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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9. 말은 안 했지만 (04:28) <태휘 solo> (9/39)

Track 9. 말은 안 했지만 (04:28) <태휘 s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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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년 3월 -

태휘가 영롱을 처음 본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태휘는 기악부 동아리였고, 새 학기에 동아리를 홍보하기 위해 부원들과 함께 신입생들 교실을 돌고 있었다. 그중 한 반에서 영롱을 보았다.

키 순서대로 자리가 정해진 터라, 지금보다 체구가 더 작았던 영롱이 맨 앞자리에서 목이 꺾일 듯이 태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그 교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영롱의 반짝거리는 시선을 느꼈다.

동아리 부장이 교탁에서 열심히 홍보하는 동안에도, 그 옆에 서 있던 태휘는 영롱의 뜨거운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었다. 당시엔 그 시선이 조금 신경 쓰이는 정도였고, 크게 눈길은 끌지 않은 보통의 중학교 1학년의 꼬마였다.

동아리 홍보가 끝나고, 맨 앞자리 꼬마는 굳이 태휘에게 와서 동아리 입회원서를 받아 갔다. 태휘가 신입생 반 홍보를 돌며 그런 눈빛을 받은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남자 중학교였음에도 후배들이 많이 따르는 타입이었다.

앳된 티를 일찌감치 벗어 낸 날카로운 얼굴선과 또래들보다 훨씬 큰 키는 어린 소년들이 선망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런 태휘의 외모에 끌려 덜컥 기악부에 신청서를 냈다가 면접에서 떨어지고 울면서 돌아가는 학생들 또한 수두룩 빽빽이어서 그렇지.

기악부의 가입 자격은 첫째,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최소 한 가지 이상이어야 하고 둘째, 매일 방과 후 연습 및 합주에 동의하며 셋째, 학년말에 열리는 문화제 연주회에 참여해야 했다. 셋 다 태휘가 만든 조건으로, 대부분 첫 번째에서 탈락했다.

게다가 한창 뛰어놀기 좋아하는 중학생 남자애들에게 매일 음악실에 남아 악기 연습하라는 두 번째 조건 역시 너무도 가혹했다. 그 와중에 영롱은 면접 자리에 당당히 국민학교6) 시절 쓰던 실로폰을 들고 들어와서는 해맑게 에델바이스를 연주했다.

캐스터네츠도 아니고 트라이앵글도 아니고, 실로폰으로 영롱하게 에델바이스라니. 동아리 부원들 모두 제 이름이랑 너무도 찰떡이라며 만장일치로 합격시켰다.

태휘는 마지못해 합격시키긴 했지만, 동아리 활동하다가 두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을 지키지 못해 조만간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건성으로 음악실에 드나들며 농땡이 칠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영롱은 생각보다 성실히 동아리 활동에 임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처음부터 예상 밖에 있던 존재였다.

태휘는 영롱과 처음으로 길게 대화한 날과 녀석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 놓은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이었으니까.

어느 날, 태휘는 방과 후 동아리 모임 장소인 음악실에 일찍 도착해서 혼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한 곡을 다 마치고 고개를 드니, 언제부터 있던 건지 문 앞에 서 있는 영롱을 발견했다.

태휘와 눈이 마주치자 영롱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변성기도 안 지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 무슨 노래예요?”

“내가 만든 노래.”

“선배, 작곡도 해요?”

“응.”

“선배, 작곡가 되려고요?”

“아니.”

“근데 작곡 왜 해요?”

“싱어송라이터 하려고.”

딱히 귀찮아서라기보다는, 유려하게 대화하는 말주변이 없던 태휘는 저도 모르게 단답형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영롱은 개의치 않는 듯 질문을 계속했다.

“씽 어쏭라…… 그게 뭔데요?”

“자기가 부를 노래 자기가 만드는 가수. 한상민 같은…….”

“우와! 나 한상민 캡 좋아하는데.”

원래도 태휘를 볼 때 빛나던 눈은 그 말에 세 배는 더 밝게 반짝거렸다. 단둘이 있는 게 처음이어서 그런지, 쉬지 않고 쫑알거리며 궁금한 것들을 물어왔다. 태휘는 굳이 무시할 이유가 없었기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한상민 같은 가수는 어떻게 되는데요?”

“나도 몰라. 우선 악기 많이 다뤄 보려고 동아리 하는 거야.”

“선배, 무슨 악기 할 줄 아는데요?”

“제일 오래 친 건 피아노. 기타랑 베이스랑 드럼은 다 조금씩…….”

“우와! 선배, 천재였구나! 캡 멋있다!”

마음에서 바로 튀어나온 순수한 감탄에 태휘는 일순 쑥스러워졌다. 중·고등학교 내내 우수한 성적을 받고 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코스였던 집안에서 가수가 되겠다고 선언한 태휘는 늘 이단아 취급을 받았으니까.

아무리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해도 가족들 눈에는 그저 돌연변이 딴따라일 뿐이었다. 같이 동아리 하는 선배나 친구들도 그저 취미일 뿐, 진지하게 태휘의 재능을 알아보고 칭찬해 준 적은 없었다.

그때까지 영롱을 그저 동아리 후배 중 하나—물론 그중 제일 조그맣고 말 많은 꼬맹이—로만 알고 있었기에, 처음으로 자신의 재능에 대한 진심 어린 칭찬을 듣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형이라고 불러.”

괜히 머쓱해져서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자신이 왜 말을 놓으라고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른 후배들한테는 한 번도 이런 적 없는데.

“형. 노래 가사는 아직 없는 거야?”

영롱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냉큼 말을 놓았다. 그러고는 총총 다가와 태휘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자신을 동경하는 후배들은 많이 봐 왔지만 동시에 어려워하기도 해서 누구도 섣불리 먼저 다가오지 못했는데, 이토록 맹랑하게 다가오는 꼬맹이라니.

태휘가 옆자리에 앉은 영롱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이 영롱은 보면판 위의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형! 여기 다시 한번 쳐 주라~. 막 이런 가사가 떠올랐거든!”

“그때는 몰랐어요~♪ 이 마음이 사랑인걸~♪”

영롱은 조금 전 들은 멜로디를 기억해 내곤 가사를 붙여 흥얼댔다. 태휘는 어설프게나마 이어 가는 녀석의 허밍을 잠시 멍하니 듣고 있었다. 영롱과 길게 대화한 것도 처음이었고, 노래하는 목소리를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말할 때는 그저 꼬맹이 같았는데, 노래하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영롱했다. 너무도 고운 음색은 자신이 쓴 멜로디와도 찰떡같이 어울렸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 뒤늦게 영롱의 흥얼거림에 맞춰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학교 창문에 부서지는 오후의 햇살과 함께 음악실 가득 영롱의 음성과 태휘의 피아노 연주가 울려 퍼졌다. 태휘의 반주에 몰입했는지, 어느새 영롱은 눈을 감은 채 아무렇게나 지어낸 가사를 흥얼거렸다.

태휘는 피아노를 치며 영롱의 눈감은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응시한 것도 처음이었다. 아직 국민학생 티도 못 벗어 낸 꼬맹이에 불과했는데, 노래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가까운 미래에 녀석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는 이 아이의 모습이. 여태 자기 것으로 생각했던 멜로디가 영롱의 목소리에 생명력을 얻고 음악실 안을 풍성하게 채웠다.

심장이 점차 빠르게 요동치는 듯하더니 저도 모르게 악보에 없던 코드까지 화려하게 연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건반 위에서 춤추던 손을 별안간 멈추자, 영롱은 놀란 얼굴로 태휘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형?”

태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는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너 노래 잘한다는 얘기 왜 안 했어?”

자신의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꾸만 하더니, 거꾸로 자기에게 묻자 영롱은 금세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 노래 잘해? 몰랐어! 여긴 기악부니까, 노래 얘긴 안 했지.”

“너 합창부 가면 잘할 거 같은데.”

나름 진지하게 조언하자, 영롱은 태휘의 어깨를 찰싹 때리고는 까르르 웃었다.

“무슨 소리야! 합창부에는 형이 없잖아!”

녀석은 다른 동아리는 생각도 안 해 봤다는 식으로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자신의 곡 주인을 만나 사뭇 심각한 태휘와는 달리, 영롱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배까지 붙잡고 웃었다. 그러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웃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이랑 이렇게 얘기 많이 해 본 거 처음이야! 오늘 일기장에 써야지!”

진짜 애네. 국민학생도 아니고, 아직도 일기를 쓰다니. 태휘는 이 꼬맹이가 너무 신기하고도 재미있어서 턱을 괸 채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되물었다.

“뭐라고 쓸 건데?”

“쓸 거 많지! 오늘 형이랑 이렇게 노래도 하고. 형이 씽 어쏭라…… 아무튼, 형 꿈이 뭔지도 알고! 거기다가 내가 노래 잘한다는 것도 알게 됐고!”

영롱은 손가락까지 접어 가며 신나서 조잘거렸다. 말없이 보기만 하던 태휘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심히 물었다.

“너 일기장에 칸 많아?”

“어? 왜?”

“칸 여유 있으면 이것도 써. ‘그리고 오늘 나의 꿈도 정했다.’라고.”

또박또박 불러 주자, 영롱은 이해를 못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태휘가 동그란 두 눈을 응시하고는 말했다.

“너 나랑 가수 하자.”

그건 표면상으로는 그래 보일지라도 제안이나 권유가 아니었다. 그 말이 태휘의 입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둘의 운명은 그렇게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영롱은 거부할 일말의 이유도 찾지 않았고, 태휘 또한 영롱이 받아들일 거로만 믿었다.

그날 이후로 영롱은 태휘의 삶에 속했다. 아니, 영롱은 그 존재 자체로 태휘의 삶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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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년 8월 -

STORY가 새로 이사한 숙소는 매니저가 말한 대로 4개의 방에 넓은 거실과 부엌, 2개의 화장실과 베란다까지 갖춰져 있는 넓은 아파트였다.

합숙 멤버인 한강, 태휘, 영롱이 각각 방 하나씩 쓰고 나머지 방은 공동 드레스룸으로 쓰기로 했다. 거실은 소파와 TV, 전화기, 컴퓨터, 게임기, 운동기구 등을 놓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가끔 설민과 오은이 자고 가도 불편함을 못 느낄 정도였으니 이전 숙소와는 비교되지 않게 좋았다. 게다가 회사 건물과도 가까워서 걸어서도 이동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팬들에게 새 숙소 위치가 금방 발각되긴 했지만.

아무튼 새 숙소는 멤버들 마음에 쏙 들었다. 각자 개인 공간이 생겨서인지, 3집 앨범 활동과 첫 콘서트를 무사히 마친 덕분인지, 그즈음 멤버들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데뷔 앨범과 2집, 3집을 연달아 히트시켰으니 소포모어 징크스7)도 깬 셈이고.

이제는 맘 편하게 충분한 공백기를 가질 법도 한데, 멤버들은 다음 앨범에 대한 부담이 더 커졌다. 아이돌로서 지속적인 인기도 신경 쓰면서도 뮤지션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심 또한 컸기에 마냥 들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멤버들 모두 짧은 휴가만 보내고 돌아와, 회사에서 시키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알아서 다음 앨범 준비를 시작했다. 태휘가 곡을 만들면 영롱이 그 가사를 붙였고, 오은과 번갈아 가이드를 녹음했다. 한강은 틈틈이 영어 랩 가사를 썼다.

데모 음원이 나오면 설민은 끊임없이 돌려 들으며 안무를 짰다. 타이틀곡이나 후속곡이 될지도 모르니, 일단 전부 안무를 만들어 두었다. 함께 모여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더 발전시키기도 하고, 필요한 부분은 회사에 요청하고.

이런 식으로 1, 2집과 달리 멤버들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해 협업하는 재미를 알게 되자, 어린애들처럼 티격태격하던 데뷔 초에 비하면 팀 분위기도 한층 성숙해지고 좋아진 편이었다. 그러던 중에 엉뚱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3집 활동 마무리 즈음 ‘스타를 속여라, 깜짝 카메라!’라는 프로그램에서 섭외 요청이 왔고, SS엔터테인먼트는 STORY의 공백기 동안 기다릴 팬들을 위해 출연을 결정했다.

‘스타를 속여라, 깜짝 카메라!’는 당시에 인기를 끌던 주말 예능 프로그램 중 한 코너로, 매주 유명 연예인을 각종 황당한 상황들로 속이는 일종의 몰래카메라였다. 이번 몰래카메라 주인공은 태휘로 낙점되었다.

처음에 이 사실을 먼저 접한 나머지 멤버들은 무뚝뚝한 리더 태휘를 골탕 먹일 생각에 한마음 한뜻으로 그저 신나 있었다. 태휘는 STORY 멤버 전원이 또래의 일반인 여성들과 서바이벌 미팅을 하는 특집 코너에 출연하는 거로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태휘를 제외한 멤버들 모두 여성들과 커플이 된다. 사실은 이 여성들은 방송국에서 사전에 섭외한 신인 배우들로, 나중에 카메라 뒤에서 여성들이 전부 태휘에게 대시를 한다는 이중 몰래카메라 설정이었다.

물론 나머지 멤버들은 그 여성들의 대시가 사전에 짜 놓은 계획인 걸 알고 있었고, 그 상황에서 태휘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가 메인이벤트였다.

초반에 여성들끼리 한 인기투표에서 꼴찌로 뽑혔을 때도, 이후 진행된 각종 게임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멤버들 모두 커플로 짝지어질 때도 태휘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 계획대로 카메라 뒤에서 여성들이 하나둘 호감을 표현하자 태휘는 어색한 웃음만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소 차갑고 무뚝뚝한 이미지의 태휘가 여자들의 적극적인 대시에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제작진들은 몰카 대성공이라며 좋아들 했다.

그러면서도 멤버들을 위해 정중하게 거절하는 리더다운 모습까지 담아냈다. 멤버들도 리더의 새로운 모습에 재미있어하며 더 오버해서 열연하곤 했다. 자신의 짝꿍이 된 여성이 진심으로 마음에 든다며, 돌아가며 태휘에게 털어놓는 식으로. 단 한 사람, 영롱만 빼고.

영롱도 처음에 속일 때만 해도 그저 신나서 연기에 열중했다. 여성들 중 누가 제일 예쁘다며, 촬영 끝나고 삐삐 번호 물어봐야겠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태휘 앞에서 일부러 늘어놓곤 했다.

하지만 뒤에서 여성들이 하나둘씩 태휘에게 접근하는 장면을 몰래카메라를 통해 직접 확인하자 영롱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영롱도 처음 참여해 보는 몰래카메라였기에, 자기가 보지 못한 태휘의 표정을 모니터를 통해 처음 확인해 보는 셈이었다.

당시에 이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연예인의 평소 모습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포맷이었기 때문이다.

데뷔 전부터 그리고 데뷔 후에도 거의 매일 붙어 있던 영롱과 태휘였던지라, 영롱은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기회가 없었다.

영롱은 어쩔 줄 몰라 곤란해하며 멋쩍은 미소만 짓는 태휘의 표정이 너무도 생경하게 느껴졌다. 자신 앞에선 단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표정이었으니까.

여성들의 대시가 사전에 계획된 설정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영롱은 급속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다행히 이번 주인공은 태휘라서, 영롱의 상태는 녹화에 큰 지장이 없었다.

몰래카메라는 결국 그 여성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할 처지에 놓인 태휘의 앞에 여장한 남자 MC가 깜짝 등장하면서 우스꽝스럽게 마무리됐다. ENG 촬영이 끝나고, PD나 작가 모두 이성 앞에서 수줍어하는 태휘의 의외의 모습을 건졌다며 매우 뿌듯해했다.

태휘는 몰래카메라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민망하고 창피했을 뿐 자신을 속인 멤버들에게 삐치진 않았는데, 엉뚱하게도 영롱이 삐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영롱은 며칠 내내 못마땅한 얼굴로 다니며 태휘가 말을 걸어도 무시하는 둥 대놓고 삐친 감정을 표출했다. 도대체 왜, 어느 포인트에서 삐친 건지 알 턱이 없는 멤버들과 매니저들은 달래며 물어봤지만 말해 주지 않았다.

태휘가 스스로 알아서 사과하고 먼저 기분을 풀어 주길 바라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자신조차도 삐친 원인을 쉽사리 유추할 수 없었다.

‘스타를 속여라, 깜짝 카메라!’ 스튜디오 녹화 때까지 영롱의 마음은 풀리지 않아서, 누가 보면 이번 몰래카메라의 주인공이 영롱인 줄 알 정도였다. 스튜디오 녹화 중 몰래카메라 VCR 감상 후 토크에서 눈치 빠른 여자 MC가 영롱에게 질문했다.

“아니, 근데 우리 영롱 군은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들은 멤버들은 모두 궁금한 마음에 영롱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평소 같으면 늘 태휘 옆에 달라붙던 영롱이가 오늘 따라 제일 끝에 섰다. 그 탓에 태휘도 고개를 빼꼼 내밀고 대답을 기다렸다.

영롱은 난처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든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촬영 중이라 평소처럼 무시하거나 말을 돌릴 수 없었기에 자기 나름의 이유를 털어놓았다.

“아, 그게요! 전 태휘 형이 그렇게 여자를 좋아하는지 몰랐거든요! 완전히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더라고요.”

“음~. 그런데 영롱 군이 왜 기분이 나빠요?”

“네?”

여자 MC의 질문에 영롱은 순간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대신 옆에 있던 오은이 끼어들어 대답했다.

“이 새…… 아니, 얘가 태휘 형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요.”

오은의 말에 스튜디오의 MC들과 방청객들 모두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영롱은 심각한 표정으로 웃지 않았다. 태휘 역시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그날 이후 영롱의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스타를 속여라, 깜짝 카메라! 직전까지만 해도 컨디션이 좋다 못해 날아다닐 정도였는데, 스튜디오 녹화 후 며칠 동안 영롱의 기분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앞서 보았듯이, 영롱의 컨디션은 타인이 알고 싶지 않아도 너무도 눈에 띄었다. 몰래카메라 당사자인 태휘도 멀쩡했고 다른 멤버들도 그저 그 생각만 하면 키득대며 웃거나 태휘를 놀리고 지나갈 뿐이었는데, 영롱은 내내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다녔다.

평소 명랑하고 방정맞은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엉뚱한 해프닝은 결국 녹음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 1~3집의 작업 일정은 조금 타이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녹음부터 믹싱과 마스터링, 그리고 안무 연습과 재킷 촬영, 뮤직비디오 촬영 등이 연달아 잡히면 컨디션 문제도 있고 아무래도 급박해져 앨범 전체적인 완성도에 지장이 있었다.

이번에 발매할 4집 앨범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작업하기로 해서, 여력이 있을 때 미리 녹음해 두자고 A&R 팀과 얘기가 된 상태였다. 그래서 수록곡 중 몇 곡의 녹음 일정을 잡아 뒀는데, 영롱의 컨디션이 바닥을 친 것이다.

하지만 태휘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녹음을 강행했다. 기분파이긴 해도 일할 땐 제대로 하는 녀석이었으니, 녹음실에 들어가면 정신을 차리겠지. 게다가 오늘 녹음할 곡은 다른 곡도 아니고 바로 ‘그 노래’니까.

녹음에 들어가기 전, 태휘는 미디엄 템포의 러브송인 만큼 특별히 밝고 사랑스러운 감정 표현을 주문했다. 그러나 영롱은 밝기는커녕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것처럼 영 기운이 없었다. 컨트롤 룸에서 디렉팅을 보던 태휘는 첫 소절 듣자마자 바로 표정이 굳어졌다.

“영롱아, 처음부터 다시 해 봐.”

“나조차도 몰랐어~. 이 마음이 사랑일까, 스치는 바람일까~. 나보다도 네가 먼저 그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는지도 몰라…….”

“영롱아, 다시 하자.”

이 노래는 태휘가 중학교 때 만든 곡으로, 음악실에서 영롱이 즉흥적으로 가사를 붙였던 그 노래였다. 데모 버전을 들은 A&R팀이 좋다며, 조금만 다듬어 이번 앨범에 싣자고 결정한 거여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막상 녹음 날 이러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나조차도 몰랐어. 이 마음이 사랑인지, 스치는…….”

태휘는 쥐고 있던 펜을 신경질적으로 두어 번 돌리고는 믹싱 콘솔을 두드렸다.

“다시.”

몇 번이나 기회를 줬음에도 한 소절 이상 무사히 넘어가지 않았다. 들어가는 박자를 놓치거나 음을 틀리는 등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그동안 영롱에게만은 한없이 약했던 태휘도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차영롱. 똑바로 안 할래?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때려치워.”

녹음 감독과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멤버들 모두 단번에 얼어붙었다. 멤버들이 예상한 영롱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아잉~. 형 미안해~. 한 번만 더 해 볼게~.’ 하며 애교 부리거나, 아니면 적반하장격으로 성질내며 ‘그래! 내가 때려치운다! 안 해, 안 해!’ 하고 뛰쳐나가겠지.

하지만 이번엔 두 가지 예상을 다 빗겨 나갔다. 영롱은 녹음 부스 안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녹음 부스 전면 유리 너머로 녀석의 표정이 어떤지 잘 보이지 않아 마이크와 스피커 볼륨을 높여 보았지만, 그저 고요했다.

잠시 후 영롱의 어깨가 들썩거리더니 옷소매를 움켜쥐고 눈 주변을 닦아 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녀석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알다시피 차영롱의 감정 표현은 꽤 극적이다. 기쁘면 우렁차게 깔깔거리며 웃고, 화날 땐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슬프면 동네가 떠나가라 엉엉 운다. 그런 녀석이 지금은 최대한 숨을 죽여 울고 있었다.

고성능 마이크에 아무 소리도 타고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영롱은 최대한 소리를 참고 있었다. 울음을 억지로 참으면 더 괴롭다는 걸 멤버들 모두 알고 있기에 차라리 평소처럼 엉엉 울어 버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태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한숨을 쉬고는 영롱에게 말했다.

“그렇게 울면 목 상하잖아. 차라리 나와서 울어. 오은이 들어가.”

그 말에 영롱은 바로 헤드폰을 벗어 놓고 부스를 나와서는 태휘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쌩하니 녹음실 밖으로 나갔다. 바로 오은 파트부터 진행하려고 하자 녹음 감독이 말했다.

“어차피 밥 먹을 시간 됐는데, 1시간 쉬었다가 하자. 영롱이 좀 달래 주고 와.”

“뭐가 예쁘다고 제가 달래 줘요?”

“그럼 쟤 달래 줄 사람 너밖에 더 있니? 저래 봬도 네 말을 제일 잘 듣잖아.”

그 말을 그냥 듣고 넘기려던 태휘는 등 뒤에서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멤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녹음 감독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듯했다. 태휘는 결심한 듯 탁 소리가 나도록 펜을 내려놓았다.

“1시간 후에 녹음 시작할게.”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녹음실을 나섰다. 밖에 있던 매니저에게 물으니 영롱은 말도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회사 건물에 있는 녹음실을 나와 녀석이 갈 곳은 걸어서 5분 거리인 숙소밖에 없었다.

태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자신이 너무 심했던 건지 반추해 보았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이번엔 영롱이 너무한 것 같았다. 다른 곡도 아니고 어떻게 이 노래를 망쳐?

‘형! 여기 다시 한번 쳐 주라~. 막 이런 가사가 떠올랐거든!’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만든 노래인 셈인데. 그리고 그날 음악실에서 자기 옆에 앉아 세상 가장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이 노래를 흥얼거리던 녀석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했기에 더 화가 난 것도 같다.

그땐 아무것도 모르던 중학생이었고, 5년이나 지난 지금 프로가 됐으면 더 잘 소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 1층으로 내려와 정문을 나서니 회사 앞에는 활동 기간도 아닌데 팬들 몇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 영롱이 봤니?”

“네. 숙소로 가던데요.”

영롱의 위치를 확인했으니, 태휘는 일단 모여든 팬들에게 한 명씩 사인을 해 줬다.

“이름이 뭐야?”

“유지애요. 이거 선물인데 영롱 오빠한테 전해 주세요. 아까 울면서 뛰어가느라 안 받더라고요.”

“알았어.”

그때 옆에서 다른 팬들이 하나둘씩 말을 걸어왔다.

“오빠! 영롱 오빠 왜 울었어요?”

“나도 몰라.”

“에이~. 오빠가 울렸죠? 그러니까 오빠가 따라왔지.”

태휘는 뜨끔해서 사인에 삑사리를 낼 뻔했다. 자기가 울린 게 맞긴 맞으니까.

“영롱 오빠한테 잘해 줘요~. 영롱 오빠가 태휘 오빠 얼마나 좋아하는데~.”

팬들도 아는 사실을 당사자인 내가 모를 리 없다. 태휘는 순간 울컥해서 말했다.

“멋대로 혼자 삐친 거야. 나도 영롱이 좋아하니까, 쟤도 나한테 잘해야 하는 거 아냐?”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져 주는 거라잖아요~.”

팬들은 그렇게 말하고는 뭐가 재밌는지 자기들끼리 까르륵 웃어 댔다. 더 좋아하는 쪽? 태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팬들에게서 선물과 편지를 건네받았다. 대부분 과자와 음료뿐인 가벼운 선물이었는데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괜히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영롱이 왜 울었는지 팬들에겐 모른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알 것도 같았다. ‘스타를 속여라, 깜짝 카메라!’ 이후로 녀석의 기분이 나빠진 이유. 녀석이 오늘 녹음을 망친 이유.

‘나조차도 몰랐어. 이 마음이 사랑일까, 스치는 바람일까. 나보다도 네가 먼저 그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는지도 몰라.’

어쩌면 영롱을 만난 이후부터 쭉 예견된 일. 그토록 외면하려고 애썼지만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는 일. 녀석의 청량함이 뜨거움으로 바뀌었을 때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의심.

매년 사계절은 반복되지만, 그 하루하루는 똑같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관계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

▶▶

방 앞에 다다른 태휘는 문만 보고 한참을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영롱의 방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문이었다.

이사를 오게 되면서 매니저 형이 숙소 벽에 못질하거나 포스터 및 브로마이드, 스티커 등을 붙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음에도 영롱은 자기 방을 정하자마자 문과 벽에 팬들에게 선물 받은 스티커와 브로마이드로 도배하였다.

팬들에게 받은 깔끔한 스타일의 ‘Please Knock’ 문구 장식만을 걸어 놓은 한강과 제 성격처럼 아무런 장식조차 하지 않은 태휘와는 비교되는 양상이었다.

영롱의 방문에 붙어 있는 스티커 중에는 태휘와 영롱이 어깨동무한 채 미소 짓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태휘는 그 사진 속 자신들을 들여다보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신호를 무시해 왔는지 떠올렸다.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던 교실에서의 첫 만남부터 음악실에서 늘 나눠 앉던 피아노 의자. 등하굣길의 함께했던 나란한 발걸음. 서로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자연스러운 어깨동무와 팔짱, 포옹.

태휘가 처음 여자 친구를 사귀었을 때 못마땅해하던 얼굴. 오디션을 보러 서울로 오던 차 안에서 긴장감을 감추려 포갠 둘의 손. 연습실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느끼던 시선. 이동하는 승합차에서 서로에게 당연히 내주던 어깨.

정신을 잃을 정도로 뜨거운 열병 중에도 걱정되던 녀석의 울음. 좁은 숙소 방 안에서 잠 못 들 때 나눈 수많은 속삭임. 그 모든 곳 모든 순간에 영롱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여기까진 우정이라고 선 그을 만한 여지가 있었다.

이번 몰래카메라 해프닝으로 영롱이 그 선 어디쯤 있는지 명확해졌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정 외에 다른 감정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도 못 한 영롱을 대신해, 옆에 있던 MC 누나와 오은이 확인해 준 셈이었다.

‘그런데 영롱 군이 왜 기분이 나빠요?’

‘얘가 태휘 형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요.’

그날의 몰래카메라 이후 오늘 녹음까지. 영롱 안에 숨어 있던 뭔가가 눈을 뜬 게 분명했다. 한편 태휘는 조금 더 빨리 자각했다. 숙소를 옮긴 뒤, 각방을 쓰게 됐음에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으니까.

좁은 방에서 항상 달싹 붙어 자던 존재가 사라지고, 녀석에게 내어 주곤 했던 팔에 아무 무게감도 없으니 너무 허전했다. 그 허전함 때문에 그동안 진열만 해 뒀던, 팬들에게 선물 받은 인형들을 팔에 누이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그놈의 더위도 사라지지 않았다. 영롱에게 밀착 금지령을 내린 게 무색할 정도로, 영롱이 눈앞에 없으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스케줄 때문에 같은 공간에 모이게 되면 제일 먼저 영롱부터 찾았다.

그러다가 녀석이 강이 형이나 이설민과 붙어 있는 모습이 눈에 띄면 왠지 모르게 또 가슴에서부터 열이 났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걸 망쳐 버린다는 사실을 아는 것까지도,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사랑이었다.

한편 영롱은 그 정도는 아닌 듯 보였다. 녀석은 이게 우정인지 사랑인지 구분도 못 하는 애새끼일 뿐이었다.

‘영롱 오빠가 태휘 오빠 얼마나 좋아하는데~’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져 주는 거라잖아요~.’

우리는 과연 누가 더 좋아하는 걸까? 아무래도 내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녀석에게 자꾸만 져 주고 싶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누가 더 좋아하든, 멈춰야만 하는 감정이었다.

태휘가 중학교 때 영롱에게 약속한 그들의 미래는 확고했다. 가수로 데뷔해 정상에 자리에 올라, 수많은 사람에게 오래도록 자신들의 노래를 들려주는 것.

녀석을 향한 이 감정은 그들의 미래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순간의 욕구에 흔들려 동료이자 친한 형·동생 사이의 선을 넘는다면 모든 것을 망쳐 버릴 게 분명했다.

설령 자신은 어떻게든 컨트롤 한다고 해도, 영롱까지 컨트롤 할 순 없었으니까. 사람들은 태휘가 영롱의 모든 컨디션을 좌우한다고 생각했지만, 영롱이 태휘의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할 뿐 그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그게 듀엣이 아닌 5인조 그룹을 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 그나마 영롱의 관심이 분산될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영롱과 거리감을 두려고 한 이유도 있었고.

영롱은 천성적으로 많은 이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와 남들보다 잘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한 아이였으니, 단체 생활에도 잘 적응할 것 같았다. 다행히 STORY의 멤버로서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으니 옳았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데뷔 1년 차였다. 이 감정이 사랑이든 소유욕이든 뭐든 간에 자신들을 휘두르도록 둘 수 없었다. 아직은 좀 더 가수로서 커리어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영롱은 이런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태휘가 서둘러 냉정히 결정해야 했다. 안 그래도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인데!

녀석이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마음을 먹는 순간, 태휘가 약속했던 미래는 무너지고 말 게 뻔했다. 태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방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축 처진 두 어깨부터 눈에 들어왔다. 영롱은 문 쪽으로 등을 보인 채 방 한가운데에 놓인 싱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암막 커튼을 쳐 둔 방은 어둑했고, 협탁 위 작은 조명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태휘는 팬들에게 받아온 선물을 문 옆에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갔다.

“오지 마, 원태휘.”

그 소리에 침대를 한 발자국 앞에 두고 걸음을 멈췄다. 눈이 뒤통수에도 달린 걸까? 뒤도 안 돌아보고 어떻게 나라는 걸 아는지. 호흡, 발걸음 소리, 향기까지 나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달려올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거겠지.

여전히 울먹임이 남아 있는 목소리가 신경 쓰였으나, 굳게 결심한 만큼 최대한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

“아직 덜 울었어? 네 투정 웬만큼 다 받아 주지만, 녹음까지 지장 주면 곤란해.”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순히 알아들은 걸까?

“마저 울고 녹음실로 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 나가려고 했더니, 영롱이 바로 뒤돌아 덥석 손을 잡았다.

“가지 마.”

조금 전엔 오지 말라더니. 어쩌라는 거야, 대체. 태휘는 뒤돌아 영롱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은 어둠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자 다시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때려치우라고 해서 속상했어?”

“아니.”

“그럼.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형, 그때 소개팅 때…….”

역시. 그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태휘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정확하게 정정해 주었다.

“몰래카메라 때.”

영롱은 개의치 않고 손을 꼭 붙잡은 채 물었다.

“그 누나들이 고백하니까 어땠어? 좋았어? 설레었어?”

지금, 이 순간에 제일 궁금한 게 그거였냐? 솔직히 그땐 자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당황스럽고 난처했을 뿐이었다.

소개팅에서 다른 멤버들과 커플이 된 사람들이 뒤에선 자기한테 호감을 보이다니. 사실 유쾌한 일은 아니지. 아무리 방송이라지만, 그들이 멤버들한테 거짓말을 한 셈이었으니까.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얼핏 몰래카메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와중에 정작 차영롱 본인은, 나한테 와서 누구누구가 제일 예쁘다며 삐삐 번호 물어봐야겠다고 신났던 건 기억 못 하나 보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도 다 연기였던 거지만 당시엔 그게 더 기분 나빴다.

그 때문에 기분도 별로였고 당혹스러웠어도 그 여성들에게 괜히 화풀이할 순 없었기에 어색한 미소로 대했던 건데. 이 자식은 내 속도 모르고.

방송에서는 태휘를 여자들 앞에서 쑥스러움 많이 타는 숙맥처럼 표현했지만, 예고 다닐 때 예쁘기로 소문난 여학생들에게 고백도 많이 받았고, 가수 데뷔 전까지 사귄 여자 친구도 있었다.

아무튼, 그랬던지라 여자들의 대시에 새삼 좋아할 이유도 없었는데 좋아 죽는 것처럼 보였다니. 그리고 그게 삐친 이유라니.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태휘를 속이기 위한 소개팅 연극 속에서, 가짜 상대역을 맡은 배우들이었다. 그 여자들을 상대로 질투를 하고 있다니.

태휘는 그 질문에 그럴 리가 있겠냐고, 실은 분노와 당혹감을 겨우 참은 거였다고 솔직히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도 자기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영롱을 붙잡는 게 우선이었다.

“기분 나쁘진 않았지.”

“그럼 몰카 아니었으면 그중 누구랑 진짜 사귀었을 수도 있겠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러진 않았을걸. 지금 연애할 정신이 어디 있어?”

그 말에 영롱은 곧바로 기분이 풀린 듯 표정이 밝아졌다. 이런 단세포 녀석.

“그런데 내 기분이 좋든 나쁘든, 사귀든 말든 네가 왜 그리 신경 쓰는 건데?”

태휘가 바로 선을 그으며 밀어 내자 영롱은 이내 다시 시무룩해졌다.

“지금은 생각 없지만, 언젠가는 연애하겠지. 너도 그럴 거고.”

“난 안 그럴 거야.”

평범한 대화라면 ‘왜?’라고 물어야 정상이겠지만, 차마 그렇게 물을 수 없었다. 그 ‘왜?’에 대한 대답이 그토록 피하려 했던 진실이니까. 그 진실을 건드리지 않고, 영원히 묻어 두고만 싶었다. 필사적으로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 말아야 했다.

태휘는 말을 돌리기 위해 영롱의 속내 대신 바깥으로 관심을 옮겼다. 꽉 깨물어 부르튼 입술과 잔뜩 부은 얼굴을 보아하니 오늘 녹음은 더는 무리인 듯 보였다. 태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더는 녹음 못 할 것 같으니 오늘은 그냥 푹 쉬어.”

“형은 나한테 전혀 관심 없지?”

잠긴 목소리 때문인지, 그 내용 때문인지 태휘는 일순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영롱은 원망 섞인 눈빛으로 태휘를 올려다보았다.

“형은 오직 내 노래, 내 목소리에만 관심 있지? 노래 못하는 나는 필요 없는 거지?”

갈라진 목소리를 겨우 쥐어 짜내어 묻는 말에 태휘는 머리가 멍해졌다. 어두운 방구석에 처박혀서 조그만 머리로 혼자 생각해 낸 게 고작 그거라니.

“그럴 리가 있어?”

“근데, 왜, 나한테 이래…….”

그러더니 영롱은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녀석의 우는 모습을 또 볼 생각을 하니 심장 한구석이 욱신거려왔다.

“제발, 영롱아. 내가 어떻게 해 줄까? 너 토라질 때마다 부탁 다 들어줬잖아. 놀이공원도 가주고, 커플 팔찌도 맞추고. 평생 이럴 거야? 어떻게 해야 앞으론 이런 감정 소모 안 하고 일에 집중할래?”

어느새 밖은 어둠이 내려 방 안은 한층 더 어두워졌고 은은한 조명 불빛만이 퍼졌다. 그 조명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훌쩍이던 영롱은 한결 또렷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부탁 들어줘.”

“뭔데? 진짜 마지막이야.”

“키스해 줘.”

태휘는 순간 아득함을 느끼고 눈을 감아 버릴 뻔했다. 방문을 열기 직전,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영롱이 덜컥 사랑 고백을 한다거나, 사귀자고 매달리면 어떡하지, 그런 상상만 하고 있었다.

만약 그런다면 냉정히 거절하리라 결심하고 있었는데. 키스는 예상 밖이었다. 키스 하나면 다 해결되는 거야? 녀석은 정말 그걸로 충분한 걸까? 아니면 키스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거로 생각하는 걸까?

태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 부탁이라니까……. 이윽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영롱이 다가왔다. 어릴 때보다 키가 부쩍 자라긴 했지만, 여전히 영롱의 이마는 태휘의 턱 한참 아래에 있었다.

고개를 숙여 그 얼굴을 마주하니 그제야 이 ‘마지막 부탁’의 목적을 알았다. 녀석은 이걸로 자신의 감정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우정인지 사랑인지도 몰라서 그저 혼란스럽고, 무엇을 요구하고 고백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녀석에게 가장 쉬운 해결 방법. 단순하고 본능에 충실한 영롱에겐 이게 최선이었던 거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영롱은 손을 뻗어 태휘의 얼굴을 만졌다. 까치발을 들고 시선을 맞춰오자 바로 코앞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태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녀석을 단념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무 반응도 하지 말아야 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겠어.”

영롱은 두 손으로 태휘의 얼굴을 감싸고는 순식간에 입술을 부딪쳐 왔다. 하지만 입술끼리 맞대는 것 외에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지, 이게 전부였다.

야, 이게 키스냐? 뽀뽀지? 이걸로 뭘 알아내겠다는 건지. 태휘는 순간 욱해서 실망감을 표현할 뻔했다. 그러다 얼른 다시 이성을 되찾아, 작은 어깨를 붙들고는 그대로 밀어 내 버렸다. 굳은 얼굴 뒤로 아쉬움을 애써 감추고는 영롱을 내려다봤는데……. 젠장.

녀석의 얼굴을 보자 절망감에 몸이 휘청거릴 뻔했다. 키스라고 말하기에도 뭣한 조금 전 행위에, 영롱의 두 뺨은 붉게 상기돼 있었다. 녀석 역시 빼도 박도 못하는 사랑인 게 분명했다. 녀석도 방금 확신한 듯한 얼굴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형, 나 형을…….”

“말하지 마.”

태휘는 다급히 영롱의 뒷말을 끊고 말했다.

“난 네가 동생으로밖에 안 보여.”

조금 전 입맞춤에 상기되어 있던 얼굴이 순간 잿빛으로 변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태휘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작은 어깨를 붙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난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기 위해 계속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러니 다른 원하는 걸 찾아.”

“내가 원하는 건 형인데?”

그 목소리는 다시 울먹거리고 있었다. 녀석의 얼굴을 마주하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지도 몰라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가로저었다.

“아닐 거야.”

“형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너에 관한 건 내가 너보다도 잘 아니까.”

“지랄하고 있네.”

녀석의 욕에 일순 화가 치밀었지만, 이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되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녀석이 다시 매달리려는 걸 팔을 뻗어 필사적으로 막아 냈다.

“아직 내가 애 같아서 그래? 그럼 내가 성인이 되면, 그땐 다시 봐줄 거야?”

내년이면 영롱은 20살이 된다. 아무래도 녀석은 자신이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애 취급하는 거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둘 사이의 문제가 나이만은 아닌데.

영롱은 가수로서의 커리어나 앞으로의 관계에 대한 걱정보다도 자신의 감정이 제일 중요한 듯했다. 그런 녀석이었기에 더더욱 둘 사이에 선을 명확히 그어야 했다.

“아니.”

태휘는 단호하게 말하곤 영롱을 세게 밀어냈다. 힘없이 밀려나는 녀석의 얼굴을 보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방을 나왔다. 빨리 이 집에서 나가야 했다. 영롱이 또 울면서 자기 이름이라도 부른다면 이번에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숙소 앞에는 팬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아파트 후문 방향의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멈춰 서서,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진정하기 위해 깊게 심호흡하려는데, 조금 전 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저 서툴기만 했던 뽀뽀일 뿐인데? 그 감촉을 잊으려 손등으로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지만, 이상하게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입술만 뺏겨서 천만다행이지.

당시엔 이게 최선이었다고 수백 번도 더 합리화했다. 영롱의 폭주를 막은 자신이 기특해 스스로 칭찬했다. 하지만 이 일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지 미처 알지 못했다.

서재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한강, 설민, 오은은 저마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오직 태휘만이 차분하게 술잔을 들이키며 멤버들을 둘러봤다. 와중에 아무도 부인하지도 않는 걸 보니, 너무 놀라서 거짓말하는 법도 잊은 모양이었다.

“왜들 그리 놀라?”

“태휘야, 그게…….”

“아니, 저기…… 진짜야……? 형이랑 너도?”

한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차마 멤버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설민은 도무지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까지 더듬었고, 오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하, 참나. 존나 어이없어서. 우리가 구멍 동서였다니.”

“단어 선택 저렴한 것 봐라, 개오은.”

“개오은, 뭐야. 너희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결국 진짜 잡아먹었냐?”

아무래도 서로 간엔 그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자기들끼리 알고도 지금까지 뻔뻔하게 굴었다면 정말 개새끼들이지. 이미 충분히 개새끼들이지만. 충격받은 듯 서로를 대하는 멤버들의 모습에 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술잔을 채우며 중얼거렸다.

“무슨 팀이 씨발, 동물의 왕국도 아니고.”

“저기, 태휘야.”

“각자 알아서 사생활 잘 관리하라는 소리를, 밖에서 사고 치는 대신 멤버랑 자라는 소리로 들었나 봐?”

태휘는 대놓고 비꼬며 그동안 눌러뒀던 화를 실컷 분출하는 중이었다.

“그럼 넌 그때 다 알고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모른 척한 거야? 13년 동안?”

“형은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았는데?”

멤버들의 질문 공세에 태휘는 또 영겁 같은 침묵의 시간을 지나 천천히 술잔을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차영롱이 얘기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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