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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4. 어떤 예감 (04:07) (30/39)

Track 4. 어떤 예감 (04:07)

태휘가 원샷한 이후로 멤버들은 절제고 뭐고 다 때려치운 듯 마구 마셔 대기 시작했다. 리더가 달리기 시작했다는 건 이 회식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까. 사실 설민과 오은은 자꾸만 술자리를 얼어붙게 만들 거라면 차라리 빨리 뻗어 줬으면 싶었다.

태휘는 잘 마시다가도 어느 시점에서 순식간에 기절하듯 쓰러져 버리는 술버릇이 있었다. 다른 멤버들은 그 꼴을 자주 봐 왔기에, 유난히 잔소리가 심한 날은 일부러 빨리 달려서 먼저 재우곤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태휘 형, 천천히 마셔.”

이제는 차영롱이 있으니까. 오직 녀석만이 태휘를 살뜰히 챙기며 폭주를 막아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설민과 오은은 넌더리를 치며 더 빠르게 술잔을 비웠다.

“어째 이놈의 집구석은 예전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술기운이 가득 오른 오은이 불평하듯 언성을 높였다.

“달라진 게 없긴. 아까 회의 때도 태휘 저 새끼가 그랬잖아! 우리 이제 다 늙었다고.”

설민이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태휘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늙었다고…… 까지는 안 했는데…….”

태휘는 취한 와중에도 말을 정정해 주었고, 설민은 불만 가득한 투로 말했다.

“그 말이 그 말이지! 아깐 얘기 못 했지만 뼈 아파 가지고, 새끼……. 행복회로 좀 돌리면 덧나?”

태휘는 알코올 탓에 평소보다 느릿하게 돌아가는 머리로 받아칠 만한 적절한 말을 찾고 있었다. 버퍼링에 걸린 태휘 대신 영롱이 대꾸했다.

“우리 태휘 형이 아픈 말은 하지만 틀린 말은 안 하잖아.”

그러고는 태연스럽게 술을 들이켰고, 순간 오은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태휘 형? 진짜 꼴값을 한다.”

“개오은, 불만이냐?”

“아,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 버렸네.”

두 사람의 유치한 말싸움을 끊어 줄 겸, 영롱에게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려 설민이 끼어들었다.

“영롱이 너는 태휘 말에 누구보다 따박따박 잘도 대들면서, 남들이 뭐라고 하면 꼭 편들더라.”

“그게 말이지, 들을 땐 재수 없고 짜증나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일 경우가 많더라고.”

그러더니 맞은편에 앉은 태휘를 쳐다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태휘는 점점 풀리는 눈으로 최선을 다해 영롱의 얼굴을 주시했다. 영롱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여유롭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그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의 눈 맞춤을 지켜보던 나머지 세 멤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 나, 이거 하난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겠는데.”

묵묵히 동생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한강이 갑자기 입을 열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래도 술이 꽤 오른 것 같았다. 태휘에게 삿대질까지 하는 거 보니.

“재결합 프로젝트 제대로 시작하기 전에, 우리 확실히 해 놓자고.”

“뭘 말이에요?”

“네가 걱정하는 문제들, 우리도 다 모르는 거 아니야. 그래도 방송국이랑 회의까지 마쳤으니, 어떻게든 잘 진행해야 되잖아. 우리 다 방송 경력 하루 이틀도 아니고.”

태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두 가지만 약속해 줘. 첫 번째는, 앞으로 멤버들 사기 떨어트리는 소리는 하지 않기.”

다들 왜 이리 두 가지 약속 좋아할까. 지난번 영롱이도 그러더니. 그 생각부터 든 건 사실이지만 태휘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팀 내 맏형임에도 한강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기보다는 리더인 태휘를 믿고 따르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당부한다는 건 그만큼 걱정하고 있단 뜻이니까.

“알았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이건, 영롱이한테도 해당되는데.”

자기 이름이 나오자 술을 들이켜고 있던 영롱이 입가를 닦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너희,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 봐. 전 애인이랑 아무렇지 않게 한 팀으로 일할 수 있겠어?”

그 말에 태휘와 영롱은 고개를 돌려 서로를 다시 쳐다보았다.

“나머지 멤버들 불편한 상황, 만들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이미 충분히 불편한 상황 많이 나왔는데. 설민과 오은은 속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뼉까지 쳐가며 한강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강이 형, 멋져!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진짜! 나도 얘네 일 더는 신경 안 쓰고 싶거든!”

취한 오은과 설민이 연달아 맞장구치자 태휘와 영롱은 잠시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태휘가 먼저 한숨 섞인 말을 뱉었다.

“저야말로 얘한테 원하는 게 그거라서요.”

이제 멤버들의 시선은 다 영롱에게로 쏠렸다. 그 시선을 확인한 영롱은 피식 웃고는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들 걱정하는 게 그것뿐이라니, 속 편하네.”

‘그럼 다른 걱정거리가 있단 소리야?’라는 질문이 멤버들 머리에 동시에 떠올랐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 생각은 술기운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같이 일 못 할 거였으면 돌아오지도 않았지.”

그렇게 말하고는 멤버들의 얼굴을 슥 둘러보았다.

“여기 나랑 잔 남자만 4명인데, 전 애인이 대수겠어?”

불시에 저격당해 굳은 표정이 된 네 명의 남자들과 달리, 영롱은 느긋하게 술잔을 입에 대며 말했다.

“우리가 한 팀인 이상, 불편함은 감수하라고 말하고 싶네요.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까, 약속도 못하겠고.”

그러면서 태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태휘는 순간 느껴지는 아득함에 눈을 감은 채 이마를 짚었다. 녀석을 컨트롤하는 건 포기한 지 오래고, 무슨 말을 할지도 예상이 됐다. 그에 비해 한강이나 설민, 오은은 녀석의 당당하고도 뻔뻔한 태도에 놀라 멍한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나도 나름대로 가수 복귀라는 큰 결심을 하고 돌아온 거야. 나라고 망치고 싶을 리 없잖아.”

영롱은 멤버들의 반응을 한 번 훑어보고는 입가에 가져가던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니 믿어 주면 안 될까? 재결합, 꼭 성공하고 싶으니까.”

한강, 태휘, 설민, 오은의 얼굴엔 복잡하고도 다채로운 빛이 지나갔다. 의심, 불안, 걱정. 영롱이 잔을 내민 팔을 거두지 않고 있자 멤버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태휘가 술잔을 들어 영롱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그 모습에 설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한강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결국 술잔을 들었다.

“젠장, 안 믿으면 어쩔 거야.”

한강을 따라 설민도 술잔을 부딪치자, 오은도 뒤늦게 잔을 들어 건배했다. 처음 만난 15년 전보다 나이를 먹은 건 분명한데, 앞에 펼쳐진 길은 여전히 안개 낀 듯 희뿌옇기만 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길을 잃어도 다 같이 안개 속에 몸을 던지는 수밖에.

▶▶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STORY 다섯 명의 술자리는 쉽게 파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들 취기가 오르면서 태휘와 영롱의 연애사도 잊고 골치 아픈 재결합 프로젝트 얘기도 건너뛰고 멤버들의 근황으로 화제가 옮겨졌다.

멤버들이 그간 영롱의 소식을 궁금했던 것처럼, 영롱 역시도 그랬으니까.

“강이 형 주연으로 나온 영화는 봤지. 큰 스크린으로 보니 더 잘생겨서 깜짝 놀랐네.”

“야, 나는! 방송 활동은 내가 제일 많이 했는데?”

설민이 서운하다는 말투로 칭얼거렸다.

“TV는 잘 안 봤다니까! 아, 개오은 노래도 들어봤다. 워낙 차트 상위권에 있어서,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더라.”

“존나 고맙네.”

“보컬과 교수도 하고, 진짜 많이 컸다. 그럼 학생들이 계 교수님이라고 불러? 딱이다, 개교수!”

“뭐래, 좆만 한 새끼가.”

또 유치한 싸움으로 번지려는 걸 설민이 끼어들어서 막았다.

“그럼, 태휘가 곡 준 가수들 노래도 들었어?”

“찾아 들은 적은 없어. 근데 듣자마자 딱 알았지. 아, 이거 원태휘 프로듀싱이네.”

“나 화장실 좀.”

영롱이 말하는 중에 태휘가 일어나자 설민은 아래층으로 가라고 알려 주었다. 태휘 혼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데도 나머지 멤버들 역시 거나하게 취해 저들끼리 마시기 바빴다.

영롱만이 그런 태휘를 힐끗거렸으나 옆에 있던 설민이 목을 와락 끌어당기는 바람에 무사히 내려가는지는 끝까지 지켜보지 못했다.

“야, 우리 2차로 노래방이나 가자!”

“노래방은 무슨 노래방이야! 오늘은 좀 쉬자!”

설민의 말에 오은은 정색하며 강냉이를 집어 던졌다.

“나 노래방 간 지 오래됐단 말이야! 그리고 모처럼 영롱이 노래도 듣고! 강이 형도 듣고 싶지?”

“리더님한테 또 한 소리 듣고 싶어? 방송 전까진 보안 유지하랬잖아. 노래방은 무슨!”

“이 근처에 내 단골 노래방 있어! 거기 가면 안전하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끝까지 노래방에 가야겠다며 우기는 설민과 술이나 마시자는 오은과 한강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붙어 시끄러운 실랑이가 이어졌다. 영롱은 그새 또 속이 울렁거려 왔다. 결코 술 때문은 아니었다. 기본 안주 접시가 빈 걸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1층으로 내려와 주방으로 가려던 영롱은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복도까지 나가니 구역질하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화장실 문을 열자 한쪽 칸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태휘의 뒷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그 모습에 영롱의 속은 도리어 진정됐다.

“으이그, 웬일로 무리하나 했다!”

영롱은 큰소리치며 다가가 좁은 화장실 칸에 몸을 밀어 넣었다.

“난 또 술 좀 는 줄 알았지!”

투덜거리며 등에 손을 얹자, 흠칫 놀란 태휘가 고개를 쳐들었다. 영롱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해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다 했어? 속 괜찮아?”

멍한 눈빛을 보아하니 술이 깬 것 같진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미루어 볼 때 이 표정이면…… 10분 안에 뻗겠군. 기절 견적을 내는 동안 태휘는 말없이 화장실 칸 밖으로 나왔다.

영롱은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해 세면대에서 입 헹구는 것과 세수까지 도와줬다. 페이퍼타월을 뽑아 얼굴을 닦아 주는 손길도 뿌리치지 않고 잠자코 있는 걸 보니 꽤 많이 취했구나 싶었다.

“……하지 마.”

눈을 감은 채, 어떤 물리적인 힘도 실리지 않은 말로만 제지할 뿐이었다.

“뭘?”

영롱은 태휘의 팔을 꽉 붙든 채 얼굴을 가까이 바싹 붙이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뭐든, 하지 마.”

태휘는 그제야 영롱을 밀어 내고는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화장실 앞 복도에 주저앉고 말았다. 낑낑거리며 일으켜 주려던 영롱은 태휘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아주 앉아 버리자 할 수 없이 그 옆에 털썩 따라 앉았다.

“너 대체…… 왜 돌아온 거야?”

태휘는 머리를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중얼거리듯 물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혼잣말처럼 들렸지만, 영롱은 친절히 대꾸해 줬다.

“그럼, 영원히 돌아오지 않길 바랐어?”

“그게 아니라, 왜 돌아왔냐고.”

혼잣말 맞잖아. 다 알면서.

“이미 알고 있잖아.”

그 말에 태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넌…….”

드디어 잠이 쏟아지기 시작하는지,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또 나야?”

영롱이 돌아온 이유를 태휘는 여태껏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녀석이 하고 싶다는 ‘재결합’이 사실은 중의적인 표현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았던 거다. 모르는 척 외면하면 사실이 아니게 될 것처럼. 그리고 이제는, 그 이유의 진의(眞意)를 알고 싶었다.

“네 인생에서…… 20년을 알아 왔으면 됐지, 왜 이 짓을 계속하려고 해?”

그 말에 영롱은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아주 간단한 문제라는 듯 바로 대답했다.

“형이 나였어 봐. 나로 살아봤으면 형을 사랑하지 않기 힘들걸.”

“헛소리.”

태휘 역시 단박에 일축했다. 무겁게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자 안 그래도 진한 쌍꺼풀이 여러 겹 생겼다.

“네가 나한테, 그렇게 했는데. 나는 너한테 그렇게 했는데.”

태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불가능한 일이야.”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려 영롱을 쳐다보니, 그 속을 짐작도 못하겠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랑놀이라면 그때 할 만큼 다 했잖아.”

“아니.”

무거워서 자꾸만 감겨오는 자신과는 달리, 동그랗게 뜬 두 눈이 반짝이듯 빛났다.

“그래도 부족해.”

그러더니 영롱은 세워서 앉은 무릎 위에 손깍지를 올리곤, 얼굴을 기댄 채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있잖아, 형. 내가 돌아온 이유는 말이야.”

녀석이 드디어 말하려고 하는데. 점점 흐려지는 의식이 야속하기만 했다.

“형이랑 했던 약속 지키려고.”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결국 태휘는 버티지 못하고 스르륵 쓰러져 버렸다. 자신의 어깨에 기댄 태휘의 무게를 느끼며, 영롱은 허공을 향해 마저 중얼거렸다.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

“어쩌면 사랑이 다가올 듯한, 그런 예감이~♪ ……야, 영롱이 어디 갔어?”

한강과 오은의 만류로 노래방에 대한 열망을 접은 줄 알았던 설민은 급기야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았다. 임시 마이크를 든 채 목청껏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오은을 향해 물으니 바로 썩은 표정을 지었다.

“왜 나한테 물어? 몰라, 아까 안주 가지러 가는 것 같았는데.”

한편 몇 병째인지 모를 술을 새로 까던 한강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그나저나 태휘도 화장실 가서 안 오네?”

그 말에 설민과 오은의 시선이 부딪히며 순간 술이 깬 듯 말똥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술을 따르던 한강은 얼어붙은 듯 굳어 있는 동생들의 표정을 보더니 의아해했다.

“왜 그래?”

“설마…….”

“아니겠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있던 세 사람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거리에는 새벽의 어스름 푸른 불빛이 드리웠다.

▶▶

‘그래도 부족해.’

‘형이랑 했던 약속 지키려고.’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말들만이 태휘의 귓가에 맴돌았다.

다시 만나기 전, 태휘가 기억하는 녀석의 마지막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은 분노와 원망이 흘러넘쳐 눈물을 뚝뚝 흘렸고 다신 안 볼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은 애인으로서 최악이야.’

그땐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머리가 나쁜 거니, 아니면…….

거기까지 의식이 흘러갔을 때,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감각과 함께 쿵 소리가 났다. 얼얼한 충격에 눈을 떠보니 익숙한 거실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태휘가 잠든 곳은 자신의 집 소파였다.

평소에는 침대 놔두고 거실에서 자는 일이 거의 없는데 어째서 소파에……? 태휘는 찌뿌둥한 몸을 겨우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어제 입고 나간 옷차림 그대로였고 탁자 위에는 아파트 출입 카드키가 놓여 있었다.

집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혼자 알아서 잘 기어들어 왔다면 놀라운 일이었다. 멤버들이 데려다준 걸까? 어제 여러 술을 섞어 마신 탓인가,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기억도 뜨문뜨문 끊겨 있었다.

영롱과 대화를 나눈 것도 같은데, 그게 현실인지 꿈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비척비척 걸어서 현관으로 가 보니 자신의 신발 옆에 낯선 신발이 한 켤레 있었다. 아니, 완전 낯선 신발은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집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단 거실엔 자신뿐이었다. 침실을 향해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걸어갔다. 내 집에서 이렇게 조심할 일인가?

조용히 침실 문을 열어 보니 영롱이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집주인은 소파에 눕혀 두고 자기는 당당히 침실에서 자고. 참으로 영롱답다고 할까나. 게다가 어디서 멋대로 꺼냈는지, 입고 있는 옷마저 자신의 것이었다.

집, 침실, 침대, 옷까지 점령한 영롱의 모습에 태휘는 일순 숙취가 더 심해지는 듯했다. 그러곤 두 팔로 어깨를 감싼 채 재빨리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저 새끼, 술 취한 나까지 덮친 건 아니겠지? 그러고도 남을 녀석인데.

그러고 보니 취해서 잠든 자신을 납치해 데려온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다행히 옷매무새가 흐트러졌다거나 생리현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식겁했네.

태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영롱이 깨지 않게 침대 귀퉁이에 살짝 걸터앉았다. 녀석은 베개 아래로 두 손을 넣은 채,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덕분에 녀석의 얼굴을 대놓고 뜯어볼 기회가 생겼다. 재회한 이후 힐끔거리기만 해도 틈도 안 주고 예뻐서 쳐다보는 거냐며 물어 댔으니까. 예쁜 건 둘째 치고 일단 신기했다. 세월의 풍파 따위 혼자서만 다 피한 듯, 예전 얼굴 그대로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하다는 게.

시술이나 성형외과적인 도움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얼굴에 손대는 건 녀석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자기애가 상당히 강해서, 남들이 얼굴 어디가 아쉽다고 지적해도 ‘뭐래?’ 하고 무시할 타입이었다. 차영롱에게 감히 그러는 이들도 없지만.

태휘는 영롱의 눈 주위, 입 주변, 귓바퀴까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어디가 아파 보이기는커녕 10살은 어려 보이는 걸. 요즘 애들처럼 은발로 염색까지 했더니 더더욱 제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못 본 사이 뱀파이어에게 물리기라도 한 건지.

이렇게 가까이에서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자연히 옛날 생각이 났다. 한 침대에서 잠들고 한 침대에서 깨어나는 게 당연하던 때가 있었는데. 어떨 때는 태휘가 먼저, 때론 영롱이 먼저 일어나 상대방이 깰 때까지 잠든 모습을 들여다보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살 맞대고 잔 게 하루 이틀이 아닌데 눈 뜨자마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 뭐가 그리 애틋했는지. 그리고 10년이나 지났으면서 그때의 감정이 이렇게나 선명할 일은 또 뭔지.

어느덧 태휘는 자기도 모르게 침대 위로 올라와 영롱의 옆에 누워 팔을 괴고 있었다. 어쩐지 두통도 잠잠해져 왔다. 한참 동안 영롱의 얼굴만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진작 가졌어야 할 의문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나저나 집까진 어떻게 온 거지? 녀석에게 이 집을 알려 준 적 없는데. 설마 멤버들이 가르쳐 줬나? 그들의 염려를 미루어 볼 때 그러진 않았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영롱에겐 전적이 있다. 주소도 알려 주지 않은 집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 전적이.

◀◀◀

- 200◆년 10월 -

지난달 음대 학기가 시작되고, 태휘는 본격적인 대학 생활에 돌입했다. 처음 한두 달은 전공수업을 쫓아가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영롱의 예언대로 영롱과 전화 통화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못 했다.

과제와 시험 준비도 그것대로 부담이었지만,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에서 음악 용어나 전문 용어 등 놓치는 부분이 꽤 있어서 수업이 끝난 후 영어 과외를 받다 보니 다른 학생들보다 시간이 빠듯했다.

물론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새로 접하는 지식에 벅찰 정도의 재미를 느껴 시간을 많이 쏟기도 했다. 가수이자 프로듀서로 음악 작업을 많이 하긴 했지만, 독학으로 익히거나 선배 작곡가들에게 귀동냥으로 배운 거에 불과했기에 스스로 갈급함이 있었다.

이번 유학은 그 갈급함을 채우기 위함이었고, 첫 학기부터 매우 만족스러웠다. 마치 처음 음악에 빠져 매일매일 레코드 가게에 들락날락했던 어린 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과제도 시험공부도 기꺼이 즐기면서 하게 됐다.

음악을 독학했을 땐 혼자였다면, 지금은 같은 수업을 듣는 동기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그 친구들과의 교류도 태휘의 눈과 귀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영롱과 함께 예고에 다니긴 했지만, 지금 다니는 대학처럼 일대일 레슨이나 구체적인 커리큘럼도 없었고 무엇보다 연예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학교를 거의 나가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대학 안팎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한국에 있는 영롱에게는 틈틈이 전화와 메일로 이런 상황을 전했으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포용해 주었는지는 태휘로선 알 길이 없었다. 연락이 뜸해지는 초반에 영롱은 점점 불만이 쌓여 칭얼거리기도 하고 그 때문에 종종 말다툼도 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말다툼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깨달았는지 더는 보채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시점부터는 기분이 급격히 좋아진 양 통화 목소리가 한층 들뜬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무슨 요새 좋은 일 있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 아니? 그냥 형이랑 오랜만에 통화하니 좋은 거지~. 연락 자주 못해도 앞으론 이렇게 몇 년 지내야 하니까……. 포기하면 편하잖아!

세상 산뜻하게 얘기하는 목소리에 마음 한편으론 왠지 의심쩍으면서도, 그래도 애인이 우울한 것보단 기분 좋은 게 훨씬 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한동안 마음 놓고 학교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바쁜 유학 생활 와중에 작은 사건도 하나 있었다. 태휘가 다니는 B 음악 대학에 한국인 유학생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학기 초 강의실 앞에서 아는 얼굴과 우연히 마주친 일이었다. 아는 얼굴보다는 더 가까웠던 사이라고 해야 하나.

“주하은?”

다른 사람도 아닌 하은을, 다른 곳도 아닌 보스턴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은도 예고 음악과 학생이었으니,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음대에 유학 오는 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타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수업 끝난 뒤 맥주 한잔하며 얘기를 나눴다. 예고 시절 관현악 전공이었던 하은은 연주 외에도 음악 업계에서 폭넓게 일하고 싶어서 뮤직 비즈니스과로 유학을 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학교 다닐 때도 그 쪽에 관심 있단 얘길 나눴던 기억이 났다. 태휘는 하은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잔에 손을 뻗었다.

“너 애인 있구나?”

그때 하은이 태휘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하고 물었다. 태휘는 그제야 당황하며 맥주잔을 내려놓고 다른 손으로 반지를 가렸다.

이곳에서는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왼손 약지에 당당히 커플링을 끼고 다녔다. 한국에서는 기자들 때문에라도 절대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심지어 멤버들에게도 숨긴 비밀 연애였으니, 하은에게 들키게 되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걱정 마! 설마 내가 어디 제보할까 봐서? 안 그러지! 의리가 있는데.”

하은은 태휘더러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면서 연예인 어떻게 하는 거냐고 놀려 댔다. 원래 포커페이스에는 자신 있었는데 낯선 도시에서 옛 친구를 만나니 저도 모르게 풀어진 모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만은 아니었지만.

“애인은 한국에 있어? 장거리 연애? 힘들겠네.”

태휘는 그렇다고 하고 자세히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학창 시절 사귀었던 전 여자 친구와 현재의 애인 얘기를 나누기는 조금은 어색했다. 게다가 하은은 영롱도 잘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영롱이는 잘 있어? 너 유학 와서 걔 엄청 섭섭하겠다.”

애인 얘기에서 바로 자연스럽게 영롱의 안부로 넘어가자 제 발이 저려 등줄기에 한 줄기 땀이 흘렀다.

“걔 학교 다닐 때 맨날 너 졸졸 쫓아다녔잖아. 그래서 나도 엄청 미워하고.”

“아니, 별로 안 미워했어.”

태휘는 냉큼 반박했다. 적어도 태휘가 알고 있기는 그랬으니까.

‘하은 누나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네.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나도 하은 누나 좋았어.’

물론 하은과 사귄 건 영롱의 호불호와는 상관없었다. 영롱과 중학교 시절부터 내내 붙어 다니다가 유일하게 떨어져 있었던 1년, 태휘는 고1이고 영롱은 중3이었을 때 하은을 알게 됐다.

당시 고백해 온 여자애들 중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태휘의 취향에 가장 가까웠다. 게다가 평소 말수 없는 태휘의 속마음을 기가 막히게 꿰뚫어 보는 사람이기도 했고. 만나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돼서 마음이 편했다.

“네가 뭘 아니? 날 보는 걔 눈빛이 어땠는지 넌 못 봤지?”

그 말에 태휘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영롱이 그렇게 말하긴 했다.

‘형의 여자 친구인 것만 마음에 안 들었지.’

돌이켜보니 의도치 않게 하은과 영롱 두 사람을 연적으로 만든 셈이었다. 하은에겐 무엇보다 미안한 마음이 계속 남았다.

지금은 영롱과 사귀지만 당시엔 영롱을 향한 감정이 사랑인 줄 몰랐던 시절이라, 어찌 보면 어린 마음에 얼렁뚱땅 시작한 이성 교제였다. 진심 없는 연애에다가 영롱의 질투까지 덤으로 딸려 왔으니, 당연히 하은에게도 좋은 남자친구로 기억될 리 없었다.

헤어진 이후 아쉬움보다는 미안함이 커서, 태휘는 쓴웃음을 머금고는 다시 맥주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래서 나랑 헤어지고 걔랑 사귈 줄 알았는데.”

하은이 담담한 투로 말하자 태휘는 그만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

“무슨 소리야?”

“아니야? 그 성격으로 봐선 몇 년 안에 너를 쟁취할 것 같았는데.”

내가 말했지? 기가 막히게 꿰뚫어 본다고. 음악 하지 않고 점집을 차려도 될 예지력인데? 아니, 뮤직 비즈니스 전공이라니까 이런 통찰력이라면 어떤 비즈니스든 성공할 친구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너도 걔 엄청 신경 썼고. 여자 친구인 나보다 더.”

하은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생각해보니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녀석은 항상 신경 쓰이는 존재였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고. 태휘는 테이블 아래로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결국 하은의 말대로 영롱이 자신을 쟁취한 셈이니, 미안함은 더더욱 쌓여만 갔다. 이 사실을 말도 못 하고. 태휘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 그 마음 역시 알아챈 하은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제 와서 미안해할 필욘 없어! 사귀자고 한 것도 나고……. 너나 나나 첫 연애였으니까. 서로 아무것도 모르고 사귄 거지!”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태휘가 내내 마음에 걸린 건 따로 있었다.

“내가 가수한다고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했잖아.”

결국 영롱과 약속한 미래를 위해 이별을 고한 셈이었다. 아무리 철없던 나이였다고 하더라도, 한때의 경험으로 치부하고 가볍게 시작해서 가볍게 끝냈다는 게 너무 이기적이었다.

“어차피 바빠져서 자연스레 헤어졌을 거야.”

태휘는 하은의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할 정도였는데도, 하은은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었다.

“덕분에 나 자랑거리 하나 생겼지, 뭐. ‘나 STORY의 원태휘랑 사귀었었다!’ 진짜 친한 사람들한테만 말하지만.”

오늘로 확실히 알았다. 남녀 사이의 설렘보다 이런 편안함이 좋아 연인보다 친구에 적합한 상대였다는 걸. 어렸을 때는 그 차이를 구분 못했지만.

“가끔 심심할 때 맥주나 한잔 할까? 타지에서 외로운 사람들끼리.”

아마 하은도 태휘와 비슷한 생각 끝에 건넨 제안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을 거다.

“아, 애인이 싫어하려나?”

태휘는 눈동자를 굴리곤 상상해 보았다. 녀석이라면…… 당연히 싫어하겠지. 자기도 없는 미국 땅에서 전 여친을 만난다는 걸 알면. 오늘은 마주치고 반가운 마음이 우선이었지만.

“응, 싫어할 거야.”

태휘의 말에 하은은 고개를 끄덕이곤 맥주를 들이켰다. 하은이 잔을 다 비운 걸 확인한 태휘는 계산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내가 살게. 학교에서 보면 인사나 하자.”

그렇게 학교에서 우연히 하은을 만난 사건은 한국에 있는 영롱에게 전해지지도 않았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다. 자주 연락을 못하다 보니 오랜만에 통화라도 한번 하면 그간 영롱의 대소사를 전해 듣기 바빴다.

태휘가 말을 꺼낼 틈도 없이 녀석의 한바탕 수다에 반응하다 보면 통화가 끝나 있었다. 그러는 바람에 하은과 만난 얘기를 할 타이밍을 놓쳤고 시간이 지나 그 사실조차 희미해졌다. 후에 다시 생각나긴 했지만 뒤늦게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나 싶어서 그냥 지나갔다.

그때쯤 어째서인지 영롱도 연락이 자주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쌓인 얘기가 늘어가고 오랜만에 연락하면 통화가 길어졌다. 태휘는 학교생활 때문이라지만, 앨범 활동 다 끝나고 휴식기인 녀석이 뭐가 그리 바쁜 건지.

요새 뭐 하고 지내는지 물어봐도 그냥 오랜만에 쉬면서 사람들 만나 놀고 있다고만 얘기했다. 자기는 각종 리포트에 깔려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는데 놀고 있다니, 부럽기도 하면서 얄미웠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을 티내진 않았다. 올 한 해 앨범 때문에 바쁘고 힘들었을 텐데 애인으로서 함께 있지 못해 미안했으니까.

안 헤어지고 있는 것만으로 다행인 상황이라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하며 연락에 안달 내지 않았다. 태휘도 바빠 연락을 강요할 처지도 아니었고. 그렇게 영롱은 서울에서, 태휘는 보스턴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

- 200◆년 12월 -

보스턴의 겨울은 추웠다. 태휘의 아파트가 있는 곳은 바다 바로 옆이어서 스치는 바람마저도 얼음창 같았다. 게다가 눈은 어찌나 많이 오는지.

작년 겨울을 유난히 따뜻하게 기억하는 걸 보니, 아마도 영롱과 사귀고 함께 보낸 겨울이어서 그랬나 보다. 그땐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그래서인지 타지에서 혼자 보내는 이 겨울이 유독 더 춥게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학기가 진행될수록 수업을 쫓아가기 버거워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기만 했는데, 과제 제출과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그나마 실기 시험은 자신 있었으나, 이론 과목에서 영어로 리포트를 제출해야 하고 영어로 시험을 쳐야 하니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연예인 활동 하느라 학교 공부 자체를 너무 멀리한 탓일까.

처음 유학을 계획했을 땐 전 학기 장학금이 목표였다. 물론 학비가 아까워서는 아니었다. 기왕 유학 온 김에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음악 활동할 때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성과를 만들고 싶었다.

나름대로 전 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쳐서, 덤으로 장학금까지 받겠다는 야무진 꿈이 있었는데……. 그렇게 과제와 시험공부로 씨름하다 보니 연말이고 뭐고, 춥고 메마르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번 시간 내어 뉴욕에 가서 선물이라도 사서 영롱에게 보내 주고 싶었으나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다. 1주년 기념일도 함께하지 못해 엄청 아쉬웠는데, 크리스마스 선물도 못 주다니. 이런 와중에 통화할 때마다 영롱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어서 내심 서운했다.

- 아냐! 나 완전 괜찮아! 안 삐져! 그나저나 우리 형 공부 넘 힘들어서 어떡해~.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녀석의 목소리에선 일말의 흥분까지 느껴졌다. 아주 요란 벅적지근한 연말 계획이라도 있나 보지?

설렘을 주체 못 하는 음성에 태휘는 금세 서운해져 일찍 전화를 끊곤 했다. 그러고 나면 또 속 좁은 자신이 못나 보여 자괴감에 빠지고……. 하지만 그러고 있을 틈도 없이 과제와 시험공부는 밀려 있고……. 여러모로 우울한 연말이었다.

미국에서는 핼러윈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크리스마스 모드로 돌입한다는 말을 실감했다. 보스턴의 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 천지였고 어딜 가든 캐럴이 울려 퍼졌다. 핼러윈 때도 느꼈지만, 미국인들은 정말로 핼러윈과 크리스마스를 위해 한 해를 보내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을 실제로 보니 신기한 것도 잠시 태휘는 곧 무덤덤해졌다. 이런 풍경들을 혼자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첫 학기가 끝났고 겨울 방학이 시작됐다. 다행히 성적이 되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그런데도 태휘는 이 시간을 즐길 줄 몰랐다.

나름 역사적인, 유학 중 첫 크리스마스 연휴인데. 피로에 지쳐 너덜너덜해진 정신을 겨우 붙들고 빨리 아파트로 돌아가 잠이나 푹 자고 싶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타지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즐길 법도 하다만, 사적으로 가까워진 친구 한 명 없었다.

어학원과 대학 동기들이 저마다 파티에 초대하기도 했는데도 미국의 파티 문화가 낯선 태휘는 친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번 어머니의 잔소리가 생각보다 깊이 자리잡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

‘미국이라고 제멋대로 굴다가 사고 같은 거 치지 말아라. 다른 나라에서 문제 일으키면 수습하기도 골치 아프니까.’

지난번 형 결혼식 이후로 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여전했다. 도대체 어떤 유학 생활을 상상하신 걸까? 술 마시다가 마약하고 스트립 클럽 갔다가 권총 강도 만나는 거? 아무래도 요즘 미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신 것 같았다.

자신은 아직도 잘난 형에 비해 못 미더운 둘째 아들인 걸까. 당당하게 홀로서기 위해 이곳으로 온 건데. 자신의 음악적 욕심 때문에 이 유학을 결정했지만,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또한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가수로 아무리 상을 많이 받고 성공해 봤자 그들에게는 언제나 무식한 딴따라일 테니까. 그렇게 학벌이라면 환장하는 집안이니 장학금과 졸업장을 받아 가면 더는 그런 취급 못하겠지 싶어서.

어머니의 말을 싹 다 무시하고 흥청망청 놀고 싶었으나,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태휘는 혼자서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몰랐다.

한국에 있을 때도 시간이 나면 무조건 음악 작업만 했다. 연예인 활동하며 한정된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새로운 사람들을 사귈 일이 많지 않았다.

또래 친구들은 멤버들이 전부였고, 친하게 지낸 사람들은 SS엔터에서 같이 작업한 스탭 몇 명뿐이었다. 물론 설민이나 영롱같이 사교성 좋은 애들은 달랐지만.

곡 작업하거나 애인과 데이트 하는 게 태휘의 여가 생활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시험과 과제에 너무 시달려 작업할 마음 안 들고, 곁에 영롱도 없었다.

어제 아침, 녀석에게 전화 했는데 받지 않는 것도 신경 쓰였다. 마지막 통화도 일주일이 넘어서 어제는 통화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대체 뭐 하는 건지. 모처럼 담배가 당겼다.

보스턴 시내 거리를 장식한 조명과 울려 퍼지는 캐럴은 태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태휘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성탄 특별 공연과 애프터 파티에 잠깐 참석했다가 혼자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리고 있었고 거리의 사람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흥분했다. 이렇게 눈 많이 오는 곳에서 크리스마스에 눈 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었다.

보스턴에 온 지 6개월도 안 됐지만, 겨울이 되자마자 눈이라면 벌써 질리도록 본 태휘였다. 매사에 이렇게 감탄하고 즐기는 이 나라의 사람들이 그저 신기했다.

아파트 1층에 도착해 우편함부터 확인했다. 청구서 몇 개와 성탄 카드인지 연하장인지가 몇 통 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자 긴 복도식 아파트의 중간쯤에 얼굴 절반을 가린 털모자를 쓰고 있는 한 사람이 커다란 캐리어와 함께 서 있었다. 공교롭게도 태휘의 집 현관문 바로 앞에.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유학생인가? 보스턴에는 각종 대학이 많았고, 이 아파트에도 타지에서 온 유학생이 많이 살았다. 집을 나서다가 뭐 두고 온 게 생각났나? 하지만 그는 복도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쭉 내밀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구경하고 있었다.

보스턴에 살면서 이 추위에 눈 구경하는 미친놈이 있다? 차라리 거위나 백조를 구경하겠다. 지나가는 길인 줄 알았더니 그는 계속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집을 향해 걸음을 내딛자, 발소리에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 천장에 있는 센서등이 켜지며 그의 얼굴 위로 환한 조명이 비췄다. 털모자 아래 낯익은 음영에 태휘는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심장이 1층까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이곳에서는 낯선 한국말, 그렇지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형,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뺨을 할퀴는 매서운 바닷바람에도 태휘는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집 앞에 영롱이 와 있었다. 보스턴에서 눈보다, 백조보다, 산타보다도 귀하다는 영롱이가.

이건 꿈일까? 아니면 유치원 이후로 믿어본 적 없는 산타의 선물일까. 올해는 착한 일 하나도 안 한 줄 알았는데.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추위로 얼굴이 온통 빨개진 영롱이 해사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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