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ack 6. 편지 (03:38) (19/39)

Track 6. 편지 (03:38)

“다림아, 여기!”

식당 창가 자리에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지애를 발견한 다림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요새 많이 바빠? 피곤해 보여.”

다림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 누구네 오빠들 때문에……. 대답하는 대신 화제를 지애에게 돌렸다.

“네가 더 바쁘겠지.”

지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넌더리를 냈다.

“그러게. 뭐 이리 준비할 게 많냐? 귀찮아서라도 두 번은 못 하겠다.”

다림은 중학생 시절에도 자주 보았던 익살스러운 표정에 미소를 지었다. 지애는 배고파 죽겠다며 음식부터 시키자고 메뉴판을 건넸다. 음식을 주문한 뒤 서로의 근황을 나누던 중에 지애가 불현듯 생각났는지 말했다.

“맞다, 이거 줘야지.”

그러더니 가방에서 미색의 봉투를 꺼내 건넸다. 다림은 이미 친구들에게 수십 장은 받아 본 청첩장을 소중하게 받아 천천히 봉투를 뜯어 보았다. 신랑과 신부 유지애. 청첩장에 쓰인 결혼식 날짜는 몇 달 뒤였다. 그 날짜를 가만히 보다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바쁠 텐데 뭐 하러 직접 주냐? 요샌 다 모바일 되던데.”

“너한테 어떻게 모바일로 땡 치냐? 이 핑계로 얼굴 한 번 보는 거지. 안 그러면 만나기도 어렵잖아.”

하긴, 학교 가면 매일 볼 수밖에 없던 10대 때를 지나고 틈나는 대로 만나서 놀러 다니던 20대 때와는 달리, 30대가 되고 나니 서로 먹고살기 바빠서 만나서 차 한 잔 마시기도 어려워진 건 사실이었다. 그나마 일찍 결혼한 친구들보다 상황은 나았지만.

희한하게도 다림은 친구들 사이에서 ‘평생 결혼 안 할 애’로 잠정 결론이 나 있었다. 어쩌다가 그런 이미지가 되어 버린 건지는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부인할 수도 없었다. 아마도 진짜 그렇게 될 것 같으니까.

“그리고 내 스타일 알지? 좋아하는 사람한텐 뭐든 직접 줘야 하는 성미인 거.”

그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차영롱과 동급이라니, 감개무량하네.

“그럼.”

그 성미 때문에 중학교 시절 STORY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지.

STORY가 데뷔한 그해 봄. 같이 숙소 앞까지 갔다가 지애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림만 멤버들을 맞닥뜨린 사건은 며칠 후에야 전해졌다.

처음 하루 이틀은 이걸 지애에게 고백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필 지애가 가지고 있던 영롱의 초상권 사진에 사인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진이 없어진 줄 알고 울고불고 난리 치는 친구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했다.

물론 그 때문에 더 크게 폭발하여 또 울고불고하고 난리가 났지만……. 지애는 다림이 자신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는 사실에 1차 폭발하고, 자신이 잠시 사서함을 확인하러 간 사이에 멤버들이 왔다는 사실에 2차 폭발해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며칠 동안은 다림과 말도 안 할 정도였다. 비록 삐친 감정은 오래가지 않아 며칠 뒤 같이 매점 털러 갔지만. 화가 풀린 지애는 뒤늦게 그날 실물 영접한 오빠들이 어땠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지만 다림은 벌써 며칠이 지나기도 했고, 한국 연예인, 그것도 남자 연예인에게 전혀 무관심해서 자세한 묘사가 불가능했다. 답답했던 지애는 더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얼굴은 TV에서 보는 것처럼 작았어? 목소리는 진짜 영롱하게 맑아? 아니면 피곤해서 잠겼어? 향기는 어땠어?’

다림은 그 질문에 하나도 제대로 답을 못했다. 그냥 우리랑 똑같이 눈 두 개, 코 한 개, 입 한 개……. 이런 식으로 표현하니 지애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당시에는 너무 경황이 없고 놀라서 상황을 설명해 준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영롱이 자신을 지애로 착각한 상황은 빼고 얘기해야만 했다. 그 사실까지 말하면 지애는 진짜 혈압이 올라 뒷목 잡고 쓰러질 테니까.

편지를 건네받은 영롱이 초상권 사진에 사인해 주고 AA 건전지를 줬다는 것만으로도 지애는 충분히 괴로워했다. 다림이 전해 준 그 AA 건전지를 지애는 아직도 가보처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아, 맞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다림은 생각난 듯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봉투에 ‘영롱이가’라고 적혀 있는 빨간색 작은 편지는 지애의 또 다른 가보였다.

“이거 돌려줄게.”

그날 이후 다림은 방과 후 다른 곳으로 샜다는 걸 엄마한테 걸리는 바람에 다시는 함께 숙소에 가지 못했다. 대신 지애의 팬레터는 계속해서 대신 써 주며 친구의 덕질을 도와주었다.

지애는 혼자 STORY를 보러 다녔고 마침내 멤버들 실물 영접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이사한 숙소는 물론 회사 앞, 음악 프로그램 방청, 라디오 스케줄, 공개방송까지 다 쫓아다니며 열성 팬으로 한층 거듭났다.

그제야 영롱도 팬레터의 실제 주인인 지애를 알게 됐다. 가끔은 영롱이 팬레터에 답장도 해 줬다며, 다림에게 자랑하곤 했다.

지금 다림이 지애에게 돌려주는 편지는 영롱에게 받은 마지막 답장이었다.

“아, 지난번 전화로 물어본 것도 이거 때문이었지?”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겨울쯤이었나? 모처럼 둘이 만나서 술을 진탕 마시던 밤에 지애는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영롱이 잠적한 지도 9년째인 해였다. 아무리 과거에 열혈 팬이었다지만 그 정도 시간이면 지애도 탈덕했을 줄 알았다.

용케 대학도 가고, 바쁜 직장인이 되고 난 뒤부터는 STORY나 영롱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어서 팬심도 다 사라졌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걸 그날에야 알았다.

‘다림아. 영롱 오빠 좀 찾아 줘.’

그렇게 말하며 다림에게 이 편지를 보여 줬다. 술김에 내뱉은 실없는 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한마디에서 짙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다림의 촉은 나쁘지 않았고, 그 촉 덕분에 지금까지 기자로 밥 벌어 먹고살고 있으니까.

자고로 휴덕은 있지만 탈덕은 없다고 했던가? 하긴, 지애는 그토록 좋아했던 존재를 마음 깊은 곳 한구석에 묻어 두면 묻어 뒀지 처음부터 없던 존재처럼 뿌리째 밖으로 내던질 친구가 아니었다.

‘보고 싶어.’

아마 다른 사람 앞이었다면 꺼내지 못할 말이었을 거다. 누가 과연 진지하게 들어줄까? 하지만 다림은 친구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이 녀석은 아무 말도 없이 자취를 감춘 영롱을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애가 그리워하는 이는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아닌 아주 예전부터 좋아한 연예인이었다. 결혼까지 약속한 애인이 있는 지애에게 영롱은 애정의 할당량을 고민하는 대상이 아니라, 별개의 영역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는 존재였다.

애인을 만나기 전부터, 아마도 가족과 친구 다음으로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알아 온 사람. 그리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사람. 가족도 친구도 아니기에 쉽게 찾을 수도 없고 그리워하기밖에 못하는 사람. 그리고 그 보고픔을 남에게 털어놓기도 어려운 사람.

10대 시절, 함께 찬바람 맞아 가며 그를 기다리던 추억을 공유한 친구한테만 할 수 있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 친구는 심지어 연예부 기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림은 그 편지를 건네받았다. 남에게 절대로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조건으로.

지애의 말로는 STORY가 갑작스레 해체했을 당시, 숙소 앞에 찾아가 몇 날 며칠 울면서 밤을 새웠을 때 영롱이 자신에게 직접 준 편지라고 했다. 다림은 다음 날 술에서 깨고 나서 그 편지를 말짱한 정신으로 읽어 보았다.

짧은 편지였는데도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이미 수백 번 읽어 편지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울 정도였지만, 가장 인상적인 한 줄은 이 부분이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돼서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편지에 구체적인 이유는 쓰여 있지 않았으나, 영롱은 팀의 해체가 자신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STORY는 해체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그룹 내부적으로 트러블은 전혀 없었고 멤버 각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합의에 따라 결정했다.’고 말해 왔다. 그렇기에 이 편지는 그 주장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게 했다.

게다가 현재 유일하게 소식을 모르는 멤버가 영롱이니, 분명 그와 연관된 어떤 일이 있었을 거라는 게 다림의 추측이었다. 다림은 지애의 부탁도 들어줄 겸, 연예부 기자로서 호기심도 해결할 겸 심층 취재를 시작했다.

“취재는 어떻게 돼 가?”

지애의 물음에 얼마 전 자신의 조사원이 SS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에서 찍은 사진에 대해 말할까 하다가 참았다. 그 사람이 영롱이라는 증거도 없고, 알아낸 거라곤 ‘STORY’ 4인이 만났다는 것뿐인데 괜히 소문 흘려 봤자 골치만 아프니까.

“사람 찾는 일이 쉽지는 않아서. 이 편지로 해체 이유부터 파악해 봤어.”

“찾는 거랑 해체 이유랑 상관이 있어?”

“일단 해체 이유에 따라 추적의 난이도가 달라지니까. 팀의 해체가 차영롱에게서 비롯된 거라면, 의도적으로 잠적했을 가능성이 커. 그럼 찾기 더 어렵지. 그게 아니라면 생각보다 쉬울 거고.”

다림이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에 지애는 자신이 술 마시고 미친 소리를 한 거 같다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하다. 안 그래도 바쁜 애한테.”

“아직 건진 건 없어. 이설민 인터뷰는 했지만, 그 뒤로 다 막혀서. 한강도 잠깐 스치기만 했고.”

“좋겠다! 오빠들 인터뷰도 하고.”

그동안 더 유명한 배우와 가수들 인터뷰했다는 얘기에는 별 반응 안 보이더니. STORY 멤버들 만났다니까 이제야 알아봐 주네.

“왜, 우리 중딩 때 숙소 앞에 갔다는 얘기도 하지 그랬어!”

“그런 얘기를 뭐 하러 해? 난 팬도 아니고, 그냥 너 따라간 건데.”

“다림아.”

지애의 목소리 톤이 한층 낮아지자 다림은 순간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무리 안 해도 돼. 나 진짜 괜찮으니까. 그때 내가 진짜 많이 취했었나 봐.”

그러곤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겠지.”

술김에 그런 얘기를 꺼낸 걸 후회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다림은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친구의 속마음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잘 지내고 있어도, 요즘처럼 STORY 소환하라고 난리인 판국에 조용히 있기 힘들 텐데.”

다림의 말에 지애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는 온라인 탑골공원이니, 1세대 아이돌 붐 다시 오는 거 좀 씁쓸하기도 해.”

“왜?”

“오빠들 해체 이후 다들 나름 열심히 살았거든. 각자 자기 분야에서 커리어 착실히 쌓으면서. 근데 사람들은 그 시기 따윈 관심도 없다가,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딱 STORY 활동만 조명하잖아!”

지애는 진심으로 언짢은 듯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그때가 전성기인 건 맞지만, 전력을 다해 버틴 그 이후의 시간도 소중한데 말이야.”

이렇게 흥분하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예비 신랑이나 다른 화제에선 볼 수 없었기에, 다림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시절은 다 무시하고 재결합이니 소환이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 같아서.”

“그래도 그만큼 전성기에 인기가 대단했다는 거잖아. 모든 가수가 이렇게 소환될 기회를 얻는 것도 아니고.”

“배부른 투정이다? 알아. 그렇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거.”

지난번 공항에서 만난 팬 수희의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확실히 팬들의 생각은 일반 대중과는 달리 재결합에 회의적이군.

“개인적으로는 영롱 오빠가 보고 싶긴 하지만.”

지애는 잠시 머뭇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 사라진 사람은 그냥 잊고 기억에 묻어 두는 게 가장 아름다운 걸지도.”

하지만 이제 와 덮어 두기엔 다림의 호기심이 들쑤셔진 지 한참이었다. 처음엔 친구에게 소중했던 한 사람을 되찾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면 지금은 기자로서의 궁금증이 최고조에 이르렀기에. 자신의 기민한 촉이 자꾸만 신호를 보내와 그만둘 수 없었다.

“난 너무 궁금해. 대체 왜 팀 해체가 자기 때문이라고 했는지.”

다림이 진지하게 중얼거리자 지애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역시 넌 팬이 아니니까 그렇게 끝까지 집요하게 따질 수 있구나 싶어서. 정작 팬들은 해체 이유쯤이야 그냥 덮어두고 싶어 하거든.”

다림은 그와 비슷한 말을 수희에게서도 들었다.

“솔직히 팬들은 멤버들 간에 곤란한 치정 관계만 없다면 다 괜찮다고 생각할걸.”

“치정?”

“예를 들어 여자 한 명을 두고 멤버들끼리 얽혔다거나. 뭐, 그것도 사생활이니까 신경 끄면 그만이지만. 아, 음식 나왔다. 먹자!”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지애는 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다림은 한 번도 지애가 말한 방향으로는 생각한 적 없었다. 역시 헤테로 연애 주의자의 사고는 자신과는 한참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보통 이런 일에서 여자 문제도 염두에 두겠지? 근데 과연 그럴까? 어째서인지 STORY 멤버들로는 그런 그림이 머릿속에서 선뜻 그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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