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6. 널 기다리는 동안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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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STORY의 원태휘입니다. 이번에 저희 STORY의 음성 사서함3)이 개설돼서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처음이라 오늘은 리더인 제가 사서함 남기고요. 다음에는 저희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남길 거예요. 기대해 주세요.
그리고 저희가 데뷔한 지 이제 두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많은 사랑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는 STORY가 되겠습니다. 저희 후속곡 활동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어…… 다음 사서함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럼 전 이만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여러분 건강하시고 다음에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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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사서함.”
다림은 노트북 화면에 자동 재생되는 영상을 멍하니 보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금 들으면 완전 어린 데뷔 초기 태휘의 음성이 사진과 자막까지 입혀 유뷰(UVIEW)에 올라와 있었다. STORY가 다시 흥하니 이런 옛날 자료까지 새로 발굴되는 모양이었다.
90년대에는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도 대중화되지 않아 연예인들의 정보와 스케줄 등을 알릴 수 있는 통로는 신문을 제외하면 음성 사서함이 유일했다. 소속사에서 공지한 네 자리의 번호를 전화기에 누르면 연예인이 남긴 인사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차원한계의 반전 모습 | 레전드 아이돌 〈STORY〉 출연 예능 모아 보기’—
모니터에는 유뷰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다음 영상이 바로 이어졌다.
다림은 냉장고에 가서 맥주 한 캔을 꺼내 왔다. 모처럼 외부 일정이 없기에 집에서 밤새 STORY의 과거 영상을 역주행하다 보니 어느덧 아침이었다.
세기말, 그러니까 1990년대 말에는 방송국도 공중파 3사뿐이었고, 인터넷도 대중화되지 않았고, 핸드폰이나 디지털카메라도 없었다. 케이블 방송은 그때 막 생기기 시작한 데다가, 유료라는 인식 때문에 아무나 쉽게 접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남은 과거 자료는 방송 영상이나 잡지, 정규 앨범 및 콘서트 비디오 따위가 전부였다. 취재하면서 이미 수도 없이 본 영상들인데 혹시나 놓친 게 있을까 싶어 계속 뒤지다 보니 이제는 맞춤 목록에 STORY 영상만 가득했다.
지금이야 연예인이 개인 SNS에 포스팅 하나만 올려도 수십 개의 기사를 써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소속사가 보내 주는 보도자료, 방송이나 잡지에서 진행한 공식 인터뷰 외에 사적인 채널을 접할 방법이 없었다.
그 덕분에 가수들은 앨범 활동을 쉬는 몇 개월 동안 철저하게 비밀리에 공백기를 가졌고, 사생활은 어지간하면 노출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기사로 쓰려니, 암흑의 시대를 탐험하는 고고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멤버 4명이라도 인터뷰해 보겠다고 자신하던 다림은 설민과 한강 이후로 모두 막혀 버리자 막막하기만 했다. 아쉬운 대로 과거 영상이나 복습해 볼 수밖에. 안 부장이 약속한 취재 지원은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라인 공유는 개뿔. 그 양반도 허언증이야.”
혼잣말하는 습관은 술을 마시자 더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멤버들 인터뷰가 어렵다면 주변인들에게 접근해 이런저런 정보를 찔러본 다음 ‘측근피셜’ 보도를 내는 방법도 있다. 그러면 불확실한 정보를 정정하기 위해 본인들이 등판하곤 하니까 꽤 효과적인 편법이었다.
하지만 다림은 그런 식의 추측성 보도로 자신의 기사를 오염시키기 싫었다. 최대한 정공법으로 진행하고 싶었는데……. 멤버들 간의 빈틈을 찾아 침투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옛날 자료를 뒤지고 또 뒤져 가며, 조금이라도 멤버들의 정보를 얻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과거 방송이나 잡지 인터뷰를 통해 보이는 모습 중 과연 얼마나 진실일까? 연출일 수도 있고, 가식 혹은 이미지 메이킹일 수도 있고.
다림은 가능한 한 진실에 가깝게 파고들고 싶었다. 그래야 이 팀의 해체와 영롱의 잠적 이유를 연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STORY는 음악 방송에 비하면 예능 방송 출연이 적은 편이었지만, 멤버들의 관계성을 파악하려면 예능을 봐야 했다.
SS엔터테인먼트에서 시작부터 철저히 ‘아티스트’형 그룹으로 키웠기 때문에 1세대 아이돌치고 예능 프로그램에 많이 나오지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멤버들이 희화화되는 걸 최대한 막고, 신비주의를 고집한 게 다른 그룹들과의 차별화 전략이었다.
대신 모처럼 한번 출연하면 그 희귀성 때문에 더 크게 화제가 되고 팬들 사이에서도 파급력이 굉장했다. 다림이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예능은 멤버들이 여장하고 나온 방송이었다.
요즘 방송에서는 여장을 개그 코드로 소비하는 걸 지양하지만, 옛날에는 남자 연예인들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단골 아이템이었다. 특히나 세기말 예능에서는 아무 맥락 없이 여장하곤 했는데, ‘STORY’ 역시 피해 가지 못했다.
멤버 몇 명이 여장하고 명동 거리를 돌아다니는 설정이었고, 멤버들과 매니저들의 투표로 한강과 영롱이 여장 멤버로 결정되었다. 한강은 잘생긴 애가 얼마나 예뻐질지 궁금해서, 그리고 영롱은 제일 체구가 작은 멤버였기 때문에 어울릴 것 같다는 이유로.
예상대로 한강은 긴 생머리 가발에 롱스커트 차림으로 여자 배우 뺨치는 비주얼을 뽐냈으나, 쑥스러워서 거의 바닥만 보고 다녔다. 반면 영롱은 그동안 여장해 보고 싶었다며 세상 적극적이었다.
스스로 STORY의 팬이라는 설정까지 짜고 의상도 교복으로 골라서 멤버들에게 ‘오빠~ 사인해 주세요~!’ 하며 신나게 몰입했다. 영롱의 연기에 오은은 질색하며 피했고, 설민은 귀엽다며 얼굴에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와중에 여장할 사람으로 한강과 이설민을 적어 냈던 태휘는 투표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방송 내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방송에 불성실하게 임한 건 아니고, 나름 제일 바빴다.
학생인데 왜 이렇게 메이크업을 진하게 했냐며 입술에 바른 립스틱을 지워 주고, 영롱이 까불거리고 뛰어다니느라 치마가 올라가기라도 하면 쫓아다니며 내려 주고.
급기야는 명동 거리 촬영 중 한 남자 고등학생이 영롱이 진짜 여학생인 줄 알고 다가와 삐삐 번호를 묻자, 촬영인 걸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태휘가 갑자기 튀어나오고 말았다.
태휘가 그 남학생과 잠시 시비가 붙는 바람에 마침 지나가던 팬들의 이목을 끌어 인파가 몰리게 되자 영롱의 손을 붙잡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그 상황에서도 영롱은 뭐가 그리 좋은지 해맑게 까르륵 웃어 댔다.
그 모습에 설민과 오은은 질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와중에 한강은 촬영이 끝날 때쯤 캐스팅 매니저들에게 받은 명함을 양손 가득 쥐고 돌아왔다. 멤버의 각자의 성격과 관계성이 한눈에 드러나는 방송이었다.
그 때문인지 팬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온라인 탑골공원 열풍 이후, ‘STORY’ 관련 알고리즘 추천에 이 영상이 빠지지 않았고, 조회수와 댓글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 댓글 보기-----------------
┖ 김현*: 리버는 진짜 무슨 미스코리아인 줄
┖ STORY FOREVE*: 영롱이 귀여워♡
┖ 탑골말뚝*: 차영롱은 교복 입혀놓으니 완전 중딩같네
┖ 꼬꼬꼬*: 저때 급식이들 패션ㅋㅋㅋㅋ 깻잎머리에 실삔ㅋㅋㅋㅋ 줄인 치마ㅋㅋㅋㅋ
┖ 핵노*: 계오은이 질색하는 게 젤 웃김ㅋㅋㅋㅋ 동갑 막내라인♡
┖ 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내 동료의 비즈니스
┖ JUN*: 차영롱 직업만족도 최고
┖ JUN*: 이설민은 자기 일 아니라고 광대 폭발이네
┖ 밀크*: 원태휘 영롱이 짧치 겁내 신경 써
┖ shinh*: 저 남학생 불쌍... 원태휘가 칼차단했을 때 지렸을듯...
┖ 909*: 리버 왜 거절 못하고 명함 다 받아오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
이들이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이 워낙 적기도 했고, 강렬한 퍼포먼스 위주였던 데뷔곡 이미지와 반대로 멤버들끼리 꽁냥거리는 모먼트가 많아서 그런지 이 방송이 입덕 필수 영상이 된 듯 했다.
모든 아이돌 그룹이 그렇듯 멤버들 간의 관계성은 그 팀만의 매력을 보여 주는 정체성과도 같다. 이런 영상들을 수십 개 섭렵한 뒤, 다림이 파악한 STORY의 각 멤버들의 캐릭터와 관계성은 이랬다.
리버(한강)는 비주얼 담당이자 마이웨이 눈새 맏형. 원태휘는 무게감 있는 리더이자 프로듀서. 설민은 메인 댄서이자 설레발&오지랖 담당. 막내 라인 중 영롱은 메인 보컬이자 애교 담당. 그리고 오은은 서브 보컬이자 막내, 최장신, 막말을 맡고 있다.
영상을 보다 보면 영롱과 오은의 티격이 제일 빈번하게 벌어진다. 동갑이면서 보컬 라인, 둘 다 자기주장 강한 성격. 그렇지만 정반대의 성향. 게다가 팀 내 최장신과 최단신의 조합이었다. 절대적으로 영롱에게 불리한 피지컬 차이 때문인지 다행히 몸싸움까지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설민은 언제나 그런 막내들을 말리는 포지션이고, 태휘는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고, 맏형 리버는 진짜 신경도 안 썼다. 멤버들끼리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리버 혼자만 몰라 뒷북치는 상황은 이들의 반복되는 일상인 모양이었다.
유난히 태휘를 따르는 영롱의 모습이 종종 보이긴 했지만, 영롱은 오은을 제외한 모두에게 살가웠다. 태휘는 리더 위치에 있어서 그런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영롱이 제일 각별했을 텐데도 그걸 대외적으로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눈에 보여서 도리어 웃겼다.
또 재미있는 점은, 데뷔 당시 리버만 성인이고 나머지는 미성년자라 맏형이 위계를 잡기 쉬운 조합이었음에도 오히려 역전된 듯한 구도의 팀 분위기였다.
제일 개성이 강한 막내 둘이 팀의 색깔을 담당하는 보컬 파트를 맡고, 중간 나이의 두 명이 한 명은 작곡, 한 명은 춤을 맡아 기둥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가장 맏형인 리버는 팀에서 비주얼만—소위 말해 꽃 병풍—을 맡고 있다.
결국, 매운맛 동생 둘과 위로 갈수록 점점 유해지는 순한 맛 성격의 형들 셋 덕분에 나름 안정적인 팀워크가 형성된 듯 보였다.
그 와중에, 다림은 멤버들 사이에 뭔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설민을 인터뷰했을 때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가까운 시기부터 과거 영상까지 거슬러 보다 보니 그들의 관계성에 달라진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그 변화를 가장 알아차리기 쉬운 건 바로 영롱이었다. 영롱은 자기감정이나 컨디션을 가장 못 숨기는 멤버였다. 데뷔 당시와 해체 직전을 비교해 보면, 태휘와 영롱의 사이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게 보였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체 직전의 영상들에서 둘은 거의 남남처럼 행동했다. 이 여장 영상만 봐도, 초반에 태휘가 영롱을 얼마나 챙겼는지 알 수 있다. 영롱과 오은이 3년 내내 한결같이 견원지간이었다면, 영롱과 태휘의 변화는 꽤 극적이었다.
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던 걸까? 그런데 당사자 중 한 명은 행방불명이고, 한 명은 인터뷰에 철벽을 치는 인물이고. 그 입 가벼운 설민마저도 그 정도이니 나머지 멤버들이 입을 열 리 없고.
이런 멤버들 간의 비화는 팬들 사이에 도는 말들이 그나마 신빙성이 있는데. 얼마 전 공항에서 만난 수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물어보지 못한 게 뒤늦게 후회됐다. 그때 수희의 단호한 태도 때문에 차마 말도 못 꺼냈겠지만.
“하긴 팬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지. 누구만 봐도…….”
다림은 산발해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겨 올리며 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위이잉.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다림은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타이밍 끝내주네. CCTV가 있나? 도청하나?
“귀신같네.”
자신이 이 취재를 시작한 이유. 어쩌면 모든 일의 시작이었을 이름. 다림은 잠시 망설이다가 노트북 볼륨을 줄이곤 전화를 받았다.
“어, 지애야.”
- 일요일인데 일찍 받네? 통화 괜찮아?
잠시 핸드폰을 떼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평소라면 늦잠 잘 시간이니까 놀랄 만하긴 했다. 사실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밤샌 건데.
“어.”
- 너 괜찮으면 동창들 만나는 약속 다음 주 주말에 잡으려고!
해맑은 그 말에 눈동자를 굴리며 난처함을 드러냈지만, 통화 상대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저번부터 동창들과 만나서 밥 한번 먹자고 하긴 했으나, 다림은 내키지 않아 확답을 피하고 있던 터였다.
단둘이 만나는 거면 모를까, 별로 친하지 않은 동창들까지 만나면 귀찮은 일이 많았다. 연예부 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연예계의 가십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친구들에 이골이 나 동창 모임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지애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다림이었지만, 동창 모임 약속은 조금 곤란했다.
- 그럼 넌 나랑 둘이 보자! 톡으로 괜찮은 날짜 알려 줘.
전화 너머로 망설임을 알아챘는지 결국 따로 약속을 잡기로 했다. 다림은 전화를 끊기 직전, 노트북에 재생되고 있는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화면 속에는 차영롱과 원태휘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지애야. 나 물어볼 거 있는데.”
- 어, 뭔데?
“차영롱이랑 원태휘, 언제 싸운 적 있어?”
- 아, 뭔가 했네. 그건 왜?
“그냥. 취재 차. 팬들한테만 알려진, 그런 일 없었어?”
- 글쎄다. 내 기억엔 딱히 그런 일 없는데…….
지애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뭔가가 떠오른 듯 말했다.
- 아, 3집이랑 4집 사이 때인가? 그때 영롱 오빠가 울고, 태휘 오빠가 쫓아간 적은 있었어.
그 말에 다림은 얼른 노트북에 손을 뻗어 메모를 남겨 놓았다. 3집이랑 4집 사이라……. 그럼 자신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때가 정확히 맞는데.
- 근데 크게 싸웠으면 쫓아가지도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않아?
“그러게. 알았어. 고마워.”
이 정보가 크게 도움이 될진 알 수 없으나, 워낙에 자료가 없기 때문에 팬들의 후기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21세기의 연예인들의 취재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요즘에는 기자들이 가만히 있어도 자기들이 알아서 막 기삿거리 뿌려 주는데.
그렇게 허겁지겁 통화를 마무리하고 나니 다림은 뒤늦게 좀 미안해졌다. 오랜만에 한 통화였는데 다정한 말은커녕 일방적으로 묻기만 했네.
게다가 지금 이 친구는 되도록 여러 지인을 한 번에 만나야 편한 상황이었다. 자기 때문에 따로 또 시간 뺏게 만들고.
이런 식으로 지애와 통화하고 나면 꼭 후회되는 게 몇 가지가 생기곤 했다. 이토록 무심한 친구와 15년 동안 우정을 유지해 주는 지애도 참 신기했다.
고개를 들어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니 다른 STORY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번 영상은 자신도 처음 보는 거였다. 업로드 날짜를 보니 바로 어제 업로드된 영상. 아마 팬들이 최근 새로 발굴해 올린 유물 영상인 듯했다. 다림은 줄여 뒀던 볼륨을 도로 키웠다.
‘스타를 알고 싶다!, 오늘의 스타는 요즘 10대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5인조 그룹 STORY입니다!’
‘스타를 알고 싶다’는 당시 유명 연예인의 하루를 24시간 밀착 취재해서 다큐 형식으로 보여 주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관찰 예능 방송이었다.
무대 밖 멤버들의 대기실과 연습실 풍경 그리고 집에서의 모습들을 속속들이 보여 주었기에 인기가 많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여기에도 나온 적 있구나?
VJ의 소개 멘트 이후 전환된 장면에서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다림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세를 고쳐 앉고는 노트북을 최대한 가까이 당겨 들여다보았다.
‘여기는 STORY 멤버들의 숙소입니다. 과연 멤버들은 숙소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지금, 만나러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VJ는 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더니, 숙소에 있는 방문을 다짜고짜 열고 카메라부터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비몽사몽 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리얼하게 담겼다.
다시 한번 영상을 되돌린 다림은 조금 전 숙소 외관을 보며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나 저기 가 봤잖아!”
◀◀◀
- 199△년 4월 -
4월이었어도 완연한 봄이라기엔 아직 좀 쌀쌀한 날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다림과 지애는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내에 화단 앞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있었다.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 바지를 받쳐 입은 두 소녀는 워크맨4)의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누어 꼈다.
다림은 교과서를 무릎 위에 받치고는 편지를 쓰고 있었고, 지애는 그 옆에서 오늘 하교 후 스타샵5)에 들러 사 온 STORY의 초상권 사진을 한 장씩 감상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소속사에서 공식 굿즈를 발매하지 않았고, 각 가정에 컴퓨터 및 프린터 등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터라 연예인 관련 상품들을 오프라인 사설 매장을 통해서만 구매할 수 있었다.
이어폰에서는 STORY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다림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있지만, 옆에 있는 지애처럼 몸으로 리듬을 타며 노래를 따라 부를 정도로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학창 시절 다림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대학생 언니의 영향으로 락 음악, 그것도 J-Rock을 먼저 접했다.
자고로 금지된 것이 더 끌리는 법이었던 사춘기 시절. 당시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이어서 J-Pop은 모두 어둠의 경로를 통해 접할 수 있었는데 가슴 속에 흑염룡을 품고 있던 중2 소녀는 그 어둠에 더 매료됐다.
그때쯤 한국 가요계에는 ‘꽃미남’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미소년으로 구성된 대 보이 그룹이 마구 쏟아져 나오며 또래의 중고등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다림은 댄스 음악은 취향이 아닐뿐더러 더구나 남자애들 무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베프였던 지애는 평범한 10대에 더 가까웠다. 수없이 쏟아져 나온 남자 아이돌 그룹 중 지애를 사로잡은 건 STORY였고,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뺏은 건 리드 보컬 영롱이었다.
지애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 언제나 열정적이었고, 그 열정과 애정을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표현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음악을 가볍고 얕게 취미 생활로만 즐기는 다림과는 완전히 다른 타입이었다.
하여튼 그 성격 때문에, 다림은 지애에게 이끌려 관심도 없던 STORY의 숙소까지 오게 된 것이다.
1세대 아이돌이 활발하게 활동할 당시에는 소속사 사무실이나 멤버들 집 앞에 팬들이 찾아가는 걸 영업 방해나 사생활 침해의 논란거리로 보지 않고 비공식 행사의 연장처럼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랬기에 그들의 집 주소를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열정이 넘치던 중학생 유지애는 입덕 2개월 만에 PC 통신에서 ‘STORY’ 숙소 주소를 알아 와서 ‘오빠’들을 직접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다림은 그들이랑 시간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남의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린다니,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지애가 ‘너는 이름이랑 안 어울리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라며 막무가내로 조르기에 어쩔 수 없이 이 무모한 원정에 함께 했다.
같이 안 가 주면 혼자라도 가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혹시나 영롱을 만났다가 길바닥에서 혼절이라도 하면 큰일이니— 따라나선 것도 있지만 애초에 다림은 지애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을 몰랐다.
“이 사진 진짜 귀엽지 않냐?”
지애는 보고 있던 사진 한 장을 다림에게 내밀며 물었다. 이미 100번은 반복한 질문에 다림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편지 쓰기에 몰두했다. 다림이 쓰고 있는 편지는 지애의 팬레터였다.
엄청난 악필이었던 지애는 다림의 어른스러운 글씨체를 부러워하더니, 어느 날 팬레터를 쓰고 싶은데 대신 써 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지애가 내용을 적어 주거나 불러 주면 다림이 옮겨 적는 식으로.
앞서 말했듯이, 다림은 지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그렇게 여러 번 팬레터 대필을 도와줬다. 안타깝게도 지애는 숙소 원정 중 멤버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기에 직접 전하지 못하고 우편함에 꽂아 두는 거로 만족해야 했지만.
단 한 번도 연예인에게 팬레터 따위를 써 본 적 없는 다림은, 지애가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쓴 편지 내용을 옮겨 적으며 ‘이런 쓸데없는 내용이어도 괜찮은 걸까?’ 싶었다.
팬레터의 절반은 시시콜콜한 일과와 아무 의미 없는 말들로 가득 채워졌는데, 과연 영롱이 일개 팬 한 명의 일상과 생각을 궁금해할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은 ‘오빠 노래 정말 잘해요, 목소리 진짜 좋아요, 너무 귀여워요’ 등등 찬양하는 내용만 가득했다.
다림은 열심히 적어 내려가던 손을 멈추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 얘기 맨날 지겹게 들을 텐데 뭐 하러 또 해?”
그러자 지애는 혀를 쯧쯧 차며 뭘 모른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오빠가 누구에게 몇 번을 들었든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그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게 중요하지.”
다림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인상을 썼다.
“이런 편지 수천 장 받아서 어차피 누군지 기억도 못 할 텐데.”
“무슨 샌님 같은 소리야? 기억해 주길 바라고 쓰는 게 아니야. 내가 누군지는 모르더라도, 이 마음만을 전하고 싶어서 쓰는 거지.”
나름 철학적인 말에 다림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는 대필 작업을 마무리했다. 다 쓴 편지를 건네자 어린 철학자는 해맑게 웃으며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고이 넣은 뒤 영롱의 사진 스티커로 덕지덕지 봉했다.
지애는 보고 있던 영롱의 사진 한 장을 편지 봉투 위에 포개더니 다림에게 보여 줬다.
“이 사진이 제일 귀여운 거 같아! 오빠 보면 여기 사인 받아야지!”
“근데 왜 다른 팬들 아무도 없어? 오늘 안 나오는 거 아니야?”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데뷔 이후 ‘STORY’ 숙소 앞에는 하루가 멀다고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에 지애는 귀에서 이어폰 빼고는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스케줄 바뀐 거 있나 사서함 듣고 올게.”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잖아.”
“그사이에 바뀌었을지도 몰라. 동전 있어?”
다림은 한숨을 내쉬고는 동전 지갑을 꺼내 남아 있는 동전을 헤아려 넉넉히 건넸다. 지애는 동전들을 꼭 쥐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뛰어갔다.
“후딱 갔다 올게!”
다림이 알기로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는 저 멀리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다른 사람이 쓰고 있으면 한참 걸릴 수도 있는데, 그사이에 나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저 대범함이라고 해야 하나 무모함이라고 해야 하나, 저 추진력 하나만큼은 대단하다고 느꼈다. 숙소 앞에 혼자 남겨진 다림은 지애가 두고 간 편지 봉투를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이름을 안 썼다는 걸 깨닫고 봉투 겉면에 ‘영롱 오빠에게’와 ‘지애가’를 썼다.
그러고는 워크맨에서 ‘STORY’ 1집 테이프를 빼고 자신이 직접 편집한 J-Rock 믹스 테이프를 넣고 재생했다. 이제야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어서 신나 하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가 꺼졌다.
그 원인을 파악한 다림은 순간 짜증이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유지애, 진짜. 건전지 다 썼잖아!”
아직 워크맨이 없던 지애는 다림의 워크맨으로 STORY의 노래를 듣곤 했다. 용돈 모아서 워크맨 산다고 말만 하고 숙소 오는 차비로 다 쓰고 있으니, 대체 언제 사려나? 다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중에 공중전화비에 건전지값까지 다 받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찰나, 앞에서 묘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누군가가 자신을 마주 보며 쪼그려 앉아 있었다.
“건전지 다 썼어?”
“엄마야……!”
다림은 순간 놀라 들고 있던 워크맨이고 편지고 다 공중에 내동댕이쳤다. 눈앞에 있던 영롱은 저글링 하듯이 그것들을 받아 냈다.
“얘, 다 던지면 어떡하니?”
영롱이 까르르 웃는데도 다림은 넋이 나가서 멍한 상태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영롱의 뒤에는 커다란 벤이 서 있었고, 남자 둘이 차례대로 내리고 있었다. 지애가 매일 ‘STORY’ 얘기를 하긴 했지만, 관심이 없던 터라 멤버들 이름을 다 외우지 못했다.
유일하게 이름과 얼굴을 매치하는 멤버는 팬레터의 주인공인 영롱뿐이었다. 언제 벤이 도착하고, 코앞까지 영롱이 와 있던 건지. 얼떨떨한 사이에 영롱은 태연히 다림에게 워크맨을 건네주고 편지의 겉봉을 확인했다.
“지애? 아! 그 글씨 엄청 예쁜 친구가 너였구나?”
영롱은 그동안 받은 팬레터를 다 읽고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다림을 지애라고 오해한 모양인데, 다림은 자신이 지애가 아니라고 설명하기엔 너무 놀라고 정신이 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림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다.
‘유지애 빨리 와 유지애 빨리 와 유지애 빨리 와 유지애 빨리 와 유지애 빨리 와!!!’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겨우 이르자, 아까 내동댕이친 것 중 바닥에 떨어진 영롱의 사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애가 사인받고 싶다고 한 그 사진이었다. 다림은 얼른 사진을 주워 주머니에 있던 펜과 함께 영롱에게 내밀었다.
“여기……! 사인해 주세요……!”
영롱은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펜과 사진을 받았다.
“이 사진이 벌써 나왔어? 빠르네~.”
그때 차에서 내린 멤버 둘 중 한 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영롱아, 들어가자.”
다른 한 명은 선글라스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채 이미 숙소를 향해 쌩하니 달려가고 있었다.
“형, 내 팬이래~. 사인 좀 해 주고.”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다리려는 듯 뒤에 서 있었다.
“근데 형 이 사진 귀여워? 난 좀 별로인 거 같은데~.”
영롱이 사진을 보여 주자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다림을 힐긋 내려다보고는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넌 항상 귀여워.”
무뚝뚝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스윗한 멘트에 다림은 어리둥절함을 느끼고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영롱은 그 말에 만족한 듯 까르르 웃으며 그의 어깨를 찰싹 때리고는 사진 위에 사인했다.
뭐야? 완전 여우네. 자기가 원하는 말 듣고 싶어서 괜히 별로인 것 같다고 해 본 거잖아. 그때 영롱이 사인을 마친 사진을 건네며 말했다.
“스케줄 취소돼서 우리 오늘 안 나오니까~ 일찍 집에 들어가~. 알았지?”
굳어 있던 다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롱은 옆에 있던 소년에게 팔짱을 낀 채 숙소로 향하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혼자서 다림에게 돌아왔다. 그러더니 매고 있던 가방을 열어 안을 뒤지면서 말했다.
“우리가 지금 지갑이 없어서……. AA 두 개 맞지?”
영롱은 가방에서 자신의 CD 플레이어를 꺼내 뒤집더니 건전지 두 개를 빼서 건넸다. 다림은 눈만 끔뻑이며 영롱의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노래 못 들으면 심심하잖아!”
영롱이 해맑게 웃으며 말하자, 다림은 얼떨결에 손을 뻗어 건전지를 받았다.
“조심히 가.”
영롱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다시 깡충깡충 뛰어 아파트 쪽으로 향했다. 아파트 입구에는 아까 그 소년이 영롱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롱이 등에 업히듯 앵기자 그 소년은 영롱을 질질 끌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다림은 손에 건전지 두 개를 받아든 채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방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실감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내 멈춰있던 머리를 굴려, 이 사실을 지애가 알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재빠르게 생각해 보았다.
대신 편지 건네주고 사인까지 받아 줘서 고마워할까? 아니면 영롱이 다림을 지애라고 오해한 것부터, 영롱의 상냥한 팬 서비스를 팬도 아닌 다림이 겪었다는 사실에 속상해할까? 다림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니 후자의 반응이 더 선명하게 그려졌다.
게다가 그놈의 사서함 듣겠다고 잠깐 자리를 비운 그 찰나에 이 모든 것이 벌어졌다는 걸 알면? 지애는 엄청난 절망에 빠질 게 분명했다. 다림은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덜컥 겁이 났다.
고개를 돌려 아직 지애가 오직 않는 걸 확인한 뒤 사인받은 영롱의 사진을 교과서 사이에 껴 두고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던 척 원래 있었던 대로 이어폰을 귀에 끼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지애가 터덜터덜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다림아~. 오늘 스케줄 취소됐대~. 안 나오는가 봐~.”
“그, 그래?”
다림은 모르는 척하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애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바닥에 있던 가방을 들쳐 메며 말했다.
“응. 편지만 우편함에 넣고 가야겠다. 편지 어디 있어?”
“나한테! 내가 넣고 올게!”
다림은 지애가 말릴 틈도 없이 후다닥 달려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가 우편함 앞에 섰다. 가방을 열어 우편함에 편지를 넣는 것처럼 행동하고 돌아 나오자, 지애는 아무 의심도 못 하는 듯했다.
“우리 스티커 사진 찍고 노래방이나 가자! 너 여기 와 줬으니 내가 쏠게.”
“그래.”
다림은 영롱의 사인이 들어 있는 자신의 가방이 천근만근이나 된 것처럼 무겁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도 영롱의 해맑은 미소가 생생하게 떠올라 신기했다. 자신의 취향은 전혀 아니었음에도, 지애가 왜 그토록 좋아하는지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