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비설화 외전
목차
외전. 만화방창
외전. 만화방창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정사를 벌이면, 모든 이들에게 알려질 거라는 사실을. 태윤은 발정 난 짐승처럼 입을 맞추며 밀어붙이는 이세희를 안고 움찔거렸다. 겨우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자 다행히 궁인들은 눈치채고 물러갔다. 한서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게 기억의 끝자락에 머물렀다.
대신들이 조정을 마치거나 삼삼오오 모여 나랏일에 대해 의논할 때 쓰는 길고 넓적한 책상이 뒤로 물렸다. 보웅전에 드나드는 대신들이 이걸 보면 기겁하고 도망갈 정도로 급박하고 끈적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아마 한서진이 대신들에게 ‘폐하께서 애첩과….’라고 말만 해도 도망갔을 테지만, 혹시나 사람이 있을까 무서워 태윤은 이세희를 안으며 숨을 참았다. 계속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이세희의 힘에 밀려 책상이 끼긱, 하고 소리를 냈다. 태윤은 책상에 엉덩이를 걸친 채로, 반사적으로 손으로 책상을 꽈악 잡았다. 연신 끽, 끼긱, 하는 소리가 아래에서 질척거리는 소리와 맞물려 흘렀다.
참아야 했다. 여기가 아니라, 태얼궁 침전으로 가자고 황제답게 이세희를 어르고 달래야 했다. 태윤은 입안에 넘치는 타액을 허겁지겁 삼키며 눈을 떴다. 손은 거미줄처럼 끈끈하게 이세희의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아, 아…!”
하지만 이세희의 진주 같은 목덜미에서 나는 체취, 뺨에서 느껴지는 고운 살결, 자신만을 바라보며 흥분에 차 일렁거리는 검은 눈을 본 순간 태윤은 참을 수 없었다. 황자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천하다는 이유로 항상 한정적인 범위 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저절로 인내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인내심의 끝은 체념이었다.
어차피 나는 가질 수 없으니 주어진 것들에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리라. 내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해 욕심을 느낀다면,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고 힘들어질 거 같아 일찌감치 포기했다. 언제나 아버지나 형제들의 그늘에 가려져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하아, 윤아. 아….”
하지만 이세희만은 자신의 그 영역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나 영역 밖이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곳에 머물렀다. 이세희에게 다가가려면 자신이 정해 놓았던 선을 넘어야 했다. 그 세상에 이세희가 있었다. 그 손을 잡은 순간, 처음으로 느껴본 욕심에 태윤은 인내심을 모두 태워버렸다.
이세희 앞에선 이성적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말로는 이세희에게 ‘떠나도 좋다.’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그를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내 사랑이 그에게 짐이 된다면, 그 사실이 너무 괴로워 이세희를 놓아주리라 마음먹었다. 무표정하거나, 울거나, 비릿한 미소를 짓던 이세희가 간혹 곱게 웃던 게 눈에 밟혔다.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데 내 욕심으로 어떻게 곁에 두겠는가. 근심을 떨쳐내고, 마음 편히 웃으며 나긋하게 말하던 이세희가 그 자체로 참으로 어여뻐 태윤은 집착을 억지로 눌렀다.
“읏, 아, 세희야…! 으응….”
그래서 이세희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자신의 마음을 다 알고 와준 것 같았다. 이럴 땐 이세희가 자신보다 연상이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동생들 다루듯 자신을 능숙하게 안고 등을 토닥이다가 은근슬쩍 안으로 들어오는 손길에 태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세희의 크고 듬직한 손이 옆구리를 쓸었다. 입을 맞추다가, 숨을 헐떡거리며 눈을 아래로 뜨니 곤복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게 보였다.
궁녀들이 보면…. 멍하니 입안에 감도는 뭉근한 타액을 삼키며 태윤은 눈을 올렸다. 이세희가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태윤의 허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반사적으로 태윤이 이세희의 손목을 잡고 하아, 하, 하고 숨을 몰아쉬자 이세희가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싫어? 하지 말까?”
묘하게 시무룩하게 느껴지는 물음에 태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세희는 눈을 깜박였다. 어쩔 수 없는 성적 흥분으로 달아오른 뺨이 붉다. 그리고 옷 너머로 느껴지는 중심도 단단했다.
“싫으시면 그만두겠습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하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에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 그의 목소리가 닿는 곳마다 열기가 피어올랐다. 태윤은 침을 연달아 삼키며, 뒤로 물러나려는 이세희의 어깨를 잡았다. 경직된 어깨가 느껴졌다. 자신 때문에 긴장한 것인가. 태윤은 입가에 느슨한 미소를 머금고서, 반대편 손으로 이세희의 뺨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간질간질한 감촉에 이세희는 눈을 깜박이다가, 천천히 감았다. 그 모습이 꼭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어린 짐승 같아 태윤은 고양감이 차올랐다.
검은 머리카락이 상기된 뺨에 후드득 내려와 드리워져 있다. 백옥 같은 피부 사이로 보이는 붉은 빛이 매혹적이었다. 눈가, 입술… 그리고 귀 끝. 섬세하게 세공된 예술품 같은 이세희를 한참이나 눈으로 어루만지던 태윤이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그대를 싫어할 수 있지?”
태윤의 웃음기 밴 목소리에 이세희가 눈을 떴다. 욕정 때문에 흐트러진 얼굴이 어여뻤다. 멍한 눈을 깜박이는 모습에 태윤은 아래가 달아올랐다. 싫지 않았다. 이세희의 숨결, 손이 닿는 곳이 다 아릴 정도로 좋았다.
다만, 이곳이 대신들이 쓰는 곳이며 그들이 이세희의 나신을 볼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세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는 걸 무척 싫어했다. 선황 때문이었다. 이세희가 극도로 예민해지고, 타인에게 적의감를 드러내는 것들도. 좋아하는 걸 전부 앗아가고 싫어하는 걸 안겨준 선황을 떠올리다, 태윤은 이세희의 뺨을 하염없이 어루만졌다. 세상 다정한 손길에 이세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렇게 여린 사람인데. 태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숨을 고르게 뱉어냈다.
“그대를 싫어하지 않아. 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대 몸을 보는 걸 싫어하잖아. 그래서 난….”
“아.”
이세희가 짤막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그는 옥대에 손을 대었다. 풀 줄 알았는데, 이세희는 그 상태로 멈춰서 태윤을 빤히 보았다.
“한서진이 알아서 잘하겠죠. 그 사람은 폐하의 몸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걸 매우 싫어하니까.”
한서진의 이름을 말할 때 얼굴이 몹시 차가웠다. 저승에서 올라온 사자 같았다. 태윤은 왜 한서진과 이세희가 사이가 안 좋은지 몰라 침울해졌다. 한서진은 능글맞지만 의젓하고 착한 친구였다. 이세희는 예민하고 고아한 편이나, 알면 알수록 듬직하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세희가 저렇게 싫어하니 억지로 친분을 맺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세희는 이세희대로, 한서진은 한서진대로 살면 그만이겠지. 이세희의 얼굴을 부드러운 시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맨살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곤복이 훌러덩 벗겨져 있고 안에 받쳐 입은 옷까지 이세희가 풀고 있었다. 능숙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손에 태윤이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박였다.
“아니, 언제…. 이렇게 벗겼어?”
태윤이 황당함에 젖어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세희는 추위 때문에 꼿꼿하게 선 유두를 보더니 무감한 얼굴로 말했다.
“신첩이 근 사 년 동안 누구 옷을 벗겼겠습니까.”
태윤이 풀이 죽었다. 이세희는 별생각 없이 말한 것이었는데,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진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태윤은 죄책감에 젖은 눈을 들어 올리자, 이세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벌렸다.
“그러니 폐하께서 다 잊게 해주세요.”
“어…?”
이세희는 태윤이 제일 좋아하는 미소를 한껏 지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폐하만 기억나게 해 주세요.”
고의적으로 이세희가 허리를 더 숙여,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웃었다. 태윤의 다리를 벌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태윤이 황급히 이세희를 밀어냈다. 이세희가 역시 태윤이 싫어하나, 싶어 물러나려는데 태윤이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이세희를 자신이 앉았던 곳에 앉히고 자신이 다리 사이에 장군처럼 떡하고 앉았다. 고개를 위로 치켜든 태윤의 얼굴에 기세가 등등했다. 야릇하던 분위기가 한 번에 충성을 맹세하는 주군과 신하 같아져, 이세희는 이마를 짚고 숨을 내쉬었다.
“지, 짐이….”
고작 자신을 칭하는 말을 했을 뿐인데 태윤의 얼굴이 타오르는 것처럼 붉어졌다. 이세희는 다리를 느슨하게 벌린 채로, 발을 까닥거리며 짓궂게 웃었다. 정작 태윤은 이세희가 능글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응시하자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구릿빛 목이 시뻘게졌다. 그 남자의 아들이라고 믿기지 않게, 뼛속까지 우직하고 순진한 모습에 이세희는 웃음이 나올 거 같아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그래도 짧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태윤의 귀까지 붉어졌다.
“폐하, 이러다가 신하들이 와서 신첩의 몸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신첩은 싫어요.”
이세희의 농염한 조름에 태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른침을 크게 삼킨 태윤이 심호흡을 하더니, 이세희의 허벅지를 잡고 입을 열었다.
“그, 그대의…. 자, 자….”
“자지요?”
태윤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말이 없었다. 차마 그 말은 못 하겠는지,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희가 태윤에게 손을 뻗었다. 검을 들 때는 야차같이 무섭더니, 정사에선 영 어리숙한 모습에 귀여워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태윤이 이세희의 손을 잡았다. 이세희는 망설임 없이, 힘을 실어 자신 쪽으로 그를 당기고는 흥분에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신첩 옷부터 벗겨 주셔야 자지를 빠실 거 아닙니까.”
자지에 묘하게 힘이 실렸다. 태윤은 예쁜 입술로 음란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세희를 보다, ‘아, 저게 어른이구나.’ 하며 수긍했다. 두 살이지만 연상은 연상이었다. 태윤은 응, 하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며 덜덜 떨리는 손을 이세희의 허리춤에 가져다 대었다. 이세희는 두 손을 뒤로 뻗어 짚고, 허리를 젖혔다. 나른하기 짝이 없는 자세였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태윤이 종이고, 이세희가 주인인 것 같은 구도였다.
이세희가 겉에 입은 털옷을 벗기자, 안에 도톰하게 입은 평복이 드러났다. 평범한 검은색 비단 옷에 난이 수놓여 있었다. 단아한 차림새였는데, 이세희가 입으니 참으로 화려했다. 태윤이 이세희의 상의를 벗기려 하자, 이세희가 손목을 잡아 아래로 끌었다.
“자지는 여기에 있습니다.”
“으, 응….”
태윤이 눈을 이리저리 흔들며 시선을 피했다. 이미 할 거 다 해 놓은 상황에서, 왜 이리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지. 이세희는 목을 울리며 웃다가, 태윤의 뺨을 어루만졌다. 세심한 손길에 태윤이 시선이 이세희 쪽으로 향했다. 태윤의 눈 아래가 붉고 촉촉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희는 “그래요.”라고 다정하게 말해주며, 태윤을 조심스럽게 다리 사이에 꿇어앉혔다. 황제가 감히 후궁, 그것도 천민 출신에게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태윤은 사랑에 푹 빠진 얼굴로 이세희만 보며, 이세희에게 순종했다. 이세희는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태윤을 보며 그가 좋아하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태윤은 이세희에게 시선을 작살처럼 고정해두고서, 손을 위로 뻗어 허리의 매듭을 풀었다. 부끄러움에 애가 타 떨리긴 했지만, 나름대로 빠르게 풀었다.
바지를 슬쩍 내리자 퉁, 하고 발기한 대물이 튕겨 나왔다. 언제 보아도 놀라운 크기였다. 흥분한 지 좀 되었는지 선홍색으로 물들었고 그에 비해 색이 엷은 귀두 부분은 애액으로 번들 번들거렸다. 저게 자신의 안으로 들어온 것도 놀랍고, 흥분을 참고 자신을 유도한 이세희도 대단해 보였다.
태윤은 눈에 힘을 주었다. 흡, 하고 숨까지 힘껏 들이마신 태윤은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이세희의 자지를 조심스레 잡았다. 자신 때문에 흥분해서 뜨거워진 게 느껴졌다, 기분이 묘했다. 태윤의 볼이 더 붉어지고, 눈에 흥분이 감돌기 시작하자 이세희가 손을 내밀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태윤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으응, 하는 달콤한 소리를 내었다.
“폐하 자지도 꺼내서 만져 보세요. 기분이 좋으실 겁니다.”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희는 손을 좀 더 내려, 태윤의 귀 전체를 감싸고 조물조물 만졌다. 간지러웠는지 태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세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태윤이 어떻게 하는지 차분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태윤의 가파른 호흡이 귀두에 느껴지더니, 이내 말랑하고 촉촉한 혀가 귀두를 핥는 게 느껴졌다. 이세희의 눈썹이 일그러지며 음,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태윤은 흐르는 신음에 덩달아 용기를 얻어, 혀를 좀 더 내밀어 귀두를 전체적으로 둥글리듯 핥았다.
“으읏….”
이세희가 손을 들어 입가를 틀어막았다. 태공의 강제적인 구음과는 달랐다. 어설프고, 미숙하나 태윤이 핥아주는 거라 그런지 뱃속이 쾌감으로 들끓었다. 태윤은 이세희의 탄탄한 허벅지를 잡고, 대범하게 혀로 기둥까지 핥았다. 크기가 너무 커 다 삼키기엔 무리일 것 같아 삼킬 수 있는 부분만 타액으로 적실 셈이었다. 이세희가 해줬던 것처럼 말이다.
혀를 내밀어 추웁, 춥, 소리 나게 귀두를 핥던 태윤은 오목하게 들어간 요도를 보았다. 처음부터 이세희가 혀를 뾰족하게 세워 느릿하고, 질척이게 쑤셔주면 좋아서 허리와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때를 떠올리며 태윤은 혀를 세운 후, 요도를 슬쩍 아래에서 위로 쓸었다.
“아…!”
이세희가 신음을 가느다랗게 흘리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세희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애써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건 또 언제 배우셔가지고….”
태윤은 이세희를 올려다보며 혀로 요도를 쑤셨다. 모르기 때문에 애태우듯 빠는 게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힘을 줘서 핥는 행위에 너무 갑작스러운 쾌감이 일었다. 이세희는 읏, 하고 신음을 짧게 흘리다가 고개를 숙이고 헐떡였다. 분명히 태윤의 입놀림은 별로였다. 무식한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이리 좋은 것인지…. 이세희는 눈을 내리깔았다. 태윤의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관을 쓰고 있었지만, 성적 흥분 때문에 땀이 맺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린 상태였다. 그 모습을 탁한 눈으로 보던 이세희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태윤이 혀를 날름, 내밀어 귀두 전체를 쓸었다.
“이제 입을 벌려서….”
이세희가 귀를 만지던 손을 내려, 턱을 잡고 당겼다. 태윤의 입이 벌어지며 타액으로 흠뻑 젖은 혀가 보였다. 저 안으로 자신의 자지가 들어간다 생각하니, 희열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세희의 얼굴에 정복욕이 짙게 깔렸다. 당장이라도 벌어진 입안으로 자지를 거세게 쑤셔박고 싶었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저 얼굴에 백탁액을 뿌려 당혹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면 어쩔 줄 모르면서도, 입술에 엉겨 붙은 정액을 핥아먹겠지.
그러나 강하게 밀어붙이면, 도리어 정사에 두려움을 가질 걸 알고서 이세희는 본능을 억눌렀다. 저번에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느끼는 지점만 찔러 울게 했으니 오늘은 다정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흐물흐물 녹아내려, 온천에서 목욕을 즐기는 것처럼 녹진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자, 폐하. 이제 삼켜 보세요.”
이세희는 하나하나 일러주며 태윤을 능수능란하게 이끌어갔다. 태윤의 귓불을 이파리 만지듯 가볍게 만지던 손길은 어느새 현을 타는 것처럼 내려와 강인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두근, 두근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불안정하다 싶을 정도로 강하고 빠르게 뛴다. 이세희는 책상에서 내려와 태윤의 앞에 섰다. 태윤의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크기의 자지에 태윤이 겁을 먹고 마른침을 삼켰다.
“다 안 삼키셔도 됩니다. 아주 조금씩, 하실 수 있는 만큼만 삼켜보세요. 자, 아, 해보세요.”
이세희가 아, 하고 말끝을 늘렸다. 태윤은 얼굴을 가볍게 탁, 탁 때리다가, 말랑한 입술에 비벼지는 단단하고 뜨거운 귀두에 결국 입술을 천천히 벌렸다. 이세희의 눈매가 완연한 곡선을 그리자 태윤은 용기를 내어 귀두를 삼켰다. 혓바닥에 닿는 귀두는 매끈했다.
“으읍….”
태윤이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힘을 주어 귀두와 그 윗부분까지 빨아들였다. 적당한 온도를 가진 점막이 자지를 감싸주자, 이세희의 얼굴에 쾌감이 물들었다. 태윤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만져주고, 귓불을 연신 매만지면서 이세희는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흐읍…!”
반도 안 들어왔는데, 벌써 숨이 턱턱 막히고 힘들었다. 허리가 얕게 움직일 때마다 목젖을 누르고 들어오는 귀두에 태윤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이세희가 머리를 잡고 있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넘어졌으리라. 흐읍, 흡, 하고 숨을 몰아쉬며 태윤은 이세희이 허벅지를 잡고 버텼다. 혓바닥과 입천장, 점막, 모든 곳에 비벼지는 단단한 감촉에 눈가에 눈물이 핑 고였다. 이세희는 쉬이, 하고 태윤을 달래고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음, 잘하시는데요.”
하지만 찔걱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세희는 태윤의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서, 허리를 점차 빠르게 움직였다. 태윤은 그저 입에 힘을 주고 이세희가 해줬던 것처럼 자지를 조일 뿐이었다.
“흐읍, 응…! 으읍!”
탁, 탁, 하고 쳐올리는 힘에 태윤의 눈이 점차 흐려졌다. 삼키지 못한 타액들이 몽글몽글 포말처럼 자지와 입술 주변에 맺혔다. 입술은 마찰에 의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세희의 허벅지를 잡는 손은, 어느새 필사적으로 변해 힘줄이 위로 융기하여 움찔거렸다.
“아, 너무….”
미숙하기 짝이 없는 혀놀림. 단지 물고만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어떻게든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노력하는 태윤을 보자 배에 열이 고였다. 정제되지 못하고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감정에 이세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쾌감 때문이었다. 하아, 하고 무겁고 끈적한 숨을 토한 이세희는 참을성을 잃고 태윤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태윤의 입술과 귀두 끝이 투명한 타액으로 연결되었다. 태윤은 멍한 얼굴로 숨을 헐떡거리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고였던 타액이 주르륵 흐르며 곤복에 짙은 자국을 남겼다.
“더 해도 되겠습니까?”
이세희의 목소리가 타액에 흥건히 젖어 축축했다. 태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뭘…?”
“폐하의 몸에 신첩이 박고 싶습니다. 폐하의 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들어가게 해 주세요….”
이세희가 벌어진 입안으로 손가락을 천천히 넣었다. 태윤은 자지를 머금고 있을 때처럼, 긴 검지를 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멍한 얼굴로 검지만 물고 있더니, 이세희가 사르르 웃자 자신도 따라 웃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과감하게 깊숙이 빨아들이고서 정성스레 핥았다. 거의 신을 모시는 눈빛이었다. 경건하고, 신성했다. 불신이라는 걸 모르는 눈으로 이세희를 보며, 태윤은 혀를 정직하게 움직여 꼼꼼히 빨았다. 어느 정도 젖자, 태윤이 알아서 빼내었다.
“그대가 해주는 건 다 좋아.”
태윤이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이세희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순한 강아지 같은 행동에 이세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내답게 중후한 목소리가 끈끈했다. 보기 드문 태윤의 애교에 기분이 좋아진 이세희는 태윤의 턱을 쥐고 들어올렸다.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에 잡힌 잘 그을린 피부가 도드라졌다.
“싫으면 언제든 싫다고 말하세요. 싫은 걸 참아가면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응.”
순진한 대답에도 이세희는 엄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신첩이 좋으셔도, 폐하의 기분이 좋지 않으시면 안 좋으신 겁니다. 아셨지요?”
아랫사람 대하듯 조곤조곤하게 말한 이세희가 태윤을 잡아 일으켰다. 누가 말할 것도 없이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서로 입을 맞추었다. 이세희가 태윤의 입술을 조용하고, 보드랍게 빨아들였다. 태윤은 이세희의 양손을 꼭 잡은 채 처음으로 입 맞추는 소년처럼 볼을 붉혔다. 언제 해도 이세희는 너무 잘했고, 자신은 모든 것에 허둥지둥거렸다. 이세희에게 발을 맞추고 싶어, 안달이 나 조급하게 혀를 움직여 이세희의 입술을 핥았다. 간지러웠는지 이세희가 눈을 감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나붓하게 퍼지는 웃음소리가 입술에 비벼졌다. 그 감촉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태윤은 그게 좋아 다시 이세희의 입술을 핥았다.
“읏….”
그사이, 이세희의 손은 슬금슬금 움직여 태윤의 바지 안으로 들어왔다. 속전속결이었다. 바지 매듭을 한 번에 벗기고, 엉덩이 사이에 들어왔다. 태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당기려 하자, 이세희가 왼손으로 뒷목을 잡은 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입술을 살짝 떼어낸 이세희가 눈을 깜박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만 봐.”
과거에 들었던 그 말에 태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태윤은 대답 대신, 눈을 감고 이세희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연달아 쪼옵, 하고 빨아들이고 입술을 꿀처럼 달게 빨았다. 이세희는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빠르게 곤복을 벗겼다. 오른손은 메마른 회음부를 느리게 매만지더니, 주름진 구멍을 더듬거렸다. 태윤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세희의 어깨를 잡고서 입술에 매달리며 으응, 하고 애달픈 신음을 흘렸다.
“신첩만 믿으시고….”
“아…!”
“쉬이, 괜찮아요.”
이세희가 고개를 숙여, 귓불을 빨며 구멍 안으로 검지를 밀어 넣었다. 넣기가 무섭게 꽈악 빨아들이는 점막에 이세희의 입에서도 습윤한 신음이 나왔다. 태윤의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이세희의 검지가 딱 두 마디가 들어갔을 뿐인데, 점막이 메말라서 그런지 아릿했다. 이물감이 심해 태윤이 이세희를 끌어안고,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읏…!”
이세희의 손가락이 다 들어왔다. 꾸욱, 꾹, 하고 누르는 손길에 태윤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이세희는 태윤의 등에 팔을 휘감아 완전히 자신 쪽으로 밀착했다. 두 사람의 다리가 들썩거리며 맞닿았다. 자지는 이미 꼿꼿하게 서서 서로의 아랫배에 문질러지고 있었다. 이세희는 곁눈질로 태윤의 옆모습을 살피며, 검지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손톱이 다 나올 때까지 뺐다가, 한 번에 박아넣길 반복하며 구멍의 수축과 이완을 살폈다. 태윤의 등이 움찔거리긴 했지만 아픔을 호소하진 않아, 천천히 중지를 입구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힘을 실어 넣자 삽입에 능숙해진 구멍이 뻐끔거리며 중지를 받아들였다.
“아…!”
열리는 틈을 이용해, 이세희가 망설임 없이 쭉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안에 붙는 열기에 태윤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며 이세희의 중지와 검지를 물어, 두 손가락이 안에서 교차했다.
“응…!”
그러나 이세희가 손가락을 굽혀, 어느 지점을 긁어내리고 문지르자 태윤의 신음이 확 달라졌다. 꿀에 담근 것처럼 늘어지다 못해 끝이 가늘어졌다. 이세희의 입술에 미소가 감돌았다. 눈가는 쾌감이 돌며 붉어졌다. 이세희의 손가락이 느릿하고, 확실하게 마찰하자 태윤의 등이 연신 들썩거렸다. 아마 등을 만진다면 척추를 따라 자리 잡은 근육이 기립하는 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세희는 목덜미에 돋아난 핏줄에 입을 맞추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상에서 할까요? 그게 편하시겠지요?”
“하아…. 으, 읏…!”
태윤은 여전히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른 손가락에 대답도 못 했다. 입이 벌어지고 타액이 흘렀다.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다. 이세희도 꺼덕거리는 자지가 이제 슬슬 한계라고 느꼈다. 어서 태윤의 안에 넣고, 발정 난 짐승처럼 박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이세희는 태윤의 안에서 손가락을 확 빼내었다.
“아흑!”
손가락이 세게 빠져나가면서 열감이 내벽 전체에 끼쳤다. 아릿함에 태윤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웅크렸다.
“아프십니까?”
이세희가 물었다. 태윤은 뱃속을 얼얼하게 치고 가는 감각에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픔이 아니었다. 내벽에서 전해져 척추로 타고 흐르는 이 전율은 쾌감이었다. 그걸 알기에 태윤은 신음을 삼키며 이세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좋아서….”
태윤의 목소리가 쾌감으로 늘어졌다. 신음 때문에 늘 또박또박하던 발음도 형편없이 뭉개졌다. 이세희가 빤히 보고 있자 태윤이 이세희의 품에 스스로 안겨들며 중얼거렸다.
“그대가 좋아서….”
“이런. 그러면 신첩도 참기가… 힘듭니다.”
억지로 참으며 이세희가 대답했다. 태윤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이며 이세희를 보더니 입을 쪽 맞추었다. 입맞춤은 아니었다. 입술에 닿은 가벼운 접촉에 이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태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서 그래. 정말이야. 그러니까….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줘.”
태윤의 눈에 퍼진 쾌감에 이세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이세희는 그대로 태윤에게 입을 맞추고서, 자지를 꺼내 태윤의 것과 비볐다. 태윤의 신음이 자지러지게 높아졌다. 아무리 사람을 물렸어도 호위를 위해 금군들이 사방에 깔렸을 테니, 아마 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두 사람은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입술이 닳을 정도로 빨고, 핥았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체취를 갉아먹듯 흡입했다. 모든 것이 서로에겐 미약으로 작용했다. 이곳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둘뿐이었다. 극락이었다.
“아…! 아읏…!”
어느새 태윤은 엎드려 책상에 두 손을 짚고 이세희의 삽입을 기다렸다. 이세희는 숨을 몰아쉬며, 태윤의 좁고 부드러운 엉덩이 사이에 자지를 넣었다. 회음부에 귀두가 마찰되자, 그 묘하고 아슬아슬한 쾌감에 입술이 벌어졌다. 태윤의 눈이 감기고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아, 아…! 으으… 조, 좋아…. 아, 거기…!”
“구멍에 비벼주는 게 좋으시죠?”
이세희가 태윤의 목을 감싸고서 회음부에 느릿느릿, 액을 묻혔다. 촘촘하게 맞물린 주름에도 자신의 액을 모두 맺히게 할 작정인지 아주 섬세한 동작이 이어졌다. 탄력적인 고환에도 이세희의 귀두가 문질러졌다. 태윤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엉덩이가 오므라들며 이세희의 자지를 슬쩍 조였다. 이세희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벌써 조이시면 어떡하십니까.”
밀색 엉덩이 사이에 맞물려 있던 선홍색 자지가 빠져나왔다. 자지로 엉덩이를 탁탁 때리자 수치심에 태윤의 귀와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태윤의 목에서 손을 떼어낸 이세희는 태윤의 손등 위에 손을 겹쳤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자지 뿌리를 잡고, 태윤의 구멍에 대고 꾸욱 눌렀다. 주름이 서서히 펴졌다. 자지에 맞물려 담금질이라도 하듯 쭈욱 펴지더니, 귀두가 안으로 밀착했다.
“흐으으…!”
태윤의 신음이 점점 멎어갔다. 이세희의 손가락을 세게 잡고 태윤이 버티는 게 느껴졌다. 이세희는 귀두를 야금야금 빨아먹는 내벽에 신음을 흘렸다. 그 상태로 물러남은 없었다. 이세희는 힘을 실어, 그대로 박아 넣었다. 태윤과 이세희의 입맞춤처럼, 서로 달라붙어 있던 내벽이 이세희의 단단하고 긴 자지에 의해 벌어졌다.
“흐윽…!”
한순간에 숨이 뚝 멈추었다. 등을 타고 흐르는 통증에 태윤이 고개를 숙이고 바들바들 떨었다. 떨림은 내벽까지 전해졌다. 자신의 자지를 감싸는 전율에 이세희는 눈을 감고, 태윤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태윤의 체취가 한결 진해졌다. 태공과 비슷하나, 좀 더 여린 체취에 자신이 안고 있는 이가 윤임을 알았다.
“윤아.”
이세희는 태윤의 강직한 어깨에 연달아 입을 맞추며 황제의 이름을 불렀다. 윤은 천천히 눈을 뜨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문에 고통에 맺혔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책상에 고였다. 이세희는 미안, 이라고 속삭이며 자지를 슬쩍 빼내었다. 달라붙었던 점막이 떨어지는 선연한 느낌에 태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고개를 젓자 눈물이 마구 흩뿌려졌다.
“윤아.”
이세희의 자지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줄 참인지, 이세희는 잇새로 신음을 흘리며 태윤의 안을 누볐다. 처음에는 아픔이지만, 곧 중독성 강한 쾌감이 올 것을 알기에 태윤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책상에 뺨을 대었다. 차라리 이렇게 상체를 납작하게 하고, 엉덩이를 완전히 빼 이세희를 받아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읏, 응…! 으…! 아, 조, 조금만 처, 천천히…!”
“하아, 하아…!”
이세희가 태윤의 어깨를 꽉 잡고서 허리를 움직였다. 고환이 눌릴 정도로 깊게 들어오는 자지에 태윤은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버거운 삽입에 발기했던 자지는 반쯤 식은 상태였다. 고통에 혼미하여, 책상에 널브러진 채 호흡만 내뱉었다.
“아…!”
그러던 어느 순간, 이세희가 자지를 빠르게 빼내더니, 직격으로 꽂아 넣었다. 한 번에 느끼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아랫배가 부푸는 게 느껴졌다. 버거움에 태윤이 상체를 들어 올리려는데, 이세희가 손으로 어깨를 꽉 누르면서 허리를 다시 한 번 쳐올렸다.
“아아아아!”
순식간에 몸에 퍼지는 쾌감에 태윤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세희는 태윤의 목덜미와 뺨, 귀에 빠르게 입을 맞추면서 허리를 거세게 움직였다. 처음과 다르게 너무 깊고, 빠르게 들어와 한 곳만 찌르는 자지에 태윤이 겁이 나 손을 뒤로 뻗었다. 이세희의 배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움직였으나 허공을 헛짚었다. 그러다 이세희의 탄탄한 배에 닿아 밀어내는데, 이세희가 그 손목을 잡아 책상에 도로 갖다 놓았다.
“윤아, 하아, 조금만 참아. 기분 좋아질 거야.”
“으응, 응…!”
이세희의 귀두가 한 지점을 비벼댔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발끝으로 바닥을 지탱해 섰다. 자신도 모르게 안달이 나 그러고 있었다. 손가락은 곱아들었다. 안으로 한 번에 푸욱, 꽂히는 자지에 태윤의 눈이 파르르 떨리다가 뒤집혔다. 엄청난 쾌감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윤아, 좋지? 응?”
이세희가 귓불을 깨물며 되물었다. 좁고 탱탱한 엉덩이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대물이 번들거렸다. 태윤이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를 “아, 아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쾌감에 초점이 완전히 풀린 눈을 깜박였다.
아픔을 준 것 이상으로 쾌감을 주어 몸이 벌벌 떨렸다. 머리에 쾌감과 이세희 빼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연결된 부위에서 찔걱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태윤의 붉은 내벽은 이세희의 자지에 돋아난 핏줄까지 외울 셈인지,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굵고 긴 자지가 모양대로 길을 내놓고, 빠져나가려는 게 괘씸했는지 꽉 물었다. 어찌나 달라붙던지 귀두가 퉁퉁 부은 입구에 걸쳐질 때 붉은 점막이 슬쩍 따라 나왔다. 자지가 온기가 있는 내벽으로 들어가자, 점막이 주름과 함께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아, 아앗!”
안을 쑤시던 자지가 빠져나가고 찌르는 것도 좋아서 괴로운데, 이세희가 손을 내려 곤두선 자지를 감싸 쥐었다. 크고, 두꺼운 손이 자지를 한 번에 감싸고 빠르게 위아래로 훑었다. 동시에 자지가 얕게 움직여 한 지점을 연속으로 찔렀다. 뭉툭한 귀두가 그 지점을 물러날 듯, 말 듯, 애태우면서 비비던 순간, 이세희의 자지가 고환까지 감싸고 싹 훑었다. 조였다, 푸는 손길에 허벅지 안쪽이 바들바들 떨렸다.
“흐읏…! 아!”
“폐하, 신첩 손에 하셔도 됩니다. 신첩은 그게 좋습니다.”
뱃속에 쌓인 열이 터질 것이다. 이세희의 손에 사정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젓는데 이세희가 벌을 주듯 자지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자지에 책상에 뺨을 대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벽은 자지가 빠져나가 공허해진 자리가 아깝다는 듯 조였다. 이세희는 내벽의 움직임조차 이미 알고 있었는지, 숨을 한 번 내쉬고서 직선으로 쭉 밀어 넣었다. 푹, 하고 자지가 부은 내벽 사이에 꽂혔다. 귀두가 느끼는 지점에 확 닿아 비벼지자 태윤의 목이 젖혀졌다. 지나치게 느껴버려 신음은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안에서 사그라졌다.
“하아…!”
그리고 이세희의 손이 태윤의 뿌리를 쥐고, 조였다 푸는 걸 반복하자 태윤의 요도가 벌름거렸다. 이내 피피핏, 하고 소변 같은 액체가 쪼르륵하고 위로 쏟아져 나왔다. 책상이 액에 금방 젖어들었다. 또한 태윤의 자지를 느슨하게 잡고 있던 이세희의 손에도, 액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흐윽…. 아, 싫어….”
자신이 이세희의 손에 실례 비슷한 걸 했다고 생각한 태윤이 울먹거렸다. 이세희도 태윤의 안에 파정을 마치고 나서, 자지를 빼내었다. 아직 발기 상태를 유지한 자지가 튕겨져 나왔다. 이세희는 얼굴을 가리고 피하는 태윤을 안아, 책상에 반듯하게 눕히고 다리를 어깨에 걸쳤다. 퉁퉁 부은 입구에 대고 귀두를 비비자 태윤의 신음이 다시 흘러나왔다. 이세희는 태윤의 액이 묻지 않은 왼손 엄지를 태윤의 입에 물리고서 자지를 바로 꽂아 넣었다.
“아흣…! 으응…!”
배가 자지로 꽉 차는 느낌. 숨이 한 번에 멎는 이 압박감이 좋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태윤이 팔을 뻗었다. 이세희가 상체를 숙여 태윤을 안았다. 두 사람의 무게에 책상이 끼익, 끽,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태윤의 입술 위로 이세희의 숨결이 떨어졌다.
“폐하, 신첩에게 모든 걸 보여주세요.”
“하아…! 아, 세희야…!”
“신첩을….”
이세희는 태윤을 완전히 짓누르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만 기억할 수 있도록…. 신첩에게 모든 걸 보여주고, 느끼게 해 주세요.”
그리 말하는 이세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며 태윤의 안을 누볐다. 태윤과 이세희는 대낮부터 정신없이 얽혔다. 태윤의 내벽은 주름마저 다 부어, 쓰리고 아릿했지만 이세희가 새겨진다는 생각에 머리가 황홀해졌다. 고환의 정액이 텅텅 빌 정도로 사정했다.
미치도록 좋았다.
*
태윤이 황제가 되고 나서, 시시때때로 정사를 맺었지만 한 번도 못 걸은 적은 없었다. 장마가 내려 그 기회를 틈타 도둑처럼 연인의 정을 맺었을 때도, 태윤은 알아서 잘 걸었다. 이세희가 도와주지 않아도 침상에서 내려와 잘 씻었다. 심지어 이세희가 씻을 수 있도록 따스한 물도 받아주고, 이세희가 씻는 동안 작은 군방에서 조촐한 상까지 차려올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체력이 좋기로 소문난 태윤도 기운이 쏙 빠져 책상에 정액 범벅이 되어 널브러진 것이다. 이세희는 힘이 없어 손가락 까닥하기도 힘든 태윤에게 직접 옷을 입혀주었다. 벗길 때처럼 입히는 것도 장인이었다. 멍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이세희의 시중을 받던 태윤은 신은 신기지 않는 이세희를 멀뚱히 보았다. 의아함이 깃든 눈빛에 이세희는 두 눈을 곱게 접었다. 특유의 사르르 녹아내리는 미소에 태윤의 얼굴이 붉어졌다.
“걸어가시게요?”
이세희가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선황에겐 잘 쓰지 않던 상냥한 어투에 목 안이 간지러웠다. 태윤이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이세희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다른 무릎은 세운 채로 태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근육이 붙어 탄탄한 태윤의 종아리를 살살 풀어주며 이세희가 조곤조곤 말했다.
“신첩이 업어드리겠습니다. 태얼궁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
그러면 이세희는? 태윤은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대는?”
“신첩은 화요궁에 가야겠지요?”
이세희가 되물었다. 태윤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이세희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짐의 궁이 곧 그대의 궁이고, 그대의 궁이 곧 짐의 궁일세. 어디 가지 말고 태얼궁에서 씻고, 같이 숙면에 드는 거야.”
늘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 이세희와 침상에 같이 눕고, 같이 조반을 들고, 시간이 되면 이세희와 손을 잡고 후원을 거닐고. 몇 번이나 생각한 상상을 태윤이 손까지 벌려가며 재잘재잘거리자, 이세희가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대답했다. 눈치를 보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바라는 눈빛이 태윤에게 전해졌다.
“폐하, 본래 후궁은 동침 이후 본인이 하사받은 궁으로 가야합니다. 그것이 법도이지 않습니까?”
“짐이 황제이고 법도인 것을 누가 뭐라 하겠느냐? 오늘 밤부터 세희 너는 짐의 침상을 함께 쓰도록 하여라.”
“폐하, 하오나….”
이세희가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자, 태윤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명이다.”
태윤의 의기양양한 어조에 이세희가 기다렸다는 듯 유려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태윤은 자신이 이세희의 술수에 넘어간 것을 알고 헛웃음을 지었다. 태윤과 자고 싶으나, 법도에 따라 화요궁으로 가야 하니 그것이 싫어 은근슬쩍 태윤의 어명을 기다렸던 것이다. 구미호에게 홀린 것 같은 기분에 태윤이 실없이 웃었다.
“폐하, 그 어명은 다른 대신들에게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신첩을 대신들로부터 지켜 주셔야 해요.”
이세희의 부탁에 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이 되었는지 이세희가 곱게 웃었다. 선황의 부재로 마음의 짐을 덜은 이세희는 자주 제 감정을 드러냈다. 그때 이세희는 매우 어여뻤다. 태윤은 계절에 맞게 피어난 화사한 꽃 같은 이세희의 뺨을 건드렸다. 이세희가 눈을 감으며 태윤의 오목한 손바닥에 뺨을 갖다 대고, 눈을 깜박거렸다.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락거렸다.
“앞으로 그대와 하고 싶은 게 많아. 암행을 나가고 싶어. 그대와 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
“암행이요?”
궁에 온 지 사 년 만에 사가로 갔었지만, 그 마저도 태윤이 보고 싶어 제 발로 돌아온 이세희였다. 태윤은 이세희의 긴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짐이 자주 가는 객잔이 있어. 아주 맛있는 화덕구이를 파는 곳인데, 그대에게도 먹여주고 싶거든. 밖으로는 강이 흐르고,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하늘엔 별이 반짝여. 아직 추운 겨울이 오기 전이니 딱 맞을 거야.”
한서진이나, 다른 금군들과 술을 마시며 종종 노닐던 곳이었다. 이세희를 만나고 난 뒤로부턴 늘 이세희가 생각났다. 그에게도 먹여주고 싶었다. 황궁에서 근 사 년을 지냈으니 온갖 산해진미에 길들여졌을 테지만, 그래도 이세희와 이곳에 오고 싶다는 갈망은 멈추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유독 덥고 끈끈했던 이번 여름, 한서진과 길을 걸으면서도 시선이 그 객잔에 머물렀다. 한서진이 무얼 하느냐고, 어서 가자고 재촉하지 않았다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하염없이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문도 모른 채 목적지가 있음에도 빙빙 돌아가곤 했다.
왜 그랬을까, 에 대한 답을 이제야 찾았다. 태윤은 이세희의 긴 검은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주며 담담하게 고백했다.
“그대와 일상을 함께하고 싶어. 별거 아니긴 하지만….”
태윤은 말하고서 부끄러웠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이세희가 말없이 태윤만 일직선으로 쭉 바라보자, 그 시선에 무안해져 태윤은 뒷목을 매만졌다. 역시 너무 형편없는 고백이었나. 온천 여행이나, 아니면 단풍이 예쁘게 무르익은 산으로 놀러가자고 할걸.
“좋습니다.”
이세희는 예쁘게 웃어주었다. 그는 태윤의 신발을 한 손에 쥐고서, 몸을 일으켰다. 이세희의 건장한 상체가 돋보였다. 태윤이 눈을 깜박이며 이세희의 행동을 좇았다. 이세희가 한쪽 손을 책상에 짚고서, 고개를 숙여 태윤과 눈을 더 가까이 마주쳤다. 아예 맞물릴 것처럼, 지나치게 가까워져 태윤은 눈을 내리떴다. 호흡이 간질간질하게 콧등을 간지럽혔다.
“폐하께서 신첩을 위해 데려가 주신다는데, 좋은 곳이겠지요. 천민으로 살 때는 가보지 못했으니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태윤은 저도 모르게 신난 목소리로 “응, 응.”이라고 두 번이나 대답했다. 좋아서 감당 못 하는 게 눈에 보여 이세희는 피식 웃었다. 이럴 때 태윤이 연인과 모든 게 처음이라 신난 게 느껴졌다. 이세희는 등을 돌렸다. 태윤에게 업어 주겠노라고, 업히라고 손짓하자 태윤이 머뭇거렸다.
“어서 업히세요. 안쪽이 얼얼하셔서 걷기 힘드실 겁니다.”
어떤 고통인지 다 안다는 어투, 그리고 약간 혼을 내는 듯한 눈빛에 태윤은 결국 이세희의 등에 업혔다. 무거울까 봐 걱정이 되었는데, 생각보다 이세희는 힘든 내색이라곤 없이 태윤을 듬직하게 업고 일어났다. 태윤이 이세희를 업었을 때는 무거워서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는데.
“역시 힘이 좋구나.”
태윤이 이세희의 목덜미에 뺨을 대며 중얼거렸다. 이세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 봬도 마을에서 힘이 제일 세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세희의 과거는 하나도 몰랐다. 그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천민, 물지기, 집안의 장남. 여동생 둘은 혼인을 했고, 막내 여동생은 부모님 대신 훈육관이 키운다고만 들었다.
이세희가 밖에 소리쳤다. 폐하께서 나가신다, 문을 열어라! 궁에서 오래 산 이답게 목소리가 낮으면서, 위엄이 넘쳤다. 태윤은 이세희의 목에 팔을 두른 채로 숨을 색색 내쉬었다. 이세희가 말한 대로 엉덩이 안쪽이 열감이 남아 쿡쿡 쓰시고 아릿했다. 예전에는 참고 걸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여 눈을 반쯤 감았다. 이세희의 체취가 강하게 묻어나왔다. 흔하게 흘러가는 이 시간이 무척 좋았다. 태윤은 이세희의 목덜미에 은근히 코를 비볐다.
“폐하?”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의 주인은 친우이자, 금군대장인 한서진이었다. 업혀 있는 태윤이 걱정스러웠는지 한서진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세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폐하, 애첩과 사이가 좋으신 건 소신들도 좋은 일이지만 이곳은 대신들이 사용하는 곳입니다. 모쪼록 궁에서….”
“선황께서 이곳으로 나를 데려올 때는 한 마디도 못하더니…. 이제 와서 말씀은 참 잘하십니다. 그때도 그러시지.”
이세희가 대놓고 빈정거렸다. 어쩐지, 이세희가 이곳을 몹시 잘 안다 싶었더니 선황에게 억지로 끌려온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한 순간에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이세희와 한서진이 서로 노려보았다. 짐승의 눈싸움처럼 치열한 눈빛이 오고 가자, 보다 못한 태윤이 이세희가 이세희의 목을 끌어안고 서둘러 말했다.
“어서 태얼궁으로 가자꾸나. 세희가 배고프겠어.”
“힘을 많이 썼더니 배고프긴 하네요.”
이세희가 태연자약하게 대답하며 웃었다. 금군들의 얼굴이 민망함에 달아올랐다. 그들 중 하나였던 한서진도 으, 하고 질색하다가 태얼궁이란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졌다.
“폐하, 설마 귀비 마마를 태얼궁 침전에 모실 생각이십니까?”
한서진이 그것만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금군들도 하나같이 한마음이었는지, 단합해서 ‘폐하, 그것만은 안 됩니다!’라고 소리쳤다. 모두 이세희보다 태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궁에서 태윤을 제외한 궁인들은 이세희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제도나 저 먼 현, 바다. 그 어디에서도 이세희를 악첩이라고 욕하고, 나라를 말아먹을 미모라고 험담할 뿐 아끼진 않았다.
이세희가 그걸 제일 잘 알았다. 태윤만큼 자신을 좋아해주고, 아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자신에게 적의감을 드러내는 금군들을 보며 눈을 날카롭게 뜨고, 입술 끝을 비틀었다. 태윤만 아니었다면 한 주먹도 안 되었을 놈들을 차례차례 노려보는데, 뒤에서 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귀비만이 이 황궁, 더 나아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짐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반려자다. 그런데 짐의 반려를 감히 그런 식으로 노려보다니, 너희들이 정녕 미쳤느냐? 대장은 무엇 하길래 금군들의 군기가 엉망이 되어 짐과 짐의 반려를 저리 바라본단 말이냐?”
“폐하, 소신들은 다만 폐하의 체면과 위엄이 염려가 되어….”
한서진이 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태윤은 차가운 눈으로 한서진을 바라보았다. 항상 곁에서 함께했던 친우의 눈이 아니었다. 질서가 분명한 황제의 눈이었다. 자신을 신하로 대하는 눈에, 한서진은 잘못을 깨닫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바닥에 댄 채, 머리를 땅에 대었다.
“폐하, 소신이 소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폐하께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이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대장의 솔선수범에 다른 금군들도 땅에 무릎을 대었다. 태윤은 그래도 눈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이세희는 웃고 싶은 입술을 꾹 참으며 바닥을 보았다. 새삼 윤이 자신의 반려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는데 누가 도와줬을까. 태공은 이세희가 경멸하는 시선에 수치스러워하고, 굴욕감을 느끼는 걸 즐겼다. 이세희가 고립되길 원했다.
그의 욕심을 알기에 더욱 이를 갈며 시선을 견딘 것도 있었다. 어떻게 수치스럽지 않을 수 있었을까.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불현듯 지나가는 과거의 감정에 이세희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그 먹먹함도 찰나였다. 태윤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강직한 말에 앙금처럼 맺혔던 감정들이 녹아내렸다.
“세희는 너희들이 함부로 바라볼 사람이 아니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윤의 보호에 이세희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비었던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애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런 애정은 처음이라 그런가. 윤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싶었다. 날 평생 지켜주고, 예뻐해 달라고. 하나뿐인 연인, 반려에게 받는 사랑은 받아도, 받아도 끝이 없었다. 그가 자신을 지켜줘야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도 좋았다.
“이번에는 옛정을 생각해 용서하고 넘어가겠지만, 한 번만 더 세희를 함부로 대했다간 벌을 면치 못하리라. 세희는 짐의 반려이며, 이 궁에서 짐 다음으로 버금가는 주인이다. 그것을 반드시 기억하거라.”
금군들이 묵직한 목소리로 폐하의 명을 거역하지 않겠노라고 대답했다.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태윤은 한서진과 금군들에게 일어나라고 명했다. 호되게 혼날 때와는 다른 부드럽고 매끄러운 어조가 태윤의 입에서 나왔다.
“그대들이 짐을 얼마나 믿는지, 어떤 마음으로 충성을 바치는지 알고 있네. 짐이 금군대장으로 선황의 곁에서 일할 때, 그대들이 짐을 봐왔기 때문에 얻은 충성이겠지.”
눈을 깜박이던 태윤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세희의 등에 업혔던 태윤은 스스로 내려와, 비틀거리며 땅을 디뎠다. 이세희가 손을 내밀어주었다. 시선을 돌려 이세희를 물끄러미 본 태윤은 이세희가 가장 좋아하는 선한 미소를 입가에 덧그렸다. 이세희의 손을 맞잡은 태윤은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제는 자신의 등을 맡기게 될 금군들을 하나하나 어진 눈으로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그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군주가 되겠다. 그대들이 알고 있던 과거의 태윤과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폐하….”
한서진이 감정이 벅차,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태윤을 부르다 결국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태윤이 늠름한 황제가 된 것도 모자라, 과거와 달라지지 않겠다 선언하자 감동이 차올라 눈물을 안 흘릴 수가 없었다. 한서진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돌리자, 다른 금군들도 훌쩍거렸다. 다들 억세 보여도 마음만은 여린 녀석들임을 알고, 태윤이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런 내가 선택한 연인일세, 세희는.”
태윤은 이세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금군들이 하나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말해도 태윤이 아까운 눈치였다. 이세희는 고까운 눈빛을 보내다가도, 태윤을 향해서는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해도 윤이가 있으니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태윤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태윤은, 더욱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세희를 아끼고 사랑해 주겠노라고 다짐했다. 이세희가 마음을 놓고 살 수 있도록. 처음 결심했던 것처럼, 그가 자신의 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그러기 위해서 금군들에게도, 백성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군주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세희를 인정해줄 것이다. 세희를 향한 악평을 알고 있었다. 아비와 아들을 홀린 악첩. 저잣거리에서 얼마나 이세희를 물고, 뜯고, 씹고 즐기는지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자신도 이세희를 몰랐을 당시에는 그랬으니까. 발 없는 말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소문은 점차 커져,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고 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단 세 사람만 있어도 호랑이가 내려왔다고, 동네방네 거짓말을 퍼트려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만백성이 이세희를 악첩이라느니, 요망한 화비라느니 하며 몰아세우니 이세희의 평판이 좋을 리 없었다.
태윤은 말없이 이세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태연해 보여도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저 예쁜 얼굴 속에 홀로 삭였을 마음이 태산이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홀로 버텼을 세희가 안쓰럽고 미안해 태윤은 무의식적으로 이세희의 손에 깍지를 꽉 꼈다. 아플 법도 한데 이세희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설렌 태윤은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대들이 짐을 믿고 여기까지 와준 걸 잘 알아. 그러니 이번에도 짐의 선택을 믿어줄 수 있겠는가?”
태윤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금군들을 보고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짐은 이세희를 사랑한다. 진심으로 세희와 평생을 함께할 것이야.”
다른 사람에게 선포하듯 말한 고백에 이세희도 얼떨떨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태윤은 이세희의 손을 놓치 않고서 강한 어조로 말했다.
“짐은 세희를 사랑하는 게 부끄럽지 않아. 그대들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말해도 힘든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노력하면 그만이었다. 말을 마친 태윤은 이세희를 보고 싱긋 웃어주었다. 이세희가 멍하니 있다가, 태윤의 손을 빼내려 하자 태윤이 “어허!” 하며 이세희를 다그쳤다.
“그대는 짐이 부끄러운가?”
태윤이 농을 걸며 이세희의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이세희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태윤도 따라 웃음을 흘렸다. 금군들은 어쩔 수 없다는 눈으로 둘을 보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저렇게 서로가 좋아 죽겠다는데 어쩌겠는가. 무엇보다 한 번도 연애해본 적도 없고, 항상 선황의 곁에 머물던 태윤이 처음으로 인정해달라고 데려온 연인이었다.
그리고 이세희의 달라진 얼굴이 태윤과의 관계를 증명했다. 태공과 있을 때는 웃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다. 늘 눈을 내리깔거나, 싸늘하게 웃거나, 사람을 혐오하는 표정을 짓던 이세희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게 놀라웠다.
금군들이 보던 그동안의 이세희는 태공 옆에 있는 장신구, 혹은 예쁜 인형에 불과했다. 태공이 원하면 다리를 벌리고, 그가 원하면 입술을 대주는 그 정도의 인형. 말도 많이 하지 않았다. 하는 일이라곤 태공이 주는 서적을 읽고, 멍하니 창을 보는 게 전부였다. 그 방향이 이세희의 가족이 사는 곳임을 알면서도 태공은 절대 이세희를 내보내 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이세희는 감정이 메말라갔고, 남은 건 짜증과 분노뿐이었다. 궁인들은 나날이 늘어나는 이세희의 예민함에 지쳐갔으나 그 누구도 이세희를 다스리지 못했다. 태공마저도 악력으로 억눌렀던 이세희였다.
“폐하께 누가 될까 봐 그랬습니다. 신첩이 폐하를 부끄러워하겠습니까?”
저렇게 달콤하게 말하다니. 몸이 저려올 정도로 다디단 음성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런 눈빛도 난생처음이었다. 태윤을 향해 한계 없는 애정을 보여주는 눈빛에 금군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방금 자신들을 하찮은 것처럼 쳐다보고 냉소를 짓던 이세희가 아니었다. 궁인들은 아예 사람 취급도 안 하던 이세희가 태윤에게는 방긋방긋 웃어주고, 흐트러진 곤복까지 섬세하게 여며주었다.
“폐하께서 이리 아껴 주시는데 신첩이 싫어할 리가 없지요.”
이세희의 다정함은 오로지 태윤만을 향한 것이었다.
“폐하, 이제 궁으로 가실까요? 신첩이 모시겠습니다.”
이세희가 요염하게 웃으며 태윤의 손을 잡아끌었다. 태윤은 반항 한번 못하고, 이세희의 꼬드김에 어버버하며 끌려갔다. 이세희는 따라오려는 금군들을 서릿발 같은 눈으로 응시했다. 다가오면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마저 느껴지는 눈빛에 금군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세희의 주먹에 한 번씩은 맞아 보았기에 벌써부터 배가 욱신거렸다. 맞으면 적어도 일주일은 일어나지 못하리라.
“오늘은 신첩이 직접 상에서 시중도 들어드리겠습니다.”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어투에 금군들은 몸을 굳혔다. 저런 말투도 썼던가? 귀가 간지러워 긁고 싶었다. 태윤은 말간 얼굴로 “응.”이라고 대답하며 이세희의 뒤를 따랐다. 이세희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주인 따라가는 강아지였다. 꼬리가 있다면 이세희를 향해 마구 흔들었을 것 같은 뒷모습에 금군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세희가 완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태윤이 이세희를 모시고 사는 모습이었지만, 태윤이 저리 좋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흐엉….”
한서진이 소리 내어 울었다. 태윤의 일이 아니면 웃거나, 울지 않는 대장을 금군들이 아연실색하고 보았다.
*
이세희도 그랬겠지만, 태윤도 이세희를 만난 이후로 숙면을 취해본 적이 없었다. 낮에는 이세희 곁에 붙어 그를 호위하고, 도와주느라 바빴다면 밤에는 그럴 수 없기에 불안감이 커져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없는 동안 또 울지 않을지, 그곳에서 힘들어서 자결을 생각하는 건 아닌지. 이세희가 자결하기 위해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벼랑으로 걸어가던 장면이 너무 선명해 태윤은 몇 번이고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선 자괴감이 밀려와 세운 무릎에 이마를 대었다. 내가 있다고 해서 이세희의 마음이 편해지는 건가? 어쩌면 나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그가 편하게 저승으로 가는 것마저 막은 게 아니었을까?
잠은 서서히 옅어졌다. 아예 밤을 새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무거워지는 잠이 늘어났다. 모두가 잠든 밤보다 어두운 새벽에 태윤은 초에 불을 붙이고 먹을 천천히 갈았다. 마음이 무거워질 때마다 태윤은 이세희를 살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했다.
나 때문에 살았으니, 그를 위해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세희를 향한 사랑엔 조건도, 이유도 없었다. 이십 년 넘게 살아오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태윤은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수신자가 보지 않을 편지를 썼다. 이세희의 동생들이었다. 편지만 보낸 게 아니었다. 그 당시,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세희의 여동생은 아이를 낳은 직후였다. 더군다나 태윤에게 경계심이 무척 많았으며 증오심으로 똘똘 뭉쳤다. 이세형뿐이던가. 이세령은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으론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이세희를 울타리처럼 감싸고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운 모습에서, 혈연이라는 게 느껴지면서도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에 있는 자들이 서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그나마 살아갈 명분을 주는 것이 최선이었고, 전부였다.
그래서 태윤은 서서히 여동생들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출산 후 좋다는 약재와 음식들을 사비를 털어 보냈다. 이세희의 가족들이 선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도에 올라오게 되면서 얻게 된 저택에는 이전부터 각종 진귀한 물건들이 넘쳐났다. 이세희가 총애받는 첩이고, 이세희 때문에 가족을 제외한 주변인들이 정3품까지 진급했으니 자신들도 그걸 노린 것이다.
처음에는 태윤도 그런 줄 알고 가족들은 매몰차게 태윤의 선물을 내쳤다. 태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마다 적어 내려간 편지는 하루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문인답게 편지 내용은 에두른 것이 없었다. 전진을 알고, 후퇴를 모르는 무관답게 태윤은 정직하고 담담하게 마음을 적어 내려갔다.
아주 단단한 얼음을 녹이는 햇볕처럼 태윤은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생겨난 빈틈으로 파고들었다. 결정적으로 태윤이 보낸 진귀한 의원 때문에 그들의 태도는 확 바뀌었다. 잠이 오지 않아 버릇처럼 기행문을 읽던 태윤은, 어느 구절을 연달아 읽고 눈을 크게 떴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놀라운 솜씨의 의원을 만나 동상에 걸린 팔이 나았다는 구절에 태윤은 조사에 나섰다. 그를 찾아내는 데 열흘이나 걸렸고, 제도까지 데려오는 데 나흘이 소모되었다. 한 달 봉급을 다 썼지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이세희에게 아버지는 의미가 남다른 존재였다.
자신 때문에 불구가 된 아버지. 죄책감 때문에 아버지에게 다가가지 못하나, 아버지가 그리워 한탄하듯 서신을 쓰던 이세희가 눈에 밟혔다.
그의 가족들을 필사적으로 지켜준 것도, 이세희의 아버지를 낫게 해준 것도, 그리고 이세희를 가족들에게 돌려보내 준 것도…. 다 자신의 아버지, 태공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였다. 이세희를 곁에 두고 싶다면 아버지 대신해서 그 죄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세희의 가족들은 자신을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으로 볼 게 분명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태윤은 밤마다 각오를 마음에 새겼다.
나는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이젠 다른 의미로 잠이 오지 않았다. 무관들이야, 어렸을 적부터 어깨를 나란히 한 자들이 많았으니 자신을 믿고 따라주었지만 문관들이 문제였다. 몇 백 년간 문신들이 잡고 있던 나라에서 정통성도 없고, 붓보다 검을 자주 든 황제는 인정하기 힘든 문제였다. 지금이야 검으로 다스린다 하지만 다음 해는? 그리고 그다음 해는 또 어떻게 문관들을 다스린단 말인가? 문신들이 지금은 납작 엎드리지만, 태건 때처럼 반란을 안 일으킨다는 보장이 없었다.
삼공들의 가르침대로 행동하고 있었지만, 삼공들이 어떤 식으로 대신들에게 말을 흘릴지도 문제였다. 지금 대신들이야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노인네들이니, 은퇴하면 그만이지만 유생들은…. 삼공들의 영향력은 단순히 황제에게만 있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개입은 못 하나, 그들에겐 콧대 높은 제자들이 넘쳐났다. 어딜 가나 그 제자들이 자신을 본다는 생각에, 태윤은 한 번도 공부를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제왕학, 천문학, 농학, 의학…. 그리고 민심. 모든 것에 허투루 할 수 없었다.
황궁은 전쟁터에 세워진 막사였다. 태윤은 이제 창문 하나로 천도를 내다봐야 하는 사령관이 되었다. 손에 검이 아니라 옥새와 붓을 들었고, 사방에는 아군인 듯하나 적이나 다름없는 신하들이 서 있다.
나는 저들의 입을 통해 듣고 천하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저들을 적으로 여길 게 아니라 진정한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그들을 믿지 못하는데, 그들이 나를 어찌 믿고 이 천하를 맡긴단 말인가?
나아갈 길이 첩첩산중이다 보니 황제가 된 지 한 달이 지나서도 마음 편하게 잔 적이 없었다. 잠자리에 들려 하면 머리가 욱신거렸고, 명치는 답답했다. 태어나 처음 겪는 신경증에 선잠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희에게 말할 순 없었다. 힘든 길을 걸어온 세희가 이제야 평화를 찾았는데, 자신으로 인해 혹여나 궁으로 돌아와 고통을 받는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했다.
겨우 일주일. 선잠이 더욱 심해져, 불면증에 다다를 때도 태윤은 힘들단 소리를 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모를 정도로 태윤은 홀로 잠 못 이루는 밤을 견뎌냈다. 간혹 잠이 너무 오지 않으면 헛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발생하지도 않은 미래에 불안해하고, 과거의 선택에 후회했다. 나 자신이 굉장히 작아지는 밤들이었다.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면,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았다.
그럴 때마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화요궁을 갔다. 따라오겠다는 금군들도 물리치고, 느긋하게 화요궁 침상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전성 없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던 머리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의미를 주었던 이를 되새기며, 태윤은 몸을 일으켰다.
종착지는 아들이 있는 동궁이었다. 유일한 적자이자 태자. 아무도 후궁으로 들이지 않겠노라고 선언했으니, 자신이 길만 잘 닦아 놓으면 아들 주현은 무사히 황제 자리에 앉으리라. 아비가 왔다고 방긋방긋 웃어주는 아들을 보다가, 태얼궁으로 돌아가면 아침이었다. 잠을 자지 못한 머리는 멍했다.
그래서였을까. 일주일 만에 만난 세희 품에 안기자마자 신경쇠약으로 인한 불안, 우울 등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침상에 눕기가 무섭게 품으로 파고드는 태윤을, 이세희는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귀에는 그토록 바라던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새겨넣어 주었다. 이세희는 태윤의 뺨이며, 목덜미, 어깨 등등에 입을 맞춰주고서 잠이 들 때까지 등을 다독여주었다. 손길이 어찌나 다정하던지, 온몸이 노곤해졌다.
뜨거웠던 목욕물, 사랑하는 연인의 보살핌…. 그간 예민해졌던 머리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태윤은 이세희를 만난 이후, 가장 달콤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세희는 색색 소리를 내며 아이같이 잠든 태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눈 밑이 푹 꺼지고 손날은 먹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병약하게 느껴졌다. 몸도 좀 마른 듯했다. 이세희는 금침을 끌어당겨 태윤의 턱 끝까지 덮여주고, 볼을 손등으로 어루만졌다. 태윤이 으응, 하며 바르작거리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세희야….”
이세희는 숨을 멈추고 태윤을 뚫어지게 보았다. 저 얼굴로, 저 목소리로 날 애타게 불렀던 말인가. 누가 보아도 떨어지기 싫어 애가 타는 얼굴이 아니던가. 일주일을 떨어져 있어도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애틋한데, 한 달, 일 년이라도 떨어졌다간 태윤이 망가질 게 분명했다. 이세희는 마른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태윤이 힘들 때 옆에 있어줘야 했는데. 선황이 죽고, 입지 다지기에 들어갈 시기라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닐 것이다.
내가 무능력해,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음에 죄책감이 쌓여갔다. 이세희는 울적함에 몸을 일으켰다. 곤히 자는 태윤이 잠에 깰까 봐, 촛불까지 끄고서 어둠을 동반자 삼아 걸어 나왔다. 워낙 오래 거닐었던 궁이라 장애물도 가볍게 피했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혼령처럼 으스스하게 밖으로 나왔다. 앞뜰에 잠시 앉아 머리를 식힐까, 싶어 계단을 내려가는데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하얀 피부에 길고 요사스러운 눈매가 독보적인 미인, 한서진이었다.
스산한 겨울 달빛 아래 서 있는 한서진은 유독 피부가 투명하고 하얘서, 자칫 잘못하면 귀신처럼 보일 법도 했다. 그나마 금군대장을 상징하는 검은 철릭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세희도 질겁하고 뒤로 넘어갔으리라.
“마마께서 어인 일로 밖에 나오셨습니까?”
목소리는 물기가 어려 무거웠다. 울었는지 끝이 갈라졌고 발음도 뭉개졌다. 눈가는 부었다. 이세희가 얼떨떨한 얼굴로 한서진을 바라보자, 한서진이 눈을 돌렸다. 이세희는 한참이나 한서진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다가 입술을 열었다.
“우셨습니까?”
“예.”
한서진이 담담하지만 울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세희는 하, 하고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울었는지 안 봐도 뻔했다.
“그렇게 윤이가 아깝습니까?”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십시오.”
“저는 그래도 되는 존재입니다.”
이세희는 고저 없이 단조로운 어투로 말했다. 한서진이 등까지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이세희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입가에는 비웃음이 가득이었다.
“대장께선 불가능하시지만.”
한서진이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힘을 쭉 풀었다. 이제 와서 싫어한다 한들 태윤은 무조건적으로 이세희를 보호할 테니 의미가 없는 행위였다. 이세희는 한결같았다. 입궁 때부터 지금까지, 한서진을 쭉 싫어하는 얼굴로 보았다. 저 시선은 태윤을 빼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었다. 이세희는 태윤에게만 봄이었다.
“마마.”
지그시 이세희를 보던 한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서진을 두고 앞뜰로 가려던 이세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싸늘한 이세희의 얼굴 위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었다. 이세희와 무척 잘 어울리는 냉기였다. 한 치의 빈틈도 내어주지 않는 차디찬 눈빛에 한서진은 기에 눌려 주춤거렸다. 이세희가 제대로 된 교육이나 검술, 무예를 배웠다면 절대 이기지 못할 상대였다. 지금도 악력으로 이세희를 이길 자가 제도에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
“폐하의 곁을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세희가 눈을 깜박거렸다. 이윽고 한서진이 숨을 삼키더니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처음이었다. 한서진이 이세희에게 자신을 낮춰 허리를 숙이고, 매달리는 건.
“폐하를 보살펴주십시오.”
“왜 갑자기 그러십니까. 대장이 그러시니, 참으로….”
이상하다, 라고 말하려던 찰나 한서진이 아예 땅에 무릎을 대었다. 이세희가 놀라서 한서진을 멍하니 보았다. 이세희가 아는 한서진은 저럴 자가 아니었다. 사생아이긴 하나, 고고하고 오만한 사내였다. 출세 길이 막혔을 뿐이지, 외모, 권력, 재력, 어디서도 흠 잡을 데 없는 미인이었다. 그것뿐이던가. 성격도 비틀어지고 냉소적인데다, 동정심도 없었다. 선황의 곁을 따르며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는 건 기본이었고, 선황의 명령에 따라 반항하는 이세희를 제압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세희보고 ‘귀찮으니 그냥 대줘라.’라는 식으로 말을 해 이세희와 대차게 싸운 적도 있었다.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한서진은 이세희를 무시했고, 이세희는 한서진을 다른 사람과 똑같이 경멸했다.
“폐하께 지금 의지가 되어 주시고, 보듬어 주실 수 있는 분은 마마밖에 없으십니다.”
한서진이 두 손을 땅에 대고서 머리를 대었다. 태윤을 위해서라면 한서진은 자존심도 버릴 수 있었다. 태윤이 힘든 모습을 곁에서 보지만, 도와줄 수 없는 이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탔던가. 하루하루 말라가고 건조해지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이 모습을 보고 싶어서 황제 자리에 오르라고 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세희를 만나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는 윤을 보고 한서진은 흔들렸다. 한때는 이세희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는데.
“폐하는 그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얘기하시지 않습니다. 마마도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얼마나 어진 분이신지.”
한서진은 고개를 들고 이세희를 절박하게 보았다. 이세희의 냉엄한 얼굴에 가슴이 쿵하고 떨어졌다. 이세희가 떠나면 안 된다. 윤에겐 이세희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세희가 없으면 윤은 시름시름 말라가고 말 것이다. 그걸 눈뜨고 지켜봐야 하는 것보다 자신이 윤에게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다는 사실에 한서진은 비참해졌다.
그러나 사람마다 주어진 일이 다름을 인지하고 한서진은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로 했다. 이세희는 이세희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윤을 위해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한서진에겐 윤의 건강, 윤의 행복이 중요했다.
“폐하께선 마마가 떠나신 후로 한숨도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오늘에서야 겨우 잠드셨고, 마마가 오셔서 제대로 된 석반을 드셨습니다. 지금은 폐하의 곁에 금군이나 문관들을 제외한 진정한 아군이 없습니다. 그러니 마마께서 폐하의 힘이 되어주시길….”
이제 한서진은 이세희 앞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아도 이세희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관계였다. 윤이 매달리면 매달렸지, 이세희가 매달릴 구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윤이 매달리거나 집착할 성격도 아니었다. 이세희가 떠나고 싶다고, 다른 사람과 연을 맺고 싶다고 하면 겉으로는 보내줄 것이다.
그리고 한평생을 이세희를 그리며, 그리워하다 외로움에 사무쳐 죽을 사람이었다. 그걸 너무 잘 알기에 한서진은 이세희에게 절박해졌다.
“사실 대장께서 부탁하시면 귀로 듣기도 싫습니다. 당장 물을 가져와 씻고 싶을 정도군요.”
예상과 다르지 않은 반응에 한서진은 머리가 아득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선황이 있을 때 이세희에게 잘해주는 척이라도 할걸…. 아니, 그랬다면 자신은 그때 죽었을 것이다.
“마마…. 제발, 폐하를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한서진은 이세희의 거절 같은 반응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세상 오만하고 도도하던 미인의 처연한 눈물에 이세희는 짓궂게 웃었다. 한서진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울 줄 누가 알았을까. 이래서 태공이 자신을 그리도 괴롭혔나. 문득 선황의 잔인한 행태를 떠올리다, 이세희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여 웃었다. 냉소가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앞뜰을 무감한 눈으로 보았다. 저 앞뜰에 묶여 채찍에 맞을 때, 자신을 지켜보던 이 중 하나가 한서진이었다. 흥미롭다는 눈으로 보면서 웃었다. 고통스러운 과거 속에 손을 내밀긴커녕, 자신의 불행을 곱씹으며 좋아하던 한서진을 다시 제대로 보았다.
태윤을 위해서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도 다 버리고 자신에게 매달리는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이 궁에서 윤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그거면 되었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싫은 한서진이지만, 윤을 진심으로 생각해주고 필요한 사람이라면 참을 수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한서진의 고운 얼굴을 보던 이세희의 입술이 위로 올라갔다. 명백한 조롱에 한서진은 주먹을 쥐었다.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이세희가 웃음을 흘렸다.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제도를 떠들썩하게 한 경국지색의 얼굴에 미소가 감도니 시선이 저절로 꽂혔다. 저 얼굴에 홀리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라는 말이 이해가 가는 얼굴에 한서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장께서 부탁 안 하셔도 제가 알아서 폐하의 곁에 머물 겁니다. 웬만하면 대장께선 저에게 부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무리 폐하가 좋아도 대장께서 그리 구시면….”
말을 흐리던 이세희가 한서진을 보고 화사하게 웃었다. 한서진은 찬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이세희의 눈빛에 몸을 웅크렸다.
“더 들어드리기 싫거든요. 저와 대장이 부탁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소신이 나서서 마마의 기분을 불편하게 했다니,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그래도 폐하를 위해 몸소 나서 주시는 모습에 마음이 놓입니다.”
이세희의 진심이 실린 말에 한서진이 고개를 더 들었다. 이세희는 피식 웃더니, 등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제가 대장을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폐하껜 대장이 필요하니까요.”
계단을 가볍게 밟으며 내려오자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금군들이 보였다. 그들에겐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이세희는 묵묵히 앞뜰로 걸어갔다. 차가운 바람이 불며 이세희의 백옥 같은 뺨을 건드렸다. 고개를 들어 숨을 뱉었다. 입김이 서렸다. 추위에 몸을 살짝 떨던 이세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에 잠긴 태얼궁이 보였다. 지난 몇 년간 미친 듯이 벗어나고 싶었던 궁이었다. 죽어서야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또다시 겨울을 맞이했고,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오지 말라고 빌던 봄을, 추위 때문에 저절로 찾게 되었다.
그 사실에 이세희는 추위가 오면 자연스레 온기를 찾는 본능마저 잊었구나, 라고 홀로 읊조렸다. 추운 걸 추운지도 모르고. 아픈 자신의 몸을 다독여주던 태윤의 손길에서 온기를 느껴, 그때야 자신이 한겨울에 있음을 자각했다.
이번에 올 봄은, 어린 시절에 느꼈던 봄처럼 찬란하겠지. 추위 속에 얼어붙어 있던 이세희는 스스로 걸어 나와 태윤에게 돌아갔다.
끝없이 이어졌던 겨울의 종식이자, 봄 같은 겨울의 시작이었다.
*
가슴을 토닥토닥, 다독여주는 손길이 참으로 따사롭다. 일어나야 할 시간임을 알면서도, 계속 잠들고 싶은 부드러움이었다. 왠지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허벅지를 베고 잠들었던 낮의 끝자락 같았다. 햇빛은 서쪽으로 기울어져 거의 들지 않아 눈은 부시지 않았다. 어쩌면 어머니가 손으로 해를 가려줬을지도 모른다. 바람은 여우 꼬리처럼 살랑거렸다. 그 계절에 잘 어울리는 잔잔하고 선선한 바람에 눈이 떠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애탄 마음으로 중얼거리면서 깊은 잠에 고개를 처박았다.
“폐하, 벌써 반 식경이나 더 주무셨습니다.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가슴을 다독여주던 손이 뺨에 닿았다. 잠결에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는 손끝이 딱딱했다. 남자 특유의 거친 단단함이 손바닥에서 느껴져 태윤은 안 떠지는 눈에 힘을 줬다.
“…선녀?”
태윤이 몽롱한 눈을 깜박이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의문에 찬 목소리가 닿은 곳은 물에 젖어 다 마르지 않은 이세희였다. 후궁의 본분답게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새벽부터 씻고 나온 것이다. 워낙 머리가 길고, 숱이 많은 터라 수건으로 여러 번 닦아도 마르지 않아 이세희는 젖은 머리를 대충 푼 상태였다. 겨울이지만, 암살 위험 때문에 후궁은 속살이 비치는 옷을 입어야 했는데 이세희도 마찬가지였다. 곱고 하얀 살결이 비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침의를 입은 상태라 이세희의 몸 선과 살이 그대로 보였다.
그 때문일까. 태윤은 잠결에 시야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 이세희를 선녀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세희는 태윤의 헛소리에 어이가 없어 눈을 가늘게 떴다가, 태윤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후궁이 폐하의 옥체에 함부로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불경한 일입니다.”
보던 내관이 엄중한 목소리로 이세희를 다그쳤다. 이세희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태윤의 반대쪽 뺨도 꼬집었다. 태윤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나오고 궁인들의 시선이 모조리 태윤과 이세희에게 꽂혔다.
“선녀라니요. 엄연히 사내인데.”
양쪽 뺨에서 올라오는 따끔한 통증에 태윤이 신음을 흘렸다. 힘을 아주 조금 실었지만, 워낙 힘이 좋다 보니 다른 사내들에 비해 더 아팠다. 태윤이 양쪽 뺨을 감싸 쥐고 끙끙거리며 일어나자 이세희가 침상에서 내려왔다. 태윤이 허겁지겁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세희가 눈을 내리깔자 긴 속눈썹이 눈가에 음영을 만들어냈다.
“어, 어디 가는가?”
윤이 아직 잠이 덜 깨 혼몽한 상태로 허둥지둥거렸다. 이세희는 혼내기보단, 그간 미뤘던 잠을 자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윤이 안쓰러워 하염없이 다정하게 보았다. 이세희는 선 채로 두 팔을 벌려 태윤을 안아주었다. 태윤은 본능적으로 이세희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 강아지처럼 뺨을 비볐다. 이세희는 어리광 부리는 태윤의 머리를 어린 동생들처럼 쓰다듬어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피곤하시면 오늘은 쉬시는 게 어떠실까요? 대신들도 이해해줄 겁니다. 장례식부터 시작해서 한 번도 쉬지 못하셨으니….”
“즉위식 문제 때문에 가긴 가야 하네. 병권 문제도 있고….”
가기 싫지만, 가야 하는 의무 때문에 태윤은 안 떠지는 눈을 억지로 떴다. 얼마나 고되었으면 눈가 아래가 검고, 눈꺼풀은 부었다. 한서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붓기에 이세희가 태윤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참 수려하고 잘생기신 용모인데…. 정무가 얼마나 고되시면 이 정도로 상하시다니요. 탕약을 드셔야겠습니다.”
이세희가 얼굴이며 목, 손목 등을 만져가며 걱정을 해주니 마음이 노곤해졌다. 태윤은 정무가 힘들어, 이세희에게 안겨 칭얼거렸다. 금군으로 살 때도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산 태윤이었다.
하지만 금군대장과 황제는 차원이 다른 위치였다. 금군대장이 단순히 한 부대만 통솔했다면, 황제는 여러 분야의 수많은 부대를 압도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걸 곁에서 자주 지켜보았던 이세희는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태윤을 떼어놓고, 넓고 각진 어깨에 손을 올려두고서 태윤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이세희와 있고 싶다는 갈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이세희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더니, 태윤의 양 뺨을 부드럽게 엄지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신첩이 영특하여 도움을 드릴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대가 있어주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
태윤이 퉁퉁 부은 눈을 힘겹게 접어 웃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본래라면 맑은 하늘의 해처럼, 어두운 거리를 비춰주는 달처럼 빛났을 윤의 눈동자가 보였을 텐데. 아쉬움이 남아 푸석해진 눈가를 매만지던 이세희가 돌연 웃었다. 언제 보아도 한 떨기 꽃 같은 미소에 태윤이 멍한 눈으로 이세희를 보았다.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이세희가 긴 팔로 태윤의 몸을 휘어 감았다. 넝쿨처럼 몸을 옥죄는 팔에도 흐물거리며 이세희를 보던 순간, 몸이 휙 올라갔다. 태윤의 눈이 커졌다.
“어?”
“신첩 목에 팔을 두르십시오. 잘못하면 떨어지십니다.”
“어? 어….”
아직 잠결이 태윤이 어리벙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세희의 사슴 같은 목에 팔을 둘렀다. 이세희는 힘든 기색 없이 태윤을 단단하게 받쳐 안고 목욕탕으로 걸어갔다. 태윤은 아직도 태얼궁이 어색해 가끔 어리숙하게 다니곤 했는데, 정작 이세희는 제집처럼 움직였다. 궁녀들이 따라와 앞을 밝히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걸었다.
“물은?”
이세희가 자신을 따라 오는 궁녀에게 물었다. 태윤을 대할 때와는 다른 딱딱하고 무감한 어투였다. 듣는 대상인 아닌 태윤도 이세희의 눈치를 볼 만큼 온기 없는 표정과 목소리, 말투에 눈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궁인들은 이세희의 태도에 별 반응이 없었다. 도리어 태윤을 대하는 이세희를 볼 때보다 편해 보였다.
“미리 받아 놓았습니다.”
“앞으로 내가 말하지 않아도 물을 받아 놓고 너희들은 나가거라. 폐하의 시중은 내가 들 테니.”
궁녀들이 동시에 태윤의 눈치를 보았다. 태윤의 확답이 없으면 애첩이자, 내정의 실세인 이세희가 명령을 내려도 따를 수 없었다. 태윤은 애절하게 눈빛을 보내는 궁녀들을 향해 말했다.
“세희 말대로 하거라. 세희가 오라고 하면 그에게 가고, 가라고 하면 나가라. 세희의 말이 곧 짐의 말이다.”
그 말에 궁녀들은 한마디 반항도 없이 “예, 폐하. 어명을 받듭니다.”라고 말하며 조용히 물러났다. 그녀들이 하는 일이라곤 불을 밝혀주고,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이제 내려놔도….”
태윤이 안겨서 꼼지락거리자 이세희가 시선을 내렸다. 뭔가 울적해 보이는 눈빛에 태윤은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신첩이 해드리고 싶어서 그런 건데 싫으신가요?”
“아, 아니다. 세희 네가 힘들까 봐….”
이세희의 눈이 목욕탕에 서린 습기 때문인지 유독 촉촉해, 청순하게 느껴졌다. 물에 흠뻑 젖은 미인은 위험했다. 습윤함을 못 이겨, 아래로 처진 속눈썹과 그 아래 흔들리는 검은 눈이 태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천하를 달라고 한다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신첩이 힘든 게, 폐하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느라 힘든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힘든 걸 알아주는 세희의 발언에 태윤은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간의 고통, 노곤함, 피로가 모두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태윤이 한 번에 녹아내려 이세희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자, 이세희가 허공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하여간, 몇 번 우는 척만 하면 태윤은 쉽게 넘어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루기 쉬운 윤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무시하기가 힘든 윤이었다. 아무리 무시하고, 냉대를 퍼붓고, 싫어해도 굽히는 법이 없었다. 우직하게 지켜주고 싶다고 곁을 맴돌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세희는 윤을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얼굴에 퍼지는 묘한 미소에 윤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이세희가 결국 웃음을 흘렸다.
“왜 그리 웃어?”
윤이 묻자 이세희가 즉각적으로 답했다.
“폐하가 귀여우셔서요.”
“…뭐?”
어릴 때, 부모님을 제외하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칭찬에 얼떨떨해졌다. 이세희는 태윤의 침의를 능숙하게 벗기며 말했다.
“신첩 눈엔 귀여우십니다. 잘생기셨고.”
그리고 자신을 보며 발기한 자지를 보더니, 태윤의 귀에 입술을 대고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래는 훌륭하시고.”
“으…!”
귀에 축축하게 감기는 끈적한 목소리에 태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세희가 고개를 물리더니 청아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장난이란 걸 깨닫고 나자 괘씸해져 노려보는데, 두 눈을 곱게 접으며 웃는 이세희가 너무 밝아서 화가 다 누그러졌다. 장난 치고, 환하게 웃는 이세희가 행복해 보이니 세상을 얻은 기분에 마음이 풀어졌다.
이세희가 웃으면 세상이 밝아졌고, 이세희가 울면 세상이 늘 장마가 온 것처럼 눅눅했다.
“그대가 사가에 갔다 와서 그런가, 얼굴이 좋아졌어.”
태윤이 과거의 이세희가 떠올라 중얼거렸다. 손은 이미 이세희의 얼굴에 닿은 상태였다. 아주 소중한 물건을 만지듯, 손가락으로 더듬는 손길에 이세희는 더 만지라며 얼굴을 내밀었다. 태윤은 더 만지면 이세희가 더러워질까 두려워 손을 거두었다. 이세희는 언제 보아도 소중했다.
“신첩의 얼굴이 좋아졌나요?”
이세희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물었다. 태윤이 응, 하고 대답했다. 피곤이 묻은 얼굴로 확답을 주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윤은 고생만 하고…. 자신 때문에 하루하루 피곤에 절여지는 거 같아, 이세희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윤을 위해 살리라. 이 사랑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자신이 태어나 받은 것 중 최고였고, 어떤 걸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태공이 주었던 모진 과거를 다시 겪으라면 겪을 각오가 될 만큼 귀한 사랑이었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고, 받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무조건적인 애정에 이세희는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죽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말은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폐하께서 신첩을 벼랑 끝에서 살려 주셔서….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태윤이 세희야, 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불렀다. 이세희는 태윤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다가 솔직하게 덧붙였다.
“폐하께 늘 감읍할 뿐입니다. 이 지극한 사랑에 어떻게 보답해드려야 할지…. 신첩이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으니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이런 미천한 저라서.”
“그대가 내 곁에 있어준 것만으로도 되었네.”
태윤이 이세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세희는 뿌리치지 않고 더 강하게 옭아맸다.
“앞으로도, 평생 곁에 있어드릴 겁니다. 폐하께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요. 그러니 가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이세희의 본심에 태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세희가 태윤의 손에 깍지를 끼고서 고개를 숙였다. 촉촉한 검은 눈이 태윤의 가슴을 한바탕 어지럽혔다. 물에 젖어 체취가 더 진하게 느껴져 태윤은 머리가 아득해지고, 가슴이 세게 뛰어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이제 신첩더러 곁에 머물라고 해주세요. 신첩은 폐하 곁에만 있고 싶습니다.”
태윤은 목이 막혔는지, 힘겹게 “그래.”라고 대답했다. 애써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이세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왜 또 그리 울먹거리십니까. 잠자리도 아니신데.”
“그대가 행복해졌다고 하니….”
“우시는 건 잠자리에서만 우세요. 다른 사람들이 보고 폐하를 우습게 알까 봐 무섭습니다.”
이세희가 은근히 자신을 다그치자, 태윤은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짐이 대전에서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줄 아는가? 궁금하면 나중에 대전에 와서 보게.”
“후궁은 대전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세희가 딱 잘라 말했다. 이세희와 대전에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가 올라가려던 찰나, 법도를 언급하니 태윤의 얼굴에서 흥분이 싹 사라졌다.
“짐이 곧 이 나라의 법도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세희는 태윤을 안아 탕으로 데리고 가며 말했다.
“신첩 때문에 법도를 자꾸 어기시면 대신들이 폐하를 선황처럼 여길 겁니다. 신첩 때문에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신첩은 대전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애첩이 조정에 들락날락하는 모습은 결코 좋지 않으니까요.”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고 단호한 태도에 태윤은 시무룩해졌다. 지금에 한해서는 물러남이 없어 보였다. 태윤이 잠자코 탕에 자리를 잡았다. 이세희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태윤을 씻기는 데 들어갔다. 능숙하게 어깨와 뒷목을 주물럭거렸다. 절로 탄성이 나오는 힘 조절에 태윤이 입을 벌리고 신음했다.
“뒷목이 많이 뭉치셨습니다. 신경증이 늘어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으음, 최근 사병 문제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사병이요?”
“문신들이 아직도 기고만장한 게 무엇이겠는가? 사병이지. 이 나라에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사병이 없는 적이 없었네.”
이세희가 흠, 하고 목을 울렸다. 꽃을 띄운 터라, 물에서는 은은하게 좋은 향이 났다. 덕분에 지끈거리던 두통도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세희의 솜씨 좋은 손길 덕분에 굳었던 목과 어깨가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태윤이 고개까지 젖혀가며 좋아하자 이세희는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폐하, 사병을 주는 것도, 거두어가는 것도 폐하의 권한입니다. 비록 오래된 전통이라고 하나, 그것이 악습이 되었다면 폐하께서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그래도 될까 싶네. 지금도 문신들이 짐을 보고….”
적통성이 없는 황제. 그게 태윤의 약점이었다. 태윤은 자신을 견고하게 해줄 세력들이 필요했다. 이세희 또한 그걸 알기에, 얌전히 입을 다물고 기다리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폐하, 신첩이 미천하고 배운 것이 없으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발언에 태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물에 젖은 이세희가 유독 예쁘게 느껴져 가슴이 떨렸다. 긴 속눈썹이 처지고, 긴 머리카락은 흰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탕의 열기 때문에 달아오른 뺨이, 꼭 흥분한 이세희 같아 묘한 착각에 빠졌다. 이세희는 자신을 보며 멍한 눈빛을 보내는 태윤이 귀여워 입술 끝을 올렸다. 그러나 정신 차리라는 듯, 탕의 물을 검지와 엄지로 가볍게 튕겨 태윤을 자극했다.
“폐하.”
이세희가 태윤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섬세하고 상냥한 손길에 태윤의 눈이 잘게 떨렸다.
“이 나라의 병권은 무조건 폐하께서 가장 강하게 쥐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반란이 일어나도 제압할 수가 있습니다. 선황께는 그 당시 금군대장이셨던 폐하가 있으셨기에 반란을 제압했지만….”
고민하던 이세희는 눈빛을 굳히고 태윤을 보았다.
“지금은 과감하게 사병을 없애셔야 합니다. 어차피 폐하께선 최악의 상황에서 어좌에 오르셨습니다. 그들이 폐하를 거부할 수는 없어요. 폐하가 없다면 누가 그 어좌에 앉습니까? 태자는 지금 고개를 가누고 있습니다. 수렴청정을 할 황족도 없으니, 망설이지 마시고 사병을 폐지하시고 병권을 다 쥐십시오. 반란을 꿈꿀 틈도 주지 마셔야 합니다.”
“…역시, 결단을 내려야겠지.”
태윤이 일렁이는 수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몇 번이고 고민하고 주저하던 것이었다. 문신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신임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싹을 잘라낸 후 다시 심을 것인가.
“폐하, 검을 여러 명이 쥐면 혼란만 가져올 뿐입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아시는 건 폐하가 아니십니까? 검 손잡이는 폐하만 쥐십시오. 다른 이에게 주지 마십시오.”
이세희가 물속에 잠긴 태윤의 손을 찾아 꽉 잡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검을 여러 명이 잡으면 누가 손잡이를 잡을지, 검신을 잡을지 싸우기 마련이다. 이세희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대신들이 으레 가지고 있는 사병을 모조리 가져와야 했다. 그렇게 되면 사이가 좋은 무관들과도 틀어질까 봐 두려워져서 태윤은 주저했다.
“사병을 모두에게서 뺏어 오시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무관의 승진을 높여 주시고, 품계를 문관과 동일시해준다면 그들의 불만도 적어질 것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세희가 윤을 다독였다.
“폐하, 지금이 기회입니다. 죽은 황자가 반란을 일으켰던 일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겪지 않기 위함이니….”
“내가 다른 게 두려워서 그러겠나.”
윤은 차마 뒷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반란을 제압하러 갈 때, 그 사람들이 외쳤던 섬뜩한 말이 기억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악첩 이세희를 처단하라! 그들이 퍼붓던 저주를 잊을 수 없었다. 이세희는 잘못한 게 없었다. 잘못은 오로지 아버지의 소유였다. 지금도 제도에서 이세희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할지 뻔해, 태윤은 마음이 심란했다. 반란이 일어나는 계기이자 핑계가 세희가 될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그걸 이세희가 듣고 괴로워할 거 같았다.
하지만 꾹 참고 이세희를 응시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무서워하는지 모르는 눈치인 이세희를 보자, 더 숨겨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또한 어떻게든 사병을 뺏고, 폐지하리라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사병은 악습이었다. 황제가 병권을 다 쥐고 있어야 했다.
황제를 위협하는 사병은 필요 없었다. 그들이 정 몸이 걱정된다고 하면, 병농일치처럼 군역을 지게 할 셈이었다. 본인의 몸은 본인이 지켜야 하는 법. 황제인 자신도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래도 그대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대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짐의 속마음을 털어놓겠는가?”
“신첩이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서 송구스럽습니다.”
이세희가 태윤의 식어가는 몸에 물을 끼얹었다. 뜨거운 물에 오래 있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세희는 눈치가 빨라, 몸을 일으켜 창을 열어주었다. 새벽의 차게 얼어붙은 공기가 확 불어 정신을 일깨웠다.
“냉수를 올릴까요?”
이세희가 태윤의 관자놀이며, 뒷목, 등등을 능수능란하게 지압했다. 머리가 절로 시원해졌다.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웠는지. 욱신거리던 머리를 시원하게 해주는 손길에 태윤이 건성으로 “그래….”라고 대답했다.
태윤이 하는 일이라곤, 이세희가 해주는 대로 받는 것이었다. 이세희가 제일 바빴다. 내정의 주인답게 이세희는 태윤의 온몸을 정성껏 씻겨주었다. 어제 무리하게 몸을 섞은 터라, 몸 안에 정액이 남았을지 모른다며 안에 손가락도 넣어 다 빼주었다. 크고 두터운 천으로 물기를 다 닦아주고, 편한 침의도 손수 입혀주었다. 원래는 궁녀 수십 명이 달라붙어 할 일을 홀로 하니 힘들 법도 한데 이세희는 묵묵히 시중을 들어주었다.
“안아드리겠습니다.”
“응?”
다 씻고 나니, 이번에도 이세희가 안아주겠다며 두 팔을 벌렸다. 태윤이 어안이 벙벙해져 가만히 이세희를 보았다. 이세희는 허튼소리하지 말고 안기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황제가 아니라 아우를 대하는 듯한 태도에 태윤은 그만 웃음을 흘렸다.
“그대가 누이들이 많아 그런가, 꼭 짐도 누이처럼 대하는 것 같네.”
“나이로 치면 폐하가 신첩의 아우뻘이니….”
이세희가 씩 웃더니 태윤을 마음대로 안아 올렸다. 태윤이 “어허!” 했지만 이세희는 개의치 않고 태윤을 꽉 안아서 곁방으로 이동했다. 목욕탕과 침전, 곁방 모두 거리감이 있었다. 태얼궁 자체가 작은 규모의 궁이 아니었다. 내정의 중심, 황제의 위엄을 알리는 궁답게 태얼궁은 가로로 길고 폭이 넓었다. 암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높은 장식은 하나도 없어, 탁 트여 시야가 시원했다. 앞뜰은 황제의 화원으로 이어졌고, 뒤뜰로는 황후가 머무는 중궁으로 바로 갈 수 있었다. 중궁과 태얼궁을 가운데에 두고 후궁들의 궁이 양쪽에 있는 형태로, 이세희의 화요궁은 가장 가까웠으나 그마저도 가마로 오가야 했다.
그 모든 설계가 황제의 내실이 아주 원대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 제도에서 가장 큰 대저택이라고 칭해도 될 정도였다.
일반 성인이 혼자 걸으면 상관없었지만, 이세희는 태윤을 안고 궁을 활보했다. 침전에서 목욕탕, 목욕탕에서 곁방…. 태윤은 이세희가 힘든 게 아닌가, 연신 눈을 흘겼지만 이세희의 팔뚝에 핏줄이 곤두섰을 뿐 딱히 힘든 기색은 없었다. 이세희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일을 한 게 여기서 드러나는 듯했다. 이 힘은 한 번에 생긴 게 아니었다. 소년부터 길러진 실용적인 근육이었다. 돌덩이 같이 단단한 팔뚝에 나무뿌리처럼 돋아난 핏줄을 만져보던 태윤이 감탄했다. 이세희가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신첩이 그랬지요? 그 마을에서 신첩을 힘으로 이기는 자가 없었다고.”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나?”
너무 자연스럽게 자신이 마을에서 힘으로 일등이라고 자랑하는 이세희가 귀여우면서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물어보았다. 이세희는 곁방에 마련된 호화로운 조반상을 눈으로 훑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신첩의 여동생들이 워낙 예쁘다 보니 건드리는 놈들이 많아서요.”
“설마 죽였나?”
태윤이 기겁하고 물어보자 이세희가 별 소리를 다 한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살인을 한 자는 마을에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천민이라 해도, 기본적인 윤리는 압니다. 그냥 사람 구실은 할 수 있게 패 주었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지 이세희가 주먹을 쥐었다. 부르르 떨리는 매서운 주먹에 태윤은 소리 내어 웃었다.
“여동생들이 아주 든든했겠어.”
이세희는 날카롭고 빠른 눈초리로 조반에 올라간 찬의 개수와 고기의 종류, 등을 살폈다. 조반 가운데에는 제비고기로 만든 탕이 있었다. 제비고기를 다지고, 다시 공처럼 뭉쳐 띄웠다. 그 주변으로는 나물이 열 개, 각기 다른 종류의 고기 찬 다섯 개. 다섯 개가 빠진 조반에 이세희는 팔짱을 끼더니 태윤을 진지하게 보았다.
“폐하.”
왠지 혼나는 기분에 태윤이 젓가락을 들고 멈칫했다. 기미가 끝난 음식들이라 괜찮을 텐데…. 하고 말하려던 찰나, 이세희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어선방 관리들도 폐하를 무시합니까?”
“무슨 소리인가? 모두 짐을 지존으로 여겨주고 있는 것을.”
“그런데 왜 찬이 줄었습니까? 다섯 개나 모자랍니다. 이건 폐하를 향한 모욕입니다.”
화가 나는지 이세희가 목소리가 정돈이 되지 않았다. 감히 윤을 무시해? 황제를? 선황이 살았을 적에는 납작 엎드려 한마디도 못 하던 것들이, 윤이 착하다 보니 무시하는 게 눈에 보이는 거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차갑게 화를 내기 시작하는 이세희를 보던 태윤이 어어, 하며 이세희를 만류했다. 이세희는 태윤의 긴 소매가 찬에 닿을까, 눈을 집중해서 보다 손을 뻗어 소매를 잡아주었다.
“아닐세! 그런 게 아니고, 짐이 혼자 먹기에 너무 많고…. 굳이 이렇게 허례허식으로 먹어야 하나… 싶어서….”
점점 자신을 한심스럽게 보는 이세희의 눈빛에 태윤이 침울해졌다. 일찍 궁을 떠난 태윤보다, 최근 궁에 들어와 예법에 적응한 이세희가 더 구중궁궐 사람 같았다.
“폐하, 사병 같은 게 허례허식이고 폐하께서 하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 들어가는 돈들도 만만치 않아. 짐에게 올라오는 허례허식을 줄이기만 해도,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돈이 넉넉해질 거야.”
이세희가 눈을 깜박였다. 태윤은 작게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이세희의 몫의 빈 백색 그릇에 탕을 담아주었다. 귀한 제비고기 탕에도 이세희는 태윤만 보고 있었다.
“아예 줄일 수는 없다고 하더구나.”
“여기서 더 줄이신다고요?”
“짐에겐 사치니까.”
정작 자신에겐 사치라면서, 태윤은 제비고기를 더 건져 이세희에게 주었다. 태윤의 그릇에는 뽀얀 육수와 채소 몇 가지만 동동 떠다녔다. 보다 못한 이세희가 수저로 제비고기를 건져 주려 하자 태윤이 거절했다.
“짐은 어렸을 적부터 검을 업으로 삼아서 그런지, 아침에는 고기를 잘 먹지 않네. 그냥 맑은 국물을 먹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일세.”
“그래도 이 귀한 걸 신첩에게만 주시다니요.”
“힘쓰는 건 세희 넌데….”
태윤이 무의식적으로 속마음을 말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묘해졌다. 태윤은 두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 헛기침을 하며 국물을 연거푸 마셨다. 이세희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수저에 든 고기를 입김을 후후 불어 식혀주었다. 그리곤 먹지 않으려고 버티는 태윤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아, 해보세요. 신첩이 먹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안 드시면 입으로 먹여드리는 수가 있습니다. 아시지요? 신첩이 얼마나 입으로 잘 먹여드리는지?”
장마 때 이세희의 입으로 물을 받아먹었던 기억에 얼굴이 화르륵 불탔다. 정사가 끝난 후, 쾌락에 몸이 절여져 손가락도 까닥하기 힘들었다. 처음 겪는 쾌감은 지나치게 강하고 짜릿했다. 태윤이 멍한 얼굴로 늘어져 있으니, 이세희는 직접 입으로 냉수를 먹여주었다. 정사보다 더 음란하게 섞이는 혀에 태윤은 그만 발기해버렸고, 이세희도 흥분이 전염되어 태윤을 잡아먹듯 자지를 박아 넣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과 머리가 화끈해졌다.
“어서 드세요. 같이 먹어야 맛있는 법입니다.”
이세희가 이젠 채근과 달램을 섞어 태윤에게 말했다. 마지못해 태윤이 입을 열었다. 적절하게 식혀준 제비고기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먹자마자 녹아내리는 녹진한 고기 맛에 태윤이 음, 하고 목을 울렸다. 이세희는 태윤이 먹는 걸 흐뭇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법에 맞게 소리는 내지 않으면서도, 복스럽게 잘 먹어서 보기 좋았다.
“그대도 먹어. 맛있네.”
태윤이 어서 먹으라는 듯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태윤은 정말 탕의 맑은 국물을 마시는 걸 좋아하는지, 고기는 손도 안 대고 국물만 느릿하게 마셨다. 이세희는 오물오물 고기를 다 먹고 나서 태윤에게 물었다.
“황자 시절에도 잘 드셨을 텐데, 고기는 왜 잘 안 드십니까?”
“아, 내 몫으로 나오는 고기는 어머니 드렸거든. 어머니가 사랑 받지 못하는 후궁이라 고기를 잘 받지 못하셔서.”
태윤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후궁은 황제가 주는 돈으로만 살아갈 수 있었다. 황제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냐에 따라 주어지는 돈, 하사되는 보옥, 물건 등이 달라졌다. 이세희는 선황이 가장 총애하는 첩인지라, 돈이나 보옥 등은 늘 두둑했다.
그러나 쓸 곳이 없으니 허송세월처럼 쌓여만 갔다. 그 돈들은 모조리 가족들에게 돌아갔으나, 가족들도 그 돈은 차곡차곡 쌓아 두고 한 푼도 손대지 않았다. 문득 자신이 받았던 돈과 가족들이 생각난 이세희는 머뭇거렸다. 무관 시절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 속전속결로 조반을 먹던 태윤이 눈을 들어 올렸다. 이젠 눈빛만 봐도 이세희가 뭘 원하는지 알기에, 태윤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태윤의 허락에 이세희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폐하, 신첩이 부탁 하나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세희 네가 바라는 거면 다 들어주지. 천하를 원하면 천하를 줄 것이고, 금을 원하면 금을 안겨주마.”
이세희를 위해 가족도 버렸는데 뭘 못하겠는가. 태윤은 어른스럽게 씩 웃었다. 처음 보았을 때 같이 짓궂고 의기양양한 미소가 장난기 많은 어린애 같아 이세희는 그만 피식 웃었다. 조금 무례한 부탁 같아 고민하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이세희는 제비고기와 채소를 수저로 함께 뜨고서, 후후 불어가며 식혔다. 그리고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아버지를 현령직에서 파면해 주십시오.”
이세희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태윤은 얼굴을 굳혔다. 혹시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자신이 알아본 바로는 이세희 아버지는 최근에 걷기 시작했으나,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게 있나 싶어,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기는데 이세희가 재빨리 덧붙였다.
“선황께선 신첩을 사랑하셔서 아버지에게 현령직을 주신 게 아니었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현령이었다는 것을. 궁궐에 대소사나 수연, 연연 등이 있으면 반드시 현령들도 선물을 가지고 참석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부모님과 신첩을 대면시키려 했던 것이겠지요.”
서로가 서로의 죄책감이 될 수 있도록. 선황은 그런 면에서 잔인한 사람이었다. 태윤이 기억하는 선황은 자신의 사람에겐 다정한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선에선 냉정했다. 자신에게 해가 안 되는 존재만 골라서 예뻐했으며, 조금이라도 반발의 기미가 보이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짓밟았다. 그는 그것을 종종 야생마를 길들이는 과정에 비유했다.
야생마를 길들이는 쾌감을 아느냐고. 안장도 없는 야생마의 목을 졸라, 억지로 꿇게 한 뒤 그 등에 타 야생마의 갈기를 잡았을 때의 쾌감은 말도 못 한다며 선황은 한참을 웃었다.
“아버지를 현령직에서 파면해 주시고,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을 앉혀 주십시오. 아버지는 현령을 하실 자격도, 지식도 가지지 못하셨습니다. 그분은 평범한 물지기가 어울리십니다.”
“그대가 원하면 그리하겠다.”
“그리고 세형의 지아비인 서혁에게도 의미뿐인 장서각 관리직을 주셨는데 그도 파면해 주십시오. 서혁은 문맹이고, 아직도 궁에서 찬밥 신세로 있으니…. 보기가 늘 미안합니다.”
글도 못 읽는 사람에게 장서각 관리직을 맡기다니. 선황도 참 선황다웠다. 이세희가 왜 그리 가족들을 보기 싫어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자신 때문에 맞지도 않은 자리에 앉아야 했는데, 이세희 때문에 벗어나지도 못했을 테고. 이세희는 그런 가족들을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을 것이다.
제 발로 나갈 수도 없게 차단해버리는 선황의 압박을 잘 알았기에 태윤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서혁도 궁에서 나가게 해주겠다. 그거면 되겠는가?”
“예. 그거면 됩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이세희가 고개를 숙였다. 궁에 가족들을 두면 태윤의 명성에 누가 되기도 하고, 가족들도 그 자리를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으니 출궁하는 게 맞았다. 이제야 좀 마음이 편해지겠구나. 생각을 정리한 이세희는 서둘러 제비고기를 태윤의 입에 넣어주었다. 한번 먹여주었더니, 이젠 아기 새처럼 고기를 척척 받아먹었다. 군소리 안 하고 받아먹는 게 예뻐 이세희는 사르르 녹아내리는 미소를 지었다.
“잘하셨습니다. 더 드릴까요?”
“어… 응.”
이세희가 저렇게 구니 좋아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후궁의 본분에 충실하게 태윤을 성심성의껏 보필했다. 태윤이 제 손으로 음식을 먹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아예 이세희가 다 먹여주었다. 덕분에 태윤의 수저와 젓가락은 깨끗했다.
“그대는 안 먹고?”
자신에게 음식을 알맞게 식혀주고, 먹여주느라 정작 이세희는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이세희는 괜찮다는 듯 엷게 웃었다.
“신첩이야 폐하께서 대전으로 가시면 그때 챙겨 먹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같이 먹어야 맛있는 법인데….”
윤이 아쉬움에 말끝을 흐렸다. 이세희는 마지막 남은 제비고기를 수저에 담고서, 태윤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태윤이 그대 먹어, 라고 말하려는 찰나 입으로 고기가 쏙 들어왔다. 윤이 어쩔 수 없이 오물거리며 고기를 씹었다.
“폐하께서 잘 드시는 것만 봐도 신첩은 배가 부릅니다.”
이세희의 다정다감한 말에 태윤은 기분 좋게 웃으며 화답했다.
“저녁은 짐이 먹여줄 테니 기다리거라. 알았지?”
태윤이 해맑게 씩 웃자 이세희는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천을 들어 태윤의 입가를 꼼꼼히 닦아주었다.
“예, 폐하. 여기서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혼례를 치르지도 않고 시작된 신방 생활이 제법 흡족해 태윤은 환하게 웃었다.
*
이세희가 귀비가 되어 일주일 만에 환궁했다. 결코 좋지 않은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신들은 대전까지 걸어오면서도 혀를 차거나, 무거운 한숨을 푹푹 내뱉었다.
태공이 이세희를 강탈하다시피 데려왔을 때도 말이 돌았다. 황제가 첩, 그것도 남자 애첩에게 푹 빠져 열 명이 넘는 후궁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대하니, 말이 좋게 나올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나라의 법도를 뒤집어 남자에게 비라는 첩지까지 내렸으니…. 이세희가 대신들에게 얼굴을 내비치고, 화요궁이 지어지는 기간엔 태얼궁 침전에 사슬로 묶여 갇혀 있어 아무도 보지 못해 말이 더 음습하게 돌았다.
소문만 무성하던 이세희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나선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납득을 안 할 수가 없는 외모였다. 사내가 저렇게 예쁠 일인가. 대신들은 연회에 나타나 황제의 옆에서 술시중을 드는 이세희를 힐끔 보며 술을 마셨다. 어떤 자는 매혹적인 단순호치의 미인인 이세희가 술을 따르는 모습에 홀려 입안에 머금고 있던 술을 그대로 뱉어냈다. 그런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태윤 다음으로 심지가 굳건하기로 소문났던 태건도, 이세희의 미모에 홀린 듯 술을 마시다가 흘리기 일쑤였다. 태경은 정신없이 이세희를 보며 침을 꼴딱거렸다. 이세희는 처음 느껴보는 시선에 얼굴을 펴지 못했다.
후궁들의 얼굴은 흙색으로 변해갔다. 이세희는 시종일관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황제의 옆을 지켰다. 이세희가 얼굴을 굳히거나 고개를 돌리는 건 황제가 이세희의 허벅지나 손등을 음란한 손길로 만질 때였다. 몹시 견디기 힘든지, 이세희는 입술까지 물고서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다가 대신들이 이세희를 강간하듯 훑자, 못 참고 황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 모습에 대신들도 궁금해져 하나같이 이세희만 보았다.
선황은 이세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들어 연회를 중지시키더니 그대로 이세희의 손목을 잡아끌고 갔다. 이세희가 비틀거렸다. 그리고 이세희는 일주일간 침전에 갇혀 나오지 못 했다. 문틈으로 신음과 열기, 비릿한 냄새가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태의가 이러다가 영영 못쓸 수도 있다는 말에 정사가 끝났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태공의 살아있는 장신구, 예쁜 인형. 대신들이 마음 놓고 입에 담고 음험하게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자.
그자가 당당하게 돌아왔다. 이젠 태공이 아니라 태윤의 손을 잡았다. 궁인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그런 미소는 처음이었으며 태윤을 보는 시선이 너무 따스해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고 전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러다가 남자 황후까지 들이겠습니다.”
예부의 나이 지긋한 문신이 허허, 하고 웃으며 중얼거리자 그 말을 들은 다른 문신이 기겁했다.
“남자 황후요? 남자 비도 망측스러운데 남자 황후라니요?”
“그러나 폐하의 성정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한 순간에 조용해졌다. 그 성격 덕분에 이세희의 호위까지 맡지 않았던가. 황제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았고, 무관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따르는 자였다. 늙은 대장군을 영웅처럼 여기고 따르는 태윤 때문에 장군들도 태윤 같은 자는 드물다며 입술이 닳도록 칭찬했다. 아랫사람은 형처럼 인자한 마음으로 다독여주고, 윗사람은 제 아버지처럼 따르고 존중하니 싫어하는 자가 드물었다. 자기 저택 시종들의 가족까지 챙겨주는 편인지라, 인근 백성들에게도 좋은 말이 오갔다.
그래서 더더욱 이세희를 자신의 연인으로 데려온 것에 소문이 안 좋게 돌았다. 이세희가 작정하고 황제를 유혹한 게 아니냐는 말이 무성하게 돌았는데, 태윤의 태도를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둘이 언제 눈이 맞은 거고, 언제 사랑을 나눈 것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이었다.
죽은 선황이 이 사실을 알까. 그 사실까지 도달했던 대신들은, 그나마 선황이 일찍 죽어 다행이라는 안도에 빠졌다. 선황이 제 손에 아들의 피를 또 묻혔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찔했다. 태경이 목이 잘려 죽고, 태경의 비 가문이 한순간에 구족까지 죽었다. 끝이 찜찜한 죽음의 연속에, 윤까지 죽는다고 상상하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이야 남자 애첩 때문에 아들을 죽인 미친 군주, 애첩 때문에 나라를 망칠 뻔한 군주, 라는 말이 붙지만 더 죽였다면 어떤 수식어가 붙었을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나마 이만한 게 다행인 건가 싶으면서도 저잣거리에 도는 말 때문에 입 안이 썼다. 그것이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이세희와 함께 가려는 성격이, 참 태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태윤이 깔끔하게 후궁 문제를 처리한 상태라, 더더욱 대신들이 만류할 수 없었다. 태윤은 선황의 후궁들에게 돈을 쥐여 주고, 재가까지 허락하고 내보냈다. 거기에 이세희도 포함이었다. 그 후에 태윤이 정중하게 꽃가마를 보낸 것이니 과정 자체에는 흠집이 없었다.
이세희도 재가가 가능한 사람이었으니. 다만, 그 재가 대상이 도덕적으로 문제였다. 대신들은 대전에 들어서면서 머리를 저었다.
좋게 생각하려 해도 좋게 생각할 수가 없으니, 이거야 원. 모두가 한숨을 내쉬며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데 어좌에 앉아있는 태윤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다들 왔는가?”
태윤의 모양새가 확 달라졌다. 태윤은 자신에게 꽂히는 어리둥절한 시선에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그렇게 이상한가?”
태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팔을 펼쳤다. 백호 가죽으로 만들어진 겉옷을 걸친 태윤의 모습이 매우 화려했다. 금군대장 시절에는 늘 검은 철릭만 입었으며, 사가에서는 만들어진 지 족히 오 년은 넘은 평복만 입었다. 좋게 말해 검소했지, 나쁘게 말하면 남루한 옷차림으로 지냈다. 워낙 의복이나 장신구에 관심이 없는 태윤인지라, 이세희가 없을 때도 사가에 있을 적처럼 입고 다녔다. 단출하게 황금 옥대만 차고 귀걸이나 목걸이, 가락지는 전혀 하지도 않았다. 대신들과 있을 때면 태윤이 더 가난하게 느껴질 정도로 입었다. 오죽했으면 대신들이 제발 의복 좀 황제의 체면이 살게 입어달라고 청을 넣었을 수준이었다.
“폐하…. 드디어 소신들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겁니까?”
대신들이 감복하여 땅에 엎드렸다. 태윤은 무안해져 볼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아니, 세희가, 아니지, 귀비가 이렇게 입으라고 하던데.”
버릇처럼 세희가, 라고 말하려던 태윤이 허겁지겁 칭호를 바꾸었다. 태윤은 귓가에서 차르륵 소리를 내는 귀걸이가 불편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 귀걸이는 어깨에 닿을 길이였고 굵었다. 목에는 비취가 걸린 목걸이가 있었다.
“귀비 마마께서 폐하의 의복을 정해 주셨습니까.”
이세희가 직접 나선 덕분인가. 태윤은 머리에도 처음 보는 관을 쓰고 있었다. 양쪽 손목에는 보기만 해도 눈부신 금팔찌가 있었다. 여러모로 이세희가 신경 쓴 듯했다. 자기들이 아무리 해달라고 애원해도 눈 한번 깜박하지도 않던 태윤이 작정하고 꾸미고 나오자, 대신들은 좋아야 할지 싫어야 할지 몰라 눈치를 살폈다.
“다음부터는 평범하게 입고 나와야겠지? 이건 너무…. 과한 거 같아.”
태윤이 귀걸이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자 대신들이 다들 “아닙니다! 폐하, 귀비 마마의 말씀대로 입어주십시오!”라고 외쳤다. 그 전의 모습이 더 과한 걸 태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황제답게 입어 달라고 말을 올리자, 태윤도 더 이상 꺾지 못하고 체념했다.
이세희는 아침에 태윤의 의복을 보다 태윤의 의복을 담당하는 궁녀들을 전부 모았다. 궁녀들은 태윤보다 이세희 앞에서 굳은 모습이었다. 이세희는 당장 비단을 공수해와 의복을 다시 만들라고 명했다. 이세희는 태윤을 돌아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혼냈다.
‘황제는 그 자리에 맞게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황제답게 위엄을 보이고 빛나야 합니다.’
‘너무 사치스러워서 짐은 부담스럽네.’
‘폐하. 폐하는 천하를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검소한 것도 좋으나, 빛나실 땐 빛나셔야 하는 게 군주입니다. 그래야 백성들도 폐하를 우러러보고 존경할 것이 아닙니까? 어진 성품도 중요하나, 군주라는 자리에 맞는 격식 있고 우아한 옷차림도 존경심을 느끼게 합니다.’
꼼짝없이 이세희에게 붙잡혀 한소리 들은 태윤이 두 손을 들었다. 그가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이세희는 자신의 백호 가죽 겉옷을 주었다. 태공이 주었던 것인데, 폐하에게 더 어울리겠다며 고집을 부려 태윤에게 입혀주었다. 거기다가 귀에는 황자 시절에도 쓰지 못했던 귀걸이가 걸렸다. 동경에 비친 제 모습이 한서진보다 화려해 질색했다. 태윤이 도저히 못 입겠다고 하자, 한서진도 나서서 태윤을 칭찬했다.
‘폐하, 소신은 지금의 폐하가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소신이 폐하를 업고 다니며, 소신의 폐하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폐하를 왜 금군대장이 업으십니까?’
이세희가 차가운 목소리로 한서진에게 쏘아붙였다. 한서진은 하, 하고 짧게 비웃더니 제 등을 보여주며 말했다.
‘제 등은 폐하를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언제든 업어드릴 수 있게요.’
엄지로 제 등을 척 가리키는 모습에 기세가 등등했다. 태윤이 있다고 믿고 설치는 모습에 이세희가 빈정거렸다.
‘그 등은 태자 전하를 업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태자 주현은 한서진을 무척 따랐다. 태윤 다음으로 한서진을 좋아해, 잠을 잘 때면 꼭 한서진 등에 업혀 잠들었다. 그 이야기를 언제 들었는지 이세희가 태자를 언급하자, 한서진이 오히려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태자 전하도 업고, 폐하도 업어드릴 겁니다.’
태윤의 옆에서 방정거리는 모습에 이세희가 잇새로 서슬 퍼런 말을 뱉어냈다.
‘너 따위가 뭔데.’
자신이 없으면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울 둘이었다. 태윤은 둘 사이에 끼어 둘을 말렸다.
‘그만, 그만! 둘이 그만 싸우거라! 맨날 만날 때마다 싸우니, 귀가 아프다. 서진이 너는 가서 태자를 안아다오. 태자가 지금쯤 일어나서 너 찾느라 울고 있을 테니.’
태자라는 이야기에 한서진의 얼굴에 꽃이 폈다. 태윤의 아들은 곧 제 아들이나 다름없다며, 한서진은 태자 주현도 금이야 옥이야 대했다. 태윤은 한서진이 태자를 끌어안고 우루루, 혀를 굴리는 모습에 ‘네가 주현이를 낳은 것 같다.’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한서진은 태윤의 아들 주현이 사실 그의 조카라는 걸 알면서도, 태윤이 아들로 인정하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태윤이 소중하게 여기니 자신도 주현을 소중하게 여겼다.
‘폐하, 소신은 가서 태자 전하를 보살피도록 하겠습니다.’
한서진은 태윤을 두고 부리나케 태자에게 갔다. 저렇게 주현이 좋을까. 서진을 무척 잘 따르는 주현은 서진만 보면 웃고, 서진이 없으면 울었다. 태자가 유모보다 한서진을 더 좋아해 아예 동궁에서 살게 할까 고민할 수준이었다.
아침에 이세희에게 혼나고, 한서진과 이세희의 싸움을 말리느라 진력이 다한 태윤의 기력을 쏙 빼놓은 건 거추장스러운 장신구와 옷차림이었다. 몸이 무거웠다. 태윤은 끙, 하고 앓으며 이마를 짚었다.
대신들도 저렇게 좋아하고, 한서진도 제발 예쁘게 입어 달라고 부탁할 정도니…. 무엇보다 이세희의 서슬 퍼런 눈빛이 무서워 아무 말도 못 하게 생겼다.
“앞으론 그대들의 말대로 격식에 맞게 입고 오겠네.”
태윤의 나직한 한마디에 대신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귀비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한 일이었다. 다들 어리숙한 얼굴로 “소신들의 말씀을 들어주셔서 감읍할 뿐입니다.”라는 말을 올렸다. 태윤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폐하, 외람되오나 한 말씀 더 올려도 되겠습니까?”
노신이 기다렸다가 말을 올렸다. 조정은 원래 대신들이 먼저 들어와 엎드리면 황제가 시중을 받으며 들어오는 게 예법이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조정에서는 기본적으로 백성들은 잘 지내는지, 농사는 풍년인지, 흉년인지, 세금 문제로 고민을 겪는 이는 없는지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해보게.”
그러나 오늘 하는 얘기는 조금 달랐다. 노신은 소매에 두 손을 넣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께서 성품이 어지시고 아랫것들에게 너그러우신 것도 압니다. 검소하시어, 황제의 안녕에 쓰이는 비용도 축소하시고 백성들에게 풀어주고자 하는 마음에 감읍했습니다. 하오나, 폐하. 부디 예법은 예법대로 지켜 주시어 폐하의 위엄을 낮추지 말아주십시오. 폐하께선 그 자리에서 하나뿐인 존재로 빛나셔야 합니다.”
이세희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태윤은 음, 하고 목을 울렸다. 더 해보라는 듯 부드럽게 웃자 노신이 고개를 더 숙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소신들이 폐하를 예법대로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오늘 일찍 온 것 때문에 그런가? 그것이 그대들에게 불편함을 주었는가?”
“불편함이라니요, 폐하. 다만, 소신들은 예법에 따라 폐하를 진심을 다해 모시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니 아침 일찍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태윤은 소리 내어 웃으며 턱을 괴었다. 이제 와서 노신들에게 일찍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워낙 연령대가 높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태윤이 노신들의 체력에 맞춰야 했다. 태윤이나 무관들은 연무장을 돌며 체력 훈련을 하는 습관이 있었지만, 문신들은 군역과 거리가 멀어 이런 쪽으로는 맞지 않았다. 지금도 도독들이나 병부 소속 관리들은 눈이 별처럼 초롱초롱하건만, 문신들은 겨울이라 추위도 타고 허리도 구부정했다. 군역의 유무에 대해 고민하던 태윤은 턱을 매만졌다.
어째서 저들은 군역에 대해 기피할까. 이 나라의 비뚤어진 군사 문제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다. 사병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연유에 대해서 잘 알지만, 현재 사병은 군역이나 무관 체계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무관 시험에 응시하기보다는 사병에 지원하는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애초에 승진에 한계가 있었고, 문관에 비해 천대받는 무관을 업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치에 발을 디딜 순 있으나, 명확한 선이 그어진 게 무관이었다.
사병이 하나의 제도가 되는 것을 기점으로, 평민들은 무관이 되기보다 돈을 많이 주는 사병이 되고 싶어 했다. 그건 나라에도 큰 손실이었다. 갈수록 부실해지는 무관들의 실력도 문제가 되었다. 괜찮은 자들은 모조리 사병으로 빠져버리니 큰일이 터졌을 때 막을 수 있는 인원이 적어지고 있었다.
또한 문관들의 군역 기피가 백성들에게 그리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문관들의 자제들은 대량의 돈을 내고, 군역을 피했다. 상업으로 재산을 모은 백성들도 그 행위를 따라했다. 군역을 가는 게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그것을 피하는 게 하나의 부를 상징하는 일이 되어버린 이 시점에서, 태윤은 나라의 존속까지 걱정되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이 자랑스러워야 했다. 그리고 그 의무, 혹은 선택에 따라 최소한으로 납득할 수 있는 봉급을 쥐여 주어야 했다. 그 두 가지 성립되지 않는 한 문관, 무관을 포함한 백성들도 군역을 지는 일에 대해 불평이 많을 것이다. 인재를 군사에 흡수하고, 실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개선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 시점에 고치지 않는다면 언젠가 다시 한 번 오랑캐에게 공격을 당하리라.
고민 끝에 태윤은 자세를 바로하고, 대신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진중하고 견고한 눈빛에 대신들도 태윤이 할 말이 있음을 직감하고 태윤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태윤을 믿는 눈이 아니었다. 태윤을 시험하고, 의심했다.
태윤은 속으로 ‘나는 아바마마와 다르다. 그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라고 되새기면서 눈을 차갑게 빛냈다.
“모두 짐이 어떻게 어좌에 올랐는지 알걸세. 짐의 이복동생, 이제는 역모를 일으킨 대역죄인인 태건의 반란이 있었고, 그 반란으로 인해 선황이 심병을 얻어 급작스럽게 붕어하셨다.”
태윤이 자연스럽게 운을 띄우고 바람을 잡자 대신들은 할 말이 없었다. 태윤의 말에서 틀린 말이 없었다. 그 두 가지 상황이 연달아 발생하지 않았다면 태윤은 절대 황제가 될 수 없었다. 태윤이 태혁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황위에 올랐고, 장군들이 지지해주며 학살 아닌 학살을 벌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 일이 근본적으로 왜 생겨났는가에 대해 짐은 깊은 고민을 하였다. 황궁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애초에 생겼어도 안 됐으며, 허용되지 않았을 감정에 우매하게 속아 넘어가 태건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대들은 그 자신감이 어디서 기인했다고 생각하는가?”
대신들은 태윤의 나긋한 물음에도 눈치를 보았다. 저 물음에 대해 대답할 자가 있을까. 태건의 반란을 가장 빠르고 압도적으로 제압한 게 태윤이었다. 그 상황에 나갔던 것은 금군들과 장군들이었다. 문신들은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본인들이 가장 잘 아는 것이다. 태윤의 물음에 대답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반란이나 민란이 터질 때마다 태혁처럼 몸부터 숨기고 보았다. 그게 당연한 진리라고 믿었으니까. 그 당시만 해도 금군대장이었던 태윤이 반란을 진압하는 게 맞다고, 대부분이 생각했다. 태윤은 자신의 예상대로 말을 못 하고 눈치를 보는 대신들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 서리가 깃든 듯한 차가움에 대신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거기서 어깨를 으쓱이는 건, 태윤과 함께했던 장수들이었다.
“또한 태혁이 자신의 황위를 주장하며 당당하게 왔지. 나라를 버리고 처가에 몸을 맡긴 죄인이, 어떻게 그리 자신감이 넘칠 수 있단 말인가? 그대들은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병입니다.”
답을 내놓은 이는 문관 시험에 금패를 받고 들어온 젊은 유생 금혁서였다. 금혁서는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태윤을 바라보며 입을 움직였다.
“현재 이 나라의 병권을 폐하가 쥐고 계신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군사의 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반란을 일으켰으며,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대역죄인들의 공통점은 모두 통솔할 수 있는 대규모의 사병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문관 한 명에게 허용되는 사병의 수는 적지만, 그 소수가 합쳐지면 대규모가 되는 법이니까요.”
“하오나, 폐하. 사병은 법도에 따라 반포되었으며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희 문신들이 있어야 이 나라의 조정이 바로 서고 돌아가는 것이니, 사병을 고용해 몸을 지키는 게….”
“본인의 몸도 못 지키는 자가 어떻게 가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킨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나라의 조정이 바로 선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나라도 지키지 못하는 법일세.”
태윤이 엄한 목소리로 반기를 드는 문관을 꾸짖었다. 문관들은 서서히 밀려오는 불안한 기운에 태윤을 보았다. 사병, 나라를 지키는 일…. 군역을 지라고 할까 봐 문관들의 얼굴이 파르라니 질려갔다. 무관들은 그들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렇게 군역을 안 지려고 몸을 사리더니…. 선황들도 대대로 문을 중시했던 터라, 무가 천시되어 무관들은 서러움을 삼키면서도 검을 들었다.
“짐이 어좌에 올랐던 순간을 생각했네. 그대들도 최악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짐을 황제로 인정하지 못했겠지.”
“폐하! 어찌 소신들이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태윤은 그들의 거짓발림을 믿지 않았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펄쩍 뛰는 문관을 지그시 보던 태윤은 차분하고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
“짐은 사병들을 이용해, 거짓된 자신감과 착각에 빠져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죄인들 덕분에 어좌에 올랐네. 사병 덕분이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태윤은 거기서 말을 자르고 대신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보며 힘을 실어 말을 이었다.
“사병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더 적합한 황제가 탄생할 수도 있었던 일일세. 역사에는 만약을 붙일 수 없다지만, 짐은 그리 생각하네. 짐은 이 어좌에 앉게 된 건 최악의 상황 중 차악이지. 물론 짐은 황제로서 백성들을 자식으로 여기며 품을 걸세. 그러기 위해 매일같이 짐을 갈고 닦을 것이다. 이 어좌에 걸맞은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할 거야.”
대신들이 태윤을 약간의 존경을 담아 보았다. 태윤은 그들을 보며 싱긋 웃어주며 본심을 드러냈다.
“그러니 그대들도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게. 사병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 그대들이 앉은 자리는 백성들의 혈세로 이루어져 있네. 그런데 왜 그대들은 그 자리에 걸맞은 노력을 하지 않는가?”
“폐하…. 아닙니다. 소신들은 소신들의 의무와 책무를 다하기 위해….”
예의 바르고 정중하나, 태윤의 압박 아닌 압박에 문관들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러다가 잘못하면 꼼짝없이 검을 들게 생겼다. 태어나 한 번도 검을 들어본 적 없었다. 그들은 당연하게 손에 붓을 쥐었다.
“왜 반란이 일어날 때 나라를 버리고 백성들에게 검을 들게 했는가? 나라를 버린 자는 그 자체로 역모다.”
“폐하! 소신들은 역모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소신들은 소신들의 자리에 맞게 무관들을 지휘하였습니다!”
“아, 가장 멀고 안전한 곳에서 서신과 봉화로 말인가? 어떻게 전투 한번 치러보지 못한 그대들이 군사를 지휘할 수 있지? 짐은 그것이 의문이야. 만약 군사를 전두지휘하고 싶고, 나라를 지키고 싶다면 그대들도 군역을 져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드디어 나온 군역이란 소리에 문관들이 아찔함에 눈을 감았다. 군역이라니! 군역은 한 해만 지는 게 아니었다. 성인이 되면 환갑이 될 때까지 일 년에 두 번은 훈련에 참가해야 했으며, 전쟁이 일어나도 절대 도망갈 수 없었다. 법도가 그러했다.
태윤은 법도의 문제를 제기하며 군역을 모두 공평하게 짊어지게 하고, 사병을 없앨 작정이었다.
“그대들을 지키기 위해 사병을 고용했으면서, 사병과 함께 제도와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을 가? 그것이 충신이란 말인가? 짐의 눈에는 그대들이 대역죄인들과 다르지 않다.”
“폐하, 삼백 년이 넘도록 전해진 전통입니다! 소신들은 전통과 법도에 맞게 행동하였습니다.”
“전통이 잘못되었다면 없어지는 것이 맞다.”
태윤이 딱 잘라 말했다. 문관들이 입을 쩍 벌렸다. 태윤은 선황들이 쌓아온 역사, 법도, 전통, 가치를 전부 뒤엎을 작정이었다.
“그것이 썩어빠진 체제를 만들었다면 전복시켜야 마땅하다.”
“폐하!”
쉿, 태윤이 덧붙이며 입가를 검지로 가렸다. 조용히 하라는 뜻에 문관들이 울먹거리며 입을 다물었으나, 무릎을 꿇고 통촉해 달라고 빌었다. 환갑까지 군역을 지라니. 생각만 해도 싫었다.
“백성들에게 교본이 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자들이 이리 말이 많다니! 그래 놓고 그대들이 백성들에게 혈세를 받아먹을 양심이 있는가?”
태윤의 기개가 등등한 으름장에 무관들은 눈을 반짝였다. 한서진이 있었다면 오열했을 정도로 고고한 모습이었다. 태윤은 생각 이상으로 대신들을 압박하고, 지휘하며 본인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연유를 설명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물론 무관 모두가 사병을 없애는 데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몇몇은 섣부른 판단이라며 얼굴을 흙빛으로 물들이기도 했다.
“그대들은 백성들을 지키고 모범이 되어야 할 자들이야. 앞으론 백성들과 함께 군역을 지도록 하게. 그리고 사병을 폐지하고.”
“폐하! 그간의 전통과 선조들의 뜻을 한 번에 저버리실 참이십니까?”
“짐이 말하지 않았는가? 잘못된 게 전통이라면 없어져야 적합하다! 어찌 전통과 선조들의 가치라고 들먹이면서 그대들의 편함을 추구하는가? 그것이 선조의 뜻이라면 짐은 따르지 않겠다! 짐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짐은 살아있는 백성들이 소중해. 이미 땅에 묻힌 선조들이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태윤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어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검을 빼들었다. 문관들이 히익, 소리를 내며 땅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었다. 태윤은 검을 쥐고서 대신들을 살의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만약 그 가치를 주장하고 싶다면 선조들의 가치가 있는 저승에 가서 펼치게. 짐의 나라에 그런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니!”
한마디도 못 하는 신하들을 노려본 태윤은 입술 끝을 올리더니, 고저 없는 어조로 새로운 법도를 말했다.
“사병을 폐지한다. 문관과 무관의 품계를 같게 하며, 그에 따라 봉급도 똑같이 한다! 그리고 모든 문신 자제들에게 군역을 부여한다!”
무관들은 생각 외의 파격적인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고, 문관들은 흐느끼지도 못했다. 태윤이 호랑이 같은 안광을 빛내며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군대장일 때는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를 하던 태윤의 달라진 태도에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었다.
태윤은 빼낼 때처럼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 자리는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도록.”
황제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대들도 짐과 같이 운이 좋았을 뿐이야.”
하지만 나는 운에 내 운명을 맡기지 않겠다. 태윤은 그리 결심하며 등을 돌렸다.
나는 아바마마와 달라. 그 말이 태윤을 여기까지 오게 해준 의지였고, 결의였다.
*
겨울에 이르니, 해도 추위가 싫었는지 요새 들어 모습을 뒤늦게 드러냈다. 하늘은 쾌청하고, 해는 높아 눈이 시렸다. 하늘만 보면 가을이건만, 지상을 할퀴듯 쓸고 지나가는 바람은 매섭기 그지없어 겨울이란 걸 일깨웠다.
태윤에게 귀한 백호 가죽 겉옷을 준 터라, 이세희는 간소한 여우 털옷을 입고 태얼궁을 나섰다. 원래라면 겨울용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으나 바람을 맞고 싶어 이세희는 금군 네 명을 이끌고 화요궁으로 걸어갔다.
화요궁은 오늘부로 공식적으로 빈 궁이 되었다. 이세희가 거처를 태얼궁으로 옮겼으니, 화요궁은 무늬뿐인 화비의 궁이 되었다. 오늘을 기준으로 역사의 한 자락에 남고 사라질 것이다.
패물은 이세희의 마음 가는 대로 처리하라는 윤의 명령까지 내려왔다. 내관이 받아온 서신을 펼쳤을 땐, 당황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선황에게 직접 글을 배운 이세희의 눈에는 태윤의 글씨가 엉망이었다. 궁녀에게 물어보자, 궁녀는 웃으면서 ‘폐하께선 명필로 체도 여러 가지신데, 이건 평상시에 간략하고 빠르게 쓰실 때 쓰는 체이십니다. 참으로 그림같이 아름답지요?’라고 뿌듯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선황도 편하게 쓸 때는 흘려 쓰곤 했다. 그걸 기억해낸 이세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서신을 보았다. 급하게 휘갈기듯 뭉개 쓴 글씨 때문에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자신이 가져다준 옥새가 구석에 정갈하게 찍혀 있는 걸 보자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세희는 무의식적으로 서신을 읽으며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그대의 마음이 가는 대로 패물은 처리하게. 날이 추우니 옷을 잘 챙겨 입게.’
마지막에는 윤이 사랑한다는 말까지 적어 놓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시도 때도 없이 예쁘다, 예쁘다 하는 말도 좋았고, 그대를 제일 사랑한다는 말은 이세희를 궁에 묶어 두는 기분 좋은 사슬이 되었다.
처음으로 윤에게 받은 서신이었다. 첩지가 내려왔던 칙서는 내관이 회수해갔기에 자신이 가질 수 없었다.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된 서신을 조심스럽게 말고, 홍실로 묶은 뒤 함에 모아두었다. 윤이 준 물건들은 다 그곳에 있었다. 함에는 내관이나 궁녀들은 절대 손을 대지 못했다.
수십 개의 보옥이 박힌 함을 만져보던 이세희는 마음을 굳혔다.
이제 과거는 과거에 묻어두어야 했다. 언제까지 선황의 그늘에 갇혀 태윤에게 마음의 짐을 줄 수 없었다. 태공은 가장 비참하게 죽었고, 태윤은 그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세희는 작게 숨을 내뱉고 자신의 손으로 화요궁의 패물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진상된 물건들을 다시 자신에게 준 것이었다. 태공의 묘에 묻기가 아까울 정도로 진귀한 패물이었다. 차라리 다른 후궁들에게도 돌려 그녀들이 떠나갈 때 한몫 단단히 챙겼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들과는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황후를 필두로 자신을 무시하긴 했지만, 그녀들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태공의 잘못이지 그녀들의 잘못이라고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태공이 죽음으로써 끊어진 인연이 되었으니, 부디 그녀들이 잘 살아가길 바랐다. 그녀는 그녀대로, 이세희는 이세희대로. 그리고 과거는 과거에 둔 채, 시간에 빛이 바래 색채를 모두 잃길 바라며 살아가야 했다.
잊어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이세희는 그래서 태공이 준 흔적들을 전부 버리고, 그 위에 윤을 새기기로 결정했다.
패물은 돈으로 바꾸어 궁의 예산으로 돌리든가, 혹은 내탕금으로 두어 윤의 뜻대로 나라에 큰일이 생겼을 때 사용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윤의 위상과 체면에 도움이 된다 생각하면 어깨가 으쓱거렸다. 태공이 준 패물은 윤이 걸어가는 길에 좋은 보호막이 될 것이다. 이세희는 자신이 먹여준 독주를 먹어가며 죽은 태공을 떠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개 같은 새끼. 저승에서 기다리긴 뭘 기다려? 그때, 역시 목을 졸라서 죽여 버릴 것을…. 윤이 절대 그대가 황제를 죽인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여 손도 대지 못한 게 아까웠다.
“아부!”
그때였다. 바람을 타고 들려온 아기의 젖내 나는 소리에 이세희의 고개가 돌아갔다. 까꿍, 까꿍, 하는 한서진의 혀 짧은 소리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화요궁과 동궁, 황후가 쓰는 중궁은 태얼궁을 기준으로 황제가 가기 편하게 설계되어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
“전하, 저기 아름다우신 귀비 마마가 지나가십니다. 처음 만나시지요?”
한서진의 머리카락도 보기 싫어서 재빨리 사라지려 했건만, 한서진이 어떻게 알고 이세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눈이 저절로 가는 반반한 얼굴에 조소가 서렸다. 일부러 태자를 들먹거리며 자신을 놀리는 게 분명했다. 이세희의 전신에 찬바람이 풀풀 풍겼다. 금군들이 바짝 긴장했다.
“마마,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동궁에 들르셨으면 전하에게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려 연모하는 폐하의 하나뿐인 아드님이신데.”
보모는 어디 갔는지, 한서진이 넓은 화원에서 태자를 업고 있었다. 자세가 영 어설펐다. 이세희는 저러다 아이의 고개가 뒤로 넘어갈까, 걱정이 되어 서둘러 뒤로 다가가 아이의 허리부터 잡아주었다.
“대장님, 되도록 전하를 업으실 때는 천을 사용해 목까지 단단히 고정하십시오. 이때는 목을 잘 가누지 못해서….”
태건의 아이라, 조금 꺼림칙하긴 했다. 자신 때문에 생부와 생모가 죽었으니 훗날 알게 되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찜찜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세희를 무섭게 짓누르는 건 아이의 부모를 어쩔 수 없이 앗아갔다는 죄책감이었다.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 생각이 은연중에 이세희를 구석으로 내몰았다.
그때마다 이세희는 태자를 모른 척했다. 태자와는 결코 좋은 인연이 될 수 없으리라 직감했다.
“우웅?”
그러나 처음 만난 태건의 아들, 태윤의 조카, 그리고 유일무이한 후계는 한서진의 등에 업혀 자신을 보고 까르륵 웃었다. 살이 오동통하게 올라 마디를 분간할 수 없는 짧고 하얀 손가락이 이세희의 검지를 잡았다.
“아부부…. 꺄.”
그러더니 두 눈을 환하게 접어 웃으며, 손가락을 당겨 산호색 입술로 빨려고 했다. 깜짝 놀란 이세희가 “안 됩니다.”라고 말하자, 태자가 울먹거렸다. 이잉, 하는 소리에 이세희가 태자를 난감한 눈으로 보았다. 한서진은 뒤를 돌려 이세희의 얼굴을 보더니, 무슨 영문인지 태자를 넘겨주었다. 얼떨결에 이세희는 태자를 안게 되었다.
“왜 저에게 태자 전하를 안겨 주십니까?”
말은 한서진에게 퉁명스러웠으나, 아이를 안는 자세나 보는 눈빛은 한겨울의 서리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 윤과 어린아이들에게는 상냥했다. 이세희는 아이의 목을 팔로 받치고, 남은 손으로는 아이의 손목을 슬며시 잡아 보았다. 숱하게 여동생들을 돌봤던 사람답게 능숙한 모양새였다. 아이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꼭 안아준 이세희는 자애로운 아버지 같았다. 눈빛에는 미움이나 원망 같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미안함이 많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아이를 한참이나 보았다. 아이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이세희를 보며, 혀를 달싹이더니 손을 뻗어 이세희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꽤 아플 텐데도 이세희는 소리 내지 않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머리카락을 내어주더니, 한서진에게 넌지시 말했다.
“폐하를 많이 닮으셨습니다.”
윤의 측근을 제외하곤, 태자의 부모를 몰랐다. 윤도 생모에 대해 ‘어릴 때 만났던 여자.’라고만 둘러대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들이 반발할 법도 한데, 반발하지 않았던 이유가 얼굴에 있었다. 태윤과 부자지간이라 하면 의심 없이 믿을 얼굴이었다. 특히, 두 눈을 환하게 접어 웃는 모습이 닮았다.
“그렇지요? 그래서 정말 사랑스러우십니다.”
한서진이 이세희와 나란히 서서 태자를 보고 웃었다. 한서진이 두 손을 치며 “전하. 이리 오세요.”라고 말하자 태자가 두 팔을 뻗었다. 꺄, 소리 내는 게 귀여웠다. 태자가 덥석 한서진에게 안기더니,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입술을 쪽쪽 거렸다. 배고픈 모양이었다. 음빠, 하는 혀가 오므려졌다고 펴지는 소리에 한서진이 태자를 안고 다독였다.
“태자께서 배가 고프신 모양입니다.”
“얼른 유모에게 모셔다 드려야겠습니다. 이러다 또 우실라.”
한서진이 호들갑을 떨며 태자를 달랬다. 태자가 배고팠는지 이잉, 하며 울음을 흘렸다. 짧은 팔을 휘적거리며 한서진의 앞섶을 잡고 가슴에서 젖을 찾는 모습이 귀여워 이세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서 가 보세요. 저도 화요궁에 패물을 정리하러 가야 합니다.”
“예. 전 물러나겠습니다.”
한서진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이고 사라졌다. 태자가 한서진을 생각 이상으로 잘 따른다는 게 사실이었다. 한서진이 윤의 호위를 도맡고 싶어 해도 태자가 한서진이 잠깐만 사라지면 울음을 터트려, 한서진도 어쩔 수 없이 태자를 안고 일을 하는 중이었다. 태자를 안고 급히 사라지는 모습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던 이세희는 화요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일상이 평온했다. 윤과 함께 눈을 뜨는 아침이 반가웠고, 윤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고 느렸으나 그 안에서 찾는 소소한 일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굳게 닫힌 화요궁을 보자 이세희는 허심탄회하게 숨을 뱉었다. 과거를 헤집는 거 같아, 멀리하려 했으나 본의 아니게 태자를 마주치자 그런 것도 힘들다는 걸 느꼈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순 없었다. 반드시,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악연이든, 과거든, 태자든… 누군가를 마주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마다 윤의 뒤에 숨을 수도 없었고, 어딘가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윤의 곁에 머물기로 했으니, 그것들도 자신이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이세희는 편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고통 받고,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윤이 곁에 있으니까. 힘들면 손을 잡아줄 윤이 있기에, 윤을 믿고 조금씩 걸어갈 수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바람이 불었다. 더 이상 눈이 시리지 않아, 이세희는 편하게 하늘을 볼 수 있었다.
*
정무를 끝마치고 나니, 어느새 석반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이제야 쉴 수 있다는 생각에 태윤이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피곤함에 무거운 눈이 절로 감기고 있었다. 삼공들과 모여 공부를 하는 도중 태자가 윤을 찾아왔다. 한서진이 달래 보려 했지만, 태자가 너무 칭얼거려 어쩔 수 없다고 덧붙였다. 오늘은 태자를 안고 공부를 하느라 팔이 은근히 아팠다. 무게는 무기들보다 가벼웠지만, 워낙 아이가 작고 여려 귀하게 여기다 보니 팔에 힘이 들어갔다. 거기다가 모유를 배부르게 먹고 왔는지 태자는 잠투정을 부리다가 태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잠들었다. 삼공들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잠에 들어 색색거리는 태자를 보자, 차마 물러나라고 할 수 없어 태윤이 몇 시진 내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자도, 자도 졸린지 태윤의 비단옷에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슴에 뺨을 기대어 통통한 젖살이 납작하게 눌렸다. 이러다가 얼굴에 자국이라도 남을까 걱정이 되어 뺨을 돌리게 했으나 태자가 우응, 하며 칭얼거려 태윤은 아이를 내버려 두었다.
잠든 아이를 보고 있자니 태윤도 눈이 자꾸 감겼다. 눈에 힘을 주고 버텼다.
“폐하, 아란에서 공물을 보내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거라.”
아란에서 윤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며 공물을 보내왔다. 아마도 겨울 과일일 것이다. 땅이 비옥하고, 사계절이 보다 일찍 오는 아란은 이 나라보다 한 계절 빠른 과일이 났다. 무슨 과일일까 기대하며 아들의 몸에 금침을 대고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아이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내관이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귤이었다. 이 나라에서도 먹기 힘든 귀한 과일 중 하나였다. 기르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동 중에 쉽게 무르고 터져버리는 과일이라 황제도 겨울, 한정적인 시기에만 겨우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다. 그 과일이 꽤나 수북하게 쌓여 있어 윤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 귀한 걸 이렇게 많이?”
태윤이 감탄했다. 딱 봐도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 보냈다. 내관은 이것 외에도 잡기 힘든 물고기, 비단, 은, 금 등등의 진상품이 왔다고 전했다. 태윤은 이미 빛깔 좋은 귤에 홀려 연신 탄성을 뱉어내며, 귤을 들고 이리저리 보았다. 반질반질한 귤을 만져보던 태윤은 사람 좋게 웃더니 내관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금군 아이들을 다 데리고 오거라.”
“폐하, 설마….”
내관이 저 귀하고 좋은 귤을 다 금군들에게 줄 생각이시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 태윤은 웃음소리에 아이가 깰까 봐,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태자는 윤에게 기대어 도롱도롱 자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를 매만져준 태윤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짐은 과일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또 이런 건 나눠 먹어야 맛있지. 어서 데리고 오거라. 추운 겨울에 화로 하나 없이 밖에서 근무하는 게 얼마나 고된데.”
금군들은 활동성을 위해 두꺼운 옷도 겹쳐 입지 못했다. 최소한으로 보온할 수 있는 관복을 입고 일하는 사실을 태윤이 가장 잘 알았다. 태윤의 부드러우나 강직한 목소리에 내관이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태윤은 아이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아가야, 이제 동궁에 가서 자거라. 아비 품은 불편하지 않느냐?”
태자의 포동포동한 뺨이 움직였다. 말을 알아듣는 건지,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며 손가락을 빨려 했다. 태윤은 아이의 손을 저지하고서 등을 토닥였다. 이젠 어엿한 아버지였다. 자신이 마음으로 낳은 아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존재였다.
“날 용서하지 않아도 좋지만, 세희는 용서해다오. 알았지?”
오늘 세희와 태자가 만났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 태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소원을 말했다.
“네 아버지에겐 내가 용서 받지 못할 짓을 했지만…. 세희는….”
태자를 보는 윤의 눈이 착잡해졌다. 후회는 없었지만, 아이가 말갛게 웃을 때마다 미안함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태윤이 속닥거리는 게 싫었는지 우응, 하고 짜증을 내며 태윤의 가슴팍에 얼굴을 아예 묻어버렸다.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이제 목을 가누기 시작한 아이에게 너무한 처사이다 싶어 태윤은 입을 다물고 아이의 등을 다독였다. 큰 구릿빛 손이 아이의 작고 보송보송한 등을 오갔다.
“폐하, 금군대장 한서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문이 열리고, 추위에 얼어붙어 몸이 딱딱해진 금군 열댓 명이 들어왔다. 현재 이쪽을 호위하는 인력은 스무 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머지는 위병을 세운 듯했다. 태윤은 버릇대로 재빠르게 머릿수를 세더니, 수북이 쌓인 귤을 책상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금군들은 태윤이 뭘 주려는 줄 알고 당황하여 손을 저었다.
“폐하, 귤이라니요. 귀한 귤을 한낱 금군들이 소신들에게 주시다니요. 폐하께서 드셔야지요.”
“너희들도 알다시피 짐은 과일은 질색이다. 추운 날에 호위를 서느라 힘들 텐데, 가져가서 하나씩 먹거라. 지금이 아니면 못 먹는다.”
태윤이 어서 먹으라는 듯 손짓하자 금군들이 어정쩡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한서진은 우두커니 서서 태윤을 지그시 보았다. 익숙한 표정에 태윤은 쾌활하게 웃으며 턱짓으로 귤을 가리켰다. 한서진의 눈가가 붉었다. 애써 웃으며 다가온 한서진이 떨리는 손으로 귤을 집었다. 금도 아닌데, 금을 가진 것처럼 두 손으로 포개더니 태윤에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소신에게 귤도 주시고….”
먹을 눈치가 아니었다. 저러다가 또 저택에 보물처럼 두고 지켜볼까 봐 태윤은 서둘러 말했다.
“그대가 귤 좋아하잖아. 어선방에 말해서 어죽도 끓여 놓으라 했으니, 춥고 출출하면 어죽 가져가서 먹게.”
“폐하….”
“짐이 못 먹어서 썩히는 것보단 너희들이 먹는 게 낫지. 대신, 다른 애들한테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다른 금군들이 들으면 속상해한다고 덧붙이면서, 태윤이 꼭 먹으라고 신신당부했다. 금군들은 귤을 먹지도 못하고, 그저 쥐고만 있었다. 너무 귀해서 잘 먹지도 못하는 귤이었다. 평민들은 태어나 한 번 먹어볼까 말까 할 정도로 귀했다. 고기야 가끔 얻어먹지만, 이렇게 잘 상하고 무르는 과일은 늘 황족들의 몫이었다. 그걸 고생한다며 쥐여 주니, 마음이 저려왔다.
“폐하, 태자는 소신이 모셔도 되겠습니까? 계속 안고 계시느라 힘드실 텐데….”
한서진은 서서 태자를 안고 재우는 태윤이 안쓰러웠는지 두 손을 내밀었다. 순하고 착한 아이긴 했지만, 잠투정이 심해 태자는 한서진과 태윤, 보모만 안고 재울 수 있었다. 요새는 보모도 잘 따르지 않아 하루의 대부분을 한서진이 달라붙어 재우고 있었다. 태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들을 넘겼다. 한서진은 “전하, 소신 서진입니다.”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태자는 기가 막히게 한서진인 걸 알았는지, 얼굴을 그의 겨드랑이 쪽에 파묻었다.
“태자가 그대를 참 좋아해. 다행이야.”
“오늘 보니 귀비 마마도 좋아하더군요.”
이세희가 태자를 안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태윤도 들었다. 태건의 일은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인 비밀이었다. 둘 다 생각지 못한 우발적인 일이었다.
윤은 그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다. 건이 반역에 성공할 리는 없었을 테니, 최대한 빨리 죽여 저 세상으로 보내주는 게 형으로서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애정이었다.
그러나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날 순 없었다. 동생의 피가 묻은 자신의 손으로, 동생의 아이를 아들로 삼으며 안고 있었다. 언젠가 진실을 알려줘야 할 텐데, 태윤도 그날이 두려웠다. 아이를 이세희 다음으로 사랑했다. 더 이기적으로 군다면, 아이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평온한 하루를 실로 엮듯 이어 나가고 싶었다.
“세희가 아이를 안고 좋아하더냐?”
윤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한서진은 태자를 꼭 안고 윤을 다정하게 보며 말했다.
“예. 귀비 마마께서 확실히 여동생들을 돌보셔서 그런지, 아이를 안고 달래는 솜씨가 소신보다 좋으셨습니다.”
“그래?”
“그리고 태자 전하도 귀비 마마를 좋아하셨고요.”
“그래….”
태윤의 목소리가 흐려질 찰나, 한서진이 태윤이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폐하, 태자 전하는 폐하가 아니었다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폐하께서 마음을 베풀어 태자 전하가 건강하게 살아 소신과 폐하, 귀비 마마의 곁에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만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세상 일이 저희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한서진이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태윤도 후, 하고 숨을 뱉어내며 웃었다. 정무를 보고, 공부를 하고, 아이까지 안고 있었더니 목이 뻐근했다. 습관적으로 뒷목에 손을 올리고 주물럭거리던 태윤이 하품을 크게 했다.
“아이를 잘 부탁하네. 그대가 있어서 다행이고… 미안하네. 저택에도 못 돌아가고 거의 동궁에 살게 되었군.”
“소신은 황송할 뿐입니다. 언제나 폐하 곁에 머물 수 있고, 전하도 지킬 수 있지 않습니까? 소신은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그리고 부관 녀석들도 좋아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소신들에게 지금처럼 태평성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금군들과 한서진도 태윤의 파격적인 개선안을 듣고 놀랐다. 사병 폐지에 문관과 무관의 품계 동일, 봉급 인상, 하사품의 종류 변환. 그리고 모든 문관 자제들과 현 문관들에게도 군역을 부여했다. 군역을 가지 않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재산으로 갚으라는 엄한 명까지 내려왔으니, 문관들은 울면서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태윤은 말을 듣지 않는 대신들의 전답을 강제로 빼앗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흘렸다. 조상 때부터 대대로 내려온 전답과 선산까지 뺏기게 된 문관들은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
태윤은 이세희에게 주기 위해 미리 빼놓은 귤을 집어 들었다. 가장 큰 귤이었다. 주섬주섬 바구니에 넣은 태윤은 금군들을 보며 씩 웃었다.
“우리 모두 사생아, 즉 서자, 진급에 한계선이 있는 자들이었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우리는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였지만, 짐이 황제가 되었으니 이제 달라질 것이다.”
금군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태윤을 보았다. 태윤은 광대처럼 귤을 공 대신 삼아 높게 튕기더니, 한 번에 받았다. 놀라운 솜씨였다.
“안 그래도 축출로 인해 그 자리가 비었으니, 똑똑하고 능력이 출중한 서자들로 채워 보자고.”
태윤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금군들을 보더니, 걸음을 느긋하게 옮겼다. 태자는 한서진에게 맡겼으니, 태윤은 이세희의 품에서 안락한 여가를 보낼 셈이었다.
“인재는 출신, 성별, 혈연을 가리지 않고 등용한다. 짐은 적재적소에 인재를 넣을 것이다. 그게 짐이 추구하는 최소한의 나라다.”
“대신들의 반발이 심할 겁니다. 그들은 적자에 남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그깟 자부심 챙겨 주다간 나라 망하겠다. 그리고 일 잘하는 놈들이 그놈들뿐이더냐? 이 나라가 얼마나 큰데. 구하지 못했을 뿐, 인재는 늘 나라에 존재한다. 짐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할 뿐이야.”
혈연, 출신, 성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자들이 넘쳐났다. 황자로 지내다가, 제도 내 저택에서 살게 되면서 태윤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여자라서, 사생아라서, 노비의 자식이라서. 고작 그 이유가 한 사람의 평가 기준 전부가 되었다. 태윤은 가끔 이 나라의 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들도 단지 운을 잘 타고 태어나, 멍청한데도 관리를 하고 있는데 왜 그들에겐 최소한의 기회도 주지 않으려 하는가?
그들은 두려운 것이었다. 최소한의 기회를 주게 된 순간, 자신들의 특권이 무너지리라고. 특권은 소수가 가져야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그걸 지키기 위해 악습을 유지해왔다. 그 악습이 전통이고, 선조들의 가치라면, 없어져야 마땅했다. 전통이라는 이유로 누군가가 기회조차 박탈당한다면 그건 전통이 아니었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알맞게 배치하는 건 너무 당연하고 기본적인 일이었다. 그것만 잘해도 천하는 적절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만드는 나라는 대단한 게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 최소한으로 굶어 죽는 걱정은 하지 않는 나라.
그게 태윤이 추구하는 나라였다.
“짐은… 짐 같은 사람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 너희들이 얼마나 능력이 뛰어난지 짐이 알고 있어. 그 능력에 맞게 대우를 해주고, 봉급을 주는 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태윤은 금군들의 어깨를 감쌌다. 금군들이 폐하, 라고 감격에 차 부르며 태윤에게 다가와 태윤을 부둥켜안았다. 그러다가 이제 황제인 태윤에게 무엄한 행동을 한 것을 깨닫고 서둘러 바닥에 엎드렸다. 귤을 한 손에 쥐고서 엎드린 모습이 웃겨서 태윤은 뒷짐을 지고 웃었다.
“폐하, 영원한 충성을 폐하께 바칩니다! 소신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폐하를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어서 일어나서 귤 먹어라. 귤은 오래 두면 무른다.”
하나하나 금군들을 일으킨 태윤은, 워낙 귀한 과일이라 먹는 방법도 모르는 금군들에게 몸소 귤 까는 시범을 보였다. 금군들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귤을 까먹었다. 덩치 큰 녀석들이 삼삼오오오 모여 귤에 환호하는 게 우습고 귀여워 태윤은 몇 번이고 웃었다.
태윤은 바구니를 직접 들고 태얼궁으로 갔다. 이 귤을 받고 좋아할 이세희를 생각하자 함박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귀한 귤을 받아 보기는 했을까. 태윤도 황자 시절에 귤을 두 번 정도 먹어본 게 다였다. 너무 귀해서 황제와 황제가 아끼는 애첩들만 먹을 수 있었다. 그나마 태윤이 먹을 수 있는 것도 사랑받는 아들이라 가능했다. 이 귤을 까는 방법을 알려주던 선황이 떠올랐으나, 금세 구름처럼 사라졌다.
태윤은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오늘은 조금 힘들었다. 돌아가면 세희 품에 안겨 힘들었다고 칭얼거려야지. 그러면 세희가 고생하셨다면서 어깨를 주물러주겠지. 손힘이 좋아, 뒷목이며 어깨를 주물러주던 게 꽤 좋았다. 생각만 해도 시원해지는 기분에 어흐, 하고 소리 내었다.
“어?”
그런데 태얼궁 앞뜰에 장신의 사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걸 보자마자, 태윤은 달리는 마차문을 벌컥 열었다.
“폐하! 폐하!”
태윤은 내관이 기겁하며 자신을 불러도, 마차 문을 열고서 이세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세희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태윤의 행동에 깜짝 놀라 “윤아!” 하고 불렀다.
“세희야! 짐이다!”
태윤의 돌발행동에 마차가 멈추었다. 태윤은 바구니를 한 팔로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거치적거리는 평복 하의를 잡고서 이세희를 향해 뛰었다. 이세희도 너무 놀라서 굳어 있다가, 달려오는 윤을 보고 두 팔을 벌렸다. 태윤이 오랜만에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이세희에게 안겼다.
“하하, 세희야! 이것 봐라, 귤이다! 귤 먹어 보았느냐? 응? 이렇게 실하고 좋은 귤은 처음 봤지?”
“윤아,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마차에서 얼굴을 내밀어?”
이세희는 귤보다 태윤이 다쳤을까 걱정이 되어 큰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윤은 이세희가 걱정하는 걸 알면서도, 귤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서 발을 구르며 바구니를 보여주었다.
“세희야, 귤 봐라. 너 주려고 짐이 제일 크고 좋은 것들로 골라왔다.”
“폐하, 이렇게 귀한 걸….”
태어나서 몇 번 보지도 못한 귤에 이세희가 말을 더듬었다. 황궁으로 끌려오지 않았다면 먹지도 못했을 귤이었다. 아란에서 직접 진상한 귤은 귤에 문외한인 이세희가 보아도 무척 좋았다. 고운 빛깔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이런 걸 받아도 될지 몰라 이세희가 당황하여 눈을 굴렸다.
“좋은 건 다 너에게 줄 거야.”
태윤이 화사하게 웃으며 속살거렸다. 이세희는 불쑥 들어오는 태윤의 고백에 멈칫했다. 윤은 바구니를 이세희에게 안겨주고는, 차게 얼어붙은 뺨을 감쌌다. 긴 머리카락도 차가웠다.
“이 추운 날 밖에서 왜 기다렸느냐? 안에서 기다리지. 짐이 추우니까 꼭 침전에서 기다리라고 했건만.”
어명인데 왜 듣지도 않냐고 태윤이 눈을 흘겼다. 이세희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보여주었다.
“폐하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밖에서 기다리면, 추운데….”
태윤이 안타까운 어조로 이세희의 뺨을 어루만졌다. 자신을 기다리느라 추위에 얼어붙은 이세희를 보자 마음이 안 좋았다. 이세희는 눈을 깜박이지 않고, 태윤의 조잘거리는 입술을 물끄러미 보았다. 세희야, 하고 제멋대로 부르는 입술이 유달리 예뻐 보였다.
참을 수 없었다. 이세희는 한 팔을 태윤의 허리에 휘어 감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태윤이 어, 하며 그의 상박에 파고든 순간, 이세희의 입술이 맞닿았다. 추위에 차가워진 입술이 입술에 닿고, 혀가 벌어진 입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갑작스럽고 농염한 입맞춤에 궁인들도 경악에 차 이세희를 보았다.
“하아…!”
태윤은 급작스러운 입맞춤에 당황한 듯 보여도, 이세희의 입맞춤에 따라가고 있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이세희의 얼굴 덕에 혀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희미한 빛 속에서도 보였다. 이세희의 붉은 입술이 오므라들면서 태윤의 입술을 빨았다. 태윤이 아, 하고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려 하자 팔로 단단히 태윤을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으읏….”
태윤이 두 손을 움직여 이세희의 어깨를 잡았다. 단순한 접촉에도 정욕을 느낀 이세희가 다급하게 아랫입술을 빨고, 깨물며 입안으로 혀를 넣었다. 두 혀가 넝쿨처럼 휘어 감기면서 타액이 주르륵 흘렀다. 두 사람 사이에 신음이 커졌다. 숨을 거칠게 내쉴 때마다 입김이 뿌옇게 흩날렸다. 추웁, 하고 타액을 빨아먹는 소리에 궁인들이 민망해져 고개를 돌렸다.
“하아, 하아….”
태윤이 숨을 몰아쉬더니, 이세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침전으로 갈까?”
태윤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었다. 흥분 때문이었다. 이세희는 옆에 있는 궁녀에게 어서 바구니를 가져가라고 일렀다. 궁녀가 허겁지겁 귤이 든 바구니를 챙기자, 이세희는 옆을 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귀한 귤이니 소중하게 가져가거라.”
“아, 맞아. 세희야, 귤. 귤 먹어야 해.”
태윤이 흥분에 취했어도, 귤에 집착하며 이세희의 소맷부리를 잡았다. 이세희는 태윤을 번쩍 안더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은 다른 게 먹고 싶어서요.”
“귤은 상하잖아. 빨리 먹어야 하는데… 무르는데….”
태윤이 귤 먹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도 이세희는 묵묵부답으로 태윤에게 입을 맞추며, 침전까지 걸어갔다. 격렬하고 달콤한 애정행각에 궁인들도 그만 허허 웃었다. 저렇게 좋다는데 누가 말릴까.
“아, 읏…!”
이세희가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문이 너덜너덜해졌다. 태윤이 놀라서 그의 목을 잡아도 이세희는 숨을 몰아쉬느라 바빴다. 이세희는 태윤을 침상에 눕히더니, 그 위에 올라타 입을 정신없이 맞추며 손을 움직여 평복을 술술 벗겼다. 언제 겪어도 재빠르고 능숙한 솜씨에 감탄이 나왔다. 단숨에 나신이 된 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세희의 매듭에 손을 대었다. 이세희는 태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더니, 열기가 돌아 붉어진 귓불을 만지며 말했다.
“즉위식을 하기 전에 암행을 다녀올까요?”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태윤이 이세희의 상의를 미숙하게 벗기며 물었다. 이세희는 끙끙거리며 옷 벗기는 게 귀여워서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뭔가 지는 기분이라, 태윤은 다급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발기해서 그런가. 아래는 아파 죽겠고, 손은 빨리 벗기고 싶은데 안 벗겨져 답답했다. 이세희는 태윤의 손에 모든 걸 맡기고서 느긋하게 태윤을 지켜보았다.
“폐하가 좋아하시는 곳에 신첩도 가고 싶어요. 폐하의 과거도 알고 싶고….”
“그래, 가자.”
“바다도 꼭 같이 가요, 폐하.”
“그래.”
이세희가 다정하게 웃었다. 상의를 벗겨가는 태윤의 손목을 잡고 내리누른 이세희는 양손에 깍지를 끼고서 고개를 숙였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미인의 얼굴에 윤의 눈이 멍해졌다. 이세희희의 달콤한 체취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발기는 더 심해져 아래가 지독하게 아파왔다.
“폐하랑 하고 싶은 게 산더미입니다.”
“나도…. 세희야.”
태윤은 이세희의 어깨에 이마를 대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사랑해….”
그 고백에 이세희는 눈을 감고 웃다가, 태윤을 품에 욱여넣었다. 덩치가 비슷해서 들어가지가 않는데도 와락 끌어안더니 태윤의 귀에 대고 밀어를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윤아.”
장막이 내려가고, 두 사람이 입을 끈끈하게 맞추었다. 추위로 얼어붙었던 몸이 서로의 온기로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너무 좋아.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이 들 만큼….
“하아, 아…. 세희야….”
태윤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이세희의 입술을 세게 빨아 당겼다. 저돌적이었다. 이세희의 도톰한 입술을 깨물고, 빨고, 그의 혀가 나가지 못하게 옭아맸다. 이세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입술에 잔떨림이 느껴졌다.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다. 아주 부드럽고, 감미로운 떨림이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흘렀다. 몸이 떨렸다.
“…으음.”
이세희의 고개가 틀어졌다. 그의 날렵한 콧날이 태윤의 코를 문질렀다. 좋아, 라고 중얼거리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벌어져 태윤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의 가지런한 치아가 입술을 깨물고, 스르륵 뒤로 물러났다. 이세희와 태윤의 입술은 긴 타액으로 연결되었다. 이세희는 혀를 내밀어 타액을 끊어내고 고개를 숙였다.
“하아….”
태윤은 눈을 반쯤 뜨고서 입안에 고인 타액을 느릿하게 삼켰다. 입에 넣어주면 정액이든, 타액이든 뭐든 삼키고 보는 착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삼킬 때마다 흐물흐물 풀어지는 눈동자가 예뻤다. 나 때문에 저리 된다는 게 이리 기분이 좋을 줄이야. 이세희는 간혹 태윤이 자신의 아래에 깔려, 흐느낄 때마다 더 울리고 싶다는 가학적인 감정을 느꼈다. 더 울리고 싶다, 더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 넌 내가 그렇게 해도 좋다고 할 거잖아.
이세희는 타액을 삼키느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태윤의 목젖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세희는 음흉한 속내는 숨기고서 태윤이 가장 사랑하는 미소를 지었다.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느슨하게 올려 치아가 보이는 미소였다. 태윤은 시각을 제외한 감각을 짓누르는 화사한 미소에 정신이 팔렸다. 긴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뽀얀 피부가 반짝반짝 빛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만개한 꽃처럼 사시사철 예쁜 이세희의 외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좋으시지요?”
그러나 이세희는 자신이 그어 놓은 선을 결코 넘지 않았다. 태윤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주고, 지켜주겠다고 맹목적으로 나서는 태윤에게 아픔은 주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니까.
“사랑하지….”
태윤은 좋아하냐는 물음에 본능적으로 사랑한다는 답을 흘렸다. 정말 자연스럽게 툭 나온 대답에 이세희는 눈을 깜박였다. 태윤은 열이 오른 눈을 깜박였다. 숨이 고르지 못했다. 쾌감은 아래에서 요동쳤고, 이제 참기 힘들었다. 이세희의 시선만 닿아도 아래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널 만나고 난 이후로….”
태윤은 이세희를 빤히 보았다. 이세희가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태윤이 이세희를 보며 찬란하게 웃었다.
“매일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야.”
그리 말한 태윤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세희는 자신의 입술에 직접 입을 맞추는 태윤을 보다 눈을 느리게 감고 웃었다. 행복했다. 어떤 표현으로도 이 감정을 더 표현할 수 없었다. 매일 자신을 예쁘다, 사랑한다 말해주는 서방님이 계시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가족들이 있었다. 아침엔 태윤을 챙겨주고, 저녁엔 다녀온 태윤을 살펴주는 하루하루가 소박하고 소중했다. 입을 맞춘 이세희는 손을 움직여 태윤의 옷을 벗겼다. 그의 손은 속전속결이었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면서 사랑에 절여진 밀어를 속삭였다.
“폐하야말로 신첩에게 전부세요.”
이세희는 눈을 파르르 떨면서 떴다. 어느새 태윤은 옷을 벗은 상태였다. 하의의 매듭까지 풀어져, 누우면 바로 나신이 될 상황이었다. 언제 겪어도 소리 없이 빠른 이세희의 손놀림에 태윤은 머쓱하게 웃었다. 자신을 기다리려고, 예쁘게 갖춰 입은 이세희에 비해 본인은 나신에 가까워 부끄러워졌다.
“매일 예뻐해 주시고, 사랑해 주세요.”
이세희의 손이 뺨에 닿았다. 태윤은 이세희에게 홀려 “응.”이라고 대답했다. 어떻게, 저 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내가 가지기에 아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움이 흐르는데. 세희는 세희라서 어여쁘고 사랑스러웠다. 보기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사람이었다.
“응….”
말보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그의 진실한 감정에 이세희는 참을 수 없는 벅참을 느꼈다. 이세희는 태윤의 뺨을 감싸고 연신 입을 맞췄다. 태윤의 눈꺼풀, 불그스름한 눈가, 콧등, 입술, 뺨. 이세희의 저돌적인 입맞춤에 태윤이 어깨를 흔들어대며 웃었다.
그 상태로 조금씩 상체가 넘어갔다. 침상에 널브러지게 눕자, 이세희가 위에 올라탔다. 그가 입술을 가볍게 물고 빨더니,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요동치는 맥박 위에 그의 온기가 달라붙자 가슴이 뛰었다. 입안에 열이 고였다.
“폐하, 오늘은 신첩이 예뻐해드릴게요.”
그리 중얼거린 이세희가 목덜미의 핏줄을 따라 내려왔다. 추웁, 춥, 하고 탄력적인 살결을 빨아들이는 입술이 느껴졌다. 청각은 유독 예민해져 그의 숨소리에 반응했다. 그가 흥분하는 게 느껴졌다. 청각에 몸이 쾌감으로 달궈지자, 온몸의 감각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이세희가 하는 행위마다 미모사처럼 반응하고 부르르 떨었다. 이세희는 경직되어 움찔거리면서 떠는 태윤이 귀여웠는지 피부를 입술로 맛보면서 웃었다.
“으읏… 응…!”
뜨겁고 물기가 많은 숨결이 유두에 닿았다. 이세희가 하도 물고 빨아, 그 부근은 이미 충분히 말랑말랑했고 뜨거웠다. 다른 부분에 비해 유독 불그스름했다. 이세희는 왼쪽 유두를 유륜과 함께 한꺼번에 빨아들였다. 혀가 닿기만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해졌다. 숨을 잠시 참은 태윤이 고개를 돌리며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이세희가 이로 유두를 깨물었다.
“아아!”
태윤의 눈이 질끈 감겼다. 고개가 젖혀지고, 보료가 육체에 눌리고 쓸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세희가 웃음을 터트리며 유두를 쪼옵, 쫍 소리 나게 빨았다. 축축하고 온기가 도는 점막이 유두를 감싸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입술은 너무 뜨거워 닿기만 해도 아래가 저렸다. 어느새 자지는 열이 올라, 아랫배에서 꺼덕였다. 태윤이 다리를 벌린 채,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흐읏…. 으, 세, 세희야, 그만….”
“신첩이 예뻐해드리는 게 싫으세요?”
이세희가 열이 오른 눈을 깜박이며 칭얼거리듯이 말했다. 태윤은 할 말이 없어져 고개를 늘어뜨리고서 신음을 흘렸다. 요새 유두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이세희의 숨결만 닿아도 머리가 멍해졌다.
아, 빨리 세희가 안으로….
“세희야, 어서….”
차라리 이세희가 안으로 들어와, 간지럽다 못해 저릿저릿한 내부를 마구잡이로 쑤셔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이 너무 간지러웠다. 해결되지 못한 쾌감이 내벽을 괴롭혔다. 길고 단단하게 들어와 느끼는 지점을 찔러주면, 내벽은 그걸 조이고 빨아들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괴로웠다.
이세희가 준 쾌감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몸은, 그의 체취만 맡아도 반응했다. 태윤이 고개를 돌리고 애원하듯 이세희를 보는데, 그는 입안에 고인 타액을 한 움큼 삼키더니 느리게 웃었다.
“어떻게 제가 서방님을 아프게 하나요?”
“하, 하지만….”
안이 너무 간지럽다는 말을 못하고 태윤이 얼굴을 찡그렸다. 언제는 왜 그리 보채냐면서, 바로 넣어줬으면서. 자기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조절하는 이세희가 조금 짓궂어 보였다.
“제가 안 아프게 해드릴게요. 걱정 말고 계세요.”
언제는 형이라고 했다가, 이제는 완벽하게 애첩으로 행동하는 이세희를 보며 태윤은 포기했다. 자신은 이세희를 이길 수 없었다. 애초에 이긴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 자긴 이세희의 것이었으니, 그가 마음대로 하는 게 맞았다.
“으… 응…! 아, 싫…!”
그래서 마음 놓고 이세희가 뭘 하든 기다리는데, 갑자기 허리가 들렸다. 몇 번 당해본 자세라 태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가장 잘 느껴서 싫어하는 체위가 이것이었다. 입술이 닿든, 자지가 들어오든…. 태윤은 이때마다 자지러지게 느껴서 기절 직전까지 갔다.
“아, 그만!”
태윤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외쳤지만, 이세희는 어느새 무릎 뒤에 손을 넣고 눌렀다. 허리가 붕 떴다. 오로지 등으로만 버텨야 하는 자세는 태윤이 수치스러워했다. 회음부가 벌어져 그 부근이 벌어지는 게 너무 잘 보였기 때문이다.
“흐윽, 이, 이건….”
태윤이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흘렸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세희는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이세희의 부드러운 입술이 회음부에 닿고, 질척이는 혀가 느껴지자 태윤이 자신도 모르게 보료를 꽉 움켜잡았다.
“읏, 응…. 으읏…!”
허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세희의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태윤의 동글동글한 고환을 머금었다.
“아앗…!”
태윤의 손등 위로 힘줄이 올라왔다. 고문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강한 쾌감이 몸을 때렸다. 결코 막을 수 없는 쾌락에 입이 벌어지고 타액이 주르륵 흘렀다. 눈가는 열이 올라 뜨거웠다. 이세희는 양쪽 고환을 입에 넣고서, 혀로 굴렸다. 입을 벌려 떼어내자 타액과 입술이 연결되었다.
“좋으세요?”
“으응….”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를 애타는 소리가 나오자 이세희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의 입이 벌어지더니, 어느새 빠끔거리기 시작한 구멍에 닿았다.
“아아! 앗!”
혀가 퉁퉁 부은 주름을 쓸었다. 태윤의 눈이 크게 뜨이고 방울방울 맺혔던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세희의 혀 때문에, 구멍에 맺혔던 타액도 살결을 타고 흘렀다. 그 감각이 어찌나 간지럽고 야릇하던지, 태윤은 울음을 크게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그, 그냥 해줘… 이상해…”
“으음, 좋으시면서….”
이세희가 회음부를 연신 빨아대며 웃음을 흘리고 중얼거렸다. 혀가 구멍 주변을 빙빙 맴도는 게 느껴졌다. 애가 탔다. 뱃속에 열이 고였다. 태윤이 겨우 눈을 떠 이세희를 바라보는데, 그가 보란 듯이 웃었다. 갑작스레 보이는 눈웃음은 샛별 같았다. 반짝거리고, 예뻤다. 태윤이 멍하니 이세희를 보는데, 그가 잠시 고개를 떼어냈다. 붉게 부은 회음부와 연결된 타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으읏, 제발, 그만…!”
그게 무엇인지, 알아챈 태윤이 울었다. 이세희의 입가가 흥건했다. 추웁, 춥, 소리 나게 구멍을 빨아댔으니 입술 위와 아래가 온통 타액으로 번들번들했다. 하지만 이세희는 멈추지 않고, 눈을 감고 태윤의 구멍을 혀로 쓸었다. 아주 느리게, 혀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질척임에 태윤이 허리를 비틀었다.
“으, 모, 못 참겠… 앗!”
태윤이 고개를 늘어뜨리고 헐떡였다. 유독 민감한 구멍 주변에만 맴돌자 미칠 것 같았다. 안이 뜨거웠다. 이 열을 터트려줄 게 필요했다. 이세희는 태윤의 아랫배에 팔을 두른 채, 놔주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긴 검은 머리카락이 태윤의 뭉개진 시야에서 흔들렸다.
태윤은 손을 뻗었다. 이세희가 입을 벌려 구멍 주름을 억지로 빨아들일 때였다. 태윤의 손이 이세희의 머리에 닿았고, 태윤은 느릿하게 이세희를 쓰다듬었다.
“예뻐….”
이세희의 입이 멈칫했다. 후우, 후우, 하고 거칠고 뜨거운 숨을 몰아쉬던 이세희가 구멍에서 입을 떼어냈다. 회음부, 고환, 음모에만 장마가 온 듯 흠뻑 젖었다. 이세희의 입가는 아까보다 더 젖어, 물을 한 사발 마신 사람 같았다.
이세희는 무심코 흘리지 못한 타액을 삼켰다. 고개를 들자, 긴 머리카락이 뒤로 젖혀지며 이세희의 달아오른 뺨이 보였다. 눈두덩이가 빨갰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 좋아해요.”
이세희가 눈이 마주치자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첩에게는 폐하뿐이에요.”
남들이 다 싫어해도 좋았다. 악첩이라 부르고, 죽어야 한다고 저주를 퍼부어도 윤이만 있다면 그곳이 저승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윤이 날 지켜줄 거니까. 그리고 자신 또한, 윤을 지켜줄 것이니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는 한마디도 싫다는 소리 없이, 그저 웃어주면서 손을 잡아주는 윤이 있었다. 윤은 자신의 배를 감싼 이세희의 손등을 다독였다. 그의 눈이 괜찮아, 라고 말해주었고, 그의 체온이 자신의 떨림을 멎게 해주었다.
“폐하….”
이세희는 그의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천천히 발기한 성기를 회음부에 문질렀다. 혀로 충분히 구멍을 풀어놓아, 귀두를 슬쩍 눌렀을 뿐인데 쑤욱 안으로 들어갔다. 뭉툭하고 두꺼운 귀두가 주름을 펼치며 안착하자, 태윤은 숨을 멈추었다. 이 순간은 조금 고통스러웠다. 민감한 부근에 두꺼운 게 꽂히고, 들락날락할 때면 장기가 위로 쏠리는 느낌이라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도 세희가 주는 것이니…. 태윤은 다른 의미로 차오르는 배를 견디며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하아….”
이세희는 아주 천천히 자지를 넣었다. 붉은 내벽의 주름이 펴지고 있었다. 자신의 귀두로, 안을 담금질했다. 힘이 들어간 내벽이 자지 모양에 맞게 펼쳐지는 이 감각은 언제 겪어도 좋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 이세희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태윤의 배를 만졌다. 단단했다. 근육으로 뭉쳐진 배는 언제 만져도 사내다웠다. 이런 자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밑에 깔려 흐느낄 때면 걷잡을 수 없는 정신적 쾌감이 자신을 사로잡았다.
“드디어 제 집으로 왔어요, 서방님….”
태윤의 안에 들어왔다. 날 반겨주는 극락이 여기였다. 이세희는 눈을 감고 느릿하게 웃었다.
“읏…!”
“좋으세요?”
이세희가 허리를 얕게 움직였다. 선홍색 고환이 반쯤 눌릴 때까지, 깊숙이 들어온 상태로 느끼는 부근을 찔렀다가, 빠져나가는 정도였다. 그때마다 확 커지는 쾌감에 태윤은 눈을 감고 숨을 헐떡였다.
“응…. 좋아….”
태윤은 눈을 겨우 뜨고서 이세희를 보았다. 손을 뻗자, 이세희가 기다렸다는 듯 안겨왔다.
“서방님이 좋으셔서 저도 좋아요.”
태윤은 하아, 하고 묵직한 숨을 터트리며 이세희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래….”
태윤이 이세희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팔뚝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이 좋았다. 한여름을 끌어안은 기분에 이세희는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처음 윤을 만났던 한여름이 기억났다. 그때와 같은 태윤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이세희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 아앗, 앗…! 아흑!”
이세희는 태윤이 사랑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그 감각이 이성을 흩뜨려 놓았다. 이세희는 아무리 파고들고, 태윤의 안을 쑤셔도 만족되지 않는 감정에 허리를 세게 움직였다. 귀두가 완전히 밖으로 나오고, 안에 퍽 하고 들어가 태윤의 몸을 흔들어댔다. 장기가 자지 때문에 위로 쏠리는 압박감에 태윤은 고개를 젖혔다.
“아, 좋아…!”
하지만 그때마다 배꼽 아래에서 퍼지는 이 쾌감에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이건 분명히 좋아서, 몸이 안달 난 것이었다. 태윤은 이세희의 자지가 푹, 푸욱, 하고 꽂힐 때마다 본능적으로 내벽에 힘을 줘 이세희의 자지를 빨았다. 이세희는 숨을 몰아쉬며 태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아래에 깔려, 위아래로 흔들리는 태윤은 몹시 예뻤다.
“저도….”
이세희는 태윤을 보고 예쁘게 웃었다.
“저도 좋아요, 폐하.”
흔들리는 시야 속,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웃는 이세희를 보고 태윤은 눈을 감았다. 입술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이 미소 또한 이세희를 닮아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화비설화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