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3. 첫눈 (04:06) <설민 s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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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년 10월 -
설민이 영롱을 처음 만난 건 18살 가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태휘와 영롱을 함께 보았다. 그때만 해도 영롱이 있는 곳엔 늘 태휘가 있었고, 태휘가 가는 곳엔 항상 영롱이 있었다.
SS엔터테인먼트가 10대 팬을 겨냥한 남성 5인조 댄스 그룹을 만들기 위해 첫 번째로 진행한 오디션에 태휘와 영롱이 함께 지원했는데, 설민은 기획사에서 일하는 고모의 추천으로 오디션 없이 첫 멤버로 발탁이 되었다.
평소 춤을 좋아하고 외모도 준수한 편이라 백업 댄서 세계에선 팬도 꽤 있었기에 자신감 빼면 시체였다. 하지만 그때 정식 오디션을 보고 들어온 태휘와 영롱을 대면하자, 자신감 따위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둘 다 잘생긴 건 기본이고,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눈길을 끌어 좌절감도 두 배였다. 태휘는 샤프하고 서늘한 느낌으로 잘생겼고, 그에 반해 영롱은 작고 귀여운 느낌의 잘생김이었다. 어쩜 둘 다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 그대로 생겼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설민은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깨닫고는 급격히 우울해졌다. 미(美)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하다면 이 세상에 미남이 얼마나 많단 건지! 자신은 그 카테고리 하나에라도 낄 수 있는 건지!
‘내가 춤 좀 춘다고 이따위 외모로 이런 분들이랑 그룹 한다고 깝쳤다니!’
연습실에서 그들을 대면하자마자 뛰쳐나와 고모에게 달려가서 가수 안 하겠다고 읍소했지만, 고모는 단칼에 무시하고는 도로 끌고 내려와 연습실에 처넣었다. 속상함과 쪽팔림에 연습실 구석에서 쭈그러져 있을 때 먼저 말을 걸어 준 사람은 영롱이었다.
“형 이름 예쁘다. 설민이라서 피부가 그렇게 하얀 거야?”
‘그렇게 치면 넌 영롱이라서 목소리가 그렇게 옥구슬이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정도로 고운 음성이었다.
귀엽고도 다정한 그 말에 설민은 금세 마음이 녹아 사귐성 넘치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고, 잠깐의 대화로 영롱의 신상 파악 및 호구 조사를 끝냈다. 차영롱. 17살. 새원예고 1학년. 2남 2녀 중 막내.
설민 역시 자기소개를 하고, 마치 같은 반 친구처럼 신나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자신의 장기인 춤을 보여 주려 일어설 때까지 영롱의 뒤에 있던 태휘는 단 한 번도 입을 떼지 않아서 있는 줄도 몰랐다.
영롱은 태휘의 팔을 잡아 끌어와 대신 소개해 주었다.
“여긴 우리 태휘 형. 둘이 동갑이네.”
이 눈빛 사나운 녀석은 원태휘. 18살. 새원예고 2학년. 2남 중 차남. 말투와 눈빛에서 애교가 뚝뚝 흐르는 영롱과는 달리 녀석은 과묵했다. 어쩌다가 두 사람이 친해진 건지. 첫 만남에서 든 가장 큰 미스터리였다.
마주하며 인사를 나누는 잠깐 사이, 그 눈빛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동갑임에도 자신에게는 없는 날카로움과 무게감을 풍겼기에 이변이 없다면 이 팀의 리더는 태휘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 아직 나머지 멤버들이 정해지지 않았는데도.
나중에 고모에게 들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의 오디션 결과에는 나름의 비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태휘 혼자만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한다.
영롱 역시 최종 후보 3인에 들었으나 회사가 추구하는 이번 그룹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추후 기획하는 다른 그룹의 연습생으로 키울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태휘가 영롱과 같은 팀이 아니면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거다.
아직 데뷔도 안 한 연습생이 자기를 뽑아 준 회사 관계자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니. 놀라움을 넘어서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전원 만장일치로 태휘를 놓치면 안 된다고 판단해 그 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결국 두 사람이 최종 선택되었다.
태휘는 처음부터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18살짜리가 자신이 작곡했다며 가지고 온 악보가 파일 한 권에 두둑했으니까. 급기야 그룹의 컨셉을 영롱의 이미지에 맞게 바꾸기로 했다. 모두 태휘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의 재능이나 영향력보다도, 설민은 녀석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놀라웠다. 영롱이 없으면 가수 안 하겠다고? 세상 무뚝뚝해 보이는 이 남자애에게 그런 면이?
고작 10대 남자애가 어른들에게 자신의 요구 조건을 당당히 말하는 건 쉽지 않은데. 의리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둘이 친한 것도 놀라운데, 그 정도로 우정이 깊을 줄이야.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 그 얘기를 은근슬쩍 물어보니, 영롱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태휘 형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녀석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설민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두 사람의 관계를, 함께 활동하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되리라 기대했다. 끝내 그날은 오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데뷔를 준비하며 멤버들에 대한 정보가 켜켜이 쌓여 갔다. 태휘와 영롱은 같은 중학교에 다니며 동아리 선후배로 서로 알게 됐고 이후 친해져 예술 고등학교에 함께 진학했단다.
동갑도 아닌 남자애들이 그렇게까지 친해진다고? 신기하다고 느끼면서도 자신 역시 잘 따르는 형들과 잘 챙기는 후배들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래도 고등학교까지 따라가는 건 좀 오버 아냐?
영롱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태휘는 명망 있는 의사 집안의 아들이었기에, 예고에 진학하고 가수 오디션을 보기까지 집안의 반대가 엄청나게 심했다고 한다. 그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봤는지, 녀석은 잔뜩 감정이입 돼서는 심각하게 말하곤 했다.
‘그러니까 우리 진짜 잘돼야 해.’
나중에 알아보니 태휘는 정말 끗발 날리는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조모, 양친, 이모, 삼촌들까지 모두 의사였고 형 역시 의대생. 그런 집안에서 어떻게 음악 천재가 나왔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똑똑한 머리는 유전이라고 쳐도, 대중가요 따위는 딴따라 음악이라며 천시하는 집안 분위기였다는데. 그 때문에 태휘는 늘 집에서 문제아, 딴따라 취급을 받아온 모양이었다.
그때 태휘가 가수의 꿈을 좌절하고 의학도의 길을 갔다면 많은 이의 인생이 뒤바뀌었을 것이다. 최소한 ‘STORY’ 멤버 4명부터, SS엔터테인먼트의 앞날까지……. 의사 원태휘라니. 이토록 심한 외모 낭비, 재능 낭비가 또 있나.
본격적인 연습이 진행되며 각자의 포지션이 정해졌다. 설민은 댄스, 태휘는 랩, 영롱은 보컬이었다. 안무를 직접 짤 수 있었던 설민은 안무 창작과 구성을 담당했고, 태휘는 작곡을 하고 있었기에 팀 색깔에 맞는 곡을 만들기로 했다.
한편 영롱은 보컬 외에 작사까지 맡았다. 중학교 때부터 태휘가 멜로디를 만들면 영롱이 그 곡에 가사를 붙였고, 그 분업으로 탄생한 결과물들이 꽤 괜찮았기에 A&R1)팀에서도 그렇게 데뷔 앨범을 준비해 보자고 결정했다.
5인조 댄스 그룹이 목표였기에 2명을 더 영입해야 했다. 보컬과 랩을 보강할 수 있는 멤버가 각각 한 명씩 필요한 상황에서 회사 관계자들은 기존 멤버들과 이미지가 겹치지 않으면서 다른 매력이 있는 비슷한 또래의 남자애들을 찾으려 애썼다고 한다.
회사의 이런 구체적인 진행 상황이야 나중에 알았고, 당시 설민과 태휘, 영롱은 밤낮으로 연습만 하느라 바빴다. 아니, 사실 설민은 이 두 사람을 관찰까지 하느라 좀 더 바빴다.
연습 기간 중 흔히 보게 되는 장면은 영롱이 일방적으로 태휘에게 치대고, 태휘는 그런 영롱을 묵묵히 받아 주는 모습들이었다.
처음 그들을 봤을 땐 정반대 재질인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았는데, 알고 지낸 시간 때문인지 그 다름마저도 나름의 조화미(調和美)가 있었다.
한동안 멤버가 셋뿐이라 이미 친한 그들 사이에서 혼자 동떨어질까 봐 내심 걱정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영롱은 살갑게 설민을 잘 챙겨 주었다.
태휘 역시 영롱만 싸고돌지 않았다. 오히려 영롱이 서운할 정도로 설민과 영롱을 공평하게 대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 팀을 이끌어나갈 리더 자질이 드러났던 것 같다.
네 번째 멤버는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길거리에서 캐스팅된 재미 교포 한강으로, 미국 이름은 리버였다. 그는 설민과 태휘보다 2살이 많았고, 실로 조각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설민의 고모 말로는 춤이나 노래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외모가 이목을 끌었고, 영어 랩 정도는 소화하지 않을까 싶어서 캐스팅했다고 한다.
춤이나 노래가 부족한 것보다도 더 문제가 된 건 그의 성격이었는데,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이 많았다. 캘리포니아 출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쑥스러움을 심하게 타서 연습실에서 춤을 추는 것조차 고비였다.
그때 다른 멤버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영롱은 특유의 애교와 다정함으로 한강을 챙겼고, 설민은 유쾌한 수다로 긴장을 풀어주는 동시에 일대일로 안무를 가르쳐 주었다. 태휘는 한강을 잘 다독이면서도 형으로 깍듯하게 대우해 줬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한강이 나이로는 맏형이었어도 동생들을 이끌 리더십은 부족했기에 암묵적으로 태휘의 리더 체제는 이미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허구한 날 넷이서 붙어 지내면서, 설민이 영롱의 특별한 감정을 알아챈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 감정의 대상은 당연하게도 태휘였다.
어느 날 밤, 설민은 안무를 짜기 위해 혼자서 연습실로 향했다. 보통 단체 연습은 저녁에 다 끝나지만, 안무 감독까지 맡은 설민은 더 멋진 안무를 만들고 멤버들이 소화할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가끔 야밤에 혼자 나오곤 했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문 앞에서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간유리 너머로 들여다보니 연습실에 쪼그려 앉아 있는 영롱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까 낮에 가르쳐 준 안무를 계속 못 익히더니, 나머지 연습을 하는 모양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설민은 놀려 줄 심산으로 조심히 문을 열었다. 다행히 틀어 놓은 음악 소리가 커서 문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뒤꿈치를 들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서니, 영롱이 쪼그려 앉아 있는 바로 앞에 누워 있는 태휘가 보였다.
밖에서는 영롱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거였다. 하긴 녀석이 혼자 있을 리 없지. 둘은 늘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으니까. 같이 연습하다가 잠시 쉬는 사이 깜빡 잠이 든 걸까.
그럴 만도 한 게 요새 태휘는 랩, 보컬 트레이닝에다가 데뷔 앨범의 작곡, 편곡까지 참여하느라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가이드 녹음만 되어 있는, 강렬한 비트의 노래가 가득한 연습실에서 영롱은 가만히 태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민은 차마 둘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차라리 연습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먼저 발견하고는 ‘어, 형 왔어?’ 하고 아무렇지 않게 웃어 주면 자연스럽게 상황 종료인데. 영롱은 잠든 태휘의 얼굴을 뚫어지라 내려다보느라 주위는 의식하지 못했다.
마치 이 세상에 태휘 말고는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것처럼. 쿵쾅거리는 댄스 음악이 울렸지만 그들의 차원에서는 미디엄 템포의 달달한 러브송이 흐르는 듯했다.
설민은 불청객이 된 기분이 들어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문까지 돌아가는 동안에도 영롱은 태휘를 바라보느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들키지 않고 무사히 연습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니 녀석은 여전히 태휘의 얼굴을 감상 중이었다. 설민은 이상하게 빨리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회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세상 무뚝뚝하고 차가운 그 남자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던 그 눈. 태휘를 보는 영롱의 눈빛은, 아무런 설명하지 않아도 사랑임이 분명했다.
어쩌면 영롱 본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그렇게 누군가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까.
남자애가 남자애를 좋아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 일인데,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은 영롱의 그 눈빛, 그 표정에 두근거림을 느끼는 설민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