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7. Observer (03:13) <오은 s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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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아까 교수님 찾는 전화 있었는데요.”
수업을 마친 오은이 연구실에 들어오자마자 조교가 뒤따라오며 말했다. 오은은 피곤한 듯 목을 매만지며 다른 손으로 메모를 건네받았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매니저분이라던데요.”
“아.”
이름을 보니 누구인진 알겠는데……. 의아한 점은, 웬만큼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라면 핸드폰으로 연락할 텐데 학교 사무실로 전화했다는 거다. 오은은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무슨 일이라고는 얘기 안 하고?”
“네. 처음엔 교수님 번호 알려 줄 수 있냐고 물으시더니 제가 곤란하다고 하니깐……. 시간 되실 때 전화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요. 고마워요.”
인사이자 이제 그만 나가 보라는 신호였음에도 어째선지 조교는 나가지 않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더 할 말 있나요?”
“저 교수님……. 옛날 영상 봤어요. 멋있으시던데요.”
아, 그 얘기인가. 확실히 요즘 그놈의 온라인 탑골 공원인가 납골 공원인가 때문에 과거를 언급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거부감이 드는 건 아니나, 그동안 모르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알게 됐는지 새삼 유명인 취급을 받으니 기분이 묘하긴 했다.
오은 입장에선 10대 때 그룹으로 정상의 자리를 한 번 찍은 이후 혼자 노력해서 솔로 가수로서 인정을 받은 지도 오래라 그룹 시절 얘기는 왠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그룹 후광이 있었다는 걸 부인 못 하지만.
지금은 한국예대 보컬학과 교수직을 맡아서, 방송 출연보다도 앨범 발매와 공연 위주로 활동할 뿐이라 연예계 이슈와는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아주 가끔 예능 토크쇼의 게스트로 나가면 그때 잠깐 이슈가 될 뿐이다. 그마저도 언젠가 그룹 시절 얘기 한 번 잘못 꺼냈다가 리더에게 한 소리 들은 뒤로는 잘 안 나가게 됐고. 체감상 STORY 시절은 가수 활동보다도 그저 자신이 지내 온 어린 시절처럼 기억됐다.
‘남자애들 5명이서 우당탕 재밌는 일 참 많았지.’
오은은 애써 표정 관리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조교는 —자기 딴에는 칭찬이라고 생각했을— 말을 건넸다.
“교수님이 메인 보컬보다 노래 더 잘하시던데요.”
잘 관리하던 표정이 순간 무너질 뻔했다. 영롱과의 실력 비교는 그룹 시절 얘기에서 빠지지 않는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더는 표정 관리가 어려워 여기서 대화를 끊어야 했다.
“당연하죠. 이만 나가 봐요.”
그제야 조교는 눈치를 챙기고 얼른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갔다. 오은은 그동안 명상원을 다니며 배운 호흡법을 실시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코로 4초 숨 쉬고…… 7초간 숨 참고…… 입으로 8초 동안 내뱉고…….
자신의 원래 성질대로 했다면 이렇게 오래 교수직을 유지하지 못했을 거다. 최근 몇 년간 명상원에서 스트레스와 화를 줄이는 호흡법을 배운 덕에 가능한 일이었지.
대학에서 노래를 가르치는 일은 어릴 때부터 가수와 더불어 제2의 꿈이었다. 그래서 데뷔했을 때 리드 보컬이 되지 않아도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먼 미래를 봤으니까.
그래도 나름 젊은 나이에 두 가지 꿈을 다 이뤘으니,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명상도 그 최선의 방법 중 하나였고.
오은은 겨우 화를 진정시키고 난 뒤에야 손에 쥐고 있던 메모지를 발견했다.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수상하긴 했지만, 호흡법을 실행해서 그런지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진 기분이었다. 편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사회성 좀 발휘해 볼까? 오은은 그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형. 저 오은이요. 오랜만이에요. 저야 잘 지내죠. 형은 뭐 하고 지내세요? 그때 무슨 기획사 차렸다고 들었는데 이후 소식을 모르네. 아아, 그렇구나. 네. 네. 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자니, 어느새 너그러움은 사라지고 서서히 표정이 차갑게 굳어갔다.
“……아니요. 사실 아니에요. 우리끼리 얘기한 것도 없고……. 몰라요. 차영롱 그 새끼 우리랑도 연락 끊은 지 오래라니까요. 태휘 형도 모르죠.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요?”
그의 대답에 오은은 곧바로 책상 위에 있던 종이에 이름을 메모하며 되물었다.
“안경미 기자요? 누군지 기억 잘 안 나는데. 어릴 때 누나 누나 거리면서 친하게 지낸 기자들이 한 둘이어야 말이지. 지금 어디 연예부 부장이라고요? 아, K엔터매거진…….”
통화 상대의 말이 장황하게 길어지자, 오은은 불쾌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형, 이런 얘기 불편해요. 오랜만에 전화해서 뭐야, 진짜. 인터뷰는 무슨 인터뷰요? 안 해요! 형, 그 기자한테 무슨 떡고물이라도 받았어요? 아, 왜 욕을 하고 그래, 씨발! 더 할 얘기 없으니까 끊습니다!”
씨발 새끼라니, 뭐야! 이 씨발 새끼가! 욕하고 싶은 게 누군데! 로드 매니저 뛴 지 반년 만에 팬들한테 손찌검한 거 태휘 형한테 걸려서 잘린 새끼가! 백만 년 만에 연락해서 기자한테 뭐 팔아먹을 소스 없나 껄떡거려? 회사 잘 망했다! 개새끼!
자신이 K엔터매거진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얼마 전 설민이 단톡방에서 말한 그 기자가 있는 곳이었다. 어쩐지 직접적인 인터뷰 컨택이 안 들어온다 했더니, 이제 주변인을 이용하겠다 이건가?
아까 조교의 말도 그렇고, 지금 전화도 그렇고 설민의 말대로 확실히 관심이 집중되고 있긴 한 것 같다.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을 듯한데, 언제까지 이렇게 무시할 수 있을지. 정말 새로운 대책이 필요한 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오은은 알고 있다. 제일 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대책이고 뭐고 소용없다는 걸. 오은은 아까 조교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교수님이 메인 보컬보다 노래 더 잘하시던데요.’
활동 당시에도 팬들이나 가요 전문가들 사이에서 둘의 보컬은 많이 비교당했다. 그 때문에 비교 자체가 지긋지긋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그래서 아까도 욱했던 거고.
미취학 아동 때부터 합창단 활동을 해 온 오은은 호흡과 발성, 악보 이해하는 법까지 체계적으로 배운 티가 나는 안정적인 보컬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에 비해 영롱은 음색빨이라는 평이 주였다.
영롱은 예고에 가기 전까진 전문적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그저 취미로 노래 부르길 좋아하는 아이였다. 예고에 진학한 것도 태휘를 따라간 것뿐이지, 노래에 큰 뜻이 있어서 간 것도 아니었다.
노래하는 법을 따로 배운 건 아니지만 타고난 음역대가 높은 편이었고, 변성기를 맞지 않은 듯 맑은 목소리가 영롱의 무기였다. 그에 비하면 오은은 본인이 느끼기에도 목소리 자체에 매력은 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룹에서 메인 보컬의 음색은 그 그룹의 색깔과도 같다. 그걸 알고 있던 오은은 더는 메인 보컬 자리를 고집하지 않았다. 확실히 영롱의 음색이 자신보다 매력이 있었으니까. 비록 활동 내내 영롱과 부딪히긴 했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그러므로 STORY에서 메인 보컬 영롱의 존재는 클 수밖에 없다. 만약 이 분위기에 휩쓸려, 또는 압박에 못 이겨 재결합하게 된다 해도 영롱이 없다면 그야말로 불완전한 이야기—STOR—가 되는 거다.
그 모양새를 멤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가장 첫 난관인데, 이건 나머지 4명 얘기를 나눠야 하는 부분이었다.
한강 형은 대세의 의견 혹은 리더의 말에 따를 게 뻔했다. 설민이 형은 개인적으론 내키지 않겠지만, 워낙 사업 수완이 밝으니 유연하게 결정할 사람이었다. 태휘 형은 그 속을 영 모르겠고.
오은 자신은 솔직히 그림만 잘 만든다면 4인의 재결합도 나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5명이 모이는 게 99퍼센트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차선을 선택해야겠지.
그룹 활동할 때 서브 보컬 포지션에 만족하기로 했지만, 파트 욕심을 완전히 비웠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땐 어렸었기에 영롱과 비교하는 주변의 얘기에 흔들리기도 했다.
영롱의 독보적인 음색을 인정하면서도 가창력 부분에선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는데’라고 수도 없이 생각했다. 그런 오은의 마음을 리더와 프로듀서가 잘 이해하고 지도해 줘서 나중엔 조금씩 마음을 놓게 됐지만.
지금은 막상 자신이 영롱의 파트까지 소화하는 그림을 상상하니 나쁘지 않았다. 멤버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닥치고 있는 거지.
15년 동안 꾸준히 가수 활동을 하며 깨달은 건 모든 상황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거다. ‘무조건 5명이 아니면 안 돼!’, ‘이 파트는 이 멤버 아니면 안 돼!’ 이런 태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정점에 있는 가요계에 그런 성역은 어디에도 없다.
골수팬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걸 알고 그래서 더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오은 개인의 생각은 이렇지만, 리더 태휘의 결정을 존중하니 아무 말 없이 따를 뿐이었다. 예전부터 태휘의 판단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놓치고 싶진 않았다. 또 모르지, 자신이 영롱의 파트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는 걸 본다면 숨어 있던 녀석이 정색하며 돌아올지도. 상상하니까 그 특유의 하이톤이 귓가에 생생히 울리는 듯했다.
‘야, 계오은 너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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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년 6월 -
“야, 계오은 너어어!!!”
음악 방송 무대를 앞두고 대기실에서 게임하며 메이크업을 받는 오은에게 영롱이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영롱이 손에 쥐고 나타난 잡지를 보고 ‘올 게 왔군.’ 싶었지만 오은은 게임기를 들여다보며 모르는 척했다.
“뭐가?”
“너 ‘하이틴스타’ 인터뷰에서 같이 방 쓰기 싫은 멤버로 나 썼더라?”
오은이 보기에 영롱은 별 시답지 않은 일로 쉽게 흥분하곤 했다. 자신이 예상한 대사에서 하나도 벗어남 없이 그대로 다 읊을 줄이야.
“사실인데, 뭐. 그럼 거짓말하냐?”
“흥! 그래서 나도 너 썼다!”
정말 유치해 가지고. 첫 만남에서 대놓고 ‘나 쟤 마음에 안 들어!’ 그러더니 사사건건 트집을 거는 게 습관이 됐네. 물론, 처음에 그 원인을 제공한 건 오은 자신이긴 했지만.
오은은 하고 싶은 말 못 하고 꿍하고 있는 건 질색이었다. 그게 하필 리드 보컬이었던 영롱을 자극하는 바람에 첫 만남부터 불꽃 튀는 관계가 되었다.
하기야, 둘의 성격을 봐선 설령 첫 만남을 무사히 넘어갔다고 가정하더라도 언젠가는 부딪혔을 거다. 오은은 애교 많고, 숨 쉬듯 귀여움 떨고, 본인이 세상의 주인공이어야 하는 어린애 같은 성격은 질색이었다.
자기보다 동생이면 말을 안 해. 오히려 생일은 몇 달 빠르면서. 그렇다고 자기보다 조그만 녀석을 형 취급해 주긴 죽어도 싫고. 그런 영롱을 다른 멤버들은 잘 받아 주었다면, 오은은 솔직한 말로 정곡을 찌르며 뼈 때리는 타입이었다.
같이 활동한 지 1년이 지나도 저놈의 성격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오기가 생겨 더 까칠하게 반응해 주고 싶어질 뿐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같은 경우도.
“널 싫어할 수도 있지, ‘저와 룸메이트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래야 하는 법이라도 있냐? 저 새끼 진짜 완전 도끼병에 왕자병이야.”
그런 말을 대놓고 들으면 영롱은 입술을 꾹 깨물고 손까지 부들부들 떨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좋아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던 듯했다.
“차영롱. 너 내가 아니라 다른 형들한테도 이렇게 다 따지고 다닐 거야?”
“아니~? 안 그러지! 왜냐하면 그럴 일은 없으니까! 리버 형은 당연히 안 그러고, 설민이 형도 절대 그럴 리 없구, 태휘 형은 1년 넘게 내 룸메이트잖아~.”
영롱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하더니 궁금했던지 바로 들고 있던 ‘하이틴스타’ 잡지를 넘겨 다른 멤버들의 답변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뿌듯하게 ‘하하하!’ 웃더니 말했다.
“이거 봐라.”
‘Q. 같이 방 쓰기 싫은 멤버와 그 이유는?’
“난 당연히 개오은 너 썼고~. ‘리버: [설민] 말이 많아서 시끄러울 것 같다’, ‘설민: [태휘] 리더라서 잔소리할 것 같다’ 그리고 태휘 형. 태휘 형은…….”
그새 게임기를 내려놓고 눈을 감은 채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오은은 쩌렁쩌렁하던 목소리가 잠잠해지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떠서 영롱을 바라보니 이젠 세상이 아니라 우주가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잡지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완전히 넋이 나가 있는 녀석의 손에서 잡지를 빼앗아 보니 오은조차도 놀래서 잡지를 떨굴 뻔했다.
‘태휘: [영롱] 이유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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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프로그램 녹화에 초상권 사진 촬영까지 마치고 늦은 밤 콘서트 연습을 위해 회사로 향하는 차 안은 숨 막히는 냉랭함으로 가득했다. 그 냉기의 발원지는 차영롱이었다.
귀엽고 발랄한 컨셉의 후속곡 무대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원래대로 싱글싱글 웃으며 노래하더니, 방송을 마치고 난 뒤에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였다. 프로답다고 해야 하나 무섭다고 해야 하나.
차에 탈 때도 평소처럼 늘 태휘와 나란히 앉던 중간 좌석이 아니라 뒷자리 구석까지 들어가 설민을 자기 옆에 앉혔다. 태휘를 옆에 못 앉게 하려는 유치한 수작이었다. 그러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무대 직전 대기실에서 영롱은 태휘에게 지금껏 한 번도 듣지 못한 낮고 차분한 음성으로, 인터뷰 질문에 왜 그렇게 대답했냐고 따졌다. 그럼 지금까지 싫은데도 참고서 한방을 쓴 거였냐면서. 똑같이 영롱을 지목한 오은에게 흥분해서 따진 것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 차이였다.
그래서 얇은 얼음판 위에 놓인 것처럼 아찔하고도 위태했다. 태휘라도 그 이유를 속 시원하게 털어놨으면 좋을 텐데, 어째서인지 무심한 태도로 얼버무렸다.
‘그냥이라니까.’
오해를 풀고자 하는 노력도 없는 대답에 영롱도 대화 의지를 잃고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STORY’ 최고 수다쟁이가 입을 다물자 차 안은 적막만 감돌았다. 또 다른 수다쟁이 설민은 둘의 눈치를 보느라 덩달아 입을 닫아 버렸다.
아까 대기실에 없던 매니저만이 공기를 읽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너희 오늘 웬일로 이리들 조용해? 다들 피곤하니?”
멤버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고개를 갸우뚱하던 매니저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맞다. 태휘야. 애들한테 얘기했어?”
그 말에 멤버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태휘에게 향했다. 영롱만을 제외하고.
“아니요.”
“숙소 멤버들, 너희 숙소 옮길 거야.”
그 말에 태휘를 제외한 모든 멤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데뷔한 지 이제 1년하고도 4개월. 따로 휴식기도 갖지 않고 활동하다 보니 어느덧 3집 활동 중이었다. 당시 가수들은 거의 1년에 한 번꼴로 정규 앨범을 냈고, 많게는 한 해에 두 장씩도 냈다.
‘STORY’ 역시 데뷔 앨범과 2집, 최근에 낸 정규 3집도 연달아 성공시키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기에 비하면 숙소 상태는 여전히 열악해 합숙 멤버들은 불만이 쌓이고 있던 터였다.
심지어 합숙 안 하고 가끔 와서 자고 가는 설민과 오은까지도 불평할 정도였다. 멤버들이 그토록 원하던 숙소 이사였는데, 하필 오늘 그 얘기가 나오다니 어쩐지 타이밍이 묘했다.
“그럼 저도 합숙할래요!”
“민아, 숙소 멤버들도 처음 듣는 얘기라 놀랬거든?”
설민이 경망스럽게 끼어들자 옆에 있던 한강이 곧바로 자제시켰다.
“형, 어디로 가는데요?”
“회사 옆. 더 넓고 방도 4개라 각자 방 하나씩 쓸 수 있어.”
“우와 캡이다!”
정작 숙소 멤버인 한강과 태휘, 영롱은 조용한데 설민이 더 신났다.
“태휘, 네가 1인 1실 쓸 수 있는 숙소로 옮겨 달라고 했다며?”
이어지는 매니저의 말에 다들 놀라 태휘를 쳐다보았다. 창밖을 보고 있던 영롱도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앞자리 태휘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이어폰으로 노래 듣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냥 꼽고만 있던 거였나. 태휘는 멤버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네. 제가 대표님께 요청했어요.”
영롱은 아까보다 더 충격이었는지 얼굴이 아주 사색이 됐다. 그 잡지 인터뷰가 농담이 아니었다는 확인 사살이나 마찬가지였다. 하긴, 지금껏 태휘가 농담하는 걸 본 적이 없긴 하지만.
“다들 지금 숙소 좁아서 불편했으니까. 옮기는 김에 각자 방 생기면 더 좋잖아…….”
“그렇게 나랑 한방 쓰는 게 싫었냐!! 원태휘!”
영롱은 결국 태휘에게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고는 곧 엉엉 대성통곡하기 시작해서, 옆에 있던 설민이 달래 주느라 진땀을 뺐다.
아까 대기실에 없던 터라 영문을 모르는 매니저는 왜 우냐며 놀라고, 오은은 별것도 아닌 거로 왜 질질 짜냐고 짜증 내고, 한강은 예전에 태휘가 아팠을 때도 우는 걸 봤기 때문에 혼자만 태연했다.
태휘는 그런 반응을 예상한 듯 여전히 아무말 없었다. 영롱이 떼쟁이이긴 해도, 태휘가 알아듣게만 얘기하면 이해할 텐데 아무 설명이나 변명조차 안 하니 더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러는 사이 회사에 도착했고 매니저는 멤버들을 내리게 했다. 평소보다 많이 늦은 시간이라 여느 때처럼 진 치고 있는 팬들 무리가 없어 조용했다. 영롱이 끝까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자, 태휘가 멤버들에게 말했다.
“먼저들 들어가. 나 영롱이랑 얘기 좀 할게.”
“됐어, 무슨 얘길 해. 나 내릴 거야!”
영롱은 울어서 상기된 얼굴로 훌쩍이며 내리려 했다. 그때 태휘가 영롱의 어깨를 붙잡더니 차 안으로 도로 밀어 넣었다. 바로 뿌리칠 것처럼 큰소리 떵떵 치더니 영롱의 몸은 고분고분 움직였다. 마치 잡아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태휘는 영롱을 따라 도로 차에 올랐다.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잘 풀어.”
한강은 승합차 문을 닫아 주고는 설민과 오은을 끌고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오은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차영롱 쟤 애새끼처럼 왜 저래요? 19살이나 처먹고 뭐 저런 거로 다 삐쳐?”
“난 이해 돼. 룸메이트한테 저런 소리 들으면 당연히 기분 나쁘지!”
설민의 반응에 오은은 어이없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들이 그렇게 저 새끼 편을 그렇게 들어주니까 애가 저 모양인 거야!”
“나는 아무 편도 안 들었어.”
한강은 두 손을 들어 방어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설민은 한강에게 바짝 달라붙어 속사포처럼 물었다.
“형, 숙소에서 뭐 보고 들은 거 없어요? 저 두 사람 숙소에서 무슨 일 있던 거 아니야? 원태휘 갑자기 왜 저래?”
한강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방 혼자 쓰고 싶었나 보지. 아무리 친하더라도 사생활은 필요하잖아.”
설민은 괜한 걸 물었다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 몰라! 아무튼 새 숙소 가서 좋겠다! 나 맨날 놀러 갈래!”
“이미 맨날 놀러 가잖아, 형.”
“오은아, 그냥 우리도 같이 숙소 들어가서 5명 단체 합숙하자.”
“싫어! 집에서까지 차영롱 저러는 꼴을 어떻게 봐. 으으으.”
오은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듯 부르르 몸서리까지 쳤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한강은 씩 웃더니 둘에게 어깨동무하며 매달렸다.
“쟤네 한참 걸릴 것 같은데, 편의점 가서 야식이나 사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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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간식 사 왔어? 뭐 사 왔어? 영롱이가 좋아하는 것도 샀어?”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한강, 설민, 오은이 편의점에 들렀다가 오니 안무 연습실에는 이미 태휘와 영롱이 와 있었다. 게다가 영롱은 기분이 다 풀리다 못해 상당히 좋아서 연습실 천장을 뚫고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오은은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3인칭 화법 뭐야, 토 쏠려.”
“왜? 너도 해 봐. 오은이는 엄청 토 쏠려요~.”
오은의 시비에도 영롱은 아랑곳하지 않고 까르르 웃으며 멤버들이 들고 온 편의점 비닐봉지 안을 살폈다. 한강과 설민, 오은은 어안이 벙벙해서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차에서 엉엉 울고 있지 않았냐? 무슨 기분 변화가 이렇게 순식간이야? 이 정도로 기분 변화폭이 크면 주변 사람도 그렇지만 본인도 피곤하지 않을까. 다들 머릿속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영롱보다 신기한 건 얘를 순식간에 이런 상태로 만든, 저 뒤에 묵묵히 서 있는 원태휘였다. 태휘는 영롱과는 상반되게 지금 어떤 기분인지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포커페이스였다.
“태휘 형은 뭐 먹을래?”
“커피. 스튜디오 가서 리믹스 CD 가져올게.”
다음 달에 있을 첫 단독 콘서트 때문에, 요즘엔 스케줄이 끝난 뒤에도 무조건 연습실에 모여 밤새 연습해야 했다. 멤버들이 방송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A&R 팀은 콘서트 버전 리믹스 음원을 만들어 두는 식으로 콘서트를 준비했기에 리더인 태휘는 그 사이에서 더욱 바빴다.
설민은 태휘가 나가자마자 영롱 곁에 바짝 다가와 물었다.
“뭐야? 둘이 왜 이리 빨리 화해했어?”
이번에는 한강과 오은도 진심으로 궁금해서 영롱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롱은 봉지에서 태휘의 캔 커피를 하나 챙긴 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스바 하나를 까 입에 넣으며 말했다.
“더워서 그랬대.”
“뭐?”
“방 같이 쓰는 거. 더웠대. 잘 때 내가 너무 엉겨 붙어서.”
태연하게 말하고는 츕츕 소리를 내며 아이스바를 빨아 먹는 영롱을 세 사람은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난리를 친 거에 비해 너무도 단순한 이유잖아! 게다가 그 이유 듣자마자 이렇게 쉽게 납득하기야?
하긴, 지금 그들이 숙소로 이용하는 아파트는 오래된 데다가 방은 좁았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는데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고. 예년보다 일찍 시작한 무더위에, 다 큰 남자 둘이 붙어서 자면 당연히 더울 날씨긴 했지만…….
영롱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슬쩍 투덜거렸다.
“웃겨. 지가 먼저 끌어안을 땐 언제고!”
아니, 잘 때 둘이서 끌어안고 잤냐고. 두 사람의 알고 싶지 않은 수면 습관까지 알게 되자 오은은 절로 인상을 썼다. 설민은 호기심이 해결된 건지, 의욕을 잃은 건지 연습실 구석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웃기지? 내가 서운할까 봐 그동안 말 못 했대. 말이 돼? 내가 그렇게 좀스러운 줄 아나.”
“너 존나 좀스럽잖아.”
영롱은 오은의 말에 전혀 타격감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들먹거렸다.
“그리고, 어차피 숙소는 큰 데로 옮기는 게 더 좋은 거고. 각 방 쓰면 서로 푹 쉴 수 있고. 아쉬운 점보다 좋은 점이 더 많아서~. 내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했지~.”
“다 당연한 말이잖아. 그게 넓은 마음과 이해까지 필요한 일이야?”
오은의 진실의 입에도 영롱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이 도도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뭘 알겠니~.”
그때 설민이 번뜩 뭔가 생각났는지 뒤돌아섰다.
“근데, 그거 납득했다고 이렇게 바로 기분이 좋아져? 좀 과한데.”
“역시 설민이 형이 눈치가 빨라~.”
영롱은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가 더 있지?”
“태휘 형이 미안하다고, 내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했어~.”
“무슨 부탁?”
“설마 또 놀이공원?”
“놀이공원은 지난번에 태휘 형이 롤러코스터 세 번 만에 토해서 이젠 금지야~.”
……그런 일이 있었다니. 불쌍하다, 원태휘.
“아직은 비밀~. 내가 나중에 보여 줄게~.”
보여 주다니 뭘? 어쨌든 뭔가를 얻어 내긴 했구먼. 저 과도한 아드레날린 분비의 이유는 역시 따로 있었다.
“자, 빨리 연습 시작하자~! 설민이 형~. 영롱이 새로운 동작 어려워. 좀 가르쳐 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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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태휘와 단둘이 있을 기회가 생긴 오은은 궁금해서 재차 확인해 보았다. 정말 그 이유 때문이 맞느냐고. 사실 말 못 할 다른 이유가 있는데 미안함에 그렇게 말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태휘는 끝까지 그렇게 말했다.
‘진짜 더웠거든. 걔 너무 뜨거워서.’
차영롱, 잘 때 열이 오르는 체질인가? 아무튼 그렇게만 말하니 더는 캐물을 수 없었다. 그리고 머잖아 그 부탁의 정체 또한 알게 되었다. 숙소 이사를 앞둔 어느 날, 멤버들을 태우러 가니 영롱이 숙소 앞에 모인 팬들에게 사인해 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얘들아, 우리 곧 이사한다~.”
“정말요?”
“오빠, 어디로 가요?”
“그건 말해 줄 수 없지~.”
녀석은 평소에도 숙소 앞에서 팬들과 조잘조잘 수다 떠는 걸 좋아했다. 차 안에서 그 대화를 듣던 오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애들한테 또 왜 얘기하는데? 그때 팬 한 명이 영롱의 팔에서 뭔가를 발견했는지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영롱 오빠 그 팔찌 뭐예요? 처음 보는 건데!”
그러고 보니 녀석이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는 오은도 처음 보는 거였다. 은색의 얇은 테에 작은 보석으로 ‘YR’이라고 박혀 있는 펜던트가 달랑거리는 깔끔한 디자인의 팔찌였다. 영롱은 팬들이 알아봐 주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금세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태휘 형이랑 맞춘 거다~.”
“태휘 오빠랑요?”
“그래~. 이따 형 나오면 봐라. 태휘 형 거에는 ‘TH’라고 돼 있다~.”
기분 풀린 이유가 다름 아닌 커플 팔찌였다니. 그걸 또 팬들에게 자랑하고 있다니. 잠시 후 숙소에서 내려온 태휘의 팔에는 진짜 똑같은 디자인의 TH 팔찌가 있었다.
같이 방 안 쓴다고 삐치고, 그 삐친 걸 달래려고 커플 팔찌를 맞추다니. 그리고 그걸 또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닌다니. 오은은 더는 태휘와 영롱의 관계에 대해 자기 상식선에서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아마 평생이 걸려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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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채팅방 - 이설민, 계오은, 원태휘, 한강]
이설민
다들 어디쯤이야?
한 강
난 5분 남았어
계오은
난 지금 주차장
이설민
난 엘리베이터. 집 10층 맞지?
원태휘
응
계오은
우리 리더님 집 처음 가 보네
이설민
나도
원태휘
안 왔었나?
이설민
이사하고 집들이 한 번 안 했잖아
원태휘
다들 기자는 안 붙었지?
계오은
아마도
이설민
백만 년 만에 회동이다 진짜
문 열어줘 리더야
태휘는 설민의 말에 핸드폰을 탁자에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현관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의 TH 펜던트가 반짝였다. 태휘는 무심히 팔찌를 옷소매 안으로 밀어 넣은 뒤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