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ack 8. 불통 (04:21) (21/39)

Track 8. 불통 (04:21)

“지금 감정 좋아요. Verse 2도 바로 갈게요.”

태휘는 컨트롤 룸에서 보컬 디렉팅 중이었다. 태휘가 심사위원으로 출연하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 ‘K팝 레전드가 돼라’는 얼마 전 마지막 심사를 끝내고, 최종 참가자 5팀이 선택한 프로듀서와 함께 신곡 작업을 하는 스페셜 방송만 남아 있었다.

오늘은 태휘를 지목한 참가자가 SS엔터테인먼트 스튜디오에서 신곡 녹음을 하는 날이라 스페셜 방송에 나갈 VCR 영상 촬영 또한 진행됐다.

마지막 심사 이후 오랜만의 촬영이라 담당 스탭들과도 반갑게 인사했다. 그사이 얼굴 좋아졌다는 말을 태휘는 대충 인사치레로 여겼다.

갑작스레 몰아치는 재결합 압박과 멤버들과의 설전, 거기다가 영롱의 등장까지 정신없는 한 주를 보냈는데, 늙었으면 늙었지 좋아졌을 리가 있나. 태휘는 촬영 말미에 짧게 녹음 후기 인터뷰만 따겠다는 제작진의 설명을 전달받고 바로 녹음을 시작했다.

그동안 ‘K팝 레전드가 돼라’에서 태휘는 참가자들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촌철살인의 심사평을 날리기로 유명했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태휘를 선택한 참가자는 재미교포로 한국어가 좀 서툰 편이었는데 첫 정식 음원 녹음에 긴장한 그가 떨지 않도록 최대한 편하게 대했다. 한국어로 대화가 어려울 땐 영어로 말을 걸어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스튜디오 녹화 때와는 사뭇 다른 태휘의 모습을 발견한 작가들은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인터뷰 질문에 추가했다. 녹음을 마친 뒤, 예고한 대로 담당 프로듀서로서 태휘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경연 끝나니 이제 이 질문을 참가자가 아닌 심사위원에게 드리게 되네요. 대니가 왜 자신의 담당 프로듀서로 원태휘 씨를 선택한 거 같아요?”

“저도 그게 의문이에요. 경연 당시 좋은 얘기도 별로 안 해 줬는데.”

“아마 태휘 씨의 B 음대 유학 경험 때문이 아닐까요? 대니도 보스턴 출신이라고 하더라고요. 낯선 한국 땅에서 그래도 연고가 있는 사람을 만나니 의지가 되는 것 같던데.”

그런가? 태휘는 크게 공감은 안 됐지만, 방송에서 좋아할 만한 연결고리이니 적당히 맞장구치고 넘어갔다.

“심사할 때처럼 무서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녹음할 때는 자상하네요?”

“그땐 서바이벌이었으니까 그런 거고, 이젠 다 끝났잖아요. 녹음은 가수가 제일 편안한 상태에서 해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같이 활동한 멤버 리버도 데뷔 당시에 우리말이 좀 서툴렀잖아요. 어릴 때부터 해외파 멤버 디렉팅을 봐줬으니 익숙하겠네요.”

다소 생뚱맞은 STORY 시절 언급에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요새 태휘의 방송 출연 자체가 별로 없다 보니, 인터뷰 기회만 잡으면 어떻게든 연결해 보려는 시도 같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재결합 가능성 떡밥을 던져 보는 거겠지.

“리버 형뿐 아니라 해외파 출신 가수와 연습생은 지금도 저희 회사에 많아요. 아무래도 그런 친구들에게는 더 신경 쓰게 되죠. 대니가 잘 적응한 덕분에 오늘 녹음은 수월하게 끝났어요.”

그렇게 태휘는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녹음도 끝났겠다, 더 귀찮은 질문하기 전에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에 녹음실을 나서려는데 프로그램 담당 PD가 태휘를 붙잡았다.

“태휘 씨. 회의실 가 보세요.”

“회의가 또 남았어요?”

“우리 회의는 아니고……. 가 보시면 알 거예요.”

녹음 끝나자마자 담배부터 피울 생각이었던 태휘는 어쩔 수 없이 계단으로 향했다. 막상 회의실 앞에 다다르자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 차영롱의 갑작스러운 등장 이후로, 회의 울렁증 생긴 듯하다. 설마 그것보다 더 놀랄 일은 없겠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영롱만큼은 아니어도 의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 CP님?”

황혜 CP는 GBS 미디어콘텐츠 제작본부의 부장으로, STORY 멤버들과는 데뷔 때부터 알아 온 사이였다. 그 유명한 세기말 예능 ‘스타를 속여라, 깜짝 카메라!’를 그가 만들었고, 오늘 태휘가 촬영한 ‘K팝 레전드가 돼라’ 역시 그가 총괄 프로듀서이다.

“감독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웬일이기는! 오랜만에 회장님도 보고, 너 수고했다고 인사도 할 겸 왔지. 너 오늘 마지막 촬영이었잖아. 대니 녹음하는 것도 보고.”

이것저것 말을 덧붙이는 걸 보니 진짜 의도는 따로 있다는 게 오히려 티가 났다.

“아까 녹음실에도 오셨었어요?”

“뒤에서 잠깐 봤지. 방해할까 봐 금방 나왔어.”

프로듀서 전향 후 방송 출연을 자제해 온 태휘가 ‘K팝 레전드가 돼라’의 심사위원 섭외 요청을 수락한 데에는 황혜 CP와의 오랜 인연이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재결합 프로젝트 제안도 태휘에게 직접적으로 해 온 것이다.

그렇다고 본부장님이 몸소 회사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급하긴 어지간히 급하셨나 보네.

“그것 때문에 오신 거 아니잖아요. 여기까지 오셔서 뭐하러 말을 돌리세요?”

태휘가 대놓고 묻자 황 CP도 더는 딴청 피우지 않고 본의를 드러냈다.

“그럼, 너 만나려면 다른 방도가 있냐?”

하긴 그러고 보니 설민도, 영롱도,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회사로 찾아오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지.

“그 이후 얘기가 뭐 더 진전이 있어야지! 너랑 회장님 만나서 담판 지으러 왔다!”

말로는 저래도 황 CP와 신 대표는 서로 언니 동생 하는 사이였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각자 방송계와 연예 매니지먼트계에서 묵직한 존재감으로 버텨 온 두 사람이기에,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둘 다 STORY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부터.

지금까지 방송가 여기저기서 재결합 방송을 제안해 왔어도 칼같이 거절한 까닭은 혹여라도 만약에, 아주 만약에 재결합 프로젝트를 한다면 황혜 CP 측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세대 아이돌의 재결합 기획은 이미 타 방송에서 여러 차례 있었으나, 제작진들이 해당 가수의 관련 서사나 팬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겉핥기식 추억팔이로 접근했다가 오히려 욕을 먹었던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단순히 흥밋거리나 한때의 복고 유행 분위기에 휩쓸리듯 진행한다면 안 하느니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걸 태휘는 알고 있었다. 물론 그때까진 영롱의 소식을 몰랐으니, 정말로 만에 하나의 가능성만 놓고 생각한 거였지만.

태휘가 한숨을 내쉬며 회의 테이블 의자에 앉자 마침 신 대표도 회의실로 들어왔다. 신 대표는 황 CP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태휘의 눈치를 흘깃 보았다. 태휘는 작게 고갯짓하고 바로 시선을 피했다.

지난번 회의 이후로 신 대표와 멤버들은 영롱의 귀환을 일단 외부에 알리지 말자고 약속했다. 가뜩이나 온갖 매스컴들이 자신들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는 와중에, 영롱의 존재까지 알아차리면 어떻게든 파고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팬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영롱에 관해서나 재결합 관련 모든 사항은 찌라시나 언론 발 단독 기사보다도 회사의 공식 발표를 통해야 한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신 대표와 태휘를 봐온 황 CP의 촉 또한 기민했다. 뭔가 낌새를 눈치챈 황 CP는 자리에 앉으며 두 사람을 계속 노려보았다.

“그사이에 뭐 변동된 사항 있지?”

“아니? 뭐? 우리 뭐가 변동됐지?”

신 대표는 모르는 척했지만 누가 봐도 수상한 과민반응이었다. 평소엔 철저한 대표님이 왜 저럴까? 태휘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오늘 작정을 하고 왔는지, 황 CP는 책상까지 쾅쾅 두드리며 언성을 높였다. 원래 성질이 좀 불같은 편이긴 하지만.

“그럼 빨리 한다 안 한다 결론을 내 주세요! 그래야 우리 쪽에서도 준비할 거 아닙니까?”

흥분한 황 CP에 비해 태휘는 차분한 태도로 응수했다.

“죄송하지만 아직 저희끼리도 얘기가 안 됐어요.”

“그래도 어느 정도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돼야지. 우리도 편성이고 기획이라는 단계가 있는데!”

“저번에 감독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STORY는 이 프로젝트의 주체여야 하지 대상이 되면 안 된다’라고요.”

“태휘야!”

“시간을 들여 충분히 상의해야 할 문제예요. 저희 입장에선 급한 것도 없고, 무턱대고 방송국 일정에 따를 수는 없어요.”

“방송계에는 흐름이라는 게 있잖냐? 이 바닥 오래 몸담은 녀석이 그걸 모를 리도 없고.”

“그럴까요? 제가 보기엔 90년대에 대한 향수는 마르지 않는 샘인데요. 어느 시대가 되어도 끊임없이 그때를 그리워하니까요. 꼭 지금이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태휘는 영롱의 귀환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이전의 의견을 고수했다. —우리에게는 지금 영롱도 없으니, 완전체가 아닌 4인의 재결합은 의미가 없다. 팬들도 이해할 것이고, 유행이나 대세에 휘둘리지 않겠다.— 이게 태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그러면, 너 무슨 40살, 60살 넘어서 하게? 너희도 이 바닥에서 계속 버티려면 대중들에게 인식 전환이 필요한 타이밍이야. 아이돌로서의 아이덴티티는 잊히고 오직 방송인, 뮤지션 정도로만 소비되고 있잖아.”

오늘 친히 행차할 정도로 날을 잡은 만큼, 황 CP는 열변을 토했다.

“시청자나 소비자 연령 타기팅(Targeting) 면에서도 지금이 딱 좋아. 지금 팬들도 너희도 딱 30대잖아. 사회생활하며 어느 정도 경제력도 생기고, 취미나 소비 활동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지. 거기다 젊은 세대에게는 새롭게 각인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그때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신솔 대표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신 대표는 태휘보다 황 CP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 편인 건지? 태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신 대표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대표는 더 적극적으로 맞장구치며 황 CP의 의견에 동의했다.

“황 감독 말이 맞긴 해. 그리고 막말로 너희 다섯 명 앞으로 몇 년 사이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르는데. 지금 다들 멀쩡할 때 해야…….”

그 말을 들은 태휘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 찰나 맞은편에 있던 황 CP와 시선이 마주쳤다.

“다섯 명?”

태휘는 바로 표정 관리를 했으나 신 대표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황 CP는 태휘와 신 대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살폈다.

“영롱이 돌아왔구나.”

“무슨 소리야? 아니야아!”

신 대표가 강하게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황 CP는 확신한다는 듯 희색만면했다.

“아니기는, 맞구만! 아니라면 영롱이까지 멀쩡하다고 어쩜 그리 자신해?”

황 CP는 책상을 탕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들어올 때보다 한층 가뿐한 발걸음으로 회의실 문을 열었다.

방송국 측에서는 재결합 프로젝트를 가로막고 있던 가장 큰 장애물 하나가 해결된 셈이었으니 신날 수밖에. STORY와 SS엔터 입장에서는 어려운 결정을 유예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방패가 사라진 격이었다.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연락은 닿는다는 거겠지.”

신 대표는 자신의 말실수를 인정하는 듯, 입을 꽉 틀어막는 동작까지 취했다. 이런 상황에서 더 부인하는 것도 무리였다. 아, 망했네. 태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쏘아보았고 신 대표는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어깨와 함께 양손을 으쓱 들어 올렸다.

“그럼 우리는 우리대로 준비하고 있을게. 너네도 충분히 상의해 봐. 다.섯.명.이서.”

황 CP는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갔고 어쩔 수 없이 태휘가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선 황 CP 옆에 따라붙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다른 데 흘리지만 마세요.”

“걱정하지 마. 그래도 내가 너희랑 쌓은 정이 얼만데, 특종 거리라고 냉큼 팔아먹겠냐?”

태휘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알아차린 황 CP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단, 우리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그땐 나도 어쩔지 모르니까.”

미치겠네. 아무리 STORY와 돈독한 사이라고 해도 그는 타고난 방송쟁이였다. 황 CP가 영롱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다른 매체처럼 바로 보도 때리지는 않더라도, 이런 식으로 무기 삼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태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하아, 진짜……. 신 대표님 때문에 미치겠네.”

“태휘 너 설마, 대표님의 입방정만으로 내가 알아차렸다고 생각한 거야?”

의외의 말에 태휘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황 CP를 바라보았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열리자 황 CP가 올라타고는 태휘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 거울 좀 봐봐. 오늘 너 보고 뭔가 촉이 오더라고. 어째 지난번 봤을 때보다 한결 유해졌다 싶었거든. 영롱이 소식 몰랐을 적 네 얼굴이랑 아주 딴판이야.”

그 말에 태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네 관심사는 팀 재결합보다도 영롱이의 생사가 우선이었으니까. 계속 걱정하고 있었지, 너?”

태휘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무심하게 닫혔다. 엘리베이터 문 반사면에는 멍한 얼굴이 비쳤다. 황 CP가 내려가고 나서도 태휘는 한참이나 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

“황 감독 뭐래?”

다시 회의실로 돌아온 태휘를 향해 신솔 대표가 물었다. 태휘는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괜히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외부에 막 흘릴 것 같지 않아요. 우리랑 척질 각오하지 않는 이상.”

솔직히 마음은 꽤 떨떠름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황혜가 먼저 알아서 다행이야. 그치?”

그렇게 말하는 신 대표의 얼굴을 보니, 조금 전 황 CP 앞에서 당혹스러워할 때와는 달리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언뜻 밝아 보이기까지 해서 태휘는 어쩐지 미심쩍었다. 저도 모르게 굳은 표정으로 쏘아보자 대표가 되물었다.

“왜? 뭐?”

한결 산뜻해진 목소리에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다. 태휘는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멈추고 정색했다.

“설마. 일부러 그런 거예요?”

아까 황 CP 앞에서의 과장된 리액션은 어딘지 모르게 수상했다. 평소 대화할 때도 액션이 큰 편이긴 하지만, 중요한 회의 자리에서는 늘 쓸모없는 동작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진중하게 임하곤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달랐다.

태휘가 날카롭게 묻자 신 대표는 숨길 필요 없다는 듯 의연하게 말했다.

“그래.”

태휘는 두통에 이어 일순 속까지 쓰려왔다. 진짜, 이놈의 집구석. 다들 동상이몽이구만.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끝까지 결론 안 날 거 같아서.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황혜가 아는 게 그나마 안전하잖아.”

그러고 보니 신 대표는 처음부터 이 재결합 프로젝트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자신과 완벽하게 같은 편이 아니라는 걸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원래 이런 일은 백날 고민한다고 해도 결정하기 힘들어.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고! 기적처럼 영롱이가 돌아오기까지 한 이 마당에 넌 또 미루고 있잖아. 그래서 내가 물꼬를 터준 거지.”

“그래도 대표님. 이건 저희 팀 일이잖아요. 저희 의견을 먼저 중요시해 주셔야죠.”

“물론이지. 그런데, 그게 너희 팀 의견 맞아? 너만의 단독 의견 아니고? 내가 보니까 너 말고는 다 긍정적인 분위기던데?”

“그건…….”

“해체 때도 리더인 네 의견을 제일 많이 들어준 거 알지? 그때 내가 그랬던 건 네가 곧 STORY의 대표라고 생각해서,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이거든. 하지만 지금은 팀 활동한 지도 10년이 넘었고, 네 대표성도 약해진 지 오래야.”

지금껏 태휘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해 주던 신 대표였는데, 오늘은 웬일로 아픈 부분만을 골라 날카롭게 찔러 대고 있었다.

“애들 워낙 착해 빠져서 네 말에 반대도 못 하잖아. 너의 의견이 곧 팀의 의견이라고 여기기 어려워졌어. 진정으로 리더로서 제 역할 하고 싶다면, 네 생각만 고집하지 말고 멤버들의 마음을 헤아려 봐.”

착해 빠지긴요. 대표님, 그 새끼들은……. 그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힘겹게 삼켰다. 하지만 그 부분만 빼면 다 참말이긴 했다.

생각도 못 한 누군가의 귀환 덕분에 재결합의 가장 큰 산을 넘은 셈이었는데도, 오직 태휘만이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에게 STORY는 가수 인생의 시작점이었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한때였으나, 동시에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다. 바로 영롱 때문에…….

영롱을 중심으로 한 애증의 부산물. 치정으로 얽히고 얽혀 지극히 사적인 감정으로 점철된 기억의 덩어리.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순수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기만 했던 시간이 아닌데도 그런 척 굴며 추억이라는 미명으로 되살리는 건, 가식이고 기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너무도 컸다.

아무리 자신들이 속한 세계가 안으로는 썩었어도 겉보기만 화려하게 꾸미면 전부인 엔터테인먼트 업계라지만.

“그리고 영롱이 생각도 해 봐. 걔가 오죽했으면 돌아왔겠어? 얼마나 다시 가수가 하고 싶었으면.”

“누가 하지 말라고 말렸어요? 자기가 먼저 하기 싫다고 떠나 놓고.”

순간 태휘는 멈칫하더니 신 대표가 건넨 말들을 머릿속으로 곰곰이 되뇌어 보았다.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지난번 영롱이 썼던 표현과 겹쳐졌다.

‘대표님은 재결합 매우 찬성하시네. 다른 멤버들도 다 긍정적인 분위기라며.’

‘다들 그것도 모르고 착해 빠져서, 그저 형의 말만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고.’

중요한 대화는 무의식적으로 흔적을 남기곤 한다. 다른 표현도 있는데 굳이 똑같은 단어를 쓴다든가.

‘내가 왔으니 이제 형 말만 믿지 못할걸?’

“대표님 걔랑 얘기했죠?”

“뭘?”

태휘는 직감적으로 확신이 들었다. 영롱이 나타나기 전까진 전적으로 자신의 말만 들어주던 신 대표였는데, 아무래도 녀석의 등장 이후 판도가 바뀐 듯했다.

“자기 돌아온 거 황 CP한테 흘리라고 부추겼죠? 신상에 관련된 문제니까, 걔 허락 없이 대표님이 실수로 먼저 흘릴 리 없어요. 그 애를 그렇게나 생각하시는 분이.”

신 대표가 뭐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뻥긋대는 사이 태휘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회의실을 나섰다. 성이 난 걸음은 저도 모르게 빨라져 복도에 가득히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어쩐지 그날 순순히 돌아서더라. 그래 놓고선 뒤에서 나 몰래 대표님이랑 수작질해? 녀석은 분명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멋대로 떠났던 녀석이 10년 만에 갑자기 돌아올 리 없다. 그리고 이렇게 물밑 작업하듯 은밀히 재결합을 설계할 리도 없고. 사랑에 눈이 멀어 가수로서의 본분도 다 내팽개쳤던 녀석이.

태휘는 복도 한 가운데에 멈춰선 채 지난번 녀석이 알려준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통화 연결음만 무심히 울릴 뿐 받지 않았다. 그때 머릿속에 선명한 호텔 이름과 호수가 떠올랐다.

‘골든호텔. 1304호.’

잠시 망설이던 태휘는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

- 200◇년 9월 -

태휘는 영롱과의 첫 관계 후 바로 호텔 방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유학 얘기를 듣자마자 영롱은 호텔이 떠나가라 꺼이꺼이 통곡했다. 장난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원태휘는 그런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태휘가 당장 가는 건 아니라고 영롱을 겨우 진정시켜 놓고, 내년 9월에 학기가 시작되니 그 3개월 전에는 어학연수를 떠나야 한다며 친절하고도 구체적인 설명을 더 하는 바람에 영롱의 눈물샘은 다시 폭발했다.

영롱이 베개까지 집어 들고 휘둘러 대자 태휘는 가운을 걸치고 침대 밖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쫓아오던 영롱이 다리에 힘이 없는지, 침대 앞에서 풀썩 넘어지는 걸 보고 방구석까지 도망갔다가 도로 돌아왔지만.

영롱을 안아 들어 침대 위로 올려놓으려 하자 녀석은 다시 베개를 휘둘렀다.

“이게 뭐야! 결혼 도장 찍고 군대 가는 거랑 뭐가 달라? 어떻게 시작한 연애인데, 시작하자마자 생이별이냐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날아오는 베개를 막으면서 태휘 자신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계속 걸리던 찝찝함이 이거였다니. 영롱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연애든 뭐든 관계를 새로 시작하기로 결심하면서도 앞으로 닥칠 유학 문제는 전혀 생각을 못 했다.

이게 왜 큰 문제냐면, 지금이야 SNS와 메신저, 이메일, 영상 통화 등 연락 방법이 다양해 국내외 간 소통의 어려움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인터넷은커녕 일반 가정에 컴퓨터 보급률도 낮았고 국제 전화 요금도 비싸서 연락이 쉽지 않았다.

유학 가면 최소 2년 동안은 말 그대로 생이별인 셈이었다. 어떻게 보면 STORY 해체 자체도 즉흥적이었고, 유학 역시 갑작스러운 해체로 생긴 공백 때문에 결정한 일이었다.

해체 땐 물론이고 유학을 계획하는 과정에서도 영롱과 잘해 볼 생각은 일절 없었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태휘의 삶에 다시 경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올지는 꿈에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삶에서 녀석을 떼어놓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건가? 지난밤 미쳐서 앞뒤 생각 안 하고 액셀을 마구 밟아 댄 게 맞구나, 원태휘. 맞아도 싸다. 스스로 자책하는 와중에 영롱은 계속 베개로 휘두르며 응징했다.

“그냥 나 따먹고 튈 생각이었던 거지? 이 나쁜 자식아!”

“뭔 헛소리야? 나도 생각 못 했다고! 아직 한참 남아서…….”

“한참 남긴 뭐가! 내년 6월이면 금방이지! 게다가 나 앨범 작업하고 활동하면 바빠질 텐데! 시간 얼마 없는 거 맞잖아! 으앙~!”

아니, 대체 얼마나 요란뻑적지근한 연애를 구상했길래? 영롱의 울음에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힘 빠진 손으로 휘두르는 베개는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녀석이 계속 울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태휘는 영롱의 양 손목을 단번에 잡아 움켜쥐고는 베개를 바닥으로 굴려 보냈다.

“그만 울어. 너 목 상한다니까?”

어째서인지 그 말은 영롱을 더 크게 울리고 말았다.

“또! 또 형은 내 목 걱정뿐이지? 내 마음은 좆도 모르고!”

녀석이 빽 소리를 지르자 그저 당황스러웠다. 영롱의 상태가 염려돼서 건넨 말인데,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공감 능력 최악인 인간이 무슨 천재 뮤지션이야? 자기가 울려 놓고 왜 그만 울래?”

그렇게 말하면서도 끅끅거리며 울음을 그치려 애썼다. 태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영롱을 끌어안아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그만 울어.”

영롱은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을 태휘의 어깨에 비비며 웅얼거렸다.

“진짜 이해 안 돼. 그렇게 계획하고 대비하는 거 좋아하는 형이 이렇게 대책 없이 저질러 버렸다는 게!”

그 말에 태휘도 잠자코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그랬잖아. 어떻게 된 게 너에 관한 건 전부 다 예측불허라고. 내가 지켜 온 모든 신념과 계획은 네 앞에선 다 무력해진다고.

아무리 예상하고 굳은 의지를 갖고 움직여 봤자 차영롱의 영향권에 들어서면 속수무책으로 휘둘려 버리는데, 이걸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꼭 끌어안아 준 게 효과가 있었는지 울음이 점차 잦아들더니 잠잠해졌다.

“안 가면 안 돼?”

……차라리 그냥 울어라. 태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영롱을 품에서 꺼내 내려다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은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반짝 빛났지만 그 눈빛에 넘어갈 순 없었다.

“안 되지. 지금처럼 좋은 시기가 없잖아.”

“좋긴 뭐가 좋아?”

“모처럼 생긴 공백 기간이니까. 유학 안 가면 군대 가려고 했고.”

“차라리 군대가 낫지. 그래도 같은 나라에 있는 건데.”

미국? B 음대? 영롱이 묻자 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얘기 나눈 적 있기에 영롱도 태휘가 언젠간 유학을 갈 거라는 걸 알고 있긴 했다. 하필 타이밍이 지금일 줄은 몰랐을 뿐이지.

“그러고 보니 나보고는 한상민이랑 작업하지 말라더니. 자기는 한상민 나온 학교로 유학 가네.”

“그거랑 이거랑은 얘기가 다르지.”

“그나저나 진짜 한상민이랑 무슨 일 있었어? 끝까지 얘기 안 해 줄 거야?”

한상민 얘기에 태휘는 또 입을 다물었다. 유학 갈 학교가 그 개새끼가 다닌 학교라는 점을 굳이 상기시키니 기분은 썩 좋지는 않았으나, 계획을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비록 영롱은 그걸 노리고 꺼낸 말이었겠지만.

한상민만 그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국내외 수많은 유명 음악가들이 그 학교 출신인걸. 태휘가 침묵을 지키자 잠시 후 영롱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일정 바꾸지,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태휘가 궁금하단 듯 얼굴을 응시하자 영롱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딱 잘라 말했다.

“나 솔로 앨범 안 낼래.”

태휘는 놀라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아니, 결론이 왜 그렇게 나? 얘 사람 미치게 하네, 정말! 침대 위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 가운을 입히고는 소파로 끌고 와 앉혔다.

“회사에선 언제 발매하는 거로 준비하고 있는데?”

“내년 4월쯤. 그럼 나 한창 활동할 때 형 미국 보내야 해.”

영롱은 잔뜩 심통 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득해야 해? 아득함과 동시에 두통을 느낀 태휘는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영롱아, 제발 공과 사 좀 구분할래? 나 때문에 일정 뒤엎을 생각 마. 저번에도 말했듯이 네 인생에 다신 없을 솔로 데뷔 앨범이라고.”

“아직 녹음 시작도 안 했는걸~. 그리고 아주 안 낸다는 게 아니라 일정만 좀 미룬다는 거잖아.”

“그냥 일정대로 해. 계약서에 사인한 이상 넌 회사 소속 가수로서 준비된 앨범 활동 성실히 임해야 한다고.”

“난 형이랑 보내는 시간도 중요하단 말이야!”

영롱의 생떼에 태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 줘야 하는 건가?

“너는 연애하면 연애만 하고 일은 다 내팽개쳐? 각자 일할 거 하면서 만나는 거잖아.”

“난 몰라. 연애 안 해 봐서.”

태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서 농담할래?”

“농담 아닌데.”

영롱이 정색하며 말하자 태휘는 그제야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섹스만 했지, 연애는 한 번도 안 했어.”

……말을 말아야지. 그래도 그중에 한두 명 정도 하고는 연애하지 않았을까 짐작했는데, 역시 차영롱은 늘 예상을 벗어난다. 녀석은 다리를 꼬더니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뭐, 그게 연애라고 착각한 놈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잖아?”

그놈 중에 대표적으로 이설민이 있겠고. 그렇다면 차영롱의 첫 경험 상대는 못 됐을지라도 첫 애인이 됐으니 참으로 감지덕지한 일이네. 그러고 보니 화제가 어쩌다가 유학에서부터 연애사까지 흘러왔지?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 사이에 대화다운 대화는 몇 년 동안 단절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태휘가 영롱을 밀어 낸 그 날 이후, 해체로 이어진 그 말싸움 전까지는 오로지 일 얘기만 했으니까.

늘 붙어 다니며 시시콜콜한 모든 걸 공유하던 10대 시절이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서로의 여드름 개수까지도 알던 시절이 있었는데, 2년 사이 모르는 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태휘는 원래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

“아무튼. 예정대로 앨범 작업해. 내 유학 일정도 계획대로 진행할 거니까.”

“혀엉~.”

영롱이 애교 섞인 말투로 불렀지만 태휘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단호하게 말했다.

“나랑 연애하는 것 때문에 네 커리어 신경 안 쓸 줄 알았으면 애초에 너한테 오지도 않았어.”

그 말에 영롱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것처럼 얼굴에 절망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그래서. 마음 바뀌었단 거야?”

“끝까지 좀 들어. 나랑 약속 하나만 해. 너나 나나, 자기 재능 썩히지 말고 각자 영역에서 최선 다하기로. 이게 우리 연애의 조건이야.”

“연애에 조건은 무슨 조건? 서로 사랑하면 하는 거지.”

“네가 불도저같이 밀어붙이니까. 내가 너 이럴까 봐 작년에…….”

태휘는 답답함에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해체 후 영롱이 조금은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일부였나 보다. 영롱은 여전히 불같이 뜨거웠고, 단순했다. 그래서 작년에 영롱을 밀어 내며 그렇게 말했던 건데.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걸 사적인 감정으로 무너뜨리지 말자는 거야.’

‘왜 무너뜨린다고 생각해? 안 무너뜨릴 수도 있잖아!’

‘아니. 무너질 거야.’

화마(火魔) 같은 영롱의 사랑은 주변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다 태워 버릴 만큼 뜨거웠다. 그 불을 끌 수 없다면 옆에서 지켜보며 그 불로 물도 끓이고, 난로도 피울 수 있도록 조절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이 사랑만으로 먹고 살 수 없다는 걸 알려 줘야 했다. 물론 살면서 열정적인 사랑도 중요하지만, 자고로 우선순위라는 게 있는 법 아닌가?

태휘에겐 음악이, 일이 우선이라면 영롱은 사랑이, 본인의 감정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녀석의 곁에 남기로 마음을 굳혔으니, 녀석이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가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내가 널 책임져 주길 바란다며. 그 말 유효해?”

자신의 말을 태휘가 인용하자 영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나랑 약속 지켜. 난 내 애인이 자기 일에도 열심인 사람이길 원하니까.”

초조한 듯 손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던 영롱은 그 말에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췄다. 태휘는 순간 자기가 또 무슨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서 긴장했다. 겨우 울음 그쳤는데 또 우는 건 아니겠지?

“애인?”

영롱은 그 말을 한번 따라 중얼거리고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애인…….”

그 단어를 곱씹듯 되뇌더니 엷은 미소가 번지며 입가가 조금씩 씰룩거렸다.

“좋아.”

그러곤 이내 방긋 웃으며 말했다. 태도가 너무 손바닥 뒤집듯 달라지자 순간적으로 불안했다. 조금 전까지 엉엉 울던 녀석 맞나? 하긴, 옛날부터 기분 변화폭이 크긴 했지. 오랜만에 겪으니 새삼스레 놀랍네. 녀석은 한층 밝아진 얼굴로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조건이라고 말하니까 딱딱하게 들렸잖아. 결국 다 날 위한 거면서. 그러게 왜 말을 그렇게 해?”

자신의 말을 과연 제대로 이해하긴 한 걸까. 태휘는 의심스러우면서도 영롱의 기분이 한결 풀린 듯 보여 오늘 잔소리는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녀석의 철부지 같은 태도에 당황하긴 했으나 어찌 됐건 유학 얘기를 미리 안 한 건 내 잘못이니까. 사귄 첫날부터 찬물 팍 끼얹은 내 죄지. 녀석의 마음이 100퍼센트 풀린 건 아닐 거고, 최소 유학 전까진 갈 길이 험난했지만 온종일 싸우고 있을 수는 없다.

“애인~~. 나 씻을 건데. 같이 씻을래?”

자리에서 일어난 영롱은 세상 앙큼하게 말하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녀석은 유학이고 약속이고, 저놈의 ‘애인’ 소리에 꽂혀서 모든 걸 다 잊은 모양이었다.

이럴 땐 단순한 게 나쁘지 않네. 태휘는 허탈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다가 영롱의 뒷모습을 바라보곤 바로 따라 일어나 가운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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