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12. Wind-up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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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태휘는 팔이 허전한 느낌에 눈을 떴다. 자기 품 안에서 잠든 연인의 체온과 무게에 흡족해하며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설마 꿈이었나?
태휘는 벌떡 일어나서 침대 주위를 살펴보았다. 혼자 미친 짓 한 게 아니라면, 영롱과 10년 만의 회포를 푼 흔적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꿈이 아니라는 안도감도 잠시, 침실 안에 영롱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가운을 주워 입고 호텔 방을 둘러보았다.
어찌나 격렬하게 사랑을 나눴는지 난리도 아니었다. 새벽쯤 그만하기로 하고 같이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가 다시 불붙는 바람에 수건과 가운, 티슈, 콘돔 등이 욕실과 침실 곳곳에 뒹굴고 있었다. 그것들을 대충 정리하는 동안에도 녀석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둘이서 동이 틀 때까지 했던 행위들을 떠올리면 몸도 성치 않을 것 같은데 어디 간 거지. 아직은 한참 곯아떨어져 있을 시간인데 보이질 않으니 슬슬 불안해졌다. 막상 다시 시작하는 게 두려워져 하룻밤 유희로 끝내기로 한 건 아니겠지?
무심코 창가로 다가간 태휘는 커튼을 마저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그친 모래사장은 물기를 머금어 흑설탕처럼 빛났다. 그 위로 새파란 파도가 여러 겹의 하얀 거품을 내뿜으며 부딪쳤다.
비수기인 데다가 평일 오전이어서 해수욕장엔 아무도 없었…, 없는 줄 알았는데. 산 위 절벽에 위치한 리조트의 최고층 객실인지라 가늘게 실눈을 뜨고 봐야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세히 내려다보니, 정동진 방파제에서 바다를 보며 서 있는 자그마한 형체가 눈에 익었다. 밤새 태휘의 팔을 간지럽힌 은빛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휘날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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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혼자 나왔어?”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영롱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보다도 먼저 외투 안감이 영롱의 시야를 가렸다. 태휘는 자신이 입고 나온 트렌치코트를 벗어서 펼치고는 바로 덮어 주었다.
그대로 뒤에서 태휘가 와락 안아 오자 영롱은 아득히 먼 18살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데뷔 직전 STORY 멤버들과 처음 여행 온 곳이 바로 여기였고 그때도 태휘가 이렇게 안아 줬었다.
‘야, 차영롱! 저 새끼 저거! 얼어 죽어도 모른다!’
그때도 원태휘는 매니저 형이 고함치는 사이, 말없이 쫓아와 잠바부터 입혀 줬었다. 그 당시 말은 못했지만 두근거리다 못해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날 본 일출이 더 감격스러웠던 걸지도 모른다.
따뜻한 태휘의 품 안에서 몽글몽글하게 피어나던 설렘과 함께 새해 처음 떠오르는 새빨간 해를 보다니. 모호했던 자신의 감정의 덩어리를 목도하고 온기로 체감한 순간이었을지도.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일을 겪었는데도 아직도 그 날의 감흥이 생생했다. 오히려 그때보다도 지금이 꿈같아 현실감이 없었다. 밤새 몸에 있던 모든 액체를 짜낸 탓에 나올 눈물도 없는데 괜스레 코끝이 찡해져 왔다.
“형 너무 곤히, 자길래…….”
애써 태연한 척했으나 어제 너무 많이 울어 목이 잠긴 탓에 목소리가 엉망으로 나왔다. 영롱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태휘는 아무 말도 않은 채 영롱을 꼭 끌어안고만 있었다. 영롱은 작게 헛기침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 말을 이어 보았다.
“그냥 혼자 나왔지. 바다 보고 싶어서.”
목소리는 여전히 갈라져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옥구슬 같던 목소리의 소유자 18살 차영롱과 지금의 차영롱은 확실히 달랐다. 일순 현실감을 되찾자 영롱은 금세 씁쓸해졌다. 영롱의 뒤에서 조용히 있던 태휘도 같은 날의 기억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일출은 놓쳤네.”
태휘의 중얼거림에 영롱은 그때와 다른 점을 또 발견했다. 일출의 순간은 한참 전에 지나고 어느덧 해는 수평선에서 한참 떠올라와 있었다.
“그저 탁 트인 바다가 좋은 거지. 일출 봐서 뭐해.”
해야 매일 뜨고 지는 거. 영롱은 괜히 심통이 나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는 새벽의 여명보다도 일몰에 감성이 짙어지곤 했다. 언젠가부터 태양의 힘찬 솟아오름 따위는 봐도 무덤덤했다.
대신 해가 지는 광경은 도시에서도 넋 놓고 보고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어렸을 때에 비해 설레고 들뜨는 등 격양된 감정보다는 차분한 상태가 더 편안해서 그런 걸까. 그렇다고 너무 가라앉고 싶지만은 않은데.
이렇게 태휘의 품에 안겨 있으면 기분만은 여전히 18살 소년이어도 막상 현실은 목소리도 안 나오고, 가수 복귀도 암담한 상황이니까.
영롱은 그런 생각을 하며 태휘가 덮어 준 코트의 옷깃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때 말없이 영롱을 끌어안고만 있던 태휘가 입을 열었다.
“너 효림 선배 알지? 예전에 우리 앨범에 코러스 해 준.”
갑자기 다른 사람 얘기? 영롱은 의아해져 태휘를 돌아보았다.
“무슨 작곡가 형이랑 결혼한 누나?”
태휘는 끄덕거리고는 말을 계속했다.
“둘이 결혼하고 효림 선배 앨범은 다 그 형이 프로듀싱한 거 알아?”
“몰랐어.”
“앨범 재킷 딱 펼쳐보면. 작곡, 작사, 편곡이 다 그 형 이름이었어. 심지어 코러스나 세션에도 참여하고.”
영롱은 태휘가 이 얘기를 왜 꺼낸 건지 알 수 없었다.
“일종의 집착까지도 느껴지더라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못 맡기겠다는 것처럼.”
“그 형의 뮤즈였나 보지.”
“그런데 그 후로 효림 선배 성대결절 걸리고 활동 한동안 쉬더니 이혼했어.”
“…….”
“나중에 효림 선배가 그러더라. 알맹이만 쏙 빼먹고 껍데기만 남으니 버려진 기분이었다고.”
그제야 영롱은 그가 이 말을 꺼낸 이유를 깨달았다.
“나 혼자 그런 생각하곤 했어. 네가 계속 내 옆에 있었다면 나도 그 형처럼 굴었을지도 모른다고.”
“형은 안 그랬을 거야. 나 목 이렇게 되도록 두지 않았을걸.”
“그건 모르는 거야. 언젠가는 널 지치게 했을지도.”
이제 와 아무 소용없는 ‘만약에 ~했었더라면’ 가정법이었으나 영롱은 바로 눈치 챘다. 자신이 사라진 후, 원태휘는 괴로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가 헤어질 수밖에 없던 수많은 이유를 만들어 낸 뒤, 그것들 중 최악은 아니었을 거라며 합리화하고 위안을 얻고.
태휘는 지금 영롱을 위로해 주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은 과거의 상황을 들먹이며 모두 다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더는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영롱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태휘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중요한 건, 우리는 다시 만났다는 거야.”
다행히 그의 말은 자책으로 끝나지 않았다.
“네 말대로 그 모든 일을 겪었는데도.”
태휘는 깍지 낀 영롱의 손을 빈틈없이 감싸 쥐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아무리 최악이어도, 엉망이어도, 감추지 마.”
어떤 화려한 약속과 다짐보다도 그 말이 더 가슴을 울렸다.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면 되는 걸, 예전엔 왜 못 했을까?
“나도 그럴 거니까.”
영롱은 여러 가지 감정이 켜켜이 쌓이며 목이 심하게 메어 왔다. 그래서 태휘의 손을 꼭 맞잡고는 대답을 대신했다.
요정 대모님(이 아니고 세나) 덕분에 호박 마차(가 아니고 고급 세단)까지 얻어 타고 달려와 왕자님을 만나 키스(뿐 아니라 섹스)까지 했지만 하룻밤 만에 목소리가 돌아오는 마법 따윈 없었다. 애초부터 영롱 자신이 동화 속의 착한 주인공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상태 역시 현실로 받아들이고 망친 일부터 하나씩 처리해야지. 혼자라면 겁났겠지만 등 뒤에 버텨 주고 있는 이 사람과 함께라면 괜찮을 거다. 어쩌면 타인에게 그런 믿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마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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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어느덧 방파제에서 내려와 해변을 걸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는 서울로 가능한 빨리 돌아가야 했지만, 오랜만에 단둘이 온 바다인지라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발을 벗어 손에 든 채 맨발로 바닷물을 느끼던 영롱은 여벌의 옷이나 수영복을 챙겨 오지 않아 아쉽다며 툴툴거렸다.
“여름에 또 오자. 그땐 멤버들이랑.”
태휘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하자 영롱은 사뭇 놀랍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멤버들? 형이 웬일이야?”
“뭐가?”
“멤버들까지 챙길 정도로 애틋한 정이 있다니 의외잖아.”
영롱의 말에 태휘도 동의하는지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정동진 오니까 자연스럽게 떠올랐어.”
“형도 이제 안 거지.”
영롱은 밀려오는 파도에 맞춰 발로 물장난 치며 말했다.
“우리 이제 멤버들 말고는 친구 없잖아.”
태휘는 그 말엔 동의 못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 다른 친구들도 많이 생겼어.”
“그래도 우리의 이런 요란뻑적지근한 연애사까지 다 아는 친구는 없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 이 막장 대서사시를 어떻게 다 말해? 태휘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영롱은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멤버들이랑 나랑 있던 일, 화 다 풀린 거야? 그거 때문에 재결합도 안 하려고 했으면서.”
“풀렸다기보다는……. 네가 다른 남자들 만나고 다닌 것보단 차라리 낫다는 생각했어.”
그 말에 영롱은 진심으로 놀라 감탄하며 말했다.
“진짜 마음이 바다처럼 너그러워졌네?”
태휘는 복잡한 심정으로 또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적어도 변태 쓰레기들은 아니니까.”
아마 지난 밤 영롱의 몸에서 본 것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영롱은 그 말을 뭐라고 정정해 주고 싶어 입을 벌렸다가 이내 도리질했다.
“……하긴! 멤버들은 ‘그 정도까지의’ 변태들은 아니지.”
그렇게 말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물장난을 치는 영롱을 바라보며 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무슨 짓까지 한 건지, 이제는 더 궁금하지도 않다. 영롱은 화제를 돌리려고 주변을 둘러보며 딴청을 피웠다.
“형, 저거 봐! 저 사람들 서핑 하러 왔나 봐!”
“그래. 요새 여기 서핑 많이…… 어라?”
태휘는 영롱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놀라며 멈춰 섰다. 하필 서핑 보드를 들고 해변으로 오는 무리들 뒤편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태휘를 따라 걸음을 멈춘 영롱도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위치 추적 장치랑 도청기 단 거 아니야?
“내 이럴 줄 알았어. 저 바퀴벌레들.”
짜증 가득한 오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언제 온 건지 한강과 오은이 주차장 쪽에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설민도 보였다.
“어이없어. 새해도 아닌데 무슨 정동진이야.”
“아, 머리 다 망가지네.”
오은과 한강이 투덜거리면서 다가오자 태휘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멤버들을 향해 물었다.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내가 출발할 때 얘기하긴 했어.”
영롱이 태휘의 팔을 끌어안으며 대신 대답하자 태휘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혹시 내가 맘 약해져서 형이랑 사랑의 도피하고 싶어질까 봐.”
영롱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혀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다들 리더의 첫 잠수에 걱정했거든.”
“걱정이라기 보단 긴장이라고 해 줄래?”
오은은 영롱의 말을 굳이 정정해 주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오은은 말하면서도 태휘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눈치 볼 거면 안 하면 될 것을 욕먹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성미라.
하지만 태휘 스스로 생각해도 멤버들 걱정할 짓을 한 건 맞기에 욕할 입장은 아니었다. 오은에게도 할 욕은 그날 실컷 다 했으니까. 게다가 자기 옆에 영롱이 찰싹 붙어 있으니 마음이 그렇게 잔잔한 호수 같을 수 없었다.
한편 영롱은 태휘에게 팔짱을 낀 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까 나 동해 간다고만 했지. 정동진이라고는 말 안 했는데.”
바닷바람이 세게 불어오자 한강은 후드를 덮어쓰고는 줄을 꽉 당기며 말했다.
“동해라고 하면 올 데가 여기밖에 더 있어?”
“형 서재에 액자까지 해 놨잖아. 그 넓은 집에 우리 사진은 그것밖에 없던데.”
집에 딱 한 번 초대했을 뿐인데 다들 그걸 기억하고 있네. 담배를 다 피고는 뒤늦게 온 설민이 짐짓 성질난 척 태휘와 영롱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여기서 아주 꿀 빨고들 있구만! 회사 다 뒤집어 놓고 말이야!”
설민은 모래투성이가 된 맨발 차림의 영롱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회사 뒤집어졌어?”
“그럼. 팀의 리더랑 메보가 사라졌는데 조용할 줄 알았냐?”
“영롱이 목 상태, 결국 대표님이 아셔서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그 말에 놀란 영롱은 순간 손끝에 힘이 풀려 쥐고 있던 신발을 놓칠 뻔했다.
“차영롱. 각오 단단히 해라.”
“어우, 데뷔 초로 돌아간 것처럼 혼났네.”
설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서리를 쳤다. 멤버들 저마다 돌아가며 잔뜩 겁을 주자 영롱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푹 떨궜다. 그 모습에 한강이 푹 한숨을 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 당장 잡아 오래. 무슨 일이 있어도 너 꼭 치료해 준다고.”
예상치 못한 말에 영롱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커다래진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덩달아 사색이 됐던 태휘가 놀란 영롱을 대신해서 되물었다.
“그럼 재결합 프로젝트는?”
“당연히 중단이지.”
한강이 말하자 영롱은 여전히 벙찐 표정으로 입만 벌리고 있다가 태휘와 눈을 맞췄다. 오은은 자세히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두 사람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일단 닥치고 태휘 형 손 붙잡고 오기나 하래. GBS랑 황혜 CP는 본인이 직접 상대하신다고.”
‘그런 일이 있으면 째깍째깍 나랑 상의를 해서 해결책을 찾았어야지! 너네끼리 싸우고 삐치고 울고불고할 게 아니라! 나나 회사 스탭들은 무슨 병풍인 줄 알아? 일 원데이 투데이 하니?’
“그러니까, 빨리 돌아가자. 리더야, 메보야.”
설민은 신 대표의 말을 전하고는 어린 아이가 졸라 대듯 몸을 흔들며 칭얼거렸다. 영롱은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훔치느라 손에 들고 있던 신발을 놓치고 말았다. 그 찰나 꽤 높은 파도가 밀려와 영롱의 바지를 적시고 말았다.
태휘는 놀라 얼른 영롱을 안아 들었고, 와중에 영롱의 신발 두 짝은 파도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설민과 오은은 순간적으로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야! 영롱아! 너! 신발!”
“아, 새끼 손 더럽게 많이 가네!”
나이를 먹었다고 무조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여전히 세상은 어렵고 지치기 마련이니까.
모든 일을 혼자 다 버티려고 하는 것보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게 진짜 용기 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땐 왜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고, 죽기보다 싫었는지. 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전투만 하려 했는지.
영롱은 태휘에게 안긴 채 우느라 바빴고, 태휘는 그런 영롱을 달래 주느라 바빴고, 설민과 오은은 영롱의 신발을 한 짝씩 구조하느라 바빴다. 한강은 멀찍이서 팔짱을 낀 채 멤버들을 바라보며 혀를 차기 바빴다.
“이놈의 집구석은 예나 지금이나 바람 잘 날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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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SS엔터에서 낸 보도 자료 확인하셨어요?”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쫓아온 후배 기자의 말에 다림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나 주말 내내 텐보이즈 콘서트 리뷰 썼잖아.”
“메일 빨리 확인해 보세요.”
그러고는 바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후배의 표정이 자못 심각하다는 걸 알고 다림은 바로 메일함을 열었다. 빠르게 내용을 읽어 내려갈수록 놀라움과 당혹감에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메일을 다 읽고 나니 눈동자가 자연스레 부장실을 향해 도르르 굴렀다. 아니나 다를까, 안 부장이 유리벽 앞에 서서 다림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순간 등줄기에서 마른 땀이 흘러내리며 오싹함을 느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부장실로 향했다. 당장 고함부터 내지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안 부장은 목소리는 담백했다.
“너 알고 있었어?”
“뭘요?”
“차영롱 상태.”
다림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눈을 내리깐 채 최대한 안 부장의 시선을 피했다. 조금 전 다림이 확인한 SS엔터테인먼트의 보도 자료 내용은 이랬다.
안녕하세요.
SS엔터테인먼트입니다.
STORY의 재결합에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 공개했던 차영롱의 영상으로 반가움과 기대가 크셨을 텐데요.
최근 차영롱의 건강상에 문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드리게 되어 무척 안타깝습니다.
병원에서의 정밀 검진 결과 ‘기능성 음성장애’라는 진단이 나왔으며, 발성에 무리가 가는 일정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습니다.
아티스트의 치료와 회복이 우선이기에 GBS와 진행할 예정에 있던 ‘STORY 재결합 프로젝트’ 방송 촬영은 잠정 연기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양해와 많은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아티스트의 치료에 차질을 빚지 않는 선에서 다른 방식의 재결합 이벤트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STORY 멤버 전원이 빠른 시일 내에 팬 여러분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뵙는 만큼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안 부장은 침묵으로 다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눈길을 피하던 다림은 하는 수 없이 실토했다.
“대충요.”
안 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다림은 다급히 덧붙였다.
“근데 다 짐작일 뿐이지,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고요!”
SS의 보도 자료를 보고 나서야 비어 있던 퍼즐 한 조각이 채워졌다. 팀 해체가 자신 때문이라고 했던 편지. 군대에서 노래를 전혀 부르지 않았다는 영롱. 그리고 잠적. 다림의 촉으로는 그에게 어떤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촉만으로 영롱의 현재 상태를 유추하기엔 심한 비약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그걸 안 부장에게 보고하고 기사로 내는 건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었다.
“야. 우리가 언제 팩트 가지고 장사했어? 뭐라도 낌새챘으면 일단 써 갈겼어야지! 틀리면 그때 가서 아님 말고 하고!”
“그랬다가 허위 사실 유포로 고소 먹으라고요? 회사가 저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기사 하루 이틀 써? 고소 안 당하는 선에서 그럴듯하게 짜 맞추면 충분히 건드릴 수 있잖아!”
다림 역시도 조금은 아쉬웠다. 그냥 눈 딱 감고 밀고 나갔으면 특종 잡고 커리어에도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 부장은 계속해서 몰아세웠다.
“그리고 네 촉. 틀리지 않았고. 이거 우리가 단독으로 냈으면 대박인 건데! 넌 진짜 일을 이딴 식으로……. 이럴 거면서 무슨 심층 기사야!”
“애초부터 저는 단독 따위 욕심 없었어요. 제 개인적인 관심으로 시작한 거였다고요.”
“개인적 관심은 네 일기장에나 써. 참나! 이렇게 족족 SS에 뒤통수를 맞네.”
SS엔터테인먼트도 그렇고 STORY도 참 한결 같다 싶었다. 언론에 휘둘리기는커녕 반대로 물 먹이는 솜씨까지 예전 그대로라니.
누가 먼저 냄새 맡기 전에 투명하게 다 오픈하는 방식은 언론사 입장에선 기사를 자극적으로 뽑아낼 수가 없으니 클릭수 장사에 영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림도 SS의 고상한 척하는 태도는 별로였다. 다른 연예기획사랑 차별화하려고 용 써 봤자 어린 팬들을 ATM으로 여기는 장사치 마인드는 똑같으면서. 하지만 안 부장이 보도 윤리쯤은 가볍게 무시하고 입에 거품 무는 꼴을 보니 같은 기자로서 일순 자괴감이 들었다.
“아무튼 너 이제부터 STORY에 대해선 한 줄도 쓰지 마.”
“왜요?”
“충분히 털 수 있었음에도 그 놈의 개인적 관심 때문에 평소 실력 발휘 못 하는 거 같으니까. 내가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STORY. 아니, 차영롱이랑 무슨 사연 있어? 팬이었나?”
다림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안 부장을 쳐다보았다.
“부장님. 저 아시잖아요.”
“잘 알지. 팬이었다가 연예부 기자 들어오는 애들 많이 봤는데, 기다림은 그런 부류와 전혀 거리가 멀다는 거. 그런데 이번엔 너무 너답지 않아서 말이지.”
선구안 어쩌구 들먹이며 적극적으로 취재 지원해 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별걸 다 트집 잡아 빠지라고 하네? 일관성 없는 안 부장의 태도에 질려 버린 다림은 진심으로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부장실에서 나와 버렸다. 뒤에서 뭐라고 욕하는 안 부장의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지금 욕 나오는 게 누군데.
자리에 돌아오자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 와있었다. 확인해보니 GBS의 정 작가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GBS도 난리 났겠구나 싶었다. 말이 잠정 연기이지 영롱이 언제 회복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올 스톱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방송국 입장에선 제작과 편성에 큰 차질이 생겼으니 핵폭탄 맞은 격일 텐데 용케도 전화할 정신머리가 있네. GBS의 상황이 궁금하기도 하여 다림은 사무실의 옥외 테라스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 왜 이리 전화가 안 돼요? 기 기자님~.
저번에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다정한 말투에 다림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세요, 정 작가님?”
정 작가는 SS엔터테인먼트가 낸 보도 자료 얘기부터 꺼내더니 갈수록 흥분하며 SS가 방송국 측에 얼마나 무책임하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는지 열변을 토하기 작했다. 말투의 온도 차와 그 내용을 미루어보아 그가 먼저 연락한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다림은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팔짱을 끼고는 무심히 정 작가의 하소연을 듣고만 있었다.
- 너무 어이없지 않아요? 우리 다음 주에 제작발표회 일정까지 잡아 뒀다고요! 회의까지 잘 해 놓고 콘서트 장소랑 협찬 섭외까지 다 마친 상태에다가 대본까지 나왔는데 뒤늦게 취소라니. 상도에 어긋난 거 아니에요?
“차영롱은 언제부터, 어쩌다 그런 거래요?”
- 그건 모르죠.
정 작가는 영롱의 상태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 없어보였다.
- 회의 때도 다들 얼마나 고자세였는지 알아요? 저희 쪽 컨셉이나 제안 다 거절하고 자기들 입맛대로만 하려고 했다니까요. 우리가 기껏 판 깔아 줬으면 우리를 따라야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정 작가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 기획과 연출은 우리 소관인데 그것까지 참견하더라고요. 팬들만 끔찍하게 위하는 척하고. 차영롱 상태도 숨긴 주제에 그렇게 나오다니 참 뻔뻔하죠.
“멤버들이랑 회사 측도 다 알면서 숨긴 거라고요?”
- 그랬겠죠! 차영롱 혼자서 전부를 속였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촬영 시작하기도 전에 중단한 거 보면 SS 측도 뒤늦게 상황 파악한 것 같은데. 그쪽 딴에는 최대한 빨리 조치한 걸지도요.”
다림이 그렇게 말하자 정 작가는 잠시 말을 잃었다.
- 아무튼 저희 CP님이 얼마나 화나셨을지 알겠죠?
“그래도 황혜 CP님이랑 SS엔터의 신솔 대표 친한 사이잖아요.”
- 친하니까 더 빡치죠. 믿던 사람한테 뒤통수 맞았으니까. STORY 15년 전 활동할 때 누가 키워 줬는데 은혜도 모른다 어쩐다 하면서……. 나 때는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던 꼬맹이들이~ 그새 컸다고 기고만장해졌다면서~ 라떼 시전하시더라고요.
그쪽 헤드나 우리 쪽 헤드나 다를 바 없구나. 다들 상 꼰대 돼 가지고.
- 그쪽도 저희랑 비슷한 상황일 것 같은데.
정 작가는 그렇게 넌지시 떠보더니 본격적으로 의중을 드러냈다.
- 제가 지금 드린 얘기로 기사 하나는 충분히 나오지 않겠어요?
“어떤 기사요?”
- [STORY의 무책임한 재결합 취소, 팬들 두 번 울리다.] 아니면 [민폐 끝판왕 STORY, 재결합이 장난?] 이런 헤드라인 어때요?
다림은 일부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론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거부감을 느꼈다. STORY가 어느 정도 무책임한 건 맞지만 괘씸죄 때문에 이런 식으로 언론 플레이까지?
순간 머리가 띵해져 무거운 눈을 반쯤 내리감았다 떴다. 황 CP한테 엄청 깨졌는지 꽤 열 받은 듯한 정 작가의 막말은 점점 더 심해졌다.
- 솔직히 탑골 열풍의 수혜자일 뿐이지 걔네가 잘나서 다시 관심 받은 거 아니잖아요? 한 때 잘 나갔다고 여태 거드름 피우는 거 꼴같잖아서. 이젠 다 상폐남들인데.
그 상폐남들 이용해서 시청률 장사하려던 게 누구더라? 지금 진짜 꼴같잖은 게 누구인지 본인은 전혀 모르겠지. 지금껏 호나 불호의 사심 없이 객관적인 취재 대상으로만 STORY를 대하던 다림이었는데, 이 통화 때문에 마음이 한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저보다 정 작가님이 기자 체질에 맞는 거 같아요.”
다림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필요할 때는 피하기 바빴으면서 자기네들이 필요할 때만 찾아서 이용해 먹으려 하는 작태에도 진절머리가 났다. 상사나 거래처나 이 바닥은 어째 다들 이따위냐. 아무래도 직업을 잘못 고른 것 같지.
“저 부장님한테 찍혀서 더는 STORY 기사 못 써요. 작가님이 직접 쓰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챙긴 뒤 목적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지금 자신의 마음이 딱 이랬다. 영롱이 돌아온 이후 목표를 잃어버린 기분.
영롱은 제 발로 돌아왔고 재결합 프로젝트는 무산됐으며 다림이 쓰던 심층 기사 또한 그 취지를 잃고 공중분해 됐다. 누구보다 먼저 영롱의 소식을 지애에게 전해 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정처 없이 거리를 걷던 다림은 핸드폰 진동을 느꼈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STORY 멤버, 특히 영롱의 거취에 대해 조사를 부탁한 조사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사 그만해도 된다는 얘기를 안 해 줬네. 이제 와 아무 소용도 없는 거.
“연락 못해서 미안해요. 이제 그만둬도…….”
- 차영롱 묵는 호텔 찾았어요.
“네?”
- 조금 전 SNS에 목격담 떴더라고요.
그동안 여기저기 진을 쳐도 목격담 한 번 안 뜨더니, 이제 와서? 다림은 곧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지난번 SS가 올린 영롱의 인사 영상 덕분인 듯했다.
그 영상이 올라오기 전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롱은 10년 전 모습이 전부였다. 얼굴이 아무리 그대로라고 해도 스타일이 바뀌었으니 그동안에는 보고도 못 알아봤을지도.
- 기자님, 이제 어쩌실 거예요?
다림은 잠시 망설였다. 귓가에 아직도 안 부장의 불호령이 남아 있었으니까.
‘너 이제부터 STORY에 대해선 한 줄도 쓰지 마.’
하지만 다림은 기사와 상관없이, 오랫동안 영롱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만둘 수 없었다.
“어느 호텔이에요?”
▶▶
골든호텔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서 다림은 한참을 죽치고 있었다. 목격담이 뜬 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 다시 나타날 법도 한데. 초조하게 기다리며 재킷 주머니에 든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이곳에 오기 전 편의점에 들러 사 온 이 물건을 꺼낼 기회가 과연 있을까.
기다리면서 연달아 마신 커피 탓에 화장실도 가고 싶었으나 혹시나 잠시 자리 비운 사이에 나타날까 봐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딱 15년 전 이맘때였네.
‘근데 왜 다른 팬들 아무도 없어? 오늘 안 나오는 거 아니야?’
STORY의 숙소 앞에서 하염없이 영롱을 기다린 그날이. 그때도 참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여태껏 이러고 있다니. 비록 지금은 교복 차림이 아니었고 곁에 지애도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에 띄는 은발 머리가 멀리 호텔 입구에서부터 보였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일어서려는데 그 옆엔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모자를 눌러써서 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영롱은 마스크를 쓴 채, 옆의 남자를 향해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미소 짓고 있었다. 혹시 매니저인가? 차영롱 혼자라면 어떻게든 들이밀어 인터뷰를 요청해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동행이 있다면 좀 곤란한데.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급하게 계산을 마치고 커피숍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영롱에게 다가가려는데 그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먼저 다림을 발견했다. 그는 다림이 접근하는 걸 알아차리고는 영롱을 잡아 자기 뒤로 숨기며 가로막아 섰다.
가까이에서 올려다보자 그제야 그 남자가 원태휘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희미해진 15년 전의 기억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그날, 숙소 앞에서 사인해 준 영롱의 뒤에서 기다리던 소년 역시 태휘였다. 다림은 그렇게 15년 만에 태휘와 영롱을 마주하고 섰다.
태휘를 알아본 다림은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STORY 멤버들 관계성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둘은 데뷔 초기에는 친했지만 분명 남남처럼 냉랭해졌는데? 그러다가 그룹은 해체했고 이후로 차영롱은 솔로 활동, 원태휘는 미국 유학.
거의 접점이 없는 상태에서 차영롱은 잠적했고 그동안 원태휘는 단 한 번도 영롱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롱이 묵는 숙소에 함께 온다? 재결합 이후 화해를 한 걸까? 그동안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림은 일단 궁금증은 묻어 두고 자신이 위험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최대한 침착하게 주머니에서 명함부터 꺼내 내밀었다.
“K엔터매거진의 기자 기다림이에요. 잠시 시간 좀 내주세요.”
다림이 소속과 이름을 밝히자 원태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토록 사방팔방으로 컨택을 시도했으니 리더인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그의 등 뒤에 있던 영롱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태휘는 그런 영롱을 단속하려는 듯 팔을 뒤로 뻗어 머리를 밀어 넣었다.
“회사 통해 약속 잡지 않은 기자와는 인터뷰 안 합니다.”
태휘는 다림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
“회사 통해서도 인터뷰 절대 안 잡잖아요.”
다림의 당돌한 태도에 태휘는 기막혀하며 냉소를 지었다.
“그럼 더 정확히 말할게요. 사생활 침해하는 파파라치와는 인터뷰 안 합니다.”
경멸이 노골적으로 배어 있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다림이 쉽사리 물러설 것 같지 않자 태휘는 고개를 돌려 영롱을 향해 말했다.
“먼저 올라가 있어. 문단속 잘 하고.”
그 찰나 급격하게 바뀐 태휘의 말투를 다림이 포착했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부드러운 음성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연예계를 오래 떠나 있었기에 과보호하는 걸까? 하긴, 그러고 보니 15년 전에도 영롱에게 그랬다.
‘넌 항상 귀여워.’
그때도 다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지.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영롱은 태휘의 말대로 혼자 걸음을 옮겼다. 눈앞에서 놓칠 순 없기에 다림은 다급히 주머니에서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차영롱 씨. 이거 받아요.”
그러자 태휘는 뭔지 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막으려 했다. 하지만 무심결에 건네받은 영롱의 행동이 더 빨랐다. 영롱이 손에 쥔 건 쪽지 한 장과 AA 건전지 한 묶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의 정체 때문인지 두 사람의 얼굴에는 황당한 기색이 스쳤다.
“전 빚지고는 못 살아서요.”
영롱이 건전지를 들여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다림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그래, 자그마치 15년인데 기억할 리가 없지. 차영롱의 인생에서 가수로 활동한 기간은 고작 4년 남짓이고 그 짧은 기간 동안 팬 포함 수많은 사람을 대했을 텐데.
‘우리가 지금 지갑이 없어서……. AA 두 개 맞지?’
그럼에도 다림은 신기하리만큼 그 순간이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대단한 것도, 어떤 큰 선물도 아니지만 자신을 기다린 팬이라는 이유로—사실 팬도 아니었는데—선뜻 건전지를 나눠 준 일이.
당시 다림은 아이돌에게 빠지는 또래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날 처음으로 알 것도 같았다. 일말의 경계도 없는 무조건적인 다정함. 지애가 왜 영롱의 팬이 됐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그만큼 인상적이었기에 영롱의 잠적에 대한 궁금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머리 위에 물음표가 뜬 두 사람을 뒤로 하고 다림은 호텔 로비를 가로질렀다. 순순히 인터뷰에 응하리라곤 바라지도 않았다.
지난번 설민의 인터뷰 이후 분명 기레기 취급했을 테니까. 혹시나 만약에, 쪽지를 읽고 연락한다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호텔을 나섰다.
▶▶
“뭐야?”
태휘는 영롱을 따라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닫힘 버튼을 누르고는 물었다. 영롱은 바로 쪽지를 펴 읽느라 대꾸하지 못했다. 태휘는 호텔이 노출됐으니 앞으로 취재진이 몰려들까 봐 걱정이었는데, 영롱은 묵묵히 건전지와 쪽지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너 저 기자 알아? 건전지는 뭐고?”
태휘는 옆으로 다가와 쪽지의 내용을 같이 들여다보았다. 정갈하게 써 내려간 손글씨 메모의 내용은 지극히 평이했다.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으면 연락 주세요. 기사 낼 생각 없어요. 친구의 개인적인 부탁이에요.]
그 밑에는 핸드폰 번호가 남겨져 있었다. 태휘는 인상을 쓴 채 쪽지와 영롱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째서인지 마스크를 쓴 영롱의 얼굴에서 어렴풋이 미소가 보였다.
“글씨 엄청 예쁜 친구.”
그러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태휘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영롱이 머무는 층에 도착했다. 태휘는 바로 내렸지만 영롱은 내리지 않고 다시 로비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나 잠깐 내려갔다가 올게.”
그러더니 핸드폰으로 쪽지에 있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태휘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손으로 다급히 막았다.
“그 기자 만나려고?”
영롱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던 태휘는 그 고집을 잘 알기에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가도 되겠어? 우리 지긋지긋하게 뒷조사한 기자야.”
그 말에 영롱은 잠시 손에 쥔 쪽지를 들여다보더니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고는 답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들어봐야지.”
▶▶
“얘기 오래는 못해요. 요새 목 치료 중이라.”
다림은 그제야 영롱이 목에 두르고 있는 머플러가 눈에 들어왔다. 둘은 골든호텔의 옥외공원에서 만났다. 투숙객의 카드키가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사람들 눈을 피해 대화하기 적당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었다. 다림은 이게 정식 인터뷰가 아니라니 아깝다는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기사도 못 쓰는데 이렇게 편히 마주하고 있으니, 허탈한 기분에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오랜 침묵을 먼저 깬 건 영롱이었다. 그는 다림이 건넨 건전지를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이자가 많이 붙었네요. 그때 제가 준 건 새것 아니었잖아요.”
다림은 그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자 내심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이래 봬도 기억력은 좋은 편이에요. 팬들에 관한 건.”
다림의 심정을 알아챘는지 영롱은 마스크를 내리곤 피식 웃었다.
“글씨체가 또래에 비해 워낙 예뻐서 이름이랑 세트로 기억하고 있었어요. 내가 알던 팬레터 주인이 아니어서 조금 헷갈리긴 했지만…….”
영롱은 다림에게 받은 쪽지를 펼치고는 수려한 필체를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지애, 잘 지내요?”
“네. 다음 달에 결혼도 하고.”
그 말을 하며 다림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영롱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기억력 진짜 좋네요. 팬레터 쓴 팬들이 한 둘도 아니었을 텐데.”
“활동을 쉬는 동안 팬들이 그리울 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거든요. 그러면 옛날에 받은 팬레터를 닳도록 읽고 또 읽어요. 현실의 삶은 나름대로 굴러가지만 팬들과 함께한 시간은 딱 그때에 고정돼 있으니까요.”
그는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처럼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영롱의 모습이 다림은 그저 가식처럼 느껴졌다.
“이해가 안 돼요. 왜…….”
다림은 울컥하는 마음에 따지듯 물으려다가 겨우 억누르고는 다시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팬들 생각하는 사람이 죄다 내팽개치고 그토록 긴 시간 잠적한 게 웃기잖아요.”
이해가 안 가는 건 또 있었다. 어린 시절 한때 좋아했던 연예인이었을 뿐인데 그를 잊지 못한 채 보고 싶다고 술기운에 울음을 터뜨리던 지애. 그리고 그걸 단순한 술주정으로 치부할 수 없었던 자신까지.
영롱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누구랑 똑같은 소리 하네.”
영롱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림은 한껏 여유로워 보이는 그 태도조차 맘에 들지 않았다. 이게 정식 인터뷰가 아니어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오랫동안 질투했던 대상을 막상 마주하자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묻고 싶은 게 그거였어요? 제가 왜 떠났고 왜 잠적했는지?”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많은 사랑 받아놓고 팬들한테 남긴 건 걱정뿐이니까.”
영롱은 손가락으로 꽉 다문 입술을 매만지며 말없이 다림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다림은 이왕 말문 터진 거 하고 싶던 말을 다 쏟아 내기로 했다. 자신을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하든지 말든지.
“다른 멤버들도 그렇고요. 재결합 절대 없다더니 말 바꾸는 것도 참 어이없죠. 해체로 팬들 마음 찢어 놓고. 이제 와서…….”
“사실 팬들한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영롱은 몰아세우듯 쏘아붙이는 다림의 말을 중간에 잘라 냈다.
“이래저래 면목 없으니까.”
일순 그의 얼굴엔 침울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곧 의연한 모습으로 돌변하더니 다시 다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렇다고 기자님한테 말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생각보다 단호한 태도에 다림은 시간이 쌓아 올린 일종의 벽을 느꼈다. 지금 다림이 상대하는 건 다정하던 18살 소년이 아니라 세상의 쓴맛 단맛 다 보고 단단해진 어른이었다.
“기자님은 왜 내 대답을 들으려고 해요? 지애가 부탁한 게 그거예요?”
영롱은 조근조근 차분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지적했다. 지애는 다림에게 영롱을 찾아 달라고만 했지, 해체의 이유나 잠적의 이유 따윈 궁금해 하지 않았다. 오랜 팬들의 마음이 어떤지, 그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아닐 거 같은데. 왜 그렇게 궁금해해요?”
천진한 표정 속에서 예리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다림은 속내를 간파당한 기분이 들었다.
“제 질문에 기자님이 먼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할게요.”
그 놈의 개인적 관심. 지금껏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유치한 속내가 밝혀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애에게도 안 부장에게도 영원히 말하지 못하겠지. 차라리 자신과 아무 연고도 없는 그에게는 털어놓아도 될 것 같았다. 다림은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 말에 영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토록 좋아할 이유도, 그리워할 만한 가치도 없다고.”
다림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지애 앞에서는 절대 못 할 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거리낌 없이 나왔다. 어째서인지 영롱의 눈빛엔 그런 힘이 있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당신에게 모든 귀책사유가 있길 바랐어요. 지애한테 준 편지에도 그렇게 썼잖아요. 다 본인 탓이라는 듯이.”
“그걸 다 밝히면 친구의 쓸데없는 맘고생도 멈추고, 아파했던 시간도 보상받을 거라고?”
자신의 속마음을 남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더 적나라하고 유치하게 들렸다. 영롱이 비웃어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인생에서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기자님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안 했네요.”
하지만 그는 끝까지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실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했다.
“친구의 소중한 추억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영롱이 말을 이어갈수록 다림의 불안한 예감이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다 눈치 챌 거라는 예감.
“사실은 친구 이상이죠?”
다림이 관심도 없던 연예부 기자가 된 계기와 STORY를 취재하게 된 이유까지.
“매일매일 정성들여 장문의 팬레터 대필해 주고, 관심도 없는 연예인 숙소도 따라가서 몇 시간을 함께 기다려 주고, 친구의 부탁에 취재까지 시작하고.”
이 모든 일의 동기는 사실 지애 때문이라는 걸, 눈치 빠른 그는 쉽게 알아차린 듯했다.
“그런 친구는 세상에 없잖아요.”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오래된 비밀이었으나 영롱이 지애에게 전할 리는 없으니 다행이었다.
“처음엔 질투 때문에 내 꼬투리 잡고 싶었는데. 실은 그만큼 독한 사람은 아니었네요, 기 기자님. 사랑하는 사람 마음 아프게 할 만큼.”
혼자 간직하느라 곪아 터진 감정을 아무에게라도 털어놓아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누굴 좋아하는 마음을 멈추게 하긴 쉽지 않더라고요.”
다만 자신을 보는 그의 눈이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빛을 띠어 그게 좀 신경 쓰일 뿐이었다. 어쩐지 측은하게 보는 그 눈빛.
“하긴 건전지 돌려줄 때부터 알아봤다. 그 정도 선의 가지고 빚진 거라고 생각했다면, 애정도 물물교환이랑 다르지 않다고 여겼겠죠?”
“이제 그쪽이 대답해 줄 차례에요.”
다림은 짐짓 담담한 투로 말했다. 오랜 짝사랑에 마음이 무뎌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지애가 영롱을 좋아했던 시간 동안 다림 역시 지애를 좋아했으니까. 이번엔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님이 바라던 대로 다 내 잘못 맞아요.”
그렇게 말하는 영롱의 표정은 엷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슬퍼 보였다.
“난 기자님보다 독했어요. 사랑하는 사람 마음 산산조각 낼 최악의 방법을 택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 팬들 얘기를 하는 건가? 아니면 멤버들 얘기?
“내가 가진 걸 소중히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여겼거든요. 너무 어리고 철없었어요. 그래서 돌아온 걸지도 몰라요. 보답하고 싶어서. 그때보단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영롱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울대뼈를 매만졌다. 그 때문에 다림은 목소리 얘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지난 일은 바꿀 수 없어도 현재의 노력으로 미래는 바꿀 수 있겠죠.”
그렇게 말을 잇던 영롱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다림의 뒤쪽 어딘가로 시선이 옮겨졌다.
“처음 반하는 순간은 항상 느닷없이 찾아오지만 싫어지는 순간은 저마다 다르잖아요. 때론 급작스레, 때론 서서히. 기자님이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그 시간은 저절로 찾아올 거예요.”
그렇게 말하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림이 고개를 돌려서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확인하니 언제 내려온 건지 원태휘가 서 있었다.
“원하는 대답은 아니겠지만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는 이만 대화를 마치자는 뜻으로 바로 마스크를 썼다. 물론 다림의 성에는 안 차는 인터뷰였으나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쩌면 그의 얘기를 듣기보다도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고 싶어서 여기 온 걸지도 모른다.
발걸음을 떼려던 영롱은 순간 멈칫하더니 다림을 다시 마주 보았다.
“그나저나 기자님처럼 마음 표현 못 하는 사람 너무 잘 아는데.”
영롱은 어째서인지 고개를 숙이더니 작게 속닥거렸다.
“표현하지 않으면 몰라요.”
“표현하면 큰일 나는데요.”
당장 다음 달에 결혼하는데 친구로라도 못 볼 일 있어요? 다림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영롱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는, 뒷걸음질로 걸으며 다림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꼭 말로 하진 않아도,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많더라고요.”
알쏭달쏭한 그의 말에 다림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다림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영롱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는 쥐고 있던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아까 내 번호 찍혔죠? 지애 결혼식 날짜랑 장소, 알려 줘요.”
그 말에 놀라서 멍하니 있는 사이, 영롱은 깡충깡충 뛰어 태휘에게 달려갔다. 영롱이 등에 업히듯 앵기자 태휘는 자연스럽게 어깨를 끌어당겨 감싸고는 그를 질질 끌어 호텔 건물 안으로 향했다. 들어가기 전, 다림을 한 번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15년 전 숙소 앞에서도 저러는 거 본 것 같은데. 착각인가? 그 모습에 다림은 심장 한구석이 묘하게 간질거리더니 이상한 촉이 감지됐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내 촉 아주 고장 났네.”
다림은 연예부 기자는 더는 못 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사회부로 옮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