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ack 2. Catch-up (03:51) <설민&영롱 Duet> (28/39)

Track 2. Catch-up (03:51) <설민&영롱 Duet>

한편 주방으로 간 영롱과 설민은 가게에 비치해 둔 레시피북을 보며 안주로 내놓을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설민은 영롱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음식을 몇 개 추천했다.

“재료들은 다 손질 돼 있으니까, 바로 만들기만 하면 돼.”

“얼큰 토마토 스튜? 쉬워 보이네. 이건 내가 끓일게.”

“강이 형이랑 개오은은 전에 이거 잘 먹더라. 하몽 치즈 타파스. 이건 내가 할게.”

고개를 끄덕이던 영롱은 레시피북을 뒤적이며 물었다.

“근데 샐러드 종류는 없어? 태휘 형은 샐러드 좋아하는데.”

그러고는 바로 냉장고로 가서 재료들을 살폈다.

“파스타랑 닭가슴살도 있네! 이걸로 샐러드 해 주면 되겠다.”

영롱이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꺼내 오자 조리 도구들을 챙기던 설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너 진짜 한결같구나.”

“뭐가?”

“온통 태휘 생각뿐인 거.”

그말에 영롱은 대꾸 없이 피식 웃기만 했다.

“태휘 생각 반만큼이라도 내 생각해 주지.”

처음엔 장난으로 받아들인 영롱은 계속 웃고만 있다가 문득 설민을 쳐다보았다. 표정을 보니 장난도 농담도 아니란 걸 깨달았다. 설민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너 잠적한 이유, 뭔지는 모르지만…… 태휘는 애인 사이었으니 칼같이 연락 끊었다 쳐도. 나한테까지 연락 안 할 건 뭐야? 그래도 멤버 중에 너랑 제일 친했다고 생각했는데…….”

설민은 그동안 쌓였던 서운함을 솔직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네 수많은 섹스 파트너 중 하나였던 건 괜찮아. 그렇다고 우리 사이에 연락까지 안 하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니 어느새 영롱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운 채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미안.”

녀석답지 않게 구구절절 쫑알거리지 않고 바로 사과하자 설민은 당황스러웠다. 미안하다는 말이 진심인 듯, 입술을 앙다물고는 조용히 있으니 오히려 설민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못 미덥긴 해! 쪼르르 어디 가서 나불대고도 남지! 신나서 확성기 켜고 동네방네 자랑했을지도 모르고! ‘여보세요, 동네 사람들! 잠적한 차영롱이 나한테 연락했어요!’ 하고 말이야.”

그런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기에, 영롱은 자기도 모르게 풋 하고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영롱이 조금이라도 우울해 보이면 설민은 무리를 해서라도 분위기를 띄워 주곤 했다. 태휘였다면 전혀 해 줄 수 없는 방식으로.

“생각해 보니 네가 연락 안 한 것도 이해 가네. 네 소식 죄다 흘렸을 거야! 태휘는 물론이고! 지난번 그 기자한테 한 것처럼.”

“기자?”

“아, 너 모르겠구나. 어떻게 보면 이번 재결합의 시발점이 그 기자야. 전에 인터뷰하다가 내가 떡밥을 조금 흘렸거든.”

설민은 영롱에게 바로 이 장소에서 다림과 했던 인터뷰 얘기를 간략히 전해 주었다.

“그 기자가 우리 조사도 많이 했더라고. 거의 팬 수준이었어! 한강 형이랑 오은이한테까지 쪼여 오는 바람에……. 게다가 태휘한테는 접근 안 하더라고. 원태휘는 찾아가 봤자 건질 부스러기도 없다는 것까지 잘 아는 모양이야.”

“기자 이름이 뭐라고?”

“기다림.”

이름을 듣고서도 영롱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결국 그것 때문에 우리 비상소집하고…… 태휘가 핵폭탄 던지고…… 그러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거지.”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며 안주를 만들어 갔다. 설민이 냉장고에서 하몽과 치즈를 꺼내 타파스를 준비하는 동안 영롱은 화구 앞에서 스튜를 끓이는 동시에 파스타 샐러드를 준비했다. 따로 알려 주지 않았는데도 두 가지 요리를 혼자 곧잘 알아서 하자 설민은 감탄했다.

“뭐야? 진짜 잘하네?”

영롱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전에 요리 좀 배웠거든. 태휘 형 유학할 때 잘 먹이고 싶어서.”

설민은 얼어붙은 듯 잠시 멍하니 있었다.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그 말은 즉…….

“너, 태휘 유학할 때 같이 갔어?”

놀라움으로 두 눈이 스튜에 빠질 듯이 커진 설민과는 달리 영롱은 태연하게 스튜를 휘젓고는 한 숟가락 떠서 후 불더니 말했다.

“응. 거기서 잠깐 동거했는데?”

설민은 놀라서 입을 틀어막은 채 그대로 주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알면 알수록 가관이네! 아까 태휘한테 영롱이 요리 많이 먹어 본 표정이라고 한 건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진짜였다니? 아니, 요리해 줬어도 유학 가기 전 얘긴 줄 알았지!

옆에서 놀라거나 말거나 영롱은 아무렇지 않게 스튜 간을 보더니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와, 이 씹새끼들!”

생각하면 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어서 설민이 참지 못하고 육성으로 욕을 내뱉는데도 영롱은 옆에서 태평하게 냄비의 불을 끄며 말했다.

“듣는 씹새끼 기분 나쁘네. 아니, 태휘 형이 얘기 안 했단 말이야?”

“그 새끼가 그 얘길 하겠냐?”

영롱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그 인간은. 나랑 연애한 게 자기 인생 최고 수치인가 봐.”

어쩐지. 지난번에 태휘는 해체 후 영롱과 2년 정도 연애했다고 말했다. STORY가 해체한 뒤 바로 다음 해에 태휘가 유학 떠난 걸 생각하면, 나머지 1년 정도는 장거리 연애를 하거나 영롱이 쫓아가야 말이 됐다.

하지만 차영롱이 장거리 연애하며 조신하게 태휘를 기다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기어이 쫓아갔구나. 진짜 제대로 미친 새끼야, 이거……. 바닥에 주저앉은 채 영롱을 올려다보던 설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넌더리를 쳤다.

“이 징글징글한 새끼들! 진짜 안 해본 거 없이 다 했네?!”

“빨리 요리나 해. 난 샐러드만 하면 끝난단 말이야.”

설민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듯 중얼거렸다.

“사내 비밀 연애부터…….”

샐러드 소스를 준비하던 영롱은 검지를 내저으며 그 말을 정정했다.

“사내 연애는 아니지! 그룹 활동할 때는 짝사랑만 했다니까~.”

“둘 다 SS엔터 소속일 때 연애했잖아! 그러니까 사내 연애 맞지!”

“그런가?”

영롱은 손바닥을 쫙 펴고는 손가락을 순서대로 하나씩 접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결혼·임신·출산·이혼 빼고 다 했네?”

영롱은 자신이 접은 손가락들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결혼, 이혼은 법적으론 안 했더라도 거의 한 기분이란 말이야.”

설민도 그 말에 동의했다. 유학까지 따라가서 동거했으면 뭐, 거의 사실혼이지.

“그동안 했던 섹스만 해도 기분상 애 두어 명은 낳은 것 같은데.”

“영롱아, 그만.”

설민이 인상을 쓰며 정색하는데도 영롱은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흥분하며 말했다.

“걔들이 실재한다면 벌써 중학생이야!”

의식의 흐름에 따라 뱉어 대는 영롱의 아무 말에 맞장구치던 설민은 현타가 와서 급속도로 의욕을 잃었다. 힘없이 일어서서 어찌어찌 대충 요리를 마무리했다. 완성된 음식들을 들고 주방에서 나와 트레이에 내려놓을 때, 영롱이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이참에 하나 더 해 보려고.”

“뭐?”

영롱은 다 접고 혼자 남아 있는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세상 상큼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혼.”

“……누구랑?”

이 와중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지 설민은 저도 모르게 그 질문부터 튀어나왔다. 영롱은 그 질문이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태휘 형이지.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

설민은 모처럼 목덜미가 뻐근하게 당겨오는 걸 느꼈다.

“태휘인 게 왜 당연한데?”

설민은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뒤돌더니, 자신을 따라 주방을 나서던 영롱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순간 영롱은 설민의 턱에 코를 부딪칠 뻔했다.

“태휘랑 안 해 본 거 없이 다 했으면, 다른 사람이랑 해도 되잖아.”

조금 전까지는 충격에 휩싸였다면, 지금은 화가 났다. 그렇게 안 해본 짓 없는 요란 법석의 연애를 했다면서 아직도 원태휘만을 원하는 녀석이 이해가 안 돼서. 영롱은 설민의 이글거리는 눈빛 너머로 익숙한 감정을 읽어 내곤 피식 웃었다.

“……형 아직도 나 좋아해? 형도 안 어울리게 순정파네.”

사돈 남 말하고 있네.

“아니면 오랜만에 만나니까 또 꼴려?”

아직도 발정 난 청소년 취급 하냐? 설민은 절망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영롱의 두 어깨를 콱 잡았다.

“차영롱, 너 진짜…….”

설민은 옛날에도 이런 식으로 영롱의 도발에 넘어가 자신의 진심이 퇴색된 걸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갓 스무 살이어서 자제력이 약했다는 핑계라도 있었지. 지금은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이번이 어린 날의 실수를 만회할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얼마나 영롱을 걱정했는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그렇게 오랫동안 사라질 줄 알았다면 젊은 날의 치기 어린 욕정만 채울 게 아니라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건데. 설민은 계속 후회하며 지냈다. 하지만 영롱은 여전히 그 마음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섹스가 목적이면 얼마든지 해 줄게. 어차피…….”

어째서인지 영롱은 뒷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대신 나 좀 도와줘. 태휘 형 마음 돌릴 수 있도록.”

영롱의 또렷한 두 눈은 단호한 빛을 띠고 있었다. 녀석이 나타난 이유가 태휘 때문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너……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돌아왔어?”

“뭐, 겸사겸사.”

녀석이 돌아왔을 때, 그 낌새를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땐 이런 대환장 연애 역사를 몰랐을 때였지. 그 모든 일을 겪고도 또 원태휘라니.

그리고 이 얘기를 나한테 털어놓는다? 게다가 도와 달라니? 그동안 자신이 했던 걱정과 그리움은 녀석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설민은 비참함을 느꼈다.

“너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난 자존심도 없는 줄 아냐? 실없이 구니까 다 장난으로 보였어? 태휘는 저따위로 너한테 차갑게 굴고, 너랑 연애했던 거 당당하게 얘기도 못 하는데! 저 새끼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가 뭔데?”

설민이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이는데도 영롱은 세상 차분했다. 침착하게 마주 보는 그 눈빛은 어쩐지 조금 슬퍼 보였다.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영롱은 혼잣말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왜 다른 남자는 안 되고, 원태휘밖에 안 되는지.”

설민을 바라보던 영롱은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고는 말을 이었다.

“나도 궁금해서, 지금까지 찾아다녔어. 원태휘를 대신할 남자.”

그 쓸쓸한 눈빛을 보자 원망으로 가득 찼던 심장 한구석에 안쓰러움이 피어올랐다.

“설민이 형. 정말 미안한데, 내 마음은 안 돼.”

도대체 너희들, 어떤 연애를 한 거야.

“몸은 수백 번이고 줄 수 있어. 근데 마음만은 안 돼.”

◀◀◀

- 200◆년 6월 -

영롱은 쇼케이스 이후 바로 솔로 활동을 시작했고 예상대로 엄청 바빠졌다. 앨범 준비 기간 때도 분주했지만, 본격적인 앨범 활동이 시작되니 그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바빴다. TV 및 라디오 출연, 사인회 등 각종 행사까지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솔로 앨범의 반응이 좋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피곤함마저도 즐겼다. 그룹 활동 때 늘 소화하던 일정들이라 딱히 어려운 건 없었다. 이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해내는 게 낯설다는 점만 빼고. 와중에 태휘 역시 유학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다.

태휘와는 그날 밤 이후로 더 싸우지도, 화해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어물쩍 지나갔다. 서로 마음이 상하긴 했지만 바로 이어서 바쁜 상황들이 몰아쳤기 때문에, 더는 에너지를 쏟을 여유가 없었고 그러다가 어느덧 태휘의 출국일이 다가왔다.

둘의 사이가 한창 애틋했을 때였다면 달랐겠지만,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은 데다가 서로 바빴던 타이밍인지라 아무 이벤트도 없이 태휘는 유학길에 올랐다.

출국 전까지 본가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날 밤 이후 마지막으로 녀석을 언제 보았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당연히 공항에 배웅 나오지도 않았고.

유학 간다고 울고불고 난리 쳤던 거에 비해 영롱이 너무나 조용히 보내 줬기에 태휘는 이게 이별의 전조는 아닐까 하고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차영롱이 자신을 기다려 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한편, 영롱은 태휘가 출국할 때까지 혼자서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출국 직전,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자신을 위해 유학을 포기하지 않을까 해서. 그러나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르다는 걸 원태휘가 몸소 보여 준 격이었다.

그를 알아 온 시간이 몇 년인데, 그런 헛된 꿈을 꾸다니. 영롱은 자신의 눈에 씌운 콩깍지를 슬슬 벗겨 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 콩깍지를 떨궈 낸다고 해서 결코 태휘를 향한 애정이 약해지진 않았지만.

10대 시절에는 철없이 연애의 로맨틱함만을 좇았다면, 이제부터는 낭만이 아닌 현실과의 싸움이었다. 현실에서 온전히 원태휘의 몸과 마음을 완벽히 차지하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거기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하나는 유학, 하나는 권준원. 유학은 태휘가 놓은 걸림돌이었고, 준원은 영롱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굴러온 돌이었다. 하지만 전자에 비하면 후자는 별 문제도 아니라고 치부했다.

태휘는 준원과 가까워진 것 때문에 매우 화가 났지만, 정작 영롱은 약간의 호감과 호기심이 전부였다. 저런 잘나가는 배우가 관심을 갖고 예뻐해 주니 조금 들떴을 뿐, 심각하게 질투할 만큼의 건덕지도 없는데.

원태휘는 정말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지고지순한 일편단심인지. 비록 일편단‘신(身)’은 아니라도……. 하지만 권준원과는 맹세코 아무 일도 없었다. 그가 어른이고 신사라는 말은 뻥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가 처음 접근해 왔을 땐 다른 사람들처럼 그 목적이 빤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정말로 순수하게 친한 동생으로만 대했다. 혼자 지레 앞서간 것 같아 민망할 정도로.

남들이 보기에 이미 가볍다 못해 날아갈 지경인 헤픈 몸뚱이겠지만, 태휘와 연애를 시작하며 영롱 나름대로 지켜온 소신이 있었다. 적어도 사귀는 동안에는 다른 남자와 자지 않겠다는 것.

태휘가 해체를 결정했을 때, 영롱은 그가 그토록 화를 낼지 몰랐다. STORY는 태휘의 지휘 아래 거대하게 쌓아 올린 성채와도 같았다. 그걸 한순간에 무너뜨릴 줄이야.

영롱도 악에 받쳐서 그런 결정을 내리도록 도발한 것도 있지만, 그때 진심으로 괴로워하던 그의 모습은, 영롱에게도 너무 많은 생채기를 남겼다.

태휘를 공격하기 위해 뱉었던 날 선 고백이었는데, 그 말들은 마치 거울처럼 자신에게 반사되어 돌아왔다. 결국 그를 아프게 하는 일은 자신 역시 괴롭게 한다는 걸 그날 알게 되었다. 그만큼 깊이 태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랬기에, 이번 일은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힘들게 이어진 만큼, 그에게 더는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나의 소신을 철저히 지키며 지내왔는데.

속 좁은 인간이 그것도 몰라주고, 노력하는 나에게 칭찬은커녕 혼자 오해하고 준원과 자지 그랬냐고 지랄만 하다니……. 그렇게 지르곤 자기는 미국으로 가 버리고…….

원태휘가 출국하고 얼마간은 혼자 지낼 만했다. 해체 직후에도 몇 달은 안 보고 살았으니까 앞으로도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 300일 동안은 연인으로서, 한 공간에서 지내며 하루가 멀다고 몸을 섞고 살았으니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렇게 불같이 싸운 뒤 평생 잊지 못할 뜨거운 섹스를 나눈 두 사람은 어정쩡하고도 뜨뜻미지근한 상태로, 13시간이라는 시차의 거리로 헤어지게 됐다. 어쩌면 앞으로 둘의 관계는 영롱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자기 앞에 놓인 두 가지 장애물을 뛰어넘든지, 말든지.

어떻게 보면 태휘를 기다릴 필요 없이, 이별하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간단한 선택지도 있었다. 그 역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거나 매달리지 않았기에……. 하지만 이번엔 그러기 싫었다.

평소엔 단순한 영롱이었으나 이번만은 쉬운 길을 택하고 싶진 않았다. 얼마나 바라던 원태휘와의 연애인데, 유학이나 아무 상관도 없는 제삼자 때문에 이대로 끝내긴 억울했다. 하지만 먼저 연락하기에는 또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답지 않게 이런 심각한 고민을 하는 스스로가 싫어서, 당장은 일에 집중했다. 지금 오히려 미친 듯이 바쁜 게 다행이었다. 태휘도 곁에 없는 와중에, 잡생각까지 많아지는 건 딱 질색이니까.

▶▶

—6월 둘째 주 GBS 톱가요20! 이번 주 1위 발표합니다! ……차영롱!

—축하합니다! 차영롱 군은 3주 연속 1위를 차지해서 왕중왕에 오르게 되었는데요, 소감 한번 들어볼까요?

—아이고, 지금 영롱 군이 너무 많이 울어서 말을 못 잇고 있네요!

—영롱 군, 말할 수 있겠어요?

—흑…네……. 어헝……. 이번 솔로 앨범 함께 작업해 주신 모든 스탭분들, 매니저들, 대표님 정말 감사하구요. 그리고 우리 태… 아니, STORY 멤버들 정말 사랑하고……, 무엇보다 우리 팬 여러분! 정말 고맙고 사랑해요!!

GBS 음악방송에서 왕중왕 자리를 거머쥐고 음악방송 4사에서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하자 영롱은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이제는 진짜 혼자뿐이라는 걸 실감했다. 이런 기쁜 순간에 함께 기쁨을 나눌 멤버들이 없이 무대에 혼자라는 게 어찌나 낯선 경험인지.

1위 수상 후 멤버들과 지인들의 축하 연락이 빗발치고, 친한 가수들도 너나 할 거 없이 영롱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태휘만은 그 사실은 아는지 모르는지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누구보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픈 사람이 곁에 없다는 현실을 깨닫자 영롱은 순간 서러움과 속상함이 치밀어 올랐다.

원태휘 이 개새끼! 좀스러운 새끼! 애인 사이를 떠나,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로서! 내 솔로 데뷔가 얼마나 중요한지 자기가 그렇게 강조했으면서! 어떻게 연락도 없을 수가 있어!

바쁘게 일만 하면 속상할 새도 없었겠지만, 마침 회사 측에서도 영롱에게 며칠의 휴가를 내준 터였다. 몇 달 내내 쉴 틈 없이 앨범 작업하고 활동한 데다가 왕중왕까지 거머쥐었으니, 후속곡 활동을 앞두고 적절한 휴식의 시간이었으나 지금 상황에선 외롭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준원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축하해 줄 겸 저녁 사 주고 싶다고. 영롱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 마다할 이유는 하나 있었지.

‘아무튼 그 새끼 앞으로 만나지 마. 너한테 흑심 있어 보이니까.’

원태휘, 그렇게 말해 놓고 정작 자기는 전화 한 통 안 해? 그간 쌓인 원망과 반항심에 그 경고 따위는 가볍게 무시했다. 지금 준원은 인기 절정의 톱배우인데, 그런 그가 먼저 연락했다는 사실에 단순히 고마움을 넘어서 우쭐거림도 조금 있었고.

그렇게 문제의 쇼케이스 이후 4개월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준원이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으며 그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관에 가서 심야 영화까지 봤다.

왠지 모르게 데이트 코스 같기는 했지만, 준원에게 여지를 남길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기에 함께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그저 친한 형과 만나서 스트레스 풀 겸 놀았을 뿐이지.

영롱의 집으로 향하는 준원의 차 안에서 영롱은 조금 전 본 영화 얘기만 조잘거렸다. 라디오에서는 분위기 좋은 팝송이 흘러나왔고 준원은 영롱의 재잘거림을 묵묵히 듣다가 귀엽다는 듯 받아 주었다.

“오랜만에 본 코미디 영화라 엄청 웃었네! 영화관에서 제 웃음소리 너무 크지 않았어요?”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웃던데, 뭐.”

“남자 주인공 코믹 연기 이렇게 잘하는지 몰랐어요. 너무 잘생겨서 이런 거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진짜 웃기네.”

“걔 원래도 좀 웃겨. 그동안 이미지 깰까 봐 과묵한 척한 거지.”

“형 그 배우랑 잘 알아요?”

“대학 동기야. 같이 연기과 다녔어.”

“우와! 친해요?”

“그럼. 요샌 바빠서 자주 못 보지만. 우리 기수가 선배들한테 하도 당해서 단합이 좋은 편이거든.”

“짱이다! 언제 저 소개시켜 주면 안 돼요?”

“싫은데.”

“네?”

신나서 떠들던 영롱은 준원의 칼같은 거절에 놀라 웃음을 멈췄다. 평소 한없이 친절한 그에게서 못 보던 태도여서 의아한 표정으로 운전석을 쳐다보았다. 준원은 전방을 주시한 채 입가에 장난기 서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롱이는 나만 알고 싶거든.”

그 한마디에 영롱은 바로 차분해져서 입술을 앙다물었다. 준원은 그런 영롱을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너랑 친해지려고 내가 얼마나 공들였는데. 그 자식한테 홀랑 넘길 수야 있나.”

그때부터 영롱의 머리에 오늘 본 영화의 내용 따윈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쩐지 어색해진 차 안은 숨 막히는 공기와 함께 라디오에서 나오는 팝송만 잔잔하게 가득 찼다. 그사이 차는 집 앞에 멈춰 섰다.

도대체 무슨 의미지?, 그냥 인사만 하고 빨리 들어가야겠다며 찝찝한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안전띠를 푼 준원이 고개를 숙여 영롱의 안전띠를 풀어 주고 있었다.

“안 내릴 거야?”

“아, 네…….”

괜히 예민하게 반응했나 싶어 민망함에 얼른 인사하고 차에서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몸을 일으키던 준원이 고개 각도를 틀어 그대로 입을 맞춰 왔다.

영롱은 코끝을 덮쳐오는 강렬한 향수 냄새에 순간 숨을 참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머리로 파악할 새도 없이 준원의 혀가 집요하게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형, 잠깐…….”

그를 말리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준원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영롱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어왔다. 말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움켜쥔 주먹으로 어깨를 힘껏 밀어 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의 저돌적인 몸짓은 더는 장난이 아니었다.

영롱은 너무 놀란 데다가,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라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웠다. 우선 자신이 태휘에게 했던 말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준원이 형은 그런 사람 아니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걸 이런 식으로 알게 되다니. 그런데도 영롱은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준원이 형이라면, 싫다는 표현을 보이면 바로 그만두겠지. 그러나 그는 영롱이 밀어 낼수록 물러나기는커녕 더 강한 힘으로 밀어붙여 왔다.

심지어 영롱이 점점 발버둥 치자 준원은 조수석으로 건너오더니 좌석 레버를 당겼다. 그 바람에 영롱의 상체가 뒤로 넘어갔고, 놀라는 사이 그가 잽싸게 올라와 무릎으로 허벅지를 짓눌렀다. 준원이 자신의 무게로 내리누르자 영롱은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형, 그만……!”

신사 같던 평소의 모습은 간데없이 완력으로 제압하려 하자 영롱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왜? 너도 이런 거 기대한 거 아니었어?”

준원은 사뭇 거칠어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영롱은 울먹이며 고개를 내저었으나, 그는 영롱의 두 손목까지 단단히 움켜쥐고는 꼼짝 못 하게 했다.

그때 밖에서 행인들이 지나가며 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고, 영롱은 순간 눈동자를 굴렸다. 이곳이 자신의 집 앞 길가라는 걸 기억해 냈다. 그 모습에 준원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누가 볼까 봐 그래? 걱정 안 해도 돼. 선팅 엄청 짙으니까.”

“그게 아니라요…….”

“너 튕기는 거 귀엽긴 한데, 적당히 하자.”

그의 말투는 점점 짜증에 날이 서고 있었다.

“아니면 너 집에 올라가서 해도 되고.”

아무래도 좋으면서 튕겨대는 거로 오해하는 것 같아서, 확실히 거절의 의사를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형, 저 형이 이러는 거 싫어요.”

“그럼, 원태휘랑은 이러는 건 좋고?”

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영롱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반응에 준원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네. 걔랑 그렇고 그런 사이 맞지? 세나 결혼식에서 보니까, 느낌이 오더라고.”

바로 부인했어야 했는데, 너무 당황한지라 미처 표정 관리를 못 했다.

“형, 그게…….”

“이 바닥 소문 무서운 거 누구보다 잘 알지?”

발버둥 치던 영롱의 팔과 다리는 어느새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준원은 영롱의 뺨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너희 둘 소문 연예계에 파다하게 퍼뜨리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으라고.”

그러더니 그의 축축한 숨결이 귓가에 와 닿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다정하기만 했던 그 음성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급기야 준원의 불쾌한 손길이 영롱의 바지 앞섬에서 머물렀다. 행위 자체는 낯선 일이 아니었으나,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냥 우리 둘만 즐기면, 아무도 모를 거야.”

준원은 최대한 부드러운 투로 어르듯 말했지만, 그건 협박이었다. 180도 달라진 그의 태도에 겁먹은 영롱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거부하려 입을 열자, 준원은 듣지도 않고 거칠게 입술을 삼켜 왔다. 그 순간 라디오에선 George Benson의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영롱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욕실로 달려갔다. 무작정 샤워기부터 틀더니, 욕조 바닥에 다리가 풀린 듯 쪼그려 앉았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영롱은 순식간에 흠뻑 젖고 말았다. 옷도 입은 채로.

머리카락이 마구 달라붙은 얼굴은 눈물로 범벅된 건지, 샤워 물줄기 때문에 젖은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두 손으로 눈가를 훔치기 전까진.

“흑……. 씨발…….”

혼자뿐인 집엔 들을 사람도 없는데, 훌쩍거리는 울음소리를 감추려는 듯 영롱은 다시 또 입을 막았다. 쪽팔림 때문이었다. 남자 경험이 적지도 않은데, 이런 일을 겪었다고 온몸이 벌벌 떨린다는 게.

무엇보다도 오늘 일을 예상 못 하고 순진하게 그를 믿었다는 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애초에 그의 약속 따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시간을 되감아 준원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으니 그의 손길이 닿았던 곳을 씻어 내는 게 최선이었다.

영롱은 그가 삼켰던 입술을 손등으로 비벼 닦았다. 옷을 벗어 던지자, 목덜미에 그가 깨문 자국들이 드러났다. 역시 손으로 마구 문질러 보았지만, 그래 봤자 그의 입술이 닿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당장 원태휘가 다시 만져 줬으면, 안아 줬으면 하고 바랐다. 그럼 마치 소독이라도 될 것처럼. 씨발, 이럴 때 애인이 옆에도 안 있어 주고 뭐 하는 거야? 영롱은 속상함에 욕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곁에 있었어도, 자기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왔는데 안아줄 리는 만무했다. 유학 떠나기 직전의 모습을 떠올리면,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그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든 영롱은, 이번 일은 죽어도 말하면 안 되겠다는 결심만 다졌다.

아니. 여태 연락도 없는데 말을 어떻게 해? 어차피 원태휘는 자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건, 왕중왕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관심이 없는 거 아닐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영롱은 금세 또 시무룩해졌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눈을 감자, 조금 전에 만났던 인간이 아니라 못 본 지 한참 된 애인의 모습부터 떠올랐다. 그 모습이 선명해질수록, 심장 한구석에 자리 잡은 원망과 죄책감이 경쟁하듯 동시에 부풀어 올라왔다.

딩동.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힘겹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 집 주소를 아는 건 매니저와 태휘뿐이어서, 영롱은 의아한 표정으로 인터폰 앞에 섰다.

“누구세요?”

- 꽃바구니 배달 왔습니다.

“……잘못 오신 거 아니에요?”

- 발신인, 수신인 이름은 다 비어 있는데, 주소는 여기로 되어 있어요.

영롱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는 문 앞에 놓고 가 달라고 했다. 일부러 목소리 톤을 다르게 내긴 했으나, 팬들이 집 알아내는 방법도 워낙 기상천외해서.

잠시 뒤에 현관문을 빼꼼 열어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꽃바구니를 들었다. 한 손으로 무심코 들었다가 순간 팔이 빠질 듯한 무게에 영롱은 깜짝 놀라고는 두 팔로 낑낑거리며 안으로 옮겼다.

특이하게도 장미가 아닌 튤립과 프리지어로만 이루어진 꽃바구니였다. 카드 같은 것도 없고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 팬들의 편지와 선물은 다 회사를 통해 받고 있기에 팬은 아닐 텐데. 누구지?

혹시나 해서 핸드폰을 찾아보니, 아까 옷 주머니에 넣은 채로 샤워하는 바람에 이미 먹통이 되어 있었다. 아, 폰 새로 바꿔야겠네. 그래도 원하는 전화는 안 오겠지만. 영롱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비비다가 문득 떠올랐는지 거실 탁자 위에 있는 전화기에 시선이 닿았다.

무거운 꽃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전화기의 자동 응답 버튼을 눌렀다. 오늘 하루 확인하지 못한 음성 메시지가 여러 건 쌓여 있었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팬들의 걸어온 장난 전화, 지인들의 안부 연락, 축하 인사 등등.

튤립 꽃송이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듣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바로 연락 못해서 미안. 도착하자마자 처리할 일이 많아서…….

원태휘의 목소리에 영롱은 움직이던 손가락을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 1위랑 왕중왕 축하해. 꽃 잘 갔는지 모르겠네.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에 코끝이 찡해져 왔다. 아까 마음 한구석에서 마구 경쟁하던 원망과 미안한 감정이 단번에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마냥 반가워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짐짓 냉소적으로 반응하려 애썼다.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원태휘? 미국물이 입에 안 맞아? 시차 적응 못 해서 미쳐 버린 거야? 영롱은 오늘 있던 일이 다시 떠올라 겨우 진정시킨 서러움이 울컥 올라왔다.

- 시간 날 때 드레스룸 가서 화장대 왼쪽 서랍 열어 봐. 원래는 출국 전에 주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

영롱은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 내고 있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후다닥 드레스룸으로 달려갔다. 화장대 왼쪽 서랍은 함께 지낼 때 아예 태휘 물건들 놔두라고 내줬던 공간이라 건드리지도 않고 있었다. 꽃바구니 말고 뭐가 더 있었단 말이야?

서랍 안에는 그가 두고 간 선글라스 등 액세서리 몇 가지가 있었고, 작은 상자가 하나 있었다. 저 크기로 보아선, 분명…….

영롱은 일단 상자를 꺼내 들고는 다시 후다닥 전화기 앞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자동 응답기에선 뜸을 들이며 천천히 말하는 태휘의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 네가 계속 끼고 있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도 끼고 있거든.

아까 느꼈던 두려움의 심장 박동 대신, 묘한 두근거림이 몰려왔다. 상자 뚜껑을 열어 보니 심플한 디자인의 백금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 그리고…….

영롱은 이제 눈물을 닦아 낼 생각도 하지 않고, 전화기 앞으로 다가와 바짝 귀를 기울였다.

- 넌 장미보다 튤립이 어울려.

그 말에 잠시 멍해진 영롱은 훌쩍거리며 튤립 가득한 꽃바구니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인간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내 별의별 꼴 다 봤으면서. 어떻게 이런 순수하고 고결한 꽃이 나와 어울린다고 할 수 있어? 아직까지 콩깍지 달고 있는 건 형이었네.

영롱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꽃바구니를 끌어다가 전화기 옆에 올려놓았다. 고개를 숙여 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에 물씬 풍겨왔다. 아까의 불쾌했던 일로 더럽혀진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향기로웠다.

영롱은 소파 앞에 쪼그려 앉아 왼손 약지에 아무 의미도 없이 멋으로 끼우고 있던 반지를 빼냈다. 바로 태휘가 준 반지를 끼우고는 손을 쫙 펴들었다. 그동안 커플링은 죽어도 안 해 주더니.

이렇게 감동 주는 법 잘 알고 있으면서, 표현은 왜 그리 서툰 걸까? 음악은 공부 안 해도 이미 천재니까 연애 공부나 하지. 여기서, 나랑. 하여튼 쓸데없는 욕심만 많아서는.

왜 싸우고 이렇게 멀리 떠난 다음에 해 주는데? 진작해 줬으면 좋았잖아. 이 메시지를 조금만 더 일찍 들었다면 권준원과 약속도 안 잡았을 거고, 그러면 오늘 같은 일도……. 영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 일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 메시지를 다시 들으시려면 1번, 삭제는 2번…….

반지를 올려다보며 훌쩍거리던 영롱은 자동 응답기의 안내 음성에 주저하지 않고 냉큼 1번을 눌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도록 내버려 둔 채,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여전히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탁자에 누이고는,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연인의 목소리에 온 감각을 집중했다.

- 바로 연락 못해서 미안. 도착하자마자 처리할 일이 많아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