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아이돌
The Best of S.T.O.R.Y.
Tape 3. (3부)
Track 1. 봉합 (03:08)
Track 2. Catch-up (03:51) <설민&영롱 Duet>
Track 3. Long Way (05:03) <태휘&오은 Duet>
Track 4. 어떤 예감 (04:07)
Track 5. 해후 (02:19)
Track 6. Value (03:42)
Track 7. Mute (04:53)
Track 8. 서리다 (03:15)
Track 9. Solitaire (03:20)
Track 10. 미련퉁이 (02:58)
Track 11. 인상(印象) (04:40)
Track 12. Wind-up (03:26)
Track 13. Outro (01:55)
Track 1. 봉합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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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휘는 영롱을 찾아 회의실 앞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 앞에서 마주 서 있는 영롱과 설민을 발견했다.
녀석은 조금 전 회의 때보단 괜찮아졌는지 엷게 미소 짓고 있었고, 설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영롱을 살피고 있었다. 태휘는 순간 설민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때맞춰 따라 나왔어도 저렇게 대놓고 걱정할 수 있었을까? 나는 언제나 한발이 늦다. 아니, 영롱을 최우선에 두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누가 붙들건 말을 걸건, 다 뿌리치고 제일 먼저 쫓아왔어야 했는데. 10년 전 네가 원한 것도 그것뿐이었을 텐데. 그때 설민이 태휘를 발견했다.
“리더야, 너도 영롱이 걱정돼서 따라온 거야?”
“……아니. 화장실.”
또, 습관적 거짓말. 영롱을 힐끗 보자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태휘를 쳐다보고 있었다. 웃는 거 보니 별일 아니었나 보네.
“회의할 때 얘 상태 안 좋았던 거 못 봤어? 네 맞은편이었잖아.”
“……몰랐는데. 네 옆이었잖아.”
누가 보면 이설민이 차영롱 보호자인 줄 알겠네. 태휘는 기가 찬 표정의 설민을 무시하곤 영롱을 향해 최대한 무뚝뚝하게 물었다.
“어디가 안 좋아?”
영롱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고는 가뿐한 얼굴로 말했다.
“설민이 형이 오버한 거야. 그냥 숙취야, 숙취~. 뭐 하러 따라와?”
녀석의 밝은 모습에 안심하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히 계속됐다. 정말 숙취일까? 누구랑 마셨길래? 태휘의 머릿속엔 물음표가 떴고, 마침 설민이 먼저 물어봐 주었다.
“뭐야? 술 누구랑 마셨어?”
“누구랑 마시긴? 혼자~.”
영롱은 그렇게 말하고는 태휘를 지나쳐 걸어갔다. 태휘는 자신을 스쳐 가는 찰나 재빨리 아래위로 스캔해 보았으나, 지금은 너무도 멀쩡해 보였다. 설민은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쳇, 나랑은 안 마셔 주고.”
영롱의 화장대에 있던 약병의 존재를 모르는 설민은, 단순 숙취라는 그 말을 별 의심 없이 믿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한잔해야 하는 거 아니냐? 다섯 명이서 모처럼? 우리 같이 술 마신 거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내가 언제 우리 가게 비워 둘게. 한 번 와!”
설민은 영롱을 뒤따라가며 신나게 말을 늘어놓았다. 태휘도 그들을 따라 회의실을 향해 걸으면서 못 마땅한 투로 말했다.
“무슨 혼자서 술을, 숙취가 날 정도로 마셔?”
의심과 걱정을 숨기기 위해 애써 퉁명스럽게 꾸민 말투였다. 그때 영롱이 별안간 멈추더니 뒤를 돌았다.
“그나저나, 태휘 형. 화장실 간다더니?”
태휘는 순간 걸음을 멈칫하고는 눈동자를 굴리며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어쩔 수 없이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 동안 손만 닦고 나왔다. 두 사람은 그새 회의실로 돌아간 듯했다. 어쩐지 영롱은 태휘의 걱정을 눈치챈 것도 같은데, 녀석의 속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회의실로 돌아가니 다른 스탭들은 다 떠나고 멤버들과 신솔 대표만 남아 있었다. 신 대표는 어쩐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태휘와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으이그, 우르르 같이 화장실도 다니고. 너희 연습생 시절 생각나서 감회가 새롭네?”
“대표님, 기억 왜곡이 심하신 것 같아요. 저희 같이 화장실 다닌 적 없는데…….”
오은이 정색하자 신 대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내 기억 속에서 너희들 항상 우르르 모여 다녔거든? 얼마나 귀여웠던지.”
그 애들끼리 붙어먹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면 하나도 안 귀여울걸요. 태휘는 속으로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멤버들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추억여행에 빠져 있던 신 대표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는지 손뼉을 치며 집중시켰다.
“자! 이제 우리끼리 마저 회의해야지. 방송국 측에서 제시한 거 다 오케이야?”
멤버들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물론 태휘만 제외하고. 태휘는 담당 PD가 제안한 신곡 작업 문제를 충분히 고민해야 했다. 그때 한강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기획 회의는 괜찮았는데요, 저희끼리 다시 얘기 나눠야 할 문제가 있어요.”
평소 회의에선 늘 뒤로 빠져 있던 한강이 화두를 던지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재결합 프로젝트는 방송으로 끝난다고 쳐도, 회사 차원에서는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요. 저 말고도 멤버들 모두 이 얘기를 하고 싶을 것 같은데.”
한강은 멤버들 얼굴을 한번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재결합 프로젝트의 반응이 좋을 경우, 저희 후속 활동이 계속 이어지는 건지.”
그 질문에 설민도 얘기 잘 꺼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호. 일회성 이벤트냐, 아니면 ‘진정한’ 재결합이냐? 그 말이지?”
한강의 말대로 앞으로 활동 여부도 나름 중요한 문제였다. 저마다 기존의 활동 계획이 짜여있을 텐데, 이번 방송으로만 끝나는 건지 후속 활동이 더 있는 건지에 따라 완전히 뒤집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드라마 촬영 등 장기적인 스케줄이 있는 한강 입장에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신 대표는 여유롭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그건 너희에게 달렸지. 너희가 계속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말고 싶으면 마는 거고.”
오은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저번에 우리 재결합 급하다고 푸념하시던 때랑은 태도가 상당히 다르신데요, 대표님?”
“맞아. 뭔가 굉장히 너그러워 보여, 지금!”
오은과 설민이 연달아 말하자 신 대표는 손을 크게 한 번 내저으며 말했다.
“그건 이 재결합 프로젝트 방송 얘기였잖아. 내 일차적 목표는 이 프로젝트의 성사였으니까. 이것만 성공적으로 치르면 이후의 전개는 순전히 너희 몫이야. 대신…….”
“대신?”
영롱이 두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신 대표는 금세 또 과장해서 울먹거렸다.
“SS 말고 다른 회사에서 재결합하고 활동하면 나 울 거다. 알지?”
멤버들은 저마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일 없을 거 아시잖아요, 대표님~.”
영롱이 달래듯 신 대표에게 말하자 곧바로 태휘가 한 마디 덧붙였다.
“맞아요. 재결합 안 하면 안 했지.”
그 한마디에 순간 회의실은 싸늘한 공기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저 새끼는 꼭 저렇게 초를 쳐요.”
설민이 태휘를 향해 삿대질하며 말하자 신 대표는 울먹이던 목소리를 도로 가다듬고는 말했다.
“아냐. 다른 의견도 귀담아들어야지.”
“대표님은 태휘한테 너무 무르다고요~.”
설민이 불만스레 말하자 신 대표는 별수 있냐는 듯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15년 전의 내가 쟤한테 리더 자리를 준 걸 어쩌겠니?”
그러고는 계속 얘기해보란 듯이 손짓하자 태휘가 말을 이어갔다.
“지금 미리 정할 필요 없잖아요. 일단 방송 무사히 마치는 거에 집중하고. 후속적인 활동은 그 반응 보고 결정해도 돼요.”
냉정한 태휘의 말에 오은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반응은 볼 것도 없지 않아? 지금 재결합 요청이 이렇게 폭발적인데. 방송 나가면 틀림없이 빵 터질걸?”
“빵 터지는 건 터지는 거고. 너 지금 네 제자 또래의 애들이랑 상대해서 이겨 먹을 수 있겠어?”
오은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누가 누굴 이겨 먹는 걸로 대화가 튀어?”
“우리가 재결합해서 그룹 활동 계속 이어간다고 생각해 봐. 그럼 한창 어린 후배들이랑 경쟁해야 하고. 나 같아도 지금 내가 프로듀싱 맡은 애들이랑 붙어서 이길 자신 없는데, 활동할 수 있겠어?”
태휘의 말이 끝나자마자 설민이 바로 끼어들어 의문을 제기했다.
“리더야. 뭘 꼭 이겨 먹어야 하냐?”
태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럼. 가요계가 다 차트 전쟁이고 수치 싸움인데. 다시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그 전쟁터에 뛰어든다는 의미라고.”
“그렇다고 우리가 못 이길 건 없지. 천하의 원태휘가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는 얘기야. 지금껏 우리 말고 재결합한 1세대 아이돌이 한둘이야? 그중 활발히 활동 이어가고 있는 팀이 얼마나 있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재결합으로 이목을 끄는 건 잠시일 뿐, 대중들은 금세 또 잊곤 했다. 아니면 저마다의 사정으로 다시 흩어지거나.
“우리가 계속 아이돌로 활동했으면 모를까. 이제 와서 우리가 가요계 현역으로 활동하면 애들 노는 판에 눈치 없이 끼어드는 꼰대 소리 듣는다고.”
객관적으로 현실을 보는 태휘의 단호함에 신 대표와 멤버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그중 한강만이 의견을 정리할 겸 입을 열었다.
“그럼 태휘 네 생각은 즉…….”
“그냥 일회성 이벤트로 그치는 게 제일 나을지도 몰라요.”
“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지금껏 재결합한 1세대 중에서 이렇게 GBS 같은 공중파 방송사가 적극적으로 기획한 전례는 없었어. 그럼 차이가 있지 않을까?”
“방송국에서도 시청률 때문에 이용할 뿐,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는 게 아니잖아요. 방송으로 얻는 인기도 한순간인데. 이후의 일은 순전히 우리의 몫이고, 잘 해낼 자신 없으면 시작하지 않는 게 낫죠.”
한강이 태휘의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설민이 반박하고 나섰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때?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팬들을 위해서 재결합한다.’ 이러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는 거야?”
“오히려 나는 그게 걸려. 방송국 측이 우리 팬들 마음 이해해서 이런 프로그램 기획하는 거 같아? 아니야. 우리 재결합 원하는 팬들이 얼마나 될까? 자기들 추억 망치지 말고 그냥 예전 모습 지켜 달라고 그러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설민이 따지듯 묻자 태휘가 정색하며 되물었다.
“STORY 팬카페도 안 들어가 봤어? 그런 글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 팬카페가 아직도 있어?”
“……네가 왜 아무 생각 없이 재결합하자고 설쳤는지 알겠다. 카페가 있는지도, 팬들 생각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설민은 팬카페가 아직 있다는 사실보다, 태휘가 그 카페에 들어가 팬들의 반응을 살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누구보다 무심할 것 같이 생겨 가지고는. 은근히 팬들 잘 챙긴단 말이야. 이내 설민은 반박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 기억을 되살렸다.
“그런데 내가 만난 팬들, 가끔 우리 막걸리바 놀러 오는 친구들 있거든? 걔네는 오빠들 한번 뭉치면 안 되냐고 그러던데!”
“나도 콘서트 때나 생일 파티 때 그런 얘기 듣긴 해. 어떤 애는 자기 평생소원이라더라. 우리 뭉치는 거 보는 거.”
오은이 설민의 말에 힘을 보탰다. 그제야 한참을 잠자코 있던 신솔 대표가 나섰다.
“그건 내가 정리해 줄게. 결국 재결합에 있어서 모든 팬의 바람은 다 다르고, 그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결과는 없을 거야. 하지만 이거 하난 자신할 수 있어.”
신 대표는 멤버들의 얼굴을 한 번 돌아보곤 말을 이었다.
“너희를 진심으로 아끼는 팬들이라면 너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할 거라는 거. 태휘 말대로 재결합을 원치 않는 팬들이 있다고 해도, 너희가 결심만 한다면 굳이 하지 말라고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면서 말리진 않을 거란 말이지.”
한강은 신 대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휘를 보며 물었다.
“태휘 네가 하고 싶은 말은 골수팬들 마음은 대중들과 다르다, 이 말이지?”
“대중들 마음도 제각각인 건 마찬가지긴 해. 매번 추억의 그룹 소환하는 거 지겹다는 의견도 많고.”
오은이 끼어들어 먼저 답하자 태휘도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그룹의 결과를 이미 다 봤으니까. 좋게 끝날지 아니면 망칠지……. 두려움과 걱정이 있다, 이 말이야.”
태휘는 멤버들과 신 대표의 얼굴을 한 번씩 훑고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천천히 두드리며 말했다.
“개인적으로 저는 STORY만큼은 그저 추억으로, 그 시대만의 레전드로 남아 달라는 바람이 가장 묵직하게 와 닿아요. 어쩌면 그게 제일 아름다운 그림일지도 몰라요.”
태휘가 덤덤하게 얘기하자 설민은 벌써 그런 결론을 내린다는 게 답답하고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리더야, 넌 왜 무조건 안 좋은 상황만 생각하냐? 우리가 잘하면 되잖아! 설마 우리가 망치겠어?”
“물론 잘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던 1세대 아이돌들 모두가, 처음부터 망칠 작정으로 시작했겠어? 시작은 좋은 의도와 의지였겠지.”
태휘는 한 문장 한 문장에 힘을 꼭꼭 실어 분명하게 말했다.
“의지와 다짐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다들 잘 알지 않아?”
어쩐지 뼈가 있는 그 말에 한강, 설민, 오은은 태휘의 눈빛이 서슬 퍼렇게 느껴졌다. 괜스레 찔렸다고 할까나.
태휘는 지금껏 자신들이 겪어 온 모든 상황을 크게 묶어 말했을 뿐이고, 각자 공감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STORY의 해체만 해도 그렇다.
멤버들은 그룹을 유지하고 싶어 하면서 욕구도 절제하지 못해 멤버 사이의 선을 넘고 말았다. 태휘는 영롱과 형·동생 사이로만 지내겠다고 다짐했지만 그것 역시 지키지 못했다. 그랬던 우리가, 10년이 지났다고 달라졌을까?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우린 지나간 세대일 뿐이야. 우리의 어른 세대를 봐. 아무리 젊은 감각 배운다고 노력해도 결국 우리 눈에는 어떻게 보여?”
“……꼰대지.”
오은이 깊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신으로선 벌써 그 현실을 체감하는 중이었다. 와중에 신 대표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지레 뜨끔해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두고 하는 말이야?”
“대표님 정도면 거의 저희랑 비슷한 세대죠. 이제 같은 구세대예요.”
설민은 나름 위로랍시고 그 말을 던졌고 신 대표는 티슈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오은은 태휘의 의견을 한 번 되짚으며 확인했다.
“그러니까 형 얘기는 되도록 추억의 시곗바늘을 억지로, 거꾸로 돌리진 말자는 얘기야?”
“무슨 노래 가사 같네.”
설민이 비꼬듯 말하자 오은이 째려보았다. 태휘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갈고 닦아도, 중고가 새것이 될 수 없잖아. 어차피 시대는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으로 남아 봤자 좋을 게 뭐야? STORY는 그런 팀으로 남지 않길 원해.”
“같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준비하면 되잖아. 기존 팬들도 만족할만한 퀄리티의 음악도 만들고, 요즘 세대들이 좋아할 음악도 도전하고. 다들 그럴 각오 없이 시작하겠어?”
설민이 말하자 태휘는 멤버들을 둘러보고는 반문했다.
“다들. 그럴 각오 되어 있는 거 확실해?”
“그럼!”
자기 혼자만 힘차게 대답하자, 설민은 당황하며 나머지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영롱은 아까부터 계속 묵언수행 중이었다 치고, 한강도 오은도 어째 조용한 것이 그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뭐야, 다들. 반응 왜 이래?”
설민이 어리둥절해하자 오은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형, 벌여 놓은 사업이랑 고정 출연도 꽤 되지? 그거 다 정리할 거야?”
그 말에 설민은 바로 입을 꼭 다물고 말았다.
“나야 방송 활동도 거의 안 하고 방학도 있고 괜찮지만. 강이 형도 드라마나 영화 한 번 들어가면 몇 개월씩 준비하는데…….”
오은이 말끝을 흐리자 태휘가 그 뒤를 이어 말했다.
“가수 활동에 집중할 수 있겠어? 요새 안무 디렉팅 손 놨다고 분위기 너무 모르는 거 아냐? 지금 데뷔 준비 중인 애들, 이미 활동하고 있는 애들, 몸 부서져라 춤추고 연습해. 우린 1~2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12년을 쉬었어. 그런 애들 열정 따라잡을 수 있겠어?”
태휘가 말로 뼈를 때리자 계속 반박하던 설민마저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자신이 안무 지도할 때만 해도 조금이라도 기합 빠지면 엄청 혼내지 않았던가. 이제는 안무 감독들 연령대가 전체적으로 낮아져서 자기들을 혼낼 수 있는 군번도 거의 없다.
게다가 요즘 방송국 기술과 장비도 좋아져서, 음악 방송 한 번 녹화할 때도 다각도에서 고화질로 촬영하기 때문에 예전보다 더 완벽을 기해야만 했다. 춤뿐만이 아니라 보컬, 컨셉 및 방향성 등 총체적으로 트렌드에 맞게 재편돼야 했다.
또한 마인드 자체도 새롭게 리셋 해야 하고. 영롱을 제외하고 연예계에서 꾸준히 활동하긴 했지만 아이돌로서의 활동은 12년 전에 멈춰 있었으니까. 12년의 공백이란, 생각보다 가볍게 매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현실적인 문제들을 태휘가 일깨워 주자 회의실은 싸늘히 얼어붙었다. 중간중간 실없는 소리를 던지던 신 대표도 이번에는 섣불리 끼어들지 않고 멤버들의 반응만 살폈다. 한참 동안 침묵만 맴돌자 태휘는 맞은편에 앉은 영롱을 힐긋 보고는 입을 열었다.
“차영롱. 너도 말 좀 해 봐.”
태휘가 굳이 지목하자 신 대표와 나머지 멤버들의 시선이 영롱에게로 쏠렸다. 회의 내내 아무 말도 없이 듣기만 하던 영롱은 고개를 들어 태휘를 응시했다.
“10년이나 떠나 있다가 돌아왔으면, 가수로서 어떤 계획이나 목표가 있을 거 아니야?”
그 질문에 회의실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다들 영롱의 대답을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영롱은 깍지 낀 손에 턱을 기댄 채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나 계획 따위 안 하는 거 잘 알면서.”
물론 그건 누구보다 잘 알고, 더는 의심하지 않기로 약속했다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엔 지금 돌아온 타이밍이 너무도 수상쩍단 말이지. 태휘는 머리가 아픈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는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그럼 목표는?”
“당연히 목표는 있지.”
“뭔데?”
“같이 노래하는 거.”
간단한 한마디에 태휘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좁아졌다.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치켜 올려 영롱을 쳐다보았다.
“그게 다야?”
“그게 다야.”
의구심 가득한 태휘의 표정에도 영롱은 더는 할 말 없다는 듯이 짧게만 덧붙였다.
“난 그거면 돼.”
앞서 멤버들과 심각하게 떠든 모든 이야기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여전히 단순하고 명쾌하네.”
태휘는 감탄 반 비꼼 반의 감정을 담아 툭 던졌다. 그럼에도 영롱은 전혀 타격 없다는 듯이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
영롱의 기운 빠지는 발언으로 신 대표와 STORY 5인의 회의는 급 소강상태가 되어 마무리 지어졌다. 신 대표는 다른 일정으로 먼저 일어섰고, 남아 있는 멤버들도 자리를 정리했다.
태휘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영롱을 힐끗거렸다. 아까 아파 보인 게 단순히 숙취 때문이라는 말을 설민은 곧이곧대로 믿을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녀석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중이었다.
“리더야, 담배나 한 대 피우자.”
설민이 태휘에게 말하자 옆에 있던 영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쳐다보았다.
“형, 담배 다시 피워?”
태휘는 아무 대답도 안 했다. 영롱은 입술을 삐죽이더니 불만 가득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저번에 호텔에서 만났을 땐 안 피우길래. 이번엔 진짜로 끊은 줄 알았지.”
그 말에 순간 한강과 설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져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은은 그날 자신도 그곳에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지만, 저 발언은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던 태휘도 멤버들의 시선에 결국 무너져 고리눈을 뜨고 손사래를 쳤다. 당황한 입은 벙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호텔에서 만나아? 둘이?”
설민이 목소리를 높여 묻자 태휘는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미치겠네, 진짜.
“차영롱, 너. 말을 똑바로 해.”
그날 얘기할 거면 계오은 먼저 호텔에 온 것부터 설명하라고! 하지만 영롱은 모르는 척 한껏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똑바로? 아아. 형이 다짜고짜 내가 묵는 호텔에 불쑥 찾아왔다고?”
“아니. 그렇게만 얘기하면 더 ……됐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태휘는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자 잔뜩 흥분한 설민이 태휘를 향해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난 안 됐거든? 나와! 담배 피우면서 얘기해!”
“너 혼자 갔다 와. 나 끊었어.”
입에 담배를 물고 회의실을 나서려던 설민은 놀라고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야? 너 불과 얼마 전까진 피웠잖아. 나랑!”
“그 이후로 끊었어.”
“갑자기?”
설민은 재빠르게 눈을 굴려 태휘와 영롱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호라, 이것들 봐라? 설민은 태휘에게 금연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너무도 잘 알았다.
11년 전 낚시터에서도 담배 끊었다고 했지? 그리고 그때 둘이 사귀고 있었고. 근데 지금 영롱이 다시 돌아오니까, 갑자기 또 끊어? 설민은 담배를 도로 주머니에 넣고는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럼 나도 끊을래.”
“꼴값들하고 앉았네.”
보다 못한 오은이 못 참고 한마디 했다. 태휘, 설민, 영롱 세 사람을 지켜보다가 무심결에 마음의 소리가 육성으로 툭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한강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 멤버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고, 설민은 괜한 민망함에 헛기침만 했다.
회의실에 다섯 명만 남게 되자 묘한 공기만 가득했다. 회의가 끝났는데도 뭔가 찝찝함이 남았는지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고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박차고 일어난 건 오은이었다.
“더 할 얘기 있으면 하셔들. 난 가요.”
오은이 일어서니 한강도 따라 일어섰다. 태휘와 영롱을 노려보고 있던 설민도 결국 담배를 도로 물고 밖으로 나섰다. 방 안에는 태휘와 영롱만이 남았다. 회의실 밖에서 한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휘야, 넌 회사에 있을 거야?”
“아뇨. 가야죠.”
태휘는 한강에게 답하고는 영롱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회의실을 나서려던 영롱은 불쑥 다가온 태휘 때문에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영롱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간 태휘는 일순 숨을 들이마셨다. 숙취라더니, 술 냄새는 안 난다? 그렇게 술 셌던 애가 숙취 올 정도면 꽤 마셔야 했을 텐데. 역시 거짓말이지? 녀석에게서 술 냄새가 나지 않는 걸 확인하곤 곧장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때 영롱이 손바닥을 펴서 태휘의 가슴을 힘주어 밀었다. 방심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태휘는 힘없이 회의실 벽에 밀어붙여졌다. 영롱은 조금 전 그가 자신에게 한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 코를 킁킁거렸다.
태휘가 너무 놀라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사이, 영롱의 입술이 귓가에 다가왔다. 녀석의 숨결이 귓불에 닿자 솜털이 오소소 일어서는 아찔한 감각과 함께 저도 몰래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형은 담배 냄새나.”
영롱은 작게 속삭이고는 태휘를 그대로 벽에 밀어 둔 채 회의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놈의 심장은 왜 이렇게 날뛰어 대는 건지. 영롱의 거짓말을 밝혀내려다가 자신의 거짓말을 들킨 셈이었다. 젠장. 그러게 왜 담배 끊었다고 거짓말했지? 자신조차 이해되지 않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과 곧추선 솜털이 진정하고 가라앉을 때까지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다가 잠시 후 회의실을 나섰다. 복도 중간 엘리베이터 앞에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태휘는 불현듯 오늘은 이대로 헤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설민!”
“아, 또 왜?”
“너네 막걸리바. 오늘 가도 되냐?”
▶▶
STORY 멤버 다섯 명은 설민의 막걸리바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이었는데도 간판과 실내조명은 꺼져 있었다. 설민이 도착하기 전에 바 매니저에게 전화해서 직원 모두를 일찍 퇴근시켰기에 가게는 비어 있었다.
1층과 2층은 막걸리바였고, 3층은 설민이 사무실 겸 개인 공간으로 쓰는 단독 건물이었기 때문에 건물 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후문으로 들어오면 누구에게도 노출되지 않았다.
설민이 그냥 한 번 툭 던져 본 술자리 제안을 태휘가 받아들이다니 의외였다. 물론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재결합을 위한 방송 기획 회의까지 마친 마당에, 멤버끼리 그동안의 회포를 풀 기회가 없었다니. 어찌 보면 터무니없이 늦었지.
술자리는커녕 이렇게 딱 다섯 명만 모인 것 자체가 엄청 오래됐으니까. 해체 기자회견 때도, 그 전후에 있던 회의 때도 늘 회사 관계자들이 함께 자리했으니 12년도 넘었을 것이다.
막걸리바에 들어서며 설민은 불현듯 떠올랐는지 뒤돌아 영롱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영롱이 넌 괜찮아? 숙취라며 오늘 또 달려도 되겠어?”
“간단히 마시지, 뭐.”
“글쎄다. 과연 간단하게 끝날까?”
설민의 말에 영롱은 씩 웃더니 뒤따라오던 태휘를 쳐다보았다.
“태휘 형 그동안 술 전혀 안 늘었지? 저 인간 건사하려면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그러자 오은이 대놓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왜 태휘 형을 건사하는데?”
영롱은 아무 대꾸 없이 웃기만 했고, 태휘는 아까 회의 때 지끈거리던 머리가 다시금 아파지는 듯했다. 누가 누굴 건사한다는 건지. 지금 걱정되는 게 누군데. 멤버들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던 태휘는 문득 아까 세나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통화 가능할 때 연락해요.’
회의 직후에 영롱을 따라 나가느라 바로 답장하지 못 했던 터였다.
“먼저들 들어가. 나 통화 좀.”
“누구랑?”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영롱만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이제야 녀석이 돌아와 다섯 명이 다 모였다는 현실을 체감했다. 서라운드 오디오가 쉴 틈 없이 꽉 차는 기분. 지난 10년 동안 태휘 주변의 수다쟁이는 오직 이설민 한 명만 남겨 뒀었는데, 다시 차영롱이 추가됐구나.
“신경 꺼.”
“칫.”
멤버들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상대방은 오래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형수님.”
- 늦었네요. 바로 전화할 줄 알았는데.
태휘는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운 채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았다. 그러다가 막걸리바 유리문에 비친 영롱의 옆모습을 보고는 도로 손을 뺐다.
“네. 오늘 좀…… 바빴어요.”
통화 상대는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 예상했겠지만 확실하게 알아낸 건 없어요.
“네.”
- 전문가 말로는 하나는 신경안정제 류의 약물로 보인대요. 모양이나 색깔로 봐서.
태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변에도 몇몇 지인들이 의사의 처방을 받아 흔하게 복용하곤 했으니까, 신경안정제라면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근이완제 같다고 하네요. 반으로 쪼개져 있는 것 보니까, 항상 최저용량 복용해야 하는.
근이완제? 고개를 돌려서 가게 안을 힐끗 들여다보았다.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멤버들과 막걸리바 내부를 구경하고 있었다.
- 걱정되면 영롱 씨한테 사람 한 명 붙여 줘요?
침묵 속에서 태휘의 염려를 알아챈 듯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러실 것까진 없어요. 형수님께 더는 폐 끼칠 수 없죠.”
- 이 정도는 폐도 아닌데. 평소에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할걸요.
핸드폰 너머로 여유롭게 웃는 세나의 미소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태휘는 자신의 형보다도 시원시원한 성격의 세나가 더 편했다. 원태성은 무슨 복이 있어서 이런 분과 결혼한 거지.
“정말 괜찮아요.”
- ……이제 태휘 씨가 옆에서 지켜볼 거니까?
그건 질문이 아닌 확인이었다. 태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망연히 서 있었다.
▶▶
통화를 마치고 막걸리바 안으로 들어오니 설민과 영롱 둘이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설민은 태휘더러 2층에 있는 룸으로 올라가 있으라고 말했다.
“너흰 어디 가?”
“직원들 다 퇴근시켰잖아. 안주 만들어야지. 술이랑 기본 안주는 갖다 놨어.”
“네가 직접 만들어?”
“그럼. 웬만한 메뉴는 내가 다 할 수 있으니까.”
“설민이 형 바지사장이 아니라는 게 놀랍지 않아?”
뒤에서 영롱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넌 어디 가?”
“설민이 형 도와주려고.”
태휘는 순간 ‘네가 왜?’라고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내가 요리 좀 하잖아.”
그 말에 태휘는 모르는 척하며 눈동자만 도르르 굴렸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설민은 그 찰나 태휘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뭐야? 차영롱 요리 많이 먹어 본 표정인데.”
“금방 준비해서 갈게. 올라가 있어.”
영롱은 설민의 등을 떠밀어 계단을 내려갔다. 태휘는 머리가 아픈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오늘 이 회식이 자신의 청문회 자리가 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애초에 타깃은 차영롱이었는데, 본인 역시 덩달아 원 플러스 원 상품처럼 함께 매대에 진열된 기분이랄까.
다들 신나서 이것저것 물어볼 텐데 멤버들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인생과 차영롱의 인생이 얼마나 복잡하게 엉켜 있고, 서로의 존재를 완벽히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새삼 실감했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은 채 2층에 있는 룸으로 들어서자 한강과 오은은 벌써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벌써 시작했어?”
태휘가 자리에 털썩 앉자 한강이 계단 쪽을 힐긋 보며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설민이한테 대충 얘기 듣긴 했는데. 다 진짜야?”
청문회 시작이군. 태휘는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영롱에게 궁금한 게 잔뜩 쌓인 만큼, 그동안 자신 역시 멤버들에게 숨긴 게 많으니까. 우리끼리만 있는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겠지.
“뭐라고 했는데요?”
“너랑 영롱이 말이야. 아주 죽고 못 사는 연애를 했다던데?”
‘죽고 못 사는’은 다분히 이설민의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간 표현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 반박은 못 했다. 태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오은이 덧붙여 물었다.
“그래서 그때 우리 안 본 거야?”
태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비밀 연애였고, 또 그땐 아직 화도 안 풀렸었고.”
한강과 오은을 빠르게 훑어보는 눈빛에 두 사람은 그제야 자신들이 한 짓을 기억해 낸 듯했다. 태휘에게 맞아 코피까지 흘린 그날이 떠올랐는지 오은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형은 여태껏 화 안 풀린 거 같은데?”
“화 안 풀렸으면 이렇게 못 보지. 게다가 지금은 그 당사자가 돌아왔잖아.”
결국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자신과 영롱이라는 걸 지금은 안다. 태휘가 화났던 건 그룹 시절 다들 영롱이랑 자놓고 뻔뻔하게 재결합을 찬성해서였다. 영롱이 돌아온다는 확신도 없었고, 녀석의 소식조차 몰랐으니 그 화를 남은 멤버들에게 풀 수밖에.
12년 전만 해도 애증과 원망, 죄책감 등이 복잡하게 뒤엉켰고 그 꼬인 실타래를 푸는 방법 또한 몰랐다.
“얘네 연애한 거, 너도 알았어?”
한강이 옆에 있던 오은을 향해 느닷없이 묻자 손을 번쩍 들며 방어하는 모션을 취했다.
“알긴 뭘 알아? 나도 그땐 꿈에도 몰랐어. 지난 뒤에 추측해 보니 그랬겠다, 싶은 거지.”
“근데 태휘 너 그러면서 10년, 아니 9년 동안 영롱이랑 연락 안 했다고?”
“네.”
지금까지 한강은 연예계에 몸담으면서, 별별 막장 연애사는 충분히 많이 주워들었다고 생각했다. 남의 사생활엔 신경을 끄는 자신마저도, 같이 일하는 스탭들을 통해서 원치 않게 접하게 됐다.
누가 누구랑 사귀었다더라, 걔가 또 누구랑 만나더라, 그들이 같은 프로그램에서 마주쳤다더라, 등등. 그런 소문들은 귀가 뚫려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것들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알게 되더라도 더 깊이 관심 갖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가장 막장의 연애사가 우리 그룹 안에 있었어! 생판 남도 아니고 자신도 나름 얽혔다면 얽힌 일이었기에 호기심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도 동생들의 사생활이니 설민처럼 시시콜콜 세세히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둘이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연애를 했다면서,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을 끊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한강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왜? 난 이해되는데. 아주 더럽게 헤어졌나 보지.”
오은이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연애 안 하고 계속 친한 형·동생 사이였다면, 우리랑은 연락 끊었어도 둘은 이따금 연락하고 지냈을걸?.”
“진짜 안 좋게 헤어졌어? 한 번도 연락 안 해 볼 만큼?”
한강의 질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렇지만 정정해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복잡했다.
“좀 그랬어요.”
태휘의 말에 오은은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생각해 봐, 강이 형! 차영롱과의 연애가 순탄하게 끝날 리가 있겠어?”
“왜? 난 잘 모르겠는데.”
“이 형 봐라? 순진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이렇게 된 마당에 툭 까놓고 얘기하자! 우리가 바로 그 증거잖아. 자기 애인이 멤버들이랑 다 자고 다녔다는 걸 아는데, 그 연애의 끝이 좋겠냐고.”
그제야 한강은 이해가 됐는지 입을 떡 벌렸다.
“애초에 연애가 가능하단 것부터 이해가 안 되지만. 그러니까 이 둘이 보통이 아니란 거지~.”
“둘이 정말…… 정말…… 좋아했나 보지.”
한강이 내린 순백색 결론에 오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태휘는 말을 아꼈다.
“그러면 너 유학 가기 전에 헤어진 거야?”
“아뇨.”
오은마저도 그 대답에 놀란 듯 빈 잔을 테이블 위에 툭 떨어트렸다.
“그럼 유학 가서도 계속 롱디했어?”
“그 긴 유학 기간 내내 차영롱이 한국에서 형을 기다렸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한강과 오은이 연달아 말하자 태휘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으면서도 씁쓸해져 바로 술잔을 채웠다.
“당연히 말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