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ack 12. 어떤 병 (04:34) (25/39)

Track 12. 어떤 병 (04:34)

라운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휘는 조금 전 핸드폰으로 찍은 영롱의 약병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약병. 태휘는 사진을 선택한 뒤 ‘사진 공유’ 탭을 터치하고 연락처 목록을 열었다.

처음에는 ‘원태성’을 선택했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취소하고는 좀 더 아래로 스크롤 해서 히읗 그룹까지 내려갔다. 거기서 연락처 하나를 선택한 뒤 메시지를 입력했다.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짧은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때 복도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서 나오고 있던 뉴스에 절로 시선이 갔고, 순간 태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의 뉴스 계속해서 전해드립니다. 현재 중국에서 활동 중인 배우 권준원 씨가 강간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소식입니다.’

굳은 표정으로 뉴스를 보던 태휘는 방금 자신이 메시지를 보낸 상대의 이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하필 이 타이밍에. 역시나 양반이 아니네, 저 새끼는.

자료화면 속 권준원은 10년 전만큼은 아니어도 반반한 얼굴은 여전했다. 다시는 소식 들을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태휘는 식사 전부터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권준원 씨는 결백을 주장하고 있지만, 논란이 커지면서 중국 국내외 기업들은 전속 모델 계약을 해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권준원 씨는 국내에서도 사생활 문제가 불거지면서 파혼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활동 무대를 국외로 옮겼는데요…….’

태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그래도 지금 저 뉴스를 본 게 나여서 다행이지. 차영롱이 아니라.

라운지 데스크로 가서 별실을 요청하고 디너 코스를 주문한 뒤 결제까지 미리 마쳤다.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바쁘실 텐데 생각보다 빨리 확인하셨네. 태휘는 아직 영롱이 밖에 도착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 이런 건 나보다 그 사람이 빠르지 않겠어요?

수화기 너머 여자의 목소리에 태휘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안 그래도 처음엔 의사인 형에게 부탁하려 했지만, 그러기엔 그가 너무 효자라는 게 문제였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잠시 침묵했다.

- 이거 혹시, 저번에 부탁한 그거랑도 연관 있는 거예요?

역시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눈치가 빠르시다.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자 상대방은 또 아무 말도 없다가 잠시 후에 입을 뗐다.

- 알아볼게요.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 지도 몰라요.

“죄송해요. 회사 일도 바쁘실 텐데.”

- 나도 어차피 사람 시키는 건데, 뭐. 그리고 두 사람한테는 내가 빚이 있잖아.

“빚이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태휘는 이 사실만은 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한테는.

“형수님.”

- 네.

“영롱이 돌아왔어요.”

그 말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 ……다행이네. 태휘 씨 괜찮아요?

“그럼요.”

- 나중에 애들 들어오면 집에나 한번 와요. 애들이 요새 어디서 뭘 봤는지, 통화하면 삼촌 얘기만 하니까.

그때 별실에 들어온 영롱이 태휘를 지나쳐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네.”

태휘는 짧게 대답했다.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쓴 영롱은 태휘가 전화를 끊자마자 물었다.

“누구야? 여자 같던데.”

“알 거 없어.”

“뭐 시켰어? 와인도 시켰어?”

“술 마셔도 돼?”

“……? 그럼 되지. 왜 안 되겠어?”

영롱은 이상하단 듯이 되묻고는 애피타이저를 가지고 온 직원에게 와인을 주문했다. 잠시 후 잔에 와인까지 채워지고 단둘이 남게 되자 영롱은 모자와 선글라스 둘 다 벗어버리고는 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건배할까?”

“무슨 건배까지 해.”

“우리의 재결합을 위해.”

태휘는 순간 미간을 꾸기며 쏘아보았다. 그러자 영롱은 억울하다는 듯 칭얼거렸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우리 팀 재결합 말이야.”

“……그건 멤버들 다 모였을 때 하면 되잖아.”

“그럼 내 무사 귀환을 기념하는 건 어때? 축하할 만하지 않아?”

개새끼. 그럼 무사히 돌아오지 않으려고 그랬어? 당연한 거지. 태휘는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와인잔을 들고 마셔 버렸다. 영롱은 그 모습에 혀를 차고는 잔을 들고 허공에 혼자 건배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애피타이저를 끝내고 본 요리를 먹을 때까지 한참 동안 침묵 속에 있었다. 태휘는 고개를 숙인 채 눈만 치켜뜨곤 맞은편의 영롱을 흘끔거렸다. 옛날처럼 여전히 밥도 잘 먹고. 살은 좀 붙었나? 아니. 많이 찌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았다.

한창 가수 활동할 때가 워낙 말랐던 거였으니, 지금은 딱 보기 좋은 정도였다. 그래 봤자 우리 나이 또래의 평균 몸무게보다는 한참 밑이겠지만. 근육은 좀 늘었으려나? 태휘는 자신도 모르게 옷 아래의 맨몸을 상상하고 말았다. ……젠장.

그때 영롱이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 오자 태휘는 바로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영롱은 씩 웃으며 말했다.

“왜 사람을 힐끔힐끔 훔쳐봐? 여전히 너무 예뻐서? 그런 거라면 그냥 대놓고 봐도 돼.”

영롱은 그렇게 말하곤 스테이크 옆에 가니쉬로 올라온 버섯을 포크로 콕 찔러 입에 집어넣었다. 하긴, 녀석은 훔쳐본다고 해서 기분 나빠할 캐릭터는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지. 계속 오해를 사면 곤란하니, 하는 수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너 혹시 어디 아픈 데 있어?”

그렇게 묻고는 다시 영롱을 빤히 쳐다보았다. 녀석은 그다지 큰 표정 변화 없이 음식을 오물오물 씹으며 대답했다.

“아니? 없는데.”

그러곤 바로 스테이크를 한 조각 크게 썰어 와앙 하고 입에 넣었다. ……그래. 겉으로 보기엔 아주 멀쩡해 보인다. 그렇지만 또 모르지. 요새는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크고 작은 질병도 많으니까. 게다가 단순히 비타민류나 건강 보조제로 보이는 약병도 아니었고.

그렇게 눈으로 레이저를 쏘듯 영롱을 훑어 내리며 건강 상태를 가늠해 보고 있는데 이번엔 녀석이 물었다.

“그러는 형은? 어디 아픈 데 있어?”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태휘는 눈만 끔벅거리며 잠시 생각해야 했다. 지금은 딱히 안 좋은 덴 없는데. 영롱을 못 본 지 거의 10년.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더라…….

“교통사고 난 적 있어. 한 3년 전쯤.”

그 말에 영롱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시던 와인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음주운전 했구나!”

뭐래. 술 한 방울만 마셔도 절대 운전대 안 잡는 거 알면서. 아니면 다 잊은 건가.

“아니. 눈길 사고.”

와중에도 태휘는 머릿속으로 그동안 영롱의 행적을 추측하고 있었다. 당시 꽤 큰 사고여서 뉴스에도 많이 나왔는데, 녀석의 반응을 보니 처음 접한 소식인 듯했다. 그동안 나에 대해 검색도 한 번 안 해 본 건지, 아니면 어디 오지에라도 있던 건지.

“그때 수술한 다리가 가끔 아픈 거 빼곤, 괜찮아.”

여유 넘치던 영롱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건강 걱정을 시작한 건 자신이 먼저였는데.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야. 3년 전 사고를 이렇게 걱정할 거였으면, 좀 더 빨리 돌아왔어야지.

“사고, 심했어?”

“차는 반파되고 전치 8주. 그래도 바로 수술받고 회복 잘 했어. 알잖아? 우리 집에서 어쨌을지.”

“아.”

영롱은 그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휘의 집이라면 최고 수준의 전문 의료진과 기술을 때려 붓고도 남았다. 저승 입구까지 갔더라도 되살릴 수 있었을 거다.

그래서였는지 태휘 입장에서도 사고 자체는 그리 심각하게 기억되지 않았다. 물론 사고 직후 어떤 심경의 변화는 있었지만.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조금 전의 전화 통화 상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는? 별일 없었어?”

태휘가 묻자 계속 마주 보고 있던 영롱이 그제야 처음으로 시선을 피하고 포크로 접시를 깨작거렸다.

“없었지, 별일.”

“이해가 안 돼.”

와인 때문인가. 아니면 이 공간 때문인가. 영롱의 소식을 몰랐던 그 시간 동안 태휘의 가장 큰 의문이었던, 그러나 평소라면 쉽사리 꺼내지 못했을 궁금증을 입 밖으로 뱉고 말았다.

“너같이 끼 많은 애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잠적했다는 게.”

영롱은 고개를 들고 의외라는 듯이 태휘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미소를 보자, 태휘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녀석이 돌아온 그 순간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자라나기 시작한 불안함. 영롱은 양손에 쥐고 있던 칼과 포크를 접시 위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이해 안 될 일인가? 나한텐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고, 시간이었는데.”

태휘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물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런데도 계속 입 안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제발. 이런 전개만은 오지 않길 바랐는데. 시간을 돌려 자신이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순간을 언제까지 유예할 수 있었을까.

영롱은 말을 계속 이었다.

“영원히 숨어 버리고 싶고. 사라지고 싶고. 가능한 한 멀리 도망치고 싶은 시간이었어. 나름 필사적이었는데. 형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 문장에 태휘는 어쩐지 아찔함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우리 헤어졌을 때가, 우리가 알게 된 지 10년쯤 됐을 때였잖아.”

내가 왜 이 호텔에 찾아왔을까. 왜 방 안으로 들어가고.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을까. 애초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져서는 안 됐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만큼은 안 보고 지내야, 다 괜찮아질 줄 알았지.”

과거형인 그 문장 다음에 이어질 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하지만 영롱은 기어이 하고야 말았다.

“결과적으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지만.”

◀◀◀

- 200◆년 1월 -

해가 바뀐 뒤, 영롱과 태휘는 본격적으로 바빠졌다. 영롱은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촬영까지 마쳐 솔로 앨범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고 태휘는 유학 준비에 몰두했다.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작업물을 재녹음하고, 실기 시험을 위해 모처럼 피아노도 연습해야 했다.

그 때문에 태휘도 회사 작업실과 본가를 오가느라 분주했다. 어차피 영롱도 앨범 작업하느라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굳이 영롱의 집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피차간 경황없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 다 자연스럽게 일에 집중하는 시기가 되어 버렸다.

이때쯤엔 멤버들과도 다시 교류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언제까지 남처럼 지낼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군 입대한 한강이나 대학생으로 돌아간 오은은 그렇다 치고, 같은 회사에 있는 설민의 오지랖 레이더망을 벗어나기는 불가능했다. 영롱은 새 앨범 후속곡 안무를 그에게 맡기기로 해서 일 때문에라도 만나야만 했다.

게다가 유학 소식이 회사에까지 알려지면서 설민은 태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술이나 한잔하자며 적극적으로 연락해 왔지만, 유학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하며 최대한 약속 잡기를 미루고 있었다.

영롱이나 태휘나 이제 비밀 연애에 적응해서 멤버들을 속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태휘의 경우엔 여전히 마음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아예 상관없는 인간들이면 몰라도 지금 내 애인이랑 예전에 잤던 놈들, 심지어 같은 그룹 멤버였던 놈들을 아무렇지 않게 만난다? 태휘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그 일만 아니었으면 유학 갈 때까지 설민을 피했을지도 모른다.

▶▶

- 200◆년 3월 -

‘스타를 알고 싶다! 오늘은 솔로 컴백을 앞둔 차영롱 군의 뮤직비디오 촬영 비하인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화 형식의 뮤직비디오라 차영롱 군은 등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촬영 현장에 직접 방문해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후문입니다.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이번 신곡 뮤직비디오에는 요즘 인기 절정 배우, 권준원 군이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했는데요.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해지는 두 남자! 지금 만나 보러 가시죠!’

‘안녕하세요, 여러분. 차영롱입니다.’

‘영롱 군, 이 추운 날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어, 보시다시피 제 새 앨범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이에요. 추운데 배우 분들이 산속에서 너무 고생이 많으셔서요. 제가 응원하러 왔어요. 아, 저기 준원이 형이 보이네요. 여기 이렇게~ 제가 준비해 온 핫팩을 전해 주러 가야겠어요. 형~! 이거 받아요.’

‘와, 고마워라. 너는?’

‘내 것도 있지~.’

‘두 분 아주 친하신가 봐요?’

‘아, 이번 뮤직비디오 출연 부탁하면서 친해졌어요.’

‘제가 영롱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들이댔어요. STORY 때부터 팬이었거든요.’

‘근데 미안해 죽겠어요~. 이렇게 힘들게 촬영하게 해서~.’

‘다음에 맛있는 거 실컷 얻어먹으려고요. 하하하.’

TV를 보고 있던 설민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지랄 깝 싸고들 있네.

“형, 뭐 봐요?”

설민은 뒤에서 안아오는 현우의 손길에도 바로 채널을 돌리거나 전원을 끄지 못했다. TV 브라운관 속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는 영롱의 얼굴이 반갑기도 했지만, 동시에 의문도 들었기 때문에.

대체 어쩌다 권준원이랑 친해진 거지? 아무리 봐도 저 분위기는 단순히 친한 형·동생 사이가 아닌데?

STORY가 해체한 지도 이제 1년이 딱 지났다. 그 말은 즉 설민이 영롱과 섹스하지 않은 지도 1년이 넘었단 뜻이다.

물론 세상에 사람은 많았고, 연애나 섹스 상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자신이 안무 디렉팅을 맡은 후배 그룹 가디언즈의 메인 보컬 녀석이랑 이런 사이가 됐지만, 그렇다고 영롱과 보냈던 밤들을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다.

현우는 설민의 가운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뒤에서 귓불을 깨물어왔다. 안무 연습 끝나자마자 바로 호텔로 넘어와 몇 시간을 했는데도 아직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졸라 대는 건 딱 차영롱 스타일인데. SS엔터 소속의 메인 보컬 라인에 무슨 수맥이라도 흐르나? 아무래도 대표님이 회사 터를 잘못 잡으신 것 같다.

대표님의 실수가 아니라면 내 실수겠지. SS엔터 아이돌의 메인 보컬에만 꽂히는 무시무시한 취향……. 같은 회사 소속의 선배, 후배 그룹의 메인 보컬 둘 다를 내가 따먹어도 되는가……. 대표님 죄송합니다.

설민은 일말의 죄책감이 뒤늦게 들었으나, 그렇다고 두 번 다 자신이 유혹한 건 아니었으니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내가 얘네들의 취향인 걸 어떡하나?

다행스러운 점은 현우는 영롱만큼 지랄 맞은 성격이 아닌 데다가, 설민에게 아주 푹 빠진 상태라 섹스 파트너에 그치지 않고 꽁냥꽁냥 연애다운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거였다.

드디어 영롱에게서 벗어나 더 귀엽고 어린 애인을 사귀었다고 자축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TV 속 녀석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브라운관 속 권준원이 영롱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설민은 친숙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익숙한 욕망. 영롱과 함께 있을 때 내 눈빛 역시 저랬겠지.

자신과 만나지 않는 동안 영롱이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남자 없이는 단 며칠도 못 버티는 음란한 몸뚱이인걸.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군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해체 후에도 종종 연락했고 회사에서도 보긴 했지만, 일 이외에 깊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누구랑 비밀 연애라도 하는지, 어떤 떡밥도 냄새도 흘리지 않겠다는 낌새를 느꼈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한다는 걸 알게 되니 예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처음엔 서운한 마음이 컸지만 어쩌면 몇 년 동안 붙어 지낸 멤버들과 적당한 거리를 만들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해하기로 했다.

해체 이후 저마다의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싶어 그 거리감을 억지로 줄이지 않고 있었는데, 영롱의 인맥에 권준원의 등장은 참 생뚱맞아 보였다. 둘이 접점이라곤 없는데, 언제 저렇게 가까워진 거지?

영롱의 첫 남자라는 설민의 자부심은 어느덧 구질구질한 미련과 집착만을 남겼다. 그렇게 붙잡고 있던 마지막 기대가 아득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권준원이 대놓고 작업이라도 걸면,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을 테니.

준원에 대해서라면 주변에서 귀동냥으로 접한 얘기가 제법 있었다. 주로 좋은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성격도 좋고, 매너도 좋고, 자기 관리도 철저한 사람이라고. 물론 객관적으로 봐도 잘 생겼고 피지컬도 훌륭했다.

특유의 젠틀함을 내세워 로맨스 드라마를 다 평정하고 최근 영화로 넘어가서 격정 멜로 장르까지 소화해서 섹시한 이미지까지 획득한 배우였다. 권준원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제일 매력적인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나이도 20대 후반이니, 설민보다 훨씬 어른 남자의 느낌이고. 또래라면 어떻게든 상대해 볼 만하겠으나 준원은 넘을 수 없는 큰 벽 같았다.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상대는…… 영롱의 오랜 짝사랑 상대였던 원태휘라면 모를까.

그나저나 태휘는 정말 어떻게 된 거지? 곧 있으면 유학 간다는 새끼가 만나자고 해도 자꾸 미루기만 하고. 슈퍼 오지랖 센서가 발동한 설민은 손을 뻗어 침대 밑에 던져 둔 핸드폰을 찾았다. 그때 뒤에서 그 움직임을 막는 현우의 손길이 느껴졌다.

“형, TV만 계속 볼 거예요?”

현우는 설민의 몸을 만지다가 혼자 흥분해 버렸는지 숨을 헐떡이며 더운 신음을 귓가에 흘렸다. 그래, 씨발. 영롱이고 권준원이고 원태휘고 내가 알 게 뭐냐. 지금 나한테 달라붙어서 박아 주길 간절히 바라는 귀염둥이가 있는데. 나도 참견 좀 작작 해야지.

설민은 핸드폰 찾기를 포기하고 뒤를 돌아 현우에게 입을 맞추며 걸친 가운을 도로 벗어버렸다. 그나저나 요즘 애들은 대범한 건지, 발랑 까진 건지……. 가디언즈는 데뷔 1년도 안 됐는데, 벌써 이래도 되나?

그래도 나는 데뷔하고 1년 동안은 죽어라 일만 했는데. 요새 애들은 일찍부터 일이랑 연애가 동시에 되나 봐. 설민은 현우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침대 아래 어딘가로 굴러간 모양이었다. 현우가 받지 말고 계속하라며 재촉했지만, 어째서인지 이 전화는 꼭 받아야 한다는 촉이 왔다.

설민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서 핸드폰을 찾아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이거 봐, 이거 봐.

▶▶

“드디어 얼굴 보네, 원태휘.”

“근데 씨발……. 얼어 죽겠는데 웬 낚시야. 미친놈아.”

설민과 태휘가 만난 곳은 서울 인근의 저수지였다. 웬일로 술이나 한잔하자며 태휘가 먼저 연락해 왔길래 술집으로 약속 장소를 잡으려다가, 설민 마음대로 낚시터로 바꿨다.

“답답한 술집에서만 보고 헤어지면 아쉽잖아? 오랜만인 데다가 너 유학 가면 당분간 못 볼 텐데.”

설민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낚시를 자주 다녔기 때문에 당구장이나 PC방 가듯 바람 쐬고 싶을 때 서울 근교 낚시터를 찾고는 했다. 반면에 태휘는 낚시가 처음이라고 했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워낙 도련님이시니.

“아니, 좆도 안 아쉬운데.”

태휘는 투덜대며 패딩 지퍼를 코끝까지 올리고는 설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설민은 그런 태휘를 위아래로 훑으며 노려보았다. 새끼, 안 본 사이 입이 왜 이리 걸어졌어?

“너 왜 이리 화가 많아? 요즘 욕구 불만이냐?”

설민의 말에 태휘는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어라, 진짜인가 본데? 지금까지의 경험상 원태휘가 이설민에게 연락한 경우는 뭔가 필요한 게 있을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전부 설민이 먼저 전화를 해야 연락이 닿았다. 지난번 술 마시고 영롱이를 찾을 때도 그랬고.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번에도 ‘스타를 알고 싶다’에 영롱이 출연한 직후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 절묘한 타이밍에 설민의 촉이 기민하게 발동했다. 이번에도 영롱과 연관이 있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영롱과 권준원의 사이에 대해 뭐라도 아는 게 있을까?

“너 요새 영롱이랑 어떻게 지내? 연락은 하냐?”

“그 새끼 얘긴 꺼내지도 마.”

질문이 끝나기도 무섭게 세상 차가운 어조로 답하자 설민은 순간 깨갱하고 말았다. 새끼, 아니면 말지 살벌하기는.

“뭔 일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잘 좀 지내봐. 옛날엔 그렇게 죽고 못 살더니…….”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말을 얹자 태휘는 말없이 눈으로 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민은 바로 옷깃을 잡아당기며 겨우 어르고 달랬다.

“알았어. 얘기 안 할게. 아, 새끼……. 뭔 말도 못 꺼내게 할 거면 대체 왜 보자고 했냐?”

설민은 태휘를 도로 자리에 앉히고는 태휘의 낚싯대까지 챙겨 지렁이로 미끼를 끼우고 물에 던져 받침대에 걸쳐 놓았다. 그러는 동안 태휘는 뚱한 표정으로 앉아 저수지 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태휘의 표정을 힐끔 살피며 설민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가정을 해 보았다. 영롱이와 연관된 일이 아니라면 이 녀석이 이리도 까칠할 이유가 대체 뭘까? 만나자고 연락한 걸 보면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을 텐데.

고작 유학 가기 전에 얼굴이나 보자고 할 정도로 사교성이 있는 녀석이 아니니 말이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권했다가 끊었다는 녀석의 말에 혼자 불을 붙였다.

“너 유학 가면 얼마나 있다가 오는데?”

“최소 2년. 더 길어질지도 모르고.”

그래서 영롱이 솔로 앨범 프로듀서를 거절한 걸까 싶었다. 당연히 태휘가 맡을 줄 알았는데. 아니, 유학과 상관없이 그 전에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서 불가능한 거였을까?

이렇게 영롱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정색하는 걸 보면 그러고도 남지. 궁금해 죽겠는데도 물어볼 수 없고,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 줄 리가 없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도 음악에 대한 슬럼프 때문에 해체한 건 진짜였나 보네. 한창 활동할 만한 나이에 유학을 결심한 걸 보니. 태휘 정도의 능력을 갖춘 녀석이 이 시기에 공백기를 가진다는 것도 쉬운 결정이 아닌데.

“갔다 오면 나 솔로 앨범 프로듀서 해 줘라.”

“……그래.”

이런 건 웬일로 또 순순히 수락하지? 오랜만에 만난 녀석은 변한 듯 그대로인 듯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의 침묵 후에 태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해체한 뒤로, 솔직히 멤버들 만날 자신이 없었거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웬일로 원태휘가 순순히 속마음을 털어놓지? 그동안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기는 있구나 싶었다. 세상 뻣뻣했던 녀석의 마음을 말랑하게 바꿔 놓고 입도 트게 만들 정도의 대사건이. 만나자마자 욕부터 해재낀 것도 전보다 감정 표현이 솔직해졌단 증거였다.

“그런데 멤버들 빼고 나니까, 내 인생에 다른 친구가 없더라고. 마음 터놓을 사람이.”

“네가 이제야 나를 친구로 인정해 주는구나. 영광이다!”

설민이 추임새를 넣자, 태휘는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노려보았다. 스스로 얘기를 털어놓으면서도 그런 자신이 싫은 듯한 얼굴이었다. 싫어도 이게 현실인 걸 어쩌겠냐. 포기하고 받아들여라, 원태휘.

설민은 그런 태휘가 고소하면서도 동시에 이해가 됐다. 10대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거치고 STORY 활동에 전력을 다했기에, 20대 초반 현재에 남아 있는 인맥은 멤버들뿐인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설민은 예외에 속했지만.

설민에게서 미친 사교성 빼면 시체였기에 가수 활동하면서도 초중고 동창은 물론 STORY 멤버 외에 사귄 연예인 친구들과도 꾸준히 친분을 쌓아 오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의 성향을 잘 알기에, 자신 빼고는 이러기 쉽지 않단 걸 알았다.

아마 태휘도 지난 1년 동안 그 사실을 체감한 듯싶었다. 녀석의 성격상, 그동안 새 친구를 활발히 사귀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럼 대체 1년 동안 뭐 하고 살았을까? 그리고 왜 이제야 날 만나 준 거지? 이 시점에서 왜 마음 터놓을 친구가 필요해졌을까? 재빨리 머리를 굴리던 설민은 자기만의 결론을 내렸다.

“너 여친 생겼냐?”

설민의 촉은 그렇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자신의 직감을 늘 자신만만해하던 그놈의 설레발 때문에 가끔 크게 헛다리를 짚곤 했다. 그동안 제삼자 입장에서 영롱과 태휘를 관찰하며 파악한 정보는 대충 이러했다.

1. 영롱은 태휘를 오랫동안 짝사랑했다.

2. 영롱은 STORY 활동 중에 태휘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

3. 영롱은 태휘에게 차인 후 홧김에 설민과 첫 경험을 하고 섹스 파트너가 된다.

4. 누가 봐도 티 나는 영롱의 마음을 몇 년 동안 외면하고, 숙소 한방에서 그렇게 부대꼈음에도 영롱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걸 보면 태휘는 아마도 고자이거나 무성욕자거나 뼈헤테로일 것이다.

5. 그 뒤로 영롱과 태휘의 관계는 급격히 나빠지고, 둘 사이는 회복되지 못한 채 팀은 해체한다.

6. 해체 후 영롱은 설민과 섹스 파트너 관계도 끊고 점점 멀어진다.

7. 해체 후 태휘는 멤버 모두를 멀리한다.

8. 해체 7개월 후 술 취한 태휘가 설민에게 전화해 영롱이 어디 있는지 묻는다. 그 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9. 영롱에게 새 남자 권준원이 접근한다.

10. 태휘는 곧 미국 유학을 떠난다.

이때까지 주어진 최소한의 정보와 눈치로 추측한 둘의 관계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일단 4번부터 거하게 망한 셈인데, 설민으로선 ‘영롱을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런 극단적인 결론에 다다랐다. 그래도 가수 데뷔 전에 여자 친구도 있었다고 하니까 고자, 무성욕자, 뼈헤테로 셋 중에 맨 마지막 경우가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하지만.

8번 이후가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구간이었으나, 자신이 연관되어 있지 않으니 블랙홀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 순서가 맞는지도, 구체적인 사실 여부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만 해도 설민은 태휘와 영롱의 관계를 의심하지 못했다. 이후 10년도 더 지난 후에야 자신의 거대한 삽질을 깨닫고 이불킥을 날리게 된다.

“원태휘, 너 연애하는 거 맞지?”

설민이 취조하듯 물어 대자 태휘는 시선을 피하고는 낚싯대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입질 오는지 봐도 모르면서 보긴 뭘 봐! 그나저나 이제야 좀 재미있어지네. 원태휘의 연애라니! 그뿐만 아니라 연애 상담을 위해 찾아온 게 나라니!

본인이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나만큼 적절한 대화 상대가 없었겠지. 저도 별수가 있나. 지가 연애 얘기를 한강 형이랑 할 거야, 개오은이랑 할 거야? 그렇다고 차영롱이랑 할 거야?

태휘를 알게 된 이후로 처음으로 녀석이 귀엽게 느껴졌다. 해체 후 다들 연애질이네. 차영롱도 그렇고, 원태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강이 형이랑 오은이는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지. 설민은 태휘의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 이 형님한테 다 털어놓아 봐.”

고작 일주일 생일 빠른 주제에 거드름 피우며 말하자 태휘는 한숨을 쉬며 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민은 그런 태휘를 겨우 또 끌어 앉혔다.

“왜? 누구랑 사귀는데 그래? 나도 아는 여자야? 연예인? 몇 살?”

“그런 건 알 거 없고…….”

“그럼 사귄 진 얼마나 됐는데?”

태휘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녀석이 이렇게 당황하는 건 또 처음 보네.

“반년?”

“뭐야. 한창 좋을 땐데? 뭐가 문제야?”

시답잖은 칼로 물 베기 사랑 싸움으로 이렇게 뜸 들이는 거였다면 저수지에 밀어 버려야지.

“바람피우는 거 같아.”

설민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육 개월밖에 안 됐는데? 완전 엽기네.”

설민은 다른 의미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태휘가 바람난 것도 아니고. 원태휘를 애인으로 두고 바람이라니, 그 여자도 보통이 아니네. 하지만 설민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대부터 욕하기보다는 일단 친구에게서 문제를 찾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너한테 문제 있는 거 아니냐? 6년도 아니고, 어떻게 사귄 지 6개월 만에 바람피워? 네가 뭔가 만족을 못 시켜 줬겠지. 마음이든 몸이든.”

그 지적에 태휘는 세상 심각한 얼굴이 되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원태휘, 이 새끼 음악에만 천재였지, 연애에는 영 젬병이었구만. 아니면 역시 겉은 멀쩡한데 실은 고자나 조루인 거 아니야?

“바람피우는 현장을 봤어?”

“아니.”

“그럼? 핸드폰 통화나 메시지 같은 거로?”

“그냥, 느낌이 그래.”

“그게 다야? 네가 의처증이라거나…… 그런 거 있는 건 아니고?”

태휘는 대답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너 같은 남자를 사귀면서 한눈을 팔 수 있냐고. 그렇게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그 말만은 삼켰다. 남자로서 매력이 있는데도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거 존나 짜증 나!

옆에서 제일 오래 지켜본 이가 영롱이긴 했지만, 녀석 말고도 태휘를 좋아한 사람은 많았다. 예전에 ‘스타를 속여라, 깜짝 카메라!’ 태휘 편을 찍으며 여성 출연진들이 모두 태휘에게 고백한다는 거짓 설정을 만들었으나, 실제로 거짓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진짜로 그렇게 단체 미팅을 했으면 대다수 여성이 태휘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설민과 가깝게 지내는 친한 누나·친구·동생들 중에서도 태휘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설민처럼 말 많고 가벼운 타입보다 태휘처럼 과묵한 남자를 좋아하니까.

기껏 이빨 다 까고 분위기 다 띄워 놓으면 앞에선 재밌어하다가도 막판에 그들의 마음은 태휘를 향했다. 자존심 상해 끝까지 연결 안 해 줘서 그렇지. 설민은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 알려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럼, 그 여자 전적이 좀 있어?”

“전적?”

“이전에도 바람피운 적 있냐고. 혹시 너도 바람피우다가 만났다거나.”

“미쳤냐?”

태휘는 당장 낚싯대를 집어 갈길 것 같은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아, 새끼. 아니면 말지. 정색하기는. 그러고는 이내 잠자코 생각하더니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닌데, 근데 좀 많이…… 오픈 마인드이긴 해.”

“오픈 마인드?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안 잡는 타입?”

태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고, 우리 리더님. 된통 걸렸구나.

“친하게 알고 지내는 남자도 많고? 엄청 예쁜가 보네?”

설민이 묻자 태휘는 그제야 오늘 처음으로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 봐라? 완전 맛탱이가 갔네.

“엄청 예쁘지.”

그래. 천하의 원태휘 코가 제대로 꿰었으니 예쁘긴 하겠지. 차영롱이 포기하길 잘했네. 제아무리 차영롱이라도 이렇게 눈 높은 헤테로 남자를 무슨 수로 꼬시겠어?

“나도 그런 타입 좀 아는데, 맘고생만 하지 않냐?”

설민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는 말하자, 태휘가 되물었다.

“넌 어땠는데?”

이 새끼가 웬일로 내 경험을 궁금해하지? 지금껏 녀석이 자신의 연애사를 궁금해 하기는커녕, 단둘이서 이렇게 오래 대화한 적이 있었나 싶어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일 얘기 외에, 실없는 소리를 구구절절 늘어놓으면 늘 한 귀로 듣고 흘리거나 컨디션이 나쁠 경우 대놓고 지겹다는 표정을 짓던 태휘였다. 역시나 연애에 관해 대화할 상대가 필요한 거였구만. 설민은 영롱의 얘기라는 걸 최대한 숨긴 채 짧게 언급했다.

“내가 걔의 수많은 남자 컬렉션 중 하나라는 느낌, 존나 짜증 나잖아.”

그 말에 태휘의 동공이 느릿하게 흔들렸고, 설민은 그 눈빛의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뭐야? 넌 그런 느낌은 안 받았어?”

“그게…….”

태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는 내가 종착지일 줄 알았어.”

상당히 자신 있었나 보네. 아으, 재수 없어. 그 반응에 설민은 자기가 더 흥분해서는 열변을 토해냈다.

“야, 걔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20대일 거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벌써 네가 종착지야?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많고 만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새끼가 안 어울리게 순정파네? 아니면 순진한 척하는 거냐?”

그동안 태휘에 대해 몰랐던 여러 가지를 오늘에야 알게 되어 설민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같은 그룹으로 3년을 활동했으면서도 서로의 연애관이나 연애사에 대해 시시콜콜 터놓지를 않아 그 영역의 정보 값은 제로에 가까웠다.

오은이나 영롱이와는 가끔 이런 대화를 나눴지만, 강이 형이나 태휘는 워낙 사적인 얘길 안 했으니까. 우리 팀에서 제일 잘생긴 인간들 둘이 그러니 더 재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겉만 멀쩡한 고자인 줄로만 알았지.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현실을 알았겠네.”

“자신감이 아니라…….”

태휘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긴 아무리 변했더라도, 자기한테 속마음을 다 털어놓으면 원태휘가 아니지. 사람이 갑자기 회까닥 변하면 죽는다고. 설민은 이쯤에서 연애 상담의 솔루션을 제시해 줘야지 싶었다.

“아무튼, 더 맘고생 하기 전에 헤어져.”

“안 헤어져. 아니 못 헤어져.”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너무도 단호한 태휘의 말에 설민은 입이 절로 벌어져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궜다. 얼른 주워서 옆에 있던 깡통에 던져 놓고는 기가 막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가 진짜 맛탱이 갔네. 그럼 바람피우는 거 알면서, 그냥 넘어가겠다고?”

“……일단 지금은 안돼.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걔한테 지금 중요한 시기거든.”

와, 이 답답한 새끼. 내가 다 환장하겠네.

“왜? 뭐? 뭐가 중요한 시기인데? 무슨 사시라도 본대? 걔 때문에 낭비하는 네 인생은 안 중요하냐?”

설민 본인이 말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지금 원태휘 인생을 걱정해 주고 있다니? 하지만 녀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건, 지금은 안돼.”

자신이 저 상황이었으면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데, 겉으로 보기에 태휘는 그저 덤덤해 보였다. 정작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기껏 내준 솔루션 무시할 거면 뭐 하러 연애 상담했냐고 화를 내며 녀석을 저수지에 거꾸로 처박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러면서도 처음으로 원태휘란 녀석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어쩌다 이런 갑갑한 사랑을 시작해 버린 거냐. 그러고 보니 이런 비슷한 동정심이 예전에도 얼핏 들었던 적 있는데.

영롱이 태휘를 좋아했을 때도 이렇게 생각했었다. 어쩌다 원태휘를 좋아해 버려서. 설민은 입질을 기다리며 태휘가 무슨 얘기라도 더 해 주길 기대했으나, 녀석은 또다시 입을 닫아 버렸다.

어쩐지 슬퍼 보이는 그 옆모습에, 수많은 연애 상담이 그렇듯 녀석도 어떤 솔루션을 바라고 자신에게 연락해 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저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했던 거겠지. 엇갈린 사랑을 하는 너희 둘 다, 불쌍하다.

“아! 불쌍은 개뿔! 이 개새끼들!”

자고 있던 설민은 꿈결에 이불을 차면서 벌떡 일어났다. 간밤 꿈에 태휘가 나왔던 듯하다.

“생각해 보니 무슨 부부사기단이야 뭐야? 멤버 속여 먹은 게 누군데! 내로남불 쩌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STORY의 진짜 해체 이유에 대한 원태휘의 폭탄 발언을 듣고, 과거에 두 사람이 연애했을 거로 추측하긴 했는데 정확한 시기는 몰랐다. 그때가 이때였을 줄은. 그 여친이 바로 차영롱이었어! 의심했던 상대가 권준원이었고.

그때가 솔로 활동 직전이었으니, 태휘도 어떻게 못 한 거고. 당시엔 이해가 안 갔는데, 그 애인이 차영롱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녀석을 가수의 길로 이끈 게 다름 아닌 태휘였으니까. 프로듀서는 맡지 않았어도 차영롱의 첫 솔로 앨범은 본인에게도 중요한 의미였을 것이다.

정말 둘의 사이는 알면 알수록 미스터리이다.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태휘와 영롱의 관계는 수백 번 얼었다가 녹았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한 거대한 빙하 같다고. 그 속에 둘리가 있을지 다른 뭔가가 들어 있을지 어찌 알겠어?

그나저나 영롱이 그 새끼는 원태휘랑 사귀면서 정말 권준원도 만났던 걸까……? 만약 사실이라면 차영롱도 대단하지만 원태휘도 만만치 않네.

수년간 팀 멤버들이랑 돌아가면서 자고, 자기랑 사귀는 중에 다른 남자도 만났다고 의심하면서 계속 사귀었다고? 인간이 아니라 보살인가? 아니면 호구인가? 둘이 진짜 잘 만났다, 잘 만났어. 아주 그냥 부창부수에 한 쌍의 바퀴벌레야.

차영롱은 원래 여우라 그렇다 쳐도, 원태휘가 거짓말을 그렇게 잘 칠 줄 알았냐고. 도대체 몇 년 동안 이 커플에게 속아 온 건지, 지난 타임라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그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자다가도 울화가 치밀어 요즘 수면의 질이 엉망이었다.

“진짜. 씹새끼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헤어진 거지? 둘이 2년쯤 연애했다고 했는데, 그럼 태휘가 유학 가고 나서도 계속 사귀었다는 건데……. 영롱이랑 권준원은 또 어떻게 된 걸까? 그러고 보니, 권준원은 언제부턴가 한국에서 자취를 감췄잖아? 그 일 이후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 되었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드니 기상 시간을 알리는 매니저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주매니저

오빠, 오늘 라디오 있는 거 알죠? 10시에 갈게요. 그리고 내일은 SS엔터에서 회의 있어요.

SS엔터에서? 무슨 회의가 있더라?

이설민

회의?

주매니저

재결합 방송 기획 회의요. GBS 본부장님도 참석하신대요.

황혜 CP님이? 결국 GBS에서 진행하기로 했나 보구나. 그 메시지를 확인하고 홈 버튼을 누르려는데 아래에 다른 알림 배지가 떠 있었다. 처음 보는 단체 대화방이 생긴 걸 보니 간밤에 누가 새로 초대한 듯했다. 대화방 인원은 총 다섯.

[한강 님이 계오은, 원태휘, 이설민, 차영롱 님을 초대했습니다]

한 강

얘들아, 매니저 통해서 회의 얘기 들었지? 내일모레 보자^^

아아, 한강 형……. 형의 여전한 해맑음과 눈새력에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부럽다. 저 둔감함…… 영롱이 돌아온 후 5명 단체 대화방이 없어서 이참에 만든 것 같은데…….

원래는 리더가 할 법한 일이지만, 태휘가 이런 걸 살뜰히 챙기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보통은 설민이 연락책이었다. 이번엔 설민도 손 놓고 있자 한강 형이 나선 모양이었다. 형, 다들 단체 대화방 괜히 안 만들고 있던 게 아닌데…….

태휘의 폭탄 고백 이후, 영롱을 제외한 멤버 4인의 단톡방은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서로 간에 몰랐던 비밀이 폭로된 데다가 그 비밀의 중심인 영롱까지 돌아왔다.

그 충격으로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 연락이고 뭐고 다 내팽개친 상태였는데……. 10년 동안 소식도 모른 녀석의 이름이 단톡방에 떡 하니 떠 있는 걸 보자 참으로 낯설었다.

연이은 충격에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재결합 프로젝트는 급물살을 타고 있었으니 필요한 일이긴 했다. 메시지 확인 인원을 표시하는 숫자가 3이라고 남아 있는 걸 보니 아직 아무도 안 보고 자신이 제일 먼저 확인한 듯했다.

이설민

알았어요, 형.

메시지를 입력하고는 한참 동안 단톡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처음으로 STORY 완전체의 단톡방이 생겼다. 예전에 활동할 때는 스마트폰도, 메신저 서비스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후에는 영롱이 없었고.

알고 보면 이 단톡방은 STORY의 단톡방이면서도 ‘차영롱과 그와 잔 남자들’의 단톡방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매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재결합 프로젝트까지 진행한다니? 앞으로 이 멤버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나머지 멤버들은 태휘와 영롱의 대환장 연애사에 잘못 엮이게 된 셈인데! 이런 억울함을 혼자만 느끼고 있을 순 없었다. 밤에 잠도 못 자고 이게 뭐야. 설민은 고민하다가 단톡방 속 한강의 이름을 터치했다.

▶▶

“한강 씨, 넥타이 좀 풀어 주세요.”

한강은 사진작가의 요청에 실크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내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멈추자 사진작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드라마 ‘대재벌의 첫사랑’의 종영 이후 화보 촬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이돌 시절부터 초상권 사진 촬영이나 잡지 화보는 영 자신이 없던 한강이었다.

차라리 일상 연기를 하는 영상 촬영이 나아서 연기는 적성에 잘 맞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대놓고 치명적인 척해야 하는 화보 촬영은 참으로 어려웠다. 그것 때문에 STORY 활동 때도 동생들한테 꽤 놀림도 받고.

‘형은 가만히 있어도 그냥 조각이니까, 뭐를 하지 마!’

그때 동생들의 조언을 잘 받아들여서 어설픈 포즈를 취하는 대신 동작을 최소화하는 식으로 나름의 요령을 터득한 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한강은 언제나 에너지와 끼가 넘쳐흐르는 설민이나 영롱이 같은 타입이 부러웠다. 그리고 자신보단 나았지만 그 둘을 따라잡지 못하는 태휘나 오은을 보며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고.

마지막에 진행한 인터뷰는 화보 촬영만큼은 아니어도 은근 불안했다. 혹시나 말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STORY 재결합 프로젝트를 앞두고, 되도록 인터뷰 일정을 잡지 말라고 신 대표와 태휘로부터 지령이 내려온 터였다. 그럼에도 이 잡지 인터뷰는 재결합 논의가 있기 전에 잡힌 스케줄이라 취소할 수가 없었다.

회사 측에서 사전에 재결합 관련 질문은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다행히도 패션 전문지여서인지 꼬치꼬치 캐묻진 않았다.

가볍게 재결합 진행 가능성에 대해 물었고, 한강도 ‘좋은 기회가 있기를 저도 멤버들도 고대하고 있다’ 정도로 일축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에디터가 진심 어린 눈빛으로 ‘저희도 너무 기대하고 있어요!’라고 말하자 그제야 마음이 훈훈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온라인 탑골 공원 열풍과, STORY의 소환 염원에 대해 말로만 전해 들었지 이렇게 바로 앞에서 그 기대감을 마주한 건 처음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자신이 생각보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걸지도. 재결합을 앞두고 멤버들 모두가 자신과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강은 그랬다.

설민은 오늘 새벽부터 한강에게 전화해 하소연을 실컷 늘어놓았다. 그동안 태휘와 영롱에게 쌓인 감정이 큰 만큼 충격 또한 큰 모양이었다. 멤버 중에서 그 둘과 제일 끈끈했던 녀석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강은 팀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데다가 특유의 개인주의 성향 때문에 언제나 한 발짝만큼의 거리감은 있었다. 그나마 영롱과 그런 관계를 시작해 사적 영역을 공유하는 유일한 사이가 됐을 뿐. 하지만 그것도 육체관계 이상으로 진전되진 않았다.

그에 비하면 설민은 끊임없이 태휘와 영롱 사이에서 알짱거렸고, 그들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물론 한강은 이런 사실을 그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오늘 설민이 한풀이하는 바람에 새로운 정보가 많이 업데이트되었다.

‘형, 그 새끼들이 그때 어땠냐면요……. 둘 다 저를 속이고……. 전 그것도 모르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한강은 설민이 들려주는 모든 얘기가 다 새로웠다. 심지어 녀석이 말한 ‘그때’ 당시에는 자신이 군인 신분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휴가 때 설민이나 오은을 보기는 했지만, 그런 전후 사정을 전혀 몰랐기에 전부 놀라웠다.

태휘와 영롱의 대환장 연애사, 거기에 설민의 오랜 삽질의 역사까지 더해져 막장 드라마급의 사연이 우리 그룹 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니.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자신 역시 그 막장 드라마의 조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니.

자신이 출연한 것도 잊은 오래된 드라마를 10년 만에 강제 시청하는 기분이었다. 조연보다도 시청자 처지에 가까운 심적 거리감 때문인지, 한강은 설민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적당히 반응해 주긴 했지만 내 일처럼 와닿지는 않았다.

주인공 두 사람의 행적을 되짚어 보며 설민은 일종의 배신감과 실망까지 느끼는 것 같은데, 한강은 속으로 ‘그럴 것까진 있나’ 싶었다. 아마도 녀석이 그만큼 영롱을 좋아했기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거겠지.

그리고 설민에게 공감 못하는 걸 깨닫고는, 정말로 자신은 그저 섹스 파트너였다는 게 실감이 났다. 영롱이 다른 멤버들과 잤다 한들, 태휘와 어떤 사이였든 다른 감정이 비집고 들어오진 않았으니까.

물론 영롱이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유혹적이고……. 그때 당시에는 헤어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이었지만 오직 육체관계뿐인 상대였다. 그래서 천만다행이기도 하다. 안 그랬다면 자신 역시 지금 설민처럼 골치 아픈 사랑싸움에 얽혀 맘고생 실컷 했겠지.

아무튼, 설민의 징징대는 한풀이를 들은 후에도 한강은 놀라움 외에 새로 적립된 감정은 없었다. 해체 후 태휘와 영롱이 연애했다는 사실에, 얼마 전 태휘에게 가졌던 일말의 미안함이 조금은 옅어졌을 뿐이다.

그래도 계속 엇갈렸던 둘의 마음이 한 번은 교차했으니 연애한 거겠지. 그 당시 태휘와 영롱이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면, 영롱과 자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몰랐기에 알게 된 뒤로 태휘에게 쭉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터였다. 멤버들을 모아 놓고 폭탄 선언한 그 날, 그렇게 소리 지르는 태휘의 모습은 난생처음 보았으니까.

다만, 지금 궁금한 건. 그렇게 힘들게 연애한 두 사람이 왜 헤어졌을까. 영롱이는 왜 사라졌던 걸까. 그리고 왜 지금 돌아온 걸까. 태휘와 영롱, 두 사람은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동안은 특유의 둔감함 때문에 이들의 연애사에 혼자만 뒤떨어졌으나 알게 된 이상 더는 놓칠 수 없었다. 웬만해선 남의 일에 무관심한 한강이었지만, 이번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게 될 것만 같았다. 10년 만에 후속편이 나온 드라마 시리즈처럼.

▶▶

“다시 불러 볼까? 이번엔 좀 더 리듬 타면서.”

오은은 학교에서 일대일 보컬 레슨 중이었다. 수업용 노트북으로 MR을 재생하자 지도받는 학생은 교수의 말대로 좀 더 리듬을 실어 노래를 불렀다.

오은은 학생의 창법과 목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첫 수업부터 이 학생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 되풀이됐다. 1절 가창을 다 마친 학생에게 개선해야 할 부분을 설명해 주었다.

“여기 후렴 파트에선 twang(비음)을 적절히 써 줘야 소리가 더 풍부하게 들려. 지금은 너무 목을 쓰거든? 그럼 나중엔 성대에도 무리 가고 안 좋아.”

그 말에 학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을 한번 가다듬었다. 오은은 노트북에서 다음 연습곡을 찾으며 학생을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물었다.

“보컬로서 추구하는 롤 모델, 있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학생은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말했다.

“차영롱이요.”

역시. 레슨 첫날부터 단번에 알아챘다. 이 학생이 내고자 하는 음색이 너무도 차영롱의 보컬과 유사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도 교수가 STORY의 서브 보컬이었으니, 괜히 눈치 보여 선뜻 말 못 한 거겠지.

“그게…… 제가 미성이라! 옛날부터 목소리 비슷하단 얘기를 많이 들어서요!”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학생은 애써 변명을 덧붙였다. 오은은 고개를 내저으며 차이점을 냉정하고도 정확하게 집어 줬다.

“원래부터 닮은 게 아니라, 좋아해서 많이 따라 부르다가 제법 비슷해진 거지. 말할 때 목소리는 완전 다르잖아.”

오은이 먼저 말을 꺼내자, 주뼛거리고 있던 학생은 이때다 싶어 평소 하고 싶던 질문을 퍼부었다.

“그럼 교수님, 어떻게 하면 차영롱 보컬 닮을 수 있을까요? 진짜 제 궁극적인 이상(理想)의 목소리거든요. 그룹 멤버에다가, 같은 보컬 라인이니 어떻게 연습하고 노력했는지 다 아실 거 아니에요?”

열성적인 학생의 질문에 오은은 지도 교수로서 진심으로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네가 노력한다고 따라갈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야.”

“왜요?”

“걘 타고났으니까.”

그런 독보적인 미성에 고음, 비브라토 등은 배운다고 배워지는 게 아니지. 무엇보다 원태휘 같은 프로듀서도 만나야 하고.

“걜 따라 하기보다는 네 강점을 찾는 게 빠를 거야. 자, 내가 말한 대로 다시 해 봐.”

오은은 바로 레슨을 이어갔다. 제자에게 꿈도 희망도 다 빼앗을 생각은 없었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하나. 스승으로서 현실적인 조언을 해 줘야 했다.

실제로 그룹 시절에 보컬을 지도해 주신 선생님께서 늘 영롱에게 했던 말은 이거였다.

‘네 목소리는 뭐든지 뚫을 수 있는 무기나 마찬가지이니, 나중에 창법 바꿀 생각하지 말고 지금 상태를 최대한 잘 유지해라.’, ‘행여나 욕심 때문에 과하게 연습해서 목을 혹사하지도 마라.’

반면에 오은에게는 창법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 보고, 연습을 더 하라는 둥 다양한 지적을 하셨다. 그 때문에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으나, 자기가 봐도 보컬로서 영롱의 유니크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도 선생님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고.

차영롱이 한국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을 만큼 독보적인 보컬로 존재감을 남긴 비결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룹 해체 이후 솔로 1집만을 발매하고 활동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가수는 물론 연예계를 아주 떠났기에 모든 영상 자료나 음반에 20대 초반, 그러니까 보컬로서 능력이 정점일 때의 목소리만 남아 있다. 그래서 그 목소리에 반해서 유입되는 팬이 꾸준히 있을 정도였다.

특히나 요즘같이 이놈의 탑골이니 뭐니 하는 복고 열풍이 한바탕 불 때는 더더욱 눈에 띄게 늘어났다. SNS 등에서 영롱의 노래 커버 영상이나 창법 분석 영상이 올라온다거나.

가요계를 떠나 10년 넘게 잠적 중인 가수치고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아이돌 보컬 역사에서 영롱의 존재는 특별했다.

아마 이 학생도 그렇게 팬이 되어 보컬학과까지 온 거겠지. 갓 20살이 된 신입생의 롤 모델이 차영롱이라니. 우리가 한창 활동할 당시엔 완전 꼬맹이였을 텐데. 그렇게 영롱은 아이돌 보컬 중에서도 레전드로 기억됐다. 계속 앨범을 내며 꾸준히 활동해 온 오은과는 달리.

수업을 다 마친 오은이 노트북을 끄려는데, 로그인해둔 메신저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역시 양반이 아니었다. 방금 수업에 지 얘기 나온 거 어떻게 알고. 간밤에 한강 형이 새로 판 STORY 단체 대화방에 영롱이 올린 메시지였다.

차영롱

다들 내일 봐♡

새끼가, 하트는 뭔 하트야. 단톡방에 영롱을 제외하고 다른 메시지는 한강의 첫 메시지, 그리고 설민의 알았다는 메시지 그 두 개가 다였다. 오은은 확인만 하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메시지 옆에 남아 있는 숫자가 없는 것 보니 태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애교 넘치는 영롱의 메시지를 보니 오은은 속이 다시 거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왔을 때도 그랬지만, 녀석을 볼 때마다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불편한 마음이 들어 속이 계속 좋지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 비위가 더 나빠진 걸까.

녀석이 예고도 없이 멤버들 앞에 짠 나타나는 바람에, 자신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다. 졸지에 멤버들에게 거짓말한 셈 됐으니까. 하긴, 그렇게 치면 거짓말은 13년 전부터 했던가.

그러고 보니 그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짓말한 건 아니었다. 단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

누군가 ‘너 차영롱이랑 잤어?’라고 물은 적도 없으니, ‘아니!’라고 거짓말할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다섯 명 전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13년을 보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다 알게 되니, 재결합이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 싶은 태휘의 마음이 이해됐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는데, 이런 우리가 과연 재결합해도 되는 걸까? 아니, 재결합이 가능하긴 한 걸까? 차영롱, 그 새끼……. 이젠 괜찮나? 대체 어쩔 생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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