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ack 10. Highway (02:56) (23/39)

Track 10. Highway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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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년 10월 -

“에라이, 새끼들.”

“둘 다 전화 안 받아?”

신경질 내며 턱으로 폴더식 핸드폰을 닫는 설민을 향해 한강이 물었다. 연습생 시절을 포함해 STORY 활동 내내 한 번도 본 적 없는 짧은 머리였지만 그래도 한강의 잘생긴 미모는 여전했다.

입대 후 얼굴에 살이 많이 오르긴 했으나 가수 활동할 땐 너무 말랐었기에 오히려 더 건강해 보였다. 까맣게 탄 피부도 한강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제법 잘 어울려 흡사 외국 배우 같았다.

그런 한강의 옆에 설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설민의 맞은편에는 A4 용지 여러 장을 펼쳐놓고 순서대로 사인하고 있던 오은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됐어! 부르지 마! 그 인간들 부르면 괜히 분위기만 망치지. 형, 이 정도면 됐어?”

“응. 고마워! 민아, 너도 좀 해 줘.”

오은과 설민은 한강의 군대 선임들의 부탁으로 졸지에 야밤에 술집에서 사인을 해 주고 있었다. 여자 친구인지 여동생인지의 부탁이라나.

그룹 활동할 때는 팬들뿐만 아니라 홍보 차원에서 틈나는 대로 수천 장씩 했었고, 해체 후에도 가족과 친지들의 요청으로 지겹게 해 온 사인이었다. 그래도 이거 몇 장 해 주면 군대에서 조금이라도 편할 테니 설민과 오은은 성심성의껏 사인을 해 주었다.

“어떻게 강이 형 휴가 나왔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냐고.”

사인을 다 마친 설민이 툴툴대자 한강은 속 좋게 웃고는 술잔을 들었다.

“그래도 지난번 휴가 때 봤어.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한강, 설민, 오은 세 사람이 모처럼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곳은 SS엔터테인먼트 근처에 있는 실내 포차로, 설민과 친한 댄서가 최근 오픈한 가게였다.

STORY 해체 후 아직 대중과 언론의 이목이 멤버들을 향하고 있긴 했으나 그렇다고 극도로 프라이빗한 고급 클럽이나 술집은 한강이 답답해했다.

설민의 지인이 운영하는 가게인 이곳은 그래도 일반 손님들과 조금 분리된 공간에서 자기들끼리 편하게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셋이 동시에 원샷을 하고 난 뒤, 설민이 한강에게 물었다.

“저번 휴가 때 봤다고요?”

한강은 안주를 집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휘는 통화만. 당분간 두문불출할 거라고 하더라. 자주 연락 못 해도 이해해 달라고 말하더라고.”

“차영롱은?”

오은이 묻자 한강은 시선을 술잔으로 옮겼다.

“영롱이는…….”

사실 한강이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제일 먼저 연락한 상대가 바로 영롱이었다. 멤버들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못할 이유로.

급작스러운 해체 이후, 영롱과 비밀리에 갖던 관계도 예고 없이 끝나고 말았다. 물론 연인이라든가 하는 진실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반년 넘게 꾸준히 몸을 섞어 왔으니 동료로서의 애정과 별개로 몸정이 든 사이였다.

그런 관계가 해체와 동시에 별안간 끝났고, 한강은 바로 입대까지 했으니 일말의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미련과 기대감 때문에 휴가를 나오자마자 연락해서 만나긴 했는데, 섭섭하게도 영롱은 술만 마시고 쌩하니 가 버렸다.

솔직히 그때 처음으로 녀석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같은 팀 멤버이자 한 때 섹스 파트너였던 사람이, 군인이 되어 첫 휴가를 나왔는데 그냥 돌려보내다니. 저도 군대에 가 봐야 이 서운함을 느끼려나.

그렇게 한강은 둘의 은밀한 관계가 마침내 끝이 났음을 실감했다. 아쉽고 섭섭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여기서 더 어떻게 할 방법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애초부터 어떤 약속을 한 사이도 아니었고, 본능적으로 또 충동적으로 시작된 관계였기에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결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멤버들한테 이런 얘기를 꺼낼 순 없으니 한강은 술잔을 다시 채우고는 짧게 말했다.

“만나서 가볍게 술 한잔하고 헤어졌어.”

숨죽이며 대답을 기다린 설민과 오은의 눈빛이 꽤 의뭉스러웠으나, 둔감한 한강은 그런 낌새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술잔을 비우고는 물었다.

“그럼 영롱이는 요새 솔로 앨범 준비 중인 거야? 태휘가 프로듀싱 안 한대?”

“안 한대. 설민이 형이 회사에서 들었댔지?”

오은이 한강의 잔을 채워 주면서 말하자 설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대표님이, 영롱이 솔로 앨범 후속곡 댄스곡으로 정해지면 나보고 안무 맡으라고 하시더라.”

“영롱이랑 태휘는 아직도 냉전 중?”

한강이 묻자 뭐라고 얘기하려던 설민은 바로 입을 닫았고,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오은이 대신 대답했다.

“그런가 봐. 일단 태휘 형은 해체 후에 한 번도 본 적 없고. 차영롱만 봤는데 걔는 뭐 일절 태휘 형 얘기 안 꺼내니까, 눈치껏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오은이 답하긴 했으나 그래도 여기 세 명 중에서 영롱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건 자신일 거라고 설민은 속으로 자부했다.

오은도 솔로 앨범 계획이 있긴 했지만, 우선은 학업에 집중하기로 했기에 아직 SS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하지 않았고, 군 생활 중인 한강은 열외였다. 전역하더라도 한강은 가수로는 재계약할 의사가 없어 보이고.

지금 SS엔터에 몸담은 건 설민과 영롱뿐이었다. 태휘가 SS엔터에서 프로듀서로 일할 건 자명한 일이었는데 왜 아직 시작하지 않는 건지 설민도 궁금했다. 한강과 오은의 말대로, 해체 후 태휘는 멤버들을 전혀 만나지 않고 있으니까.

설민이 조금 전 말하려다가 그만둔 얘기는, 한 달 전쯤 태휘가 밤에 전화를 걸어온 일에 대해서였다. 술 취해서 다짜고짜 영롱이 어디 있냐고 물어 댄 일을 멤버들에게 말해야 하나, 아니 굳이 할 필요 없나 고민하던 설민은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날 설민은 너무 궁금해서 후배들 안무 연습이 끝나자마자 A 스튜디오로 달려가 보았으나 이미 영롱도 태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스탭들이 회의는 조금 전에 끝났고 중간에 태휘가 잠깐 들렀다 갔다고만 전해 줄 따름이었다.

그 말에도 설민은 뭔가 찜찜함을 떨칠 수 없었다. 자신한테 전화까지 해서 찾을 정도면 그렇게 잠깐만 보고 갈 용건일 리가 없는데. 그 이후 회사에서 영롱을 마주쳤을 때 그날 일에 대해 물어봤었다.

‘혹시 그날 태휘 만났어?’

‘아, 형이 태휘 형한테 나 어디 있는지 알려 줬구나? 고마워.’

그러고는 다른 용무 때문에 쌩하고 가 버렸기에 더 자세히 묻지도 못했다. 영롱이 끝에 던진 ‘고마워’라는 말이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긴 했으나, 제삼자로서 두 사람 사이의 일을 더는 추측하기 무리였기에 강제로 신경을 꺼야만 했다.

어쩌면 그날 이후 둘이 화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자신도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와중에 멤버들에게 괜한 얘기할 필요 없겠다 싶어서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오은이 넌 요새 학교 잘 다니고?”

다행히 화제는 자연스레 옮겨갔다. 한강이 묻자 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을 들고 한강의 빈 잔을 채웠다.

“응. 과제로 자작곡 써야 해서. 요새 그거 작업하고 있어.”

“그래도 경험이 있어서 유리하겠네.”

“태휘 형이 5집 때 멤버 전원 자작곡 쓰라며 하드 트레이닝 시킨 게 나름 도움이 되더라? 완성하면 나중에 솔로 앨범에 실으려고.”

“영롱이는 복학 안 한대?”

묘하게도 세 사람의 대화에서 태휘와 영롱의 언급은 사라질 줄 몰랐다. 몇 년 동안 5명이서 동고동락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더군다나 오은이 다니고 있는 대학을 영롱도 다니다가 휴학했기에 자연스럽게 드는 궁금증이기도 했다. 오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답했다.

“걔 자퇴했어요.”

“정말? 언제?”

처음 듣는 영롱의 소식에 설민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오은을 쳐다보았다. 오은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덤덤히 말했다.

“얼마 전에. 학교에 왔더라고.”

오은이 영롱을 만난 건 해체 후 처음이었으니까 실로 몇 달만이었다. 대학 수업이 일찍 끝난 날, 집에 가려는데 영롱의 전화를 받았다. 너 지금 학교냐고, 자긴 지금 자퇴서 내려고 학교 왔는데 교무과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STORY 활동하는 와중에 입학해서 한 학기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휴학한 거라 이해는 됐다. 웬일로 매니저도 없이 와서는 혼자 캠퍼스를 배회하길래 바보 아니냐고 욕을 날려 주며 데리러 갔었다.

오은은 팀은 해체했지만, 복학하면 함께 학교생활을 하게 되지 않을까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롱이 자퇴할 줄이야. 연예인 활동 덕분에 특기자 전형으로 입학한 학교인데 자퇴한다니, 오은은 자기가 괜히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말려도 보았다.

‘너처럼 머리 나쁜 새끼가 정시로 이런 대학 붙을 것 같냐? 붙여 줬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다닐 것이지. 지금 앨범 준비 때문에 바빠서 그런 거면 나중에 활동 쉴 때 복학해도 되잖아.’

‘네 말대로 나 머리 나쁜 거 알아서 그런다! 똑똑한 너나 학교 잘 다녀라.’

영롱의 단호한 태도에 오은은 군말 없이 자퇴서 작성과 제출을 도와준 뒤 교무과를 나왔다. 녀석이 고맙다는 말만 던지고 바로 헤어지려고 하기에 은근슬쩍 붙잡아 보았다.

‘오랜만인데. 밥이나 술이나 뭐라도 안 하냐?’

오은이 진짜로 원하는 건 그 문장 아래에 숨겨져 있었고, 그걸 알아차린 영롱은 비웃음으로 반응할 뿐이었다.

‘개오은. 너도 이제 그만 애인 만들어야지.’

그러고는 주차장에 세워 둔 차로 바로 달려가더니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매니저 없이 온 줄 알았는데 누구랑 온 거였네. 그 생각은 뒤이어 치밀어 오르는 짜증 탓에 곧바로 잊혔다.

어디 가서 떠벌릴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첫 상대였는데, 총각 딱지 떼먹어 놓고 몇 개월 만에 내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틈틈이 숙소에 몰래 불러서 실컷 즐길 때는 언제고, 해체하자마자 관계를 딱 끊으니 아쉽다기보다는 좀 화가 났다.

딱히 영롱과 잘 되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이 아니라, 그저 녀석의 욕구 해소의 대상으로 이용된 게 영 찝찝했다.

아주 환장하며 좋아하길래 해체해도 이 관계가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혼자만의 바람이었다는 사실도 짜증 나고 차영롱을 상대로 이런 마음이 든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어 더 짜증이 났다.

그 짜증이 너무 컸던 탓에 오은은 영롱이 한 말 중 ‘너도’의 의미와 운전석에 있는 남자의 존재를 알아챌 여력도 없었다.

그날 생각이 나자 오은은 비웠던 술잔을 채우고 단숨에 원샷해 버렸다. 그 모습에 설민은 술병을 뺏으며 천천히 마시라고 말렸고, 한강은 두 사람에게 받은 사인을 챙겨 파일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태휘랑 영롱이 사인은 나중에 받아야겠다.”

“오늘 그 인간들은 그냥 잊어. 생각하면 골치나 아프지.”

“그래요, 형. 우리 조금만 더 마시고 피시방 가서 스타나 한판 해요.”

▶▶

“하으읏……, 형…….”

영롱은 손바닥으로 차창 유리를 짚은 채 가쁜 숨을 내쉬며 허덕였다. 분명 심야 영화를 보겠다고 영화관에 가던 길이었는데. 영롱이 그새를 못 참고 태휘를 몇 번 도발했고, 정신 차리고 보니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주차장 한구석에서 스릴 넘치는 카섹스를 하고 있었다.

바지를 입은 채로 성난 아랫도리를 비비적대던 두 사람은 결국 버클을 풀고 서로의 속옷을 내렸다. 글러브 박스에서 콘돔을 꺼내 씌우고 삽입에 이르기까지 순식간이었다. 태휘에게 올라탄 영롱은 조수석 창문에 팔을 기댄 채 위아래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 아아!!”

태휘는 영롱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는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쳐올렸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자극에 영롱은 눈가에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자신의 아래에서 입술을 깨문 채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리는 태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어떤 야한 영화의 남자 주인공보다 섹시한 얼굴인데 따로 영화를 볼 필요가 뭐가 있나 싶었다.

태휘와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한 뒤로 영롱은 다른 것들은 전부 시시해졌다. 그동안 흘려보낸 시간이 아깝다는 듯이, 오로지 태휘에게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건 태휘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 대부분은 섹스로 채워졌다.

“영롱아, 사랑해.”

“나도……, 아흣!”

영롱은 태휘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덮으며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자 태휘의 쳐올리는 강도가 더 세지며 영롱의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자신의 깊은 곳을 찔러 대는 감각을 느끼며 영롱은 태휘의 입 안에 정신없는 신음을 토해 냈다.

“흣, 흐응……, 형…….”

어느새 차 바닥에 떨어진 두 대의 핸드폰은 설민이 건 부재중 전화를 알리는 액정의 불빛과 함께 무심히 진동하고 있었다.

▶▶

“아흣! 형……, 좀만 천천히…….”

영롱의 허리를 잡고 집요하게 쳐올리던 태휘가 그 말에 속도를 늦췄다. 영롱은 거실 바닥을 손바닥으로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땀에 미끄러져 도로 엎어졌다. 태휘와 영롱은 결국 영화 상영 시간을 놓쳐서 집으로 돌아와 바로 두 번째 섹스를 이어갔다.

애초에 영화관은 왜 가려고 한 건지. 그동안 못 해 본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를 밟아 보자며 호기롭게 나섰지만, 아직 서로의 몸만큼 흥미로운 건 없었다. 아무리 물고 빨고 탐해도 서로를 삼켜 버리고 싶은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영롱의 요구에 태휘가 천천히 움직이며 허리를 뭉근하게 놀리자 영롱은 조금 전의 고통은 잊었는지 내벽을 움찔거리면서 태휘의 것을 물 듯이 조여 왔다. 태휘는 영롱의 도드라진 치골 부근을 어루만지며 목 안으로 끙 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진짜, 변덕하고는.”

“내가 뭐얼…… 흐앙!”

영롱이 칭얼대자 태휘는 더는 군소리 못 하도록 최대한 깊이 박아 넣었다. 쾌락에 젖은 영롱은 이성을 잃고 허리를 흔들며 교성을 질렀고, 태휘 또한 쥐어짜는 듯한 강한 압박에 전율했다.

영롱은 문장으로 완성하지 못하는 단어들을 내뱉으며 신음하다가 ‘형’만을 수십 번 불러 댔다. 태휘는 손을 뻗어 영롱의 턱을 움켜쥐고는 중지를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영롱이 손가락을 깨무는 감각과 아래를 마구 조이는 자극이 겹치며 태휘는 순식간에 절정에 도달했다.

영롱에게 같은 쾌감을 전해 주기 위해 태휘는 거칠게 허릿짓하며 절정의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으읏! 흐읏!”

“하아…….”

태휘는 영롱의 등 위에 쓰러지듯 엎어지며 그 상태에서 영롱을 꼭 끌어안았다. 온몸으로 쏟아낸 땀과 기타 등등의 액체 때문에 대리석 바닥이 미끄러웠다.

아직 이삿짐 정리가 끝나지 않은 데다가, 주문한 침대 매트리스가 안 오는 바람에 거실 바닥에서 했더니 영롱은 무릎과 팔꿈치가 멍투성이가 됐다며 툴툴거리면서도 만족한 듯 보였다. 그리고 구매 목록에 거실 러그를 추가했다.

얼마 전 영롱은 호텔살이를 청산하고 새집으로 이사했다. 처음에는 이사가 귀찮다는 이유로 태휘더러 서울에 집을 마련하라고 했지만, 내년 유학 갈 예정인 태휘는 그냥 본가에서 지내면 된다고 했다.

‘형 유학 간 동안 내가 살고 있으면 되잖아.’

영롱이 헛소리를 천연덕스럽게 하길래 태휘는 가볍게 무시하고 같이 집을 알아봐 주었다. 곧 있으면 유학 떠날 자신보다 집이 더 필요한 건 영롱이었다. 언제까지 호텔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자기가 살 곳인데도 영롱은 집 자체엔 큰 관심이 없어서 태휘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아봐 줘야 했다. 최대한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집을 구한 뒤 가구를 비롯하여 각종 살림살이까지 장만해서 이사를 마친 영롱의 집은 온통 태휘의 취향으로 점철되었다.

집 계약 및 준비 과정은 물론, 이사도 함께하고 이후로도 매일 자기 집처럼 드나들고 있으니 거의 태휘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영롱은 한창 솔로 앨범 준비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그저 신혼부부 기분 난다며 한껏 들뜬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었다. 태휘는 오히려 영롱이 그래 줘서 다행이었다. 이사할 때 신경 써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사사건건 영롱이 자기 고집대로 했다면 머리만 더 아팠겠지.

태휘는 이삿짐 정리가 마무리된 후에도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영롱과 나름 동거 비스무레한 시간을 함께 보내니 사람들이 왜 결혼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태휘의 경우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으니 그저 좋은 것과 별개로, 불안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에게만 매달리는 영롱의 모습에 태휘는 그제야 깊은 안도와 함께 마음의 평화를 찾은 듯했다. 지금 이 시간, 이 공간만큼은 오직 자신만이 영롱을 온전히 소유하도록 허락된 것 같았다.

지난번 걸려온 설민의 부재중 전화도 쿨하게 무시했다. 남긴 메시지로 한강의 휴가 때문에 멤버들이 모였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당분간 멤버들은 되도록 만나지 않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얼마 전 영롱의 학교에서 오은을 만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나름 비밀 연애인데 멤버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무심결에 진실이 튀어나올지도 몰라 그렇게 결정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라면 몰라도, 오랜 시간을 함께한 멤버들은 귀신같이 눈치 채고도 남았다. 물론 한강은 제외하고.

이맘때쯤 태휘는 영롱을 중심으로 생활 반경을 정하고 대인 관계도 어느 정도 정리했겠다, 이 시기만큼은 다른 생각하지 않고 보낸 편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한계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내년 6월, 유학을 떠나면 그 후에는 영롱과 어떻게 될까? 과연 영롱이 자신을 기다려 줄까? 한창 혈기왕성한 시기의 연인에게 2년을 넘게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가능하다면, 아무 생각 안 하고 이 시간을 빈틈없이 누리고만 싶었다. 그것마저도 영롱과의 연애에선 단꿈에 불과하다는 걸 모른 채.

▶▶▶

“형, 빨리 나와!”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영롱의 소리에 방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던 태휘는 반사적으로 손으로 송화기 부분을 막고는 대답했다.

“금방 갈게!”

그 말에 영롱이 조용해지자 태휘는 다시 손을 내려 통화를 이어갔다.

“……네. 물어볼게요. 네.”

태휘는 딱딱한 말투로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영롱은 리모컨으로 TV 볼륨을 줄이고는 물었다.

“누구 전화였어?”

“어머니.”

“아.”

태휘의 대답에 영롱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태휘가 소파에 와서 앉자 영롱은 다시 TV 볼륨을 높였다.

[스타를 알고 싶다! 오늘은 솔로 앨범을 준비 중인 STORY의 전 멤버, 차영롱 군의 하루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영롱 군은 솔로 가수로서의 독립뿐만 아니라, 얼마 전엔 진짜로 독립했다고 하는데요!

홀로서기를 앞둔 차영롱 군의 집을 오늘 ‘스타를 알고 싶다’에서 최초 공개합니다! 오늘 방송 놓치지 마세요!]

TV에는 얼마 전 영롱이 촬영한 ‘스타를 알고 싶다’ 본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영롱의 솔로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첫 프로그램이었기에 태휘와 함께 보기로 약속하고 온종일 대기 중이었다.

집을 공개하는 촬영인지라 저 때 태휘는 몇 시간 동안 밖에서 배회해야 했다. STORY 시절에는 개별 활동을 안 했으니, 방송 촬영도 언제나 멤버들과 함께였다. 그래서인지 영롱은 촬영 직전까지도 긴장한 듯 보였다. 하지만 태휘가 함께해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태휘 딴에는 응원한답시고 ‘네가 스타트를 잘 끊어 줘야 나머지 멤버들도 자신감 있게 활동하지.’라고 조언했고, 영롱은 놀라며 이제 멤버들에 대한 화가 다 풀린 거냐고 물었다. 아니, 단지 공과 사를 구분했을 뿐인데. 영롱은 그런 태휘를 신기하단 표정으로 쳐다봤었다.

태휘가 옆으로 오자 영롱은 자연스레 손을 잡아 깍지를 낀 채 방송을 모니터했다.

“잘 봐봐. 형 물건 뭐 안 나오나.”

“꼼꼼하게 잘 숨겼잖아. 그리고 나와도 사람들은 잘 모를걸.”

“왜? 팬들은 귀신같이 알지. 녹화해 놓고 수십 번 감아 보는데.”

그 와중에 태휘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안테나를 엄지로 뺐다가 넣었다 하기를 반복하며 어째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비록 영롱의 시선은 TV 브라운관만을 향하고 있어서 알아채지 못했지만.

브라운관 속 ‘스타를 알고 싶다’는 집 공개 부분은 무사히 지나가고, 앨범 작업이 한창인 녹음실 장면으로 넘어갔다. 태휘는 그제야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고 방송에 집중했다. 태휘 입장에선 영롱이 자신이 아닌 다른 프로듀서의 디렉팅으로 녹음하는 장면은 새로웠으니까.

“새 프로듀서 어때?”

“좋아. 저 누나도 되게 꼼꼼해. 난 형만 그렇게 깐깐한 줄 알았는데.”

태휘는 일부러 영롱의 새 앨범 작업에 신경을 끄려 노력하고 있었다. 신경 쓰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간섭하고 싶어질 테니.

영롱도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집에서도 일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태휘가 공사 구분을 철저히 하길 좋아한다는 걸 이제는 어느 정도 아니까.

영롱도 태휘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싸우지 않고 이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물론 다른 희망도 아주 버리지는 않았다. 한편 태휘는 뭔가가 문득 생각났는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프로듀서 제안 거절했을 때, 네가 더 조르지 않고 순순히 물러나서 이상했는데.”

그 말에 영롱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태휘를 올려다보았다.

“뻔하잖아! 당연히 형이랑 잘해 볼 생각으로 그랬지.”

역시나. 그때의 불안한 예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영롱은 입술을 샐쭉하니 내밀고는 말을 이었다.

“프로듀서와 가수로 작업하면 또 일로 얽히는 거잖아? 그럼 암만 들이대 봤자 형은 또 절대 안 된다고 튕길 거고.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게 좋을 거 같아서 더 안 졸랐지.”

어찌 됐든 결국 영롱의 작전이 성공한 셈이었다. 서로 멀어진 사이 태휘는 무대책이 된 반면, 영롱은 한층 치밀해져 있었다.

“형은 가수로서도 정말 탐나는 작곡가이지만…….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애인이 더 좋으니까.”

영롱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에 기대어 왔다. 태휘가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영롱도 눈을 들어 태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태휘는 음악적으로 성공해서 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많은 이’에 영롱은 예외였다. 이미 둘 사이에 음악적인 신의는 두텁게 쌓여 있어서일까? 어쩌면 영롱이 음악의 원동력 그 자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롱은 태휘의 뮤즈에 머무르는 것보다도 연인의 자리를 택했다. 이 말이 더 달콤하게 들리는 걸 보니, 지금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태휘가 손을 뻗어 영롱의 턱을 붙들고 다가가자 영롱이 눈을 감고 입술을 맞았다.

이사를 마치고 반동거를 시작한 뒤로, 두 사람은 매일 달콤함에 흠뻑 취해 지내고 있어서 그런지 보통의 연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태휘는 처음엔 오히려 불안할 정도였다.

영롱과 사이좋게 지내던 때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 알콩달콩 다정하게 연애질하고 있다니,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서로에게 연애 감정이 생겨났는지는 모호하지만, 오랜 시간 계속 마음이 엇갈리고 부딪치고 상처 입히기만 반복하다 보니 연애는커녕 인연 자체가 끝나 버릴 줄만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로 오다 보니 태휘는 습관적인 의심과 불안증 탓에 조바심이 났다. 그에 비해 영롱은 그 불확실한 상태를 즐기는 듯 보였다.

‘어떻게 우리 앞의 모든 길을 예측하겠어? 어떤 길이 나올지 모르니까 두근거리고 설레지 않아?’

태휘는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영롱과 같이 지내면서 녀석에게 물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 변화가 막상 싫거나 두렵지 않은 게 신기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영롱을 보고 있노라면, 기꺼이 이 길을 달려가고만 싶었다. 그러다가 울퉁불퉁 비포장도로나 막다른 길이 나오면?

가끔 이런 식으로 태휘의 유전자에 새겨진 선천성 불안증이 도지긴 했지만, 이내 영롱이 전파한 초단순 마인드가 그 불안을 덮어 주었다. 뭐, 안전띠를 더 단단히 매든지, 다른 길로 돌아가면 되지.

그때 키스하던 영롱이 새삼 수줍은 웃음을 짓고는 먼저 입을 뗐다.

“나 주말에 녹음 없는데, 어디 놀러 갈까?”

아, 주말. 그 말에 태휘는 조금 전의 통화를 기억해 냈다.

“주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태휘는 차마 영롱을 마주 보지 못하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린 채 망설이다가 아까 전화 통화 얘기를 꺼냈다.

“어머니가 보자고 하셔.”

“그래? 갔다 와.”

덤덤하게 말하는 영롱을 향해 태휘는 입술을 옴짝거리기만 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막다른 길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포장도로로 빠지는 길을 앞둔 거 같은데.

“너도.”

“나?”

▶▶

“싫어.”

“그냥 노래 한 곡만 하는 거야.”

“그래도 싫어.”

생각보다 영롱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태휘는 난처한 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째 한동안 평화롭다고 했다. 달달하고 순한 맛만 나는 건 차영롱과의 연애가 아니지.

둘의 평화를 깨트린 건 태휘 어머니의 전화 한 통이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전화해서는 주말에 형의 결혼식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본가에 자주 가지 않아 형이 결혼하는 줄도 몰랐기에, 가족 행사에 꼭 참석하라는 당부 전화인 줄만 알고 알겠다고 하고 그냥 끊으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전화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형과 결혼할 사람, 즉 태휘의 형수 될 분이 STORY의 팬이라며 영롱에게 축가를 부탁할 수 있겠냐는 게 진짜 용건이었다.

조금은 황당하고 웃기기까지 했다. 그동안은 의사 집안에 연예인이 웬 말이냐며, 가수 활동 내내 태휘를 인정하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던 가족들이었다.

고고한 척 태휘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딴따라라고 무시하던 부모님과 형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그랬던 본인들의 모습은 기억에서 지워 버렸는지 어머니는 평소와는 달리 최대한 다정한 말투로, 그러면서도 간절하게 부탁을 해 오셨다.

이렇게까지 어머니가 간청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예비 며느리가 원한다고 이렇게까지 나오다니? 그러다가 사돈 될 집안이 엄청난 재벌이라는, 안 궁금한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어쩐지, 아무리 아들이라도 남에게 절대로 아쉬운 소리 하지 않는 어머니인데. 이번엔 제대로 설설 기는 상대를 만났구나 싶었다.

‘이런 부탁하는 거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다. 너도 알잖니?’

‘영롱이한테 물어는 볼게요.’

‘너 저번에 할머니 생신에도 안 왔잖아. 얼마나 화내셨는지 알아? 그때 네 아버지랑 나랑 너한테 불똥 안 튀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그 일 보은하는 셈 치고 꼭 성사 시켜.’

‘보은’이니 ‘성사’니. 이게 부탁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단어인가? 그러면 영롱이 아니라 당사자인 나한테 축가를 부탁하든지. 그래도 아들이 보컬이 아니라 래퍼라는 걸 알긴 아는 건가? 아니, 신부가 콕 집어 메인 보컬인 영롱의 축가를 원한다고 말했겠지.

그나저나 학창 시절부터 영롱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내키지 않아 하셨으면서, 녀석도 바로 오케이 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영롱이에 대해 진짜 아무것도 모르시네.

아무튼 그렇게 전화를 끊고 영롱에게 말을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활동 당시에도 회사 관계자나 방송국의 높은 분들 부탁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결혼식에 종종 불려가서 축가하고 온 적 있기 때문에.

그냥 행사 스케줄 가는 셈 치고 같이 가자고 말한 참이었다. 어머니의 염치없는 태세 전환이 황당하긴 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라니 못할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차영롱은 언제나 나의 예상 밖에 있다고.

“어머니도 그렇지만 형도 참 웃기네. 내가 순순히 할 거라고 생각했어?”

태휘도 알고는 있었다. 가족들이 태휘의 가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예전부터 영롱을 탐탁지 않아 했고, 그 때문에 영롱도 태휘의 가족을 싫어했다.

녀석의 성격상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만 좋아했고,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대놓고 똑같이 싫어했으니까. 비록 그게 태휘의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하지만 영롱이 태휘의 가족을 만난 건 중학교 때뿐이고, 그 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싫었던 마음 역시 수그러졌을 거로 생각했다. 혹여나 수그러들지 않았더라도, 예의상 축가 한 번 정도는 별문제 아니라고 여겼는데.

“나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빵긋빵긋 웃으면서 축가 부르라고?”

“누가 싫어한대? 싫어했으면 너한테 축가 부탁하시겠어?”

어느새 영롱은 찰싹 달라붙어 있던 몸을 떼고 소파 끝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와……, 이게 남편이 마누라 편 안 들고 시가족 편 들 때의 기분인가?”

편들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는데, 영롱이 정색하니 오해를 풀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이 영롱이를 싫어하는 건 영롱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태휘가 가수하겠다고 선언할 때부터 녀석이 곁에 있었으니까, 음악이라는 영역 안에 속해 있던 영롱 역시 못마땅하게 여겼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영롱은 삐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화난 듯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벌써 잊었어? 옛날에 형 어머니가 어떻게 했는지? 새원예고 올라갈 때도 그렇고 가수 한다고 할 때도 그렇고, 우리 집 찾아와서 남의 집 귀한 자식한테 헛바람 넣지 말라고 얼마나 뭐라고 하셨는데.”

뭐? 태휘는 오늘 처음 듣는 얘기였다. 놀라서 눈만 끔뻑대는 사이 영롱은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아, ‘떡볶이집 아들 주제에 어딜 감히’라는 말도 빼먹지 않으셨지.”

태휘는 그저 영롱이 집에 처음 놀러 왔을 때 가족들과 딱 한 번 만났다고만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랬었어?”

태휘가 진심으로 놀란 얼굴로 묻자 영롱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는 말했다.

“내가 형한테 얘기 안 했나? 그땐 자존심 넘 상해서 얘기 안 했나 보다. 어쨌든 지금 알았으니 됐지?”

아니? 전혀 안 됐는데?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죽어도 영롱에게 이런 부탁 안 했을 거다. 지금 영롱 입장에선 나도 우리 가족들과 다를 바 없이 몰염치한 인간이 된 거다. 그런 짓을 했으면서 뭐? ‘보은’? ‘성사 시켜’?

“그때는 그냥 혼자 참고 넘어갔을 거야. 형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으니까. 혹시나 맘 바뀌어서 나랑 같이 가수 안 한다고 할까 봐.”

미치겠네. 몰아치는 부끄러움과 미안함 때문에 태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가 몰랐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영롱은 조금 전보다는 화가 가라앉은 말투로 말했다.

“형은 몰랐으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근데 어머니 진짜 너무하시네.”

“미안해.”

태휘는 죄인이라도 된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일 있는지 몰랐어. 그저 나한테 뭐라고 하시는 것만 알았지. 너희 집까지 가셨을 줄은…….”

태휘는 이런 일에는 그 시기를 한참 놓쳤더라도, 바로 사과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차갑게 날 서 있던 영롱도 한결 누그러진 듯했다.

“아냐. 나도 형이 다 알면서 그런 부탁했다고 생각해서 화난 거니까. 그런데 내가 말을 안 한 거였잖아. 형이 미안할 일은 아니지.”

“그게 아니라, 과거에 우리 어머니가 너한테 한 짓. 내가 대신 사과할게.”

태휘가 영롱의 눈을 응시하며 진심 어린 표정으로 사과하자 영롱은 말없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괜히 손가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나한테 말고 우리 엄마랑 아빠한테 사과해야 하는데. 우리 부모님한테도 뭐라고 하셨으니까.”

“뭐?”

영롱은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다 말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한테도 막 뭐라고 하셨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냐고.”

이런 젠장. 음악에 아무 관심도 없던 영롱에게 가수 하자고 한 건 오히려 자신이었는데.

“근데 엄마랑 아빠는 형이랑 누나들 키우면서 워낙 별별 소리 다 듣고 살았다고, 괜찮다고 나를 달래 주셨어. 나한텐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사실 속은 말이 아니셨겠지.”

“근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너희 집 놀러 갔었잖아. 너희 부모님은 평소처럼 나 대해 주시고.”

“그냥, 우리 가족들은 그렇게 생각했어. 형이 더 불쌍하다고.”

태휘는 묵묵히 영롱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저런 집에서 살아야 하는 형이 안됐다고. 나보고 형 더 잘 챙겨 주라고 했어. 그리고 보란 듯이 둘이 꼭 꿈 이루라고.”

영롱은 혀를 쯧 차고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에이 씨, 형 어머니 때문에 별 얘기를 다 하네.”

나름 마음고생한 일이었는데, 5년 정도 지난 후에야 이 얘기를 처음 꺼냈다니 태휘로서는 믿어지지 않았다. 이 수다쟁이 녀석이?

“너도 안 하고 묵혀 둔 얘기가 다 있네.”

“나라고 맨날 칠렐레팔렐레 다 나불대는 줄 알았어? 나도 생각이라는 거 하고 살아.”

태휘는 이 상황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롱은 짐짓 우쭐거리며 말했다.

“이젠 애인 사이이니까, 이런 얘기 하는 거지. 그냥 형·동생 사이일 때랑은 다른 거잖아.”

영롱도 이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하긴 나보다 더 용감한 녀석이니까. 내가 백 번 고민하는 사이 영롱은 늘 한 발 앞서 내딛는다. 태휘가 미소 짓자 영롱도 그새 기분이 풀렸는지 소파 위를 기어 다시 옆으로 다가왔다.

“형 사과는 받아 줄게. 대신 오늘 밤에 찐하게 해 주라.”

말했지? 늘 한 발 앞서 내딛는다고. 역시나 초 단순 마인드.

“안 그래도 매일 찐하게 하잖아?”

“그래서 안 한다고?”

영롱은 태휘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태휘가 대답 대신 입을 맞추자 영롱은 손으로 태휘의 옷을 걷어 올렸다. 우리 분명 조금 전까지는 화내면서 말싸움하고 있지 않았나?

정신없이 키스하다가 눈을 떠보니 어느새 서로의 옷은 소파 아래로 떨어져 있었고 영롱은 태휘 위에 몸을 겹친 채 신음하고 있었다. 아직 속옷은 벗지도 않았는데 태휘의 발기한 물건 위로 엉덩이를 비비는 것만으로 영롱은 흥분한 듯했다.

“아흣, 형. 빨리 넣어 줘.”

“방으로 가자.”

“싫어. 그냥 여기서 해.”

“새로 산 소파, 마음에 든다며.”

“……어.”

영롱이 바로 납득하며 태휘의 위에서 내려왔고, 태휘는 영롱을 안아 들어 침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영롱이 얼굴을 끌어안고 입을 맞춰 대자 시야가 막힌 태휘는 감으로 방문을 찾아야 했다.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은 속옷까지 잽싸게 내던지고는 다시 열렬히 키스했다. 태휘는 침대로 가는 대신 자신의 어깨에 영롱의 다리를 걸치게 한 채로 벽으로 밀어붙였다. 미안하니까, 평소보다 거칠게 해 줘야 좋아하겠지. 이번엔 태휘의 예상이 맞았다.

태휘가 물어뜯듯이 귓불을 빨고, 목덜미에 키스를 퍼붓자 영롱을 사시나무 떨듯 움찔대며 희열에 들뜬 교성을 흘려 댔다.

“흐응……, 형.”

“잠깐, 콘돔 안 가져왔는데.”

“그냥 해.”

영롱이 조르자 태휘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삽입했다. 제대로 풀지 못한 입구에 단단한 성기가 그대로 밀고 들어오자 영롱은 태휘의 목에 매달리며 비명을 질렀다.

등을 감싸 안은 영롱이 손톱을 세워 긁어 대자 태휘 역시 거친 신음을 지르며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영롱은 괴로워하면서도 태휘의 귀에 입술을 파묻으며 애원하듯 졸라 댔다.

“제발, 안에 가득 싸 줘, 형.”

“흣……, 씨발.”

녀석이 힘들까 봐 밖에다 할 생각이었는데, 귓가를 자극하는 영롱의 숨결에 뺄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원하는 대로 해 주자 영롱은 태휘를 꼭 끌어안은 채 크게 몸을 떨었다. 접합부 사이로 넘쳐흐른 정액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휘는 천천히 움직여 영롱을 침대에 눕히고는 다시 격하게 허릿짓을 시작했다. 영롱이 물기를 머금은 눈으로 올려다보자 태휘는 문득 아까 나누던 얘기가 떠올랐다.

가뜩이나 감정 풍부한 녀석이, 어렸을 때 그런 취급당하고는 분해서 울진 않았을까. 태휘는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주고는 눈가에 입을 맞췄다. 거칠게 몰아치다가 갑자기 다정하게 굴자 영롱은 놀란 표정으로 태휘를 올려다보았다.

“나중에 너희 부모님 찾아뵙고 인사드릴게. 너무 죄송했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부모님 얘기하고 싶어?”

“미안.”

그러더니 영롱도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두 다리는 여전히 태휘의 허리를 감은 채로.

“좋아. 안 그래도 우리 가족들 다 형 보고 싶어 해.”

“우리 어머니한테는 안 된다고 할게. 축가.”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맞춘 뒤 본격적으로 하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신음을 흘리던 영롱은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는지 태휘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는 말했다.

“잠깐만.”

“왜?”

숨을 헐떡이며 내려다보니, 땀에 뒤범벅된 영롱은 두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결혼식 갈 때 뭐 입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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