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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3. Long Way (05:03) <태휘&오은 Duet> (29/39)

Track 3. Long Way (05:03) <태휘&오은 Duet>

설민이 막걸리바 주방에서 영롱에게 연달아 충격을 받는 동안, 2층 룸에 있던 오은과 한강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태휘에게서 10년 전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충격과 경악이 범벅된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국에서 영롱이랑 같이 살았다고?”

태휘는 덤덤한 얼굴로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 와중에 빠트린 사실을 하나 덧붙여 주었다.

“한국에서도요.”

한강은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내리고 놀라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대단하다, 너네.”

한강 옆에 있던 오은은 여전히 놀란 입을 틀어막은 채 머릿속으로는 십여 년 전 기억을 되짚어 올라갔다.

“잠깐. 차영롱 솔로 1집 때 형 유학 간 거잖아? 걔는 활동 끝나자마자 유럽 여행 갔는데?”

“그때 유럽 안 가고 보스턴으로 온 거야.”

태휘의 말에 오은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와, 차영롱 그런 얘기 싹 다 숨기고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한 거야? 옆에 있던 한강은 진심으로 경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유럽 여행은 훼이크였구나.”

“와, 차영롱. 이 여우 같은 새끼.”

그렇게 말하면서도 오은은 힐끗 계단 쪽을 살폈다. 다행히 영롱은 올라오지 않았다. 태휘는 그런 오은의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걔 말을 순순히 믿은 네가 바보지.”

“그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일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어떻게 그 여행이랑 형을 연관 지어?”

흥분한 오은이 점점 언성을 높여 갈 때쯤 테이블에 놓여 있던 한강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중요한 연락이었는지 한강은 밖에서 받고 오겠다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룸에 태휘와 단둘이 남게 되자, 조금 전까지 흥분하던 오은은 어쩐지 긴장돼 태휘의 눈치를 살폈다. 말없이 막걸리만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둘만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오은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태휘가 뭐에 관해 물어볼지는 안 봐도 뻔했다.

“너 지난번에 걔 호텔 방엔 왜 간 거야?”

녀석이 묵는 호텔에서 재수 없게 마주친 그날의 얘기다. 그날 이후, 오은도 나름대로 이 질문이 나올 경우 대응 매뉴얼도 준비해 뒀다.

“형이야말로. 그날 왜 왔는데?”

첫째, 적반하장으로 나가기. 그렇게 묻자 역시 태휘는 일순 말문이 턱 막힌 듯 보였다.

“볼 일 있어서 갔어.”

“나도 볼 일 있어서 간 거야.”

둘째, 쫄지 말고 뻔뻔하게 나가기. 이게 오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이러면 저도 할 말 없지. 자기는 전 애인이라 이거야? 본인은 아무 때나 차영롱 만나도 되고, 나는 일일이 보고하고 허락받고 만나야 하고?

“차영롱이 그날 말해 주지 않았어? 나한테 생필품 필요한 거 이것저것 사다 달라고 부탁해서 갔다고.”

“난 이제 걔 말 순순히 안 믿거든.”

태휘의 말에 오은은 혀끝을 쯧쯧 찼다. 도대체 둘이 어떤 연애를 하다가 얼마나 더럽게 쫑난 건지……. 알고 싶지도 않다. 세 번째는 명상원에서 배운 호흡법을 잊지 말기. 흥분하지 말자. 침착하자.

“형이랑 차영롱이랑 어떻게 끝났건, 나까지 굴비 엮듯이 한 데 엮으려고 하지 마쇼.”

오은이 선을 긋자 태휘는 잠자코 응시하더니 술을 한 모금 털어 마셨다.

“자기는 걔랑 엮인 적 없던 것처럼 구네.”

스스로 최고의 흑역사로 여기는 부분을 태휘가 건들자, 명상이고 나발이고 또 흥분하고 말았다.

“난 그때가 끝이라고 했잖아! 진행형이 아니라 과거 완료! 게다가 난…… 씨발, 그 새끼한테 잡아먹힌 거였다고.”

억울하다는 투로 항변하던 오은은 마지막 문장에서 숨을 죽이고는 계단 쪽을 다시 살피며 말을 이었다.

“설민이 형은 지금까지 마음 정리 못 한 거 딱 보이잖아. 그에 비하면 나나 한강 형 봐봐! 지금은 걔한테 동료 이상의 감정은 없어. 뭐 사다 주는 건 그 동료로서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거고.”

오은은 자신도 어이없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구구절절 형한테 해명하는 것도 기분 참 좆같고 더러워. 더는 걔 보호자도 애인도 아닌데, 그런 걸 왜 캐물어? 지금 전 남편 행세하는 거야?”

그 말에 태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옛날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봐. 리더로서 물어본 거야.”

“형이나 실수하지 마.”

“…….”

“리더로서는, 개뿔이. 이제 그 말은 안 통하는 거 모르겠어? 형이랑 차영롱의 그 지랄 생쇼 얘기를 다 들었는데.”

약점만 골라서 쏘아붙이자 태휘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 실컷 비웃어 줘야겠다 싶어 오은은 계속 떠들었다. 때리면 또 맞지, 뭐!

“하긴, 이해는 가! 차영롱 애인으로 살면서 주변에 있는 남자들 얼마나 신경 쓰였을까? 형도 참 피곤했겠네. 애인 간수하기 힘들어서.”

여차하면 도망칠 요량으로 최대한 거리를 멀찍이 유지하며 말했다. 태휘는 말로 뼈를 너무 맞아 가루가 됐는지 사색이 된 얼굴로 술잔만 비우고 있었다. 오은은 이제 이 화제는 끝났겠다 싶어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꼬치꼬치 캐물어서 기분 나빴다면 미안. 그럼 그 얘긴 그만할게.”

술잔을 내려놓은 태휘의 입에서 기대도 하지 않은 사과까지 나오자 오은은 불안함을 느꼈다. 꽉 막히고 뒤끝 쩌는 이 양반이 웬일로 순순히 사과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뭔데?”

“혹시 걔한테 약도 구해다 줬어?”

오은은 너무 놀라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뭐야, 차영롱. 들킨 거야?

“약? 무슨 약?”

오은은 태연한 척 되물으며 술 대신 물을 들이켰다. 이 상태에서 취했다가는 진짜 실수할지도 몰라. 태휘가 조금 더 캐물었다면 지난번처럼 주먹질 정도로 끝나지 않을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때 구세주처럼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냐. 내 얘기 못 들은 걸로 해.”

다행히 태휘는 오은의 놀란 표정까진 포착하지 못했는지 먼저 질문을 거뒀다. 태휘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니 한강, 설민, 영롱이 안주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통화 마치고 들어오는데 얘들 주방에서 막 나오더라고.”

한강이 안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이 테이블을 채웠다. 다른 멤버들이 돌아오자 하던 얘기를 멈춘 걸 보니, 영롱에 관해서 태휘 혼자 뭔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오은은 태휘가 뭘 어디까지 눈치챈 건지 궁금했지만,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자신이 숨긴 게 무엇인지 태휘가 알게 되는 날엔, 그야말로 그날이 자기 제삿날이 될 테니까. 하여튼, 이 모든 게 다 차영롱 때문이다. 저 새끼는 씨발, 왜 하필 나한테…….

오은은 태휘의 건너편 자리에 앉은 영롱을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쏘아보았다. 그런 심정을 알 턱이 없는 영롱은 씩 웃으며 빈 잔을 들이밀었다.

“오랜만에 형한테 술 좀 올려 봐라.”

“미친 새끼가, 형은 무슨 형이야?”

오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술을 따르며 투덜거렸다. 옆자리에서 자작하던 설민이 그들의 대화에 혀를 찼다.

“고작 몇 달 차이로 개오은 저 새끼한테 형 대접을 기대해? 나나 태휘한테 하는 거 봐.”

그러더니 건배도 하지 않고 혼자 술을 들이켰다. 어쩐지 조금 전 주방에 내려갈 때와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아까 설민은 엄청 텐션 업 돼 있었는데, 지금은 좀 날카로워 보였다.

요리하다가 둘이 말싸움이라도 했나. 아니, 무한 영롱바라기인 이설민이 그럴 일은 없을 텐데. 한편 영롱은 변함없이 해맑아 보였다.

“아, 뭐야! 다들 의리도 없이 각자 술 마시고 있네?”

10년 동안 멤버들한테 연락도 안 한 게 누군데, 의리는 염병.

“오랜만인데 건배도 안 할 거야?”

영롱이 잔을 든 채 맞은편에 앉은 태휘에게 눈짓을 보내자, 태휘는 한 번에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잔을 들었다. 지난번 호텔 라운지에서 했던 건배 약속을 지키라는 의미의 눈빛이었다.

‘……그건 멤버들 다 모였을 때 하면 되잖아.’

태휘가 순순히 술잔을 들어 올리자 한강, 설민, 오은은 의아해하며 두 사람을 따라 술잔을 들었다. 태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STORY의 재결합을 위해.”

뜻밖의 건배사에 오은은 오글거림을 견디지 못해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한강과 설민은 그 건배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뭉클한 표정이었다.

영롱은 마음에 들다 못해 넘치는지 흡족한 미소로 멤버들과 신나게 잔을 부딪쳤다. 그 때문에 술이 마구 튀어 흐르자 멤버들은 술잔을 얼른 입에 가져다 댔다. 영롱은 순식간에 원샷을 하고는 진심으로 기분 좋은 표정으로 멤버들의 얼굴을 슥 둘러보았다.

“이렇게 모여서 한잔하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그 말 한마디에 멤버들은 정색하며 저마다 한소리씩 보탰다.

“영롱아, 오랜만인 건 네가 잠적을…….”

“그러니까, 왜 그리 오래…….”

“그러게 누가 그렇게 오랫동안…….”

“웃긴 새끼네, 네가 잠수를 존나…….”

네 사람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마구 뒤엉켰고, 영롱은 놀라서 잔을 든 채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잘못했지! 그럼.”

이번엔 넷이서 한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저마다 안주를 집어 먹고 서로의 술잔을 빠르게 채워 줬다. 이럴 땐 세상 단합이 잘되네. 영롱은 그 모습을 보곤 또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한마음이 된 모습, 보기 좋아.”

그때 한강이 영롱의 술잔을 채워 주며 말을 건넸다.

“영롱아. 말 나온 김에 얘기 좀 해 봐.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냥, 군대 갔다가. 제대하고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다니면서 지냈어.”

“그렇다고 가수까지 그만둘 필요는 없었잖아.”

“그만두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좀 쉬고 싶었는데, 쉬다 보니까 일하기가 싫더라고.”

“쉬어도 어떻게 10년을 쉬어?”

“나도 그렇게 오래 쉴 생각은 없었어.”

“무슨 ‘정신과 시간의 방’에 있다가 나왔냐?”

설민의 말에 멤버들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은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은 일단 접어 두고 다른 이유를 제기했다.

“한국에서 가수 활동하면 태휘 형 다시 마주치게 되니까 그랬겠지.”

그 말에 멤버들의 시선이 절로 태휘에게로 향했다. 태휘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샐러드를 집어 먹었고, 영롱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개오은, 꽤 예리하네.”

태휘는 맞은편에 앉은 영롱을 한 번 보고는 시선을 아래로 피한 채 헛기침했다.

“또 옛날 버릇 못 버리고 내 탓 하네.”

대화가 다시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되자 술자리의 공기가 점점 냉랭해졌다. 설민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멤버들의 술잔을 채워 주며 한강에게 물었다.

“우리 안주 만드는 사이 무슨 얘기들 하고 있었어?”

“얘네 동거했던 얘기!”

한강이 눈치 없이 천진하게 말했다. 화제를 바꾸려 한 설민은 절망하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 의도를 알았던 오은은 한강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저 형 한결같이 저러는 것도 참 재주야. 저래서 연예계에서 오래 살아남았나봐. 오직 영롱만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한강에게 맞장구쳤다.

“아, 우리도 주방에서 그 얘기 했는데.”

영롱은 옆자리의 설민을 힐끗 보고는 한강을 향해 물었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네가 유럽 간다고 거짓말하고 미국 갔단 것까지 들었지.”

“아아, 미국 간다고 하면 단박에 의심할 것 같아서.”

“근데, 태휘 나름대로 큰 결심하고 유학 간 건데, 용케도 영롱이를 불렀네?”

한강의 물음에 태휘는 정색하며 말했다.

“부른 적 없어요.”

“같이 살았다며?”

“제가 오라고 한 거 아니에요. 지가 다짜고짜 쫓아와서 제멋대로 눌러산 거지.”

태휘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영롱이 대놓고 비웃었다.

“뭔 소리야. 그때 존나 좋아했으면서.”

영롱은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남자들 진짜 웃기지? 왜 연인과의 좋았던 기억을 친구들한테 말할 땐 나쁘게 왜곡하고 그럴까?”

◀◀◀

- 200◆년 6월 -

태휘는 미국에서의 첫 여름을 어학연수를 하면서 보냈다. 영어 공부는 가수로 활동하면서도 틈틈이 해 오긴 했지만, 현지 어학원에서 듣는 수업은 역시 달랐다.

앞으로 2년 동안 미국에서 지내야 하고 당장 9월부터 음대 수업을 들어야 하니 생존에 필요한 영어를 빠르게 익히게 됐다. 처음엔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지내는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으나 조금씩 익숙해졌다.

한국에서라면 불가능했을 평범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어서 그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매니저 없이는 거리를 돌아다니지도 못했던 한국과는 달리, 이곳에는 태휘를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간혹 젊은 한국 유학생들은 알아보긴 했으나,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오은처럼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할 수도 있겠지만, 태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한결 자유로운 외국에서의 학교생활을 꿈꿨다. 마침 듣고 싶은 커리큘럼이 이 학교에 존재하기도 했고.

게다가 어릴 땐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청소년기 이후에는 회사와 매니저들의 보호 속에서만 지내왔으니 이 기회에 진정한 홀로서기를 해내고 싶었다.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살 집을 알아보고 계약하고 이사하고 각종 필요한 생필품도 구비하고, 어학원 등록에, 곧 있을 음대 입학 인터뷰까지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지냈다.

본가에도 이사를 마치고 전화를 개통한 며칠 후에야 연락을 드렸다. 집안의 애물단지 같은 딴따라 아들이라도 타지에서 홀로 생활해야 하니 걱정하시려나 싶었는데, 역시나 기우였다.

얼굴 팔릴 대로 팔린 자식이 외국까지 나가서 집안 망신시키면 곤란하니, 한국에서보다 더 각별히 행실 조심하라는 신신당부만 실컷 들었다. 잔소리 어택에 귀가 얼얼해져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제야 영롱의 존재가 떠올랐다.

영롱과의 관계는 출국할 때만 해도 불안하고 엉망진창이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이대로 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출국을 앞두고 크게 다투기까지 했으니.

어느 정도는 마음을 내려놓고, 한국을 떠나는 동시에 헤어지겠구나 하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는 편이 자신에게도 영롱에게도 좋을 거라는 합리화까지 했다.

유학 동안 영롱이 자신을 기다려 줄 리 없으니 서로 마음고생할 필요 없다고. 자신으로선 멀리 유학까지 온 마당에 연애보다는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낯선 도시의 텅 빈 아파트. 한국에서 짐을 단출하게 가져온 터라 필요한 물건의 대부분은 여기서 장만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이곳에 혼자 덩그러니 있으니, 영롱에 대한 그리움이 순식간에 해일처럼 쏟아져 왔다.

어째서인지 뜬금없게도 영롱과 함께 보낸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어머니에게 실컷 잔소리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학교 음악실이나 영롱의 집으로 향하곤 했다. 두 군데 중 어딘가에는 반드시 영롱이 있었으니까.

태휘에게 영롱과 음악은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나 마찬가지였다. 도피하듯 찾아가면 늘 자신을 위로해 주었다. 비록 싸늘한 말로 서로를 할퀼 때도 있지만, 희한하게도 그 상처는 금세 무감각해지곤 했다.

이렇게 철저히 혼자가 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영롱이 그리워졌다. 매정하게 혼자 두고 떠날 땐 언제고, 이제 와 녀석을 떠올리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한심했다. 영롱이 진저리를 치고 욕해도 할 말이 없었다. 설마, 아직 끝은 아니겠지. 완전히 놓든가, 잡든가 둘 중 하나만 해야 한다면…….

시계를 보니 서울은 아직 오전이라 야행성 인간인 영롱은 자고 있을 게 뻔했다. 어쩔 수 없이 회사의 신 대표에게 우선 전화를 걸어 보았다.

반갑게 전화를 받은 신 대표는 길고 긴 수다 끝에 안부를 확인하고, 태휘가 굳이 묻지 않아도 먼저 영롱의 1위와 왕중왕 소식을 전해 주었다. 영롱을 포함한 다른 멤버들한테 연락이라도 하라는 신 대표의 야단에 대표님이 대신 안부 전해 달라고 부탁한 뒤 통화를 마쳤다.

전화를 끊자마자 한국에서 가져온 짐 가방에서 노트를 꺼낸 태휘는 깔끔하게 정리해 둔 비상 연락망을 찾았다. 서울에서 지인들의 경조사에 꽃을 보내곤 했던 단골 꽃집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어 꽃바구니를 주문하고 영롱의 집 주소를 불러 줬다.

‘제일 인기 많은 장미 꽃바구니로 할까요?’

꽃집 사장님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망할 권준원의 장미 꽃다발이 연상됐다. 물론,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와 영롱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태휘가 보기엔 장미는 무대 위의 영롱에 가까웠다. 메이크업을 한 무대 위의 모습보다 어릴 때부터 본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이 더 익숙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녀석을 다 장미로 본대도, 자신에게는 튤립이었다. 아니, 어쩌면 튤립이길 바라는 걸지도.

수많은 사람을 홀리고 손이 타고야 마는 장미가 아니라, 자신만의 화분에서 자라길 바라는 튤립. 하긴, 차영롱이라면 튤립이어도 수많은 사람을 홀리겠지만.

드레스룸에 숨겨 둔 반지의 존재는 사실 자동 응답기에 음성을 남기면서 불현듯 떠올랐다. 이젠 영영 줄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출국하면서부터 잊고 있었는데.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인 것 같았다. 아직 자신한테 화가 나 있다면,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

커플링을 준비해 둔 지는 꽤 됐다. 3월이었나. 녀석의 솔로 데뷔 축하 겸 자신의 유학 전 기념으로 맞춰 두었다. 망할 권준원과 그놈의 장미 꽃다발만 아니었으면 더 일찍 주인의 손에 끼워 줄 수 있었을 텐데.

태휘는 출국하면서부터 왼손 약지에 끼우고 있었지만, 영롱에게는 언제 전해 줘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 서랍에서 영원히 빛을 못 봤을지도 모르고.

자동 응답기에 남긴 음성 메시지를 뒤늦게 확인한 영롱은 다음 날 국제전화를 걸어왔고 모처럼 연애 초기 때처럼 애틋하게 통화했다. 처음엔 조금 툴툴거리다가도, 반지와 꽃바구니 선물에 많이 감동했는지, 결국 울음까지 터뜨렸다.

태휘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이었는데 한순간에 이렇게 마음이 풀리다니. 단순한 차영롱의 마음을 녹이는 일은 얼마나 쉬운지 새삼 깨달았다. 물론 그런 만큼 쉽게 얼어붙기도 했지만.

영롱이 자신에게 바라는 건 큰 게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번번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뒤늦게야 깨닫곤 했다. 아무튼 그 전화 통화 이후로 둘의 관계는 기사회생한 듯 새로운 방향으로 다시 나아갔다.

생각조차 못 했던 장거리 연애에 일말의 희망이 보였다고나 할까. 거리가 멀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자연스레 희미해질 거라고만 예상했다. 외로움을 느끼더라도, 굳이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까이에서 다른 사람을 찾게 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화났던 일, 상처받은 일…… 나쁜 기억들만 희미해질 뿐. 서로를 간절히 원했던 이유와 그 순간의 감정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또 선명해졌다.

어떻게 보면 위태롭던 시기에 강제로 생이별하게 되면서 오히려 서로의 소중함을 각성하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태휘와 영롱은 국제전화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팔자에도 없던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잠깐만.”

태휘와 영롱의 얘기를 듣던 오은은 눈으로 재빠르게 두 사람의 약지를 살폈다. 11년 전 태휘가 선물했다는 커플링은 당연히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가지가지 했네, 두 사람. 한강은 재밌는데 왜 중간에 끊느냐며 구시렁거렸다.

멤버들 모두 유학까지도 이어진 태휘와 영롱의 연애담을 듣다 보니 적당히 조절하면서 마시자는 초심은 간데없고 막걸리에서 소맥으로 갈아타 마구 달리고 있었다. 맨정신으로 들을 수 없어서 마구 마셔 대는 오은도 오은이었지만, 옆에 있던 설민도 만만치 않았다.

오은은 저 형이 또 왜 저러나 의아해했다. 아까 영롱과 단둘이 주방에 다녀온 뒤로 얼굴도 내내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속만큼 살얼음판이겠냐? 이 와중에 제일 부러운 건 눈치 없이 속 편해 보이는 강이 형뿐이었다.

술이 오른 한강은 태휘와 영롱에게 끊임없이 술잔을 부딪치며 그동안의 연애사를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저 형이 저렇게 남의 연애사에 관심 가지는 건 처음 봤다.

태휘는 술이 약해 조금씩 천천히 마시고 있었고 영롱은 예전 주량 그대로인지 꽤 마셨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멀쩡했다. 오은은 설민과 태휘의 취기 오른 얼굴을 한 번씩 힐긋 살피고는 말짱한 영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멤버들에 대한 애틋함 따위 없다고 생각했는데, 술기운 탓인가? 무사히 영롱이 돌아오고 재결합까지 진행할 수 있게 된 건 잘된 일이지만, 그동안 마음고생했을 저 인간들 속을 생각하면 녀석의 번지르르한 얼굴이 얄미워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내 속은 말할 것도 없고! 저 인간들이랑은 다른 종류의 걱정이었지만. 게다가 해체 후 원태휘와 저렇게 사랑 놀음도 원 없이 하며 지냈었다니. 배신감인지 질투인지, 자신도 이 감정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오은은 복잡한 마음에 또 다시 소맥을 원샷하고 테이블이 울릴 정도로 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두 사람 옛날 얘기 그만하면 안돼? 어차피 이젠 다 끝났잖아.”

순간 영롱이 인상을 찌푸리며 오은을 대놓고 노려보았다. 뭐야, 그 불만 가득한 눈빛은? 아직 안 끝났다는 거야? 저 돌은 새끼, 저거.

“왜? 완전 흥미진진한데. 좀 더 들어보자.”

눈치 없는 한강 형 덕분에 망할 커플의 대환장 추억팔이는 계속될 기미였다. 영롱은 오은의 말은 무시하고 한강의 재촉에만 대꾸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때 내가 미국에 따라가지 말았어야 해.”

“무슨 소리야, 그건?”

영롱은 턱을 괸 채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고, 이번에는 설민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 되물었다.

“그럼 그렇게 안 헤어졌을 텐데.”

그 말에 설민은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영롱이 아쉬운 투로 말하자 얘기를 듣고만 있던 태휘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 부근을 누르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에 와서 그런 얘기 해 봤자…….”

“형도 그렇지? 각자 서울이랑 보스턴에서 살며 원거리 연애할 때까지가 딱 좋았지?”

“아니.”

영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태휘는 짧게 대답했다.

자기가 미국에 쫓아와서 헤어졌다는 건 인과의 오류이자 굉장한 착각인데. 나더러 좋았던 기억 나쁘게 왜곡한다고 뭐라고 하더니만. 자기도 마찬가지잖아. 멤버들 앞이라 낱낱이 늘어놓지 못할 뿐, 좋았을 때는 더없이 좋았다. 나빴을 때도 한없이 나빠서 그렇지.

“그럼 형 생각은 어떤데?”

태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는 한참 뜸을 들였다.

“언제든, 어디에 있었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을 거야.”

단호하게 말하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술기운에 머리가 핑 도는데도, 십여 년 전 그들이 나눴던 밤의 기억은 더욱 선명해져만 갔다.

◀◀◀

- 200◆년 8월 -

- 어학원 갔다 오면 남는 시간엔 뭐해?

영롱이 묻자 태휘는 방 한쪽 구석에 세워 둔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신시사이저 앞에 앉아, 유선전화기를 바닥에 두고 스프링 코드가 팽팽해질 정도로 늘인 채 수화기를 귀와 턱 사이에 끼고 있는 채였다.

어학연수 기간 중엔 음대 학기가 시작하지 않았으니 그래도 여유가 있어 한국에 있는 영롱과 자주 연락할 수 있었다.

“애인이랑 통화하지.”

아이, 참. 그거 말구. 영롱은 은근히 좋아하면서도 투정 부리는 말투로 되물었다. 유학 직전 살벌하게 싸운 일은 애초부터 없던 일처럼 그저 알콩달콩하기만 했다.

서울과 보스턴의 시차는 13시간이어서 시간 맞춰서 겨우 통화하다 보니 싸울 만한 대화 소재는 나오지도 않았다. 틈틈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데만 집중했다.

태휘는 피식 웃고는 신시사이저를 누르며 멜로디를 들려주었다.

“곡 작업하지.”

- 건반 가져갔어?

“여기 와서 하나 장만했어. 어차피 학기 시작하면 필요하니까.”

- 작업한 거 좀 들려줘.

그 말에 태휘는 신시사이저 스피커 쪽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양손으로 건반을 두드렸다. 아직 미완성인 곡이었지만 경쾌한 도입부부터 후렴구 전까지는 만족스럽게 나와서 매끄럽게 연주해나갔다. 잠자코 감상하던 영롱은 연주가 끝나자마자 놀란 듯 말했다.

- 형답지 않게 되게 청량하네. 맨날 엄청 비장하거나 아니면 구슬픈 멜로디부터 떠오르잖아.

“그래서 별로야?”

- 아니, 좋아. 되게 여름 느낌이다.

태휘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밤의 해변을 내다보며 말했다.

“여기 집 앞이 바로 바닷가라 그런가봐. 서울에선 못 보던 풍경이라 새로워. 주말엔 사람이 몰려서 시끄럽기도 하지만.”

- 아무래도 환경이 달라지니까 영감도 달라지나 봐.

잘 갔네. 영롱은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심 같았다. 방금 들은 곡에서 어떠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지금 시점에서 태휘가 유학을 강행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한 듯 보였다.

- 빨리 완성해 봐. 딱 여름 활동 후속곡 감인데.

“타이틀곡 감은 아니야?”

- 타이틀곡으로 해도 돼? 부담스러워서 나 타이틀곡 안 주려는 줄 알았지.

영롱은 이 곡이 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물론 녀석이 부르는 가이드를 상상하며 작업하는 버릇을 아직 고치진 못했지만, 딱히 곡 주인 생각하지 않고 쓰고 있었는데.

차영롱이 부르면 또 찰떡같이 잘 소화하겠지. 얼핏 떠올리기만 해도 뮤직비디오 컨셉이나 무대 구성이 절로 그려졌다.

- 형 어학원 갔다 오면 어디 안 나가고 곡 작업만 해?

영롱은 애인의 하루를 속속들이 다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응. 주말에만 좀 돌아다니고.”

태휘는 이 말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자기 나름대로는 수줍은 고백과도 같았다.

“이렇게 너랑 통화하고 나면, 곡이 잘 써져.”

영롱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자 수화기 너머 녀석의 표정이 궁금했다. 기분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단박에 반응하는 녀석인데. 이 침묵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긴 태휘 자신조차도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애초에 유학을 오게 된 계기가,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는 영롱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걸 접해 볼 생각으로 온 거였는데. 여기까지 와서도 녀석에게 의지하고 있을 줄이야.

자기 딴에는 영롱이 좋아할 것 같아서 꺼낸 말이었는데 이번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그래서 얼른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팬클럽 애들이랑 여름 캠프 다녀온 건 어땠어? 재밌었어?”

- 아, 응! 재밌었어! 애들이랑 보물찾기하고, Q&A도 하고, 미니 콘서트도 했어!

진심으로 즐거웠는지 바로 해맑은 목소리로 반응했다. 이것 봐, 이렇게 알기 쉽다니까. 영롱은 한껏 신이 나서 캠프 때 있었던 일들 하나하나를 쫑알거리며 전해 주었다. 태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흐뭇한 미소로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

- 아, 맞다! 나 애들한테 형 유학 안 말렸다고 엄청 혼났다? 웃기지? 다들 내가 형 안 말린 줄 아나 봐.

태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롱은 억울해 죽겠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 내가 얼마나 말렸는데! 애들 붙잡고 엉엉 울고불고 하소연할 뻔한 거 겨우 참았잖아.

“그래서 애들한텐 뭐라고 했어?”

- ‘그 인간이 내가 말린다고 말려질 인간이니?’ 그랬지.

영롱이 뾰로통하게 말하자 태휘는 얼핏 기시감을 느끼곤 중얼거렸다.

“팬 애들 다 우리더러 서로 말리라고 그러네.”

영롱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 응? 애들이 형한테도 나 말리라고 한 적 있어? 뭐?

태휘는 아차 하고, 조금 전 중얼거림을 후회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인간을 떠올려야 했으니까.

‘영롱 오빠 권준원이랑 친한 거 마음에 안 들어요! 오빠가 놀지 말라고 좀 해 봐요.’

그 이후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않았다. 영롱도 더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듣기로는 한국에서 권준원의 인기는 더 치솟아서, 요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양이던데. 그래서 영롱이 꽁무니 쫓아다닐 시간도 없는 건지.

앞으로 신경 끄는 게 정신 건강상 좋을 것 같아서 권준원이란 인간은 세상에 없는 셈 치기로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때 괜한 질투와 오해로 화냈던 것 같아서 영롱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태휘는 얼른 말을 돌려 버렸다.

“아니야. 요새도 바빠? 스케줄 어때?”

- 응. 하루에 두세 개? 맨날 새벽에 나가서 밤에 들어오잖아.

그 말에 태휘는 걱정스러움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신 대표님이 너 막 부려 먹어?”

- 아니. 내가 바쁜 게 좋아서 매니저 누나한테 되는 대로 다 잡아 달라고 그런 거야.

“왜?”

- 오랜만에 활동하는 거니까.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야…….

녀석은 어째서인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태휘는 피로 때문에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영롱은 이내 밝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바꿨다.

- 그래도 후속곡 활동 거의 막바지라, 방송은 별로 없어. 라디오 고정 두 개만 있고.

“라디오? 어디?”

- 월요일엔 GBS FM ‘꿈결 라디오’, 수요일엔 HBC ‘감성 충전.’

태휘는 힘겹게 팔을 뻗어 책상에 놔둔 노트를 펼치곤 급히 메모했다. 한국 라디오는 여기서도 나오니까. 다만 시간대가…… 부지런 떨어서 일찍 일어나면 들을 수 있겠군.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메모하는 걸 알았는지 영롱이 물었다.

- 나 1집 활동 끝나면 라디오 DJ 할까?

지금도 피곤하다면서, DJ까지?

“너 DJ 하고 싶어?”

예전부터 팬들도 원했고, 조잘조잘 말하는 걸 워낙 좋아하니 잘하긴 할 거다. 그룹 시절에도 라디오 게스트로 나가면 작가 누나들이 영롱이에게 긴 멘트를 많이 맡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목소리가 달콤하고 듣기 좋으니까.

- 매니저 누나가 그러는데 나 DJ 섭외 많이 들어온대. 그리고 나 DJ 하면 형도 내 목소리 많이 들을 수 있잖아.

“지금도 거의 매일 통화하는데, 뭘.”

- 매일은 아니지. 이삼일에 한 번 하는데. 형 학기 시작하면 일주일에 한 번쯤 하겠지.

설마 바다 건너 자신에게 목소리 들려주기 위해 라디오 DJ를 하겠다는 건가? 매일 목소리 들으면 좋긴 하지만,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통화하며 함께 대화하는 쪽이 훨씬 좋은데. 더군다나 영롱에 대한 걱정부터 앞섰다.

“근데 라디오 DJ 하면 목에 안 좋을 텐데. 노래하는 것보다 말 많이 하는 게 목 빨리 쉬는 거 알지?”

- …….

“목 관리 잘하면서, 매일 두 시간씩 라디오 진행할 수 있겠어?”

- 앨범 활동 안 할 때 하면 되지. 다른 가수들도 DJ 많이 하잖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어쩐지 영롱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지더니 급격히 말수가 줄었다. 아니면 그냥 피곤한 걸까?

“너 오늘은 스케줄 없어?”

- 오늘 오전 스케줄은 끝났고 밤에 또 있어. 아, 나 내일 ‘우리꿈 콘서트’ 나간다!

“혼자?”

- 그럼, 혼자지.

‘우리꿈 콘서트’는 한국대중음악제작자협회가 주최하는 대규모 연합 자선 콘서트였다. STORY 활동 당시에는 매년 빠지지 않고 참여해 엔딩 무대에 올랐다. 그룹 해체 후 솔로로는 영롱이 처음으로 혼자 서게 되는 셈이었다.

“설민이는?”

- 설민이 형? 안무 감독이 ‘우리꿈 콘서트’까지 올 필요는 없지. 아, 그날 가디언즈 애들 나올 테니 오려나?

가디언즈는 SS엔터테인먼트가 STORY 후속으로 내놓은 신인 그룹이었다.

- 설민이 형 그 팀 메인 보컬 애랑 사이가 아주 수상하던데.

“현우?”

태휘도 회사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었다. 첫 녹음 때 대표님이 불러서 모니터링해 주기도 했고.

- 어. 나 솔로 데뷔 날 설민이 형이 응원 왔었는데, 걔네 대기실에 한참 있다 오더라고?

“안무 담당이니까 그런 거 아니야?”

- 아니야. 그거 말고도 둘이 눈빛이 막……. 암튼 보면 알아.

이설민이 드디어 영롱에 대한 짝사랑을 접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태휘로선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영롱이 홀로 ‘우리꿈 콘서트’ 같은 큰 공연에 가는 건 조금 신경 쓰이는데.

합동 콘서트는 대기실도 여의치 않아서 다른 팀이랑 북적북적 함께 쓰게 된다. 매번 팀으로 가다가, 혼자 가면 팀들 사이에서 소외감 느끼거나 외로워할 게 뻔했다. 앞으로 그런 일에 적응하는 것도 영롱이 해내야 할 몫이긴 하지만…….

“오은이는 솔로 준비 안 한대?”

- 개오은 그 자식은 같이 활동해도 도움 되겠어?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동갑내기 친구이니 없는 것보단 나을 텐데.

- 안 그래도 곡 쓰고 있더라고. 지난번 만났을 때 몇 개 들려줬는데 나쁘진 않았어.

“강이 형은?”

- 강이 형은 내년 전역이잖아. 저번 휴가 때 보니까 전역하면 미국 집에 가서 부모님과 좀 지내다가, 한국 와서 배우 준비하기로 계획 세웠더라고.

“아예 배우로 전향한대?”

- 응. 가수보다는 배우에 욕심 있다고 전부터 얘기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STORY 때도 강이 형은 태휘에게 종종 고민 상담하곤 했다. 다른 멤버들에 비해 가수로서 특출 난 점이 없어 언제까지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결국 그렇게 계획을 세웠구나.

- 아, 형 내년에 미국에서 만나도 되겠다.

“그래. 강이 형 집은 서부니까 좀 멀긴 하지만.”

태휘의 대답에 영롱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 그나저나 형이 멤버들 얘기를 먼저 꺼내다니, 의왼데?

……그러게. 몇 달 전만 해도 모조리 꼴도 보기 싫어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웃긴 일이었다. 대형 콘서트에 홀로 참가할 영롱 걱정에, 자기도 모르게 가장 먼저 찾는 게 원수 같은 멤버들이라니.

정확히 말하면 원수보다는 연적(戀敵)에 가깝지만. 그래도, 그놈의 연적은 이제 그룹 밖에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차라리 자신의 영향력이 닿는 멤버들이 낫지.

그나저나 영롱의 발음이 점점 뭉개지고 말수가 적어지는 걸 보아하니, 전화기를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녀석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태휘는 문득 시계를 확인하고는 머릿속으로 시차를 계산해 보았다. 이곳이 자정 직전이니 서울은 오후 1시쯤이었다. 야행성 인간인 영롱에게는 아직 새벽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게 왜 평소와 다르게 이 시간에 통화하겠다고 우겨서는.

“영롱아. 졸리면 전화 끊고 자.”

- 안돼, 조금만 더.

“너 또 수화기 들고 잠들다가 전화 요금 왕창 나온다. 너 지난달에도…….”

- 형, 잠깐!

그러더니 무선전화기로 바꾸는 전환음과 함께 수화기 너머에서 뭔가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롱의 알 수 없는 행동에 태휘는 건반 앞에서 일어났다. 진짜 얘 오늘따라 이상하지, 왜?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태휘 형! 생일 축하합니다!!!

갑자기 영롱이 손뼉까지 치며 노래를 부르자 태휘는 반사적으로 달력을 쳐다보았다. 아아, 어쩐지. 태휘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너 이거 때문에 안 끊고 있었던 거야?”

- 그럼! 형 미국에서 혼자 보내는 첫 생일이잖아! 어떻게 그냥 넘어가?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안 그래도 데뷔 이후 매년 팬들과 생일 파티를 하다가 작년 해체 후 처음으로 아무 이벤트 없이 생일을 보내니 어쩐지 낯선 감정이 들었던 태휘였다.

평소 생일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성격임에도, 3년 간 멤버와 팬과 함께 보내다가 집에서 혼자 조용히 보내니 허전했다. 더군다나 그땐 영롱도 곁에 없었고. 올해도 타지에서 혼자 보내야 하니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날짜도 잊고 살았는데.

아무리 무뚝뚝한 태휘라도 애인 생일 챙겨 주겠다고 졸린 눈 비벼 가며 전화기 붙들고 있던 영롱의 모습을 상상하니 기특하고 귀엽고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고마워. 이제 그만 자.”

- …….

영롱이 아무 반응이 없자 태휘는 자신이 무슨 실수했나 싶었다.

“왜?”

- 형도 참~. 내가 고작 축하 노래만 불러 주려고 안 자고 버틴 줄 알아?

어째서인지 볼멘 듯한 영롱의 목소리에 태휘의 머릿속엔 물음표만 가득했다.

- 나 지금 욕실 들어왔어.

그러고 보니 전화 음감이 조금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소리가 약간 울리는 것 보니, 정말로 욕실에 무선전화를 가지고 들어간 모양이었다.

- 형도 빨리 벗고 들어와.

미쳤네. 태휘는 순간 마른침을 삼키며 바보 같게도 반사적으로 자신의 집 욕실을 돌아보았다. 영롱이 여기 와 있을 리가 없는데도. 녀석이 요구하는 게 다름 아닌 폰섹스라는 걸 깨닫고 태휘는 전화기만 붙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보스턴에 온 뒤, 영롱을 떠올리며 자위한 적은 있지만 폰섹스는 처음이었다. 들고 있는 수화기 너머에선 욕조 안의 물 튕기는 소리가 넘어왔다.

- 옷 벗었어? 나 벌써 다 풀어 놨단 말이야.

오 마이 갓. 굳어 있던 태휘는 겨우 발걸음을 떼고는 바닥에 내려 뒀던 유선전화기 본체를 들어 침대 위로 올라갔다. 전화기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채 침대에 눕고는 욕조 물에 몸을 담근 영롱의 맨몸을 상상하며 바지를 내렸다. 첫 폰섹스의 기대감에 태휘는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였다.

“벗었어. 이제 뭐 할 거야?”

- 형 꺼 빨아 주려고.

태휘가 놀라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사이, 영롱은 진짜로 뭘 빨고 있는지 크게 쪽쪽거리는 소리를 냈다. 태휘는 서서히 손을 내려 그 적나라한 소리에 맞춰 자신의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전화기 너머로 야릇한 숨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자 금세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 으응, 너무 커, 형.

“나 넣고 싶어, 영롱아.”

- 잠깐만…….

영롱이 크게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욕조의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의 후끈한 열기와 습도까지 전해지는 느낌이 들어 태휘는 더 쉽게 흥분되는 듯했다. 실제로 저 욕실에서 얼마나 많이 사랑을 나눴던가. 그곳의 광경이 여전히 생생히 그려졌다.

- 후, 흐읏…….

영롱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녀석 혼자 삽입을 시작한 듯했다. 이쯤에서 태휘는 순수한 의문이 들어 자신의 것을 손에 쥔 채 두 눈을 끔뻑였다.

“너 손가락으로 하고 있어?”

- 아니, 딜도. 형꺼 내 손가락으로는 모자라잖아.

그건 또 어디서 구했대? 그나저나 그딴 고무좆 따위가 질투 나긴 처음이었다. 자신은 한동안 못 느낄 영롱의 축축한 혀도 닿고, 안까지 쑤신다니. 하지만 이내 폰섹스의 목적에 맞게 최대한 그 장난감에 이입해 보기로 했다.

태휘는 영롱의 좁고 뜨거운 내부를 떠올리며 두 손으로 자신의 것을 움켜쥐었다. 비록 현실은 보스턴 아파트의 침대 위를 혼자 뒹굴고 있었지만, 또 다른 자신은 영롱의 집 욕조 안에서 녀석을 안고 있는 거라고 상상했다.

잔뜩 물기에 젖은 채 자신의 위에서 헐떡이고 있는 영롱의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그의 허리를 붙들자 녀석 스스로 엉덩이를 벌리며 더 깊이 내려앉았다.

“너무 뜨거워, 영롱아.”

- 형, 더 깊이, 흐앙!

영롱의 몸짓이 격렬해지며 첨벙거리는 소리 또한 커졌다. 녀석이 느끼는 곳을 찔러 댈수록 교성은 점점 커졌고, 태휘의 어깨를 끌어안은 손길마저 강해졌다. 자신의 귀를 물고 빠는 영롱의 젖은 숨결을 느끼며 더 세게 쳐올리자 영롱은 바르작거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아, 아! 너무 좋아!

무선 전화의 불안정한 음질이 계속 현실을 일깨워 주긴 했으나, 이미 두 사람은 잔뜩 몰입하여 서로의 손길과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태휘는 평소 혼자 자위할 때보다 훨씬 빨리 절정에 이른 데 반해, 영롱은 아직 정신없이 즐기고 있는 듯했다.

“영롱아, 영롱아.”

- 하읏, 으응…….

얼마나 신나게 쑤셔 대고 있는지,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데도 전화기 너머에선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신음만 섞여 들려왔다. 아, 진짜 딜도 새끼 부러워 죽겠네. 태휘는 무의미한 질투를 마음에 품은 채 성기 끝을 틀어막고는 가까스로 버텼다.

“영롱아, 나 갈 것 같아.”

- 같이 가. 형, 안에다 가득 싸 줘.

흐읏, 씨발. 태휘는 바로 성기 끝을 자유롭게 한 뒤 팔이 아플 정도로 탈탈 흔들어 댔다. 영롱의 말대로 안을 가득 채워 줄 심산으로. 쾌락으로 가득 찬 영롱의 표정을 떠올리며 거친 신음과 함께 손바닥에 사정했고, 전화 너머에서도 곧바로 절정에 이른 듯했다.

- 아! 아아!!

숨을 고르며 시간 차로 영롱의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평소처럼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겠지. 붉은 입술을 마구 깨물고 있겠지.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강하게 움켜쥐고 있다가 절정이 지나간 후 부드럽게 어루만지겠지.

그 손길을 떠올리니 실제로 한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그 손길이, 피부가, 향기가 미친 듯이 그리워졌다. 생일 선물로 폰섹스도 좋지만 진짜로 갖고 싶은 건 너라고 말하고 싶었다.

허나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에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일방적으로 떠나온 입장에선 너무도 무책임한 말이었으니까.

“영롱아.”

태휘가 영롱을 부르자 잠시 후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응?

“생일 선물 고마워.”

어디에 있건, 넌 영원히 내 꺼야. 그 말을 덧붙이자 영롱이 흡족하게 웃는 입꼬리가 태휘의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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