퇴를 하다못해 세 시간씩 일찍 집에 가는 사람이야.”

“대체 경영은 누가 해?”

“내가 없어야 회사가 돌아가지.”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말한 문 전무는 입가를 가리며 하품까지 했다. 지루하긴 했나 보다. 평소 성격만 보아도 한자리에 오래 있는 걸 못 하는 사람이었는데, 가만히 앉아 자료를 검토하고 서류 확인만 계속하는 업무가 즐거울 리 없었다.

“조언 듣겠다고 쳐들어오더니 막노동만 시키고. 문화재단은 돈만 잘 쓰게 하면 된다니까.”

오늘 해일이 문지원의 회사까지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은 청영보다 앞서 재단을 설립한 AG 기업 재단의 여러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초반엔 흔쾌히 응해주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본격적인 업무 이야기로 넘어가니 대놓고 지루하다는 티를 냈다. 오랜만에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놀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너무 다른 상황이었다.

“그만 징징거려. 이제 마무리하자.”

“간만에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 조용한 바로.”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그때 해일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바로 핸드폰을 꺼낸 해일은 안색을 바꾸며 전화를 받았다.

“네. 서도운 씨.”

―이사님, 집이세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도운이었다. 해일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찢어져라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 전무가 질린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회삽니다.”

―일 많이 바쁘신가요? 8시가 넘었는데. 피곤하셔서 어떡해요.

해일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전화 한 통으로 피로가 싹 가셨으니 도운이 걱정할 것은 전혀 없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서도운 씨는 수업 끝났습니까? 오늘은 조금 일찍 끝났네.”

―네, 조금 전에 끝나서 이제 막 나왔어요.

사람들이 지나가며 떠드는 소리, 주변에 흐르는 바람 소리가 한데 섞여 들려왔다. 해일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차 키를 쥐었다. 추운 날도 아니었는데 밖에 나와 있다는 말에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라도 보는 듯 도운이 걱정되었다.

“내가 금방 데리러 갈게요. 학교 안에서 기다려요.”

해일의 대답에 문 전무는 오늘 술은 물 건너갔구나 예상하며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댔다.

―아, 아니에요. 사실 오늘 같이 수업 듣는 동기들이 술 한잔하자고 해서요.

“……아…….”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태세이던 해일이 멈칫하더니 조용히 무거운 숨을 쉬었다. 술 모임이 생겼구나.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뜬 해일이 문 전무와 마찬가지로 의자에 몸을 기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그냥 가볍게 마시고 들어갈 것 같은데. 한…… 두세 시간?

요즘 들어 술 모임이 잦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난 학기에는 이렇게 자주 만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 학기에 들어서서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동기와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시고 발그레해진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왜일까.

친구를 만나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러냐 하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해일은 아니었다. 친구든 친구가 아니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도운 한정 해일은 보수적인 사람이 되었다.

“음. 가볍게 마시는 데 세 시간이나 걸려요?”

―잘 모르겠습니다. 더 짧을 수도 있고, 길어질 수도 있고…….

너무 오래 마시는 것 아니냐는 의미로 한 소리였는데, 도운은 해일의 의도도 모른 채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다는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기가 차는데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조금 늦게 들어갈 것 같아요. 괜찮으시죠?

“그럼요. 모임 장소가 어디예요?”

―학교 근처 생맥주집으로 가요.

해일은 도운의 학교 주변 노란 간판의 펍을 기억해 냈다. 도운이 종종 가는 곳이었고 해일도 몇 번 그를 데리러 간 적이 있었다.

“내가 이따 데리러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오늘 차를 가져와서. 대리 부르려고요.

“……데리러 갈게요.”

해일은 평온함을 가장해, 하지만 고집 있게 말했다. 수화기 너머에선 짧게 정적이 흐르다가 알겠다는 답이 넘어왔다. 너그러운 애인인 척하려고 했으나 이미 속내를 들킨 듯하다.

―그럼 오실 때 연락 주세요.

“네, 늦지 않게 데리러 갈 테니까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그래도 원하는 답을 얻어낸 해일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는 누그러졌다. 깊은 한숨과 함께 전화를 마무리한 그가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두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뭐야. 도운 씨 약속 있대?”

영 시큰둥한 태도로 있던 문 전무가 해일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럼 우리도 한잔하러 가자.”

“오늘은 안 되겠다.”

“왜. 거기 따라가서 같이 마시기라도 하게?”

문 전무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해일이 정말 도운의 약속장소까지 따라가지는 않으리라.

“네가 말 안 했으면 그럴 뻔했네.”

“와…….”

그는 감탄하며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푸하하 크게 웃어버렸다. 정해일이 이렇게까지 진심인 건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랑에 집착적인 사람일 줄도 몰랐다.

“어딜 가나 사람이 꼬이는 사람이라.”

해일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가 가장 불안을 느끼는 부분은 바로 그런 점이었다.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들 듯이, 도운이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사람들이 꼬여들었다.

“음…… 그런 사람이긴 하지.”

“…….”

“왜 노려보냐고.”

문 전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해일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기껏 공감해 줘도 난리였다.

“너 팔불출도 그 정도면 병이야.”

“마음대로 생각해.”

해일은 꺼진 핸드폰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주머니에 넣었다.

“누구랑 약속인데.”

“동기들.”

“동기들이랑 노는 걸로 질투하면 회사는 어떻게 보내냐?”

그러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후회되었다. 도운이 사회생활도 못 하고 아무도 못 만나도록 집에만 있게 만들면 해일은 좋을 것이다. 도운이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도 도운에게 호감을 품을 일이 없이 오로지 해일 자신만 바라볼 수 있으니. 하지만 이렇게 하면 도운이 행복할까? 절대 아니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해일이 잘 알기에 제 이기심으로 또 도운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요즘 들어 자주 만나. 그래서 문제지.”

하지만 빈도 정도는 연인으로서 관여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던가.

이렇게 자주 만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졌다. 같이 강의를 듣는 사람들과 이 정도로 가까워진 걸까. 사이 나쁘게 지내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이렇게 가까워지니 불안하고, 싫은 기분이 드는 것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대학원엔 사회인이 많고, 학위를 위해 들어오는 기업인들도 많았다. 누군가 도운을 보고 음험한 마음을 품지는 않을지, 재력이나 사회적 위치 따위로 유혹하지는 않을지, 술을 마시며 불필요한 접촉이나 선을 넘는 언행 등을 하지는 않을지. 해일의 걱정은 일파만파로 퍼져 가기만 했다.

“정해일 너도 이제 끝났네. 일곱 살이나 어린 애를 만나니까 벌 받는 거야.”

문 전무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 말했다. 곧 젊고 머리도 좋은 예비 석사에게 도운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듯이.

“너도 껄떡대지 않았어?”

“난 동안이잖아.”

“말을 말자.”

“이거 왜 이래? 나랑 도운 씨는 나름 잘 통했다고. 이거 봐.”

문 전무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말투로 자신의 팔을 걷어붙였다. 손목에 찬 시계가 드러났다. 해일은 짧게 눈길을 주고는 ‘시계가 뭐 어떻다고?’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문 전무가 그게 아니라는 듯 다시 손목을 내밀었다. 그제야 시계 옆 둥근 밴드가 보였다.

“이게 뭔지 아냐?”

장난감 같은 알록달록한 색감. 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팔찌.”

문 전무가 밴드를 풀자 일자로 펴져 자 같은 모양새로 바뀌었다.

“이거 도운 씨한테 선물 받은 건데.”

“뭐?”

“넌 이런 거 있냐?”

도운이 언젠가 도넛 가게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장난감 팔찌였다. 도운에게 선물로 받았다기엔 어폐가 있었다. 그저 도운의 집에 널브러져 있던 것을 자기가 달라고 한 것이었으니. 하지만 굳은 해일의 표정을 보니 그를 놀리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내놔.”

해일은 그제야 팔찌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났다. 과거 기억 속 도운이 저 팔찌를 손목에 차고 있었다. 문 전무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까부터 시계 보는 척하면서 계속 보여줬는데.”

“그걸 왜 너한테 줘.”

“내가 동안이라.”

“장난하지 말고.”

해일이 인상을 확 구겼다. 날카로운 눈매가 한층 더 흉흉한 기운을 풍겼으나, 매번 보아온 문 전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팔찌를 빼앗으려 뻗는 해일의 손을 가볍게 피하더니, 그 손목 위로 탁 내려쳐 감싸주었다.

“서도운 아직 어려. 일곱 살이나 어리다고. 친구 만나 놀고 사회생활도 해야지.”

“…….”

“질투 좀 줄이라고 하는 소리야. 나도 이 나이까지 놀기만 하는데. 그 어린애를 뭐 얼마나 속박하려고.”

문 전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벗어두었던 재킷을 걸쳤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벗어나며 비서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해일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손목의 팔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남들은 이 정도의 질투도 하지 않는 것인가 궁금했다. 도운과 마찬가지로, 해일 또한 사랑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자신이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문 전무의 조언대로 조금은…… 마음을 편히 갖는 것이 좋을까.

그는 짧은 생각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혼란스러웠다.

* * *

“늦은 시간까지 고생했습니다.”

AG 본사까지 동행한 김 실장과 서재혁은 해일을 뒤따라 건물에서 나왔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김 실장이 모는 차에 해일이 오르려고 하자 서재혁이 말했다.

“내 집 가는데 두 사람씩이나 따라올 필요까진 없습니다.”

단조로운 해일의 어투에 자칫 면박을 주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재혁은 그렇지 않았다.

“저도 앞으로 사장님 댁에 모셔다드릴 일이 많을 텐데…… 실장님과 함께 가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근거가 뚜렷한 말을 듣고 있자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잠깐 생각하던 해일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럼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재혁은 김 실장에게서 키를 받아냈다.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의욕적으로 구는 게 마음에 들었다. 운전석에 앉아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키는 서재혁을 보며 해일은 문득 도운을 처음 채용했을 때를 떠올렸다. 강제적인 계약으로 엮이게 된 관계였음에도 일할 때 꾀를 부리지 않고 항상 열심히 하던 도운.

“…….”

해일은 이렇게 무슨 생각만 해도 다 도운으로 귀결되었다. 그 정도로 정해일의 일상은 도운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도운은 아닌 모양이었다. 해일의 속도 모른 채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간다니.

창틀에 팔을 기댄 해일이 바깥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벌써 날이 이렇게 어두워져 있었다. 도운과 통화한 지 고작 30분 정도가 흘렀을 뿐인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나지는 않았을지, 제 생각은 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과 즐거워하는 것은 아닌지 온갖 잡생각에 머리가 다 아팠다.

도운이 바깥 생활을 하는 걸 어디까지 용인해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는 어느 정도의 주기로 만나게 해야 할지, 회식이나 술 약속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러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구속임을 알기에 착잡해졌다.

아무리 연인이라 한들 다 큰 성인을 함부로 제어하려 들면 분명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집착을 들켰다가 혹여 자신을 무섭다고 피하진 않을까 걱정되었고, 그렇다고 아예 말을 하지 않기에는 도운이 밖으로 나돌 때마다 스멀스멀 차오르는 질투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역시…… 법적으로. 공인된 문서로써 서로를 적당히 통제할 수 있는 사이가 되면 자신의 불안함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흠.”

해일이 다리를 꼬며 턱을 문질렀다. 작게 낸 소리에 운전을 하던 서재혁이 룸미러를 흘긋거렸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닙니다.”

아무래도 문 전무의 조언엔 완전히 공감하진 못할 것 같다. 해일은 주머니 속 장난감 팔찌를 매만지며 조용히 집으로 향했다.

* * *

“포차는 진짜 오랜만이다.”

도운의 대학원 친구 성민이 포장마차 천막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는 냉큼 빈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붙이며 술부터 주문했다. 도운은 성민을 뒤따라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이 네댓 명씩 모여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도운의 테이블엔 단 두 명뿐이라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두 사람과 맥주집에서 함께 마시던 다른 동기들은 중간에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뜨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둘만 남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취기가 올라올 정도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오늘따라 술이 잘 받는데?”

성민은 팔을 걷어붙이며 막 나온 소주를 땄다. 두 잔에 꽉 차도록 따른 뒤 잔을 들어 허공에 내밀었다. 도운은 장단을 맞춰주며 가볍게 짠 하고 마주쳤다. 그러고는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나도 오늘따라 많이 들어가네.”

“너 완전 꼴아버리면 안 된다. 나 책임 못 져, 아님 우리 집 가서 자든가.”

“그 정도는 아냐.”

도운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는 동갑인 성민과 유독 친해졌다. 성민은 해외에서 음악을 전공하다가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한국에 돌아온 지 몇 년 되지 않았다. 음주가무를 특히 좋아해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사람들을 꼬드겨 술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초반엔 가끔 참여하던 도운은 최근 들어서 거의 매번 함께하고 있었다. 술……. 회사 스트레스를 잊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심 과장 놈은 아직도 그래?”

“휴……. 요즘은 특히 더 심한 것 같아.”

도운은 한숨을 쉬며 또 술을 들이켰다. 해일에겐 미처 하지 못했던 문화재단의 이야기를 성민에게는 종종 해왔다. 이렇게 술을 마시면서 심 과장의 괴롭힘에 대해 떠들기 시작하면 속에 진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잦은 약속을 해일이 탐탁지 않아 하는 걸 잘 알면서도 도운은 일탈처럼 술을 마시게 되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자 성민이 도운보다 더 인상을 찡그리며 욕했다.

“아니 그 미친놈, 그거 제정신 아니야. 나이 처먹고 뭐 하냐고.”

“사소한 일이라 뭐라 하기도 애매하다.”

“사소하긴! 누가 봐도 괴롭힘인데. 아오. 그 새끼 아직도 열등감 못 버린 거야. 찌질한 놈.”

성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또 술을 따랐다. 도운은 얌전히 술을 받아 마셨다. 열등감. 차마 자신이 대놓고 꺼내지 못한 단어를 남이 대신해 주니 속이 후련했다.

심 과장은 재단 문화지원팀으로 이직해 오는 순간부터 도운과 트러블이 있었다.

구체적 발단은 이러했다. 도운이 기존부터 맡아 해오던 악기 지원 사업이 있었는데, 그걸 심 과장이 가져가고 싶어 했다.

심 과장은 도운의 기획과 아주 흡사한, 하지만 조금 더 서비스가 추가된 사업을 기획했다. 하마터면 눈 뜨고 코 베일 뻔하였으나 다행히 부장이 이미 도운이 기획해 진행하는 사업이라며 중간에서 잘랐다. 그것부터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는지 심 과장은 새로이 개편한 사항이 많다 주장했고, 줄기차게 재검토를 요청했다. 참다못한 부장은 기존 사업 개편은 도운의 몫이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심 과장, 경쟁 치열한 곳에 있다가 문화재단에 오니 적응이 잘 안 되지? 의욕 넘쳐서 그런 건 잘 알겠으니까 이번 일은 내가 말한 대로 여기서 마무리해. 심 과장 실력은 다른 사업에서 보자.’

그날 이후로 심 과장의 견제는 더 심해졌다. 같은 과장급도 아닌 일개 사원에게 사사건건 트집에, 도운이 대학원에 다니는 것도 유독 안 좋아했다. 공부면 공부, 일이면 일, 하나에 몰두하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도운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렸으나, 정도가 과해지니 심란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 욕심부리다 쪽 당하니까 아직까지 너한테 화풀이하는 거잖아.”

“화가 언제까지 가려나.”

문화재단에서 처음 맡았던 사업이라 의욕적으로 진행했던 도운은 괴롭힘이 심각해지면서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괴롭힘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다 아팠다. 설마 둘 중 하나가 그만둘 때까지 괴롭히는 건 아니겠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가올 추석에 따로 선물이라도 마련해 심 과장의 기분을 풀어줘야 하나 했다가 성민에게 괜히 한 소리를 들었다.

“그냥 내가 넘길 걸 그랬어. 그렇게 큰 사업도 아니었는데. 과장님이 정말 크게 키울 수도 있던 거였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 네가 맡아서 하고 있으니까 잘 진행되는 거지. 아직 프로젝트 1년도 안 됐는데 다른 사람한테 뺏기면 아깝잖아.”

“……그렇겠지?”

성민은 도운과 술을 나눠 마시며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대단하다며 추켜세워 주었다. 이렇게 성민이 편을 들어주니 도운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보란 듯이 더 잘해버려. 착해 빠져가지고, 순딩아.”

“미련한 거지.”

“야, 됐어. 자아비판 금지! 남 탓만 하자. 씹을 거리가 있으니까 술이 더 잘 들어간다, 진짜.”

성민은 손을 들어 술을 더 시켰다. 술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알딸딸한 기운에 몸의 근육이 이완되었다. 도운은 늘어지는 몸을 테이블에 기대며 안주로 나온 계란말이를 집어 먹고는 짧은 행복을 만끽했다.

“엇, 나 잠시만.”

눈꺼풀이 느리게 감기던 때에 도운의 핸드폰이 울렸다. 해일에게서 온 전화였다. 도운은 찬물을 한 잔 들이켜며 말했다.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겠다.”

“어우. 11시 반 넘었네.”

성민도 남은 술을 모조리 마시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냈다. 도운은 겉옷과 가방을 챙겨 들며 해일의 전화를 받았다.

“네.”

―학교 근처인데. 어디에 있어요?

“큰길가 쪽 포장마차에요. 제가 그리로 갈게요.”

―차만 돌리면 금방입니다. 역 근처에 세울 테니 바로 나와요.

“알겠어요.”

도운이 전화를 끊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성민이 물었다.

“누군데 그렇게 활짝 웃어?”

“어? 어…… 그냥 같이 사는 형.”

“아아. 난 또 여자 친구인 줄.”

이상해 보일 정도로 활짝 웃었던가. 도운은 자신의 볼을 손끝으로 뭉개듯 문질렀다. 해일만 생각하면 절로 실실 웃음이 나오는데, 술 때문에 얼굴 근육이 풀어져 평소보다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어서 가자고 성민의 등을 떠밀었다.

지하철 역 안으로 성민을 보내자마자 해일의 차가 옆으로 와 멈춰 섰다. 도운이 냉큼 조수석에 올라 문을 닫자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해일의 입술이었다. 볼과 광대 위로 두 번씩 쪽쪽 뽀뽀가 내려앉고는, 손을 뻗어 대신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술 냄새.”

“……많이 나요?”

도운이 제 옷소매를 끌어다 킁킁 냄새를 맡았다. 작은 강아지 같은 모습에 해일이 피식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취기에 졸음이 쏟아지는지 하품을 하며 눈가를 문지르는 도운을 흘긋 살폈다.

“맥주 마신다더니. 소주 마셨나 보네요.”

“분명 처음은 맥주였는데……. 둘이 포차로 옮기면서 어쩌다 보니까…….”

둘이. 도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해일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때마침 신호에 걸린 차를 멈춰 세우며 해일이 도운을 응시했다.

“둘이?”

멍하니 예…… 하고 대답하던 도운은 해일의 시선에 눈을 맞췄다. 굳어진 것 같은 표정. 곧 차를 다시 움직이느라 고개가 정면으로 돌아갔으나 해일의 심기가 불편한 게 확 티가 났다.

“이사님……?”

“왜 둘이 마셨어요.”

살며시 불러보자 차가운 목소리가 짧게 뻗어 나왔다. 조금 전과는 다른 무거워진 공기에 도운이 마른침을 삼켰다.

“동기들이랑 마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한 명이었어요?”

“그, 처, 처음부터 둘은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둘이 남게 된 건데…….”

“다른 사람들이 일어났으면 너도 같이 일어났어야지. 굳이 둘이서 늦게까지 마실 이유가 있어요?”

해일은 빠른 속도로 길을 달리며 말했다. 자신은 도운이 술 모임에 나가는 동안 망부석이나 다름없었다. 일도 못 했고, TV를 본 것도 아니었고, 조용한 서재 의자에 기대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도운을 기다렸다. 집중할 수가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시계를 확인했다.

모임이 두세 시간쯤 걸린다기에 두 시간 뒤에 데리러 갈지, 아니면 세 시간 뒤에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 중간인 두 시간 반이 흐른 뒤 칼같이 연락한 것이었는데. 이런 제 속은 알지도 못하고 친구와 단둘이서 자리까지 이동해 가며 술을 마셨다는 것에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

차가 없는 한밤중의 서울은 두 사람을 순식간에 집까지 이동시켰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안전벨트만 꾹 쥔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도운은 덩달아 조용한 해일의 뒤를 가만히 따르기만 했다.

“저도…… 친구랑 놀 수도 있죠…….”

막 집 현관문에 손을 댄 해일의 뒤에 대고 도운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해일의 상체가 부풀었다 꺼지며 깊은 한숨이 흘렀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랑 단둘이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걱정 안 할 애인이 어디 있어.”

“그렇지만, 걔랑은 그냥 친구 사이예요. 술만 마셨을 뿐인데…….”

도운이 소심한 항변을 이어나가자 해일이 뒤를 돌아 도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열이 오른 볼이 뜨끈뜨끈했다. 붉어진 눈가를 엄지가 한 번 쓸더니 씁쓸한 말투로 해일이 말했다.

“가볍게도 아니고 이렇게 눈이 풀릴 정도로 말이죠.”

평소보다 조금 많이 마셨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해일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대로 쾅 닫아버리는 줄 알았는데 도운이 들어올 때까지 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눈치를 보던 도운이 현관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 서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아 도운은 시무룩해졌다. 절로 아랫입술이 비죽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며 신발을 벗었다. 순간 휘청, 술기운인지 발이 걸린 것인지 몸이 앞으로 쏠리자 옆에 서 있던 해일이 팔을 뻗어 상체를 턱 받쳐 주었다.

“……감사합니다.”

해일은 아무 대답 없이 바로 복도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오는 도운에게 ‘씻어요.’ 하고 조용히 말하고는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달칵. 서재 문이 닫히는 작은 소리에 도운의 등 뒤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정말 어쩌지…….”

도운은 닫힌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해일이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데 도무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연인들끼리 자주 싸워봐야 한다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연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도운은 생소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몰랐다.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고, 우선 씻고 나오기로 하고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샤워를 마친 도운이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을 얹고 나왔다. 자연스레 시선은 저 멀리 서재 쪽으로 향했다. 침실은 불이 꺼져 있고, 서재 문틈에서 빛이 가늘게 새어 나오고 있는 걸 보니 해일은 여전히 서재에 있는 모양이었다. 도운은 천천히 서재로 향했다.

“……서 비서.”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들렸나? 도운이 바로 ‘네’ 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도 낮은 조명 하나만 켜져 있는 서재 데스크 옆에 서 있던 해일은 상체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

자신을 부른 줄로만 알았는데 해일은 지금 통화 중이었다. 그가 가볍게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붙이며 통화 중이라는 티를 냈다. 도운은 머쓱한 나머지 볼을 긁적이며 괜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 보니 새로 온 비서의 이름이 서……재혁이라고 했던가. 그 사람과 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해일이 다시 뒤를 돌며 차분한 말투로 통화를 이어나가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던 도운은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살며시 문질렀다.

다른 사람한테 서 비서라고 부르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그냥 그 사람의 성이 서 씨라서 그렇게 부르는 것뿐인데. 도운은 비서를 그만둔 지 한참이 되었음에도 해일에게 유일한 서 비서는 자신뿐이라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나 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싱숭생숭한 느낌. 게다가 무슨 일이기에 이 늦은 시간에 김 실장도 아닌 서재혁이 해일에게 연락을 해온 것인지도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고 나니 해일이 화가 난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고작 호칭 하나에도 기분이 이상해지고, 전화 한 통도 이렇게 궁금한데. 늦게까지 단둘이 술을 마셨다니까 해일도 당연히 궁금하고 걱정됐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잠시 기다리니 해일의 통화가 끝이 났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해일이 가만히 서 있는 도운을 보더니 그대로 가죽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대어 앉았다. 낮은 숨소리와 함께 눈을 감는 것을 보고는 도운이 더 기다리지 못하고 사박사박 걸어 해일에게 다가갔다.

“이사님.”

속삭이듯 말하자 감긴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이사님…….”

재차 해일을 부르니 조용히 해일의 눈이 떠졌다. 그의 눈빛이 도운을 일직선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칫하다가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해일의 눈동자에는 까만 밤이 물들어 있었다.

도운은 그 자리에 쭈그려 앉으며 해일의 무릎 위로 두 손을 포개어 올렸다. 도운의 움직임에 따라 해일의 시선도 천천히 내려왔다.

“화 많이 나셨어요……?”

“화난 게 아니라 걱정한 겁니다.”

“죄송해요…….”

도운의 말끝이 늘어졌다. 잠시 말이 없던 해일은 손을 뻗어 도운의 볼을 넓게 감싸고 쓰다듬었다. 도운은 눈을 깊게 감으며 해일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온기를 느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

“이사님이 데리러 와주신다고 해서 너무 편하게 생각했나 봐요. ……죄송해요.”

도운은 조곤조곤한 말씨로 느릿하게 이야기하며 포갠 손 위로 턱을 올렸다. 얼굴을 기대자 해일의 손이 도운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덜 말라 축축한 머리칼을 손으로 빗겨주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잘 알아서……. 다른 사람 앞에서 취하는 게 싫고, 단둘이라면 더더욱 싫은데. 내 욕심이 너무 과합니까.”

해일은 자신의 책상 펜꽂이에 꽂아둔 알록달록한 팔찌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도운은 무엇인지 기억도 못 할 고작 저런 사소한 장난감 쪼가리 하나에도 질투가 나는 스스로가 우습지만, 이런 제 모습이 도운에게 얼마나 한심하게 비칠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도운의 모든 관심사가 자신이었으면 했고, 사사로운 일 모두 자신과 함께하길 바랐다. 해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가 바라는 것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았다.

“과하지 않습니다.”

도운의 대답은 꼭 해일을 달래는 것만 같았다. 무릎 위로 퍼지는 도운의 온기가 서서히 해일의 마음을 녹여 내리고 있었다. 해일은 제 눈가를 문지르며 얼굴을 가렸다.

“내가 질투도 많고…… 잔걱정도 많아서, 약속이 잦아지니까 불안합니다.”

해일 또한 도운이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 여러 교류를 하고 지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집착을 내리누르고 마음을 다잡기란 쉽지 않다.

도운은 그런 해일을 보며 과한 걱정을 한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별 볼 일 없는 자신에게 누군가 마음을 품는 일은 정말 일어나지 않을 텐데. 오히려 걱정해야 할 쪽은 이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 점을 짚어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기로 했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술 약속이 잦아진 것인데, 이를 해일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문화재단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일에게 시시콜콜 다 전하기엔 철없는 연인처럼 느껴졌으니. 몇 배는 바쁘고 힘들 해일에게 투정 부리기엔 너무 사소한 일이었다. 도운은 재차 작은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내가 속이 좁았던 거지.”

해일은 도운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살짝 웃었다. 도운은 해일의 기분이 완전히 풀렸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말이라도 이렇게 해주는 게 어딘가 싶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해일을 바라보는데도, 그의 속내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처음 겪어보는 연애,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 익숙하지 않은 일과 생소한 기분에 도운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과연 해일은 도운을 얼마나 침범할 것이며, 또 도운의 침범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궁금했다. 쉬이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어쩐지 도운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도운은 몸을 일으켜 해일의 목을 감싸 안으며 품에 안겼다. 해일도 자연스레 도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제 허벅지 위에 도운을 앉혔다. 퍼즐 조각처럼 서로 꼭 맞는 몸을 붙이고 온기를 나눴다.

“…….”

지금 밀려드는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어 도운은 해일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해일의 목과 어깨 사이에 이마와 볼을 마구 문질렀다. 촉촉한 머리칼이 해일의 턱에 닿았다. 해일은 자신의 손아귀 안에 다 들어오는 조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

걱정스러운 마음에 해일이 물었다. 도운은 고개를 저었다. 살살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해일을 간지럽혔다. 보드라운 볼살이 어깨에 마구 뭉개지니 해일은 절로 마음이 누그러졌다.

“나 걱정시키지 말아요.”

“……네.”

도운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들더니 먼저 해일의 턱 끝에 뽀뽀했다. 그리고 입술은 얼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의 콧대와 볼에도 쪽, 쪽쪽. 귀엽게 소리를 내더니 목선으로 내려와 길게 입술을 댔다. 목에 난 핏대와 힘줄을 따라 입술로 훑고 내려와서는 셔츠로 가려진 목 아랫부분에 입술을 한참이나 문질렀다.

평소 잘 하지 않는 도운의 애무였다. 기껏해야 뽀뽀가 최선이던 도운이 이젠 해일의 목에 키스 마크를 남기려 하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해일에게 무언가 증명이라도 한다는 듯이.

츕…… 츠읏. 촙촙. 작게 핥고 빨아들이는 소리가 꽤 길게 이어졌다. 작고 미끄덩한 혀가 목덜미를 살살 누르고 문지르는 간지러운 감촉에 해일은 웃음이 피식 터졌다.

“하아……. 왜요……?”

“귀여워서.”

물어보는 도운의 얼굴이 벌써 붉었다. 뺨이 사과처럼 달아올라 그렇게 어깨가 뜨끈했던 것이구나 해일이 깨달았다.

“더 해봐.”

해일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도운은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도운이 목덜미를 물어오는 감각은 작은 동물이 핥는 것만 같았다. 이갈이하는 것처럼 앙 물어오는 것이 너무나도 간지러웠다. 해일은 도운의 엉덩이를 팔로 받치며 촉촉한 살덩이가 주는 쾌감을 천천히 음미했다.

“읏, 하…….”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도운의 숨결이 가팔라졌다. 애무 당하는 것은 해일이었는데 애무하는 쪽인 도운이 먼저 몸이 달기 시작한 것이다. 비교적 여유로운 태도로 앉아 있던 해일은 아래를 움찔거리며 문질러오는 도운을 보곤 또 짧은 웃음이 터졌다.

“몸으로 사과하려고?”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럼.”

해일이 되물으며 도운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귓가까지 새빨개질 정도로 흥분한 도운은 눈가에 울망울망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해일은 비어 있는 손으로 도운의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중심부를 손끝으로 스쳤다. 그러자 후드득 몸을 떨며 하악, 하고 더운 숨을 뱉었다. 어디 한 군데 제대로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혼자 해일의 목덜미를 빨며 이렇게 흥분하다니. 이렇게 야한 애인을 밖으로 내돌리는 것은 역시나 잘못한 선택이었다.

“아니면 뭔데요. 응?”

“이사님이랑…… 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요.”

“……하고 싶다고?”

의외의 말에 가볍게 놀란 해일은 시선을 피하려는 도운의 턱을 세게 붙잡으며 자신에게로 고정했다.

눈을 마주한 도운은 정염에 휩싸인 눈동자를 보곤 아까보다는 안심할 수 있었다. 화를 내는 차가운 눈보단, 조금 버겁더라도 이게 훨씬 좋았다. 도운은 해일의 입술 위로 버드 키스를 날렸다. 입술이 몇 번이나 뭉개지면서 머리끝까지 흥분이 찬 해일은 도운의 엉덩이를 세게 쥐었다.

“아…….”

“하던 거 계속해.”

해일이 낮게 읊조리는 동시에 도운의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도운은 부추겨지는 느낌에 다시 해일을 끌어안으며 이번엔 반대쪽 목덜미를 빨기 시작했다. 해일이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며 신음했다. 그 신음 소리에 도운은 배 속이 간지러워짐을 느꼈다.

해일은 잠옷 위로 엉덩이를 만지다 못해 천천히 손을 올렸다. 상의 속으로 서늘한 손이 파고들어 척추를 따라 피아노를 치듯 올라왔다. 날개뼈를 쓸고 손톱으로 어깨를 긁자 귓가로 으으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결 좀 어루만졌을 뿐인데 몸을 떠는 게 귀여웠다. 해일은 도운의 엉덩이를 끌어 자신의 몸에 더더욱 밀착시켰다.

뜨거운 중심부가 맞닿으면서 두 사람은 깊은 키스를 나눴다. 해일은 도운의 허리를 넓게 쓸어 올리며 엄지로 유두를 꾹 눌렀다. 찌릿한 느낌에 도운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해일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아랫입술을 길게 물어 당겼다. 혀를 길게 빼 입천장을 훑고, 도운의 혀와 엮어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하아, 흐…….”

잠시 입이 떨어질 때만 가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 잠깐마저도 아쉽다는 듯 해일이 도운의 몸을 끌어당겨 혀를 빨았다. 해일의 날렵한 콧날에 재차 도운의 콧대가 문질러지고, 서로의 숨이 섞이며 온통 축축하고 뜨거운 공기만이 주변을 감돌았다.

“아, 이사님…….”

해일이 급한 손길로 도운의 상의를 벗겨 내렸다. 드러난 쇄골과 어깨에 이빨을 박아 넣으며 순식간에 울긋불긋한 자국들을 남겼다. 보들보들한 살결에 입술 도장을 찍으며 내려가 발딱 서 있는 붉은 유두를 빨았다. 도운이 절로 허리를 휘며 가슴을 내밀었다. 파르르 떨며 부끄러워하면서도 가슴을 빨아주는 게 기분 좋았는지 도운의 신음이 점점 높아졌다.

가슴을 건드릴 때면 해일은 끝장을 보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귀엽게 튀어나와 있는 걸 그냥 둘 수가 없어 혀로 누르고 이로 긁으며 한참을 괴롭혔다. 반대쪽 유두로 입술을 옮겨가면서 젖은 유두는 손끝으로 튕겼다. 왼쪽 가슴에 예민한 감각이 몰려 있기라도 한 건지, 그쪽은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엉덩이를 꼼질거리며 긴 신음을 흘렸다. 정수리까지 짜릿해지는 감각에 도운은 저도 모르게 해일의 머리칼을 살짝 붙잡았다.

“아직도…… 술 냄새 나요?”

밭은 숨과 함께 도운이 물었다. 샤워를 해서 그런지 술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고, 살을 빨면 빨수록 해일을 미치게 하는 도운의 달큼한 살 냄새만 피어오를 뿐이었다. 해일은 속옷 안으로 손을 넣으며 말했다.

“응. 내가 다…… 취할 것 같은데.”

“아……!”

해일이 아래를 퍽 쳐올렸다. 뜨겁고 단단한 기둥이 엉덩이 아래 고스란히 느껴져 아직 삽입하지도 않았는데도 아랫도리가 뜨거워졌다. 저렇게 한껏 발기한 그의 것이 자신의 몸을 침범해 올 때의 감각을 이미 알고 있기에 더욱 열이 올랐다.

해일은 엉덩잇살을 손 안 가득 쥐고는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중지가 주름진 구멍 위를 살살 쓰다듬자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재차 세게 쥐어 벌리자 그제야 살살 풀어졌다.

“젖어 있어.”

아직 촉촉이 물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마치 스스로 뒤가 젖어들었다는 듯한 말에 도운이 입술을 깨물며 해일의 품에 안겨들었다. 해일은 한결 수월해진 자세로 아래를 천천히 파고들었다.

“아…… 아아…….”

중지가 내벽을 꾹 꾹 누르며 진입했다. 손가락이 젖어 있지 않아 조금 뻑뻑했고, 엉덩이에 반쯤 걸려 있는 잠옷과 속옷이 거슬렸다. 해일은 바지를 완전히 벗겨버렸다. 그러자 이미 발기한 성기가 통 튀어 올랐다. 해일은 입맛을 다시며 서랍에서 급히 아무 크림이나 잡아 꺼냈다. 두 손가락에 길게 짜낸 뒤 다시 내벽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손길이 다소 거칠었다. 흥분의 정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했다. 해일은 도운이 가장 느끼는 곳을 찌르며 살살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흐윽, 읏, 으아, 이사님…… 흐…….”

도운이 해일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으며 허리를 떨었다. 점점 위로 솟는 몸을 해일이 잡아 누르며 아래를 빠르게 자극하자 매끈한 성기 끄트머리에서 실처럼 선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읏…… 빨리, 아…… 넣어주세요. 이사님, 넣어, 주…….”

“후우…….”

일찍부터 달아올랐던 몸에 예민한 지점까지 자극당하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도운이 조르다 못해 아래로 손을 뻗었다. 해일의 왼쪽 허벅지로 길게 뻗은 기둥을 옷 위로 살살 쓰다듬었다. 묵직한 무게감에 자신도 모르게 탄식처럼 숨이 터졌다.

갑자기 중심이 자극당하자 해일도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아직 두 손가락밖에 삼키지 못했는데 당장이라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그는 서랍 속 콘돔 상자로 손을 뻗었다. 하나를 가져와 뜯고는 바지 속에 갇혀 있던 성기를 꺼내 보였다.

“읏…….”

자신의 성기 위로 퉁 맞닿는 해일의 것에 도운이 움찔 떨었다.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와 단단함. 무섭도록 핏줄이 서 있는 검붉은 성기에 절로 눈이 감길 정도였다. 해일이 도운의 허리를 잡아 일으켰다. 도운은 무릎으로 서며 해일의 어깨를 붙잡았다.

해일은 손으로 기둥을 몇 번 추어올리더니 그 위로 콘돔을 가져다 댔다. 의자에 두 사람이 겹쳐 앉은 자세여서 손을 움직이기 불편했다. 콘돔이 자꾸 헛돌자 마음이 급했던 도운이 먼저 해일의 손을 붙들었다.

“없이, 해요. 그냥…… 아, 그냥 넣어주세요…….”

“하아……. 보채지 마.”

머리가 핑 돌 정도의 강한 유혹이었다. 해일이 도운의 허벅지 뒤쪽을 아프도록 꽉 쥐어 경고하듯 말했다. 살갗에 붉은 손자국이 남았지만 두 사람 다 개의치 않았다. 해일은 콘돔을 당겨 씌우고는 도운의 엉덩이를 붙잡고 몸을 내리게 했다.

“흐으…….”

엉덩잇살 위로 한 번 미끄러진 성기가 마침내 구멍 위를 쿡 찌르자 도운이 앓는 소리를 냈다. 해일은 손끝에 크림을 더 묻혀 부드럽게 매만지며 이완을 도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꾸욱, 귀두 위로 엉덩이를 눌렀다.

“으응, 응……! 아…… 천천, 천천히…….”

마음은 급했으나 몸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빨리 해일을 안에 품고 싶어 먼저 허리를 흔들어대던 이전과는 달리 도운은 무릎에 힘을 주며 내려앉지 않으려 버텼다. 막상 구멍이 벌어지기 시작하니 쾌감보다는 아픔이 우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전에 없던 도운의 유혹적인 몸짓에 해일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도운의 가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며 등을 쓸어내리고, 허리를 끌어안아 몸을 내리기 시작했다.

“웃, 으으……!”

“그러게, 하……. 보채지 말라고 했지.”

작은 구멍이 억지로 크기를 키워가며 해일의 성기 윗부분을 꾸역꾸역 삼키기 시작했다. 해일은 손에 크림을 더 짜내 구멍 주변을 매만지며 적셨다. 그러고는 다시 꾸욱, 힘을 줘 버티는 도운의 허리를 눌렀다.

“아아……!”

주우욱, 막을 새도 없이 성기의 절반이 안을 찌르고 들어갔다. 도운은 애써 해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해일이 아래를 한 번 쳐올리자, 두꺼운 기둥이 곧장 도운의 자극점을 짓이기고 들었다.

“아, 아으응!”

“힘 빼. 응? 도운아…….”

몸의 말단까지 전기가 통하는 듯이 저릿했다. 순식간에 흥분이 뻗쳐나간 도운의 몸은 주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아래를 무섭도록 조여댔다. 끝까지 들어가려면 절반이 남았는데, 더 이상 진입이 어려울 정도로 내벽이 쫄깃하게 달라붙어 왔다.

“아, 젠장…….”

해일은 조임을 참지 못하고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아래를 살살 쳐올리기 시작했다. 도운은 어금니를 다물며 아래를 찔릴 때마다 몸을 움틀 떨었다. 고개가 자꾸만 뒤로 넘어갔다. 해일은 드러나는 하얀 목덜미에 입을 대며 세게 빨아들였다.

“읏, 흐읏, 아…… 좋, 좋아. 으응!”

“좋아요?”

몇 번 찔러주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좋다고 우는 소리가 나왔다. 흐윽! 안쪽으로 조금씩 더 진입할수록 조임이 심해졌다.

“오늘따라…… 아……. 더 조이네.”

“흑, 흐윽.”

“취해서 그래요? 아니면, 윽. 자세 때문에 그래?”

“아아!”

해일은 도운의 허리를 꾹 눌러 완전히 앉히고 말았다. 도운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밑이 찢어질 듯 벌어지며 해일의 두꺼운 기둥을 꾸역꾸역 집어삼키고 있었다. 해일은 도운의 입구 주위를 매만졌다. 하아. 해일은 아래를 쳐올리며 도운의 쇄골을 물어뜯었다.

몸이 위로 솟았다 꺼질 때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거근이 아직 덜 풀린 안쪽을 억지로 벌리고 들어오는 감각 자체로도 황홀함이 느껴졌다. 해일과의 관계는 매번 그러했다. 같은 행위여도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윽, 읏, 아, 아…….”

도운이 먼저 엉덩이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성기가 저 안쪽을 퍽 퍽 두드리며 조금씩 더 깊게 삽입되었다.

“아……. 야해라.”

그러자 해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야하고 요망한 짓도 할 줄 알다니. 목에 팔을 감고는 허리를 찧어오는 행위를 만끽하던 해일은 곧 기꺼이 도운에게 동참해 주기로 했다.

“흑, 윽……!”

도운이 어느 정도 적응한 것 같을 때 해일은 그의 허리를 붙들었다. 그리고 아래로 꾹 붙잡아 내리는 동시에 멋대로 도운의 몸을 앞뒤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아악, 아……! 아, 으으응, 아아! 아!”

“하아…….”

“응, 아…… 아, 아! 이사님, 우, 흑, 너무…… 아!”

몸이 앞뒤로 거세게 흔들리며 해일의 것 또한 안으로 깊숙이 박혔다가 조금 빠져나왔다. 그러기가 무섭게 다시 안으로 박혀드는 몽둥이에 도운이 진저리를 쳤다. 여린 속살을 헤집고 길을 뚫어내는 것처럼 해일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으응! 아! 하아아!”

“아……. 속살이, 계속 엉겨 붙잖아, 도운아.”

“그, 그만. 하악, 아……!”

“언제쯤 다…… 받을까.”

도운의 의지와는 다르게 해일이 멋대로 몸을 흔들어대니 더 미칠 지경이었다. 차라리 몇 번 해봤던 것처럼 위아래로 박혀 들어오는 것이면 몰라도, 엉덩이를 진득하게 누른 채로 앞뒤로 움직이게 해 지금까지 자극된 적 없는 새로운 부분이 건드려지는 기분이었다.

“아, 아…… 다 넣으면, 안 돼요……. 읏…… 배가 이상해…….”

빳빳한 기둥이 멋대로 안을 찌르고 눌렀다. 내벽을 밀고 들어오는 귀두나 힘줄의 모양까지 선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도운은 한쪽 손을 내려 배를 감쌌다. 손바닥 안으로 요동치는 배 속의 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

“우웃! 흐, 으읏…….”

해일이 허리를 퍼억 쳐올렸다. 몸이 위로 크게 솟구친 도운은 다시 곤두박질치며 성기에 그대로 꽂혀들었다. 해일은 도운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시 허리를 눌렀고, 도운은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을 파르르 떨었다.

사정이라도 했나 싶어 해일이 아래로 손을 가져다 댔지만, 선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을 뿐 아직도 통통하게 부피를 키우고 있었다. 엄지로 끄트머리를 살살 문지르자 쯔걱쯔걱 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해일은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렇게 젖어서는, 사정이라도 한 것 같네.”

“읏, 아니…….”

“아니야?”

“아아…… 흐…….”

해일이 도운의 허리를 잡고 둥글게 돌리기 시작하자, 우는 것처럼 앓는 신음이 길게 흘렀다.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야트막한 피스톤질이 계속되는 것만 같았다. 조금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안을 뭉근하게 눌러 도운을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도운은 오늘따라 집요하게 제 몸을 멋대로 흔들어대는 해일이 밉다가도, 성감에 머릿속이 끓어 그런 감정들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말았다. 눈을 꾹 눌러 감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고, 살이 치덕대는 소리와 도운의 울음이 한데 섞였다.

해일은 잇새로 보이는 붉은 혀에 시선을 빼앗겨 급히 입을 맞췄다. 도운이 혀를 빼며 적극적으로 문질러오자 이로 물어가며 입 안으로 모조리 집어삼켰다. 두 사람 모두에게 갈증이 이는 자극적인 애무였다. 도운은 한계에 치닫는 기분에 몸에 힘을 세게 주었다.

“아…….”

엉덩이가 워낙 작아서인지 잘 풀어준 때에도 안이 미친 듯 조이던 도운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남다르게 밀착해 왔다. 이렇게 달라붙는 내벽으로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어댈 때면…….

“팔 감아.”

계속해서 해일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해일은 도운에게 짧게 명령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바뀌는 체위에 도운이 코알라처럼 해일의 몸에 매달렸고, 그러기가 무섭게 해일이 아래를 퍽퍽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읏, 아아!”

해일의 음낭이 도운의 아래에 묵직하게 부딪힐 정도의 강한 힘이었다. 허공에서 몸이 흔들리면서 해일의 성기가 거의 뿌리까지 들어오려고 하자 도운은 겁이 나기 시작했다.

“흐윽…… 으……. 이사님, 너무, 깊어요. 윽, 깊어……! 하악!”

명치를 찌르는 이물감이 계속되었다. 도운은 해일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주며 버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자극을 주면 줄수록 좁아드는 내벽에 희열을 느낀 해일은 도운의 턱 끝에 입술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여기 기분 좋아?”

“아파, 흣, 아……! 좋, 좋아. 깊어…….”

도운은 정신없이 신음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정을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내벽이 쫀득하게 성기를 물고 자극하니 해일 또한 정신이 나간 것처럼 아래를 찧었다.

“하아, 여기, 찌르니까…… 좋아요? 윽…….”

“읏, 아앙, 아…… 으, 으읏…… 아……! 아!”

고개를 젖히며 앓던 도운은 어느 순간 먼저 사정했다. 사정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해일의 옷에 정액을 툭, 툭 뱉어대며 무아지경으로 흔들리는 몸을 멈출 생각도 못 했다. 그저 해일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매달려 그의 허릿짓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해일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사정액을 질질 흘리는 도운의 성기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숙였다. 서재 책상에 도운을 눕힌 뒤 그 주변 집기들을 한 손으로 모두 쓸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으나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아래를 치대기 시작했다.

퍽, 퍽, 터억. 살이 부딪치며 때리기라도 하는 듯한 둔탁한 소리도 함께 울렸다. 정말 말 그대로 성기가 비좁은 내벽을 때리듯 파고들었다. 도운은 자꾸만 눈이 뒤집히는 게 무서워 질끈 감아버렸다.

해일은 끝까지 도달하는 데 오래 걸렸다.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에서 덜컹거리는 굉음이 날 정도로 무자비하게 몸을 맞붙여왔다.

“악, 아아! 아, 흣……. 흐윽……! 그만……!”

도운의 흰 다리가 허공에서 속절없이 흔들렸다. 해일은 허벅지에서부터 종아리까지를 손끝으로 쓸고는 오금을 잡아 눌렀다. 몸을 반 접으며 아래를 콱 붙이자 도운이 퍼덕거렸다.

“흐윽……!”

한참 만에 사정에 다다른 것이다. 해일은 허리를 숙여 도운의 몸을 꽉 끌어안고는 콘돔 속에 정액을 분출해 냈다. 덩달아 도운의 몸에도 힘이 훅 들어가면서 아래를 조였다. 한계까지 발기한 해일의 성기가 얼마나 두꺼운지 새삼 크기를 실감하고 만다.

엉덩이 사이를 들쑤시던 붉은 기둥이 마침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해일은 콘돔을 벗겨 던지고는 자신의 것을 빠르게 손으로 쳐올렸다. 남아 있던 정액을 도운의 배 위로 쏟아내며 고개를 젖혔다. 흰 점액이 아랫배에 흐르는 걸 흐려진 눈으로 바라보던 도운이 숨을 몰아쉬며 해일을 올려다보았다. 목젖이 도드라진 해일의 목에 땀이 한 줄기 흐르는 것이 포르노를 보는 것만 같았다.

성감을 해소한 해일이 떨고 있는 도운의 허벅지를 감싸며 키스해 오자 도운은 절로 우는 소리가 났다. 그만하라고 말려도 세게 몰아붙였던 것이 이제야 조금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해일은 한 번으로 그칠 생각이 없었다. 엉덩이 사이로 뻗은 손이 아직도 벌어져 있는 구멍 위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미끌미끌해 한순간 손가락이 속을 확 파고들자 몸이 한 방향으로 휘며 자지러졌다.

“흐윽!”

“네가 지금 또 유혹하고 있잖아.”

해일은 콘돔을 하나 더 꺼냈다. 오늘을 핑계로 도운을 모른 척 한계까지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화난 게 아니라고 하더니, 역시나 맞았다.

다음 날, 해일은 아침을 차려 먹은 뒤 도운이 좋아하는 도넛을 한 상자 사 왔다. 그가 하는 나름의 사과 표현이었다. 달달한 도넛을 베어 무는 도운의 입가를 조심스레 닦아주며 해일은 그래도 술은 당분간 줄이자고 나직이 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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