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9. Solitaire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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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년 5월 -
뿔테 안경을 쓴 한강은 놀라움에 입을 떡 벌린 채 공항을 둘러보았다. 군복 대신 사복 차림의 자신이 아직 낯설었지만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그 어색함도 잊었다.
개항한 지 1년이 갓 넘은 인천국제공항은 듣던 대로 휘황찬란했다. 어느 하나 빠짐없이 신식이기도 했지만 규모 자체도 어마어마했다. 그렇지 않아도 막 전역한 터라 사회의 모든 게 생경했는데 이곳은 무슨 별천지 같았다.
한강은 미국 본가에 가기 위해 체크인을 마치고 짐을 부친 뒤 혼자서 공항을 둘러보고 있었다. 개인 일정이라 매니저 없이 혼자 오긴 했지만 큰 불편은 없었다. 늘 다니던 김포공항이 아니라 조금 헤맨 것 빼고는.
입대 후 대중들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진 탓일까, 돌아다녀도 알아보는 이도 많지 않았다. 멤버들과 함께였다면 분명히 눈길을 끌었겠지만 자기 혼자라 크게 주목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머! 저 사람 리버 아냐?”
“STORY? 진짜 잘 생겼다!”
하지만 주변의 수군거림을 본인만 눈치 채지 못할 뿐이었다.
아직 비행기 시간도 좀 남았고 새 공항 구경도 할 겸 출발층을 둘러보다가 궁금해서 아래층도 내려가게 되었다. 도착층에는 출발층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려 있어서 한강은 반사적으로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입국 게이트 앞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들과 검은 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자세히 둘러보니 프랑스 국기와 프랑스어로 쓴 플래카드를 흔들고 있는 사람들 또한 보였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니 바로 오늘이 프랑스 선수단 입국일이란다.
그제야 한강은 곧 월드컵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지단이나 앙리라도 보는 건가 싶어서 한강도 입국장 주변을 알짱거리고 있었다. 자신처럼 지나가다가 구경할 겸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도 주워들으며.
“프랑스 지난번 9●년 월드컵에서 우승했잖아. 이번에도 우승하려나?”
“우승까진 못해도 탑3에는 들겠지.”
한강은 공항에서 팬들과 기자들의 환영만 받아 봤지 이렇게 누구를 보려고 기다린 적은 처음이라 흥미진진했다. 갓 전역한 입장에서 뭐든 안 재밌겠느냐마는. 그렇게 인파 속에 묻혀 입국 게이트를 응시하고 있는데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지단이나 앙리는 아니었다.
볼캡을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까지 꼈지만 한강은 영롱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입국장 앞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순간 멈칫하는 모습이 영롱이가 확실했다.
다행히 게이트 앞의 군중은 프랑스 선수단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영롱은 빠른 걸음으로 입국장을 빠져나가는 중이었고 그를 알아본 건 한강뿐이었다. 작년 가을에 휴가 나왔을 때 보고 못 봤으니 꽤 오랜만이었다.
한강은 반가움과 동시에 하필 오늘 이곳에서 만났다는 우연에 신기해하며 손을 흔들었다.
“영……!”
저도 모르게 이름을 크게 부르려고 하다가 바로 멈췄다. 아무리 축구 팬들과 스포츠 전문 기자들 앞이라고 해도 녀석이 주목받아 좋을 건 없었다. 솔로 활동을 시작한 건 녀석뿐이라 안 그래도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멤버였다.
한강은 조용히 다가가 말을 걸기 위해 인파 속에서 눈으로 영롱을 계속 좇았다. 그러다가 이내 이상함을 감지했다. 어디를 다녀온 건지 매니저도 없이 혼자였고 손에 아무런 짐도 없었다. 안 그래도 쪼그만 몸은 툭 건들면 쓰러질 것처럼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 많은 사람 중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시끄러워질 텐데 마중 나온 사람조차 없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한강은 인산인해를 비집고 영롱을 향해 움직였다.
“실례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하필 그때 선수단이 도착했는지 장내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대기하고 있던 경호 인력들이 게이트에서부터 공항 외부 출구까지 촘촘히 도열했다. 그 바람에 영롱에게 가려던 길이 막히고 말았다.
프랑스 선수단이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와 팬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가는 동안 영롱은 한강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느덧 출국 시간도 가까워져서 이 소란통에 녀석을 찾는 건 포기해야만 했다.
왠지 모르게 위태로운 모습이 염려스럽긴 했으나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연락해 봐야겠다고 다짐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게 영롱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는 걸 당시에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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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은 한강의 얘기에 놀라서 마시던 커피를 주르륵 뱉을 뻔했다. 두 사람은 SS엔터테인먼트 1층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조금 전 녹음실에서의 충격을 식히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한강은 태휘와 영롱이 헤어졌다던 200○년 공항에서 우연히 영롱을 만난 얘기를 꺼내 놓았다. 만났다기보다는 한강만 일방적으로 본 거였지만.
“형, 그때 영롱이 봐 놓고 우리한테 왜 얘기 안 했어?”
“그러고 바로 미국 가는 통에 깜빡했지, 뭐. 월드컵이라는 특수 상황만 아니었으면 완전히 까먹었을걸?”
오은은 속으로 한강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일에 철저히 무신경한 사람이니까. 그나마 차영롱 일이니 뒤늦게나마 기억 난 거지.
“더군다나 그땐 영롱이가 그렇게 잠적해 버릴 줄 몰랐잖아. 그러는 너는?”
“나 뭐?”
“작년에 영롱이가 찾아온 거 말 안 했잖아. 그게 훨씬 더 심한 일인 거 알지?”
그 말에 오은은 금방 또 의기소침해져 어깨가 축 처졌다. 평소대로라면 절대 주눅들 성격이 아닌데 바로 태도가 바뀌는 것 보니 본인도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알지.”
“진짜 상상도 못 했네. 우리 중 누구한테도 연락 안 했는데. 태휘도 아니고, 민이도 아닌 널 찾아가다니.”
“난 오죽 놀랐겠어?”
오은은 찬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던 한강은 마음속에 아직 배신감이 남았는지 저도 모르게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하긴, 그렇게 서로 못 잡아서 안달이던 새끼들끼리 진짜로 잡아먹은 것부터 놀라웠지.”
“형. 자꾸 남 얘기하듯이 그럴 거야?”
그때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고 한강은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민이야. 영롱이 호텔에 데려다주고 온대.”
그렇게 말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오은을 쳐다보았다.
“영롱이 병원부터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병원 가도 딱히 방법 없을걸.”
오은은 고개를 내저으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영롱이 상태가 정확히 어떤 건데?”
“나한테도 자세히는 말 안 해 줬어. 너무 많이 울어서 성대 고장 났다고만 했지.”
“치료도 바로 안 받았대?”
“응. 그래서 한동안 말도 못 했대. 나중에 말은 겨우 할 수 있게 됐는데 노래는 아직 안된다고 하길래 내가 아는 발성 클리닉 소개해 줬어.”
“그럼 1년 동안 고치지 못했다는 거네.”
“말은 정상적으로 하는 것 보니 구조적인 문제는 없을 거야. 녀석 말대로 심리적인 문제겠지.”
“심리적인 문제?”
“학생들 레슨해 주다 보면 종종 그런 경우 있어. 성대 결절 걸렸다가 다시 회복하는 과정에서 두려움이 생기는 거야.”
오은은 대번에 교수 모드가 되어 진중하게 설명했다.
“한참 쉬었다가 다시 노래하게 되면 걱정부터 들거든. ‘원래대로 노래할 수 있을까?’, ‘목소리가 과연 잘 나올까?’ 그러면 멀쩡한 근육도 긴장하고 목소리도 원래대로 안 나오고.”
“영롱이 10년 동안 노래 안 했다고 했잖아. 그만큼 두려움이 쌓였겠네.”
한강은 이제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때론 정신건강의학과나 심리 상담 치료 권하기도 해.”
“그러니 태휘한텐 더더욱 말하기 어려웠겠네. 우리 활동 때도 태휘가 목 관리 오죽 많이 시켰어야지.”
“그뿐만이 아니라, 차영롱 그 새끼는…….”
오은은 그렇게 말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문득 영롱과 처음 섹스한 날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날 방송국 대기실에서 메인 보컬 건으로 태휘가 영롱을 혼냈었다.
‘리드 보컬, 벼슬 아니야. 정신 차려.’
태휘에게서 그 말을 들은 직후 영롱은 발작하듯 오은에게 달려들었다. 그날도 느꼈지만 차영롱에게 ‘노래’란 태휘에게 부여받은 매우 특별한 것이어서 자신의 존재 가치는 오직 그것에만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세상 자신만만해 보이는 녀석도 사실은 태휘의 ‘인정’에만 목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인정’이 사라지면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는데 그 어림짐작이 맞았다니.
겉으로 보이는 자신감만 넘치지 알고 보면 자존감은 바닥이라는 뜻이다. 혼자 센 척, 잘난 척 다 하더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차영롱. 마음속에 차오르는 이 감정은 비웃음이 아니라 안타까움이었다.
한편 한강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오은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은은 이내 제 생각을 흘려보내고는 말을 돌렸다.
“아마 그 새끼, 내가 보컬과 교수만 아니었으면 안 찾아왔을 걸. 자기의 약점을 단 한 사람에게만 공개하는 셈인데, 그 상대가 나야! 죽기보다 싫었겠지.”
안 그래도 영롱은 그렇게 말했었다. 작년에 오은을 찾아와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으면서.
‘쌤통이다…… 싶지? 축하해. 이제 네가 리드 보컬이야.’
새끼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그땐 농담처럼 말해서 이렇게 심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괜히 센 척한 거였잖아? 만약 이 정도인 줄 알았으면 자신이 직접 클리닉 데리고 다니면서 꼬박꼬박 치료받게 했을 것이다. 태휘나 멤버들에게도 알리고.
“그나저나. 작년에 걔가 나 찾아온 난 뒤에 느낀 건데 잘은 몰라도 10년 동안 꽤 외롭게 지냈나 봐.”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너한테 얘기했어?”
“그럴 리 있어? 그냥 느낌이지.”
그 말에 한강은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 감탄했다. 오은은 그 반응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걔 주위에 사람이 얼마나 없었으면 날 찾아왔겠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싶어 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긴 시간 동안, 걔한텐 우리가 전부였던 거야.”
십여 년이면 새로운 인연을 수없이 만들고도 남을 시간이다. 하지만 영롱은 자신의 약점을 죽기보다 밝히기 싫었을 상대, 오은을 찾아왔다.
그 말은 곧 녀석이 궁지에 몰렸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쩌면 영롱의 세계는 더 확장되지 않은 채 STORY 시절에 멈춰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면 좋으냐.”
“우선 방송국 측에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방송국뿐만 아니라 대표님도 아셔야 할 텐데.”
오은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재결합 이대로 쫑 나는 건가.”
“일단 기다려 봐. 태휘가 생각이 있겠지.”
한강의 말에 오은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곤 말했다.
“……태휘 형이 과연 생각할 이성이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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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인간으로서 최악이야. 영원히 꺼져 버려.’
‘진짜 구제 불능이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영롱은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아직은 저 벨소리보다 꿈에서 들은 태휘의 목소리가 귓가에 더 생생히 남았다.
내가 인생을 막살기는 했나 보네. 보통 사람이라면 저런 말 살면서 한 번 들을까 말까일 텐데 두 번이나 들었으니. 더군다나 같은 상대에게.
영롱은 침대에서 힘없이 몸을 일으킨 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커튼을 쳐 둔 탓에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틀 동안 나가지 않고 잠만 잤더니 시간관념이 엉망이었다. 9년 전 그날들처럼.
호텔 침실 어디에 핸드폰을 던져두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벨소리는 무심히 꺼졌다. 영롱은 폰을 찾을 생각도 않고 울대뼈부터 매만져보았다.
최근 연달아 심하게 우는 바람에 목이 많이 부은 느낌이었다. 영롱은 응접실로 나와 커피포트의 물부터 끓이고 약병을 집어 들었다.
솔직히 이제 약의 효과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약을 챙겨 먹어 봤자 노래를 못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약을 삼킨 영롱은 이 넓은 방에 홀로 있다는 적막감을 견디지 못하고 TV를 틀었다.
밤마다 잠들기 전에 TV를 틀어 놓는데 야속한 호텔 시스템은 1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꺼지게 설정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잠이 들 때까지 리모컨을 계속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얼마 전 원태휘의 집에서 잠들었을 때 스스로 신기했다. 모처럼 술을 많이 마시기도 했지만 남의 집 침대에서 그렇게 곯아떨어질 줄이야. 신경안정제 없이 이렇게 푹 잔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심지어 같이 잔 것도 아니고 태휘는 소파에서 재운 뒤 자신만 혼자 침대에서 잤을 뿐인데. 그저 원태휘의 체취만으로 편안해졌던 걸까. 그 탓에 헛된 기대감만 더 높아진 건지도 모른다. 그의 곁이라면 다시 노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멤버들은 무책임하다며 힐난했지만 영롱은 왕자님의 키스로 모든 게 해결되는 마법 같은 엔딩에만 매달렸다. 왜냐하면 그런 기적이 아니고서야 이 저주를 풀 방법이 없었으니까.
‘이제 성대에 염증이나 혹은 없어요. 이비인후과적으로 권해 드릴 치료도 처방해 드릴 약도 더는 새로운 게 없습니다.’
‘그럼 전 왜 여전히 노래를 못 하는 거죠?’
‘무리하지 마시고 최대한 스트레스를 줄이라고밖에 말씀드리지 못하겠네요.’
아무 일도 안 하고 쉬고 있으니 이보다 더 무리 안 할 수는 없는데. 게다가 노래 못 하는 게 제일 큰 스트레스인데 어떻게 스트레스를 줄이라는 건지. 그렇게 병원에 발길을 끊은 지도 한참이 됐다.
멤버들은 이렇게 될 때까지 치료도 하지 않고 뭐 했냐고 따졌지만 처음 1년은 노래를 못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때는 노래를 부를 시도조차 안 했으니까.
보스턴에서 귀국한 후 한동안은 집에 처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매일 울고 술 마시고 의미 없이 밤을 지새우기만을 반복했다. 그렇게 모두가 축구에 열렬히 환호하고 목청껏 응원하던 200○년 여름, 영롱은 목소리를 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솔 대표는 2집 앨범을 내자고 끈질기게 설득했고 영롱은 일단 목 상태를 숨긴 채 못 내겠다고 버텼다.
시간이 지나고 관리를 전혀 안 해 목이 상하긴 했지만 말하는 목소리는 어느 정도 나오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노래 부를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중에 든 생각인데 이때쯤 바로 치료를 시작했으면 지금 이 지경까진 이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도무지 노래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마 태휘를 향한 원망과 저항심이 8할이었을 거다. 그땐 태휘에게서 받은 것들을 버리고만 싶었다. 반지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반지는 그럴 듯했지만 목소리는 본인의 타고난 재능이었음에도 영롱은 그걸 몰랐다. 태휘가 발견해 주기 전에는 몰랐던 재능이니 마치 그가 부여해 준 것처럼 느껴졌다.
어릴 땐 그저 태휘가 칭찬해 주는 게 좋았다. 그래서 더 칭찬받고 싶고 조금 더 잘하고 싶고 그렇게 계속 연습하다 보니 자신감도 생겼다.
동시에 사랑에 있어서도 중간에 엇갈림이 있긴 했지만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그토록 원하고 바라던 태휘를 쟁취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영롱은 스스로 이런 질문을 했다. 태휘 형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 목소리가 사라져도 과연 날 사랑할까? 갑자기 툭 튀어나온 생각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회피해 온 둘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 의문에 가까웠다.
태휘는 지금껏 영롱이 만나 왔던 남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자신이 느끼기에는 영롱의 육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합숙했던 시절 한방까지 썼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건, 워낙 어렸을 때부터 봐 왔기 때문일까?
영롱은 태휘를 원하면서도, 항상 의문이었다. 결국, 그가 자신에게 반한 이유는 목소리일 거라고 혼자 단정 지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목소리에 집착할 리가 있겠어?
하지만 영롱은 중요한 사실을 놓쳤다. 아무리 오랫동안 만나고, 자신이 태휘에 관하여 잘 안다고 자신할지언정 정반대 부류의 인간을 이해하기는 역부족이란 걸. 이해의 부족은 곧 소통의 한계로 이어졌다. 둘의 이별은 영롱의 섣부른 단정이 몰고 온 나비효과였다.
영롱은 보스턴 바닷가에서 그 일을 얘기했을 때 그렇게까지 화낼 줄은 몰랐다. 화를 내더라도 분노의 대상이 준원일 줄로만 알았지. 어쩔 수 없던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 주고, 연인을 혼자 남겨 두고 매정하게 유학을 가 버린 본인을 탓할 줄 알았다.
그래서 영롱은 태휘가 자신을 붙잡으리라 믿었다. 거기다가 극적이고도 낭만적인 감성까지 한 스푼 섞었다. 반지를 버리면 바다에 뛰어들어 그 반지를 다시 손에 끼워 주며 사과할 거라고.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자기도 따라 반지를 던질 줄이야.
예상한 시나리오대로 그가 행동하지 않자 영롱은 고장 나고 말았다. 날카로운 말들과 이별 통보에도 놀랐지만 태휘가 자신의 예측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나는 이 남자를 완벽히 안다고 자신할 수 없구나.
그렇게 십여 년 전 일을 돌이켜보니 태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나 스스로 하은 누나를 그토록 질투하고 있던 것도 몰랐지. 그것 때문에 눈 뒤집혀서, 내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의심했으니.
방 안 어딘가에서 다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영롱은 침실로 돌아와 화장대 옆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 화면엔 설민의 이름이 보였다. 영롱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목을 가다듬은 뒤 전화를 받았다.
“왜?”
가라앉긴 했지만 목소리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 태휘한테 연락 없었어?
설민이 다짜고짜 묻자 영롱은 괴로운 현실을 자각해야 했다. 그러게. 아무 연락 없네.
“그 인간이 과연 나한테 연락을 할까?”
9년 전 타지에서 자신을 매몰차게 내쫓았던 남자였다. 그리고 그동안 찾지도 않았지.
-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태휘랑 연락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말이야.
“집에 있겠지.”
- 매니저가 확인했는데 집에도 없대. 혹시나 너한텐 하지 않았나 해서.
“안 했어.”
이설민 씨가 나보다도 우리 관계에 긍정적이시네. 하긴 이 지랄 같은 연애사를 세세히 알지 못하니 당연한 건가.
- 너한테까지 전화 안 했으면 진짜 답 없는데……. 만약 연락되면 알려 줘!
영롱은 급하게 끊어진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태휘의 잠수라니, 이건 좀 신선하네.
흔치 않은 일이긴 했다. 고지식한 천성 탓에, 무계획적이고 무책임한 짓이라면 바로 두드러기가 나는 인간이었으니까. 평소대로라면 지금쯤은 어떤 결정이든 내렸어야 했다. 재결합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갈지 멈출지에 대해서.
12년 전 해체할 때 마저도 그는 리더로서 속전속결로 용단을 내렸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도 다분히 들어간 결단이었지만. 이대로 팀을 지속시키면 안 된다는 나름대로 냉정한 판단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은 그때보다 더 스케일도 커지고 파급력도 더 세진 상황이었다. 기사도 났겠다, 팬들에게 공지도 했겠다. 회사와 방송국 모두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판국에서 리더가 잠수를 타다니. 누가 봐도 원태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물론 이 일에 있어서 영롱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를 그답지 않게 만든 게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애초부터 돌아오자마자 태휘에게 솔직하게 얘기했어야 했다. 사랑과 믿음 운운하기 전에 숨김없이 모든 걸 털어놨어야 했다.
그럼에도 영롱은 처음으로 두려웠다. 기억 속 그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도 차갑고 무서웠기에. 노래를 못 하게 됐다고 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노래도 못 하는 주제에 뭐 하러 돌아왔냐는 경멸 어린 그의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왕자의 키스를 받아 마법이 풀리면 동화 같은 해피엔딩만 기다릴 줄 알았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도 되찾고 왕자도 차지하고 꿩 먹고 알 먹고.
하지만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마법 따윈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영롱 자신이 동화 속 착한 공주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욕심이 컸구나.
“요령 없이 뻣뻣하기만 한 원태휘는 모로 봐도 곱게 자란 왕자님이 맞는데.”
그나저나 우리 왕자님이 기별도 없이 어딜 가셨을까. 영롱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걱정에 폰을 들어 태휘의 번호를 눌렀다. 역시나 왕자님께선 전화를 받지 아니하셨다. 핸드폰 모서리를 화장대에 대고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욕실로 향했다.
어디로 찾아가야 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왕자님 실종 사건의 원인 제공자로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원태휘의 연락 두절이라면 이기지 못할 정도로 진탕 술을 마시고 어디서 비명횡사 당하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였으니까.
샤워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서려는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라면 최고의 시나리오인데? 영롱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확인도 안 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게 왜 전화도 안 받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태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멤버들도 아니었고 처음 보는 남자였다. 검은 정장 차림에 단정하게 넘긴 머리, 큰 키와 다부진 체격.
“누구시죠? 제가 지금 왕자님, 아니 누굴 좀 찾으러 가야 해서 좀 바쁜데…….”
딱딱한 얼굴의 남자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이내 그가 옆으로 비켜서더니 뒤에 가려져 있던 우아한 단발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형수님?”
정확히는 태휘의 형수님이었지만.
“오랜만이에요, 영롱 씨.”
태휘의 형수, 즉 최세나를 만나는 건 그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고 12년 만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모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어엿한 태양그룹의 대표이사로 종종 매스컴에 오르내리곤 했으니까. 아마 가수 활동을 그만둔 영롱보다 더 많이 언론에 노출됐을 거다.
“들어가도 돼요?”
“네. 대신 저 친구는 말고요.”
영롱은 조금 전 문 앞에 서 있던 수행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호텔 방에 다른 남자를 들이면 신경 쓰는 사람이 있어서요.”
과연 아직도 신경 쓸지는 모르겠지만. 영롱이 어깨를 들먹이며 말하자 세나가 수행원에게 눈짓했다. 그가 한 걸음 물러서며 객실 문을 잡았고 그사이 세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응접실을 이리저리 살피는 뒷모습을 영롱은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긴 한강 전망이 멋진 객실인데. 왜 이러고 있어요?”
창가에 다가간 세나는 답답하게 쳐져 있던 커튼을 걷었다. 그제야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방 안 가득 쏟아졌다. 영롱은 눈을 찌푸리며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세나는 사양하고는 바로 소파에 앉았다. 발걸음을 돌린 영롱은 바로 따라 앉으며 제일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저 이 호텔에 있는 거 멤버들밖에 모르는데 누가 와서 놀랐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 중 세나와 연관 있는 사람은 태휘뿐이고 태휘는 영롱이 있는 곳을 남한테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아니, ‘그 가족’이라면 더더욱.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그래도 제 호텔에 묵고 있는 걸 아는데 한 번은 들러야 할 것 같아서.”
영롱은 순간 헛웃음이 턱 나왔다.
“아, 이거 형수님 호텔이었어요?”
“인수한 지 몇 년 됐죠. 그렇다고 투숙객 정보 유출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렇게 안 거라면 체크인했을 때부터 알았겠죠. 최근 원태휘 지켜보다가 알게 됐을 뿐이에요.”
지켜봐? 정보 유출이나 가족 사찰이나 둘 다 비슷하게 걱정되는데요.
“평소에 태휘 형, 감시하세요?”
“가끔요. 보호 차원에서.”
그 말에 영롱은 곧바로 태휘의 직계 가족들을 떠올렸다. 그놈의 갑갑한 집구석은 여전한 건가? 지금 아들 나이가 몇인데? 아니, 그것보다도.
“형수님이 태휘 형네 어른들 수족이 될 위치는 아니시잖아요.”
“물론이죠. 집안 어르신들은 몰라요. 그이는 더더욱 모르고.”
“그럼 무엇으로부터 태휘 형을 보호하시는 건데요?”
그 물음에 세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도해 보이기만 하던 그 얼굴에서 어떤 인간적인 기색을 읽은 영롱은 조금씩 경계심을 풀었다.
“질문을 바꿀게요. 왜 태휘 형을 보호하시는 거예요?”
“왜냐고 묻는다면 최소 세 가지 이유가 있죠. 첫째, 나한테 그럴 능력이 있고. 두 번째, 걱정되니까.”
세나의 얘기가 흥미로운지 영롱의 눈빛은 점점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세 번째론, 태휘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 말에 영롱이 뭐라고 입을 열기 직전 세나는 바로 말을 덧붙였다.
“영롱 씨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영롱은 세나가 이미 자신과 태휘의 역사를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태휘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원태성, 진짜 장가 잘 갔네.
영롱은 태휘의 식구들이라면 진절머리가 났지만 세나는 그 느낌이 달랐다. 자기가 없는 사이 집안에 태휘의 편이 한 명이라도 생겼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중에도 영롱은 소파에 진득이 앉아 있지 못한 채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나저나 그냥 저 보러 오신 건 아닐 테고. 왜 오신 거예요? 저 빨리 나가 봐야 해서. 시간이 없는데.”
“그 시간 저한테 조금만 써요. 훨씬 절약해 줄 테니까.”
단호한 세나의 말에 들썩이던 엉덩이가 바로 얌전해졌다. 그 모습에 보더니 세나는 피식 웃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손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보여줄 게 있어요.”
세나는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더니 건네주었다. 영롱은 열려 있던 핸드폰 사진첩에서 사진 몇 장을 찬찬히 넘겼다.
그 사진첩 속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바로 영롱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남이 찍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기에 낯선 구도였다.
아마도 최근 5~6년 사이의 모습인 듯했다. 영국에서 지냈을 적에 사진도 있고 홍콩에서 머물렀을 때 사진도 있고 호주에 갔을 때 사진도 있고. 사진에는 영롱뿐만 아니라 당시 만나던 남자의 모습도 함께 담겨 있었다.
“사실 몇 년 전에 영롱 씨 찾았어요.”
영롱은 그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투숙객 정보 유출이나 가족 사찰이 문제가 아니었네요? 그렇게 따지려다가 일단 속으로 삭이고 마저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태휘한텐 사실대로 전하지 못했어요. 못 찾았다고만 했지.”
“알 만하네요.”
영롱은 사진을 들여다보곤 단박에 수긍했다. 전역 후 몇 년간 이 나라 저 나라 돌며 남자 갈아치우는 걸 근황이랍시고 전해 주긴 좀 그랬겠지. 원태휘가 그 소식을 접했다면 차라리 몰랐으면 싶었을 거다.
“잘 지내고 있다는 거 아니까. 생사 확인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개오은 수명이 조금 늘어나는 소리가 들리네. 내 행방 알면서 숨긴 게 본인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면 안도하겠지.
“쭉 지켜본 건 아니에요. 영롱 씨가 거주지를 자주 옮기는 탓에 번번이 놓쳤죠. 작년에 귀국했던 것도 몰랐고.”
“형수님께서 심심해서 국제적으로 저 사찰하신 건 아닐 테고…….”
이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영롱은 도무지 진지해지지 못했다.
“뻔하잖아요.”
속내까지 꿰뚫어 보는듯한 세나의 날카로운 눈빛에서 그 말의 의미를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태휘 형이 절 찾아 달라고 했다고요?”
세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평소에 사적인 부탁 전혀 안 했으니까 좀 놀랐지. 영롱 씨 관한 일이 저한테 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었어요.”
영롱은 지난번 태휘의 집에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것만 바랐어. 너랑 나 평생 남남으로 살아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 달라고.’
진짜 웃기는 남자야. 이렇게까지 날 찾았단 얘기 본인 입으로는 죽어도 안 하지. 얘기하면 내가 홀랑 넘어간다는 것도 다 알면서.
“알다시피 원태휘, 겉으론 어딜 봐도 아쉬움 하나 없이 살았잖아요? 아이돌 그룹으로 정점 찍고 솔로 가수와 프로듀서로서도 성공하고. 가족들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영롱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 바라던 걸 다 얻었구나.
“그런데도 계속 뭔가 부족해 보였어요.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과거 어딘가에 두고 온 사람처럼.”
그 말에 영롱은 끄덕이던 고갯짓을 멈췄다.
“그래서 몰랐을 땐 소개팅도 몇 번 해 줬어요. 나 때문에 거절도 못 하고 억지로 만났었다는 거 뒤늦게 알았고.”
“…….”
“알고 보니, 영롱 씨였더라고요. 원태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세나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다 보니 작지만 중요한 의문이 하나 들었다.
“그런데 태휘 형이 어쩌다 처음 제 얘기를 꺼냈어요?”
STORY 멤버조차 아무도 모를 정도로 둘의 관계를 꼭꼭 숨겼는데. 원태휘 성격에 남도 아닌 형수님께 다짜고짜 영롱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을 리 없었다. 세나는 감탄스런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눈치가 정말 빠르네.”
“제 뒷조사한 것까지도 알았는데 얘기 안 해 주시면 안 되죠.”
영롱은 그 말을 하면서도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어서 바로 되물었다.
“설마 권준원 때문이에요?”
오래전 기억 속엔 권준원이 세나를 빌미로 협박했던 일이 남아 있었다. 그 이후, 그가 정말 실행에 옮긴 걸까? 그랬다고 하기엔 너무 잠잠하게 지나갔는데?
“아…… 권준원…….”
세나는 그 이름을 오랜만에 듣는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볍게 짚고는 말했다.
“그 인간이, 내가 두 사람에게 진 빚이지.”
“저희 둘 관계, 준원이 형 통해서 알게 되신 거 아니에요?”
“내가 납득할 만큼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영롱 씨 집적거린 일도 말해야 하는데? 걔는 나한테 자기 치부를 스스로 노출할 만큼 멍청한 놈은 아니에요.”
세나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영롱은 점점 흥미로워졌다. 그런데 어떻게 다 알고 계시지? 한편 세나는 혀끝을 차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그 정도의 쓰레기인 줄도 몰랐지만. 동창 중에서도 여자애들한테는 끝까지 매너 있게 굴었거든.”
영롱이 알기로는, 몇 년 전 권준원은 어느 대기업 총수의 딸과 결혼 생활 중, 외도가 발각되어 파혼당하고 국내에서 더는 연예계 활동을 못 하게 됐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가 여자 동창들에게 잘해 준 건, 빵빵한 집안 하나 잡아서 결혼하려는 불순한 목적이 있었겠지.
아무튼, 영롱이 오랫동안 해외 생활을 한 데에는 권준원을 피하려는 의도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 후로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으나 연예인 활동을 하며 그를 마주치기 싫었고, 그의 협박이 아직도 유효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탓에.
권준원이 국내 연예계에서 퇴출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야, 영롱도 한국에 돌아올 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웠으니까. 그런데 그 때문이 아니라면 권준원의 실체를 언제 알게 되신 거지? 영롱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그럼 정말로 태휘 형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고요?”
“정확히는 무의식중에 흘린 거지만.”
“무의식중? 술기운에요?”
그거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평소보단 솔직해지는 인간이니…….
“아니. 교통사고 때.”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오자 영롱은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아 순간 미간을 좁혔다.
“태휘가 그때 얘기 안 했어요?”
영롱은 지난번 태휘와 재회 후 처음으로 함께 이 호텔 라운지에서 밥을 먹으며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교통사고 난 적 있어. 한 3년 전쯤.’
아, 그거. 눈길 사고였다고 했던가.
“교통사고 심하게 났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그때 거의 죽을 뻔했거든.”
세나는 그 당시 상황이 생각났는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내가 동해 리조트 오픈 때문에 가 있어서 병원 응급실에 제일 먼저 도착했어요.”
동해? 사고가 동해에서 났던 건가? 궁금했으나 그의 말을 중간에 끊을 수 없어서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급히 수술실로 옮겨지는 와중에 계속 중얼거리더라고요.”
‘영롱이…불러 줘요……. 차영롱…… 좀…찾아 주세요…….’
“그러고 바로 의식 잃었어요.”
“……수술 후에도 찾던가요?”
“나중에 수술 잘 마치고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땐 아예 기억을 못 했어요. 그래서 내가 확인차 물었죠. 영롱 씨 찾아 달라는 부탁 아직 유효하냐고.”
“형이 뭐랬어요?”
“자기가 그 말 했다는 거 알고 엄청 당황하더라고요. 사고 직후 그 자리에 있던 게 나라서 천만다행이었지.”
영롱도 같은 생각이었다. 무의식중에 흘린 그 말을 집안의 다른 가족이 들었다면 꽤나 심각했을 거다. 죽음 문턱에서 애타게 찾는 사람이 다름 아닌 차영롱이라니. 대체 무슨 사이길래?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의심스러웠겠지.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어요. 말이 잘못 나왔다거나 다른 거짓말로 둘러댈 줄 알았는데 안 그러더라고요.”
‘네. 찾아 주세요.’
“사지(死地)까지 갔다가 돌아오니 깨달은 거겠죠. 만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사람이 있는데, 살면서 무슨 일이 닥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걸.”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라니까, 원태휘. 그랬으면서 왜 아무것도 안 한 척 숨기고. 그리워한 마음 표현 안 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꼭꼭 숨겨두는 건데? 서재에 걸어둔 액자나 작업실에 놓은 튤립처럼.
그렇지만 뒤늦게라도 자기를 찾았다고, 그간의 냉정함을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죠? 영롱이 그렇게 말하려 입을 떼려는데,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는지 세나가 선수 쳐서 말했다.
“아, 그리고 그런 말도 했지. 나중에 상태 좀 나아졌을 때쯤.”
‘……죄송한데. 형수님 친구 권준원 있잖아요.’
‘준원이는 갑자기 왜?’
‘그 새끼 제가 좀 조질게요.’
▶▶
전혀 상상도 못 한 얘기에, 영롱은 놀라서 멍하니 세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영롱이 그러거나 말거나, 세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핸드폰만을 들여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 지금 전혀 이해가 안 돼요.”
한참 후에야 영롱이 반응하자 세나는 힐끗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태휘한테 마저 들어요.”
그 말에 영롱은 답답하다는 듯 입을 삐쭉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태휘 형은 저한테 이런 얘기 절대 안 해 주니까 그렇죠.”
“하지만 누구보다 잘 알죠? 구구절절 말 많이 할수록 진심이 흐려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잖아.”
태휘의 편을 드는 듯한 세나의 발언에 영롱은 한편으론 동의하면서도 별안간 욱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말문 터지면 할 말 못 할 말 얼마나 잘하는데요! 특히 남의 마음에 비수 꽂을 때는 말 잘만 하던데!”
영롱이 애처럼 투덜대자 세나는 차분히 받아넘겼다.
“그럼 그 비수가 진심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그 말에 영롱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일순 정신이 얼얼했다. 한편 세나는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영상 통화를 걸었다.
“오늘 원태휘의 대변인으로 여기 온 건 아니에요. 그저 살짝 껴들어서 빗장만 열어 주려고.”
그러고는 전화가 걸리는 동안 영롱을 쳐다보며 말했다.
“호텔 정문에 기사 대기 시켜 놨으니 그 차 타고 가요.”
앞뒤 잘라먹고 명령조로 말하자 영롱은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왕자님 찾으러 간다면서. 일종의 호박 마차라고나 할까?”
이 동화, 인어공주인 줄 알았는데 신데렐라였어? 아니, 처음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아니었나?
“어디로요?”
그때 세나가 핸드폰을 영롱의 눈앞에 내밀었다. 영상 통화 화면에는 해변을 걷고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틀림없는 태휘의 뒷모습이었고 얼핏 보니 그가 있는 곳은 바다 같았다. 아마 세나의 수행원 중 누군가가 멀찍이서 실시간으로 찍고 있는 듯했다.
“지금 동해에요.”
“형 저기서 뭐 한대요?”
“직접 가서 물어봐요.”
세나는 전화를 끊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흔들자 영롱은 뒤늦게 미안해져 따라 일어섰다.
“죄송해요. 다 큰 시동생 연애사로 신경 쓰게 해드려서…….”
“안 그래도 앞으로 더는 신경 안 쓰려고요. 오늘 괜히 다 털어놓겠어? 어서 가 봐요.”
세나가 응접실을 가로질러 나가는 동안 영롱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걸 알아챈 세나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지금 불쑥 든 생각인데. 제가 가는 게 맞을까요?”
그 말에 세나는 이제 와 무슨 소리 하냐는 듯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태휘 형 저한테 화 많이 났어요. 꼴도 보기 싫다고 하고.”
“그 말 진심 아니라고 치부하기로 한 줄 알았는데.”
“하지만…….”
웬일로 영롱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불과 몇 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봐요. 나만 아니었으면 벌써 달려 나갔을 거잖아. 화난 거 알면서도 걱정돼서.”
“그랬다면 혼자서 못 찾고 포기했겠죠.”
세나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갈지 말지, 영롱 씨 마음대로 해요.”
“지금껏 전부 제 마음대로 했거든요. 그런데 번번이 그 결과가 나빴으니까. 더는 마음대로 하면 안 되나 싶어요. 절 기다리지 않으면요? 또 꺼지라고 하면? 노래도 못 하는 새끼는 필요 없다고 하면?”
“나한테 답까지 바라는 거예요? 어차피 정답은 없어요.”
영롱은 자기답지 않게 망설이고 있었다. 자기를 잊은 채 살았던 태휘의 인생에 괜히 돌아와 다시금 그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평소의 영롱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태 본인의 생각대로 행동했다가 모든 걸 망쳐 버렸으니 두려울밖에.
영롱은 저번 회의 때 태휘의 말을 반추하고 있었다. 그날 그가 했던 말은 자신들의 관계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STORY만큼은 그저 추억으로…… 남아 달라는 바람이 있잖아요. 어쩌면 그게 제일 아름다운 그림일지도 몰라요.’
‘의지와 다짐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다들 잘 알지 않아?’
어쩌면 그때 형은 이 모든 상황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STORY의 재결합도, 우리의 재결합도 실패할 거라고.
세나는 영롱을 마주 본 채 팔짱을 꼈다. 이 말을 꺼낼까 말까, 한참 동안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본 바로는 영롱 씨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던데.”
영롱은 저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연예계 생활 접고 잠적했을 때요.”
아아, 그때. 영롱은 짐짓 모르는 척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했다. 세나는 영롱의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고는 피식 웃었다.
“그거 알아요? 태휘가 영롱 씨 찾아 달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끌고 올 심산은 아니었어요.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은 이해 가면서도, 영롱 씨의 인생이니까 함부로 개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
나름 사생활 보호해 준 거였군. 고맙게도. 하긴 무작정 끌고 오면 마피아랑 다를 게 뭐야?
“그때 영롱 씨 누가 봐도 잘 지내고 있더라고. 곁에 원태휘가 없다는 걸 빼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아무리 사찰해도 그 사람의 정확한 속사정까진 모르겠지.
“태휘 따위 완전히 잊고 행복하게 살고 있단 확신이 들면 그때 말할 생각이었어요. 잘 지내고 있으니 더는 찾지 말라고.”
“그런데 제가 돌아온 거네요.”
“그래서 놀랐지. 안락한 삶 버리고 힘든 가시밭에 돌아온 셈이니까. 가뜩이나 더 살벌해진 연예계. 거기다가 멤버들과의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애인과의 오해도 풀어야 하고. 목 상태도 극복해야 하고.”
마지막 문장에 영롱은 놀라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저 노래 못 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어림짐작이었는데 맞은 모양이네. 지켜보는 몇 년 동안 노래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냥 찍으신 거라고요?”
“그리고 태휘가 약도 알아봐 달라고 했고. 조사해 보니까 신경안정제와 근이완제를 함께 복용하는 경우는 운동선수 아니면 발성장애를 위한 처방이 대부분이더라고요. 이거 역시 확실하진 않아서 태휘한텐 말 못 했지.”
약까지 알아봤다니. 그 정도면 눈치챌 법도 한데 노래를 못 한다는 상황은 단 1퍼센트도 생각하지 않았구나. 원태휘.
“그리고 오늘 혼자 동해로 달려간 것도. 뭔가 심란한 일 생기면 거기 가곤 했으니까.”
역시 대기업을 이끄는 수장답게 감이 남다르시네. 그리고 그 감으로 알게 된 사실을 함부로 떠벌리지 않는다는 점까지도.
“영롱 씨가 연예계 떠난 지도 10년인 데다가 그사이 쌓인, 직면해야 할 골칫거리도 많잖아요. 그런데도 돌아와야 했다면 꽤 중요한 일 때문이겠죠.”
“전 다른 거창한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영롱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뒤 머뭇거리며 말했다.
“다시 예전처럼 지내고 싶었어요. 태휘 형이랑. 노래하면서.”
“오직 그걸 위해서 누리던 걸 다 버리고 온 거네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날 원망하고 경멸할 게 분명한 그 눈을 마주하기 위해. 그 긴 시간을 돌아서. 먼 거리를 날아왔다.
“태휘가 여전히 화났을까 봐, 밀어 낼까 봐 망설이고 있죠? 이거 하나는 잊지 말아요. 영롱 씨보다 태휘가 먼저 영롱 씨를 찾았다는 거.”
자신을 반길지, 거부할지, 어떤 말을 할지. 두렵고 떨렸지만 그래도 그를 만나야만 했다.
“이번엔 제가 찾을 차례네요.”
어떤 열망은 결심이나 용기 없이도 그 자체로 동력이 된다.
“왕자님을 구하러 가야겠어요.”
객실에서 함께 나온 두 사람은 나란히 호텔 복도를 걸었다. 1층으로 내려가려는 영롱과 사무실로 올라간다는 세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해야 했다.
“그러면 그 교통사고 때문에 저희 사이 알게 되신 거네요? 그러다가 여기까지 엮이게 되셨고.”
영롱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세나는 피식 미소 지었다. 수행원이 미리 잡아 놓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서는 영롱을 향해 돌아섰다.
“사실 그전에도 의심한 적은 있어요.”
“언제요?”
세나는 혼자서 다른 재밌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입을 가린 채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태휘랑 부른 축가, 아직도 기억나요.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
영롱도 생생히 기억이 났다. George Benson의 노래였지. 그런데 그게 왜요? 물어보려고 하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세나의 또렷한 목소리가 영롱의 귓가에 닿았다.
“그때 두 사람 보고 내 결혼식은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
- 201◇년 1월 -
찬 바람이 부는 황량한 겨울 바다 앞, 태휘는 홀로 선 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휴대폰, 한 손에는 담배 케이스를 쥐고 있는 그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그래서, 권준원이 어쨌다고?”
- 지난번 방송 뒤풀이 때마다 우리 애들 몇 명 건드린 모양이에요. 얘들 완전 쌩 신인이라 어쩔 줄 몰라서, 뒤늦게 털어놓더라고요.
통화 상대는 SS엔터테인먼트 소속 매니저였다. 태휘는 며칠 휴가를 내고 동해에 와 있는 중이었는데, 급하게 상의할 일이 있다고 연락해 와서 받았더니. 태휘가 얼마 전 프로듀싱한 남자 아이돌 멤버들에 대한 일이었다.
- 다른 매니저들한테 들었는데, 예전부터 소문이 안 좋았나 봐요. 권준원 그 인간. 근데 워낙 거물인 데다가,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애들만 건드리니까 매번 묻히고.
아마도 신 대표에게 곧바로 보고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일이어서 회사의 이사이기도 한 태휘에게 먼저 조언을 구한 모양이었다.
- 애들끼리 어디에 제보해 보려고 해도, 신상 노출될까 봐. 잔뜩 겁먹었더라고요.
“내가 해결할게. 걱정 마. 애들 잘 챙겨 줘.”
통화를 마친 태휘는 순식간에 속이 갑갑해져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방금 내뱉은 말을, 그때 영롱이에게 해야 했는데. 내가 해결할게. 걱정 마.
뱃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분노와 가슴을 옥죄는 죄책감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 어질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내리자, 오열하는 듯한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형이 내 말을 믿어 주기만 하면 되는데.’
태휘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다가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녀석이 곁에 있었다면 분명 잔소리했겠지 싶어서. 아직 많이 남은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꺼 버리고는 담배와 라이터를 코트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몇 해 전부터 태휘는 1월의 마지막 날마다 동해를 찾았다. 12월도 아닌 1월의 마지막 날인 이유는 영롱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장소도 아니고 굳이 동해인 건 녀석을 추억할 만한 장소가 딱히 이곳 외엔 없어서.
STORY 시절 함께 합숙한 숙소는 물론, 꽤 많은 시간을 보낸 SS엔터테인먼트도 얼마 전 신사옥을 짓고 이전해 예전 건물은 사라졌다. 녀석과 살던 서울의 집도, 보스턴에서의 집도 더는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녀석인데 그리워할 곳마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느 해인가부터 무작정 이곳으로 왔다. 태휘의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액자 속 사진의 배경인 이곳, 정동진에.
‘나 이 순간을 영원히 못 잊을 것 같아.’
데뷔 직전 멤버들과 처음으로 왔던 이 바닷가에서, 그리고 태휘의 품 안에서 영롱은 그렇게 말했다. 녀석 특유의 과장법이긴 했으나 어쩌면 정말로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영롱과 소식이 끊긴 지도 벌써 7년이 넘었다. 헤어졌을 때만 해도 녀석을 떠올리진 않았다. 태휘는 무슨 일이든 결정을 내린 직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마치 해체 직후 멤버들을 떠올리지 않은 것처럼.
그 이후 미국 유학도 끝나고 군대도 갔다 오고 SS엔터에서 본격적으로 프로듀서 일도 시작했다. 형수님 소개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연애도 했다. 비록 오래가진 않았지만.
그러면서 잊었던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모되고 바래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더 또렷이 돋아나는 기억도 있다는걸. 오히려 희미해지는 건 미움과 원망의 감정뿐이었다. 후회와 미안함, 미련은 더더욱 선명해지기만 했다.
‘내가 그러면 안 됐는데.’
그 당시에는 죽었다 깨도 들지 않을 마음이었다. 그때는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별의 이유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을 돌이켜보면 한심하기만 하다. 왜 매번 어른스러운 판단이라고 단정했던 일들은 지나고 나면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이 되어 버리는 걸까?
그렇다면 언제고 돌이켜봐도 참 현명하고 어른스러웠다고 만족할 만한 결정은 몇 살쯤에야 할 수 있는 걸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긴 할까?
한바탕 후회한 후에는 원망 역시 불쑥 머리를 들이밀기도 했다.
‘그렇다고 진짜로 영영 사라져 버릴 건 뭐야? 왜 그런 말은 또 쓸데없이 잘 들어?’
그러다가 이내 자신이 했던 모진 말들이 진자(振子)처럼 돌아와 가슴을 강하게 때리고는 졸렬한 원망 따위 멀리 내쫓아 버린다.
‘영원히 꺼져 버려, 차영롱.’
그때 녀석의 말을 믿어 줬으면, 녀석에게 그렇게 모질게 굴지 않았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미련하게 붙들고 있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일부터 해결해야만 했다. 바로 권준원.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치긴 했으나, 일단 그는 매니저의 말대로 톱배우를 넘어서 연예계의 거물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 대기업 총수의 사위 자리까지 꿰차서 그 입지는 더 단단해졌고. 게다가 그는 태휘의 형수 세나와 친구였다. 그런 그를 어떻게 족쳐야 하지?
그에 대한 소문이라면 태휘도 따로 들은 게 있었다. 주로 설민의 소식통이었다. 녀석은 내가 관심 있다고 생각했는지, 종종 권준원의 지저분한 여자관계에 대해 전해 주곤 했다.
그때마다 나와 아무 상관 없으니 닥치라고 일축했지만. 그걸 좀 더 파보면 써먹을 수 있으려나. 남자고 여자고 닥치는 대로 건드리고 다녔다니, 정말 간땡이가 부은 새끼구나.
형수님이 그의 사생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그런 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냐가 또 문제였다. 사실을 알게 되면 친구라고 편을 들까? 아니면 경멸할까? 몇 년 전만 해도 몰랐겠지만, 그동안 태휘가 보아온 최세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그래도 자신과 알고 지낸 것보다 권준원과 친구로 지낸 시간이 더 긴 만큼, 조심히 접근해야 하는 문제였다. 한참을 생각에 몰두해 있으니, 뺨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동해안에 비와 눈이 온다는 예보를 라디오에서 얼핏 들었던 것 같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라니. 시공을 초월하여 감회에 사로잡히기에는 충분한 요소였다. 멤버들과 다 함께 처음 이 바다를 찾았을 때도 눈이 내렸고, 영롱과 단둘이 보스턴에서 겨울을 보낼 때도 아파트 앞 해변엔 늘 쌓일 정도로 눈이 왔다.
그 탓인지 태휘는 당장이라도 해변 저 멀리서 녀석이 달려올 것만 같았다. 녀석은 두 바다가 비슷한 정취가 난다고 말했었다. 태휘는 태평양과 대서양이라 다른 바다니까 그건 착각이라고 말했다가 분위기 깨는 데 선수라며 구박 받았다.
그 툴툴대는 목소리가 그리웠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큰 착각에 빠진 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영롱을 잊을 수 있다는 건방진 착각 속에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태휘는 머리와 어깨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일 때까지 해변을 떠나지 못했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진 뒤에야 저녁 약속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핸드폰을 받아 귀에 대니 차분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디예요?
“이제 리조트 쪽으로 가려고요. 일은 다 끝나셨어요?”
- 도련님 온대서 빨리 마쳤죠.
그 말에 태휘는 피식 웃었다. 평소엔 도련님이란 호칭 대신 편하게 이름 부르기로 해서 절대 그렇게 안 부르시는데. 농담까지 하시는 거 보니 오늘 일이 기분 좋게 잘 끝나셨나?
“그러실 것까진 없었는데.”
- 바쁘신 분과 모처럼 같이 식사할 기회를 놓칠 수 있나요? 연말 연초에 가족 행사에 코빼기도 안 비췄잖아.
“죄송해요. 빨리 갈게요.”
- 괜찮으니 천천히 와요. 눈 많이 오던데.
마침 근처 리조트 호텔에 형수님이 업무차 와 계시다기에 들러보기로 선약을 잡아 놓은 상태였다. 하필 오늘 그 얘기를 접해서 유감이지만, 준원에 대한 불호의 감정과 세나는 철저히 구분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태휘가 유일하게 집안에서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 같은 경우도 왜 혼자서 겨울 바다를 보겠다며 동해까지 왔는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저 밥이나 한 끼 사 줄 테니 만나자고 스스럼없이 권하고 태휘도 기꺼이 응하는 사이였다.
가족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회사의 리더로서도 존경스럽고 자극받았다. 일로도 사적으로도 잔소리하기 바빴던 가족들과는 달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챙길 땐 잘 챙겨 주니 알게 모르게 믿음이 자랐다.
이렇게 유난히 감상적인 날에는 오랜 비밀을 털어놓고 싶을 정도로. 그렇지만 원 씨 집안의 구성원이 된 이상, 지극히 개인적인 비밀 공유는 위험하겠지 싶어서 마지막까지 뇌에 힘을 주고 있던 터였다.
차로 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다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차갑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제법 굵은 눈송이가 소리 없이 내리며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 바다의 일부가 된 거겠지. 태휘도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겨울이 되면 잊지 않고 내리는 눈송이처럼. 쉬지 않고 밀려드는 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기억 속의 영롱은 이제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고. 어쩌면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함께할 지도 모른다고.
오늘 형수님에게 권준원 얘기는 못 꺼내더라도, 그가 소개해 준 사람과 헤어졌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연애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영롱을 마음에 품은 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비겁한 짓이니까. 이곳을 찾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그땐 모를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녀석을 찾을 염치는 없었다. 아니, 찾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몰랐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미련과 후회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뿐.
“생일 축하해.”
허공에 대고 말하자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한 번은 만나고 싶었는데.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사과하기 위해서. 그 사과를 받아 줄지도 모르고 자기만족일 수도 있지만.
뺨에 닿는 눈송이는 차가워야 하는데 왜 뜨거운지 모를 일이었다. 태휘는 무심히 손등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 냈다. 코끝이 시려오고 코트 속까지 한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기온이 꽤 내려간 모양이었다.
태휘는 저 멀리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끝내 뒤돌아 걸었다. 주차장에 도착해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 내고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도로가 제법 미끄러워 보였으나 리조트까진 가까우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출발하며 뉴스로 기상 상황을 확인할 겸 라디오를 틀자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서울과는 달리 강원도 방송에서는 지금이 올드팝 전문 프로그램 시간인 듯했다. 영롱과 헤어진 후로는 되도록 올드팝 방송은 피해 왔는데.
—오늘의 첫 곡, Carpenters가 부릅니다. ‘Love me for what I am.’
운전대를 쥔 손에 무심결에 힘이 들어갔다. 헤어지던 그날, 학교 앞 거리에서 녀석이 불렀던 바로 그 노래였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건 카렌 카펜터의 음성이었으나 태휘의 머릿속엔 영롱의 목소리로 오버랩 됐다.
순식간에 눈시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워졌고 차창 밖의 눈발도 점점 거세졌다. 라디오를 끌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전방을 주시하던 태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라디오로 향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