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ack 4. 다시 너에게 (04:15) (17/39)

Track 4. 다시 너에게 (04:15)

▶▶▶

- 200◇년 8월 -

재즈바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온 그날 이후, 태휘의 머릿속에선 무대 위 영롱의 모습이 떠나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 며칠 뒤 신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예상대로 용건은 영롱의 솔로 앨범에 대한 의논이었다.

신 대표는 태휘의 유학 계획을 전혀 몰랐고, 이 정도 시간을 줬으면 당연히 회사로 돌아올 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멤버들 사이의 일을 알 턱이 없으니, 프로듀서 원태휘로서 첫 작업은 당연히 영롱의 솔로 앨범이어야 한다고 우겨 댔다.

태휘는 유학 준비 때문이라도 결국 고사할 일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기다려 준 신 대표에게 예의는 차려야겠기에 약속을 잡고 SS엔터로 향했다. 사실 그건 핑계고, 재즈 공연 이후 영롱을 다시 마주하고 싶었다.

해체 후 회사를 찾은 건 6개월 만이었다. 신 대표의 방 들어가니 예상했던 대로 영롱이 있었다. 며칠 전 재즈바에서 봤던 것처럼 새까만 머리에, 오늘은 평소처럼 편한 캐주얼 힙합 차림이었다. 영롱은 태휘가 올 거란 얘기를 못 들었는지 놀란 듯 두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태휘 형도 불렀어요?”

“태휘랑 먼저 약속 잡았는데 네가 갑자기 온 거지. 어차피 같이 얘기할 일이긴 했으니까. 태휘 오랜만이다? 뭐, 둘은 그동안 자주 봤겠지만. 그치?”

태휘는 영롱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둘이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눈 건 그날 숙소에서의 그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해체 때문에 회의하고 기자 회견을 했을 때조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난 6개월간 멤버들은커녕 사람들과 만남을 거의 갖지 않았기에 영롱의 소식도 모르는 상태였다. 며칠 전 재즈바 오픈 파티만 아니었다면.

“얼마 전에 볼 수 있었는데 못 봤어요. 미영 누나 재즈바 오픈 파티 때 형 왔었다며? 멋있는 수트 입고. 그걸 못 봤네.”

영롱은 신 대표 앞에서 최대한 말을 고르면서도 태연스레 굴었다. 싸웠다고 해야 하나, 절교 선언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난리를 치고 반년 만에 마주하는 건데도 어색해하거나 난감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머리카락 색을 검게 바꿔서 그런 건가? 살은 좀 빠져 보였다. 태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영롱을 힐끔거리며 살펴보고 있었다.

“아, 맞다. 너 그 파티에서 노래했다며? 나 출장 때문에 화환만 보냈잖아! 좋은 구경 놓쳤네. 미리 얘기해 줬으면 꼭 보러 갔을 텐데.”

“그러게, 대표님이 저의 첫 재즈 공연 보셨어야 했는데! 근데 저 많이 떨어서 별로 잘하진 못했어요.”

“잘했어.”

순간 영롱과 신 대표 둘 다 동시에 놀란 눈으로 태휘를 쳐다보았다.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라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영롱의 표정부터 살폈다. 녀석은 어쩐지 안도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칭찬 오랜만에 들어보네.”

지난번 발악하며 소리 지르던 녀석은 어디 갔는지 세상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3년간 활동했던 팀이 해체한 일은 녀석에게도 일생일대의 변화였나 보다.

태휘는 속으로 ‘그러니까 애초에…….’로 시작하는 팔만대장경급 잔소리가 떠올랐지만 애써 눌러 내렸다. 둘 사이에서 묘한 기류를 느끼고 눈치만 보던 신 대표는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그럼! 영롱이 솔로 앨범 프로듀싱은 태휘가 맡는 거지?”

신 대표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태휘는 맞은편에 앉은 영롱의 반짝이는 눈을 잠자코 응시하다가 대답했다.

“아뇨.”

신솔 대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태휘를 바라보았다. 영롱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흔쾌히 수락하는 상황이 더 놀랄 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에 비하면 신 대표는 나름 오래 기다려 줬다고 생각했는지, 많이 당황스러운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왜? 아직도 슬럼프야? 영롱이 앨범을 네가 프로듀서 안 하면 누가 해?”

“프로듀서는 저 말고도 많잖아요. 꼭 제가 해야 한다는 법도 없고요.”

“너만큼 영롱이 색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지! 어휴, 얘가 답답하게 왜 이래?”

신 대표가 가슴을 치며 언성을 높이는데도 태휘는 의연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그것도 고정 관념이에요. 저 말고도 영롱이 색 잘 파악하는 사람 있을 수 있어요. 제가 캐치하지 못한 걸 발견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제가 맡으면 STORY 음악의 연장에 그칠 수도 있어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둬야죠.”

“네 말도 맞긴 한데……. 너희 중 첫 솔로 앨범이야. 솔로 데뷔 앨범부터 굳이 그런 모험을 해야 해? STORY 음악의 연장이 어때서? 뭐든 처음엔 안전한 게 좋은 거야. 색다른 시도나 발견은 2집, 3집에서 해도 늦지 않아.”

“대표님은 사업가로서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작곡가로서 제 의견을 구하신다면 전 반대예요. 멤버 중 첫 솔로 앨범이니까 더더욱. 제가 아닌 다른 프로듀서와 새롭게 출발해야 해요.”

“미치겠네. 영롱아,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지금 네 앨범 얘기하고 있잖아.”

완강한 태휘를 혼자 상대하며 고전하던 신 대표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는 영롱을 부추겼다. 영롱은 흥미로워하는 미소와 함께 태휘를 바라보고 있었고, 태휘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양 손바닥을 마주 대고 손가락 끝을 리듬 타듯 두드리던 영롱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더니 잠시 시차를 두고 말을 뱉었다.

“대표님. 자리 좀 비켜 주실래요? 둘이서 얘기 나눠야 할 것 같아서요.”

신솔 대표의 얼굴은 황당함과 어이없음으로 마구 일그러졌다. 태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요놈들 보게? 여기 내 방이야, 인마! 여기 ‘회장 신솔’ 안 보여? 니들이 회의실로 가!”

신 대표가 책상 위에 놓인 명패까지 흔들어 보이며 흥분하는 데도 영롱과 태휘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두 명 나가는 것보단 한 명 나가는 게 경제적이잖아요.”

태휘까지 거들자 신 대표는 기막혀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태휘와 영롱은 신경도 쓰지 않고 눈싸움하듯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신 대표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니들이 언제 내 말을 그렇게 순순히 들어 먹었다고? 어? 회장을 방에서 막 쫓아내고. 회사 꼴 잘~ 돌아간다~. 안 그래도 나 외부 미팅 있었다고! 너희 때문에 나가는 거 아니야! 똑바로 알아 둬!”

그렇게 장황하게 한탄을 늘어놓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삿대질하며 방을 나섰다. 멤버들과 워낙 격 없이 지내는 신 대표다운 자연스러운 퇴장이었다.

신 대표가 온갖 법석을 떨고 나간 뒤, 단둘뿐임에도 태휘와 영롱은 한참 동안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긴 침묵을 깨고 질문을 던진 건 영롱이었다.

“정말 그 이유가 다야?”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해체하는 이유도 거짓말했으면서. 또 거짓말 아니란 법 없잖아. 대표님은 속여도 난 못 속여.”

태휘는 유학 얘기를 꺼낼까 했다가, 아직 대표님께도 안 한 얘기를 영롱에게만 하기에는 망설여져 일단 다음에 얘기하기로 했다.

“적어도 아까 한 얘기는 거짓말 아니야.”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건 맞네.”

나머지 멤버들과 대표까지 속이고 해체한 마당에, 더는 녀석과 기 싸움할 이유가 없다 싶어서 이번만큼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너랑 아무렇지 않게 일할 정도로 내 마음이 넓지 않아.”

“웬일이야? 본인 속 좁은 것도 인정하고.”

빈정거림에는 굳이 대꾸할 필요를 못 느껴 입을 다물자 녀석이 말을 이었다.

“형이야말로 공과 사 구분 못 하는 거 아니야? 해체까지 했으면 됐지, 그걸 지금까지 끌고 와?”

태휘는 한 대 살짝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못 본 사이에 좀 큰 건가? 녀석은 전보다 한결 차분해 보였다. 지난번 재즈바 무대에서도 얼핏 느꼈지만, 이렇게 마주 보며 대화하고 있으니 확실히 변한 게 느껴졌다.

“우리 일단 일 얘기만 해. 가수와 프로듀서로서.”

모든 감정이 투명하게 내보이며 마구 질러 대던 예전의 영롱이 아니었다.

“난 솔직히, 형이 내 앨범 책임 프로듀서 맡아 주면 좋겠어. 내 장점 누구보다 잘 살려 줄 수 있는 사람이고, 대표님 말대로 아직 형이 쓴 곡이 제일 익숙하니까. 아까 STORY의 연장선이라고 했는데, 그걸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잖아. 자신 없어?”

기분에 휘둘리지 않고 말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이성적으로 따지고 있었다. 전처럼 두서없이 떠오르는 대로 생각을 쏟아 내는 대신, 태휘의 반응을 살피며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내 자존심 긁어서 도발하려는 속셈이라면 안 통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야. 내 눈에는 지금 형 도망칠 핑계 대는 거로밖에 안 보이니까.”

“일 얘기만 하자며.”

“그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얘길 해 봐.”

“아까 대표님께 한 얘기 그대로야. 거기에 덧붙이자면, 너에 관한 생각이 좀 달라졌어.”

“어떤 생각?”

“대표님 말대로 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나뿐이라고 자신했어. 근데 그게 무너졌지.”

영롱은 의아한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일’ 얘기 맞아?”

“맞아. 지난번 재즈바 공연 얘기야.”

“음?”

“그날 선곡이랑 무대 준비. 너 혼자 한 거야?”

“어.”

“솔직히 좀 놀랐거든. 너를 두고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그림이어서.”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 무대를 보고, 더 큰 가능성이 있는 너를 더는 가둘 수 없다고 처음 생각했으니까.”

그제야 영롱은 진짜 놀란 얼굴이 되었다. 태휘는 영롱을 처음 만난 날부터, 그 목소리로 구현하고 싶은 노래들이 떠올랐다. 그 목소리로 불리길 바라며 음악을 만들었다. 그 말은 즉 영롱이 영감의 원천인 동시에, 평생 태휘의 창작의 통로로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재즈바 무대에서의 영롱은 그 자체로 한 명의 아티스트였다. 사실 태휘는 해체 전, 영롱이 더는 노래나 가수라는 직업에 애정이 사라진 줄 알았다.

철딱서니 없이 태휘에게 노래 못하는 자신은 필요 없냐며 반문할 때나 무책임하게 동료들과 선을 넘는 걸 보고, 녀석은 팀의 유지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리드 보컬로서 아무 열정도 없고 자신의 재능에 대해 고찰도 하지 않는 것 같아 화가 났다.

태휘만이 영롱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고민하는 줄 알았다. 그 점이 화나서 해체를 강행한 이유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날 재즈바 무대 위의 영롱은 달랐다. 그 누구의 뮤즈도 아닌, 스스로 색을 찾은 가수 차영롱으로 서 있었다. 지금까지 영롱을 바라보던 태휘의 시선에서 필터가 한 꺼풀 벗겨져 더욱 선명해진 느낌.

그 모습을 보니, 태휘는 그런 영롱을 자신만이 독점하려고 한 게 욕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영롱에게 실망하고 화난 기억은 일단 묻어 두고, 영롱과 오랫동안 함께 한 음악 동료로서 최선의 길을 알려 줘야 한다는 생각부터 앞섰다.

태휘는 자신의 진심이 다른 마음에 가려지지 않고 온전히 전해지길 바라며 최대한 진지하게 말했다.

“신중히 생각해. 네 가수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솔로 데뷔 앨범이야. 타성에 젖어 ‘익숙하니까’, ‘편하니까’로 결정하면 안 돼. 새 출발 하는데 내 그림자가 네 위에 드리우면 되겠어? 너 보컬리스트로서 재능 있어. 난 그런 널 지금까지 내 입맛에 맞게 요리하려고만 했고.”

영롱은 두 눈을 빛내며 경청하고 있다가 무심결에 입으로 속마음을 뱉어 버리고 말았다.

“아, 요리한 김에 그냥 꿀꺽 먹어 버리지.”

그새를 못 참고 말장난을 치자 태휘는 바로 영롱을 노려보았다. 하긴, 사람이 갑자기 싹 다 변하면 이상하지. 싸늘한 눈빛에 영롱은 바로 시선을 피하고는 혼자 주문을 외듯 ‘일 얘기만, 일 얘기만…….’을 되뇌었다. 태휘는 다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하여튼. 자신 없는 건 아니지만, 이번엔 가능성에 더 걸고 싶어. 지금까지 3년 동안 내가 프로듀스한 널 봐 왔으니, 내 틀 밖에 있는 네 음악이 어떨까 궁금해.”

뮤지션으로서 영롱에게 나름의 찬사를 바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녀석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더는 나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태휘를 향해 턱을 치켜들고만 있는 그 얼굴은 언뜻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 나는 형에게 아무 영감도 주지 않는 존재가 된 건 아니냐고.”

어떤 기시감과 함께 머리가 지끈거려오자 태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넌 이 마당에 그게 그렇게 중요해?”

“중요해. 왜냐하면, 난…….”

영롱은 순간 말을 멈추고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형이 나를 가둬 주길 원해.”

“…….”

“형이 내 전부를 책임지길 바란다고.”

태휘는 의자에 앉아 있는 채로 아득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는 기분이 들어 그만 눈을 감아버릴 뻔했다.

“그렇지만…….”

뭐라고 더 말할 것처럼 말끝을 흐리던 영롱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가뿐한 표정이 되어 가볍게 무릎을 탁 두드렸다.

“근데 뭐, 형 생각 들어보니 나름대로 일리가 있네.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둘러댈 줄 알았는데. 내 맘에 들진 않지만, 그럴듯한 얘기야.”

저렇게 상쾌한 얼굴을 하고 설득에 순순히 넘어가자 태휘는 안심하면서도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녀석이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리 없는데.

“형이 음악적인 면에서 내 선택을 존중해 주고 믿어 준다는 건 가수로서 기쁜 일이니까. 원태휘의 인정을 받다니! 그러니까 형 말은 ‘3년 동안 STORY에서 함께 했으니까 새 출발은 각자 알아서 하자!’ 이거잖아.”

심하게 단순화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말이 맞긴 하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망해도 책임 안 져도 된다.’ 이 말도 되지만.”

영롱이 덧붙이자 태휘는 일순 인상을 쓰며 도리질을 쳤다.

“너무 갔어.”

“왜? 틀려?”

“내가 맡으면 망할 일 없으니까.”

“아, 진짜 재수 없어.”

영롱이 진심으로 짜증 내자 태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시 이렇게 웃으며 얘기하는 날이 올지 몰랐는데.

“아무튼. 내 의견 충분히 이해했으면 그렇게 정리하자. 네 새 앨범에 나는 일체 관여 안 하기로.”

“정 없게 또 뭐 일체 관여 안 하기까지 해? 전 멤버로서 조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그럼 대표님한텐 그렇게 말씀드린다. 나 먼저 일어날게.”

“그래.”

모든 걸 수긍하는 태도에 태휘는 여전히 불안함이 남았지만, 이 의심의 실체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 몰라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영롱의 목소리가 태휘를 붙잡았다.

“회의는 끝났으니까 이제 사적인 얘기, 하나 할게.”

그 불길한 예감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나 이제 멤버들이랑 안 자. 그날 이후로.”

“……안 물어봤어.”

“알고 있으라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태휘는 무심하게 툭 내뱉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닫히는 문 뒤로 영롱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냥 형한테 얘기하고 싶었어.”

▶▶▶

- 200◇년 9월 -

태휘가 영롱의 솔로 앨범 작업을 정중히 거절한 뒤, 둘 사이에는 잠시나마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다신 안 볼 것처럼 군 건 자신이었지만 그땐 그만큼 표현하지 않으면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아서 그런 거였고, 현실적으로 안 보고 사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몇 개월은 잊고 살긴 했어도 마지막을 그렇게 엉망으로 끝냈으니 마음에 불편함은 늘 남아 있었다. 이번 재회로 어느 정도 화해 무드가 이루어진 것 같아 태휘의 기분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 평화가 폭풍 전야의 고요함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지난번 재즈바 공연 때 태휘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 빗방울은 어느새 스며들어 또 다른 싹을 움트고 있었다.

태휘는 이제 마음 편히 유학 준비만 하면 되겠다 싶어서 오랜 잠수를 끝낸 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입학에 필요한 서류 등을 준비하다 보니 자연스레 유학 경험이 있는 뮤지션 동료와 선배들 위주로 만남이 이어졌다.

태휘가 유학을 준비 중인 학교는 미국 보스턴에 있는 B 음악 대학이었는데, 태휘와 함께 STORY 앨범을 작업했던 작사가가 친한 지인이 그곳을 나왔다며 소개해 주기로 했다.

그는 태휘가 평소 존경하던 대선배이기도 해서 모처럼 설레기까지 했다. 유학 관련 조언도 듣고 음악 관련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한상민은 록 밴드 출신으로, 발라드 가수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싱어송라이터였다. 1세대 아이돌이 등장하기 전의 90년대 가요계는 발라드가 점령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 발라드 열풍의 중심에 있던 가수가 한상민이었다.

댄스 음악의 유행이 시작되자 그 타이밍에 발 빠르게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작곡가로서 영역을 확장해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는 최근 행보가 인상 깊었다. 댄스 음악을 만드는 자신과 장르는 다르더라도, 그의 행보와 도전 정신을 본받고 싶었다.

조용한 일본식 선술집 같은 곳에서 만나길 원한 태휘와는 달리 나이트클럽에 가자고 고집한 한상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명 나이트클럽의 룸을 예약했다. 그때부터 알아챘어야 하는데.

그는 만나자마자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듯이 값비싼 양주와 최상급의 안주를 잔뜩 주문했다. 상민을 소개해 준 작사가 누나와 다른 동료 음악인들까지 네 명이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상민은 그간 STORY를 눈여겨봤다면서, 모든 앨범을 프로듀싱한 천재 리더가 누군지 궁금했다며 한껏 추켜세워 주었다. 그리고 미국 유학까지 같은 학교로 간다니 좋은 선택했다며 칭찬과 응원을 퍼부었다.

예전부터 존경하던 대선배가 그렇게 말해 주자 태휘도 기분이 좋아져 따르는 술을 덥석덥석 받아 마셨다. 음악부터 유학 얘기까지 나누며 한참을 떠들었고, 술잔이 몇 번 오가자 선배님과 후배님에서 순식간에 형과 아우 사이로 발전했다.

와중에, 오랜만에 마신 술에 취기가 꽤 오르자 태휘는 이상하게도 STORY 멤버들이 떠올랐다. 해체 전에는 멤버들과 가끔 술도 마시고 클럽도 오곤 했는데. 멤버들을 안 만나다 보니 이런 시간 자체가 처음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룹 활동 때는 다른 친구를 만날 수도 없어서 무조건 멤버들과 함께였다. 그 속에서 자신은 무뚝뚝한 리더였지만, 왁자지껄한 그 분위기를 싫어하진 않았다.

설민의 실없는 소리, 영롱의 시도 때도 없는 애교, 그걸 못 참고 욕하던 오은, 동생들 얘기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가 엉뚱한 말 던지던 한강 형까지. 대화에 섞이지 않아도, 그걸 듣고만 있어도 즐거웠다. 그들이 문득 그리워졌다. 아니, 미쳤나? 많이 취했네.

태휘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는 대선배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싹 차렸다. 그때 상민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바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반사 신경은 여전한 것 보니 완전히 맛 가진 않았군.

“너도 담배 피워?”

“네, 형.”

원래 중학교 시절 부모님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좀 피우다가, 영롱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녀석의 잔소리에 끊고 STORY 활동 내내 안 피웠다. 그리고 해체 후 최근에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상민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잔뜩 거드름을 피웠다.

“그래. 원래 뮤지션의 3대 충족 조건이잖아. 술, 담배, 섹스.”

순간 태휘는 대놓고 인상을 확 찌푸릴 뻔했다. 자신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 조건인데. 저급한 멘트에 그에게 가졌던 존경심이 단박에 50퍼센트 정도 깎여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런 속내를 모르는 상민은 태연하게 담배를 내밀었다.

“너도 피워.”

“아뇨, 괜찮습니다.”

태휘는 자세를 고쳐 앉은 채 손사래를 치며 마다했다. 아무리 형·동생 하기로 했어도 까마득한 대선배와 맞담배 피울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방금 그가 말한 뮤지션의 3대 요소고 나발이고를 들으니 입맛도 떨어지고.

그렇지만 존경하는 선배의 부정적인 면만 보고 싶지 않았다. 말을 돌리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룸 밖에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안까지 들어오자 문득 든 생각에 상민에게 물었다.

“여기서 보자고 하셔서 의외였어요. 형이 만드는 음악 생각하면 이런 데는 안 좋아하실 줄 알았거든요.”

“야, 중국집 요리사가 맨날 짜장면만 먹냐? 한식도 먹고 양식도 먹잖아. 맨날 발라드만 만드는데 이런 음악도 즐기러 와 줘야지.”

오늘 이 사람의 새로운 면모 많이 알게 되는군. 태휘는 의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 상민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여기 예쁜 애들이 많이 오거든.”

태휘는 잠시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아, 부킹? 뭐 그럴 수도 있지. 유흥과 여자에 환장하는 남자 선배는 연예계에서 차고 넘치게 봐 왔기에 한상민을 그쪽 카테고리로 분류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사적으로는 거리를 좀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역시 아름다운 노래를 만든다고 만든 사람까지도 아름다운 건 아니었어. 이런 식으로 어린 시절 좋아하던 스타의 환상이 와르르 깨지자 씁쓸해졌다. 한편 담배를 피우던 상민은 뭔가 생각났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아, 예쁜 애 하니까 생각나네! 나 며칠 전에 걔 만났어. 차영롱.”

술기운에 머리가 무거워진 태휘는 그 이름에 뒤늦게 반응했다. 그사이 상민은 옆에 있던 작사가를 툭툭 치며 말하고 있었다.

“너한텐 얘기했지? 얘네 회사 대표가 차영롱 솔로 앨범 작업 의뢰했다고.”

그 얘기에 바로 술이 확 깨는 듯했다. 상민은 다시 태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회사 가서 미팅하고 왔지.”

“……그러셨어요?”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프로듀서 후보 1순위였던 자신이 거절했으니, 신 대표는 다른 유명 작곡가들을 섭외했을 것이다. 영롱 역시 한상민을 좋아했으니, 그 라인업에 빠질 리 없고.

‘우와! 나 한상민 캡 좋아하는데. 한상민 같은 가수는 어떻게 되는데요?’

불현듯 그 옛날 영롱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의 우상과 작업할 기회가 온 것만으로 녀석은 뛸 듯이 기뻐했겠지.

“걔 진짜 귀엽더라.”

기뻐하는 영롱의 모습 위로 상민의 취한 목소리가 오버랩 되며 태휘의 상상은 불쾌하게 끝났다. 뉘앙스를 보아하니 그가 찾는 ‘예쁜 애’의 성별은 남자인 듯했다. 계속 술술 넘어가던 술맛이 일순간 쓰게 느껴졌고, 태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곡 주기로 하셨어요?”

“프로듀서까지 맡을지도 몰라. 영롱이가 발라드를 하고 싶어 해서. 일단 생각해 본다고 했지.”

그가 친근하게 ‘영롱이’라고 부르자 위장이 배배 꼬여오는 듯했다. 역시 너무 많이 마셨나? 다른 프로듀서와 새 출발 하라고 권한 건 자신이었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더군다나 둘 다 어릴 때부터 존경한 가수가 프로듀서를 맡으면 잘된 일인데.

아마, 녀석이 얼마나 공사 구분을 못 하는지 너무도 잘 알아서? 이 상태에서 더 마셨다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태휘는 술 대신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 속을 알 리가 없는 상민은 계속해서 같은 화제를 이어갔다.

“나야말로 너한테 좀 물어봐야겠네. 너희 팀 프로듀서 네가 다 했잖아. 걔 스타일이 어때?”

구체적으로 어떤 스타일을 묻는 건지. 질문의 의도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없어 머뭇거리는 사이에 상민이 물었다.

“좀 걱정돼서. 댄스 음악만 하던 애가 발라드 감성 있긴 하냐?”

태휘는 얼마 전에 본 영롱의 모습이 떠올라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모습을 봤으면 이런 소리 못할 텐데. 하긴 자신도 녀석이 ‘Say You Love Me’를 부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그래도 처음 만나는 사이에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함부로 언급하는 게 별로였다. 이미 실망스러운 면모를 많이 목격해서 다 삐딱하게 보이는 것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영롱이 얘기니까.

그게 무례한 짓이란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자신의 위치와 권위에 기대어, 자기 아래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타입 같았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실망감만 커지자 태휘는 이 자리가 곤욕스러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민에 대한 존경심으로 바른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만 쭉 내밀어 경청하였으나, 지금은 자신도 모르게 풀어진 모양새가 되어 등받이에 기댄 채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겠어요? 음악적인 면에서는 저보다 빠르게 파악하실 텐데. 저는 걔랑 워낙 어렸을 때부터 봐서요.”

“팀 하면서 만난 거 아니야?”

“상민 오빠. 쟤 영롱이랑 꼬마 때부터 아는 사이예요.”

옆에 있던 작사가가 끼어들어 말했다. STORY 앨범에 참여했던 작사가는 태휘와 영롱이 막역한 사이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정말 친형제 같겠네?”

태휘는 순간 코웃음이 나왔다. 친형제? 엄밀히 말하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해 둬야 상민이 영롱에게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해 일단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이가 틀어진 일에 대해서도 굳이 말할 이유를 못 찾아 말을 아꼈다.

그때 동석한 일행들이 화장실에 가겠다며 방을 나섰다. 상민과 단둘이 남게 되자 아까까지 부드럽고 유쾌하게 풀어졌던 분위기는 다소 냉랭하게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상민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혀가 잔뜩 꼬부라진 탓에 엉망이 된 발음으로 물었다.

“그럼 음악 스타일은 내가 알아서 파악할게. 연애 스타일은 어때?”

친분을 강조하면 그만둘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함께 있던 여자 동료들이 나가자 오히려 더 대놓고 물어봤다. ‘친형제’라는 관계에만 방점을 찍다 보니 다른 쪽으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태휘는 표정 관리를 포기하고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지만 만취한 그는 개의치 않고 물었다.

“딱 봐도 남자 좋아하게 생겼던데. 어떤 스타일 좋아해? 같이 작업하면 한 번 따먹을 수 있을까?”

생각보다도 훨씬 더 쓰레기 같은 새끼였다. 방송에서 보인 감성적이고 점잖은 이미지는 완전 가식이었다는 걸 단 몇 시간 만에 스스로 드러낼 정도로. 마음 같아선 선배고 뭐고 당장 멱살잡이하고 싶었지만 이어질 상황을 예측해 보면 태휘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한상민 같은 가요계 거물에게 까마득한 후배가 손찌검했다? 앞으로 가요계는 물론 연예계에서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이딴 새끼를 진심으로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태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내를 최대한 모두 끌어 모았다.

“선배님, 많이 취하셨네요.”

“왜? 미팅 때 날 보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잘만 꼬시면 다 줄 것 같…….”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와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게 최선일까 재빨리 머리를 굴리다가 일단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말을 뱉었다.

“걔 여자 친구 있어요.”

“뭐?”

취했던 상민의 눈동자가 잠시 또렷하게 빛났다. 예상치 못한 말에 내심 놀랬는지 테이블 위로 담뱃재를 떨어뜨리고만 있던 그의 팔 앞에 재떨이를 밀며 말했다.

“걔 애인 있다고요. 그것도 아주 성격 더러운. 집적댔다가는 뼈도 못 추릴걸요.”

또 거짓말해 버렸다. 내가 피노키오였다면 차영롱 때문에 한 거짓말만 해도 코로 장대높이뛰기 할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까짓것 하지, 뭐. 장대높이뛰기. 태휘는 테이블에 있던 계산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룸을 나서자 안에서 자기를 부르는 상민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문을 닫았다. 마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일행들이 어디 가냐고 묻자 속이 안 좋아서 먼저 간다고 답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짜로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으니까.

한상민의 추잡한 실체도 태휘를 화나게 했지만, 그가 진짜로 영롱을 꼬신다면 쉽게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더 열 받았다. 그 만약의 상황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결제를 마치자마자 클럽 밖으로 나와서 결국 참았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뮤지션의 3대 충족 조건? 개소리하고 있네. 몇 모금을 들이마신 태휘는 발길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몇 걸음 만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지금 당장 영롱을 봐야겠는데, 녀석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몇 개월 동안 연락을 끊은 터라 전화번호도 바뀌어 있었고, 얼마 전 만난 회의 때는 바뀐 연락처도 물어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

“현우야, 조금 더 빠르게.”

설민의 말에 트레이닝복 차림의 앳된 소년이 긴장된 표정으로 허리를 90도 굽혔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나 말고 멤버들한테 죄송해하고. 지금 계속 너만 늦게 돌아. 그 부분부터 다시 해 봐.”

설민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노래를 틀었다. 6명의 멤버들이 동선을 맞추며 격렬히 춤을 추는 동안 매서운 눈으로 한 명 한 명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평소 사람 좋게 웃으며 칠렐레팔렐레하던 설민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SS엔터의 신인 그룹 ‘가디언즈’의 안무를 맡게 된 설민은 ‘STORY’ 때보다 더 날카롭게 후배들을 지도했다.

SS엔터테인먼트가 STORY의 성공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후속 그룹이라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설민 입장에서도 정식 안무가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일이었기에 개인적으로도 더 완벽함을 추구했다.

자신이 속한 팀이 아니기에 더 큰 책임감이 느껴졌다. 멤버들과 함께 할 때는 서로 의견 교환도 해 가며 수평적인 팀워크로 작업했다면, 후배 그룹의 전담 안무가가 된 이상 후배들은 오직 설민만을 보고 따라오기 때문에 책임감이 막중했다.

그러니 웃음기를 싹 빼고 진지하게 임할 수밖에 없었다. 가디언즈의 안무 연습은 한밤중까지 계속됐다.

그래도 첫 작업이 태휘가 STORY 시절 쓴 곡이라 다행이었다. 지금껏 3년 내내 태휘의 곡에 안무를 짰으니까. 신 대표가 누가 썼는지 알려 주지 않고 이번 신인 그룹의 타이틀 곡이라며 데모를 들려줬을 때 단박에 알아챘다.

‘이거 태휘 곡이죠?’

그 순간 신 대표의 당황한 눈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설민한테까지는 숨길 수 없어서 곧바로 인정했으나 아니라고 끝까지 우겼어도 속지 않았을 것이다.

기존에 쓰던 곡에 비해 템포가 느렸고, 절도 있는 안무보다는 소울풀한 스타일이라 STORY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빼 뒀으리라는 이유도 맞췄다.

원태휘, 이 자식. 이런 곡도 쓸 수 있으면서 맨날 우리는 겁나 힘든 것만 시키고. 물론 편한 곡보다는 어려운 곡을 소화할수록 춤꾼으로서 성취감은 더 있지만. 그런 생각까지 이르렀을 때 설민은 주머니에서 진동을 느꼈다.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본 설민은 실눈으로 이름을 재차 확인했다. 하, 양반은 아니네. 그렇다 하더라도 시기도 시간도 너무 생뚱맞았다.

해체 후 반년 만에 리더에게서 온 첫 연락인데, 왜 하필 지금? 이미 자정을 지나 한밤중인 시간이었다. 이런 상황이 흔한 일은 아니기에 설민은 재생 중이던 노래를 멈췄다.

“30분 휴식. 다들 조금 쉬고 와.”

그렇게 말하곤 연습실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 끝 창가 앞 자신의 단골 흡연 구역에 걸터앉아 담배부터 물었다. 폴더식 핸드폰을 턱으로 밀어서 열자 다짜고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 차영롱 어딨어?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부터 흘렸다.

“……어, 나도 반가워, 리더야.”

- 영롱이 어딨냐고.

“리더라는 인간이, 몇 개월 만에 연락해서 하는 말이 그거냐?”

설민이 느끼기에도 해체 후 태휘의 행동은 이상하긴 했다. 불화 때문에 해체한 것도 아닌데, 녀석은 몇 개월 동안이나 멤버들과의 모든 연락을 끊었다.

지레짐작하기가 특기인 설민은, 해체의 가장 큰 이유가 태휘의 슬럼프 때문이었기에 죄책감을 느껴 거리를 둔 거로 추측했다. 그래도 3년을 넘게 동고동락했고 주변에 남아 있는 또래 친구는 멤버들뿐인데, 반년 넘게 연락 끊고 지내는 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태휘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여전히 자주 연락하며 지내는 편이었다. 강이 형은 군대 간 이후로 편지 주고받으며 소식 나누고 있고, 오은은 대학 생활에 충실한 와중에 자주 보는 편이었고, 영롱은…….

영롱이와는 해체 이후,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갔다. 다시 말해, 섹스 파트너가 되기 전으로. 태휘만큼은 아니더라도, 녀석과 단둘이서는 만나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영롱도 회사에서 솔로 앨범을 준비 중이고, 자신도 안무가로 있으니 SS엔터에 꾸준히 출근하는 멤버는 둘뿐이었다. 그 덕분에 자주 마주치기는 했지만, 관계는 더 나아가지 않고 그저 친한 형·동생 관계로 머물러만 있었다.

가끔 약속 잡아서 밥 먹고 영화 보고 술 마시고 잘 놀다가도 하룻밤 보내려고 분위기를 잡을라치면 녀석은 쌩하니 가 버렸다. 팀도 해체했겠다, 이제 아무 거리낌 없이 관계가 발전될 수 있을 거란 설민 혼자만의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녀석은 그동안 즐길 만큼 다 즐긴 걸까. 서운하면서도, 그렇다고 억지로 조를 수 없는 노릇이니 이 짝사랑은 거의 포기 상태였다. 1년 동안 섹스 파트너로 지냈던 거로 만족해야 할지도.

어쩌면 다른 상대가 생겼을 수도 있으나, 영롱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막을 권리는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혹시 자신은 모르는 태휘와 연관된 일이 있던 걸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과의 섹스에 환장하던 녀석이 더는 관계를 요구하지 않게 된 시점이 바로 해체 직전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둘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지는 상상조차 어려웠다.

오늘 이 전화로 그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된 셈이다.

- 빨리 말해.

“무슨 일인데?”

- 넌 알 거 없…업 서.

설민은 어딘지 어눌한 태휘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명적인 술버릇 때문에 멤버들과 함께 있을 때 외에는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는 녀석인데.

“너 취했냐?”

- 모르면 끊는다.

“야! 기다려. 영롱이 요새 회사 녹음실 죽돌이야. 오늘도 거기 있을걸. A 스튜디오.”

- …….

뚝. 고맙다 어떻다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자 설민은 기가 차서 애먼 핸드폰 액정만 쏘아 보았다.

“와, 이거 완전 개새끼 아냐?”

▶▶

‘A… A… A…!’

술기운에 흐려진 시야로 간신히 녹음실 문패를 확인하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녹음실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롱 혼자였다. 녀석은 화들짝 놀라며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앉아 있던 게 아니라 녹음실 한편에 있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영롱의 한쪽 뺨에 악보 한 장이 붙어 있는 걸 보니.

“태휘 형?”

책상 위를 보니 작업용 컴퓨터가 켜져 있고 그 앞엔 악보들이 마구 널려 있었다. 아마도 앨범에 실을 데모곡을 혼자서 체크하던 중에 깜빡 잠들었었나 보다. 침까지 흘릴 정도니 깜빡은 아닌가?

영롱은 종이가 볼에 붙었음에도 갑작스러운 태휘의 등장에 당황했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태휘는 취기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그 악보를 떼어 주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영롱은 손등으로 얼른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 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내가 취하긴 취했네. 오늘따라 왜 귀여워 보이고 지랄이지.

“뭐야, 형. 갑자기? 여긴 왜 왔어?”

“코가 길어져서……. 장대높이뛰기…….”

“……뭔 헛소리야? 술 마셨어?”

클럽을 나설 때 잠깐 깼던 술은 여기까지 오면서 머리끝까지 퍼져 버린 것 같았다. 술에서 깨려고 고개를 가로저을수록 머리가 더 핑 돌았다.

자신의 주사를 잘 알고 있던 태휘는 깨어 있는 동안 할 말을 마치기 위해 정신을 겨우 붙들고 있었다. 그 의지는 그대로 행동으로 표출되어 두 손으로 영롱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고, 녀석은 아픈지 인상을 찌푸렸다.

“……너 한상민…… 곡 받을 거야?”

“뭐?”

“……한상민한테 프로듀서 맡길 거야?”

예고 없이 들이닥친 것도 황당한데, 다짜고짜 따지며 몰아붙이자 영롱은 혼란스러워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그건 어떻게 알고? 아니…… 그러든 말든 뭔 상관인데? 내 새 앨범에 일체 관여 안 한다더니?”

“전 멤버로서, 조언 정도…… 해 달라며.”

취한 와중에 영롱이 했던 말은 다 기억하고 있다니. 스스로 말해 놓고도 놀랐다. 녀석의 향수 냄새가 점점 짙게 풍겨 오는 걸 보니 가누지 못하는 몸이 영롱 쪽으로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그러자 이내 허리를 팔로 감아 부축해 주는 녀석의 손길이 느껴졌다.

“왜 이러는지는 몰라도, 술 깨고 얘기해. 응?”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영롱의 눈빛은 어느새 걱정스러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안 보고 살 작정으로 냉정하게 밀어 냈는데. 몇 개월 동안 생각도 안 하고 살았는데. 최근 딱 두 번 만나고 나서부터, 이상하게도 더 간절해졌다.

이 얼굴을 어떻게 반년 씩이나 안 보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그뿐만 아니라 다신 안 보고 살 자신조차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긴 인생 동안, 불순한 의도로 접근할 한상민 같은 새끼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새끼들을 쳐내기는커녕 좋다고 꼬리 흔들 녀석을 떠올리자 더더욱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그 상대가 멤버들뿐일 때가 나았던 걸지도 모른다. 녀석은 이제 그룹 밖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날 테고, 같은 팀 리더라는 명목으로 막을 자격 또한 사라졌으니까.

‘걔 애인 있다고요. 그것도 아주 성격 더러운. 집적댔다가는 뼈도 못 추릴걸요.’

그렇다면 다른 자격을 얻는 건 어떨까? 오늘의 거짓말을 진짜로 만들면 되지. 거기까지 생각이 흐르자 태휘는 정색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구나, 원태휘.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해 놓고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 지랄해서 팀까지 깨 놓고, 이제 와서?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눈앞에 영롱의 얼굴만이 선명히 보였다. 뭐라 뭐라 자신에게 말을 거는 입술 위로 며칠 전 영롱의 음성이 입혀졌다.

‘형이 나를 가둬 주길 원해. 형이 내 전부를 책임지길 바란다고.’

어쩌면 넌 그리도 한결같을까. 태휘가 혼자 고민하고, 외면하고, 거부하고, 거짓말하고, 비난하는 동안에도 영롱은 한결같았다.

처음 만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태휘만을 바라보는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자기 마음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는 한시도 쉬지 않고 진심을 퍼부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도망치기 바빴으니 영롱의 말대로 겁쟁이가 맞았다.

겁쟁이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는 순수한 그 감정을 이용해, 미래를 핑계로 녀석이 있어야 할 곳을 지정해 두고 거기서 꼼짝도 못 하게 묶어 놓았다. 비겁한 악덕 고용주가 따로 없네.

이미 태휘에게 온 마음을 쏟아부은 영롱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은 자기 육체를 헤프게 굴리는 게 다였을지도. 이 모든 걸 뒤늦게 깨달은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게다가 여기까지 달려와 놓고 또, 망설이고 있다니.

“형, 괜찮아?”

허리를 잡고 흔들어 대는 손길에 태휘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 영롱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녀석을 마주하는 건 작년 겨울 숙소에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 네가 뭐라고 했더라?

‘하지만 형은 내가 원하는 말은 절대 들려주지 않을 거지?’

술 때문에 기억의 빗장이 제멋대로 풀리며 그때 나눴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뒤엉켰다.

“……네가 원했던 말, 아직도 듣고 싶어?”

영롱은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이내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는지 두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딱 벌어진 입술에서 놀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충분히 놀랄 만도 하지. 뒷북도 이런 뒷북이 있나. 자기가 생각해도 한심스럽기에 태휘는 눈을 질끈 감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무 늦은 것 같지만…….”

“말하지 마.”

불현듯 든 기시감에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2년 전에 자신이 영롱을 밀어 내며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을 줄이야. 곧이어 ‘난 이제 당신이 형으로밖에 안 보여.’라며 보복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그대로 녀석에게 기댈 생각이었는데,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영롱은 맑고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듣고 싶지 않아.”

그와 동시에 두 손이 태휘의 양 볼에 와 닿았다. 아, 이 체온. 그땐 너무도 뜨겁고 숨 막혀 피하고만 싶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 뜨거운 손길에 어느새 불안함마저 잊었다.

태휘가 도로 눈을 뜨자, 마주한 영롱의 눈빛은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 떨리고 있었다.

“맨정신으로 듣고 싶으니까, 술 깨고 말해 줘.”

말문이 막힌 태휘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끌어당기는 손길에 이끌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을 열어 말하는 대신 영롱의 입술을 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