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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배부기가 (7/11)

4장. 배부기가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황제는 제도의 북산으로 올라가 원단에서 제사를 지내야 했다. 황제가 되면 반드시 해야 하는 임무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황제는 제사를 마치고 나면 단출한 옷차림을 하고서 백성들에게 밭은 매는 일을 직접 보여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지만, 평민에서 천민으로 이루어진 백성들은 귀한 황제가 자신들이 하는 일을 같이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용기를 받았다.

무엇보다 지금의 황제, 태공은 농법에 관심이 많아 그 일을 미루지 않고 꼭 보여주었다. 그것도 오랜 시간 공들여 밭을 매고, 종자를 심고, 물을 뿌리기까지 했다. 선황들이 보여주기 식으로 밭을 매는 것만으로 일을 끝냈다면, 태공은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조언을 해주거나, 같이 온 학자들과 농법에 대해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제사에 농사까지 마치고 나면, 태공은 천민 중에서도 백정이나 소작도 못 하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작물과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 하루를 다 써도 모자랄 정도로 빡빡한 일과였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황제가 제사를 드리고 농사를 드리는 거대한 규모의 행차였기 때문에 소요되는 인력과 자금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의 탄신일만큼 기우제와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황제인지라, 그는 자원을 아끼지 않고 투자했다. 태자, 친왕, 황후, 문무백관도 참석했으나 황제가 아끼는 이세희와 태윤은 그 자리에서 제외되었다.

아무리 황제의 총애가 깊어도, 천민 출신인 이세희는 북산에 오를 수 없었다. 반은 천민의 피가 흐르는 태윤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황제는 태윤을 안고 북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으나 대신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며 반대했다. 태윤은 절대 북산에 오를 수 없다는 게 법도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사실이 원통해 펑펑 울곤 했으나, 지금이 되자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 이세희를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 모든 관심과 인력이 밖으로 쏠렸고, 이세희와 태윤은 법도에 따라 북산에 오르지 못한다. 모든 게 딱 맞아떨어지는 최적의 상황임을, 이세희도 태윤도 알았다.

그걸 알면서도 이세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원림에서 빠져나오고, 화요궁으로 온 뒤로도 말이 없었다. 창백한 낯빛으로 밖을 멀거니 바라보며 손을 맞잡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던 태윤은 화요궁에 도착한 그를 안아서 침상까지 옮겨주었다. 반항할 법도 한데, 더위에 지쳤는지 이세희는 태윤의 품에 얌전히 안겨 이동했다.

태윤은 궁녀들이 미리 정리해 놓은 침상에 이세희를 천천히 눕혀주며, 고개를 바짝 숙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는 혼자였지만, 이제는 제가 있습니다.’

이세희는 누가 들을까, 겁이 나 눈을 살짝 떨었다. 태윤은 여전히 이세희를 꼭 안은 채로 그를 눕히고, 목침을 끌어당겨 그의 머리에 대주며 눈을 마주쳤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검은 눈이 이세희의 동공을 단숨에 꿰뚫었다.

‘오로지 앞을 보며 가십시오. 무사히 가실 때까지, 전 뒤에 있겠습니다.’

그리고 흐리게 웃는 태윤을 오래 볼 수 없어, 이세희는 고개를 돌렸다. 여름에 맞게, 얇은 금침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어둠 속에 혼자가 되고 나서야 이세희는 편한 마음으로 숨을 내쉬었다. 태윤이 궁녀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주로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퇴궐 하면서도, 자신이 걱정되는지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멀어지는 게 들렸다.

금침 속에 몸을 웅크리고 누운 채, 숨을 잘게 내쉬며 이세희는 주먹을 움켜잡았다.

도망가고 싶다. 영원히, 이곳을 떠나고 싶다. 갈망은 어느새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그때는 혼자였고, 다분히 충동적으로 시작한 도망이라 금세 잡혔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임을 이세희도 직감했다.

태윤을 버리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가족들만 챙겨서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태윤의 말처럼 그를 버리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나는 정말 태윤을 버리고 갈 수 있을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그 아이를.

처음에는 달라붙는 게 귀찮아, 다른 금군들이나 궁녀들처럼 이용하고 버릴 참이었다. 자신의 손끝만 닿아도 미쳐서 날뛰는 황제가 이 사실을 알면 단숨에 태윤을 내칠 것이라 믿었으니까.

‘마마, 제발….’

그러나 벼랑으로 달려가, 죽으려던 자신을 말리기 위해 스스로 무릎을 꿇는 그 아이를 보며 가슴이 내려앉았다.

‘제가, 마마를 좋아합니다….’

황제를 닮은 얼굴로,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제 마음을 감추지 않는 그 꿋꿋함에 시선이 갔다. 비굴하지도 않은 건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에 비웃었는데, 태윤은 그것도 모자라 땅에 머리를 처박으며 덜덜 떨었다. 진심으로 자신이 죽을 줄 알고서 온몸을 던져 자신을 막았다.

태윤은 한 번도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뒤는 자신에게 맡기라고, 지켜주겠다고 단호한 눈으로 자신을 직시했다.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려 하지 않은 궁에서, 죽음조차 불사하고 달려드는 태윤을 보자 가슴이 기울고 있었다. 이세희는 쿵, 쿵, 커지는 심장에 입술을 깨물고 팔뚝에 얼굴을 파묻었다.

버리면 되잖아, 그까짓 거. 어차피 적당히 이용해 먹고 버리기로 한 애였으니까, 그렇게 써줘도 원한을 가지지 않을 애인데….

사실 묻고 싶었다.

한 번이라도 같이 가자고 물어볼 법도 한데, 왜 너는 그러지 않는지. 옆에 있어 달라고, 매달려도 괜찮을 텐데 태윤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일찌감치 뒤로 물러났다. 그곳이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라는 것처럼, 꼿꼿하게 서서 강직한 눈으로 자신을 지탱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생각 외로 간단하게 내려졌다. 태윤은, 눈빛으로도 이세희가 다칠까 봐 애지중지 훑었다. 바라보는 것조차 아까워 죽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끙끙 앓았다.

처음 만났던 후원에서부터 시작이었다. 황제를 보다가,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 때 태윤은 자신은 걱정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온전히 보았을 때 보여주는 감정에 이세희는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얕게,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밀고 들어오는 수면에 허우적거렸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어떻게 그 말을 듣고 널 두고 갈 수 있을까. 안심하라는 듯, 자신의 손을 꽉 잡고 봄을 담은 눈으로 자신을 보며 태윤이 웃었다.

‘어차피 난 잃을 게 없어. 너만, 날 기억해 주면 돼.’

나 또한 잃을 게 없는 삶을 살았다.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은 더더욱 없는 비참한 삶 속에 빛이 들었다. 시들었던 꽃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그 꽃 하나가 뭐라고. 부는 바람에 힘겹게 삶을 지켜가는 게 안쓰러워, 시선이 뒤로 향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삶은 이 세상에 없다.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것들은 가치가 있었고, 살아가야 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게 삶이었다. 어떻게 쓰이든, 막을 내리든, 그 과정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고 역사였다.

‘사셔야 해요.’

세형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이세희는 어둠이 스민 침전에서, 치미는 뜨거운 덩어리를 삼키고 또 삼켰다.

‘오로지 앞을 보며 가십시오.’

살고 싶었다. 매일 죽고 싶다고 염원하던 이세희는, 사실은 자신이 미치도록 살고 싶음을 깨닫고서 금침 속에서 소리를 삼키며 오열했다.

태윤이란 빛 속에서 살고 싶어졌다. 그곳은 봄이었다. 장마도 오지 않을 영원한 봄.

“하….”

이토록 자신이 삶에 집착이 강했던가. 이세희는 오랫동안 숨어있던 금침 안에서 빠져나왔다. 긴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었다. 커다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숨을 차분하게 내쉰 이세희는 떨리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답을 알면서도, 선뜻 말하지 못했던 것은 아직 두렵기 때문이겠지. 지난 세월, 황제에게 당한 고통들이 몸서리치듯 자신을 덮치자 이세희는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감쌌다.

태공만 죽으면 되는데…. 죽어야 마땅한 자는 그자였는데…. 이세희의 손이 내려가며, 태공을 향해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어둠보다 짙푸른 여명을 쪼갤 듯한 눈빛이 넘실거렸다.

“마마, 황후 마마께 문후인사를 갈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에 이세희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궁녀들이 냉기가 도는 눈으로 이세희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그녀들은 이세희를 모시기보단, 의심하고 감시하는 역할에 가까웠다. 그들 사이에 있는 태감도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새삼스러웠지만, 태윤을 제외하고 자신에게 인간다운 호감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생 한 번 잘못 살아왔다고 곱씹으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발을 땅에 디디기가 무섭게 몸을 파고드는 통증을 감내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이세희는 다가오는 내관의 팔을 덥석 잡았다. 내관이 깜짝 놀라 이세희를 보았다. 이세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차피 넌 고자잖아.”

설 것도 없다는 식으로 비웃은 이세희는 내관의 팔을 지팡이 삼아 잡으며, 한 걸음씩 옮겼다. 이세희가 도착한 곳은 목욕탕이었다. 밤사이 흐른 땀을 씻어내고, 긴 머리에 향유를 발라 빗었다. 길고 날씬한 몸에 하늘하늘한 남색 평복이 걸쳐졌다. 허리에 백색 띠를 두르고, 머리는 하나로 높게 들어 묶었다. 특별한 장식은 없는 수수한 차림이었는데도, 그것만으로도 빛이 났다. 매일 보아도 새로운 아름다움에 궁녀 몇은 얼굴을 붉혔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신비롭고 우아한 외모에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무감한 눈으로 응시하던 이세희가 손을 들었다. 은은한 향이 나는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뺨까지 매만진 이세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뜻 모를 미소를 연신 짓더니, 이세희는 몸을 빠르게 돌렸다. 발이 아플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궁녀들이 더 조마조마할 정도로 빠른 걸음이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간에는 벌써 더위가 기승이라 더울 법도 한데 이세희는 속도를 늦추는 법이 없었다. 이세희는 자신을 기다리는 마차에 냉큼 올라탔다. 궁녀가 들고 있는 부채까지 뺏어들어, 본인이 살랑살랑 부채를 부치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출발해라.”

황후궁에는 가마를 타고 가야 했고, 가마에서 내려 안에 들어가야 했으나 이세희는 부상으로 마차를 타고 갔다. 마차 안에서 이세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지금쯤이면, 태자가 올 시간이었다. 가장 먼저 태자가 문후인사를 드리고 그다음에 비와 빈 순서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있었다.

태자를 기다리는 이세희의 눈이 차츰 차가워졌다. 장막을 슬쩍 들춰 밖을 염탐하던 이세희는 황제 다음으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가마에 입술 끝을 비틀어 웃었다.

자기가 황제라도 된 듯 구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애새끼…. 속으로 태자 태경을 향해 욕을 퍼붓던 이세희는 점차 가까워지는 가마에 냉큼 장막을 치고, 등받이에 나른하게 등을 대었다.

“화비가 아니십니까?”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 태자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며 무표정한 얼굴로 있던 이세희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리며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의상 지어주는 미소에 불과했으나, 그조차도 눈이 멀 만큼 아름다워 태자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두 볼은 상기되었고, 눈은 둘 곳을 몰라 허공을 더듬었다. 이세희는 그걸 빤히 보다 눈웃음을 짙게 덧그리며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태자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상대가 태자이니 이세희는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그를 만날 때는 예의를 깍듯하게 차렸다. 그러나 웃어주는 법은 거의 없었다. 웃어도 픽 웃거나, 냉소를 짓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저렇게 우아하게 웃어준 적은 없어 태경은 눈을 힐끗 돌렸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이세희는 더욱 눈웃음을 유려하게 지으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눈웃음이 도드라지는 광경에 태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들어가서 황후 마마께 문후인사를 드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전하?”

그랬다간 황후가 악 소리를 지르겠지만, 이세희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황후와 자신은 좋게 끝날 수 없는 인연이었다. 태자도 그 제안에 솔깃했으나, 어머니의 성품을 알기에 그러자고 대답하지 못했다.

“참, 듣자 하니 발을 크게 다치셨다고요?”

가마가 아니라 마차를 탄 걸 알면서도, 그 말을 덧붙이는 태자의 꿍꿍이가 다 보여 이세희는 새치름하게 웃었다.

“예. 다쳐서, 거동이 좀 불편하답니다.”

마차가 황후궁 앞에서 멈췄다. 가마도 동시에 멈춰, 내관들이 가마를 내리는데 태자는 그새를 못 참고 뛰어내려와 이세희에게 다가왔다.

저 새끼…. 하여간, 황제 아들들은 다 미쳤군. 태윤만 빼고 멀쩡한 놈이 하나도 없었다. 이세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냉소를 터트렸다. 가면을 쓴 듯, 예쁘장한 미소를 유지하며 태자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태자가 손을 뻗어 창문을 가린 장막을 거두었다. 이세희는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채, 태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딱 맞물렸고 태자의 입술이 열렸다.

“지팡이도 없으신데 어떻게 들어가시려고요?”

“금군대장이 있었다면, 절 안아서 황후 마마께 모셔줬겠지만….어쩔 수 없지요. 제 발로 걸어가는 수밖에.”

넌 그렇게 못 하겠지만…. 묘한 어감을 담아 이세희가 말을 흐리고, 체념한 듯 굴자 태자의 눈이 찌푸려졌다. 한 번도 제 형과 비교당한 적이 없던 태자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이세희는 거기에 밀리지 않고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아니면…. 전하께서 절 잡아 주시겠습니까? 폐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첩이 너무 아파서, 전하께서 도와주셨다고요.”

그리 말하며 이세희가 물기가 어린 눈으로 보자, 태자의 시선이 음험해졌다. 이세희는 자신에게 이끌리듯 다가오는 태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내답게 쭉 뻗고, 하얀 손을 보던 태자는 머뭇거리며 이세희의 손을 맞잡았다. 이세희는 놓치지 않고 자신보다 어린 태자의 손을 꽉 잡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렇게 오만방자하던 태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되어 이세희에게 끌려갔다.

“걱정 마세요, 전하.”

이세희가 문을 열었다. 태자의 손을 맞잡은 채 내려온 이세희가 비틀거리자, 태자가 본능적으로 반대편 팔을 뻗어 이세희의 몸을 감쌌다. 이세희는 손을 나붓하게 움직여 태자의 어깨에 손을 대고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순전히 제가 아파서 요청드린 것이고, 폐하께도 그리 말씀 드릴 터이니….”

태자의 숨이 거칠어졌다.

“아바마마는 절 의심하지 않으실 겁니다.”

호언장담하는 태자를 보며 이세희는 피식 웃었다. 어린애 다루는 듯한 가소로운 시선에 태자는 불쾌감을 느끼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이세희는 태자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거두고, 그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움직여 황후궁을 보았다.

“만약 그러지 않더라도, 제가 알아서 수습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수습하는지는 태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예감한 대로, 태자가 고개를 돌리고 볼을 붉혔다. 이세희는 말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태자의 손에 깍지를 꼈다. 황제의 애첩답게 접촉에 태연한 이세희였다. 태자는 힘을 주려 했으나, 오히려 이세희에게 힘으로 눌려 당황했다. 손바닥에도 굳은살이 박여 단단했다.

“자, 그럼 가 보실까요?”

이세희가 유쾌하게 미소 지었다. 황후궁을 노려보는 이세희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태자는 자신의 상상과 달리, 완전히 살아있는 지팡이가 되어 이세희의 지지대 역할을 했다. 자신이 이세희에게 힘으로 진다는 사실에 눈을 빛내는 태자를 보며 이세희는 아름다운 미소를 한껏 지었다.

“전하, 자꾸 쓰러지시면 절 어떻게 지탱해 주시려고요? 똑바로 서야 저를 지탱해주실 거 아닙니까?”

어리기는.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속으로 태자를 마음껏 비웃으며 이세희는 태자의 손을 터질 것처럼 꽈악 잡았다. 태자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이세희는 더 힘을 실어 태자를 끌고 황후궁으로 들어갔다. 그의 탐스럽고 긴 머리카락이 자유분방하게 흩날렸다.

*

아침이 왔다. 고리타분하게 맞이하던 아침이건만, 왜 이리 설레는지 모를 일이었다. 태윤은 발밑에서 물고기 떼처럼 산란하는 빛들을 툭, 건드렸다. 빛이 으깨지고, 먼지가 이는 게 보였다. 이세희를 서방에서 마주했을 때도 이러했다. 먼지가 쏟아지는 눈처럼 느껴졌다. 그가 찌푸린 얼굴을 돌려 자신을 보자, 눈은 사르르 녹아 사라지고 봄이 찾아왔다.

그때 핀 꽃을 이제야 알았으니. 그나마 장마에 쓸려가지 않게 지켜서 다행이었다.

태윤은 쓰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머리는 개운했고, 몸은 가벼웠다. 최적의 몸 상태였다. 태윤은 책상에 올려 두었던 지도를 둘둘 말아 품 안에 넣고, 늘 착용하는 검을 띠돈에 고정했다. 허리에 두 손을 올려 둔 태윤은 고개를 양옆으로 움직이며 숨을 내뱉었다.

“이틀 남았군.”

새벽 내내, 생각을 곱씹고 물레방아처럼 돌려 보았으나 답은 결국 하나였다. 이세희의 대답 여부와 상관없이 무조건 궁에서 내보낼 생각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고, 여지를 갖게 되면 주춤하기 마련이었다. 그 순간 황제에게 잡히고 말 것이다. 황제가 궁에 나가는 하루, 그날을 골라 어떻게든 이세희와 그의 가족들을 항구까지 보낼 작정이었다. 마차 하나 훔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에게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선물이라도 하나 할까. 생각의 종착지가 그곳까지 다다랐으나 태윤은 조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태윤이라는 자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아버지를 떠올릴 텐데.

그의 악몽의 시발점이 된 자의 아들을 기억해서, 그의 인생에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그저 그가 살아가다가 한 번쯤은 태윤이란 자가 있었지, 하고 웃으면서 넘어가 주길 바라며 태윤은 묵직한 주머니도 챙겼다. 있는 것을 다 긁어모아 만든 돈이었다.

이제 실행만 남았다. 태윤은 살짝 겁에 질려 주춤하는 자신을 다그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관복을 입고, 머리에 금군을 상징하는 띠를 두른 태윤은 누가 보아도 훤칠한 무관이었다. 주인을 맞이하는 노비들은 늠름한 태윤을 보며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버릇처럼 그들에게 머리를 까닥이며 인사를 해준 태윤은, 말에 올라타더니 노비들을 관리하는 자에게 돈 몇 전을 넘겨주었다.

“오늘은 고기나 사먹어라.”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태윤의 말투에 노비들은 어리둥절했다. 태윤은 고삐를 느슨하게 잡으며 피식 웃었다.

“돼지 말고 소 먹어도 된다. 돈은 넉넉하니까. 그럼, 밤에 보자.”

그리고 태윤은 말의 옆구리를 적당한 힘으로 후려쳐 달려갔다. 황족들만 살 수 있는 지역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황궁이었다. 문 앞에 다다라서 말에서 내리는데, 익숙한 문양의 가마가 보였다. 태자와 동갑이고, 자신보다 두 살 어린 무혁왕 태건의 가마였다. 친왕답게 화려한 수가 놓아진 청보랏빛 예복을 입은 아우를 본 태윤이 말없이 미소 짓자, 태건도 동경을 보듯 따라 웃었다. 가마가 다 내려지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려온 태건은 두 팔을 벌려 태윤을 꽉 끌어안았다.

“형님!”

태건이 강아지처럼 파고들었다. 태윤이 두 다리에 힘을 줘 버티는데도 이제 장성해진 동생에게 밀렸다.

“하하, 전하. 체통을 지키셔야죠.”

태윤이 호탕하게 웃으며 태건의 어깨를 두드리는데도 태건은 어린아이가 된 듯 칭얼거리며 태윤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황제를 유독 많이 닮아, 어마어마한 장신인 터라 윤은 거의 건에게 파묻히듯 안긴 상태였다. 허리에 황제 못지않은 두 팔이 감기고, 힘이 실리자 숨이 턱 막혔다. 태윤이 끙끙 앓으며 태건을 밀어냈다.

“형님, 다 컸다고 이제 저를 밀어내시고…. 속상합니다.”

건이 침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태윤은 못 이기겠다는 얼굴로 쓰게 웃으며 발돋움을 해 동생을 빤히 보았다. 그제야 기분이 풀렸는지 태건이 해맑게 웃으며 윤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예전처럼 뺨 만져주세요.”

“혼례도 치르신 어른이시면서, 왜 이리 저에게 아이처럼 구십니까?”

윤이 짓궂게 웃으며 이마를 검지로 꾹 밀어냈다. 태건은 밀리는 대로 밀리더니, 이내 그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결국 마지못해 태윤은 손을 들어 태건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태건이 고양감에 찬 얼굴로 씩 웃더니, 태윤의 손바닥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그것도 모자라 반대편 손도 억지로 들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도록 종용하는 게 아닌가.

“형님에겐 언제나 아우가 아닙니까? 형님이 아우 예뻐해 주는 게 문제도 아니고.”

태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런 건 왕비님에게 받으셔야죠.”

“왕비는 만삭에 가까워져 서 있는 것도 힘들어합니다.”

“곧 첫 아이를 보시겠군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전하.”

태윤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자 태건이 질색했다.

“형님, 예법이 중요하다지만 저희 사이에 예법보다 형제애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리하시면, 형님과 사이가 멀어진 거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밖에서는 건아, 라고 다정히 불러주십시오. 전 그게 좋습니다.”

태건이 시무룩해져서 칭얼거렸다. 아이가 부쩍 커지고, 왕부로 떠나면서 태윤은 건을 예전처럼 대하지 못했다. 자신은 금군에 불과했지만 출신이 좋은 건은 일찍이 친왕이 되었다. 엄연히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동생을 좀 멀리했던 건 사실이라 태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같은 형제라도, 어머니가 천민 출신이다 보니 은연중에 밀렸고 거기에 대한 자괴감이 태윤에겐 희미하게 있었다.

“오늘은 문후인사를 올리러 오신 겁니까, 전하.”

태윤은 나란히 태건과 발을 맞춰 걸으며 물었다. 문이 열렸기에, 이제부터 궁으로 들어가는 거라 태건을 친왕으로 대해야 했다. 걸음도 늦춘 태윤이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태윤을 보는 태건의 눈이 순간 어두워졌다. 법도에 따라 앞으로 데려오고 싶어도, 태윤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곧 있으면 북산에 오르지 않습니까. 오늘 대신들과 모여 예행을 해야 하고, 또 폐하께 올릴 것도 있고….”

태건이 너스레를 떨며 말을 이었다. 태윤이 그제야 아, 하고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산에 오르기 전, 제사장, 대신, 친왕, 황후가 모여 천후전에서 제사 예행을 한다. 실수가 없기 위함이었다. 태윤은 북산에 오를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걸음을 묵묵히 옮기던 태건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앳되고, 잘생긴 태건의 얼굴에 태윤이 눈을 느리게 깜박이는데, 건이 몸까지 돌려 걸어왔다. 태윤은 건이 다가올 때마다 차츰 멀어졌는데, 건이 못 참고 손목을 잡아당겨 자신의 앞으로 데려왔다.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기는….”

“형님,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제가 아바마마께 말씀이라도 올려봐야겠습니다. 형님께선 문무도 출중하시고, 성격도 어지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핏줄에 반이 천민이란 이유로 관직에도 오르지 못하는 건 너무한 처사인 것 같습니다.”

태건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윤의 손을 꼭 잡은 채 조곤조곤 얘기했다. 태윤이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거부하자, 태건이 입술을 깨물며 눈을 치켜떴다. 그 순간, 태윤은 황제를 너무 닮은 눈에 거부감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꼭 저러니, 이세희를 탐하는 황제 같아서…. 윤이 눈을 피하자 태건을 윤의 손목을 잡아 자신을 보도록 하며 속삭였다.

“그 요망한 이세희는 천민이고, 사내이나 단숨에 비로 승격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형님은 아바마마의 아들인데도, 천민이란 이유로 금군대장에만 머물게 하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처사입니다.”

태건의 눈에 이세희를 향한 적의가 넘실거렸다. 태윤은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요망한 이세희라니. 이세희가 원해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강제로 끌려온 것인데…. 거기에 대해 설명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는데, 태건이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님의 능력이 출중한데 그딴 애첩의 호위나 하라고 명령을 내리시고.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깟 애첩이 뭐가 중요하단 말입니까. 아바마마께서 형님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이런 대우는…!”

“대장님.”

태건이 목에 핏줄까지 세워가며 버럭 화를 내는데,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나부꼈다. 듣자마자 태윤의 얼굴에 빛이 돌았다. 태건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았고, 눈에는 살기마저 감돌았다. 노골적인 적의에 태윤이 보다 못해, “전하, 그러지 마십시오.”라며 달래자 태건이 시큰둥한 얼굴로 웃는 장본인을 노려보았다.

“입궐하셨으면 저를 가장 먼저 찾아오셨어야죠. 폐하께서 그러라고 내리신 금군대장직이 아닙니까?”

이세희가 태중문 앞에 서서, 부채를 살랑거리며 태윤과 태건을 바라보았다. 이세희가 다섯 계단 정도 위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세희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형국이었다.

“지금 형님께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라고 내리신 금군대장직이 아니냐고요?”

이세희에게 다가가려 걸음을 떼는데, 태건이 태윤의 앞을 팔로 막으며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이세희는 흐음, 하고 비웃듯이 침음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예열된 바람이 불며, 이세희가 높게 묶은 머리가 휘날렸다. 이세희는 바람 때문인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 상태로 묘한 웃음을 덧그렸다. 수려한 얼굴에 물결이 일듯 감도는 아름다운 미소에 태윤은 입가를 가리고 숨을 삼켰다. 태건도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움에 멈칫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금군대장도 만족하고 저를 지키는데, 전하께서 불만을 가져 봤자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대장, 거기에 있지 마시고 이리 오세요.”

그러면서 이세희가 자신의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장께선 이곳에 있으셔야 합니다. 제 옆에요.”

“형님은 화비께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태건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붉은 입술에 냉소가 깃들더니, 이세희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이세희가 너무 걱정되어, 태윤은 주저하지 않고 뛰어갔다. 태건이 황망함에 젖어 “형님!” 하고 불렀으나 들리지 않았다. 숨을 차분히 내쉰 태윤이 계단 중턱에 선 이세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침한 고양이처럼 토라져 있던 이세희는 자신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태윤을 보더니,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부채로 입가를 슬쩍 가린 이세희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손은 느리게 움직여 태윤의 손을 꼭 맞잡고, 자신 쪽으로 당겼다. 어, 하는 사이에 이세희에게 끌려갔다. 태윤이 비틀거리려 하자, 이세희가 능숙하게 태윤을 지탱해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항상 이래야 해, 윤아.”

나른하고 달콤한 목소리에 등이 저릿했다. 태윤이 황홀함에 젖은 눈을 들어 이세희를 마주 보았다. 허리를 편 이세희는 보란 듯이 태건에게 말했다.

“금군대장은 저를 지켜 주기 위해서, 폐하께서 주신 사람입니다. 오히려 전하께서 무례하게 금군대장의 일에 나선 것이 아닙니까?”

태건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세희는 그 자리에 서서 태윤의 손을 맞잡은 채, 나른한 눈으로 태건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활시위처럼 당겨졌다. 그 중심에 선 태윤은 태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저는 이만 마마를 모시기 위해 가겠습니다. 마마께서 발을 다치셔서….”

제가 모셔야 합니다, 라고 변명처럼 덧붙이려는 사이 이세희가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태윤이 깜짝 놀라 반대쪽 팔을 뻗어 넘어지려는 이세희를 안아주었다.

“아….”

이세희의 앓는 소리에 태윤이 허둥지둥했다. 당혹스러운 눈으로 이세희의 안색을 살폈다. 지척에서 보니, 이세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마…. 하고 탄식하듯 중얼거리던 태윤은 얼굴을 굳히고 이세희를 업었다. 태건의 눈이 커졌다. 이세희는 자신을 듬직하게 업어주는 태윤의 목에 팔을 두르더니, 고개를 들어 태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얼굴에 스치는 가소롭다는 듯 웃음에 태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대장님, 제가 아픈 걸 아시면서 늦게 오시고…. 대장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태의가 걷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이세희가 아픔에 젖은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물론, 태건을 보는 눈은 태연자약했다. 태윤이 고개를 돌리자, 끙끙 앓는 얼굴로 변해 태윤의 어깨에 기댔다. 태윤은 생각보다 꽤 무거운 이세희를 간신히 업은 상태에서 발을 움직였다. 계단만 조금 올라가면, 태중문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가 있었다.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데, 뒤에서 묵직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형님.”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부르는 태건을 뒤돌아보려는데, 이세희가 목을 두 팔로 조이며 속살거렸다.

“지금 내 앞에서 다른 남자랑 붙어먹으려는 거야?”

“예?”

태윤이 깜짝 놀라 이세희를 떨어트릴 뻔했다. 컥,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세희가 넘어지지 않으면서, 태윤에게 벌을 주기 위해 목을 누른 것이다.

“마, 마마…! 이러면 넘어집니다!”

허둥지둥 태윤이 두 발에 힘을 주고 버텼다. 힘껏 이세희를 추켜올려 업은 태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팍에는 묵직한 돈을 등에는 이세희를 업은 몸이 후들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던 찰나, 이세희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말을 건넸다.

“정말 동생 맞아? 다른 남자 아니야?”

“…제 처음이자 마지막은 마마입니다.”

태윤이 금세 초췌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누가 들을까, 목소리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태윤의 구릿빛 목이 민망함에 붉어진 걸 본 이세희는 침음했다. 한숨을 내쉰 태윤이 묵묵히 걸음을 옮겨 마차까지 이세희를 옮겨주었다. 그 짧은 거리를 걸어오는데도, 이세희가 상당히 무거워 얼굴과 몸이 땀으로 젖었다. 아예 소금에 절여진 듯했다. 태윤이 무릎에 두 손을 대고 헉헉거리는데, 이세희는 새치름한 얼굴로 마차에서 부채를 부쳤다.

“발은, 헉, 괜찮으십니까?”

그 와중에도 태윤은 이세희의 발이 걱정되어 몸 상태부터 걱정했다. 무감한 얼굴로 태윤을 지켜보던 이세희는 태윤의 손목을 잡고 당겼다.

“걱정되면 들어와서 보시든가요.”

“하오나….”

태윤이 주변을 살폈다. 이세희가 발이 아파, 안거나 업어서 옮겨주는 건 태윤에게 윤허된 일이라 하고 있었으나 그 이상의 접촉은 불가였다. 태윤이 선을 그으며 뒤로 물러나려 하자, 이세희가 대뜸 손을 내밀어 태윤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억,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와서 보라니까요?”

태윤의 훤칠하고 단단한 근육질 몸이 마차에 나동그라졌다. 거의 폭행이나 다름없는 행동에, 지켜보던 궁인들이 이세희를 불렀다. 그들이 자신을 저지하려 들자 이세희는 주먹을 치켜들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에 상처가 덧나서, 금군대장께 치료를 받을 테니 그리 알아라!”

이세희는 마차 바닥에 엎어져 신음하는 태윤을 오로지 팔 힘으로 잡아끌어 안으로 처박았다. 문이 쾅, 소리 나며 닫혔다. 태윤이 바닥에 손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태윤이 마른침을 삼키며 이세희를 보는데, 이세희의 두 손이 다가와 태윤의 얼굴을 감쌌다.

“그러게 왜 다른 남자랑 있었어. 오해하게 되잖아.”

“…제 친아우입니다. 제가 아우랑 붙어먹겠습니까. 그리고 저에겐…. 음, 마마밖에….”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워 태윤이 목을 긁적였다. 이세희가 픽 웃었다. 황제를 닮은 지적인 얼굴이, 수치심에 젖으면서도 힐끔힐끔 눈을 돌려 자신을 보는 게 제법 귀여웠다. 태윤이 바닥에 무릎을 댄 채, 발에 손을 대려 하는데 이세희가 이마를 손으로 짚어 저지했다.

“발이 아프시다고….”

태윤이 머뭇거리며 묻자 이세희가 “아, 그거?”라며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거짓말이야. 안 아파.”

이세희가 화사하게 웃었다. 태윤이 허망함에 멍하니 이세희를 응시했다. 정말 아픈 줄 알고 그 땀을 흘리며 여기까지 업고 왔는데…. 그러다가 한숨을 내쉰 태윤은 품을 뒤적여 주머니를 꺼냈다. 이세희가 영문 모르겠다는 듯, 어여쁜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순진무구한 눈빛을 싹 지운 태윤이 나직하게 말을 내뱉었다.

“도망갈 때 필요한 자금입니다. 가지고 계십시오.”

그가 주머니를 꽉 쥐었다. 도망이라…. 담담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아직 주저하는 그를 빤히 보던 태윤이 이세희의 손을 맞잡았다.

“가셔야 합니다. 주저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후미를 볼 테니, 가족들과 함께 항구로 가십시오. 지도는 제가 다음 날 드리겠습니다. 그걸 보면서 가시면 됩니다.”

“…너는?”

“저를 신경 쓰시면 도망은 갈 수 없습니다.”

태윤이 확고한 태도로 말을 자르며 몸을 일으켰다. 이세희는 무감한 얼굴로 태윤을 직시하다, 입술을 벌렸다.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툴툴거리지만, 시선은 걱정되어 죽겠다는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워 태윤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세희는 어둠을 물리칠 만큼 쾌청한 태윤의 미소에 신경질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너는 어떻게 되는 거냐니까.”

“이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모두가 사는 계획은 없으니까요. 마마께서 도망가시느냐, 못 가느냐가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거지…. 나머지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최우선으로 마마를 생각하십시오.”

“…왜 같이 가자고 안 해?”

이세희가 머뭇거리다가, 본심을 드러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태윤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제가 마마를 지켜야 하니까요. 지켜 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무서워하실 거 없습니다. 이곳을 벗어나면 다 괜찮아질 겁니다. 전부 다요. 그곳에 가셔서, 다 잊으십시오.”

태윤이 손을 뻗어 이세희의 손등을 토닥였다. 가슴까지 전해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이세희는 무심코 입술을 벌렸다.

“너와 내가 사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할래?”

생각을 거듭했다. 태윤도 살고, 자신도, 가족도 무사한 방법을. 같이 도망갈 수는 없었다. 태윤이 원하지 않을 테니까. 도저히 태윤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자신은 버리고, 오로지 살기 위해 도망가라고 종용하는 태윤을 두고 간다면,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 것 같았다.

오늘 태윤의 등에 업히면서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자신이라는 이야기에 이세희는 고뇌를 그만두기로 했다.

태윤을 황제로 만든다. 그것만이 해답이었다.

태윤만 살리고 모두를 죽여 태윤을 황제로 옹립한다. 이세희는 검을 박은 듯한 날카로운 눈으로 태윤을 응시했다.

“그런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같이 도망갈 수는….”

“네가 황제가 되면 돼.”

이세희가 본론을 꺼냈다. 태윤은 훅 치고 들어오는 이세희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한서진과 같은 말을 하는 이세희는 흔들림도 없었다. 자신처럼 주저함도 없었다. 태윤이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젓는데도, 이세희는 굳건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태윤은 이세희가 말하는 바를 알고서 서둘러 말했다.

“법도에 따라, 저는 황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천민의 피가 흐르니까요.”

한 발자국 물러나는 말은 태윤다웠다. 이세희는 입술을 더듬고, 눈을 내리뜨며 어떤 말을 할지 고민했다. 안 된다고 생각하는 태윤을 자극할 수 있는 말. 짧은 시간 속에 고심하던 이세희는 촉촉이 젖은 눈을 깜박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황자의 어미가 아니라, 황자의 유일무이한 처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 해주시겠습니까?”

황자의 어미라니…. 태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 말은 즉 남은 후궁들을 처리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아니면, 그저 자신을 자극하기 위해서인가. 태윤은 눈을 내리뜨고 생각에 잠겼다가, 되물었다.

“제 손으로 아바마마를 죽이라, 이 말씀이십니까?”

“그럼 신첩을 매일 밤, 폐하 때문에 울게 내버려두실 건가요?”

이세희가 황제를 향한 분노, 증오를 뒤섞인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 모든 감정이 황제를 향한 걸 알면서도, 눈이 매섭게 빛나 태윤은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태윤의 눈이 흔들렸다. 신첩이라는 단어에 매혹되고, 폐하라는 말에 정처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싸늘한 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금방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으론 만족 할 수 없었다. 이세희는 일부러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담고서 태윤에게 말했다.

“오늘밤, 폐하가 절 부르실 겁니다. 그때도 절 업어서 데려다주세요. 그래야 폐하가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가실 테니까요.”

황제가 자신을 밤에 부른다는 소리에 벌써부터 태윤의 얼굴이 굳었다. 이세희는 소매로 입가를 가리는 척하며 피식 웃었다.

황제가 되지 못하겠다고 벌써부터 겁을 먹는다면, 황제가 되게끔 마음먹게 만들어야겠는걸.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른 이세희는 흥미로운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 화요궁을 응시했다.

*

이토록 간절하게 밤이 오지 않길 빈 적이 없었다. 만약 밤이 오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제 심장도 바칠 수 있으리라. 제발, 밤이 오지 않기를. 아바마마가 세희를 부르지 않기를. 태윤은 해가 기울어지고, 사위가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허공을 응시하며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자연의 섭리대로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태얼궁에서 명이 내려왔다. 화비 이세희를 황제가 부른 것이다. 후궁들이 머무는 육궁에도 불이 켜졌건만, 태얼궁의 태감은 잔인하게도 화요궁에만 왔다.

“마마께서는 준비를 끝내셨습니까.”

태감이 패를 내밀며 물었다. 나무를 깎고, 부드럽게 문지른 패엔 화비 이세희의 이름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힘이 들어간 태윤의 손등에 힘줄이 융기했다. 아주 억세게 패를 쥐었다가 편 태윤은 고개를 돌려 화요궁을 보았다.

언제까지 나는…. 내가 힘이 좀 더 있었더라면….

태윤은 이를 악물며 눈을 세게 감았다.

다 내가 강하지 못한 탓이었다. 내가 천민의 피가 흘러,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지 못해서. 이세희가 도망을 가지 않아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애절하게 빌면서도 생각해 봤지만 답은 안개에 가려진 듯 찾을 수 없었다.

“대장님?”

태감이 의아한지 태윤을 불렀다. 화요궁을 물들인 화사한 빛이 꼭 낮을 연상케 했다. 밤이 오기 전까지, 이세희와 태윤은 그럴싸하게 애첩과 호위의 가면을 쓰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세희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애지중지 대하며 그를 보살폈다. 이세희는 태윤의 상냥한 손길과 눈길에 짜증을 부리면서도, 끝내는 가만히 태윤이 건네주는 걸 받아들였다.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고 웃을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눈을 곱게 접고, 입술 끝을 부드럽게 올려 호선을 그리고…. 그리고 고개를 올려, 무지개처럼 화사하게 미소 짓는 그를 보며 태윤은 그가 했던 말을 무심코 떠올렸다.

내가 황제가 된다면….

하지만 그러려면 현 황제도, 아우들도 사라져야 했다. 그러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멀쩡히 살아있는 그들을 어떻게 없앴을 수 있을까. 태윤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하루도 지체할 없었다. 그를 빨리 이 악몽에서 구해내야 했다.

“대장님,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마마가 늦게 오시면 폐하께서 역정을 내실 터이니, 어서 모시고 오십시오.”

태감이 화요궁을 뚫어져라 보는 태윤을 채근했다. 태윤은 숨을 고르게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발목에 족쇄를 건 것도 아닌데, 발이 무거워서 걷는 게 버거웠다. 하늘에서 자신에게 벌을 주는 게 틀림없었다. 죄책감이 온몸을 짓누르고, 숨통까지 조였다.

다, 내가 늦은 탓이다. 내가 좀 더 빨리, 이 마음을 자각하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면 그가 황제에게 불려갈 일은 없었을 테니까. 또한 자신이 욕심을 내지 않고 금군대장직에 만족한 것도 문제였다.

모두 내 탓이었다. 태윤은 화요궁 침전 앞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 윤이 간신히 울음을 삼키고, 문을 열려는 찰나 문이 활짝 열렸다. 태윤이 멍하니 눈을 들어 올리자, 그곳에 얇은 침의를 입은 이세희가 삐뚜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그의 아름다움에 태윤이 숨을 멈추었다. 눈가에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은 이세희는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숙였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질책하는 듯한 어투에 태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벌을 받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세희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태윤이 머뭇거리며 다가가자, 이세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십니까. 등을 대셔야지. 제가 발이 아픈데 걸어서 폐하께 가길 바라시는 겁니까.”

태윤이 움찔거렸다. 혼을 내는 이세희 앞에서 침울해진 태윤은 느리게 등을 돌렸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걸 보던 이세희가 짜증 섞인 눈빛을 보내더니, 태윤의 어깨를 확 밀치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마!”

태윤이 허둥지둥 달려가는데도 이세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개선장군 같은 기세로 빠르게 걸어간 이세희는 마차에 냉큼 올라탔다.

“마마, 발이 아프시지 않습니까.”

애틋한 얼굴로 태윤이 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렸다. 이세희는 생전 처음 보는 차디찬 눈으로 태윤을 지그시 노려보며 입술을 벌렸다.

“그러면 진작 나서셨어야죠. 이제 나서서 뭐 한단 말입니까?”

매몰차게 태윤을 몰아낸 이세희는 문을 세게 닫았다. 태윤이 주먹을 쥐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이세희를 바라보았다. 후, 하고 무거운 숨을 내쉰 이세희는 장막을 내리며 외쳤다.

“출발해라!”

내가 못난 탓이었다. 윤은 마차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가슴이 뜯어지는 고통을 참으며 걸었다. 아바마마에게 예쁨 받고 싶고, 그러면서도 이세희의 곁에 머물고 싶다는 전제조건이 애초부터 잘못되었다. 둘 중 하나는 포기했어야 했다.

걸을 때마다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고통에 태윤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가 이리 아픈데, 세희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옆에 있지만, 지켜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혐오감에 휩싸여 태윤은 앞을 분간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세희가 마차에서 내려 태얼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요요하게 쏟아지는 달빛 속을 걷는 이세희의 자태에 머리가 멍해졌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발바닥의 고통을 참으며 걷는 모습조차 신음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태얼궁을 지키는 금군과 위병들도 경국지색에 홀려 눈을 떼지 못했다.

“대장, 이리 오세요.”

이세희는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 중, 물기에 서린 두 눈을 단번에 알아챘다. 태윤은 금군들 앞에 서서 태연한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초점은 흐렸고 시커먼 눈가는 희미하게 붉었다. 태윤을 안아본 자신만 알 수 있는 흔적이었다. 이세희는 냉정한 눈으로 태윤을 보다, 흐릿하게 웃었다. 태윤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보일까 걱정이 되어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면서도 이세희의 명령에 따라 성큼성큼 다가가, 계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업히라는 뜻이었다. 땅에 손을 짚은 태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 잘못이니, 내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었다. 이세희는 이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걸 쉴 새 없이 되뇌며 태윤은 눈을 번뜩였다.

“그러셨어야죠.”

이세희는 입술을 비틀어 웃고는 태윤의 등에 업혔다. 단단한 팔이 목에 감겼다. 태윤은 손을 뒤로 둘러, 이세희의 엉덩이를 받쳤다. 태윤의 걸음이 정갈하게 움직였다. 이세희는 달빛 아래에서 보이는 태윤의 뒷목을 눈으로 음미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이 피부를 스치자 태윤의 몸이 흠칫 떨렸다.

“…사실, 나도 싫어.”

바스러질 것 같은 건조한 목소리에 배인 고통과 슬픔에 태윤은 눈물이 나올 거 같아,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었다. 이세희는 무감한 눈으로 태윤의 옆얼굴을 살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도 지켜봐. 이제 나서면 안 돼.”

태윤은 고개를 젖히고 숨을 잘게 내쉬었다. 그거만큼 더한 고통이 어디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무자비하게 원하지도 않은 관계를 맺는 걸 지켜만 보라니.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세희가 다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몇 번이나 몸을 앞세웠다. 태윤은 울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울어서 뭐 한다고…. 내가 약해서 벌어진 일인 것을. 이세희의 말이 맞았다. 그를 사랑했다면, 진작 나섰어야 하는 일이었다. 태윤은 자신의 뒤에서 공포에 덜덜 떠는 이세희를 느끼며, 비참함에 고개를 숙였다.

“세희야.”

가장 오지 않길 바랐던 순간이 도래했다. 침전의 문이 열리고, 황제가 우뚝 서서 이세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윤은 감정을 잠재우고 충직한 신하의 가면을 썼다. 여리박빙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우선 숨을 죽이는 게 중요했다. 침착하자.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자신에게 말을 속삭이며 태윤은 무릎을 굽혀 이세희를 내려주었다. 이세희가 바닥에 발을 디디며 신음하자 태공이 혀를 찼다. 발바닥이 지끈지끈 아픈 걸 참으며 이세희가 태공에게 걸어갔다. 그때까지 팔짱을 끼고 태산처럼 서서 이세희를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던 태공이 손을 뻗었다.

“아아!”

이세희의 머리채가 잡혔다. 무릎을 꿇고 있던 태윤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황제가 고개를 강제로 젖히게 했다. 이세희가 신음하며 휘청거렸다.

“이상하단 말이야. 생전 안 그러던 네가 태자에게 손을 잡아 달라 하고. 윤이에겐 업어 달라 그러고.”

황제가 조곤조곤 얘기하면서도, 냉엄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도리어 눈빛이 스산했다. 광기와 질투에 휩싸인 남자의 눈빛에 태윤은 입술을 핥았다. 목이 탔다. 황제의 눈에서 전해져 오는 열기에 침전 안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세희는 머리채가 잡힌 채로 태공을 죽어라 노려보다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발바닥에 심한 자상을 입은 걸 아시면서, 신첩이 걸어 다니길 원하시는 겁니까. 태의도 조심하라고 그랬습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너의 태도가 수상하다는 거지.”

황제가 싱긋 웃었다. 그는 머리채를 잡은 채로, 이세희를 침상에 내던졌다. 아무리 폭신하고 부드러운 침상이라도 갑작스럽게 부딪치면 아픈 게 당연했다. 어깨로부터 전해지는 통증에 이세희가 몸을 웅크리고 신음했다.

개새끼, 진짜 죽여버리겠어.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보료를 꽉 잡은 이세희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슬쩍 돌렸다. 태윤이 보고 있나. 황제에게 가려져, 태윤이 보이지 않았다. 당혹스러움에 식은땀을 흘리는데, 목에 손이 닿았다. 뜨거운 황제의 손이었다. 이세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짐에게 일부러 그러는 것인가?”

목을 당장이라도 조일 것처럼, 힘을 조였다 푸는 황제의 손아귀에 잡혀 이세희는 침을 느리게 삼켰다. 예상하고 저지른 일이었지만, 실제로 겪으니 몸이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렸다. 황제에게 목이 졸린 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당할 때마다 진저리나게 싫었다. 정말 죽을 거 같아 두려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태윤을 황제로 만들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아 이세희는 눈을 감고 할 말을 골랐다.

“…신첩도 이제 살아야 하니까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살기 위해 선택한 차악이었다. 이세희는 황제에게 목이 잡힌 채로, 보료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신첩의 가족도 살아야 하고요.”

“흐음, 네가 그럴 애가 아닌데?”

황제가 홧김에 목을 조였다. 보료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이세희가 밭은 숨을 내쉬었다. 발이 버둥거렸다. 보료를 탁탁 두들기며 살려 달라는 뜻을 보이자 황제가 손에 힘을 풀었다. 바들바들 떨던 이세희가 몸을 굳히고서, 숨을 잘게 헐떡였다.

“하아, 하아…!”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생사가 오락가락 할 정도로 목이 졸렸다.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은 강간만큼 익숙해지지 않았다. 당할 때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어쩔 수 없이 떨었다. 이세희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후두득 떨구어 내고 눈을 돌렸다. 눈시울이 목이 졸려 붉어졌다. 황제에게 가려져 있던 태윤이 보였다.

태윤이 띠돈에 손을 대고 있었다.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눈을 빛내며, 검을 빼내려 손을 느리게 움직이는 태윤을 본 이세희는 머리가 굳어졌다. 태윤은 제 아비를 향해 검 손잡이에 손을 대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제 아비를 노려보는 게, 살의로 범벅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아래에 깔려, 멍한 눈으로 허공을 더듬는 이세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눈이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인지. 황제의 눈이 이세희를 따라 향하려던 찰나, 이세희의 입에서 울음이 흘러나왔다. 구슬픈 울음이 차츰 흘러나오자, 황제가 이세희를 보았다.

“…대장.”

이 모든 걸 지켜보던 부관 한서진이 재빠르게 태윤의 손을 잡았다. 핏줄이 융기할 만큼 힘이 바짝 들어간 태윤의 손등을 짓눌렀다. 엄청난 힘과 순발력으로, 남들이 보기 전에 태윤을 저지한 한서진은 재빨리 속삭였다.

“지금은 안 됩니다.”

태윤의 눈이 멍하니 돌아갔다. 한서진은 엄한 눈으로 태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태윤이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눈치가 빠른 한서진이 태윤만 보고 있었기에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태윤은 반역죄로 끌려갔으리라. 무엇보다 이세희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어서, 자신을 제외하고 태윤을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이세희가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라…. 한서진은 기묘하게 흐르는 판도에 눈을 빛내며 입술 끝을 올렸다. 한서진은 황제에게 눌려, 목이 졸리는 이세희와 그를 지켜보는 태윤을 돌이켜 보다 자신이 그 사이에 섰다.

그때까지 숨을 못 쉬고, 자각도 못 하던 태윤이 눈을 깜박였다. 황제가 양손으로 이세희의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세희의 발이 거칠게 움직이며 보료를 밀어냈다. 두 팔은 황제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흐윽, 하고 울던 이세희가 황제를 노려보며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신첩이, 허윽… 살고자 하는 게…!”

황제가 듣기 싫다는 듯 목젖 아래를 양손으로 꾸욱 눌렀다. 황제의 눈이 광기에 젖어 번들거렸다. 숨이 멎어가고, 머리가 그 때문에 아득히 멀어졌다.

아, 윤아…. 안 돼, 여기선…. 이세희는 애써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세희야, 네가 고분고분하게 나올 아이는 아니잖니?”

황제는 능숙하게 힘을 조였다, 풀며 이세희의 목을 계속 조였다. 숨을 쉴 수 없어,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 황제가 놓아주었다. 고개를 틀며, 허억, 허억,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자 다시 목젖을 누르는 손에 이세희가 울음을 왈칵 터트렸다.

무서워. 윤아, 너무 무서워. 살려 달라고 윤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잡아야 하는 건 황제였다. 죽도록 싫었다. 죽일 만큼 증오하는 사람에게 지금은 손을 뻗어야 살 수 있었다. 이세희는 숨을 쉬려 고개를 돌리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아주 희미하게 나온 목소리를 들은 황제가 손을 떼어냈다.

“하아…! 아흐, 흐윽…!”

황제도 이세희를 따라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도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세희가 태자며, 태건을 건드리고 다닌 소식이 들렸을 때부터 그는 이세희의 아름다움에 아들들이 홀린 게 아닌가 의심했다. 특히 태자와 손을 잡고 걸었다는 이야기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자신의 손 한번 잡아주지 않은 이세희였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했다. 자신을 약 올리려 드는 이세희가 미워서, 목을 조르며 길들일 생각이었다.

이세희는 목이 졸리는 걸 가장 무서워했다. 팔다리가 맨 정신에 부러질 때보다, 목이 졸릴 때 이세희는 진심으로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하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이세희였다. 그런 이세희가 사 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오랜만에 애원조의 말을 내뱉었다.

‘페하, 제발….’

처음 이세희를 가졌을 때를 제외하고 듣지 못했던 제발, 이란 말이 황제의 마음을 흐트려 놓았다. 몇 년 전에도 목을 졸랐을 때, 한마디도 벙긋하지 않았던 이세희가 제발, 이라고 속삭였다.

“세희야.”

황제가 희열에 차 이세희를 불렀다. 졸린 목을 붙잡고, 구석에 웅크려 흐느끼던 이세희가 얼굴을 들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적시는 눈물에 황제는 마른침을 삼켰다. 세희가 저런 눈빛을 한 적이 있었던가. 체념에 섞이면서도, 자신을 애원하는 눈으로 보다니. 황제는 몇 년 만에 얻어낸 쾌거에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세희는 점차 다가오는 황제를 떨리는 눈으로 보다, 슬쩍 위를 보았다. 태윤이 보고 싶었다. 아주 멀리, 태윤의 눈이 보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한 이세희는 입술을 달싹였다.

“폐하, 제발….”

그사이, 졸린 목이 쉬고 가라앉았다.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목이 쓰라리게 아파와 이세희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 말을 내뱉어 황제의 시선을 잡아야 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말이었다. 제발, 이란 말은 황제가 미치게 좋아했으니까. 그가 행복해 웃는 게 보기 싫어 죽을 위기에 처해도, 팔다리가 부러져도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지켰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여태 힘겹게 지켜온 것들이었다. 그래야 자신이 살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그것들을 버릴 때가 되었다. 태윤이 황제가 된다면, 그 무엇도 할 수 있었다. 이세희는 바스러진 자존심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울지 않으려 해도,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장마가 끝난 지 오래인데, 다시 장마가 온 것 같은 열기와 습기에 휩싸여 이세희는 겨우 눈을 떴다.

“세희야, 이제 도망가지 않고 짐의 곁에 머물 것이냐?”

황제가 설렘에 차 물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 보이는 황제를 응시하며 느리게 입을 달싹였다.

“그러겠다고… 신첩이….”

내가 널 죽여 버릴 거야. 그러기 위해서 네 곁에 머무는 것뿐이니까.

이세희는 이를 갈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대답했다. 황제는 더 이상 차오르는 흥분을 인내하지 못했다. 그가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이세희는 떨리는 팔을 움직여 황제의 목에 둘렀다. 황제의 흥분이, 신음이, 이세희와 맞닿은 입술에서 증폭되어 갔다. 그의 떨림과 설렘을 입술로 빨아들이며 이세희는 차가운 눈을 부릅떠 한곳을 응시했다.

태윤이 있었다. 모든 걸, 태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 이세희는 태윤을 좀 더 집요하게 보기 위해 황제를 부둥켜안고 상체를 일으켰다. 황제는 그걸 자신에게 안기는 걸로 착각하며 이세희의 몸을 더듬었다. 능숙하게 바지 안으로 파고들어 엉덩이 사이를 더듬는 두터운 손길을 견뎌내며 이세희는 태윤만 보았다. 태윤도 이세희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주먹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맨살에 파고들어 피가 맺혔는데도 태윤은 주먹을 풀지 않았다. 고통만이 자신을 견디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아응….”

황제와 입을 맞추며 이세희가 신음을 흘렸다. 황제는 숨을 헐떡이며 이세희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세희야. 그의 신음이 나직하게 흘러나와 피부를 적셨다. 이세희는 견딜 수 없어 눈을 감고 태윤을 상상했다. 자신의 품에 안기던 윤이를. 윤이의 뜨거운 내부와 자신을 보며 훌쩍이던 애틋한 얼굴을. 마마, 제발. 애원하던 윤이를 생각하자 자지에 열이 돌았다. 이세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폐하….”

그나마 황제는 윤의 아버지였고, 윤이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뜨거운 체온이나, 자신을 안는 억센 팔이나. 황제를 부르며 윤을 연상했다. 윤아, 속으로 윤을 부르며 눈을 떴다. 이세희의 눈에 얼기설기 얽힌 흥분을 본 태윤은 눈을 감았다.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넝마가 되다 못해, 찢기고, 갈겨져, 형체를 잃었다.

고통임을 알면서도. 버거워서 윤은 그를 보는 걸 포기했다. 대신, 전해지는 고통은 모두 머리에 새겨 넣고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황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였다.

“읏…!”

이세희는 내부로 파고드는 검지에 미간을 찌푸렸다. 뒤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다. 내부로 손가락이 들어오면, 처음 그에게 당했던 고통스러운 날이 떠올라 저절로 몸이 웅크려졌다. 자지도 식었다.

“아…! 아아!”

내부를 쑤시는 손가락이 이제 두 개가 되었다. 열상을 입은 내부를 쿡쿡 찌르는 손가락에 견딜 수 없어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윤을 생각하자 우습게도 자지가 서기 시작했다. 윤에게 박고 싶어 안달이 났다. 황제에게 안겨, 뒤가 박히면서 윤이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머리에도, 마음에도 윤이 꽃처럼 피자 조금씩 견디기 편해졌다.

“…세희, 너….”

황제는 손가락 세 개를 넣어 푸욱, 푹, 소리 나게 박다가 자신의 아랫배를 문지르는 뜨거운 자지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세희는 황제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천천히 돌렸다. 황제는 서둘러 이세희의 구멍에 박혔던 손가락 세 개를 빼내고, 자신의 거대한 자지를 갖다 대었다. 이세희는 회음부를 긁는 두툼한 귀두에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오밀조밀한 주름을 비비고, 그 다음 탱탱한 고환까지 문지르는 귀두에 입을 틀어막았다. 으응, 읏, 하고 터지는 신음이 손바닥에 닿아 뭉개졌다. 황제는 상기된 얼굴로 이세희를 보며 꺼덕이는 자지를 입구에 대고 눌렀다.

“흑….”

이세희는 일부러 눈을 반쯤 감고, 황제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노력했다. 태윤이 떠오른다. 윤의 안에 자지를 세게 박는다고 생각하자 자지가 힘차게 섰다. 뒤로 박힐 때는 느낄 수 없던 쾌감이 자지에 감돌았다. 이세희는 멍한 눈으로, 황제의 얼굴 위에 윤을 새겨 넣으며 이 간음을 잊으려 했다. 황제는 이세희의 귀두가 번들거리며 액에 젖는 걸 보고 나서야 희열에 차 짙게 웃었다.

“드디어….”

이세희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하지만 윤이는 저렇게 안 웃었는걸. 윤이는, 더 환하고 햇살같이 웃는 아이였다. 윤의 내부에 자지를 세게 박고, 그 안에 사정하는 걸 상상하자 아랫배에 쾌감이 응고되었다.

“세희 네가 느끼는 거구나. 그렇지?”

황제가 구멍에 대고 귀두를 꾸욱 눌렀다. 입구가 확 벌어지는 뜨뜻한 아픔에 이세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온몸에 작열하는 고통에 죽고 싶었다. 내장이 확 쏠리고, 내벽이 자지에 뒤틀리는 아픔에 헐떡였다. 눈이 감기고 눈물이 장맛비처럼 흘러내렸다.

“하아, 세희야…!”

황제가 신음을 터트리며 이세희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이세희의 두 다리가 황제의 어깨에 걸쳐지고, 허리가 들린다. 삽입이 그만큼 깊어졌다. 이세희는 배를 뚫을 것처럼 들어오는 자지에 숨을 멈추고, 눈을 힘겹게 떴다.

환상은 환상일 뿐이지…. 눈물이 걷히며, 현실이 시야에 들어찼다. 자신은 황제에게 안기고 있었다. 죽어서라도, 절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말이 입술 밖으로 울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아, 좋아…!”

황제의 눈이 커졌다. 이세희의 내부에 박힌 황제의 자지가 더 커지며 내부로 파고들었다. 이세희는 황제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싫어, 그의 뒤통수를 잡고 자신 쪽으로 당겼다. 황제의 몸이 더욱 아래로 숙여지며 자지가 안으로 들어와 숨을 쉬기가 힘들었지만, 이세희는 숨을 간신히 몰아쉬며 앞을 보았다. 시선 끝에 태윤이 있었다. 태윤을 보자, 잠시 시들었던 자지가 다시 힘을 받아 섰다.

“세희야, 하아…!”

죽여 버릴 거야. 이세희는 귀에서 연신 터지는 황제의 신음을 참으며, 앞을 노려보았다. 힘을 줘서 보지 않는 이상, 태윤을 볼 수 없었다. 이세희는 자신을 꽉 끌어안고, 안이 헐 것처럼 박아대는 황제를 받아들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응, 읏…! 아….”

무력하게 신음이 터졌다. 기름도 없이, 무지막지한 크기로 뚫고 들어오니 구멍에 열이 붙은 듯 뜨거웠다. 메마른 내벽에, 박히고, 비벼지는 거대한 자지에 안이 모두 마모될 것 같았다.

“아응, 좋아…! 아앗…!”

몸이 휙 돌려져 이세희는 황제 위에 올라타게 되었다. 안이 쓸리는 고통에 눈을 크게 뜨고, 이세희는 고개를 젖히며 흐느꼈다. 너무 아팠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비참한 건, 황제에게 좋다는 말을 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죽고 싶었다. 진심으로 아까 목이 졸렸을 때 죽는 게,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정신을 차려 보니, 이세희는 태윤의 등에 업혀 있었다. 두 팔이 힘을 잃어 태윤의 가슴팍에서 머리카락과 함께 흔들렸다. 달이 비치는 황궁을 걷던 태윤은 이세희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자 나직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피를 흘리셔서….”

아, 그래서 이렇게 아팠던 건가. 좋다는 말에 흥분한 황제가 발정 난 말처럼 박아댄 대가는 혹독했다. 이세희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움직여 태윤의 목을 휘어 감았다. 태윤이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감고 태윤의 숨소리, 등의 움직임, 억센 팔을 다 느끼던 이세희가 힘겹게 웃으며 물었다.

“…왜 울어.”

태윤은 말이 없었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달이 헤엄치는 어둠을 보며, 침묵을 지켰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차츰 안에서 퍼지는 고통에 이세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 이상으로 몸이 아팠다. 목도 졸렸고, 내부에도 말자지 같은 게 계속 박혀 죽을 것 같았다. 너무 아픈데…. 차츰 의식이 가물어지고, 눈앞이 흐릿해질 때쯤 태윤의 묵직하고 매끄러운 중저음이 들렸다.

“아바마마를 죽였어야 했습니다.”

“…안 돼.”

이세희는 몸을 웅크리며 뒤에서 속삭였다.

“넌 황제가 되어야 해…. 그래야, 우리가 되는 거야….”

너와 나, 가 아니라 우리가 되어야 해. 이세희는 마음속으로 그 말을 중얼거리며 태윤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힘이 쭉 빠진 손을 들어 소리 없이 오열하는 태윤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태윤은 투박하고, 방향을 잃은 손을 가만히 느꼈다. 태윤은 한쪽 팔을 풀고, 그 손으로 이세희의 손목을 잡았다. 손바닥에 지그시 입술을 맞댄 태윤은 눈을 떴다. 찬란한 화요궁이 보였다. 이세희가 갇힌 아름다운 감옥.

그곳을 향해 느리게 걸어갔다. 태윤은 숨을 죽였다. 침전에 들어간 태윤은 궁녀들을 물리고, 이세희를 직접 안아 침상에 눕혀주었다. 늘 그렇듯 목침을 끌어당겨 지친 이세희의 머리에 대어주었다. 금침까지 끌어당겨 턱 끝까지 덮어주던 태윤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건 둘만의 대화 방식이 되었다. 자연스레 접촉을 하며 남들의 이목에서 벗어나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어좌에 오를 거야.”

태윤의 눈이 단단해졌다. 완연한 사내로 여문 태윤이 하얗게 질린 이세희의 뺨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황제가 되겠어. 널 위해서….”

오로지 널 위한, 황제가 될 거야. 태윤은 확고한 음성으로 말하며 이세희의 눈가를 덮었다. 손바닥에 닿는 눈물에 태윤은 입매를 굳혔다. 어둠을 노려보는 태윤의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분노는 증오가 되었고, 방향과 목적이 확실해진 검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게 막은 이유가 황제가 되기 위함이라면, 황제가 되겠다.

이세희를 재우고 나온 태윤은 자신을 기다리는 한서진을 보았다. 한서진은 한 번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태윤 앞에 다가와 입을 벌렸다.

“저와 퇴궐하시죠.”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구나.”

한서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장께서 목표가 생기신 거 같아, 기쁠 따름입니다.”

한서진이 손을 내밀었다. 태윤은 냉소를 짓다가, 한서진의 예쁜 손을 맞잡았다. 자신을 휘어 감는 어둠을 빠져나오며 태윤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이유는 이제 이세희가 뒤에 있는 순간뿐이었다.

“바빠지겠군.”

태윤은 앞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

달이 휘영청 떴다. 보름이 다가오는 시점이라, 달이 구슬처럼 둥글어지고 있었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더위가 무르익기 시작하는 기점이라 보송보송한 솜 같은 구름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빗물처럼 쏟아지는 요요한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태윤은 저택으로 들어섰다. 제 주인답지 않게, 쾅! 하고 문을 여는 소리에 앞뜰에서 고기를 구워 먹던 노비들이 고개를 휙 돌렸다.

“시방, 누구여!”

처음에는 도둑인 줄 알고 들고 있던 칼을 내밀던 노비는 면사처럼 두른 어둠을 가르고 나온 미청년에 눈을 크게 떴다. 한 폭의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 신선 같은 고아한 외모에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처음에는 그가 누군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내던 이들은 그의 이마에 둘린 머리띠에 허리를 숙였다. 검은 비단에 金이란 한자가 수놓아진 머리띠를 한 이는 금군밖에 없었다. 그들이 불 앞에서 허겁지겁 주저앉는 모습을 유들유들한 미소를 띤 채 지켜보던 한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뭣도 아닌 놈들이 소고기라…. 딱 보아하니 대장님께서 마지막 잔치라도 해 주신 모양입니다.”

예쁘장하고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쇳소리가 낀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태윤은 자신을 향한 희미한 조롱에 미간을 찌푸렸다. 한서진은 뒤를 빤히 돌아보던 눈을 돌렸다. 식욕을 돋게 하는 소고기 냄새에 넘어간 한서진이 손을 뻗으려 하자, 태윤이 다가와 강한 손길로 어깨를 탁 잡았다.

“먹게 내버려 둬라. 잘 먹고 다니는 놈이 노비들 것을 뺏어먹고 싶은 거냐?”

“대장을 보필하느라 배고팠단 말입니다. 폐하께서 한번 정사를 맺으시면 얼마나 오래하는지 아시면서….”

한서진이 투덜거렸지만, 태윤은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팔을 잡아 저택으로 이끌었다. 아직도 바닥에 납작 엎드린 노비들을 향해 “먹어도 된다. 신경 쓰지 말거라.” 하고 말했다. 건성으로 뒷수습을 마친 태윤은 무뚝뚝한 눈빛으로 저택을 보았다. 그 옆모습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던 한서진은 입술 끝을 올려 조용히 웃었다.

몸을 숨긴 짐승 같지 않은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제 몸을 숲에 숨기고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눈빛이 매서웠다. 여태 저 감정을 눌러왔던 게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눈빛에 증오가 아슬아슬하게 차올랐다. 툭, 치면 쏟아질 것 같은 요동치는 감정에 한서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양감에 차 웃었다. 세상 일이 관심 없어 보이고, 오로지 황제의 말에만 움직이던 인형 같은 태윤의 변화에 한서진은 가슴이 뛴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그의 분노가 한서진에겐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설렘이었다.

“넌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한계를 넘어, 신경을 쿡쿡 찌르는 한서진의 웃음에 태윤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였다. 한서진이 두 팔을 벌려 태윤을 와락 끌어안았다. 침입과 다름없는 접촉에 태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세희가 안아줄 때는 세상 좋더니, 다 큰 한서진이 자신을 안으려 들자 덥고 짜증만 났다.

“더워. 떨어져라.”

태윤이 서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나직하나, 힘이 실린 목소리에 한서진은 음흉한 미소를 짓고 뒤로 물러났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태윤은 천천히 팔짱을 끼고, 책상에 엉덩이를 대었다. 태윤이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시선을 보내자 한서진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태평한 척 굴었지만, 실은 황제와 화비를 지켜보는 태윤을 달래느라 긴장했는지 어깨에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손을 뒤로 움직여, 땀이 끈적이는 뒷목을 주무르며 한서진이 입을 열었다.

“저희 사이에 말을 아끼는 것도 우스우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물을 것도 없다.”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한서진이 다시 입을 벌리기도 전에, 태윤은 한서진처럼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세희를 구하는 게 내 목적이다.”

“하!”

언제부터 화비를 세희라고 부르는 사이가 된 건지. 한서진이 가소롭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고 피식 웃던 한서진은 미동도 없는 태윤의 표정에 얼굴을 굳혔다. 태윤은 손을 뒤로 뻗어 책상을 짚으며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허리힘으로 단번에 몸을 일으킨 태윤은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서진은 달빛 속으로 빨려 들어오듯 다가온 태윤을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설픈 동정심은 서로를 죽일 뿐이라고요. 대장께서 화비 마마를 생각한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때까지 눈을 내리깔고, 발밑에서 시냇물처럼 흐르는 달빛과 별빛을 보던 태윤이 한서진을 응시했다. 이세희가 황제에게 목이 졸리고서, 뒤가 무참하게 뚫리는 걸 볼 때부터 지금까지 태윤의 눈빛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분노로 응결되어 있었다. 그 끝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진심으로 이세희를 구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범벅이 된 눈을 보던 한서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감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의문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세희를 무사히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애초에 하나였다.

이 궁에서 유일하게 이세희를 사람으로 보는 태윤이 황제가 되어 그를 구해내는 수밖에. 황제가 이세희에게 미친 듯이 집착하고, 숨만 쉬어도 발정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자칫 잘못하면이 아니라 이 일이 발각된 즉시 태윤은 죽는다. 그리고 이 일에 연관된 금군들도. 그뿐인가, 황제는 가문을 멸문시킬 것이다. 살아갈 날이 창창한 한서진은 여기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또한, 그만큼 태윤을 황제로 만들고 싶었다.

오히려 이 일이 도화선이 되어 태윤이 황제가 된다면 아주 좋은 일이었다. 생각을 단번에 정리한 한서진은 손을 떼어내고, 태윤을 올곧은 시선으로 보며 심사숙고하여 말했다.

“황제가 되십시오. 그 수밖에 없습니다.”

“…세희도 그랬지. 나를 황제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태윤은 고통을 역력히 드러내며 눈을 감았다. 그 얼굴에 아로새겨지는 수많은 감정을 읽은 한서진은 턱을 감싸고 신음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친 거지. 태윤이 심성이 고와 이세희에게 동정심을 가질 만했으나 그게 연심으로 번질 줄은 몰랐다. 태윤은 아버지의 것을 탐내지 않는 아들이었다. 착하게 말하면 순했고, 나쁘게 말하면 욕심을 품지 않았다. 어머니가 준 신분의 틀에 갇혀도 현실에 순응했다. 한서진은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태윤의 몸에 천민의 피가 흐르는 걸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황족의 피도 흐르지 않던가. 황제가 될 자격이 반이나 있는 것이었다. 그까짓 법도 따위는 부수면 그만이었다.

그걸 못 한 건 태윤이었다. 애초에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자신을 현실에 가두었다.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새끼는 어미도 포기하기 마련이었다. 죽어가던 새끼가 마지막 발악으로 껍질을 깬 순간, 세계는 변화한다.

한서진은 장마가 와, 불어난 강처럼 깊어진 침묵 안에서 눈을 치켜떴다. 고요한 수면 같은 태윤의 눈을 마주한 한서진이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몸을 바쳐, 대장을 황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한서진이 단번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까지 장난스럽고, 능글맞게 자신을 대했던 부관의 사뭇 다른 태도에 태윤은 의아함을 드러냈다. 입가에 스몄던 웃음을 거두어간 한서진은 충직한 신하가 되어 입을 열었다.

“어좌에 오르실 분은 태자도 아니고, 무혁왕 전하도 아닙니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분은 오로지 대장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오를 명분이 없다.”

“그래서 이세희가 그 명분을 만들어 주겠다는 거 아닙니까?”

태윤이 고개를 돌리고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할 말이 많은지, 입술을 깨물고 숨을 고르던 태윤이 울 것 같은 얼굴로 한서진을 보았다.

“그게 싫다는 거다. 세희를 이용하기 싫어. 나는 세희를 지켜 주고 싶은 거야!”

본심을 드러낸 태윤은 얼굴을 감쌌다. 그의 호흡이 거칠었다.

“그러기 위해서 이세희를 이용해서라도 황제가 되셔야 한다는 겁니다! 영특하신 분이 왜 연심에 빠지셔서 현실을 보지 못하시는 겁니까? 어좌에 오르기 위해선, 명분을 얻으셔야 합니다. 남은 황자들을 죽여서라도!”

한서진이 잇새로 사납게 말을 내뱉었다. 태윤도 살벌한 눈으로 한서진을 노려보았다.

“황자들을 죽이는 데 세희를 이용하란 말이냐? 그렇다면 내가 아바마마와 뭐가 다르단 말이냐! 결국 세희에게 상처를 주는 건 마찬가지인데!”

세희에겐 황제가 되겠노라고, 다짐하듯 말하고 나왔지만 태윤은 세희의 말이 연신 마음에 걸렸다.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는 세희에게서는 장수 같은 기개가 엿보였다. 자신의 목숨이나 몸은 신경 쓰지 않고 불길로 달려들듯한 광기마저 느껴졌다.

세희를 지켜주고 싶어서, 구해주고 싶어서 황제가 되겠노라고 한 건데, 그 과정에서 세희가 다친다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세희가 더 이상 상처 받고 다치는 게 보기 싫어서 황제에게 칼을 빼든 것이었다.

“내 계획의 유일한 목표는 세희가 무사한 것뿐이야. 거기에 나는 중요하지 않아.”

확신에 찬 태윤의 말에 한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젠장, 하고 속으로 욕을 내뱉은 한서진은 최대한 마음을 다독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세희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더더욱 황제가 되셔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 상황에서 이세희를 구해주고 대장께서 돌아가신다면…. 정말 이세희를 노리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폐하께선 어떻게든 이세희를 찾아낼 겁니다. 이세희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 시체를 찾아내서 간음할 분이 폐하란 말입니다!”

태윤도 이미 짐작한 듯 말을 바로 잇지 않았다. 혀를 내밀어, 초조한 듯 입술을 핥았다. 두툼한 팔뚝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긴장을 다독이려 하던 태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금 기회가 있다. 아바마마가 북산에 오르실 때, 세희와 그의 가족들을 내보내는 거야. 황제가 되는 것보단 더 빠르지.”

정말 자신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계획에 한서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젠장, 왜 기회를 발로 차시는 겁니까? 황제가 되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어차피 이세희가 한 번 당하나, 두 번 당하나 뭐가 달라진다고…!”

그때였다. 말을 다 잇기도 전에 태윤이 한서진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엄청난 악력에 숨이 멎고 몸이 단번에 붕 떴다. 한서진이 발을 버둥거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머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사이 서슬 퍼런 빛을 뿜어내는 태윤의 눈과 마주했다.

살의를 번뜩이는 눈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빛이 표창처럼 날아들어 피부에 쿡쿡 박혔다. 신경이 온통 태윤에게 쏠렸다.

진작 이렇게 나왔어야지. 한서진은 목젖이 눌려 발을 버둥거리면서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광기에 찬 미소를 지었다. 태윤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세희에 대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마.”

“…그렇게 좋아하면서, 흐…!”

한서진이 주먹을 쥐고, 방심한 태윤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뻐억, 소리가 나게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윤은 밀리지 않았다. 금세 자세를 다잡은 태윤은 한서진을 짐짝처럼 내던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한서진은 충격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간신히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난 한서진은 졸린 목을 매만지며 비릿하게 웃었다.

“후, 우리가 이런다고… 지금 이세희가 편한 것 같습니까? 이 상황에도 고통 받는 건 우리가 아니라 이세희입니다.”

태윤이 할 말을 잃고 한서진을 보았다. 동요를 보이는 눈빛을 음미한 한서진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관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흐트러진 머리도 정리한 한서진이 반듯하게 서서 태윤을 보며 유려한 입술을 열었다.

“연심 때문에 현실에 쫓겨 미래를 보지 못할 정도로, 아둔해지시면 안 됩니다.”

“지금 내가 세희를 향한 마음 때문에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냐?”

“예.”

한서진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냉소를 지었다.

“작금의 상황에, 이세희 때문에 이성을 잃은 자가 폐하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슴에 훅 들어오는 한서진의 비꼼에 태윤은 이성을 잠시 잃었다. 아버지와 같다는 말이 이렇게 기분 나쁠 수가 없었다. 태윤의 얼굴에 스산한 빛이 감돌자, 한서진이 잠깐 몸을 움찔거렸다.

“지금 나를 모욕하려 드는 것이냐?”

이 상황에서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이틀 안에 세희와 가족들을 제도에서 빠져나가게 해주든가, 자신이 황제가 되든가. 세희를 구해주면 자신은 죽지만, 황제가 된다면 그 기간이 오래 걸려 세희의 고통이 길어진다. 어둠에 몸을 숨기고, 아무리 곱씹어도 자신은 세희의 고통을 볼 자신이 없었다.

“모욕이라뇨. 현실을 보여드리는 거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세희가 도망친다고 해서 그 사람 앞날이 편해질 것 같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더 고달파진다면 모를까….”

그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던 태윤은 머리를 감싸고 땅에 주저앉았다. 어린아이처럼, 몸을 감싸안고 떠는 태윤을 보자 한서진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세희를 지키고 싶어. 세희를 아바마마에게 데려다주고 싶지 않아! 내 손으로, 어떻게 세희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 아바마마의 명령으로 여태껏 세희를 데려다준 나를 내가 죽이고 싶은데!”

“그러니까 더더욱 황제가 되어야지.”

한서진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엉망으로 구긴 채 우는 태윤을 안아주었다. 태윤이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한서진의 옷깃을 꽉 잡았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던지, 손등에 힘줄이 서고 몸의 근육이 바짝 수축했다.

“너도 알잖아, 윤아. 네가 바라는 이세희의 행복과 안전은 이제 너만이 줄 수 있는 거야. 네가 황제가 되어서…. 그 누구도 이세희를 건드리지 못하게. 그를 네 품에 두고 지켜.”

한서진은 너무 울어서, 연신 딸꾹질을 하는 태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세희를 향한 열렬한 마음에 쓴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좋아하면서, 어떻게든 탈출시켜 주려 자기 혼자 전전긍긍했을 태윤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죄책감과 연심에 사로잡혀서 미래를 버리지 마십시오. 마음을 굳게 다잡으시고…. 복수를 생각하십시오. 이세희를 그렇게 만든 폐하께 할 최고의 복수를. 이 차악의 선택이, 폐하께 바치는 최고의 복수가 될 겁니다.”

한서진은 이세희가 선택한 복수를 가늠했다. 이세희는 황제를 아예 춘추에서 애첩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할 선황으로 남게 할 작정인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세희가 태윤에게 했던 의미심장한 말이나, 오늘 황제에게 했던 행동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세희는 황제의 죽음뿐만 아니라, 명예마저 앗아가고 싶은 거다. 황제로서 최고의 치욕과 죽음을 선사해주려…. 이세희가 태윤을 사랑하는지, 그저 패로 이용하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가 태윤을 이용하려 든다면, 자신도 이세희를 이용할 테니까. 그는 그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천민이라고 자신을 무시하고, 태윤을 가소롭게 여기던 자들에게 자신 또한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세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니 이세희가 도망가서도 안 되었다. 한서진은 음흉한 속내를 감추며, 태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친우가 되어 달래 주었다.

“내일 날이 밝아 입궐하시면 마마께 여쭤보십시오. 마마가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마 저와 같은 뜻일 겁니다.”

한서진은 태윤의 양손을 세게 맞잡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대장께서 마음을 굳히고, 황제가 되고자 하면 금군들이, 그리고 수많은 무관들이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저희들의 상관은 오로지 한 분이었으니까요. 저희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건, 늘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신 대장님이셨습니다. 폐하의 명으로 만들어진 금군이지만, 저희를 진심으로 아끼고, 처우까지 개선해주신 건…. 대장님밖에 없었습니다.”

태윤이 눈물이 멈춘 눈으로 한서진을 직시했다. 한서진은 땅에 무릎을 다소곳하게 대고서, 태윤의 앞에 엎드렸다.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대장님의 검이 되어, 대장님을 지키겠습니다.”

*

새벽의 미적지근한 여유를 느낄 새도 없이 더위가 지면을 점령했다. 몇 보만 걸어도 몸이 솥에 익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기승을 부리는 더위에, 황제는 되도록 오시에는 농사를 쉬라는 명까지 내렸다. 한여름의 더위가 무르익다 못해 절정으로 치닫는 시기가 되면 해가 진 저녁까지도 열기가 이어지니, 더위를 먹어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귀한 얼음을 무관과 위병에게 지급했고, 그 뒤로는 가장 약한 노인과 어린이, 산모들에게 일정량의 얼음을 나눠주었다.

그러나 능실에 보관된 얼음을 가져와 백성들에게 나눠주던 황제는 정작 얼음은 쳐다보지도 않고 몇 시진째 사냥터에서 활을 쏘고 있었다. 겨울에는 건강한 밀색 피부가, 여름에는 건강하게 그을려진 그의 구릿빛 피부에 땀이 송송 맺혀도 그의 얼굴엔 일그러짐이 없었다. 시위를 과감하게 당기는 다부진 손끝도, 과녁을 응시하는 새카만 눈도 더위에 인한 짜증이나 동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나라의 지엄한 존재인 황제가 저리 나오니, 그를 보필하는 궁인들은 어지럼증을 느껴도 내색하지 못했다. 당장 쓰러질 것 같아도 두 다리에 힘을 줘 버텼다.

“더우면 차양막 안에서 쉬거라. 짐을 보필하다가 너희들이 병나겠구나.”

시위를 놓기 전, 눈을 힐끗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던 황제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눈웃음까지 지어가며 미천한 궁인들을 달랬지만, 그들은 지레 겁이라도 먹은 듯 납작 엎드리며 “어찌 천한 소신들이 폐하가 계신데 쉴 수가 있겠사옵니까. 그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읍소했다. 그 소리를 무감한 얼굴로 감상하던 황제가 잘생긴 입술을 달싹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고, 황제의 손끝에서 화살이 빠르게 날아갔기에 소리는 단숨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곳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흠….”

황제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린 순간, 저 멀리서 내관이 붉은 깃발을 올렸다. 명중이었다. 궁인들은 “폐하, 명중이옵니다!”라며 호들갑을 떨었으나 당사자인 황제는 감흥이 없었다. 고요한 시선으로 과녁을 유심히 보던 황제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대신들에게 늘상 보여주던 그린 듯한 웃음이 아니었다. 본심이 녹아든 미소는 한겨울의 서리만큼 차가웠고, 무수한 담금질로 완성된 검처럼 뾰족했다. 이지적이고, 부드러운 면모가 강해 언뜻 유약해 보이는 얼굴에 얼음장 같은 미소가 감도니 분위기가 절로 예민해졌다. 태감은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등이 덜덜 떨렸다.

“세희는 어떻다고 하더냐?”

황제는 손을 아래로 뻗어, 허벅지에 고정한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들었다. 황자 시절부터 단련된 사람답게 그는 보지 않고도 정확한 동작으로 화살을 빼내고, 활에 걸었다. 웬만한 힘으로는 당길 수 없는 시위를 우습게 당겼다. 그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올까 두려워진 태감은 눈을 아래에 고정하고서 입술을 서둘러 움직였다.

“아직 의식을 못 차렸다고 하십니다.”

“겨우 그거 가지고?”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눈을 힐긋 들어 올린 태감은 서릿발처럼 떨어지는 황제의 시선에 화들짝 놀랐다.

“겨우 그 정도로 쓰러질 애가 아니라는 건, 그대가 잘 알지 않나.”

그 즉시, 황제의 손에서 활이 공기를 대나무 쪼개듯 가르며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전과는 다르게 화살이 매우 빠르게 날아가 과녁에 콱 박혔다. 과녁에 있던 두 명의 내관도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깃발을 움직일 여유가 없었다. 콰악, 하고 나무판에 내리꽂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몸에 소름이 돋아 움직일 수 없었다. 내관 중 한 명은 살의가 깃든 듯한 소리에 벼락이라도 들은 것처럼 주저앉아 식은땀을 흘렸다. 그나마 연륜이 있는 내관이 허겁지겁 깃발을 흔들었다.

황제는 당연하다는 시선으로 붉은 깃발을 응시하다, 고개를 슥 내렸다.

“그대는 지금까지 짐의 곁에 머물면서 세희도 오래 봐왔지.”

“예, 폐하.”

화살을 흙바닥에 내리꽂은 황제가 몸을 숙였다. 태감은 가까이 다가오는 황제의 체취에 미세하게 떨었다. 완연하게 풍겨져 오는, 땀에 젖어 물씬 풍기는 체취가 마치 이세희와 동침하던 황제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유일하게 황제가 정복할 수 없었던 대상. 독을 품은 듯, 화려하고 요사스러운 외모를 가져 황제를 홀린 이세희. 황제의 아래에 깔려도 한 번도 애원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황제도 그런 이세희를 우습게 여겼지만, 이세희가 몇 년을 넘어가도 굽혀지지 않자 애가 타는 게 궁인들 눈에도 선하게 보였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도 태감만큼 이세희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세희가 황제와 있든, 없든, 지척에 머물며 그를 돌봐온 게 태감이었다. 본래 태감은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세희가 호위내관을 오로지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 도망갔을 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려 황제에게 알린 대가로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세희의 짜증과 증오를 한 몸에 받아야 했지만, 태감은 이세희의 아름다움에 몸을 숨겨 여태까지 살아왔다.

지금 바라는 게 있다면, 부디 이세희가 황제의 품에 폭 안겨 자신에게 안락한 삶을 주는 것이었다. 근 삼 년간 황제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동물 같았던 이세희는 최근엔 묘하게 너그러워진 게 있었다. 평생을 황제만 증오할 것 같던 이세희가 처음으로 황제의 뺨을 매만졌다.

그 순간 태감은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다. 눈을 들어 올려, 황제를 보며 흐릿한 미소를 짓는 이세희만이 오색찬란한 색을 빨아들인 것처럼 빛이 났다. 하얀 손으로 황제의 얼굴을 쓰다듬고, 어깨에 손을 올려 기대자 숨이 콱 틀어 막혔다. 미인이 작정하고 웃음을 치며 사근사근하게 안기자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탁해졌다.

냉소만 짓던 이세희가 슬쩍 부드럽게 웃었을 뿐인데 세상이 함께 웃었다. 그가 미동도 하지 않을 땐 일상처럼 느껴지던 광경이, 미소 한 번에 보석 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이게 느껴졌다.

“그대가 보기에도, 세희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 미소에 홀딱 빠져, 이세희를 삼 일간 태얼궁에 가둬 놓은 것도 모자라 이젠 의심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세희가 자신에게 어여쁜 미소를 보여줄 리가 없다는 게 황제의 뜻이었다. 자신이 보여줬던 모든 애정을 부정당한 황제는 이세희의 손길에 좋아 몸을 떨면서도, 그의 고분고분함을 믿지 못해 안달이 났다. 믿고 싶으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부인하는 황제의 눈이 쉴 새 없이 떨렸다. 그게 마치 사랑에 애가 타는 소년 같아 태감은 좀 더 고개를 올려 황제를 직시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조심하면서도,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폐하….”

태감이 갈라진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다. 마음에 담긴 이세희를 보는 황제의 시선이 순식간에 음험해졌다. 스산한 빛이 감도는 검은 눈이 더욱 음울하게 빛나, 사람을 매섭게 만들었다. 눈빛이 제 숨통을 쥔 듯한 압박감에 태감은 움츠러들었다. 이세희는 어떻게 이 눈빛을 마주하고도 그렇게 대거리를 하는지…. 천민인데도 굽힘이 없는 이세희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 아이가 짐을 사랑할 리도 없는데 왜 갑자기 그러는 것일까?”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삐뚜름하게 자리 잡혔다. 짓궂은 미소와 달리, 눈은 이세희를 향한 의심으로 똘똘 뭉쳤다. 얽히고설켜 풀릴 길이 없어 보이는 실타래였다.

“폐하, 마마께서는 이제 깨달으신 것 같습니다.”

황제의 의문을 태감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근 사 년간 길을 들이려 고문 같은 폭행과 폭언을 일삼아도 뭉개지지 않았다. 찍어 누를수록 반발했다.

그러나 이세희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가족이었다. 처음에는 아버지 때문에, 그 후에는 여동생들 때문에 이세희가 자진해서 황제의 품에 안기지 않았던가. 그 쉽고도 당연한 이치를 황제는 알지 못하고 의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이 커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태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삶의 노고를 뒤집어써 주름지고 빛을 잃었으나, 눈빛만은 희번득하게 빛나는 태감을 보며 황제는 고개를 젖혔다. 의아함이 감싸인 눈을 깜박이던 황제가 고개를 좀 더 숙여 태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엇을?”

“마마께서 굽히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가족입니다, 가족.”

태감의 확신에 찬 어조에 황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올린 황제가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런단 말인가? 고작 가족 때문에 세희가 짐에게 자진해서 다리를 벌릴 애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제 가족을 감금했냐면서 목을 졸랐을 애가 세희지.”

생각만으로도 오싹한지 황제는 자신의 두꺼운 목을 매만졌다. 실제로 잠들었을 때 이세희가 목을 조른 적이 있었다. 물을 긷고, 나르는 일을 했던 이답게 손힘이 얼마나 세던지 황제는 단숨에 이세희를 제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황제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눈에 핏줄을 곤두세우며, 자신을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 노려보던 그 눈이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그 외모를 한 이세희를 두고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황제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 벌떡 일어나, 이세희를 단번에 제압하고 보란 듯이 목을 졸랐다. 눈이 파들파들 떨리는 그를 바라보며 황제는 씩 웃었다. 그때, 이세희의 눈에는 죽고 싶다는 감정이 간절하게 깃들었다. 또한 이제야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놀란 황제는 놀라서 손을 떼어냈다. 정말 이세희가 죽을까 봐, 등에 소름이 벼락처럼 끼쳤다.

다시 살아난 이세희는 절망에 차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자신을 두고 죽으려 한 이세희에게 화가 나, 이세희를 목욕탕으로 끌고 가 얼굴을 물에 처박았다. 이세희는 숨을 못 쉬어 버둥거렸다.

‘그렇게 죽고 싶으냐? 죽여주마! 짐의 손으로! 절대, 네 스스로는 못 죽을 것이다!’

이세희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황제의 팔을 잡았다. 힘이 빠진 손은 주르륵 미끄러졌다. 머리채를 잡고 놔주자 이세희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황제가 머리채를 잡아끌고 가자, 이세희가 두 손을 힘겹게 움직여 팔뚝을 잡고 버텼다. 뒤를 돌아보자 창백하게 질린 수려한 얼굴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과 초점이 맞지 않는 두 눈. 그러나 살려달라고 빌지 않는 입술에 황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죽는다는 게 뭔지 보여주마.’

선전포고에 이세희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황제는 보란 듯이 이세희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고 꺼내 주지 않았다. 물거품이 살려 달라는 듯 올라오고 이세희의 날씬한 몸이 바르작거리다가, 뻣뻣해졌다. 황제는 다시 머리채를 빼내고, 이세희가 잔기침을 토해내며 몸을 떨었다. 어느 정도 숨을 확보했다고 생각되면 황제는 거침없이 머리를 처박았다. 주변에선 몇 번이고 반복되는 물고문에 하얗게 질려갔다.

그 일을 겪고도 절대 ‘제발’이라는 소리 한번 벙긋하지 않았다. 태감을 동경처럼 바라보며 황제는 불쾌감에 입가를 쓸었다.

“세희가 정빈 일에 겁을 먹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아. 당하면 당한 대로 갚아줬을 애다. 직접 검을 빼들어 정빈을 죽이려 들었을 텐데….”

“폐하,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황제가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태감을 짜증 섞인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태감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며 연거푸 말했다.

“마마께서 가장 무서워하시는 건 마마께서 돌아가시는 게 아닙니다.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다치는 것이지요. 그런데 반대로, 폐하께서 가장 먼저 마마의 가족을 보호하시고 치료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가족들을 만나게 해 주셨지요.”

노쇠했지만 힘이 깃든 태감의 말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지만, 가족 일이라면 세희가 달라지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가르치려 드는 태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늘 하던 일이 아니더냐? 그런데도 세희는….”

그때, 태감이 “폐하.”라고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태감을 보았다. 태감의 눈빛이 돌변했다. 아주 강한 확신으로 다져진 그 눈에 황제는 마른침을 연달아 삼켰다.

“소신도 처음에는 마마를 불신한 게 맞습니다. 하지만 우혜전에 드시어, 몇 년 만에 가족들을 직접 만나시고…. 조카를 품에 안으셨을 때 얼굴이 달라지셨습니다. 외람되오나, 마마께서 궁에 오신 이후로 그리 밝은 얼굴을 보이신 건 처음이신 듯했습니다.”

“…그렇게 조카를 좋아했단 말이냐?”

“예. 그것뿐만 아니라 여동생 두 분과 한참을 끌어안고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겨우 그거 때문에 세희가 달라졌다는 말이냐?”

태감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마껜 가족이 전부가 아닙니까? 천민 출신으로, 가진 건 가족뿐이고 그 가족을 지켜줄 분이 폐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셨으니….”

황제의 눈이 세찬 바람을 맞은 이파리처럼 흔들렸다.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귀가 태감에게로 끌린다. 어쩌면, 이라는 만약의 상황을 두고 믿고 싶은 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황제는 입을 큼지막한 손으로 감싼 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애가 탄 눈빛이었다.

“폐하, 마마의 가족을 제도로 불러들이십시오. 그 가족들을 아껴 주시고, 마마께도 다정함을 보여 주십시오. 어차피 마마의 가족은 천민 출신으로, 외척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 주변엔 폐하의 사람으로 가득 차 있고, 후사도 볼 수 없는 몸이오니….”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대신들이 세희를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혀를 차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태감이 도리어 세게 나왔다.

“폐하, 폐하께서 마마를 지켜 주시는데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그 말에 황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태감은 입가에 미소를 짙게 드리우고서 황제를 향해 말을 아끼지 않았다.

“높은 자리에 올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령 자리는 보존하되, 몸 보양을 위해 제도로만 잠시 불러들이셔서 마마께 자주 가족을 보여주십시오. 실제로 마마께서도 폐하께 말씀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감금을 한 게 아니라, 지켜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리자 감읍하다면서 폐하께 스스로 안겼습니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세희는 한때 사랑만 받는 애첩에 불과하다. 후사도 낳을 수 없고, 외척도 없다. 그를 지켜주는 자도 황궁에 없다.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패가 이세희였다. 지금이야 탈 없이 이용하다가 황제가 죽으면 순장을 시키든가, 그를 탐내는 남자에게 보내면 그만이었다.

이세희는 그 예쁜 얼굴과 몸으로 숨만 쉬어도 되었다. 그러면 황제가 알아서 자신에게 부를 줄 터이니….

“마마껜 폐하밖에 없다는 뜻이옵니다. 폐하, 마마를 의심하지 마옵시고 곁에 두시어 그 마음을 다독여 주시옵소서. 그렇다면, 마마는 더욱 폐하께 비로서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세희에겐 짐밖에 없다…. 그 말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황제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세희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걸 알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부푼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황제는 손을 들어, 세희가 딱 두 번 만져준 뺨을 어루만졌다.

벌써 온기가 식은 것 같아 애가 탔다.

“금군대장을 불러들여라.”

손을 떨군 황제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명을 내렸다.

“앞으로 세희를 태얼궁으로 불러들일 필요는 없다. 세희는 태얼궁 침전에 머물도록 하며, 또한 세희의 가족들은 제도의 별궁에 두어 불편함이 없도록 할 것이다!”

생각과는 다른 말에 태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다시 시작된 감금에 태감이 허둥지둥 말을 붙이려 하자, 황제는 제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짐은 세희를 믿지 못하겠다. 그러니 짐이 지척에 두고 지켜봐야겠노라.”

“폐하….”

“그리고 세희는 발이 다쳐서 거동도 불편하지 않던가? 짐의 밤 시중을 들기 위해 화요궁에서 태얼궁까지 오는 데 불편함을 느껴선 안 되지.”

그 때문에 태자의 손을 잡고 황후궁을 든 것도 화가 날 지경인데…. 황제가 그 생각을 하자,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또, 세희가 정말 진심으로 좋다고 말한 건지도 의문이고….”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 그의 의심에 태감은 눈을 질끈 감고 탄식했다.

저러니까 맨날 이세희한테 맞고 살지. 황제가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나오고, 이세희를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랬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건 황제가 자초했다.

*

앞으로 이세희가 화요궁이 아니라 태얼궁에 머물게 될 거라는 청천벽력에 태윤은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머리는 지끈거리고, 가슴은 돌이 켜켜이 얹어진 것처럼 답답했다. 당장이라도 주먹으로 명치를 두들기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한서진이 능글맞게 굴며 눈을 흘겨 압박을 주지 않았다면, 부관들이 보는 앞에서 체했다는 명분으로 두들겼을 것이다.

내일이면 황제가 궁을 나서는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한서진의 말대로 점차 방법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어좌에 올라 이세희를 자신의 품 안에 두는 것.

그 생각이 퍼뜩 들자, 두루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바마마를 정말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 그리고 남은 동생들도. 한서진과 이세희가 말하는 방법은 최악 중 최악이었다. 모두를 죽여 어좌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태윤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그건 이해가 가지만, 도대체 이세희가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만든다는 건지 태윤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바마마야 이미 이세희에게 홀딱 빠져서 뭐든 들어줄 것 같았지만, 대놓고 동생들을 죽이라는 청을 한다고 해서 그걸 들어줄까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계속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먼 곳에 두던 태윤 앞에 이슬이 맺힌 잔이 내려왔다. 태윤이 멍한 눈을 들어 올리자 그곳에 한서진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인 한서진은 호기롭게 씩 웃었다. 가장 먼저 불쾌감이 서려 태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께서 금군들에게도 얼음을 내리셨습니다. 귀한 얼음으로 차갑게 식힌 물이니, 벌컥벌컥 들이켜십시오. 그러면 한결 속이 나아지실 겁니다.”

뻔히 알면서 하는 말이라 속이 더 부글부글 끓었다. 태윤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서, 보란 듯이 냉수를 한 번에 들이켰다. 식도가 다 얼어붙는 느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덕분에 잠시 잊고 있었던 이성이 돌아왔다. 냉기가 서려, 차가워진 숨을 내뱉은 태윤은 두루마리를 내던지고 턱을 괴었다. 그 상태로 삐뚤어진 눈으로 한서진을 바라보자, 그가 손을 들어 태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 힘드시면 제가 마마께 가서….”

그 말에 태윤이 손등을 찰싹 때리며 위엄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되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한서진이 입술 양끝을 올려 짓궂게 웃었다. 돌아갈 길은 없었다. 한서진의 눈도 단호하게 그리 말했고, 태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행하는 건 격이 다른 일이었다. 심지어 그 일의 중심엔 이세희가 있었고, 태윤은 이 길로 걸어가 그걸 통보해야 했다. 이젠 통각에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너무 아파 태윤은 주저앉고 싶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서웠다. 힘들게 잡았던 이세희의 손을 놔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이 서렸고, 정말 이 끝이 저물어버릴까 무서웠다. 이세희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이대로 영영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이세희를 볼까 봐, 그게 싫었다. 장마가 몰아쳐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곳에 갇혀 이세희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가 주는 열에 들떠서, 쾌락에 신음하고, 그만 보고…. 둘만 알던 비밀을 공공연히 알리고 싶어서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것이 개미같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기침이 나왔다.

너무 애가 타, 태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바람이 살랑살랑 이는 하늘은 장마가 언제 왔냐는 듯 해맑기 그지없었다. 눈꺼풀을 찌르는 강렬한 햇살에 마지못해 눈물을 주륵 흘리면서, 태윤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게 욕심이구나. 모든 걸 다 버리고서라도 갖고 싶은 것.

“…세희야.”

태윤은 이를 으스러지도록 물고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뒤돌아볼 곳은 없었다. 어차피 돌아본다 한들, 자신이 죽여서 무덤으로 간 자들밖에 없으리라.

응어리를 꾹 누른 태윤은 열기로 감싸인 눈으로, 화요궁을 보았다. 이세희를 갖고 싶으냐, 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태윤은 이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갖고 싶다.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 누구도 울리지 못하게. 그리고 그가 운다면, 그의 울음을 닦아줄 수 있는 자가 되고 싶다.

그러니 갖고 싶다면 가져야 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게 싫다면 뺏어야 했다. 설령, 뒤에서 자신과 이세희를 소곤거린다 해도 가져야 했다. 지금도 아버지 품에 이세희를 데려다줘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미칠 지경인데, 앞으로 더 견딜 자신이 없었다.

도망도 막힌 이 상황에서 자신을 살게 해주는 건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게 실감이 났다. 더 참았다간 가슴이 답답함에 터져 죽을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명에 납작 엎드리고, 말을 잘 듣는 아들로 살다가 울화증에 죽을 바에야 실패하더라도 이세희의 손 한 번, 세게 잡아보고 싶었다. 당당하게 말이다.

단 한 번의 마주침의 대가가 죽음이 된다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리라.

갖고 싶은 건 오로지 하나였다. 그리고 전부였다. 자신은 잃어버릴 게 없으니, 더욱 상관없었다. 아버지 손에 죽는다 해도, 그의 기억 속에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될 테니.

그리 결심하며 화요궁으로 걸어가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거듭하여 마음을 방패처럼 만들어도, 이세희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자신을 구하지 못했냐면서 질책할까, 두려웠다. 어쩌면 세희도 도망을 원하고 있었을지 모르니까. 비틀거리며 길을 걷던 태윤은 새삼, 자신의 한심한 상태에 얼굴을 감싸고 웃음을 흘렸다. 이러니 한서진이 걱정할 만했다.

세희 때문에 지금 몇 번이나 생각을 바꾸고, 바보같이 돌아가고, 질투하고. 자신이 이러면 세희도, 한서진도 자신을 믿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을 따를 금군들도.

황제가 되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았단 말이냐. 태윤은 스스로에게 비웃음을 날리며 계단에 발을 디뎠다.

이게 마지막이 되길 바라며, 태윤은 궁인들의 안내에 따라 화요궁 앞뜰을 지나, 회랑으로 들어섰다. 전과는 다르게 어두컴컴한 궁 내부에 태윤이 고개를 돌려 내관을 보았다.

“마마께서는?”

“그게,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셨습니다.”

“뭐라고? 태의는 불렀느냐?”

“아, 그것이… 태의께서도….”

새벽에 데려다줄 때만 해도 의식은 있었는데. 태윤의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졌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상태를 볼까, 하는 마음에 시선이 돌아갔다. 침전에 당장 들어갈 마음에 발을 돌리는데 내관이 태윤의 팔을 덥석 잡았다. 태윤이 내관의 팔을 뿌리쳤다. 전과는 달라진 태윤의 막무가내에 내관이 당황한 듯 쫓아와 태윤의 소맷부리를 움켜잡았다.

“대장님, 안 됩니다. 마마께서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달라붙는 궁인들이 태윤의 힘에 픽픽 쓰러졌다. 태윤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태의가 물러났다고 해도, 정신을 못 차리셨다면 다시 부르는 게 마땅한 것을!”

“대장님!”

“어차피 내 손으로 모셔다 드려야 한다. 내 눈으로 보고, 마마께서 폐하께 가실 수 있는지 판단하겠다!”

태윤은 으름장을 놓고 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 지켜보라고?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붙잡는 내관들을 물리치며 걷던 태윤은 문을 지키는 다른 이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호위내관들을 통솔하는 윤 내관이었다. 오랜 세월 아바마마를 지켜온 측근이었다. 태윤이 입술을 조개처럼 꾹 깨물고 지켜보자, 윤 내관이 문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의식은 차리셨으니, 좀 더 기다려주십시오. 폐하께서도 마마가 의식을 못 차리셔서 소신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소신이 들어갔을 때,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신 상태였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마께서는 정말 괜찮으신가?”

태윤이 궁금한 건 오직 이세희의 안위였다. 타는 듯한 심정으로, 애써 물었다. 윤 내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태윤을 보다 싱긋 웃었다.

“무사하십니다.”

그러니 뒤로 물러나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목을 베고, 이세희에게 가고 싶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태윤은 주먹을 쥐고 등을 돌렸다. 허공을 노려보는 태윤의 눈에 짙푸른 적의가 감돌았다.

기회만 된다면…. 내 앞을 막는 모든 이의 목을 벨 것이다. 세희를 입에 담고, 멋대로 희롱하는 자도, 자신과 세희의 사이를 두고 농담처럼 넘기는 자도.

황제가 된다면.

어제까지만 해도 망설이던 마음은 햇빛에 녹아내렸다.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 태윤은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자신이 왜 망설였는지조차 우스울 정도로 분노가 피어올랐다. 불티는 아주 단순하게 튀겼고, 단숨에 거대한 불길이 되어 모든 걸 불살랐다.

태윤이 갈 때까지 침전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이세희는 몸을 일으켰다. 황제에게 목이 졸리고, 피가 날 정도로 박혔던 아래가 몹시 아팠지만 일어나야 한다는 사명감에 억지로 일어나 숨을 헐떡였다.

“마마, 더 누워 계셔야 합니다. 아직 옥체가 성치 않으십니다.”

이세희를 지켜보던 궁녀가 다가와 만류했다. 서슬 퍼런 눈으로 궁녀를 노려보자, 궁녀가 움찔 떨며 물러났다. 장막을 거둔 이세희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우중충하게 내려앉은 이세희의 분위기에 궁인들이 이세희의 눈치를 살폈다. 힘이 빠진 손을 들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린 이세희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 받아.”

거칠어진 목소리가 우아하게 흘러나왔다. 궁녀들이 홀린 듯 이세희를 보자, 이세희는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게 너희들 일이니 하려무나. 좀 씻어야겠으니.”

궁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미소를 싹 지운 이세희는 정신이 혼미할 때 들었던 황제의 명령을 되새겼다.

앞으로 태얼궁에 머물라. 그리고 가족들은 제도에 머물게 한다. 안 봐도 뻔한 개수작이었다.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뺨을 후려갈기고, 쓰다듬어도 좋아하는 건 그 순간뿐이었다. 자신이 만든 재앙이긴 했다. 한 번도 그 앞에서 애원도, 좋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니 그의 의심이 무럭무럭 커지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자신이 만든 일인 만큼, 무력하게 만드는 것도 자신이었다. 황제가 자신의 말 한마디면 다 해줄 것처럼 구는 걸 알고 있었어도, 황제를 만지는 것 자체가 싫어 손도 대지 않았다. 황제가 좋아서 사르르 녹아내리듯이 웃는 얼굴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했으니까.

어제도 ‘좋아.’라고 말했을 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박아대던 황제만 생각하면 죽이고 싶었다. 그 목을 조르는 것으론 부족했다. 편하게 죽는 건, 속이 풀리지 않았다. 더 비참한 최후를 줘야 했다.

은혜는 못 갚아도 복수는 반드시 갚으리라.

이세희는 숨을 느리게 내쉬며 동경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빛이 나는 동경이 있었다. 동경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보았다. 하얗고, 긴 목에는 황제의 손자국이 선명해서 자상이 보이지 않았다. 손을 더듬어 자신이 만들어낸 자상을 더듬어 만지던 이세희는, 문득 동경을 보며 싱긋 웃어 보았다.

“으음….”

턱에 손을 대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이세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뭘 해도 좋다고 달려들 테니. 죽기 전에 몇 번 웃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마….”

이세희를 모시기 위해 온 궁녀는 이세희의 산뜻한 미소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거의 무표정으로 살던 이세희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그녀는 한참이나 이세희를 보았다. 이세희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뒤따르던 궁녀들도 놀라서 눈을 멍청하게 깜박였다.

“이제 폐하께 잘 보여야지. 언제까지 목이 졸릴 수는 없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말한 이세희는 굳어 있는 그녀들을 가로지르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이제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세희는 수증기가 어린 목욕탕을 차가운 눈으로 훑으며, 입술 끝을 올렸다.

은혜는 절대 못 갚아도 복수는 철저하게 갚아 줘야지….

*

이윽고 밤이 도래했다. 여느 날과 같이 내려온 밤 시중 하명에 애첩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조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웃음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이세희는 만개한 꽃처럼 빛을 발했다. 모두 다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너무 지긋지긋하게 겪었던 일이니, 언제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리 되는군요.”

이세희가 허심탄회하게 중얼거렸다. 태윤과 이세희 모두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도망은 실패로 돌아갔음을 알았다. 황제가 태얼궁 침전으로 불러 들였으니, 화요궁에 있을 때만큼 자유로울 수 없다. 이세희를 지척에 두고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목소리에는 씁쓸함이나 한숨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찌꺼기를 걸러낸 듯, 맑고 청아한 저음이었다. 태어났을 적부터 그 외모가 대단하여, 아이가 모진 일을 당할까 존재를 감추었던 전적에 걸맞은 아름다운 목소리가 침전했다. 목소리는 두터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앞에 명령을 가져온 이의 무릎까지 닿았다. 무릎을 꿇은 이는 반쪽짜리 황자 태윤이었다. 황제의 아들답게, 젊었을 적 황제를 쏙 빼닮은 이는 정갈하고 굵직한 이목구비를 가진 훤칠한 미남이었다. 애첩이 독을 품은 꽃처럼 화사하고 요요하다면, 애첩의 앞에 우뚝 앉은 이는 농담을 조절한 수묵화처럼 담백하고 고요했다.

“가야 하겠지요.”

말은 차분했으나, 눈빛은 거짓을 감출 수 없었다. 황제에게 가기 싫은 이세희는 눈물은 흘리지 않으나 울고 있었다. 어김없이 동요를 보내는 이세희를 보던 금군대장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의 눈꺼풀이 완전히 잘게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자, 그 위로 투명한 궤적이 그려졌다. 붉은 발을 두고 앉아있던 금군대장의 손이 바닥에 닿더니, 그 사이로 금군대장의 머리가 쿵 떨어졌다.

이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을 정도로 비참했다. 이렇게 약하다니. 황자라는 자리가 아무 짝에 쓸모가 없었다. 나약함은 자신을 향한 혐오감으로 바뀌었다.

“가셔야 합니다, 마마.”

금군대장의 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참을 수 없는 비통함에 금군대장이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쥐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에 슬퍼하여 처연하게 울먹거리는 금군대장을 집요히 지켜보던 이세희가 입을 열었다.

“모두 나가거라.”

궁인들이 뒷걸음질로, 아주 빠르고 소리 없이 화요궁을 빠져나갔다. 이세희의 명령 덕분에 화요궁은 금군대장이 울먹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금군대장만 지켜보던 이세희가 손을 천천히 올렸다. 다소곳하게 두 손을 맞댄 채, 허벅지에 올라갔던 손이 향한 곳은 발을 올리고 내리는 끈이었다. 그는 긴 팔을 뻗어, 끈을 잡고 천천히 내렸다. 발부리만 보이게끔 길게 내려왔던 불투명한 붉은 발이 위로 올라갔다.

“고개를 드세요.”

이세희의 나긋한 명령에 금군대장이 손등으로 눈물을 슥슥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울음을 삼키는 얼굴이 아이처럼 말갛다. 그와 시선이 맞닿기가 무섭게 입술 끝을 양쪽으로 올린 이세희가 몸을 일으켰다. 금군대장보다 좀 더 큰 그의 몸이 천장에 닿을 만큼 솟아올랐다. 자신의 앞에 드리우는 그림자에 잠시 몸을 움찔거리던 태윤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시야에 이세희의 하얀 옷자락이 보이자 무섭도록 떨렸다.

그가 다가오고 있다. 아버지의 애첩이, 발도 거두고 자신에게…. 금기를 범하는 죄인이 된 태윤은 마른침을 삼킬 새도 없이 멍하니 애첩을 좇아 눈을 서서히 위로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고 싶었다. 금기를 범해, 아버지에게 사지가 도륙난다 하더라도. 그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너무 좋아서, 몸이 떨렸다.

“윤아.”

이세희가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태윤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소리 내어 울면 누가 알아차릴까 봐 여태껏 참아왔던 눈물이었다. 입술을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태윤의 입가가 하얗게 질려갔다. 입술은 이세희의 것보다 더욱 붉어졌다. 애써 울음을 삼키던 태윤은 두 팔을 뻗었다. 이세희가 기다렸다는 듯 태윤을 끌어당겨 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힘이 없어서…. 내가 너무 약해서, 그대를….”

윤이 당과를 빼앗긴 아이처럼 서럽게 울음을 띄엄띄엄 흘리며 이세희의 너른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세희는 윤의 등을 토닥였다. 엇비슷한 신체를 가진 둘이었지만, 유독 윤이 작아 보였다. 한참을 윤의 우는 소리를 들어주던 이세희는 윤의 둥글둥글한 머리를 매만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까지 신첩을 아버지의 품에 안겨드릴 생각이십니까?”

윤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묘하게 자신을 타박하는 이세희의 목소리에 윤이 어깨에서 얼굴을 들어 올리더니, 애첩과 눈을 마주쳤다. 눈물을 흠뻑 머금은 윤의 얼굴을 보자 엄격하던 이세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힘이 약하다고 울기만 하시면 어떡합니까? 그런다고 누가 힘을 준단 말입니까?”

“그대를 구하기 위해 나도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그 누가 나를 황제로 만들어 주겠어? 나는 반쪽짜리에 불과해. 그 누구도 나를….”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슬쩍 나왔다. 황제가 되겠다고 해도, 그 누가 자신을 지지해줄까 싶은 마음.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두려움을 내비치자 이세희가 미소를 지었다. 그게 더욱 자신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윤이 울적한 얼굴로 눈을 내리떴다. 사랑스럽다는 듯, 윤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던 이세희가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윤이 당황스러웠는지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황제의 품에서 어화둥둥 컸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남자였다. 황제와 닮았으나, 그와 다르게 표독스럽지 못하고 맑은 샘물처럼 느껴지는 윤을 사랑에 빠진 눈으로 보던 이세희가 입을 열었다.

“신첩이 드리겠습니다.”

윤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이세희는 화려한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미소를 한껏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널 황제로 만들어 주겠어.”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윤에게 입을 맞추었다. 고개를 틀어 입술을 빨아들이고, 으응, 하고 신음을 흘리는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는 이세희를 따라 윤이 헐떡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움직여 이세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안겨서 매달리지 않는 한 버틸 수 없는 힘이었다. 윤은 화비 이세희에게 안겨 입을 맞춘 채, 아래를 세웠다. 애첩의 손은 이미 예고된 일에 웃음을 청아하게 터트리며 손을 아래로 뻗어 기립하기 시작한 남근을 잡고 애무했다. 오랜만에 닿은 접촉에 태윤이 숨을 멈추었다.

“아, 세희야, 아…!”

윤이 눈을 찡그리며 울음을 터트리자, 이세희가 귀에 대고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아비에게 안기는 날 보고 싶어?”

“아니…. 싫어….”

윤이 아니야, 난, 그게 싫어서 널…. 하고 중얼거리고 이세희의 옷깃을 세게 잡았다. 아비가 이세희에게 하사해준 비단 옷이 구겨졌다. 이걸 아바마마가 알아채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몸은 솔직하게 이세희를 붙잡았다. 그 손을 놓게 한 건 이세희였다. 자지를 만지던 손은 아직 바지 속에 머물렀다. 짧은 사이, 이세희는 능숙하게 자지를 문지르고 귀두를 엄지로 비볐다. 눈앞에 흐려졌다. 이세희가 주는 쾌감으로 몸이 들떴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여기서 더 동침하고 싶은 마음에 태윤은 다리를 들썩였다. 이세희가 힘으로 태윤을 막으며, 빠르게 사정을 유도했다.

“널 구할 거야….”

하읏, 하고 신음을 희미하게 터트리며 가장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이 귓가를 감싸고, 마음까지 휘어잡자 이세희는 눈을 내리감으며 웃었다. 누가 들을까, 찌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주무르듯 자지를 애무하자 힘에 의해 윤의 자지가 금방 사정했다. 이세희는 손바닥을 빼내었다. 정액이 엉겨붙은 이세희의 하얀 손바닥을 본 태윤의 볼이 붉어졌다.

“그래.”

이세희가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윤의 젖은 뺨에 입을 맞추며 덧붙였다.

“날 너의 애첩으로 만들어줘.”

혀를 내민 이세희가 손바닥에 달라붙은 정액을 핥아먹었다. 태윤이 깜짝 놀라 잡으려 해도, 이세희가 눈을 똑바로 떠 태윤을 보며 정액을 샅샅이 핥았다. 손가락까지 집어넣어, 쪽 소리 나게 다 빨아먹었다. 그 음흉하고, 음험한 시선 끝에 닿은 태윤이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움, 그리고 애가 타서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때였다. 이세희가 태윤의 멱살을 잡아당겨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목이 눌려 소리가 잠시 나오지 않았다. 세희야, 라고 부를 힘이 없어 입술을 달싹이는데 이세희가 태윤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네 아버지는 애첩 때문에 나라를 망칠 뻔한 폭군이 될 거야.”

태윤의 눈에 흥분이 가시고 거기에 불이 솟았다. 그 사실에 만족해하며, 이세희는 멱살을 서서히 놓고 태윤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태윤의 눈에 애정이 감돌았다. 자신을 향할 땐 순한 강아지처럼 구는 태윤을 보며 짓궂게 웃은 이세희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너는 성군이 되는 거야. 네 아버지가 못했던 걸 네가 이뤄내는 거지.”

“그게 네가 바라는 거라면.”

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활짝 지으며 말했다.

“성군이 되면, 칭찬으로 더 기분 좋게 해 줄게.”

“그럴 필요 없어.”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태윤은 남이 들어올까 긴장이 되는 상황에서도 두 팔을 벌려 이세희를 끌어안았다. 태윤에게 안긴 이세희도 눈을 들어 문을 보았다. 그림자가 우거진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세희는 여차하면 태윤을 밀어낼 생각으로 두 손을 드는데, 태윤이 귀에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난 너만 행복하면 돼.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태윤이 이세희를 밀어냈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윤 내관이 호위들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태윤은 그들에게 등을 보인 채, 일어난 상태로 이세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폐하께 가셔야 합니다.”

무표정을 유지하며, 목소리도 서적을 읽는 것처럼 차분하다. 제법 그럴듯하게 연기하는 태윤을 물끄러미 보던 이세희는 손을 맞잡았다. 말은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굴어도 손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데려다주기 싫어서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

북산에 오르는 날이 찾아왔다. 일 년의 농사가 잘되기를, 역병이 돌지 않기를, 만백성이 고난을 겪지 않기를, 전쟁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절실히 담아 기도를 드리는 날이기에, 황제는 해가 뜨기 전부터 조용하고 빠르게 움직여 정화수에 몸을 담가야 했다. 황제가 바쁘다면, 황제를 따르는 궁인들은 발바닥에 불이 붙도록 바빴다. 황제뿐만 아니라 황제와 그 산에 올라 기도를 드리는 태자, 친왕, 황후도 모두 아침에 길어온 정화수에 몸을 담가 깨끗이 해야 했다.

궁녀들이 황제의 기상을 돕기 위해 태얼궁 침전에 도착했으나, 깨울 필요는 없었다. 여러 개의 문을 지나 안쪽 문에 도착했을 때 그림자로 황제의 상황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세희가 황제의 위에 올라탔는지, 건장하고 나긋한 몸이 위아래에 흔들리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너울거리는 야릇한 모습에 궁녀들은 희한한 것을 보았다는 심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이세희가 그간 황제의 위에 올라탄 적이 있던가? 찌뿌둥한 표정으로 말을 탄 건 본적이 있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 황제의 위에 올라탄 적은 결코 없었다.

사실, 본래 황실 법도에 따르면 후궁은 황제의 위에 올라서는 안 되었다. 황제가 누군가에게 깔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황제가 위에, 후궁이 아래에 있어, 정사 중에도 그 위계질서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간혹 황제가 애첩을 어여삐 여겨, 자신의 배 위에 오르게 해 즐거움을 본 적이 있었다. 황제가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경우에만 그러했으니 잦은 일은 아니었다. 만약 황제가 애첩을 조금이라도 배 위에 올라 태울 기미를 보인다면, 지켜보는 태감이 눈에 불을 켜고 “법도에 따르셔야 합니다, 폐하! 그 누구도 만승지존이신 폐하의 위에 올라설 수 없는 법! 선황들께서 이 법도에 따라 처첩은 항상 아래에 두셨습니다.”라고 노성을 지르니, 황제로서도 흥이 다 깨져 그럴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만두지 않으면, 태감을 필두로 궁인들이 “폐하, 법도에 따르셔야 합니다.”를 외쳤다.

궁녀들의 우두머리이자, 황제를 어릴 때부터 보필했던 보모였던 나이 지긋한 궁녀가 앞으로 나섰다. 태감이 나서지 못할 땐, 항시 그녀가 나서서 황제를 달래곤 했다. 태감이 나서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 그를 향해 고개를 한 번 꾸벅였다. 태감이 혼령처럼 스르륵 물러났다.

“폐하, 정화수에 옥체를 담그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정말 자식을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그녀는 엄하게 다그치는 게 아니라 다정다감하게 속삭였다. 하아, 하아…. 하고 누군가의 다급한 숨이 터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비단처럼 위아래로 흔들거리던 머리카락이 우뚝 멎었다. 이세희의 고개가 숙여지고, 돌처럼 단단한 상체가 위로 올라와 이세희와 맞닿는 게 보였다. 궁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무감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황제가 이세희를 위에 태운 게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황제가 강압적으로 입에 담기도 힘든 체위를 자주 강요했으니, 그럴 수 있다고 가늠했다.

그러나 문에 비치는 길쭉하고 나른한 그림자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황제의 너른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숨을 헐떡이던 이세희가 황제의 목에 팔을 두른 것이다. 그가 스스로 안겼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느리게 미간을 찌푸리던 찰나, 황제가 목을 울려 웃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아, 궁녀는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 꾹 닫힌 틈새까지 다가갔으나 대화는 끝이 났다. 궁녀가 의아함이 담긴 시선을 지척에 있는 태감에게 보내 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무언가 확실히 달라졌다. 그간 황제에게 냉랭하게 굴던 이세희가 황제를 직접 끌어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마음이 간질거렸다. 좋지 않은 예감에 궁녀가 초조할 무렵 문이 양쪽에서 열렸다. 확 풍기는 끈적하고, 달콤한 냄새에 궁녀가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시작된 냄새인 줄 아니 도저히 반길 수 없었다. 궁녀가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난감해하자, 황제가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향유에 힘들어하니…. 그리 힘들면 다른 궁녀를 시키게. 그대는 짐의 어미와도 같은 사람인데, 고역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구나.”

황제가 손을 내밀어 궁녀의 좁고 메마른 어깨를 토닥였다. 황제가 아장아장 걸을 무렵부터 함께 한 두 사람이었다. 어머니보다 더 어머니 같은 존재인지라, 황제는 고된 일이나, 신경증, 울화증이 심하면 꼭 그녀를 불러 심정을 토로했다. 나이가 들고, 후궁 문제에 황제가 고달파 할 때면, 그녀가 먼저 알아채고 나서서 황제를 달래준 적도 많았다.

황제의 다정다감한 어투에 궁녀는 입가를 가리던 손을 내려 황제를 빤히 보았다. 황제가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 것처럼, 부드러운 눈웃음을 보이자 궁녀는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려 이세희부터 보았다. 침상에 우두커니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모습에 궁녀는 먼저 미간을 찌푸렸다.

천한 것 주제에.

처음부터 이세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제가 그 미모를 어여삐 여겨, 승은을 입혀줘 데려왔으면 성심성의껏 황제를 침상에서 보필하지는 못할망정 하는 짓이라곤 황제와 대거리를 하거나, 황제에게 툭하면 욕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제일 괘씸했던 건 황제의 애정을 걷어차고, 내관들을 두들겨 패고 궁을 벗어난 일이었다. 팔다리가 모두 부러져 시체 꼴이 되어 나타났을 때, 그녀는 몹시 기뻐했다. 진심으로 이세희가 죽은 줄 알았다.

하지만 황제의 정성 어린 치료로 그는 신체 멀쩡하게 살아났다. 황제가 주먹이나 발로 두들겨 패도 며칠 앓다가 다시 일어났다. 역시 천것이라 그런가. 그녀는 지금도 침상에 홀로 앉아 고통을 삭이고 있는 이세희를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황제 주변에 모든 사람이 달라붙어 몸을 닦아주고, 그의 머리를 단장해 주었으나 이세희 곁에는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천하고, 쓸모없었다. 황제의 애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궁녀들도 그 사실은 알기에 이세희를 딱 황제가 자주 부르는 애첩으로 대했지, 사람으로 대한 적은 없었다.

황제도 그 대우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세희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이유에 대해서만 골똘히 생각하고 화를 냈지, 궁녀들이나 내관들이 이세희를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그 영역까지 미처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그대, 화요궁에 소속된 궁녀들은 본분을 다하지 못한 죄로 태형을 삼십 대씩 내리고 궁 밖으로 내보내라.”

갑작스러운 어명에도 그녀는 담담하게 굴었다. 태형 삼십 대라고 해봐야 얇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정도이니, 이 정도면 아주 약소한 벌이었다. 더불어 그녀들이 이세희를 은연중에 얕보고, 무시한 경향도 있었으니 그녀는 황제의 말에 하오나, 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화요궁 소속 궁녀들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들이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황제의 치세가 오래가고, 그가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세희가 불편함 없이 돌보라고 했더니, 하는 것이라곤 세희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뿐이니…. 그것 때문에 짐이 세희에게 미움만 사지 않았던가?”

황제가 불이 켜진, 대낮같이 훤한 궁을 걸으며 혀를 찼다. 그녀는 황제의 뒤를 꽁지처럼 따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과 황제를 보는 도홧빛이 도는 눈매에 화들짝 놀랐다. 검은 머리가 장막처럼 내려와 이세희의 눈가를 드문드문 가려도, 일부러 붓으로 야릇하게 그린 듯한 눈매가 다 가려지진 않았다. 근처라고 지칭할 수 있는 거리감이라 그녀는 그곳에 서서 이세희를 물끄러미 보았다. 긴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나팔거렸다. 깊이가 있는 눈가는, 일부러 붉게 물들인 것처럼 새초롬하게 붉었다. 정사의 기운이 아직 남아 두 뺨은 상기되어 있었고, 아랫입술은 물고 빨렸는지 전보다 확실히 부었다.

음란함을 모르던 정숙한 선녀가 흐트러진다면, 저런 모습일까. 그녀는 고개를 돌리기 전, 자신을 보며 피식 웃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더 보았다간 그의 화려함에 자신도 물들게 될까 봐 황제의 뒤에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눈을 낮추고, 듬직한 황제의 등을 지켜보던 그녀가 입을 슬그머니 열었다.

“폐하, 혹시 화비께서 무슨 언질을 하신 겁니까?”

황제가 걸음 속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세희가 그간 황궁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왜 짐에게 그리할 수밖에 없었는지… 기댈 곳이 아무 데도 없어, 내 아들 윤이 동정심에 측은하게 여겨주자 그곳에 잠시 기댔다고 하더구나.”

처음에는 덤덤히 말을 이어가던 황제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이세희와 근 사 년을 크고 작게 싸운 황제였다. 그의 노고가 여기까지 전해져 그녀도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세희가 모두 토로했다. 이제부터라도 잘해 보자면서, 짐의 손을 처음으로 잡아 주더구나.”

황제의 목소리에 묘한 설렘과 뿌듯함이 있었다. 황제는 순전히 좋아서 들뜬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자꾸만 돌부리처럼 걸리는 의혹에 머뭇거리게 되었다. 이세희가 자신을 보며 유려하게 웃던 모습이 뇌리에 박혀서일까. 그녀는 황제의 사내답고, 너른 등을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세희가 단순히 그런 마음으로 황제를 설득할 남자는 아니었다. 혹, 권력을 잡고 싶은 것인가. 황제를 이용해서 이제라도 부와 권력, 없는 명예라도 만들어 누리고 싶은 건가 싶어 그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아직 의심을 늦출 수는 없으니, 그대는 세희를 곁에서 잘 보살피되, 영특한 궁녀들로 배치하라. 짐은 그대는 의심치 않으니, 그대가 잘해 주리라 믿어.”

황제 또한 그녀의 염려를 알았는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눈빛이 음험했다. 이세희가 나긋하게 나오니 좋으면서도, 의심의 불씨를 지우지 않는 게 황제다웠다. 그 성격 때문에 이세희가 쉽게 굽히지 않은 것도 있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세희가 해봤자 뭘 하겠단 말인가. 가진 거라곤 얼굴과 몸밖에 없는 천한 남자였다. 나이가 들수록 그 화려한 외모가 수려해져 조금 걱정이 되긴 했으나, 그도 나이가 더 들면 빛을 잃고 쫓겨나리라. 그때까지만 자신의 눈 아래 둬서 잘 감시하면 그만이었다.

정화수가 담긴 목욕탕에 다다른 황제는 걸치고 있던 침의를 벗었다. 그의 우람한 근육이 드러났다.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근육들이 매서웠다.

“태감도, 세희를 돌보던 내관들에게 태형을 내리고 궁 밖으로 내보내거라. 자신의 일도 마땅히 하지 않는 놈들은 짐의 궁에 필요 없다.”

황제가 조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화요궁의 모든 인력을 처리할 계획인 듯 보였다.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이세희의 나긋나긋한 대접은 못 받을 거란 생각이 언뜻 느껴졌다. 정화수에 들어가기 전, 발을 옮기던 황제는 태감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리고 세희의 가족들은 궁에 두지 말고, 제도 안에 두되 홍패를 주어 세희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게 하라.”

그의 파격적인 제안에 궁인들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홍패는 출가한 황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붉은색은 황실의 색이었다. 습도에 강하고, 잘 부패하지 않는 목재에 붉은 염료를 입히고 금색 염료로 다시 글자를 쓴다. 그리고 옻칠을 하여 보존력을 강하게 하는 패였다. 황족들은 붉은색, 문무백관들은 흰색이었다. 황제가 여태 홍패를 내린 건, 친왕들과 혼례를 치러 출가한 공주들과 부마들이었다. 외척에겐 홍패가 아니라 신하란 이유로 백패를 내렸다.

“폐하, 외람되오나 화비의 가족들에게 홍패를 주는 것은 정도를 벗어난 처사가 아닌지….”

“홍패를 주는 건 세희의 외로움과 고됨을 달래주기 위함이다. 백패는 정해진 때에만 들어올 수 있지 않은가?”

“폐하, 이 사실을 대신들이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태감이 안타까운 어조로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는 정화수에 천천히 발을 넣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대신들이 뭐라 한들, 세희는 어차피 애도 못 낳는 비에 불과하다. 외척도 없지. 설령, 있다 해도 문맹밖에 없는 천민들이 무얼 한다고? 그걸 알고서 본인들도 세희를 비에 앉혔을 때 묵과한 게 아닌가?”

이세희를 아끼는 건지, 비웃는 건지 모를 황제의 태도에 태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잘 해줄 거면 아예 잘해줄 것이지, 여전히 이세희를 의심하고, 깎아내리는 행동에 태감은 일이 글렀다는 걸 짐작했다.

“차라리 본인 가족들에게 의지하는 게 낫지, 윤이나 태자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애첩을 두고 아들들과 척을 지는 꼴이 가장 볼썽사납지 않은가.”

심지어 그것도 이세희가 요청한 것일 게 분명했다. 황제가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 것은 이세희의 눈물 어린 애원 덕분이었다. 황제는 이세희와 정사를 맺을 때, 항상 주변에 사람을 몇 십 명씩 두게 했다. 그게 법도였다. 이세희는 그 행태에 몹시 수치스러워했고, 정사를 맺던 도중이나, 끝에 서글피 울었다. 황제는 당연한 법도를 왜 이해 못 하냐면서 이세희를 구박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더니, 이세희는 이제 못 참겠다며 황제에게 처음으로 애원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면, 다시는 그러하지 말라면서 황제의 품에 폭 안겼다.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입을 맞추고, 그의 침의까지 벗겨주니 황제가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세희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황제의 숨이 거칠게 변했다. 의심과 흥분 사이에서 오가던 황제는, 자신의 뺨을 감싸는 딱딱한 손길에 “어서 다 나가거라!”라고 소리치면서 이세희를 침상에 눕혔다. 이세희는 황제의 둥근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해 주시면 됩니다, 폐하. 신첩은 바라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라는 말을 속삭이며 황제의 뺨에 입을 맞췄다. 황제는 완전히 이세희에게 정신이 팔려 허우적거렸다. 태감은 끝까지 남아 지켜보고 싶었으나 이세희의 살기 어린 시선에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 때문에 다 듣지는 못 했지만, 이세희가 가족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었다. 다정하게 대해주는 윤에게 기대게 하지 말라면서, 눈물이라도 보인 것인가. 태감은 황제의 날렵한 옆모습을 힐끔 살피며 생각했다. 황제는 태감의 궁금증 어린 시선을 알았는지 눈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들은 아들이고, 애첩은 애첩이지. 그 둘이 양립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정화수에 몸을 반 정도 담그며 황제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태자나 윤이 세희를 어여뻐서 보는 건 상관없어. 아름다운 꽃을 보고 벌이 꼬여드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세희가 아름다우니 볼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 꽃을 탐내는 건 안 돼. 그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지.”

나직하게 웃은 황제가 정화수에 어깨까지 들어갔다. 하늘하늘한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은 궁녀들이 날아오듯 다가와, 황제의 건장한 몸에 물을 끼얹었다. 그녀들의 정성 어린 안마를 받으며 눈을 감은 황제가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그 꽃을 탐낸다면, 그 꽃을 죽이는 방법도 나쁘지 않지.”

황제가 미소 짓는 모습에 태감은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

이세희의 가족들에게 홍패가 내려졌다. 그 사실에 가장 먼저 분개한 건 황후였다. 어떻게 비의 가족들에게, 그것도 후사를 못 낳는 비의 가족에게 홍패를 줄 수 있느냐며 황후가 황제와 북산에 가는 길에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황후의 아버지, 황제에겐 장인인 태위인 그도 한마디 거들었다. 북산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그 소식이 파다하게 전해졌기에 대신들도 심기가 편치 않았다. 꽤 높은 품계의 문무백관들로 이루어진 행렬을 지켜보던 황제가 폭소를 터트렸다. 대신들이 눈치를 살폈다. 황제는 웃음을 갈무리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짐의 침상에서 다리 벌리는 일밖에 못 하는 앤데, 세희가 무얼 한단 말인가? 마음먹고 뭘 하려고 해도, 글이라도 읽어야 역모라도 꾸밀 거 아닌가?’

황제의 웃음에 대신들도 따라서 웃었다. 웃음은 점차 전염되어 커졌다. 태위도 그건 그렇지, 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마니 황후만이 모멸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세희의 아버지, 이국영이 현령 자리에 있으나 글을 아예 몰라 옆에서 대신 글을 봐주고, 사사로운 일을 처리해주는 사람이 넷이 넘었다. 이세희의 아버지가 글을 배우려 해도 몸이 성치 않으니 배울 수가 없었다. 그를 현령 자리에 둔 건 순전히 이세희를 감시하고 옥죄기 위함이라, 가족들도 그걸 알면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반발하면 그 몫으로 이세희에게 과한 벌이 주어졌고, 이세희가 반항하면 그의 가족들이 수모를 당했다. 효과가 좋은 족쇄나 다름없었다.

‘하긴, 반신불구이니 검 하나 못 들 거 아닙니까?’

태위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황후는 싸늘한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다 고개를 휙 돌렸다. 태위의 앞에서 편한 교자에 앉아 그 말을 듣던 태자도 한마디 끼얹었다.

‘반신불구에, 문맹에…. 그런 자에게 현령이란 자리를 주었으니, 화비가 폐하에게 값을 빚이 많습니다.’

‘그래도 싫다고 승냥이처럼 털을 세우니, 고된 일이 많다.’

황제의 투덜거림에 태자가 황제를 보며 슬슬 달랬다.

‘하지만 그런 맛에 짐승도 길들이는 법이지요. 털을 세우던 승냥이를 마침내 길들였을 때 느껴지는 희열감이 큰 법 아니겠습니까.’

태자의 맞장구에 황제가 맞는 말이라며 웃음을 실실 내뱉었다. 그들은 자주 이세희를 입방아에 올리고 제멋대로 폄하했다. 이세희는 그들에게 그래도 되는 존재였다. 오히려 이세희가 궁에 온 이후로 황제의 난폭한 성정이 이세희에게만 쏠리니, 그들 입장에선 편했다. 아무것도 없어서 반발한 사람이 없고, 탈이 없다. 그 자리에서 홍패는 너무한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으나, 대세가 이세희를 가지고 깔아뭉개며 황제의 편을 드니 한숨을 내쉬며 참았다. 지난 세월간 이세희가 가족을 수단으로 휘두르고, 부를 착취한 것도 아니니 반발한 명분이 없었다. 무엇이든 명분이 있어야 의견을 내세우고,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지지가 없는 명분은 금방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속이 편했다.

황제는 반대 세력들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낼 걸 알고, 일찌감치 말을 꺼냈다.

‘그대들의 걱정은 짐이 안다. 세희의 가족들이 혹여 세희를 이용해 권력을 잡을 게 염려스럽겠지만,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그런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짐이 먼저 세희를 저승으로 보낼 테니.’

그리 말하며 싸늘하게 웃는 황제를 보자 대신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빛이 지금이라도 이세희를 죽일 것 같았다. 그건 진짜 원한이 있어 죽이려는 게 아니라, 남의 손을 탈까 두려운 집착이었다. 그럴 바엔 자신의 손으로 보내겠다는 집착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대신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먼저 나선 건 능수능란한 태보였다.

‘폐하께서 화비를 아끼시는 마음이 크셔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혹, 화비의 가족들이 조정에 나서려 한다면 그때 홍패를 뺏어도 되는 일입니다.’

태보가 고개를 조아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혀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한 유려한 말솜씨를 들은 태위가 황후를 한 번 돌아보았다. 황후는 이미 아버지에 대한 기대감을 버렸다. 태자에게도, 아버지도 제 편을 들어주지 않으니 그녀는 아버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길을 갔다. 태위는 속으로 혀를 차고 ‘저러니 지아비에게 사랑을 못 받지.’라고 푸념을 놓으며, 황제의 편을 들었다.

‘홍패가 황족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맞으나, 본래 역할이 자유롭게 궁에 드나들어 가족을 보기 위함입니다. 또 폐하의 말씀대로 화비는 후사를 낳지 못하는 몸. 화비의 아버지는 반신불구에, 글도 모르고, 유현에 있어 오갈 수도 없습니다. 현령은 유현으로 내려가고, 화비의 누이들이 남아 화비를 보기 위함이오니…. 무엇보다 화비만큼, 비의 본분을 다 하는 충신이 없지 않습니까? 비빈들도 폐하의 충신이고, 그 충신이 제 몸을 바쳐 폐하를 기쁘게 해드리고 있으니 홍패는 적당한 치사입니다.’

자신의 주제를 알고, 홍패만 달라 한 거니 태위 입장에선 매우 좋은 치사였다. 더한 자리를 달라 했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했을 테지만, 고작해야 누이들 좀 자주 만나는 것이다. 지아비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높은 자리는 질색이라며 자신들 선에서 잘랐다. 하나같이 눈치가 있어 알아서 찬 바닥에 엎드려주니 마음이 편한데, 고작해야 홍패 좀 줬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게 우스울 뿐이었다. 막말로 화비가 황제를 죽인다 해도, 그걸 빌미로 화비를 한 번에 보낼 수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일찌감치 제 손자를 황제 자리에 올려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태위로선 나쁘지 않았다. 황제는 태위의 입발림을 듣다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세희에 관한 일은 짐의 손에서 처리할 터이니, 그대들이 걱정할 건 없다. 여태까지 짐에게만 반항하고, 그대들에겐 얌전하게 굴던 세희가 아니던가. 세희는 건드리지 마라. 그 아이를 길들이는 것도, 죽이는 것도 짐에게 달려있다.’

건드릴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는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말에 대신들은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치세가 평온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후궁 문제로 큰 싸움을 벌인 적 없었고, 태자도 정해놨으니, 이대로 물 흐르듯 평화가 이어지길 바라며 그들은 황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황후는 완전히 구석에 밀렸다. 북산 입구에서 황제는 내관에게 말했다.

‘세희의 누이들에게 홍패를 나누어 주거라. 언제든지, 원할 때에 오라비를 봐도 좋다고 전해주고.’

*

황제의 흔쾌한 윤허에 이세희는 자유로이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른 후궁들에겐 입궁부터 허락된 기회였으나 이세희에겐 너무 오래 걸렸다. 청요전에서 발을 씌우고 가끔 만났는데, 이세희는 누이들이 온다는 것도 거절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이 강간당하거나, 황제에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고 나서 처음 본 게 여동생들이었다. 비참함, 수치심에 못 이겨도 동생들이 걱정할까 봐 아무 말 못 하고 견뎌왔다. 동생들을 보면 그때가 떠올라 이세희는 자진해서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끔씩 욱하는 감정이 올라와 동생들 앞에서 울까 봐,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막내 여동생은 아무것도 모르니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황제에게 애걸복걸해 만나긴 했으나, 모든 건 허사로 돌아갔다.

사랑했던 이가 자신을 잊는 것만큼 허무한 일이 있을까. 비록 풍족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세연을 위해 모진 일도 견디며 살아왔다. 세연은 세희에게 여동생을 넘어, 딸 같은 아이였다.

세연이 부정했을 때 이세희는 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바닥에 엎어져 엉엉 울던 세연을 달래주지 못해 그게 한이 되어 맺혔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세상에 미련이 없어졌다. 어차피 살아 봤자 가족들에게 자신은 수치였다. 아버지를 반신불구로 만든 불효자였다. 살아 봤자, 남은 게 이런 수모라면 죽어 마땅했다.

그런데 세연이 아니라, 태윤 때문에 살고 싶다니…. 이세희는 걸음을 멈추고 해가 쨍쨍하게 들어오는 하늘을 보았다.

“오늘은 날이 좋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느리게 웃었다. 화려한 독 같은 외모에 퍼지는 선한 미소에 궁녀들의 눈이 멍해졌다. 하늘을 파랗게 만드는 햇살보다 이세희의 미소가 밝았다. 그녀들을 잠시 돌아보며 웃어주던 이세희는,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에 발걸음을 옮겼다. 여동생들이 온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의 뒷모습이 해맑게 느껴졌다.

“세형아, 세령아!”

막 모퉁이를 돌던 이세희는 우뚝 선 훤칠한 자를 보고 웃음을 애써 참았다. 세형과 세령을 직접 데리고 온 자는, 천해서 북산에 못 오른 태윤이었다. 태윤은 이마와 관자놀이에 흐르는 땀을 닦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보는 시선이 있으니, 이세희는 내색하지 못하고 입가만 씰룩였다. 태윤은 그럴 때마다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단단한 구릿빛 목덜미가 붉게 물든 걸 본 이세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정을 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숫총각처럼 수줍을 타는 모습이 정복욕을 느끼게 했다. 당장 뒤가 흐물흐물 풀릴 정도로 박아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다. 처음 뒤가 박히는데, 앞을 세운 게 타고났다. 이세희의 음흉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태윤이 움찔 떨며 뒤로 물러났다. 전신을 쫘악 훑는 시선에 탐욕이 알알이 박혔다. 태윤도 뒤가 근질해지는 마음에, 더 있다간 발기할 거 같아 아예 시선을 피했다.

“오라버니, 평안히 잘 계셨어요?”

세형이 쓰고 있던 긴 검은 멱리를 들어 올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이세희 다음으로 버금가는 청초하고, 아름다운 외모가 눈이 부셨다. 주변을 꽃밭으로 만드는 남매들의 외모에 궁녀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새로 화요궁으로 온 궁녀들은 이세형의 외모를 보는 게 처음이었다.

“나는 잘 있었지. 너는? 아이들은 어쩌고?”

“서방님이 보고 계세요.”

세형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까지 얌전히 있던 세령도 슬그머니 나왔다. 이세희가 긴 팔을 쭉 펼치자, 세령이 총총 다가와 세희에게 꼭 안겼다. 이세희가 세령의 뒷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눈을 매섭게 빛내 태윤을 찾았다. 태윤도 아닌 척하면서 눈을 힐끗 돌려 이세희를 엿보다가, 이세희의 시선에 딱 걸렸다. 태윤이 슬금슬금 도망칠 기미를 보이자, 이세희는 두 여동생의 어깨에 긴 팔을 걸치며 이죽거렸다.

“금군대장께서 어디 가십니까. 제 여동생들을 데려다주셨으면, 책임지시고 퇴궐도 도와주셔야죠.”

“저희 대장님께서 마마를 생각하셔서 직접 호위를 해 주신 건데, 어떻게 퇴궐까지 떠미십니까?”

부관 한 명이 욱하는 마음에 되물었다. 태윤을 향해 가소롭다는 듯 웃고 있던 이세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너야말로 뭔데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냐? 맞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냐?”

이세희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하며 발걸음을 저벅저벅 옮겼다. 황제도 이세희의 주먹에 얻어맞아, 눈가나 관자놀이에 멍이 들기가 일쑤라는 걸 아는 부관이 흠칫 떨었다. 그 호위내관 다섯을 주먹과 발로 패고, 태감의 머리를 도자기로 내리쳐 기절시킨 일화를 알기에 부관은 겁에 질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이세희를 보던 태윤이 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마, 잠시 고정하시옵소서.”

그러자 이세희가 손을 확 들었다. 태윤이 맞을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다. 주변에서도 이세희가 태윤을 때리는 줄 알고 “마마!” 했으나, 이세희는 태윤의 목을 한 손으로 콱 잡고 질질 당겼다. 목젖이 눌려 태윤이 숨을 헐떡였다.

“마마, 저희 대장님께 어찌 그러십니까!”

“너희 대장은 나에게 당해도 상관없다고 할 텐데?”

이세희는 태윤의 목을 쥐고 탈탈 털었다. 그때마다 태윤이 흐억, 하며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이세희의 동생들도 깜짝 놀라 이세희를 자중시키려 했지만, 오라버니의 서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에게 집적거리던 동네 남자들을 볼 때 꼭 저런 눈이었는데…. 그때 이세희는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어 두들겨 팼다. 처음에는 동생들도 오라비가 남자를 팰 때 좋아했으나, 남자가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못 차리자 무서워져서 오라비를 말렸다. 이상하게 그 상황이 겹쳐 보였다.

“말해보십시오. 싫으십니까? 싫으세요?”

이세희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태윤이 “놔, 놔주셔야….”라고 말을 더듬었다. 뒤늦게 이세희가 손을 놔주자 태윤이 목을 붙들고 기침했다. 부관이 다가와 등을 두들겨 주려 하자, 빠르게 눈치채고 이세희가 다가가 손으로 등을 퍽퍽 두들겼다. 때릴 때마다 태윤의 등이 벼처럼 숙여졌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

도와주는 것인지, 패는 것인지…. 태윤은 등을 작살 낼 것 같은 손길에 결국 못 견디고 “조, 좋습니다! 마마, 제가 싫어서 하겠습니까!”라고 외쳤다.

“그렇죠? 좋아서 하시는 것이지요?”

이세희가 은근히 기뻐하는 말투로 물었다. 태윤은 등이 너무 따끔해서, 홧홧해서 울먹거리며 “네, 마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세희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래, 세희가 좋다는데…. 목이 따갑고, 등은 열이 올라 뜨거웠으나 이세희가 좋아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손이 너무 맵네…. 아프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 눈물을 훔치고 무표정으로 돌아오려는데 이세희가 갑자기 어깻죽지를 잡고 당겼다. 어, 어어, 하는 사이에 태윤이 질질 끌려갔다.

“호위가 필요하니 금군대장께서 책임지고 보십시오! 폐하께서 명도 내리셨으니 잘되었습니다!”

그러고는 호위 내관을 내보내고, 궁녀들도 쫓아냈다. 사냥터에서 발생한 일로, 이세희의 호위는 대체로 태윤이 보게 되어 다른 자들이 반발하지 않았다. 또한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에 인원을 최소화해달라는 이세희의 청이 있어, 황제도 마지못해 윤허해 주었다. 그걸 받아내기 위해 이세희가 직접 황제 위에 올라탔다.

자신의 몸을 바쳐, 태윤과 드디어 함께 있게 되었다. 그 사실에 몹시 흥분되었다. 태윤이 온 걸 봤을 때부터 머리는 온통 음란함에 젖었다. 손끝이 근질거렸다. 그게 정도를 넘어서자, 동생들을 밀어 넣은 후, 가장 먼저 태윤을 끌어안았다.

“아니, 오라버니….”

여동생 둘이 놀라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이세희를 멍하니 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오라버니가 적극적으로, 황제를 닮은 아들을 안은 것도 놀라울 마당에 그 아들도 좋아서 안달 난 얼굴로 이세희를 꼭 마주 안았다.

“애들한테 미안한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둘의 눈이 커졌다. 이세희가 나른한 숨을 내쉬며, 태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처음에는 이세희의 접근에 좋아서, 신난 강아지처럼 안기던 태윤도 앞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황망한 시선에 놀라 입술을 달싹였다.

“마, 마마…. 이, 이러시면….”

윤이 말을 더듬었다. 잘 그을려진 피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여동생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게, 우리 오라버니를 꼬신 거 아니야? 라는 생각에 여동생 둘이 주먹을 치켜세우려는 찰나, 이세희가 뒤를 돌아보며 유려하게 웃었다.

“윤이 예쁘지?”

그러면서 자신이 아니라 태윤의 턱을 잡고 당기는 게 아닌가. 세형이 먼저 헛웃음을 지었다. 세령도 이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오라버니?” 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세희는 창가와 문에서 떨어진 구석에서 태윤을 노골적으로 더듬고, 만지면서 나긋하게 대답했다.

“윤이 만나려고 궁에 들어온 거 같아.”

“마마, 앗…!”

이세희는 태윤이 그 소리에 감동 받고 울먹거릴 때를 노려, 입을 맞추었다. 태윤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거리다가 천천히 내려앉아 이세희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비단 옷이 거칠어지고, 태윤의 손바닥 안에서 구겨졌다. 이세희는 자신과 태윤의 입맞춤을 봐야 하는 동생들의 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고개를 이리저리 틀어가며 태윤의 입술을 빨아 머금었다. 태윤은 숨이 거칠어지면 남들이 알아챌까, 숨을 힘겹게 삼키고서 이세희의 입을 받아들였다. 태윤의 입을 제 욕심껏, 빨아들이던 이세희가 요염한 눈웃음을 지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박히고 싶어서 안달이어도 참아. 곧 박아줄 테니까.”

“네…?”

이세희도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 참으려 했지만, 자신의 손에 맞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에 흥분한 지 오래였다. 지금이 아니면 태윤과 입을 맞추지 못한다는 생각에 성급하게 태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어차피 동생들에게 못 볼 꼴, 다 보여준 마당에 다른 사내와의 입맞춤은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너 지금 입만 맞춰도 아래가 움찔거리잖아. 맞지?”

말과 다르게 손짓은 가볍고 산뜻했다.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지만 말로도 흥분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태윤이 고개를 틀었다. 완전히 달아올라 터질 것 같은 목덜미에 입을 맞추자 태윤이 바들바들 떨다가 아래에 주저앉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몸을 오들오들 떨며 옹송그렸다. 급기야 울 것 같은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훌쩍거리자, 이세희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 더 울어야 하는데, 이 정도로 울면 안 돼.”

“마마….”

태윤이 울먹거리며 고개를 들자, 이세희가 눈물을 닦아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검고, 음흉해 태윤은 아래가 아파와 신음했다.

“넌 울 때마다 더 울리고 싶다니까. 오늘만 달래 줄 테니까, 다음에는 펑펑 울어야 돼.”

거절할 법도 한데, 태윤은 다소곳하게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세희와 눈을 마주치고는 “예, 마마.” 하고 대답했다. 이세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음에는 마마가 아니라 그대라고 부르게 될 거야.”

태윤이 우물쭈물거리며 “제가 어떻게….”라고 중얼거렸다. 제 맘대로 세희야, 라고 부를 때는 언제고 그대라고 못 부르겠다며 발을 빼는 모습이 어이없어 이세희는 눈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니?”

그들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세령이 불안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세희는 꼼짝도 못 하고,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태윤을 힐긋 보았다. 아무래도 아래가 서서, 그 모습을 보이기가 창피해 저러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 잘 느끼는 태윤이 이럴 때는 곤란했다.

하지만 이세희는 미련을 버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미 다 알면서 뭘 물어.”

“오라버니. 그건 안 돼요. 위험한 일이에요.”

세형이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세희는 단번에 동생에게 다가가,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던 세형은 등을 토닥이는 오라버니의 다정한 손길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세형이 가락지를 낀 손을 들어 올려 세희의 등을 매만졌다. 여동생의 애정 어린 손짓에 이세희는 눈을 차갑게 빛내며 생각한 바를 세형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넌 내가 부탁한 것만 구해와. 그래서 홍패를 달라고 부탁한 거니까….”

세형의 눈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마른침을 삼키는 세형이 불안함에 떨었다. 정말 황제를 죽일 거냐고 묻는 그 눈빛에 이세희는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가족들을 죽게 할 일은 없어. 그러니 걱정 말고….”

세형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잠시 흐트러진 가슴을 정리하던 세형은 세령을 보았다. 태윤과 이세희의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서, 구석에 숨어있던 세령도 무언가 짐작이 갔는지 눈빛이 달라졌다. 세령은 세형을 밀치고 다가와, 제 오라버니의 손을 맞잡으며 아주 낮게 속삭였다.

“저 자를 황제로 만드실 거면, 저도 돕겠습니다. 황제만 죽이는 게 아니라, 오라버니도 안전해지는 선택이라면…. 저는 상관없어요.”

말을 잇던 세령이 감정이 올라오는지, 눈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오라버니가 당하신 걸 생각하면 전 매일 밤이 괴로워요. 그럴 바에 차라리 이러는 게 나아요. 죽는다 해도 상관없어요. 오라버니만 행복하시다면, 전 괜찮아요.”

세령은 두 팔을 벌려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세희를 부둥켜안았다. 자그마한 체구로 달려드는 세령을 세희가 번쩍 안아주었다. 어릴 때처럼, 세희에게 찰싹 안긴 세령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소심하고, 말수가 없어 몰랐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 세령도, 세형도 힘들었을 것이다.

세형도 울먹거리며 다가오더니 세희의 옆구리에 파고들었다. 두 아이를 오라버니답게 달래 주며 이세희는 태윤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곁에 맴돌 때는 한겨울의 냉기보다 찬바람을 풀풀 풍기며 모른 척하더니, 이제는 주인 손길 한 번이 그리운 강아지마냥 끙끙 앓고 있었다. 여동생들이 있으니 흥분도 드러내지 못하고, 다리를 오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숨을 잘게 내뱉는 모습이 나약하게도 느껴졌다. 성적 흥분이 나타나야, 꼿꼿하던 본능이 흩어져 약해지는 사내라니. 이세희는 여동생을 서서히 품에서 떼어놓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세형은 눈빛에 감도는 빛에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개망나니 같은 황제의 아들인데, 뭐가 좋아서 저 자를….”

세형은 황제만 생각해도 화가 치미는지 이까지 부득부득 갈았다. 언제나 온순할 것 같던 세령도 황제는 생략하고 욕을 내뱉었다. 쌍심지를 켠 것 같은 눈빛에 이세희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궁에서 이 오라비를 사람 취급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자를 없애고, 황제 자리에 앉히면 우리도 무사할 수 있고.”

뒷말은 두 동생만 들을 수 있게 읊조렸다. 둘은 덩치만 컸지, 아무것도 못하고 앓는 태윤을 보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황제처럼 겉만 멀쩡하고 속은 썩어문드러진 놈 같았다. 이세희는 큰 손을 여동생의 머리에 척척 올리며 속삭였다.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저 자를 앉힐 명분은 있으십니까.”

세형이 조마조마한 심정을 억누르며 이세희를 올려다보았다. 이세희는 여동생이 곱게 단장한 머리가 망가질까, 조심스럽게 머리를 매만졌다. 황궁 밖에 살 때는 몰랐던 명분이란 건, 사실 별것도 아니었다. 아주 약간의 트집만 잡고, 그걸 크게 부풀려서 다그치면 그만이었다. 황제가 자신을 곁에 두고, 대신들을 어떤 식으로 좌지우지했는지 보고 배웠던 이세희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명분은 만들면 그만이야.”

굉장히 쉬운 일인 것처럼, 이세희가 태연한 어투로 대답했다. 세령은 잠자코 제 오라비의 날렵한 턱을 보았다. 동생들을 한 번씩 보고, 바깥도 두리번거리던 이세희가 걸음을 빨리했다. 여동생들이 따라오려 하자, 이세희가 “거기 있어.”라고 나긋하게 말한 후, 문으로 걸어가는 태윤을 뒤에서 막았다. 태윤은 단숨에 뺨을 가르며, 거칠게 벽을 짓누르는 손에 숨을 멈칫했다.

“내 앞에서 등을 보여?”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태윤이 천천히 뒤를 보았다. 마른침을 삼켰다. 불안하고 정신없이 움직이던 태윤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이세희가 흐음, 하고 소리를 내며 태윤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았다. 태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등을 보이는 건 침상에서나 하는 거야.”

농염하게 속삭이던 이세희는 태윤의 귓불을 깨물었다. 태윤이 무너질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세희가 “버텨.”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태윤을 벽에 밀쳤다. 벽을 양손으로 짚은 태윤이 뒤를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뒤, 뒤에 여동생들이…!”

“누가 너랑 그런 거 한다고. 그건, 네 아버지가 죽은 후에 실컷 해도 돼.”

그건, 에서 힘을 주는 이세희의 목소리에 그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흥분이 몸을 강하게 훑었다.

“그러면 왜….”

자길 잡고 놔주지 않느냐고 한탄하는 어투에 이세희가 어깨에 턱을 올렸다. 너무 가까워졌다. 이세희의 고른 숨소리, 난향이 뒤섞인 체취. 그리고 시선 사각지대에 걸리는 붉고 요염한 입술에 눈빛이 자꾸 그쪽으로 향했다. 태윤의 눈이 흔들거리는 걸 유심히 지켜보던 이세희가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네가 자꾸 도망가니까 잡고 싶어지잖아. 나 안 지켜줄 거야?”

이세희가 유려하게 웃으며 태윤을 꼭 끌어안자 태윤이 숨을 느리게 내뱉었다. 지켜 달란 말에 신기하게도 감돌던 흥분이 가라앉았다. 지금 본능에 따르다간 훗날 도모할 일을 망치게 될 것이다. 네 사람이 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를 새삼스레 자각한 태윤이 눈빛을 달리했다. 한결 견고해진 검은 두 눈에 이세희가 화사하게 웃었다.

“날 지켜주려고 궁에 온 거잖아. 그러면 곁에 있어야지. 응? 윤아, 그 귀여운 얼굴로 누구 홀리려는 거 아니지?”

다그치는 듯했지만 이세희의 목소리에는 농이 가득했다.

“지금 절 홀리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여동생들도 계시는데, 마마께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태윤이 계속 힘을 줘 이세희를 저지하려도 해도, 이세희의 힘이 만만치 않아 밀리지 않았다.

“그러면 앞으로 내 옆에만 있어. 나는 이 궁에서 혼자잖아.”

혼자라는 말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 세월 동안 혼자 버텨온 그가 안쓰럽고, 대견했다. 태윤은 말없이 이세희의 손등을 토닥였다. 딱딱한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다정다감한 위로에 이세희는 태윤을 부둥켜안고 가만히 있었다. 황제가 정해준 짧은 시간, 이때만 태윤과 거리낌 없이 있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구석에서 안아야 하는 이 현실이 짜증 났다. 태윤을 마음대로 침상에 끌어들이고, 구멍이 헐렁해질 때까지 박고 싶은 욕구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더 싫은 것은, 황제에게 박힐 때마다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태윤을 생각하며 발기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그것도 좋다고 거짓말로 속삭이면서.

“빨리 죽여 버려야 하는데….”

진심 어린 목소리로, 스산하게 중얼거리자 태윤이 깜짝 놀라 이세희를 돌아보았다.

“마마, 남들이 듣습니다.”

“누굴 죽인다고 말은 안 했어.”

이세희가 투덜거렸다. 그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군지 뻔히 아는 태윤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태윤의 건장하던 뺨에서 홍조가 사라지자, 이세희는 귀엽다는 듯 웃으며 그 뺨에 입을 맞추었다. 태윤이 숨을 멈추고 몸을 뒤틀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또다시 끌어당겨 안은 이세희가 어깨에 턱을 대고 중얼거렸다.

“앞으로 많은 일이 벌어질 텐데…. 네가 내 곁에 항상 있어야 해.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자가 한둘이 아닐 테니까.”

이세희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태윤이 입을 벙긋하기도 전에, 이세희는 제 말을 다 끝냈는지 몸을 돌려 동생들에게로 걸어갔다. 세형과 세령은 오라버니가 시커먼 사내를 끌어안고 좋아하는 꼴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고 있던 참이었다.

“다음에 올 때는 유한이랑 유란이도 데려와.”

세형이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희는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깨끗한 동생의 눈을 일직선으로 마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애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거든.”

“홍패만 있으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게 맞는 거지요?”

세령이 물었다. 이세희가 단호하게 “그래. 그걸 알고 홍패를 달라고 부탁한 거야. 고생 좀 했지.”라는 말을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어떤 식으로 부탁했는지 알게 된 세형과 세령은 얼굴을 굳혔다.

“뭘 가져오면 되지요?”

이세령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세희는 세령이 볼 수 있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버섯꽃.

잘나가는 의원들도 버섯과 섞어놓으면 구분하지 못하는 독초였다. 생긴 건 버섯 모양이고, 자라는 곳도 습하고 구석진 곳이었지만 엄연히 꽃이었다. 먹은 즉시 뱉어내지 않는 이상, 해독제가 없다고 일컬어지는 독초의 이름에 세령은 가슴이 떨렸다.

“어떻게 먹이시려고요…?”

세령의 불안감에 이세희는 여전히 떨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먹이면 돼.”

이세희는 새삼스레 그가 잔을 쓰지 않고 술을 마시는 버릇에 조소를 머금었다. 제 손으로 독주를 먹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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