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2. Discovery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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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은 K엔터매거진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오늘 써야 하는 기사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동행한 사진 촬영 기자에게 선별한 사진 공유를 부탁하고는 다음 일정을 계산해 보았다. 한 시간 내로 마무리해야지 인터뷰에 늦지 않을 텐데. 그때 후배 기자가 다가왔다.
“다림 선배, 부탁하신 월드엔터 홍보팀 연락처랑 보도자료 메일로 전달해 놨어요.”
“어, 땡큐. 내가 다음에 밥 쏠게.”
“뭘 이 정도 가지고요.”
“난 빚지고는 못 살거든.”
다림은 한쪽 눈을 찡긋하곤 자리에 앉았고, 미소 지으며 돌아서던 후배 기자는 뭔가 또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칫했다.
“맞다, 선배. 부장실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나 기사 써야 하는데.”
“부장님한테 그렇게 말해 보세요.”
다림은 순간 불안한 기분이 들어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부장실로 향했다. 상사인 안경미 부장은 평소의 예민한 눈빛을 한껏 누그러뜨리고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다림을 다정히 맞이했다.
“어서 와, 다림. 오늘 일정 뭐였어?”
‘뭐야. 왜 저래.’
다림은 상한 음식을 잘못 집어 먹은 사람처럼 거북스러움을 느꼈다.
“텐보이즈 쇼케이스요. 지금 기사 써야 해요.”
그 말에 안 부장은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빠르게 입력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거 박 기자에게 넘겼어. 오후에 김수혜 인터뷰도 있었네? 그것도 송 기자한테 넘기고.”
갑작스러운 업무 지시에 당황해할 동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물론 자신의 당혹스러움은 따로 그려 볼 필요도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쇼케이스 보느라 이 기사 못 봤겠네.”
안 부장이 건넨 태블릿 피시에는 모 연예 전문지의 헤드라인이 크게 떠 있었다.
―1세대 아이돌 〈STORY〉 재결합? ……온라인 탑골공원 최다 언급, 소환 1순위
굵직한 글자의 헤드라인을 읽은 다림의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래졌다. 안 부장은 곧바로 태블릿을 빼앗고는 다림이 낭비할 시간을 줄여 주었다.
“간 보기 낚시 기사야. ‘과연 재결합할까요?’ ‘안 될걸?’ 자문자답. 재결합에 대한 명확한 실체가 없으니 다들 기사 써 봤자 뭐가 더 안 나오는 거야.”
침까지 튀기며 이 말을 하는 의도를 알지 못해 다림은 아무 말도 없이 멀뚱히 자신의 상사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안 부장은 뭔가를 기다리듯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길게 누이고 다림의 시선을 마주했다.
“너는 그 실체에 근접했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안 부장은 다림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박 기자한테 다 들었어. 다림. ‘STORY’ 심층 기사 계속 준비해 왔다고.”
‘박 기자 이놈!’
다림은 난처한 표정을 숨기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거, 그냥 제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혼자 파 보던 건데요. 진도 별로 못 나갔어요. 근접은 무슨.”
“그래도 손 놓고 있던 인간들보단 건진 게 있겠지?”
“그리고 잊고 계시나 본데, 그거 예전에 제가 준비 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라고 하신 거 다름 아닌 부장님이셨어요.”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결국 계속했네.”
다림은 이번엔 숨기지 않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 모습에 안 부장은 화내긴커녕 미소를 지으며 책상에 팔을 기댄 채 몸을 내밀었다.
“내 말 곧 죽어도 안 들어 처먹는 다림이 언젠가 한 건 할 줄 알았어.”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부장의 말에 다림은 불안함이 더 커졌다. 보통 자신을 칭찬하는 경우는 즉 일거리 폭탄을 받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다른 거 다 집어치우고 ‘STORY’ 심층 기사에 올인해.”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라면서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잖아. 걔네 대표곡들이 모든 음원 순위에서 역주행 중이야. 그땐 아무도 안 찾을 때 너 혼자 삽질한 거였지만 지금은 니즈가 생겼다고.”
어찌 보면 여태 단 한 번도 재결합하지 않은 ‘STORY’에게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껏 음원 순위 역주행은 꽤 많은 나비효과를 일으켜 왔다. 언제부턴가 대중의 관심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로 자리 잡은 건 물론, 그 덕분에 지나간 가수들의 재평가와 제2의 부흥기가 시작되곤 했다.
최근엔 각종 방송사에서 동영상 공유 웹사이트 ‘유뷰(UVIEW)’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과거 영상들을 고화질로 업로드 했고, 대중들은 더욱더 생생하게 그 시대의 현장감을 접할 수 있었다.
STORY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한때의 들썩거림으로 끝날 분위기가 아니었다. 거기다 복고 열풍에 기대어, 지나간 가수와 명곡을 재발견한 예능 프로그램인 ‘롱타임노송’이 높은 시청률로 시즌제가 확정된 것도 시너지 효과를 냈다.
다만 이번 경우에는 상대가 상대인지라, 나비의 날갯짓이 과연 태풍을 일으킬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그 상대를 누구보다 오래 연구한 다림이 단호하게 말했다.
“니즈가 생겼더라도 그쪽은 똑같을걸요. STORY는 대중의 관심에 휘둘리는 팀이 아니에요. 기자들한테 새로운 떡밥 하나도 안 흘려요.”
“꼭 새로운 떡밥 아니어도 좋아. 재결합까지 안 가도 과거부터라도 파 보자고. 팀 결성 계기, 활동 비화, 해체 사유 등등 묵은 떡밥 많잖아?”
“더군다나 이제 음원 순위 역주행은 새로운 일도 아니고요. 공식 해체한 지 12년 된 팀의 비하인드가 지금 먹힐 거라고 보세요?”
“그럼 넌 그걸 왜 기사로 쓰려고 했던 건데?”
“말씀드렸잖아요. 개인적 관심이라고.”
“어쩌면 네가 선구안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지금 대중들은 궁금해해. 다른 1세대 아이돌들과는 달리, 꽁꽁 비밀에 싸여 있는 팀이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방송사가 ‘STORY’로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왔다.
“그동안 복고다 뭐다 하며 90년대 가요계 소환될 때마다 예외로 남은 게 이 그룹뿐이야. 금단의 열매나 다름없는 영역이었는데, 이제 그 열매를 따는 사람이 승자인 거지!”
‘무슨 승자씩이나.’
다림은 열변을 토하는 안 부장을 속으로 비웃었지만, 승자 운운하는 부분만 빼면 그동안 자신의 주장과 일맥상통하긴 했다. 그동안 다들 그 주장을 무시했을 뿐.
“어차피 시간 지나서 탑골공원 열풍 끝나면 네가 가진 그 자료 다 나가리잖아! 이때 털어야지!”
그 말도 맞았다. 아무리 개인적 관심으로 준비한 기사일지언정, 대중의 이목이 쏠렸을 때 터뜨려야 의미가 있지. 이런 기회가 또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다림이 망설이는 듯 아무 대꾸도 안 하고 있으니 안 부장은 결국 자신이 먼저 카드를 꺼냈다.
“조사원이랑 보조할 수 있는 수습 붙여 줄게. 그리고 내 라인도 공유해 주고.”
“부장님 라인이요?”
“내 나이 보면 각 딱 안 나와? 그때랑 활동 시대 겹친다고. 그 당시 매니저나 스탭 중 아직 연락하는 사람들 있고…….”
그 말에 다림은 반가움보다 분노가 먼저 일었다.
“잠깐만요, 부장님. 그걸 이제야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야! 내가 너한테 내 라인 다 공개할 의무 있니?”
다림은 배신감에 뒷골이 당겼다. 사수 생활부터라면 벌써 5년째인데, 이럴 수 있나.
“저 혼자 겁나 삽질하는 거 다 아시면서!”
“걔네 기획사에서 워낙 단도리를 심하게 해서 얼마나 건질 수 있을지 몰라. 내가 괜히 얘기 안 했겠니?”
하긴 그렇다. ‘STORY’의 기획사였던 SS엔터테인먼트에는 아직도 리더인 원태휘가 대표이사 겸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아무리 12년 전 해체한 팀이라고 해도, 이 그룹은 SS에서 관리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긴 작업하는 데 조금 걸릴 것 같으니, 다른 라인부터 잡아 봐. 계획 있어?”
이제야 이야기가 좀 진행될 거 같아 다림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제 스타일 아시죠? ‘주변 지인 취재 백 번보다 당사자 취재 한 번이 낫다.’ 주의라는 거. 본격적으로 할 거면 멤버들부터 만나야죠.”
“리더 원태휘부터?”
“원태휘는 제일 어려울 거라는 거 아시잖아요.”
“제일은 아니지.”
부장의 말에 다림은 취재 대상으로 염두에도 두지 않은 멤버 한 명을 떠올리고는 동의의 의미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를 제외하더라도 리더 원태휘는 제일 공들여서 작업해야 겨우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한 멤버이다. 만난다고 해도 그의 입에서 STORY에 대한 언급을 끌어낼 수 있을지는 그다음 문제이고.
“그럼 한강?”
“그룹 활동 당시 이름은 리버였죠. 연기 활동 중이라 언론 접촉이 그나마 쉬운 편인데, 얼마 전 ‘대재벌의 첫사랑’이 종영하고 지금 포상 휴가 갔어요.”
“계오은은?”
“요즘은 가수 활동보다도 한국예대 보컬과 교수로 강의에 더 집중하고 있어서 접촉이 쉽진 않아요. 인터뷰 성사만 된다면 꽤 많은 걸 건질 수 있는 멤버인데. 워낙 다혈질이라, 방송에서도 살짝만 자극하면 솔직하게 막말 터뜨리거든요.”
“자타공인 아가리 파이터였잖아. 또 영롱과 사이 안 좋다는 소문도 돌았고.”
“근데 최근엔 원태휘가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는지, 인터뷰 자체를 잘 안 해요. 그나마 제일 쉬운 멤버가…….”
“역시 이설민인가?”
“그렇죠. 방송 활동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고, 사업도 이것저것 많이 진행 중이고. 요즘 방영 중인 ‘골목길 카페’도 화제고요.”
안 부장은 다림의 말을 듣는 동안 태블릿 피시로 인터넷 창을 몇 번 넘기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들여다봤다.
“이설민이 최근 인터뷰에서 자기 사업 중에 제일 애정이 가는 게 막걸리바 사업이라고 했네. 연예인 사업 관련으로 인터뷰 주제 잡아서 컨택해 봐. 되도록 본인 막걸리바에서 진행하는 취중 인터뷰로. 분위기 편하게 풀어 줄수록 호의적인 답변이 나오겠지.”
‘오랜만에 술 좀 마시겠네.’
다림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는 부장실을 나섰다. 부장 앞에선 삐딱하게 대꾸하긴 했지만 혼자서는 막막하던 기획 기사가 강력한 추진력을 얻으니 기분이 한결 후련했다. 그러니까 진작 좀 들어주지! 그때 문을 밀고 나가려던 다림을 부장이 불러 세웠다.
“그나저나 차영롱은 어떻게 할 거야? 계획 있어?”
안 부장의 말에 다림은 문손잡이를 쥔 손으로 초조한 박자를 탔다. 솔직히 말하면, 가장 자신 없고 아무 계획도 없는 게 바로 차영롱이었다.
이 인간은 도무지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했다. 가족들, 지인들 중 그 누구도 차영롱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멤버들은 번번이 그에 대한 언급을 함구했다.
차영롱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면 거의 탐사보도 급으로 팀을 꾸려야 할 판인데, 고작 한물간 연예인 한 명 찾는데 그런 수고를 들일 이유가 없었다. 결국, 다림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도나 하세요.”
어이없어하는 표정의 안 부장을 뒤로하고 다림은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착하게 살았다면 영롱의 소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겠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하늘에서 벼락 맞을 확률과 비슷했다. 소위 말하는 기레기 생활이 몇 년인데.
자기 자리로 돌아온 다림은 부장실에서 무슨 얘기를 그리 오래 했냐는 동료들의 질문 공세를 무시하고는 털썩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허공을 응시하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열쇠로 잠가 놓은 책상 서랍 맨 마지막 칸에서 자료들이 담긴 서류철을 꺼냈다.
차영롱의 행방을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 다른 자료들은 다 디지털로 자료화 했지만, 이것만은 불가능했다. 다림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안 되겠다 싶어 서류철과 함께 가방을 들곤 사무실을 나섰다.
근처에 있는 공원까지 나와 벤치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류철을 펼쳤다. 갖가지 프린트와 메모들 사이에서 작은 크기의 빨간색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다림이 STORY의 심층 기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나 다름없는, 편지의 겉면엔 손글씨로 ‘영롱이가’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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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기자님? 안녕하세요.”
설민은 막걸리바의 안쪽에 있는 룸에서 다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웃음이 기본으로 장착된 듯한 그의 부드러운 얼굴은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어색함의 벽을 허무는 힘이 있었다.
방송에서 볼 때마다 그렇게 느끼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가 왜 성공한 사업가이자 방송국에서 선호하는 연예인이 됐는지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설민은 다림이 만나는 사람 백이면 백 전부가 건네는 인사말인 ‘기자와 딱 어울리는 이름이시네요’라고 말하며, 다림과 사진 기자에게 차례로 악수를 했다.
“음주 인터뷰 정말 오랜만이다. 안주는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저희 가게에서 제일 잘 나가는 거로 준비했어요.”
“감사해요. 보내 드린 사전 질문지 읽어 보셨죠?”
“네. 그런데 질문지에 없는 질문 나오는 게 더 재밌잖아요.”
설민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무지 면티 위에 포근한 느낌의 가디건을 걸친 그는 최소한의 스타일링으로 깔끔한 이미지를 잘 살렸다. 그러면서도 편안한 취중 토크의 컨셉을 충실히 맞추었고.
모던하면서 편안한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막걸리바 벽면을 배경으로 간단한 사진 촬영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초반에는 미리 얘기된 대로 15년 차 방송인이자 성공한 연예인 사업가 이설민에 초점을 맞춘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그는 사람을 워낙 좋아하고 술자리도 좋아하다 보니 지인들과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 막걸리바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다림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연예계 생활을 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람에 지치거나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10대 때 아이돌로 데뷔한 설민 씨가 그렇게 말하니 특별하게 들리네요.”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요? 저도 그런 걸 안 겪은 건 아닌데 나쁜 기억은 빨리 잊으려고 해요. 그리고 좋은 추억을 하나라도 더 만들려고 하죠. 이거 너무 정석적인 대답인가? 재미없죠?”
설민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다림은 짐짓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STORY 시절의 경험은 어떻게 남아 있는지 궁금해요.”
여기까지도 사전에 준비된 질문이었다. 이런 질문은 아이돌 출신 연예인들에겐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곤 했으니, 그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즐겁고 재밌었고. 이런 저를 있게 해 준 시작이었죠. 나쁘게 남을 이유가 없어요.”
또 정석적인 대답. 역시 프로 방송인이야. 다림은 예의상 싱긋 웃으며 막걸리로 입을 축이려 잔을 들었다.
“제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기자님도 저희 팬 세대일 거 같은데. 혹시 팬 아니었어요?”
예고 없이 훅 들어온 질문에 순간 막걸리를 입 밖으로 뿜을 뻔했다. 반은 틀리긴 했어도, 그의 눈썰미는 나름 예리했다. 내심 불안해졌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 말했다.
“진짜 죄송한데 전 한국 가수 안 좋아했어요. 팬이었다면 이렇게 차분히 인터뷰하고 있겠어요?”
하긴, 그렇겠네요! 설민은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림은 마저 막걸리 잔을 비우며 힐끗 눈치를 살폈다. 그가 던진 말로 인해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으나 인터뷰에 방해가 되니 바로 그 생각을 지워야만 했다.
동석한 사진 기자는 인터뷰 장면까지 찍고 주요 촬영을 다 마친 뒤 다음 일정 때문에 먼저 자리를 떴다.
단둘이 남게 되자 다림은 설민이 데뷔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자취를 성심성의껏 조사해 온 만큼 일반적인 인터뷰에서 묻지 않을 질문들을 던졌다. 그러면 보통 인터뷰이는 그 정성에 감동하며 마음을 활짝 열기 마련이니까.
역시나 꼼꼼한 사전 조사에 감동했는지 설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신나게 쏟아 냈다. 물론 술기운도 한몫했고. 그중에 다림이 원하는 내용은 단 1그램도 없었다. 그럼에도 진짜 목적을 위해 인내심을 발휘하여 들어주었다.
한바탕의 대화가 휩쓸고 지나간 뒤 잠시 소강상태가 되어 안주에 집중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다림은 설민이 추천한 메뉴를 입에 넣고는 맛있다는 칭찬과 함께 조심스레 화제를 옮겼다.
“요새 ‘온라인 탑골공원’이 유행이에요. 그러면서 STORY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는 거 아세요?”
“저도 얘기 들었어요. 과거랑 현재 사진 비교해서 올린 짤 같은 것도 보고. 어휴, 전 지금이 너무 늙어 보여서 민망하던데요.”
“겸손하시네요. 다들 너무 잘 보존됐다고 난리던데.”
그래도 다른 멤버들에 비해 팀 언급에 대한 가드가 낮은 편이어서 그런지 의도적인 질문에도 거부감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얼굴은 취기로 상기되었고 목소리도 한 톤 올라간 것이 기분이 꽤 좋아진 듯했다.
“다른 멤버들은 모르겠는데, 저는 오래 보아온 팬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킨다 생각하고 관리하고 있어요.”
“혹시 ‘우리 오빠 너무 망가졌어!’ 이런 소리 듣기 싫어서요?”
“네. 일반 대중들에게야 뭐, 제가 무슨 유명 배우도 아니고 그냥 방송 보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 한 명이잖아요. 아니면 이런저런 사업 많이 하는 사람? 그 정도이니까. 아, 지금은 또 새로 준비 중인 사업도 있거든요.”
오호, 이것 봐라. 설민은 매끄럽게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재주가 있었다. 정신 차리고 있지 않았다면 물 흐르듯이 ‘어떤 사업인가요?’라는 반응이 튀어나올 뻔했다. 다림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기에 편한 분위기를 끌고 가려고 예의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사업 이야기는 잠시 후에 들을게요. 저희 온라인 탑골공원에서 불고 있는 STORY의 인기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순간, 막걸리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 있는 설민의 눈빛이 생경하게 바뀌는 걸 느꼈다. 이 인터뷰의 목적을 확실히 알아챈 눈치였다. 취한 줄 알았는데 아직 상황 파악할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망했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빙빙 도는 얘기만 하다가 인터뷰를 끝낼 수는 없으니까.
“재결합을 원하는 팬들의 반응도 모르실 리 없을 것 같은데요.”
“기자님이야말로 저희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모르실 리 없으셨을 것 같은데.”
조금 전 사람 좋은 웃음은 간데없고 사무적이고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는 설민은 낯선 사람 같았다. 방송에서도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조사 많이 하셨으면, 재결합 언급은 절대 안 한다는 저희 팀 철칙 잘 아실 텐데요.”
“그 철칙, 지금까지 모든 매체가 더 파고들지 않고 지켜 줬잖아요. 그렇다면 그 이유만이라도 알려 주는 건 어때요?”
“인터뷰는 충분히 한 것 같네요. 그럼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
마지막까지 예의를 지키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첫인사 때와는 온도 차이가 적도와 남극 수준이었다. 다림은 자리를 뜨는 뒤통수를 향해 준비해 둔 최후의 무기를 꺼냈다.
“그럼 재결합 언급 안 하고 차영롱 얘기만 하는 건요?”
그 뒤통수가 움찔한 건 정확히 ‘차영롱’ 이름 석 자를 언급한 순간이었다. 다림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걸 더더욱 확신했다. 설민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뒤돌아보았지만, 그 표정 아래에서 묘한 감정이 읽혔기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보네요.”
재결합에 대한 언급 없이 차영롱 얘기만 하는 건 의미 없다는 뜻인가? 그 반응으로 다림은 자신의 가설에 점점 심증을 굳혔다.
‘해체의 이유와 재결합 가능성의 중심엔 차영롱이 있다.’ 이것이 그동안 다림이 STORY를 조사하며 세운 가설이자 추측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떠보기로 했다.
“차영롱과 관련된 그 소문, 사실이에요?”
설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썹을 위로 추어올린 그의 표정이 ‘그 많은 소문 중 어떤 거?’라고 묻고 있는 듯했다.
동시에 다림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해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래도 K엔터매거진 명함을 들고 왔는데, 설마 아무 근거도 없이 빈손으로 이런 치밀한 짓을 벌이는 하수는 아닐 테니까.
설민이 입을 다물고만 있자 다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완전 거짓말은 아니니까.
“제보가 있었어요.”
“영롱이에 대해서?”
꽤나 빠른 반응 속도였다. 그 속도에 최소한 설민과 영롱 사이에 악감정은 없음을 알아챘다. 나쁜 감정이 남아 있다면 관심 없거나 듣기 싫어하면 그만인 일이다.
설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알코올 탓인지 한층 복잡한 감정으로 뒤흔들리고 있었다.
“영롱이 소식 들은 거 있어요?”
설민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떠보기 작전은 더는 불가능했다. 그 역시 영롱의 소식을 접하지 못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으니까. 물론 생각보다 뻔뻔한 거짓말쟁이일 수도 있지만 그는 분명 새로운 정보를 기대하고 있었다.
다림은 결국 양심에 손을 들고 말았다. 취재도 중요하지만 그에게 책임질 수도 없는 헛된 희망을 줄 순 없었다.
“아쉽게도 없어요. 전 설민 씨한테 듣고 싶었는데요.”
“그럼 제보는?”
“예전 얘기예요. 해체 당시 멤버들 사이에 금전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제보요.”
설민은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 터무니없는 제보까지 다 받는 거 보면 꽤 절박하신가 보네요. 그동안 저희를 둘러싼 뜬소문이 얼마나 많았는데 겨우 그런 거라니. 그런 쪽으로는 전혀 문제없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고요.”
굳게 무장했던 설민의 마음은 술기운과 영롱의 얘기에 무너진 게 확실했다. 그가 언성을 높이고 쏟아 내듯이 말하자 다림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속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람들은 —셜록 홈즈가 말했던가— 진실을 순순히 말해 주기보다는 어떤 사실에 대해 반박하길 좋아한다. 사업가로서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이 가장 예민하게 신경 쓰는 부분을 건드리기만 한다면 그다음은 수월했다.
금전적인 문제 어쩌고는 기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수많은 소문 중 하나에 불과했다. 다림은 설민의 반박에서 나름 중요한 단서 하나를 건졌다.
‘그런 쪽으로는 전혀 문제없었습니다.’
‘그런 쪽으로’ 문제가 없었다면 ‘다른 쪽에서’ 문제가 있긴 있었다는 거다. 그들의 해체 이유와 영롱의 잠적에 관해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기에 이런 식으로 좁혀 가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조금 흥분한 걸 깨달았는지, 설민은 머리를 짧게 흔들어 대곤 뒤돌아 룸을 나서며 말했다.
“아무튼, 제가 기자님의 귀한 시간 아껴드렸으니 인터뷰나 잘 내주세요.”
“STORY 재결합 언급이 시간 낭비라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차영롱을 찾는 게?”
이설민은 기운 넘치던 인터뷰 초반과는 달리 매우 지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둘 다요.”
▶▶
[이설민님이 계오은, 원태휘, 한강 님을 초대했습니다]
이설민
비상비상. 나 오늘 이상한 인터뷰 들어옴
한 강
?????
계오은
야밤에 먼 개소리야?
이설민
리더는 아직 확인 안 하네
계오은
태휘형 작업 중인가 보지
한 강
인터뷰 얘기는 뭐야 민아
이설민
내 개인 인터뷰인 줄 알고 수락했는데 계속 팀 얘기만 하더라고요. 꼬치꼬치 캐묻던데
한 강
뭐 흔한 일이잖아
이설민
근데 음주 인터뷰여가지고... 술 좀 마셔서... 실수한 거 같아
한 강
......
계오은
인간아 무슨 헛소리 씨부렸길래?
이설민
오은아 나 형이다^^
새끼가 요즘 명상한다더니 말버릇은 그대로야
아니, 기자가 영롱이 얘기를 훅 꺼내잖아
계오은
......
한 강
......
뭐 할 만한 얘기는 없잖아. 적어도 우리는
계오은
그렇지 태휘 형이 등장하면 모를까
설민이 형은 뭐 있어? 우리가 모르는 거?
이설민
있긴 뭐가 있어
아무튼 요즘 탑골인가 뭔가 때문에 우리 다시 관심받는 거 같으니까. 다들 미리 알고 있으라고. 다 찾아갈지도 몰라. 아마 만만해서 나부터 시작한 모양인데.
계오은
이설민 씨,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네
이설민
개오은 언제 한잔하자?^^ 강의 없는 날 연락해^^
한 강
탑골이 뭐야? 종로에 있는 거?
계오은
......형, 뉴스 좀 봐
이설민
강이 형 아직 휴가 중? 한국 언제 와요?
한 강
주말에 들어가
이설민
그럼 형 오면 언제 한번 모이자
한 강
관심받는 중이라며. 모이는 게 더 수상쩍은 거 아니야?
이설민
집에서 보면 되지
그나저나 리더야, 단톡방 확인 좀 하지?
한 강
그러게 1 아직도 안 지워지네
누가 전화 좀 해봐
계오은
강이 형이 해. 우리 연락은 씹어도 형 연락은 안 씹겠지
이설민
근데 진짜 영롱이랑 연락하는 사람 우리 중 아무도 없어?
계오은
.....난 안 해
한 강
.....나도
이설민
태휘도 안 할까?
한 강
직접 물어봐
이설민
이 새끼가 단톡방 확인도 안 하자나요
계오은
번호 바꿨나?
암튼 설민이형 인터뷰한 것만으로 태휘형한테 엄청 깨질 수도 있어
형 진짜 차영롱이랑 무슨 일 있었어? 왤케 예민하게 굴어?
이설민
일은 무슨. 그래도 멤버고 동생인데, 걱정되고 궁금하니 그렇지
넌 걱정 안 돼?
계오은
무소식이 희소식
잘살겠지
한 강
우리가 암만 궁금하고 걱정돼봤자 태휘만 하겠어?
우린 꼴랑 3년 같이 활동했지만 태휘랑 영롱이는 고향에서부터 연습생 생활까지 하면 그 세월이 얼마야.
근데 10년째 소식도 모르고
이설민
형 그 말은 좀 그러네요
나도 영롱이 궁금하고 걱정돼
알고 지낸 시간이 반드시 애정에 비례인 건 아니잖아요
계오은
애정??? 애저엉????
설민이형 아직 술 안 깼지
한 강
어 1 지워졌다
태휘 들어왔나보다
이설민
이제 왔냐 리더야
[원태휘 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계오은
?????????
한 강
뭐야
이설민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