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7. Mute (04:53)
▶
—안녕하세요, 여러분. 차영롱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리죠? 다들 잘 지내셨어요? 저도 잘 지냈어요. 기사를 통해 접하셨다시피…… 저희 STORY 다섯 명이 여러분께 돌아갑니다. 제 소식 궁금하신 팬분들 많을 거라 생각돼서 이렇게 저부터 인사드려요.
좋은 기회 마련해 주신 GBS 측에 매우 감사드리고요. 무엇보다 저희 STORY 잊지 않아 주시고, 관심 가져 주신 많은 분께 감사드립니다. 저희를 통해 행복한 추억 많이 쌓으신 분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곧 만나요! 안녕!
환히 웃으며 손 흔드는 영롱의 모습 위로 떠오른 검은 화면엔 ‘Our Story Re-begins’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K엔터매거진의 안경미 부장은 보고 있던 태블릿 피시를 책상에 엎어 놓고는 다림을 마주 보았다. 다림은 책상 앞에 서서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기도가 효과 있었나 보네?”
비꼬는 듯한 그 말에 다림은 목만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이내 안 부장은 웃음기를 거두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언성을 높였다.
“어쩔 거야, 다림! 지금 네 기사는 순위에도 없잖아!”
“SS 측에서 이렇게 나올 줄 제가 알았나요? 전 저 나름 특종을 잡은 거라고요!”
이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무슨 잔소리를 퍼부을지 예상했기에 다림도 지지 않고 바로 대들었다. 비록 STORY 측의 대응은 예상 밖이었지만.
조금 전 SS엔터테인먼트의 공식 SNS에 올라온 1분 남짓한 영상에 연예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동안 감감무소식이었던 STORY의 메인 보컬 차영롱이 1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온갖 루머가 무색할 정도로 멀쩡해 보였고, 멀쩡한 걸 넘어서 요즘 아이돌 못지않게 반짝반짝 빛나는 외모를 자랑했다. 그 덕분에 다림이 쓴 재결합 기사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묻히고 말았다.
“그게 무슨 특종이야! 기사에 4인인지 5인인지 명시도 안 해 놓고! 차영롱의 합류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지들이 먼저 까게 두지 말았어야지!”
다림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자기 딴엔 영롱의 거취에 확신이 생겼을 때 후속 기사를 내야겠다고 판단했는데, SS 측에서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GBS 측이랑 사전에 협의가 된 부분일지 궁금했다. 그랬으면 정 작가가 어느 정도 언질을 줬을 텐데.
“내가 이러라고 취재 지원해 준 줄 알아?”
안 부장의 호통에 다림은 순간 욱해서 입을 열었다.
“뭐 빵빵하게 지원도 안 해 주셨으면서! 그거로는 차영롱 추적은 턱도 없었어요!”
이 판국에 누구보다 분한 사람은 다림이었다. 10년간 묘연했던 영롱의 행방에 대해 심층 기사를 쓸 계획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갑툭튀 하다니. 뒤통수가 얼얼하고 화딱지가 났다.
정 작가의 말대로 이 업계는 스토리텔링 장사인데, 영롱이라는 와일드카드를 이렇게 써 버린 SS엔터가 이해가 안 갔다. 낚시용 예고도 없이 바로 정공법으로?
하긴 옛날부터 SS엔터테인먼트도 그렇고 STORY도 그렇고, 언론의 수작질에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런 도도한 태도가 그들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긴 했으나 고깝기도 했다. 연예부 기자로서 소속사가 넘겨주는 공식 입장만 옮겨 적는 것보다 비참한 일은 없으니까.
“SS 측에서 더는 개수작 말라고 경고한 거나 마찬가지야. 다림, 너도 심층 기사인지 뭔지 때려치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부장님!”
“제 발로 돌아왔겠다, 공식 채널로 다 오픈한 마당에 더 팔 게 뭐 있다고?”
“STORY 더러 금단의 열매니 뭐니 운운한 건 부장님이었잖아요. 왜 해체했는지, 그동안 차영롱이 어디서 뭐 하고 살았는지 알아봐야죠!”
“지금까지 시간 충분히 줬는데 하나도 못 건진 건 너야. 더는 시간 낭비, 자원 낭비하지 마.”
밀어준다고 할 땐 언제고. 하여간 윗 대가리들 맘 바뀌는 거 진짜 한순간이라니까. 타이밍 놓쳤다 이거지.
“재결합 진행 상황이랑 다른 1세대 아이돌의 행보와 차이점,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게 될지나 파악해서 기사 쓰라고.”
대꾸할 말을 못 찾은 다림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안 부장을 바라보다가 방을 나왔다. 지금 상황에선 대들어 봤자 본전도 못 찾는다는 걸 이곳에서 보낸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았다.
다림이 그동안 하나도 못 건졌다는 안 부장의 말은 틀렸다. 영롱이 지애에게 쓴 편지도 확보해 뒀고 SS엔터에 있던 STORY 회동도 포착했고 잠적 직전 영롱을 알았던 군대 동기의 인터뷰도 땄으니까.
끼 넘치고 재능 있던 영롱이 10년 동안 잠적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다림이 건진 두 가지를 조합해 보면 어렴풋이 짚이는 것도 있었다. 그렇지만 결정적 증거도 없이 자신의 촉만 가지고 상사에게 보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아…… 차영롱…….”
다림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책상에 이마를 쾅 부딪치곤 엎드려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워낙에 혼잣말 대장으로 유명했던지라 같은 사무실의 동료들은 이제 그런 다림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내가 찾아 주고 싶었는데…….”
▶▶▶
<동영상 공유 웹사이트 유뷰(UVIEW) - 실시간 인기 동영상>
★[경]재결합 기념[축]|세기말 레전드 STORY 무대 모음ZIP|NTV★
조회수 54,092회
댓글 784개
----------------- 댓글 보기-----------------
┖ 83HU*: 대박 이차원한계 귀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수*: 쓰 차영롱 공식 영상에서 알고리즘 타고 넘어왔습니다.
┖ Vert*: 어쩜 다들 외모 그대로??? 나이는 나 혼자만 먹었나
┖ 핵노*: 방송사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거 보소
┖ 또로기*: 05:37:00 계오은 애드립 머선129 지린다야
┖ NEVER ENDING STOR*: 세기말 영상 고화질로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ㅜㅜ
┖ 슴살*: 나 스토리 좋아했네... 리버 존잘
┖ 케이팝노*: 재결합할 때까지 여기서 존버하며 예습한다
┖ 김현*: 학창시절에 테이프 늘어지도록 들었는데 이건 아무리 들어도 안 늘어지네 :)
┖ arista*: 대신 이제 데이터가 많이 나가는
┖ 최혜*: 명곡이 이렇게 많은데 활동 기간이 고작 3년이라고???
┖ 본투비얼빠순*: 와 진짜 다 잘 늙었다
┖ 겨울이엄*: 지금 나와도 음원 차트 올킬 쌉가능 개썅명곡들bbb
┖ 시드니쿨*: 90년대 가요 추억팔이 지겹다
┖ Abroad fa*: Thank U NTV for presenting this precious memory to us. I really missed them.
┖ 이야기*: 제발 재결합 무대 추첨 말고 티켓 팔아줘... 오빠들 나 이제 사장이야
┖ 춤신춤*: 이설민은 예능인인 줄 알았는데 춤 간지 작살이네
┖ 조연*: 해체 후 한 번도 뭉친 적 없어서 기대감 MAX
┖ 영롱하*: 영롱아 보고 싶었어ㅠㅠㅠㅠ 돌아와줘서 고마워♡
┖ Sonb*: 잘생긴애옆에잘생긴애그옆에또잘생긴애그옆에잘생긴애옆에또잘생긴애
┖ 럽이*: 이런 곡들 다 작사작곡한 원태휘 천재야 ㅠ
┖ JuneHoli*: 이 영상에서 못 나가겠네... 데뷔 15년 지나서 입덕함ㅠㅠ
┖ 희동*: 내 인생 첫 아이돌... 이 오빠들 때문에 15년째 케이팝 지박령임
┖ 싱싱가요매니*: 다 애기들인데 무대매너 장난없네 왜 레게노인지 알겠다
┖ UNUbo*: UNU 누나들도 재결합해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
.
▶▶▶
영롱의 영상이 공개된 후 연예계와 대중들의 반응은 시끌시끌했지만 당사자인 멤버들은 정작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공개적으로 재결합을 알린 이상 더는 지체해선 안 됐다.
일단 GBS 측부터 상대해야 했고 이 일은 신 대표가 맡았다. 황혜 CP는 본인들이 언론에 흘렸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면서 SS가 아무 상의 없이 영롱의 영상을 올린 일에 대해서는 대놓고 서운함을 표했다.
영롱의 합류 여부를 최대한 오픈하지 않고 관심을 끌어 보려 했던 계획이 물거품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건 멤버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으니 섭섭함 이상의 비난은 하지 못했다. 아마 자기들이 떳떳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비즈니스적인 문제는 신 대표가 도맡아 처리했고 멤버들은 공연 준비에 열중했다. GBS 측은 보안상 더 노출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구체적인 일정은 알려 주지 않았다. 재결합 기념 공연도 사전 신청제로 할지 게릴라 형식으로 하게 될지도 몰랐다.
‘공연 준비만 완벽하게 해 두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유출 문제를 STORY 측에 떠넘기는 핑계가 우습긴 했으나 딱히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재결합 방송은 제작진을 믿고 따라야 했으니까. 멤버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우선 설민은 멤버들과 의논해서 고른 노래들의 안무를 재정비하거나 새로 만들어야 했다. 태휘 역시 회사 소속 엔지니어들과 과거 음원들을 찾아 음질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에 따라 재편곡 또는 재녹음해야 했다.
그런 탓에 멤버들끼리 태휘와 영롱의 두 번째 연애에 대해선 가타부타 얘기 나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럴 만도 했던 게 다시 사귄다면서 일할 때는 전혀 티 내지 않아 그저 동료 사이로만 보였다.
불과 얼마 전처럼 서로 툭툭거리고 기 싸움을 하지 않으니 오히려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졌고 의견 교환도 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사귀라고 할 걸 그랬지?’ 한강과 오은은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물론 설민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안무는 공연용 리믹스 버전 음원이 나와야 완성될 것 같아. 댄스팀한테는 일단 기본 안무 익히라고 해 뒀어.”
멤버들은 태휘의 회사 작업실에서 자신들의 옛날 무대 영상을 보며 안무를 확인하고 있었다. 설민의 말에 한강이 물었다.
“옛날 우리 댄서 형들이랑 안 해?”
“그 형들 다 은퇴한 게 언젠데요. 아니면 나가서 자기 댄스팀 차렸거나.”
옆에 있던 오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이제 여기 댄스팀에 형들은 없고 다 한참 어린애들뿐이야.”
“걔네가 우리 안무 우리보다 더 빨리 익힐 수도 있어.”
설민이 덧붙이자 한강은 놀라워하며 중얼거렸다.
“나 어릴 땐 그 형들 천년만년 춤출 줄 알았는데…….”
“그렇게 치면 나도 차영롱이 천년만년 노래할 줄 알았지.”
갑자기 화살이 소파 끝에서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던 영롱에게로 향했다. 생뚱맞게 자기 이름이 언급되자 영롱은 고개를 들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다들 쟤가 10년 동안 가수 안 할 줄은 꿈에도 몰랐잖아?”
그 말에도 영롱은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어째 멤버들의 수다에도 끼지 않고 유독 조용한 게 평소답지 않았다. 그때 녹음 콘솔 데스크 앞에 있던 태휘가 의자를 돌리더니 영롱과 눈을 마주쳤다.
“영롱이부터 들어가 봐.”
멤버들은 지금 공연에 쓸 음원을 녹음하기 위해 회사에 있는 태휘의 작업실에 모여 있었다. 공연에 쓰이는 건 MR이라고 해도 반주만 나오는 게 아니라 코러스를 위한 더블링1) 작업이 필요했기에 모든 멤버가 보컬 녹음을 해야 했다.
물론 15년 전 활동 때 썼던 음원이 남아 있긴 하다. 하지만 그사이 멤버들의 목소리가 변하기도 했고 옛날 방식으로 녹음한 터라 지금 사용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곡 녹음이 아닌 과거에 수천 번 부른 곡이었기에 하루 동안 각자 연습 후 이곳에 모였다.
“나부터?”
첫 순서로 지목 당하자 영롱은 흠칫 놀라 되물었다.
“처음이 네 파트잖아. 나중에 할래?”
태휘가 묻자 영롱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수다 떨던 멤버들은 금세 각자 들고 온 악보로 시선을 피했다.
영롱만큼 오래 쉰 건 아니었으나 녹음이 오랜만인 건 마찬가지였기에, 본인들도 첫 순서만큼은 피하고 싶어 했다. 그 모습을 본 영롱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아냐. 할게.”
영롱은 경직된 얼굴로 녹음 부스로 향했다. 태휘는 일부러 다른 엔지니어를 작업실에 부르지 않고 홀로 콘솔 데스크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녹음하는 멤버들이 긴장하지 않도록. 자기들끼리 있으면 그래도 한결 마음이 편해지니까.
그럼에도 오늘 영롱은 유난히 굳어 보였다. 평소에 흘러넘치던 여유는 어디 갔을까. 설민은 긴장을 풀어 줄 생각으로 말을 걸었다.
“그래. 백만 년 만에 녹음인데! 역시 메보가 첫 스타트를 끊어 줘야지!”
하지만 영롱은 듣는 둥 마는 둥,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녹음 부스로 들어갔다.
“쟤 웃기네. 오래 쉬었다고 해도 수천 번은 불렀던 노래잖아! 안 그래? 계 교수님?”
설민은 맞장구쳐 주길 바라며 팔꿈치로 오은을 툭 건드렸다. 하지만 어째 녀석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보컬들이라고 다들 예민해진 거야, 뭐야? 아무도 받아 주지 않자 설민은 악보를 보며 멤버별 파트를 확인했다.
사실 메인 보컬의 파트가 제일 많으니 파트가 적은 멤버들 먼저 끝내고 영롱이 맨 마지막에 해도 됐다. 하지만 피차 앞 순서가 부담스러웠고 모처럼 영롱의 노래를 빨리 듣고 싶은 마음에 굳이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영롱은 멤버들이 각자 소리를 내어 연습할 때도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었다.
“맨 처음이고, 오랜만이니까 일단 편하게 해.”
태휘는 영롱이 헤드폰을 낀 걸 확인한 뒤 토크 백(Talk back)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부스 안에서 영롱은 헤드폰을 두 손으로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영롱이 준비될 때까지 태휘는 충분히 기다려 줬다. 옛날엔 녹음실에서 저승사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무서운 프로듀서였는데 그래도 꽤 부드러워졌네. 멤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영롱은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저 새끼, 힘들어 보이는데.”
녹음 부스 안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오은이 중얼거렸다. 영롱은 아직 입도 떼지 않았는데 단번에 불안함을 감지하는 걸 보니 현역 가수에다가 보컬과 교수의 연륜은 허투루 쌓인 건 아닌 듯했다.
웬일로 영롱이 걱정을 다 하나 싶어 한강과 설민은 의아하긴 했으나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본인들 파트를 연습하느라 바빴다.
“전주 처음부터 쭉 플레이할 테니까 편하게 들어와.”
태휘는 반주를 재생하고는 눈을 감은 채 영롱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자신이 쳐다보지 않는 게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도입부 한 마디가 지나가도록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눈을 떠서 들여다보니 영롱은 헤드폰을 쥔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들어가는 타이밍 놓쳤어? 괜찮아. 다시 해 봐.”
태휘는 부드러운 말투로 격려하고는 다시 반주를 재생해 주었다. 이번엔 눈을 똑바로 뜨고 부스 안을 바라봤다. 영롱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헤드폰을 꼭 붙든 채 집중하여 반주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파트 도입부에서 노래를 시작하지 않았다.
나머지 멤버들도 그제야 심각함을 느끼고 허리를 펴 녹음실 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색이 되어 굳어 있는 영롱이 보였다. 태휘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토크 백 마이크를 열었다.
“박자랑 음정 다 안 맞아도 되니까 아무거나 불러 봐.”
“어?”
“네가 부를 수 있는 노래, 아무거나 불러 보라고.”
녹음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결국 참다못한 태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태휘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영롱은 겁에 질린 얼굴로 변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는 태휘를 밀쳐 내더니 도망치듯 녹음 부스를 나왔다.
멤버들이 모두 놀라 벌떡 일어나는 사이, 영롱은 녹음실 구석에 있는 휴지통을 잡고는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회의 때 그랬던 것처럼. 그때처럼 또 숙취? 하지만 영롱은 아무것도 게워 내지 않았다.
태휘를 비롯한 멤버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영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무 놀랐기에, 섣불리 다가설 엄두도 못 냈다. 한참 후에 겨우 숨을 고른 영롱이 뱉은 말은 뜻밖이었다.
“나…… 노래 못 해.”
▶▶
영롱의 말에 멤버들 모두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만 봤다. 저마다 자신이 들은 말이 맞나 의심하는 중이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태휘와 한강은 이해가 안 가는 듯 되물었고 오은은 아무 말 없이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마른세수했다. 설민은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는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영롱의 옆에 따라 앉았다.
“지, 지금만 못 하겠다는 거지? 너무 떨리고 긴장돼서? 그럼 좀 쉬었다 해! 다른 멤버들 먼저 하면 되지.”
등을 토닥이며 달래 주었으나 영롱은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진짜로 노래 못 하게 됐다고. 9년 동안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어.”
“돌아 버리겠네.”
영롱의 말에 오은은 뒤돌아 녹음실 구석으로 가 버렸고 한강은 너무 놀라 입을 틀어막고만 있었다. 등을 토닥여 주던 설민의 손은 공중에서 멈췄다. 그러더니 바로 일어나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욕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태휘는 충격에 머리가 아득해졌는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한 뒤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시간 필요하면 충분히 줄게. 발성 연습부터 다시 하면 돼.”
“계속해 봤는데 안 돼. 목 완전 고장 났어.”
영롱은 여전히 휴지통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말은 멀쩡하게 잘하면서!”
영롱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노래만 하면 성대가 경직되면서 듣기 싫은 소리가 나. 그렇게 된 후로 노래 안 했어.”
“그런 거면 치료는 해 봤어? 병원은 가 봤고?”
한강이 묻자 영롱은 순간 숨을 참았다가 내쉬며 말했다.
“응. 근긴장성 발성장애래.”
그 말에 태휘는 결국 참아 왔던 화가 폭발하며 영롱 앞에 있던 휴지통을 걷어차 버렸다.
“씨발, 넌 그러면서. 뭐? 복귀? 재결합?”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오른 태휘는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영롱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려 하자 옆에 있던 한강이 태휘를 붙잡아 말렸다.
영롱은 눈물을 훌쩍이며 뒷걸음질 쳤고 그 앞을 설민이 막아섰다. 설민 역시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태휘의 상태라면 진짜로 영롱을 때려죽일 것만 같아서.
태휘는 이 모든 상황이 용납이 안 돼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어떻게 가수로서 치명적인 자기 건강 상태를 숨긴 채 동료들에게 당당하게 복귀를 선언하고 재결합을 추진하고 심지어 팬들에게 인사까지 남길 수 있는지?
이게 솔로 활동이라고 해도 말이 안 되는데. 이건 팀 전체에게, 그리고 회사 전체에게 폐 끼치는 무책임한 짓 아닌가? 우리 좆 돼 보라는 건가? 이거 완전히 정신 나간 새끼 아니야?
“넌 끝까지 존나 이기적이네. 어떻게 이런 일을 숨겨?”
“리더야, 진정해.”
영롱은 주먹을 부들거리는 태휘의 모습에 엉엉 울면서 설민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씨발, 뭘 잘했다고 울긴 쳐 울어? 나이를 어디로 처먹은 거야? 이런 심각한 문제를 숨긴 주제에 욕먹고 줘터질 각오도 안 한 거냐고!
저 새끼의 달콤한 말에 속은 내가 등신이지. 사랑이 어쩌고 어째? 나더러는 솔직하라고, 그렇게 진심을 강조하더니. 믿어 달라더니.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겨 놓고, 뭐? 형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옆에서 태휘를 붙들고 있는 한강도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일단 태휘를 진정시키며 그나마 이성이 남으니 대신 영롱에게 물었다.
“너 이런 상태인 거 왜 말 안 했어? 미리 말했으면, 우리한테 상의했으면 치료할 시간 충분히 있었잖아.”
“맞아! 회사랑 방송국 측이랑 이 정도로 진행되기 전에만 얘기해 줬어도……. 이 사단은 안 났지!”
설민 또한 맞장구치며 뒤돌아보았다.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울던 영롱은 눈물범벅된 얼굴을 옷소매로 닦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돌아오면, 다 나을 줄 알았어.”
“이건 또 뭔 소리야?”
설민이 어이없어 하자 영롱은 잔뜩 갈라져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울면 목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는 듯했다.
“병원에서, 그랬어. 이렇게 노래할 때만, 성대가 경직되는 건, 심리적 요인이라고.”
“……그래서?”
“태휘 형이랑, 다시, 시작하면, 다, 나을 줄, 알았다고.”
“진짜, 차영롱. 하…….”
태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게, 목소리, 원래대로, 돌아오면, 내가 노래 못 했다는, 사실도 모르니까…….”
“너 정말 돌대가리냐?”
영롱의 편을 들어주려고 했던 설민도 기가 차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영롱아. 이런 큰일을 앞두고 어떻게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해? 얼마나 큰 피해 줄지 예상 못했어?”
“노래 못 한다고 말하기, 죽기보다 싫었단 말이야!”
목을 쥐어짜듯 영롱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자 설민을 비롯한 멤버들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설민이 말끝을 흐리는 사이 태휘가 한강의 팔을 뿌리치고는 영롱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영롱은 움찔 떨며 설민의 뒤에 피했으나 설민은 더는 막아 주지 않았다. 분노를 넘어 경멸이 가득 서린 태휘의 눈빛이 곧바로 영롱에게 닿았다.
“넌 진짜, 구제 불능이다. 차영롱.”
그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냉랭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영롱은 울먹이며 올려다보았다.
“태휘 형…….”
제멋대로 갈라지는 목소리에 태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에 있는 영롱을 아무렇지 않게 볼 자신이 없었다. 태휘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뒤돌아 버렸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더는 화낼 기운도 없다는 듯이 차갑게 식어 버린 말투에 영롱은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설민은 우선 태휘에게서 떨어뜨려 놔야겠다는 생각에 영롱을 잡아끌었다.
“영롱아, 일단 나가자.”
설민의 손에 이끌려 힘없이 비척비척 작업실을 나가던 영롱은 문을 붙잡고는 멈춰 섰다.
“다 숨긴 건, 아니야.”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있던 태휘가 고개를 들었다. 영롱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태휘를 지나쳐 그 뒤에 시선을 던진 채 말했다.
“개오은은 알았어.”
태휘의 뒤쪽, 작업실 구석엔 영롱 못지않게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오은이 서 있었다. 그제야 태휘는 영롱의 폭탄 발언 이후 오은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라면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 심한 욕을 영롱에게 갈기고 있을 녀석인데 이토록 조용하다니. 확실히 이상했다.
“저 새끼는, 1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영롱은 그 말을 던져 놓고는 작업실을 나갔다. 놀란 설민은 넋 놓고 오은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영롱을 따라나섰다. 개오은 새끼는 태휘와 한강에게 맡겨도 되지만 영롱은 혼자 둘 수 없었으니까.
영롱과 설민이 나간 후 남아 있는 네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오은은 작업실 창문을 깨부수고서라도 도망치고 싶은 표정이었다.
“씨발, 차영롱, 개새끼가.”
오은이 욕을 내뱉는 사이 순식간에 다가온 태휘가 멱살을 잡아 왔다. 눈앞에서 영롱이 사라지자 태휘는 분노가 식기는커녕 그대로 오은을 향해 옮겨갔다.
“태휘야!”
한강이 둘 사이로 달려들어 말렸지만 태휘는 오은을 놓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때리는 참사는 막기 위해 한강은 태휘의 주먹을 붙들고 끝까지 매달렸다.
“계오은, 이 정신 나간 새끼야. 저 자식은 원래 천지 분간 못하는 새끼라고 쳐도, 너까지 어떻게 그래?”
“태, 태휘 형! 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깐 일단 놓고 얘기해!”
사태 파악을 마친 오은은 부인하지 않고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그렇다고 해도 태휘가 쉽게 화를 가라앉힐 리는 만무했다. 멱살을 쥔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고 오은은 목이 졸려 콜록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을…… 니들끼리만…….”
오은이 실눈을 뜨고 태휘를 보니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의 눈빛엔 울분뿐 아니라 비통함까지도 느껴졌다. 어쩌면 오늘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팔에 온 힘을 모아 태휘를 뿌리쳤다.
“아, 좀 놓으라고! 난 저 새끼 이젠 다 나은 줄 알았다고!”
연이은 충격으로 몸에 힘이 풀린 태휘는 뒤로 확 밀려 넘어가고 말았다. 태휘를 붙들고 있던 한강은 넘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두 다리로 버티고 섰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오은을 보며 말했다.
“아까 영롱이가 1년 전이랬지? 그럼 넌…… 그때부터 영롱이 소식 알고 있었어?”
작업실 바닥에 넘어진 태휘는 몸을 일으키며 놀라움에 눈이 커졌다. 한강의 말에 자신 역시 중요한 사실을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오은을 쳐다보자 난처하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하아, 나 미치겠네!”
“네가 더 나쁜 새끼였네. 어떻게 그걸…….”
더는 화낼 기력도 없는 태휘는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앉았다. 한강도 머리가 아픈지 인상을 쓰며 뒤에 있던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기댔다.
“그래. 들어줄게. 설명해 봐.”
태휘가 힘없이 손짓하자 오은은 숨을 고르더니 초조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작년에, 차영롱이 찾아왔어. 우리 학교로.”
오은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해서 누군지 한참을 알아보지 못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차영롱인 걸 알았다.
‘개오은. 부탁이 있어서 왔어.’
“왜 하필이면 너한테?”
말을 끊고 한강이 의문을 제기하자 오은은 자신도 억울한지 울컥하며 말을 쏟아 냈다.
“씨발, 그러니까 말이야! 아마도 내가 보컬과 교수 됐으니까? 그거 알고 온 듯했어. 발성 장애 치료하고 싶다고 잘 아는 의사나 병원 있는지 부탁하더라. 그래서 나도 도움 주고 싶으니까 아는 한에서 다 알려 줬지! 그랬더니 멤버들한텐 죽어도 알리지 말랬어.”
한강은 어이없어하더니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네가 언제부터 영롱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어떻게 영롱이 만난 걸 우리한테 숨겨?”
“그때 걔가…… 나한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라고 했단 말이야. 씨발. 내가 아무리 걔랑 견원지간이라고 해도, 그 정도로 부탁하는데 어떻게 안 들어줘?”
오은은 자기가 말하면서도 치욕스러운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사한 거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나만 알고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땐 목 상태가 이 정도로 심각한지도 몰랐어. 그리고 바로 다시 사라져 버려서…… 이번에 돌아왔을 땐 치료 잘 받고 다 나은 줄로 알았다고!”
태휘는 이제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지난번 4명의 첫 회동 때, 다들 영롱의 행방을 걱정하는데 혼자만 냉정하고 심드렁했던 오은의 태도를.
‘사고 나지도, 죽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꼭꼭 숨은 거면 그것도 꽤 심각한 상황일걸? 연예계에 깊은 환멸을 느껴서 떠났거나 아니면 피치 못할 다른 이유가 생겼을 거라고.’
SS엔터테인먼트 회의실에 영롱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던 오은의 모습도 기억났다. 영롱이 이 사실을 폭로할까 봐 걱정했던 거였다. 게다가 망할 그 호텔에서 마주쳤던 것도.
‘내가 개오은한테 사다 달라고 한 거야. 하다못해 면도기도 없어서, 이것저것 부탁 좀 했지.’
녀석의 말대로 쇼핑 부탁도 했겠지만 그 부탁 중엔 입막음 또한 있었겠지. 태휘는 질투에 눈이 돌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갔다. 이렇게 금방 밝혀질 일을 그렇게까지 숨겨야 했던 이유가.
“그때, 호텔에 갔을 때 나도 궁금해서 꼬치꼬치 물어봤었어. ‘너 진짜 재결합 하고 싶어서 돌아온 거냐, 목은 다 나은 거냐’ 그랬더니 ‘걱정 안 해도 된다, 계속 치료 중이다’라고 했단 말이야.”
오은은 심호흡 하듯 한숨을 크게 한 번 내뱉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 나아가는 단계려니 했지. 나도 성대 결절 걸렸을 때 치료랑 휴식 반복하며 활동했으니까. 노래를 아예 못 하게 된 줄은 정말 몰랐어! 그래서 형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한 것도 이해가 잘 안 됐다고.”
‘알지? 멤버들한테 얘기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특히 태휘 형은 절대로 안 돼.’
▶▶
오은의 말에 태휘는 영혼까지 탈탈 털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차영롱, 이 멍청이가…….
“형들한테 영롱이 목 상태 얘기하면 저 새끼가 나 찾아온 것까지 말해야 하니까……. 그러면 1년 동안 숨겼다고 욕먹을 거 뻔하잖아. 그래서 서로 입 다물기로 한 건데……. 하! 근데 저 새끼가! 저만 좆 될 수 없으니까, 나까지 물귀신 작전으로…….”
“너 그걸 말이라고…….”
오은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고는 억울하다는 듯 호소하자 태휘는 말문이 막혀 고개를 떨궜다. 한강은 그런 태휘를 보고는 오은을 향해 대신 잔소리를 퍼부었다.
“어떻게 그딴 약속을 해? 둘 다 제정신이 아니네.”
“나도 후회돼. 그냥 형들한테 다 말했어야 했는데…….”
그때 한강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소파에 늘어뜨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미심쩍은 눈빛으로 오은을 쳐다봤다.
“혹시 너…….”
“혹시 뭐……?”
“메인 보컬 자리 탐나서 숨긴 건 아니지? 영롱이 소식 아무도 모르면, 네가 그 자리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형!”
오은은 버럭 소리 질렀고 한강은 팔짱을 낀 채 도로 소파에 기댔다.
“아니면 말고.”
“날 뭐로 보고 그래? 내가 저 새끼 재수 없어 하긴 하지만 그 정도 인간 말종은 아니라고!”
오은이 펄펄 뛰며 흥분하자 한강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의 콧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너 처음 오디션 보러 왔을 때부터 메인 보컬 자리에 야망 있었잖아.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무슨 내가 철딱서니 없던 17살 때 그대로인 줄 알아? STORY의 메인 보컬 아니어도 명예라면 충분히 얻었거든요?”
“미안. 너랑 영롱이가 벌인 작당이 너무 철딱서니 없어서. 둘 다 17살인 줄 알았네.”
한강은 태휘처럼 화내진 않았으나 고도의 비꼬기 스킬을 쓰며 기분 상한 티를 팍팍 냈다. 오은이 그런 유치한 동기로 이런 일을 벌였으리라고 진심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만큼 괘씸했기에 녀석이 발끈할 만한 말을 던졌을 뿐.
그도 그럴 것이 믿었던 동료이자 동생들이 이런 일을 숨기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됐으니까. 그럼에도 오은은 끝까지 자기의 억울함을 피력했다.
“차영롱 행방 알면서 말 안 한 건 잘못했어! 근데 이렇게 목 상태 심각한지는 진짜 몰랐다고. 알았으면 나부터 말렸지! 당당하게 가수 복귀하겠다고 돌아온 새끼가 저 지경일지 짐작이나 했겠어?”
한강은 더는 변명 듣기도 지친다는 듯 대충 끄덕거리고는 태휘를 바라봤다. 태휘도 탈진했는지 눈을 감고는 의자 등받이를 최대한 뒤로 젖힌 채 뻗어 있었다.
“태휘야. 듣고 있어? 이제 어쩌지?”
“일단 오늘 녹음은 취소해야지.”
한강은 이번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사달이 났는데 녹음은 역시 무리지.
“그리고 일단 이 일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 회사랑 방송국 측엔 어떻게 말할지 고민 좀 해 보고.”
메인 보컬이 노래를 못 한다는 건 재결합 프로젝트를 전면 중단해야 할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문제였다. 해결 방법이 있을지도 지금으로선 불확실했다. 오늘은 모두 넋이 나가고 말았으니 멤버들끼리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두 사람도 나가 줄래?”
태휘의 말에 한강과 오은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혼자 있고 싶어.”
한강은 아차 소리를 내곤 소파에서 바로 일어났다. 그래, 아무래도 리더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모두 다 똑같이 놀라긴 했으나 이번 일로 누구보다 충격이 큰 사람은 태휘일 거다. 리더인 동시에 영롱의 연인이니.
마지막까지 재결합 프로젝트를 반대했고 그토록 영롱을 밀어 냈었는데. 두 가지 사안에 대해 힘겹게 마음을 바꾸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 속이 어떨지 감히 짐작도 못 하겠다. 한강은 오은에게 나가자고 고갯짓했고 둘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작업실을 나섰다.
“계오은.”
태휘가 지하까지 파고드는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오은은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어?”
“영롱이 목.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도 들었냐?”
“걔가 나한테 얘기했겠어?”
“……됐다. 나가라.”
오은은 평소답지 않게 주눅 들어 축 처진 어깨로 작업실을 나갔다. 한강이 작업실 문을 꼭 닫은 후에도 태휘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 때문에 눈을 뜨면 어지러워 쓰러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분노가 너무 여러 갈래에서 뻗어 온지라 어느 한 가닥부터 잠재워야 할지 몰랐다. 연인으로서 느낀 배신감이 먼저인지 동료로서 갖는 배신감이 먼저인지.
더군다나 자신은 어린 시절 영롱의 목소리에 반한 최초의 팬이자 녀석을 가수의 길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했다. 둘은 오랫동안 한 가지 관계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친구이자 동료이자 프로듀서이자 전 애인이자 현 애인이기도 하니까.
그 복잡성을 인정하고 그 사실이 초래할 다양한 문제를 받아들이기로 어렵게 마음먹었기에 영롱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건데……. 시작하자마자 바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자신의 예상보다 매우 이르게.
그토록 여러 관계를 통해 영롱을 알아 왔던 자신이 녀석의 상태를 단번에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게 첫 번째 충격이었다. 아니. 그런 자신에게 끝까지 사실을 숨긴 영롱의 행동이 더 강한 충격일까?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뭣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는지.
귓가엔 아직도 녀석의 엉엉거리는 울음과 갈라진 목소리가 울려 대는 것만 같았다. 울긴 왜 울어. 사람 마음 갖고 장난친 새끼가 뭐가 그리 억울하다고.
‘나로 살아 봤으면 형을 사랑하지 않기 힘들걸.’
앞뒤가 안 맞는 말만 해대고.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러냐고. 9년 전이랑 하나도 달라진 게 없네. ……잠깐, 9년?
불현듯 머릿속에 조금 전 녀석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줄지어 지나갔다. 당황함과 분노로 놓쳤던 장면이 하나씩 클로즈업되며 느릿하게 스치기도 했다. 그것들 중 영롱이 던졌던 한마디가 순간 고정됐다. 그리고 녀석이 돌아왔을 때 했던 말도.
‘9년 동안 한 번도 불러본 적 없어.’
‘그것부터 묻다니 실망이야, 태휘 형. 9년 만에 보는 건데.’
태휘는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머릿속 필름은 더 오랜 시간을 거슬러 빠르게 되감아졌다. 9년 전. 자신과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녀석은 노래를 불렀는데.
▶▶
설민은 영롱을 데리고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옥상으로 향했다. 흡연실 옆에 있는 옥상 공원에는 사람들 눈을 피할 수 있는 구석진 곳이 있었다.
우선 영롱을 공원 구석 벤치에 앉혀 두곤 자판기로 가서 생수를 하나 뽑았다. 뚜껑을 따서 가지고 있던 손수건에 물을 조금 적셨다. 녀석에게 마시라고 생수병을 건네곤 손수건으로 눈물범벅된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이 나이 되도록 녀석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게도 느껴졌다. 예전에도 한바탕 거하게 섹스하고 나면 허리 아프다, 다리 아프다, 목마르다 칭얼대는 통에 물 갖다 바치고 업어서 욕실 모셔드리고 머슴처럼 수발들었는데…….
그리고 결국 연애는 원태휘랑 하고. 죽 쒀서 개 준 꼴이지. 모처럼 옛날 생각나고 참 좋네? 오늘 일까지 포함해서 자신한테 한 짓 생각하면 화낼 일 천지인데 어깨까지 들썩이며 흐느끼는 녀석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안쓰러웠다.
“그만 울어. 목 안 좋다며. 그러다 말도 못 하게 될라.”
천하의 수다쟁이가 말까지 못 하게 되면 쓰나. 그 고운 목소리로 노래 못 하게 된 것도 내가 다 속상해 죽겠는데.
영롱은 힘겹게 울음을 삼키고는 설민이 건넨 물을 마셨다. 그 모습이 안타깝긴 했지만 아무래도 잔소리를 더 퍼부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슬슬 발동을 걸었다.
“진짜 너 이 정도로 무대책일 줄은 몰랐어.”
영롱이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 하자 설민은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목 아껴야지.”
영롱은 원망스러운 듯 쏘아보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 어플로 메시지를 써서 보여 줬다.
[원태휘처럼 말하지 마.]
설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와중에도 원태휘 생각이냐.
“언제는 태휘가 틀린 말은 안 한다더니?”
영롱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문자를 더 입력했다.
[들을 땐 재수 없고 짜증난다고.]
“웃겨. 너 지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어.”
영롱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 그래서 문자로 치고 있지. 설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영롱을 좋아한다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가수이자 방송인으로서, 또 사업가로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이런 식으로 동료가 뒤통수친 경우는 처음이었다.
물론 아무리 가수라도 건강이나 컨디션 관리에 실패할 수는 있지. 하지만 그 상태를 숨긴 채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건 직무 유기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일할 때만큼은 철저하던 녀석이 이런 짓을 벌인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방치하게 된 건지.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이렇게 될 때까지 치료도 안 하고 뭐 했어?”
영롱은 할 말이 많은 듯 핸드폰을 단단히 쥐었다. 설민은 그 내용을 기대하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화면의 자판 위에 떠 있는 손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 너머 먼 곳을 응시하듯 아련해진 녀석의 눈빛엔 다시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