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ack 5. 사랑 느낌 (03:39) <영롱 solo> (18/39)

Track 5. 사랑 느낌 (03:39) <영롱 s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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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년 3월 -

영롱의 기억 속 둘의 첫 만남은 태휘의 기억과는 조금 다르다.

영롱이 태휘를 처음 본 장소는 교실 안이 아니었다. 중학교 입학 직후, 새 학기 동아리 홍보를 시작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당시 영롱은 동네에서 나름 유명인이었는데,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이 학교 근처에 있는 시장에서 분식집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 곳에서 오래 장사한 데다가 그 집의 4남매 중 막둥이로 태어난지라 그 시장을 자주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롱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형과 누나들 손에서, 때로는 시장 어른들 손에서 키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롱은 분식집 앞에 놓인 평상 위를 기어 다니며 시장의 마스코트처럼 자랐다.

특별히 튀는 행동을 한다거나 사고를 치지도 않았는데 ‘떡볶이집 막둥이’는 동네 사람들 누구나가 다 알았다. 물론 땡글땡글하니 귀여운 외모도 한몫 거들었고.

국민학교를 다닐 때까진 한 번도 ‘떡볶이집 막둥이’라는 유명세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 타이틀은 괴롭힘을 위한 좋은 꼬투리가 되었다.

입학식 며칠 후 영롱은 딱 봐도 불량해 보이는 3학년 선배 3명에게 붙들려 학교 근처에 있는 공터로 끌려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이유였다.

“떡볶이집 막둥이. 너네 집 장사 잘되더라? 용돈도 많이 받지? 형들이 중학교 생활 편하게 해 줄 테니까 매달 돈 상납해라.”

그저 웃겼다. 진짜 부자들에게는 꼼짝도 못 해 건들지도 못하면서. 그깟 떡볶이 어린 학생들에게 거저나 다름없이 팍팍 퍼주느라 우리 가족 여섯 명은 시장 단칸방에서 사는데. 영롱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가 한 명에게 발길질로 배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14살 인생 처음으로 경험해 본 폭력이었다. 시장에선 보통 웃으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해 주거나 오히려 용돈을 쥐여 줬는데. 영롱은 배를 움켜쥐고는 힘겹게 일어섰다.

“드릴 돈 없으니까 그만 가 볼게요.”

“어쭈, 이게?”

바로 또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얼굴은 안 돼!’

귀여운 얼굴이 자신이 사랑받는 이유라고 믿었던지라 반사적으로 얼굴부터 막았다. 얼굴을 지키려다가 결국 바닥에 엎드린 채 온몸을 마구 밟히고 말았지만. 더 대든다거나 도망친다는 건 생각도 못 했다.

이렇게 계속 맞고 있다 보면 학교에서 안 돌아오는 막내가 걱정돼 형이나 누나들이 찾으러 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만 하고 있는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신입생보다 형들 학교생활부터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공터 옆에 쌓여 있는 건축 자재들 뒤에서 그들과 같은 교복을 입은 한 소년이 나타났다. 귀 한쪽에는 이어폰을 낀 채로, 손에는 카세트 워크맨을 쥔 걸 보니 혼자 음악을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소년을 보고 학교 폭력 가해자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쟤 걔잖아? 기악부 2학년.”

“작년에 서울에서 전학 온…… 그 집안 진짜 빵빵한 애?”

“우리 그것도 모르고 작년에 쟤 건드렸다가 학주한테 존나 깨졌잖아.”

그들끼리 수군거리는 동안 소년은 운동화 발로 땅바닥에 뭔가를 짓이겼다. 영롱이 얼핏 보기에 그건 담배 같았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3학년들은 센 척하며 큰소리쳤다.

“원태휘! 너랑 상관없으니까 갈 길 가라.”

“상관있는데요. 여기 우리 집 병원 부지거든요. 제 아지트였는데, 학교 폭력의 현장이 되어 버렸잖아요.”

태휘는 전혀 쫄지 않은 기세로 이어폰 줄을 빙빙 돌리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마침 조금 전에 제가 손가락이 미끄러져 녹음 버튼을 눌렀네요.”

그러더니 들고 있던 워크맨을 흔들어 보이고는 이어폰을 빼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후면에 있는 스피커에서 조금 전 그들의 대화가 재생되어 나왔다. 그러니까 ‘떡볶이집 막둥이’부터 시작해서 ‘상납’ 운운에다가 구타하는 소리까지 전부.

빼도 박도 못 하는 폭행의 증거 자료였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확인한 3학년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색이 됐다.

“너…… 이 새끼가……!”

“저도 교무실 가서 선생님들 관심받고 싶지 않고 부모님께 연락 가고 그러는 거 귀찮아요.”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마치 원하지 않은 일에 얽혀 골치 아프다는 듯, 진심으로 귀찮아 보였다.

“그러니까 신입생 괴롭히는 거 그만하고, 이 부지에도 더는 출입하지 않기로 약속만 하면 제가 이거 들고 교무실 가는 일은 없다고요.”

태휘의 말에 3학년들은 또다시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더니 한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너…… 약속 지켜라!”

그러고는 영롱을 내버려 두고 줄행랑을 쳤다. 3학년 3명이 2학년 한 명에게 꼼짝도 못 하다니. 영롱은 어처구니없는 와중에 태휘를 멍하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태휘는 그 시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자신의 워크맨을 열어 테이프를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아, 테이프 하나 버렸네.”

공테이프가 아닌, 가수의 발매 테이프에 녹음한 모양이었다. 영롱은 계속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자신을 구해준 태휘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천천히 스캔했다.

‘와, 진짜 잘 생겼다.’

형 하나에 누나 둘이 있으니 형과 누나들의 친구도 많이 보고, 분식집에 오는 수많은 학생을 보아 왔으나 태휘같이 생긴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서 전학 왔다고 했나? 그래서 내가 모르는구나.

날카로운 눈매에 서늘한 분위기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15살에게선 보기 힘든 세련미가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새 다가와 가방을 줍고는 영롱을 일으켜 주었다.

“괜찮아?”

“네…….”

어깨를 쥐는 기다란 손가락에 시선을 뺏길 때쯤 그 손에서 담배 냄새가 풍겼다. 영롱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집에 갈 수 있겠어? 데려다줄까?”

“괘,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영롱은 가방을 낚아채듯 건네받고는 그대로 뒤돌아 달렸다. 얼굴 보며 감탄하던 상대가 말을 걸어오자 떨려서 그랬는데, 이내 생각하니 후회스러웠다. 그냥 데려 달라고 그럴걸! 지금이라도 데려다 달라고 할까?

그 생각에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느새 큰길로 나온 태휘는 반대편의 시내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영롱은 멀리서 졸졸 쫓아갔다. 누가 따라오는 걸 알 턱이 없는 태휘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고개를 흔들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영롱아, 옷이 왜 그러냐?”

시내에 들어서자 동네 어른들은 영롱의 행색을 보고는 한마디씩 건넸다.

“안녕하세요! 넘어졌어요, 헤헤.”

“으이그, 조심해야지!”

해맑게 인사하며 대답하는 와중에도 영롱의 시선은 오직 태휘의 뒷모습만을 좇았다. 영롱은 그제야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 내고는 계속 따라갔다. 태휘가 도착한 곳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음반 매장이었다.

그가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 차마 대놓고 따라 들어가진 못하곤 문 앞에 바짝 붙어 유리창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태휘는 조금 전 녹음으로 덮어 버린 가요 테이프를 매장 주인에게 들어 보이며 물었다.

“사장님. 이거 있어요? 한상민 1집이요.”

“그건 다 나갔는데. 지난번에 물어본 그 외국 가수 앨범은 들어왔다. 뭐더라, 콜라……?”

“Color Of Love요.”

“그래, 그거. 악보도 구해 왔다.”

“와! 감사합니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태휘의 모습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차가워만 보이던 무표정은 음악 얘기에 금세 생기가 돌며 신난 표정이 되었다.

아까까지는 눈도 깜짝 안 하고 선배들을 사색으로 만들어 쫓아내더니만, 이제야 15살 소년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영롱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음악을 정말 좋아하나 봐.”

“영롱이 집에 안 가고 뭐 하냐?”

“지금 가요!”

지나가던 또 다른 동네 어른에게 말로만 대답하고 난 뒤 문득 궁금해졌다. 무언가를 그토록 좋아한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그날까지 영롱은 좋아하는 게 없었다. 가족이나 동네 어른들은 영롱이 뭘 하든 예뻐했다. 뭐 하나 잘하는 장기 하나 없었는데도, 재채기만 해도 귀여워했다.

형 따라서 피아노 학원도 조금 다녀 보고, 누나 따라서 미술학원도 조금 다녀 봤지만 어느 것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취향이란 게 있다 쳐도 형과 누나들을 따라 하다가 생겼을 뿐, 스스로 뭔가에 꽂혀서 심취해 본 일이 없었다.

무언가에 몰입한 그의 모습을 보자 자신도 그렇게 빠져들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이미 자신이 빠져들었다는 사실은 인지 못 한 채.

그로부터 일주일 후, 동아리 홍보를 위해 기악부가 영롱의 반을 방문했을 때 태휘는 영롱을 알아보지 못했다. 교실 맨 앞자리에서 광선을 쏘듯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았음에도, 태휘는 그런 눈빛을 이미 많이 받아온 듯 익숙하게 넘겼다. 그때 영롱은 작은 충격을 받았다.

이 동네에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리고 한 번 보면 못 잊는 귀염둥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 얼굴을 기억 못 하다니! 저 형은 음악밖에 모르고 인간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몰라.

그날 이후 영롱은 단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태휘가 애착을 갖는 첫 번째 사람이자 유일한 사람이 되겠다고. 영롱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기악부 동아리 입회 원서를 냈다.

비록 동아리 활동 내내 악기 연주보다도 피아노 치는 태휘의 옆모습과 손가락을 감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지만.

염불보다 잿밥에만 맘이 있던 영롱에게는 다행히도 매우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자신도 미처 몰랐던 ‘목소리’라는 무기가. 그 재능 덕분에 처음으로 태휘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관심 그 이상이었다.

“너 나랑 가수 하자.”

스스로 노래를 잘하는지도 몰랐기에 가수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그런 자신에게 다짜고짜 같이 가수가 되자고 하다니.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그 제안을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음악에 있어서 태휘가 허투루 판단하고 섣불리 결정할 리가 없다고 믿었다. 자신을 통해 어떤 비전을 내다봤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가 미래를 함께하자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덥석 OK하면 너무 속없어 보일까 싶어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먼저 좋아한 쪽이 지는 거라지만, 나도 일말의 자존심은 있다고! 영롱은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조건 하나를 걸었다.

“형 담배 끊으면.”

“뭐?”

즉흥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였지만 꽤 괜찮은 순발력이었다며 스스로 만족했다. 담배 냄새를 지독히도 싫어했던 영롱은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일이니, 그 정도 요구는 할 만하다고 여겼다. 곰곰이 생각하던 태휘는 알았다고 결심한 듯 대답했다.

그렇게 영롱은 태휘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다. 태휘는 담배를 끊겠다는 약속을 6년간 지켰다. 영롱과 함께 보낸 중학교 시절, 예고 시절, 연습생 시절, 그리고 STORY 활동 기간 내내.

▶▶▶

- 200◇년 9월 -

태휘의 얼굴을 끌어안은 채 정신없이 입술을 탐하던 영롱은 문득 낯선 감각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담배 냄새……?’

입술을 열어 부드럽고도 뜨거운 혀의 감촉을 느끼는 와중에, 후각이 뇌로 불쾌한 신호를 보냈다. 영롱은 그 신호를 무시한 채 더 열렬하게 태휘에게 매달렸다.

내가 이걸 얼마나 원하고 바라왔는데! 이 순간을 망치기 싫어!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고는 뒷걸음치고 말았다.

“형! 담배 다시 피워?”

자신을 밀어 낸 손길에 강제로 입술이 떨어지자 태휘는 당황하며 영롱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게 문제야?’라는 눈빛으로.

영롱은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한 번 훑고는, 곧바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러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데. 그러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무시할 순 없었다.

“담배 끊겠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숨 쉴 틈도 없이 이어졌던 거친 키스 이후 호흡을 고르던 태휘는 손등으로 입술 주변의 타액을 닦아 내고는 말했다.

“그게 언제 적 얘기야? 중학교 때? 그 뒤로 우리 상황이 얼마나 바뀌었는데 그 약속을 계속 지켜?”

“상황에 따라 바뀌는 건 약속이 아니잖아!”

영롱은 소리 지르며 진심으로 서운한 듯 울먹였다. 조금 전까지 비틀거리던 태휘는 강렬했던 키스와 또 갑작스러운 중단에 술이 깼는지 두 눈이 또렷해졌다. 그 눈빛으로 영롱을 빤히 응시하고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또박또박 끊으며 말했다.

“너. 지금. 나한테. 고작 그 담배. 다시 피웠다고. 이러는 거야? 네가. 나한테?”

영롱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단박에 이해했다. 그러니까 나는 멤버들이랑 다 자 놓고선, 지금 자기한테는 고작 담배 가지고 뭐라고 한다 이거지? 하지만 금연은 확실히 약속했지만, 금남(禁男)은 서로 약속한 적 없잖아?

“그럼. 나 그냥. 이대로 나갈까?”

태휘가 엄지를 들어 뒤에 있는 문을 가리키자 영롱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얼굴이 바로 흙빛이 됐다. 태휘가 한숨을 푹 내신 뒤 녹음실 문고리를 잡고 나가려 하자 영롱은 화들짝 놀래며 얼른 팔을 붙잡았다.

“아냐! 좀만 더 해!”

“뭘 좀만 더 해?! 담배 피워서 싫다며.”

“그게…… 너무, 너무 놀라서 그랬어! 우리의 역사적인 첫 키스인데! 형한테 담배 맛이 나니까!”

“그건 또 뭔 소리야! 첫 키스 아니잖아! 2년 전에 숙소에서 한 건?”

“그건 키스가 아니라 뽀뽀였잖아! 심지어 내가 일방적으로 형한테 들이받은 거였고!”

영롱은 허겁지겁 변명하듯 군말을 늘어놓았다. 몇 년간의 삽질 끝에 모처럼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 순간이었는데. 잠결과 술주정으로 시작해, 중간에 끊어 먹은 키스에다가 말싸움까지. 로맨틱은커녕 엉망진창,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래도 나한텐 그게 첫 키스였어.”

그 와중에도 태휘가 진지하게 말하자 영롱은 기가 막혔다.

“그때는 형이 나 밀어 낸 거 알지? 이걸로 쌤쌤이야.”

“쌤쌤이고 나발이고…… 읍.”

영롱은 태휘의 옷깃을 도로 잡아당기고는 다시 입을 맞췄다. 진짜 한심하다, 차영롱.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키스인데, 담배가 대수냐? 속으로 자책하며 이번엔 다신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태휘의 목을 두 팔로 옭아맸다.

밀쳐져 화내던 태휘도 그새 잊었는지, 영롱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입술을 포개어 그 안에 혀를 찾아 파고들었다. 골수까지 빨아들일 것처럼 사나운 키스에 영롱은 다리 힘이 풀려 매달리지 않고는 버티고 설 수가 없었다.

태휘도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두 손을 내려 영롱의 허리를 붙들었다. 그동안의 갈급함을 채우려는 듯 쉼 없이 입술을 탐하던 영롱은 손을 뻗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 그 손길에 태휘의 목울대가 진동하며 앓는 듯한 신음이 전해져 왔다.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하고 바라는 찰나, 아까 태휘가 열고 들어온 문틈 너머에서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들려왔다.

태휘가 반사적으로 영롱을 밀쳐 냈고, 그 힘에 영롱은 세 걸음 이상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마자 바로 녹음실 문을 열고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어, 뭐야? 태휘 언제 왔어?”

“진짜. 태휘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양손에 야식을 가득 싸 들고 들어온 사람들은 STORY 시절부터 같이 작업했던 A&R 팀과 매니저들이었다. 밤새워서 수록곡 선정 회의를 하던 중에 영롱이 피곤하다고 해서 잠시 쉬던 참이었다.

영롱은 안쪽 책상에 두 팔로 기댄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고, 태휘는 그 앞에서 영롱을 가리고 서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방금 벌어진 일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태휘는 손등으로 입 주변을 훔치고 태연히 몸을 돌렸다.

“그냥, 잠깐 영롱이 보러 왔어요.”

“잘 왔네. 우리 야식 먹으려고 했거든. 먹고 가.”

그사이 숨을 고른 영롱이 태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말했다.

“아니. 형 안 먹을걸요. 지금 막 가려던 참이었거든. 그치?”

“어, 응.”

조금 전 상황은 꿈에도 모르는 스탭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더 있다 가도 되는데.”

“아니에요. 바쁠 텐데. 저 이만 가 볼게요.”

태휘가 황급히 녹음실을 나서자 스탭들은 눈만 끔벅거리며 영롱의 눈치를 보았다. 영롱은 싱글싱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형이랑 할 얘기가 있었거든. 잠깐만~.”

그러고는 바로 따라나섰다. 영롱은 벌써 복도 저만치까지 걸어간 태휘를 향해 뛰어가 팔을 붙잡고는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손을 들여다보니 자동차 키였다. 영롱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차에서 기다려. 지하 2층 주차장. 나 끝나자마자 갈 테니까.”

순간 태휘가 미간을 좁히자 영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복화술 하듯 이를 앙다물고 말했다.

“그름 으드로 글르 그르쓰?(그럼 이대로 가려 그랬어?)”

타오르는 듯한 눈빛에 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물었다.

“너 언제 끝나는데?”

“한 시간 내에. 어차피 형 술도 깨야 하잖아. 차에서 눈 좀 붙이고 있어.”

둘 사이의 어긋난 톱니바퀴가 이제야 맞아 들기 시작했는데. 이 밤을, 태휘를, 그냥 이렇게 보낼 수 없었다. 이 오랜 삽질을 오늘은 끝장을 봐야 했다. 아까 뱉은 말도 있고.

‘맨정신으로 듣고 싶으니까, 술 깨고 말해 줘.’

웬일로 같은 생각이었는지, 태휘는 차 키를 순순히 받아들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에 영롱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다시 녹음실로 돌아왔다.

조금 전 키스 때문에 쿵쿵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날뛰던 심장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도 스탭들과의 회의는 무사히 마쳐야 했기에 영롱은 남아 있는 모든 집중력을 끌어모았다.

그나마 본격적인 앨범 작업을 시작하기 전이라 다행이었다. 이제 막 작곡가들에게서 받은 곡을 추리는 단계였고, 오늘은 가벼운 아이디어 회의 축에 속했다. 아직 메인 프로듀서도 결정하지 않았고.

영롱은 이런 타이밍에 태휘가 다짜고짜 찾아온 게 이상하긴 했다. 한상민한테 곡 의뢰한 것과 메인 프로듀서 건까지 어떻게 알고서는.

얼마 전 신 대표님이 대면시킨 회의 때, 원태휘가 프로듀서 자리를 고사하고 솔로 앨범에 간섭 안 할 거라고 큰소리치긴 했지만 아예 신경 끌 거라곤 예상하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 함께 음악을 해 왔는데, 무 자르듯 관심을 끊는 게 그에겐 더 어려운 일일 거다.

그런데도 그를 프로듀서로 하겠다고 끝까지 고집부리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오늘 같은 일을 예견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의 기대보다는 빨리 이루어졌지만.

영롱은 태휘처럼 뭔가를 예상해서 미리 계획하는, 철두철미한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로 팀까지 해체해 버리는 걸 보고 나니, 원태휘라는 뻣뻣한 인간을 갖기 위해서라면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음악적으로는 그의 프로듀싱을 받는 게 안전하고 더 든든했으나, 그놈의 공과 사과 문제였다. 여지껏 그는 친동생 같고, 한 팀이라는 이유로 영롱을 밀어냈다. 다시 프로듀서와 가수의 관계로 일하게 되면 또 그 핑계를 들며 자신을 거부할 게 뻔했다.

가수로서는 물론 프로듀서 원태휘가 탐이 났지만, 진짜 원하는 건 연인으로서의 원태휘였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욕망을 드러내는 데 서툰 사람이었다. 부디 그가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랐다.

영롱 입장에선 그런 태휘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건 또 아니었다. 그놈의 집구석. 그는 모든 걸 억누른 채 이미 정해 놓은 순서대로, 집안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가정에서 자랐다.

음악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는데, 그마저도 허락받기 힘들었다. 그 꿈 하나만을 얻어 내기 위해 어른들의 뜻을 최대한 거스르지 않고 청소년기를 보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롱은 처음으로 그 집에 놀러 갔던 날이 떠올랐다.

‘부모님은 뭐하시니?’

대뜸 그것부터 물어보시던 어머님. 분식집 한다고 대답했더니 대놓고 일그러지던 표정. 형은 바로 안방으로 불려 가서 한참 동안의 잔소리를 듣고는 그대로 내 손을 붙잡고 호화스러운 안마당을 가로질러 나왔다.

그 뒤로는 기악부 동아리방으로 쓰던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거나 우리 가게 앞 평상에 누워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도 형은 우리 집 사정을 알았기에 내 앞에서 자기 집안에 대해 불평도 하지 못했다. 혹시나 배부른 투정처럼 들릴까 봐.

하지만 난 그런 생각보다도 그런 집에서 살아온 태휘 형이 불쌍했다. 결국 원태휘는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갖고 싶은 게 뭔지.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표현을 못하는, 음악만이 인생의 전부인 천재이면서 감정 표현에는 서툰,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가 되어 버렸다.

그런 상황을 알았기에 이해하면서도. 끝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의 모습에 속이 터졌던 건, 더는 기다려 주지 못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게 돼 버려서. 나는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형이 나를 사랑해 주길 원했다.

둘은 같은 꿈을 향해 달렸지만 영롱의 목표가 태휘였던 데 비해, 태휘는 음악으로 모든 성취를 이루고자 했다. 꿈도 좋았지만, 영롱은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라는 마인드로 살았다. 하지만 태휘는 달랐다.

그의 목표지향적인 삶의 태도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태휘를 제외한 모든 것에 금세 시들해지곤 하는 영롱은 그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본받고 싶기도 했다. 자신이 절대 될 수 없는 모습이라 엄두도 안 나기도 했지만.

아티스트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를 만한 사람이었기에 그가 멋있고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영롱은 그가 인간적으로도 행복하길 바랐다.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고, 질투를 숨김없이 표현하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고. 물론 그 대상이 타인이 아니고 영롱 자신이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태휘는 음악 작업을 할 때 종종 영롱에게 이렇게 말하고 했다.

‘많은 사람이 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곡을 만들어 줄게.’

그 말이 감동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슬픈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난 형 한 사람만 사랑해 주면 되는데.

STORY 활동을 할수록, 영롱은 태휘와 동상이몽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태휘는 자신이 만든 노래를, 영롱의 목소리를 통해, 온 세상에 들려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인기 가수가 되어, 많은 사람에게 오래도록 사랑받고자 했다.

그래야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인정받는다는 듯이. 하지만 영롱은 그저 태휘와 미래를 함께하고픈 생각뿐이었다. 지금은 미래고 뭐고, 태휘가 자신처럼 솔직하길 바랐다.

부풀고 부풀어 터질 것 같은 이 감정이 휘발되어 버리기 전에. 이 소중한 시간을 쓸데없는 감정들로 소모하고 흘려보낸 뒤 후회하기 전에…….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고대한 회의를 빙자한 야식 타임이 끝나자, 영롱은 쏜살같이 녹음실을 튀어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의 운전석 문을 여니 조수석에 등받이를 뒤로 젖힌 채 잠든 태휘가 보였다.

태휘는 취하면 자기 주량도 무시하고 폭주하다가 아무 데서나 순식간에 기절하듯 픽 잠들어버리는 술버릇이 있다. 아까 그대로 보냈다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길바닥이나 택시에서 잠들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구한테 발견되기라도 하면, 완전 뉴스거리지.

영롱은 자신의 말을 착하게 들은 그 모습을 보자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확실히 해체 후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경멸하는 눈빛으로, 치를 떨면서 다시는 안 볼 것 같이 굴더니만.

몇 개월 만에 재회한 지난번 회의에선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이라 의외였다. STORY 활동 중에는 팀의 리더라는 자리가 그렇게 만들었던 걸까? 아니면 떠나보내고 나니 소중함을 느꼈나?

속 다 뒤집어 놓을 땐 언제고, 이제 와 이러는 게 괘씸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아까의 키스를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는 듯했다.

깨울까 하다가 코까지 쌕쌕 골며 자고 있기에 참았다.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안전띠를 채워주며 문득 얼굴이 가까워지자 감은 눈 아래로 길고 촘촘하게 뻗은 속눈썹을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롱은 잠든 태휘의 모습을 보는 게 실로 오랜만이라는 걸 깨닫고는 얼굴 구석구석을 한참이나 뜯어보았다. 그동안 아무리 다른 남자를 만나 몸을 섞고 욕구를 풀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이 있었다. 그를 갖지 못하는 한 이 갈증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영롱은 결국 참지 못하고 살짝 벌어진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쪽 맞췄다. 담배 냄새랑 술 냄새 따위야.

“그래, 내가 이 얼굴에 반했지.”

영롱은 중얼거리고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

“널 처음 본 순간 난 사랑을 느꼈어~♪ 내 전부를 너에게 다 주고 싶어~♪”

몸이 흔들거리는 느낌과 함께 아득하기만 하던 반의식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얼거리는 영롱의 노랫소리에 태휘는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느라 잠시 넋 놓고,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기억해 내느라 또 한참이 걸렸다.

그 와중에 영롱은 STORY 시절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하고 있었다. 태휘가 작곡하고 영롱이 작사한, 영롱의 솔로곡이었다. 방송 활동은 안 했어도 수록곡 중에서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에 속했는데 아직 부르고 다닐 줄이야.

잠에서 깼는데도 태휘는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 영롱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후진하느라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린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깼어? 방지 턱 살살 넘는다고 했는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4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영롱의 차에 타기 전에 화장실에서 한 번 게워 낸 뒤 물도 마시고 한참 자고 났더니 술은 거의 다 깼다. 두통은 조금 남아 있었지만…….

두통보다도 심각한 건 술에 취했을 때의 생생한 기억이었다. 한상민한테 지르고 나온 것까진 좋았는데, 다짜고짜 영롱이를 찾아가서…… 아, 내가 뭘 한 거지?

물론 온전히 술기운만으로 튀어나온 행동은 아니었다. 그동안 태휘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쌓여 온 영롱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영롱을 다시 만나면서 차오른 감정의 수위는 불안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알코올을 들이붓는 바람에 넘쳐 버린 것뿐.

제멋대로 요동치는 이 격정이 조만간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다고 예상하긴 했다. 이런 식으로 술김에 터뜨리고 싶지 않았는데, 망할 한상민 때문에…….

지금 차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기 위해 창밖을 두리번거렸지만 아까 있던 회사 주차장과 비슷해 보이는 지하 주차장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태휘는 눕혔던 의자 등받이를 세워 앉고는 물었다.

“여기 어디야?”

“회사 근처 골든호텔.”

주차를 마친 영롱이 시동을 끄고 안전띠를 풀 때까지 태휘는 그대로 얼음처럼 멈춰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고만 있는 의심쩍은 눈빛에 영롱은 의연하게 대답했다.

“왜? 나 요새 여기서 살아.”

태휘는 더 심각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집은?”

“해체한 뒤 숙소에서 나와서 본가에서 지내다가, 앨범 준비하면서 여기 묵었지. 집은 이사고 뭐고 아직 귀찮아서.”

“그래도 그렇지……. 멀쩡한 집 두고 웬 호텔살이야?”

“그럼, 서울에 집 구해서 같이 살래?”

또, 또 귀염 떨면서 헛소리한다. 인상을 쓰며 실없는 소리 취급을 하자 영롱은 몸을 틀어 한쪽 팔을 운전대에 올리고는 턱을 괸 채 태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심인데. 예전 숙소에서 한방 쓸 때 좋았잖아.”

“아니. 하나도 안 좋았거든.”

“우리 서로 끌어안고 자고.”

“그러니까 정확히 그 점이 안 좋았다고.”

“아직도 안 좋은지 오늘 확인해 보자.”

“차라리 집에 데려다줘.”

“또 도망치게?”

영롱의 물음에 태휘는 입을 다물었다. 좁은 차 안, 이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는 표정을 숨길 수도 없고 침 삼키는 소리를 감출 수도 없었다. 자기가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진 녀석은 순순히 내려 주지 않을 게 뻔했다. 꽤 영리한 납치 솜씨인데…….

“오늘 일부터 설명해 봐. 왜 갑자기 술 먹고 찾아온 거야? 상민 선배 얘기는 뭐고?”

태휘가 입을 다물자 영롱은 화제를 돌렸다.

“누구랑 술 마셨어?”

눈치 빠른 녀석. 자세한 상황까진 몰라도 대충의 정황은 추측한 듯했다. 한상민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들었다거나, 그 비슷한 정도로만. 태휘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영롱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바로 앉았다.

“알았어. 한상민이랑 안 할게, 앨범 작업.”

그 말에 태휘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롱은 정면을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형이 아무 이유도 없이 한밤중에 이 난리를 칠 사람은 아니니까. 날 위한 일일 거 아니야? 안 그래도 100퍼센트 마음에 차진 않았어. 신 대표님이 추천해 주신 다른 여자 프로듀서가 더 맘에 든 참이었거든.”

확실히 변하긴 변했다. 이렇게 고분고분 내 말을 듣다니?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나? 아니, 얘가 그렇게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녀석이 아닌데.

“형 말 들을 테니까, 대신에 형 마음 솔직히 말해 줘. 오늘 왜 이렇게 찾아왔는지,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긴 건지. 그냥 술주정인 거라면 진짜 최악이니까.”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었네. 오늘 녀석은 날을 잡은 모양인지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는 감정과 흥분에 사로잡혀 삽질하는 일 없다는 듯이.

녀석의 눈빛만이 어두운 차 안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그 눈빛에 태휘는 의자에 파묻힐 기세로 물러났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나도 변했고, 녀석도 변했다는 사실을.

“술주정 아니야.”

태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네가 다른 남자 만나는 거, 못 참겠더라고.”

영롱은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걸 막겠어? 난 네 보호자도, 형도, 선배도 아니고 더는 동료도 리더도 아닌데.”

영롱은 순간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래서 이제 네 남자가 되려고.”

그 말에 녀석의 고개가 기울어진 채 그대로 정지했다. 태휘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너만 괜찮다면. 이제 와 이러는 거, 참 염치없다는 거 알아. 그래도 오늘 널 만나서, 이 말을 꼭 해야 했어. 또 언제 용기가 날지 몰라서.”

영롱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할 말을 마친 뒤 고개를 숙인 태휘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만 보다가 입을 열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다정한 건지, 속 터지게 하는 건지.”

진심으로 신기해하는 말투였다.

“형은 술 마셔야 그나마 솔직해지는구나? 다음부터 형 속마음 궁금할 땐 술 먹여야겠다.”

자신도 이럴 줄은 몰랐다. 이렇게 취할 정도로 마신 적이 별로 없어서. 어쨌든 모처럼 쏟아낸 솔직한 말들에 녀석은 진심을 느낀 듯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속으로 삭이지만 말고 말 좀 해. 나중에 삽질하지 말고! 쌓아 두니까 한 번에 팍 폭발하잖아.”

“딱히 삭이지 않았는데.”

“그리고 형은 원래 내 남자였어. 형이 인정하든 않든.”

영롱이 너무도 당연하게 말하자 태휘는 일순 벙쪘다. 그 말에 따질 틈도 주지 않고 녀석은 대뜸 물어왔다.

“그럼, 나한테 화났던 것도 다 풀렸어?”

순간 왜 화났었는지 잠시 생각해야 했고,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녀석이 멤버들과 다 잤다는 사실에 팀까지 해체할 정도로 분노했으면서, 그 생각이 바로 안 났다니? 하지만 기억해 내자마자 바로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화 다 안 풀렸는데.”

“그렇다면 차차 풀도록 해.”

영롱이 당당한 태도로 말하자 태휘는 어이가 없었다. 뻔뻔함이 정말 역대급이네?

“내가 당연히 화 풀어야 하는 거야? 넌 그 일에 대해 아무 할 말 없어?”

“왜? 난 작년에 말한 게 다야. 더 새로운 것도 없고.”

“나 원래부터 네 남자였다면서. 네 남자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다고?”

“먼저 화났던 건 나라고. 내 남자가, 내 마음 몰라 주고 뻗대니까 빡쳐서 그랬지!”

“누가 자기 남자한테 빡쳤다고 동료들이랑 돌아가면서 자?”

“그래서 이제 안 자잖아.”

태휘는 숙취 탓인지, 영롱 때문에 혈압이 오른 건지 머리가 아파져 왔다. 애초에 이 녀석에게 엇나간 정조 관념이나 성적 방종함에 대한 진지한 사과를 기대한 건 무리였나?

계속 이 문제를 따지고 들어 봤자 서로의 감정만 상하고 원점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한밤중 녀석을 찾아온 순간부터 이미 그 부분은 차치하기로 한 셈이니까.

태휘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영롱은 다 해결했다는 듯 세상 상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 문제 될 거 없는 거지?”

태휘는 뭔가가 찜찜했다. 너무 오랫동안 마음을 억누른 채 살아와서 그런가. 그냥 이렇게 둘 사이의 관계에 브레이크를 풀어 버려도 되는 걸까? 분명 빼먹은 게 있는데. 꽤 중요한 문제가…….

하지만 이 상황에선 어느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음 단계를 미리 준비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태휘 입장에서는 모든 게 꺼림칙했고 모든 게 불안했다.

이 앞길은 안개처럼 예측불허였고 그야말로 모험이었다. 그 상태에서 브레이크를 풀고 액셀을 밟느냐 마느냐. 장대높이뛰기를 하느냐 마느냐, 선택의 순간이었다.

“그럼 이제 방으로 올라가자.”

태휘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롱은 그저 산뜻한 표정으로 신나게 액셀을 밟아 댔다.

“아니. 오늘은 그냥 집으로 가는 게 좋겠는데.”

다시 브레이크. 급정거에 당황했는지 영롱은 순간 미간을 좁히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 남자가 되고 싶다더니?”

“……원래 네 남자였다며?”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말이야! 몸으로는 아직 내 남자 아니지.”

영롱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태휘는 지금의 대화만으로 이미 엎치락뒤치락 몇 판 뛴 기분이었다.

“……다음에 될래.”

“뭐야, 형. 여기까지 와서?”

“나 잠든 사이 네가 납치한 거잖아!”

“형 진짜 사람 지치게 한다. 물러서면 다가오고, 들이대면 도망가고. 고자도 아니면서 튕기기는 왜 튕겨?”

“너랑 다른 멤버들처럼 머리에 그 생각만 가득하지 않으니까.”

“그게 이 모든 일의 비극이라는 거 알아?”

“…….”

“형 아직 20대이잖아. 그러면 20대답게 좀 욕망에 몸을 맡겨 봐. 왜 그리 쓸데없이 금욕적이야?”

“누가 금욕적이래?”

“이 새벽에, 호텔 앞에서. 이렇게 예쁜 사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집에 갈 생각하는 게 금욕적인 거지 뭐야?”

“이런 식으로 도발하는 거, 다른 멤버들한텐 통했어도 나한텐 안 통해.”

“다른 멤버들 얘기 좀 그만하지?”

“…….”

“그리고 안 통한다는 게 뭐 그리 자랑이야? 내 남자 되겠다며! 그럼 도발에도 좀 넘어가 주고 그러는 거지. 뻗대면 누가 상 준대?”

그 말에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한 문장이 떠올랐다. 누가 한 말이었더라?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져 주는 거라잖아요.’

2년 전에도 그렇고, 작년까지도 태휘는 이 관계에서 이기고 영롱을 길들일 생각만 했다. 하지만 이젠 달라져야 했다. 녀석의 말대로 뻗대 봤자 지금껏 그 결과는 처참했으니까.

문득 이렇게 기 싸움만 하고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무엇보다 모든 게 불확실하고 불안한 이 안개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자신의 감정을 믿어 보기로 했다.

태휘가 생각하느라 미동도 없이 잠자코 있자 영롱이 창밖을 내다보며 투덜거렸다.

“대체 그 잘난 머리로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지는 생각.”

이번에야말로 더 좋아하는 쪽은 내가 돼 보기로. 태휘는 매고 있던 안전띠를 풀어냈다. 녀석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영롱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손으로 태휘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입꼬리가 만족한 듯 위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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