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ack 2. Tear Down (04:38) (15/39)

Track 2. Tear Down (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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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년 12월 -

1년에 최소 두 장의 정규앨범을 발매한 예년과는 달리 199□년은 5집 앨범 한 장만을 내고 전국 투어와 라이브 앨범에 집중한 해였다. 이제 햇수로 데뷔 4년 차가 목전이었기 때문에 댄스 그룹으로서 STORY는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기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태휘는 그룹을 해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구체적인 것까지 멤버들에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데뷔 당시 태휘는 향후 10년의 계획까지 다 세워 둔 상태였다. 각 앨범의 컨셉과 그룹의 나아갈 방향까지 머릿속에는 이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태휘는 STORY가 여태껏 가요계에 나왔던 수많은 댄스 그룹들처럼 흐지부지 끝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국 가요계 최초로 롱런하는 아이돌 그룹을 만들기 위해 리더이자 프로듀서로서 할 수 있는 공부와 노력은 다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돌이켜보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듯했다. 리더로서 멤버들의 입장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룹은 리더 개인의 이상이나 능력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그때의 태휘는 몰랐다. 제아무리 천재 프로듀서이고 출중한 리더라고 해도 고작 21살짜리 남자애일 뿐이었다. 게다가 사랑에 빠진.

영롱과 멤버들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된 건 밀레니엄을 코앞에 둔 겨울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재앙 예언이나 Y2K1) 등의 소문으로 뒤숭숭하던 연말. 그런 것들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던 태휘는 자기만의 재앙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영롱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안다고 자부한 일이 사실은 자만일 뿐이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영롱과 자신은 물과 기름처럼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차이점을 모르진 않는다고 믿어 왔는데, 영롱의 사고와 행동이 태휘의 이해 영역 바깥에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작년, 영롱의 고백을 거부한 일이 그간 어떤 상황을 만들어 냈는지 감히 짐작도 못 했다.

그렇게 잘 안다고 자신만만했다면, 애초부터 거절당한 영롱의 마음이 어떻게 빗나갈지도 예상했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계획적이고 자신이 정한 원칙 안에서만 철저했던 태휘는 즉흥적이고 폭발적이었던 19살의 영롱이 난생처음 겪는 감정—예컨대 실연—을 접했을 때 어디로 어떻게 튀어 나갈지 전혀 몰랐다는 게 그의 한계였다.

설마 자신에게 차였다고 나머지 멤버들과 자고 다니는 행동은 예상은커녕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상상조차 못 했기에 이상한 기미도 느끼지 못했다.

영롱이 얼마나 철저히 멤버들과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했으면, 일말의 소문도 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점이 불행 중 다행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태휘의 선에서 막을 수 있었으니까.

태휘와 영롱이 합숙 중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꽤 늦게 알게 된 셈이었다. 1년 전 그 일 이후 태휘는 의도적으로 단둘이 있는 시간을 피해 왔고 영롱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다만, 3개월 전 영롱을 때렸을 때를 제외하고.

그때 태휘는 그동안 자신이 영롱을 방치해 왔기에, 오은에게 같은 멤버로서 해선 안 되는 말을 했다고 여겼다. 그런 영롱을 막을 방법은 자신이 직접 혼내는 것뿐이라 생각해서 저지른 행동이었다. 그러곤 불과 며칠 후 미안함에 사과하고 말았지만.

‘미안. 다시는 네게 손대는 일 없을 거야.’

‘괜찮아. 나도 개오은 새끼랑 따로 화해했어.’

당시에는 ‘정말 화해했다면 개오은 새끼라고 불렀을까?’라는 의심만 들었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그 화해가 씨발 몸으로 하는 화해였을 줄이야. 아무튼, 그때 때린 일에 대해 사과하고 영롱이 받아들이면서 둘의 사이는 더 나빠지진 않았다.

물론 사이좋았던 예전에 비해 거리감이 생기긴 했지만, 다행히 그룹 활동에 지장은 없었다.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자신에게 달라붙어 칭얼대는 일이 줄어 한결 편해졌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영롱을 대하는 자신의 단호한 태도에 내심 죄책감이 있었는데, 녀석이 더는 철없이 굴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20살이 되더니 훨씬 어른스러워졌구나 싶어서 감격할 뻔했으나, 실은 다른 방식으로 어른이 된 거였다.

그날은 본가에 갔던 태휘가 예정보다 하루 일찍 숙소에 돌아온 날이었다. 5집 앨범 활동도 마무리하고, 연말 콘서트 일정도 끝나서 멤버들 모두 자유로운 공백기를 보내고 있었다.

연습생 때나 활동 초기에는 휴식기라 할지라도 멤버들끼리 어울려 놀곤 했지만, 5집 정도 되니 휴식기엔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이때도 집안 행사 때문에 태휘가 집에 다녀오는 동안 영롱은 숙소에 있었다.

가족 모임이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되자 태휘는 예정보다 빨리 서울로 돌아왔다. 전부터 태휘는 집보다는 회사나 숙소가 편했다. 음악 작업을 실컷 할 수 있는 녹음실을 제일 좋아했고, 숙소에는 영롱이 있어서 마음이 편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본가보다는 선호했다.

일단 각자의 방에 들어가면 거의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영롱은 태휘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오히려 온 신경을 쏟고 있는 편에 속했다.

숙소에서 태휘는 영롱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다가 나간 걸 확인하고 숙소 안을 돌아다녔고, 들어오면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어쨌든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거라 영롱을 마주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평소에 일정 변동에 대해 일일이 연락하던 것도 아니어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매니저들도 다 연말 휴가 중이라 멤버들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연락하는 것도 좀 그랬고.

태휘가 알기론 오늘 밤 비행기로 한강이 미국에 간다고 했으니, 저녁까진 숙소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롱이 숙소에 없을 수도 있고, 있어도 강이 형과 셋이니 걱정하는 상황은 없겠거니 싶었다. 딱 그것까지만 예상했는데.

어둑한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태휘는 현관에 나와 있는 신발부터 확인했다. 영롱과 한강 둘 다 안에 있는 것 같은데, 숙소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아직 이른 저녁인데, 둘 다 자는 걸까?

강이 형이 아직 있다면 공항 가기 전에 인사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그쪽 방부터 들렀다. 꽉 닫힌 문에 걸린 ‘Please Knock’ 장식을 보고는 노크하기 위해 손을 드는 찰나, 방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흐읏…….”

허공에서 멈춘 손은 물론 온몸 전체가 굳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는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형이 방에서 혼자 해결 중인 건가? 아니면 애인이라도 데려왔나?

하지만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숙소에 영롱도 있는데 이렇게 큰 소리를 낼 형이 아니었다. 의아했지만 못 들은 척 뒤돌아 가려고 했는데, 곧이어 다른 이의 음성도 들렸다.

“아아, 형, 너무 좋아…….”

절대로 모를 수 없는 목소리였다. 어쩌면 태휘의 모든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었을 그 목소리. 그 목소리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목소리가 유일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어지는 한강의 음성에 그 간절한 바람은 무너지고 말았지만.

“하아, 영롱아…….”

어지러운 신음뿐만 아니라 적나라하게 살 부딪히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닫힌 문틈 사이로 뜨거운 열락의 기운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의 성생활을 엿듣는 취미는 없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얼어붙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특히 영롱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귀와 팔다리를 붙드는 듯 엉켜 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아……!”

거의 막바지에 도달했는지 두 사람은 한껏 달아올라 격렬히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정신없이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태휘의 산산조각이 난 이성 중 한 조각은 당장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 강이고 영롱이고 죄다 패 주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붙들어 매고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곧바로 방으로 가려다가 와중에 신발 생각이 나서 현관으로 가 자신의 신발을 챙겨 들어왔다.

차마 오르가즘까지 이르는 소리는 듣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온 태휘는 멍하니 서 있다가 쓰러지듯 침대 위로 엎드렸다. 무슨 생각이든 해야 했는데, 머리가 통 돌아가지 않았다. 멈춰 버린 머리 대신 영롱의 목소리에 발기한 성기만이 바지 속에서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영롱을 상상하며 자위한 적은 있어도, 상상 속에서만 떠올리던 영롱의 색스런 음성을 실제로 들으니 그 효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그 상상 속에 다른 남자는 없었는데. 그것도 같은 팀 멤버는 더욱이.

둘이 언제부터 저런 사이가 된 걸까? 멤버 중에 설민이라면 모를까, 강이 형은 너무도 의외였다. 사생활에 있어서 누구보다 철저한 한강 형이었기에, 평소에 성적 취향도 연애 스타일도 어떤지 전혀 알 기회가 없었는데, 언제부터 영롱이와 저런 관계가 된 걸까?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오늘 예정에 없이 숙소에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숙소에 단둘뿐이라고 알고 안심하고 저런 대담한 짓을 벌였다는 걸 생각하면, 한두 번이 아닐 수도 있고 꽤 오래된 관계일 수도 있다.

그 생각에 순간 혈압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영롱은 그렇다 치고, 상대는 2살이나 형인 한강이었다. 설민이나 오은처럼 동갑이나 동생이었으면 참을 것도 없이 바로 달려들었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차츰 진정되자 머리에서 수많은 생각이 폭발하듯 솟아났다. 둘이 진짜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렇지만 그 상황이어도 혈압이 오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한테 그렇게 고백해 놓고, 거절당한 뒤 바로 강이 형과? 영롱의 가벼움에 화가 나고 그런 영롱을 받아들인 한강에게도 화가 났다. 물론 반대 경우여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모든 상황이 화가 났다. 사랑이든 단지 육체적인 관계뿐이든, 멤버끼리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저래도 되는 거면 1년 전에 내가 뭐 때문에 참았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태휘는 이 분노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은 팀을 위해 거짓으로 진심까지 감추며 영롱을 거부했는데, 그게 자기만의 노력에 불과했다는 허무함과 배신감이 그 이유였다.

물론 멤버들과 그런 원칙을 정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그건 팀 활동의 기본이라고 생각했기에 따로 언급할 필요도 못 느꼈다. 함께 그룹 활동하면서 일적인 관계가 사적인 감정으로 뒤엉키지 않도록 노력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그렇게 태휘는 이 일은 자신이 영롱을 아끼는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질투가 아니라, 팀의 리더로서 멤버 둘에 대한 배신감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렸다.

그러는 사이에 방 건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방문 열리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리는 것 보니 둘 다 방에서 나온 듯했다. 태휘는 자신의 방문 앞까지 무릎으로 조용히 기어가 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형 같이 씻을래?”

너 미쳤어? 영롱의 말에 태휘는 순간 몰래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걸 잊고 육성으로 벌컥 화를 낼 뻔했다.

“아, 오늘은 안 돼. 비행기 시간 얼마 안 남아서.”

“씻기만 하자는 건데, 무슨 생각한 거야~? 엉큼하긴. 알았어. 얼른 씻어.”

영롱은 한강을 실컷 놀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듯했다. 잠시 후 욕실에서 씻고 나온 한강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외출 준비를 마치고는 짐을 챙겨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소 분주하게 들리는 것 보니 숙소에서 나서는 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진 모양이었다. 와중에 한강은 영롱의 방으로 향하더니 문을 두드렸다.

“왜?”

“뭐 필요한 거 없어? 사다 줄게.”

“음……. 글쎄. 콘돔?”

“뭐래. 나 간다.”

바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보니 영롱은 방에서 나와 보지도 않고 인사를 마친 듯했다. 조금 전 뜨거운 정사를 나눈 이들치고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다정한 연인 사이로는 보이지 않는 심심한 대화였다.

강이 형이 원체 둔감해서 반응이 없을 뿐이지, 그 짧은 대화 중 절반은 영롱이 도발하며 놀려먹는 게 다였다. 저 둘 사이는 대체 뭘까? 궁금해하는 사이 강이 형이 트렁크를 끌며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강이 형은 그대로 공항으로 가고 미국으로 가서 다행인데, 숙소 안에는 녀석이 있었다. 어떻게, 언제까지 집에 없는 척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영롱이 외출하면 다행이지만, 녀석이 나갈지 안 나갈지 모를 일이었다. 아까 둘의 상황을 알아챈 직후 바로 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게 실수였다.

설민에게 연락해서 영롱을 불러내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그 수다쟁이 자식이 꼬치꼬치 이유를 캐물을 걸 생각하니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피하지 않고 영롱과 마주하는 것. 오늘 자신이 보고 들은 일에 대해 영롱에게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몸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

영롱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러더니 저벅저벅 발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불안함에 뒷걸음치는 사이, 태휘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문이 열리고 잠옷 차림의 영롱이 보이자 뒷걸음질 치던 태휘는 바로 멈춰 섰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표정을 지었지만, 영롱은 속내를 알아챈 눈치였다.

그런데도 태휘는 오래 단련된 포커페이스로 다시 무장하고 영롱을 마주 봤다. 이제는 영롱을 대할 때 본능적으로 챙겨 입는 갑옷이나 마찬가지였다.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영롱을 향해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나 있는 거 알았어?”

“응.”

“언제부터?”

“형이 숙소 문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태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그 말대로라면 집 안에 자기가 있는 걸 알면서도 그만두기는커녕 태연히 그 짓을 이어 갔다는 거다. 태휘가 차마 말을 못 잇는 데 반해 영롱은 서슴없이 말을 이어갔다.

“현관문 소리 들었어. 숙소 문 열고 들어올 사람 형밖에 없으니까. 리버 형은 워낙 둔해서 못 들었지만…….”

“내가 있는 거 알면서 그랬다고?”

그러자 영롱은 한 발자국 성큼 다가왔다. 방금까지 한강과 뒹굴던 몸에서 정사의 기운이 물씬 풍겨와 태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빨개 보이는 입술은 잔뜩 부어 있었고, 벌어진 잠옷 사이로 한강이 남긴 것이 분명한 흔적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 와중에 태휘는 녀석이 모기에도 금세 붉게 부어오르는 여린 피부의 소유자였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래서 모기에 안 물리게 하려고 지새우던 밤들 또한 선명히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모기 따위가 아니라……. 충격으로 머리가 이상해졌는지 의식이 제멋대로 흘러갔다.

그때 영롱이 무심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고, 손목에서 반짝이는 YR 팔찌가 시야에 들어왔다. 너 지금 그 팔찌하고 리버 형이랑 떡친 거야? 나랑 맞춘 팔찌를 차고?

눈에 닿는 영롱의 모든 것이 태휘를 돌아 버리게 했는데, 그 입에서 나오는 말까지 가관이었다.

“응. 그래서 일부러 더 크게 소리 냈어.”

영롱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서슬 퍼렇게 눈을 뜨고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태휘를 마주 보았다. 태휘는 떨려오는 손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꼭 쥔 채 부들거렸다.

그럼 아까 유난히 컸던 교성, 한강에게 같이 씻자고 한 말, 콘돔 사 달라는 소리까지 전부 태휘를 자극하기 위한 도발이었다는 거다.

“그 소리에 리버 형은 아주 흥분하던데. 형은 어땠어?”

덤비듯이 맹랑하게 내던지는 말에 태휘는 어지러울 만큼 타격을 느끼면서도, 분노로 갈팡질팡하던 머릿속은 서서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다 나를 향한 원망의 몸부림이었구나. 그걸 깨달으면서 모든 게 정리가 됐기 때문에.

지금 영롱은 작년 여름, 자신을 방에 덩그러니 남겨 두고 차갑게 돌아선 태휘에게 복수하는 중이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때 태휘가 거부한 게 무엇인지 똑똑히 보란 듯이, 속을 다 뒤집어 놓겠다는 듯이, 화병으로 말려 죽이겠다는 듯이.

노래 못하는 자기는 필요 없는 거냐며 훌쩍이던 19살 영롱의 모습은 사라지고, 다른 남자와 보란 듯이 몸을 섞는 20살 영롱만이 눈앞에 서 있었다.

머릿속에서 폭발한 모든 가정과 추측이 무색하리 만큼 녀석다운 단순한 방법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다른 멤버까지 끌어들일 줄은 몰랐는데.

꽉 쥔 주먹을 그대로 영롱에게 날리고 싶었지만, 다신 손찌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화를 낸다면 녀석은 자신의 복수가 성공했다고 의기양양하겠지.

영롱도 한강도 마음 같아서는 둘 다 신나게 패 주고 싶었지만, 태휘는 꾹 참기로 했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줘야 더는 이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 하자는 거야, 너?”

“기왕 들킨 거, 숨겨도 소용없잖아.”

태휘는 섹스의 흔적이 역력한, 흐트러진 차림의 영롱의 몸에서 시선을 거두고 동그란 눈만을 주시하려 애썼다. 뭘 잘했다고, 의기양양하게 빛나는 녀석의 눈을 최대한 차가운 눈빛으로 응수하다가 입을 열었다.

“리버 형이랑 사랑하는 사이야?”

혹시나 해서 확인하고 싶었다. 차라리 리버 형과 연인이라면.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날 원한다고 했던 녀석이니까,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나마 상식적으로 반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영롱의 마음이 변해서, 둘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면 태휘 또한 마음을 접고, 그래도 그룹 내 연애는 곤란하니 헤어지라고 설득하면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영롱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라는 듯 두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당당했던 태도 역시 한결 수그러지더니 말까지 더듬거렸다.

“나, 나 동생으로밖에 안 보인다며! 무슨 사이든, 형이 무슨 상관이야?”

작년에 태휘가 했던 말부터 들고나오는 거 보니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녀석은 지금 리버와의 관계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현장이 걸린 김에, 태휘를 실컷 자극할 심산이었던 거다.

“리더로서는 상관있지. STORY의 앞날을 위해서.”

그 반응에 영롱은 진심으로 충격받은 듯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태휘가 흥분하고 화내고, 같은 남자로서 한강을 질투하기를 기대했음이 빤했다. 그런데 리더 운운, 팀 운운이나 하고 있으니. 그 커다란 실망감은 한눈에 다 티가 날 정도였다.

“앞날 좋아하네.”

충격에서 못 벗어났는지 영롱은 허탈하게 웃으며 이기죽거렸다. 태휘는 어째서 자신의 말에 빈정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서로의 미래를 위해, 힘들게 노력해서 가수가 된 건데 그걸 왜 무시하는지.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팀을 오래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큰데, 녀석은 왜 이해 못 하는지.

태휘는 불현듯 가수 데뷔를 위해 SS엔터테인먼트에 오디션 보러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솔 대표는 영롱을 STORY가 아닌 다른 그룹으로 데뷔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태휘는 끝까지 영롱과 함께가 아니면 안 하겠다고 고집했다.

영롱 없이는 가수 하는 의미가 없었고, 누구보다도 오래 함께하고 싶었다. 영롱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었고, 영롱은 오래오래 사랑받는 가수가 되어야 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말 거다. 내겐 그럴 책임이 있다. 나 하나만 꾹 참고, 이 위기를 잘 넘기면 가능하리라 여겼다.

“시간 줄 테니 둘 관계 정리해. 팀 활동도 당분간 없으니까.”

“……그게 다야?”

태휘의 단호한 말에 영롱은 멍하니 있다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 당당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마구 뒤섞인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 이 상황에 뭐가 더 필요해?”

“형은 뭐든 그렇게 쉬워? 감정이든 관계든?”

쉬울 리가 없잖아. 너와의 관계도 이렇게 복잡한데.

“어떻게든 해결점을 찾아야 하니까. 그리고 뭐든 쉬운 건 너잖아. 멤버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선을 넘은 건 다름 아닌 너야. 작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때 내가 거절했다고, 보란 듯이 리버 형이랑 붙어먹은 거야? 그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뱉지 못하고 삼켰다. 그런 말은 지금 영롱의 감정에 더 큰불을 지필 뿐 하나도 도움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 말은 끝내 삼켰지만, 마지막 문장에 녀석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형은 작년 일이랑, 오늘 일이 같다고 생각해?”

“그럼 뭐가 다른데?”

“형은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몰라?”

영롱의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이제 절망감이 가득했다. 오늘 맞닥뜨린 영롱과 한강의 일을 해결하려는 태휘와는 달리, 영롱은 자꾸만 태휘와의 일을 끌고 왔다. 그 점이 태휘를 불편하게 했다. 자신의 의사는 이미 작년에 확실히 못 박았는데.

‘난 네가 동생으로밖에 안 보여. 난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태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영롱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꾹 감은 채 말했다.

“형이 지금 어떤 말 한마디만 하면, 나는 리버 형과의 관계 당장 정리할 수 있어.”

녀석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리더로서가 아니라 남자로서 말해 봐.”

녀석이 꿈꾸는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우린 분명 같은 꿈을 꾼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꾸 멀리 돌아가려고 하는 건지. 태휘는 대답 대신 입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형은 내가 원하는 말은 절대 들려주지 않을 거지?”

아무리 입을 다물고 꼭꼭 숨겨 봤자, 영롱은 태휘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완성된 문장을 자신의 두 귀로 듣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두 손으로 만지고 느껴야만 했다.

그로 인해 벌어질 뒷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태휘를 난감하게 하는 지점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도대체 왜 그리 감정적이야? 지금 한가하게 사랑놀이나 할 때냐고. 팀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이러면 안 되잖아. 한때의 충동으로 모든 걸 망칠 셈이야?

태휘는 영롱의 어깨를 붙잡고는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건 극도로 정제된 언어와 냉정한 얼굴뿐이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한 번의 충동으로 망치지 마.”

“난 이것도 중요해.”

영롱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태휘는 단박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단순함이 부러워 육성으로 감탄할 뻔했다. 그전에 영롱이 바로 덧붙였다.

“그리고 6년이면, 보통 충동이라고 하지 않잖아.”

6년이라는 햇수에 태휘는 순간 아득해졌다. 그렇구나, 6년. 중학교 교실 맨 앞자리에서 앉아 있던 그 꼬맹이가 계속 한 곳만을 바라본 지도. 그리고 그 눈빛을 줄곧 외면해 온 지도. 태휘는 작년에 회사 앞에서 만난 팬이 했던 얘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져 주는 거라잖아요~.’

녀석의 애절한 눈빛에도 져 줄 생각이 없는 걸 보니, 아마도 더 좋아하는 쪽은 내가 아닌가 보다. 태휘는 티 나지 않게 심호흡하고는 입을 열었다.

“넌 어떤지 몰라도, 난 팀의 미래, 가수로서의 미래도 중요해. 그리고 너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고. 넌 리드 보컬로서, 난 리더이자 프로듀서로서…… 우리의 커리어에 좀 더 집중하길 바라. 나머지 멤버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나머지 멤버들?”

마지막 문장에 영롱이 되물으며 입가에 머금었다. 그땐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미처 몰랐다. 태휘는 영롱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자신이 했던 말을 거듭 되풀이했다.

“내 말은,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걸 사적인 감정으로 무너뜨리지 말자는 거야.”

“왜 무너뜨린다고 생각해? 안 무너뜨릴 수도 있잖아!”

“아니. 무너질 거야.”

태휘는 단언했다. 작년만 해도, 영롱 때문에 그럴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마저 모든 걸 망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참아 왔던 감정이 방둑 터지듯 흘러넘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모든 걸 계획하고 대비하는 태휘에게 그런 불확실한 방향과 무게의 감정은 두렵기만 했다. 영롱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정말 겁쟁이구나, 형은.”

그 목소리에는 일종의 연민마저 담겨 있었다. 태휘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정말 용감하구나. 하지만 무모하기도 해. 난 그 무모함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지 않을 거야.

“날 뭐라고 욕해도 상관없어. 언젠간 네가 이해해 주기만 바랄 뿐이야.”

영롱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조용해진 거 보니 이번엔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한 걸까 싶었다. 태휘는 일말의 희망을 기대를 품고, 이 힘겨운 대화를 끝내기로 했다.

“리버 형이랑 정리해.”

태휘는 그렇게 말한 뒤 영롱을 지나쳐 방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녀석의 한마디가 발걸음을 붙들었다.

“형 빼고는 다 즐길 만큼 즐기고 있는 것 같던데.”

어째서인지 빈정거리는 듯한 그 말투에서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무슨 소리야?”

“나 멤버들이랑 다 잤어.”

“……뭐?”

“리버 형이랑만 잔 게 아니라. 설민이 형, 개오은이랑도 잤다고.”

태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영롱이 자신을 열받게 만들기 위해 마구잡이로 내뱉은 말인 줄로만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거짓말 같아? 설민이 형은 박는 힘이 끝내줘. 정력이 제일 좋거든. 리버 형은 다정하면서 스킬이 좋아. 개오은은 서투른 맛이 있고, 꼴에 거친 섹스를 즐기더라. 날 깔아뭉개고 싶어서 그런가 봐.”

“야, 차영롱!”

“지난주에는 설민이 형이랑 잤고. 오늘은 리버 형이랑 했으니까, 다음번엔 개오은이랑 할 거야.”

“너, 미쳤어?”

방을 나가려던 태휘는 그대로 영롱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마주 보고 섰다. 그동안 갑옷으로 꽁꽁 무장하고 있던 이성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며, 얼굴이 분노로 얼룩졌다. 그런 태휘를 올려다보던 영롱은 입가에 생경한 미소를 띤 채, 눈시울과 코끝이 붉게 물들었다.

“이것도 해결점을 찾아봐. ‘리더’로서.”

태휘는 어째서 자신까지도 눈시울이 화끈거려 오는지 알지 못했다. 펄펄 끓는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뱃속이 울렁거리는 이유도 몰랐다.

“확인해 볼래? 설민이 형이랑 개오은한테 전화해 봐? 지금 하자고 연락하면 당장 날아올 텐데.”

“닥쳐, 차영롱.”

태휘는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영롱이란 녀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일은 우연히 들켜서 어쩔 수 없다 쳐도, 자기 입으로 직접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그러니까 날 거부하지 말았어야지.”

이 모든 게 자신을 자극하기 위한 거짓말이길 바랐는데, 불행하게도 영롱의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넌 씨발 공과 사도 구분 못 해?”

“나만큼 공과 사 잘 구분하는 사람이 어딨는데? 그룹 활동에 전혀 지장 안 줬으니 형도 새까맣게 모르고 있잖아!”

“공과 사 구분한다는 건, 애초에 멤버 간에 그런 일 안 만드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 이미 저질러 버렸는데!”

영롱이 발악하듯 소리 지르자 태휘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이 새끼 완전히 돌아 버린 게 아닐까? 진짜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덩달아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오른쪽 볼에 뜨거운 액체가 한 줄기 흘렀고 태휘는 낯선 감각에 흠칫 놀라 두 눈을 크게 끔벅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뺨을 가로지른 눈물이 턱 끝에서 후드득 떨어졌다.

영롱 앞에서 사사로운 감정 따위 최대한 꾹꾹 눌러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얼어 버렸다고 믿었는데. 녀석이 던진 불길이 제법 센 모양이었다. 철옹성 같던 태휘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마구 할퀴어 상처를 내려던 게 녀석의 의도였다면 성공한 셈이다.

한편 영롱의 얼굴 또한 묘하게 일그러졌다. 폭탄 발언으로 태휘를 혼란스럽게 해서 사뭇 기쁠 줄만 알았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괴로워 보였다. 영롱은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려고 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 좀 똑바로 알라고, 원태휘. 잘난 척하지 말고.”

어린애 어르듯 건네는 그 말에 태휘는 손목을 쳐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너 이거 다 계획한 거야? 나 질투로 미치게 하려고?”

태휘는 격양된 감정으로 심하게 떨리는 자신의 음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누구처럼 계획 따위 안 해. 그때그때 맘 가는 대로 할 뿐이지.”

그렇게 말하는 영롱의 목소리도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형 잘못이야. 내가 가장 형을 원했을 때, 곁에 없었잖아.”

녀석은 어느새 눈가도 촉촉이 젖어, 코를 훌쩍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형이 질투한다고 인정했으니, 계획은 안 했지만 효과 있었네.”

태휘가 자신을 밀어 냈음에도 영롱은 다시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러곤 두 손으로 뺨을 감싼 뒤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손길에 태휘는 모든 걸 체념한 듯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아아, 이젠 다 모르겠다…….

녀석의 어깨를 붙잡고 무너지듯 안기자 영롱은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영롱은 태휘의 등을 쓰다듬으며 토닥거려 주었다.

“그러게 왜 자기가 상처받은 줄도 몰라?”

태휘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칼로 실컷 난도질한 게 자기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대로 영롱의 품속에 한없이 빠져들고만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안고 있는 이 가녀린 몸이 조금 전까지 다른 남자와 뒹굴며 신음하던 몸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 사실을 외면하고만 싶었지만, 마지막까지 날이 선 이성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영롱을 꽉 끌어안고 싶은 욕망에 이성이 모질게도 속삭였다.

작년에 영롱이 한 게 진심 어린 사랑의 고백이었다면, 이럴 짓을 벌일 리 없다고. 태휘는 꼭 해야만 했던 말을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넌 결국…… 누구든 상관없는 거였어.”

이어지는 태휘의 말에 등을 토닥거리던 영롱의 손이 멈췄다.

“STORY는 해체한다.”

놀라긴 뭘 놀라? 네가 바란 게 이거였잖아. 내게 가장 소중한 걸 산산조각 내고 싶었으면서.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홧김에 멤버들이랑 자버린 녀석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함께 활동할 자신도 없었다.

“우리 다신 보지 말자.”

태휘는 힘없이 영롱을 밀어 낸 뒤 쳐다보지도 않고 숙소를 나왔다. 이 순간만큼은 영롱도, 나머지 멤버들 모두 꼴도 보기 싫었다. 여태껏 늘 뒷일을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이번만큼은 모든 게 즉흥적이었다. 이 상황에서 평소처럼 냉정함을 유지하는 건 무리였다.

그저 이대로 사라지고만 싶었다. 자기 혼자 팀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해 봤자, 다들 자기와 다른 마음인데 무슨 소용인가 싶어 허무함이 밀려왔다. 해체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서로 안 볼 순 없으니 다신 보지 말자는 말은 현실적이지 않았지만, 정말 영롱이 보기 싫었다.

태휘에게 갖는 감정이 뭐든 간에 STORY의 멤버로서의 책임감과 가수로서의 커리어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무모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팀의 앞날이고 뭐고, 녀석은 자기감정만 중요했다.

게다가 그 감정 역시 누구로든 대체 가능한 욕망이라면, 태휘가 그토록 지키려던 건 과연 무엇이었던 건지. 이렇게 영롱과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평행선으로 갈라지게 되는 걸까.

녀석을 아꼈던 마음, 그리고 같은 멤버로서 가졌던 믿음…… 두 가지를 다 무너뜨렸으니 눈앞에서 일단 영롱을 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녀석과 다를 게 없는 멤버들도.

이후에 벌어질 일을 미리 변명하는 건 아니지만, 이때만 해도 맹세코 다른 마음 때문에 해체를 결정한 건 아니었다. 그저 멤버들과 더는 얼굴 맞대고 일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 태휘의 삶은 계획대로 흘러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작정 숙소에서 뛰쳐나와 정처 없이 밤거리를 걸었던 것처럼, STORY의 해체는 태휘 인생에서 처음으로 계획 없이 결정된 일이었다.

“작업실 너~무 삭막하다. 화분이라도 좀 놓지.”

영롱은 작업실을 어슬렁거리며 둘러보았다.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태휘를 향해 마주 보고는 멈춰 섰다.

“형네 집 작업실도 그렇게 좋다며?”

“그 얘긴 또 어디서 들었어?”

“아까 설민이 형이 얘기해 줬어. 어제 형 집에서 회의했다고.”

그새 그 얘기까지 했다니. 너네도 참 너네다. 영롱은 소파에 털썩 앉고는 서 있는 태휘를 올려다보았다.

“구경하러 조만간 집 가 봐야겠네.”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왜? 혹시 누구랑 같이 살아?”

태휘는 영롱을 차갑게 노려보았으나, 그 눈빛은 더는 통하지 않는 듯했다. 영롱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시간이 이만큼 흘렀으니, 당연히 그럴 수 있잖아.”

“그러는 너야말로. 그 시간 동안 어떻게 지낸 건데?”

“이제야 내 안부 물어봐 주네.”

영롱이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자 태휘는 그동안 들어온 수많은 소문이 떠올랐다. 죽었다는 소문부터 시작해서 결혼했다, 사고당해 불구가 됐다는 둥 별별 얘기가 다 있었다.

그중에서 결혼이 제일 약한 소문 축에 속했으나 그게 사실이라면 내심 놀랄 것 같았다. 결혼한 차영롱은 도무지 상상되질 않으니까.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지냈어.”

안부를 물어봐 줘서 기뻐한 것 치고는 부실한 답변이었기에 태휘의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무슨 소문 있었는지 나도 다 알아. 이렇게 멀쩡히 돌아왔으니 된 거 아냐? 혹시 무슨 일 있길 바랐던 거 아니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래. 아무리 형이 이기적이어도 옛 연인을 저주할 타입은 아니지.”

누가 누구더러 이기적이라고 하는지. 적반하장적인 태도는 여전하구나. 태휘는 따지려다가 더는 말싸움할 기력도 없어서 입을 닫았다. 오늘 녀석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꽤 충격이 컸으니까. 그러다가 줄지어 떠오르는 궁금증에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은 어디서 지내?”

“한국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호텔. 집 알아보고 있어.”

집을 알아봐? 태휘는 순간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서울에 자리 잡으려고?”

“이제 잠수 끝내고 복귀해야지. STORY로.”

말 안 되는 소리 많이 하네. 하필 오늘 불쑥 나타난 것 자체도 말 안 되는 일이었지만.

“누구 마음대로?”

“대표님은 재결합 매우 찬성하시네. 다른 멤버들도 다 긍정적인 분위기라며.”

젠장, 이설민. 어제 회의한 얘기까지 했다더니, 벌써 다 불었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당연하다는 듯 덥석 찬성하면 안 되지.”

“해체의 원흉이 나일지는 몰라도 나한테 100퍼센트 책임이 있는 건 아니잖아. 우리 다섯 명에게 20퍼센트씩 골고루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태휘는 눈썹 한쪽을 추어올리며 팔짱을 꼈다.

“공평하게 20은 아니지.”

“그래. 해체를 주장한 게 형이니 형에게 반절 이상의 책임이 있나?”

“멤버들이랑 붙어먹은 게 넌데 어떻게 나한테 반절 이상이 있어?”

“내가 왜 붙어먹었나 그 이유를 생각하면 더더욱 형에게 있지.”

“우리 유치하게 퍼센티지로 따지지 말자. 12년 전 일 가지고.”

“그럼 앞으로 해체의 책임 운운하지 않기로 해. 현재 얘기만 하자고.”

영롱은 그렇게 과거의 일을 간단히 정리해 버렸다. 영롱의 말대로, 멤버들이 아직 재결합에 미련이 있다는 걸 태휘도 알고는 있었다. 본인들이 영롱과 저지른 짓이 있으니, 태휘에게 면목이 없어 더는 밀어붙이지 못했을 뿐.

그러나 당사자가 직접 등판한 이상, 판도가 바뀌었다. 12년 전에도 태휘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걸 다 까발린 녀석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더 얘기가 안 될 것 같으니까.”

“너 정말 재결합 때문에 돌아온 거야?”

“응. 나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가지고 있었다고. 이 정도 분위기면 회사랑 멤버들 다 고민하고 있을 거 같았고. 나 없이 어떻게 진행할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 꼴은 또 못 보겠더라고.”

녀석다운 초 단순한 이유이긴 한데, 어째서인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그게 다라고?”

“그럼 내가 달리 돌아올 이유가 뭐가 있겠어?”

“아무 소식도 없이 잠적한 시간이 자그마치 10…… 9년이야. 가수 활동이고 연예계고 뭐고 다 관두고 떠난 놈이 왜 맘이 바뀌었어? 그동안 연예계에서 쭉 활동해 온 우리도 재결합은 쉽지 않은 결정인데.”

“그 정도면 바뀌기 충분한 시간이잖아. 마음도, 사람도.”

영롱은 바뀐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말간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동안의 회포를 어떻게 단 하루 만에 다 풀겠어? 천천히 풀자고. 난 이만 가 볼게.”

영롱이 생각보다 대화를 일찍 마무리하자 태휘는 언뜻 아쉬운 마음이 드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냥 이렇게 간다고?”

“그럼? 뭐 더 할까?”

바뀌긴 뭐가 바뀌었다는 건지. 태휘는 한숨을 내쉬더니 핸드폰을 내밀었다.

“연락처 알려 줘.”

영롱은 피식 웃으며 건네받은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그러는 사이 태휘는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어디 호텔에 묵고 있어?”

“골든호텔. 1304호.”

호텔 이름을 듣자마자 너무도 선명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왜 하필 그 호텔이야? 그렇게 묻고 싶을 걸 겨우 참아 냈다. 태휘는 표정을 애써 감추고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호수까지 물어본 거 아닌데.”

“그냥 알고 있으라고.”

잠시 후 영롱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태휘의 핸드폰으로 자신에게 전화까지 건 모양이었다. 영롱은 바로 전화를 끊은 뒤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멤버들한테도 알려 줘. 나 간다.”

영롱은 그렇게 말하고는 작업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그 뒷모습에 대고 태휘가 물었다.

“하나만 묻자. 너 이번에도 공사 구분 안 할 거야?”

“현재 얘기만 하기로 했으면서.”

“그러니까. 현재 얘기야.”

“누누이 말했잖아. 난 언제나 공과 사 구분 잘 해 왔다고.”

영롱은 눈으로 욕하는 태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작업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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