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해일은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화면을 어둡게 껐다가, 다시 켜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알람이 뜨는지 재차 확인했으나 역시 알람은 오지 않았다.
도운에게 일어나면 연락하라고 문자를 보내두었는데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그는 조용히 시계를 확인했다. 5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아침에 곧장 잠들지 않고 조금 늦게 잤나, 아니면 깼다가 다시 잠들었나. 해일은 도운의 행동을 추측하기에 바빴다.
역시 점심때 집에 들렀어야 했는데. 해일은 제 선택을 후회했다. 자고 있다는 가사도우미의 말에 가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연락이 안 될 줄은 몰랐다. 불안했다.
“다녀왔습니다, 사장님.”
“수고했어요.”
회의실 문이 열리며 서재혁이 등장했다. 그는 조금 급히 올라왔는지 숨을 몰아쉬며 해일에게 서류 봉투를 건넸다. 아침에 도운을 챙기는 데 급급해 서재에 빼놓고 온 서류였다.
“죽은 잘 전해줬습니까.”
“아…… 네. 아주머니께 전해드렸습니다.”
점심에 가보지 못한 게 신경 쓰였던 해일은 도운을 위한 특제 영양죽을 호텔 주방장에게 준비하라 일렀다. 그리고 재혁에게 서류를 가져오는 김에 죽 전달도 함께 부탁했다.
가사도우미에게 잘 전해주고 왔다니 다행이었지만 도운이 먹지 않으면 도루묵이었다. 해일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감돌았다. 손끝으로 책상을 툭툭 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밖으로 나갔다.
재혁은 그런 해일의 눈치를 보며 쭈뼛대다가 자신의 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해일이 회의실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 눈으로 좇다가 박 대리가 부르는 소리에 움찔 몸을 떨었다.
“왜 그렇게 넋 놓고 있어요.”
“아…… 저…… 그…….”
“……?”
“……아닙니다, 아무것도.”
재혁은 제 볼 위를 착착 때리고 난 뒤 다시 노트북을 펼쳤다.
잠시 나온 해일은 가장 먼저 도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긴 연결음만 들려올 뿐 끝내 받지는 않았다. 역시 아직 잠들어 있는 것인가.
해일은 잠시 생각하다가 가사도우미에게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오래 걸리지 않고 전화가 연결되었다. 수화기로 넘어오는 소음이 제법 커 실내가 아닌 실외 같았다. 장이라도 보러 나가는 것인가 싶어 물어보자, 돌아오는 대답은 퇴근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작은 사장님이 계속 이만 퇴근하라고 하셔서요. 제가 거기 버티고 있을 수가 없어서…….
해일이 이마를 짚었다. 그랬다면 바로 자신에게 연락을 줄 수도 있던 것 아닌가 싶어 한마디 하려다, 이미 퇴근하고 있는 사람에게 뭐라 해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그럼 깨어 있다는 소린데. 전화를 안 받아서요. 혹시 낮에 오래 못 잤습니까?”
―아뇨, 출근했을 때부터 쭉 잠들어 계셨는데요. 오후 나절 다 되어서야 일어나시고는…….
“별다른 말은 없었고요?”
―입맛이 없으셔서 뭘 못 드시겠다고요. 아, 회사에서 오신 분이랑 마주치긴 했는데.
이런. 해일이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쩌다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재혁에게 주의를 줄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해일은 알겠다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도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설마 재혁과 마주친 일 때문에 전화를 안 받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마주쳐 문제가 될 것 같았으면 불안한 마음에서라도 바로 자신에게 연락했을 텐데.
해일은 연락이 닿지 않는 원인을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급한 대로 도운에게 일어났느냐고, 왜 연락이 안 되냐고 문자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다시 회의실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에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 이만 정리합시다.”
그는 십여 분 정도 초조한 마음으로 앉아 있다가 결국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이런 기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팀원들이 당황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해일 또한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해일은 급히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그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서도운 씨.”
그의 이름을 부르며 온 구석구석을 다 살폈다. 2층과 다락, 창고와 뒤뜰까지. 하지만 도운은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았다.
전에 도운이 집을 나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과 똑같았다. 도운은 집 밖으로 나간 것이다. 해일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몸도 좋지 못한 사람이 대체 어딜 나간 걸까. 나갈 일이 뭐가 있을까. 그는 미간이 파일 정도로 인상을 썼다.
편히 생각해 보자면 잠깐 근처 편의점에 간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약이 떨어져 약국에 갔다거나. 그렇다면 곧 연락을 확인하거나 집에 돌아오지 않을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해일은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에 이성적으로 굴기 어려웠다.
“대체 왜 전화를…….”
나중에 도운이 부재중 목록을 보면 놀랄 정도로 전화를 걸어대고 있었다. 또 받을 수 없다는 음성이 흘러나오자 해일은 다시 전화를 걸며 거칠게 욕을 뱉었다. 전화를 안 받을 이유가 없었다. 아파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던 사람이 갑자기 밖에 나가 연락이 안 된다니. 나가서 쓰러지기라도 한 게 아닌 이상…….
“…….”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해일은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집 밖으로 나왔다. 정말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과거에도 도운이 실신해 응급실로 실려 가지 않았던가.
당장이라도 사람을 풀어야 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도운을 찾고, 혹여 병원에 이송되진 않았는지 주변 큰 병원에 모두 연락을 넣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해일이 차 키를 꺼내며 막 차에 다다랐을 때였다.
―여보세요?
계속 시도하던 통화가 드디어 연결되었다.
“……누구십니까.”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도운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해일의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아, 저, 도운이가 많이 취해서 제가 대신 받았거든요?
취해? 예상치도 못한 문장이 들려와 해일이 잠시 멈칫했다. 취하다니. 해일의 손목시계는 이제 7시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이런 이른 시간에 전화를 못 받을 정도로 취하다니? 표정이 굳어졌다.
―호옥시 같이 산다던 그 형님이신가? 저는 도운이 대학원 동기인데요.
전화를 받는 사람도 온전한 맨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늘어지는 말투가 이미 거나하게 술판을 벌인 상태인 듯 듯했다. 거기에 도운이 무슨 영문에서인지 급작스럽게 끼게 된 것이고.
“거기 어딥니까.”
맥이 다 빠졌다. 혹시 몸에 무슨 문제가 생겼을까 걱정으로 심장까지 차갑게 식던 해일은 도운이 고작 술에 취해 있다는 것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몰랐다.
* * *
성민은 대학원 사람들과 함께 저녁이나 먹으려는 생각에 도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근 도운의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거절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웬걸. 도운이 흔쾌히 허락했다. 한 시간 뒤에 만나자는 성민의 말에도 자신은 벌써 집 밖으로 나왔다며 약속 시간을 당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결성된 모임은 시작부터 술이었다. 오랜만에 원년 멤버 모임이라며 신나 하던 사람들은 고기가 채 익기도 전에 빈속으로 소주부터 밀어 넣었다. 도운도 군말 없이 술부터 들이켰다.
무리 중 가장 빨리 취한 도운은 결국 식사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나자빠졌다. 구석 자리에서 식탁에 엎드린 채 잠을 자는 도운을 성민이 흔들었다.
“야, 서도운. 내가 전화 대신 받았다. 어?”
톡톡 건드려보기도 했지만 도운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성민은 본인도 취해 있었기에 도운을 그냥 두기로 했다. 꺼냈던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주고는 다시 동기들과 마셔라, 부어라 술을 나눠 마시기 시작했다.
“전화 온 건 누구래요?”
“아, 도운이가 같이 산다는 형인 것 같아요. 데리러 오시려나 봐요.”
“와, 잘됐다. 저 꽐라 어떻게 처리하나 했는데,”
“다들 오늘따라 너무 달렸어, 처음부터. 나도 좀 후달린다.”
“나약한 소리 말죠. 불금을 이렇게 보낼쏘냐.”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며 계속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20분이나 흘렀을까.
“서도운.”
날렵하게 올린 머리, 쓰리피스의 정장 위로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짙은 인상의 남자가 등장해 도운을 불렀다. 이 낡고 허름한 고깃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는 잘생긴 얼굴을 구기며 성민의 무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해일은 뒤통수만 보고도 도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구석에 엎드려 누워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곧장 어깨를 부드럽게 쥐며 살살 흔들었다.
“도운아, 서도운.”
무서운 표정과는 대비되는 부드러운 말투로 도운을 깨웠다. 이목을 끄는 외형이라 그런지, 그런 그를 가게 안 손님들이 모두 흘긋거리고 있었다.
“아 그, 같이 사신다는 형님?”
성민이 소주가 조금 흐른 턱을 손등으로 훔쳐 닦으며 벌떡 일어났다. 전화를 끊은 지 몇 분이나 됐더라. 생각보다 빨리 나타난 그에게 성민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해일은 아무리 빨라도 3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미친 듯이 밟으며 서둘렀다. 취해 있다는 도운을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데려가기 위한 집념이었다.
손길이 이끄는 대로 몸을 팔랑이던 도운이 길게 신음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주 느리게 눈꺼풀을 끔뻑거리는가 싶더니,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는지 활짝 웃으며 먼저 품으로 파고들었다.
“형…….”
하지만 얼마 못 가 다시 힘이 빠졌는지 몸이 축 늘어졌다. 해일은 도운을 품으로 받치며 한숨을 쉬었다. 화를 눌러 참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테이블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하하, 저…… 어쩌다 보니까 많이 취해서…….”
어딘가 모르게 가라앉은 듯한 공기에 성민이 다시 먼저 말을 걸었지만, 해일은 아무런 답 없이 짧게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지갑에서 현금을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대학원 일행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파악할 새도 없이 해일은 도운의 짐을 챙겨 들었고, 도운의 몸까지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와, 저 사람 뭐야……? 배우인 줄 알았네.”
머쓱하게 다시 자리에 앉은 성민이 뒷덜미를 벅벅 긁었다. 저렇게 무서운 사람이랑 어떻게 사냐. 중얼거렸으나 듣는 이는 없었다. 취한 사람들은 신이 나서 더 술을 시키기 시작했고, 성민 또한 곧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조금 전 일어난 일은 금세 잊어버렸다.
* * *
“어디…… 어디 가는 길이에요……?”
해일은 조수석에서 도운이 사부작거리는 소리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잠이 든 건지 조용했다. 소음이 적은 차체여서 그런지 도운이 색색 내뱉는 숨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해일은 어떻게 운전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어지러운 마음을 하고는 집에 도착했다. 속도를 내 빠르게 문 앞에 차를 세우고 나서는 한쪽 어깨에 도운을 둘러업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으응…….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완전한 문장은 아니었다.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가 되어서야 잠에서 깬 건지 도운이 팔다리를 흔들어가며 몸부림쳤다.
“제에가…… 걸을 수 있어요…….”
해일이 중간에 도운을 내려놓자 혼자 벽을 짚고 비틀비틀 걸어가는가 싶더니 침대 위에 풀썩 엎어졌다.
“다 왔다…….”
이불에 고개를 폭 파묻은 도운이 다 왔다, 편하다, 졸립다, 하며 조잘거리는 목소리에 해일의 굳어진 표정이 슬그머니 풀어지고 말았다. 도운은 또 금세 잠든 건지 조용해졌다.
여태껏 이렇게 취한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도운은 과히 취한 상태였다. 온몸에서 술 냄새가 났고,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아무리 깨워도 계속 잠들려고만 하고.
“…….”
해일은 도운의 원인 모를 돌발행동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으며, 화까지 났다. 심장은 차갑게 굳어가는 데 반해 머리는 두통이 일 정도로 열이 끓었다.
얼마나 마신 것일까. 그리고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가 술자리에 참여한 것인가. 기다리는 해일에겐 한마디 말도 없이, 그것도 아프다는 사람이 말이다.
혹여 아파 쓰러졌을까 걱정한 시간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해일은 침대 끝에 걸터앉고는 도운의 얼굴을 쓸었다. 솜털이 난 보들보들한 얼굴이 열로 뜨끈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있던 열인지 알 턱이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이 오가는 것을 보곤 해일이 한숨을 쉬며 입술을 눌렀다.
대체 왜. 왜 날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들어.
해일은 도운이 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한숨을 쉬며 다가가 도운의 신발부터 차근히 벗겨 내려놓았다. 그때 도운이 몸을 뒤집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엎드려 해일의 손길을 받고 있던 도운이 어느새 잠에서 설핏 깬 것이다. 잠에서 깨긴 했지만 여전히 눈을 뜨진 못했다. 잠과 현실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이사님.”
“…….”
“이…… 이사님. ……형.”
“……네.”
“……형…….”
기다란 속눈썹이 움찔거리며 떨리는가 싶더니, 사르르 눈꺼풀이 올라가 까만 눈동자를 드러냈다. 눈은 금세 감겼다가 다시 힘겹게 떠졌다.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이었다. 몽롱하게 풀린 눈은 쌍꺼풀이 더 짙어져 있었고, 고작 한 어절짜리 단어를 말하는데도 발음이 어눌하게 풀렸다.
“형. 혀엉?”
“하아. 일단 자.”
해일은 세수하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취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도운이 자는 동안, 해일 자신 또한 차오른 화를 좀 가라앉히며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걸터앉았던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도운이 팔을 뻗어 해일의 손을 붙잡아왔다.
“형, 왜…….”
“……자요. 술 깨면 내일 얘기합시다.”
“왜 화내요……?”
도운에게 해일의 말이 들리는 건지 안 들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
“술 깨면 얘기하자니까.”
“나 쓸모, ……없어요?”
“…….”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 해일이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도운이 끙끙거리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멀쩡히 버틸 힘은 없었는지 크게 휘청거리더니 해일의 팔뚝에 이마를 툭 기댔다.
“화내지 마요…….”
“내가 지금 화를 안 내게 생겼습니까.”
“나 일 못 해요? 못생겼어……. 쓸모없어……?”
도운에겐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지는 버릇이 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해일에겐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와 부정확한 발음으로 무어라 계속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해일은 갑갑하기만 했다.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지금 이 상황이 그러했다. 도운이 대체 왜 술을 마시러 나갔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의 근본적인 갈증은 해소되질 않았다.
“형…….”
“…….”
천천히 고개를 든 도운이 해일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눈을 감으며 먼저 입을 맞췄다.
단순히 입술을 비비는 수준의 키스가 아니었다. 도운이 혀를 내어 해일의 입술을 핥고, 이로 살살 물어가며 자극하는 키스였다.
츠읏. 츠으읏. 느릿한 마찰음이 길도록 이어졌다. 해일은 손바닥에 손톱이 박힐 때까지 주먹을 쥐어가며 알 수 없는 감정을 억눌렀다.
도운은 매달리듯 해일에게 고개를 내밀고 혀를 뾰족하게 세웠다. 키스를 하는 모습이 꼭, 나뭇잎에 매달린 이슬을 받아먹으려고 하는 사람 같았다.
해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
한 손으로 도운의 아래턱을 감싸듯 쥐어 손끝으로 양 볼을 눌렀다. 그렇게 열린 입 안으로 해일의 혀가 깊게 파고들었다.
“흐으…….”
입천장을 문지르고, 치열을 거칠게 훑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과격하던 움직임도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해일은 결국 도운의 두 뺨을 감싸고 바닷물이 잔잔하게 밀려오듯 고개를 움직이며 입술을 물고 혀를 감쌌다. 인상을 쓰고 있던 미간도 어느새 풀어져 눈썹이 팔자로 휘어져 있었다.
한참 만에 떨어진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는 타액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도운은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리며 해일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해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운의 속내를 알기 위해서라도 더욱 도운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곧 도운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상체도 한 번 휘청이며 다시 해일에게로 안겨들었다. 잠이 든 것이었다. 해일은 크게 한숨을 쉬며 도운을 바로 눕혔다. 불편하지 않도록 옷을 벗겨주고, 또 편한 옷으로 갈아입혔다.
이마를 덮고 있는 그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해일은 많은 것을 눌러 참았다.
당장이라도 도운을 깨워 그가 제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키다 못해 미치게 만들어놓고는, 다른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으로 취하다니. 도운이 취해 잠에 빠졌든 아니든 당장이라도 이 뜨거운 몸속을 파고들어 제 씨를 뿌리고 누구에게든 각인시키고 싶었다.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라고. 자신의 집착이 일반적이지 못하다고.
그는 도운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며 침실을 벗어났다. 본능으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그게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 * *
다음 날 아침이었다.
도운은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 절로 잠에서 깨어났다. 눈꺼풀이 무거웠던 그는 눈가를 문지르며 모로 돌아눕다가,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에 얼굴을 구겼다.
“으…….”
마치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도운은 얼굴을 감싸며 작게 신음했다. 속도 쓰리고, 목도 말랐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웅크리던 그는 어느 순간.
“헉…….”
이 통증이 숙취라는 것을 깨닫고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제…… 어떻게 왔지?’
도운은 머리를 감싸며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써보았다. 하지만 온전한 기억은 술을 마시기 직전까지의 일뿐. 그 이후는 모두 꿈처럼 불확실했다.
우선 자신의 상태를 보니 멀쩡히 집에 들어와 잠옷까지 입고 있었다. 기억이 온전하지 못할 정도로 취했으면서 이 상태로 아침에 일어났다는 건 분명…….
“깼습니까.”
침실 문이 열리며 해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네…….”
도운은 차마 해일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흐릿하던 기억들이 조각조각 짜 맞춰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도운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게, 해일이 술자리로 자신을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자신은 계속해서,
‘나 쓸모없어?’
술주정하고…….
도운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쓸어내렸다. 무릎을 세워 그 위로 두꺼운 낯짝을 완전히 묻어버리자, 해일의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서도운 씨.”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도운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도운의 머리를 한 번에 다 감싸고는, 결을 따라 부드럽게 빗듯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따뜻하고 다정했다.
“머리 아파요? 속은?”
해일의 목소리 또한 그러했다. 어젯밤 자신이 부린 추태에도 몸 상태부터 물어오는 그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계속 고개를 파묻고 있을 수도 없던 도운이 소심하게 얼굴을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숙취 해소제랑 해장국 준비했으니까 들어요.”
“…….”
“도운아.”
“죄송해요.”
도운은 불편한 마음을 안고 멀쩡히 식사할 자신이 없었다. 어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한 해일을 보니 더더욱.
어제 일은 충동적이었다. 도운 또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이 앞서 행동한. ……생각이 뒤엉켰던 것 같다. 재혁의 일로 계속 답답한 감정이 누적되어 오고 있었고, 와중에 해일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니 내심 그에 대한 불만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다 설명하기에는 도운은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감정을 타인에게 설득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럴 거면, 어제처럼 그런 반항적인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바보 같다. 이래서 도운은 아직 스스로가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다. 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어제 전화는 왜 안 받은 거예요.”
“…….”
“지금까지 그렇게 취한 적도 없었잖습니까.”
“…….”
“몸도 아픈 사람이 전화도 안 받지. 집에도 없고. 난 네가 어디 길바닥에서 쓰러지기라도 한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내 연락 무시하고 나가서 한 게 술 마시는 거였어? 인사불성으로 취하기까지 해요?”
“죄송해요…….”
“사과하라는 거 아닙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말해요. 나도 널 이해하고 싶으니까.”
해일이 답답하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는 도운을 이해하고 싶다고 말했다. 도운은 가슴속 응어리가 울컥거리며 목 바깥으로 뛰쳐나갈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친구가 불러내서…….”
“또 거짓말이지.”
해일이 표정을 굳히며 단호히 말하자 도운의 얼굴이 흐려졌다. 역시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안 나는 게 이상하다. 그걸 부추긴 건 자신이면서 이제 와서 뭘 후회하고 겁을 내고 있는지. 한심했다.
도운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해일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저리 울상을 짓는 연인을 더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 해일은 한숨을 쉬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술을 마셔 숙취도 심하고 정신도 없을 것 같은데.
“화 많이 나셨죠. ……죄송해요.”
“화 안 나게 생겼나 봐.”
“…….”
“그래도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군요.”
눈 뜬 지 몇 분 되지도 않은 사람을 붙들고 추궁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해일은 한발 물러섰다. 도운에게 밥부터 먹일 심산이었다.
“우선은…….”
그런데 그때, 주머니에서 해일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해일의 말이 뚝 끊겼다. 그는 눈을 깊게 눌러 감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해일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놀라는 기색도 보이는가 싶더니, 흉부가 크게 부풀었다 꺼질 정도로 한숨을 길고 크게 쉬었다. 끝내 ‘알겠습니다.’ 하는 대답과 함께 짧은 통화를 끝마쳤다.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진 듯한 표정에 도운이 그의 눈치를 보았다.
“잠깐 회사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해일은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 지금이요?”
주말 아침이었다. 갑자기 회사에 가야 한다니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하지만 해일은 그저 착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갑자기 회장님이 회사에 행차하셨다고 해서. ……오늘 입국하신다더니 댁으로 곧장 가시지 않고.”
해일도 이마를 짚으며 곤혹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의 표정에서 피곤이 묻어나왔다. 아침부터, 아니 어젯밤부터…… 아주 고생이었다. 어젠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자신을 데려와야 했고, 오늘은 주말 아침인데도 회사에 나가봐야 한다니. 힘들었을 그를 또 일터에 보내야 하는 도운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해일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어차피 회사에 나가보긴 해야 했다. 어제 도운을 찾기 위해 일을 중간에 멈추고 나온 탓에 팀원들이 고생하고 있었다. 그런 직원들에게 막무가내인 회장까지 응대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느새 셔츠를 다 갖춰 입었다. 침묵이 가라앉은 방에 넥타이가 슥슥 매어지는 마찰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도운은 아랫입술을 꾹꾹 물어가며 해일의 눈치를 보다가 이불을 걷으며 일어나려 했다.
“그, 그럼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쉬어요.”
“저 열도 안 나고…….”
“술이 아직 덜 깼잖아.”
“아…….”
그러니 할 말이 없었다. 어제 얼마나 마시고 취했는지 기억도 못 할 정도였으니, 아직 잠기운도 있는 이 상태로 운전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솟았던 도운의 몸이 다시 가라앉았다. ……괜히 많이 마셨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저질렀던 행동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도운은 한없이 시무룩해졌다.
해일은 시계를 차며 다가와 도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정말 열이 내렸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진짜 내렸네. 해일은 평소보다 덜한 온기에 그제야 살며시 안심할 수 있었다.
“더 누워 있다가 정신 좀 차리면 밥도 먹고, 약도 먹어요.”
“네……. 알겠습니다.”
“서 비서가 지금 오는 길이라고 합니다.”
아……. 도운이 작게 소리 냈다. 서 비서. 서재혁이 지금 이곳으로 오는 길이라는 이야기였다.
조금 전 전화를 한 게 그였던 모양이다. 종종 이런 일이 있을 때 해일이 직접 운전해서 가곤 했는데 서재혁은 주말에 상사의 집까지 방문하는 게 전혀 거리낌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리고 그는 회장님이 회사에 나타난 시점에서부터 이미 해일의 집으로 출발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 방법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세 시간 안에 올 겁니다.”
해일은 그리 말하고는 침실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기 전에 도운 또한 허겁지겁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뒤따랐다. 현관에 다다라 구두를 신는 해일을 말없이 서서 지켜보았다.
어딘가 마음이 불안했다. 해일이 영영 떠나는 것도 아니고, 방금 전에 세 시간 안에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도운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해일을 붙들었다.
“……?”
갑자기 소매가 붙잡힌 해일이 의아해 쳐다보자 도운이 움찔하며 재빨리 손을 뗐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머쓱하게 웃어 보였지만 미소가 잘 지어지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서 비서가 집에 왔었죠.”
해일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가사도우미가 말하기를 서재혁이 집 안에까지 들어와 도운과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당연히 현관에서 일을 해결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불찰이었다. 도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려던 때에 초인종이 울렸다.
벽면에 걸린 모니터를 확인했다. 대문 밖에 서재혁이 서 있었다. 해일은 서둘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늦지 않게 다녀올게요.”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겠지. 해일은 우선 급한 일과 성가신 일부터 해치우고 돌아오려고 했다.
“…….”
그런데 다시 해일의 옷소매가 붙잡혔다. 해일이 도운을 돌아보았다. 이전과는 다른 느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해일이 도운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도운아.”
“가지…… 마세요.”
소매를 붙잡은 도운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도운은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아니 울고 있었다.
도운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도운아, 갑자기 왜…….”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이사님.”
도운의 두 볼을 흠뻑 적시며 눈물 줄기가 줄줄 흘러내리다 못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해일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답지 않게 허둥댔다. 우선 다급하게 도운의 눈물을 닦아주었지만, 그게 더 서러웠는지 도운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이런.”
해일이 도운을 품에 안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도운이 흐느꼈다.
“왜 그래요. 응? 무슨 일이야, 도운아.”
해일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연인이 이리 구슬프게 울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이유도 모르고 있다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안아주는 것뿐이었기에 해일은 답답해졌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왜 도운이 이렇게 갑자기…….
도운을 어르고 달래던 도중 핸드폰이 울렸다. 여전히 도운을 품에 안은 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초인종을 눌러도 나와보지 않는 해일을 의아하게 생각한 재혁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도운 또한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며 해일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받지 마세요. 윽, 받지 마…….”
처음엔 그냥 아무 일도 아니라고, 이상하게 감정이 격했다고 얼버무리려던 도운은 결국, 해일에게 생떼라도 부리듯 전화통화를 막아섰다.
“…….”
해일은 도운의 말과 행동에서 그동안 느껴왔던 이상한 낌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하지만 이제껏 일관됐던…… 특정인을 향한 도운의 반응.
그는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도운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통화는 간결했다.
“내가 후에 따로 처리할 테니 서 비서는 복귀하세요.”
그러고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은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이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도운을 품에 꼭 안았다.
짧게 전화를 끊은 해일에게 도운은 더 감정이 북받쳤다. 스스로가 왜 이러는지 자신도 몰랐으나 눈물이 계속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도운아.”
“읏…….”
“뭐가 그렇게 속상했어. 응? 왜 이렇게 서러워.”
“흐윽, 윽…….”
“나 봐봐. 울지 말고. 얘길 해줘야지.”
해일은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도운을 달랬다. 도운이 눈물을 떨굴 때마다 심장에 도끼질이라도 하는 듯 가슴이 시렸다.
한참 도운의 등을 토닥이고 쓸어주니 조금 진정됐는지 가쁜 울음이 많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도운은 해일의 품속에서 울먹거리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해일은 그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으면서 도운이 하는 말에 집중하려 애썼다. 뭉개지던 발음 속에서 짧은 단어들을 잡아챌 수 있었다.
“서 비서라고…… 부르지 마세요.”
“뭐라고?”
“안 그러시면…… 안 돼요?”
서 비서라면……. 역시 방금 전 자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추측이 맞았던 걸까. 해일이 다시금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도 모르겠어요. 저도 제가 이상해요.”
애써 달래놨더니 도운은 다시 울먹거렸다.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 울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가 너무 쓸모없는 사람인 것 같아요. 이사님한테…… 도움도 못 되고, 한심한…… 흐윽. 자꾸 질투만 하고. 근데 이사님이…… 그분한테 관심……. 으으윽. 우윽, 흐으윽.”
무슨 말을 하려는지 스스로도 모르겠다는 듯 횡설수설해대던 도운은 또 서럽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해일은 냉큼 도운을 끌어안았다. 허공으로 번쩍 안아 들자 코알라처럼 해일의 몸에 팔다리를 감아왔다. 두 사람은 그대로 거실 소파까지 이동했다.
해일은 도운을 내려두고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로도 모자랐는지 엄지로 눈가를 조심스럽게 훔쳤고, 입술을 대 부드럽게 문질렀다.
“다 들어줄게.”
“…….”
속상했던 게 있으면 뭐든 이야기해요.
해일이 도운을 끌어안고는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자 도운이 제 손가락을 마구 얽다가 큰 결심을 했다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서 비서, 집에…… 오고……. 또…… 왜 저한테, 아무 일도 안 시키시는지……. 저도…… 저도 서류 볼 줄 알고, 가져다드릴, 수도, 있는데. 그런데. 이사님만 절…… 도와주시니까 제가 너무…… 바보 같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한심한데. 거기다…… 질투까지 하는 저는 더 쓸모없는 것 같아서, 제가 너무, 자괴감이…….”
울먹이고, 훌쩍이며 말하느라 한참이 걸린 문장이었다. 그마저도 뚝뚝 끊어져 인내가 필요했으나 해일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저도 이런 제가 이상한 거 아는데, 그런데…… 그분이랑 제가……. 아니야. 그냥…… 제가 이사님의 영원한 비서일 줄 알았나 봐요.”
도운은 지금껏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꺼내 늘어놓았다. 숨도 잘 가누질 못하고 정리되지 않은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해일은 도운의 말에 담긴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자신이 서재혁에게 호감을 가진 줄로만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해일에게서 스스로의 필요성을 찾게 되고, 그게 잘 안 되다 보니 자괴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지금껏 도운이 서재혁을 언급했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일은 잘하냐느니, 잘생겼다느니. 그저 반 장난으로만 가볍게 여기던 해일은 머리가 차게 식었다.
도운이 지금껏 예민해졌던 이유는 단순히 심 과장에게 받은 괴롭힘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해일이 원인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스스로의 자만심에 다시 한번 발등이 찍혔다. 특별히 달라진 것 없는 일상이었기에 당연히 외부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제 불찰이었다. 자신에겐 절대 잘못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니.
“저랑 계실 때 그분이랑…… 전화하러 가시는 것도 일 때문인 걸 알면서 속상했고……. 그분이 집까지 찾아오시거나 이사님을 태우고 오는 것도 싫었어요. 그냥 다, 싫었어요. 제가 철이 덜 들어서요……. 알아요. 제가 바보예요…….”
자학하는 도운의 뺨을 쓸어주며 해일은 고개를 저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고 소심한 연인이었다. 걸어온 삶의 길이 곧지만은 못해 그가 주변을 과히 살피고 민감하게 군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해일은 그간의 평온하던 생활에 안일해져 있던 모양이었다.
도운은 전부 쏟아내고 나니 홀가분했던 건지 아니면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숙였다. 해일은 그런 도운에게 어떻게 진심을 전해야 할지 몰라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더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해일은 몇 번이나 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무리 내 주변에 사람이 많다 해도, 내가 서도운 씨 이외의 사람에게 특별한 호감을 느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 ……물론 그렇게 느껴지게 한 건 내 잘못이고 책임이에요.”
“…….”
“난 내가 서도운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게 네 눈에도 잘 보일 줄 알았어.”
그러자 도운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서류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못 했던 건 네가 아파서였고. 대체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열나서 누워 있는 애인한테 회사까지 와달라고 하겠습니까. ……서재혁 씨를 보낸 것도, 김 실장이나 다른 팀원들이 갔다가 혹시나 마주하게 되면 민망할까 봐 그랬던 거였고, 서재혁 씨를 더 신뢰한다거나…… 그런 다른 뜻이 있던 게 절대 아니에요.”
해일이 재혁을 부르는 호칭도 서 비서에서 이름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들고, 눈빛을 빛내는 모습에 해일은 도운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일곱 살이 차이 나는 연애. 역시 해일이 도운에게 맞춰줘야 할 부분이 많았다.
“여태껏 그렇게 술을 마시고 스트레스를 받았던 게 다 나 때문이라니. 내가 더 자괴감이 드는걸요.”
“아니에요. 아녜요, 이사님……. 제가 죄송해요. 제가…….”
“또 내가 잘못한 거 없습니까. 서운했던 거 다 이야기해요.”
도운을 완전히 파악하려면 아직 멀었다. 해일은 스스로가 얼마나 오만했던 것인지 뼈저리게 반성했다.
“이사님께 제일 필요한 사람이 저였으면…….”
도운은 모기가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다, 이내 주먹을 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형한테 유일한 존재였으면 좋겠어요.”
바들바들 떨며 저 이야기를 하기까지 그간 얼마나 고심이 많았을까, 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자신을 괴롭히는 못된 상사에게 치이고, 애인의 곁에 나타난 새 사람에 불안해하고. 그게 해일을 귀찮게 할까 봐 혼자 삭이고 참아오던 도운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도운의 크나큰 사랑은 해일이 함부로 그 크기와 깊이를 재단할 수 없었다. 차마 다 되돌려주지 못할 정도였다. 평생이 가도 도운만큼 자신을 사랑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해일은 도운을 바라보며 비스듬히 앉았던 몸을 앞으로 당겨 도운과 가까이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상체를 숙여 도운의 얼굴 여기저기에 미안함과 사랑스러움을 담은 키스를 퍼부었다.
“도운아, 너는 이미 내 유일한 존재야.”
그 어떤 것도 그를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귀했다. 차마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도운은 해일의 전부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유일무이한 내 평생의 사람.”
도운의 가슴속에서 종이 울렸다. 해일의 말은 그 어떤 것보다 더 크게 도운을 감격하게 했다. 어른스러움과 너그러움으로 치졸하고 작은 마음까지 다 감싸는 그. 이런 사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이젠 자괴감을 느낄 새도 없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서재혁 씨는 현재 사실혼 관계입니다. 아이도 있어요.”
“……예?”
순간 도운의 몸이 굳어졌다.
“곧 두 돌이라고 하던데.”
해일은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당황한 도운의 귀여운 얼굴을 구경했다. 당연히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이다. 도운에게 얘기를 안 했으니. 해일은 재혁에게 아내와 아이까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도운의 질투가 그저 가볍게만 여겨졌다. 이를 빨리 눈치채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여기까지 끌고 온 건 다 해일 자신의 탓이었다.
그는 도운의 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많이 놀랐냐고 묻는 말에도 도운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설마 가정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신입사원이었던 데다가 나이도 도운보다 어렸기에 더더욱.
“곧 혼인신고도 하고 결혼식도 성대하게 올릴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안정적인 직장이 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일에 집착적으로 굴었던 것도 있고.”
해일은 서재혁이 조금 빠르게 수행비서로 활동하며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던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비서실은 기본급도 타 부서에 비해 많았는데 수행비서로 활동할수록, 그리고 맡는 일이 많을수록 추가수당이 붙었다.
해일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니 도운의 서서히 표정이 풀어지는가 싶더니 곧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까지 아이도 있는 유부남을 멋대로 오해한 것이었다. 잘 알아보지도 않고 한 자신의 편협한 행동에 부끄러워졌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성민이한테만 고민 상담하고 그랬는데……. 차라리 이사님께 빨리 말씀드렸더라면 오해할 일도 없었을 텐데 너무 죄송해요…….”
도운이 스스로 반성했지만 사실 해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도운의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자신 또한 성민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계속 견제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겉으로는 일말의 티도 내지 않고 그저 도운을 끌어안았다.
“그래요. 이제부턴 우리 꼭 서로에게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너무 오래 돌아온 것 같아.”
해일은 도운의 왼손을 가져가 반지가 끼워진 곳 위로 짧게 키스했다.
“서도운 씨가 불안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날 조금 더 믿고, 나한테 기댔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이사님.”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요. 언제든, 뭐든.”
도운은 해일의 입술이 닿았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짧은 정적 후에 말했다.
“이사님도 저와 같이 반지…….”
“응?”
“반지 나눠 끼워요. 커플링으로.”
단호한 말투에 해일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얼마든지. 도운이 원하는 그 어떤 것이든 들어줄 것이다.
해일은 도운의 요구를 들어주는 동시에, 자신의 욕심도 실현하기로 했다.
“우리 관계에…… 확신을 심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해일이 도운과 깍지를 껴 손을 잡았다. 부드럽게 맞잡은 손이 제자리라는 듯 딱 맞아 들어갔다. 해일이 한 번 쥐고 나면 도운이 다시 쥐었다. 서로의 손바닥을 문지르고 손등을 감싸 안으며 체온을 나누었다. 해일은 도운의 온기에 더 망설일 수가 없었다.
“합법적으로 서로를 구속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반지 같은 것이 아니라 더욱 확실한 그 무언가.
도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지금 들은 게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의미가 맞는지. 하지만 곧, 해일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보고 도운이 확신했다.
“……이사님…….”
마침내 미소를 띠는 도운에게서 길게 그려지는 보조개가 보였다. 도운은 웃으며 동시에 울었다.
말만으로도 좋았다. 거짓말이라 해도 좋았다. 앞으로 평생 살아갈 힘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해일은 감격에 떠는 도운을 품에 안았다.
“서도운 씨가 내 다정한 속박이 되어줬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 결혼할까요.”
그리고 뜨거운 입맞춤으로 더없이 깊은 사랑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