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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이드가 죽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요란하게 울어대며 부른 용건이 겨우 이것이라는 점에 오르피어스 벨포드는 길게 하품하며 중얼거렸다.
“저런.”
“…….”
아이릭 벨포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품하며 눈꼬리에 맺힌 눈물방울의 너머로 형의 쌀쌀한 얼굴을 힐끔 훔쳐보고는 한마디를 더 붙였다.
“음 삼가 고인의 명목을 빕니다.”
“……후우.”
그 짤막한 한숨에는 한심한 놈이라든가 구제불능의 놈이라든가 경우 없는 놈이라든가 등등 갖가지 폄하의 표현들이 뒤섞여 있을 게 뻔했지만 모르는 척 아침 식사를 계속했다. 어젯밤 수면 부족으로 매우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고 가이드의 죽음 정도로는 그의 잠을 날아가게 할 정보가 되지 못했다.
“벌써 다섯 번째다. 오르피어스.”
그의 가이드가 죽은 게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뭐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되물은, 속 보이는 유치한 도발에도 아이릭은 직설적으로 받아쳤다.
“네 가이드가 죽은 게.”
그러니 더 할 말이 궁해져 오르피어스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호출 때문에 아침도 먹지 않고 급하게 달려 왔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총독부가 위치한 그레이트 홀 안쪽 골목의 카페에서 사 온 토스트를 먹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어쩌다가 죽은 거래? 암살? 자살?"
“사고사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 있었다더군.”
토스트를 꿀꺽 삼키고는 입술에 묻은 소스를 핥았다.
“에이, 그럼 나랑 전혀 관계가 없잖아.”
“그렇지. 뻔한 스토리에 흔하디흔한 사인이지.”
“근데 왜 총독부로 불러? 전화로 알려줘도 되는 건데. 나 휴가란 말이야.”
“말했듯이, 다섯 번째니까.”
둥근 바퀴 의자가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가급적 아이릭과 시선이 바로 마주하지 않게끔 책상에서 비스듬한 선상에 있는 창틀에 걸터앉아 있던 오르피어스의 엉덩이가 움찔했다.
날카롭게 직시하는 시선에 갇힌 채 꿋꿋하게 남은 토스트를 우물거리고 손가락까지 할짝할짝 빨고는, 토스트를 싼 봉투에 남은 소스와 부스러기까지 핥아 먹을 듯한 기색으로 맹렬하게 토스트의 잔해들을 내려다보던 그는 결국 어깨를 추우욱 늘어트렸다.
“가이드가 다섯 명이나 죽은 게 내 탓이야?”
“국고 낭비다. 너 같은 센티넬도 귀하지만 페어가 되는 가이드도 귀하긴 마찬가지야.”
“나도 지켜주고 싶다구. 하지만 암살이나 자살도 아니고 사고로 죽는 걸 내가 어떻게 일일이 다 지켜? 24시간 붙어 다니면서 경호라도 해?”
“여하튼-”
아이릭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가이드가 하나둘도 아니고 다섯이나 죽은 건 네 책임도 크다. 센터도 곤란하다는 입장이야. 메어가 정해지지 않은 가이드는 있지만 누구도 네 가이드로 자원하는 사람이 없다더군. 알겠나, 블랙위도우?"
남자한테 사신도 아니고 블랙위도우가 뭐냐면서 오르피어스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토스트와 함께 사 온 아이스티를 홀짝홀짝 마셨다.
“너도 가이드의 부재로 비참하게 죽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냐.”
“설마 형이 날 죽게 놔두겠어?”
아이릭이 바로 긍정의 대답을 하지 않아 오르피어스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하였다. 작게 콜록거리는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려 아이릭은 말을 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죽기 직전까지 네가 몰려 봐야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싶긴 하다만 - “우와, 형. 너무해.” 오르피어스가 과장되게 어깨를 움츠렸다 - 너 같은 녀석이라도 일단은 센티넬이니 죽음은 곧 왕국과 국왕 폐하의 손실이라는 게 안타깝다.”
“네에, 네. 반성합니다. 각하.”
입술 끝에 빨대를 끼운 채 각성하는 기미를 보여 보았자 진실성이 느껴질 리는 만무하다. 이 정도에서 진지하게 들으라는 나직한 호통이 날아올 법도 한데 아이릭은 평연함을 유지했다. 느슨한 여유가 감도는 얼굴에서는 왜인지 웃음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여 오르피어스의 등골에 살짝 소름을 돋게 했다.
“해서, 준비했다. 절대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을 튼튼한 가이드를.”
“응.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지? 난 금발머리의 열여섯 살 미소녀가 좋아.”
결국 가이드를 준비해 줬으면서 왜 굳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건지 성격 정말 안 좋다니까. 아이릭이 들었다면 네 이야기를 하는 거냐며 어이없어했을 발언을 내심으로 중얼거리며 순순히 응했다.
“흐음.”
그러자, 놀랍게도 아이릭은 엷게 미소하였고, 오르피어스의 등골은 다시 쭈뼛 긴장했다.
“고맙다는 인사는 나중에 받으마. 같이 호출하였으니 곧 올 거다,”
“……어, 으, 으응.”
반사적으로 고개만 끄덕끄덕 아래위로 끄덕였다.
곧 올 것이라는 발언과는 다르게 집무실의 문을 노크하는 기척은 오랫동안 없었다. 그를 의식의 밖으로 밀어두고 서류에 눈을 꽂은 아이릭의 옆에서 오르피어스는 초조하게 빨대 끝을 깨물었다. 단순히 새 가이드를 소개하는 자리라면 아이릭이 이 정도로 의미심장한 발언을 던지며 분위기를 조성하지는 않는다.
마침내 비서가 문을 열고 새 가이드로 짐작되는 사람을 안내했을 때, 거의 마시지도 않은 아이스티 잔이 오르피어스의 손에서 떨어졌다.
지크하르트 카시야스 대령이 총독의 지급 호출을 명령 받은 건 아침 업무가 시작되는 시각에서 정확히 1분 후였다. 29분 후에 정례 회의가 있지만 남부 글래스팅 성에서 국왕의 어명이 하달되지 않는 이상 최우선시 되는 사항은 당연히 총독의 명이다. 지크하르트는 커피에 입술도 대지 못하고 도로 착검해야 했다.
융통성 없고 완고한 벨포드 총독이 사전 절차와 용건을 생략하고 앞뒤 자른 명령만 내리는 건 전시가 아니고서야 퍽 드문 일이라 총독부로 가는 전용차 안에서 내도록 머리를 굴렸다. 공식 라인을 통한 연락이니 사무는 아니다. 좋든 싫든 대령 정도의 직급이 되면 군 내부의 알력에 발을 들이게 되지만 그와는 무관한 일이고, 총독이 직접 부를 만큼 중대한 과실도 없고, 사정이 급박한 첩보가 올라온 기미도 없었다. 이것저것 짚이는 가정을 무턱대고 건드려 보았지만 여전히 의도를 알지 못하겠다.
“각하께 언질 받으신 건 있으십니까?”
궁금한 건 지크하르트 혼자만이 아니었는지, 닉 마텐 중위가 백미러로 힐긋 훔쳐보았다.
“글세, 힐라리아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는 사석에서 만난 적도 없다마는,”
“벌써 6개월 전이 아닙니까.”
“대충 그렇지. 이제 와서는 딱히 서로 할 말도 없고.: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차창 밖으로 한가하게 도로를 가로지르는 남녀 한 쌍을 시야의 구석에서 밀어 보내며 뜻 없이 중얼거렸다.
“……뭐. 알현하면 싫어도 알게 되겠지.”
행인을 보낸 차는 다시 출발했고 지크하르트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뒷목을 주물렀다. 중앙 사령부와 총독부는 그리 멀지 않았기에 고민의 시간은 금방이었다.
미리 언질이 있었는지 총독의 비서는 접견실이 아니라 집무실로 지크하르트를 바로 안내했다.
“카시야스 대령입니다, 각하.”
습관적으로 짧게 인사하며 군례를 올린 후에야 그는 총독의 집무실 안을 훑어볼 수 있게 되었고, 시야의 구석에서 손에 들고 있었을 잔을 떨어트린 오르피어스를 보았다.
‘아, 이 카펫 꽤 비싼 거 아닌가?’
무심코 오른쪽 발을 살짝 굴려 솜이불이라도 밟는 마냥 두툼한 카펫을 눌렀다. 그리고 총독의 호출한 사유를 설명하기를, 혹은 명령하기를 기다리기도 전에 오르피어스가 비명처럼 외쳤다.
“말도 안 돼!! 설마 저 녀석이야?”
삿대질하며 외치는 ‘저 녀석’이 방금 문을 닫고 나간 비서가 아닌 이상 겨냥이 누구인지는 명백하다. 느닷없이 찢어지는 고함소리를 맞았으니 당황한 건 사실이나 돌아가는 상황 자체가 전혀 이해되지 않아 지크하르트는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살펴보는 선택을 했다. 그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이럴 때에 안달복달하며 줄줄줄 설명을 늘어놓는 건 으레 상대방이었다.
“그래.”
“아이릭 형! 웃기지 마!!”
사근사근 사람 좋은 미소 - 혹자는 가증스러운 미소라고 평한다 - 를 지우지 않는 오르피어스의 낯이 이렇게나 산산이 깨진 모습은 좋든 싫든 사관학교 시절부터 이럭저럭 10년 넘게 인연을 쌓고 있는 지크하르트로서도 매우 드물게 겪는 일이라 반사적으로 휘익, 하는 휘파람소리를 낼 뻔했다.
오르피어스가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엎질러진 음료가 구두굽에 밟혀 철퍽 튀며 바짓단을 적셨다.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나 알아?! 가이드라고! 가이드! 남자 가이드를 내게 붙여주겠다 이거야?! 저 녀석이랑 자라고 말하는 거랑 뭐가 달라!!”
이번에는 지크하르트도 놀랐다. 자신의 손에도 음료가 들려 있었으면 분명히 떨어트렸을 거라고 확신했다.
한번 페어가 된 센티넬과 가이드는 죽기 전에는 절연하지 못하니 아마도 오르피어스의 가이드가 또 죽어서 문제가 된 것이리라는 건 어렵잖게 이해했다. 그리고 지크하르트 자신도 반년 전에 센티넬이 사망하여 절연한 가이드였다. 가이드가 사망한 센티넬과, 센티넬이 사망한 가이드를 페어로 한다는 발상은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수식만큼이나 당연하다.
아이릭이 지명한 센티넬과 가이드가 남자와 남자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미쳤어?! 죽으면 죽었지 남자랑 절대 안 자!!”
능력자인 센티넬과 이를 제어하는 가이드는 거의 필연적으로 육체관계가 동반된다. 오르피어스가 펄펄 뛰며 거부하는 것에도 이유는 있었다. 지크하르트를 놀라게 한 원인 중에 하나는 이것이었다. 벨포드 형제의 형제애는 유명하다. 형제간의 우애라는 달짝지근하고 훈훈한 감정의 일환이 아닌, 잔인무도한 군견과 조련사라는 의미로. 그 군견이 목줄을 끊어버리기라도 한 양 이를 드러내고 있으니 충분히 비상사태다.
지크하르트는 형제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을 도주 경로를 계산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는 게 그나마 쉽지 않을까. 참, 저거 방탄이었나.
“형 일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입 다물어.”
“…….”
칼로 자른 것처럼 소리가 멎었다. 조련사는 여전히 조련사였다.
언제 도망치려고 했냐는 것처럼 지크하르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부동했다. 아이릭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얼추 사정은 들어서 알겠지만 다시 한번 정리해 주마. 벨포드 소령의 가이드가 오늘 새벽 사망하여 내가 새 가이드로 자네를 추천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명령이십니까? 제게 거부권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있다면 뭐라고 대답할 예정이지?”
“거절합니다.”
“이유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오르피어스가 외쳤다.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저 녀석도 나도 남자잖아! 거기다가 힐라리아 누나가 죽지 않았다면 내 매형이 되었을거라구! 도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절대 안 돼!”
“도의? 윤리? 네가?”
아이릭이 날카롭게 코웃음쳤다. 심정적으로는 지크하르트도 일말 동감이었다. 필요하면 세 살배기 아기도 태연히 죽이는 오르피어스의 입에서 도의와 윤리 운운하는 발언이 나오다니 뒷골목 창녀가 순결을 거론하는 것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다.
“벨포드 소령이 말한 이유와 동일합니다, 각하.”
“자네에게 거부권은 없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조금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총독부의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총독의 의견에 반하는 자유의사가 존재할 리 없었다.
“명령이시라면……. 받들겠습니다.”
“야! 바로 꼬리 내리다니, 넌 사내자식이 기개도 없냐!!”고 오르피어스가 쩌렁쩌렁 외쳤지만 지크하르트는 못 들은 척했다. 대꾸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총독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총독의 아우이자 일문의 사람이라 방만함이 허락되는 오르피어스와는 다르게 그는 모래알처럼 많고 많은 일개 부하 장교에 불과했으니까.
“좋아. 공식적인 절차는 센터를 통해서 전달될 거다. 물러가도록.”
인사하고 물러나오려는 그의 뒤통수를 오르피어스가 붙잡았다.
“지크하르트! 밖에서 잠깐만 기다려! 네가 내 가이드가 된다는 걸 철회하고 다시 알려줄 테니까!”
그리고 문이 탕 닫혔다.
“다 끝나셨습니까?”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닉은 궁금증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지크하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소파의 빈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오르피어스가 자신의 고집을 끝까지 관철할 것이라는 낙관은 없었지만 기다리라니 기다려 주기로 했다.
비서가 두 사람에게 커피를 내왔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도 문짝 너머는 잠잠하다.
입도 심심하던 차에 총독부 건물 안이 금연이었는지 아닌지를 곰곰이 고민하고 있자니 드디어 문이 벌컥 열렸다.
“…….”
이야기가 어떻게 풀렸는지 굳이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오르피어스의 얼굴이 명쾌한 대답이었으니까. 의미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 놓고 일어났다.
“오르피.”
“지크하르트 카시야스!!”
“어, 음?”
코앞에서 삿대질하며 쑥 들이미는 손가락에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뺀 그에게 오르피어스가 울분에 가득 찬 외침을 토했다.
“나랑 잘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뭐야? 내가 너랑 자려고 억지로 가이드가 된…… 야! 사람 말은 듣고 가! 야! 야! 오르피어스!!”
어처구니없음에 반응이 한 박자 늦은 지크하르트가 뒤늦게야 억울함을 성토했으나 이미 오르피어스는 발소리도 요란하게 대기실 밖으로 나간 후였다.
진심으로 담배를 한 대 물고 싶어졌다. 닉이 식은땀을 흘리며 안경을 올렸다.
“대령님. 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건 아닌데…….”
지크하르트는 난감하게 한숨을 쉬다가 일단 손짓하여 닉을 데리고 대기실을 빠져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라도 오르피어스를 만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사령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대강 사정을 설명하다 접촉 사고가 날 뻔한 일이 있었지만 차는 비교적 무탈하게 도로를 달렸다. 뒷유리 너머로 멀어지는 총독부 건물을 보며 입에 지크하르트는 문 빈 담배를 까닥거렸다.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은 제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여 폭주하기 십상이고 오르피어스가 폭주하면 총독부 건물 하나 따위는 우습지도 않게 박살이 난다.
오르피어스의 방만함이 허용되는 이유는 총독의 아우라는 배경에 더하여 누구도 폄하할 수 없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 강력한 센티넬이라는 가시적인 공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알아서 잘들 하겠지. 총독부 건물을 내가 짓는 것도 아니고.’
오르피어스를 제외하고도 생각할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았으므로 일단 우선순위에서 하락시킨 지크하르트는 눈을 감고 짧은 휴식을 택했다.
그는 유능한 군인이었으나 결코 충직한 군인은 아니었다.
며칠이 지났지만 센티넬 센터로부터 페어와 각인을 맺는 정식 절차를 밟으라는 서류가 날아오지도, 그가 오르피어스의 가이드가 되었다는 소문도 나지 않았다. 후자는 신중한 닉이 공식적으로 문서화되기 전에는 무거운 입을 봉하고 있기 때문일 테지만 전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의 센티넬이 되기를 극명히 거부하였던 오르피어스가 손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럭저럭 납득이 가는 가정이었다. 무슨 일이 닥쳐도 물 흐르듯이 적당히 웃음으로 넘기며 회피하는 오르피어스가 날것 냄새 풍기는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니까.
새파란 빛을 띄웠던 오르피어스의 눈동자를 기억에서 건져내며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겉모습만 보면 망중한의 여유였다. 실제로도 아침나절부터 집무실을 빠져 나와 숨어 있는 중이기도 하였다.
중앙 사령부 청사의 뒷문에서 이어지는 뜰은 지크하르트가 즐겨 휴식하는 장소였다.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의 뜰은 정원이라 칭하기에는 조악하지만 아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휴식처를 발견한 하사관 몇몇이 잡초를 뽑고 가물 때는 물을 주는 정도로는 가꾸고 있는 탓이다.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뜰에 피어난 꽃은 잡초와 야생화의 언저리에 놓여 있어 지크하르트의 무딘 눈에도 얼추 익었다. 나름대로 정원석이랍시고 큼직한 돌을 빙 둘러 쌓아 만든 야트막한 경계를 발로 차지 않도록 조심하며 따끈따끈한 햇볕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새 가이드. 오르피어스 벨포드.
익숙하지만 낯선 단어들이 상념이 되어 머릿속을 혼탁하게 부유했다.
육체에 발현하기도 하며 정신에 미치기도 하는 센티넬의 이능을 온전히 담아두고 있기에 인간은 더할 나위 없이 연약하다. 센티넬의 오감은 범상한 인간을 초월하는 이능을 따라 날카롭고 예리하게 다듬어지며, 극대화된다. 오감의 감각이 최고점에 달할수록 센티넬의 정신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붕괴한다. 홀로 두면 붕괴된 오감 속을 허우적거리다 기어이 미쳐 죽는 센티넬을 안정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존재가 가이드였다.
가이드는 센티넬과는 달리 어떠한 능력도 지니지 못하지만, 오직 센티넬의 감각과 감정을 품어 안을 수 있다. 해일처럼 격랑하며 발광하는 센티넬의 심부도 페어로서 각인한 가이드는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지크하르트는 가이드로서 발현한 지 오래지 않아 센티넬과 각인하였고 십 년을 페어로서 지내왔다. 한번 각인한 센티넬과 가이드의 각인을 지울 수 있는 건 오직 죽음뿐이니 적어도 수십 년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센티넬을 충분히 지킬 수 있으리라 자만했다.
하지만 겨우, 십 년이었다.
그 전화 속을 살아서 탈출하였음에도, 전쟁이 끝나자 허무하게 죽었다.
“……후우.”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가슴을 어지럽히는 상념이 조금이나마 뚫리길 바랐는데 허공에 흐늘흐늘 엷게 변지는 파르란 담배 연기를 보자니 외려 더 갑갑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오르피어스는 담배 냄새를 싫어했다. 결국 생각의 끄트머리가 오르피어스에게 돌아오게 되는 건 무어래도 요 며칠 간 그의 머릿속을 제일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서로의 센티넬과 가이드가 되었다고 서류에 도장을 쾅쾅 찍어 증명하는 것만으로 페어가 된다면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문제는 가이드가 센티넬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신체적 접촉이라는 것이다.
포옹도 좋고 키스도 좋고 단순히 피부만 맞닿아도 좋다. 가이드의 능력이 특출하거나 정서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라면 인식 범위 내에 가이드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그렇지만 효율을 고려하였을 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육체가 깊이 접촉되고 정신도 함께 고양되는 섹스다.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판국에 섹스 문제를 고려하고 있자니 우습다는 자조가 안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거의 평생을 이고 나가야 하는 사항이라 제법 심각했다. 특히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자에게 동하지 않았던 이성애자라면.
“…….”
사실, 지크하르트는 총독부에서 명령 받은 그날 저녁 서점에서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잡지를 몇 권 구입했었다. 수 시간의 탐독 끝에 새벽 햇살을 맞이하며 받은 감상은 참담했다.
‘서기나 할까. 그게.’
오르피어스의 알몸 따위야 기숙사 목욕탕에서부터 몇 번이나 봤고 화장실에서 마주친 적도 더러 있다. 그가 자신의 아래에 알몸으로 깔려 있는 상상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의 아랫도리는 꿈틀거릴 기미도 없었다.
서지 않으면 서지 않는 대로 문제다. 알몸으로 깔리는 게 오르피어스가 아니라 자신이 될 위험도 있었다.
‘피똥을 싼다잖아, 피똥을. 진짜 싫다.’
남자들끼리 수군거리는 과격한 음담패설과 성인잡지의 자극적인 문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한 지크하르트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새 담배를 꺼내 성냥에서 불을 붙였다. 지난 며칠 내내 그의 입에서는 줄담배가 떨어지지 않았다.
벨포드 총독의 면전에서 오르피어스가 절대 안 된다며 펄펄 날뛰었을 때야 소심하게 동조하였지만 힐라리아와의 관계도 걸렸다. 그녀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무탈히 벨포드 가의 사위가 되어 있을 것이다.
타인이었다면 결혼하여 진짜 처남이 된 것도 아닌데 고민할 게 뭐가 있느냐며 가볍게 받아쳤을 테지만, 역시나 본인의 일이 되니 수식처럼 명료하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힐라리아는 그녀의 형제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가 동생의 가이드가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면 불같이 노하리라. 손이 무척 맵기도 하다. 따귀 몇 대로 끝나면 다행이지. 죽은 후에 힐라리아를 볼 면목이 없는 선택을 하기는 꺼려진다.
“으아아, 나더러 어쩌라고.”
부러 소리 내어 터트려 보았지만 갑갑한 속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기실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무가치한 시간이기도 했다. 센터에 등재되고 군에 소속된 몸으로써 총독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군복을 벗는 것뿐이니까.
통탄스럽게도 그는 퇴역할 계획도 탈영할 계획도 없었다. 단지 조용하고 평화롭고 소박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그를 둘러싼 삶은 언제나 그의 멱살을 잡고 요란하게 뒤흔들었다.
입에 문 담배를 뻑뻑 피운 지크하르트는 그게 돗대였다는 걸 빈 담뱃갑을 탈탈 털어가며 확인하고는 도리 없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휴대용 재떨이와 구긴 담뱃갑을 챙겨 놓고 기운 없는 걸음을 건물 안으로 터덜터덜 옮겼다. 오늘도 좋은 현실 도피였다.
오르피어스가 총독에게 최면이라도 걸어서 명령을 철회하지 않는 이상 그와 섹스는 해야 할 테고 - 지크하르트는 다시 원론적인 문제로 돌아와 있었다 - 소위 말하는 여자 포지션은 누가 취해야 하는 걸까. 가위바위보로 정해야 하나, 내가 이겼는데 안서면 최음제라도 먹어야 하나, 어쨌든 잡고 흔들면 발기는 하지 않을까 따위의 진지한 고민을 되풀이하던 걸음이 우뚝 멎었다.
“…….”
“…….”
차라리 모퉁이를 돌다가 부딪친다는 식상한 상황이라도 전개되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적어도 부딪친 충격을 수습하고 사태를 파악하는 몇 초 동안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총독부에서 헤어진 후 머리카락 끝도 볼 수 없었던 오르피어스와 재회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여러 가지 생각해 둔 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인사할까, 네 형 옆구리라도 잘 찔러서 없던 일로 해 달라고 꼬드길까, 보지 못한 척 외면할까, 등등. 기타 등등.
하지만 그 어디에도 오르피어스가 한 팔에 커다란 종이봉투를 끌어안은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도넛을 오물거리고 있다는 가정은 없었다.
“…….”
“…….”
큼지막한 도넛 하나를 알뜰하게 다 먹어치우고 입가와 손끝에 묻은 설탕가루까지 탈탈 털어낸 오르피어스는 단련된 군인답게 왼발을 축으로 정확히 180° 빙글 몸을 회전한 후 앞으로 걸어갔다.
“…….”
완벽하게 무시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오르피어스의 그림자마저 복도 건너편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
오늘은 옆집 고양이가 고롱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어제는 창틀에 걸린 종이가 바람에 쓸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깼고, 그제는 아파트 아래의 보도에서 어린아이가 도도독 뛰어가는 소리에 깼다. 그는 4층에 거주했다.
내일은 자신의 숨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깨게 될 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나른하게 내뱉는 고롱거림이 고막을 찢어발길 것처럼 난폭하게 들이닥쳤기에 귀를 틀어막으며 눈을 뜬 오르피어스는 천장이 바로 코앞에서 하강하는 것 같은 착각에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너무 거칠게 뛴다. 나쁜 징조다.
도로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그를 거쳐 간 다섯 명의 가이드들을 떠올렸다. 감촉, 체온, 손짓, 기억, 목소리, 무엇이라도 좋았다. 평균 이상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고 고양이의 하품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오르피어스는 눈을 뜨며 신중하게 몸을 일으켰다. 천장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고 발바닥을 간질이는 슬리퍼의 감촉도 바늘처럼 찔러오지 않았다.
협탁에서 진정제를 찾아 익숙하게 주사 바늘을 찔러 넣었다. 이것으로 당분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약효가 그의 정신을 평연히 붙잡아두고 있는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이대로 고집을 세우면 힘들어지는 건 결국 자신이다. 다섯 번이나 가이드를 갈아치우면서 가이드가 없던 공백기가 몇 번이나 존재하였던 오르피어스는 그 어떤 센티넬보다 잘 알았다.
그렇지만 지크하르트를 가이드로 삼는 것보다는 나았다.
「처음부터 말했지 않나. 절대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을 튼튼한 가이드를 준비했다고. 오늘 새벽과 같은 차 사고가 발생해도 지크하르트라면 두 발로 멀쩡하게 살아나올 거다」
「……거야 당연히 죽지는 않겠지! 저 괴물 같은 자식을 대체 누가 죽일 수 있단 말이야?」
지크하르트가 나간 문을 가리키는 아이릭의 태연한 발언에 더욱 분통이 터졌다.
근래 두 차례의 전란을 거치며 센티넬을 노리는 가이드의 압살 기도도 심심찮게 보고되는 작금의 오시안 왕국에서 단순히 의미 그대로, ‘죽지 않는’쪽에 중점을 두는 가이드라면 지크하르트만큼 적합한 이도 없다.
지크하르트는 세 명의 센티넬과 대적하여 승리를 거둔 진짜 천재였으니까.
「형이 원하는 건 내 ‘가이드’가 아니라 ‘지크하르트’인 거잖아! 누나가 죽으니까 이젠 나야? 나더러 남창처럼 다리라도 벌려서 지크하르트를 붙잡으라고?! 내가 죽으면 이젠 누군데? 다음번에는 리벡에서 작은형이라도 데려올거야?」
무도의 측면에서 지크하르트는 신의 총애가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재능과 축복을 그 한몸에 유감없이 타고 난 천재다. 군재도 뒤처지지 않고 인품도 무난하다. 글래스팅의 군문에서 그는 독보적인 자였다.
센티넬과 동등, 혹은 우위를 점하는 재능임에도 센티넬과 같은 약점이 없다. 물욕도, 명예욕도, 권력욕도 없다. 그것이 지크하르트였다.
힐라리아 벨포드는 지크하르트 카시야스를 아이릭 벨포드의 수중에, 오시안 왕국의 배하에 묶어두기 위한 두 겹의 족쇄였다.
아이릭이 이마를 매만졌다. 한껏 흥분한 오르피어스의 앞이기에 더욱 대조적으로 차갑게 식은 냉담한 어조가 떨어졌다.
「나는 널 그렇게 쓰기 위해서 기른 거다, 오르피어스 벨포드」
주먹 쥔 오르피어스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알아! 안다고! 이제까지 형이 명령하는 건 다 해 왔잖아! 뭐든지!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렇지만 지크하르트만은 안 돼. 엮이기 싫어!」
「오르피어스. 왜 그렇게 민감하게 나오는지는 모르겠다만」
아이릭의 말꼬리가 느슨하게 늘어졌다.
「나는 힐라리아처럼 직접적인 관계 형성으로 붙잡으라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네 가이드가 된다면 네게도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해가 될 일은 절대 없어. 네 입장과 상황도 충분히 고려하고 내린 선택이다. 이러한 때에 네 가이드가 사고를 당한 것도 운명이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내가 지크하르트에게 무슨 짓을……!!」
도무지 안정하지 못하고 집무실 안을 서성이며 고함치던 오르피어스는 머리가 일순 어지럽게 흐려질 정도의 흥분을 삭이려 애썼다. 들썩이던 어깨는 약간 가라앉았지만 울분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어쨌든! 난 싫어! 절대 안 해!」
대답도 듣지 않고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그 이후 아이릭에게서는 전화도 방문도 없었다. 잔뜩 화를 터트리고 오기는 했지만 아이릭이 명령을 철회하리란 헛된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아이릭이 결정한 이상 여타의 반발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매한가지였으니까.
“……미치겠네.”
아이릭의 명령에 항거하는 건 처음이다. 오르피어스는 아이릭의 명령에 절대복종하였으며, 이에 의심이나 불만은 갖지 않았지만 지크하르트와 페어로서 각인하는 건 그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지크하르트의 앞에서는 보편적인 핑계를 댔지만 단순히 핑계대로의 이유뿐이었다면 어렵잖게 명령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며칠 내내 빠져 나갈 방도를 고심했지만 앞이 껌껌하게 막혀 있다는 것만 확인할 따름었다.
그렇게 고민하다 까무룩 선잠이 들었던 것 같다. 오르피어스는 하루의 시작을 여는 소리에 흠칫 잠에서 깼다. 가이드가 죽은 후 그는 하루에 3시간도 채 잠들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예리하게 다듬어지는 오감이 수면을 방해한다.
등청 시각에 가까웠다. 의욕은 전혀 없었지만 내도록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 있다면 감정을 다스리기가 더 힘들 것 같았다. 주사를 한 번 더 놓고 일어났다. 관성적으로 차가운 물에 샤워하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침 식사 전이라는 것을 떠올린 건 시영 아파트 주차장에서 시동을 건 후였다.
등청하는 도중에 적당한 가게에 들러 손에 짚이는 빵이며 샌드위치 따위를 아무거나 쓸어 담았다. 커다란 종이봉투가 금세 묵직해졌다. 이럭저럭 며칠 먹을 끼니는 될 것이다.
예상보다 가게에서 지체한 탓에 종이봉투의 제일 위에 놓여 있던 도넛을 적당히 우물거리며 복도를 걷다, 지크하르트와 마주 쳤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따뜻하다고 느낄 햇살에 눈이 부셔 눈물이 맺히고, 뚜벅뚜벅 울리는 발소리가 천둥처럼 내리꽂히어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알싸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독하게 후려칠 때 걸음을 돌렸어야 했다. 지크하르트의 담배 냄새라는 걸 알면서도 인식하지 못했다.
당황하여 인사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던 그는 지크하르트가 한 손을 올리며 무어라 말을 하려는 기척에 흠칫 놀라 등을 돌려 도망 쳤다. 들고 있던 종이봉투는 어디에다 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가까스로 건물을 빠져 나와 심장 언저리를 누르며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최악의 타이밍이다.
더욱 최악인 건 억지로 붙잡아 가라앉히던 약효를 떨쳐내며 서서히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하려던 오감이 지크하르트의 존재를 그의 영역 안에 인지한 순간 급격히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센티넬이라면 갓 발현한 아이부터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에 이르기까지 본능적으로 깨우치는 마음의 지침이다. 거부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의 정신은 이미 지크하르트를 자신의 가이드로서 인지하고 있었다.
아이릭 벨포드가 지크하르트 카시야스의 가이드가 되라고 명령했다. 센티넬로 각성하고 십수 년을 아이릭에게 지배당하였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오르피어스에게는 그 한마디면 족했다.
“빌어먹을…….”
숨을 죽이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무리 자신의 가이드는 지크하르트가 아니라고 되뇌어 봤자 영혼을 도려내어 박은 것처럼 뚜렷한 명령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깜깜하게 막혀있으나마 적어도 볼 수 있던 앞이 차츰 사라져 갔다. 출구가 없다. 하지만 마지막은 아니다.
아직,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증표인 각인이 새겨지지 않았다. 그 전에 다른 가이드를 아무나 붙잡아 각인을 새기게 하면 그만이다.
‘강간이라도, 못할 건 없잖아.’
지크하르트를 떨쳐낼 수만 있다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오르피어스는 이를 악물었다.
여타의 국가와 같이 오시안 왕국도 소재가 파악된 센티넬과 가이드를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전화의 불길이 가시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 이상의 월등한 이능을 지닌 센티넬은 대부분이 군사 병기로서 이용되기에 센티넬 센터는 군속 기관이다.
그렇기에, 데스크에 한 팔을 올리고 방글방글 웃고 있는 남자는 직속은 아닐지라도 엄연한 상관이었으므로 위계질서가 뚜렷한 조직 사회의 말단인 크리스 세브란 하사는 진땀을 흘리며 메아리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말했듯이 내가 거창한 걸 요구하는 게 아니잖아. 작은 부탁만 들어주면 된다구. 가이드 숫자가 아무리 적어도 센티넬보다는 많은데 홀몸인 가이드가 없겠어? 있는 거 다 안다니까. 능력이든 지위든 나이든 뭐든 전혀 상관 안 하니까 한 명만 소개해 줘. 응?”
“이미 가이드가 있지 않으십니까.”
“없어, 없어~ 정식 각인도 안 했는데 무슨 가이드야.”
“벨포드 소령님의 가이드로 여기 분명히 카시야스 대령님이 등록되어 있으십니다.”
가이드 있잖아요. 가이드 없어.
영양가 없는 대화의 반복은 이십 분째 지속되고 있었고 오르피어스가 한마디 할 때마다 크리스는 체증이 한 무더기씩 얹히는 기분이었다. 기어이 서류까지 가져와서 내밀었지만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내 서명도 없고 지크하르트의 서명도 없는 걸, 뭐. 무효야.”
“…….”
총독이 대리인의 자격으로서 친필 서명하고 본인의 인장까지 찍어 작성한 서류보다 공증성이 떨어지는 게 무어 있던가. 계급장 떼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0.1초 후에 오르피어스의 멱살을 붙잡은 채 팔뚝과 분리된 자신의 손을 보게 될 것이 뻔하다.
십대 중반에 벨포드 총독의 쿠데타에 동참하여 센티넬로서 정식 활동을 시작한 오르피어스의 무공은 화려했다. 크리스는 센터 소속이라 참전 경험은 없지만 소문으로도 기록으로도 익히 그의 전공을 접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군인이 화려하게 발자취를 남긴 무공에서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던 적이 있던가.
오르피어스의 이력에 한 줄로도 기술되지 않고 잊혀 사라질 자신의 처참한 운명을 상상하고 얌전해진 그는 거절의 방향을 약간 달리 했다.
“카시야스 대령닝은 가이드로서의 자질도 발군이십니다. 센티넬의 평균을 월등히 상회하는 소령님의 능력을 가다듬기에 여타의 평범한 가이드로서는 좀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적당한 아첨을 섞어 오르피어스의 자존심을 세워준다는, 뻔하지만 뻔한 만큼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수도 있는 설득이었으나 오르피어스는 따분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능력이고 뭐고 솔직하게 말해서 난 남자랑 자기 싫어. 박는 것도 박히는 것도 싫다구. 너도 남자니까 내 마음 잘 알 거 아냐. 아니면 너 남자 좋아하니? 남자랑 자?”
일순간 남자를 좋아한다는 뻥을 치고 셜득을 빙자한 애걸을 계속하자는 충동이 크리스를 뒤흔들었으나 멀쩡히 여자 친구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남자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그를 간신히 잡아 세웠다.
“……아닙니다. 여자 좋아합니다.”
“그치이?”
오르피어스가 입가에 올린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시선을 가까이 했다. 크리스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지만 군인으로서의 훈련이 엉덩이를 뒤로 빼지 않도록 버티게 해 주었다.
“나도 여자가 좋아. 제일 좋아하는 건 다리지만 가슴도 물론 싫어하는 건 아니야. 남자 가슴과 구분 가지 않을 정도의 납작한 빈유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 가슴을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그, 그러십니까.”
“하지만 빈유든 거유든 체형, 외모, 몸매, 성격, 배경, 능력, 직업 다 상관없으니까 여자 가이드 한 명만 알려줘. 나 정도의 남자가 치마만 입으면 된다는데 조건이 까다로운 것도 아니잖아? 우와, 내가 여자였다면 제발 날 받아달라고 매달렸을 텐데. 얼굴, 돈, 직업, 능력, 가문, 거기다 미혼. 뭐가 달려?”
목숨이 달리죠, 라는 대꾸를 직급에서 밀려 할 수 없는 것이 통한이었다. 곱상한 미남을 옆에 끼고 그의 돈을 흥청망청 쓸 수 있다 하여도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크리스는 최후의 보루로 넘어갔다. 부디 이 발언이 그의 심기를 긁지 않기를 바라며 신중하게 단어를 고른 후 부러 무뚝뚝한 의무적인 표정을 가장했다.
“소령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알지 못하는 건 아니나 원칙적으로 센티넬에게 가이드의 거처를 알리는 행위는 엄중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한번 각인을 맺으면 죽기 전까지 지속되는지라 서로의 성장 환경과 성격 및 인간관계 등의 요소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몇 차례 제공한다. 허나 이도 어디까지나 사람의 행사라 완벽한 궁합을 자랑하는 페어는 완벽한 금슬을 가진 부부만큼이나 드물었다.
신체적, 능력적으로 우월한 센티넬이 일방적으로 절박하게 가이드를 필요로 하는 만큼 틈이 벌어지면 극단적으로 치닫아 가이드를 죽이고 다른 가이드와 강제로 각인을 맺는 범죄는 잦지 않으나 분명히 있다.
각인을 하기 위해서는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신중하게 서로의 정신적인 교갑과 감응을 맞추어 가는 방법도 있지만, 대개는 육체와 정신의 고양이 빠르게 일어나 한두 번의 접촉만으로 각인이 완료되는 성관계를 택했다. 즉, 센티넬이 강간한다면 대개 가이드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각인이 이루어진다.
이 같은 일이 횡행하면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를 성립하는 근간이 흔들린다. 센티넬에게 특권과 면책권을 부여하는 오시안에서도 가이드 강간 및 페어 가이드의 살해와 학대는 엄중히 처벌함과 동시에, 페어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가이드의 인적 사항을 센티넬에게 알리는 정보의 유출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센티넬이라면 알지 못할 리가 없는 당연한 금지 사항을 크리스가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둔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르피어스라면, “내가 가이드를 찾아서 강간할 거라고 말하는 거야, 지금? 좀 기분 나빠지기 시작했어.”라는 대꾸를 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오르피어스가 강간이라도 불사할 심정을 굳히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당황함이 아니라 어이없음이 장악하였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크리스는 타인의 마음을 읽을 능력이 없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원칙을 말씀드린 거니 노여워 마십시오.”
“화는 안 내. 하지만 안 알려 주면 네가 날 예비 강간범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생각에 몹시 슬퍼질 거야.”
“……소령님. 제발 부탁입니다. 가이드의 거취를 알려드린 게 발각되면 제가 죽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핏기 빠진 얼굴을 최대한 불쌍하게 일그러트리며 슬쩍 양손을 모았지만 오르피어스의 ? 존재하는지나 의심스러운 ? 측은지심을 자극하여 마음을 돌리게 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시간을 벌고 있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상관 중의 한 명이 접수 데스크 구석의 자그마한 소란을 발견하여 오르피어스의 화살을 대신 맞아주기를. 싸울 대 싸우더라도 급수가 비슷해야 싸움이 되지 소령과 하사는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계급차다.
“내가 언제 널 죽인댔어?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자꾸 이럴 거야? 이름이……. 그래, 세브란 하사. 너 때문에 슬퍼지고 싶지 않아. 그리고 우린 앞으로도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을 거구. 그치? 으응?”
오르피어스의 눈이 가슴의 명찰로 힐끔 떨어졌다가 얼굴로 올라왔다. 우리 사이. 이름도 모르고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위명 아닌 위명만 들은, 대면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그런 사이. 크리스는 애인이고 뭐고 남자를 좋아한다고 대꾸해서 맥락을 끊었어야 했다고 뼈저린 후회를 하였다.
“오, 이게 누구야. 벨포드 소령 아닌가?”
신은 있었다. 크리스는 세상에 둘도 없는 경건한 신자가 되었고 오르피어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허리를 폈다. 조금만 더 하면 됐는데.
“귀관을 센터에서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이거, 반갑다고 해야 하나?”
정복을 갖춘 나이 지긋한 장년의 여성이 반색했다. 오르피어스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출구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는가 싶더니 생긋 눈가를 접으며 슬렁슬렁 가볍게 경례했다.
“안녕하세요, 소장님.”
센티넬 센터의 소장 레베카 크롤 소장이 인사를 받고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시간 괜찮으면 들어가서 오랜만에 회포나 풀까?”
“불편한 정복까지 입으셨는데 나가시려던 참 아니었어요? 오늘 무슨 행사 있어요?”
“뭘, 개인적인 용무일세.”
“아하. 전 시간이 안 괜찮아요. 그럼 이만.”
끈질기게 크리스를 닦달하던 때와는 다르게 미적미적 엉덩이를 빼고 도망치려는 오르피어스의 등허리에 팔을 두르며 레베카가 사뭇 정답게 안쪽 복도로 이끌었다.
“귀관의 안 괜찮은 시간을 내가 사도록 하지. 얼마면 되나?”
“현금밖에 안 받아요.”
몇 마디 버티지 못한 오르피어스는 백기를 들었고 크리스가 마음속으로 보내는 열띤 응원을 받으며 레베카는 그와 함께 소장실로 올라갔다. 차를 드시겠냐는 비서의 정중한 물음에 아무거나라고 대답한 주제에, 커피를 가져오자 커피를 안 좋아한다고 뾰로통하게 한마디를 덧붙여 신임 비서의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한 오르피어스가 마시지도 않을 커피에 각설탕을 마구 넣고 휘저었다.
소장실 안에 두 사람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게 되자 레베카가 한결 편한 태도로 돌아왔다.
“왜 또 그렇게 심술인가?”
“소장님이라면 지는 싸움에 끌려오고 싶겠어요?”
“넌 이길 싸움만 하나?”
“아이릭 형이 이기지 못할 싸움하는 거 보셨어요?”
“그래서 애꿎은 하사를 달달 볶고 있던 거고?”
“그럼요. 계급으로 누르는 게 최고예요.”
오르피어스가 손가락으로 각설탕을 톡 튕겨 한 입에 쏙 받아먹으며 으쓱했다. 레베카가 실소했다.
“그럼 나도 널 계급으로 눌러도 되겠구나?”
“가이드가 없어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가련한 센티넬에게 이 무슨 폭거를.”
끝까지 한마디도 지지 않으면서 얼굴만은 놀란 사슴처럼 동그랗게 뜬 눈이라 그녀도 결국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웃었다. 열 살 때부터 보아 왔던 아이라면 아무리 나이를 먹고 어른인 양 행세해도 어딘가에서는 열 살의 그 모습을 발견하고야 만다. 지금이야 훤칠한 청년으로 성장했지만 허리께밖에 키가 오지 않던 시절엔 체격은 조막만 한 꼬마 녀석이 머리도 크고 눈동자도 참 동글동글 컸었다.
레베카가 소파에 느슨히 등을 기대며 따뜻한 커피잔을 들었다.
“그러잖아도 그 가이드 문제다만, 카시야스 대령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격이 다르잖아요. 어디에서 굴러 들어온지도 모르는 한미한 출신이 벨포드 가에 어디 가당키나 해요?”
“대령의 출신이 아무리 낮아도 굴뚝청소부와 노점상을 부모로 둔 자네트보다는 환경이 좋지.”
마음에도 없는 이유를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주절거린 오르피어스는 레베카가 정론으로 받아치자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제 사정 좀 봐주시면 안 돼요? 지크하르트는 정말 아니라구요.”
“십년지기인데 가이드로서 적응도 잘 되지 않겠나?”
“특별히 걔랑 친한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햇수로만 계산하자면 사관학교 동기 중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애들은 다 십년지기잖아요. 지크하르트랑은 지금도 딱히 안 친해요. 전 한 번 유급하기도 했었고.”
레베카는 그만 보면 죽이지를 못해서 안달이 나는 동문도 있으니 지크하르트 정도면 나름대로 친분이 있다는 범주에 들어가지 않느냐고 되물을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지크하르트가 그의 면전에 대고 총질한 적은 없지 않은가. 오르피어스의 교우 관계는 빈말로도 원만하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친자가 없는 레베카는 오르피어스에게 모성이라 칭할 수 있을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자식처럼 보살폈다. 오르피어스가 어린 나이에 센티넬로 각성했을 때 보듬어준 임시 가이드가 그녀였다. 그녀라고 그에게 선택지 없는 선택을 냉담히 강요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다만 글래스팅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먼저 각하부터 설득하고 오려무나. 그래 봬도 널 꽤 아끼시질 않으냐.”
“그거야 요새 개 값이 비싸서 그런 거구요. 형이 절 아낀다고 해 봤자 일 잘한 개한테 개껌 주는 정도로밖에 생각 안 해요.”
오르피어스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입속에서 잠시 몇 마디 말을 굴려보던 레베카는 현실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쪽을 택했다.
“만약에 각하께서 네 부탁을 들어주신다고 해도 문제다. 자네트의 변고를 확인하고 제일 먼저 가이드를 물색했다만, 네 가이드가 되겠다고 자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조제의 저주라고 다들 수군거리더구나. 너도 알겠지만 자네트도 힘들게 구한 가이드였고.”
“……조제가 저주할 만큼 강단 있는 성격이었으면 애초에 자살도 안 했을 거예요.”
처음으로 오르피어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각설탕을 싼 종이봉지를 의미 없이 잡아 뜯던 손도 놓았다. 짧지 않은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커피는 식어 있었지만 그는 커피를 마시는 대신 마른 입속만 혀로 훑었다. 조제를 떠올리면 항상 목이 탔다.
조제는 그의 첫 변째 가이드였고 사고가 아닌 자살로 그와 절연한 유일한 가이드였다. 그녀의 자살 이후 가이드의 죽음은 거두어지지 않는 그늘이 되어 그에게 드리웠고, 네 번째 가이드마저 죽었을 때 그늘은 가장 짙어졌다.
모든 가이드가 기피하던 그의 다섯 번째로 자네트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부유했고, 자네트는 빈궁했다.
“조제는 좋은 여자였어요.”
“나도 안다. 하지만 센티넬을 두고 자살했으니 좋은 가이드는 아니었지.”
레베카가 빈 커피잔을 놓고 스토브에 주전자를 올렸다. 한 잔을 더 마시기에 딱 적절한 양의 물이 남았던 주전자는 곧 보글보글 꿇었다. “제가 할게요.”라며 소파에서 일어난 오르피어스가 선반에서 커피 통을 찾아왔다. 익히 아는 그녀의 취향에 맞추어 양을 조절하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짙은 커피향이 올라왔다.
“있죠, 레베카.”
“응?”
“레베카가 제 가이드가 되어줄래요?”
커피잔을 건네받은 반대편 손을 올려 잡으며 장난스럽게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그의 낯을 굳히게 하였던 감정은 썰물처럼 쓸려 나가 있었다. 그녀도 부드럽게 마주 웃어 주었다.
“유감스럽지만 이 나이로는 최전선의 센티넬을 따라다니기엔 버거워서 말이다.”
“미동을 안고 자면 회춘한다잖아요.”,
“동자라는 범주에 들어가기엔 네 나이가 양심에 걸리지 않나?”
“언제는 제가 지금도 열 살 아가 같다고 안 그랬어요?”
“더욱 유감. 넌 내 취향의 아가가 아니거든.”
“아, 그럼 아기가 아니라 남자로 클래요.”
“더더욱 유감. 내 취향의 남자도 아니야.”
붙잡혔던 손을 빼며 따악, 하는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튕긴 레베카가 양손으로 커피잔을 쥐었다.
“어쨌든 너와 한 번은 이야기해야겠다 싶어서 가이드 등록 서류는 발송하지 않았다. 오늘 중으로 발송할 테니 위험해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너나 각하의 마음을 돌리려무나. 약으로 버텨도 슬슬 한계가 올 때가 되었어.”
“네에, 네에.”
붉은 흔적이 남은 이마를 문지르며 오르피어스가 건성으로 끄덕끄덕했다.
“그리고 이따 나와 같이 나가자. 정 시간이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만.”
“어디를 가려던 참이었는데요?”“자네트의 장례식이지, 물론. 넌 관심이 없었겠지만 오늘이다.”
특별한 공식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정복을 입은 이유였다. 한 명의 가이드이자 센티넬 센터의 소장으로서 레베카는 변사한 가이드의 조문을 잊지 않았다. 특별히 장례식까지 참석하는 이유는 자네트가 오르피어스의 가이드였기 때문이다. 정작 당사자의 고개는 비딱하게 꼬여 있었지만.
“저 그렇잖아도 불안정한데 장례식에서 파앙, 하고 폭주해 버리면 어쩌죠?”
“내키지 않는 마음도 알겠다만 그래도 네 가이드였다. 마지막 전별은 해 줘야지 도리야.”
대개 이 같은 경우에 정도를 걷고 제시하는 건 레베카였기 때문에 고민하던 오르피어스도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끄덕였다.
“유족이 제 멱살 잡고 드잡이질하면 어떻게 해요?”
“도망 쳐라.”
“충고는 그것뿐이에요?”
“아니면 싹싹 빌든가. 유족보다 더 크게 울든가.”
“어디에도 제가 같이 팔 걷어붙이고 싸운다는 선택지는 안 만들어줄 생각이군요.”
“싸우다가 잘못하면 미동의 얼굴에 흉이 진다.”
“…….”
껄끄러운 심정 탓에 쓸데없이 조잘거리던 그의 입을 조용히 다물게 만든 레베카는 남은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오르피어스가 타주는 커피를 좋아했다.
장례식은 초라하고 조용했다. 금전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자네트는 오르피어스의 가이드가 되어서 일가를 폐가나 다름없는 슬럼의 단칸방에서 시내의 번듯한 주택으로 이사하게 하였고, 오빠가 가게를 열 수 있게 하였고, 두 동생을 공립학교에 진학시켰고, 막냇동생의 입원비를 꾸준히 댔다. 장례식도 부족함이 없었다. 인근 교회의 무덤에 그녀는 안식처를 찾았고 살아생전 제일 아름다웠던 모습을 인화한 메달이 비석에 넣어졌으며 본당신부가 노구를 이끌고 직접 장례미사를 바쳤다. 벨포드 총독의 일등비서관은 유능한 사람이었으니 총독 일문의 가이드가 죽은 것에 깊은 조의를 표하여 주었을 것이다. 그 조의의 일부가 무덤을 덮을 대리석과 그녀를 수호할 조각상이 되었으리라는 것에 오르피어스는 오늘 아침 식사도 내기로 걸 수 있었다. 도넛 하나만 먹고 휴지통에 처박아버린 식사이긴 하였어도.
그런데도 장례식은 초라했다. 자살한 가이드가 저주하여 이후의 가이드들이 줄줄이 죽어 나간다는 소문이야 유명하다. 유족 중의 한 명이 마치 소설책처럼 멱살을 잡으며 너 때문에 자네트가 죽었다고 울부짖는 전개를 아주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는데 자네트의 관 앞에서 그네들은 그에게 허둥지둥 인사하며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는 둥의 인사를 꾀꼬리처럼 반복했다. 슬픔과 비련이 아닌 두려움과 불안감이 고인이 마지막으로 남길 흔적을 퇴색시키고 있었다.
자네트 생전에 그녀의 가족을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때도 그들은 이 같은 비굴한 낯으로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을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I런 가족들 때문에 널 팔아야 했던 거야?’
조금 웃고 싶어졌다.
가이드로 발현하여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떨칠 수 없었던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자네트가 가이드로서의 자신을 팔았기 때문이다. 돈에 팔려간 가이드는 결국 고급 창녀나 다름없다.
딸을, 누이를, 창녀로 팔아 기울어진 가세를 바로 세운 이들이니 기생하던 기둥의 영원한 부재에 긍긍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이며 당연한 걱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이해와 동의어는 아니었다. 오르피어스는 한 번도 그 같은 현실에 부딪친 적이 없기에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그녀 명의로 개설하고 다달이 입금해 주었던 통장을 회수하겠다고 하면 자네트를 살려 내라고 멱살을 잡을지 궁금해지기는 했다.
“후아암.”
죽은 이의 넋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신부의 경건한 음성을 들으며 늘어지게 하품하다 레베카에게 호되게 옆구리를 꼬집힌 오르피어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신음하다 겨우 허리를 펴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나름대로는 오르피어스도 그녀에 대한 조의를 갖추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서 평상 군복에 포마드 기름으로 넘기기만 한 앞머리칼이 벌써부터 답답하고 가려운 것 같아 헤집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자네트는 수사만 끝나고 바로 안치한 거예요? 검시도 안 하고?”
“사고 정황이 뻔하니까 유족들이 굳이 원하지 않았다더군.”
“흐응.”
레베카의 귓가에 속삭이던 입술을 떼고 앞을 보았다. 고인의 유족들이 하관한 구덩이에 꽃을 한 송이씩 던지고 있었다. 한 바퀴 순번이 돌고 오르피어스의 차례가 돌아왔다.
백합을 떨구고 비석에 새겨진 자네트의 부드러운 웃음을 내려다보다, 허리를 숙였다. 이마에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빨리 비키라고 재촉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네트의 친구였던 듯한 여자가 감상적인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났다.
‘해부했다면 임신 3개월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고개를 깊이 아래로 감춘 오르피어스는 자신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지 잘 상상하지 못했다.
가이드로서의 재능은 졸하였던 자네트였기에 그는 안정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그녀와 몸을 겹쳐야 했다. 그 때문이리라. 그렇게나 주의하였는데도 덜컥 임신하고 만 것은. 아이를 빌미로 요구하는 건 없을 테니, 그냥 낳아서 키우게만 해 달라고 애원했었다.
그 말 만큼은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짐덩이와 미련밖에 되지 않는 가족들에게서 해방되어 ‘진짜’ 가족을 갖고 싶어 했으니까.
좋은 여자였다. 그의 곁에는 항상 좋은 여자만 있었다.
죽은 친모도, 자살한 조제도, 아이를 품고 죽은 자네트도, 잇따라 간 세 명의 가이드들도.
이복 누이 힐라리아도 좋은 여자였다. 몇 겹으로 덧씌우고 덧씌우고 내리눌러 간신히 유지 중이던 인내심이 끊어져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이기 전에 먼저 죽어주었으니까.
긴 날숨과 함께 상체를 일으킨 오르피어스는 몸에 남았을 백합의 마지막 잔향까지 떨구어 보내고는, 자네트와 작별 했다.
***
딩동, 딩동- 두어 차례 이어지던 초인종은 이내 문을 탕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되었다.
“야, 오르피어스. 집에 있냐?”
몇 차례 더 두드리며 불러 보았지만 문 너머는 잠잠했다. 전화도 되지 않고 집에도 기척이 없다. 우편함의 신문도 며칠치가 쌓인 채 먼지가 내려앉아 있다. 지크하르트는 문에 바짝 귀를 대었다. 인기척은 여전히 감지되지 않았다.
오르피어스가 행방불명된 지 나흘이 지났다. 당연히 사령부 청사에도 등청한 기록이 없었다. 단순히 군 장교의 실종이라는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는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이다. 즉, 언제 폭발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폭발하는 시한폭탄이다.
총독의 명령으로 어영부영 가이드가 되기는 하였지만 정식으로 각인한 게 아니니 그에게 의무는 없지만, 걱정이 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오르피어스가 따로 나와서 사는 시영 아파트에도, 벨포드 본가 저택에도 수차례 연락했지만 행적을 찾지 못했다. 오르피어스에게는 며칠간 몸을 의탁할 지인도 거의 없었다.
‘……설마 다른 가이드를 강간하기라도 하러 간 건가.’
무심코 떠오른 가정이 지크하르트를 침음하게 했다. 그가 아는 오르피어스는 족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으니까. 목적을 위해 수단을 불사하는 오르피어스가 맥없이 두 손 놓고 집에 처박혀서 끙끙 앓고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왜 오르피어스가 널 죽이면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거라면서 밤중에 자신의 목이라도 따러 오지 않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담배를 입에 물고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집에는 며칠째 드나든 흔적이 없고 밖에서 보았던 창에도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단단히 닫힌 문을 손등으로 툭툭 건드리며 강도를 가늠해 보았다.
‘자를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울 동안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고민하다 잠자코 발길을 돌렸다. 역시 오르피어스가 얌전히 집에 처박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관사에 숨어서 몰래 칼을 갈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꽤 가능성이 있는 상상이었기에 지크하르트는 실소했다.
옆집 고양이는 오늘도 나른한 햇볕을 즐기며 기문 좋게 고롱거렸다. 천장 구석으로 수십 개의 발을 움직이며 벌레가 다다닥 기어갔다. 전화 벨소리가 따르릉 울리고 무가치한 수다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거리를 지나며 깔깔 웃었다. 무엇이 무엇인지 하나씩 판별할 냉정한 미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소리가 혼탁하게 뒤섞이어 태풍처럼 웅웅 휘몰아치며 뇌를 두드렸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 컸다. 비명을 질렀다가는 고막이 찢어질 지도 모른다. 며칠째인지도 모르겠다. 한 줌의 햇살에 망막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아 두꺼운 커튼을 친 방 안에는 시간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눈을 감으면 시각이 차단된다. 후각은 마비된 지 오래다. 마비되기까지 몇 번이나 구토하고 기절하고 구토하기를 반복했지만 그 대가로 지금은 아무런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왜 청각은 마비되지 않는 걸까. 귀를 후벼 파 고막을 잡아 뜯고 싶었지만 보슬보슬한 천으로 된 옷에 쓸려도 사포로 문질리는 것만 같은 촉각이 통각을 견딜 수 없으리라는 걸 간신히 떠올렸다. 주사바늘을 혈관에 넣는 아픔만으로도 기절했기에 약을 할 수 없게 된 지도 한참이었다. 무사히 주사하였더라도 몇 분이나 약효가 갈 지는 의문이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된 지도 긴 시간이 지났다. 세상은 많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벌레가 날개를 퍼득거리는 소리. 새가 삐롱삐롱 우는 소리.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리는 소리. 종이 위를 사각사각 달리는 펜 소리. 옷을 입으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물건을 달그락 놓는 소리. 콜록콜록 잔기침 소리. 조용히 울먹거리는 소리. 마차 바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자동차가 도로 위를 굴러가는 소리.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 놀이터에서 삐걱거리는 그네 소리. 소리. 소리.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그을 집어 삼키며 씹어 먹었다. 0.0001초의 틈도 여유도 주지 않고 소리들은 끊임없이 그를 난도질했다.
“하으……윽…….”
휘몰아치는 소리의 더미 구석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온 신음 소리에 덜컥 놀랐다. 자신의 신음 소리였다. 오르피어스는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올렸다. 탕탕탕.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오르피어스- 그를 부르는 소리다. 지크하르트의 소리다.
빛살에 비껴나는 그림자처럼 소리들이 슬금슬금 그로부터 멀어졌다. 오르피어스는 바닥에 웅크린 채 손등을 깨물었다. 비명도 울음도 신음도 목 안으로 삼켜져 그의 체내에서 흩어진다. 숨소리마저 바깥으로 흘러갈까 두려워 호흡마저 멈췄다.
한참이나 집 앞을 오락가락하던 기척은 크게 한 번 탕 친 소리를 마지막으로 멀어졌다. 오르피어스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던 팔다리에 피가 돌자 머리가 휘청 어지러웠지만 가까스로 버텨냈다. 조금이나마 이성을 되찾은 머리가 외쳤다. 나가야 해. 여기에서 나가야 해. 언제 다시 지크하르트가 찾아올지 몰라.
신발을 찾아 신을 이성이 남아 있었던 건 맨발바닥으로 밟은 모래 알갱이가 살갗을 푹 찌르며 꿰뚫는 것 같은 통각을 남겼기 때문이다. 헛손질을 거듭하다 간신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내딛자마자 햇살이 쏟아져 비명을 지를 뻔했다. 피부가 자글자글 익고 눈이 짓물리는 것 같았다. 심호흡하며 머릿속을 다스리기 위해 애썼다. 감각이 극대화되어서 과장되게 받아들일 뿐 피부도 눈도 괜찮아. 멀쩡해. 세뇌와 갈은 중얼거림은 거의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앞으로 걸음을 내딛게 할 수는 있었다.
아주 멀리에 있는 것도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시각은 오히려 방해만 되었기에 눈을 질끈 감고 계단을 내려왔다. 시야를 차단하여도 빛살은 여전히 그에게 내리꽂혔다. 눈가가 쓰라리고, 뺨이 뜨거워졌다. 생리적인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지만 아픔은 조금도 상쇄되지 못했다. 도중에 한 번 구르기도 했다. 뼈가 부러져 피부를 찢으며 튀어나온 것 같은 고통이었지만 가벼운 멍이 들었을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계속 속삭였다.
차를 운전하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어쨌든 멀리, 멀리, 멀리, 떠나야 했다. 그것 하나만을 붙잡고 비틀비틀 걸어갔다. 부딪친 사람들이 화를 내기도 했고 욕을 하기도 했다. 눈을 감고 휘청거리는 그를 맹인이라 짐작하였는지 길게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소리, 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었다.
자리에 멈춘 행인이 많아졌다. 오르피어스는 오른쪽 눈 하나를 간신히 가늘게 떴다. 노면전차 승강장의 팻말이 위압적인 커다란 몸체로 시야를 꽉 점령했다. 거인처럼 몰려 선 사람들이 우레처럼 웅성거렸다. 귀를 양손으로 누른 채 주저앉았다. 땅바닥이 울렁거렸다. 엔진 소리가 사방을 찢으며 몰려왔다. 전차에 타지 못하고 더듬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팔을 내밀어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말소리가 뭉개진 채 흘러넘친다. 큰일이다. 아직 멀리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증상이 악화되고 있었다.
누군가가 양보해 준 빈자리에 앉았지만 몇 분 버티지 못했다. 전차는 밀폐된 공간이다. 소리도 냄새도 기척도 외부로 퍼지지 못하고 내부에서만 빙글빙글 회전한다. 차체가 덜그럭거리고 바퀴에 돌이 튀고 크게 기우뚱했다가 균형을 바로 잡고, 빠르게 달리다가 멈추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다시 또 타고, 경적이 울리고, 소리가, 진동이, 내부를 진탕시켰다.
전-철-을-멈-춰-주-세-요― 새하얗게 질려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의 옆자리 승객이 다급하게 외쳤다. 전차가 승강장 약간 앞에서 멈췄다. 거의 끌리듯이 전차 밖으로 나서자마자 속을 게워냈다. 며칠 간 전혀 입에 댄 게 없었으므로 신물이 나는 위액만 꿀렁꿀렁 넘어오며 식도와 혀를 태웠다. 구토할 것 같은 그를 억지로 잡아 끌어 내리게 하느라 같이 전차에서 내리게 된 승객이 약간의 짜증과 안쓰러움이 섞인 시선을 오르피어스에게 던지고는 다음 전차를 대기하러 섰다.
전차도 안 돼. 그렇다면 걸어야지. 구토물에 거의 얼굴을 박듯이 헉헉거리던 그는 겨우 허리를 구부정하게나마 펴고,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걸어갔다. 머리가 아팠다. 아프다는 감각이 진짜 아프기 때문인지 과부화된 뇌가 판단을 잘못 내리고 있기 때문인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빨리, 미쳐서, 죽었으면, 좋겠어. 드문드문 끊어지는 생각을 바닥에 뿌리며 그는 위태로이 걸어갔다.
퍽, 하고 제법 아프게 어깨를 부딪친 탓에 노성을 지르려던 남자는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휘청거리며 걷다 그를 들이박은 사람은 맹인이었다. 지팡이도 인도견도 없이 어쩌다 혼자 거리를 방황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단단히 내리 감은 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리란 것만큼은 확실했다.
“거 조심하쇼.”
퉁명스러운 말이 나오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번화가는 아닐지라도 행인이 오가는 대낮의 광장을 준비도 없이 나다니는 맹인이라니 조금 짜증이 나는 건 사실이다. 앞도 못 보는 맹인이 아무렇게나 방치된 것만으로도 모자라 후줄근한 셔츠 한 장에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칼, 얼굴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 - 남자는 표현을 조금 정정했다. 눈물은 지금도 가늘게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 흉하게 남아 있으니 정신병동에서 탈출한 병자가 아닌가 싶다.
경찰에 연락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고 있는데 허우적허우적 걸어가던 맹인이 갑자기 무릎을 풀썩 꺾으며 고꾸라졌다. 안 그래도 위태롭던 걸음걸이였다. 남자는 오늘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혀를 차며 맹인에게 다가갔다. 마침 기마경관이 순찰 중인지 말발굽 소리가 다그닥거리면서 도로를 울렸다.
“이봐요. 괜찮소? 쯧, 그러니까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왜.”
“아아, 아아아아아아――!!”
남자는 멈칫했다. 전조 없이 터진 비명이 새되게 허공을 찢었다. 머리를 감싼 채 웅크린 맹인의 몸 주위로 둥근 불길이 치솟았다.
한 걸음만 앞섰어도 불길에 직격당할 뻔한 냠자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 경악으로 외쳤다.
“세, 센티넬이야……!”
소요는 파도처럼 사방으로 번졌다.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넘실대는 화염을 피해 도망쳤다. 다리가 풀린 그를 급히 다가온 경관들이 끌어 빼냈다. 광장은 금세 불바다가 되었다. 센티넬의 폭주였다.
“발포 허가는 아직인가!!”
스코프에서 눈을 뗀 크루엘라 헬시터 소령이 노발대발 언성을 높였지만 오지 않은 허가가 당도하였다고 거짓으로 보고할 수는 없는지라 해링 턴 소위는 2분 전의 대답을 반복했다.
“없습니다, 소령님!”
“빌어먹을!! 불이 여기서 더 번지면 가스관이 터진단 말이다! 개새끼가 뒤지려면 집구석에서 얌전히 뒈질 것이지!!”
벨포드 소령이 자택 아파트에서 폭주하였으면 인명 피해가 가스 폭발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해링은 지적해 줄까 말까 하다가 입 닥치고 있는 쪽을 택했다. 그녀가 노발대발 날뛰고 있는 이유는 ‘센티넬’의 폭주가 아니라 ‘벨포드 소령’의 폭주였으니까.
이 같은 상황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진노부터 느끼는 건 그녀의 기질 때문일까, 혹은 동류의 센티넬이기 때문일까. 무엇이든 반경 200미터를 뒤덮은 화염 앞에서도 크루엘라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는 건 멀찍이 광장을 포위 중인 부대를 위해서도 다행이었다.
해링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다리가 조금 떨렸다. 새하얗게 일렁거리는 화염은 흔히 눈에 담는 붉고 노란 강렬한 색채가 아니기에 비현실적이고, 그렇기에 더욱 공포스럽다. 전장에서 벨포드 소령의 백염은 악마의 다른 이름이었다.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피부를 찌르는 열기가 뜨겁다. 경관의 신속한 소개로 시체가 불타는 특유의 노린내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 것에 해링은 감사했다.
인위적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화염이 기어이 외곽의 상가 건물을 집어삼켰다. 노상 가판대며 깃대 등은 불길에 허물어진 지 오래였다. 이제 불이 옮겨 붙는 건 시간문제다.
센티넬의 폭주를 진정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다. 가이드가 동조해주거나, 죽거나. 벨포드 소령은 현재 가이드가 없고, 폭주 끝에 사망하는 건 예정된 미래였다. 이 이상 피해가 커지기 전에 그를 죽이는 것이 미쳐가며 고통 받고 있을 그를 위해서나 도시를 위해서나 최선이었다. 책임 소재를 기리는 건 그 다음의 일이다.
“사령부에서 사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통신병이 외쳤다.
“좋았어!”
그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던 크루엘라가 방아쇠를 당겼다. 해링이 멈칫하며 “잠깐,”하고 불렀지만 총탄 소리가 더 빨랐다. 타앙. 탕. 탕. 탕―! 탄창을 단번에 다 비운 크루엘라의 입에서는 사살에 성공한 희열이 아닌 욕설이 나왔다. 해링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벨포드 소령님의 화염은 물리적인 층격으로 뚫지 못합니다.”
“알아! 젠장!”
그녀는 욕설을 씹으면서도 수류탄의 작동줄 다섯 개를 한번에 잡아 빼며 한 손에 전부 쥐었다. 그리고 팔을 뒤로 젖혔다가 힘껏 던졌다. 매가 활공하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범인이라면 절대 겨냥할 수 없는 거리를 훌쩍 단축하며 날아간 수류탄들은 정확히 오르피어스에게 격중하는 듯 하였으나 수류탄의 폭발은 자그마한 불씨만을 남기고 보다 압도적인 질량을 가진 화염에 먹혀 사라졌다.
“씨발! 사살 허가가 떨어지면 뭘해! 죽일 수가 없잖아!”
화염만큼이나 이글거리는 증오가 크루엘라의 입술 사이에서 짓씹혔다.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폭주하여 능력을 마구잡이로 사방에 떨치고 있는 오르피어스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떠올렸다. 시간을 들이거나 작전을 세워 피해를 감수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헤임에서 한순간에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총독 각하께서 15분 이내에 당도하신다고 합니다!”
통신병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크루엘라의 맟도 일그러졌다. 그녀가 입술을 열어 무어라 대꾸하려던 때 군경의 경계를 뚫은 차 한 대가 굉음을 일으키며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노호성을 내지르려던 크루엘라는 자동차 변호판과 운전석의 남자를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서둘러 운전석에서 내린 닉이 뒷문을 열기도 전에 장신의 남자가 군화를 보도에 디뎠다.
“카시야스 대령님. 오셨습니까.”
빠르게 현장을 눈으로 훑은 지크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오르피어스 짓이라는 거 안 들어도 알겠군.”
그리고 크루엘라를 돌아보았다.
“죽이려고 했는데 못 죽인 것도.”
크루엘라가 낯을 굳혔다.
“곧 총독 각하께서 오십니다.”
“오르피머스를 죽이러?”
“당연합니다.”
소드 벨트에 올린 지크하르트의 손가락이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고민에 빠질 때 으레 나오곤 하는 습관이라는 걸 익히 아는 크루엘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좋지 못한 예감이 든다.
대개의 경우,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는 법이다.
“내가 간다.”
“대령님!! 안 됩니다!”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위험합니다. 각하께서 오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귀관은 말이야…….”
지크하르트가 조금 피곤한 기색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형이 아우의 피를 손에 묻히는 걸 방관할 셈인가?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간다고 했잖나.”
“상관이 죽으러 가는 건 방관하란 말씀이십니까? 저 불길을 어떻게 넘으시겠다는 겁니까!”
크루엘라가 가리킨 손가락 끌에는 탐욕스럽게 제 영역을 넓혀가는 화마가 치솟고 있었다. 지크하르트가 대수롭지 않게 손을 올려 화염 너머의 몇 군데를 가리켰다.
“여기, 여기, 여기, 저기, 그리고 저기를 발판으로 뛰어 넘으면 오르피어스가 있는 중심부까지 갈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건물은 붕괴되지 않았군.”
그가 지정한 지점들을 이은 궤도를 머릿속으로 계산한 크루엘라의 낯이 다시금 창백해졌다.
“대령님! 너무 무모합니다! 다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화상 좀 입는 것 정도야 치료하면 되겠지.. 오르피어스의 목숨은 내가 거둔다. 녀석은 날 싫어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I0년 이상 함께 보내 온 전우야. 이 이상 고통스러워하는 걸 방치하기도 힘들군.”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사관학교 재학 중일 때의 기간으로 따지면 저와 벨포드 소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돼. 귀관은 너무 흥분해 있는데다가 목적이 구제가 아닌 복수잖나. 그리고 내게는 이유가 하나 더 있어.”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장검을 풀고 소드 벨트에 갈고리를 매단 와이어와 대거를 차며 마지막으로 첨언했다.
“오르피어스는 죽은 약혼녀의 동생이라고.”
그 말에는 크루엘라도 더 만류할 구실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이를 꾹 다물며 물러서자 아래의 장교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기실 남매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보편적인 우애와는 다르게 힐라리아는 오르피어스를 아이릭의 개라고 지독하게 경멸했다. 경멸과 동시에 벨포드 일문이라는 자부심도 컸던 그녀이니,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타인의 손에 비참하게 절명하기보다 가문의 손에 거두어지길 원했을 테지만 구태여 자세한 사정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다녀오겠다고 짧게 이른 지크하르트는 목적했던 상가의 지붕으로 뛰어들기 위해 근처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높은 전경에서 보는 화재는 더욱 참담했다. 오르피어스의 의지가 없어 폭발하지 않고 그저 단순한 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점만이 약간의 위안이었다.
작은 점처럼 보이는 오르피어스의 모습을 눈에 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에게도 책임은 있다. 태평하게 고민이나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고통을 1분, 1초라도 덜어주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였다.
한 변이라도 삐끗하면 화마 속으로 추락이다. 신중하게 거리를 재고 도움닫기를 하여 처음 목적한 지붕에 무사히 안착했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밀려들었다. 소맷자락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와이어를 꺼내려던 지크하르트가 멈칫했다.
전혀 뜨겁지 않았다.
그때와는 다르게, 아니, 구태여 과거의 경험을 꺼낼 것까지도 없이 불이 뜨겁다는 건 상식이다. 화마가 날름거리며 토하는 연기가 매캐하게 속을 자극하여 목이 따가웠지만 정작 불 자체는 그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화재 현장 밖에 있을 때에도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었다.
“…….”
잠깐 머뭇거리던 그는, 3층 건물 지붕에서 화마 속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연기가 짙어 명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지크하르트가 최초의 도약을 무사히 성곱한 건 분명했다. 손에 땀을 쥐며 눈을 부릅뜨고 있던 크루엘라가 비명을 질렀다.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령님! 이런 젠장! 건물이 무너졌나!!”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저 불구덩이에 추락한 지크하르트를 방치하는 건 더더욱 안 되었다. 뒷일이야 어떻든 일단 돌진하기 위해 방금 지크하르트가 타고 온 차에 오르려는 그녀의 발목을 해링의 다급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소령님! 대령닝이 일어나셨습니다. 아주…… 멀쩡하신데요?”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하고 싶었지만 전언은 사실이었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지크하르트는 주변을 두리번 돌아보는 것 같더니 오르피어스가 있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사납게 날름거리는 화염이 마치 물길이 갈라지듯 그의 주변을 텄다.
자신이 본 것을 불신하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소총을 올려 쥔 크루엘라는 스코프의 렌즈로 지크하르트가 오르피어스를 끌어안는 것까지 목격하고야 말았다.
“……실은, 정식으로 절차가 이루어진 건 아닌데 대령님은 벨포드 소령님의 가이드가 되셨습니다.”
닉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크루엘라의 손아귀에서 소총이 와지끈 두 동강이 났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각인도 맺지 않은 센티넬이 자신을 페어 가이드로 인식한다는 건. 그렇게나 질색했던 녀석이.
하지만 고민은 이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크하르트는 그를 피하며 물러서는 화마 속을 갈라 중심부로 향했다. 짐승처럼 웅크린 채 벌벌 떨며 흐느끼는 오르피어스가 있었다. 기력 없이 웅얼웅얼 뱉어지는 신음은 이미 인간의 언어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있었다.
지크하르트는 센티넬이 극대화되는 오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지난 십년의 경험으로 이러한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오르피어스.”
목소리를 크게 높여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오르피어스.”
재차 부르자, 부들거리는 얼굴이 조금씩 위로 올라왔다. 동공이 크게 열리고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동자가 허공을 더듬거렸다. 낮고 탁한 음성이 눈물에 젖은 채 밀어 올려졌지만 그것이 단순한 신음인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 뭉개진 것인지 잘 파악하기 힘들었다.
“괜찮아, 오르피어스.”
낯섦에 대한 본능 때문인지 주춤거리며 물러나려는 오르피어스에게 다가가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주었다. 등이 크게 경련했다.
“……지크, 하…….”
거칠거칠하게 쉰 음성이 갈라졌다. 지크하르트는 팔을 뻗어 그의 몸을 가득 품어 안았다.
“그래, 나다. 내가 있으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
품 안으로 오르피어스가 허물어졌다. 눈물로 흠씬 젖은 뺨이 목덜미를 간질이고 양 팔이 무턱대고 어깨며 등을 안았다. 사지에 힘이 없어 옷자락을 쥐면 떨어지고, 쥐면 떨어지기를 반복했지만 그를 놓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지크하르트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끊임없이 괜찮다고 내가 있다고 속삭이며 얼굴에 연신 키스를 떨어트리고 오르피어스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격하게 날뛰던 오르피어스의 심장 소리가 차츰 그의 심장 소리와 동조되어 갔다.
거세게 치솟던 화마가 찬찬히 사그라졌다. 시야가 트이고 하늘이 보인다. 검은 연기는 남았지만 불은 완전히 사라졌다. 지크하르트는 그제야 허리를 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르피어스의 팔이 그의 등에서 아래로 스르륵 떨어졌다.
“미안해……. 내가, 지크하르트. 미안. 미안…….”
오르피어스가 내도록 웅얼거리던 것이 신음이 아닌 사죄임을 그는 그때야 깨달았다.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폭주한 걸로 사과할 녀석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서늘한 바람이 상념까지 날려 보냈다.
지크하르트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땀으로 흠뻑 젖어 있던 등이 식으며 오한이 인다. 해가 많이 기울었다. 생각보다 퍽 오랜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 같다.
기진맥진하여 의식을 일은 오르피어스를 어깨에 둘러업으며 일어났다. 불기운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저 멀리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에 괜스레 민망해졌다. 폭주한 센티넬을 진정시키는 건 오랜만이라 은연중에 긴장했는지 등근육이 조금 땅겼다.
‘그래도, 뭐……. 힐라리아보다는 낫나.’
적어도 주위의 사람들이 그을 죽이려고 무기를 들고 달려들지는 않았으니.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를 단단히 추어 업고, 걸음을 땠다.
***
블로섬 광장에서 발발하였던 센티넬의 폭주는 다행히 대형사고로 번지지 않고 진정되었다. 오르피어스를 둘러업고 나올 때부터 숱한 시선이 의문과 경악을 담고 화살처럼 빗발쳤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시치미를 뚝 때고 대기 중이던 앰뷸런스에 오르피어스믈 실어 보냈다. 그 후 차마 그를 정면으로 보지도 못하며 이를 가는 크루엘라에게 뒷수습을 맡기고는 사령부로 후다닥 돌아왔다. 그날 석간지부터 다음날 조간지까지 센티넬의 폭주 뉴스가 1면을 점령하였지만 일부러 보지 않았다. 총독의 호출만 아니었다면 퇴청할 때까지도 모른 척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을 밀어 열자마자 문틈 소리로 들려 나오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기이한 소리에 나아가려던 발이 뚝 멎었다. 몇 년 더 성숙한 소리였으면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 나왔을 테지만 그렇게 넘기기에는 애매한 연령대다. 마땅한 대처 방법을 찾지 못하여 도와달라는 의미로 흘긋 돌아보았지만 비서는 기계적인 정중한 미소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이었다.
신경 쓰는 쪽이 지는 건가.‘
보이지 못할 것이라면 애초에 들어오게 허락하지도 않았을 테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한 지크하르트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앙앙 들려오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왔나.”
익히 예상하였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예닐곱 살 되었을 법한 어린 아이가 아이릭의 무릎에 올라앉은 채 목이 쉬도록 울고 있었다. 우는 아이도 우는 아이지만, 바로 옆에서 귀청이 찢어지랴 울어젖히는데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서류를 보고 있는 아이릭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오르피어스가 폭주하였던 게 바로 어제의 일이다. 직접 호출당한 사안이야 뻔한데 정작 아이릭의 입술에서 떨어진 말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아이 좋아하나?”
“네?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만.”
“안 싫어하니 됐군. 이 녀석 좀 데리고 있어라.”
그러더니 가타부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짐짝이라도 옮기듯 아이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바동거리며 울음소리가 더 커진 건 물론이었다. 얼결에 아이를 받아 안았다. 낯선 사람에게 억지로 안기자 이 이상 커질 것 같지 않았던 울음은 더더욱 커졌다. 울음소리에 연민을 느낀 게 아니라 짜증이 슬금슬금 생기려 하고 있었기에 지크하르트는 어설프게나마 아이를 달랬다. 아이릭이 낮은 한숨을 뱉으며 허리를 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업무 중인 총독의 무릎 위에서 한숨이 나올 때까지 앙앙 울어도 너그러이 용서 받을 수 있는 아이는 지크하르트의 지식 내에서 한 명밖에 없었다.
“각하의 영애입니까?”
“그래. 록사나라고 한다.”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이릭의 적장자인 동시에 벨포드 가의 제1 후계자인 록사나 벨포드.
적어도 그의 사관학교 동기 중에서 록사나가 유명한 이유는 총독의 딸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지크하르트는 양껏 울다가 슬슬 지치기 시작했는지 호흡이 씩씩거리면서도 울음은 잦아드는 록사나의 엉망이 된 얼굴에서 오르피어스가 지갑이며 로켓이며 액자며 사진이 활용되는 모든 곳에 보관 중인 조카딸의 모습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울음으로 땅땅 부은 얼굴로는 쉽지 않았다.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 통에서도 틈만 나면 사진을 꺼내 들여다보거나 키스하거나 어루만지거나 하여 열렬히 연애 중인 애인을 두고 왔다며 사정을 아는 자로서는 실소밖에 안 나오는 소문마저 돌았을 정도다.
울음이 점차 잦아들면서 아이를 방치 중인 아버지와 얼떨결에 달래주고 있는 부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리고 있을 때 낯선 여성이 허겁지겁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각하. 설마 아가씨가 차에 몰래 숨어들 줄은 몰랐습니다.”
“록사나가 아침부터 매달려서 삼촌 살려내라고 우는 게 자네 잘못은 아니지. 진정한 것 같으니 데려가라.”
“아빠. 삼촌 죽어? 죽는 거야?”
아이릭의 입에서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안 죽는다. 널 두고 죽을 만큼 기상 있는 녀석이었다면 벌써 도망쳤을 거다.”
“진짜? 안 죽지? 진짜? 진짜?”
코를 훌쩍거리면서 끈질기게 묻는 록사나에게 아이릭은 참을성 있게 죽지 않을 거라는 대답을 반복해 주었고 내일이나 모레는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답까지 듣고서야 록사나는 유모에게 안겨서 집무실을 나갔다.
아이릭이 얼굴을 문질렀다. 피곤이 역력히 묻어났다.
“오르피어스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가 내가 죽을 맛이군. 어린애에게 가이드를 만나서 진정되었다는 말을 이해시키기는 어려워.”
“그 녀석 괜찮긴 합니까?”
“약간의 영양실조 증상만 제외하면 아주 쌩쌩하지. 병원에 입원 중이니 하루 이틀 내로 깨긴 할 거다.”
오르피어스의 백염은 공격 수단인 동시에 어느 정도의 방어적 기능도 수행하므로 그가 온전한 정신이 아니어도 외부로부터 해를 입는 경우는 적다. 그날의 폭주에도 도드라지는 육체적 부상은 없었으니 회복은 어렵지 않으리라. 깨어나고 난 뒤가 오히려 문제다. 지크하르트는 손수건을 꺼내 록사나가 군복에 잔뜩 묻히고 간 눈물이며 콧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페어가 되지 않을 거라고 버티다가 폭주까지 할 지경이니 쉽게 고집을 꺾을 기세는 아니었는데.
‘……보통은 가이드가 거부하는 걸 센티넬이 꼬시든가 협박하든가 애원하지 않던가. 뭐지, 이 상황은.’
페어라고 칭하기에도 페어라고 칭하지 않기에도 묘한 국면이었으나 아이릭은 기정사실화가 된 것처럼 그에게 서류를 보여 주었다.
“가이드인 너도 알아야 할 내용이다. 사망자 3명, 중상자 12명. 그 외의 재산 피해도 막중하지.”
“생각보다는 사상자가 적군요.”
오르피어스가 힘을 거두지 않는 이상 절대 소화할 수 없는 그의 백염이 몸에 옮겨 붙으면 꼼짝없이 타 죽거나, 혹은 육체를 절단해야 한다. 경상자가 존재할 수 없는 힘의 특성상 대낮 시가지에서 폭주하고도 사상자가 15명에서 끝났다면 경미한 축이었다.
“경관들이 지나가고 있어서 운이 좋았다. 화상으로 부상 입은 사람보다는 도망치다가 인파에 쓸려 다친 사람이 더 많아. 가스관이 터지지 않은 것도 그렇고.”
“오르피어스도 징계를 받게 됩니까?”
피해액에 적힌 0의 개수를 헤아리다가 포기하며 물었다. 제아무리 센티넬이어도 폭주하게 된 원인이 전적으로 본인의 과실인데다 묵인하고 넘어갈 수 있을 수준의 피해가 아니었다. 적어도 몇 달은 철창 안에서 썩히게 되지 않으려나 싶었는데 아이릭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녀석에게는 권리가 없으니만큼 의무도 책임도 없어. 기르던 개가 사람을 물면 일차적인 책임이 훈련하지 못한 주인에게 있고, 칼이 떨어져 몸을 상하게 되어도 소홀히 관리한 주인에게 책임이 있는 것과 똑같지,”
“그렇습니까.”
동생을 지칭하는 설명이라기엔 이해하기 힘든 비유였지만 지크하르트는 동요 없이 수긍했다.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의 색채가 있으니만큼 그가 구태여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고, 오르피어스와 아이릭의 관계에 대해서는 힐라리아로부터 익히 들은 바였다.
“혹시 모르지. 난 정말 화가 많이 나 있으니까 그 녀석이 뻔뻔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한 대쯤 후려갈길지는.”
농담이라고 여긴 지크하르트는 짧게 웃었지만 아이릭의 표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기에 머쓱해졌다.
“아무튼 고맙다. 오르피어스를 내가 직접 죽이지 않게 해 주어서.”
짤막하게 치하한 아이릭이 돌아가도 된다는 뜻으로 손을 내젓고는 얼구릉ㄹ 서류에 처박았다. 사고의 책임을 혼자 지겠다고 하였으니만큼 뒷수습도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지크하르트는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오르피어스가 깨어나고, 또 다시 그의 센티넬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설득을 해야 할지 아이릭의 명령을 내세울지 결심은 서지 않았지만 우선은 그가 깨어난 후에 판단할 일이다.
「아하하, 하, 하하. 너 되게 웃기는 소리를 한다?」
힐라리아가 특유의 고성으로 냉소했다.
「내가 지크하르트를 좋아해서 약혼한 거냐고? 진짜 몰라서 묻는 거니? 넌 그런 짓을 당하고도 아직 이 가문에 환상을 갖고 있어? 머리로 생각과 판단이라는 걸 할 줄 모르니? 흐응, 하기야 내가 너 같은 짓을 당했다면 목을 매서 죽든가 이 치 떨리는 집을 다 태워버리든가 했을 텐데 여태 꼬리 흔들고 있는 거 보면 개는 개구나. 개 주제에 생각할 필요가 어디 있겠니」
그녀의 말은 맞았다. 부친은 가족을 가지면 사람이 바뀐다고 말했고, 혈혈단신인 지크하르트를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일차적인 관계를 넘어 가족이라는 틀에 묶어두기를 원하였다. 벨포드 가의 데릴사위가 된 지크하르트는 벨포드의 위명을 높이여 가문의 반석으로 융화할 것이다. 벨포드는 그렇게 가세를 확장하여 왔다. 잴 것도 없는 정략결혼이었다.
아이릭의 발밑을 기어 다니면서 핥는 개라는 모욕을 들어도 수치와 모멸을 느낄 감정은 마모된 지 오래였기에 힐라리아의 폭언에도 별 반응 없이 서 있었다. 자신의 태도가 그녀의 화를 북돋을 거라는 건 알지만 일일이 그녀가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기에도 번거로웠다.
카랑카랑하게 이어지던 높은 목소리가 멎고, 할 말은 다 끝난듯하여 쉬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던 때에 붙잡혔다.
「거기 서. 내가 명령하잖아.」
아홉 살에 발현하고 벨포드 가의 문턱을 넘었을 무렵에는 명가의 적통다운 오만한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던 힐라리아였고, 실제로도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절망과 고통의 구렁을 헤매던 그의 가치를 아이릭이 발견한 후에는 모든 상황이 반전되었다.
힐라리아의 오만은 경멸로, 무관심은 증오가 되어 그에게 쏟아졌다.
「느낌이 이상한 걸. 가까이 와. 멈춰 서. 움직이지 마. 고개 숙여」
서늘한 손이 그의 양 뺨을 안았다. 힐라리아의 방을 찾아올 때부터 예상하고 있던 삼황이었다.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건 알지만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빛이 스미지 않는 흐린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이며 그를 향했다. 그녀의 능력에 대비하는 것 정도야 신물이 날 정도로 알고 있다. 뒷짐을 지었다. 허리 뒤쪽 벨트에 찔러두었던 대거를 빼내 손바닥을 그었다. 고통에 신경이 쏠린다. 아픔에 익숙해지면 손바닥을 한 번 더 그었고 핏방울이 질척하여 가늠할 수 없게 되자 손목을 그었다.
피비린내는 갑출 수 있다. 그는 일부러 아이릭의 명렁을 수행한 직후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채 힐라리아를 찾아왔다.
「아아. 재미없네. 너랑 오빠들은 날 너무 잘 알아서 시시하다니까」
가 봐, 하고 흥미를 잃은 목소리로 그녀가 손을 팔랑팔랑 내저었다. 긴장이 풀려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짧게 뱉으며 등을 돌리려던 찰나, 멱살이 붙잡혔다.
실수라고 생각한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힐라리아의 눈동자가 그를 집어삼켰다. 의식이 새카맣게 타 들어가고, 곤죽이 되어 헤집어지고, 남김없이 뒤집어지어 엉망으로 더럽혀진다. 뇌가 쥐어짜이듯 압박당하는 두통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간신히 이성의 가닥을 잡아 그녀를 밀쳐냈지만 힐라리아는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면서도 깔깔깔 웃음소리를 높였다.
「세상에! 사랑스러운 나의 약혼자에게 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그러고도 가증스럽게 친구 놀이를 하고 있었어? 아하하! 하하하하하!!」
그녀를 더 즐겁게 하리란 걸 알면서도 닥치라고 외쳤고, 결과적으로 웃음소리는 더욱 높이 방 안을 울렸다. 배를 부여잡고 웃어젖히던 힐라리아가 여전히 깔깔거리며 손을 더듬었다. 웃음으로 허우적거리며 힘들게 디방에 올라앉고는 웃음의 잔향이 남은 시선으로 그를 조롱하였다.
「착각하지 마. 설사 네가 깨끗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어. 지크하르트는 아이릭 오빠가 나에게 준 것이야. 내 것이라고. 알겠니? 넌 다시 오빠에게 돌아가 오빠가 던져 주는 먹이나 받아먹으며 살려무나. 개는 개답게 바닥을 기어야지, 사람의 것을 넘보면 쓰니?」
끔찍한 꿈이었다.
‘……최악이네. 죽은 후에 더 극성이라니까.’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식은땀이 배어 있어 더욱 물쾌했다. 죽은 누이가 꿈에 나타나는 날은 으레 운수가 나쁘다. 길하지 못한 하루를 예견하는 것이라면 어떤 의미로는 예지몽이긴 하다.
한숨을 쉬고 일어나려다 멈칫했다. 이상하리만큼 사지에 기력이 하나도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낯선 천장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혹하여 머릿속에 흐물흐물 남은 기억을 더듬으며 거슬러 올랐다. 자네트의 장례식에서 귀가하고, 몸이 안 좋아져서 잠깐 누웠다가 잠이 들고, 센터의 직원 한 명을 협박하여 가이드의 거취를 알아내자고 작정했다가, 오감이 비틀리기 시작하여 쓰러졌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맙소사.”
의식이 기억에 닿은 순간, 나른하게 젖어 있던 미몽이 단변에 씻겼다. 저절로 묵직한 신음이 을렀다. 힐라리아의 꿈이 가져온 불길함 중 제일 최악의 상황이다. 그렇게나 피해 왔는데.
“아니, 아니지. 아직 각인까지 맺은 건 아니니까.”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듯 연거푸 중얼거렸다. 최악 작전이지만 최악은 아니다. 더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팔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난 탓에 머리가 아찔하게 어지러웠지만 이를 꾹 물고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아무렇게나 링거를 뽑아 떨구고 슬리퍼를 찾아 신은 오르피어스는 주먹을 몇 차례 쥐었다가 폈다. 오감도 분명하고 머리도 비교적 명료하다. 한동안은 버틸 수 있다. 최대한 멀리 가는 거야. 다른 가이드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발작해도 지크하르트가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문을 찾으러 주위를 한 바퀴 휘둘러보고 나서야 이곳이 병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군병원일터다. 시내에서 발작한 센티넬이 일반 병원에 입원하도록 방치하거나 자택 귀가하도록 하지 않겠지. 당연한 조치였으나 몰래 빠져 나가기는 더 곤란해졌다. 밖에는 분명히 감시 인원이 있을 터다. 하지만 나가야 했다. 명확한 목적지는 없었으나 그는 이곳을 당장 나가 지크하르트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제대로 옷을 챙겨 입을 여유도 없이 창을 슬쩍 밀어 밖을 확인했다. 3층이었다. 난간과 홈통을 잡고 내려가면 불가능한 높이는 아니었다. 그는 주저 없이 창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힐라리아의 꿈은, 그 어떤 징크스보다 확실하게 존재를 증명한다.
“삘포드 소령님! 깨어나셨습니까?”
문이 열리고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다. 오르피어스는 어색하지 않게끔 손을 거두며 빙긋 미소해 주었다. 정기 검진 시간이었던가. l0분만 늦게 깨어났어도 무사히 넘겼을 텐데.
도리 없이 침대로 돌아가 멋대로 뽑으면 안 된다는 꾸중과 함께 다시 링거를 맞고 몇 가지 검진을 거쳤다. 예상했던 건 며칠 간 식사도 제대로 섭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첩된 피로도 문제이니 충분히 쉬라는 진단이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건 발작 이후 만 이틀이 지났다는 점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자각하자 갑자기 배가 주렸다. 꾸루룩 소리가 나자 간호사는 상냥하게 식사를 준비해 오겠노라고 인사했다. 오르피어스는 뱃속에 뭐라도 조금 채워 넣어 기력을 회복한 후에 탈출하기로 결심의 방향을 살짝 돌렸다.
며칠 간 음식 섭취를 하지 못한 위장에 부담이 가지 않는 가벼운 요리가 나왔다. 꾸루룩거리는 뱃속은 기름지고 열량이 높은 음식을 원하고 있었지만 간호사는 요지부동이었다. 실랑이를 하자니 기력이 더 빠지는 기문이라 일단 배부터 채웠다. 진하게 끓인 포리지와 과일 샐러드는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트레이를 물리고 조용해지자 다시금 주변을 탐색했다. 개인실이라 병실 내의 행동거지는 자유롭다. 창밖을 보니 조급했던 아까와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주변에 녹아든 감시자들을 판별할 수 있었다. 환자의 보호자인 양 사복을 입은 채 주변을 거닐고 있지만 군인 특유의 행동이 묻어난다. 죽이고 돌파하는 건 쉽지만 따돌리고 돌파하는 건 어렵다.
차라리 의사나 간호사를 협박하든가 기절시켜 조럭하게끔 의도하는 방향이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인기척이 다가왔다. 군병원의 개인 특실이라 입원한 환자는 매우 드물다. 목적지가 어디 인지는 뻔하였기에 오르피어스는 링거 걸이대를 끌어 침대로 돌아가 계속 앉아있었던 척했다.
아니나 다를까 인기척은 그의 병실 앞으로 직행했다. 피곤한 척 기대어 있다가 도도독 달려오는 인기척 중의 하나가 어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고 당혹한 순간, 문이 조심성 없이 쾅 열렸다.
“삼촌―!!”
냅다 뛰던 기척이 그대로 그의 침대로 날아들었다. 자그마한 어린 소녀는 그가 당혹감을 수습하기도 전에 달려들어 울먹거리며 끌어안았다.
“삼촌이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일어나지도 않구! 삼존 바보야!!”
조막만한 손으로 콩닥콩닥 어깨를 때리며 삼촌 바보, 바보, 외치던 록사나는 결국 앙앙 울음을 터트렸다. 허공을 잠시 헤매던 오르피어스의 손이 조심스럽게 아이를 감싸안았다.
“삼촌이 잘못했어. 미안해, 록사나.”
“몰라, 몰라. 나빠;!”
안도와 투정에 가까운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기만 했다. 록사나를 품에 꼭 끌어안고 이마와 뺨에 연신 키스하며 등을 쓸어주는 그의 앞으로 하나의 기척이 더 와 닿았다. 록사나를 안은 팔이 살짝 굳었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훤하다. 오르피어스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고 고개를 올렸다.
“……형.”
입매를 매섭게 굳힌 마뜩잖은 시선이 그에게 내리꽂혔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록사나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히끅거리며 잦아들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헤매던 오르피어스가 한 손을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
“못난 놈.”
나직이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명확하지는 않았다. 인사 아닌 인사를 하자마자 주먹 따귀가 날아온 탓이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오르피어스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삼촌! 삼촌!”하고 겁에 질린 록사나의 울음소리가 다시금 높아졌다.
떨어지는 서슬에 뒤통수를 의자에 부딪쳐 더 정신이 없었다. 록사나의 울음소리가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데 일조한 건 물론이었다. 그럭저럭 수습하고 입 안에 고인 피를 침과 함께 뱉으며 일어난 오르피어스는 크게 경직했다. 이미 사라지고 없으리라 여겼던 아이릭이 여전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몸은 괜찮나?”
오르피어스의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어, 어? 으응……. 형한테 맞은 곳만 아니면 안 아파.”
낯설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서 헤어나기 위해 어설픈 농담을 섞었지만 어떠한 울림도 되지 못하고 느적느적 흩어졌다. 록사나의 울음소리로 병실 안이 꽉 차지 않았다면 민둥한 분위기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며 반 이상 불신을 섞어 물었다.
“저기, 형. 화……났어?”
“화가 안 났을 것 같으냐?”
사생아인 오르피어스는 장형 아이릭과 형제간이라기보다는 숙질간에 더 가까우리만큼 연차가 진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장성한 청년이었던 아이릭은 한참 어린 동생의 행동거지에 하나하나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칭사도 없지만 노하는 일도 없다.
피를 닦지도, 록사나를 달래지도 못하고 마른침만 삼키다 거북한 입술을 뗐다.
“……내가 명령을 거역해서 화난 거야, 아니면 멋대로 죽으려고 해서 화난 거야?”
“둘 다다. 자유를 구속하는 건 아니지만 용납하지 않은 일까지 방종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넌 아직 용도가 충분해. 그리고…….”
적당한 말을 고르는 듯 아이릭이 잠깐 말문을 닫았다. 그러다 무뚝뚝한 눈매를 찌푸렸다.
“내 손으로 널 죽이게 하지 마라.”
어이를 이해하지 못한 오르피어스가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사이 아이릭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힁하니 병실을 나갔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니까, 지금 형한테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십수 년의 경험으로는 불가해한 상황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를 건져낸 건 록사나의 울음이었다.
오르피어스는 일단 아이릭과의 대화를 머리 구석으로 밀어두고 소맷자락으로 터진 입술을 대충 문지르며 침대로 돌아와 록사나의 뺨을 매만졌다.
“울지 마. 응? 삼촌 안 아파. 괜찮아.”
“아빠 미워. 나빠. 맨날 맨날 삼촌 때리기만 하고.”
“아니야 맨날 맨날 맞지는 않고 맞을 짓 했을 때만 맞았어.”
부러 가볍게 하하 웃자 볼이 땅겨 더 욱신거렸다. 그나마 이가 부러질 정도로 후려 맞은 건 아니니 다행이었다.
“이변에는……. 음, 역시 맞을 짓 하긴 했네.”
시내에서 폭주하였다니 지크하르트가 제때 달려오지 않았다면 대형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폭주하였다면 하다못해 적군과 동귀어진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번 일은 그야말로 개죽음이나 진배없는 동반자살이 아니었던가.
얼음찜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록사나 앞에서 아파했다가는 울음이 언제 멈출지 모른다. 오르피어스는 얼음찜질을 포기하고 대신 록사나를 끌어안으며 둥개둥개 달랬다. 한참이 지나서야 록사나는 눈물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물에 적신 타월에 닦을 수 있었다.
“우리 록사나는 이렇게 울기만 해서 어떡해? 이런 울보 아가씨를 누가 데려간담.”
장난스러운 도닥임에 록사나가 도리질했다.
“그치만 아빠가 삼촌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되게 무서웠어. 삼촌이 죽는 것도, 아픈 것도 싫어.”
“삼촌이 죽는 거 싫어?”
록사나는 친모의 요절로 또래의 아이들보다 죽음을 또렷이 인식하고 있다. 금세라도 울음보가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울음을 참으며 오르피어스의 목에 매달렸다.
“응. 싫어. 삼촌이랑 아빠랑 같이 오래오래 살 거야.”
“그래……. 미안, 미안해. 록사나.”
오르피어스가 쓰게 웃으며 록사나를 다독였다. 그리고는 품에 안고 속닥였다.
“록사나가 원한다면 절대 죽지 않을게. 괜찮아. 아픈 걸 참는 건 익숙하니까 이번에도 잘 견딜 수 있을 거야.”
“삼존 또 아파?”
록사나가 코를 훌쩍거렸다. 대답 대신 번쩍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아이는 꺄아 탄성을 지르며 금세 울먹거림에서 벗어났다.
“얼마 전부터 가정교사 선생님이 생겼다면서? 요즘 뭐 배웠니?”
“응! 나 이제 내 이름이랑 삼촌 이름도 쓸 수 있어!”
써 보라며 손바닥을 내밀자 손가락을 꼬물거리면서 철자를 하나씩 손바닥에 꾹꾹 눌렀다.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인지 걸음마도 말문이 트는 것도, 전부 남들보다 늦되었던 록사나다. 그 조그맣던 아이가 벌써 글을 배웠다고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자 새삼스러운 충동이 일어 록사나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기대앉아 정수리며 이마에 키스했다. 어째서 도망치고,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네가 있는데.
공포도, 아픔도, 두려움도, 증오도, 눈물도, 익숙해지면, 뭐든지 괜찮아진다. 그의 인생 전반이 그러하였듯이.
기운을 찾은 록사나가 재잘거리며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오르피어스는 결심을 굳혔다.
지크하르트가 그 전화를 받은 건 막 점심 식사 메뉴를 궁리할 때였다. 사령부 내가 아닌 외부 회선으로부터의 연락이라는 말에도 별 의미 없이 전화를 연결 받은 그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퇴원했냐?”
「응. 오늘 아침에 깨어났어」
총독부에서 험악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헤어졌음에도 목소리는 선선하다.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다행이라고 상투적인 대답을 하면서도 다른 화제를 마땅히 찾을 수가 없었다. 몸은 괜찮은지, 이상은 없는지, 갓 퇴원한 사람과 대화할 때 필요한 이야기들을 찾아보아도 중점이 아닌 겉을 빙글빙글 헛되이 돌고 있는 느낌이다.
기실 은연중에 제일 궁금했던 건 어깨서 네가 날 가이드로 인식하고 있느냐는 내용이었지만 오르피어스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의문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나랑 잘래?」
빙글빙글 손가락 사이에서 돌아가던 연필이 툭 굴러 떨어졌다. 오르피어스가 의식을 되찾은 후 거취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단번에 해결되었지만 이런 방법을 원한 건 아니었다.
“……하고많은 표현 방법 중에서 하필이면 바로 그거냐?”
「나랑 섹스할래?」
“……이제 와서 안 할 수는 없잖아, 그거.”
「안 해도 돼. 그냥 내가 한 번 더 폭주할 뿐인데, 뭐. 이번에는 아이릭 형이 바로 처리할 수 있도록 총독부 옆에서 얼쩡거리고 있을게. 너 오기 전에 바로 끌날 거야」
“차라리 목에 칼 들이대고 협박을 해라.”
투덜거리며 허리를 굽혀 바닥까지 떨어진 연필을 주워들었다. 대낮부터 섹스하자는 협박 아닌 협박을 듣고 있자니 평소와 같이 약간 소란한 듯한 사무실 안의 정경이 오히려 이질적이다. 남은 서류들을 곁눈으로 확인하고 송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알았다. 이따가 저녁 때,”
퇴청하고 내가 연락하겠다는 요지의 뒷말은 끝맺지도 못하고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전파에 잘라 먹혔다.
「안 돼. 지금 당장 와줘. 몸이 너무 달아올라서 더 이상은 못 참을 거 같아」
“…….”
일부러 이런 단어 고르는 거겠지.
끊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센티넬이 폭주할 것 같다고 동동거리는데 외면하면 가이드로서의 기본적인 도리를 저버리는 격이다. 앞으로가 무척이나 골치 아플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등을 오싹하게 했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집?”
「집은 어수선해서 안 돼. 며칠 내내 청소도 안 한데다가 자네트 물건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구. 넌 내가 바로 지지난주까지 다른 여자랑 뒹굴던 침대가 좋아?」
별로 상관은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다른 장소를 꺼냈다.
“그럼 관사 내 방으로 와라.”
「제정신이니?」
신랄하게 코웃음을 친 오르피어스가 호텔 이름과 호실을 불렀다. 듣자하니 이미 체크인하고 로비에서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용건을 끝낸 그는 빨리 오라는 한마디만 남기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툭 끊었다.
“…….”
왠지 조금, 얄미웠다.
하지만 전화기를 붙잡고 노려본들 딱히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으므로 한숨만 한 차례 내쉬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 나갔다 온다.”
“어디에 가십니까?”
“오르피어스가 깨어났다는군.”
닉이 딸꾹질을 시작했고 사무실의 다른 사관들의 안색도 기묘하게 변했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쉬쉬하고 있는 정황이었으나, 요란하게 발작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던 오르피어스의 가이드가 지크하르트라는 소식은 이미 사령부 내의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만인주시 하에 그를 진정시키는 걸 목도당했으니 외면할 수조차 없다.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하필이면 왜 벨포드 소령 같은 작자와 우리 대령님이.
심리적 충격이야 차치하고도 센티넬과 관계되는 가이드의 행동은 여타의 사안에 대하여 항상 우위에 놓인다. 그를 만류할 구실도 핑계도 전혀 찾지 못한 닉은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인사했다.
“내, 내일 뵙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5시 전에 돌아올 거야.”
정사 한두 번에 긴 시간이 소요될리도 없으므로 시큰둥하게 대꾸한 지크하르트는 썩 내키지 않는 걸음을 터덜터덜 움직여 사무실을 나갔다. 발걸음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자마자 사무실 안에는 열띤 대화의 장이 펼쳐졌지만 그가 알 도리는 없었다.
지크하르트가 예약한 호텔이라고 하기에 정장을 입지 않으면 입실조차 불가한 호화로운 고급 호텔이 아닌가 하였는데 의외로 적당히 한적하고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깔끔한 평범한 호텔이었다. 하긴 놈이 돈은 펑펑 잘 쓰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치하는 걸 본 기억은 없던 것 같다. 옷도 노상 군복 아니면 유행 타지 않는 수수한 기성복이고.
알려준 객실은 6층이었다. 문을 노크하고도 반응이 없어 1, 2분 기다리다 한 번 더 노크했다.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직원을 불러오려다 혹시나 하여 문을 밀어보니 삐걱거리며 안으로 열렸다. 아무리 센티넬이라지만 어지간히도 조심성이 없는 놈이었다.
“오르피어스. 있냐?”
현관에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뒷손으로 문을 걸어잠그고 객실을 둘러보았다. 현관과 이어진 거실을 지나 바로 안쪽의 침실로 들어간 건 만남의 특성상 자연스러운 판단이었다.
어쨌든 적확한 판단이었다. 오르피어스는 이불을 둘둘 말고 잠들어 있었으니까.
“야. 기껏 불러 놓고 자냐? 급하다며? 달아올랐다며?”
어이가 없어서 흔들어 깨웠지만 오히려 잠결에 신경질을 내며 손을 쳐낸다. 누가 손 매운 힐라리아와 남매 아니랄까봐 잠결에도 세게 맞은 손등이 얼얼했다.
멱살이라도 잡고 일으켜 세우려다, 어디에서 처맞고 왔는지 왼쪽 얼굴이 퍼렇게 붓고 입술이 온통 찢겨 굳은 피가 엉겨 있는 품새가 퍽 처량해 보여 주먹을 참았다. 설마 진짜 벨포드 총독이 팬 건 아니겠지.
지크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자는 사람과 억지로 관계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강간이다. 그렇다고 하여 사령부로 도로 돌아가기도 뭣하여 한참을 서성이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경으로 재킷과 소드 벨트를 끌러 대충 의자에 던지곤 이불을 하나 더 꺼내와 침대에 누웠다. 물론 오르피어스의 옆이 아니라 등을 돌리고 멀찍이 거리를 둔 침대 가장자리였다.
오르피어스의 잠버릇이 안 좋아 뒤척거리며 침대를 굴러다녔다면 마음 편히 눕지도 못했겠지만 그는 웅크린 그대로 꼼짝 않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잖아도 피곤하던 참이다. 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아 뒤통수 붙이고 눈 감으면 쉽게 잠드는 편리하고도 실용적인 체질의 지크하르트는 곧 깊은 수마 속으로 하강했다.
“……르트. 지크하르트!”
수번이나 불리어서야 겨우 자신의 이름이 인식된 지크하르트는 무거운 눈꺼풀을 떴다. 흐리마리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시야에 비치는 사람은 밝은 은발의 청년뿐이었기에 도로 눈을 감았다. 그의 인식 내에서 잠을 깨울 만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은발의 지인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뇌가 선뜻 기억을 좇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l0초가량 지난 후에 퍼뜩 눈을 떴다.
“오르피어스?!”
“무슨 낮잠을 그렇게 깊이 자? 깨워도 듣지를 않고.”
오르피어스가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투덜거렸다. 결 좋은 은발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진다. 전등을 켜지 안 ㅎ아도 시야가 선명하니 해가 서녘으로 넘어갈 시간은 되지 않았지만 속이 빈 듯 허하니l 짧은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우선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지크하르트가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보이는 광경은 변함이 없다. 잠이 덜 깬 건 아니었다.
“……너 뭐하냐?”
“섹스 준비.”
지크하르트의 허리에 걸터앉아 자신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는 오르피어스가 시틋하게 대답했다.
“내가 차려 놓은 밥상이 되어서 자고 있는데도 덮치지 않았으니 지금 당장 관계를 가져야 하잖아. 설마 너……, 고자는 아니지?”
“……강간을 종용하는 거냐?”
“어차피 너랑 자야 되는데 새삼스럽게 뭘.”
셔츠를 휙 벗어 던지고는 지크하르트의 셔츠에는 손도 대지 않고 바로 버클을 풀려 했다. 철컥, 하는 소리에 느슨하게 남아 있던 잠기운이 확 달아나 반사적으로 제지했다.
“자, 잠깐만. 자다가 막 일어나서 기력도 없는데 멈춰 봐. 식사하고 씻기라도 하자고.”
“안 돼. 시간 없어. 센터 업무 끝나기 전에 가려면 4시까지는 각인을 완료하고 호텔을 나가야 한단 말이야. 벌써 3시 반이니까 밥 먹고 씻고 하면 늦어.”
“왜 굳이 오늘 가려고 하는데.”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잖아. 빨리 해치우고 잊고 신경 끊고 싶어.”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하지만 위에 올라 타 있는 이상 주도권은 거반 오르피어스에게 넘어가 있다. 이대로 있다가는 오르피어스와 관계하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내가 안기는 입장이 될지도, 라는 곳까지 생각이 미치자 얼굴에서 핏기가 사아악 빠졌다. ……일단 이 문제부터 시급히 해결을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그전에 얘기,”
“너 남자랑 잔 적 있어?”
거반이 아니라 주도권의 대부분이 넘어간 것 같다.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가 무턱대고 다리를 벌리려 들면 그의 양팔을 꺾을 결심을 다지며 대답했다.
“……없지.”
“흥미는?”
“있을 리가.”
“날 보면 설 거 같아?”
“아니.”
동일한 성을 지닌 남자라도 오르피어스가 아닌 생판 다른 남자였다면 약간은 동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남자이니 여자이니 하는 문제를 떠나 l0년 넘게, 정확히는 11년을 알고 지낸 사람과 바로 성적인 긴장감이 형성되는 건 무리였다. 그 11년의 시간에 이렇다 할 특별한 교분이 없다 할지라도 부대낀 기간은 많다. 갈은 기숙사였고, 같은 부대였다.
심지어 그는 오르피어스가 여성과 정사 중인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내가 폭주해서 다 같이 죽을래?’라고 2차 성징이나 겨우 지났을까 싶은 가이드 소녀를 허리 위에 올려 삽입한 채 꿉꿉한 피비린내가 밴 막사 안에서 피식거렸었다.
바로 돌아 나오기는 하였으나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 리가 만무하다.
“알았어.”
순순히 수긍하는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오르피어스는 거침없이 벨트를 풀더니 지퍼를 죽 내렸다. 기함한 그가 내동댕이치기 전에 그만하라고 붙잡았으나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내가 세워줄게.”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그의 것을 서슴없이 입에 물었다.
관계에서 항상 주도권을 갖고 있던 힐라리아는 침대에서도 고압적으로 요구했다. 대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주었던 지크하르트였기에 잠자리에서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힐라리아가 아예 애무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구음은 절대 해 주지 않았다. 유서의 명가다운 출신의 오연함은 그녀의 근간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였으니 그 성정상 자신이 남자의 성기 따위를 입으로 애무하는 건 상상하지도 못한 행위일 것이 분명했고, 꼭 애무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힐라리아와 약혼하기 전에 사귀었던 여자들이나 힐라리아 사후에 가끔 찾아간 창부들의 기교는 능하였으니 그가 놀란 이유는 단순히 구음 때문만이 아니었다. 당자가 바로 오르피어스라는 점이었다.
“멈추……. 큭.”
혀끝에 얹힌 단 신음을 삼키기 위해 지크하르트는 다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능숙했다. 빌어먹을 정도로 능숙했다.
선단에 가볍게 이를 세워 자극하며 빨더니 차츰 혀를 움직여 기둥을 훑는다. 볼이 옴폭 팰 정도로 빨아 당기고 목구멍 가장 안쪽까지 닿게끔 깊이 머금으며 핥는 행위는 남자의 욕망을 알고, 그것에 불을 지피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욕망을 누르기 힘든 남자의 육체는 곧 그의 입 안에서 부풀었다.
‘젠장. 남자랑 자는 거 질색한 게 아니었나?’
낮은 신음을 뱉으며 오르피어스를 밀어내려고 뒷머리에 얹었던 손을 아래로 움직였다. 내키는 대로 하자면 양손으로 얼굴을 움켜쥐고 허리짓하고 싶었지만, 충동을 억누르고 그의 머리칼이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귀가 민감한지 귓등을 손톱으로 훑자 목구멍 안쪽으로 신음하며 깊이 빨았다.
“하아, 여름눈……. 이쯤하면 됐지?”
그가 검붉게 발기한 성기를 한 손으로 가볍게 쥔 채 기둥에 혀를 기며 속닥였다. 무어라 대답할 기력도 없어 지크하르트는 밭은숨을 흘렸다. 오르피어스가 바지와 속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다시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약간 가쁜 숨을 쉬면서 타액으로 질척하게 젖은 채 곧추선 성기를 한 손으로 쓰는가 싶더니 서슴없이 허리를 내렸다. 내리려 했을 것이다. 지크하르트가 기겁하여 붙잡지 않았다면.
“야! 잠깐만, 잠깐만! 안 들어가잖아! 아파!”
“내가 더…… 윽, 아파……!”
여성기처럼 젖지도 않고 제대로 풀지도 않은 입구는 꽉 닫힌 채 접근을 거절했다. 겨우 선단만 삼켰을 뿐인데 완강하게 압박하며 도로 밀어낸다. 이대로 억지로 쑤셔 박다가는 삽입하는 지크하르트는 물론이거니와 오르피어스의 고통이 더 심할 게 분명할 텐데도 그는 막무가내로 욱여넣으려 애써 허리를 움직였다.
“한 번 찢어지면, 크, 피 때문에 수월해지니까……. 으.”
남자와 섹스한다는 것 자체가 썩 기껍지 않은 상황인데 찢어져서 피가 철철 흐르는 구멍으로 들락날락하는 광경을 상상하니 욕정이 단변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니, 날아갈 것만 같은 게 아니라 분명히 날아갈 것이다.
그가 피학성향이 있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며 팔을 잡아 끌어 몸을 반전시켰다. 오르피어스가 미간을 구겼다.
“4시에 나가야 한다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고 협탁을 뒤져 보았다. 못마땅한 신음을 흘리며 오르피어스가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빨리 하라고 재촉하는 목소리에 건성으로 대꾸한 지크하르트는 이내 콘돔 하나와 오일을 발견했다. 윤활제가 어느 정도 필요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지라 뚜껑을 열고 그대로 오르피어스의 다리 사이에 부었다. 그가 으, 하는 짧은 신음을 뱉으며 허벅지를 잘게 떨었다.
회음부 아래의 구멍이 뱃가죽이 호흡하며 잘게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조금씩 옴찔거렸다. 오일을 바르는 손가락이 바로 비부에 접근하지 못하고 허벅지 안쪽을 어루만졌다. 넣자, 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머뭇거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오르피어스가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눈 감고 여자랑 한다고 생각해.”
“……여자란 생각이 들겠냐.”
체념한 듯한 중얼거림이 이상하게도 충동에 불을 지폈다. 지크하르트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오일에 젖어 옴찔거리는 구멍에 검지를 밀어 넣었다. 오르피어스가 잠깐 숨을 멈추었다. 교차한 양팔 아래로 가려지지 않은 입술이 감쳐물렸다.
생각했던 것만큼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낯설다. 거기다 몹시 뻑뻑하기도 했다. 오일을 더 부어가며 손가락을 두 개, 세 개 늘리어 안쪽을 넓혔지만 성기까지 삽입될 것 같은 느낌은 안 들었다.
손가락이 기교 없이 체내를 헤집어도 “으응…….”하며 허리를 비들기만 하던 오르피어스가 짧게 허덕이며 그의 어깨를 걷어찼다.
“간 그만 보고 빨리, 읏, 넣어. 4시!”
오늘 당장 등록하지 않으면 세상이라도 멸망할 것 갈은 기세로 재촉하니 불안해도 도리가 없었다. 지크하르트는 찢어지면 어쩌나 싶은 우려를 완전히 떨치지 못하며 선단으로 입구의 주름을 문지르다, 천천히 삽입했다.
“……크읏.”
역시나 뻑뻑했다. 아까보다는 압박감이 덜했지만 좁은 건 매한가지였다. 살이 찢기는 사태만이 문제가 아니라 한껏 발기한 자신의 것도 사방의 압력으로 뻬근하게 아플 지경이다. 느릿느릿 밀어 넣고 있자니 밑에서 입술을 꾹 깨물고만 있던 오르피어스가 짜증을 내며 그의 허리에 다리를 휘감았다. 교차한 양 다리에 힘을 주면서 당기니 얼결에 끌려가 단변에 꿰뚫었다.
“흐아, 앗!!”
억지로 당긴 주제에 깊이 삽입당한 순간 목을 젖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올리며 몸을 떤다. 어이가 없었지만 다행히 찢어지지는 않았다. 피학성향이 있는 건 상관 안 하겠지만 거기에 날 이용해 주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내심 투덜거리며 허리를 움직였지만 몇 번 허리짓 하기도 전에 절로 욕설이 나왔다.
“젠장! 힘 좀 빼……! 너무 조여!”
“윽……. 처녀랑 잔 적도 없어? 처녀는 더, 조…… 흣!”
끝까지 지지 않고 조잘거리면서도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더니 양쪽 둔부를 스스로 움켜쥐고 구멍을 벌리려 애썼다. 한마디 더 던지려던 그는 아픔 때문인지 눈물이 맺힌 눈동자를 천장에 고정한 채 하얗게 질리도록 신음을 참는 얼굴을 보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막연히 여자와 큰 차이는 나지 않겠거니, 라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관계할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끝없이 그저 삼키며 빨아 당길 것처럼 압박하는 깊은 체내도, 부딪히는 맨살의 뼈대도, 아래에서 들려오는 억누른 희미한 신음도, 그가 안고 있는 이가 남자라는 걸 새삼 인식시켰다.
“……안 아프냐?”
오르피어스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눈꼬리로 흘러내려 베개에 자그마한 흔적을 떨구고 있었다. 아까 귀 언저리를 민감하게 반응했던 걸 떠올리고 귓불을 깨물었다. 좋다 싫다 뚜렷한 호응은 없었지만 단단히 맞물린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참지 마.”
속삭이며 귓불을 핥고 빨았다. 오르피어스가 신음을 씹으며 눈을 치떴다.
“으, 윽.”
“제기랄. 강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아프면 억지로 참지는 말라고. 어디가 좋냐?”
강간도 아닌데 박고 있는 그야 둘째치더라도 더 힘들어하는 이 자식도 느껴야 할 게 아닌가. 그때까지 몸이 흔들릴 때마다 미끄러지고 놓치면서도 다시 엉덩이를 붙잡고, 피부에 빨간 손자국이 남을 만큼 벌리곤 하던 그의 팔을 풀어 목에 감을 수 있게 해주었다.
“아, 아흣? 아! 아앗!”
오르피어스의 신음이 처음으로 입술에서 터졌다. 제어하던 고삐가 끊어진 것처럼 매끈한 흰 팔이 정신없이 그의 어깨며 목을 다급히 부둥켜안았다.
“읏, 거, 거기 안쪽으로 조금만, 깊이…….”
여리게 요구하는 음성을 좇아 깊숙이 박아 넣은 성기를 비벼 주자, 예민한 부분을 직격했는지 반응은 곧바로 돌아왔다.
“흐앗! 아으, 응! 아앗!!”
교성이라 칭해야 할 신음이 카랑카랑하게 허공으로 오르고 내벽이 꿈틀거리며 꾹꾹 조였다. 맥없이 흔들리기만 하던 허리가 뚜렷한 행동성을 지니고 요분질했다.
“하아, 헉……. 빌어먹을.”
지크하르트는 묵직하게 신음하며 허리를 쳐 올렸다. 오르피어스가 제대로 허리를 움직이니 맞물린 직장이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라도 되는 양 탄력 있고 쫄깃쫄깃하게 깊이 삽입된 성기를 물었다. 저릿한 쾌감이 연결된 부위로부터 신경을 달구며 전신을 휩쓸었다. 나직한 욕설과 뱉어진 젖은 숨이 귓가를 간질이자 오르피어스가 코끝으로 으응, 응, 비음 섞인 울음을 흘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지크, 하…… 흐아아! 아응! 응!! 좋아, 좋, 깊, 아흑!!”
외침과 이름과 신음이 모두 엉망으로 짓뭉개진 채 교성이 되어 치솟았다. 명확한 언어가 되지 않는 소리를 중얼중얼 흘리며 오르피어스가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달착지근한 교성이 귓가에 척척 감겼다. 열기가 가득 엉겨 흐려진 시야에 오르피어스의 얼굴이 엿보였다. 발긋하게 붉어진 뺨이 눈물에 온통 더럽혀진 채 웅얼웅얼 그의 이름을 부르고 흐느끼며 안겼다.
얄미우리만큼 본인의 페이스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녀석이 자신을 무방비하게 드러내어 밀어 넣으면 넣어지는 대로,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입 맞추면 입 맞추는 대로 반응하며 울먹이고 신음했다. 이 녀석이 이런 얼굴도 하는구나? 라고 다소 신기한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했지만 밀려오는 쾌감에 쓸려 의식의 너머로 흩어졌다. 지크하르트는 엉덩이를 양손으로 꽉 잡고 퍽퍽 소리 나도록 허리를 치받았다. 히끅히끅 목 안으로 밀려 올라가던 오르피어스의 감창소리가 높이 천장을 울렸다.
“하윽! 윽! 으응! 힉! 아, 아아?!!”
꼿꼿하게 발기한 채 흔들릴 때마다 그의 복부에 턱턱 부딪히던 오르피어스의 성기가 백탁의 체액을 토했다. 쾌락의 정점에 달한 내벽이 크게 꿈틀거리며 옥죄어 와 거의 한계에 달해 있던 지크하르트도 파정했다.
깊이 연결한 그대로 오르피어스의 가슴 위로 털썩 무너졌다. 묵직한 숨이 잇새에서 흘러 내렸다. 울음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오르피어스의 신음이 달게 귓가를 간질였다. 몽롱한 쾌감이 들이 차 하얗게 지워졌던 머릿속으로 퍼뜩 떠올린 건 들썩이던 호흡이 다소나마 진정될 무렵이었다.
쓰러졌던 상체를 일으키자 아직 연결되어 있는 성기가 내벽의 어딘가를 긁었는지 오르피어스가 목을 틀며 헐떡였다. 땀이 식지 않은 목덜미를 주묵 훑으면서 내려온 손가락이 심장 언저리를 더듬었다.
Sieghard Casillas
피처럼 맺힌 이름이 그곳에 존재했다.
하얀 살결에 아로새겨진 자신의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기이한 쾌감과 정복욕을 일으켰다. 지크하르트는 이름자 위에 이를 세웠다. 오르피어스의 숨소리가 가파르게 올라갔다.
“한 번만 더 하자. 어때?”
시계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오르피어스가 대답 대신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당연히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세 번째로 사정하고 문득 시계를 봤을 때는 이미 4시클 넘긴 지 오래였다. 점심도 못 먹은 데다 계속 침대 위를 뒹군 탓에 허기가 져 센터 퇴근하겠다고 울상을 짓는 오르피어스를 붙잡고 이른 저녁을 먹었다. 열기가 식고 나니 그와 알몸으로 한침대에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였지만 오르피어스는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려 하지 않았기에 도리 없이 룸서비스를 시켜 슬쩍 등을 돌린 채 식사했다.
욕실에서 씻고 어영부영하다 보니 밤이 깊었고, 호텔에서 나갈까 말까 고민하는 그의 다리 사이로 오르피어스가 꾸물꾸물 기어 들어가 지퍼를 내렸다. 그대로 엉겨 두 번을 더 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이 들었다.
“짐승 같으니.”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씻고 차를 출발했지만 오르피어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뒷좌석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채 입만 살아 종알거렸다.
“허리 아파 죽겠어. 어쩜 그렇게 무식하게 힘으로만 퍽퍽 박아? 크기만 하면 다야?”
오후에 3번, 밤에 2번, 하루 동안 도합 5번이나 한 건 10대 이후로 처음이었기에 지크하르트도 처음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묵묵히 차만 운전했다. 그렇지만 내도록 교성을 질러 텁텁하니 쉰 목이 퍽 아플 텐데도 오르피어스의 입은 다물릴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참다참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한 줄 알겠군. 밤에 내 위에 먼저 올라타서 허리 흔든 사람이 누구였냐?”
“나는 한 번만 하고 끝내려고 했는데 엎드리게 해서 한 번 더 한 건 너잖아.”
“싫으면 싫다고 말이나 하든가! 앙앙 울기만 한 주제에!”
입씨름하는 사이 센터가 보였다. 차를 주차하고 다리가 풀려서 걸을 수가 없다 허리가 아프니 업어라 등등 헛소리를 하는 오르피어스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질질 끌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엄살은 엄살이었는지 센터로 들어오자 그는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두 다리로 멀쩡히 걸어서 데스크로 갔다.
크리스 세브란이란 명찰을 가슴팍에 단 직원은 오르피어스와 눈이 마주치자 낯빛이 해쓱해졌지만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령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르피어스의 왼쪽 얼굴은 하룻밤이 지나서 더 시퍼렇게 부었고 목소리마저 쉬어 있다. 아침부터 그런 몰골을 보고 크리스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지크하르트는 매우 궁금해졌다.
“전화.”
“넵.”
용건이며 뭐며 묻지도 않고 냉큼 바친 수화기를 잡고 오르피어스가 전파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총독부 비서실로 연결해 줘. ……아, 난데, 왜 유안 네가 전화 받아? 비서들은 어디로 가고? ……아니 딱히 궁금한 건 아니니까 설명은 됐어. 형은 어디 있는데? ……회의 끝나면 내가 지크하르트랑 잤다고 전해. 끊는다.”
저 망할 화법 같으니. 그는 지크하르트가 이를 갈든 말든 수화기를 크리스에게 도로 툭 던지고는 팔랑팔랑 손짓했다.
“들었지? 저 녀석이랑 각인했으니까 작성할 서류 줘.”
지크하르트를 돌아보는 크리스의 시선이 퍽 묘했다. 부디 그의 머릿속에서 상대를 후려치며 난폭하게 섹스하는 취미를 가진 놈으로 인식되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목이 쉰 부문에 대해서는 반쯤 책임이 있긴 하지만.
페어 정식 등록 서류의 작성은 이번이 두 번째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크리스의 설명을 들어가며 하나씩 기재하는 사이 벌써 여섯 번째 똑같은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오르피어스는 휙휙휙 글을 날려가며 완료하고는 소파에 늘어졌다. 힐끔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차 안에서처럼 허리가 아프다고 쉴 새 없이 그를 쪼지는 않았지만 인상을 찌푸린 채 허리를 툭툭 두드리고 주무르는 모습을 보아 하니 아주 엄살은 아니었던 것 같다.
등록을 끝내고 센터를 나오자 해는 꽤 높아 있었다. 오르피어스가 투덜댔다.
“이제 큰일났네.”
“또 뭐.”
“페어가 되었으니까 사람들이 너랑 날 보면 둘이 잤다고 생각할 거 아냐.”
갈수록 가관이었다. 이쯤 되니 저 조그만 머리통 속에 들어있는 게 무엇일지 지크하르트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넌 모든 페어나 부부를 보면 저 사람들 자겠다고 생각하냐?”
대답은 언제나 명료하다.
“응.”
“…….”
입만 다물고 있으면 참 괜찮은 놈인데. 지크하르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오르피어스를 바라보았다. 아니, 오늘은 퍼런 멍까지 달고 있으니 입 다물어도 괜찮지 않나.
“어제부터 궁금했는데 누구한테 맞았냐, 그거?
설마하니 총독이 후려 팼을까 의심했는데 역시 대답은 명료했다.
“형.”
“……헤임을 뒤엎는 지랄을 하고도 한 대 맞는 걸로 끝났다니 싸게 먹혔구만.”
손끝으로 오르피어스의 턱을 올리고 멍을 살폈다. 그 냉엄한 총독이 화가 치밀어서 격정적으로 후려치는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질 않는다. 어지간히도 노한 모양이라고 말하니 오르피어스가 피식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형들한테 엄청나게 많이 맞으면서 컸어. 큰형은 한 대만 아주 아프게 때리고 말지만 작은형은 곡소리 날 때까지 작신작신 온몸을 밟아놓는다구. 누가 형제 아니랄까봐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간다니까.”
실실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이어진 어조였기에 지크하르트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명문가든 아니든 형제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면서 자라는 건 같구나, 라고 생각했다.
“피가 섞인 것도 아닌데 그렇게 닮았냐?”
“집터가 안 좋나 보지.”
말의 끝에 기지개를 쭉 켜며 하품한 오르피어스는 이내 죽을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허리를 부여잡았다.
“아무튼, 갈게. 병가 남았으니까 오늘은 집에 가서 쉴 거야.”
길 건너편의 노면전차 승강장으로 허리를 누르고 끙끙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배웅하던 지크하르트는 결국 쫓아가 그의 허리를 번쩍 올려 안았다.
“데려다 줄 테니까 타라.”
“그건 고마운데 왜 이렇게 들어 올려?”
“허리 아프다며.”
“쪽팔리잖아.”
끝까지 한마디가 더 많은 놈이었다. 바닥에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참을성 있게 뒷좌석의 문을 열고 그를 밀어 넣었다.
“가는 길에 식사나 하자. 먹고 싶은 거 있냐?”
“기름지고 칼로 썰 수 있는 두툼한 고기가 좋아. 병원식은 맹숭맹숭 맛없어.”
어젯밤에는 너무 배고파서 빨리 되는 거 아무거나 시켜 먹었더니 뱃속이 허하다고 중얼거리며 뒷좌석에 다시 늘어졌다. 지크하르트는 알겠다고 짧게 응하고는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