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5. 해후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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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휘가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니, 영롱의 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 깬 거지? 원래는 녀석이 깨기 전에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이제 와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당황해서 흔들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한 채 눈꺼풀만 끔벅였다.
영롱은 같은 침대 위에, 자기 옆에 누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태휘를 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해?”
잠에서 막 깨 잠긴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결 낮았다. 한 침대에 함께 누워 있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덤덤한 말투였다. 태휘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12년 전 첫날밤을 보내고 함께 맞은 아침, 영롱은 잠에서 깨자마자 태휘의 얼굴을 보며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런 기억은 왜 이리도 선명한 걸까. 아무 생각 안 했다고 말해봤자 순순히 속아 넘어갈 리 없는 녀석이니 솔직히 말했다.
“그냥, 옛날 생각.”
영롱은 어떤 옛날 생각인지 묻지 않았다.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했는지 피식 웃었고, 태휘는 그 미소에 그만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술이 아직 덜 깼나. 굳어 버린 줄 알았던 심장이 왜 이리 간질거리는 걸까.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밖은 이미 해가 중천이었고,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마주 보고 누워만 있을 뿐 털끝 하나 닿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더는 10대도, 20대도 아닌데. 대체 이 떨림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나 봐.”
영롱의 명령에 태휘는 거부하지 못하고 바로 눈을 떴다. 영롱은 두 손을 얼굴 옆에 모으곤 고개를 기댄 채 태휘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었다. 뭐, 나도 얘 깨기 전까지 훔쳐보고 있었으니 이래야 공평한가. 그때 영롱이 사뭇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왜 여전히 잘생겼냐.”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망가졌으면 맘 접으려고 했는데.”
남 얘기하고 있네. 실없는 소리에 헛웃음을 짓던 태휘는 일순 미소를 거두고 물끄러미 영롱을 쳐다보았다. 눈싸움하듯 서로를 보던 두 사람 중 의외로 영롱이 먼저 시선을 내리깔고 피했다.
그때 꼼지락대며 이불만 만지작거리는 녀석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움찔거림이 어떤 의미인지 한눈에 알아보는 자신이 싫었다. 옛날이라면 저러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을 녀석이. 시선도 피하고 참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까지 했다.
아직 술이 깨지 않은 탓일까? 아니면 자는 사이 약이라도 타 먹였나? 오늘따라 아침부터 왜 이렇게 마음이 나른하고 너그럽지.
“만져도 돼.”
그 말에 놀란 듯 영롱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놀랄 만도 하지. 하지만 얼굴 좀 만진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만져도 끄떡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기도 하고.
태휘의 허락에 영롱은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었다. 영롱의 손바닥이 태휘의 뺨에 와닿았다. 손가락으로 눈썹 선을 따라 그려보기도 하고, 밤새 자라난 수염 탓에 까슬까슬해진 턱을 만져보기도 했다.
녀석의 손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 손길이 입술 주변을 맴돌기 시작하자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이쯤이면 됐겠지. 너그러워진 마음을 다시 얼리고 굳힐 때였다.
태휘는 고개를 돌려 영롱의 손을 피했고, 쳐다보지 않은 채 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숨이 막혀서 환기를 위해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우리 집 어떻게 알았어?”
창문을 열며 묻자 등 뒤로 영롱의 기막혀하는 탄식이 느껴졌다.
“형이 알려 줬잖아. 기억 안 나?”
“내가 알려 줬다고?”
태휘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영롱은 베개를 끌어안은 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럼. 내가 무슨 수로 형 집을 알고 와? 택시 잡아서 타고 집 물어보니까, 순순히 알려 줬잖아. 형 주머니 뒤지니까 카드키 나와서 그걸로 들어 왔고.”
“그리고 나는 소파에 던져 두고 넌 내 방에서 자고?”
그 말에 영롱은 사뭇 억울한 표정을 짓더니 한바탕 일장 연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택시에서 내려서 형 업다시피 해서 올라오는 거 얼마나 힘들었는데! 겨우겨우 들어온 다음에는, 이 넓은 집에 침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일단 소파에 눕히고 침실 위치 확인하고 오니까 형 완전히 뻗었더라고. 나도 힘 다 빠져서 죽어도 못 일으키겠고.”
그러고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 아래, 자신의 침대 위에서 자신의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녀석의 모습은 옛날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크게 기지개를 켜자 손목에서 반짝이는 팔찌까지 예전 그대로……. 아니, 잠깐. 팔찌?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태휘는 놀라서 단숨에 영롱에게로 다가와 손목을 움켜쥐었다. 녀석이 차고 있는 건 그 옛날 자신과 맞춘 YR 이니셜 팔찌가 틀림없었다.
“너, 이걸 어떻게…….”
‘형이라도 그 팔찌 잘하고 다니니 보기 좋네. 나는 잃어버렸거든. 어디 갔는지 영 못 찾겠더라고.’
영롱이 돌아온 날, 녀석은 커플 팔찌를 잃어버렸다고 했지만 태휘는 그 팔찌가 어디 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태휘가 놀라자 영롱은 짐짓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형 드레스룸에서 옷 찾다가 발견해 버렸지 뭐야~?”
이 공간에 녀석을 들인 순간부터 이 상황을 대비해야 했는데. 처음 온 곳일지언정 자기 집처럼 제멋대로 뒤지고 다니고도 남을 녀석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누구도 못 찾을 곳에 숨겨 뒀어야 했는데, 이렇게 녀석이 예고도 없이 불쑥 쳐들어올 줄이야 알았나? 그것도 자신이 인사불성이 돼 있는 사이에.
태휘는 10년 만에 제 주인을 찾아가 안착한 팔찌를 바라보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영롱은 태휘의 약점을 찾아 놀릴 생각에 그저 신난 듯 보였다.
“나 진짜 이거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형이 가지고 있었어? 언제부터? 근데 말도 안 해주고! 완전 못됐어!”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던 거냐고. 태휘는 속상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으나 겨우 참으며 잡고 있던 팔을 놔 버렸다. 영롱은 딸랑거리는 펜던트를 일부러 세게 흔들어 보이며 약 올리듯 웃었다.
헤어진 애인의 물건, 그것도 커플템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건 태휘로선 꽤 치명적인 약점이긴 했다. 그토록 감추고 숨기려 애썼던 미련의 한 귀퉁이를 들킨 격이었으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방어를 해야 했기에 대충 뭉뚱그린 사실만을 말했다.
“어쩌다보니 내 짐에 섞여 있었어. 그렇다고 막 버릴 수도 없고.”
그 말의 끝엔 ‘이것마저.’가 생략되어 있었다. 말했더라도 영롱이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말하다 보니 구차한 변명처럼 들려서 스스로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영롱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이 팔찌가 이 집에 있다는 사실만 중요한 모양이었다. 태휘의 해명인지 변명인지를 듣는 둥 마는 둥, 반짝거리는 팔찌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상태 보니까 처박아 둔 것도 아니란 말이야. 주기적으로 꺼내서 관리했단 거잖아.”
기어이 확인 사살하니까 속이 시원하냐? 태휘는 집에 있는데도 너무나 집에 가고 싶어졌다. 태휘가 민망함과 수치스러움에 무너져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자, 영롱은 세상 발랄한 몸짓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나 배고파. 뭐 먹을 거 없어?”
됐으니까 빨리 꺼지기나 하라고 말하려다가, 주먹으로 어깨와 허리를 토닥토닥 두드려 대는 녀석의 뒷모습에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젯밤 혼자서 저 쪼그만 몸으로 자길 들쳐 업고 집까지 왔다는 사실이 퍼뜩 떠오르는 바람에. 차라리 그냥 버리고 오지 그랬냐. 그럼 다른 녀석들이 알아서 챙겼을 텐데. 왜 쓸데없는 짓을 해 가지고는.
“없어.”
영롱은 태휘의 대답도 무시한 채 침실 문을 열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씻고 와. 있는 재료로 뭐라도 만들어 볼게.”
영롱은 태휘의 미련 한 조각을 발견했으면서도, 넓은 아량으로 못 본 척해 준다는 듯이 굴었다. 아무래도 태휘가 쪽팔림에 괴로워하는 걸 최대한 즐길 심산인 것 같았다.
복도를 걸어가는 영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태휘의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경고음이 울렸다.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이곳을 누비는 녀석을 쫓아내야 하는데. 자신의 삶에서 밀어내야 하는데.
이런 경우의 끝이 좋지 않았다는 걸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는데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침실에 혼자 남은 태휘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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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은 GBS 사옥에서 열리는 모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발표회가 끝난 뒤 주위를 살폈다. 수많은 기자와 방송국 관계자 속에서 다림은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정 작가님! 오랜만이에요.”
그는 다림과 꽤 가깝게 지냈던 GBS 미디어콘텐츠 제작팀의 헤드 작가였다. 얼마 전 혹시 STORY 재결합 방송에 대한 계획이나 소식이 있으면 언질을 달라고 부탁해 뒀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뚝 끊긴 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만날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아, 기 기자님.”
“작가님 요새 왜 이리 연락이 안 돼요?”
“그게, 요즘 좀 바빠서요.”
“뭐 때문에 그리 바빠요? 혹시 제가 저번에 부탁드린 그거?”
“그, 그거면 제가 바로 기 기자님한테 연락 드렸죠.”
어쩐지 자신을 피하는 듯한 정 작가의 태도에 다림의 기민한 촉이 움직였다. 모 아니면 도겠다 싶어서 다림은 자신이 가진 패를 던져 보기로 했다.
“저 이미 다 아는데. SS엔터에서 회의했잖아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SS엔터에서 최소 4명이 모였다는 건 저번에 확인했으니까. 바쁘게 걷던 정 작가가 다림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다림은 어깨를 한 번 으쓱 들먹이며 뻔뻔하게 밀고 나갔다.
“작가님이 연락 안 줘서 제가 나름대로 알아봤죠.”
“기 기자님, 저희가 나중에 보도자료 다 드릴 거예요.”
걸려들었다. 진짜 GBS에서 방송하는 거 맞나 보네.
“그러면 안 되죠. 저희 K엔터에 단독 주기로 하셨잖아요!”
다림이 몰아세우자 정 작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림을 끌고 복도 구석으로 갔다.
“저희 쪽에서도 SS 쪽이랑 극비로 진행하기로 약속해서 그래요. 이거 새 나가면 저 죽는다고요!”
“SS 쪽에서 흘릴 수도 있잖아요. 거기도 관계자가 몇 명인데. 방송국 쪽 정보라고 입도 뻥긋 안 할게요.”
“안 그래도 확정 나면 기 기자님한테 제일 먼저 연락드리려고…….”
“저희가 저번에 방송사고 난 거 기사로 엄청 쉴드쳐 드린 거 잊으셨어요? 그때 기사 잘 내주면 꼭 보은하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지금이 그 보은하실 타이밍인데.”
정 작가는 입술을 깨물며 난처해하다가 반쯤 포기한 듯 털어놓았다.
“사실 저희 부장님도 상황 봐서 언론 쪽에 흘리라고 말씀하기는 했어요. ……그래서 내가 연락드린다니까!”
다림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연락 주신 걸로 하면 되겠네요.”
“대신 저희 쪽에서 흘린 낌새 절대 나면 안 돼요!”
“당연하죠! 어디까지 진행됐어요? 어느 정도 내용이 있어야 바람 잡을 거 아니에요?”
“지금 SS엔터에서 기획 회의까지 했어요. 구체적인 레이아웃은 지금 짜는 중이고.”
“STORY 5명 완전체로요?”
“글쎄요.”
정 작가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응수했다. 아마도 방송국 내부에서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나 본데……. 왜냐하면 영롱이 합류 여부에 따라 그 파급 효과가 다를 테니까.
“그것까진 말씀 못 드리죠. 우리도 다 스토리텔링 장사인데.”
차영롱의 행방이 제일 큰 알맹이인데, 그걸 안 주겠다? 다림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 이 정도로 바람은커녕 휘파람도 못 부는데.”
“왜요? 타이틀 딱 나왔잖아! [1세대 레전드 아이돌 〈STORY〉, GBS 신규 프로그램에서 재결합!] 이 정도면 다 드렸지, 다 드렸어. 그럼 수고하세요!”
정 작가는 양 손으로 파이팅 제스처를 만들어 보이고는 멀어졌다. 다림은 어쩐지 자신이 이용당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들도 흐지부지 관심이 흐려지는 것보단 떡밥을 미리 뿌려 놔야 대중들의 주의를 끄니까. 다림이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어도 기사 내 달라고 먼저 연락했을 거다. 하여간 방송국 놈들이란.
그나저나 영롱은 어떻게 된 걸까? 역시 더 알아보는 수밖에 없나. 지난번 영롱의 군대 동기와의 만남 이후로 그의 행방에 대한 추적이 완전히 막혀 버려서 막막해하던 터였다.
‘그러고 보니 노래를 한 번도 안 했네?’
다림은 어째서인지 그가 했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가수가 군대에 가서 노래를 안 한다? 지금이야 그 정도는 아니라지만, 가수가 아닌 일반인도 노래 좀 잘한다고 하면 주크박스처럼 상관이 시키는 대로 불러야 하는 게 당시 군대 문화였다.
군대 다녀온 가수들 얘기 들어보면, 군대에서 노래한 일화를 빼놓을 수 없는데. 혹시 가수 생활과 노래에 염증을 느껴 잠적한 걸까? 그렇다면 영롱이 돌아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하도 막막하다 보니 다림은 영롱의 군대 동기와의 취재를 바탕으로 지인 피셜 기사라도 낼까 잠시 고민했었다. 영롱의 복귀는 어려울 것이며, STORY 완전체 재결합도 쉽지 않을 거란 방향으로.
그런데 오늘 정 작가의 묘하게 당당한 태도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5인 완전체가 아니라면 이렇게 대놓고 재결합 떡밥을 흘릴까?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이러는 거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사라진 영롱의 빈자리를 강조하며 서사를 만들려면 충분히 만들 수도 있겠지만.
문득 다림은 지난번 지애의 말이 떠올랐다.
‘사라진 사람은 그냥 잊고 기억에 묻어 두는 게 가장 아름다운 걸지도.’
모든 것을 초월하고 희망 따위 내려놓은, 오랜 팬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술에 취해 영롱을 그리워하던 친구의 모습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둘 중 어느 한 가지만 진심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하는 거겠지. 다림은 습관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사라졌던 그 사람이 돌아온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지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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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롱이 꺼낸 말에 태휘는 그만 콩나물국을 뜨던 숟가락을 멈칫하고 말았다.
“뭘 그렇게 놀래?”
둘은 어느새 태휘의 집 식탁에 마주 앉아 영롱이 차린 아침을 먹고 있었다. 영롱은 여전히 YR 팔찌를 손목에 찬 채 덤덤히 말을 이었다.
“재결합에 있어 형이랑 먼저 상의하기로 했잖아.”
물론 그렇긴 했지만. 방금 녀석이 꺼낸 얘기는 의외였기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야?”
“응.”
영롱은 식사를 마쳤는지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조금 전 꺼낸 말을 강조하듯 되풀이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팬들한텐 기사나 방송으로 알리고 싶지 않아.”
태휘도 영롱을 따라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뜨거운 물로 샤워한 뒤 빈속에 뭐라도 채워 넣어 주니 숙취가 좀 가신 듯했다.
거의 10년 만에 영롱이 차려준 식탁에 감개무량했음에도 티내진 못했다. 안 그래도 지금 저 팔찌 찾은 뒤 잔뜩 업 된 상태이니, 더 흥분시킬 필요는 없지. 영롱은 자신의 의견을 낸 뒤 태휘의 의향이 궁금한 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제멋대로 꺼내 입은 태휘의 옷은 영롱에게는 한참이나 큰 탓에 하얀 어깨와 쇄골을 다 드러낸 채였다. 태휘는 눈 둘 곳이 없어 일단 시선을 식탁 중앙에 고정하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던 영롱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팬들, 내 걱정 많이 했다고 들었어.”
팬들뿐이겠냐? 그걸 아는 자식이……. 태휘는 잔소리부터 쏟아 낼 것 같은 입을 다문 채 일단 식탁에서 일어났다.
“커피 내려 줘?”
영롱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휘는 커피 머신 앞에서 녀석이 좋아할 만한 캡슐을 골랐다. 산미가 없고 고소한 맛. 그리고 무조건 투샷으로 라떼. 그동안 커피 취향이 변하지 않았다면. 반면 태휘의 커피는 산미가 강한 아메리카노였다. 커피 취향도 어쩜 이리 정반대인지.
라떼를 타서 건네주자 말없이 받아 마시는 것 보니 입맛은 변하지 않은 듯했다. 영롱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머그잔 표면을 매만지며 물었다.
“방법이 있을까?”
재결합을 진행하면서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팬들에게 자신의 행방을 미리 알리지 않고 갑자기 기사나 방송으로 등장하는 방식이. 물론 그게 연예계 바닥에선 제일 극적으로 먹히는 방식이긴 했다.
태휘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처럼 녀석이 장난기 없이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구하고 있었으니까. 흑심만 품고 집까지 쫓아온 줄 알았더니.
“생각해보자. 팬카페에 글 남겨도 되고.”
“정말? 그래도 돼?”
“네가 괜찮다면.”
“방송국 측이랑 약속은?”
길길이 날뛸 황 CP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지긴 했다. 그렇지만, 애초에 팬들 마음 이용하지 않는 걸 최우선으로 못 박아 뒀으니까.
“팬들이 더 중요하지.”
태휘가 단호하게 말하자 영롱은 씩 웃었다.
“모처럼 마음이 통했다니 기쁘네.”
만족스러운 미소로 머그잔을 입가에 가져가던 영롱은 뭔가 떠오른 듯 도로 내려놓았다.
“팬카페 하니까 생각났는데, 형 STORY 팬카페엔 왜 들어가 봤어?”
“뭐?”
“어제 회의 때 얘기했잖아. 우리 팬카페에서 팬들 반응 본다고.”
“그게 잘못됐어?”
“그 말이 아니라, 형 개인 팬클럽은 따로 있잖아? 근데 최근까지 STORY 팬카페 둘러봤다는 게 신기해서. 재결합은 절대 안 한다고 했던 사람이.”
순간 뜨끔해서 들고 있던 잔을 놓칠 뻔했다. 이 자식은 똑똑한 건가, 촉이 좋은 건가? 왜 쓸데없이 이런 데서 예리하고 난리야? 태휘는 애써 표정을 숨기고는 머그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내 마음이야.”
“흠.”
영롱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태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형도 재결합 생각 있긴 했지? 팀 그렇게 깨고 나서, 팬들한테 미안했지?”
그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팬카페를 들락거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니, 팬카페뿐만 아니라 모든 커뮤니티를 뒤지고 다녔던 때가 있었지. 다름 아닌 누구 때문에.
“우리 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팀을 깨고 팬들의 소중한 추억을 끝내 버린 거잖아. 그 당시에는 어려서 내 생각밖에 못했는데. 지나고 나니 참 이기적이었어. 미안하더라고. 형한테도, 팬들한테도.”
왜 갑자기 고해성사할까? 재결합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니까 생각이 많아졌나?
“이제라도 안다니 다행이네.”
태휘는 무뚝뚝하게 말하곤 커피를 마저 마셨다.
“형도 그래서 그런 거지? 팬들 생각나서. 나도 가끔 그랬어. 팬카페까진 안 가 봤지만. 옛날에 받은 팬레터들 닳을 정도로 보다가 울고.”
영롱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멍하니 머그잔만 들여다보았다.
“나 계속 마음에 남는 일 있거든. 우리 해체했을 때. 우리 숙소 앞에 끝까지 찾아왔던 팬 있었는데, 한 번은 나랑 단둘이 마주치고 엄청 울더라고.”
사귀었을 당시에도 안 했던 얘기를 꺼내자, 태휘는 내심 놀란 눈으로 영롱을 쳐다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한 짓 후회했어.”
“…….”
“그래서 걔한테 편지까지 써주고, 택시 태워 보내고. 그게 내가 팬한테 쓴 마지막 답장이었어. 그래서 더 기억나.”
영롱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태휘를 마주 보았다.
“걔도, 지금쯤이면 나 따위 다 잊었겠지?”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잊지 않았을 거야’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해 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자신이 그러했으니까. 태휘는 마시던 머그잔을 담담히 내려놓았다.
“잊지 않길 바란다면, 잊히지 않게 노력했어야지.”
너그러웠던 마음은 샤워와 해장 이후 숙취와 함께 사라진 듯했다. 아까 침실에서 허락한 스킨십만으로도 이미 허용 초과였기에 다행인 일이었다.
“다른 멤버들, 지금까지 취미로 연예계 생활해 온 거 아니야.”
영롱이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하면서도, 그렇게 모습을 감춰 버린 녀석에게 야속함이 남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사라진 뒤, 걱정과 안타까움은 순전히 남은 이들의 몫이었으니까.
원망 섞인 말에 영롱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놀란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슬퍼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돌아온 이유 어제 말해 줬잖아.”
태휘는 그 말에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뭐라고 말했지? 잔뜩 취했을 때 영롱이 뭐라 뭐라 했던 건 생각나는데,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태휘가 전혀 기억 못한다는 표정을 짓자 영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슬픈 기색이 스쳤는데, 이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돌변했다.
“다들 열심히 살긴 했더라. 이렇게 좋은 집도 장만하고 말이지. 구경 좀 한다?”
태휘는 허탈하고 기가 차서 단박에 거절했다.
“구경은 무슨. 집에나 가.”
“나 집 없는데. 아직 호텔살이 하잖아. 여기 남는 방 없어?”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딱히 허락을 구한 게 아니라 구경하겠다는 선포일 뿐이었다. 어째 안 어울리게 진지함이 오래 간다 했더니, 원래의 푼수데기 모드로 돌아왔네.
영롱의 콩콩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침실 반대편에 있는 방을 향해 멀어졌다. 태휘는 한숨을 내쉬고는 얼른 뒤따라갔다. 드레스룸에서 했던 것처럼 서재도 뒤지면 곤란하니까.
“어제 다른 방은 제대로 못 봤거든. 여기는 서재?”
방문을 벌컥 연 영롱은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액자 앞에 멈춰 섰다. 지난번 회의하러 멤버들이 왔을 때 강이 형도 한참이나 들여다본 데뷔 전 사진이었다. STORY 멤버들이 동해에서 해돋이를 보고 있을 때, 매니저가 찍어 준 뒷모습 사진.
태휘는 그사이 조심스럽게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영롱 몰래 서랍을 한 칸씩 열어 보고는 문제의 서류철과 태블릿 PC를 둔 서랍을 확인했다.
“왜 하필이면 뒷모습 사진이야?”
영롱도 한강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때 태휘는 한강에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 빠른 영롱은 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바로 알아챘다.
“하긴, 알 것도 같다.”
영롱은 액자를 지나쳐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태휘는 그 틈에 재빨리 서랍을 잠갔다.
“멤버들 얼굴 볼 자신은 없고. 그러면서도 이때가 그립기는 하고. 맞지?”
영롱이 되묻자, 태휘는 책상에서 물러나 자연스럽게 창가에 등을 기댄 채 말했다.
“저 때가 제일 행복했으니까. 앞으로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영롱은 순간 인상을 쓰며 태휘를 쳐다보았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제일 행복? 형 인생 통틀어서?”
마치 다른 행복했던 때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 사실을 부인하기에는 꽤 짙고도 깊은 관계를 가졌지. 태휘는 한숨을 내쉬고는 바로 정정했다.
“STORY의 멤버로서 말이야.”
영롱은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짓고는 다시 서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미국에 있을 때도 서재랑 작업실 갖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아주 잘 꾸며 놨네. 작업실은?”
“위층에.”
영롱은 책상까진 와 보지도 않고 바로 몸을 돌려 서재를 나갔다. 이것저것 마구 뒤져 댈까 봐 긴장했던 태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계단을 오르는 영롱의 신난 발소리가 들리자 태휘는 조심히 다시 서랍을 열어 보았다. 태블릿 피시는 꺼놓은 상태였고, 서류철에는 예전에 형수님이 보내 준 여러 자료가 있었다.
3년 전부터 영롱을 찾은 흔적들. 팬카페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영롱을 봤다거나, 영롱과 닮은 사람을 봤다는 목격담이 올라오면 당장 사람을 보내 확인해 주곤 했다. 국내든 국외든 상관없이.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지만, 혹시 몰라서 자료들을 다 보관해 두고 있었다. 이제 영롱이 돌아왔으니 다 필요 없어진 셈이다. 거기에다가 권준원 관련 자료까지 아직 있었네. 저 녀석 가고 나면 바로 없애 버려야지.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위층에 올라간 영롱이 한참 동안 조용한 게 이상했다. 이쯤이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릴 때가 됐는데. 작업실엔 별로 볼만한 게 없을 텐데…….
불현듯 뭔가가 떠오른 태휘는 다급히 서재에서 뛰쳐나갔다. 복도를 내달리고 계단을 두 개씩 뛰어 올라 서둘러 작업실에 도착했으나, 이미 늦었다.
무거운 방음문을 밀고 들어가니 작업실 한가운데에 영롱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작업실은 고급 방음시설과 최신식의 음향 장비로 가득 채우긴 했으나 그저 평범한 음악 스튜디오였다. 시선이 닿는 곳곳에 놓인 튤립 꽃병들만 빼면.
‘태휘 형 작업실 끝내주는데? 근데 안 어울리게 뭔 꽃을 잔뜩 깔아 놨냐.’
지난번 멤버들이 와서 구경했을 때도 다들 튤립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작업실에 들어선 태휘는 영롱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짧게 탄식하고는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문질렀다.
‘넌 장미보다 튤립이 어울려.’
몇 년 동안 늘 이렇게 작업실을 튤립으로 채우고 지낸 터라, 태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드레스룸에서 영롱의 팔찌도 들키고 이것까지. 차라리 서재에서 그 서류철을 들키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형, 진짜 나쁘다.”
영롱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뒤에 놓인 꽃병들 때문에 튤립 사이에 영롱이 서 있는 것처럼 보여 태휘는 일순 아찔함을 느꼈다.
“여지를 주지 말든가.”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코끝과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촉촉이 젖은 눈에선 어느새 한 줄기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망했다. 완전히 망해 버렸다.
최선을 다해 꼭꼭 닫고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을 이 집에 들인 그 순간부터 이미 망한 걸지도 모른다.
이건 어떤 말로 변명한들, 그냥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 보여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것 보라고. 차갑게 얼어붙은 게 아니라 아직도 너를 향해 이렇게 미친 듯 뛰고 있다고.
끊임없이 말로 확인해야 하는 영롱과는 다른, 태휘만의 표현 방식이었다. 이렇게라도 영롱을 놓지 않고, 잊지 않고 싶었다. 그 의미를 당사자가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영롱은 태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며 말했다.
“모른 척해 주려고 해도 더는 할 수가 없잖아.”
코앞까지 다가온 영롱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려고 했고, 그 손길을 피해 뒷걸음질 치던 태휘는 작업실 코너까지 몰아붙여졌다. 영롱의 손목에서 팔찌 펜던트가 흔들리며 반짝였다.
“하지 마.”
태휘는 영롱의 손이 닿기 전 눈을 질끈 감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뭘?”
“뭐든, 하지 마.”
어제 막걸리바 화장실 앞에서 했던 대화의 반복이라는 걸 깨달았다. 영롱이 잠자코 있자 태휘는 고개를 숙인 채 가늘게 실눈을 떴다. 자신의 티셔츠를 입은 영롱의 새하얀 어깨가 시야에 들어왔고, 태휘는 흠칫 놀라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태휘의 시선이 닿았던 곳을 알아챈 영롱은 자신의 어깨를 힐끗 보고는 그를 만지려던 손을 내렸다.
“알았어. 난 안 할게.”
그 말에 안심하려는 찰나, 영롱은 태휘를 작업실 귀퉁이에 몰아세워 넣은 채 못 나가게 양팔을 벌려 벽을 짚었다.
“대신 형이 해.”
격한 움직임에 은빛 앞머리가 얼굴에 흘러내려오자 영롱은 입바람으로 불어 넘기고는 말을 이었다.
“형이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말 그대로 구석에 몰린 태휘는 벽에 뒤통수를 기대고는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난 어젯밤에 형한테 원하는 거 솔직히 다 말했어.”
영롱을 안 보면 여기서 도망칠 방법이라도 있다는 듯이.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이제 형 차례야.”
태휘는 도로 눈을 떴다. 이제는 정말로 인정해야만 했다. 작업실에 영롱이 들어선 순간, 모든 게임은 끝났다는 걸. 더는 어떤 거짓말도, 변명도, 회피도 소용없었다.
지금은 어제처럼 취하지도 않았고, 간밤의 단꿈으로 마음이 한껏 너그러워진 상태도 아니었다. 용기를 내기 위해 독한 술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든 온전히 실행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은 아주 맑고 또렷했다. 태휘는 그토록 만지고 싶던 영롱의 하얀 어깨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안아 끌어당기자 작고도 여린 체구가 자신의 품에 쏙 안겨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녀석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입술에 닿는 뜨거운 체온을 느끼고 체취를 한껏 들이마시고 나서야, 그제야 눈물이 날 정도로 안도감이 들었다. 정말로 영롱이가 돌아온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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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년 12월 -
“아아아! 형……!”
영롱은 태휘의 몸에 올라탄 채 정신없이 소리 지르고 있었다. 태휘는 영롱의 허리를 움켜잡고는 더 세게 쳐올렸다. 태휘의 탄탄한 배에 손을 올리고 버티고 있던 영롱은 전신에 흐르는 쾌감 때문에 팔이 후들거렸다.
두 사람은 이미 땀투성이였고, 계속되는 태휘의 허릿짓에 영롱은 무너지고 말았다. 몸을 일으킨 태휘는 침대 위에 영롱을 엎드리게 하고는 엉덩이만 들어 바로 삽입했다.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바람에 영롱의 얼굴은 땀과 타액 범벅이었다. 베개에 얼굴을 부비며 숨을 할딱이는 사이, 태휘는 단숨에 깊은 곳까지 박아 넣었다.
“아흣…….”
아플 법도 한데, 영롱은 자신의 안을 가득 채우는 태휘의 성기를 맛있게 삼켰다. 괴로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스스로 다리를 벌려 최대한 깊이 태휘를 받아들였다.
태휘가 노련하게 영롱이 느끼는 지점을 정확히 찔러 대자 그때부턴 자기 의지가 아니라 본능대로 몸이 움직였다. 목구멍에서 쏟아 내는 말들은 뇌를 거치지 않은 채 뱃속에서 바로 튀어나왔기에 언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태휘는 영롱의 요구를 정확하게 알아듣고 극단의 쾌락을 선사해 주었다. 오랜만인데도 연인의 몸의 언어는 잊지 않았는지 영롱의 작은 신음 하나, 움찔거리는 손가락 놀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때론 거칠게, 때론 느릿하게 박자를 조절하며 영롱을 갖고 노는 것 같았다. 손끝까지 퍼지는 쾌감을 참지 못한 영롱은 침대 시트가 벗겨질 정도로 움켜쥐었다. 하반신은 태휘에게 단단히 꿰뚫린 채 사지를 비틀며 바르작거렸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과 동시에, 죽으면 이 쾌락을 더는 못 느낀다는 아쉬움이 뒤범벅되어 하얗게 폭발해 버린 머리는 더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찌걱거리며 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제 안을 드나드는 태휘의 단단한 것만 느낄 뿐이었다. 뜨겁게 가득 차오르는 이 감각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연말 내내 섹스만 했더니 이젠 시작할 때 입구를 따로 풀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한국에서 지낼 때는 그래도 인간 같았다면, 지금은 매일이 발정 상태인 두 마리 짐승이었다. 해가 바뀌는 것도 한밤중에 섹스하다가 해변에서 터지는 불꽃놀이 소리를 듣고 알았으니까.
마치 지난 6개월 동안 못한 관계를 다 하려는 듯, 태휘와 영롱은 재회 후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다. 물론 ‘대부분’은 침대였고 욕실과 거실 바닥, 소파 등 가리지 않았다.
12시간 넘게 비행기 타고 보스턴까지 날아온 영롱이 일주일 동안 본 보스턴의 풍경이라고는 공항 외엔 태휘의 아파트 앞 해변, 그리고 집 천장과 바닥, 침대 시트가 전부였다. 그래서 불만이었냐고? 설마.
영롱이 아무 말도 없이 집 앞에 나타났을 때, 태휘는 유령이라도 본 듯 얼빠진 표정이었다. 영롱은 태휘를 기다리면서 내심 걱정했었다. 태휘가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기는커녕 잔소리부터 퍼부을까 봐.
애인을 만나기 위해 기껏 비행기 표 끊어서 미국까지 왔는데, 그의 반응이 기대와 다르다면?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했다. 그리고 원태휘는 워낙에 그럴만한 인간이기도 했고.
이 서프라이즈 미국 여행을 준비하느라 한 달 전부터 연락이 줄었는데도 무관심했던 태휘의 반응이 그 징후처럼 보였다. 게다가 평소 힘든 내색 전혀 하지 않던 인간이 학교 수업 때문에 쩔쩔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걱정은 점점 커졌다.
저렇게 지친 상황에서 나까지 나타나면 반가움이 반감되는 건 아닐까? 그냥 한국에서 조신하게 응원만 했어야 됐나? 그런 불안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마주한 태휘의 얼굴은…… 그를 알고 나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은 영롱에게 어떤 확신을 주었다. 이 사람도 나만큼 그리워하고 있었구나.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옥에서 천사라도 만난 듯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절망의 나락에서 갓 건져 올라온 듯한 얼굴. 영롱은 그 모습에 감동해 눈물까지 찔끔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영롱은 바라던 대로 보스턴에서 첫날밤이자 크리스마스를 태휘와 뜨겁게 보낼 수 있었다. 태휘가 영롱을 코앞에서 보고도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 하기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일깨워 주었다.
키스하고, 살을 섞고, 절정까지 지나간 후에야 진짜 현실인 걸 깨달은 듯했지만. 영롱은 며칠 동안 짐도 풀지 않고 태휘와 한 몸처럼 지냈다. 밤이고 낮이고 떨어질 줄 모르는 태휘를 보며, 영롱은 그가 바람피우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가끔 둘이서 폰섹스를 하긴 했지만 그거로는 턱도 없으니까. 그래도 원나잇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다행히도 원태휘는 생각보다 훨씬 꽉 막힌 인간이었다. 그를 못 믿는 건 아니었으나 자신이 한 짓이 있으니 태휘도 그럴까 봐 불안했다.
당사자는 바람은 생각도 안 할 대쪽 같은 인간이긴 하지만……. 비주얼로는 어디에 내놔도, 누가 봐도 탐나는 인물이니 주변에서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 같아서.
이번 미국 여행을 계획한 데에는 그 이유도 컸다. 원태휘 주위에 달라붙을 날파리 퇴치! 물론 그것 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지만.
“좀 더……! 흐앙……!”
“영롱아, 하아…….”
태휘는 영롱의 골반을 단단히 붙든 채,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도 쥐어짜듯 영롱에게 가득 채워 넣었다. 영롱 또한 부들부들 떨며 사정했고, 태휘는 끝까지 허리를 돌려 가며 잔뜩 예민해진 영롱의 구석구석을 자극했다.
영롱은 태휘가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게 아쉬워 흐느끼며 팔을 뒤로 뻗어 엉덩이를 잡아당겼다. 태휘도 그 손길에 순응해 그대로 영롱을 안고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영롱은 태휘의 무게와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밭은 숨을 골랐다.
영롱의 어깨부터 팔까지 어루만져 내려오던 태휘의 왼손이 손등 위에 겹쳐 오더니 깍지를 꼈다. 두 사람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와 손목의 팔찌가 저들끼리 부딪쳐 작은 금속음을 냈다. 영롱은 태휘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200○년 1월 -
예정에 없던 드라마틱한 재회 이후, 해가 바뀌고 나서야 두 사람은 드디어 태휘의 아파트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보스턴 시내를 돌아다녔다.
보스턴은 관광지라기보다는 대학교가 많아 유학생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어서, 미국 동부 관광을 제대로 하고 싶다면 날 잡고 뉴욕으로 가야했다. 하지만 영롱의 주목적은 관광이 아닌 데이트였기에, 보스턴 안에만 머물러도 좋았다.
오히려 보스턴에서 태휘의 일상을 추측하는 게 재밌었다. 태휘의 학교도 구경하고, 태휘가 자주 들른다는 식당과 카페에도 가 보고.
한국에선 가수 데뷔 후 한 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는데, 태휘는 보스턴에서 등하교를 지하철로 했다. 그런 태휘를 따라 보스턴에서 있는 내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그것마저도 즐거웠다.
무엇보다 영롱이 즐겼던 건, 그 모든 과정 내내 태휘와 딱 달라붙어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활보한 일이었다. 연예인 신분으로, 서울 한복판에선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으니까.
서울에선 외출 한 번만 하려고 해도 모자와 선글라스로 중무장을 하고 차로 밤에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태휘와 영롱을 알아보는 이가 거의 없었으니 보통의 연인들처럼 편하게 돌아다니는 게 가능했다. 각국의 유학생들이 모이는 이 도시는 동양에서 온 남자애들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개방적인 이 나라의 연인들처럼 대낮에 길거리에서 키스하는 등의 과감한 스킨십은 하지 못했지만. 솔직히 영롱은 하고 싶었고 할 수도 있었으나, 태휘가 기겁을 했다.
일단 둘이 함께 있고, 모자도 선글라스도 없이 어깨를 붙이고 나란히 걸으며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영롱은 보스턴 다른 어느 곳보다도 태휘의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바다를 좋아했다. 서울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바다라도 최소 1시간은 달려야 볼 수 있었으니까.
이 리비어 비치(Revere Beach)는 특별한 관광 명소는 아니더라도 워낙 넓은 해수욕장인지라 보스턴 주민들이 나들이 삼아 많이 찾는 곳이라고 했다.
지금은 겨울이라 한산한 편이었고. 눈이 쌓인 풍경은 어쩐지 데뷔 전 멤버들과 갔던 동해 바다와 비슷한 정취가 느껴졌다. 그곳은 태평양이고 여기서 보이는 바다는 대서양이라고 해도, 영롱에겐 그저 다 똑같은 바다였다.
태휘의 아파트에서는 도로의 차 소리보다도 파도치는 소리가 더 가까이 들렸다. 밤새 암막 커튼을 걷어 두면 수평선 너머의 일출이 집 안을 가득히 밝혀 눈이 저절로 떠졌다.
영롱은 아침마다 바다를 보며 조깅한다는 태휘를 따라 함께 운동하기 시작했다. 원래 야행성인 영롱이었지만, 시차 때문에도 그렇고, 태휘의 일상에 맞추다 보니 아침형 생활을 하게 되었다.
운동이 아니어도 두 사람은 매일 오후 해변을 한참 동안 산책하다 들어오곤 했다. 근처에 로건 국제공항이 있어 수시로 바다 위를 가르는 비행기를 구경하는 것도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태휘 말로는 한국이 그리워질 때는 그 광경이 때론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원하면 언제든지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생각에. 물론 그의 성격이라면 절대 실행에 옮기지 않겠지만.
태휘와 영롱은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리비어 비치를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겨울의 바닷바람은 살을 엘 듯 추웠으나, 털모자와 패딩으로 꽁꽁 싸맨 덕에 남자 둘인지 알아보기 힘들어 거리낌 없이 손을 잡을 수 있는 건 좋았다.
“하늘이랑 바다 진짜 예쁘다.”
“지금은 너무 추워서 그렇지, 여름 되면 더 예뻐.”
태휘는 바닷바람으로 차가워진 영롱의 손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영롱은 연인의 시선을 따라 해변을 바라보고는 씨익 웃었다.
“좋네. 그때는 나와서 일광욕하자.”
그 말에 태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름까지 함께 보낸다는 걸 생각도 못했다는 듯이. 그러고 보니, 내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 형한테 말 안 했던가?
그제야 영롱과 태휘는 재회하고 처음으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의논했다. 보스턴의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뉴베리 스트리트(Newbury Street)의 한 레스토랑에서 모처럼 근사한 저녁을 먹으며.
“온 김에 그래도 몇 개월은 있으려고.”
영롱은 어깨를 으쓱 들먹이고는 스테이크를 크게 썰어 입에 넣었다. 태휘는 샐러드로 향하던 포크를 멈칫하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
“난 너 생일까지만 같이 보내고 돌아가겠거니 했지.”
내 생일이면 이번 달 말인데. 겨우 그 정도만? 영롱은 입 안 가득 고기를 채워 넣어 빵빵해진 볼을 하고는 물었다.
“왜? 형은 싫어?”
“싫은 게 아니라, 나랑 아무 상의도 안 했잖아.”
“그럼, 한국에 있을 때 형은 우리 집에 들어오기 전에 상의했어? 그때도 그냥 눌러 살았으면서.”
“그때랑 지금은 다르지.”
나는 공부하러 온 거니까. 태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바로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침대에서와는 달리 한층 차가워진 표정에 영롱은 맛있던 스테이크가 순식간 질기게 느껴졌다. 참 나, 좋다고 환장할 땐 언제고!
칼 같은 태휘의 반응에 영롱은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그래도 자기가 한 짓이 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음악 공부하겠다고 미국까지 온 사람 막무가내로 따라와서 자취방에 눌러 살겠다고 하니, 아무리 애인이라도 당황스럽겠지.
그러나 자기 딴에도 다 생각이 있었다. 원태휘 말은 저렇게 해도 워낙 자신에게 약하니까, 최대한 살살 꾀어서 넘어갈 심산이었다. 영롱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애교를 가득 담아 말했다.
“나 있는 동안 형 방해 안 할게~. 월세도 반 내고!”
“월세가 문제가 아니잖아. 개강하면 너 챙기지도 못할 정도로 바쁠 거야.”
“나 안 챙겨줘도 돼! 나 없다고 생각해~. 투명 인간처럼 있을게.”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안 되긴 해. 이렇게 예쁜데 투명 인간 취급하긴 힘들겠지.”
영롱은 턱 밑에 손으로 꽃받침 만들고는 말했다. 태휘는 기가 막혀 화낼 기운도 없어 보였다.
“우리 집에서도 바쁠 땐 각자 살았잖아. 벌써 잊었어?”
“그 집은 크기라도 했지.”
“둘이 살기에 좁아서 불편하면, 난 근처에 호텔에서 장기 투숙해도 돼!”
“불편한 게 아니라…….”
태휘가 기가 찬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영롱은 순간 위험을 감지했다. 원태휘가 한숨을 쉬기 시작하면 90퍼센트 확률로 말다툼으로 이어지던데.
영롱은 반 년 만의 극적인 재회를 싸움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이 위기는 모면해야겠다 싶어서 대충 수습하고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럼 봄 학기까지만! 대신 여름 방학 땐 형이 한국 들어와.”
태휘는 봄 학기까지도 내키지 않은 눈치였으나, 그 역시 오늘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는지 영롱의 체류 기간에 관해 더는 아무 말 안 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한결 누그러진 태휘의 말투에 영롱은 안도하고는 다시 음식에 손을 뻗었다.
“여름에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하잖아. 월드컵은 같이 봐야지.”
영롱의 말에 태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축구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개최한다니까 궁금하잖아.”
태휘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2집 앨범은?”
“몰라.”
“몰라? 대표님이 언제 내자 말씀 안 하셨어?”
“내가 내고 싶을 때 내래. 1집 잘 됐으니까, 2집은 좀 더 완성도 있게 내고 싶다고 했지.”
그 말에 태휘는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열었다가, 바로 다물었다. 오늘만은 잔소리를 자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영롱은 자연스레 이어진 화두에 지금이 말을 꺼낼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형은?”
“나? 뭐?”
고개를 숙인 채 샐러드를 먹던 태휘는 영롱을 쳐다보지도 않고 되물었다.
“형도 앨범 내야지.”
영롱이 단호하게 말하자 태휘는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영롱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나 유학 끝나려면 한참 남았는데, 언제 내겠어?”
“틈틈이 곡 작업하고 있잖아. 저번에 들려준 것도 좋았고.”
“너한테 달라더니?”
“나 안 줘도 돼.”
영롱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태휘는 혼란스러운 듯한 얼굴이 되었다.
“저번에 라디오 막방 끝나고 팬들 만났거든. 애들이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형은 솔로로 안 나오냐고.”
영롱이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어가자 태휘는 가만히 눈만 끔벅거리며 듣고 있었다.
“팬들이 하도 조르고 부탁해서 내가 온 거야. 형이라면 분명히 학업에 집중하느라 솔로 앨범은 생각하지도 않을 게 뻔하니까.”
영롱은 팬들에게 나름 큰 임무를 부여받아 이곳에 온 셈이다. 애인이기도 하지만 동료 가수로서 원태휘를 좋아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팬들의 심정을 백분 이해했다.
“유학 다 끝나고 앨범 내면 너무 늦지 않아? 팬들도 그렇고, 대중의 기억에서 잊히기 전에 뭐든 해야 한다고 봐.”
전화 통화로 그가 작업한 곡을 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탐이 나긴 했으나……. 팬들의 하소연을 들어보니, 자신이 채가는 것보다는 그의 음악을 기다리는 팬들을 위해 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뭐, 형이 원하면 내가 보컬 피처링 정도는 참여해 줄게.”
영롱은 턱을 괸 채 도도한 투로 말했다. 흔들리는 태휘의 눈빛을 보아하니 역시나 생각도 안 해 본 게 분명했다. 그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미루어 볼 때, 학업과 음반 작업은 병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겠지.
원태휘라면 솔로 앨범을 내더라도 음대 과정을 다 마치고, 완성된 상태에서 열 몇 곡으로 꽉꽉 채운 정규 앨범을 낼 계획이었을 거다. 하지만 영롱의 생각은 달랐다.
그 시기라고 그가 음악적으로 완성됐다는 보장은 없는데. 어차피 아티스트라면 일평생 성장하고 그 과정을 음악으로 내보이는 거 아닌가?
STORY가 해체한 지도 이제 2년째이다. 대중은 물론이고 아무리 팬들이라도 눈앞에 안 보이면 금방 잊는다. 영롱도 솔로 활동하며 느꼈지만 음악 프로그램에 나가면 매주 놀라운 실력의 신인들을 마주한다.
원태휘의 음악적 재능은 의심할 바 없다고 해도 한국 가요계의 트렌드는 무서우리만치 빠르게 변화한다. 대중들이 그를 잊는다면, 영롱이 괜히 다 억울하고 아까울 것 같았다. 더군다나 태휘는 자신의 커리어보다도 바다 건너 영롱만을 더 신경 쓰고 있었으니.
“맨날 내 곡 작업이랑, 내 목 상태만 잔소리하고.”
철딱서니 없는 반항심으로 ‘형이나 잘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영롱은 태휘에게 곡을 의뢰하고, 받기만 기다리는 클라이언트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창작에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로만 남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도 태휘와 함께 성장하고, 그의 작업에 도움이 되는 음악적 동반자가 되고 싶었다.
“한 우물 우직하게 파는 것도 좋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 열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평소 이런 얘기를 깊게 나누지 않아 그는 짐작도 못했겠지만. 전화 통화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 직접 만나서 얼굴 보고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유학 하는 동안 작업한 곡들 엮어서 내면 의미도 있고, 형 기다리는 팬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어느새 식사를 다 마친 영롱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태휘는 샐러드를 깨지락거리며 영롱이 한 얘기를 곱씹는 듯 보였다.
“꼭 정규 앨범 아니어도 되잖아. 미국처럼 싱글이나 EP로 발매해도 되고.”
영롱이 태휘에게 이렇게 오래 음악에 관한 조언을 건넨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태휘는 짐짓 놀란 것도 같았다. 이런 식으로 잔소리 하는 건 늘 본인 역할이었으니까.
“여기서 틈틈이 작업한 곡들 모아 두고, 방학 때 한국 들어가서 녹음하면 불가능한 일정도 아니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태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했다.
“생각해 볼게.”
긍정적인 대답에 영롱은 해맑게 웃었다. 의외여서 놀랄지언정, 그는 이런 종류의 조언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야 마음이 개미 똥구멍처럼 좁아서 잔소리를 숨 막혀 하지만.
본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살짝만 열어 주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곤 했다. 호의적인 반응에 자신감이 차오른 영롱은 용기를 내어 한 가지를 더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형, 미니홈피도 만들어.”
“그게 뭔데?”
“요새 사람들 많이 해. 연예인들도. 그거 하면 사진도 올릴 수 있고, 팬들도 많이 구경 와. 형 소식 올려 주면 팬들 엄청 좋아할걸?”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지 태휘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이건 설득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도토리 많이 선물할게.”
“도토리?”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일어섰고, 태휘가 계산을 하는 동안 영롱은 레스토랑 앞에 나와서 기다렸다. 잠깐 서 있는 사이, 웬 모르는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영어를 잘 못 하는 터라 난처한 표정으로 가게 안의 태휘를 돌아보았는데, 계산이 오래 걸리는지 직원과 뭔가 대화를 길게 나누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영롱은 최대한 친절한 표정으로 남자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제스처를 보니 대충 같이 술 한잔하자는 말 같았다. 레스토랑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나온지라 지금의 영롱은 털모자도 없었고 말쑥한 코트 차림이었다. 체격이 작긴 하지만 남자라는 걸 모를 리 없는데.
상대방의 눈빛을 보니 그 제안이 어떤 의미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한껏 예의는 차리고 있지만 노골적인 호감의 표시. 한국에서도 이미 익숙하게 많이 겪은 일이었다. 심지어 가끔 해외 촬영이나 공연 갈 때도 각국의 언어로 심심치 않게 받아 왔다.
지금 말을 걸어온 남자는 훤칠한 체구에다가, 큰 입으로 활짝 웃는 미소가 매력적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 야구 점퍼만 걸친 걸 보니 체육과 학생인 것 같았다. 외국인이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자기보다 한참 어릴 수도 있고.
그가 적극적인 몸짓으로 다가오자 영롱은 지을 수 있는 가장 미안한 표정으로 레스토랑 유리 너머 태휘를 가리키며 말했다.
“Sorry. He is my boyfriend.”
그 말에 그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반대편 인도로 건너갔다. 외국이긴 하지만, 다른 이에게 저 남자가 내 애인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영롱은 기분 좋은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태휘를 기다렸다.
“카드 기계가 말을 안 들어서, 좀 오래 걸렸어.”
어느새 가게에서 나온 태휘가 영롱에게 몸을 붙여 왔다. 와인도 한잔했겠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태휘는 영롱의 어깨를 감싼 채 거리를 걸었다. 대범해진 태휘를 따라 영롱도 태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어차피 시간이 늦어 거리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영롱은 ‘my boyfriend’를 올려다보며, 솔로 앨범 발매를 위한 설득 말고도 자신이 보스턴에 온 또 다른 이유를 상기했다.
어떻게 보면 6개월은 긴 시간일 수도 있지만, 전체 유학 기간에 비하면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헤어진 지 반년 만에 그새를 못 참고 미국까지 쫓아온 까닭은 태휘 보다도 영롱 자신 때문이 컸다. 결국엔 태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영롱이 봐도, 한국에 홀로 남겨진 자신은 위험천만이었다. 곁에서 자기를 지켜주는 태휘가 없으니까, 주변에서 집적거리는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영롱은 자신이 막을 수 있는 상대에게는 최선을 다해 철벽을 쳤다. 예를 들면 멤버들.
태휘와 사귄다는 사실을 모르는 멤버들은 여전히 영롱과 자고 싶어 했다. 가디언즈의 현우였던가? 아무튼 제 애인이랑 헤어졌다며 위로해 달라는 설민부터, 곡 작업하는데 잘 안 풀려서 스트레스 만빵이라는 오은에다가, 군대 휴가 중 술 마시고 찾아온 한강까지.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날이 겹친 적은 한 번도 없었네? 아무튼 그들을 겨우 달래 돌려보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멤버들은 권준원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협박하거나 강제로 요구하진 않았으니까.
태휘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영롱은 권준원과 단둘이 영화를 본 날부터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날 준원은 영롱이 끝까지 저항하자 결국 지저분한 카드를 꺼냈다. 그의 동창인, 원태휘의 새 형수까지 들먹이며.
‘최세나가 너희 사이 알게 되면 참 재밌겠지? 그 집안 둘 다 장난 아니잖아.’
그 말을 듣자 그를 밀어 내던 영롱의 손에서 순간 힘이 빠져나갔다. 별별 소문이 떠도는 연예계니, 자신들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과연 원태휘의 집안도 그럴 수 있을까? 결혼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잘못하면 원태성의 파혼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 문제였다.
‘세나는 다른 소문은 안 믿어도, 내 말은 믿을걸?’
그래서 처음엔 준원이 원하는 대로 해 줄 뻔했다. 그저 태휘의 집안에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동안 태휘 형이 가족들에게 인정받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 혼자만 참으면 되겠지 싶어서. 지금까지 잔 남자가 몇 명인데, 한 명쯤 더 늘려봤자 무슨 차이겠어?
준원이 영롱의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만지작댈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태휘가 아닌 타인의 손길이 은밀한 부위에 닿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도 스킨십에 목말랐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참고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신을 만지는 손이 태휘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자 두려움 속에서 작아졌던 용기와 이성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결국 그를 밀어 내고, 역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제가 형이 오늘 한 짓 다 불어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리고 그의 차에서 내려 단숨에 집까지 도망쳐 올라갔다. 그가 아무리 협박했어도, 자기가 저지른 짓이 있으니 섣불리 행동하진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설마 그런 위험을 감수하진 않겠지.
역시나 준원은 말로만 협박했을 뿐이었지만, 그 이후로 계속해서 끈질기게 영롱을 괴롭혀 왔다. 처음 며칠간은 걱정에 손이 떨리고 다리가 풀렸다. 그럴 때마다 영롱은 태휘가 준 튤립 꽃바구니와 반지를 보며 버텼다.
준원에게 당한 일을 태휘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순 없었다.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준원을 만났다가 생긴 일이니, 말해 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아서.
권준원은 매일 전화했고 때론 집 앞까지 찾아왔다. 그래서 영롱은 더 바쁘게 일했다. 핸드폰을 확인하고, 집에 들어올 틈도 없을 만큼. 그가 제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지길 바라며.
다행히 준원도 해외 올 로케이션 촬영으로 화제가 된 신작 드라마에 캐스팅되는 등 바빠지면서 영롱에 대한 집착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래도 종종 연락을 해 왔기에, 그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다시 쫓아다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때부터 영롱은 1집 스케줄도 다 끝났겠다, 아무도 모르게 한국을 뜰 준비를 했다.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늑대들을 피해, 연인이 있는 보스턴으로 오기로.
사실 태휘의 의사는 중요치 않았다. 한국에서 충분히 시달릴 만큼 시달렸기에, 더는 이 외로움을 혼자 버틸 자신이 없었다. 내가 자기 곁에 있으면 원태휘도 덜 불안하겠지.
영롱이 안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당기자, 태휘가 세상 사랑스럽단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게 맞는 그림이야. 위험과 불안을 뒤로하고 도망쳐 왔으니, 이젠 행복할 일만 남았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