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8. Lie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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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집 멋있다.”
태휘의 집에 세 번째로 도착한 한강이 앞서 들어온 두 사람과 똑같이 말했다. 전체적으로 장식이 많지 않고 모던하면서 심플한 무채색 계열의 인테리어는 집이라기보다는 비즈니스호텔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아이돌 출신이자 K-pop 대표 프로듀서의 집인데 본인의 ‘인생 사진’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팬들 선물은 하나도 없어?”
“침실이랑 서재에 있어요.”
“그래도 생각보다 삭막하진 않네.”
“형 대체 뭘 예상한 거예요?”
“원태휘의 집이라면 훨씬 작업실 같은 느낌일 거로 생각했거든.”
“작업실은 따로 있죠.”
“어디?”
태휘가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자 한강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오은이는 이미 구경 중이에요.”
“아, 복층이구나?”
“형도 구경할래요? 계단은 저쪽. 설민이는 서재에 있고요.”
“아니. 나는 주방에 관심 있어.”
한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태휘가 손가락으로 계단 반대편을 가리켰다.
“자고로 주방을 봐야 애인의 유무를 아는 법이지.”
“형이 이설민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니까 이상하네요.”
한강이 미닫이문을 열고 주방에 들어서니 이미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요리사 복장의 낯선 남자를 보고 한강은 순간 당황해 멈칫했다.
“본가 요리사님이에요. 이따가 출출할 것 같아서.”
“이제 거의 마무리입니다. 트레이에 세팅만 하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 마치시면 들어가 보세요.”
식탁 위에는 간단한 식사부터 안주까지 푸짐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요리사와 인사를 마친 태휘가 한강을 주방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복도 반대편에 있다는 서재로 안내하자 한강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애인의 유무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도련님인 건 알겠네.”
“뭘요. 모처럼 모인 거니까 이러는 거지. 평소에는 혼자 대충 해결해요.”
“그러니 그냥 밖에서 보자니까.”
“이런 분위기에 저희 넷 모인 거 알려지면 더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요.”
“그래도 너 용케 민이 말 듣고 모이기로 했네.”
“그 새끼가 회사 찾아와서 하는 소리 들으니 둘이서는 결론이 안 날 것 같더라고요. 형이랑 오은이 얘기도 들어봐야죠. 제 생각도 분명히 전하고.”
한강은 ‘설민이가 또 어지간히 긁어 댔군.’ 하며 예상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태휘의 냉담한 표정을 보아하니 멤버들을 집까지 부르고 싶진 않았던 것 같다.
그동안 멤버들과 꾸준히 연락하며 지냈으나 그래 봤자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지, 최근엔 절친 수준으로 교류하고 지낸 건 아니었으니까. 오늘 약속을 잡는 과정에서, 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 멤버들을 불러 모으기까지 태휘는 꽤 망설인 듯했다.
아마 자신이 리더만 아니었으면 초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3년 동안 같은 숙소를 쓰고, 매일 보던 사이인데, 언젠가부터 사적인 장소와 시간을 공유하는 게 드문 일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집으로 들이진 않았다.
좁은 차 안에서, 연습실에서, 숙소에서 부대끼던 10대를 지나, 자주 얼굴 보고 술 마시며 놀던 20대를 겪고, 이제 30대가 되어 각자의 삶을 바쁘게 살다 보니, 이렇게 가끔 안부만 묻고 지내도 충분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태휘와 한강이 서재에 거의 다다를 때쯤, 오은도 작업실 구경을 마쳤는지 계단에서 막 내려왔다.
“어, 강이 형 왔어? 태휘 형 작업실 끝내주는데? 근데 안 어울리게 뭔 꽃을 잔뜩 깔아 놨냐. 스튜디오 공사에 얼마 들었어?”
오은이 꼬치꼬치 캐묻자 세 사람은 복도에 선 채 작업실 견적 얘기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아, 다들 뭐하냐고!”
그때 서재에서 혼자 기다리던 설민이 참다못해 문을 벌컥 열고 나와서는 투덜댔다.
“리더야, 회의 안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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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한쪽 벽면에 보이는 커다란 액자에 가장 먼저 시선이 갔다. STORY 데뷔 전, 다 함께 동해에 갔을 때 해변에서 일출을 보는 멤버들의 뒷모습 사진이었다.
그때 유일하게 수동 카메라를 들고 갔던 매니저 형이 찍어 준 거던가. 동해에 갔다 온 뒤 한참 뒤에야 인화해 보여 줘서, 멤버들도 이 사진의 존재를 뒤늦게 알았던 기억이 났다.
15년 전 사진이지만 한강은 뒷모습만으로도 누군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제일 작은 영롱을 태휘가 뒤에서 끌어안고 있어 한 몸처럼 보였고, 그들 옆에는 키가 가장 큰 오은이 설민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한강과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다들 춥다고 옹기종기 붙어 있는 게 제법 귀여웠다. 저런 마이너스적인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라니, 지금은 상상도 못 하는 일인데.
액자를 한참 바라보던 한강은 서재 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서재는 물론 이 넓은 집에서 STORY 멤버들 사진은 오직 이거 하나뿐이었다. 한강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물었다.
“왜 하필이면 뒷모습 사진이야?”
설민과 오은은 저들끼리 서재를 탐방하느라 한강의 말을 듣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태휘는 대답 대신 소파에 앉았다. 피식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한,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한강 역시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액자에서 눈을 뗐다.
음악 하는 사람이라 작업실만 빵빵한 줄 알았더니 서재도 나름대로 잘 꾸며져 있었다. 음악 외에 다양한 분야의 서적과 그동안 팬들에게 받은 선물이 벽 한쪽 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낮은 테이블 하나에 ‘ㄴ’자 소파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멤버들은 태휘를 중심으로 그 소파에 둘러앉았다. STORY 멤버 4명이 이렇게 모인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설민이 빈 테이블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더니 말했다.
“뭐, 술도 안 까고 시작해?”
“회식이 아니라 회의잖아.”
한강의 말에 설민이 답답하다는 듯 대꾸했다.
“이게 얼마 만인데, 회의가 곧 회식이지 뭐야. 그래서 내가 우리 매장에서 막걸리 좀 챙겨 왔잖아. 지금 꺼내 올까?”
“형, 그놈의 음주 인터뷴가 뭔가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정곡을 찌르는 오은의 말에 설민은 소파에 궁둥이를 바로 붙이고 앉았다. 분위기가 대충 정리된 듯하여지자 태휘가 입을 열었다.
“취해서 나눌 얘기는 아니니까, 술은 이따가. 일단 회의 시작하자.”
“황 CP님 얘기부터 해 봐. 너한테 직접 연락하셨다며.”
“GBS에서 단독 프로그램 하나 편성해 준다고 하셨어. 최종 목표는 단독 콘서트. 기획 준비부터 콘서트 과정까지 다 방송으로 내보내고, 10부작 정도의 재결합 프로젝트로.”
한강은 놀란 듯 입이 떡 벌어졌다.
“단독 콘서트에다가 10부작? 그 정도면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니야?”
“CP님 말씀이, 그동안 우리가 너무 꽁꽁 싸매고 있어서 작게 할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래요.”
“내가 봐도 그렇긴 해.”
오은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랑 같이 데뷔한 1세대들 봐봐. ‘HERO’나 ‘B.I.B’ 같은 팀들. 전자는 소소하게나마 재결합 성공했고, 후자는 토요특급에서 3부작 편성으로 나름 성대하게 재결합해서 차트 역주행하고 대형 기획사랑 계약도 하고. 지금 새 앨범 준비 중이라며.”
“당시엔 우리가 ‘B.I.B’보다 더 인기 있었는데. 걔네가 그 정도로 성대하게 했으니 그보단 스케일 키워야 한다고 판단했겠지.”
설민과 한강이 연달아 말하자, 오은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문제는 이 스케일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스케일이냐, 이거야.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생길 모든 변수를 우리가 컨트롤 못 하잖아. 10부작이나 나오려면 우리의 모든 걸 거의 다 내보이는 건데.”
“회차가 부담스럽다면 그건 조절 가능하다고 말씀하긴 했어.”
“내 생각에도 10회는 너무 세. 그렇게 나올 콘텐츠도 없을걸.”
“우리가 그동안 너무 신비주의여서, 멤버당 한두 개씩만 뽑아내도 충분할 거로 생각하나?”
“그놈의 신비주의.”
STORY의 신비주의는 멤버들이 의도했다기보다는 소속사의 철저한 관리로 유지됐다. 그룹을 기획한 SS엔터의 신솔 대표는 ‘가수는 노래만 잘하면 된다. 댄스 가수라면 춤 잘 추고 노래만 잘하면 된다.’라는 주의였다.
즉, 가수가 굳이 만능 엔터테이너까지 될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프로듀싱 재능이 있던 태휘를 비롯해 멤버들 각자의 능력을 내세워 10대임에도 음악성 있는 댄스 그룹을 표방했기에, 음악 관련 프로그램 외에는 되도록 출연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이후 다른 1세대 아이돌 멤버들과 얘기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 각종 분장쇼와 코미디 연기하는 것도 어린 나이에 부담이 심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요즘 같은 버라이어티 예능이나 관찰 예능은 많지 않았고, 슬랩스틱 코미디 콩트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자신들도 한결 편하게 가수 활동했음을 알고 있다. 예능 출연을 안 한 건 아니었으나 그 때문에 스트레스받은 기억은 없으니. 노래와 춤 연습, 콘서트 준비, 녹음 작업 때문에 진이 빠지거나 지방이나 해외 공연, 사인회 및 팬미팅 등의 스케줄에 쫓긴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SS엔터에서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서 다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됐으니 1세대 아이돌로서는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그 흔한 라디오나 쇼 프로그램 출연도 많지 않아서 팬들은 아쉬워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STORY’ 3년간의 활동은 가수로서는 편했으나, 해체 후가 문제였다. STORY라는 울타리 안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지내다가 해체 후 각자 전쟁터 같은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니 예능 활동은 필수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가수 활동 외에 방송인으로 각종 예능에 잘 적응한 케이스가 설민이었고, 적응 못 한 예가 영롱일 것이다. 아예 사라져 버렸으니까.
나머지 멤버들도 STORY의 신비주의를 유지하며 각자 자기의 영역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쉽지 않았다. 그 신비주의 때문에 방송 관계자나 언론사 쪽은 대부분 이들을 어려워하거나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룹 시절 선입견이 계속 이어져 ‘지들이 뭔데 아직도 톱스타인 척하냐’고. 정작 멤버들은 가수 활동 외적인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을 뿐이었고, 적극적이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사정까지 깊이 관심 두지 않았고, 딱히 해명할 기회도 없었기에 그저 스스로 깨우치며 묵묵히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현재, 15년 전부터 굴러온 그 신비주의라는 눈덩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이런 눈사태를 일으킨 격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잖아. 완전체야, 4명이야?”
설민의 말에 나머지 3명의 이목이 쏠렸다. 오은은 ‘또 시작이네’라는 표정이었다. 한강도 궁금했는지 태휘를 보며 물었다.
“맞아. 방송국 측에선 4명이든 5명이든 상관없대? 나름 중요한 문제일 텐데.”
“제가 말했어요. ‘차영롱은 저희도 연락이 안 됩니다. 완전체는 불가능합니다.’라고. 그랬더니 그 문제는 자기들도 해결 방법을 찾아본다고 했어요. 그리고 영롱이 없이 4명이라도 진행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태휘는 그렇게 말하고는 설민을 시큰둥하게 노려보았다.
“됐냐? 이제 속 시원해?”
멤버들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동안 설민은 기가 찬다는 듯 웃어 보였다. 며칠 전 단둘이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 때문이었다.
‘걔, 걔 거리지 말고 제대로 이름 부르라고. 무슨 볼드모트야? 영롱이 이름 말하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해?’
“어쨌건, 한 명이 사라졌다는 특수한 상황까지 방송 쪽에서는 스토리텔링으로 최대한 써먹을 거야.”
“그러겠지. 시청자 낚시하기 딱 좋은 떡밥이잖아. 차영롱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분량 충분히 뽑을걸? 몇 주 내내 궁금하게 해서 시청률 잔뜩 올린 다음 찾아서 잘만 진행되면 완전체 재결합 성공이고, 정작 못 찾고 넷이서 재결합해도 어떻게든 포장해서 잘 내보낼 거야.”
오은의 말에 한강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곤 말을 이었다.
“거기에도 변수는 여러 개 있네. 영롱이를 찾는다, 혹은 찾지 못한다, 아니면 찾았음에도 재결합은 안 한다.”
“찾았는데 안 하는 상황은 뭐야? 안 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설민이 묻자 한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충분히 많이 있지. 다 너 같은 방송쟁이인 줄 알아? 연예계 한참을 떠나 있었잖아. 큰 결심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야. 그리고 만약의 경우도 있고.”
“만약의 경우?”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한강의 말에 설민의 동공이 심하게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태휘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설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설마. 형도 그 소문 믿는 거예요?”
“사고나 죽음에 안전지대가 어디 있어?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한강의 말에 오은도 동의했다.
“맞아. 재수 없는 소리 될까 봐 지금까지 안 꺼냈을 뿐이지. 10년 동안 깜깜무소식이면 그러고도 남을 시간이잖아.”
“야, 개오은.”
“우리끼리 이렇게 모여서 걔 입장 미리 짐작하는 게 다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다고.”
“적당히 하지? 강이 형 말까진 이해하는데, 너는 심해.”
“형. 좀 냉정하게 생각해 봐. 사고 나지도, 죽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꼭꼭 숨은 거면 그것도 꽤 심각한 상황일걸? 연예계에 깊은 환멸을 느껴서 떠났거나 아니면 피치 못할 다른 이유가 생겼을 거라고.”
“그럼 다행이지. 어떤 이유든지 죽음보다 최악은 없으니까.”
설민과 오은의 대화가 점점 격해지자 태휘는 노크하듯 탁자를 두드리며 흐름을 끊었다.
“중간 정리. 그럼 다들 4인이든 5인이든 이 재결합 프로젝트에 동의하는 거야? 지금 얘기 들어보니 다들 그런 것 같네.”
그러고 보니 다들 자연스럽게 ‘재결합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로 가정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놈의 온라인 탑골공원 때문에 등 떠밀린 감이 없잖아 있으면서도 다들 내심 1세대 대표 가수로서 대중의 요구를 나 몰라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재결합은 절대 없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어떤 구속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면만 조금 깎일 뿐이다. 체면 이상으로 거절해야 할 강력한 사유가 없는 한, 대중의 기대를 더는 외면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계속 거부하다가는 정말 톱스타인 척의 끝을 보여 주는 셈이니까.
다들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마다 이유나 속셈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대세를 거스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때, 회의 내내 양팔을 무릎에 올린 채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태휘가 다리를 꼬더니 소파 등받이에 천천히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런데 나는 재결합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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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휘가 단호하게 뱉은 한마디에 다들 놀라고도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멤버들 모두 이놈의 회의가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민은 이쯤에서 술이 필요하다며 방을 나가더니 잠시 후 주방에서 술과 안주를 바리바리 챙겨왔다. 오은은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아니, 왜 얘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궁금해하길래 방송국 쪽 조건 먼저 말해 줬을 뿐이야. 우리끼리의 논의는 이제 시작이고, 이게 내 의견이야.”
동요하는 멤버들 속에서 혼자만 침착한 태휘의 태도에 설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 아니, 그럼. 견적이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안 하자고?”
“각자 의견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거야. 네 말대로 이런 큰 스케일의 프로젝트인데, 사전에 확인할 건 다 확인해야지.”
설민이 바로 뭐라고 쏘아붙일 듯 입을 벌리자 한강이 무릎에 손을 올려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대신 태휘를 향해 물었다.
“재결합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태휘는 눈알을 굴려 멤버들의 얼굴을 살피고는 잠시 침묵했다. 예전부터 가늠할 수 없는 저 침묵의 깊이에 모두 익숙해지긴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엔 답답해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 빼고 다 하고 싶은 거 맞지?”
이번에도 자신의 대답보다 멤버들의 의견을 재차 확인했다.
“그래, 솔직히 난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는 쪽이야. 강이 형은?”
오은이 가장 먼저 잽싸게 말했다. 빨리 대답해야 태휘의 의중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도. 대세를 거스르지 말자는 쪽. 기왕 하면 제대로 하고 싶고.”
한강도 아직 배우로 자리 잡지 못했을 때였다면 이런 선택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기자로서의 성공이 예전보다 더 자신감을 느끼게 해 주었고, 재결합한다면 지금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설민이는?”
설민은 조금 전 한강에게 저지당한 뒤로 할 말이 많았는지, 마치 기다렸단 듯 크게 심호흡하고는 대답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해. 우리가 했던 말 번복하는 거. 그리고 영롱이의 부재. 하지만 지금의 이 열풍이나 흐름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봐. 질질 끌어서 좋은 것도 없고. 아니, 지금 우리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고! 원태휘, 너는 왜 그렇게 말해서 분위기 좆창 내는데?”
끝내 참지 못한 분노가 그러데이션처럼 폭발했다. 그런데도 태휘는 눈도 끔쩍 안 하고 의연하게 반문했다.
“모두의 생각이 중요하지. 왜 안 중요해?”
“리더가 할 생각 없다면 다 소용없는 거 아니야?”
“그럼 내가 ‘아이 재결합 존나 좋네. 빨리하고 싶어 죽겠네.’ 이럴 줄 알았어? 난 다들 당연히 한다는 분위기인 게 어이없는데.”
설민은 답답하다는 듯 혼자 막걸리를 따라 들이켰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지금 건배고 자시고 할 기분이 아니었다. 한강도 마찬가지였는지 술을 한잔 비우고는 태휘에게 물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 중 어느 부분에서 생각이 달라?”
“지금까지 나온 의견에는 대부분 저도 동의해요.”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말에 나머지 멤버들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말장난과 비꼬기까지 곁들이는 게 평소의 태휘답지 않아 더 혼란스러웠다. 늘 냉철하고 이성적이었던 평소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속 어딘가가 상당히 못마땅해 괜한 심통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설민은 뒷골이 당겨오는지 잔뜩 인상 쓴 채 목을 주물렀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젠데?”
태휘는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더니 고개를 기울이곤 물었다.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어? 아니면 하얀 거짓말을 듣고 싶어?”
“이건 씨발, 또 무슨 소리야?”
마침내 오은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명상법이고 호흡법이고 이 상황에선 다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더 심한 말이 나올까 봐 강은 두 손으로 오은의 입을 틀어막았다.
“태휘야, 너답지 않게 왜 이래?”
한강이 애원하듯 묻자, 태휘의 눈이 다시 냉정을 되찾은 듯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우리한텐 중요한 문제예요. 왜냐하면, 정확히 이 문제 때문에 우리가 해체했으니까.”
“뭐?”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동그랗게 커졌다. 모두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반응에도 태휘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재결합 논의를 하려면, 이 문제부터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해.”
셋은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로 의아하다는 듯 태휘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해체한 건…….”
“태휘 네가 슬럼프 왔다고 해서였잖아. ‘STORY’ 음악 더는 못 만들겠다고.”
“우리가 그거 이해해서, 다 동의해서 해체하기로 한 거고.”
“그리고 어차피 가요계에선 댄스 그룹 수명도 짧으니까. 앞으로 서로 각자 제 갈 길 가자고.”
“형 혼자 해체에 대한 책임을 다 짊어지게 될까 봐, 그 이유는 외부에 안 밝히기로 한 거고.”
릴레이 하듯 주고받는 멤버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태휘는 천천히 턱을 들어 올리더니 천장에 잠시 시선을 두고는 말했다.
“그 슬럼프 얘기 사실 거짓말이었거든.”
처음 듣는 이야기에 멤버들 모두 충격으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태휘는 곧바로 덧붙였다.
“너희랑 더는 같은 그룹 하기 싫었어.”
차라리 농담이길 바랐지만, 태휘는 이런 얘기에 농담할 인간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안다. 와중에 ‘너희’라는 단어 선택에 한강은 자신은 예외인가 싶어 눈치 없이 어벙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태휘는 한숨을 쉬고는 정확히 집어 정정해 주었다.
“형도 포함이에요. 한강, 이설민, 계오은 그리고 차영롱까지 전부.”
“야, 원태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다들 나한테 할 말 없어? 나만 솔직하기로 한 거야?”
태휘는 멤버들을 향해 비웃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진짜 뻔뻔하네. 아니면 13년 지났다고 다들 잊은 건 아니지?”
13년? 구체적인 햇수를 언급하자 멤버들은 순간 1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해체가 12년 전이고, 13년 전에는…….
그사이 태휘는 자기 앞에 놓인 잔 가득히 술을 따랐다. 그러고는 멤버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힐게. 12년 전 STORY가 해체한 이유는 차영롱이 너네랑 다 잤고, 내가 그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야.”
◀◀◀
태휘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때 영롱의 마음을 받아 줬다면, 지금과는 모든 게 달라졌을까?
◀◀◀
- 199●년 7월 -
☎
- 안녕하세요! 영롱이에요~. 날씨가 너무 더워졌죠? 며칠 전 있었던 저희 ‘STORY’ 첫 단독 콘서트에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엄~~~~~청 많은 분이 자리를 꽉꽉 채워 주셔 가지구 저 영롱이를 비롯한 멤버들 모두 꺄아아아아아악~~~~ 행복한 비명을 질렀어요. 아직도 여러분들의 함성이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아요. 아~~~ 콘서트 또 하고 싶다~~~.
저희 이제 잠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갖고, 더 좋은 모습으로 돌아오려고 해요. 그동안 여러분들도 잘 지내시고, 저희 다섯 명 잊지 않으셔야 해요! 잊으시면 영롱이 너무 슬퍼서 엉엉 울 거예요~. 절대로 잊지 말기!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까지 꽝 찍었어요~! 다들 찍었죠?
쉬는 동안에도 사서함 자주 남길게요~. 이것도 약속~! 밥 꼭꼭 잘 챙겨 먹고! 여름방학도 재밌게 보내요!! 저 영롱이는 이만 태휘 형 괴롭히러 가 볼게요~. 안녕~~~!
사무실 전화로 사서함을 남긴 영롱은 멤버들이 앉아 있는 소파로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전 선포한 자신의 계획을 착실히 실행하기 위해, 태휘의 옆으로.
태휘와 영롱을 제외한 멤버들은 소파에 다닥다닥 둘러앉아 각자 펜을 하나씩 쥐고 브로마이드에 사인을 하느라 바빴다. 얼마 전 CF를 찍은 교복 회사에서 이벤트 경품으로 나갈 거라며 오늘 수백 장 사인해야 했다.
빨리 끝내야 밥 먹으러 갈 수 있다는 매니저의 말에 멤버들은 모처럼 장난도 치지 않고 초집중 모드였다. 반면 가장 일찍 사무실에 나온 태휘와 영롱은 이미 자기 분량 사인을 다 마쳐서 여유로웠다.
태휘는 이어폰을 낀 채 소파 구석에 거의 눕듯이 앉아 캡 모자를 얼굴까지 푹 눌러쓰고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옆에는 이미 오은이 앉아 있었으나, 영롱은 굳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뭐해, 이 새끼가’ 하는 오은의 말을 신경 쓸 리 없었다.
그러고는 태휘가 듣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빼서 자신의 귀에 꽂으며 물었다.
“형, 뭐 들어?”
반쯤 졸고 있었던 태휘는 듣고 있던 노래 대신 영롱의 목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우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다가와 몸을 바싹 붙이고 있는 영롱에게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영롱아.”
영롱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톤만으로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바로 뒤로 물러서서 붙었던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태휘의 팔목을 시선으로 훑었다.
태휘와 영롱의 팔에 있는 이니셜 팔찌는 둘이 맺은 약속의 증표였다. 예쁜 말로 약속이지 일종의 거래와도 같았다. 그 거래는 지난번 잡지 인터뷰 사태 이후 승합차 안에서 이루어졌다. 영롱은 자신이 바람대로 커플 팔찌를 얻었고 태휘가 원한 건 다름 아닌,
‘더우니까 이제 달라붙지 마.’
영롱은 엄청나게 가혹한 조건이란 듯이 억울해했지만, 그렇다고 거절하기엔 커플 팔찌가 너무도 유혹적이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조급함에 냉큼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 어렸을 때부터 치대던 버릇이 남아 있어 적응이 쉽진 않았지만.
이렇게 태휘의 제지를 받을 때마다, 섣불리 승낙한 과거의 자신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럴 땐 그저 입술만 삐쭉 내밀고는 손목에 있는 팔찌를 보며 위안 삼을 수밖에.
한편 태휘는 그런 영롱을 애써 모르는 체하고는 재빨리 손등으로 상기된 뺨 온도를 스스로 체크해 보았다. 속상해하는 영롱과는 달리, 태휘는 더위가 더 심해지기 전에 영롱을 떼어 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숙소를 옮겨 각방을 쓰게 된 것까지도.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녀석의 스킨십에는 15살부터 적응되어 있었기에 딱히 싫다거나 귀찮지 않았으니까. 그랬다면 합숙을 시작했을 때 스킨십 귀신인 녀석과 한방을 쓰겠다고 자청하지도 않았을 거다.
심지어 데뷔 직전 겨울에 심하게 아팠을 땐 영롱의 서늘한 체온이 너무도 좋아서, 퇴원한 이후로도 녀석의 몸을 꼭 끌어안고 자곤 했다. 그 사이 사계절을 한 차례씩 다 겪고 숙소에서 두 번째 여름을 맞이할 무렵,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초여름 특유의 밤공기가 코끝에 닿은 어느 날, 문득 영롱의 체온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는 숙소 방은 창문이라도 활짝 열어 놓아야 그나마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다만 얼마 전에 팬들이 던진 돌멩이에 방충망이 뚫리는 바람에 벌레나 모기가 많이 들어왔다. 대체 왜 던지는 건지 이해는 안 가지만.
아무튼, 매니저 형한테 고쳐 달라고 말했는데 바쁘다 보니 까먹었는지 영 소식이 없었다. 테이프로 덕지덕지 막아 봤자 벌레들은 손쉽게 들어왔고, 그 때문에 방 곳곳에 모기향을 켜 놓는 건 필수였다.
자신은 그나마 괜찮았으나 영롱의 하얀 피부는 모기에게 물리면 금세 빨갛게 부어오르곤 했다. 더군다나 간지러움을 참을 만한 인내심도 없는 녀석인지라 벅벅 긁기라도 하면 흉도 크게 남았다.
태휘는 그런 영롱을 위해 자다가도 모기향이 꺼질 때쯤 귀신같이 깨어나, 나선 모양의 모기향을 새 걸로 바꾸고 불을 붙인 다음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어둠 속에서 잠들어 있는 영롱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 잠드는 밤이 많아졌다.
5년 동안 거의 매일 봐 온 얼굴인데, 올해는 뭐가 그리도 달랐던 걸까? 눈썹 숱이 이렇게 많았나? 콧대가 이렇게 오뚝했나? 입술산에서부터 입꼬리에 이르는 선이 이렇게 선명했나?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살결이 이렇게 빛날 일인가?
그렇게 보고 있다 보면 피부에 닿은 영롱의 체온이 유독 덥게 느껴졌다. 그 더위 때문에 저도 모르게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애들끼리만 있는 숙소이니 잠옷으론 민소매에 트렁크 팬티만으로도 충분했다. 너무 더운 날엔 그 민소매마저도 벗어 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잠들다 보면, 좁은 방에서 저절로 밀착되는 맨살의 감촉 따위 지금껏 아무렇지도 않았다.
비록 영롱이 멀쩡한 베개는 다리 사이에 끼운 채, 남의 팔을 베개 삼아 베고 자는 습관이 있었어도 괜찮았다. 그러다가 태휘의 팔에 영롱의 쌔근거리는 숨결이 닿더라도, 녀석이 살아 숨 쉬는 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었는데.
SS에 오디션을 보던 날에도, 데뷔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도, 연말 시상식에서도. 긴장해서 땀이 흥건한 손으로 자신의 손을 꽉 잡아도 녀석은 늘 시원한 청량감만 남겼었는데. 이제는 고온 발열 유발자라니. 갑자기, 대체 왜?
태휘는 당혹스러웠고, 걱정스러웠다. 이 여름이 끝나고, 더위가 물러가면 이 열감 역시 나아질까? 하지만 작년 여름에는 아무렇지 않았단 걸 생각하면, 여름이 문제는 아닌 듯했다. 그사이 달라진 건 자신이 19살에서 20살이 되었단 것뿐이었다.
태휘는 이 상태로 여름이 끝나길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태휘는 ‘하이틴스타’ 잡지 인터뷰에서 같이 방 쓰기 싫은 멤버로 영롱을 꼽은 것이고, 대표님께 숙소도 옮겨 달라고 건의한 것이다.
예상한 대로 영롱은 난리를 쳤지만 일단 커플 팔찌로 달래 놓았으니, 나머지는 자신의 몫이었다. 영롱을 예전처럼 귀여운 동생으로만 보는 것. 잠든 모습을 몰래 훔쳐보지도 않는 것.
이때만 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한 가장 큰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