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ack 7. 원(願) (02:59) (20/39)

Track 7. 원(願)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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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년 9월 -

영롱은 호텔 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태휘가 벽으로 밀어붙이고 키스를 퍼부어 대는 통에 손에 쥐고 있던 카드키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집에 간다더니, 순순히 보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물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보냈겠지만.

영롱은 팔을 뻗어 태휘의 목을 끌어안고는 다급하게 입술을 물고 빨았다. 현관에서 한참 동안 격렬한 키스를 이어가자 머리 위의 센서 등이 빨리 안으로 들어가라고 독촉하는 듯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두 사람은 주차장에서 방까지 올라오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차에서 시작된 키스로 순식간에 달아오른 영롱은 그대로 거기서 뭐든 할 기세였다. 그런 영롱을 더 자극한 건 다름 아닌 태휘의 손이었다.

바로 직전 영롱이 고자라느니 금욕적이라느니 한껏 도발한 덕분인지 태휘 또한 거침이 없었다. 키스는 점점 짙어졌고, 커다란 두 손이 영롱의 얼굴을 감쌌다. 그 손길은 영롱의 기억보다 훨씬 크고 억셌다.

태휘의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 위에서 춤을 추듯 미끄러지던, 길고 가느다란 이미지로 강렬히 남아 있었다. 언제나 그 손이 자신을 만져 주기를 바라고 상상하기만 했다.

몇 년 만에 이루어진 다정한 스킨십이었기에, 그사이 그가 얼마나 어른이 되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기억과는 달리 너무도 큰 어른 남자의 손이어서 내심 놀라, 키스하는 와중에도 그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길에 태휘는 자신을 밀어 내는 줄 알고 순간 키스를 멈췄다. 입술이 떨어지자 영롱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바로 조수석으로 넘어가 태휘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여기서?”

태휘가 당황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사이 영롱은 하체를 태휘의 중심부에 더욱 밀착하며 입고 있던 티를 벗어 올렸다.

“못 참겠어.”

그토록 원하던 태휘와의 첫날밤이 눈앞에 다가오자 영롱은 벌써부터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그의 모든 걸 삼키고 느끼고 싶어 허리가 절로 들썩거렸다. 여태껏 기다린 시간이 얼만데,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 영롱의 맨살이 드러나자 태휘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역시 자제력 하나로 몇 년을 버텨온 인내심의 끝판왕답게 바로 옷을 끌어 내리며 말했다.

“방으로 가자.”

순간 짜증이 치민 영롱은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형, 정말 이럴 거야?”

“몇 년은 기다려놓고 몇 분을 못 기다려?”

“몇 년을 기다렸으니, 몇 초도 못 기다리지!”

그렇게 억지 부리는 영롱을 겨우 어르고 달래서 차에서 내렸다. 방으로 올라가면 군말 없이 영롱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준다는 조건으로. 성인이 되고 해체까지 해서 더는 리더도 뭣도 아닌 마당에 아직도 이렇게 애 키우듯 어르고 달래야 한다니.

태휘는 도로 고생길로 걸어 들어왔음을 실감했지만 이젠 무를 수도 없었다. 지금 녀석을 갖지 못하면 어쩌면 영영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랬기에 태휘는 호텔 방으로 올라오자마자 영롱을 꼭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영롱은 태휘의 입맞춤을 받아 내며 바닥으로 주저앉아 떨어진 카드키를 주워 일어나 벽에 꽂았다. 방 안이 환해지자 태휘는 순간 눈을 찡그리며 입술을 뗐다. 눈앞에는 숨을 헐떡이며 다시 매달리는 영롱이 보였다.

태휘는 고개를 들어 호텔 방을 눈으로 대충 살핀 뒤 신발을 벗어 던지고는 영롱을 안아 들었다. 영롱도 두 다리를 태휘의 허리에 감고는 발끼리 비벼 신발을 벗어 던졌다. 태휘는 그대로 방 안쪽에 있는 침대 위에 영롱을 던지듯 눕혔다.

몸을 일으키려는 영롱에게 태휘가 다시 입술을 부딪쳐 오자 무방비로 무너져 내려 다리로만 겨우 붙들고 있었다. 입술에서 턱으로, 목까지 이어지는 태휘의 부드럽고도 뜨거운 키스에 영롱은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잠시 입맞춤을 멈춘 태휘가 영롱의 옷을 벗기고 자신의 상의를 벗어 내는 동안 영롱은 태휘의 하체를 감고 있는 다리를 풀지 않았다. 마치 도망 못 가게 붙잡고 있는 것처럼.

“영롱아.”

“응?”

“놔줘야 바지를 벗지.”

아. 눈을 끔벅이던 영롱이 그제야 힘을 풀고 침대 위에 두 다리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태휘가 영롱의 바지를 벗기고 자신의 바지로 손을 뻗는 사이 영롱의 손이 먼저 닿았다.

“내가 할래.”

영롱은 떨리는 손으로 바지 단추를 풀어 속옷과 함께 벗겨 내렸다. 잔뜩 발기한 태휘의 물건을 보자 영롱은 만족스러움과 기대감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 역시 자신의 기억 속에서 손만큼이나 부쩍 자라있었다.

옛날에는 아무 생각 없이 서로 알몸도 보긴 했었으니까. 그러니까, 영롱의 몸도 마음도 순수했을 시절에. 저걸 이제야 맛보게 되다니 속상했지만, 지금이라도 참 감사한 일이었다.

영롱은 당장 달려들어 물고 빨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침대 안쪽으로 뒷걸음쳐 앉았다. 지금은 입보다도 아래가 더 고팠다. 얼른 저 크고 단단한 물건이 자신의 안을 가득 채워 주기를, 기절할 정도로 정신없이 박아 주기를 기대하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그 기대감에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입구를 따로 안 풀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이와 처음으로 섹스하게 되다니. 시작도 전에 벌써 가 버릴 것 같았다.

영롱이 기대감에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협탁 서랍에서 젤과 콘돔을 찾던 태휘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서랍 안에는 이미 쓴 콘돔 포장지가 남아 있었다.

당연히 영롱이라면 콘돔을 서랍 안에 뒀을 거라고 예상했고, 이미 다른 사람과 썼을지도 모른다고 머리로는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 흔적을 코앞에서 마주하니 유쾌하진 않았다.

게다가 서랍 안을 뒤적여 보니 다양한 사이즈의 콘돔 상자가 몇 개씩 비어 있었다. 새끼, 썼으면 싹 다 치우던가! 태휘가 그 상자들을 들고 말없이 쏘아보자 영롱은 눈동자를 굴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또 한 바가지 잔소리가 쏟아질 것만 같아 즉시 선수를 쳤다.

“멤버들이랑은 안 잔다고 했지. 다른 놈하고도 안 잔다고는 안 했잖아?”

태휘는 더 말하기도 지친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는 제일 큰 사이즈의 콘돔만 남기고는 옆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죄다 던져 넣었다. 그 모습에 영롱은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으로 콘돔 상자를 가리켰다.

“딱 그거만 안 썼어. 그거에 맞는 놈은 없더라고.”

“차영롱, 잠깐만 좀 닥쳐 줄래? 나 지금 화 겨우 참고 있으니까.”

영롱은 바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지금 이 마당에 태휘의 심기를 건드려 봐야 좋을 거 없다고 판단했다. 화나서 혹시라도 흥분이 가라앉으면 어쩌나 그것만 걱정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니 다행히 그의 물건 역시 잔뜩 성나있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 걸 보니, 지금 안으려는 상대가 옛날에 알던 어리고 순진무구하기만 한 동생이 아니라는 걸 제대로 깨달은 것 같아서 영롱은 한결 마음이 편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꼬맹이는 작년에 사라졌어. 그럼에도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은 너뿐이니까 영광인 줄 알아, 원태휘.

한편 태휘는 화가 나 굳은 표정으로 콘돔을 자신의 것에 씌우고는 젤을 짜서 바르고 있었다. 손가락에까지 콘돔을 씌우는 걸 보고 영롱은 안 풀어도 된다고 말하려다가 오랫동안 바라본 저 손가락이 자신의 안으로 들어올 기회를 놓치긴 싫어 그저 입을 다물었다.

태휘는 영롱의 위로 몸을 겹쳐 오며 콘돔을 씌운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는 동시에 입으로는 영롱의 마른 가슴을 한입에 삼키듯 빨았다.

“흐응…….”

갑작스러운 흡입에 영롱은 콧소리를 내며 허리를 들썩였다. 태휘는 벌을 주듯 혀끝으로 젖꼭지를 돌리고 이로 깨물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소리가 나도록 크게 빨고는 다른 쪽 가슴으로 옮겨 갔다.

그사이 젤을 묻힌 손가락은 엉덩이 바로 앞에서 들어올 듯 말 듯 입구를 빙빙 맴돌았다. 영롱은 참지 못하고 허리를 들어 태휘의 손을 두 다리로 옭아맸다. 하지만 태휘가 손을 뒤로 빼자 영롱은 안타까운 신음을 내며 헐떡거렸다.

하, 씨발. 이 인간, 금욕적인 게 아니었잖아? 영롱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태휘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하도 샌님처럼 굴어서 숙맥인 줄만 알았더니, 만만치 않은 선수였네.

그때 혀로 영롱의 가슴을 희롱하던 태휘가 고개를 들었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태휘는 여전히 화난 듯한 얼굴이었는데 흥분한 기색 또한 숨기지 못해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미친 듯이 섹시해 영롱은 바로 가 버릴 것 같았다. 안돼……. 천하의 차영롱이 그럴 수야 없지.

“형, 빨리 손가락 넣어 줘.”

태휘가 대꾸하지 않자 영롱은 거의 울먹거렸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준다고 했잖아.”

그러자 태휘는 말없이 영롱을 올려다보다가 어깨를 움직였다. 태휘의 기다란 검지와 중지가 영롱의 엉덩이 사이를 순식간에 파고들더니 안쪽 깊숙이 들어와 마구 쑤시기 시작했다.

“하읏! 하앙…….”

손가락이 들어오기 전부터 꼿꼿이 선 영롱의 성기는 그 손짓에 맞춰 프리컴을 질질 흘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쾌감에 몸부림치던 영롱은 허공에 손을 뻗어 허우적대다가 자신의 얼굴에 닿는 태휘의 손길을 느끼곤 붙들었다.

태휘는 이번엔 뿌리치지 않고 영롱의 턱을 강하게 움켜쥐며 입술 사이로 엄지를 집어넣었다. 영롱은 자신의 얼굴을 한 손에 다 감쌀 듯한 손 크기에 압도되며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입 안을 파고드는 태휘의 검지를 소리가 나도록 빨고는 아래를 자극하는 다른 손을 더 깊이 받아들이려 허리를 움직였다.

건반을 칠 때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던 그 손가락. 마이크를 쥘 때도 유난히 돋보이던 그 손가락. 악보를 쓰고 넘기며, 곡을 설명할 때 춤추듯 움직이던 그 손가락이 지금 자신의 안을 휘젓고 있다는 사실에 영롱은 곧장 무아지경에 도달해 소리를 질렀다.

태휘는 아직 화가 덜 풀린 듯 계속해서 거칠게 파고들었다. 결과적으로 영롱은 그쪽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흐읏, 하아, 아! 아아아아!”

몸 안 깊숙한 곳을 자극하는 손길에 영롱은 목소리를 줄이려는 노력도 없이 정신없이 교성을 질렀다. 태휘가 선사하는 희열을 표현하는데 자제해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결국 한 차례 사정하고 만 영롱은 몸을 한껏 늘어뜨린 와중에도 태휘의 손가락을 계속 붙들고 빨아 댔다. 몸을 일으킨 태휘는 협탁 위에 있던 티슈를 뽑아 자신의 배에 흥건하게 묻은 정액을 닦아 내며 기가 찬 표정으로 영롱을 내려다보았다.

“진짜, 너…… 어쩌다 이렇게 밝히는 애가 된 거야?”

“……나도 몰라. 다 형 때문이야.”

벌써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영롱은 뾰로통하게 말했다.

“뭐, 다 나 때문이래.”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며. 그러니 다른 걸 찾으라고 했잖아.”

2년 전, 태휘가 영롱의 고백을 거절하며 한 말이었다.

“나 내가 원하는 걸 찾으려고 멤버들이랑 다 자 봤어. 그리고 다른 남자들이랑도. 근데 아무리 해 봐도, 누구도 만족스럽지 않았어. 뭐 할 때 기분이야 좋았지만. 끝까지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어.”

이 말을 태휘가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누군가로 만족했으면 그 사람이랑만 쭉 함께했겠지.

“그래서 알았어. 형을 갖지 않는 한 세상의 모든 남자를 다 가져도 충분하지 않다는걸.”

“영롱아…….”

“그러니까 빨리 나를 채워 줘.”

태휘는 영롱이 이 호텔 방에 들인 남자가 자신이 처음은 아닐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그것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눈앞에 들이 밀어진 경우는 마음의 동요 차이가 컸다.

순간 화부터 났으나 그렇다고 여기서 브레이크 걸 이유는 없었다. 이미 영롱이 어떤 녀석인지 알고 액셀을 밟기로 한 거였으니까. 남은 걱정은 하나뿐이었다. 만약 영롱이 자신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면? 그러면 그땐 새로운 남자를 찾아 떠나려나?

영롱은 태휘를 갖기 위해 그 모든 방황을 한 거라고 주장했지만, 자기를 갖는다고 그게 채워지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저 영롱 저만의 생각에 불과한데, 과연 내가 영롱을 끝까지 믿을 수 있을까? 녀석 본인조차도 자기의 몸과 마음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고 있는데.

하지만 그런 불안마저도 지금은 미뤄 두기로 했다. 혼자 절정에 이른 영롱의 모습 앞에서 걱정 따위는 사치였다. 그토록 지켜주려 애썼던 어린 영롱은 이제 없었다. 손길만으로 오르가즘을 느끼고 다음 단계를 기다리며 다리를 벌리는 음탕한 몸을 가진 성인 남자뿐이었다.

이미 한 차례 희열이 몸을 훑고 지나갔는데도 영롱은 자신의 손가락 마디를 깨물며 기대감에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태휘 또한 영롱의 새된 신음과 손가락을 뜨겁게 조여 오는 내부를 느꼈더니 조금 전의 분노는 휘발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다른 멤버들이 어쩌다가 선을 넘게 됐는지 알 것도 같았다. 빨리 채워 달라는 녀석의 말은 이제 손가락 대신 다른 걸 넣어 달라는 요구였기에 손에 씌운 콘돔을 빼서 던져 버리고는 바로 영롱의 위로 올라왔다.

영롱이 두 팔을 벌려 태휘를 꼭 끌어안자 매끈하면서도 뜨거운 맨살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거친 숨결을 귀에 불어 넣었다.

“하아…….”

탄식이 섞여 있는 그 호흡에 그만 눈을 감아 버린 영롱은 뒤이어 허벅지를 들어 올리는 손길을 느꼈다. 자신을 파고드는 태휘의 존재감을 느끼며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처음도 아닌데 첫 경험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우습기도 했다.

처음이 누구였더라? 언제나 태휘이길 바랐는데, 생각해 보니 첫 섹스 상대는 설민이었다. 그땐 욱하는 기분이 우선이었으니까. 태휘가 아닌 한 누구든 상관없다고 생각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반면, 설민은 자기가 영롱의 첫 상대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내비치곤 했다.

영롱이 다른 멤버들과 자고 다니는 것도 몰랐으면서, 자신이 영롱의 인생에서 꽤 중요한 사람이 됐다는 착각에도 빠지고. 그 착각을 깨뜨릴 이유가 딱히 없어서 내버려 두긴 했으나 해체 후에는 대놓고 애인처럼 굴기에 조금씩 불편하던 참이었다.

영롱은 자기한테 대놓고 잘해 주는 사람에게 약해서 설민 역시 좋아했지만 연애는 원치 않았다. 그들을 연애 대상이 아닌, 성욕 해소의 상대로만 여겼으니까. 차라리 원나잇 관계로만 만족하는 한강이나 오은이 마음은 더 편했다.

사실 첫 섹스도 연애도…… 그 모든 걸 하고 싶은 상대는 언제나 태휘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 하고만 아무것도 못 해 봤다는 게 제일 속상했다.

무작위 뽑기 게임을 할 때, 내가 원하는 장난감만 죽어라 안 나와서 나올 때까지 동전을 넣고 또 넣는 심정이었다. 다른 장난감들이 자기와 놀아 달라며 옆에 쌓여 있는데도 나의 온 관심은 오직 끝까지 나오지 않는 그 장난감에만 가 있는 그런 상태.

포기하고 뒤돌아설 때쯤에야 나를 불쌍하게 본 뽑기 가게 주인이 기계에서 내가 원한 그 장난감을 꺼내서 건네주는 듯한, 바로 오늘의 상황.

“흐읏……!”

자신의 것을 서서히 밀어 넣던 태휘가 영롱의 다리를 들어 자기 어깨에 올리며 단숨에 끝까지 삽입하자 영롱은 눈을 뜨며 공기를 다 내뱉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 정도로 자신을 가득 채운 감각에 숨도 쉬지 못했다.

울고 싶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던 조금 전 기분처럼, 눈가엔 눈물이 고였으나 안을 가득 채우는 충만감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태휘 역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 채 쇄골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영롱이 손을 뻗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매만지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삽입의 압박감이 장난이 아닌지, 찌푸린 미간 사이로 송골송골 맺힌 땀이 보였다. 태휘가 한껏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너…… 그렇게 헤프게 굴더니 왜 이렇게 조이는데?”

“내가 뭘…… 형이 너무 커서 그렇잖아.”

“하아, 씨발.”

그새 적응한 영롱은 들린 발을 더 당기며 태휘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태휘는 영롱의 다리에 입을 맞추더니 양손으로 붙들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영롱도 흔들리며 맞닿은 몸 사이에서 마찰음이 났다.

“흐읏, 형…….”

부딪히는 강도가 차츰 세지면서 마찰음은 퍽퍽 거리는 둔탁한 소리로 바뀌어 방 안에 울렸다. 태휘의 이마에 맺힌 땀과 찌푸린 표정, 욕을 내뱉는 섹시한 입술을 넋 놓고 감상하던 영롱도 점점 그럴 여유가 사라졌다.

고개를 옆으로 젖힌 채 양손에 잡히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는 어지러운 신음만 흘렸다. 자신의 안을 가득 채우는 태휘가 깊이 박혔다가 빠져나갔다가 다시 강하게 들어오길 반복하며 정신없는 쾌락을 선사하자 속절없이 허리만 흔들어 댔다.

간간이 깊이 박아 넣었다가도 원을 그리듯 허리를 돌리며 뭉근히 중심을 자극하기까지 하자 영롱은 자지러졌다.

“아, 아앙……!”

평소 섹스할 때는 자신이 주도하는 걸 즐겼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적극적으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저 간절히 원했던 순간이기에 주도고 뭐고 모든 걸 맡기고만 싶었다. 태휘가 자신을 마음대로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귓가에 바로 닿는 그의 뜨거운 숨결과 거칠게 쓸어내리는 손길. 심지어 떨어뜨리는 땀 한 방울까지. 자신을 원하는 갈급한 몸짓에 저린 듯 온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물론 태휘의 존재 자체가 영롱에겐 자극제나 마찬가지였기에, 아무 스킬 없이 무식하게 박기만 해도 껌뻑 죽었을 것이다. 스킬이 없지도 않다는 게 가장 당혹스러웠지만.

태휘가 다리를 두 팔로 고정하듯 감싼 채 강하게 쳐올리자 영롱은 잡고 있던 시트를 놓치며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본격적으로 태휘는 입 밖으로 소리 낼 틈도 주지 않고 자지러지는 지점을 연속적으로 찍어 눌렀다. 그 강렬한 쾌감에 목 안으로 비명을 삼켜야만 했다.

그걸 알아챈 태휘는 속도를 늦추고는 영롱의 입으로 손을 뻗어 입을 벌리게 했다.

“너 그러면 목 상해. 곧 녹음해야 하는 녀석이.”

이 와중에도 녹음 걱정이라니. 태휘다운 멘트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영롱은 혀를 내밀어 손가락을 핥고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태휘를 올려다보았다.

“다정한 건지 답답한 건지 진짜 헷갈려.”

태휘가 속도를 늦춘 덕분에 영롱은 평소 자기답게 굴어야겠다는 여유가 생겼다. 자신은 이렇게 몸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죽을 것 같은데, 태휘는 지금 어떨지 그 속을 모르니까. 영롱은 자신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원태휘를 보고 싶었다.

실행에 옮기고자 상체를 일으켜 앉아 태휘의 입술에 키스하며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자신의 안에서 더 부풀어 오르는 굵직한 성기를 느끼며 영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아래를 조이고 풀기를 반복했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시선을 맞추자 태휘는 순간 아찔함을 느낀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영롱의 골반을 붙들고는 퍽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쳐올렸다.

“으응, 응! 아아!!”

영롱의 반응이 한층 격양되자 태휘의 허릿짓은 짧으면서 강하게 이어졌다. 영롱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퍼져나가는 쾌감을 조금도 놓치기 싫어 손으로 태휘의 어깨를 움켜쥔 채 발끝을 오므렸다.

와중에 영롱은 본능적으로 태휘를 흥분시키기 위해 귓가에 입술을 묻고 최대한 야한 신음을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읏…….”

그때 태휘가 짧고도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세게 박아 올리더니 움직임을 멈추고 영롱에게서 빠져나왔다.

“아, 형…….”

탄식이 섞인 그 소리에 태휘는 상체를 숙이더니 얼굴에 뒤범벅된 눈물과 침을 입술로 훔쳐 주었다. 영롱은 훌쩍이며 태휘에게 애원했다.

“왜 멈춰? 계속해, 형.”

“걱정 마. 제발 그만해 달라고 할 때까지 할 거니까.”

영롱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만해 달라고 할 일은 없을걸.”

그 말에 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는 녀석. 아, 오늘은 내가 지기로 했지.

그사이 태휘는 콘돔을 새 걸로 갈아 끼웠고, 그 모습에 영롱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언제 쌌는데, 왜 티도 안 나? 하지만 태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바로 영롱에게 입을 맞춰 왔다.

“흐응.”

질척거리는 키스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각자 한 번씩 갔으니 이제 같이 가고 싶은데. 영롱은 태휘를 침대 위에 눕히고는 태휘의 위에 올라앉았다.

태휘의 얼굴과 목선을 따라 쪽쪽 입을 맞추며 내려오다가 혀로 가슴을 핥고 빳빳하게 선 유두를 빨아 대자 태휘의 앓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태휘가 영롱의 마른 엉덩이를 주무르며 그 사이로 성난 성기를 부딪쳐 왔다.

고개를 든 영롱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아래로 태휘의 것을 받아들였다. 녹진녹진 풀어진 입구는 수월하게 성기를 삼켰다. 그럼에도 영롱은 미간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태휘가 좋아할 만한 음담패설을 귓가에 흘렸다.

“하읏, 너무 깊어. 형, 너무 커.”

오늘의 경우 거짓말이나 오버는 아니었지만. 그러면서도 영롱은 다리를 최대한 벌려 더 깊이 태휘의 것을 채웠다. 그 와중에 조였다 놓아주면서 끊임없이 자극을 줬다. 태휘가 짐승 같은 낮은 신음을 내자 영롱은 흡족한 표정으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 너무 좋아!”

“아 씨, 차영롱, 진짜…….”

어째서인지 교태를 부릴수록 태휘는 흥분한 동시에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화를 말이 아닌 몸으로 내니 영롱의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태휘는 영롱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든 채 마구 쳐올렸다. 영롱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듯하다가도 중간중간 눈앞이 점멸하며 더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자신을 가득 채우고 뒤흔드는 태휘의 존재만 느껴졌고, 그에게 매달리고만 싶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바스러질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토록 애탔던 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랄까. 아니, 사실은 아직 해소되려면 멀었다. 오직 원태휘만이 채워 줄 수 있을 것만 같아 계속 조르고 또 졸라 댔다. 마치 오늘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몇 번째 했는지도 모를 사정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영롱은 침대에 엎드려 엉덩이를 위로 치켜든 상태로 태휘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형.”

태휘도 사양하지 않고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삽입을 했다. 이제는 익숙하게 태휘의 것을 빨아들이며 앞뒤로 들썩이자 태휘도 그 리듬에 맞춰 피스톤질을 했다. 오직 본능대로 움직이는 영롱은 육체를 제어하는 법도 잊은 것처럼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 댔다.

태휘는 이제 쳐올리는 대신 허리를 뭉근히 움직이며 영롱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쾌감을 느끼는 지점을 찾아 파고들었다. 한 손으로는 솟아오른 젖꼭지를 잡아 비틀고, 다른 손은 입 안에 넣고는 아래로는 느릿하게 은밀한 곳을 자극했다.

입 안을 휘젓는 손가락에 영롱은 무방비로 눈물과 침을 흘리며 침대 시트를 적셨다. 빠르게 처댈 때보다 내밀하게 느껴지는 희열에 전신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으응, 흐읏…….”

“차영롱, 너 이제 누구 거야?”

“흐응…….”

자신의 물음에 영롱이 신음만 흘리자 태휘는 다시 간헐적으로 쳐올리기 시작했다. 그 힘에 영롱은 몸을 크게 떨며 앞으로 쓰러졌다.

처음에 다정하던 태휘의 모습은 어느새 간데없었다. 아까부터 원인 모를 분노에 섹스의 열락이 더해지며 한껏 거칠어진 듯했다. 영롱은 짙은 쾌락에 취해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그걸… 뭐하러…… 말로…… 해?”

“똑바로, 대답해.”

그렇게 말하며 태휘는 더 강하게 쳐올렸다. 자신의 육체에 좋아 미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성난 듯한 태도에 어쩔 줄을 몰랐다.

영롱은 얼굴을 침대 시트에 묻은 채 웅얼거렸다. 그 와중에 엉덩이는 최대한 뒤로 빼 다음 삽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꺼.”

“형이 누구야? 네가 형이 한둘이야?”

태휘는 엉덩이골 사이에 성기를 대고 문지르며 애를 태웠다. 영롱은 스스로 태휘의 것에 엉덩이를 비비며 낑낑거리는 신음을 냈다.

“형, 빨리…….”

“대답해. 너 누구 거야?”

“원태휘.”

태휘는 그제야 영롱의 안에 깊이 박아 넣고는 바라던 대로 연달아 쳐올려 주었다.

“아! 아아아! 앙아아앙!”

두 팔로 겨우 몸을 일으켰던 영롱이 교성과 함께 다시 침대 위로 무너져 내리자, 태휘는 영롱을 안아 옆으로 눕힌 채 그 상태로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영롱은 숨을 헐떡이며 애써 고개를 돌리더니 태휘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흣, 끅, 형, 대체…….”

“왜?”

“그동안 누구랑 이렇게, 했어? 대체 나 아닌 누구랑…….”

“지금 그런 게 궁금해?”

“씨발, 존나 아깝게…… 흡.”

영롱이 진심 어린 욕을 내뱉자 태휘가 손으로 얼굴을 잡아 키스로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무릎을 접어 자신의 몸에 밀착시키며 더 깊이 쳐올리자 영롱이 태휘의 입에 신음을 토해 냈다.

영롱은 상체를 튼 채 팔을 뻗어 태휘의 목을 끌어당겨 혀와 입술을 정신없이 깨물고 빨았다. 찐득한 키스와 동시에 아래를 조였다가 풀자 이번엔 태휘의 신음이 입 안으로 전해졌다.

태휘가 거칠게 신음하는 통에 두 입이 떨어지자 영롱은 축축이 젖은 입술을 한 번 핥고는 태휘의 눈을 또렷이 바라보며 말했다.

“형이야말로 내가 듣고 싶은 말 아직 안 들려줬어.”

맹렬하고도 꿈같은 섹스 와중에 모처럼 정신이 선명한 순간이었다.

“말했잖아. 네 남자가 되고 싶다고.”

“그거 말고.”

자기가 오늘 먼저 찾아왔으면서, 이렇게 뻣뻣하게 굴기야? 왠지 열 받아. 영롱은 그 말을 듣기 위해 엉덩이를 천천히 움직이며 태휘의 것을 자극했다.

“아, 흐읏……, 태휘 형.”

그러다가 자기가 더 느껴 버려서 원래 목적을 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스스로 허리를 흔들던 영롱은 급한 마음에 손을 뻗어 태휘의 손을 잡아 자신의 성기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태휘는 순순히 만져 주지 않았다. 영롱은 숨을 헐떡이며 졸라 댔다.

“형, 빨리해 줘.”

“뭘?”

얄밉게 모른 척하기는. 하지만 자신조차도 헷갈렸다. 그 말을 해 주길 바라는 건지, 자기 껄 만져 주길 원하는 건지. 아니, 둘 다 해 주면 되잖아?

“형이 하고 싶은 거.”

태휘는 그 말에 영롱의 것을 만져 주는 대신 뒤에서 끌어안아 그대로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러고는 그 상태에서 허리를 움직이더니 마구 쳐올렸다. 자세 탓에 순간적으로 더 깊이 성기를 받아들인 영롱의 몸은 태휘에게 박힌 채 힘없이 흔들렸다.

“아! 아아!!”

태휘는 액이 흐르는 영롱의 성기 끝을 손으로 막고는 쉬지 않고 안을 자극했다. 어떤 요구는커녕 제대로 된 문장과 단어도 떠오르지 않는 지경에 이르자 영롱은 태휘의 이름만 불러 댔다. 그에 호응하듯 태휘는 영롱의 귓불과 목을 깨물 듯이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절정의 순간에 이르자, 태휘는 그제야 막고 있던 영롱의 것을 풀어 주었다. 태휘 역시 절정에 도달했는지 엉덩이 사이로 콘돔 속의 정액이 흘러넘쳤다. 한차례 폭풍 같은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 뒤, 영롱은 어깨에 닿는 태휘의 뜨거운 숨결을 느꼈다.

자신의 허리를 꽉 끌어안는 팔 힘에 영롱은 황홀경의 의식 너머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뿌옇게 흐려졌던 시야가 서서히 선명해지며 호텔 방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걸 보니 어느새 아침이 된 모양이었다.

온몸에 힘이 풀려 늘어진 채 눈꺼풀만 겨우 끔벅이던 영롱은 문득 아래에서 자기를 꼭 끌어안고 있는 태휘가 무겁겠다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내려오려고 몸을 움직이자 태휘는 영롱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을 더 세게 주었다.

“사랑해.”

태휘의 낮은 음성에 영롱은 움직임을 멈췄다. 영롱은 그제야 태휘가 아까 이 말을 들려주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맨정신으로 듣고 싶으니까, 술 깨고 말해 줘.’

취중이나 정사 중이나 제정신이 아닌 건 매한가지라고 생각한 걸까. 영롱은 긴 시간 쌓였던 설움이 씻긴 듯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래. 그리고 또 많이.”

어쩐지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 때문에 영롱은 저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너무 크고 오랫동안 쌓인 감정이라 이토록 시간이 걸린 건가. 함부로 꺼낼 수 없을 만큼.

땀이고 눈물이고 몸에 있는 수분은 죄다 쏟아 내 더 나올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영롱은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뒤를 돌아 태휘의 얼굴을 보고 싶으면서도, 주책맞은 자신의 눈물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북받친 감정에 목이 메 헛기침 몇 번으로 겨우 가다듬고는 영롱도 허공에 말했다.

“나도.”

그러고는 몸을 뒤집어 태휘를 내려다보았다. 그토록 좋아하고도 또 미워했던 얼굴을 양손으로 어루만지고 마구 꼬집어보았다.

“이거 꿈 아니지?”

태휘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영롱이 몸이 들썩였다. 물고 빨고 박고, 실컷 할 거 다 해 놓고 한마디 고백에 꿈 아니냐고 묻기는. 그 와중에도 영롱은 태휘의 얼굴을 계속 매만지며 눈으로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네 얼굴을 꼬집지 왜 내 얼굴을 꼬집어?”

“나도 사랑해.”

영롱이 내려다보며 말하자 태휘는 일순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웃음을 멈췄다. 촉촉해진 영롱의 두 눈을 응시하다가 팔을 들어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당겼다.

그 손길에 영롱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여 왔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 아래에서 두 사람은 처음인 양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

잠결에 무심코 몸을 뒤척이던 태휘는 자신의 팔 안쪽으로 파고들어 오는 감촉에 눈을 떴다. 시야 가득히 까만 머리카락이 보였다. 볼 때마다 적응 안 되네. 검게 염색한 녀석의 머리. 침대까지 늘어진 오후 햇살 아래에서 보니 블루블랙으로 보이는 색깔이었다.

조심히 뒤로 물러나 영롱의 머리를 자신의 팔에 기대게 하자 드디어 얼굴이 보였다. 밤새 셀 수도 없이 많이 빨아 댄 입술은 붉게 부어올라 쌕쌕 얕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강이 형과의 정사 현장을 목격하고 이 입술을 보며 분노했던 게 불과 작년 일인데, 이번엔 자신이 이렇게 만들었다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눈부신 햇살 아래, 호텔 침대 위에 나체로 누워 있는 자신과 영롱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니 멤버들에게 실망하고 분노해서 해체해 놓고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러면서도 처음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고 욕망대로 행동했기에 일말의 해방감을 느꼈다. 꽤나 복잡한 심정이었지만, 후회하고 싶진 않았다.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구 충돌하는 동안에도 태휘의 두 눈은 깜빡이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영롱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뭐 이렇게 예뻐서 내 속을 다 썩이는지.

오늘 새벽만 해도 그랬다. 잔뜩 색기가 올라 졸라 대는 그 모습이 미칠 듯이 섹시하긴 했지만, 노골적으로 유혹해 올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그동안 다른 남자들한테 했을 법한 능숙한 몸짓과 표정이었기에, 과연 영롱에게 그들과 나는 어떤 차이가 있나 싶어서.

이런 질투 마저도 각오하고 영롱에게 온 거였지만 그들과 똑같은 취급은 싫었다. 멀리 돌아온 만큼, 영롱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오직 나만을 향해 웃어 주고, 나만을 위해 울었으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마음을 표현하고 나면 이렇게 집착하게 될까 봐 그동안 외면하고 거부해 온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과연 영롱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을까? 그때 동그랗게 뜬 영롱의 눈과 마주쳤다.

“뭐야? 언제 깼어.”

“지금 막. 나 자는 거 보고 있었어? 너무 예뻐서?”

사실도 저렇게 본인 입으로 아무렇지 않게 말해 버리면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마는데. 태휘가 아무 대답이 없자 영롱은 다시 물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너 너무 예뻐서 보고 있었다니까.”

태휘가 똑같이 뻔뻔하게 응수하자 영롱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잖아. 나 깬 것도 늦게 알아차리고.”

녀석은 어떤 낌새를 알아챈 이상 절대 도망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궁금한 건 곧바로 밝혀내고야 마는 성격이니까. 그에 비해 자신은 말을 최대한 아껴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편이라 완전 정반대인데, 그래서 서로 끌리게 된 걸까.

“그냥 이런저런 생각.”

하지만 이제 녀석의 곁에 있기로 한 이상 그 간격을 좁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멀어지고 말 테니까.

“형이 무슨 걱정하는지 대충은 알겠어.”

다행히 영롱도 태휘가 어느 부분에서 고민하는지 눈치챘기에 굳이 입 밖으로 내는 수고는 덜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 신경 쓰는 거잖아. 특히 멤버들.”

맞다, 멤버들. 그 문제도 있었지. 지금 상황에서 밀려드는 수많은 고민 중 일부이긴 했다.

영롱과의 관계 진전에 있어서 태휘가 더 신경 쓰이는 근원적 문제는 따로 있었지만. 아니,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태휘도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모든 상황이 딱 세팅될 때까지 기다려? 우리가 좋으면 되는 거지.”

영롱은 태휘가 질투 때문에 팀을 해체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걸 알아챘다. 태휘가 말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동안 STORY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열정을 쏟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말로는 영롱 탓을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았을 리 없었다.

멤버들에겐 원망과 동시에 미안함이 공존했다. 그런 마음으로 영롱을 만나는 건 태휘에겐 꽤 힘든 결정인 셈이었다. 모든 게 단순명료한 영롱의 관점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들은 우리가 말하지 않는 이상 모르잖아?

“몰래 만나면 되잖아.”

자기 입으로 말하고 나니 영롱은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설민한테도, 한강한테도, 오은에게도 저런 식으로 말했었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태휘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기에, 태휘는 이번엔 긍정의 의미로 침묵했다. 그 의중을 이해한 영롱은 태휘를 팔 아래에 있던 손을 더 깊이 뻗어 등까지 끌어안았다.

“아, 비밀 연애 벌써부터 설레네.”

영롱은 고개를 들어 태휘의 턱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갖가지 고민에 마음이 시끄러운 태휘와는 다르게,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잔뜩 들뜬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 영화 보러 가자. 나 요새 보고 싶은 영화 엄청 많아. 오랜만에 스티커 사진도 찍고 싶고. 아, 놀이공원도 가고 싶다. 우리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안 갔잖아. 이번엔 롤러코스터 많이 안 탈게.”

영롱은 태휘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는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겨울엔 스키장도 가고. 사람들 눈 신경 쓰이면 해외여행 가면 좋겠다. 길거리 다니면서 데이트도 하고 가서 쇼핑도 하고. 형은 여행 어디로 가고 싶어? 나 솔로 앨범 내고 활동하면 바빠지니까 그 전에 실컷 하자.”

영롱이 맑은 목소리로 재잘대자 어쩐지 노랫소리처럼 들려서 태휘는 다시 눈꺼풀이 서서히 무거워졌다. 그러다가 뒤늦게 영롱이 말한 몇몇 단어가 뇌리에 박히며 태휘는 어제오늘 내내 뭔가 찜찜했던 기분의 실체를 깨달았다.

아직 영롱에게 말하지 않은 계획이 있었다. 망할 한상민 때문에 조급해져서. 게다가 첫 섹스의 흥분 탓에 중요한 현실을 잊고 말았다. 순간 눈이 번쩍 뜨인 태휘는 영롱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품에서 꺼내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나 유학 가.”

태휘의 말을 단번에 이해 못한 듯 영롱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태휘조차도 깜빡하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 내고 진심으로 놀란 얼굴이었기에 이 상황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창 들뜬 표정이었던 영롱은 순식간에 울상으로 바뀌며 빽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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