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11. 인상(印象) (04:40)
인상(印象)
어떤 대상에 대하여 마음속에 새겨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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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롱한테 연락 왔다고?”
오은은 안무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설민을 향해 물었다.
“어. 아까 문자 왔어. 태휘 데리러 간대.”
연습실에는 설민과 한강 그리고 이제 막 도착한 오은뿐이었다. 아직 신 대표를 포함한 회사 관계자들 누구에게도 현재 상황을 얘기하지 못했기에 안무팀 없이 멤버 세 명이서만 연습을 진행했다.
태휘를 찾아와야 대충 교통정리라도 될 텐데, 지금으로선 마냥 넋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도 없으니까. 우선 셋만이라도 안무 연습을 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세 명도 막상 연습에 집중하긴 어려웠다.
사라진 태휘를 찾아오고 영롱의 목 문제도 해결해야 이 연습도 의미가 있으니까. 재결합이 무산되기라도 하면 안무고 뭐고 아무 소용없었다.
그러다 보니까 동작 몇 번 맞춰 보고는 연습실 가득 음악만 크게 틀어놓은 채 휴게실 소파에서 기운 없이 늘어져 과자나 까먹는 중이었다.
설민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대답하자 오은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걔는 태휘 형 있는 데 어떻게 안 거야?”
“나도 모르지.”
설민이 무심히 대답하자 한강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투로 말했다.
“사귀는 사이잖아. 그래서 연락 됐나 보지.”
설민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형. 그게 말이 돼요?”
“왜 말이 안 되는데?”
“그 사달이 났는데도 둘이 계속 사귀겠어요? 그날 다 쫑났지.”
그날 녹음실의 살벌한 분위기를 돌아보면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태휘가 다신 영롱을 안 볼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때 오은이 끼어들었다.
“근데 차영롱이 태휘 형 데리러 갔다며?”
설민은 혼자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곤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
“태휘 형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오은이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하자 설민은 괜히 노래를 들으며 딴청 피우기 시작했다.
“……아, 이 노래 안무 엄청 빡셌잖아. 다들 생각나지?”
이설민, 본인도 모르는 사이 희망사항이 들통나 버린 거지. 오은은 혀를 쯧쯧 차며 측은한 눈빛을 쏘아 댔다.
“안쓰럽다, 안쓰러워. 설민이 형.”
“뭐가, 인마?”
“형도 이제 포기해. 원태휘와 차영롱은 지옥에서 온 한 쌍의 바퀴벌레라니까? 지구가 멸망해도 절대로 안 떨어질걸?”
뭐라고 항변하려던 설민은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설민의 입을 막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 아마 어느 정도 동의한다는 뜻이겠지. 오은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차영롱 그런 취급당하고도 쫓아간 거 봐봐. 그 커플은 속없는 차영롱 때문에 천년이고 만년이고 갈 거야.”
“그래? 난 태휘가 거의 보살인 것 같은데. 말은 모질게 해도 실제론 영롱이한테 한없이 약하잖아. 결국 영롱이 받아 주고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한강의 말에 설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른 거 다 떠나서 내 애인이…… 멤버들이랑 다 자고 다녔다고 하면……. 어후, 상상만 해도 끔찍해. 그걸 어떻게 살려 둬?”
“그니까. 태휘가 보살이 아니었다면 우리 다 여기 이러고 앉아 있지도 못했어.”
한강이 말하자 연습실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잠깐의 침묵 후 오은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좌우지간 두 사람이 빨리 돌아와야 뭐든 진행할 텐데.”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오전에 인터뷰 하나 취소했잖아. 나는 당장 ‘골목길 카페’ 촬영도 있어. 분명 우리 재결합 관련 질문할걸?”
설민이 맞장구치자 한강은 순간 머리가 아파 오는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러 대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인터뷰 피하면 틀림없이 언론에서도 수상하다고 말 나와.”
“그리고 제멋대로 기사 써재낄 거고.”
언론에서 악의적인 기사들을 양산해 내면 팬들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STORY는 부정적인 인상만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재결합의 성공이나 실패를 떠나 원래 갖고 있던 신비주의 이미지마저 손상되는 셈이니, 이 프로젝트는 안 하느니만 못한 시도가 되겠지.
과자를 집어 입에 넣으려던 설민이 머뭇거리며 멤버들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영롱이 영원히 노래 못 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날 상태 아주 나빠 보였잖아. 회복할 수 있긴 한 거야?”
“나도 몰라.”
오은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내저었다. 현역 가수이자 보컬과 교수이긴 하지만 이런 케이스의 의학적 소견을 내릴 만한 전문가는 아니었으니까. 설민은 혼자서 말을 계속했다.
“태휘가 잠수 탄 것도 이해되긴 하네. 아무리 영롱이를 아껴도 목을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했으니 얼마나 화났겠어? 그냥 일반인도 아니고 메인 보컬로 컴백하겠다고 돌아온 녀석이 말이야. 게다가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한테 숨겼으니 더 열 받겠지.”
“믿고 아낄수록 그 배신감이 더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리버, 지금 배신감 얘기하고 있니?”
“네, 배신감……, 허억!”
익숙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가 들리자 한강은 기겁하며 소파에서 튀어 올랐다. 한강뿐만 아니라 설민과 오은도 사색이 된 채 한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언제 소리도 없이 들어온 건지, 신솔 대표가 휴게실의 간유리 벽에 기대고는 멤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화 내용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있었는데, 그 탓에 반대로 누가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배신감이라……. 지금 내 상황에서 써야 할 단어인 건 맞지?”
멤버 셋은 신 대표가 어디까지 들었는지 몰랐기에 침만 삼키며 섣불리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저 반응을 보아하니 웬만큼은 다 들은 것 같은데……. 처음부터 다 들었다면 재결합이고 뭐고 인간 취급도 안 하고 다섯 명 전부 다 내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태휘가 잠수 탔다고?”
신 대표는 겨우 화를 누르고 있는 듯 평소보다 확연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그게…….”
“내가 걔를 알고 지낸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도 처음이지 말입니다. 멤버들은 그렇게 속으로만 대꾸했다. 입을 꾹 다문 채 묵언수행 중인 세 사람을 쏘아보던 신 대표가 다시 물었다.
“영롱이 상태가 어떤데?”
그의 표정은 한층 더 심각하고 어두워졌다. 간발의 차로 멤버들이 다 영롱과 잤다는 얘기는 듣지 못한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누가 말할래?”
10대 때도 아니고 이렇게 정자세로 나란히 서서 신 대표에게 혼나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멤버들이 서로의 눈치만 보고 아무 말도 못 하자 신 대표는 소파에 털썩 앉아 팔짱을 낀 채 말을 꺼냈다.
“재결합에 있어서 당사자인 너희에게 전권을 넘기고 나는 창구 역할만 맡기로 했다지만, 그래도 이 회사의 대표는 나잖아? 물론 나한테 숨기는 게 있을 수도 있어. 자고로 가족끼리도 비밀은 있는 법이니까.”
그러고는 세 사람의 눈을 한 명씩 마주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신 대표가 특유의 가벼움을 거두고 매서운 눈빛으로 응시하자 멤버들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에 있어서 내가 알아야 할 문제를 몰라선 안 되지. 그래야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으니까.”
멤버들을 천천히 차례대로 훑어보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리버가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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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휘는 영롱의 하체 여기저기 가득한 흉터가 눈에 들어오자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영롱도 그 심정을 알아챘는지 손을 내리고는 짐짓 덤덤한 투로 말했다.
“남의 몸에 장난질하기 좋아하는 남자들 있더라고.”
태휘는 영롱의 마른 허벅지를 그러쥐고는 다리 안쪽을 자세히 살폈다. 자신의 지인 중에도 문신했다가 지운 이들이 꽤 있었기에 그 흔적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착색된 피부 면적이 작은 걸 보니 대부분 레터링 문신이었던 모양이다. 뻔하지.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든가. 지금은 남아 있는 게 없다지만 문신은 새기는 것보다 지우는 게 더 괴롭다는 걸 알기에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이 갔다.
“이걸 허락했어?”
태휘는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해 나직하게 물었다. 어떤 이유로든 더는 영롱에게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허락 안 했어.”
영롱의 그 말에 당황스러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코끝이 시큰거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중엔 거의 포기했으니 허락했다고 봐야 하나.”
아무 감정 없이 덤덤하게 말하는 녀석의 태도에 자신이 대신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다. 그동안 대체 어떤 새끼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아온 거야.
“이때가 정말 내 인생에서 최악이었거든. 내 몸뚱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영롱은 다리를 오므리고는 뒤로 물러나더니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아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멤버들이랑 형이 마지막이었어. 나랑 잔 남자들 중 내 걱정해 준 사람들은.”
태휘는 괴로움에 두 눈을 감고 말았다.
“형이랑 헤어졌을 땐 형의 걱정이 그저 다 잔소리 같았어. 실은 다 나를 위한 거였는데. 형 말고는 그렇게 내 인생에 신경 써 주는 인간이 없더라고.”
입 안으로 짭짤한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눈물 안 보이려고 했는데. 지금 누구보다 울고 싶은 건 녀석일 텐데.
“다 내 몸만 원하고. 자기 하고픈 대로만 하려고 하고. 이상한 짓 강요하고. 그러다 보니 섹스에도 흥미 떨어졌어. 성욕 준 거 진짜라니까?”
영롱이 애써 웃음 섞인 말투로 가볍게 말하자 태휘의 심장은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형한테 못되게 해서 벌 받았나 봐.”
태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못되게 군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는데.
‘앞으로 그렇게 몸 걸레처럼 굴리고 살아.’
영롱이 의식했건 안 했건, 태휘의 그 말이 마음속 깊은 곳 비수처럼 꽂혀 그 말 그대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 일종의 저주의 주문처럼.
태휘에게 버림받은 이상 아무것도 의미 없다고 여겼기에 그 저주는 아주 손쉽게 영롱의 영혼을 통째로 삼키고 말았다. 그 저주 탓에 이 모든 일이 전부 자신이 자초할 벌이라고 믿게 되었고.
“내가 가진 걸 더 소중히 지켰어야 했는데. 그치? 형도, 멤버들도, 목소리도, 몸도.”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 위에 덮여 있던 이불로 꼬물꼬물 들어갔다. 태휘의 눈치를 보던 영롱은 그제야 눈물을 글썽이며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보니까 하고 싶은 마음 사라졌지?”
녀석의 말끝이 떨렸다. 태휘는 조금 전까지 녀석이 왜 그토록 몸을 사렸는지 이제야 알았다. 태휘 자신이 던진 비수이고 저주였다. 벌을 받아야 하는 건 영롱이 아닌 자신이었다.
영롱이 돌아온 그 순간, 그의 두 발 앞에 냅다 고꾸라졌어야 했다. 그러기는커녕 차갑게 굴고 비난하고 원망하기 바빴다니. 태휘는 고개를 내저으며 눈물을 떨궈 버렸다.
“널 지켰어야 하는 건 나야.”
잔뜩 목멘 소리로 말하자 영롱은 이불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이불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가락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널 책임져야 했는데 혼자 내버려 둬서 미안해.”
태휘는 영롱의 하얗게 질린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쪽 손은 이불 속에 넣어 그의 맨 어깨를 감싸 안았다.
“헤어질 때만 해도 너와 10대, 20대를 함께 보냈으니 나머지 인생은 떨어져 지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
태휘는 영롱의 귀가 있을 위치를 가늠해서 이불 위로 나지막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근데 헤어져 보니까 다 착각이고 오만이었어.”
이불이 들썩거리더니 영롱의 흐느끼는 소리가 차츰 크게 들려왔다.
“떨어져 지내도 좋은 시간 따윈 없다는 걸 깨달았어. 너 없이 보낸 날들은 텅 비었거든.”
태휘는 그 어느 때보다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고르며 말을 이었다.
“아프게 해서, 외롭게 해서 미안해.”
그토록 긴 시간 동안 마르고 갈라진 마음의 균열을 과연 어떤 말로 메울 수 있을까? 어쩌면 일평생을 쏟아 부어도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기꺼이 할 것이다. 녀석을 지킬 수만 있다면 뭐든지.
“나머지 시간 동안 널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기회를 나한테 줘. 이제 진짜 상처 주지 않을 테니까.”
잠깐이지만 녀석의 얼굴을 못 보는 이 찰나가 너무 괴로웠다. 10년 동안 못 보고 살았으니, 이젠 단 한 순간도 놓치기 싫었다.
“나 좀 안아 줘, 영롱아.”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처럼 애처롭게 말하자 마침내 이불이 걷히더니 영롱의 얼굴이 나타났다. 숨이 막혔는지 시뻘게진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영롱은 붙잡듯 태휘의 팔을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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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느라 눈물 콧물 잔뜩 쏟아 낸 두 사람 주위엔 어느새 티슈가 한 움큼 쌓여 있었다. 섹스하다가 말고 갑자기 오열 파티라니. 눈물이 어느 정도 마르고 문득 이 상황이 우스워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정말 싫어.”
영롱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왜 이렇게 어렵게 돌아온 거지?”
태휘가 영롱의 젖은 눈가를 티슈로 톡톡 눌러 주었다. 영롱은 훌쩍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왜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헤매는 걸까? 지금껏 시행착오 했으면서 빠른 길 찾기가 왜 이리 어려운 거냐고.”
자신도 했던 생각을 영롱이 똑같이 하는 게 신기해 태휘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영롱은 태휘의 팔을 흔들며 투정부리듯 말했다.
“그렇지 않아? 어른이 되면 더 쉬워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앞으론 좀 더 낫겠지.”
“어떻게?”
“헤매더라도 이젠 둘이니까.”
그 말이 위안이 됐는지 영롱은 입을 앙다물고는 말없이 태휘의 어깨에 기댔다. 태휘는 영롱을 더 세게 끌어안고는 귓가에 대고 읊조리듯 말했다.
“내가 더 아껴 줄게. 더는 내 생각만 하지 않을 거야.”
그는 여태껏 하지 못한 고백의 말들을 실컷 다 쏟아 내기로 결심한 사람 같았다. 아니면 스스로 되뇌며 결심을 다잡는 걸 수도 있고.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을 꼭 안고 있는 악력을 느끼며 영롱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영롱은 몸을 굴려 태휘의 가슴 위에 얼굴을 기댄 채 올려다보았다.
“동정하는 거면 싫어. 죄책감 때문에 이러는 거면 더 싫고.”
태휘는 손을 뻗어 붉어진 영롱의 눈가를 쓰다듬고는 반문했다.
“싫으면? 다른 방법 있어?”
“……아니.”
“두고 보자고. 동정인지, 사랑인지.”
이전과 다르게 태휘가 한결 여유로운 태도로 반응하자 영롱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서로를 옥죄고 재단하는 빠듯한 사랑은 더 이상 못하니까. 그의 말대로 지름길은 여전히 모르더라도 함께 걷는다면 괜찮을 거다.
“키스해 줘.”
영롱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던 태휘는 그 말에 곧바로 턱을 잡아 자신에게로 당겼다. 마른 입술을 열자 말랑한 혀가 태휘를 맞이했다.
한 쌍의 입술과 혀가 눅진하게 부대낄수록 사그라졌던 열기가 금세 다시 올라오는 듯했다. 영롱이 뒤로 물러서며 겹쳤던 입술이 떨어지자 태휘가 아쉽다는 듯 쫓아왔다.
“형 다 식었어?”
“아니.”
“아까 하던 거 계속할 수 있어?”
“너야말로 힘들면 말해.”
영롱은 태휘의 가슴을 조몰락거리며 새침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성욕 진짜 줄었는지 확인해 본다며.”
그건 아까 확인한 것 같은데. 태휘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킨 뒤 둘 사이를 막고 있던 이불을 끌어내려 버렸다. 그러고는 침대 위로 영롱을 눕힌 채 자신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바로 삽입하려는 건가 싶어서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던 영롱은 자연스럽게 시선이 태휘의 하체로 향했다. 그런데 이번엔 태휘의 물건이 아닌, 다리에 길게 난 수술 자국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크게 남은 자국어서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흉터 길게 남았네.”
영롱은 손을 뻗어 조심스레 흉터를 만져 보았다.
“인공 뼈랑 철심 박았으니까. 많이 흐려진 건데 워낙 수술 부위가 넓어서.”
다른 STORY 멤버 모두가 그렇듯이, 겉에서 보기에는 10년의 세월 동안 다들 변함없이 그대로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발가벗겨 보면 전에 없던 비극의 훈장들이 저마다 있었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건 없었다. 몸도, 마음도. 영롱은 작지만 여러 개, 태휘는 크게 하나의 흉터가 생겼다. 어쩌면 그 흉터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인생일지도 모르고.
태휘는 자신의 수술 자국을 만지작거리는 영롱이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일부러 가벼운 투로 말했다.
“내가 더 흉측하지?”
“……그래도 형은 사고잖아.”
“네 흉터도 사고나 마찬가지야.”
영롱은 피식 웃음이 먼저 나왔지만 자상한 그 한마디에 곧바로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이제 우린 아무도 거둬 가지 않는 폐기물들이지.”
“인정해.”
영롱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쳤다.
“서로 실컷 쓰다가 분리수거도 안 하고 버렸잖아.”
“그러니 우리가 서로 거둬 줘야지.”
태휘의 미소에 영롱도 눈물을 겨우 삼켰다. 영롱은 그대로 몸을 숙여 태휘의 흉터를 따라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어정어정 몸을 움직여 태휘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내가 해도 돼?”
영롱이 세상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저런 말을 하니 태휘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언제는 네가 허락받고 했냐며……. 오랜만이라 쑥스러우면서도 그 와중에 되살아난 성욕 때문에 이런 희귀한 장면도 볼 수 있다니. 사고 때 안 죽고 살아 있길 잘했네.
헤벌쭉 벌어진 태휘의 입꼬리로 대답이 됐는지, 영롱은 스스로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는 꼿꼿이 선 성기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아까 풀긴 했지만 워낙 오랜만의 삽입이라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아흣……!”
태휘는 영롱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조여 오는 압박감에 정신을 잃은 것 같아 이성을 겨우 붙들고 있었다.
오랜만인데 제멋대로 몰아붙였다간 녀석이 힘들 테니까. 그때 혼자서는 도무지 무리였는지 영롱이 두 팔로 태휘의 목을 끌어안고는 귓가에 탄식하듯 속삭였다.
“형, 나 도와줘.”
원체 혼자 느끼고 즐기기의 선수였던지라 섹스 중에 부탁하는 건 더 세게 박아 달라고 조를 때뿐이었는데. 도리어 그 점이 태휘에겐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이성을 붙들려는 노력도 별 소용이 없었다.
태휘는 양손으로 영롱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는 아래로 세게 내리눌렀다. 영롱은 속으로 신음을 삼킨 채 태휘를 더 꽉 끌어안았다. 예전엔 맘껏 소리 지르기 바빴던 녀석이 신음을 참는 것도 새로운 모습이었다. 소리 내지 않는 건 아마도 목 때문이 아닐까 어림짐작했다.
“흐읏, 흣……!”
태휘는 영롱의 허리를 잡은 채 자신의 엉덩이를 들어 빠르게 운동하기 시작했다. 영롱은 어지러운 신음을 흘리며 태휘의 몸짓에 맞춰 같이 허리를 흔들었다.
어느새 삽입의 고통은 사라지고 하체에서부터 전신으로 쾌감이 퍼져나갔다. 손끝, 발끝까지 저릿하게 만드는 감각에 퍼들거리던 영롱은 어느새 늘어져 침대에 길게 눕고 말았다.
태휘는 밝은 조명 아래에서 빛나는 영롱의 나신을 모처럼 감상하며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였다. 아랫도리는 계속해서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영롱의 엉덩이를 쳐올렸다.
굵고 단단한 태휘의 물건이 영롱의 구멍을 들락날락거리다가 한 번씩 강하게 내리꽂자 영롱은 더는 신음을 참지 못했다.
“아! 아아아! 형!”
몰아붙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오늘의 목적은 영롱의 잃어버린 성욕을 찾아 주는 거니까. 녀석도 분명 그걸 원하겠지. 태휘는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하며 미친 듯이 박아 댔다.
영롱의 몸을 뒤집어 엎드리게 한 뒤 엉덩이를 들어 올리자마자 자신이 옳았다는 걸 알았다. 어느새 바짝 선 성기에선 프리컴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영롱의 내벽 역시 그새 적응했는지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며 태휘의 것을 자극했다.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이 감도에 황홀해진 태휘는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오랜만에 들어선 영롱의 안은 여전히 빈틈없이 뜨거웠다. 그 안에서 영원히 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태휘가 엉덩이를 어루만지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자 영롱이 바로 흐느끼며 졸라댔다.
“형, 빨리…….”
영롱 역시 자기 안을 가득 채우고 흔들어 대는 묵직한 존재감이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간 수많은 남자가 드나든 구멍이었지만 이만큼 꽉 맞아 들면서 넘치도록 몸과 마음을 채워 주는 건 태휘뿐이었다.
엉덩이가 얼얼하도록 강하게 박아 댔지만 뇌의 어딘가가 터져 버린 듯한 강렬한 쾌감 덕분에 아파할 틈조차 없었다. 비로소 제 짝을 만났다는 환희에 감격한 내벽은 태휘를 꽉 문 채 쉽게 놔주질 않았다.
“하아, 영롱아…….”
태휘는 손을 뻗어 땀이 송골송골 맺힌 영롱의 등허리를 가볍게 훑어 올렸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잔뜩 예민해진 탓에 그 감촉만으로도 전류가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내달렸다.
영롱이 흠칫흠칫 몸을 떠는 사이 태휘는 허리를 뭉근하게 돌려 느끼는 지점을 정확하게 눌러 댔다. 영롱은 머리를 위로 젖히고는 목놓아 신음했다. 잘박잘박 차오르는 파도처럼 쾌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보며 즐기듯이 태휘가 절정까지 몰아세우지 않고 감질나게 움직이자 영롱은 세상 서러움을 다 느꼈다.
“형, 제발…….”
“조금, 기다려.”
태휘가 헐떡이며 영롱의 성기를 쥐더니 그 끝을 손으로 막았다. 영롱은 머리로는 태휘가 같이 가고 싶어 이러는 거라고 이해하면서도 몸으로는 기다리기 힘들었다.
스스로 허리를 움직여 태휘의 것을 더 깊이 머금으려 하니 그가 뒤로 물러났다. 안타까운 감각에 속이 상한 영롱은 엉엉 울고 싶었다. 태휘의 다른 손이 영롱의 입 안을 파고들자 소리가 나도록 빨고 핥으며 재촉했다.
이렇게 다정하게 말고 난폭하게 자신을 휘둘러 주길 정신을 잃을 정도로 범해 주길 원했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태휘가 한쪽 다리를 세우고는 영롱의 엉덩이를 잡아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박아 대기 시작했다.
영롱은 두 팔을 바르작거리며 손에 닿는 무엇이든 움켜쥐려 했다. 태휘가 깊이 들어오고 빠져나갈 때마다 영롱은 벌게진 얼굴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뻥긋거렸다.
몰아치는 쾌감에 저절로 발바닥이 안으로 곱아들고 겨우 침대 시트를 움켜쥔 두 손끝이 하얗게 질려왔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터져 나오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점멸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아득했던 희열이 순식간에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자신의 허리를 붙든 태휘의 축축한 손과 등 뒤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 귓가에 쏟아지는 거친 숨결만 생생히 남았다.
마치 불기둥 같은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 영롱은 태휘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쳐 깍지를 꼈다. 온몸에 힘이 풀리고 녹아버릴 것 같았지만 더 하고 싶었다. 10년의 공백을 채우기엔 아직 부족했다.
역시나 성욕이 줄어든 게 아니었어. 내 인생에서 원태휘가 부족했을 뿐. 영롱은 가쁜 숨을 할딱거리면서도 태휘의 손을 꼭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렸을 땐 마냥 기다랗고 예뻐서 좋아했던 손이었다. 지금은 그저 내 남자의 손이어서 좋았다. 이 손을 얼마나 그리워했던지. 어찌나 다시 잡고 싶었던지.
‘형은 원래 내 남자였어.’
이 남자의 머리끝부터 손끝, 발끝까지 놔주고 싶지 않았던 어렸을 때의 간절한 열망이 비로소 기억이 났다. 지치고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잊고 있던 모든 감각을 깨워 준 내 남자의 손을 다시는 놓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 있건, 영원히 내 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