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4. Fever (04:00) <리버 solo>
▶
공항 입국장은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으로 번잡스러웠다. 카메라를 든 취재진부터 역시나 카메라와 핸드폰을 든 채 미어캣처럼 모여 있는 팬들까지 게이트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 수속을 마친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게이트의 반복적인 움직임이 지겹게 느껴질 무렵, 한 남자가 카트를 밀고 나왔고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를 향해 눈부신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역대 케이블 TV 드라마 중 최고의 시청률 기록을 세우고 포상 휴가를 떠났던 ‘대재벌의 첫사랑’ 제작진과 출연자들의 귀국길이었다. 그들 중 가장 많은 플래시 세례를 받은 건, 벙거지에 까만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가려 얼굴도 알아보기 힘든 키 큰 남자였다.
남자 주인공 한강은 공식 석상 외에선 늘 저렇게 꽁꽁 가리고 다녔기에, 중무장 차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봤자 잘생긴 윤곽은 감춰지지 않았지만.
팬들과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을 둘러싼 취재진에겐 간단한 인사로 답하고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가려는 한강에게 다림이 성큼 다가갔다.
“한강 씨, 온라인 탑골공원 열풍 알고 계세요? 많은 분이 STORY의 재결합을 원하던데, 멤버로서 한 말씀 해 주세요.”
뒤늦게 나타난 매니저가 다림을 저지했다. 선글라스와 마스크 때문에 어떤 표정인지 보이진 않았으나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스크 아래로 광대가 조금 솟아오르는 걸 보니 미소 짓는 듯했다.
“물론 잘 알죠. 제가 몸담았던 팀에 관심 가져 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죠. 그럼 이만.”
그는 말을 더 잇지 않고 카트를 힘 있게 밀어 그대로 공항을 빠져나가 막 신호가 바뀐 건널목을 부리나케 건너갔다. 긴 다리의 보폭은 다림이 쫓아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강이 온라인 탑골공원을 알고 있다니 의외였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남에게 무관심한 아웃사이더, 마이웨이 타입에다가 그 흔한 SNS도 하지 않는 배우로 유명했기에.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연기력을 인정받기까지 맘고생이 많아서, 가요계 쪽 소식은 아주 차단한 줄 알았는데. 뭐, 그만큼 요새 온라인 탑골공원이 유명하다 보니 모를 수 없겠지만. 아니면 이미 설민에게 인터뷰 얘기를 전해 들었을 수도 있고.
대화를 바로 끊는 걸 보니 정식 인터뷰는 잡기 어려워 보이는데. 다림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귀국한 배우들이 다 빠져나가자 공항에 남은 취재진 역시 뿔뿔이 흩어지는 중이었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다른 배우들 촬영을 다 마친 모양이었다.
“다림, 어쩔 거야? 사무실로 갈 거지?”
그럴 거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아까 한강과 인사하던 팬 중 한 명이었는데, 꽤 길게 대화를 나누길래 인상적이었다.
“아니, 먼저 들어가.”
그러고는 바로 그 팬을 향해 다가갔다. 조금 전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지 카메라 뷰파인더를 보며 걷고 있었다. 다림은 가까이 다가가 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을 건네며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전 K엔터매거진 기다림 기자예요.”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했는지, 그는 잠시 멈칫하고선 위아래로 다림을 훑어보았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경계하는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묻자, 다림은 팬의 연차를 알아낼 수 있는 제일 쉬운 질문을 던졌다.
“요새 온라인 탑골공원 열풍으로 1세대 아이돌에 새로 입덕한 팬들 인터뷰하고 있어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해맑고 천진한 표정을 짓자 상대방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고,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아니거든요? 저 ‘STORY’ 데뷔 때부터 팬이에요.”
오래된 팬은 뉴비 취급받는 걸 싫어하지. 다림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멤버들의 인터뷰가 제일 필요하나, 팬들에게 직접 듣는 정보 역시 소중했으니까.
지금까지도 STORY를 꾸준히 응원하는 현장 팬들을 만나려고 여러 번 시도한 적 있었으나 쉽사리 성사되지 않았다. 그 가수에 그 팬들이라고, 언론에 철벽 치는 것까지 닮은 모양이다.
물론 가까운 곳에 STORY의 오랜 팬이 있긴 했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팬질은 10년 전에 강제로 멈추고 말았으니.
“혹시 괜찮으시면 잠시 시간 좀 내주실래요?”
▶▶
한강은 차에 타자마자 얼굴을 가리던 것들을 바로 벗어 버렸고, 그제야 뚜렷한 이목구비가 살짝 그을린 피부와 함께 드러났다. 오랜 비행 탓에 거뭇하게 자란 수염까지도 배역 때문에 일부러 기른 것처럼 보이는 외모였다.
매니저는 차를 몰며 힐끗힐끗 한강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까 그 기자 못 막아서 죄송해요. 그 질문을 할 줄 몰라서.”
“괜찮아. 난 할 줄 알았거든.”
상큼한 대답에 매니저는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아셨어요? 전 오늘 뵙고 말씀드리려고 했거든요. 휴가 가신 동안 회사로 재결합 의사를 묻는 연락이 많이 와 가지고.”
그때 한강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양반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어, 민아.”
- 형, 한국 왔어요?
“응. 네가 말한 기자 만났어. 회사에도 연락 많이 왔다고 그러네.”
- 나 지금 태휘 만나러 SS엔터 가는 길인데. 형도 올래요?
“나중에 같이 보자며 뭘 또 만나러 거기까지 가?”
- 형, 태휘 성격 알면서 그래요? 직접 안 보면 끝도 없이 미룰걸?
“뭐 어때? 급할 필요 없잖아.”
- 지금 나한테도 방송국 컨택 물밀듯 들어오고 있다니까! 우리끼리 대책 회의는 해 놔야지.
“할 게 뭐 있어. 12년 전 결정대로 하는 거지.”
- 거참, 이 형 지금 분위기도 모르고 속 편한 소리 하시네.
“솔직히 말해 봐. 너 다른 이유로 태휘 만나러 가는 거면서.”
- 이건 또 무슨 소리예요?
“영롱이 얘기 듣고 싶어서 가는 거 아니야?”
핸드폰 너머에서 아무 대꾸도 없자 얼어붙은 설민의 모습이 상상돼 눈동자만 굴렸다. 그냥 해 본 말인데, 설마 정곡을 찔렀나?
- 아니, 그럼. 형은 안 궁금해? 3년간 동고동락했고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는데!
정곡이 찔린 걸 감추려는 듯 설민은 괜히 더 과장하며 언성을 높였다.
“형제는 무슨. 너는 형제랑…….”
한강은 뒤에 이어 나올 말을 겨우 삼켰다.
“내 동의 구하지 말고, 네 속마음을 얘기해.”
- 에이씨, 형한테 전화 괜히 했어.
“대신 태휘한테는 이런 말 씨알도 안 먹히는 거 알지?”
- 알아요, 알아. 아무튼, 오늘 만나고 얘기 나오는 거 있으면 다시 알려 줄게요.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 녀석의 적극적인 태도에 피로감을 느꼈으나 티 내진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매체들이 계속해서 연락해 온다면 대책이 필요한 건 사실이니까.
“그래, 연락해.”
한강은 전화를 끊은 후 급격히 피곤해져 의자 등받이를 뒤로 넘기고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조금 전 통화가 머리에 잔상을 남겼는지, 영롱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티 없이 해맑던 그 얼굴은 어느새 열화(劣化)된 사진처럼 흐릿해져 있었다.
▶▶
공항 내 카페는 오가는 사람들로 부산스러웠다. 한강의 오랜 팬임을 밝힌 수희는 다림이 시켜 준 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회사 가 봐야 해서, 오래는 못 있어요.”
“시간 많이 안 뺏고 간단하게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기자와의 만남을 불편해하는 티가 역력했기에,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아까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던 걸 떠올렸다.
“입국 짤 잘 건졌어요? 홈마2)는 언제부터 했어요?”
연예부 기자로서 자신이 알고 있는 아이돌 팬 지식을 총동원하여 아는 척했다. 수희는 자신의 카메라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얼마 안 됐어요.”
“한강 씨 개인 팬이에요?”
“아뇨, 올 팬이에요.”
오호, 올 팬이라. 다림 입장에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럼 다른 멤버들 사진도 찍어요?”
“요새 스케줄이 별로 없어서요. 강이 오빠랑 설민 오빠 위주로 찍어요.”
“원태휘도 ‘K팝 레전드가 돼라’ 심사위원으로 나오잖아요.”
“그건 비공개 녹화라서. 그리고 태휘 오빠는 출퇴근길에 팬들 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계오은은 작년 연말에 콘서트 했죠? 그것도 갔어요?”
“네. 올콘 뛰었죠.”
그 정도면 정말 열성 팬이라는 말인데.
“지금 방송국마다 ‘STORY’ 소환하려고 난리잖아요. 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수희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예상했던 반응과는 확실히 달랐다.
“저는 별로 원하지 않아요. 아마 다른 팬들도 비슷한 생각일걸요.”
“왜요?”
“일단 완전체여야 의미가 있는데, 영롱이가 없잖아요.”
다른 멤버들한텐 꼬박꼬박 오빠 호칭을 쓴 걸 보면 영롱, 오은과 같은 나이인 듯했다.
“그렇긴 하지만, STORY라는 이름으로 다시 뭉치는 걸 상상하면 설레지 않아요?”
그러자 수희는 미간을 좁히며 불편한 기색을 나타냈다.
“솔직히 말할게요. 저는 그동안 STORY 노래나 멤버들 솔로 활동했던 노래도 꾸준히 듣고 지냈어요. 지금도 데뷔 당시의 노래를 듣고요.”
그게 뭐 어때서요? 다림은 그렇게 되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딱히 과거 같지 않아요. 근데 사람들이 역주행, 재결합 운운하는 거 보면 좀 그래요. 저한테는 항상 현재거든요.”
그 말은 은은한 충격을 주었다. 이런 관점은 꽤 신선한걸?
“일반 대중들이랑 팬들은 아주 달라요. 대중들은 평소엔 아무 관심도 없다가 이슈가 되면 그때 잠깐 호기심 갖고 흥미를 느끼죠. 반면 저같이 오래된 팬들은 계속 지켜봐 왔고, 그간의 사정을 다 알거든요. 그래서 기대할 일과 포기할 일, 구분을 잘해요.”
역시 그 가수에 그 팬이었다. 이제는 팬들도 STORY의 단호한 태도에 완전히 동화된 듯했다.
“팬들끼리 하는 말이 있어요. ‘우리의 이야기(STORY)는 꽉 닫힌 결말이다.’ 다른 팀처럼 오래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흐지부지되지도 않았고, 활동하는 동안은 모든 걸 다 했으니까 아쉬울 게 없다고요. 재결합을 원하는 이들은 그걸 경험 못 해 본 사람들인 거죠.”
뭔가 골수팬으로서의 관록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어쩌면 멤버들도 이런 팬들의 마음을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랜 팬들의 마음이 이러하니 주변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건지도.
“무엇보다도, 태휘 오빠가 확실히 못 박았잖아요. 리더 오빠가 안 한다면 진짜 안 하는 거예요.”
“그럼 다른 질문이요. 영롱 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혹시 팬들 사이에 도는 얘기는 없어요? 지금 어디 있다거나.”
영롱의 얘기가 나오자 수희는 바로 말문을 닫았다. 그제야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한때 이런저런 소문은 돌았죠. 외국에 가서 결혼했다, 무슨 사고를 당해서 불구가 됐다 등등. 지금은 그마저도 없지만. 근데 다 신빙성 없는 뜬소문이라 아무것도 안 믿어요.”
“그러면 해체한 이유에 대해 팬들은 어떻게 알고 있어요?”
“그것도 말이 많았어요. 소속사와의 갈등. 영롱이와 오은이 사이의 불화. 그리고 한강 오빠가 가수보다 연기하고 싶어 했다더라. 혹은 영롱이 솔로 활동을 원했다 등등이요.”
“그중에 뭐가 가장 그럴듯해요?”
“팬들은 다 안 믿고, 태휘 오빠의 음악적 슬럼프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때 그룹 해체하자마자 원태휘가 바로 미국 유학 갔죠?”
“네. 그렇지만 정작 팬들은 해체 이유에도 큰 관심 없어요. 웃기죠? 정작 관계없는 사람들만 궁금해한다니까요. 팬들은 그냥 ‘오빠들이 해체했으니까 해체했나 보다’ 하는 거예요. 이유가 뭐든지 간에 그게 오빠들의 최선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으로 행복하다면 끝이에요.”
다림은 순간 자신이 갖고 있는 편지의 이야기를 할 뻔했다. 이 취재를 시작하면서부터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는 빨간색 편지 봉투. 수희를 비롯한 STORY의 팬들이 이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해체의 이유가 사실은 어느 한 사람 때문이라면.
하지만 아직 이걸 꺼낼 수는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깊이 파고 들어가야 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얘기 나눠 줘서 고마워요.”
“기자님 질문에 제가 다 대답했으니, 기자님도 하나만 대답해 주세요.”
다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그 말에 동작을 멈췄다.
“왜 이런 걸 물어보시는 거예요? 단순히 기사를 위해서가 아니죠?”
가수나 팬이나 어째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없어? 다림은 자리에 도로 털썩 앉았다. 그 질문에 가방에 있는 편지의 존재가 도로 떠올랐다. 그리고 안 부장이나 설민에게는 꺼내지 못한 말을, 수희에게는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TORY의 팬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다림은 수희를 쳐다봤지만, 그 얼굴 위로 다른 이의 얼굴이 겹쳤다. 차가운 인상 대신, 부드러운 미소가 어린 지애의 얼굴.
“차영롱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
- 199■년 11월 -
한강은 원체 남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 성인이 된 지금도 그렇다. 그나마 STORY로 활동한 3년이 그의 인생에서 타인을 가장 많이 의식하며 산 시기였을 것이다.
엄연한 계약이었으니, 개인주의자라는 이유로 자기 편한 대로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근본적인 성향은 여전히 마이웨이였으나, 팀 활동 하는 동안 이기적인 면을 꽤 많이 고치고 남들과 함께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나이로는 맏형이었음에도 미국에서 나고 자란지라 무리에서 ‘형’ 노릇해야 하는 한국식 서열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도 마음만은 늘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서 먼저 동생들을 챙겨 주고 싶었으나, 원체 그런 센스가 모자랐다.
그런 무신경함 때문에 팀 내에서 일어나는 말 없는 기류를 놓치거나 뒤늦게 깨닫는 경우도 많았는데, 오히려 동생들이 챙겨 주면서 STORY는 나름 수평적 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연습생 시절 한강, 태휘, 영롱은 같은 숙소를 썼다. 집이 멀었던 태휘와 영롱은 이미 회사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지내고 있었고, 설민은 회사와 집이 가까워 출퇴근했다. 집이 미국이던 한강은 자연스레 태휘와 영롱 둘이 살던 숙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숙소는 방이 3개였고, 방 하나는 옷 방, 태휘와 영롱이 침실을 하나씩 쓰고 있었다. 한강이 들어오게 되자 태휘는 침실 하나를 양보하고 영롱과 같은 방을 쓰겠다고 했다.
한강은 자신을 배려한 동생들이 고마우면서도 ‘둘이 한방을 쓸 정도로 친하구나.’라고만 생각했다. 아직 데뷔도 못 한 연습생들에게 주어지는 숙소의 방은 겨우 몸만 누일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마지막 멤버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라, 숙소 인원이 추가된다면 한강과 같은 방을 쓰거나 다시 방 배정을 해야 했다. 그전까지 침실을 혼자 쓰는 작은 호사를 누리게 된 것이다.
처음에 숙소는 종일 연습하고 돌아와 잠만 자는 곳이었으나, 점차 연습생 생활에 익숙해지며 숙소는 멤버들의 친목과 놀이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나름 신비주의 전략으로 준비 중이었기에 모든 외출이 금지되어 놀 수 있는 곳은 숙소뿐이었다. 당시엔 핸드폰도 없던 데다가 숙소에 전화기도 놔 주지 않았다. 전화 통화는 회사 사무실에서만 가능했다.
그래서 숙소에서 할 수 있는 놀이라고는 컴퓨터 게임, 콘솔 게임, 보드게임이나 매니저들이 던져 주고 간 만화책과 비디오를 보는 게 전부이긴 했지만 온종일 연습에 지친 소년들은 그것만으로 재미나게 놀 수 있었다.
게다가 언제부턴가는 숙소에서 지내지 않는 설민까지 놀러 와 자고 가곤 했다. 한강은 설민이 워낙 사람들을 좋아해서 그런다고만 생각했다. 자기라면 연습 끝나자마자 집으로 날아갔을 테니까.
게다가 설민과 태휘, 영롱은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예고 재학생인 두 사람은 가수 준비에 비교적 자유로웠던 반면, 인문계에 다니던 설민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도 매일 숙소에서 영롱과 노닥거리는 설민을 보다 못해, 태휘가 잔소리한 적도 있다.
“너 이 시간에 집에 가서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 말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설민은 바로 다음 날 교과서와 문제집을 챙겨와 숙소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휘는 어이없어하며 더는 잔소리하길 포기했다.
연습이 없을 때의 숙소의 풍경을 묘사하자면, 좁은 거실 한편에서 설민은 엎드려 공부하고 태휘와 영롱은 함께 콘솔 게임을 하고 한강은 자신의 방에서 만화책을 본다.
강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거실로 나와 보면 공부하던 설민은 어느새 영롱의 옆에서 같이 게임하고 있고, 태휘는 방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또 한참 지나서 다시 거실에 나오면 영롱까지 방으로 들어가 없고, 혼자 남은 설민은 다시 공부하다가 잠들었는지 바닥에 엎어져 있곤 했다.
강이 음악 방송이라도 보려고 TV를 켜면 그 소리에 부스스 일어난 설민은 잠결인지 뭔지 ‘형, 사랑은 뭘까요?’ 이딴 소리만 중얼거리다가 문제지를 들여다보고 다시 잠드는 싱거운 일상이 한동안 반복됐다.
이때의 영롱은 4명 중 제일 어려서 그런지 멤버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물론 나중에 5명이 되었을 때도 크게 달라진 건 없긴 했지만.
집에서도 막둥이로 사랑받고 자라 워낙 밝고 애교가 넘치고 자신의 감정 표현에 서슴없었다. 이런 애가 팀에 2명이었으면 피곤했겠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그런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서 나름대로 조화가 잘 맞았다.
한강과 태휘는 차분한 편이었고 그나마 설민이 쾌활했으나 영롱의 해맑음은 못 쫓아갔다. 영롱은 자신의 모든 기분을 드러내는 스타일이었다. 기쁘면 온몸으로 기뻐하고, 화나면 불처럼 화내고, 서운함을 느끼면 1초의 꿍함도 없이 바로 서운하다고 말했다.
한강은 여태껏 살면서 녀석만큼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신기하기도 하고 저절로 눈길이 가는 아이였다. 그토록 남에게 무관심한 자신조차도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고나 할까.
재미있는 기억은 아니었지만, 가장 강렬한 인상이 남은 건 태휘가 아팠던 날의 일이었다. 그날은 영롱뿐만 아니라 태휘의 새로운 면까지 알게 된 날이기도 하다.
데뷔를 앞두고 안무 연습에 보컬 레슨, 작곡에 편곡, 프로듀싱까지 맡은 태휘는 다른 멤버들보다 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프로듀싱은 2집 때부터 맡자는 얘기가 회의에서 나오기도 했는데, 대표님 입장에선 10대의 팀 리더가 직접 프로듀싱까지 맡은 천재 그룹이라는 네임 밸류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리더 태휘가 떠맡은 부담은 더 심해졌다. 대표가 시켜서이기도 했지만, 본인 스스로 욕심도 있어서 묵묵히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결국 피로가 누적돼 병이 났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연습생과 신인 가수의 복지를 신경 쓰는 분위기나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몇 시간 내내 휴식 없이 춤 연습만 하느라 식사도 거르기 일쑤였고, 외출도 금지된 터라 여러모로 영양 상태가 좋지 못했다.
아무리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지만, 그런 불규칙한 생활이 한창 성장기의 청소년에게 좋을 리 없었다. 그중 제일 무리한 태휘가 먼저 병이 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매니저에게 자신의 상태를 말하지 않아 상황이 꽤 심각해졌다는 거다. 평소 매니저는 아침 일찍 숙소에 와서 멤버들을 깨워 차에 싣고 회사로 간 다음, 종일 안무 연습과 보컬 레슨 등의 트레이닝을 한다.
그리고 밤에 연습이 끝나면 멤버들을 태워 숙소에 데려다 놓고 떠나기 때문에, 외출이 금지된 멤버들은 매니저가 오기 전까지는 숙소 밖으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나빠 보이던 태휘에게 매니저가 괜찮은지 묻자 태휘는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거라고 답했다. 그랬기에 매니저는 평소처럼 숙소에 멤버들을 두고 떠났고, 강과 영롱도 그 말만 믿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한강 역시 고된 연습에 지쳤기에 씻자마자 바로 누워 단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자신을 흔드는 누군가의 손길이 꿈인 줄로만 알았다.
“형, 얼른 일어나 봐! 태휘 형이 이상해!”
놀라서 눈을 뜨니 시야 한가득 온통 눈물범벅이 된 영롱의 얼굴이 들어왔다. 비몽사몽인 와중에 녀석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가 보니 침대에 누워 있는 태휘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심각해 보였다.
벌게진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린 채 메마른 입술로 가쁜 호흡을 겨우 내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엄청난 고열에 탓인지 태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랬어?”
“몰라! 자다가 형이 너무 뜨거워서 깼는데, 흔들어도 앓는 소리만 내고 눈을 안 떠.”
자신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지만 딱 봐도 매니저가 데리러 오는 아침까지 기다리면 큰일 나겠다 싶었다. 그러나 숙소에는 해열제는커녕 비상약도 없었다. 영롱은 뒤에서 엉엉 울고만 있었다.
“영롱. 냉장고에서 얼음 꺼내 와.”
녀석은 벌게진 얼굴로 훌쩍이다가도 시키는 대로 했다. 냉찜질로 열을 식히는 동안 옆에선 계속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강은 아픈 사람도 아픈 사람이지만, 옆에서 통곡하는 꼬맹이 때문에 두 배로 정신이 없었다.
“영롱, 그만 울고 매니저 형 불러와.”
순간 자기가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다. 전화가 없으니 지금 당장 매니저를 부를 방법이 없는데. 그러나 영롱은 울음을 뚝 그치더니 말릴 새도 없이 단숨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옷 바람으로, 신발도 안 신고.
“영롱아?”
한강은 태휘의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놓고는 바로 뒤따라 나갔다. 영롱은 옆집 문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숙소는 한 층에 4개의 호수가 사는 아파트였는데, 그 집 중 누구라도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죄다 두드려댔다. 영롱은 지금 태휘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했다.
“옆집인데요! 정말 죄송한데, 전화 좀 빌려주세요!”
결국 한 집이 문을 열고 전화를 쓰게 해 줘 매니저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오밤중에 아파트 한 층을 다 깨우는 소동을 일으킨 뒤, 매니저가 오기까지 또 한참의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울지 말랬더니 이제 영롱은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이렇게 울다가는 둘 다 실려 갈 것 같아서, 옆에 있던 생수병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영롱은 훌쩍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좀 마셔. 이러다 너도 쓰러져.”
“태휘 형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이건 또 무슨 바보 같은 소리인지. 이 상황에서 농담이라니 하며 웃어 버릴 뻔했는데, 얼굴을 보니 농담이 아니었다. 제법 비장한 표정이었기에 건넬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얼음이 다 녹아 부엌에 가서 새 얼음주머니로 바꿔오는 동안, 영롱은 물수건으로 쉼 없이 태휘의 얼굴과 목을 닦고 또 닦고 있었다. 그 정성 때문인지 열이 좀 내린 것 같았다.
태휘는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호흡으로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영롱은 수건을 집어 던지곤 손을 덥석 잡았다.
“형! 괜찮아? 매니저 형 곧 올 거야! 조금만 참…….”
그때 태휘가 별안간 영롱의 손을 자기 뺨에 갖다 댔다. 그러고는 잔뜩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너……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얼음장 같아.”
영롱은 진짜 얼음이 된 것처럼 굳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찬 물수건을 쥐었던 터라, 고열을 앓고 있는 태휘에겐 차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내가 차가운 게 아니라, 형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거야!”
그렇게 말하며 손을 빼려고 하자 태휘는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영롱은 당황했는지 동그랗게 고리눈을 떴다.
“가만히 있어 봐.”
태휘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영롱은 다시 얼음이 되었다.
“얼굴 좀 만져 줘.”
태휘의 눈에도 영롱밖에 보이지 않는 게 분명하자 한강은 기가 찼다. 완전 둘만의 세계에, 나는 투명 인간이네? 강이 눈동자를 굴려 영롱을 힐끔 보자 태휘에게 열이 옮은 것처럼 두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고는 붙들린 손을 움직여 천천히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머지 손은 강이 가져온 얼음주머니 위에 올려놓았다.
파랗게 질릴 정도로 냉기를 머금은 손으로 얼굴을 만지자 태휘는 만족스러운 듯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빈틈없고 날카로워 보이기만 하더니 지금은 제 나이로 보였다.
“계속해 줘, 영롱아.”
아이처럼 보채는 듯한 태휘의 음성도 처음 들었다. 평소 연습을 지휘하거나 회의할 땐 제일 맏형 같았으니까.
태휘는 붉게 상기된 볼을 영롱의 두 손에 비벼 대며 그 손길에 모든 걸 맡기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긴 속눈썹 끝에 매달려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영롱은 그 눈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엄지로 그 물방울을 닦아 주었다.
“시원해서 기분 좋아.”
태휘가 자신의 기분을 표현한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제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소리인데? 어쩌면 오늘 밤이 지나고 자신이 무슨 말과 행동을 했는지 기억 못 할지도 모른다. 아니, 원래 영롱이랑 단둘이 있을 때 이런 식으로 대화했던 걸까?
한강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롱은 태휘의 말을 고분고분히 따르며 열심히 손을 얼렸다 얼굴 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매니저 형이 도착해서, 태휘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바로 둘러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숙소에 남아 있으라는 매니저의 당부에도 영롱은 끝까지 따라 나와 같이 차를 탔다.
그날 밤 태휘는 응급실을 거쳐 입원까지 해 빠르게 회복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날 이후 영롱은 한동안 멍해 보였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 중 아무도 다시는 그날 밤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태휘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기억 못 하는 건진 몰라도 수다쟁이 영롱이 아무 말 않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당시에 설민이 있었다면 끊임없이 그날 일에 대해 수다 떨었을 텐데, 설민이 없어서 그런 거였을까?
다행히 태휘는 이후로는 그날처럼 아픈 적이 없었다. 어쩌면 데뷔 전 리더로서 겪은 액땜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사 사람들은 말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한강은 종종 궁금해지곤 했다. 태휘가 죽으면 따라 죽을 거라던 녀석의 마음은 그대로일지. 그런 태휘를 두고 몇 년 뒤, 자신과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건지. 태휘 때문에 숨넘어갈 듯 울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