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ack 9. Room (03:18) (22/39)

Track 9. Room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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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년 9월 -

태휘와 영롱이 사귀기로 한 그날 이후, 둘은 영롱의 호텔 방에서 매일 살다시피 했다. 태휘는 유학 준비 외엔 별다른 일이 없었고, 영롱의 솔로 앨범 일정도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영롱이 회사에 가는 시간만 빼고는 ‘식사-섹스-취침-샤워’ 이 루틴만 반복하며 살았다.

그 덕분에 영롱이 태휘에게 갖고 있던 깊은 오해는 저절로 풀렸다. 고자라느니 금욕 인간이라느니 하는. 태휘 입장에선 오해를 풀기 위한 의도는 딱히 없었다. 매일 함께 붙어 있으니 자연스레 그리됐을 뿐.

어느 날은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에 하루의 첫 끼를 룸서비스로 주문했다. 영롱이 갈비탕에 파스타, 피자, 장어 덮밥까지 골고루 시킨 덕에 밤새 소진한 열량을 채우고도 남을 듯했다. 녀석은 왕성한 성욕만큼 식욕 또한 왕성했다. 마른 몸과 안 어울리게.

식탁 옆에 전면 유리창으로 내려다보이는 한낮의 도심은 분주한 데 비해 호텔 스위트룸 안의 이제 막 시작한 연인은 한가로웠다.

영롱은 배고픔에 눈이 돌아 뭐부터 먹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고, 태휘는 그런 영롱을 말없이 보더니 자기 앞에 있던 장어 덮밥을 밀어 놓아주었다. 숟가락만 물고 있던 영롱은 태휘의 행동에 피식 웃었다.

“하여간 내 애인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영롱은 요즘 저놈의 ‘애인’ 소리에 흠뻑 재미 들린 듯했다.

“온도 차가 너무 극과 극이잖아. 밤에는 그렇게 뜨겁다가, 평소에는 또 차가웠다가, 지금은 다시 따뜻해지고. 변온동물이야?”

태휘는 ‘그래 봤자 네 기분 변화폭 같겠니?’라고 따지려다가 참았다. 그 와중에 영롱은 빈 접시에 장어를 절반쯤 덜어 태휘의 앞에 놓아주었다.

밥 먹는 내내 영롱은 식탁 아래로 발을 뻗어 맞은편에 앉은 태휘의 발을 계속 건드리며 장난을 쳤고, 그때마다 태휘는 다리를 피하며 식사에 집중하려 애썼다.

“근데, 형 궁금한 게 있는데.”

영롱이 저렇게 차분한 목소리로 운을 띄우면 태휘는 반사적으로 긴장하고 만다. 또 무슨 얘길 꺼내려고 저러나.

“다른 의도 없이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태휘는 자못 불안해져서 그만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한편 영롱은 물을 마시기 위해 생수병을 집었다가 뚜껑을 못 열어 낑낑거렸다.

“또 뭘?”

태휘가 영롱을 향해 손을 뻗자 영롱이 물병을 건네주었고 태휘는 가뿐하게 뚜껑을 따서 돌려주었다. 영롱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진짜 궁금해서. 형은 내가 다른 남자랑 잤다고 그렇게 화냈잖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다른 남자랑 잤다고 화난 게 아니라 멤버들이랑 자서 화난 거지.”

“그럼 멤버 아닌 남자들이랑 잔 건 아주 기분 상큼하고 괜찮아?”

말꼬투리 잡기로는 녀석을 못 당해 낸다는 걸 깜빡했네.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자기가 불리한 질문엔 대답하지 않는 경향이 있구나, 내 애인.”

영롱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태휘는 말없이 뚝배기에 거의 코를 박은 채 갈비탕을 흡입했다.

“아무튼 내가 궁금한 건, 내가 다른 남자들 만나는 동안 형도 수절하진 않은 것 같던데? 요 며칠 보니까?”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어서 태휘는 일단 밥을 우물우물 씹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마 처음이었다면 형은 정말 타고난 밤의 황제고. 아니라면 형도 대체 몇 명이나 만난 거야? 며칠 내내 그게 자꾸 신경 쓰여 가지고.”

글쎄, 전혀 신경 안 쓰는 걸로 보였는데. 대답하지 않을 작정으로 태휘가 음식을 두 볼 가득 채우자 영롱은 왼손을 들더니 손바닥을 쫙 펼치고는 말했다.

“그럼 업&다운으로 물을게. 업? 다운?”

태휘는 영롱의 다섯 손가락을 바라보고는 말없이 음식만 우물거렸다. 그러자 영롱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툴툴거렸다.

“왜? 난 누구처럼 질투하거나 화 안 내!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라니까. 솔직히 내가 화낼 입장은 아니잖아.”

잘 아네, 기특하게도. 태휘는 한참 동안 대답 없이 영롱의 손가락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눈을 끔뻑이던 영롱은 전부 펼쳤던 다섯 손가락에서 엄지를 접었다. 태휘는 다시 아래로 고갯짓을 했다. 이번엔 검지를 접었다. 이제 세 손가락만 남았다.

태휘가 한 번 더 고갯짓하자, 영롱은 또 하나를 접었다. 남은 손가락은 단 두 개뿐이었다. 태휘는 고개를 또 아래로 내렸다. 영롱은 놀랍다는 눈으로 마지막으로 세워져 있는 자기 새끼손가락과 태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말도 안 돼.”

그제야 밥을 다 씹어 삼킨 태휘가 입을 열었다.

“뭐가 말이 안 돼?”

“뻥 치지 마. 한 명밖에 안 만났는데 그렇게 선수가 됐다고?”

“그럼 네 말대로 타고났나 보지.”

태휘가 태연스레 말하자 영롱의 눈동자가 진동하듯 빠르게 흔들렸다. 그러고는 재차 확인하려는 듯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거, 데뷔 이후 만난 사람 숫자 맞아?”

“아니? 난 지금까지 살면서 만난 사람 말한 건데.”

그 말에 영롱은 턱이 빠질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럼 형, 지금까지 딱 한 명 사귀고. 그 사람하고만 잤다고?”

태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 한 사람은 영롱도 아는 사람이라서, 저렇게 놀라는 걸 거다.

“그럼……, 하은 누나?!”

새원예고 시절에 사귀었던 같은 학년의 주하은. 영롱과 셋이서도 종종 어울려 다니기도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둘의 데이트에 녀석이 일방적으로 끼어든 게 대부분이었지만. 영롱은 몰랐던 사실에 흥미를 느꼈는지 두 눈까지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하은 누나가 형의 첫 여자 친구이자 첫 상대였어?”

“그렇지.”

“진짜 대단하다. 아, 근데 하은 누나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네.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나도 하은 누나 좋았어.”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당시 태휘에게 대시했던 수많은 여학생 중, 영롱은 하은이 제일 괜찮다고 했으니까.

‘형, 여자 친구 사귈 거면 하은 누나랑 사귀어. 그 누나 빼곤 다 별로야.’

영롱에게 허락을 구한 적도 없는데, 녀석은 자기 멋대로 여자 친구를 정해 주었다.

“그땐 형의 여자 친구인 것만 마음에 안 들었지. 근데 우리 데뷔하면서 헤어졌잖아. 그 뒤로 계속 연락했어?”

태휘는 영롱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대답했다.

“가끔.”

영롱은 경이롭다는 듯 감탄한 표정으로 태휘를 바라보았다.

“형 진짜 지고지순한 순정파구나?”

태휘는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고는 테이블 한편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하은이 얘긴 그만하자.”

“왜? 난 짱 재밌는데?”

정식으로 사귄 건 예고 시절 얘기이고, 데뷔 이후 영롱 때문에 혼란스러웠을 때 몇 번 하은을 만난 적 있지만 그럴수록 태휘는 오히려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영롱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하은에겐 미안한 마음이 남은 상태였다. 의도치 않게 이용한 셈이 되어서. 그저 신난 영롱은 손뼉까지 치며 조잘거렸다.

“너무 재밌잖아. 내가 그렇게 여러 명이랑 하는 동안 형은 한 사람이랑만 했는데, 나 못지않은 정력과 스킬을 겸비했다는 게!”

“너무 오래 참았나 보지.”

게다가 사귀기로 하자마자 굳이 전 여자 친구 얘기를 꺼낼 필요가 있나? 지금은 우리 둘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태휘는 영롱이 내려 둔 생수병에 손을 뻗어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난 그동안 너랑 하고 싶었던 것들 했을 뿐이야.”

태휘가 진지하게 말하자 영롱의 분위기도 조금 전과 사뭇 달라졌다. 태휘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식탁 아래로 자기 발을 건드리는 태휘의 발끝이 느껴졌기에.

“물론 하고 싶은 거 아직도 한참 남았고.”

그 발끝은 천천히 영롱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어쭈, 이 남자 보게? 이런 응큼한 면이 있었어? 영롱 역시 제삼자 얘기보다 눈앞에 있는 애인의 새로운 면모가 더 흥미로웠다.

“형. 밥 먹는 데 이러기 있어?”

“그래서. 싫다고?”

고자니, 금욕적이라느니 도발했던 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내가 안전핀을 뽑아 버렸나? 영롱은 흡족한 기분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대답 대신 냅킨을 펼쳐 입 주변을 정리했다. 이제 다른 걸 맛볼 시간이었다. 그래. 지금껏 누구랑 몇 번을 했던 뭐가 중요하겠어? 앞으로 나랑 얼마나 할 거냐가 더 중요하지.

영롱은 가운의 끈을 풀어내며 식탁 위로 올라갔다. 태휘도 미소를 지으며 영롱을 올려다보았다.

태휘는 1304호 숫자가 새겨진 골든호텔 스위트룸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사이 리모델링으로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음에도 태휘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 이 호텔에 영롱이 머무는 동안 방문 안에서 참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는데. 이 새끼는 왜 하필 여기에 묵는 건지. 아무 생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태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써 그 기억을 떨쳐 내려 애썼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아무 생각 없어야 하는 건 정작 나여야 하는데 말이야.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이곳에 온 목적 두 가지를 다시 상기했다. 우리의 관계가 더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막장이 된 이 마당에, 영롱이 굳이 STORY로 재결합하려는 진짜 의도를 알아내는 것. 그리고 자기 멋대로 굴지 않기로 약속을 받아 내는 것.

노크 전에 다시 영롱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올렸는데, 그 순간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태휘는 놀라며 뒷걸음질 쳤고, 의외의 인물이 방에서 나와 두 배로 더 놀랐다. 문을 열고 나온 오은 역시 놀란 눈으로 태휘를 마주 본 채 굳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태휘는 얼어붙은 것처럼 호텔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 계오은, 네가 왜 여기서 나와?

태휘도 태휘지만 오은도 만만치 않게 엄청 놀란 눈치였다. 저승사자라도 만난 표정으로 사색이 되더니 딸꾹질까지 시작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태휘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오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자 제 발이 저린 건지, 녀석은 손사래를 치며 해명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형, 이상한 오해하지 마! 난 그냥, 차영롱이 부탁해서, 온 거야! 그러니까, 쟤가 요새 막 밖에 돌아다니긴 그렇잖아! 뭐 필요한 거 좀 사다 달라고 해서! 그거 갖다 주고 가는 길이야!”

요새 명상 한다는 새끼가 뭐 이리 흥분을 잘해? 어째 변명도 영 신빙성이 없었다. 차라리 또 차영롱의 유혹에 넘어가 떡 치고 나왔다는 게 말이 더 되겠는데. 태휘는 팔짱을 낀 채 저도 모르게 비웃음을 흘렸다.

“네가 순순히 걔 부탁을 들어준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진짜야! 저 새끼한테 물어봐! 아무 일도 없었어! 진짜!”

오은이 세상 억울하다는 얼굴로 항변하는 사이, 닫혀있던 1304호 문이 열리며 은발 머리의 영롱이 실크 가운 차림으로 나왔다.

“왜 이리 시끄럽나 했더니. 태휘 형 왔네?”

그 모습에 오은은 더 당황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새끼야! 넌 그렇게 나오면 어떻게 해? 더 오해받잖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오은과 달리 영롱은 태연히 웃으며 방문을 활짝 열었다.

“뭐 어때? 오해하라면 하라지. 들어와, 형. 개오은 넌 그만 가 보고. 오늘 고마웠어~.”

영롱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살가운 말투로 인사하자 오은은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태휘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더니 하고픈 말은 끝까지 쏘아붙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왜 왔대? 맨날 자기는 되고 남은 안 된대!”

그 말에 곧바로 목덜미가 뻐근해 왔다. 영롱은 뭐가 재밌는지 까르르 웃었고, 태휘는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간신히 참으며 오은을 힐끗 째려보았다.

“넌 나중에 얘기하자.”

태휘는 영롱을 방 안으로 밀어 넣고는 자신도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영롱은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현관에 버티고 서 있었다.

문밖에선 오은이 욕을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센서등이 깜빡이며 켜졌다. 조명 아래 음영이 드리워진 영롱의 눈은 또렷이 빛나며 태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을 응시하고 있자니 코끝에 영롱의 향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향수 바꿨네. 그 생각에 이르자 태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머릿속에서 위험을 알리는 경보가 울렸다.

태휘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내던 영롱이 먼저 숨 막히는 정적을 깨뜨렸다. 짐짓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방 안쪽으로 향하며 물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태휘는 조금 떨어진 채 뒤따라 들어가면서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네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뭐 하느라 전화도 안 받아?”

“자느라고 못 받았나 봐.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서 그런지 자꾸 졸려.”

말하는 와중에도 영롱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동안 어디에서 지냈길래 시차 적응까지 있어? 질문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삼키고는 무관심한 척했다. 관심종자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 게 상책이지.

닫혀 있는 침실 문 앞을 지나 응접실에 다다르자 영롱은 태휘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눈짓했다. 그러고는 응접실 구석에 있는 냉장고 문을 열고 물었다.

“뭐 마실래? 맥주?”

“차 가지고 왔는데 무슨 맥주야.”

“자고 가면 되잖아.”

실없는 소리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태휘는 영롱을 한 번 쏘아 보고 소파에 앉았다. 영롱은 어깨를 들먹이고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한 병 꺼냈다.

태휘가 자리에 앉으면서 보니 테이블 옆에 다양한 크기의 쇼핑백이 가득 놓여 있었다. 영롱은 그 시선을 알아채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내가 개오은한테 사다 달라고 한 거야. 하다못해 면도기도 없어서, 이것저것 부탁 좀 했지.”

그 말에 태휘는 또 의문이 쌓였다. 대체 어디서 얼마나 지내다가 왔기에 집도 없고 살림도 없는 건지. 더군다나 개오은이 순순히 차영롱 심부름 셔틀을 해?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왜 하필 오은이야? 이설민도 아니고.”

그런 부탁이라면 이설민이 훨씬 더 쉬웠을 거다. 기꺼이 차영롱의 셔틀이 될 놈이니까. 영롱은 별것 아니란 듯이 무덤덤하게, 하지만 심히 압축해서 설명했다.

“다른 것 때문에 연락했다가, 백화점에 있다기에 부탁한 거야.”

내 전화는 안 받았으면서 오은이랑은 연락할 일이 뭐가 있어? 이 말도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이거야말로 진짜 오해할 것 같아서 겨우 참아 냈다. 영롱은 두 다리를 소파 위에 올린 채 생수 뚜껑을 따기 위해 낑낑대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국 백화점 구경하며 쇼핑 좀 하고 싶었는데. 돌아다니지 말라며.”

그 모습을 본 태휘는 익숙하게 영롱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롱 역시 자연스럽게 태휘에게 물병을 건넸다. 태휘는 손쉽게 병뚜껑을 따고는 영롱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런 녀석이 네 얘기 황 CP한테 흘리라고 대표님 꼬드겼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물병을 건네받은 영롱은 두 눈을 끔뻑이다가 말했다.

“뭐야, 대표님은 그걸 또 왜 형한테 걸리고 그래.”

“네 아이디어 맞지? 재결합 진행하려고 네 거취 흘리자고 한 거.”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벌써 혼자 다 결론 냈으면서.”

“네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재결합하려는 속셈, 알아야겠어.”

영롱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 마시고는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속셈이라니. 무슨 말이 그래? 난 그냥 모처럼 다섯 명이서 같이 뭐든 해 보고 싶어서 돌아온 거야. 팬들 앞에 다시 서게 된다면 더 좋고. 누구나…… 아니, 우리 같은 연예인이라면 특별히 더. 전성기 시절의 추억 되찾고 싶은 마음 다 있지 않아?”

태휘는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롱은 말을 이었다.

“그 기회가 생기느냐 마느냐는 어떻게 보면 운의 문제고. 우리는 그 운이 있는 거잖아. 그 기회를 잡겠다는데, 속셈까지 필요해?”

“네 말대로라면,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 기회인 셈인데 왜 너 혼자 멋대로 진행하냐고.”

“내 거취 알리고 말고는 내 마음이야. 내가 형이나 STORY의 소유는 아니잖아. STORY의 멤버이긴 하지만.”

그러더니 하여간 남자들은 이게 문제라며 중얼거렸다. 몇 번 잤다고 다 자기 거 됐다고 착각한다며. 태휘는 그런 말을 하는 영롱이 참으로 뻔뻔하다고 생각하면서, 문득 과거에 녀석이 했던 어떤 말이 머리를 스쳤다.

‘형이 나를 가둬 주길 원해. 형이 내 전부를 책임지길 바란다고.’

그럴 때는 언제고. 영롱은 계속해서 당당하게 말했다.

“형이 망설이는 것 같아서 도와준 것뿐이야. 형 말고 나머지 멤버들 얘기 들어보니 다 재결합 원하더만. 과거 일에 발목 잡혀서, 맘 상해서 하기 싫어하는 건 형 혼자인 것 같던데.”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라, 태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어차피 언론과 대중들은 우리의 진짜 모습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형도 잘 알잖아. 그냥 그 시대의 감성 소환용, 추억팔이용으로 우리가 필요한 거야. 꼭 어떤 진솔한 의미를 담을 필요 없다고. 우리는 팬들한테 여전히 잘 지내는 모습 보여 주기만 하면 돼.”

하여튼 형은 혼자 너무 심각하다니깐. 영롱은 덧붙였다. 녀석이 생각보다 진지하게 의견을 내자 태휘는 내심 놀라웠다. 진심인가, 이 녀석? 하지만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저런 담백한 태도에 넘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순진하게 믿기에는 그를 너무 오래 알았다.

“그럼, 너는 최소한 나한테라도 솔직해야 해.”

“음?”

“정말 다른 의도는 없는 거야?”

“없어.”

“거짓말.”

“없다니까.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보니까 형, 다른 의도 있기를 바라는 눈치네.”

“개소리.”

“알았어. 그럼 앞으로 무조건 형이랑 먼저 상의할게. 내가 멋대로 멤버들이랑 대표님과 얘기한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잖아?”

자신의 방문 목적을 알아차리고 영롱이 먼저 말을 꺼내자 태휘는 의아함과 동시에 민망함을 느꼈다. 열 받아서 바로 쫓아온 모양새가 무색하게스리.

“대신 형도 약속해 줘.”

“뭘?”

“형이야말로 지난 얘기 꺼내지 말기. 즉, 지금만 생각하기. 그리고 나 의심하지 말기. 이 두 가지.”

태휘는 영롱을 알고 지낸 20년 가까운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비록 그중 거의 절반은 소식도 모르고 살았지만.

‘네가 한 약속 중에 지킨 게 있기나 해?’라고 묻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다 지난 얘기였기에 따지는 것 자체가 미련이 남았다는 의미 같았다. 그동안 우리 사이에 끝까지 지킨 약속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럼 나도 재결합에 있어서 형 말 잘 따를게.”

지금껏 두 사람 사이엔 수많은 약속이 생겨났다가 어그러지길 반복했다. 마치 약속을 만드는 일 자체가 특별한 관계의 증명이라도 되는 듯이.

어쩌면 이게 새로운 관계의 시작점이 될까 봐 태휘는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분명 먼저 약속을 받으러 온 건 자신이 먼저였는데. 태휘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영롱은 피식 웃고는 욕실 쪽으로 향했다.

“나 씻고 나오는 동안 생각하고 있어. 같이 라운지에 밥 먹으러 가자.”

“너랑 밥 먹으러 온 거 아닌데. 그리고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럼 룸서비스 시켜 먹을까? 옛날 생각나고 좋게?”

역시, 녀석이 잊었을 리 없지. 태휘가 인상을 쓰며 노려보자 영롱은 자기 입을 막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아, 옛날얘기 꺼내지 말기로 했지. 그래도 우리 오랜만에 만나서 여태 밥 한 끼 못 먹었잖아.”

태휘는 녀석과 이 스위트룸에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너무도 위험하게 느껴졌다. 모양이 변하고 시간이 흘렀어도, 이곳에 얽힌 추억은 넘치도록 많았다. 벗어나려고 해 봐도 벗어날 수 없는 중력처럼 자꾸 그때로 끌려가고 만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방을 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먼저 라운지 올라가서 별실 잡아 둘게.”

태휘의 말에 영롱은 엷게 미소 지었다.

“화장대 위에서 키 하나 가져가. 별실은 투숙객만 이용 가능하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영롱은 욕실로 들어갔다. 문 너머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들려오자 태휘는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 화장대 앞으로 가 카드키 하나를 집어 들다가 제멋대로 늘어놓은 화장품들을 와르르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것들을 도로 세워 정리하며 ‘그래도 화장품은 많이 가져왔네.’라고 생각하는 찰나, 그 사이에서 약병으로 보이는 작은 통 몇 개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손을 뻗어 약병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라벨은 이미 제거된 상태여서 무슨 약인지 알 수 없었다.

섣부르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을 꺼내 약병과 알약 사진을 찍고는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1304호에서 도망치듯 나오며, 불안함에 빨리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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