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11. Harmony (02:49)
하모니(harmony)
명사
1. [미술] 미적 대상의 부분들이 성질이나 수량성에서 서로 모순이 없는 통일 관계를 맺어 쾌감을 낳는 것
2. [음악] 일정한 법칙에 따른 화음의 연결
▶▶▶
- 200◇년 11월 -
“야, 저 남자들 봤어?”
“응. 엄청 잘생겼다. 연예인인가?”
“원태휘랑 차영롱 아니야?”
“STORY? 어머, 맞는 거 같애!”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영롱의 귀까지 들렸고 왠지 우쭐해지는 기분에 발걸음이 더 경쾌해졌다. 눈가의 웃음은 선글라스로 가려졌지만 주체 못하고 올라가는 입꼬리는 억지로 내리느라 힘들었다.
옆에 있던 태휘는 갑갑했는지 선글라스를 벗었고 그러자 사람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역시, 누가 봐도 잘생긴 내 남자라니까.
영롱과 태휘는 태휘의 형, 원태성의 결혼식이 열리는 호텔의 로비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평소의 편한 힙합 패션이 아닌 모처럼 깔끔한 수트 차림이었다. 태휘는 답답하다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치긴 했지만.
며칠 전 말싸움까지 했는데도 이 결혼식에 온 건 오로지 영롱이 태휘의 수트 입은 모습이 보고 싶다고 해서였다. 오직 그거 하나 때문에 축가를 부르겠다고 하자 태휘는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거 때문이라면 내가 집에서 입어 줄게.’
영롱은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검지를 내저으며 말했다.
‘사람들 속에서 수트 입고 서 있는 내 남자의 모습이 보고 싶은 거라고. 하여간 형은 애인 마음은 좆도 모른다니까.’
아무튼 그렇게 영롱은 태성의 결혼식에 축가를 부르기 위해 참석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몰염치한 태도에 화가 나긴 했지만, 그 집 사람들이 그러는 거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어서 놀랍지도 않고.
어른의 부탁이고 나발이고 거절하고 싶었으나, 그래도 거절하는 건 지난 일로 상처받은 채 여태껏 꿍해 있다는 거니까.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그사이 성숙해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토록 무시했던 딴따라 아들내미와 그 친구(사실은 애인)가 얼마나 컸는지, 얼마나 잘나졌는지 당당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물론 태휘의 수트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제일 큰 이유였고. 지난번 미영 감독님 재즈바 오픈 파티 때도 못 봤단 말이다!
솔직히 다른 이유도 있긴 했다. 수트를 입은 태휘를 본다는 것 말고도, 숨어서 하는 데이트가 아닌 밝고 오픈된 공간에 가고 싶었다. 몰래 하는 비밀 연애도 스릴 있어서 좋았지만, 계속 숨어서만 만나려니 좀이 쑤셨다.
하지만 정식으로 초대받고 참석하는 행사라면? 영롱은 오늘 결혼식을 ‘어머니가 허락한 공식 데이트’라고 여기고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그것도 태휘 형의 가족 행사라니. 진짜 애인 자격으로 참석하는 기분이어서 엄청 들뜨기까지 했다. 물론 어머니는 전혀 상상도 못 하고 계시겠지만, 나만 기분 내면 되는 거지, 뭐.
반면 태휘는 처음엔 걱정부터 앞섰다. 해체 이후 최대한 외부 접촉을 자제하고 있었기에 영롱과 함께 있는 모습이 알려진다면 한창 멤버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기자들에게 떡밥 던져 주는 격이었으니까.
예를 들면 ‘STORY 태휘-영롱 극비 만남. 듀오로 컴백하나?’식의 헤드라인으로. 다행히 비공개 예식이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가족과 가까운 지인 위주로 진행하는 듯했다. 덕분에 냄새 맡고 올 파리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무엇보다 태휘의 가족들은 태휘가 가수라는 걸 부끄럽게 여겨 주위에도 알리지 않아 가까운 친척 외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게다가 대중문화와는 담쌓고 사는 집안인지라 태휘와 영롱이 아무리 반짝반짝 꾸미고 가도 가수인지 뭐 하는 놈인지 모를 사람이 태반이었다.
도리어 신부 측이 먼저 STORY의 유명세를 알고 관심을 보이자 당황했을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집안에 가수가 있어도 신부가 원하지 않았다면 축가를 부탁할 생각도 못했을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국내 굴지 재벌가 영애의 결혼식인 데다가 워낙 고위층이 오가는 고급 호텔인지라 연예인이라고 대놓고 쳐다본다거나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 같으면 폰카로 몰래 찍어 바로 SNS에 올라왔겠지만, 이 당시에는 카메라 달린 핸드폰은커녕 핸드폰도 디지털 카메라도 대중화되지 않았다. 눈으로만 보고 그저 지나칠 뿐이어서, 목격담이나 소문 따위도 널리 퍼지지 못했다.
이런 것들을 깨닫자 태휘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더라도, 이 결혼식에 영롱을 데려왔으면 안됐는데. 이때만 해도 그토록 깊게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호텔 예식홀은 고풍스러움과 우아함이 흘러넘쳤지만, 과도하게 점잔 빼는 분위기에 태휘와 영롱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태휘는 이래서 가족 행사에 오기를 싫어했다.
축가만 끝내고 빨리 사라질 심산으로 예식장에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하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던 부모님과 마주쳤다. 태휘의 부모님은 난생처음 보는 인자한 미소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넌 왔으면서, 인사도 없이 들어가려고 했니?”
어머니의 날이 서 있는 첫 마디에, 그 인자한 미소는 가식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태휘의 어머니는 옆에 있던 영롱에게 시선을 옮겼다.
“영롱 군. 와 줘서 고마워요. 바쁠 텐데.”
“무슨 말씀이세요. 이런 소중한 가족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한껏 예의 차린 인사에 영롱 역시 한술 더 떠서 세상 깍듯하게 인사했다.
“해체했는데도, 여전히 우리 태휘와 잘 지내나 봐요. 이렇게 선뜻 축가도 불러 주고.”
“당연하죠. 태휘 형과는 팀 동료 이상이니까요.”
영롱이 싱글싱글 웃으며 태연하게 말하자 태휘는 엉겁결에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태휘의 아버지와 형은 다른 하객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그 말의 의미를 알 턱이 없는 어머니는 흐뭇하게 미소 짓다가 태휘를 보며 물었다.
“너는 집에 아주 안 들어올 거니? 얼굴 까먹겠다.”
태휘가 입을 다물고는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을 피하자 어머니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곧 유학 간다는 애가 집에도 안 들어오고 어디서 뭐 하고 지내는지……. 어디서 사고 칠까 봐 겁난다. 형도 결혼하는데, 집안 망신시키면 안 되는 거 잘 알고 있지?”
영롱은 순간 어이없어서 얼굴에 미소를 거두고 자기가 나서서 따지고 들 뻔했다. 아들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저보다 태휘 형을 더 모르시네요. 형이 어디 가서 사고 칠 사람이에요? 제가 친 사고까지 수습할 사람이지!
—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태휘의 눈치를 보고는 겨우 참았다. 하긴, 사고는 이미 치는 중이지. 한편 태휘는 이런 취급에 익숙한 듯 덤덤한 표정으로 영롱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옷매무새는 그게 또 뭐니? 형 결혼식인데…….”
어머니가 태휘의 풀어진 넥타이를 매어 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영롱이 좀 더 빨랐다. 영롱은 한 손으로 태휘의 목에 둘린 넥타이를 잡아서 당기고는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그런 뒤 풀어 헤친 셔츠 제일 위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를 다시 매주었다.
구김이 생기지 않게 넥타이 끝까지 매만진 뒤에 수트에 붙은 먼지까지 툭툭 터는 손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구 쓸어 넘겨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새끼손가락으로 세심하게 정리해 주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됐죠?”
영롱이 태휘의 어머니를 향해 묻자 약간 놀란 듯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롱은 그런 반응에 개의치 않은 채 세상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태휘의 위아래를 훑었다.
어머니가 둘 사이의 어쩐지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영롱이 바로 손뼉까지 쳐가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는 바람에 순식간에 잊혔다.
“그나저나, 어머니는 정말 좋으시겠어요~. 큰아들은 의사. 작은아들은 인기 가수에다가 천재 프로듀서에다가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하고!”
훅 들어온 영롱의 주접 멘트는 상당히 편파적이었으나, 어머니는 그것까진 눈치 채지 못한 채 웃음을 터뜨렸다.
“어휴, 별소리를 다 해요~. 그러는 영롱 군 어머니는 아들을 어쩜 이리 곱게 나셨을까~?”
조금 전 어머니의 발언에 화났던 건 잊었는지, 영롱은 손으로 얼굴에 꽃받침까지 해 가며 애교를 부렸다.
“맞아요. 저희 집에선 제가 제일 곱긴 해요, 호호호.”
“옛날엔 그냥 애 같았는데, 오랜만에 보니 너무 고와졌어.”
“제가 요새 사랑을 듬뿍 받아서 그런가 봐요.”
영롱은 그렇게 말하며 태휘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태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둘의 대화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놈의 필살 애교와 수다로 저 딱딱한 어머니를 무너뜨리다니……. 내 애인이지만 정말 굉장한걸.
“영롱 군 너무 예뻐서 어머니가 나중에 장가 보내기 아까우시겠어요~.”
“그래서 시집가려고요, 태휘 형한테—.”
“어머니! 저희 축가 준비 때문에, 먼저 가 볼게요.”
태휘는 황급히 말하며 영롱의 팔을 잡아끌고 갔다. 영롱은 그 와중에도 끝까지 살랑살랑 능청스럽게 인사를 날렸다.
“어머니~ 이따 봬요~.”
어머니에게서 멀어지자 태휘는 영롱에게 작게 속삭였다.
“미쳤어?”
영롱은 그저 즐거운지 고개까지 젖혀 가며 까르륵 웃었다.
“왜? 농담 좀 한 건데~.”
태휘가 보기엔 농담이 아니라 농락하며 소심한 복수를 한 게 분명했다. 결혼식에 오기 전 걱정한 만큼 영롱과 어머니의 사이가 냉랭하지 않아 다행이긴 하지만……. 하긴, 어머니로선 염치없이 부탁해 놓고 옛날처럼 무례하게 굴 순 없었겠지.
영롱도 몇 년 동안 아이돌 활동하며 는 것 중엔 노래 실력뿐 아니라 뻔뻔함과 능청도 포함됐다. 싫은 감정 고스란히 티 낼 수도 있었지만, 애인의 집안 행사까지 와서 어머니와 신경전 벌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상대가 어른인 데다가 태휘의 어머니여서 망정이지, 그런 보호막이 없다? 그럼 오은이한테 굴듯 봐주지 않고 막말 작렬이었을 것이다. 오늘은 다만 그 감정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놀려 먹는 거로 승화했을 뿐이지.
영롱의 예상 밖의 행동에 태휘는 당황하긴 했으나 그래도 이 자리에 혼자 왔으면 숨이 막혀 도망치고만 싶었을 거다. 녀석 덕에 이렇게 어이없는 웃음이라도 흘릴 수 있는 거지. 오늘 영롱이 함께여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대범한 영롱에게 전염된 것인지, 어머니가 둘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도 잊고 이 순간만큼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한결 든든했다. 이 사람들 속에서는 언제나 외톨이 같은 기분이었기에.
잠시 후 결혼식이 거행됐다. 이 따분한 예식에서 자신들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튀는 부분은 사회자가 매우 눈에 익은 미남이라는 점이었다.
“형, 저 사람 어디서 보지 않았어?”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안 그래도 예식 시작 직전 영롱이 태휘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이내 결혼식이 시작하자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결혼식 사회를 진행하게 된 탤런트 권준원이라고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 최세나 양의 고등학교 동창이라, 영광스럽게도 사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맞아, 권준원! 요새 우리가 보는 드라마 ‘청춘의 그물’에 나오잖아!”
영롱의 호들갑에도 태휘는 무덤덤했다. 평소 드라마를 즐겨보는 영롱과 달리 태휘는 같이 TV 앞에 앉아도 몰입해서 보지 않았다. 그냥 영롱이 보니 옆에 같이 앉아만 있을 뿐이었지.
남자다운 강인한 골격과 이목구비 아래 유머러스함과 매너까지 겸비한 그는 요즘 각종 드라마에 출연하며 한창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남자 배우였다.
“형수님 안목이 좋으시네. 우리 팬인 데다가 저런 미남을 친구로 두고. 태성이 형도 의사치곤 잘 생기긴 했잖아. 물론 형보단 아니지만.”
태휘는 이따가 있을 축가 이벤트에 온 신경이 쓰여 사회자가 미남이든 탤런트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태휘는 이날따라 불안 레이더를 곧추세우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물론 그랬더라도 일어날 일을 막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이후 준원의 소개로 신랑과 신부가 차례대로 입장한 뒤 혼인 서약과 성혼선언문 낭독 등 뻔하고도 지루한 순서가 이어졌다. 활동하면서 회사 및 방송 관계자들에게 불려 여러 결혼식에 참석해 본 태휘와 영롱이었지만, 오늘처럼 엄숙한 분위기의 결혼식은 처음이었다.
비공개 예식인 것도 그렇고, 의사 집안과 재벌가의 결혼이라 그런지 양가 하객도 어째 다 점잖고 고매하신 분들인 것 같았다. 그중 주례사 시간이 지루함의 정점을 찍었다.
사회를 탤런트 준원이 맡지 않고 축가를 영롱이 부르지 않았으면 매우 칙칙했을 결혼식이었다. 아무리 봐도 사회와 축가를 제외하고 모든 예식 준비를 양가 부모님들이 시키는 대로 진행한 게 분명했다.
축가 순서에 앞서 준원이 구체적으로 ‘인기 아이돌 그룹 STORY의 차영롱 군’이라고 소개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영롱이 누군지 몰랐을 분위기였다.
그렇게 축가 이벤트 차례가 됐고, 영롱이 신부와 신랑 옆에 위치한 무대에 올라섰다. 그리고 태휘도 영롱을 따라 무대에 올라오더니 옆에 있던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았다. 사전에 예식장 측에 요청한 대로 피아노 앞에는 스탠드 마이크가 설치돼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태휘 가족들의 놀란 표정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축가는 영롱만 부르는 거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롱은 반응을 확인하고는 씨익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댄스 그룹 STORY의 메인 보컬이었던 차영롱이라고 합니다. 오늘 축가를 부르게 되어 매우 영광이고요, 피아노 반주를 해 주시는 분은 같은 그룹의 리더였던 원태휘 씨입니다. 신랑 원태성 씨의 동생이죠. 많은 분이 모르시는 거 같아 소개해 드려요.”
영롱의 말에 결혼식장은 미미하게나마 동요했다. STORY라는 가수는 모르더라도, 이들 사이에서 나름 저명한 의사 집안에 가수 아들이 있었다는 건 대부분 금시초문이었을 테니까. 이 모든 건 영롱과 태휘가 상의해서 꾸민 일이었다.
영롱이 축가를 부르고 태휘가 코러스와 피아노 반주를 하기로. 원래는 평범하게 반주 CD를 틀어놓고 영롱 혼자 부를 생각이었으나, 바로 전날 밤 영롱은 생각을 바꾸고 태휘에게 아이디어를 냈다.
‘형이 피아노 반주랑 코러스 하면 어때?’
처음에 태휘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형의 결혼식에서 피아노까지 쳐 줄 정도로 우애 좋은 형제는 아닌데.’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의 말씀을 법처럼 따르던 형 태성은 늘 태휘를 돌연변이 보듯이 대했고 태휘 역시 태성을 자신과는 다른 종족 취급하며 살아왔으니까. 그런 형을 위해 피아노를 뚱땅거린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그림이었다.
심지어 어머니마저도 태휘가 아닌 영롱에게 축가를 부탁했는데,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자처해서 피아노를 연주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데? 나는 뭐 형네 집안사람들에게 애정이 넘쳐서 축가 하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고른 이 노래, MR(반주 음원)보다 피아노 라이브 반주가 더 멋지다는 거 알잖아? 축가 퀄리티도 더 높아질걸. 그리고 형 연주에 노래해 본 지도 오래됐고. 나 하고 싶어.’
‘가족들 앞에서 노래하고 피아노 친 적 단 한 번도 없는데, 온 일가친척들 다 모이는 자리에서 하라고? 나 방송 나오면 채널 돌려 버리는 사람들이야.’
‘그럼 이참에 보여 줘. 채널 돌리지도 못하니까.’
태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녀석에겐 모든 게 단순하고 간단해서 어떤 면에서는 참 부럽다 싶었다. 그런데도 영롱은 웃지 않은 채 의외로 끝까지 진지하게 말했다.
‘형이 가족들 앞에서 음악 하는 모습 보이지 않는다고, 형이 음악 하는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 그렇다고 가족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인정받을 필요는 없어. 그냥 형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라는 거야. 숨기지 말고.’
그 말에 태휘는 불편함을 느꼈다. 가족에 대한 얘기는 깊이 하면 할수록 도망치고만 싶었기에. 결혼식에 가는 것만도 껄끄러운 일이었는데 그것보다 더한 것을 요구하니. 녀석이 내 삶을 조금씩 바꾸고 있는 건 맞지만, 이건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날 밤 나에게 달려와서 솔직한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가족들한테도 솔직히 보여 줘. 형이 어떤 사람인지, 뭘 사랑하는지. 형이 사랑하는 음악을 얼마나 잘하는지.’
영롱은 그렇게 말하며 태휘의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태휘는 축가로 고른 노래의 MR을 들으며 편곡용 피아노 악보를 작업하고 있었다.
인사를 마친 영롱이 눈짓을 보내자 태휘는 피아노 위에 손을 올리고 악보도 없이 반주를 시작했다. 오늘의 축가는 영롱과 태휘가 나름 머리 맞대고 밤새 고심하며 고른 곡이었다.
George Benson의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는 연배가 있는 사람들에겐 익숙한 올드팝이면서도 젊은 사람들이 들어도 좋아할 만한 사랑 노래로, 가사가 특히 아름다웠다. 영롱의 미성과도 잘 어울리는 감미로운 팝 발라드였다.
태휘는 반주를 하는 와중에 간간이 코러스를 넣었다. 그룹에선 랩을 담당하긴 하지만 작곡가이다 보니 음감이 뛰어나 화음 넣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노래 만들기를 좋아하고, 워낙 저음이라 노래보다 랩에 더 어울리는 목소리 톤이라고 판단해 래퍼가 됐을 뿐이지.
축가를 끝내고 신랑과 신부를 바라보자 두 사람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태휘는 형이 저렇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오늘 태휘의 형수가 된 세나는 처음 신부 입장할 때만 해도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축가를 듣고는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태휘와 영롱은 축가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식장을 빠져나왔다. 쏟아지는 박수 소리가 뒤에서 들려오긴 했지만 태휘 부모님이나 하객들의 반응이 어떤지는 자세하게 살피진 못했다. 태휘는 이상하리만큼 가슴 한편이 후련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했던 큰 공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은 무대였음에도 그 성취감은 어째 더 크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주체 못 할 희열을 느껴, 예식이 한창 중인 홀을 벗어나 영롱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 영롱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화장실로 들어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곤 제일 구석에 있는 화장실 칸으로 영롱을 밀어 넣었다. 영롱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미소를 띠며 안겨 왔다.
“뭐야?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흥분한 거야?”
“나도 몰라.”
태휘는 낮게 속삭이더니 고개를 기울여 단숨에 영롱의 입술을 삼켰다. 영롱 역시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이유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이렇게 둘이 함께 공연한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데뷔 후 첫 콘서트에서 했었던가, 그 정도로 가물가물해진 경험이었다.
신부와 신랑을 향해 노래하면서도 자꾸 태휘에게 몸이 돌아가려는 걸 자제하느라 힘들었던 거 빼고는 만족스러운 무대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 축가라기보다 태휘를 향한 세레나데라고 생각하며 부르고 있었다. 그 세레나데가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이렇게 밖에서 태휘가 자신의 기분대로 행동하는 걸 처음 봐서, 영롱은 그저 반갑고 자신의 아이디어가 효과가 있다는 사실에 흡족했다.
태휘는 영롱의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은 채 화장실 벽에 쿵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영롱은 아파하기는커녕 짜릿함을 느끼며 태휘의 입술과 혀를 세게 깨물고 빨아 댔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얼얼한 키스에 영롱은 무심결에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태휘의 목을 잡아 끌어당기고는 손바닥을 쫙 펼쳐서 수트 아래로 느껴지는 태휘의 등 근육을 어루만지고 탐했다.
그렇게 원했던 수트 차림인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장 벗기고 싶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결혼행진곡과 갈채 소리가 예식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방금 자신들이 부른 축가만이 머릿속에 몇 번이고 맴돌 뿐이었다.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
예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화장실로 들이닥치기 직전 두 사람은 차례대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서로의 침으로 반짝거리는 입 주변을 닦고,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나오자 예식홀 앞은 이동하는 사람들로 번잡스러웠다.
하객 중 몇몇은 태휘와 영롱을 알아보고는 축가 너무 좋았다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두 사람은 볼 일도 마쳤겠다, 부모님께 무슨 잔소리 들을지 몰라 얼른 자리를 뜨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잡히기 전에 태휘는 집안의 친척 어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태휘 이 녀석, 이렇게 멋있는 놈인데 너희 엄마 아빠는 왜 아무 얘기도 안 한 거냐?”
“그러게. 정말 꿈에도 몰랐지 뭐니?”
그런 칭찬을 퍼붓는 사람들이 대여섯 명 이상 우르르 모여들더니 급기야 사인 요청까지 했다. 영롱은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뭐, 부모님 반응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작전이 어느 정도 먹히긴 했네.
“차영롱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영롱은 반사적으로 돌아봤다. 오늘 사회를 맡은 권준원이었다. 영롱은 반가움에 입을 틀어막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와, 가까이서 보니 더 잘생겼네.
“아, 안녕하세요!”
“오늘 축가 너무 좋던데요. STORY 노래와는 완전 다른 이런 곡도 잘 소화하시네요.”
“저희 노래 들어보셨어요?”
“안 들어본 사람 있겠어요? 여기 계신 어르신들 말고.”
오늘 결혼식에 대해 준원이 자신과 비슷한 감상을 털어놓자 영롱은 웃음을 터뜨렸다. 준원 역시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아무 말 없이 영롱을 마주 보고만 서 있었다.
그가 한참을 물끄러미 응시하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다. 드라마 속에서 보던 부리부리한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어쩐지 어색했다. 사인이라도 받을까? 아니, 같은 연예인끼리 사인해 달라고 하는 것도 웃기잖아!
그 어색함을 깨고 싶어서 방금까지 화장실에서 격렬하게 키스를 나눈 연인부터 찾았다. 낯선 이들만 가득한 이곳에서 의지할 이는 태휘뿐이었으니까.
뒤를 돌아보니 태휘는 여전히 친척들 무리에 둘러싸인 채 얘기를 나누며 사인을 해 주고 있느라 바빴다. 모처럼 만에 보는 훈훈한 광경이라 차마 방해할 수 없었다.
“요새 솔로 앨범 준비하신다면서요. 혹시 뮤직비디오 주인공 안 필요하세요?”
준원의 말에 도로 고개를 돌린 영롱의 두 눈이 놀라서 동그래졌다.
“출연해 주시게요?”
“출연하게 해 주시면 제가 영광이죠. 영롱 씨 첫 솔로 앨범인데.”
그렇게 말하더니 준원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뭔가를 찾았다.
“원래 이런 건 매니저가 하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영롱 씨 팬이라서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나요.”
그가 건넨 건 자신의 명함이었다. 요즘에는 뮤직비디오를 영화처럼 만드는 게 유행이었기에, 업계에선 저마다 유명 배우 섭외에 열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인기 절정의 배우가 먼저 출연을 자청하다니!
영롱은 너무 좋아 명함을 든 채 폴짝폴짝 뛸 뻔했다. 그때 자신의 뒤에서 어깨동무하며 기대어 오는 태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갑자기 사인회하고 왔어.”
친척들한테 이런 반응을 겪은 건 처음이어서인지 어쩐지 어린애처럼 들뜬 음성이었다. 태휘는 앞에 서 있는 준원을 미처 보지 못하고, 영롱이 손에 쥐고 있던 명함에 먼저 시선이 닿았다.
“이건 뭐야?”
“형! 권준원 씨가 내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주신대! 짱이지?”
아이같이 해맑던 태휘의 얼굴이 순간 부자연스럽게 굳어졌다. 고개를 드니 준원이 여유로운 미소로 마주 보고 있었다.
“반가워요, 원태휘 씨. 이렇게 뵙게 되네요.”
준원이 악수를 청하자 태휘는 곧바로 대외용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두 분 축가 정말 좋았어요. 오랫동안 입을 맞춰 와서 그런가?”
나란히 선 자신들을 번갈아 쳐다보는 준원의 눈빛에서 묘한 뉘앙스를 느낀 태휘와 달리, 영롱은 칭찬에 그저 뿌듯해하며 어깨를 우쭐거렸다.
“아무래도 그렇죠? 헤헷.”
“세나가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봤거든요.”
“……그, 형수님이랑 매우 친하셨나 봐요. 사회까지 봐주시고.”
아직 형수님 호칭이 입에 안 붙은 태휘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학교 다닐 때 세나가 전교 회장하고, 제가 부회장 했거든요. 그때부터 제가 회장님처럼 모셨죠.”
대화를 나눌수록 세 사람 사이엔 어색함이 감돌았다. 태휘는 영롱의 어깨에 두른 손을 내리지 않은 채, 무뚝뚝한 얼굴로 준원을 마주하고 섰다. 준원은 그 손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영롱에게 손짓했다.
“꼭 연락해요. 전 이만 가 볼게요. 반가웠습니다. 두 분 모두.”
영롱은 뒤돌아서 멀어지는 준원을 바라보며 쥐고 있던 명함을 소중하게 주머니 속에 넣었다. 태휘는 그 행동을 지켜보다가 퉁명스레 물었다.
“정말 연락할 거야?”
“일단 회사랑 얘기해 보고. 회사에서 말려도 내가 적극 추천해야지!”
“다른 배우들도 많은데 굳이……. 저 사람이어야 돼?”
“뭔 소리야. 지금 권준원 인기 짱인데.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는데 어떻게 안 잡아?”
영롱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흥분하며 말하자 태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입을 샐쭉거렸다.
“그리고 형 내 새 앨범에 일체 관여 안 한다더니? 꽤 신경 많이 쓰네?”
연인의 관심에 영롱은 내심 기분 좋은 듯 입이 귀에 걸린 채 함박웃음을 지었다. 꼬투리가 잡히자 태휘는 괜히 헛기침하며 영롱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른 집에 가자. 친척들이 너한테도 사인해 달라고 달라붙기 전에.”
“난 괜찮은데.”
그러자 태휘가 고개를 숙이곤 속삭여왔다.
“우리 아까 하던 거, 마저 해야지.”
그 말에 영롱은 바로 볼을 붉히며 키득거렸다. 오늘 태휘는 정말 기분이 좋은지, 평소와 다르게 주위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영롱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호텔 로비를 가로질렀다.
영롱 역시 수트 차림에 잘 생기고 기분까지 좋은 애인의 모습을 넋 놓고 감상하느라,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준원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