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5. STORY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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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민
작업실 몇 층이야? 나 대표님 좀 뵙고 갈게.
30분 전 메시지를 뒤늦게 확인한 태휘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피곤해.’
15년 전부터 이설민은 그런 존재였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만나면 피로도가 높은. 시간 대비 쏟아 내는 말의 양이 많아서 그런가. 하지만 그건 ‘그 녀석’도 마찬가지였는데.
녀석과 함께 있을 때 비슷한 피로감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둘 다 수다쟁이였지만 둘의 큰 차이라면 ‘오지랖의 반경’ 차이일 것이다. 녀석은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을 얹었고, 그에 비하면 이설민은 관심사의 범위 자체가 컸다.
온갖 데 다 신경 쓰는 성격이 존경스러우면서도, 그 오지랖의 대상에 본인이 속하면 피곤해진다는 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깨달았다. 이설민은 친구 사이라면 모든 근황과 생각을 공유해야 한다고 여기는 놈이었다.
그래서 계속 친구로 지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10대와 20대 대부분 시간을 함께 공유했다는 건 생각보다 강하고 끈끈한 매개였다. 어느새 떼어 내려 해도 떼어 낼 수 없게 되었으니…….
물론,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린 녀석도 있지만. 그 녀석의 생각에까지 이르니 입에 문 담배가 쓰게 느껴졌다. 녀석과 담배 역시 떼려야 뗄 수 없는 연상 작용이 있으니까.
짓이겨 끈 꽁초를 휴지통에 버리고 옥상 공원 흡연실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단체로 우르르 올라오는 연습생들과 마주쳤다. 땀 냄새를 폴폴 풍기는 걸 보니 안무 연습을 마치고 쉬러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태휘는 회사 프로듀서인 동시에 직속 선배였기에 후배들이 먼저 벽 쪽으로 몸을 붙여 나란히 서서 깍듯이 인사했다. 가벼운 눈인사로 답하고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야, 봤냐? 원태휘 PD님이 날 보셨어!”
“웃기네. 나 보셨거든?”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인데, 진짜 실물 존잘이다.”
뒤에서 자기들끼리 야단법석 떠는 게 들려왔지만, 그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작업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니 괜한 불안함이 엄습했다. 작업실 간유리 문 너머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비쳤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작업실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있던 설민과 눈이 마주쳤다. 태휘는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대체 왜 허락도 없이 남의 방에 들어와 있는 거야?”
“문 열려 있길래, 당연히 너 있는 줄 알고 들어왔지.”
당당한 태도로 작업실의 가죽 의자를 서슴없이 만지작대던 설민은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너 옛날부터 꼬리가 길었잖아. 숙소 방문도 맨날 열고 다니고.”
“그때도 넌 남의 방에 불쑥불쑥 들어왔지.”
“영롱이도 문단속 잘 안 했어. 의외로 그런 건 닮았단 말이야?”
툭 던지며 상대방의 반응을 떠보는 것도 그만의 방식이었다. 눈치 없는 한강이라면 100퍼센트 걸려들어 대화의 주도권을 넘겼겠지만 태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뭐 하러 왔냐?”
대답 대신 말을 돌리며 설민의 간 보기를 무시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오늘 날을 잡은 거 같긴 하지만.
“그러게 누가 그렇게 단톡방 나가래? 다들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또 멤버들 핑계 대며 오버 깝 싸네. 자신이 그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그마치 15년인데, 강이 형도 오은도 이제 익숙할 거다. 강이 형은 ‘그러든지 말든지’ 모드였을 거고, 계오은은 욕이나 좀 씨부렁거리고 말았겠지.
“작업에 방해돼서 나간 것뿐이야. 한두 번도 아니잖아.”
“그냥 무음해 놓고 나중에 확인하면 되지.”
“숫자 떠 있으면 신경 쓰여.”
“솔직히 말해 봐. 어떤 말에 빡쳤어?”
“또 지레짐작한다. 내용 읽지도 않고 나왔다니까.”
작업실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은 설민은 맞은편에 앉은 태휘를 향해 손바닥을 쫙 내밀어 피고는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자, 골라 봐. 첫째, 내가 기자한테 술김에 실수했다고 그래서. 둘째, 영롱이 얘기 꺼내서. 셋째, 내가 애정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어쩌고 그래서.”
설민은 마치 취조 하듯이 태휘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폈다.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태휘는 끝까지 무표정으로 응수했다.
셋 다 빡치게 할 말이라는 건 알고 있네. 대화방 내용을 읽지 않고 나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세 번째의 경우 진심으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설마 자신을 자극하기 위한 말이었을까? 그 부분만 좀 궁금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어떤 도발에도 넘어가지 않자 설민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리더야. 강이 형한테도 기자 붙었다는데. 방송국 쪽도 난리고.”
“안 그래도 방송국에서 우리 회사로도 연락 왔어. GBS랑 HBC에서.”
그 말에 설민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과장된 행동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진짜?”
“응. 황혜 CP님이 직접 전화하셨더라.”
“왜 너한테?”
“STORY가 SS엔터에서 데뷔하고 해체했으니까. 그리고 리더인 내가 여기 있으니, 여기로 연락 오는 게 당연하잖아.”
“우리한텐 왜 얘기 안 했는데?”
“어차피 방송 출연 안 할 거니까.”
“리더 독단으로 그렇게 막 정하냐? 조건이 어떤지는 멤버들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독단? 우리 해체할 때 다 동의한 사항이잖아.”
“알지. 나도 그렇게 기자한테 대답했어. 근데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단다, 리더야. 언제까지 이 스탠스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유지 못 하면 어쩔 건데? 넌 재결합 생각 있다는 소리로 들린다?”
설민은 일순 망설이다가 답했다.
“해서 나쁠 거 없지.”
“해체 때 했던 말 지키지 않는 그런 팀으로 기억되려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태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팬들과 대중 앞에서 한 약속이 안 중요해? 그럼 이설민, 넌 뭐가 중요한데?”
“영롱이를 찾는 거.”
태휘는 허를 찔린 듯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감정 표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의 얼굴에선 나름 다이나믹한 광경이었다. 설민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지금처럼 관심받을 때, 대중들이나 매체들이 발 벗고 나서면 영롱이 찾을 수도 있어.”
“결국 네 사심이네. 재결합이고 뭐고.”
“원태휘, 아무렇지 않은 척 좀 그만해. 너도 영롱이 소식 궁금하잖아!”
“내가 안 찾아봤을 것 같아?”
태휘의 언성이 높아지자 설민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걔 소식 궁금하다고 기자들의 먹잇감으로 만들고 싶어? 만일 걔가 원하지 않으면? 일부러 숨은 거면?”
사실 설민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원태휘가 영롱의 존재를 외면해 왔다고 단정 짓고, 그런 태도를 공격하고만 싶었다.
“단지 네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찾는다면, 배려도 뭣도 없는 이기심일 뿐이지.”
“그게 아니라, 나는…….”
태휘는 설민이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감정에 도취해서 남을 네 판단대로 좌지우지하려는 버릇 좀 고쳐. 그거 일종의 영웅 심리야. 난 네가 걔 찾는 일에 왜 그리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다. 걔가 잠수 탄 게 네 탓이라도 되는 듯이.”
“영롱이.”
“뭐?”
“걔, 걔 거리지 말고 제대로 이름 부르라고. 무슨 볼드모트야? 영롱이 이름 말하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해?”
또 시작이네. 자기 정곡 찔리니까 말 돌리기. 그리고 자기만 녀석을 아끼는 듯 구는 태도까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 거다. 입 밖으로 뱉으면 닳을까 봐 차마 못 부르는 이름도 있다는걸.
“내가 걜 뭐라고 부르든 신경 꺼.”
“하아, 씨발.”
설민은 욕을 뱉으며 작업실 안을 배회했다. 한참을 아무 말도 안 하고 혼자 화를 삭이는 듯하더니 문득 말했다.
“담배 있냐?”
태휘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그가 먼저 작업실을 나서려 일어서자, 설민이 담배만 낚아챈 뒤 어깨를 내리눌러 의자에 도로 앉혔다.
“지금 너랑 사이좋게 맞담배질할 기분 아니거든? 나 다녀오면 가라.”
설민은 황당해하는 태휘의 반응을 무시하고는 작업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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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끊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담배가 당기는 순간이었다. 옥상으로 가는 복도에는 SS엔터테인먼트 역대 소속 가수들의 사진으로 구성된 프로필이 벽면 가득 줄지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던 설민은 맨 처음에 걸린 ‘STORY’ 액자 앞에서 멈춰 섰다.
멤버들은 한껏 카리스마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그저 풋내 풀풀 나는 애송이들이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진 속에서 영롱과 어깨동무를 한 채 해맑게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영롱은 반대편에 있는 태휘 쪽으로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전 태휘의 말이 머리에 계속 맴돌았다.
‘단지 네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찾는다면, 배려도 뭣도 없는 이기심일 뿐이지.’
‘난 네가 걔 찾는 일에 왜 그리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다. 걔가 잠수 탄 게 네 탓이라도 되는 듯이.’
열 받게도, 놈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누구보다 현실주의자인 원태휘는 말이 없을 뿐이지, 입을 열면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태휘를 찾아온 이유는, 자신조차도 모르는 본심을 그의 진실의 입을 통해 깨닫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설민은 스스로 두 가지가 늘 궁금했다. 첫째, 자신이 왜 그렇게 영롱의 얘기만 들으면 버튼 눌리듯 발작하는지. 둘째, 자신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가까운 사이였던 태휘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지. 오늘 그 두 가지의 답을 다 얻었다.
첫째, 영롱의 잠적에 설민은 죄책감이 있다. 아무도 모르지만, 영롱이 돌아오지 않는 건 자신과의 ‘그 일’이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원태휘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다. 녀석 역시 영롱을 그리워하고, 걱정하고 있다.
15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다 번번이 얻는 건 좌절뿐이다. 구구절절 말만 늘어놓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과는 달리 태휘는 직접 찾으려는 노력까지 했다.
심지어 태휘는 자신을 경쟁 상대로조차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만 전전긍긍한다는 게 더 비참했다. 오래 알고 지내서 이제 다 안다고 자신했지만, 아직도 태휘와 영롱의 관계는 자신이 파악하기에는 너무 크고 방대해서 시야에 다 담지 못하는 거대한 빙하 같다.
20년 가까이 켜켜이 쌓인 그들만의 시간은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며 암석처럼 굳어 있다. 과연 그 빙하가 녹는 날이 오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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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년 11월 -
태휘가 크게 아팠던 일은 팀에게 위기인 동시에 전화위복이기도 했다. 우선 한밤의 응급실행 소식이 태휘의 부모님에게 전해지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고, 태휘는 연습생 생활을 관둘 위기에 처했다.
미성년자의 건강 상태도 살피지 못하는 무책임한 회사에 귀한 남의 집 자식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미 태휘의 곡으로 데뷔 앨범의 편곡 작업이 절반 이상 진행되었기에 그건 불가능했다.
결국, 소속사 대표가 바닥에 무릎 꿇고 빌다시피 해서 겨우 태휘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 덕에 SS엔터테인먼트는 그때부터 연습생과 소속 가수의 건강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데뷔 전부터 강행군이었던 연습 일정은 멤버들의 건강과 체력을 고려해 느슨하게 진행되었고, 계획했던 데뷔 시기를 조금 늦추더라도 태휘가 퇴원하고 마지막 멤버가 정해진 다음에 앨범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어찌 보면 소속사 입장에선 어린 연습생들이라고 만만하게 여기다가 큰코다칠 뻔한 일이었다. 그날 밤 응급실에 있던 태휘는 다음 날 바로 조모가 병원장으로 있는 서울의 모 대형 병원의 특실로 옮겨져 최상의 케어를 받았다.
태휘를 문병하러 온 한강, 설민, 영롱은 태어나서 처음 병원 특실 구경을 했고 축구 놀이를 해도 될 만한 넓은 크기에 태휘 집안의 어마어마함을 새삼 실감했다. 평소에는 태휘가 전혀 티 내지 않았기에 놀라움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예정에 없던 휴가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인 어린 멤버들은 숙소보다 좋다며 태휘의 입원 기간 내내 만화책과 게임기를 잔뜩 챙겨와 놀았다. 태휘는 과로로 인한 감기일 뿐인데 유난 떤 가족들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데뷔 준비가 늦어져 미안해하다가도, 모처럼 신난 멤버들의 모습을 보고는 한결 마음을 놓았다. 빡빡한 연습 일정과 학교 진도까지 따라잡느라 벅차하던 설민은 농담까지 할 여유가 생겼다.
“역시 리더야! 자기 한 몸 희생해서 우릴 살렸어.”
태휘는 병실 침대에 앉아 녹음기를 쥔 채 새로운 곡을 작업 중이었고, 영롱은 그 옆에 엎드려 가사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한강과 설민은 특실에 놓인 넓은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 만화책을 읽었다.
설민의 농담에 태휘는 정작 반응이 없었으나 영롱은 곧바로 다람쥐처럼 달려와 암바를 걸었다. 와중에 두 눈엔 눈물을 그렁그렁 담고는. 아직도 그날 밤의 일이 생생한지, 그때 숙소에 있었으면 그런 말 못 할 거라며 정색했다.
설민은 대놓고 서운해하며, 자기가 감기 걸려도 이렇게 걱정해 줄 거냐고 투덜거렸다. 영롱은 코웃음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바보는 감기 안 걸려.”
아무튼,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앞만 보고 달리던 연습생 4인은 조금은 휴가 같은 연말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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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년 12월 -
태휘가 퇴원하고 얼마 후, 영롱과 동갑인 계오은의 합류로 다섯 멤버가 모두 정해졌다. 더불어 최연소자로 맘껏 응석 부리던 영롱의 백일천하 또한 끝났다.
마지막 멤버를 뽑는 오디션에는 이미 뽑힌 멤버들도 함께했다. 멤버 중 제일 장신인 데다가, 어린데도 주눅 들지 않는 자신만만한 태도부터 보컬이라는 포지션까지. 영롱과 부딪힐 만한 부분이 다소 있었다. 그런 불길한 예감이 감도는 와중에 오은이 당당하게 물었다.
“혹시 리드 보컬이 정해졌나요?”
당시에는 ‘메인 보컬’이라는 말보다 ‘리드 보컬’이라는 말이 주로 쓰였다. 그렇기에 면접관으로 자리한 대표가 리드 보컬은 영롱으로 내정되었고, 이건 서브 보컬을 뽑는 자리라고 알려 주었다. 오은은 멀찍이서 영롱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중에 리드와 서브가 바뀔 수도 있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합창단을 해서 발성을 기초부터 배웠거든요.”
회사 관계자들과 멤버들 모두 놀란 눈으로 영롱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오디션 전부터 영롱은 마지막 멤버 후보인 오은이 자신과 동갑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몇 달뿐이었지만, 그 사이 막내 포지션을 은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멤버 모두가 영롱을 우쭈쭈 해 주던 분위기였기에, 형들에게 실컷 응석을 부리며 팀의 비타민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 와중에 태휘는 편애를 신경 써서 제일 자중했고.
지금은 마치 집안에서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막내에게 뒤늦게 진짜 막둥이 동생이 생긴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그 막둥이가 나타나자마자 하극상을 일으킨 셈이니. 영롱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나 쟤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말하는 영롱의 시선 끝에는 태휘가 있었다. 자신의 편을 들어 달라는 눈빛이었지만, 태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서브하기 싫으면 네가 더 열심히 하면 되겠네.”
“혀엉!”
영롱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휘는 오은의 지원 서류를 내려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저는 마음에 들어요. 음색도 영롱이랑 완전 다른 느낌이라, 오히려 잘 어울릴 것 같고.”
영롱의 눈빛은 원망에서 절망으로 바뀌어 갔다. 다른 멤버들도 태휘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행여나 영롱이 폭발할까 봐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태휘는 꿋꿋하게 오은에 대한 호감을 계속 내비쳤다.
“무엇보다,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이름이 계오은, 맞죠?”
“네.”
태휘는 종이 한구석에 뭔가를 적어 내리더니, 소리 나게 펜을 내려놓으며 선언하듯 말했다.
“팀 이름 나왔네요. 스토리(STORY). 멤버들 이름 이니셜 하나씩 모으면 딱 돼요. 컨셉이나 의미 부여하기도 좋고.”
“감사합니다!”
태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은이 우렁차게 인사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영롱을 향해 씨익 웃었고, 영롱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로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다들 난처해하고 있을 때 태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따라가 볼게요.”
“둘이 한 팀 되면 볼 만하겠는데. 정말 괜찮겠어?”
대표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안 그래도 영롱이 눌러 줄 사람 필요했잖아요.”
멤버들은 그제야 태휘가 꽤 오랫동안 마지막 멤버의 조건을 고민했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 시작될 이야기(STORY)의 ‘O’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 영롱과는 대비되는 음색을 가진 보컬리스트.
마지막으로 영롱을 견제해 줄 사람. 아직 데뷔도 안 한 마당에, 팀이 오래 가기 위해선 영롱의 응석을 받아만 줄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태휘는 사적인 감정에 치우침 없이 객관적으로 판단했고, 남들보다 한발 앞을 내다보고 준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늘 즉흥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영롱과는 정반대였다.
다행인 사실은, 그토록 기분파인 영롱이 고작 1살 형인 태휘의 말은 잘 들었다는 거다. 비록 앞에선 투덜댈지라도 뒤에서 태휘가 차분히 설득하면 꽤 잘 먹혔으니까.
영롱은 태휘와 단둘이 얘기 나누고 오더니, 오은을 마지막 멤버로 결정하겠다는 의견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당시엔 어떻게 설득했는지 나머지 멤버들은 알 길이 없었는데, 나중에 영롱이 말해 주었다.
“형이 내 부탁 하나 들어준대서, 걔 받아 주기로 했지.”
“무슨 부탁?”
“쉬는 날 같이 자연공원 가기로 했어.”
“이번에 네버랜드로 이름 바뀐 그 놀이공원?”
“이 겨울에 놀이공원을 간다고?”
한강과 설민이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며 되묻자 영롱은 세상 중요한 일이라는 듯이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나 놀이공원 가고 싶어 죽을 것 같단 말이야. 학교 가을 소풍도 빠졌는데! 롤러코스터랑 후룸라이드랑 바이킹 열 번씩 탈 거다~.”
잔뜩 신나서 의지를 다지는 영롱의 뒤로 어쩐지 사색이 된 태휘의 얼굴이 보였다. 지난번 듣기론 놀이기구 잘 못 탄다고 한 것 같은데.
그나저나 차영롱 설득하기 난이도 참 쉽네. 놀이공원 약속 한 번으로 이렇게 간단히 풀린다고? 물론 그 대상이 원태휘여야만 가능한 일이니, 완전 쉽다고는 볼 수 없지만. 태휘 입장에선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셈이었고.
아무튼, 둘이서 놀이공원에 다녀온 뒤로 영롱의 기분은 완전히 풀린 듯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오은과의 사이 또한 바로 좋아진 건 아니었다.
대신 두 사람이 경쟁적으로 보컬 연습에 임하는 바람에 단기간에 보컬 퀄리티는 월등히 좋아졌다. 그 덕에 녹음도 수월하게 진행했고, 다행히 데뷔 일정도 많이 늦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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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 5명이 모두 확정되고 데뷔가 다음 해 2월로 정해지면서, 다시 안무 연습과 앨범 녹음에 박차를 가했다. 와중에 12월 마지막 날, ‘STORY’ 5명은 매니저의 인솔하에 다 함께 동해로 새해 일출을 보러 가게 됐다.
당시 65퍼센트에 달하는 시청률을 기록한 최고 인기 드라마에 등장한 동해 정동진이 일출 명소로 유명해졌을 무렵이었다.
그 드라마의 광팬이었던 매니저가 좋은 기운을 얻어야 한다며 추진한 여행이었으나, 정작 멤버들은 데뷔 준비에 잠이 부족한 데다가 이 추위 속에 휑한 겨울 바다를 가자니 다들 죽상이었다.
멤버 중 해돋이 여행에 신난 건 당연히도 설민과 영롱뿐이었다. 한강은 귀찮았지만 강하게 표현은 못 하고, 태휘는 피곤했음에도 잠자코 매니저의 말을 따랐고, 오은은 대놓고 무슨 얼어 죽을 해돋이냐고 불평했다.
“잘 생각해 봐. 너희 데뷔하고 인기 많아지면 언제 또 다 같이 새해 일출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아니면 한동안 못 간다.”
멤버들은 이 말에 설득당해 결국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따라나섰다기보다는 승합차에 꾸겨 앉은 채 짐짝처럼 옮겨졌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5명의 첫 여행이었음에도 피곤함에 찌든 멤버들은 큰 감흥이 없었다.
반면에 동해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해돋이를 보기 위한 차들로 빼곡히 차서 완전 주차장 같았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발달하지 않은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려, 가는 데만 해도 자그마치 8시간이 걸렸다.
매니저가 전날부터 서둘러 일찍 출발했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면 고속도로에서 새해를 맞이할 뻔했다. 멤버들은 오밤중 차에서 내내 잠만 잤는데, 이럴 거면 차라리 집에서 편하게 자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할 정도로 해돋이에 무관심했다.
처음엔 좋아하던 설민과 영롱마저도 오랜 이동에 지쳐 녹초가 되었다. 그렇게 밤새 달려서 간 정동진 해변은 짙게 깔린 어둠 아래로 차와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가장 먼저 눈을 뜬 영롱은 멤버들을 다 깨워 댔다.
“다들 일어나! 바다야! 눈 좀 봐!”
밖을 내다보니 모래사장 위엔 정말로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눈 쌓인 겨울 바다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닌지라, 무덤덤했던 멤버들은 그 광경에 조금씩 설렘을 느꼈다.
매니저는 바닷바람이 차니 일출이 시작하면 그때 내리자고 했으나, 영롱은 차가 멈추자마자 문을 열고 바닷가로 내달렸다.
“차영롱! 저 새끼 저거! 얼어 죽어도 모른다!”
잠바도 안 챙겨 입고는 딸랑 후드티 차림에, 바닥까지 질질 끌리는 힙합바지로 눈과 모래를 다 쓸며 바다로 돌진하는 영롱의 뒷모습에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뒤따라 내린 설민이 영롱의 잠바를 찾으려 했지만, 이번에도 태휘가 빨랐다.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태휘는 잠바를 팔에 걸친 채 바로 영롱을 쫓아 달렸다. 하나둘씩 따라 내린 멤버들이 겉옷 지퍼를 턱까지 올리고 모자까지 뒤집어 써가며 추위를 막을 동안 영롱은 얼굴이 시뻘게질 때까지 온몸으로 찬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뛰어다녔다.
장시간 이동에 좀이 쑤셨던 건지, 그저 눈과 바다를 보고 흥분한 건지, 혹은 둘 다인지. 어쨌거나 자기가 뛰고 싶으면 추위고 뭐고 냅다 뛰어야 하는 녀석이었으니까.
“저거, 저거. 전생에 개새끼였을 거야.”
“평소 하는 짓은 개보단 고양이잖아요.”
매니저와 오은이 혀를 차며 말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영롱을 따라잡은 태휘가 잠바를 펼치고 뒤에서 덮으며 그대로 안았다. 그러자 강아지처럼 날뛰던 녀석은 바로 얌전해져 그대로 굳은 듯 멈춰 섰다.
‘멍멍이인지 고양이인지, 주인한테 잡혔네.’
나머지 멤버들은 둘의 모습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다가 이내 장난기가 스멀스멀 올라와 눈 뭉치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눈싸움을 시작했다. 숙소와 연습실을 떠나 하얗게 펼쳐진 눈밭에서 웃고 떠들며 모처럼 친구들과 왁자하게 이 시간을 즐겼다.
매니저가 사진 좀 찍게 모여 보라고 해도 아무도 들어먹지 않았다. 사실 멤버들은 이런 날이 앞으로 또 언제 올지 모른다는, 그런 예견조차 안 했다. 그저 이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는 법밖에 모르는 어린 소년들이었기에.
태휘와 영롱은 멤버들의 눈싸움에 끼지 않고 재미있다는 듯 지켜만 보며 그대로 한 몸처럼 계속 붙어 있었다. 마침 수평선 너머로 붉은 빛줄기가 씨실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해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손을 뻗어 일출을 가리켰고 웅성거림이 주변으로 퍼져갔다.
깔깔거리며 신나게 장난치던 세 명의 소년도 눈싸움을 멈추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핸드폰도 디지털카메라도 널리 쓰이지 않을 때라, 수동 필름 카메라를 든 사람 외에 그곳에 모인 대부분이 새해의 첫 일출을 오롯이 두 눈으로 담았다.
맨손으로 눈 만지고 놀아 뒤늦게 추위를 느낀 한강과 설민, 오은은 다닥다닥 붙어 서로 껴안는 바람에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세 명은 엉금엉금 눈밭 위에 뒤엉킨 발자국을 남기며 태휘와 영롱 곁으로 다가와 섰다.
일출을 보면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STORY’ 다섯 명은 아무 말도 없이 바다 너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얀 물보라를 머금은 채 반복적으로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파도는 거셌고, 불어오는 바람 역시 살을 에듯이 세찬데도 떠오르는 새빨간 해를 보니 가슴 한구석에 불같은 뜨거움이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멤버들의 코끝은 바닷바람에 빨개졌지만, 눈에는 태양의 일렁임이 담겼다. 해돋이에 시큰둥했던 멤버들도 이 순간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 여전히 태휘의 품에 안겨 있던 영롱이 조금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 이 순간을 영원히 못 잊을 것 같아.”
영롱은 평소에도 극적인 표현을 많이 쓰곤 한다. ‘태어나서 처음’, ‘죽도록’, ‘영원히’, ‘마지막까지’ 등등. 자주 그랬기에 멤버들 모두 그때마다 그러려니 하며 건성으로 듣고 넘겼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STORY의 해가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