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6. Value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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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롱은 태휘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 작업실 천장만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만 움직여 작업실 곳곳에 놓인 튤립 화병들을 둘러보는데, 눈꺼풀을 깜박일 때마다 눈앞이 뿌예졌다.
이 집에서 울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와 함께 수많은 낮과 밤을 함께 보냈던 호텔도 아니고, 자신의 집도 아니고, 보스턴의 아파트도 아닌 낯선 공간인데.
그의 냉랭한 태도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미련의 흔적들을 집 안에서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처음엔 꼬투리 하나 잡았다고 그저 신났을 뿐이었다.
새벽에 그를 거실 소파에 눕힌 뒤 드레스룸에서 커플 팔찌를 발견했을 때도 반가움과 기쁨에 벅찼으나 놀릴 생각이 먼저였다. 이 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자기 사진이 뒷모습 단체 사진뿐일 때도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비밀 암호문 같은 그의 속내가 재밌기만 했다.
하지만 이 방을 가득 채운 튤립들을 보자마자 겹겹이 쌓였던 감정이 순식간에 바스러져 버렸다. 작업실 안,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빽빽하게 튤립을 꽂아 둔 것은 그의 무의식적인 습관이었을 것이다. 이 꽃의 의미를 알고 있는 영롱을 무방비로 들여보낼 만큼.
그 기습적인 무심함에 영롱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태휘에게 있어 이 방은 무언의 자백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그는 팔을 뻗어 영롱을 끌어안는 거로 자신의 항복을 인정했다.
영롱은 10년 만에 안겨 보는 태휘의 품이 어쩐지 낯설었다. 녹아내릴 정도로 편안할 줄 알았건만. 현실감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내 안에 남아 있는 죄책감 때문일까? 그의 등을 끌어안으려 천천히 들어 올린 두 팔은 끝내 안착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부유했다.
이날만을 그토록 기다려 왔는데. 여태껏 꿨던 수많은 꿈속에서처럼 자신이 안자마자 그가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포옹이라기보다는 결박처럼 느껴진 탓도 있다. 놓쳤던 끈을 다시 붙든 사람처럼 원태휘가 옥죄듯 안으며 놔주질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영롱은 도로 두 팔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태휘가 강하게 끌어안는 바람에 오로지 그의 팔심으로만 지탱하고 서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부정해 왔던 마음을 원태휘 스스로 깨닫는 날이 오면 맘껏 놀려 대고 즐길 작정이었는데. 무방비 상태에서 감정의 파도를 직격으로 맞은 탓인지 온몸에 힘이 쫙 빠져 버렸다.
태휘는 영롱의 쇄골에 얼굴을 묻은 채, 그동안 맡지 못했던 체취를 단번에 빨아들일 듯 숨을 삼키고만 있었다. 그가 한 곳만을 깨물고 빨아 대는 통에 피부가 아릿했다. 붙들린 어깨도 으스러질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 목이 메어 오는 게 문제였다. 경험상 이렇게 울면 좋을 게 없다는 걸 배웠다. 몰랐으면 좋았을, 너무 비싼 교훈이었지. 영롱은 아쉬움을 겨우 누르고는 태휘를 밀어 내야 했다.
“형, 잠깐…….”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놓기는커녕 태휘는 더 세게 안았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걱정 마. 나 이젠 형 아니면 갈 데도 없으니까. 영롱은 그 말을 하려다가 속으로 삼키고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기를 포기했다. 그래, 얼마 만에 느껴보는 형의 품인데.
영롱은 몇 년 전부터 해 온 대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울음을 그치는 쪽을 택했다. 나는 슬프지 않다. 너무 즐거워 죽겠다. 평소처럼 가볍게, 푼수같이 굴자……. 얼음 왕자 같던 원태휘 마음을 드디어 녹였다! 그렇게 튕기더니,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아이고, 신난다.
그제야 영롱은 손을 들어 태휘의 허리를 만질 수 있었다. 노련한 손길에 그가 흠칫 떨며 팔을 살짝 풀었고 영롱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앉아 버렸다. 놀란 태휘가 바로 뒤따라 몸을 숙이며 둘은 작업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자세가 되었다.
“영롱아, 괜찮아?”
태휘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오자 뿌옇던 눈앞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돌아온 이후 그가 ‘영롱아’라고 불러 준 적이 있던가? 와, 마인드 컨트롤이 아니라 정말로 기분 완전 째지는데? 영롱은 두 눈을 반짝이며 태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숨 막혀 죽을 뻔했잖아!”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더니 목소리가 떨렸다. 다행히 아직 티 날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태휘가 걱정스러워하며 일으키려 하자 영롱은 손을 잡아당기고는 다시 와락 껴안았다.
“이대로 조금만.”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려 최대한 짧게 말했다. 의아해하던 태휘는 이내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결국 두 사람은 작업실 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추스르고 들뜬 목소리도 진정되자 영롱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고 태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하니 다시 목이 메어 왔다.
얼음 왕자는 속마음 감추기를 완전히 포기했는지 만면에 복잡한 심경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넘치는 애정, 애끓는 후회, 일말의 근심 등등. 영롱이 돌아온 이후 태휘가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내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있잖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형의 차가운 얼굴 아래에 요동치고 있는 감정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해도 나는 다 안다고. 나로 인해 형이 얼마나 열정적인 사람이 되는지, 또 얼마나 냉정해질 수 있는지. 형의 모든 온도를 나는 전부 느껴 봤으니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태휘는 스스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 모든 일을 겪었는데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냐고.”
그가 괴로워하며 얼굴을 찌푸리자 감은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자 울어 버리고 마는 어린아이처럼. 아, 정말 녹아 버렸네. 영롱은 자신도 훌쩍거리는 와중에 손을 뻗어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사실 나도 이제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어.”
태휘는 흐르는 눈물을 영롱의 손길에 맡긴 채, 붉게 충혈된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영롱은 잠겨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는 개뿔도 모르면서 확신했다면 말이야.”
입가에 설핏 미소를 지으면서도 실은 슬퍼 보일 거란 걸 알았다.
“그동안 내 사랑을 찾는 데 모든 걸 바쳤는데. 점점 더 모르겠더라.”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지만 이 말만은 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겪고 나서도 다시 한 사람만을 원한다면…… 그게 사랑 아니야?”
그렇게 말한 뒤 영롱이 손을 떼려고 하자, 태휘가 손목을 붙들었다.
“맞아.”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단호한 대답에 영롱은 이제 목이 아닌 가슴까지 메어왔다.
“네 말이 맞아.”
태휘는 확신하듯 되뇌고는 바로 입술을 부딪쳐 왔다. 거의 10년 만에 느껴보는 태휘의 입술이었다. 차마 입을 벌리지도 못하고 부드럽게 포개어오는 그 입술을 느끼며 영롱은 생각했다.
사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헤어진 게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서로를 놓지 못한 채 치열하게 연애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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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만의 키스는 그 공백이 무색하리만치 짧게 끝났다. 불같이 타오르던 열정이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키스 이상의 단계로 진행될까 봐 두려워서 멈췄으면 멈췄지. 그러면서도 어렸을 때는 느끼지 못한 쑥스러움이 들어 낯설었다.
키스를 마친 태휘는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마치 항복 후 무장해제당한 것처럼. 그러게, 철벽 치긴 누구 앞에서 철벽을 쳐? 영롱은 입을 떼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깨끗하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젠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렇지만 내심 걱정스러웠다.
작업실 안을 둘러보니 한쪽 구석에 있는 소형냉장고가 보였다. 무릎으로 기어가려고 하자 태휘가 한발 빨리 움직여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뚜껑까지 따서 건네주었다. 영롱은 피식 웃고는 물을 마셨다.
그래도 마인드 컨트롤해서 생각보단 많이 안 울었다. 어렸을 때였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났을 텐데. 마실 만큼 마시고 생수병을 태휘에게 건네자 고개를 내저었다.
그사이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는지 심란해 보였다. 그래, 이러지 않으면 원태휘가 아니지. 진짜 변한 거 하나도 없다니까. 영롱은 목을 가다듬고는 일부러 작게 속삭였다.
“이 표정 뭔지 알아.”
“뭐가?”
“아 또 망했다. 그 표정이잖아.”
그 말에 태휘는 곧바로 심란한 기색을 숨겼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러게 튕기긴 왜 튕겨.”
영롱이 새침하게 말하자 태휘는 이제야 자신이 받아들인 현실을 체감했는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는 콜록콜록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대체 나 돌아오면 어쩔 셈이었어? 아무렇지 않게 형·동생으로만 지낼 자신 있었어?”
영롱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태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런 생각 안 했어.”
“그럼?”
“거기까지 생각 못 했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랐으니까.”
영롱은 다시 눈물이 핑 돌아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것만 바랐어. 너랑 나 평생 남남으로 살아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 달라고.”
아, 나야말로 망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고개를 돌리고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진짜 원태휘 이 인간은 진심을 보였다 하면 나를 속수무책으로 만든다. 영롱은 괜히 작업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울음을 삼켰다. 태휘는 영롱의 뒷모습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너에게 더 바라는 게 없어. 아니, 오히려 과해. 네가 나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이. 다 장난 같았어.”
믿을 수 없었던 거구나. 하긴, 내가 못 믿을 행동을 많이 하긴 했지.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했지. 내가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의 애절한 고백을 들으며, 영롱은 이게 다 자기 업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때 너한테 너무 모질었어. 네가 그렇게 멀리, 오래 떠나 버릴 줄도 모르고…….”
“이제 옛날 얘기 그만하기로 했잖아, 우리.”
옛날 얘기 시작하면 ‘누가 더 개새끼인가’ 대회 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회에선 내가 압승이겠지. 그 생각을 하니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하제일 개새끼 대회의 승자로서 더는 질질 짜고 있을 수 없다.
“나도 어릴 때처럼 철없이 굴 생각 없어. 이것저것 요구하지도 않을 거고.”
영롱은 손등으로 눈가의 눈물을 재빨리 훔치며 말했다.
“그냥 곁에 있고 싶을 뿐이야. 형이 날 밀어 내지만 않는다면.”
“안 그럴 거야.”
태휘는 그렇게 말하며 팔을 뻗어 영롱의 손을 잡았다. 영롱은 그 손길을 못 이기는 척 돌아와 다시 안겼다.
모든 걸 체념했는지 깊이 묻어 뒀던 진심을 꺼내 순순히 고백하는 그가 신기하긴 했다. 오랜만에 재회했음에도 남보다 못한 사이인 양 까칠하게만 굴던 인간이니까.
실은 새벽에 부축해서 들어올 때 택시에서 머리를 세게 부딪쳤는데 그것 때문에 이상해진 거 아니야? 이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휘는 세상 애틋한 표정으로 영롱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이 현실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안 늦었어.”
물기 어린 두 눈을 빤히 올려다보고만 있다가, 태휘가 대뜸 그렇게 말하자 영롱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어제 한 말에 대한 대답이야.”
어제? 영롱은 그제야 막걸리바 화장실 앞에서 태휘를 향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형이랑 했던 약속 지키려고.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취해서 못 들었거나 잊은 줄 알았는데. 영롱은 그만 피식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럼 그 약속이 뭔지도 알아?”
“우리 사귈 때 내가 말한 그거잖아.”
그 말에 영롱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12년 전에 했던 말 다 기억하고 있네, 원태휘. 기특하게도. 영롱은 손을 뻗어 기특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억력 아직 쓸 만하네, 우리 애인.”
애인 소리를 듣고도 정색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 기억하면서, 다 알면서 내내 모르는 척했다 이거지? 내 팔찌의 행방도 그렇고. 그동안 담배도 계속 피웠으면서 나 돌아오니까 갑자기 끊었다고 하질 않나.
하여간 보기보다 요망하고 깜찍한 데가 있어. 나이 먹어서도 이렇게 귀여우면 내가 또 반하지 않고 배겨?
태휘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만 있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와 자신의 뺨을 영롱의 손바닥 안쪽에 가져다 댔다. 얼음처럼 차갑게 닫혀 있던 마음이 녹아내리며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영롱은 자연스레 태휘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엄지로 젖은 눈가를 닦아 주었다. 태휘는 두 팔로 꼭 끌어안은 채 놔주지 않았다.
반나절도 안 돼 두 사람의 온도차가 급격히 좁아지다 못해 한 몸과 같이 되자 영롱은 멀미가 날 정도였다. 오랜 세월, 오늘만을 꿈꿔 왔지만 이다음은 어찌해야 할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릴 때라면 ‘잘 먹겠습니다’ 하며 바로 덮쳤겠지.
하지만 조금 전 자신이 내뱉은, 철없이 굴지 않겠다는 말은 지켜야 했다. 게다가 어렸을 때보다 지금 더 수줍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오늘은 짧은 입맞춤만으로도 충분했다.
영롱은 태휘의 품에서 겨우 빠져나와 손을 잡고는 팔만 휘휘 흔들어 댔다. 안 어울리게 쑥스러워하며 괜히 작업실만 둘러보자 태휘도 어색한 공기를 환기하려 녹음 부스 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녹음실, 들어가 볼래?”
태휘의 말에 영롱은 흠칫 놀라며 물었다.
“응? 왜?”
“아까부터 부스 안 마이크 들여다봤잖아. 노래 부르고 싶은 줄 알았는데.”
영롱은 자신이 그랬는지도 몰랐다. 이제는 괜찮겠지만, 오늘은 자신이 없었다.
“아, 아니야. 나 너무 많이 울었어.”
대충 그렇게 둘러대고는 그의 손을 잡아끌어 서둘러 작업실을 나섰다.
“세수나 할래.”
작업실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영롱의 시선은 녹음 부스 안 마이크를 향하고 있었지만 본인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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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다섯…… 아니, 세 명이요.”
설민은 폴폴 풍기는 술 냄새 때문에 입을 가린 채 해장국집에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온 한강, 오은의 몰골도 거기서 거기였다.
끝까지 남아 새벽까지 퍼마신 세 사람은 막걸리바 여기저기서 널브러져 자다가 일어났다. 속이나 풀자며 안경과 모자로 대충 얼굴을 가리고는 근처의 식당을 찾은 참이었다.
다행히 평일 이른 시각이라 다른 손님들은 없었다. 해장국 세 그릇을 시키고 말도 없이 먹는 와중에 설민은 핸드폰을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다가 이내 테이블 위로 던져 버렸다.
“폰 꺼져 있네.”
“차영롱?”
오은이 묻자 설민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해장국에 밥을 말았다.
“둘 다. 이 자식들 진짜 어디 간 거야?”
“그냥 둬. 각자 집에 갔을 수도 있지.”
“모처럼 만에 팀 회식인데 둘만 쏙 빠지는 거 너무 하잖아! 어제 우리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설민이 투덜거리자 오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말했다.
“그거 씨알도 안 먹힐 거 같던데? 차영롱은 대놓고 태휘 형한테 들이대고. 태휘 형도 분명 마음 있어. 존나 튕기고는 있지만.”
“그러니까, 내 말이! 역사적인 큰일을 앞두고 사내 연애가 말이 되냐고, 지금!”
버럭 언성을 높이더니 술을 한 병 시키려고 하는 설민을 옆에 있던 한강이 겨우 말렸다.
“내가 어제 술김에 잔소리하긴 했지만, 실은 활동에 지장만 안 주면 상관없지 않아?”
그 말에 설민과 오은은 동시에 배신감을 느낀 표정으로 한강을 쳐다보았다.
“아, 형은 왜 또 말을 바꿔요? 속 편해서 진짜 부럽다!”
“강이 형 진짜 무골호인(無骨好人)이라니까.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동생들의 비난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한강은 김이 서린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말을 바꾼 게 아니라, 내 생각은 한결같았어. 일에 폐 끼치지 않는 한, 연애하든 결혼하든 상관없다고.”
“형!”
“너희 모두 마찬가지야. 우리 연차도 있고, 현역 아이돌도 아니잖아. 요즘 연습생들처럼 연애 금지 할 것도 아니고. 어제는 노파심에 한 번 짚어 준 거지, 걔들도 그걸 모르진 않을 거야.”
설민은 고개를 내저으며 냉수를 한 잔 들이켰고, 한강은 말을 이었다.
“솔직히 우리가 걔들 막을 자격은 없잖아. 자기들이 서로 좋다면.”
더는 할 말이 없어진 설민과 오은은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설민은 숟가락으로 애꿎은 해장국만 뒤적여 댔다. 느릿하게 한 숟가락씩 떠먹던 오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참 미스터리야. 여전히 이렇게 좋아 죽을 거면, 그때 왜 헤어진 걸까?”
“난들 아냐?”
설민은 불만 가득한 말투로 대꾸했다.
“난 알 것 같은데.”
한강의 말에 설민과 오은이 놀랍다는 듯 서로를 마주 보다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천하의 둔탱이 리버 씨가, 우리도 모르는 이유를 안다고?
“형이 어떻게 알아요?”
한강을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아침에 술 깨고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둘이 헤어졌을 때가 그때쯤이랬지? 200○년.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했을 때.”
“응.”
“그때까지, 너네도 영롱이한테 들이댔어?”
“뭐라고요?”
“자자고 계속 졸랐냐고.”
“…….”
“…….”
입술을 앙다물고 얼음 상태가 된 동생들을 보니 말하지 않아도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이런 명확한 반응엔 별다른 눈치가 필요하지 않았다. 한강은 확신하는 표정을 짓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어쩌면 우리 때문일 수도 있어.”
설민과 오은은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둘 중 설민의 삿대질 액션이 좀 더 빨랐다.
“개오은, 너 이 새끼! 지는 한때 잠깐이었다고 발뺌하더니!”
“뭐! 왜 나한테만 그래? 아니, 씨발. 그리고 그게 왜 우리 때문이야? 그때 결국 차영롱 겁내 튕기기만 하고 한 번도 안 해 줬는데?”
오은의 언성이 높아지자 설민은 바로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고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게다가 우린 그때 둘이 사귀고 있는지도 몰랐잖아.”
설민과 오은은 억울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한강에게 호소했다.
“그러니까 그 둘도 우리한테 책임을 따지진 않았지. 결국 자기들 문제니까. 어쨌든 간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사이 걔네 연애사에 얽혀 있던 거야. 알게 모르게 원인 제공을 했을지도 모르니, 우리도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지.”
한강은 눈치가 없을 뿐이지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만 하면 교통정리는 잘했다. 동생들이 감정적으로 흥분했을 때 차분히 진정시키는 것도 한강의 몫이었고. 이럴 때는 제법 맏형다웠다. 그런 사람마저 그때까지 영롱한테 들이댔다는 게 의외였지만.
어찌 됐건 맏형의 말을 수긍한 설민과 오은은 금세 조용해졌다. 그사이 한강은 뭔가가 떠오른 듯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래돼서 까먹고 있었는데……. 그때가 둘이 헤어진 직후였나 봐.”
“뭐가요?”
“나 예전에 공항에서 영롱이 본 적 있거든. 그때가 그때였나?”
“무슨 말이에요?”
“이야, 퍼즐이 이제야 맞춰지네.”
한강이 손뼉까지 치며 큰 깨달음을 얻은 양 계속 혼잣말하자 설민과 오은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영롱이 미국에서 태휘랑 헤어지고 귀국할 때 공항에서 봤어. 그땐 그런 줄도 몰랐…….”
한강이 말을 계속 이으려는 순간 하필 다른 손님들이 우르르 가게에 들어왔다. 한강은 바로 입을 닫았고 궁금함에 목이 빠지기 직전이었던 설민과 오은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
평일 이 시간에 해장국집을 찾는 손님은 자기들뿐일 줄 알았는데 다른 용무를 마치고 온 일행들이 바로 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자신들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여성들이 테이블 위에 범상치 않은 장비들을 내려놓았다. 엄청난 망원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들이었다.
그들과 마주 보는 자리였던 설민은 그 광경을 보고는 바로 모자를 푹 눌러썼다. 다른 손님들이 없는 데다가 STORY 삼인방도 입을 닫아 조용했던 터라 가게엔 그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아, 아침부터 빡셌다.”
“곧 군백기 온다고 쪽쪽 다 뽑아 먹으려고 그러나 봐.”
“그래도 오늘 텐둥이들 개 예뻤다……. 프리뷰 셀렉 어떻게 하냐?”
그 모습에 설민은 멤버들을 향해 몰래 손짓했고 한강과 오은은 바로 머리를 모아 왔다.
“맞다. 여기가 텐보이즈인가? 그 아이돌 멤버 단골 식당이라고 유명한가 봐. 팬들이 밥 먹으러 여기 자주 오더라. 저기 사인도 있어.”
설민이 벽을 가리키며 발랄하게 말하자 오은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눈으로 욕했다.
“그걸 알면서 우릴 여기로 데리고 와?”
설민은 어이없어하면서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야, 어차피 우리 누군지도 못 알아봐! 한강 형이나 좀 알아보려나.”
그 말에 한강은 침착하게 뿔테 안경을 도로 쓰고는 핸드폰 카메라로 상태를 확인했다. 잘생긴 이목구비는 그대로였으나 부은 얼굴과 거뭇하게 자란 수염은 남 보이기 민망했으니까.
“지금 몰골은 아무도 못 알아볼 거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빨리 먹고 나가자.”
오은의 말에 한강과 설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STORY 삼인방의 걱정과 달리 그 팬 무리는 뒷자리의 아저씨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식사를 주문한 뒤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기 바빴고 말소리 대신 폰카 셔터음만 울렸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핸드폰만 쥔 채 빠르게 텍스트 입력하는 소리와 알 수 없는 쓱 뽕 소리만 울렸다.
주문한 해장국이 나왔는데도 바로 식사를 시작하지 않고, 가방에서 뭔가 카드 같은 것을 꺼내든 채 음식과 함께 사진을 찍는 듯했다. 무슨 일종의 신성한 의식 같은 건가?
잠시 후 일련의 예식을 다 마쳤는지, 그제야 그들은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훔쳐 들을 작정은 아니었는데 너무도 잘 들려서 어쩔 수 없이 대화를 듣게 됐다.
“너네 오늘 데카 투어도 갈 거지?”
“가야지. 나 포카 나눔도 공지도 올렸어.”
“난 못 가. 내 컵홀더 하나 챙겨 주라.”
“그럼 너 만든 탑꾸랑 키링 하나씩 주는 거다?”
“알았어. 너 이번 서포트 총알 쐈어?”
“나야 최고액 쐈지.”
“너 이번 콘서트도 올콘 질렀다고 하지 않았냐?”
“그래서 요새 알바 늘렸잖아. 스밍 신경 쓰느라 밤에 잠도 못 자는데.”
“잠은 죽어서 자자고. 애들 군대 가면 하고 싶어도 못한다.”
훔쳐 들어도 그들이 쓰는 말을 반도 알아듣지 못해 암호 해독 전문가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하아, 군백기……. 생각만 해도 슬프다. 어떻게 기다려?”
“난 그사이 더 예쁜 애 나오면 갈아탈지도. 늙고 못 생겨지는 순간 버려 줄 테다.”
“하다못해 가디언즈만큼만 곱게 늙어도 감사할 텐데.”
“걔네는 잘 늙었더라. 그중에 그 누구냐. 현우!”
“아, 현우 존예지. 그 나이치고.”
“쓰가 그래도 소속 가수들 와꾸 관리는 철저하잖아.”
그들의 대화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와중에 그나마 익숙한 이름이 세 사람의 귀에 꽂혔다. 특히 설민은 먹던 해장국을 그대로 뿜을 뻔했다. 그 모습을 본 오은과 한강이 서둘러 물과 티슈를 건네주었다.
‘쓰’는 팬들끼리 SS엔터테인먼트를 부르는 은어인 듯했다. 자신들보다 한참 후배인 가디언즈가 벌써 곱게 늙은 아이돌의 예시로 쓰이고 있다니.
그렇다면 저들이 생각하는 ‘아이돌’의 자격 기준에 STORY는 들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만약 언급돼도 좋은 얘기는 아닐 듯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그러고 보니 ‘쓰’ 얘기하니까 생각났는데, 그 STORY인가? 1세대 아이돌 재결합한다더라.”
“아, 기사 뜬 거 봤어. 쥐방시에서 한다며.”
‘쥐방시’는 GBS를 말하는 것 같았다. 요즘 어린 친구들, 별명도 참 재밌게 짓네, ……잠깐. 기사가 떴다고? 그 말을 들은 삼인방의 눈이 동시에 동그랗게 커졌다.
설민은 바로 핸드폰 화면을 터치했고, 한강과 오은도 핸드폰을 꺼내 검색해 보았다. 포털 사이트의 연예 뉴스 탭을 확인하니, 정말로 최상단에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단독] 1세대 레전드 아이돌 〈STORY〉, GBS 신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재결합!
기사에는 STORY 멤버들과 방송국 제작진이 최근 SS엔터 사옥에서 비밀리에 몇 차례 만나 회의를 진행했다고 나와 있었다. 여태껏 뜬 추측성 기사들과는 달리 실제 회의 날짜도 구체적으로 밝혀 꽤 신빙성이 있었다. 오은은 언론사와 기자 이름부터 찾아보았다.
—K엔터매거진 기다림 기자.
“역시 또 이 기자네.”
오은은 밥이고 뭐고 바로 일어나서 나가려 했고 설민이 겨우 붙잡아 앉혔다. 오은이 순간 짜증을 내려하자, 설민은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워 조용히 하라며 뒷자리 손님들을 향해 눈짓했다. 아무래도 그들의 대화를 더 들을 속셈인 듯했다.
오은은 한숨을 내쉬며 못 이기는 척 도로 자리에 앉았다. 뒷자리에선 저들끼리 계속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난 별로. 꼰대들의 재결합을 굳이 공중파에서 해 줘야 하나? 그럴 제작비 있으면 신인들 콘텐츠나 더 만들어 주지.”
“근데 그 아저씨들도 꽤 와꾸 유지 잘한 편 아니야? 나 최신 짤 보고 과사인 줄 알았잖아.”
“그래도 재결합까진 에바쎄바지. 요즘 아이돌처럼 라이브에 칼군무 되겠어? 비주얼도 중요하지만 가수라면 본업을 잘해야…….”
“사장님, 저희 계산할게요.”
그사이 오은의 재촉에 먼저 일어난 한강이 계산을 마쳤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채 얘기를 마저 들으려는 설민을 가까스로 끌고 나왔다. 해장국집에서 한참 멀어진 뒤 거리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멤버들은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키웠다.
“아, 더 듣고 싶었는데! 왜 나왔어?”
“더 안 듣는 게 나을 것 같던데.”
한강은 설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하여간 인간들. 이렇게들 센스가 없어요. 우리 재결합하려면 요즘 팬들의 취향도 파악하고 동향도 어떤지 공부를 해야지!”
설민이 혀를 쯧쯧 차며 멤버들을 향해 손가락질하자, 한강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우리 타깃이 요즘 팬들이야? 오랜 팬들을 위한 프로젝트 아니었어?”
“물론 그게 메인이지만! 쟤들 우리한테 갈아타게 만들고 싶지 않아? 의욕이 막 샘솟지 않냐고!”
오은은 열변을 토하는 설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숨을 뱉었다.
“꿈도 야무져, 이설민 씨. 지금 형 꼬락서니나 보고 말을 해. 방금 꼰대 소리 못 들었어?”
“왜, 우리 와꾸 유지 잘했다고 하잖아!”
“지 듣기 좋은 말만 들었네. 주책이야, 정말.”
설민은 오은의 빈정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안 되겠어. 바로 예약해야지.”
“뭘?”
“에스테틱샵.”
오은은 더는 할 말도 짜증낼 기력도 없어서 썩은 눈빛으로 설민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다 같이 가는 거야! 그리고 내일부터 당장 연습 시작하자.”
설민의 눈은 결의에 차서 이글이글 불탔다. 한강과 오은은 ‘이 새끼 진심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저놈의 미친 자신감은 차영롱보다도 넘친다니까.
“예, 실장님. 오늘 가려고요. 네, 세 명이요.”
“그런데 기사는 어쩌다 난 건지? 그 기자가 저번에 그 기자 맞지? 드디어 건수 올렸네.”
한강이 중얼거리자 오은은 그제야 기사 생각이 난 듯 흥분해서 설민을 향해 소리 질렀다.
“망할 에스테틱은 관두고 대표님한테 연락부터 해!”
한강은 이번엔 오은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진정시켰다.
“회사랑 방송국이 알아서 대응할 거야. 기사 뜬다고 해도 달라질 거 없어. 우리 다섯 명은 원래 일정대로 준비하면 돼.”
우리 다섯 명? 그러고 보니 그들의 존재는 순간 잊고 있었네. 걔넨 이 소식 알고 있으려나? 오은은 한강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다급히 물었다.
“그럼, 태휘 형이랑 차영롱은?”
그러자 설민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오은은 그 둘에게도 기사 소식을 빨리 전해야 한다는 말이었는데.
“걔네도 피부 관리 받겠지?”
▶▶
“응. 지금 가고 있어.”
차 조수석에 타고 있던 영롱은 태휘의 목소리에 살포시 눈을 떴다. 옆자리에선 태휘가 운전 중이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 얼굴은 안 보였지만 무선 이어폰으로 통화 중인 듯했다. 통화 상대는 아마 멤버 중 한 명일 거다.
“그렇게 됐어.”
태휘는 영롱이 깨지 않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는 말했다. 사실 잠들지 않고 눈만 감고 있던 건데. 태휘의 집에 있던 두 사람은 지금 신 대표의 호출에 SS엔터테인먼트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까 많이 운 탓에 눈과 목이 피로하긴 했지만 가슴이 벌렁거려서인지 잠은 오지 않았다. 단지 목을 아끼려고 자는 척했을 뿐. 그랬더니 태휘는 알아서 카오디오 볼륨도 줄이고 가능한 한 조용히 차를 몰았다.
집에 있을 때 걸려온 신솔 대표의 전화로 재결합 프로젝트 기사가 떴다는 걸 알게 됐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태휘와 신 대표는 한참을 통화했다.
그 대책으로 영롱이 태휘와 상의했던 문제가 자연스럽게 언급되어 나름의 돌파구를 찾았다. 그 돌파구로 나아가기 위해 당장 회사로 가야 했다.
“……영롱이도 시간 맞춰 나갈 거야.”
누군지 영롱의 행방을 물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백발백중 설민이겠지. 역시 맞았는지 뭐라 뭐라 하며 잔뜩 격양된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가서 설명할게.”
그 말에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는지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영롱은 기지개를 켜고서는 막 깨어난 척 눈을 비볐다.
“이설민?”
“깼어?”
흠칫 놀라 돌아보는 태휘의 얼굴은 미안함에 눈썹 끝이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애초에 잠들지 않았으니 미안해할 일은 아닌데. 그 표정이 귀여워 영롱은 잠자코 있었다.
“설민이 형한테 나랑 있다고 안 했어?”
“가서 얘기하려고. 전화로 말하면 그 새끼, 분명히 흥분해서 난리 칠 테니까.”
영롱은 피식 미소 지었다.
“만나서 말해도 똑같이 난리 칠 텐데.”
태휘는 곁눈질로 눈치를 살피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설민, 아직도 너 좋아해.”
“알아.”
영롱은 어제 막걸리바 주방에서 설민과 있던 일을 떠올렸다. 태휘의 마음을 돌릴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렇게 빨리 될 줄은 예상 못한 거지.
어쨌든 그 부탁은 설민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거절 방식이었다. 조금 잔인하기는 해도 어떤 희망도 품지 못하도록 적나라하게 뜻을 전했으니까.
영롱은 설민이 태휘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단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감정은 과거에 섹스할 때 여실히 드러났다.
오은과 한강 두 사람은 영롱과 섹스 파트너 관계만으로 만족했다. 오은은 자기 밑으로 깔아뭉개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영롱과 잤다. 한강은 욕구 해소의 편의를 다정과 위로로 착각해서 영롱과 잤다. 하지만 설민의 이유는 조금 달랐다.
오랫동안 영롱을 짝사랑하면서도 태휘를 동경했고 동시에 질투했다. 그 때문에 남자로서 태휘를 이기고 싶은 마음에 가장 의욕적으로 섹스에 임했다. 물론 영롱을 좋아한 만큼 열정을 불태운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감정이 자신을 향한 순애보 100퍼센트는 아니라는 건 영롱 자신만이 알았다. 순수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좀 더 복합적이었다. 설민 본인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설민은 육체로는 영롱을 제일 먼저 차지했지만 끝끝내 마음은 얻지 못했다는 치명적인 열패감만 남게 됐다. 그를 단념하게 하려면 자존심을 짓밟는 방법이 가장 빨랐다. 그렇다고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
‘섹스가 목적이면 얼마든지 해 줄게. 어차피…….’
어차피 이미 구를 대로 굴러서 이 몸땡이는 아무 의미가 없는걸.
‘몸은 수백 번이고 줄 수 있어. 근데 마음만은 안 돼.’
오랜만에 재회한지라 기대감이 부쩍 자란 설민에게는 비참할 정도로 냉정한 거절이 필요했다. 단호한 태도에 말문이 막힌 건지, 깊은 절망이 한차례 스쳐간 그의 얼굴은 급속도로 시무룩해졌다. 그 말이 효과가 톡톡히 있던 셈이었다.
태휘에게 그 대화를 그대로 전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자신에겐 연인을 안심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설민이 형은 금방 마음 정리할 거야.”
태휘는 의아해하며 영롱을 쳐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
“이제 우리 얘기만 해.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말고.”
그동안 우리 사이엔 너무 많은 타인이 끼어들었다. 물론 대부분 내 실수였고 이젠 그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동의했는지 더는 얘기 꺼내지 않았다. 자신들 앞엔 먼저 넘어야 할 일들이 있었으니까.
오늘 뜬 기사에다가, 지금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도 그렇고. 태휘도 마침 그 생각을 하는 중이었는지 영롱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대표님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촬영하자고 그랬어. 영상 빨리 올릴수록 좋으니까.”
“응…….”
평소답지 않게 늘어지는 말끝에서 이상함을 감지한 태휘가 재차 물었다.
“너 괜찮겠어?”
영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이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셈이잖아. 그게 부담스러워.”
놀랐는지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긴, 그렇게 주목받는 거 좋아하던 내가 이런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다니 낯설겠지. 하지만 사실인걸.
“그냥 팬들한테 오랜만에 인사한다고 생각해.”
태휘는 그렇게 말하고는 핸들을 잡은 손을 왼손으로 바꾸더니 오른손을 내밀었다. 영롱은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편하게 마음먹도록 도와주면서도 어째 그도 못지않게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형이야말로 괜찮아?”
그 물음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걸 보니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영롱이 그런 것처럼. 물론 영롱의 염려는 영롱만의 비밀이었으나 태휘의 근심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이래야 타고난 걱정 대장 원태휘답지.
어제 한강한테 들은 신신당부, ‘멤버들 사기 떨어트리는 소리는 하지 않기’ 때문인지 태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멤버로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연인으로서의 걱정이기도 했다.
“솔직히 겁나. 우리가 망치게 될까 봐.”
영롱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과거 STORY 활동 시절 그토록 자신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으니까. 게다가 어제 멤버들의 당부도 있었고. 두 사람의 관계가 팀과 그들의 일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염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야, 형.’
영롱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타이밍에 그 얘기를 꺼내야 할까? 영롱은 자신의 손등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태휘의 손끝을 느꼈다. 이렇게 겨우 맞잡은 손을 다신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텁텁한 말은 삼키고 개운한 말을 꺼냈다.
“형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영롱은 태휘의 손을 더 꽉 쥐고는 주문(呪文) 같은 말을 뱉었다. 어쩌면 다짐일지도.
“형이랑 한 약속 결국 못 지켰잖아. 이제라도 만회하고 싶어.”
영롱은 신중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었다. 태휘가 자신의 진심을 더는 의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랑 약속 하나만 해. 너나 나나, 자기 재능 썩히지 말고 각자 영역에서 최선 다하기로. 이게 우리 연애의 조건이야.’
‘연애에 조건은 무슨 조건? 서로 사랑하면 하는 거지.’
어렸을 땐 답답하게만 여겼던 그 연애의 조건이, 영롱을 그만큼 아꼈기에 다짐받고 싶었던 태휘의 애정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토록 늦게 알아 버렸지만, 너무 많이 돌아왔지만 그래도 태휘가 늦지 않다고 말해 주었기에 영롱은 불안함을 내리누를 수 있었다. 괜찮아. 이젠 괜찮을 거야. 영롱은 태휘의 손을 꼭 쥔 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
회사에 도착한 한강과 설민, 오은은 안무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늘부터 바로 안무 회의에 돌입해야 했기에 이곳에서 모이기로 했다.
연습실 구석에 마련된 회의실 겸 휴게실 소파에는 태휘 혼자 앉아 있었다. 태휘는 연습실에 들어온 멤버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얼굴 왜 이리들 뺀질뺀질해?”
번지르르하게 광나는 피부와 상반되게 한강과 오은의 안색은 잿빛이었다. 설민을 제외한 두 사람은 어쩐지 지쳐 보였다.
“말도 마.”
“관리 받은 거 존나 오랜만이다. 피곤해…….”
“진짜 촌스러워서 같이 팀 못하겠어! 연예인들 맞냐? 그나저나, 영롱이는?”
멤버들은 안쪽으로 들어와 하나둘씩 소파에 앉았다. 설민의 물음에 태휘는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위층에는 회사 자체 촬영 스튜디오가 마련되어 있다.
“대표님한테 얘기 들었어. 정말 그러기로 한 거야?”
한강이 묻자 태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어차피 기사 터졌으니까. 대표님은 방송국 측이 언론에 흘린 거라 확신하시더라고요.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더는 특종 내줄 수 없죠.”
“촬영하는 거 우린 안 봐도 되나?”
설민은 당장이라도 계단을 뛰어 올라가려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사람 많으면 영롱이 더 긴장할걸. 이따가 모니터나 하자.”
“누가? 천하의 차영롱이 긴장을 해?”
오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영롱이도 방송 쉰 게 자그마치 10년이잖아. 대표님 계시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태휘는 들여다보고 있던 태블릿 피시를 멤버들을 향해 내밀었다.
“우리는 우리 할 일 하자. 공연할 곡 골라 봤으니까 확인해 보고 다른 의견 있으면 내줘.”
벌써 선곡 리스트를 뽑아 왔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태휘의 태도에 멤버들 모두 당황스러워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둔한 한강마저 태휘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 소극적이고 비관적이던 인간이 불과 하룻밤 사이에 적극적이 되었다니? 한강은 태블릿 PC를 건네받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리더님, 술 마신 다음 날 치고 아주 에너지가 넘치시네.”
설민과 오은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피곤해져 입을 다물었다. 아니 형, 저건 에너지 문제가 아니라…… 완전 다른 사람이 된 수준이잖아. 원태휘가 우리를 보고 웃은 게 얼마 만인 줄 알아? 우리의 질문에 저렇게 친절하게 대답해 주던 사람이야?
묘하게 부드러워진 표정과 말투 또한 그들이 그동안 보아온 리더가 아니었다. 촉이 기민하게 발동한 설민과 오은은 차마 말은 못 꺼내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태휘는 그런 멤버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 얘기를 이어갔다.
“맥시멈 열 곡이라고 했으니 몇 곡 더 넣을 수 있어. 여기서 뺄 것도 있을 거고.”
한강은 리스트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네. 히트곡 위주라 팬들도 대중들도 익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깰 수 없던 설민과 오은은 일단 궁금증을 뒤로 하고 회의에 참여했다.
“‘Harmony’도 해야지. 팬송이니까.”
“‘Discovery’는 안 넣어? 데뷔곡이잖아.”
“‘Our Story Begins’를 오프닝곡으로 하면 좋겠다. 웅장한 느낌으로.”
“안무도 가능한지도 봐야지. 오프닝부터 너무 세지 않겠어?”
태휘가 설민을 쳐다보며 물었다.
“오프닝일수록 세게 가야지. 이거 옛날에 콘서트 오프닝으로도 했었지? 그때 안무 살짝 손보면 돼. 완전 빡세게 만들어야지.”
설민은 생각만으로도 흥분되는지 낄낄거렸고, 반면에 한강과 오은은 사색이 됐다.
“민아. 너 빼고 춤 끊은 지 다 10년 이상 됐거든?”
“괜찮아, 괜찮아. 내가 일대일 레슨 해 줄게. 나 목석도 춤추게 만드는 이설민이야.”
또 또, 저 미친 자신감. 몇 년 전에 몸치 연예인들 춤 가르쳐 주는 프로그램 한 번 했다고 으스대는 거지.
“우리도 우린데, 태휘는 괜찮겠어? 수술한 다리 괜찮아?”
“맞다. 태휘 형 사고 났었지!”
“이젠 운동도 그럭저럭 무리 없이 하니까 괜찮아요. 그나저나 라이브는 할 만하겠어?”
태휘가 오은을 보며 물었다. 순간 오은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오은이 정색하자 태휘는 눈을 끔뻑이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가 보컬라인이니까.”
“게다가 이제 보컬과 교수님까지 됐고.”
옆에서 설민이 거들며 놀리는 데도 오은은 어째서인지 머뭇거렸다.
“난 괜찮은데……. 차영롱은 괜찮대?”
“걔가 안 괜찮을 게 뭐야?”
한강이 묻자 오은은 자신에게 집중된 멤버들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그게 아니라, 노래 오랫동안 쉬었으니 하는 말이지.”
“노래는 영롱이뿐만 아니라 우리도 오래 쉬었잖아. 어쨌든 발성부터 보컬 연습은 다 해야지.”
“잠깐, 타임.”
태휘가 말을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설민이 두 팔로 T자를 만들어 회의를 중단시켰다. 설민의 성격상 오늘 느껴지는 이질감의 정체에 대해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눈치코치의 달인 ‘촉’ 이설민 선생의 관찰 결과 태휘의 말 속에서 그 어색함의 이유를 알아챘다.
“왜?”
회의 흐름을 갑자기 끊자 멤버들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고 설민은 팔짱을 낀 채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태휘를 노려보았다.
“원태휘 오늘따라 웬일로 영롱이, 영롱이. 이름을 아주 다정하게 부르네.”
“그럼 영롱이를 영롱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녀석이 돌아오기 직전부터 지금까지 볼드모트마냥 이름 제대로 안 부르고 ‘걔’, ‘얘’, ‘너’ 부르거나 성 꼬박꼬박 붙여서 딱딱하게 ‘차영롱’ 해 댄 것도 잊었냐? 설민은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까 통화할 때 하던 얘기마저 해야겠네.
“너 어제 영롱이랑 같이 있었어?”
취조하듯이 짐짓 날카롭게 묻자 태휘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대답했다.
“영롱이가 집에 데려다줬어.”
“그건 다행이네.”
술 취하면 기절해 버리는 녀석이니. 재결합 앞두고 리더가 비명횡사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영롱이랑 다시 사귀기로 했어. 팀에는 지장 안 줄게.”
“팀에 지장 안 준다니, 그것도 다행…… 뭐?”
한강은 들고 있던 태블릿 피시를 놓칠 뻔하고 오은은 눈을, 설민은 턱을 떨어트릴 뻔했다. 인간아, 넌 무슨 그런 얘기를 스케줄 얘기하듯 태연하게 하니? 멤버들이 한마음으로 경악하여 태휘를 쳐다보는 사이, 연습실 문이 열리고 태휘의 매니저가 들어왔다.
“대표님이 올라와서 모니터하시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