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셨어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도운이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막 집으로 들어오던 해일이 조금 눈을 크게 뜨며 두 팔을 벌리자 도운이 그대로 품에 쏙 들어가 안겼다.
“일찍 왔네요.”
“오늘 외근 다녀왔다가 바로 퇴근했거든요.”
“그랬어요?”
“으응……, 네.”
도운의 뜨끈한 몸을 꽉 끌어안자 숨이 막혔는지 짧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해일은 품에 들어온 도운을 한참 놓아주지 않고 몸을 좌우로 흔들어가며 길게 포옹했다. 고작 하루 반나절 떨어져 있던 것뿐인데도 몇 주는 떨어져 보낸 연인처럼 애틋한 몸짓이었다.
해일이 도운의 등을 쓸 듯 더듬자 도운도 장단을 맞춰 해일의 허리를 세게 안았다. 가을바람 냄새를 한껏 묻히고 온 연인에게 온기를 나눠주었다.
“식사부터 하실래요? 아니면…….”
“키스부터.”
목욕부터 할 거냐 물으려고 했는데 해일이 멋대로 말을 끊더니 입술을 문질러왔다. 입술끼리 맞닿고 가볍게 빨아들인 해일이 짧은 키스를 하고는 씨익 웃었다.
“밥 먹죠. 잠시만 기다려요. 내가 준비할 테니까.”
“아니에요, 제가 거의 다 해뒀어요.”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은 도운이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부엌으로 총총 달려 들어갔다. 해일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고는 도운을 따랐다. 꼭 신혼부부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부엌에서 찌개 간을 보는 도운을 보며 이 생활에 더욱 확실한 쐐기를 박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해일이 식탁 근처에 가방을 내려두고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내려 함께 걸어두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음식을 차리는 도운을 도왔다.
도운이 흘긋 해일을 보았다. 프라이팬을 쥐는 팔뚝에 푸른 핏줄이 서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꿈틀거렸고, 시선을 더 올리니 풀어진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키스 마크가 보였다. 이젠 꽤나 옅어졌지만 아직도 상처처럼 울혈이 남아 있었다. 도운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흔적을 남겨둔 게 꽤 기분 좋았다. 왜 해일이 자신의 살결을 물고 빠는지 이제 이해가 갔다.
“왜.”
“아, 아니에요.”
시선을 느낀 해일이 웃으며 묻고는 도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도운은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진 이마를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다 준비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오셔서…….”
“요즘은 계속 이쯤 옵니다. 서 비서가 운전 실력이 좋은 건지.”
“아…….”
서재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도운의 손이 우뚝 멈췄다. 서재혁. 요즘 들어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꽤나 자주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해일의 최측근 중 하나였으니 말이 자주 나오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으나 바로 그 날, 다른 사람을 ‘서 비서’라고 부른다는 걸 안 그날부터 이상하게 도운은 서재혁이 신경 쓰였다. 이전까지는 아무 생각도 감흥도 없던 사람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는 괜히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다.
오늘도 해일의 입에서 서 비서라는 말이 나오자 도운은 입술부터 튀어나왔다. 서재혁 씨라고 부르면 되지 꼭 그런 호칭을 써야 하나? 하는 불만이 생겼다가도, 또 이름을 부르면 왜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지에 대한 불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거기다 서재혁이 운전하는 차라니. 평소 해일은 운전기사나 김 실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요즘은 계속 서재혁이 운전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일의 허락이 필요했을 터인데. 입사한 지 오래되지 않은 그가 이렇게나 빨리 집까지 오가도 되는 것일까. ……도운은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무척이나 낯설고 우스웠다.
“찌개 넘치겠는데.”
“앗.”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찌개가 팔팔 끓는 것도 못 보고 있었다. 허둥대는 도운 대신 해일이 팔을 뻗어 불부터 내렸다. 절로 한 걸음 물러선 도운은 해일이 찌개에 물을 조금 붓고 다시 살짝 끓여내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앉아 있어요. 내가 할게요.”
“네…….”
음식도 가사도우미가 대강의 준비를 마친 것이었다. 도운은 음식을 데우고 그릇에 옮겨 담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걸 못 하니 자괴감이 들었다. 이상한 질투심으로 해일과의 행복한 저녁 식사도 망칠 수는 없었다. 도운은 애써 생각을 떨쳐 버리려 볼을 탁탁 때리고는 식탁을 꾸렸다.
* * *
하지만 머지않아 도운은 제 생각보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서재혁을 아무리 신경 쓰지 말자고 재차 다짐해도 그게 잘 안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회사 일로 예민해진 자신이 사소한 일에 과하게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가면 갈수록…… 해일이 서재혁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해일의 야근 빈도가 이전보다 늘었다. 무슨 일 때문에 늦는 건지 물으면 해일은 항상 서 비서의 교육과 관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을 가르쳐야 하기에 그 늦은 시간까지, 그것도 사장이 직접 가르친다는 말인가.
사실 이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해일은 도운이 사원일 때에도 직접 일을 가르치곤 했다. ……하지만 알아도 속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집에 있을 때도 업무 통화를 자주 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서재혁일 때가 많았다.
이건 확실히 이상한 점이었다. 해일은 도운과 함께 있을 땐 핸드폰 사용을 자제해 왔었다. 애초에 업무 전화가 오지 않도록 회사에서 일을 확실히 끝내고 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도운과 함께 뒹굴거리다 전화가 오면 자리를 피해 전화를 받다니.
상대가 누구인지 물으면 절반은 서재혁이었다. 별 게 아닌 것 같아도 도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젠 도운은 해일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행위 자체가 불편해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주말 오후, 도운은 연습실에서 느긋이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고, 그 옆을 해일이 지키고 있었다. 둘이 도란도란, 속닥속닥, 피아노를 함께 치며 여유로운 주말을 즐기고 있었는데 해일에게 또 전화가 온 것이다.
“…….”
혼자 치는 피아노가 갑자기 재미없어졌다. 도운은 해일이 연습실을 나가면서 동시에 자신의 손을 멈췄다.
연습실 문에 난 창문으로 해일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자신과의 시간을 쪼개 통화를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철없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미워지면서, 동시에 해일에게도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짧은 통화를 마친 해일이 다시 연습실에 들어왔다. 피아노에서 손을 내린 도운의 모습을 보곤 해일이 옆에 앉으며 물었다.
“기다렸어요?”
자연스레 도운의 허리를 끌어안고 볼이 뭉개지도록 뽀뽀를 했다. 그러자 어쩐지 도운의 표정이 더 뾰로통해졌다. 해일은 어어, 하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도운의 앞머리를 빗듯 쓸어 넘겼다.
“어디 안 좋아요?”
“……아니요.”
“그럼.”
“그냥요. ……주말에도 통화를 하시고.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돌려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어쩐지 직구를 던진 기분이었다. 왜 자신을 두고 나가 일을 하느냐고 따지는 듯한 모양새에 도운의 어깨가 작아졌다.
괜히 말했다. 벌써부터 귓가가 뜨끈해졌다.
“미안해요. 급한 일은 마무리됐으니 핸드폰은 꺼두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러시라는 건 아니었는데…….”
해일이 즉각 사과하자 도운이 더욱 머쓱해졌다. 괜히 건반 하나를 통통 누르며 해일의 눈치를 보았다. 해일은 여전히 다정한 표정으로 도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재혁…… 그분은…….”
“네.”
“그, 그분은 요즘 일이 많으신가 봐요. 자주 통화하시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요. 최근에 일을 맡아서.”
해일은 도운의 볼에 떨어진 속눈썹을 조심스레 털어주며 여상히 말했다. 말하는 것으로만 봐서는 서재혁인지 뭔지는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도운은 손가락을 옮겨 다른 건반을 눌렀다.
“일은 잘하세요?”
“음……. 처음엔 제대로 써먹으려면 반년은 필요할 거라 생각했는데…….”
해일이 그간의 서재혁을 떠올렸다. 처음 채용했을 땐 역시나 신입이라 미숙했다. 지시한 일을 까먹거나, 잘못 알아들어 일을 그르치기도 했고. 해일의 물건을 챙긴답시고 가방과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다가 정작 전화가 울리는 걸 알아채지 못해 도운의 통화를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그를 총평하자면 남들보다 조금 둔한 편이었다.
“예상외로 학습능력이 좋아서, 요즘 들어선 본인 몫을 톡톡히 하는 것 같네요.”
“아하…….”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았다. 피드백이 잘 되는 사람이었고, 바쁜 스케줄에 서서히 익숙해지면서 이젠 여유롭게 일 처리도 할 줄 알았다.
“뭐, 잘한다고 할 수 있겠죠.”
“저보다 더…… 잘해요?”
“……네?”
하늘하늘 움직이는 도운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던 해일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저랑 일할 때보다 더 좋으십니까?”
도운의 질문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린 해일은 마침내 의도를 파악하고는 그만 피식 웃어버리곤 말았다. 해일이 입가를 가리며 큭큭대자 도운은 되레 더 조급한 표정으로 뾰로통하게 물었다.
“저랑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 정도로요?”
언젠가 해일이 했던 말을 고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해일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도운의 표정을 보면 그럴 수밖에. 눈썹이 한없이 처져 있었다. 눈썹을 따라 내려간 눈꼬리 또한 이렇게 시무룩해 보일 수가 없다. 미간은 평소보다 좁아져 있었고, 부리처럼 튀어나와 세모 입이 된 입술까지.
“아, 서도운. 정말…….”
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귀엽다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했다. 아주 앙큼하고, 허를 찌르고, 사람을 들었다 놨다 했다. 해일은 씨익 웃으며 도운의 볼을 살살 꼬집고 흔들었다.
“왜 대답을 안, 웅……, 하세요. 저보다 그분이, 읏, 더 좋아지면 안 되……눈데.”
도운의 두 뺨을 손 안에 가두고는 조잘대는 입술 위로 재차 자신의 입술을 쪽쪽 눌렀다. 발음이 뭉개지면서도 끝까지 할 말을 마치는 도운이 사랑스러워 해일은 다시 촉촉촉, 빠르게 소리 내며 잡아먹을 듯이 뽀뽀했다.
“질투하는 거예요?”
“…….”
“그럴 리가 없잖아요.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귀여워서 뭐라 할 생각도 안 드네, 이거.”
해일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도운의 입술을 꾹 눌렀다. 이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이 항상 상상을 초월했다. 가만히 쳐다보던 그가 건반 위로 올라온 도운의 손을 잡아 주물렀다. 당연히 반쯤 농담일 거라 생각했다.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였으니.
하지만 도운이 질투를 하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항상 자신만 도운이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느낄까 전전긍긍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도운의 속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니 이 사랑에 더 강한 확신을 얻는 듯하다.
자신의 연인은 왜 질투를 해도 귀엽고, 토라져도 귀여운 걸까. 어떻게 이다지도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해일은 매일이 새삼스러웠다.
“이사님 바쁘신데 제가 괜히 방해만 하는 건가 싶고…….”
“전혀요. 전화 온 건 단순 서류 업무였습니다.”
“그 정도 일이라면 제가 집에서 따로 도와드려도 될 것 같은데…….”
그 말인즉 괜히 서재혁에게 일을 맡겨 따로 통화할 일을 만들지 말고 자신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도운 또한 과거 비서실에서 일해 온 경력이 있으니 신사업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다. 하지만 해일은 도운의 발개진 눈가를 쓸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도운 씨 일로도 힘들 텐데.”
“안 힘듭니다, 하나도.”
도운이 작게 항변했다. 해일은 피아노 끄트머리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며 도운의 표정을 살폈다.
안 힘들긴. 낮엔 일하고, 밤엔 수업 듣고. 주말엔 피아노 연습 삼매경인데 굳이 집에서까지 일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이런 일로 실랑이를 하는 것 자체도 소모적이라고 느꼈다. 해일은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뻗었다. 동그란 도운의 무릎을 공 굴리듯 만지작거리다가 서서히 올라갔다.
“이사님…….”
“일도 마무리됐고, 핸드폰도 껐고. 이제 서도운 씨 연습을 방해하는 건 없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허벅지를 쓰다듬는 해일의 손이 방해를 막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이사님 손이, 방해하고, 읏…… 방해하고 있잖아요.”
순식간에 화제가 바뀌었다. 아니, 화제가 바뀐 게 아니라 대화 와중에 성감이 해일처럼 덮친 것이었다.
“방해라니. 연습에 도움을 주는 겁니다.”
“아…….”
기어코 고간에 가 닿은 큰 손이 아랫도리를 한 번에 쥐고는 뭉근하게 문질러왔다.
아직 뾰로통한 기분이 채 다 풀리기도 전에 차오르는 흥분으로 뒤덮인 도운은, 아무 곡이나 쳐 보라는 해일의 요구에 하는 수 없이 두 손을 모두 건반 위로 올렸다. 악상 하나를 떠올려 누르기 시작했지만 연주는 엉망이었다.
“읏, 이사님, 세게 하지…… 마세요……. 아…….”
해일은 도운의 바지 앞섶을 풀어 결국 성기를 꺼내 들었다. 도운은 피아노를 치다 말고 봉변을 당한 기분이었다. 해일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성기를 쓸어내렸다. 이리저리 자극을 주고 귀두 위를 감싸 둥글게 굴릴 때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해일은 도운이 가장 잘 느끼는 곳을 알았기에 그 부분을 사정없이 문질렀다. 빠르게 발기시킨 것도 모자라 순식간에 사정 직전에까지 몰아세웠다.
“갈 것 같아요. 하아, 갈 것…… 같은…….”
“해도 돼. 괜찮아요.”
“피, 피아노에……. 아……!”
혹여 피아노에 정액이 튀기라도 할까 걱정한 도운은 최대한 상체를 웅크렸다. 무릎을 딱 붙이고 세우며 해일의 손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의 손길은 무척이나 집요하고 진득했다. 도운은 결국 바들바들 떨다 해일의 손 안에 토정하고 말았다.
“하아. 하…….”
사정하는 순간 콰앙 눌린 건반에서 꽤 길게 소리가 울렸다. 도운은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우웃……. 뒤늦게 부끄러워진 도운이 울상을 지으며 해일을 노려보았다.
“이사님……. 당분간 연습실 출입 금지예요.”
* * *
대학원 수업 도중 짧은 쉬는 시간이었다. 오늘따라 졸려오는 눈을 비비며 하품을 길게 한 도운은 기지개를 켜며 졸음을 쫓았다. 목을 이리저리 꺾으니 우두둑하는 무시무시한 소리도 났다.
너무 몸을 안 움직였나. 잠시 복도라도 걷고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성민도 덩달아 일어나며 도운을 따라 나왔다.
“어우, 찌뿌둥해. 오늘 끝나고 술 한잔할까? 후문 쪽에 새로 탭 하우스 생겼다던데.”
“술집 소식은 아주 꿰고 있네.”
도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어려울 것 같아. 애인 만나러 가야 해서.”
애인 핑계를 대며 도운은 거절했다. 말만 들어서는 데이트를 하러 가는가 싶지만 사실 데이트는 없었고 그냥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 그다지 찔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팔을 위로 쭉 당겨 스트레칭 하던 성민은 놀란 눈으로 도운을 바라보았다.
“어엉? 헤어진 거 아니었어?”
“뭐?”
“아니, 반지가 없길래.”
그러면서 도운의 손을 슬쩍 바라보았다. 역시나 반지가 없었다.
“그 왕 큰 다이아 반지, 너 끼고 다니던 거.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길래 헤어졌나 싶었지. 아니었나 보네.”
“아…….”
도운이 자신의 왼손을 매만지며 낮게 탄식했다. 비어 있는 네 번째 손가락. 해일이 준 반지는 가방 안 속주머니에 넣어두었다.
“헤어진 게 아니라……. 휴. 심 과장이 하도 뭐라고 해서.”
“뭐? 이젠 반지로도 염병이라고?”
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이 손가락을 세워 관자놀이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심 과장의 만행을 떠올리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최근 심 과장은 도운이 대학원에 다니면서도 아무 실수 없이 일을 해내니 트집 잡을 것이 없어 옷차림을 가지고도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넥타이가 조금이라도 풀어지면 꼴이 그게 뭐냐면서 파일 끄트머리로 배를 쿡쿡 찔렀다. 너무나도 기분 나쁜 행동이었다. 해일이 사준 값비싼 정장이나 셔츠도 싼 티가 난다고 까 내리기 바빴고, 급기야는 반지에 대해서도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알이 너무 큰 게 아니냐느니, 번쩍거리는 것 때문에 일에 집중이 안 된다느니.
듣다못해 도운이 출근길에 반지를 빼 가방 속에 넣었다. 그런다고 해서 지적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래야 도운의 마음이 편했다.
“부서 이동 노리는 것 같은데 어서 가버렸으면 좋겠어…….”
“나도 물 떠놓고 같이 기도하련다.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해.”
성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옆에서 편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정말, 어서 심 과장이 원하는 부서로 가서 더 이상의 근심 걱정 없이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복도 중앙에 마련된 테이블에 두 사람이 잠시 앉았다.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를 한 캔씩 꺼낸 둘은 목을 축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애인이 서운해하겠네, 기껏 좋은 반지 사줬는데 잘 끼고 다니지도 못하고.”
“애인은 빼고 다니는지 몰라. 앞에서는 열심히 끼고 회사에서만 빼서.”
“너도 참 고생이다.”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다가 흐름이 자연스럽게 애인 이야기로 흘렀다. 성민이 먼저 신나서 자신의 애인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도운에게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도 흘렸다. 어물어물 돌려 대답하던 도운은 저도 모르게 속에 있던 근심거리를 성민에게 꺼내놓게 되었다.
“요즘 좀…… 고민이 있는데. 여친이 회사 사람 한 명이랑 특히 가까이 지내는 것 같아서.”
주어를 ‘여친’으로 돌린 도운은 천천히 사정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나랑 있을 때 전화를 받으러 가기도 하고……. 물론 둘이 업무가 비슷해서 거의 업무 파트너 같은 관계이긴 한데.”
도운은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정상인지 아닌지가 가장 궁금했다. 서재혁은 비서였다. 필연적으로 해일과 딱 붙어 지낼 수밖에 없는 사람. 수행비서라면 그가 가는 어느 곳이든 따라가야 했고 항상 동석해야 하는 것을…… 도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수행비서 역할을 해보았기 때문에.
하지만 싱숭생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논리적으로 감정이 흐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사람인지라 그게 어려웠다. 도운은 이 감정을 누군가에게라도 이해받고 싶었다.
“흐음. 둘이 같은 회사에 같은 부서면 진짜 불안하긴 하겠다.”
“그렇지……?”
박 대리에게 듣기를, 서재혁은 도운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했다. 애초에 게이도 아니던 해일이 도운과 사랑에 빠졌다는 건 도운과 비슷한 외모나 성격, 행동 등등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에게도 호감을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게다가 일도 잘한다고 했었지.
도운은 말도 안 되는 일인 걸 알면서도, 해일의 관심이 그 사람에게로 향할까 걱정된 것이다. 그렇기에 도운은 어지러운 감정을 잠재우기 어려웠다.
“그 남자는 너 여친이 애인 있는 거 알아?”
“모르는 것 같은데…….”
모를 게 분명했다. 해일은 반지도 없었으니.
도운은 저도 모르게 네 번째 손가락을 매만졌다. 해일이 준 반지는 오로지 도운의 것 하나뿐이었고, 두 사람이 나눠 끼는 커플링이 아니었다. 그걸 생각하자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왜 이사님은 반지를 끼지 않으시는 걸까. 혹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걸 별로 티 내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걸까. 도운의 아랫입술이 미약하게 튀어나왔다.
“남친 있다는 티를 좀 내보면 어때? 회사로 선물을 보낸다든가, 팀원들한테 밥을 산다든가.”
“음…….”
티를 낸다, 라. 성민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서 재혁은 죄가 없고 오로지 도운 자신이 가진 질투심이 문제였기에 대뜸 가서 애인인 티를 내는 것도 당황스러울 일이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해일의 회사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이 애인이라고 나서지는 못하겠지만, 그냥…… 가서 제 눈으로 두 사람이 평범한 상사와 부하직원 관계라는 걸 보고 오면 이 미련한 질투가 좀 사라지지 않을까.
수다를 떨며 쉬는 시간을 모두 보낸 성민과 도운은 다시 강의실로 향했다. 이후 수업에서 도운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청영에 자연스럽게 방문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뿐이었다.
* * *
해일이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데스크 위에 우편이 도착해 있었다. 해일은 레터 나이프로 가장자리를 잘라낸 뒤 안에 든 서류를 꺼냈다. 안에 든 것은 도운의 주변 인물에 대한 조사 내용이었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며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 읽기 시작했다.
분량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요즘 도운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대학원 친구 김성민이었다. 중학생 시절 유학을 떠나 한국에 돌아온 지는 3년으로, 그의 아버지는 악기와 관련한 중견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사업을 물려받을 것으로 보였다. 그 외 자잘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정리하자면 큰 줄기는 그러했다.
해일은 턱을 쓰다듬었다. 다행히 애인이 있다는 구절이 있었다. 하지만 완벽히 불안을 지울 수는 없었기에 앞으로도 주의 깊게 둘의 만남을 살피기로 했다.
마지막 장까지 전부 확인한 해일은 책상에 던지듯 파일을 내려놓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문질렀다.
“하아.”
요즘 도운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남들이 본다면 절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변화였으나, 함께 붙어살고 온 관심이 도운뿐인 해일은 어느 순간부터 그의 행동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시작은 해일에게 연락하는 빈도가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먼저 자주 전화를 걸어오는 도운이 사랑스러웠으나, 재차 어디에 있느냐 묻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꼭…… 예전에 불안 증세를 보이던 그때가 떠올랐다.
게다가 도운이 자꾸 혼자 술을 마셨다. 해일이 조금 늦게 들어오는 날엔 맥주든 와인이든 꼭 한 잔씩 하고 있었다. 차라리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는 거면 약속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는데, 자꾸 혼자 마시니 해일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냐고 물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냥 한잔하고 싶어서요.’ 하며 해맑게 대답해 왔다.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해일에겐 말 못 할 무슨 고민거리가 있다거나, 해결이 어려운 문제가 있다거나.
그렇게 이상함을 느낀 해일이 주변 인물부터 천천히 조사를 시작했다. 도운의 일상에 특별한 변화가 있는 것인가 싶어서.
사고의 트라우마가…… 완치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제든 재발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걸 인지한 순간부터 해일은 도운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혹여 자해 흔적이 있나 매일같이 손끝 발끝을 확인하고 눈이 잘 닿지 않는 곳까지 살결을 쓰다듬으며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자해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살도 조금 내렸다. 1, 2㎏ 정도는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수치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최근엔 조금 내린 채로 계속 유지였다. 해일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스스로를 다스리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걸 일종의 자해행위로 보는 의사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쌓여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겠는가.
도운은 본인 스스로의 행동이 이전과는 달라진 걸 눈치채지도 못하는 듯 보였다. 그렇기에 해일도 대놓고 묻지 않기로 했다. 혹여 더 꽁꽁 감출까 봐 걱정되었다.
해일은 자신 또한 되돌아보았다. 도운에게 실수한 것은 없는지, 그의 트라우마를 건드리지는 않았는지. 불편한 일을 만들거나 차마 말 못 할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하지만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 봐도 해일의 일상은 여느 때보다 단조롭고 변화가 적었다. 도운에게 하는 말은 대부분이 사랑을 속삭이는 말뿐이었는데.
‘혹시…….’
겉보기엔 평온하기 그지없는 문화재단에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친구도, 연인도 아니라면 혹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 해일은 김 실장을 호출했다. 최근 문화재단에서 올라온 보고가 있는지 묻자 얼마 전 문화지원팀 이 부장에게서 보고를 받은 적이 있다고 답해왔다.
“……해서 실적면에선 순항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간략히 들은 바로는…… 악기 지원 사업이 대상자를 늘려가고 있고, 미술관은 올해 말에 별관 준공을 마무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복지나 생명 쪽은 따로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준비할까요.”
“음…….”
설마 타 부서와 문제가 있을까 싶었지만 도운의 성격상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일말의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때에, 김 실장은 깜빡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 두어 달 전에 과장 하나가 이직해 왔는데, 성격상의 문제인지 팀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해일은 거기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시기상으로 보기에도 도운이 술자리에 자주 참여하던 때와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과한 억측일 수도 있었으나 상관없었다. 아니면 아닌 거고, 맞으면 좋은 것이다. 해일은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는가 싶더니 김 실장에게 말했다.
“조만간 한 번 들러보는 게 좋겠는데, 시간 비는 날 있습니까. 최대한 빠른 날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김 실장은 곧장 태블릿으로 스케줄을 확인했다. 머지않은 주중 하루 오후가 짧게 비어 있었다.
……문화재단에 미리 언질은 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
* * *
아직 가을의 중반을 달리고 있었으나, 일교차가 큰 탓인지 아침저녁으로는 조금 쌀쌀했다. 해일의 감독하에 도운의 옷차림도 조금 도톰해졌다. 어차피 출퇴근할 때 주로 차를 타고 다녀 차가운 바람을 느낄 새도 없었지만, 해일의 과보호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최근의 해일은 어딘가 달라진 것도 같았다. 도운을 점점 더 싸고돈다고 해야 할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번쩍 안겨 발을 땅에 한 번 대보지도 못하고 바로 몸무게를 재야만 했다. 비몽사몽 상태로 해일의 목에 매달려 있으면 해일에게서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샤워를 할 때도 도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일이 하려고 했다. 머리를 감겨주는 정도면 몰라도, 자꾸…… 몸을 씻기려고 드니. 맨정신에 그런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기는 부끄러웠다.
도운이 전화를 걸려고 하는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먼저 연락해 오는 것도 놀라웠다. 점심시간에 괜히 해일에게 실없는 문자를 남겨두거나 전화를 해 버릇했더니, 이젠 해일이 먼저 걸어왔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일들이었지만, 이젠 자신도 조금 기민해진 모양인지 그런 해일의 변화를 알아챈 게 어딘가 기쁘기까지 했다. 해일이 소홀한 쪽으로 변한 게 아니니 더 좋았다.
도운은 사내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올라와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셨다. 그리고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이 또 일과처럼 전화가 왔다.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네, 이사님.”
―점심 먹었어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 연락했습니다.
간질간질한 말에 도운은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문질렀다.
“그럼요. 오늘 메뉴가 삼계탕이더라고요.”
―배부르게 많이 먹었어야 할 텐데.
“너무 많이 먹어서 올챙이배예요.”
―잘했어요. 약은?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던 도중 수화기 속 해일이 나지막이 물어왔다. 도운은 아차, 작게 소리 냈다. 요즘 계속 미열이 있는 것 같다며 아침마다 해일의 걱정을 샀다. 도운은 그저 자고 일어나 체온이 높은 것뿐이라 했지만 그런 말은 해일에게 통하지 않았다.
“지금 들어가서 먹을게요.”
―까먹지 말고 꼭 먹어요.
해일이 직접 챙겨준 해열제였다. 도운은 가방 속 약을 생각하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사님은 점심 드셨어요?”
―네, 조금 일찍.
그러고는 도운이 묻기도 전에 누구와 먹었는지, 어디서 무얼 먹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도운의 궁금증을 미리 해소해 주는 것이었다.
―다음엔 같이 점심 해요. 조만간 시간 비울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제 외근 나가봐야 해서. 이따 다시 전화할게요.
“네, 이사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응. 사랑해.
“……저, 저도…….”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었으나 도운은 사위를 살폈다.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대답하는 그 목소리는 아주 모깃소리만 했다. 소심하게 답하는 도운에게 해일은 짧게 웃었다.
전화가 끊어진 검은 화면을 내려다보던 도운은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외근이면 역시, 김 실장님이 함께하겠지. 다행이었다. 그리고 도운은 이 와중에도 서재혁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했다.
1시 반쯤, 심 과장은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아주 느지막이 자리로 복귀했다. 양치를 하지 않았는지 그에게서 불쾌한 냄새가 고스란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도운은 긴장으로 목이 말랐다. 심 과장에게 보고해야 하는 서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잘했든 못했든 항상 꼬투리를 잡기 때문에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요즘은 특히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원래 그런 사람이겠거니 하며 마음을 놓으려 해봐도 쉽지 않았다.
“과장님.”
도운이 미리 준비한 파일을 들고 자리로 가자 그는 고개 한 번 들지 않고는 인상부터 팍 썼다.
“앉자마자……. 뭐.”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일부터 들이민다며 재수 없다는 말을 혼잣말처럼 흘렸다. 목소리가 꽤 컸다. 아마 이 부장이 있었더라면 바로 중간에서 제재했을 것이다. 때마침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이 부장 때문에 다른 사원들이 괜히 더 흘긋, 두 사람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도운은 이런 상황에 놓이는 것 자체가 난감했으나, 심 과장은 도운이 이렇게 곤란해하는 걸 즐기는 듯 보였다.
어찌어찌 파일을 건네긴 했으나 태도는 영 시큰둥했다. 도운이 자리로 돌아가려는 걸 굳이 붙잡아 세워두고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그는 한참 만에 입을 뗐다.
“너무 그…… 엘리트인 척하지 말고, 직관적으로 봐 버릇해. 어?”
“……네?”
“뭐,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줘? 스스로 문제를 찾아볼 생각은 잘 안 하나 봐.”
심 과장의 말은 뜬구름 잡는 소리로밖엔 들리지 않았다. 또 시작이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트집을 한번 잡아보는 것뿐이었다. 도운이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비웃듯 낄낄거리는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평소 하는 짓 보면 남한테 사바사바밖에 못 하던데, 그래서 배울 게 없는 거야.”
그게 대체 무슨……. 도운은 어이가 없어 얼이 빠졌다. 남 비위 맞추는 행위밖에 못 한다니, 오히려 비위 맞추는 짓을 잘못해 일이라도 열심히 하자는 게 평소 업무 태도였는데.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어느 면모가 그렇게 보인다는 말인가.
지속적인 가혹 행위도 어느 순간부터는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렇게 모진 심 과장의 태도에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적응될 만하면 사람 속을 긁어내렸고, 인격적으로 상처를 주는 언행을 했다.
도운이 아무런 말을 못 하고 서 있자 심 과장은 코웃음을 쳤다.
“왜. 할 말 있으면 해봐.”
도발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도운이 참지 못하고 반박하면 그걸로 또 트집을 잡을 요량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더 할 말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짧게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해일이 너무나도 보고 싶다.
“어쭈, 한숨 쉬어?”
심 과장이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였다.
“뭐 해, 다들?”
이 부장이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외근 후 곧장 퇴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도운과 심 과장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인상을 확 썼다.
“뭐 하는지 모르겠는데 상황 정리해. 지금 사장님 로비에 도착하셨대.”
그는 다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사장님이요?”
설마 지금 온 사람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느냐고 사원들이 물어왔다. 부장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어서 주변 정리를 하라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 순식간에 문화지원팀 사람들 모두가 웅성거리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심 과장도, 도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사님이? 지금 여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허둥댔다. 도운은 심 과장이 거칠게 안겨주는 파일을 어정쩡하게 쥐고는 막 자리로 돌아왔다. 그 때, 이 부장이 조금 전 통과했던 문이 열렸다.
“사장님.”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아…….”
해일이 문화재단에 나타났다. 도운의 눈 바로 앞에.
모두 놀라 굳어진 사이 부장이 먼저 나가 그를 맞이했다. 그러자 다른 사원들도 따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해일은 되었다며 손을 들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사장님.”
“지나가던 길에. 재단 이야기도 들을까 하고.”
해일이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시선이 오래 머문 곳은 도운이었다. 작고 동그란 머리통이 자신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다들 신경 쓰지 말고 일들 해요.”
“네, 사장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이 부장이 해일을 이끌고 안쪽 접견실로 향했다. 해일이 부서 쪽에서 멀어지자 그제야 사람들이 시선을 들어 해일의 뒷모습을 살폈다. 도운도 고개를 들었다. 마침 그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때맞춰 그가 나타나다니. 그의 등장에 놀라고, 또 이런 우연에 두 번 놀랐다.
그런데 해일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김 실장이 아니었다. 훨씬 젊어 보이는 ……처음 보는 얼굴. 도운은 단번에 그가 서재혁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김 실장님이랑 오신 게 아니었잖아.’
아까 그와 통화할 때 당연히 김 실장을 대동했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니. 도운은 좋던 와중 가슴 한구석이 조금 차가워졌다. 왜일까…… 하고 생각하던 도운은, 해일이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하자 정신이 퍼뜩 깨어졌다.
“와, 나 사장님 실물 처음 봤어.”
“우리 사장님이라니.”
“대박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래.”
연락을 주고받은 도운에게까지 비밀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 부장 또한 그리 급하게 들어온 걸 보니 조금 전에야 소식을 전해 들은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사람들은 한참을 소곤댔다.
도운은 접견실에 내드릴 차를 준비했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해일이 부드러운 미소로 도운을 맞이해 주었다. 다시 보아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해일이 여기에 있다니……. 트레이를 쥔 손이 조금 떨려왔다.
조용히 다가가 해일의 앞에 찻잔을 내려주자, 해일의 손이 조금 성급히 다가와 잔 손잡이를 쥐었다.
“고맙습니다.”
차를 주는 도운의 손등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도운이 움찔거리며 해일을 쳐다보자 그는 진하게 웃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면 안 되겠다 싶어 시선을 피한 곳엔 하필 서재혁이 있었다. 도운은 움찔거린 것도 잠시, 빠르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지만 열기는 오래 갔다. 부끄럽고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사장의 등장 때문이었는지 심 과장은 잠잠했다. 파티션 너머로 도운을 몇 번 흘긋거리긴 했으나 도운은 눈치도 채지 못했다. 도운의 신경은 저 접견실 너머의 해일에게로 모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저 안에 함께 있는 서재혁도 궁금했다.
도운의 머릿속엔 서재혁의 얼굴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짧은 순간 마주친 것뿐인데도 두 눈동자가 아주 밝았고, 싱긋 미소 짓는 것이 인상이 좋아 보이다 못해 그냥 아주 잘생긴 사람이었다. 왜 박 대리님이 그렇게까지 잘생겼다고 재차 얘기했는지 첫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접견실 속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고, 30분 정도가 흐르자 문이 열렸다. 해일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자 일을 하던 사원들이 다시 기립했다. 도운은 표정 관리가 어려워 일부러라도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그런 도운에게 해일이 먼저 말을 걸었다.
“서도운 씨.”
“네, 네.”
고개를 퍼뜩 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을 대놓고 불러 놀랐다는 감정이 표정과 행동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해일은 주먹으로 입가를 살짝 가리며 기침하듯 웃음을 숨겼다.
“재단 일은 어떻습니까. 제일 말단 사원으로서.”
“어……. 문화지원이라는 아주, 좋은…… 일을 하고 있어 뿌듯합니다.”
도운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며 눈치를 보다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달리 힘든 일은 없고요?”
“예…….”
도운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해일을 흘긋 바라보았다. 왜 이런 곤란한 질문을 하세요!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해일은 결국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피식 소리 내 웃어버리고 말았다.
“전에 재단으로 보낸 그림들은 어디 있습니까?”
“아, 로비에 한 점 있고 대회의실과 직원 휴게실에도 한 점씩 걸려 있습니다. 저희 부서 쪽 복도에도 하나 걸어두었습니다.”
이 부장이 대략적인 위치를 설명하자 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도운 씨. 그림들을 천천히 한번 보고 싶은데. 서도운 씨가 안내 좀 해줄 수 있겠습니까.”
해일은 도운을 콕 집어 물었다. 도운은 해일의 뒤에서 이 부장이 보내는 눈짓 신호를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도운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해일을 안내했다. 유리문을 열고 해일과 재혁을 먼저 내보낸 뒤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갔다. 등 뒤에서 사원들이 해일을 신기하다는 듯 곁눈질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기에 괜히 자신이 더 머쓱하고 민망한 기분이었다.
도운 대신 서재혁이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두고 있었다. 도운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하자 재혁은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역시 잘생겼다. 나란히 서보니 자신보다 키도 조금 컸다. 도운은 어딘가 모르게 작아졌다.
해일은 그런 도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재혁이 있어 차마 반응할 수가 없었다.
“서 비서는 먼저 내려가 있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때마침 비어 있는 대회의실에 도착하자마자 해일은 재혁을 내려보냈다. 그리고 회의실 안으로 도운을 이끌고 들어가고는 곧장 문을 잠가버렸다.
“CCTV 있어요?”
“없, 없습…….”
없다는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일이 입술을 부딪쳤다. 깊지 않은 짧은 버드 키스였다. 회의실 벽에 도운을 몰아세우고 품에 가두듯 하고는 몇 번이고 입술을 더 내렸다.
“회사에서 이러니까 재미있네.”
“저는…… 간이 쪼그라들 것 같아요.”
해일은 빨개진 얼굴을 가리려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도운을 안아주었다. 이런 귀여운 버릇을 남들은 평생 몰랐으면 좋겠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냥, 지나가다가. 싫어요?”
“아니요. 너무너무 좋아서요.”
“서도운 씨 얼굴도 보고, 일하는 환경은 어떤지 한 번 보고……. 누구 괴롭히는 사람은 없나 감시도 하고. 겸사겸사.”
“…….”
해일이 그리 말하자 도운의 미약하던 움직임이 순간 우뚝 멈췄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해일은 그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
조금 전 이 부장에게 대강의 설명을 들었다. 사원들 사이에서 일어난 불화나 문제에 관해서. 이 부장은 에둘러 표현했지만 해일이 파악하기로는 하반기에 새로 들어온 심 과장이 마찰의 주범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운이 기획한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심 과장이 탐을 내더라는 말도 지나가듯이 했다. 그 말 속에 담긴 속뜻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해일은 돌려 말하지 않고 대놓고 도운을 각별하게 여기고 있다고 언질을 주었다. 이는 청영에 오래 근무한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쉬쉬한다 해도 도운이 사고에서 해일을 구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부장은 해일이 도운을 아끼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자신 또한 도운을 좋게 보고 있었기에 문제없이 잘 챙기겠노라고 확답했다.
회의실 책상에 걸터앉은 해일은 도운의 손목을 붙잡고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큰 손이 가느다란 팔을 꾹꾹 주무르며 올라갔다가 내려오고는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 아주 작고 보들보들해 만지는 즐거움이 있었다. 해일은 손등을 엄지로 쓸고 손가락을 하나씩 만져보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반지, 없네요.”
“아…….”
도운이 탄식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가리며 한 발짝 물러나기에 해일이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다.
“왜 안 꼈어요? 아침에는 끼고 있었잖아.”
“그, 그게. ……팀원들이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요.”
“팀원 누구. 심 과장이?”
해일은 날카롭게 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도운이 놀라 되묻고는 곧장 후회했다. 아니라고 해야 했는데 해일에게 말린 것이다. 해일은 그 반응으로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고작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지고도 트집을 잡았나. 업무적으로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을 줄은 몰랐다.
“이 부장에게 좀 예민한 사람이라고는 전해 들었습니다. 심 과장이 평소에도 많이 괴롭혀요?”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해일은 계속 도운의 손을 주무르며 말했다. 도운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도운이 시선을 피할 때면 가볍게 흔들어 주의를 끌고, 몸을 더 끌어당기기도 했다. 입술을 물어뜯으며 불안해하기에 해일이 엄지로 가볍게 누르고 부드럽게 문질렀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제가 빼고 다니면 해결될 일이라서 빼고 다녔어요.”
“고작 반지로도 트집 잡을 사람이 반지를 뺀다고 안 잡을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길 하지 그랬어.”
“일러바치는 것 같아서…….”
도운은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전히 괜히 말했다는 듯 눈치를 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해일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도운이 왜 지금껏 말을 못 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속상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얘기를 애인한테 하지 않으면 누구한테 합니까.”
“사장님이시잖아요.”
“그래서. 그 전에 네 애인인데 날 이렇게 속상하게 만들어야겠어?”
해일은 자기가 그렇게 믿음을 못 줬냐는 듯 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감정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서로 보듬고 사랑하는 것이 연인의 일이었는데. 도운은 너무 조심스럽기만 했다.
“죄송해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 어리광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속상해하실까 봐…….”
도운은 눈가를 붉히며 입술을 얕게 내밀었다. 고개를 젓는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는 듯했다.
“난 내가 네 일을 모르고 있는 게 더 속상해.”
해일 자신이었다면 사장이라는 애인의 지위를 이용해 무슨 보복이라도 했을 터다. 아무 말 못 하고 버티고 있는 도운이 답답하다가도, 꼭 그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래서 해일은 더 기민할 수밖에 없었다. 사소한 변화도 놓쳐서는 안 됐다. 이번에도 그냥 기우이겠거니 하고 넘기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다음부터는 꼭 이야기할게요. 그렇지만 이번 일은, 아마 과장님 곧 다른 부서로 옮기실 거예요. 크게 신경 쓰실 일 아니에요.”
해일은 자신의 방문 자체가 심 과장에게 영향을 미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연히 사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나올 테고, 도운과 자신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걸 알게 되면 괴롭힘을 그만둘 것이다. 하지만 예외도 얼마든 생길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 회사를 그만두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그건 두고 봐야지.”
“정말, 정말 괜찮아요. 이사님이 지금껏 이런저런 일 다 해주셨는데 더 귀찮게 해드리기 싫어서.”
귀찮다는 단어도 거슬렸지만, 이것저것 다 해주었다는 표현도 못지않게 거슬렸다. 도운은 해일의 눈썹이 불편하다는 듯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전부 이사님 덕분에 회사도 학교도 다닐 수 있었던 건데 더 어리광부리고 싶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 서도운 씨가 노력해서 이룬 거지.”
해일의 미간이 대놓고 구겨졌다.
“그렇지만, ……그렇잖아요. 저한텐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런 이야기 그만해요, 서도운 씨.”
도운의 손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강도로 꽉 쥐어졌다. 도운은 그제야 해일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서도운 씨한테서 모두 가져간 건 나였고, 그 책임을 내가 지는 것뿐입니다.”
해일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한참 도운을 응시하던 해일의 눈이 잠시 감겼다. 속에서 차오르는 무언가를 눌러 참는 듯한 행동이었다. 입술을 말아 물며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고, 또 도운의 뺨을 감싸는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 조금 떨리는 것도 같은 손길에 도운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제 딴엔 스펙도 없는 자신을 좋은 회사에 보내주고, 학교 공부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 게 고마워 그걸 표현하고 싶었고 또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해일은 아무래도 과거의 일로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몸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이사님, 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압니다. 그래도…… 난 무슨 의미였든 그렇습니다. 내 책임이지 서도운 씨가 작아질 일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해일은 점차 누그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둘 사이엔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도운 또한 할 말이 없었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할 땐 마음이 편했는데, 해일이 제 탓이라고 말하니 가슴이 갑갑했다.
해일도 같은 기분이었을까. 서로 자신의 탓만 하고 있어 평행선을 달리고 있던 것이다.
“……미안해요.”
해일이 고개를 숙여 다시 도운의 품으로 얼굴을 기댔다.
“내가 너를 또 몰아붙인 것 같아.”
“아니…… 아니에요, 이사님.”
도운은 해일의 머리를 감싸 안듯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저도 안 그럴 테니까, 이사님도 그러지 마세요.”
“…….”
“저도 이거 다 제가 잘난 덕이라고 생각하면서 살 테니까, 이사님도 저한테 가진 부채감 다 지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이제 사회인이니까요.”
물론 이사님 덕에 조금 편하게 사회인이 됐지만. 도운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또 한 소리 들을까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해일 또한 도운의 대답이 완벽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쯤 하기로 하였다.
“이사님도 무슨 일 있으시면 저한테 얘기하세요.”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애인이라니.”
해일은 두 팔로 도운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그제야 두 사람에게서 웃음이 나왔다.
“오늘 이대로 같이 퇴근하면 좋겠지만, 오후에 있는 외근 일정을 미루고 짬을 내서 온 거라 저녁에나 다시 봐야 할 것 같네요.”
“저 때문에 일부러 오진 마세요.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자주는 안 올게요.”
“정말…….”
때마침 해일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알림을 확인한 그가 도운에게 가볍게 키스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봐야겠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네.”
“외근 가신다고 하셨죠.”
“네. 슬슬 수원으로 출발해야 해서 비서가 재촉하네요.”
“같이 오신 분이, 그 새로 오신……?”
“아. 얼굴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나요.”
“네……. 되게 잘생기셨어요.”
그 말에 해일이 흘긋 도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람은 안 됩니다.”
“제, 제가, 무슨.”
도운이 당황해 덧붙였다.
“당연히 이사님보다는 아닙니다.”
그러자 해일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회의실 밖으로 한 발짝 나가 있던 그는 역시 못 참겠다는 듯 다시 회의실 안으로 들어와 도운에게 길게 입맞춤했다. 혀가 섞이지 않고 입술끼리 문질러지는 키스였으나 그마저도 아래가 저릿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로비까지 모셔다드릴게요.”
“그럼 고맙고.”
상기된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며 도운이 중얼거렸다. 해일은 도운의 손바닥 위로도 뽀뽀한 뒤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건물 밖에 차를 대기시키고 있던 서재혁은 해일을 발견한 순간 재빠르게 움직였다. 뒷좌석의 문을 열어 해일을 오르게 하고, 직접 문을 닫아주고는 또 곧장 운전석에 올라탔다. 도운은 살짝 내려온 창문 사이로 해일과 눈을 마주하며 짧게 인사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차가 저 멀리 떠나간 뒤에서야 도운은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사내, 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길은 생각을 정리하기 좋았다.
해일이 심 과장의 일을 괜히 알아챈 게 아닐 것이다. 이 부장에게 물으려 이곳까지 행차하기 전 분명 도운 자신에게서 무슨 낌새를 느낀 것이다.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역시 해일에게는 소용이 없나 보다.
* * *
심 과장 일은 해일이나 도운이 더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해결되었다. 해일이 방문한 후로 심 과장이 무척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심 과장은 이전까지 모르고 있던 사실을 그날에서야 깨달았다. 해일이 도운을 지목해 데리고 나간 후.
“사장님이 혹시 도운 씨 때문에 오신 건가?”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안 그래도 아까 왜 사장이 고작 말단인 서도운을 콕 집어 데리고 나갔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는데, 심 과장은 사원들이 소곤대는 말을 듣고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대화에 끼어들었다.
“왜 사장님이 도운 씨 때문에 와?”
“과장님 모르셨구나, 전에 도운 씨가 이사실에서 일했어요. 사장님 이사이실 때.”
“뭐?”
심 과장은 인상을 팍 쓰며 되물었다.
“이사실에서 왜 여기에 왔지? 좌천인 건가?”
“저도 어쩌다 들은 거라 잘…….”
직설적인 단어에 어린 사원이 머뭇댔다. 재단에 정을 안 붙인 사람이란 건 느끼고 있었지만, 여기서 자부심을 느끼고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좌천이라고 표현을 하다니.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던 찰나, 다른 사원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답했다.
“좌천은요, 사장님이 도운 씨 아껴서 여기로 보낸 거지. 옛날에 사장님 교통사고 난 적 있는데 그때 구한 게 도운 씨라는 얘기 있잖아요.”
“뭐?!”
되묻는 목소리가 고함처럼 커졌다. 그간 도운을 괴롭히던 걸 지켜봐 왔던 직원들은 심 과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는 걸 보고는 속으로 쌤통이라 비웃었다.
“그걸 왜,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안 물어보셨잖아요? 하고 답해주며 한 방 먹이려 했지만, 그마저도 필요 없어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뜯고 발을 굴렀다. 키보드 소리도 평소보다 더 신경질적이었고, 아악 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도무지 진정되질 않았는지, 그날은 도운이 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먼저 피해 있으며 최대한 마주치지 않았다.
대강의 내막을 파악한 그는 그 순간부터 ‘도운 괴롭히기’를 그만두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도운의 눈치를 보는 듯 비위를 맞추기도 했다.
도운은 갑작스럽게 변화한 그의 태도에 신물이 났다. 자신한테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저 해일의 권력에 굴복한 것이 아니던가. 답답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장 일할 때 마음가짐은 편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애인의 지위를 사적으로 이용한 것만 같아 죄스럽던 마음도 어느새 녹아 사라진 듯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 도운이 외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 다른 팀원들이 자리를 비워 지원팀이 무척 조용하던 때, 부서로 들어오던 심 과장이 도운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도운은 시선 끝에서 심 과장을 발견했지만 계속해서 가방을 정리했다. 그러자 심 과장도 괜한 헛기침 소리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하지만 흘긋대는 시선은 여전히 느껴졌다. 모르는 척하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열렬해 그럴 수가 없었다.
“지시하실 것 있으십니까?”
“어? 아, 아니.”
심 과장의 시선이 거둬지자 도운은 다시 서류를 챙겼다. 하지만 그는 커피를 홀짝이며 눈치를 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외근 나가기 전에 잠깐…… 얘기 좀 할까?”
도운은 흔쾌히 응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건물의 옥상 공원으로 향했다. 바람은 좀 불었지만 사람이 몇 없어 이야기하기 좋았다.
“하실 말씀이 뭔가요?”
도운이 그렇게 물었을 때는 심 과장이 뜸을 들이느라 십여 분이 흐른 뒤였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도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유롭게 준비했다고 하나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게, 있잖아. 전에 내가 서도운 씨 사업 가져가려고 했던…… 그런 거. 내가 사과할게, 너무 상급자답지 못했다. 그렇지.”
“…….”
“그런 걸로 꽁해 있지 말고 풀자고. 앞으로 서로 도와가면서 지원팀을 위해서…….”
“과장님.”
꽁해……. 도운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말을 꺼냈다.
“전 풀 게 없어요. 과장님만 푸시면 되는 문제예요.”
이런 상황에까지 치달았음에도 남 탓이었다. 도운은 더 이상 그와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둘의 문제인데 제삼자가 간섭하는 것 자체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또 해일과의 친분을 이런 일에 이용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차라리 해일이 회사에 와준 게 다행이었다. 상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장님이 와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저는 평생 이 사과를 못 들을 뻔했네요.”
말이 날카롭게 튀어 나갔다. 이렇게 된 이상 도운도 뒤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원래도 좀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딱딱하게 군 거는 내가 원래 부하들한테 엄한 편이라서…….”
“과장님, 저는 뭐가 되었든 사과를 들었으니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
“사장님께 가서 이르거나 하는 일은 예전에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 할 거고요. 이 정도로 말씀드렸으면 제 말뜻 파악하셨으리라 믿어요.”
도운은 그렇게 말을 마무리하고는 먼저 인사하고 옥상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1층까지 내려오면서, 어쩐지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고작 말단사원인 주제에 상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기회를 준 건 모두…… 해일이었다. 어쩐지 고맙고, 홀가분하고. 또 미안하기도 하고.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하지만 역시 마지막은, 해일이 보고 싶다는 감정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런 도운을 부추기기라도 하는 듯 마침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금 외근을 나가는 곳은 재단에서 새로이 지원하게 된 음악 교육사업의 대상지인데, 청영 본사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도운은 지도 앱으로 아동센터의 위치를 대강 확인했다. 지하철 한 노선만 타고 이동하면 바로 회사였다.
전에 이사님도 한 번 오셨으니, 자신도 가보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부터 가보고 싶기도 했고, 팀원들도 다시 만나고 싶었고, 성민과 대화하며 회사에 가볼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고. 또……. 하여튼 여러 핑계가 뒤섞인 좋은 타이밍이었다.
해일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갑자기 기분이 상쾌해졌다. 하늘도 화창하고 햇살도 눈 부셨다. 심 과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마음은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이어서 아동센터에서 진행한 회의 또한 순조로웠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외근 후 곧장 퇴근해도 되었기에 도운은 바로 청영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날 팀원들을 위해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는 브런치 가게에도 들렀다. 신선한 생과일 음료와 샌드위치, 조각 케이크를 사 포장했다.
“……와.”
커다란 본사 건물 앞에 서자 감회가 새로울 지경이었다. 이곳으로 매일같이 출근하던 때도 있었는데. 오랜만에 와보니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더했다. ‘미래를 향한 맑고 푸른 도약.’ 슬로건이 새겨진 벽을 잠시 바라보던 도운은 이내 구석진 곳에 놓인 의자에 잠시 앉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사님 혹시 지금 바쁘세요?]
해일이 중한 일을 하고 있을까 봐 문자를 보냈다. 전송되기가 무섭게 곧장 전화가 걸려와 도운이 흠칫할 정도였다.
“이사님.”
―네, 무슨 일이에요. 지금 하나도 안 바쁩니다.
“그러셨구나. 사실 저…… 지금 청영 로비에 와 있습니다.”
―뭐라고?
아니나 다를까 해일이 놀라 되물었다. 도운은 안면에 미소를 짙게 띠었다. 깜짝 놀라게 하려고 했는데 성공이었다. 해일이 재단으로 왔을 때 자신의 기분을 그도 느낄까. 도운은 작게 킥킥 웃었다.
당황한 듯한 해일에게 도운이 로비 데스크에 연락을 넣어달라고 하자, 이내 정신을 차린 해일이 단호히 사람을 내려보내겠다고 답해왔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올라가면 되는데.”
그러자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듯 수화기에서 조금 떨어진 해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비에 문화재단에서 오신 손님 모시고 올라오세요.’ 그걸 들은 도운이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벌써 보냈습니다. 전용 엘리베이터 타고 곧장 올라오세요.
“알겠습니다.”
도운은 전화를 끊고 자신을 찾아올 사람을 기다렸다. 전에 같이 일하던 팀원이 내려온다면 서로 간에 머쓱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혹시 문화재단에서 나오셨습니까?”
머지않아 도운 앞에 나타나 공손히 물은 남자는 사원증에 서재혁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아……. 네.”
“이전에 한 번 뵈었었죠, 비서 서재혁이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서재혁은 엘리베이터 입구 쪽으로 손짓해 보였다. 도운이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재혁은 가장 안쪽에 있는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도운을 안내했다.
“제가 들겠습니다.”
재혁은 도운이 들고 있는 쇼핑백 꾸러미를 보고는 손을 뻗었다. 도운은 살짝 물러서며 만류했다.
“아닙니다, 별로 무겁지 않아서요.”
“손님께 짐을 들게 하면 제가 사장님께 혼이 납니다.”
맞다. 그렇겠지. 도운 또한 그랬었다.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쇼핑백을 넘기자 일말의 불만도 없다는 해사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도운을 먼저 태웠다.
사장실이 있는 층으로 점점 올라가는 숫자판을 바라보던 도운은 어느 순간부터 서재혁을 흘끔댔다. 깔끔하게 정리해 올린 헤어 스타일, 반듯한 이마와 높게 서 있는 콧대가 아주 날카로웠다. 옆에서 보기에도 둥글게 휘어져 있는 입술 모양까지, 아주 호남형이었다.
층계 버튼 사이로 언뜻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며 입술을 비죽거리려는데, 마침 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복도를 지나 유리문을 막 통과하는 그 때, 사장실 문이 열리며 해일이 모습을 나타냈다. 밖에서 기척을 느끼고는 도운을 맞이하러 직접 나와본 것이었다.
해일을 보자 도운은 순간 직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완전히 까먹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도운을 발견한 해일 또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사, 아…… 아니, 사장님.”
순간 익숙한 호칭을 부르려고 하다가 옆에서 재혁이 움찔하는 것을 느낀 도운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금방 고쳤다. 짧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도운의 표정을 살핀 해일이 피식 웃었다. 못 들은 척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습니다. 서 비서도 수고했어요. 손에 든 건 뭡니까.”
“아, 팀원들이랑 나눠 드시라고 사 온 건데…….”
동시에 도운의 시선이 굴러 불투명한 유리문 안쪽 비서실을 살폈다. 사람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도 안 계신 모양입니다.”
“공교롭게도 다들 외근에 미팅이 있어서.”
귀여운 고갯짓에 저도 모르게 볼을 쓰다듬으려 하던 해일은 주먹을 꽉 쥐어 참으며 설명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도운이 아쉬운 티를 냈다. 아무래도 오늘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먹을 거라면 냉장고에 넣어두는 게 좋겠군요. 돌아오면 찾아들 먹겠지.”
“제가 넣어둘게요. 탕비실이…….”
도운이 쇼핑백을 가져가려고 하자 서재혁이 만류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운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탕비실 위치가 이사실이랑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애먼 곳에 들어갔다가 실례를 범할 뻔했다. 게다가, 손님으로 온 외부인일 뿐인데 멋대로 탕비실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활보하면 그런 황당한 일이 또 없겠다 싶었다.
도운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해일의 비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고야 만다. 해일이 부리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시무룩할 줄은 본인도 미처 몰랐다.
“우선 들어가죠.”
재혁의 뒤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도운이 마음에 안 들었던 해일은 도운의 어깨를 감싸며 사장실로 이끌었다. 얌전히 따라 들어가는 도운의 어깨가 유독 처져 있는 듯했다.
“어떻게 말도 없이 왔어요.”
문이 탁 닫히자마자 해일이 물었다. 전혀 탓하는 말투가 아닌, 오히려 와준 것이 기쁘다는 듯 상기된 목소리였으나 도운이 걱정스레 되물었다.
“저…… 실례된 건 아니지요?”
“전혀요. 조금 전에 스케줄도 끝나서 곧 퇴근하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해일이 고개를 저으며 도운을 안심시키니 눈치를 보던 표정이 그제야 풀어지며 살포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실은 근처에서 볼일이 있어서요. 외근 나왔다가 그냥 퇴근하기 아쉬워서 이사님 뵈려고.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그랬습니까. 아주 잘했어요.”
해일은 손가락으로 도운의 볼을 톡 치며 말했다. 죄송하다니, 오히려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런 이벤트도 할 줄 알다니. 게다가 선물을 사 들고 로비까지 진출해 놓고는 막상 올라오니 눈치를 보는 것도 귀엽기 그지없었다.
해일이 안내하는 대로 커다란 소파에 앉은 도운은 주변을 크게 둘러보며 살폈다. 전체적인 사장실의 모습을 살피며 저도 모르게 우와, 하고 작은 탄성을 흘렸다.
사장실에는 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이사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사실엔 검은색의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이곳은 짙은 갈색의 소파가 있었다. 테이블의 모양도 네모반듯한 마감으로 깔끔함을 더했고, 해일이 집무를 보는 데스크의 디자인과 색, 벽에 발린 페인트의 질감까지도 느낌을 달리했다. 사장실을 위해 모두 새로 디자인된 모습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와보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충동적으로 움직이게 될 줄은 몰랐다. 자각했을 때는 가슴 한쪽을 갉작거리는 감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사장실에 있는 해일을 보니 모든 후회가 사라졌다. 반가우면서도 또 낯선 해일의 공간. 감회가 남달랐다.
해일은 열심히 구경하는 도운을 뒤로하고 데스크로 다가가 스위치를 내렸다. 사장실에 가동되고 있는 CCTV의 전원을 끈 것이다.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일이 들어오라 말하니 서재혁이 트레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도운이 사 온 조각 케이크를 작은 접시에 담고, 생과일주스 또한 긴 유리잔에 옮겨 담아 빨대와 함께 내왔다. 해일이 일인용 소파에 앉으니 그 앞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홍차였다. 찬 음료를 즐겨 마시지 않은 그의 취향을 고려한 것이었다. 한 사람 몫을 톡톡히 한다더니,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알아챌 수 있었다.
“따로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좋아요.”
“아닙니다, 리서치 정리 마치고 퇴근하겠습니다.”
재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이만 나가보겠다고 자리를 떠났다. 해일은 이내 찻잔을 들어 가볍게 목을 축였는데, 도운은 재혁이 나갈 때까지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잘생긴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과 큰 눈으로 얼굴의 인상도 진했고, 목소리조차도 낮고 안정적이었다. 짙은 피부색도 건강해 보이는 데다가 슈트로 가려지지 않은 떡 벌어진 어깨까지. 자신과 나란히 서 있다면 당연히 재혁에게 먼저 시선이 갈 것 같았다.
나이도 두어 살 더 어리다고 들었는데, 훨씬 어른스러운 듯했다. 두 사람이 평범한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 관계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에게 일을 많이 맡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화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도운은 시무룩한 얼굴로 음료를 쭉 빨아 마셨다. 아까까진 기분이 좋았던 것 같은데…….
으깨진 딸기 과육과 함께 갈린 얼음이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급작스럽게 차가운 걸 마셔서 그런지 골이 찌잉 울렸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던 해일이 작게 웃었다.
“많이 들진 말고. 이따 나가서 외식합시다.”
“알겠습니다. 아…… 저 아까 심 과장님이랑 짧게 대화 나눴어요.”
“그래요? 심 과장이 뭐라고 하던가요.”
해일은 천천히 차를 마시며 도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더 손쓸 것도 없이 자멸한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티를 냈으니 적어도 더 이상 도운을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고, 양심이 있다면 곧 알아서 도운의 앞에서 사라지겠지.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요.”
“그래서 좀 홀가분하기도 하고……. 아무튼 이사님이 더 신경 쓰실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좋아요. 문제도 해결됐는데 오랜만에 데이트나 할까.”
부드럽게 웃는 해일에게 도운도 화답했다.
“좋아요. 음…… 제가 보고 싶었던 전시가 있는데, 아직도 하는지 모르겠어요.”
도운은 최근 보고 싶던 전시회의 주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참여했던 경매가 꽤 재미있었는지 도운은 미술품에 관심이 커진 듯 보였다. 해일은 이야기를 들으며 도운이 어떤 주제를, 어떤 작품을,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깊게 파악해 가기 시작했다. 조만간 그의 취향에 맞는 그림 선물을 하거나, 아니면 해외 경매에 참여시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문화재단에 걸린 그림도 직원들이 정말 좋아해요.”
“도운 씨는 마음에 들어요?”
“그럼요. 특히 그 <등대>는 더더욱요. 직접 골라서 그런지…….”
도운이 만지작거리던 컵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그날이 떠오르는 것 같다. 알 수 없는 머쓱한 기분에 목덜미를 문질렀다. 해일도 마찬가지였는지 도운에게 말했다.
“도운 씨. 가까이 와요.”
바라본 해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남이 보기엔 한없이 점잖은 겉모습이었으나 도운이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한없이 야해 보이기만 하는 미소였다.
도운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옆으로 한 칸 옮겨 앉았다. 해일에게 가까운 자리로 붙어 앉고는 손을 뻗어 팔걸이에 올라와 있는 해일의 손을 잡았다.
“사실 아까부터 손잡고 싶었어요.”
도운이 해일의 손등을 매만지다 깍지를 끼며 씩 웃자, 해일은 도운의 손을 확 잡아당겼다.
“엇!”
고작 손? 가끔 도운이 저돌적인 건지 아닌지 헷갈리고는 했으나 그 점이 해일을 미치게 하는 도운의 매력이었다.
“난 아까부터 끌어안고 싶었는데.”
“…….”
“내가 가까이 오랄 때 어떻게 했었어요?”
강한 힘에 이끌려 순식간에 해일의 품으로 엎어진 도운은 그의 양어깨를 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 못 말린다는 듯이 해일을 바라보니 그는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해일은 도운의 허리를 잡아 허벅지 위로 제대로 앉혔다. 움찔, 멈칫하던 도운도 이내 수긍하며 그의 몸 위로 편히 앉았다. 그리고 목에 팔을 감으며 얼굴을 묻고 안겼다. 밖에 사람이 있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쓰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과시하고 싶은 이 마음을 해일이 몰라줬으면 한다.
“오는 길에 힘들진 않았습니까. 오늘 차도 안 가지고 갔잖아요.”
도운의 등을 토닥이듯 쓸던 해일이 나긋하게 물었다.
“지하철 타고 금방 와서 괜찮았어요.”
도운 또한 나른하게 가라앉은 톤으로 대답했다. 꼭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서로를 끌어안고 나누는 대화 같았다. 편안하고 안정되었다. 두 사람은 둘만 아는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한참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입술을 마주했다. 보드랍고 촉촉한 입술이 문질러지는 얕은 키스를 지속하며 온기를 나눴다. 어느 순간 도운이 강렬한 시선을 느껴 눈을 뜨자, 눈꺼풀 위에도 키스가 내려앉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서도운 씨가 여기 있으니 신기해서요.”
“저도 회사에서 이사님을 뵈니까…… 신기해요.”
“여기서 그 호칭을 들으니 감회가 새로운데.”
“아……. 사장님이시죠.”
도운이 실수했다고 사과하자 해일은 도운의 목덜미에 쪽 소리 내며 가벼운 뽀뽀를 했다.
“편하게 불러요. 우리끼린데 어때.”
우리, 남들과는 다른 관계의 정의였다. 그를 원하는 대로 부를 수도 있고, 이렇게 몸을 맞대고 키스를 나눌 수도 있고. 도운 이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해일과 이런 관계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왜 불안하고 초조한 걸까.
“이사님, 저 좋아하시죠.”
“그럼요.”
해일은 뜬금없는 도운의 물음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확신을 주려는 듯 고개를 들어 도운의 볼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앙다물고 있던 도운 또한 움직여 해일의 볼에 뽀뽀했다. 재차 입술을 내리며 제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도운의 등을 쓰다듬던 해일이 손을 올려 어깨를 둥글게 문지르기도 하고, 팔뚝으로 내려와 간지럼을 태웠다.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해일은 손에 힘을 줘 가느다란 팔을 한 손 안에 쥐었다. 못 움직이도록 꽉 잡은 다음 몇 번이고 짧은 키스를 했다.
도운은 빼고 싶지 않았다. 자기도 사람인데, 좋아하는 이를 눈앞에 두면 당연히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끌어안아 입도 맞추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인지 해일이 아랫입술을 길게 빨아들였다. 이로 물고 혀로 문지르다 재차 빨았다. 그리고 마찰음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아릿한 통증에 짧게 탄식했다. 배 속으로 열이 모이는 듯하다.
“아…….”
“밖에 사람도 있는데, 몰래 이런 짓을 하기엔 좀 그런가요.”
해일은 혹여 자신이 선을 넘다 도운이 불편해할까 봐 물었지만, 도운은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왜…… 못 해요.”
도운은 해일의 허벅지 위에서 엉덩이를 살짝 움직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나. 오늘따라 적극적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은요…….”
눈치 빠른 해일이 묻자 도운은 얼굴을 붉혔다. 고개를 폭 숙이며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들이는 걸 본 해일이 순간 엉덩이를 세게 쥐었다. 헉……. 짧게 숨을 내쉰 도운이 다시 얼굴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순식간에 허기가 일었다. 해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운이 다시 해일의 목을 감싸 안으며 아래를 문질렀다.
“……이러면 참기 힘들어요.”
“참지 마세요……. 읏.”
해일은 다급히 도운의 입술을 덮었다. 혀가 빠르게 안을 침범해 들어갔다. 델 만큼 뜨겁고 축축한 입 안이 다디달았다. 조금 전 마신 음료 때문인지 달콤한 딸기 맛이 났다. 이를 훑고 입천장을 문지르고 소심하게 뻗어오는 도운의 혀를 누르고 빨았다.
질척이는 소리와 가쁜 숨소리가 섞였다. 하아, 잠시 입을 뗀 해일이 도운의 엉덩이를 끌어당겨 몸을 완전히 밀착시키고는 여기저기를 손으로 쓸었다. 도운의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키스를 나눌 때 새는 비음 소리를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해일은 도운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허리에서부터 옆구리를 간질이며 올라와 엄지로 유두를 누르기도 하고, 움찔거리며 피하면 다시 등허리를 쓸며 내려갔다.
“흣…… 하아…….”
마침내 입술이 떨어지고, 두 사람의 시선은 허공에서 부딪쳤다.
“아무래도 지금 퇴근하는 게 좋겠는데.”
“…….”
“데이트는 다음으로 미룰까.”
서로의 눈동자 속에 이는 정염을 보았다. 도운은 시선에 붙잡히기라도 한 듯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동공의 떨림을 숨기지 못하고 울먹이던 그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 * *
둘만의 집은 넓고 아늑했으나, 달리 보면 폐쇄적이었다. 마당에서부터 담장이 높이 솟아 있어 어디서 뭘 해도 바깥에서 절대 볼 수 없었다. 이 집의 구조는 해일이 결정한 것이었다.
처음엔 조금 갑갑하게 느껴지진 않을까 하던 도운 또한 막상 살아보니 탁월하게 넓은 마당에 그런 기분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저 높은 담장이 아주, 아주 고마울 지경이었다.
“음, 으읏……!”
대문을 열고 마당에 난 돌길을 가로질러야만 현관이 나온다. 해일은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도운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도운은 제 힘으로 걷는 게 아니라 해일에 의해 현관문 쪽으로 몰아붙여지고 있었다. 아주 강한 힘이었다. 그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자 해일이 허리를 붙들어 안고는 그대로 멈춰 서서 다시 진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옷 위로 마구잡이로 긁어 내려지는 유두는 이미 부어오르다 못해 쓰라리기까지 했다.
“하아! 이, 이사님.”
도운은 해일의 어깨를 때리다시피 해 밀어내며 잠깐 그의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진정시킬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서 일을 치를 순 없었다. 도운이 숨을 고르며 애써 말했다.
“안에, 들어가서…… 들어가서 해요.”
그러자 그 말이 해일을 더 자극했는지 그의 눈이 이글이글 불탔다. 해일은 도운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도운이 놀라 해일의 허리에 다리를 감자 그대로 도운의 엉덩이를 받치고 집 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침대에 던져지다시피 한 도운은 바로 고개를 내밀어 키스를 청했다. 해일은 재킷을 벗어 바닥으로 던지고는 상체를 숙여 도운에게 입을 맞추었다. 도운 또한 손을 뻗어 해일의 넥타이를 풀어 내렸고, 해일은 도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전희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바지를 벗기던 해일은 도운의 속옷이 젖어 있는 걸 보곤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속옷까지 잡아 내리자 이미 발기해 곧게 선 성기 끄트머리가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눈이 벌게진 해일은 곧장 허벅지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성기를 입 안 깊숙이 담자 도운의 허리가 퍼뜩 튀었다.
“아아!”
도운의 것은 색도 모양도 좋았다. 연한 분홍색에 끄트머리는 달아올라 다홍색을 띠었고, 일자로 곧게 뻗은 모양이었다. 크기도 작지 않아 해일이 입에 완전히 담으면 그의 목을 찔렀다. 해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혀를 움직였다. 매끈한 표면을 물컹한 혀로 핥아 내리고, 귀두 밑 파인 부분을 이로 살살 긁으면 도운은 당장이라도 토정할 듯이 사지를 벌벌 떨어왔다.
해일은 사정하기 직전 입에서 성기를 빼냈다. 뒤로 가게 하는 것이 더 여운을 길게 느끼는 도운이었기에 어서 삽입해 안을 세게 찔러주고 싶었다. 그리고 해일 또한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도운의 안을 침범해 마구잡이로 휘저어 성감을 해소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도운의 몸을 살살 핥아 녹일 필요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더 아래로 숙여 도운의 엉덩이 사이로 혀를 대었다. 예상한 것만큼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도운이 다리를 마구 휘저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으응, 하지 마세요, 거기. 혀로 핥지, 읏……!”
엉덩이를 잡아 벌리며 얼굴을 묻자 도운은 부끄러웠는지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 덕에 비부 깊숙이 혀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앗, 아으응!”
물컹한 살점이 다물린 아래를 아이스크림처럼 핥았다. 혀뿐만이 아니라 해일의 손가락과 코까지 민감한 곳에 마구 문질러지는 기분에 도운은 울먹거렸다. 부끄러웠다. 특히 서서히 벌어지는 구멍 사이를 혀가 파고들어 간지럽힐 때면,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길게 이어진 애무 후 해일은 자신의 바지 벨트를 풀었다. 철컥하며 쇠 부딪치는 소리에 도운이 움찔 떨었다. 드로어즈 속 갇혀 있던 해일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고 도운은 차마 그곳에 시선을 두지 못하고 베개를 쥐며 고개를 돌렸다.
서랍에서 콘돔을 꺼내 성기에 씌운 해일은 손에 젤을 짜냈다. 손은 지체 없이 움직여 도운의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고, 단번에 두 개의 손가락이 구멍을 벌리고 들어갔다. 흐윽……. 도운의 입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흘렀다. 하지만 가장 예민한 부분을 바로 문질러주자 허리가 잘게 떨렸다.
“아, 아…….”
“괜찮아?”
“응, 으응.”
해일이 손목을 빠르게 움직여 안을 물렁물렁하게 풀어주었다. 도운은 눈시울을 붉히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못해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만 같았다.
손가락의 개수가 하나 더 늘어났다. 손가락의 가장 굵은 부분까지 밀어 넣자 구멍이 움찔 조여들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해일은 그 위로 젤을 더 짜냈다. 넘치도록 부은 뒤 다시 가까운 부분을 깔짝이다 깊게 헤집었다. 안으로 진입하면 할수록 비좁았다.
해일은 도운이 아파하는 것이 싫으면서도, 이 좁은 곳을 마구잡이로 뚫고 들어갈 때 느끼는 황홀함을 생각하면 뇌가 끓는 것만 같았다. 해일은 이를 악물며 애써 성감을 내리눌렀지만, 도운이 먼저 손을 뻗어 그의 배를 쓸어내리자 다시 불쑥 흥분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급하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해일은 도운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손가락을 잡아 빼냈다. 오금을 눌러 도운의 몸을 반 접자 절로 들어 올려진 엉덩이 위로 해일의 성기가 툭 맞닿아왔다. 엉덩잇살을 잡아 벌려 붉어진 구멍 위를 기둥으로 문질렀다. 도운은 뜨겁고 미끌거리는 느낌이 이상해 절로 우는 소리가 나왔다.
아직 진입하기엔 한참 좁아 보였지만 귀두를 꾹 눌렀다 떼기를 반복하니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흐응, 으, 아…….”
“힘 빼요.”
“하악…….”
해일은 허리를 잠시 물렀다가 다시 눌렀다. 즈즈즉, 전보다 조금 더 벌어지며 마침내 구멍이 해일의 귀두를 꾸역꾸역 삼켰고, 도운은 숨이 모자라는 기분에 고개를 꺾어가며 학학 밭은 숨을 내쉬었다. 아래에 주먹 하나가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다.
“힘, 빼…….”
“아…… 아아…….”
기둥이 안쪽을 뭉근하게 누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허리가 퍼억 처박혔다.
“……!”
순식간에 가장 깊은 곳까지 기둥이 진입했다. 도운은 신음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허리를 휘며 떨더니 툭, 투욱 정액을 뱉어냈다. 넣자마자 사정하고 만 것이다.
“하…….”
“으응! 아! 아아!”
그 모습을 본 해일은 더 참을 수 없었다. 도운의 허리를 붙잡은 채로 아래를 강하게 치받기 시작했다. 내벽이 강하게 조여와 해일의 성기로 들러붙는 듯했다. 성기가 안을 찌르고 빠져나갈 때마다 안쪽이 쓸려 올라갔다 밀려 나오는 감각이 선연했다.
“아, 이사님. 아읏, 으응! 응! 이사님……!”
도운은 해일의 힘에 의해 정신없이 흔들리며 정액을 흘렸다. 성기 끄트머리에서 꾸물꾸물 빠져나오는 흰 액체가 기둥을 타고 흘러 고환에까지 가 닿았다. 사정의 여운 때문인지 손끝 발끝까지 다 저릿저릿했다. 도운은 침대 시트를 구겨 쥐다가 또 베개를 움켜잡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흐으윽, 아, 아으응……! 으윽, 아……!”
해일은 도운의 배 위로 흩뿌려진 정액을 훑어 가슴에 묻혔다. 미끈미끈하게 젖은 유두를 두 손가락으로 꼬집고 잡아당기자 몸이 자지러졌다. 다리는 활짝 벌어져 양옆으로 널브러졌다. 해일이 쳐올릴 때마다 그에 맞춰 살결이 흔들릴 뿐이었다. 위로 밀려 올라가는 몸을 잡아 끌어내리며 아래를 퍽퍽 박아 넣자 젤이 녹아 흐르며 찌걱거리는 야한 소음을 냈다.
“아파요? 응?”
“아, 아니요. 흑, 아…….”
해일이 성기를 깊게 꽂아 넣은 채로 허리를 돌리자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며 안이 급격히 좁아졌다. 이만큼 박아 풀어주려 하는데도 도운의 안은 쉽사리 이완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벽이 부어오르며 해일의 것만 더 꽉꽉 물었다. 그는 더 이상 인내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응, 으……. 좋아.”
도운은 고인 눈물을 흘려보내며 중얼거렸다. 정말 좋았는지 안이 쩍쩍 들러붙었다.
“좋아요?”
“응, 좋아. 좋……! 하아! 형, 혀엉. 안에, 안…….”
굵은 기둥이 속절없이 배를 찔렀다. 도운은 더한 성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재차 해일이 힘을 빼라고 말해왔지만 불가능했다. 오히려 해일의 것을 더 선명히 느끼고 싶어 아래를 조였다.
힘이 빠졌던 도운의 성기는 다시 서서히 발기하고 있었다. 통통하게 달아오른 것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또 선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도운은 그에 부끄러워할 새도 없었다. 조임을 만끽하는 해일의 인상 쓴 얼굴만 보아도 또 사정할 것 같았다.
“아, ……으으…… 형. 세게. ……아! 더 세게, 윽.”
“하아. 세게 박아줘?”
“으응. 세게, 해주세요. 안……까지, 아, 아아……! 하악!”
세게 해달라는 말에 해일의 눈이 돌았다. 끓는점이 급격하게 낮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래에 힘을 실어 깊게 꾸우욱 눌렀다. 꽉 막혀 있던 안쪽이 츠으윽, 억지로 벌어지고 있었다.
도운이 발버둥 쳤다. 저도 모르게 상체를 모로 비틀어 피하려고 하자 해일은 그대로 도운의 몸을 완전히 돌려 엎어버렸다. 그리고 어깨를 내리눌러 고정하는 아래를 쾅쾅 처박았다.
“아윽, 아! 악, 아아…….”
“아…… 미치겠네.”
해일은 턱에 근육이 설 때까지 힘을 줘 이를 물었다.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는 허리를 억지로 붙잡아 세우며 그는 더없이 강한 힘으로 아래를 밀어붙였다.
도운은 아파서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배 안을 꽉 채우고 들어오는 성기가 무서워서, 그리고 전에 없는 흥분으로 온몸이 절절 끓는 몸에 겁이 나서였다. 장기를 밀어내는 것만 같다. 자칫하면 해일의 성기가 입으로 튀어나올 것도 같았다. 도운은 엇비슷한 토기를 느끼며 얼굴을 시트에 문질렀다.
해일은 가장 안쪽을 쾅 들이받고는 허리를 뒤로 주욱 잡아 뺐다. 귀두만 남겨놓은 상태에서 다시 철퍽 박았다. 도운이 발가락을 구부리며 파르르 떨 때, 또 성기를 꺼냈다. 귀두까지 모조리 빠져나왔다가 구멍이 다물어지기도 전 빠르게 안을 침범해 들어갔다.
퍼억, 때리듯 들어간 가장 깊은 점막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뜨겁고 미끌거리고 또 한껏 부어올라 해일의 기둥을 조였다. 빠져나가려고 하면 꽉 물어왔고 다시 진입하려 하면 막힌 곳을 억지로 뚫고 들어가는 기분에 해일도 눈앞이 흐려졌다. 도운의 몸을 마구 유린하는 느낌이었다.
“흐으아! 흐응……. 아윽. 읍.”
비명 같은 신음이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도운은 또 사정을 하고 있었고 정액으로 시트를 더럽게 물들였다.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추삽질에 도운이 앞으로 기어가자 해일이 허벅지를 붙잡아 뒤로 퍼억 잡아당겼다.
“아아! 아……!”
“하아…….”
해일도 그 순간 토정했다. 강한 조임에 성기가 꿈틀거리며 많은 양의 정액을 쏟아냈다. 고개를 젖히며 끝까지 사정하던 해일은 이상한 기분에 아래를 확인했다. 기둥을 조금 빼보니 콘돔이 찢어져 있었다. 그는 허리를 뒤로 완전히 물리며 성기를 모두 빼냈다. 도운은 마지막까지 해일의 것을 꽉 물고 놓아주질 않다가 츄웃 하는 민망한 소리와 함께 뱉어냈다.
눈물과 타액이 흘러 얼굴을 적시고 시트도 축축하게 젖었지만 닦을 정신이 없었다. 도운은 엉덩이만 쳐들고 바들바들 떨었다. 해일은 떨리고 있는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손 안에 꽉 차는 살이 말캉말캉해 다시 아랫도리로 피가 돌았다.
해일은 손가락 두 개를 구멍에 찔러 넣어 찢어진 콘돔의 잔해를 긁어 빼냈다. 도운의 배가 훅 조여들었다. 콘돔과 함께 덩어리 진 정액도 투둑 떨어졌다. 해일은 제 손에 묻은 정액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쪽 여기저기에 펴 바르듯 손을 움직이며 전립선 위를 자극했다.
버티다 못한 도운의 엉덩이가 아래로 꺼지자 해일이 상체를 붙여오며 도운에게 키스했다. 달래는 듯한 몸짓이었다.
“도운아. ……도운아.”
“흐윽…….”
“힘들어요?”
“아니, 좋은……데…… 느낌이 이상해서…….”
도운을 눈물범벅이 된 눈을 끔뻑거렸다. 해일이 대신 눈가를 닦아주자 칭얼거리듯 그의 목에 팔을 감아왔다.
“좋아요. 좋아요……. 더 해요.”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중에 정말 힘들 텐데요.”
해일이 경고했으나 도운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해일의 뺨에 입술을 비볐다. 해일의 턱을 따라 쪽쪽 정신없이 입을 맞추는가 싶더니 귓불을 빨며 ‘더 해요. 너무 좋아요.’ 하며 앓았다. 해일의 이성이 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 윽…….”
“아아……!”
해일은 도운을 다시 엎드리게 하며 아래를 파고들었다. 방금 사정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한계까지 발기해 몽둥이 같은 위용을 자랑하였다.
얼마 만에 콘돔 없이 생으로 넣는 것인지 모르겠다. 도운의 건강을 위해 될 수 있는 한 콘돔을 착용해 왔기에 내벽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점막이 고스란히 성기 위에 들러붙었다. 꼭 손으로 쥐기라도 하는 듯 강하게 감싸 안는 느낌에 해일도 허리를 떨었다.
끝까지 파고드는 건 한결 수월했다. 아래를 몇 번 툭툭 쳐올리니 절로 환영하듯 열렸다. 더 깊숙이, 도운이 자지러지는 배 가장 안쪽으로 점점 밀고 들어가니 짧게 끊어지는 숨이 터졌다. 마침내 안에 자리하고 나면 도운은 뱃가죽이 뚫려 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훌쩍거리며 배를 감싸 안았다.
“응, 아……. 하으…….”
거센 추삽질이 시작되자 색색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운은 감전된 사람처럼 간헐적으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자신의 신체임에도 제어할 능력을 상실했는지 자꾸만 몸이 옆으로 쓰러지려고 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너무 빨리 기운이 소진되었다. 도운은 팔에도 힘이 죄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때 해일이 상체를 숙여 자신의 몸을 안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도운은 제 얼굴 옆에 뻗어 있는 해일의 손을 간신히 잡았지만, 곧 힘이 풀어져 얹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들어오면 안 될 것 같은 곳까지 들어와서 그런 걸까, 명치 부근을 꽉 누르고 찌르는 강한 힘에 도운은 눈앞이 흐려지고 동공이 풀렸다. 크게 신음을 내지를 수도 없어 우는 것처럼 소리내기만 했다.
“이상해, 하으으……. 이상해요. 형. 이사님, 아. 너무, 좋아, 아…….”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남자가 이리도 좋다니. 아래가 영영 망가져도 좋을 것 같다. 도운은 본능적으로 해일과 눈을 어물어물 맞췄다. 그러자 해일이 키스해 왔다. 입술은 대지 않고 혀끼리 문질러 핥아 올리는 감각이 미치도록 짜릿했다.
배도 엉망이었다. 몸이 마비되어 느끼는 감각이라고는 오로지 성감뿐이었다. 점점 갈수록 배가 묵직해졌다. 성기가 들어차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이물감으로 묵직한 것과는 달랐다. 해일이 뱃가죽 위를 쓸고 누를 때마다 더 강한 충격감이 전신으로 떨어졌다.
“으응, 윽……. 아, 아!”
도운은 눈물을 쏟아내며 흔들렸다. 눈앞이 하얘졌다. 귓가에 울리는 살 부딪치는 적나라한 소리가 점점 아득해지는 듯하다. 해일의 움직임이 더더욱 빨라지자 그 알 수 없는 느낌은 심해졌다. 그의 두꺼운 귀두가 가장 느끼는 곳을 한 번 비끼지도 않고 찔러 올렸다. 다시 빠져나갈 땐 귀두의 튀어나온 부분이 내벽을 긁어내려 엉덩이가 엉망이 될 것만 같아 무서웠다.
“이사님, 잠깐. ……아! 잠깐만, 흐으응…….”
다시 앞으로 기듯 해일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점점 배뇨감과 비슷한 것이 차오르자 겁이 난 도운이 몸을 바르작댔다.
해일은 도운의 몸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아래는 깊숙이까지 박아 넣은 채로 야트막한 추삽질을 계속하며 도운을 자극했다. 도운이 울며 재차 놓아달라고 사정했지만 흥분한 해일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때, 도운의 성기에서 투명한 액이 분수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흐으윽…….”
도운은 허리에 힘을 세게 주며 액을 모조리 흘려보냈다. 이게 대체 뭐지……? 거칠게 몸이 흔들리던 와중에도 정체 모를 액을 바라보며 순식간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도운은 허벅지를 모았으나, 그런다 한들 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소변이구나. 정신없던 도운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급작스럽게 울음이 터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눈치를 못 채고 있던 해일은 도운이 훌쩍이며 우는 소리가 커지자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도운 씨.”
“흑, 으윽……. 윽…….”
“도운아. 도운아, 고개 들어봐.”
무릎 꿇은 자세로 상체까지 푹 숙이고 있으니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해일은 엉덩이를 벌리고 성기를 끄집어냈다. 츠으윽, 귀두가 예민한 점막을 긁으며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성기에선 계속 물이 흘러나왔다. 아으으, 도운은 전신을 짧게 떨었다. 소변을 보고 난 뒤 하는 행동과 비슷해 더 절망적이었다.
“……오, 오줌…….”
도운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이불에 막혀 있어 잘 들리지 않았다. 해일은 다시 도운을 달래듯 어깨를 쓸더니 조금 힘을 주어 억지로 몸을 돌렸다.
“…….”
이불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정액을 싸서 젖었다기엔 범위가 이상할 만큼 넓었다. 해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지자 도운이 몸을 일으켜 그 위를 가리듯 앉았다. 이불을 끌어 모으며 덮었다.
“웃, 으읏……. 죄송해요.”
“도운아.”
“죄송해요, 흐윽. 갑자기, 갑자기 나와서……. 후읏, 저도 모르게.”
도운은 주먹을 꼭 쥔 채로 허벅지에 올려두고는 고개를 숙이고 파들파들 떨었다.
“오줌이 나와서……. 우웃, 실례를……. 몸이 이상했, 는데…….”
우느라 말이 더듬더듬 끊어졌다. 오줌, 실례라고 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도운의 주먹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해일이 아차 싶었다. 도운은 이 액체의 정체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듯했다. 오줌이라고 생각을 해서 이리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이었다.
“도운아. 울지 말고. 응? 나 봐.”
“흣, 죄송해요. 제가…… 제가 빨게요…….”
잘못을 고하던 와중에도 뒤에서 해일의 정액이 흐르는 것 같아 자꾸만 잘게 몸이 떨렸다. 도운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해일은 시각적으로 너무 큰 자극을 받고 있었다. 흥분해 정액이 아닌 전립선액을 마구 싸대더니, 오줌이라며 울고. 심지어 다 젖은 이불 위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는 꼴이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정말 실례를 한 것처럼 보였다.
“이거 소변 아닙니다.”
“네……?”
그새 붕어처럼 부은 눈으로 도운이 해일을 올려다보았다. 해일은 귀여움을 참지 못하고 도운의 뺨에 여러 차례 뽀뽀하며 자연스레 그를 다시 눕혔다. 손은 절로 도운의 아랫도리로 향했다. 축축하게 젖어 손이 닿자마자 움찔거렸다. 성기에서 또 주륵, 미처 나오지 못한 액이 마저 흘렀다.
“기분 좋으면 나오는 겁니다. 소변이 아니라.”
“……그런 게 있어요……?”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서 나오는 건 정액이나 오줌 둘 중 하나였는데, 해일이 자신을 달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해일의 표정은 단호하고 또 다정했다. 절대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도운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다시 입을 맞췄다.
“정말 아니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설령 소변이라 하더라도 귀엽기 그지없을 것이다. 해일이 재차 도운을 설득하자 표정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야 좀 믿는 듯했다. 해일은 도운의 아랫입술을 쭉쭉 빨며 씩 웃었다.
“그럼, 이사님은…….”
어깨를 쓸어내린 해일이 도운의 유두를 괴롭히려고 할 때 도운이 말했다.
“이사님은…… 왜 안 하세요? 이거…….”
“뭐?”
“이사님은 기분 안 좋으세요……?”
해일이 말을 잇지 못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사님도…… 빨리 이거…….”
그리고 도운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손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리키고, 내리깔았던 눈을 올리며 해일에게 말했다.
“이거…… 이사님도 빨리하세요…….”
해일은 아찔한 광경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참지 못하고 거친 손길로 도운의 다리를 확 잡아 벌렸다. 아윽! 강한 힘에 통증이 느껴져 도운이 이를 악물었으나 해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숨소리가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도운의 아래를 파고들 준비를 하며 그가 웃었다.
“나도 싸라고, 응?”
“아윽, 으……!”
구멍 위를 배회하던 귀두가 꾹 눌렸다.
“배부를 때까지 싸줄게.”
“으으응!”
“넘치도록…….”
성기가 도운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삽입되었다.
“아악, 아! 아!”
팽팽해진 구멍이 두툼한 기둥을 전부 먹어치웠다. 도운은 쇠꼬챙이에 끼워지기라도 한 듯 몸을 휘며 퍼뜩거렸다.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공포스러울 정도로 거셌다. 퍽, 퍼억, 철썩! 해일은 봐줄 생각이 없는지 속도를 늦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아, 여기…… 뚫고 들어갈 때마다, 싸고 있어. 보여?”
안쪽에 깊이 처박을 때마다 계속해서 물이 흘러나왔다. 아래에 힘을 주어 멈추려고 해봐도 쉽지 않았다. 오히려 뒤가 조여 흥분한 해일이 개처럼 허리를 붙여오며 도운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윽, 흐아, 아아응. 형. 형……!”
도운의 얼굴이 쾌감으로 일그러졌다. 온몸이 땀과 눈물, 그리고 희뿌연 액체로 젖어들었다. 힘이 죄 빠진 몸이 덜컥덜컥 흔들렸고, 눈동자는 초점이 흐려져 해일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해일은 그런 도운의 몸을 부술 듯 센 힘으로 끌어안았다. 젖은 몸에서 단내가 나는 듯했다.
도운은 해일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었다. 해일이 또 어느 부분에서 핀트가 나간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쩐지 조금 억울했지만 토로하기도 전에 그는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 * *
해일이 양치질하는 도운의 이마를 재차 손바닥으로 감쌌다. 손이 커 눈가까지 다 가릴 정도이기에 도운은 으응, 소리를 내며 손을 치워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해일은 자신의 이마에도 손을 대보고, 도운의 목덜미도 쓸어가며 체온을 확인했다. 도운에게 확실히 열이 나고 있었다.
세수와 양치질을 마친 도운을 끌고 안방 침대에 앉혔다. 해일은 기어코 체온계를 들고 와 열을 쟀다.
“이거 봐요. 열이 심해졌잖아.”
해일의 표정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38.1도, 사실 도운이 느끼기로는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다.
“이건 어제, 그……거를 너무 오래 해서 그런 거잖아요.”
도운은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열감이 올랐던 나머지 정신이 깜빡깜빡 나갈 정도였다. 도운은 체액으로 시트를 푹 적시고도 모자라, 해일이 이끄는 대로 그의 허벅지 위에서 흔들리다가 방바닥에까지 무언가를 쏟아냈다. 무아지경으로 흥분했던 것이 얼핏 기억났다.
그래서인지 해일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부끄러워 자꾸 시선이 땅으로 향했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운의 체온을 재차 확인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높은 체온에 해일은 구겨진 얼굴을 펼 줄을 몰랐다. 그러지 않아도 도운은 최근 계속 미열이 있었다.
“오늘 병가 처리하고 집에서 쉬어요.”
“정말 괜찮은데…….”
“내 말 들어요. 괜히 병 더 키우지 말고. 오늘부터 주말까지 이어 쉬면서 회복합시다.”
해일이 도운의 뺨을 감싸며 말했다. 그 또한 어젯밤 저지른 제 잘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분명 도운의 한계를 넘었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 끝의 끝으로 한없이 몰아붙였다. 당시엔 정말 참을 수 없었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많이 과했다. 다음 날 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질 정도였으니.
“심하면 의사 부를게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집에서 그냥 쉴게요. 푹 자면…… 나아질 것 같아요.”
“목도 다 가라앉고…….”
지난밤에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단 탓이다. 도운은 괜히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해일이 약과 함께 가져다준 따뜻한 물을 마시며 갈라진 성대를 진정시켰다.
해일은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계속 도운을 확인했다. 병가를 내고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는 도운에게 어서 누우라 이르고, 이불을 끌어당겨 꼼꼼히 덮어준 뒤 뜨거운 이마 위로 찬 얼음주머니를 올려주었다.
“하필 오늘 빠질 수 없는 일이 있어서.”
“괜찮아요. 천천히 일 보고 오세요.”
“저녁까지 일이 있어서 좀 늦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 전화하고. 가사도우미한테 내가 퇴근할 때까지 있으라고 하겠습니다.”
“집에서 쉬기만 할 건데요, 뭐.”
해일은 이불을 꾹 쥐느라 밖에 나온 손가락까지 안으로 집어 넣어주며 도운의 몸을 이불로 꽁꽁 싸맸다. 분홍색으로 물든 뺨 위로 짧게 뽀뽀한 뒤 말했다.
“점심때쯤 들를 수 있으면 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도운은 다시 손을 빼꼼 내밀어 흔들어주고는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해일은 다시 상체를 숙여 도운에게 입을 맞추고는 한참 만에 몸을 움직였다. 침실 불을 꺼주고, 조용히 문을 닫으며 해일은 마지막까지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애써 거두며 집을 나섰다.
해일이 출근한 뒤, 도운은 어느새 색색 잠이 들었다. 전날 몸이 혹사당하기도 했고, 아침을 먹은 뒤 몸살감기약과 해열제까지 챙겨 먹으니 절로 잠이 온 것이다. 무거워진 몸과 함께 한참을 잠에서 허우적대느라 점심때가 다 지날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몇 시인지 가늠조차 안 되는 오후, 도운은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어났다.
“음…….”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킨 그는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당겨가며 스트레칭하고는 협탁 위 시계를 확인했다. 4시가 훌쩍 넘은 때였다. 9시가 되기 전에 잠들었는데 벌써 4시가 넘었다고? 몽롱하던 정신이 단번에 깨어지는 것 같았다.
도운은 슬리퍼를 끼워 신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푹 자고 일어난 덕분에 아침보다 훨씬 몸이 가벼웠다. 테이블에 놓인 물도 한 잔 마시자 거칠었던 목 상태도 좀 나아지는 듯하다.
그는 해일이 두고 간 체온계로 열을 쟀다. 다행히도 정상적인 수치였다. 도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해일이 과한 걱정을 한 것이다.
해일에게 몸 상태를 알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핸드폰을 찾았다. 혹여 바쁜 일이 있는데 자신 때문에 미루고 오면 미안할 것 같아서.
“아. 그리고…… 사장님이…….”
그런데 그때, 밖에서 어렴풋이 말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주머니가 TV를 보시나? 도운은 별다른 생각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어…….”
도운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서재혁이었다.
도운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몸이 문고리를 잡은 채로 그대로 굳어졌다. 서재혁이 왜 여기에……?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황이라 순간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아니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거나.
하지만 서재혁 또한 도운 못지않게 놀란 표정이었다. 왜 도운이 여기서 나오느냐는 듯 어리둥절한 눈빛이 고스란히 읽혔다. 그것도 양복 차림이 아닌 잠옷 차림으로. 누가 보아도 자다 일어난 사람의 행색을 하고.
“아이고. 회사에서 나오셨대요.”
주방에서 무언가 일을 하고 있던 가사도우미가 도운을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둘 가까이 다가왔다.
“들어가 계세요. 그쪽은 뭐 필요하다고 하셨죠?”
“아, 네, 저…… 저는…….”
서재혁이 더듬거리다 간신히 도운에게서 시선을 떼고 말했다.
“사장님이 서재에 두고 가신 서류…….”
“서재? 잠시만 기다려요.”
가사도우미가 자리를 뜨자 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도운이 한 발짝 뒤로 숨듯 물러서며 부스스한 제 머리를 쓰다듬자, 애써 도우미가 떠난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서재혁이 그제야 머쓱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저는, 사장님 심부름 때문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도운과 재혁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던 때, 가사도우미가 안쪽 서재에서 갈색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이거 맞아요?”
재혁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를 건네받은 그는 곧장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이만 가보겠노라고 말했다.
“…….”
빠르게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서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운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깊은 한숨이 끊어지며 흘러나왔다. 눈동자가 시선 둘 곳을 모르고 이리저리 헤매는가 싶더니 이내 꾹 감아버렸고, 손끝까지 힘이 들어가 주먹이 쥐어졌다.
“작은 사장님, 지금 막 죽이…….”
“저…… 입맛이 없어서……. 죄송해요.”
점심도 거르지 않았느냐고 걱정스레 물어오는 그에게 도운은 그저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지금 퇴근하셔도 돼요.”
“오늘 8시까지는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괜찮아요, 들어가 보세요.”
그러고는 따로 배웅해 드리지는 못할 것 같다고 말하고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감싸며 방으로 비척비척 걸어 들어왔다.
“…….”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다. 도운은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그만 얼굴을 가려버렸다. 꼴사나운 표정일 것 같아 거울을 보기도 겁이 났다. 한참을 허공만 바라보며 앉아 있던 도운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하나였다.
왜 서재혁이?
자고 일어나 머리가 개운하던 도운은 다시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 잠옷을 펄럭거렸지만 답답한 무언가가 해소되지 않아 더 찝찝하기만 했다.
김 실장님도 한 번도 집에 온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비서로 일할 때도 일과 관련한 것으로 해일의 집에 가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되는 서재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도운은 애써 부정하고 눌렀던 마음에 불씨가 당겨지는 듯했다. 정말…… 이사님이 그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
“서류 정도는 날 시켜도 되잖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서류 하나 배달해 주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집에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한 자신을 이용하면 될 일이지. 굳이 타인에게 시켰어야 했을까. 그것도 서재혁에게. 아무리 그가 비서여도…… 둘이 사는 집에까지 보내 서류를 가져오라고 해야 했을까.
기분이 상했다. 도운은 도무지 해일이 자신을 무어라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도운에게 곤란한 일이 생길 땐 말하지 않아도 해일이 알아서 먼저 도와주고 해결해 주면서, 그리고 그걸 애인의 역할이라고 말하면서. 왜 그는 자신의 도움을 받지 않을까. 이런 사소한 일에서조차도.
전에도 도운이 몇 번이나 돕고 싶다고 말했는데, 해일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휴…….”
해일에게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한땐 그런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니라고 재차 일깨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그 쓸모 있는 사람 자리는 서재혁이 차지하고 있는 듯하고, 그 사실이 도운을 한없이 작게 만들고 있었다.
도운은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해일에게선 문자 하나가 간략하게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일어나면 연락해요.]
“…….”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전화하면 꼴사나운 목소리가 흐느낌과 함께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해일을 곤란하게 만들고 나면 또 죄책감에 한동안 고개를 들기가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런 자신에게 해일이 질리기라도 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맺혀 있었다. 도운은 손등으로 쓱 문질러 채 흐르기도 전에 닦아버렸다. 이 갑갑한 마음을 어디에 풀 수도 없구나. 착잡해졌다.
그때, 도운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