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10. 미련퉁이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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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더 드릴까요?”
프라이빗라운지의 바텐더가 태휘를 향해 물었다. 자기 주량을 잘 아는 태휘는 위스키를 딱 한 잔만 더 주문하고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더 마시더라도 내 방에서 마셔야지. 여기서 쓰러졌다간 챙겨 줄 사람도 없다.
태휘는 바닷가를 잠시 걸은 뒤 이곳에 체크인했다. 3년 전 형수님과 만나기로 했던 이 리조트 호텔은 그새 동해의 랜드마크가 되어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비수기인지라 그나마 한산했다. 안 그래도 재결합 기사 때문에 시끄러운데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었다.
애초에 투숙할 생각으로 여기 온 건 아니었다. 동해에 도착하자마자 하늘이 흐려지는 게 심상치 않더니 해변을 조금 걷는 도중 쏟아진 비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핸드폰으로 슬쩍슬쩍 동영상 촬영을 하는 남자가 신경 쓰이기도 했고. 어느 언론사에서 들러붙은 파파라치는 아니겠지. 다행히 프라이빗라운지는 스위트룸 투숙객만 출입이 가능했기에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태휘는 라운지의 창밖으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이 바다를 찾은 것도 3년 만이었다. 사고 이후에는 한 번도 이곳을 찾은 적이 없었다.
거의 죽을 뻔했다지만, 정작 자신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반대편 차선에서 달리던 대형 트럭이 폭설 탓에 중앙선을 착각해 넘어오는 걸 미처 못 보고 뒤늦게 피하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그 날의 기억은 뜨문뜨문 끊겨있었고 아득히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와 머릿속에 맴돌던 ‘Love me for what I am’이 마구 뒤섞여 울려 대던 것만 떠오른다.
트라우마까진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좋은 기억도 아니었기에 한동안은 이곳을 찾기 꺼려졌다. 그럼에도 혼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만한 곳은 여기뿐이라는 게 아이러니 했다. 동해를 겨울이 아닌 계절에 온 것도 처음이었다. 항상 녀석의 생일에 맞춰서 왔으니까.
사고당한 날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한심했다. 소식이 끊긴 전 애인이 태어난 날, 혼자 겨울 바다를 방문해 찌질하게 후회하다가 교통사고나 나고. 까딱하면 녀석의 생일이 자신의 제삿날이 될 뻔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그것만큼 추태가 있을까.
그래서 수술 후 깨어나자마자 더는 이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저승 문에 노크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돌아왔더니 미련한 짓은 때려치우고 한층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직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태 영롱을 잊지 못하는 문제에 대하여.
‘네. 찾아 주세요.’
‘영롱 씨 찾아서 어쩌고 싶은데요?’
‘사과하고 싶어요.’
‘뭘요?’
‘상처 준 거에 대해서요. 그리고 믿어 주지 못한 거에 대해서도.’
그래, 그땐 분명 그랬었는데. 시간의 위력이 정말 무서운 게 그 후 3년이 더 흘렀다고 그때 가졌던 결심은 그새 또 흐릿해지고 말았다.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얻은 후회와 깨달음은 재차 좁디좁은 마음의 필터를 거치며 원망과 옹졸함만 남겼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으면서. 해야 할 말을 못 한 채 영영 이별할까 봐 전전긍긍한 주제에. 다시 만났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헤어지던 날처럼 차가운 말들로 무장해 버렸다. 재회하자마자 녀석에게 처음 건넨 말이 뭐였더라?
‘이 시점에 돌아온 이유가 대체 뭐야?’
구제 불능은 나였네. 십여 년 만에 건넨 말이 그거라니 정말 최악이다. 나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게 여전히 싫어서. 불리한 기억은 군데군데 잘라내 버리고. 녀석의 허물만 강조해서 비난하고. 용기 내어 다가온 마음에도 뒷걸음치고. 결국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나…… 노래 못 해.’
녹음실에서 녀석의 폭탄 고백을 듣고 난 후 분노 포인트가 한둘이 아니라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화가 난 첫째 이유는 노래 못 하는 걸 숨긴 채 돌아왔기 때문이고, 둘째는 오은에게는 말했다는 사실 때문에. 하지만 세 번째에 비하면 앞의 이유들은 우스웠다.
‘돌아오면, 다 나을 줄 알았어.’
태휘는 그 말을 되뇌며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조각날 것만 같아서 곧바로 다른 생각으로 옮겨야만 했다.
이 사태의 원인 제공을 한 게 다름 아닌 자기였다는 현실만으로도 버거운 와중에 엎친 데 덮친 셈이었다. 미안해하면서도 동시에 원망을 놓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어떻게 죄책감과 미움이 한마음에 공존할 수 있지? 정작 그렇게 남 탓하기 좋아하는 영롱은 ‘형 때문에 이렇게 됐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자괴감 때문에 태휘는 서울을 떠나 이곳까지 한달음에 도망쳐 오고 만 것이다. 핸드폰은 꺼둔 상태였다. 전화나 메시지가 얼마나 쌓였을지 예상은 됐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태휘는 무심결에 술을 더 시킬까 봐 마지막 잔을 비우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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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온 태휘는 샤워 후 가운 차림으로 맥주를 땄다. 밖을 내다보니 유리창에 빗줄기가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역시 하룻밤 묵기로 하길 잘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에서 야간 빗길 운전은 아직 조심스러우니까. 더구나 오늘은 술도 마셔야 했고.
창가에 서서 비 오는 바다를 감상하며 맥주 한 캔을 다 마시고 두 번째 캔을 따려고 하는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찾아올 사람이 없으니 다른 방 소음을 잘못 들었나 싶어서 무시하고 맥주를 마저 땄는데 노크 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설마 아까 해변에서 봤던 그 파파라치가 쫓아온 건가 싶어서 아무 대꾸 없이 문에 다가가 귀를 기울여 보았다. 여차하면 호텔 프런트에 신고할 생각으로. 하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의외였다.
“열어 줘, 형.”
순간 들고 있던 맥주를 떨어뜨릴 뻔했다. 틀림없는 영롱의 목소리였다. 뭐야, 이 녀석.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지? 나한테 위치 추적 장치라도 달았나? 하긴 보스턴까지 쫓아온 녀석인데 동해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지도.
“혀엉, 빨리.”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묵고 있는 이 호텔이 누구의 호텔인지 기억해 냈다. 녀석 혼자서 알아냈을 리는 없고 그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형수님이 직접 개입했다면 게임 끝인데. 태휘가 혼자 머리를 굴리는 동안 영롱은 거듭 문을 똑똑 두드렸다.
“설마. 다른 사람이랑 있냐?”
이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녀석이 기가 막혀 헛웃음이 다 나왔다.
“안 열어 주면 고래고래 소리친다?”
그래 봤자 누구 손해인데. 목도 안 좋다는 녀석이. 태휘는 문고리를 붙든 채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있는 곳을 형수님이 알려 준 거라면 다른 것도 다 말했을 게 뻔했다. 어떤 표정으로 녀석을 마주해야 할지 아직 머리가 복잡한데.
“형. 나 또 쫓아낼 거야?”
마침내 녀석은 만능열쇠나 마찬가지인 한마디를 뱉고 말았다. 태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가 손잡이를 돌리고 말았다.
문이 열리고 비 때문에 축축해진 공기와 함께 영롱이 들이닥쳤다. 태휘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빛을 띠던 영롱의 두 눈은 가운만 걸친 모습에 곧바로 그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뭐야! 나 올 줄 알고 있었어?”
태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혀를 내둘렀다. 이 와중에 무슨 생각부터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다른 사람이랑 있었어?”
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바로 옷장이 있는 침실로 향했다. 영롱은 잰걸음으로 후다닥 그 앞을 막아섰다.
“안 돼! 옷 입지 마!”
영롱이 격렬히 말리자 태휘는 말없이 쳐다보다가 다시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롱은 웬일로 순순히 들어주지 싶어서 놀라워하며 쫄래쫄래 따라갔다.
“나 왔는데도 별로 안 놀라네?”
“이제 더 놀랄 일도 없어.”
태휘는 거실 미니바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고는 건넸다. 맥주를 받아든 영롱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대하는 그의 모습에 어쩐지 초조함을 느꼈다.
“형. 완전히 마음 정리한 거 아니지?”
“무슨 소리야?”
태휘는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영롱에게 눈짓했다. 영롱은 태휘의 맞은편에 앉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나 때문에 열 받았잖아. 화 안 내?”
“화는 충분히 다 냈으니까.”
태휘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캔을 마저 비웠다.
“사실 과할 정도로 냈지. 내 잘못은 생각 안 하고.”
그 말을 듣고도 영롱은 손에 쥔 맥주를 마시지도 않고 만지작거렸다. 모든 걸 다 포기한 듯 방어벽을 내리는 태휘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져서.
“왜? 내 목 때문에? 난 목 이렇게 된 거 형 탓이라고 생각 안 해. 이렇게 방치한 건 100퍼센트 내 잘못이니까.”
“하지만 너 돌아오지 않은 건 나 때문이 맞잖아. 가수 그만두고 연예계 떠난 건.”
“그것도 내가 제멋대로 살다가 그렇게 된 거지. 형 탓 아니야.”
9년 전 일에 대해 태휘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자 먼저 눈치챈 영롱이 선수를 쳤다.
“연인의 그저 흔한 이별일 뿐이야. 우리가 했던 수많은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게 형만의 잘못이 아니듯이.”
이런 소리 들으려고 꺼낸 얘기가 아닌데. 태휘가 제대로 사과하기도 전에 영롱이 먼저 용서한 격이었다.
아니, 어쩌면 용서도 아니지. 용서란 그 사람의 잘못을 인정한 뒤 그걸 덮어 주는 행위인데, 영롱은 애초부터 그게 잘못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녀석은 더는 사과나 과거 따위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영롱은 힐끔거리며 태휘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권준원도. 형이 그런 거라며.”
아, 완전 관심 없는 건 아니었네. 태휘는 대답 대신 영롱이 쥐고 있던 맥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녀석이 먼저 잽싸게 맥주를 뒤로 숨겼다.
“그 얘기 왜 안 했어?”
조르듯이 재차 묻기에 한숨을 내쉬곤 답했다.
“기껏 너 돌아왔는데, 그 자식 얘기 꺼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대답을 들었으나 영롱은 여전히 맥주를 건네지 않았다. 내가 취하면 한결 솔직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미 충분히 마셨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게다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고.”
한심하잖아. 당시엔 믿어 주지도 않더니. 널 그렇게 떠나보내고 몇 년이나 지난 후에야 복수했다는 게. 영롱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술까지 삐죽거리며 말했다.
“나 찾았다는 얘기도 안 하고.”
태휘는 맥주를 포기한 듯 도로 소파에 등을 기대어 다시 깊은숨을 내쉬었다. 영롱은 그런 태휘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들먹거리곤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뭐, 나도 목소리 얘기 안 했으니까. 쌤쌤인가.”
그러더니 가만히 태휘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잠시의 침묵 후, 영롱이 입술을 열었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태휘는 개를 떨군 채, 바닥만 내려다보며 말했다.
“재결합 프로젝트는 보류해야지. 너 목소리 회복할 때까지.”
“아니, 그거 말고. ‘우리’ 말이야.”
“……넌 어쩌고 싶어?”
“내 의견 묻지 말고. 형 마음이 듣고 싶어.”
“나는 네 마음이 알고 싶어.”
“내 마음이 왜? 난 지금까지 내내 한결같았어. 형도 알잖아.”
“그렇지만, 네가…….”
태휘는 차마 말을 못 잇고 머뭇거렸다. 자신이 영롱에게 화가 났던 세 번째 이유가 계속 마음에서 걸리적거렸다. 커다란 추를 심장에 매단 것처럼 절망스러운 감정이 한없이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네가 그랬잖아. 나한테 돌아오면 목 다 나을 줄 알았다고.”
영롱은 불과 며칠 전 자신이 내뱉은 말이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태휘는 그 말을 자기 입에 담는다는 것조차 괴롭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는 힘겹게 뱉었다.
“나한테 접근한 목적, 오직 그것 때문이었어?”
접근? 목적? 영롱은 여기서 왜 그 단어들이 나오는지 이해하지 못해 한참을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뭐라고?”
태휘는 지난 몇 주 동안의 일을 떠올렸다. 재회 후 재결합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동시에 자신에게 끊임없이 들이대던 녀석의 행동을 돌이켜보았다.
9년 전 그렇게 냉정하게 영롱을 버렸는데. 그토록 심한 말을 퍼부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연애하자고 졸라 대는 녀석이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줄곧 의심하고 밀어 냈다.
자고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철저해지고 내가 손해 보는 짓, 상처받는 짓은 필사적으로 피하기 마련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럴 순 없잖아. 나 같은 새끼를 다시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래서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란 의구심을 내내 버리지 못했다. 오랜 시간 죄책감이 쌓인 자리엔 두려움이란 무게까지 작용하여 불신이라는 깊은 자국을 새기고 말았다. 그 와중에 영롱이 그 말을 한 거다.
‘태휘 형이랑, 다시, 시작하면, 다, 나을 줄, 알았다고.’
태휘는 빈 캔을 단숨에 찌그러트린 뒤 쓰레기통에 던져 놓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찰나 영롱은 태휘의 붉어진 코끝과 눈시울을 알아챘다. 그제야 그가 어떤 생각으로 괴로워하는지 깨달았고 그 발상이 너무 놀라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형, 진짜 바보다.”
영롱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내가 돌아온 이유가, 원태휘와 다시 연애하려고 한 이유가, 오직 목을 낫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 거야? 다시 노래하기 위해, 사람 마음 이용하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영롱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
영롱이 알콩달콩한 동화를 쓰는 사이 태휘는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쓴 격이었다. 하여튼 생각 많은 인간은 이게 문제라니까. 홀로 5천 미터짜리 땅굴 파며 삽질하고 있는 이 남자를 어쩌면 좋아.
아득해진 영롱은 머리를 세차게 한 번 흔들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되었다고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지만 설명보다도 태휘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태휘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창가 앞으로 가서 영롱에게 등을 보이고 섰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축 처진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나의 얼음 왕자가 또 녹아내리고 있구나. 억울함에 순간 울컥했던 영롱은 이젠 그저 그가 안쓰러웠다.
난 악쓰며 울기라도 했지. 저 사람은 소리 내어 울 줄도 모른다. 그리움과 후회에 몸부림치다가 다치고, 날 찾기까지 했으면서 그 사실까지 숨겼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연인이 무사히 돌아와 안도했으면서도 다시 사랑할 엄두도 못 냈다. 그럴 자격도 없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 와중에 영롱의 행동이 모두 가식이었다고 오해하고. 십여 년의 시간 동안 멀어진 두 사람 사이의 간격만큼 그 공백에 죄의식이 뿌리내리고 거기다 의심과 원망이 들이부어지고 뒤섞이며 기형적인 감정의 다리가 조형되고 말았다.
태휘는 기괴한 형상의 그 다리 앞에서 혼란스러워 보였다. 과연 건너야 하는지, 돌아서야 하는지. 영롱을 다시 사랑해야 하는지, 증오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태휘 대신 영롱이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뒤에 한 걸음을 남기고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형, 나 봐봐.”
태휘는 비 내리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에 비치는 음영으론 어떤 표정일지 알 수가 없었다. 영롱은 한 발자국 내딛은 뒤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안았다. 그 손길에 몸이 흠칫 떨리긴 했으나 밀어 내진 않았다. 오히려 손을 내려 영롱의 팔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영롱은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뒤에서 껴안은 그대로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댔다. 그러자 태휘도 손등 위로 손을 겹쳐와 깍지를 꼈고 그도 자신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했다는 걸 알았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 낼까봐 겁내고 있었다는걸.
태휘는 고개를 숙이고는 깍지 낀 영롱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여전히 조심스럽게 손등에 입을 맞췄고 그러자 그의 콧날을 타고 흐른 눈물이 영롱의 손끝에 닿았다.
영롱은 안 되겠다 싶어서 태휘의 턱을 붙잡아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그 완고한 손길에도 태휘는 시선을 피하고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영롱은 울컥 목이 메어 왔다.
이 세상엔 이치에 맞는 일만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이 인간을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떠어떠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어떠어떠한 결과가 도출해야 한다고 아는 이 헛똑똑이를 어쩐다? 어쩌긴. 내가 거둬 줘야지.
“형이 그런 바보 같은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영롱은 태휘를 안은 채 자신을 마주보도록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흘러내리는 눈물을 엄지로 닦아 주었다. 덩달아 자신도 훌쩍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형이 노래 못 하는 나를 쓸모없다고 할까 봐. 그것만 걱정했는데.”
그 말에 태휘의 긴 속눈썹이 움찔하고 떨리더니 비로소 눈을 떴다.
“그게 제일 무서웠지 다른 의도는 없었어. 날 그렇게 치밀하게 봐줘서 고마운데. 나 단순하고 멍청해.”
태휘는 물기 어린 눈으로 가만히 영롱을 내려다보며 듣고만 있었다.
“난 내가 원치 않는 일을 원하는 척, 속이는 법 따윈 몰라. 예를 들면 형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형을 사랑하는 척하기라든가. 반대로 형을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척하기라든가.”
영롱은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때 내가 그랬지. 형한테 난 신뢰도 바닥이라고. 지금 생각해 보니 당연한 거였어. 내가 형이 못 믿을 만한 짓 많이 했으니까.”
“…….”
“연인에게 어떻게 믿음을 줘야 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소중한 존재가 곁에 있을 때,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걸 혹독하게 배웠으니까. 우리가 연애할 때 그걸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형에게 그런 상처 주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예전보다 성욕도 좀 줄었어. 예전이랑 다르게.”
어깨를 들먹이며 말하자 태휘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의 웃는 모습에 영롱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상태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노래는 점점 다시 하고 싶어지더라?”
형이 준 건 다 버리고만 싶었는데. 노래도, 반지도. 텅 비어 버린 네 번째 손가락이 허전해서 훨씬 비싼 반지를 끼워 봤지만 그거로는 채워지지 않았어.
“형도 보고 싶고. 솔직히 뭐가 먼저인지 잘 모르겠어. 형이 그리워져서 노래하고 싶어진 건지, 노래하고 싶어지니 형이 떠오른 건지. 그렇지만 순서 따위 뭐가 중요하나 싶었어. 둘 다 서로 상관없이 동시에 떠오른 걸 수도 있고.”
영롱은 헛기침하며 저도 모르게 목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그냥 꿩 먹고 알 먹기 정도로 생각했지. 다시 노래하게 되면 좋고, 형 곁에 있으면 더 좋고.”
해야 할 말에 도달하기 위해 한 마디 한 마디 이어나갈수록 입술이 떨려왔다. 또 울면 안 되는데. 목소리가 또 엉망이 될 텐데.
“대신에 만약 노래를 못 하면 형 곁에 있을 수 없을까 봐 무서웠어.”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애써 참다가,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는 제일 하고 싶던 말을 했다.
“미안해. 숨긴 거. 말 못 한 거…….”
“상관없어.”
한참을 듣고만 있던 태휘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영롱은 놀라서 멍하니 태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영영 노래 못 해도 상관없어.”
태휘는 빨개진 코끝을 한 번 훔치고는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널 사랑할 거야.”
영롱은 참아 왔던 울음을 터뜨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태휘는 그런 영롱을 바로 안아들었다.
“너한테 그런 믿음을 주지 못해서 미안해.”
도로 소파로 향하는 동안 영롱은 태휘의 품에서 더 크게 오열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머리 위로 태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그게 나의 제일 큰 잘못이야. 정말 미안해.”
그때 영롱이 손을 내리고는 훌쩍거리며 올려다보았다.
“한 번 더 말해 줘.”
태휘는 순간 멈칫하고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되뇌어 보았다.
“정말 미안해?”
“아니, 그 말 말고! 그 전에!”
“……믿음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거 말고.”
혼자 중얼거리던 태휘는 영롱을 소파에 내려놓은 뒤 그 앞에 무릎 꿇은 채 앉아 시선을 맞췄다.
“네가 노래 못 해도 널 사랑해.”
그러자 영롱은 재회한 후 가장 환하게 웃었다.
“그 말이 제일 듣고 싶었어.”
그 미소에 태휘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굳었던 얼굴 근육이 풀어졌다. 영롱의 눈꼬리가 휘며 맺혔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 말 한마디면 되는걸. 뭐가 두려워서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는지.
이번엔 태휘가 양손 엄지로 영롱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바로 영롱이 팔을 뻗어와 목을 끌어안자 태휘는 벅찬 표정으로 그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어릴 때는 그저 내가 행복해지려고 사랑했다. 그랬기에 왜 날 불행으로 내모는 거냐며 연인을 원망하고, 내 사랑은 뭐 이따위냐며 세상에 토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불행한 순간을 함께 견디고 극복하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한 거였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건가 싶지만 어쩌면 아직 늦진 않았을지도 몰라.
나이가 들고 점점 지쳐갈수록 외로움은 비례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은 필요하니까. 우리의 황혼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으니까.
▶▶
호텔 창문을 두드리는 불규칙한 빗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 보니 시간이 한참 흐른 듯했다. 태휘는 문득 가운 한 장 너머로 밀착해 있는 영롱의 체온이 뜨겁게 느껴졌다. 어쩜 어렸을 때랑 변한 게 없는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릴 땐 뜨겁게 느껴질수록 겁이 나서 녀석을 멀리했다면 언젠가부터는 그 열감을 함께 만끽했다는 거다. 지금으로선 그것도 오래 전의 얘기지만.
태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태휘를 안고 있던 영롱도 팔을 풀고는 올려다보았다. 태휘는 영롱의 은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영롱은 그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태휘의 손은 머리를 지나 귓바퀴를 스치고는 턱선을 타고 내려왔다. 한 명은 지금 가운 차림이고, 둘은 밀착해 있고, 그 손길 또한 노골적이었다. 그럼에도 영롱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는 천진하게 말했다.
“나 바다 보고 싶어.”
그 반응에 태휘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차영롱답지 않게 이 상황에서 웬 바다?
“너무 늦었어. 비도 오고.”
“나 한국 들어와서 바다 한 번도 안 가 봤거든. 공항에서 올 때 본 거 빼고.”
녀석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티나게 지분거리는 데도 계속 딴청만 피우는 느낌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태휘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기로 했다.
“바다는 내일 보자.”
“내일?”
태휘가 소파 위로 다리를 슬그머니 올렸고 그러자 가운 사이로 맨살이 훤히 드러났다.
“옷 갈아입지 말라고 해서 안 입고 있었잖아.”
저돌적인 유혹에 영롱은 놀란 건지 좋은 건지 아님 둘 다인 건지, 입을 헤벌쭉 벌렸다가 곧바로 틀어막았다.
“그냥, 형 헐벗은 거 오랜만에 보니까 좋아서 그랬지!”
“보기만 하려고? 아쉽지 않겠어?”
영롱은 태휘의 다리를 찰싹찰싹 때리며 마구 호들갑 떨었다.
“뭐야, 이 형! 미쳤어, 미쳤어!”
태휘는 인상을 쓴 채 영롱의 손자국이 빨갛게 난 맨살을 마구 비벼 댔다.
“아야.”
“세상에나! 왜 이렇게 능글맞아졌어?”
이제 어떤 감정도, 생각도, 욕구도 숨기지 않으려고 해 본 건데 놀라기는.
“그래서. 싫어?”
“아니. 존나 좋은데……. 낯설어서 그렇지.”
영롱이 입술을 실룩이며 우물거리자 태휘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자기야말로 녀석의 이런 모습이 낯설었다. 웬 횡재냐 하고 당장 달려들어 벗겨 먹을 줄 알았는데 답지 않게 왜 이리 주뼛거리는지. 다시 만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추파 던져 댈 때는 언제고.
다른 곳도 아니고 호텔에다가, 묵었던 오해도 풀었겠다, 거의 다 벗고 있는 애인까지 눈앞에 있는 마당에 낯선 게 대수인가.
태휘는 그대로 소파 위로 무릎을 꿇고 올라와 영롱을 눕힌 뒤 바로 입을 맞춰 왔다. 지난번 집 작업실에서 했던 키스는 성적 스킨십이라기엔 심히 담백했다. 일종의 재회의 인사와도 같은, 영혼의 입맞춤이었달까?
그에 비하면 오늘은 한껏 무르익은 욕망이 여실히 드러나는 키스였다. ‘정신적 재결합은 마쳤으니 이제 육체의 재결합을 해 보자’라는 선언 같은.
영롱의 입술은 예전과 변함없이 촉촉하면서도 달큰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태휘는 영롱의 팔을 꽉 붙들고 하체까지 두 다리로 옭아맨 채 농도 짙은 키스를 퍼부었다.
영롱은 태휘의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며 소리가 나도록 태휘의 혀와 턱을 빨아 댔다. 그 덕분에 녀석의 체온이 옮겨온 듯 점점 뜨거워지며 무심결에 가운의 허리끈을 풀어 내렸다. 그러다가 불현듯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는 키스를 멈췄다.
“나 콘돔 없어.”
물론 예전엔 없이도 했지만. 오늘은 오랜만이니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나 있어.”
그러더니 영롱은 바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더니 눈앞에 보여 주었다. 태휘는 황당해하며 웃음을 흘렸다.
“성욕 줄었다며?”
“이건 상비약 같은 거지. 그나저나 나 진짜 오랜만이야.”
“나도.”
그렇게 말하며 녀석의 손에서 콘돔을 잡아채려고 하자 손끝에 힘을 꽉 쥔 채 놓지 않았다.
“그럼 오늘 하지 말까?”
태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차영롱이 섹스를 미루다니? 이건 또 무슨 최신 유머인지? 문득 둘이 처음 섹스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영롱이 마구 들이대고 자신이 몸을 사렸는데, 지금은 어째 둘이 바뀐 모양새였다.
그 태도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온 태휘는 이내 정색하고는 말했다.
“이제 와서 연기하지 마! 콘돔까지 준비했으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챙겨온 거지! 진짜 할 줄은 몰랐단 말이야.”
“지금이 만일의 사태야.”
“아이, 참!”
영롱은 진심인 듯 길길이 날뛰더니 태휘를 밀어내고는 품에서 후다닥 빠져나와 멀찍이 떨어져 섰다.
“우리 거의 10년 만이잖아.”
“그렇지.”
“그땐 20대 초반이었고.”
“그렇지.”
태휘는 영롱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감도 안 왔다.
“나 어렸을 때 모든 정력을 소진했나 봐. 성욕 줄었다는 말 진짜라니까.”
“무슨 애늙은이 같은 소리야?”
“예전 모습을 기대한다면 형 실망할지도 몰라.”
섹스에 자신 없어 하는 차영롱이라니. 확실히 신선하네.
“과거의 너랑 경쟁이라도 하려고?”
태휘가 계속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영롱은 토라진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옛날 같은 맛 안 날 텐데?”
심각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 저 수준이라니. 이런 농담이라면 재미없는데.
“네가 무슨 진짜 음식이아? 그런 건 그냥 더티 토크였잖아.”
실컷 애태워서 더 끓어오르게 하려는 고도의 전략인가? 태휘는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영롱은 두 팔로 자기 몸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흔들어 댔다. 그 앙탈에 태휘는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손을 까닥거렸다.
“내가 설마 옛날에도 너 잘해서 좋아했을까 봐? 난 오히려 네가 서툴렀으면 싶었어.”
“좋아했으면서.”
“그건 결과고. 이유는 아니었단 거지. 이리 와.”
그제야 영롱은 쭈뼛거리며 한 발짝 다가왔다. 자신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태휘는 바로 일어나 허리를 끌어안고는 자신에게 밀착시켰다.
“정력 진짜 다 소진했는지. 알아보자고.”
“진짜 능글맞아졌네. 안 어울리게.”
“피차 마찬가지야.”
태휘는 그렇게 말하고는 영롱을 냉큼 공주님 안기로 들쳐 안았다.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체구와 깃털처럼 가벼운 무게감은 예전 그대로였다. 방심한 틈에 들린 영롱은 발버둥을 치며 태휘의 등을 마구 때렸다.
“아! 쫌! 내가 직접 걸어가려고 했거든!”
태휘는 솜방망이 같은 주먹질에 끄떡도 하지 않은 채 침실로 향했다.
“10년 기다렸으니, 몇 초도 못 기다려.”
‘몇 년을 기다렸으니, 몇 초도 못 기다리지!’
둘의 첫날밤 영롱이 했던 말이었다. 자기 말을 인용했다는 걸 알고 영롱은 그만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침실 문 앞에 다다르자 다시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콘돔 왜 가져왔지…….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릴까…….”
“너 혼잣말이 너무 커.”
태휘는 친절히 지적해 주고는 한 손으로 침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콘돔 던져 버리면 너만 더 힘들걸.”
그러자 영롱이 곁눈으로 쏘아보았다. 어느새 침대에 도착해 영롱을 앉히고는 침대 앞에서 다시 시선을 맞췄다. 자꾸 원치 않은 관계를 억지로 강요하는 거 같아 싫었다. 이런 찜찜함은 확실히 해결해야 하니까.
“영롱아. 너 싫으면 안 해도 돼.”
“아니. 싫은 건 아닌데. 형이 실망할까 봐 그러지.”
“실망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너 사랑하니까 안고 싶은 거지.”
어울리지 않게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는 녀석이 낯설면서도 귀여워서 솔직히 그냥 안고만 자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장담은 못 하겠지만 일단 지금 기분만은 그랬다.
이런 영롱마저도 여전히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니 뭔가를 깨달았다. 녀석을 다시 사랑하게 된 건 예전과 변함없이 그대로여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달라진 모습 때문만도 아니고, 그저 차영롱의 모든 면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보면 나이 든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여전히 헤맬 때도 있지만 경험이 쌓인 만큼 이해의 폭도 한층 깊고 넓어지니까. 이제 어떤 모습의 차영롱이든 받아들일 자신이 생겼다. 이런 마음을 녀석이 알아주면 좋겠는데.
“너 노래 못 해도 사랑할 거고 섹스 못해도 사랑하니까. 제발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해.”
태휘의 말에 영롱은 괜히 입을 비죽이며 시선을 피했다.
“바보 같은 말은 자기도 만만치 않게 했으면서.”
그러자 태휘는 영롱의 무릎에 턱을 기대고는 바로 입을 앙다물었다. 보호자의 허락을 기다리는 대형견 같은 그 모습에 영롱은 마음이 누그러져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휘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두 팔로 침대 끝을 짚은 채 영롱에게 입을 맞췄다. 녀석의 두 손이 얼굴을 감싸 오더니 어쩐지 조금 망설이듯이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수줍던 키스는 이내 몸이 기억하는 익숙함에 갈수록 격렬해졌다.
십여 년의 공백이 있었으나 서로의 성감에 대해서라면 보지 않고도 훤히 알았다. 처음 같은 설렘은 기분 탓일 뿐, 거짓말 못 하는 육체는 능숙하게 반응했다.
입 안을 마구 헤집는 태휘의 혀를 영롱의 혀가 집요하게 따라가며 목 깊은 곳에서부터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혀가 얽히고 혀뿌리가 얼얼해질 만큼 키스가 깊어졌다.
잊고 있던 익숙한 감각이 서서히 깨어 오자 영롱은 반가움에 눈물이 핑 도는 느낌마저 들었다. 서로의 타액과 호흡을 삼킬수록 갈증은 더 심해져 입을 떼고 싶지 않았다. 결국 숨이 차 영롱이 먼저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잠시 현기증이 나 천천히 눈을 뜨니 욕망으로 얼룩진 태휘의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역시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영롱의 바지 앞섶은 조금 전의 키스와 태휘의 눈빛만으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분명 성욕 줄었었는데 거짓말한 셈이 됐다니.
영롱은 시선을 태휘한테 고정한 채 침대 뒤로 물러서며 상의를 벗었다. 그 사이 태휘도 가운을 벗어 던지는 바람에 먼저 맨몸을 드러냈다. 영롱은 저도 모르게 눈이 아래로 향했고 오래전 자신이 예뻐해 마지않던 물건을 다시 보자마자 육성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형은 그대로네. 진짜.”
“너 입맛 다시는 거 다 보여.”
아직 바지를 벗지 않은 영롱의 위로 태휘가 몸을 겹쳐 왔고 영롱은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태휘가 목과 쇄골을 따라 입 맞추자 영롱은 눈을 감고는 오랜만에 자신의 맨살에 와 닿는 그 입술을 느꼈다.
태휘 역시도 영롱의 살냄새를 한껏 빨아들이며 느릿하게 애무했다. 영롱이 곁에 없었을 때 얼굴이나 목소리는 사진이나 영상으로 조금이나마 충족됐지만 이 체취만은 불가능했기에 더 그리웠다.
20대 때 실컷 물고 빨았던 피부는 변함없이 부드럽고 또 민감했다. 흡입하며 지나가는 자리마다 열꽃 같은 붉은 자국이 남았다.
“아흣, 혀엉…….”
흐느끼는 듯한 영롱의 새된 신음 역시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태휘는 영롱의 가슴 언저리의 여린 살을 쉬지 않고 탐했다. 선홍빛 유두는 혀 놀림 몇 번에 꼿꼿이 서서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태휘는 마다하지 않고 단숨에 삼키고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빨아 댔다.
“흐읏……!”
태휘의 등을 감싸고 있던 영롱의 두 팔이 바르작거리며 손톱자국을 남겼다. 자신을 할퀴어 대는 몸부림에도 아랑곳 않고 양쪽 가슴을 번갈아 공략했다. 자극의 강도는 점점 세졌고 온몸으로 번지는 쾌락에 영롱의 버둥질은 커졌다가 도로 약해졌다.
아직 하체에는 아무런 터치도 없었는데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전율을 느끼자 스스로 신기했다. 섹스 자체가 오랜만이긴 해도 한동안 섹스에 흥미를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태휘 역시 전희만으로 녀석이 이렇게 느끼는 걸 보고는 오랜만이란 말이 사실이긴 하구나 싶었다. 옛날에도 예민하긴 했지만 그땐 워낙 몸이 달아 있었고.
태휘는 흥분에 흠뻑 젖은 영롱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영롱은 달뜬 호흡을 내뱉으며 촉촉해진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흡족해진 태휘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더 아래로 내려갔다.
바지를 벗기고 속옷까지 내리려고 하자 영롱은 다급히 태휘의 얼굴을 붙들고는 고개를 들게 했다.
“형, 불 좀 꺼 줘.”
불을 꺼 달라니. 지금 불 지르러 가는 길인데. 이해 안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태휘가 올려다보자 영롱은 침대 옆의 조명 컨트롤러를 향해 고갯짓했다.
태휘는 의아함에 일순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에 녀석은 환한 상태에서 섹스하기 좋아했다. 태휘의 몸과 표정을 여실히 볼 수 있어서 좋다나 뭐라나. 그랬기에 한 번도 조명을 끄라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왜?”
“부끄러워서.”
“우리 사이에 뭐가 부끄러워?”
“그냥. 나 오늘 진짜 이상해.”
영롱은 거친 숨을 한 번 삼키고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형이랑 처음 하던 날보다 더 떨려.”
그 말엔 태휘도 동의했다. 서로의 육체가 미지의 세계와도 같았던 처음보다도 눈 감고도 샅샅이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지금이 오히려 더 떨리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 생각까지 이르니 쑥스러워하는 녀석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가 돼 손을 뻗어 침실의 불을 껐다. 오랜만에 밝은 곳에서 영롱의 구석구석을 다 보고 싶긴 했지만 앞으로 날은 많으니까.
불도 껐겠다, 옷도 다 벗겼겠다. 태휘는 콘돔 포장을 뜯고는 자신의 성기에 하나, 손가락에 하나를 끼웠다. 모처럼 녀석의 입구를 풀어 줄 생각을 하니 진짜 처음 같았다. 영롱의 다리 사이에 안착한 후 다시금 입술을 삼켰다.
위로는 혼을 쏙 빼놓을 만큼 맹렬한 키스를 퍼붓고 아래로는 콘돔을 끼운 두 검지와 중지로 조심스레 입구를 파고들었다. 오랜만이라는 그 말은 사실인 듯했다. 손가락이 들어가기 벅찰 정도로 꽉꽉 조여와 이대로라면 태휘의 물건은 근처에도 못 갈 것 같았다.
“흐읏, 형…….”
영롱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보며 어쩌면 오늘 삽입 섹스는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조금 전엔 애무만으로 그렇게 흥분했으면서 지금 녀석은 입술까지 꽉 문 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롱아. 나 들여보내 줘야지.”
귓가에 속삭이자 녀석의 몸이 흠칫 떨리더니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이렇게 낮고 거친 목소리로 불러 주는 거에 환장했으니까. 어차피 깜깜해서 잘 안 보이겠다, 태휘는 한 손으로 영롱의 눈을 가리고는 청각의 자극을 극대화하여 긴장을 풀어 주기로 했다.
“떠올려 봐. 내가 너한테 들어갔을 때 어땠었는지.”
두 사람에게는 이미 수많은 경험으로 상상력의 소스가 풍부했다. 그것만 떠올려도 손쉽게 절정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혼자서 외로울 때 태휘가 수없이 써먹은 방법이었다. 한창때, 정신없이 서로를 탐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 어떤 포르노보다도 자극적이었으니까.
“더 깊이, 더 세게 박아 달라고 애원했잖아. 아무리 삼켜도 부족하다는 듯이.”
그 방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영롱은 침을 크게 한 번 삼키더니 바로 매달려 왔다. 그러면서 조이던 입구가 한결 풀어져 태휘의 손가락을 단숨에 두 마디나 삼켰다.
“형, 빨리…….”
태휘는 영롱의 요구를 단번에 이해했다.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쾌락을 선사해 달라는 의미였다. 녀석의 표정을 보지 않고도 느끼는 지점을 알았기에 깊이 파고들어 거칠게 쑤셔 대고는 손가락을 벌리기까지 했다.
“아! 아아아!!”
영롱은 감전이라도 된 듯 허리를 흠칫흠칫 떨며 태휘의 어깨를 깨물어 댔다. 태휘는 통증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영롱의 몸에 몰두했다. 아직 삽입도 안 했는데 맞닿은 두 사람의 몸은 벌써 땀범벅이었다. 이렇게 무아지경으로 심신이 집중하는 섹스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으응……! 흐으읏!”
결국 손길만으로 사정까지 이른 영롱은 온몸이 녹진하게 풀어져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태휘는 손가락에 끼웠던 콘돔을 빼서 휴지통에 던지고 본격적으로 삽입할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영롱의 안에 들어갈 기대감에 아까부터 발기해 있던 성기는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다. 녀석의 두 다리를 어깨에 올리고 허벅지를 부드럽게 매만지는데, 순간 손끝에 닿은 피부 감촉이 생경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영롱의 허벅지 안쪽 살을 들여다보자 원래 매끈했던 피부에 희미한 자국이 보였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태휘는 몸을 일으켜 침실 조명을 켰다.
“형!”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태휘는 고개를 돌려 그러쥐고 있던 영롱의 다리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하얗고 매끈했던 피부 위로 우둘투둘하고도 불그스름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쪽 다리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쪽 다리도 군데군데 있었다.
태휘는 이내 그게 무슨 자국인지 알아봤다. 문신을 지운 흔적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허벅지뿐 아니라 아랫배 부근에도 불규칙한 흉터가 무수히 많았다. 영롱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숨 섞인 소리로 웅얼거렸다.
“불 켜지 말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