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르피어스가 남기고 간 쌀쌀한 비아냥거림은 그가 병실을 떠난 후에도 불쾌한 습기처럼 진득하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면전에서 비웃음을 받은 그보다 클라우드가 더욱 노하여 자리를 박찼다.
「개자식이! 누구 덕에 살아난 줄 모르고!!」
지크하르트는 신음에 가까운 한숨으로 친구를 잡았다.
「……됐어. 놔둬」
「넌 오르피어스 새끼가 한 말을 듣고도 화가 안 나냐? 폭주해서 죽을 뻔한 걸 네가 살려준 거잖아!!」
「화가 안 나면 내가 저 자식이 말한 것보다 더한 등신이지」
클라우드처럼 펄펄 뛰지 않는 건 화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화를 낼 기력이 없어서였다. 아무리 그라도 반신에 3도 화상을 입어 치료받은 후에 겨우 의식을 회복한 상태에서 멀쩡히 나다니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오르피어스가 나간 문을 주먹으로 쾅 친 클라우드가 이를 갈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몸은 나을 수 있대?」
지크하르트는 기력 없이 끄덕끄덕했다. 최상위급 치유계의 힘을 지닌 센티넬 세 명이 치료에 전력하였으니 죽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단지 흉터는 남을 것이라는 설명은 들였지만 그 부분까지 상세히 클라우드에게 말해 주지는 않았다. 군인 一 아직큰 생도의 신분이지만一 의 몸에 흉터가 생기는 것 따위야 대수롭지 않았다.
「네 앞에서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왜 구해 줬냐」
책망과도 같이 들리는 어조였지만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임을 모를 리 없는 지크하르트는 애매하게 웃었다.
오르피어스가 교정의 구석에서 폭주했고, 지크하르트가 교정 내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2차 성징이 있을 무렵에 능력이 발현하는 센티넬은 그 능력의 특성에 따라 대개 사관학교나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교육받는다. 사관학교는 센티넬의 폭주에 대비한 매뉴얼과 경험이 풍부하였으나 선견하지 못하였던 전제가 있었다. 첫 변째는 오르피어스의 능력이 예상외로 치명적이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르피어스에게 이미 임시 가이드가 배정되어 있었으며, 세 번째는 임시 가이드가 해임을 떠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오르피어스의 임시 가이드인 레베카를 탓할 사안은 아니었다. 그녀는 출장을 가기 전 오르피어스와 충분히 교감하여 심신을 안정하게 해 주었다. 센티넬의 감정이 급작스럽게 뒤흔들려 자아낸 폭주까지 그녀의 책임은 아니었다.
학교는 급히 학생들을 대피시키고 센터를 통하여 레베카에게 연락을 취했다. 지급 전보는 그녀가 빨라도 사관학교 부지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이 소요된다는 절망적인 내용이었다. 건물 몇 채가 전소하는 것이야 문제가 아니다. 다만 2시간이면 그러잖아도 어린 센티넬이 붕괴된 오감을 버티지 못하고 미치거나, 또는 죽기에 적절한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 미쳐 죽어가는 지독한 비명을 2시간 동안 두 손 놓고 하릴 없이 들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지크하르트가 나선 건 그때였다.
임시 가이드만 있었던 오르피어스와 가이드라는 걸 숨기고 있었던 지크하르트는 정식 페어가 아니었지만, 서로의 페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도박을 걸어 볼 만했다. 가이드임을 각성하고 도서관에서 몰래 찾아 읽었던 가이드의 기본 매뉴얼을 숙지하며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숨막히는 정적 속에 오르피어스를 진정시키자마자 끔찍한 화상을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다. 연락을 받고 미리 대기 중이던 센티넬들이 즉시 치료를 퍼붓지 않았으면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다. 가이드로서의 지크하르트의 능력이 비범하지 않았으면 필패하였을 도박이었다.
그리고 의식을 회복한 그에게 오르피어스는 나라면 레베카가 올 때까지 2시간은 버틸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헛고생을 했느냐며 오히려 조소했다.
분노가 치미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었다. 클라우드가 그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불같이 노해 주였기에 지크하르트는 미약하게 동의했다.
「그러게. 그냥 무시하고 죽도록 놔둘 걸 그랬다」
「죽어도 싸지!」
한참이나 오르피어스의 과거 행적까지 끌어와 욕설을 퍼붓던 클라우드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병실 안을 서성였다. 그러다 덜컥거리며 병실 문을 열었다. 걱정이 되어 지크하르트는 친구를 한 번 더 붙잡았다.
「설마 오르피어스 놈이랑 싸우러 가는 건 아니지?」
「빡쳐서 담배 피우러 가」
클라우드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아 벌건 얼굴로 입술 앞에서 검지와 중지를 까닥까닥했다. 다른 사람이, 특히 병문안이라도 온 교사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담배 피우러 간다는 소리를 저렇게 당당하게 하는지. 잘못되면 나란히 중상으로 병실에 입원하게 될 상황인데.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여 무심코 실소한 지크하르트는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실감했다.
「걸리지 마라」
「인마. 안 걸려. 몰래 담배 피운 경력이 몇 달인데」
「몇 년도 아닌 주제에」
클라우드가 대답 대신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총총총 복도 너머로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지크하르트는 나도 담배나 배워 볼까, 하고 명하니 생각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문을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있었다. 지크하르트는 클라우드가 벌써 담배를 다 태웠겠거니 싶어 별 생각 없이 들어오라고 일렀다. 클라우드라면 굳이 문을 노크하지도 않고 열었으리란 걸 떠올린 건 두 명의 젊은 여성이 병실로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들어온 사람은 두 명이으나 인상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사람은 그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백금발의 소녀였다. 지체 있는 가문의 사람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무딘 그의 눈에도 고급스러운 옷감임이 얼추 집작 가는 에스커브 실루엣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소녀를 둘러싼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이를 알려주었다. 사용인으로 짐작되는 여자의 부축을 받고 있음에도 곧게 편 당당한 허리와 반듯한 손짓, 그리고 아래로 내려다보는 거만한 시선까지. 태어남과 동시에 사람을 부리는 사람 특유의 오연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누구십니까?」
누구냐고 묻는, 병실의 주인인 이상 당연한 물음도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신분이 고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창백하리만큼 뽀얀 우윳빛 피부를 가진 소녀의 이목구비는 또렷했고, 아주 고운 붓으로 우아하게 그린 것만 같은 미인이었다. 미간을 지나 양쪽 관자놀이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나 칼로 그은 듯한 흉측한 검상이 낙인처럼 남아 있음에도, 소녀는 미인이었다.
과거에는 사파이어를 녹인 것처럼 강렬하고 아름다운 푸른색을 지녔을 테지만 현재는 빛을 잃어 불투명하게 흐려진 눈동자에 시선을 너무 주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히 물었다. 소녀가 흐음, 하며 그의 목소리가 있는 방향으로 얼굴을 틀었다.
「네가 지크하르트 카시야스니?」
병실을 잘못 찾아왔을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렇습니다만……」
센티넬 센터에서 방문한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적어도 그가 가이드로 각성하였음을 숨긴 건 사실이니 센터에서 그 이유를 캐물으며 등록 절차를 밟기 위한 직원이 오리란 건 예상했다. 예상보다 이르게 닥치긴 하였으나 변명도 준비해 두었다.
「혹시 센터에서,」
「내가 묻기 전에는 말하지 마」
「……」
명령하고, 복종받는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언짢음을 조용히 삼킨 지크하르트는 입을 다물었고, 시중인의 부축을 받으며 소녀가 침대 가까이 걸어왔다. 잘 느끼지 못하였던 달콤한 향수 내음과 분 내음이 불현듯 감돌았다. 소녀의 향이다. 여자의 향기였다.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접한 적 없는 사춘기의 소년답게 지크하르트는 무의식중에 뺨을 붉혔다. 희미하게 일었던 언짢음은 사라진 후였다.
소녀가 그녀의 피부만큼이나 하안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허공과 침대를 더듬거리다 맨손을 그의 손등에 가지런히 얹었다. 거칠고 딱딱한 자신의 손에 닿은 감촉이 놀라우리만큼 보들보들하고 매끄러워 당혹하였으나, 그 당혹감은 머릿속을 가볍게 떠다니며 자극하는 듯한 느낌에 밀려갔다.
토옥, 톡, 톡. 의식이라는 수면을 살그머니 자극하여 자극점에서부터 파문처럼 번지는 반응을 뜰채로 건져 올리는 것 같은, 그런 감각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머릿속을 휘돌던 기이한 느낌은 사라지고 없고, 소녀는 장갑을 낀 채 지팡이를 짚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지쳐있는 심신이 한낮에 얼토당토않은 꿈을 꾸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기억이 몇 분간 통째로 삭제되었거나.
소녀가 입술을 가리며 아주 곱게, 동시에 카랑카랑한 음색으로 웃었다.
「후후, 후. 아하하하! 오빠가 말한 게 사실이었네」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는 왜인지 그가 아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하는 느낌이 있었다. 지크하르트가 그 교집합을 찾을 시간을 주지 않으며 그녀는 내처 말했다.
「넌 정말 생각하는 것과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같구나. 무척 재미있어. 너 같은 사람은 처음 봐」
「칭찬인가요?」
「적어도 나에겐 극상의 칭찬이지」
소녀는 빛을 담지 못하는 눈동자가 마치 또렷하게 사물을 판별할 수 있는 것처럼 지크하르트를 지그시 응시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왜인지 그녀가 갖고 있는 여자의 향기가 짙게 다가오는 것 같아 지크하르트는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약간 뒤로 뺏다.
「질문할 테니 대답해. 어째서 죽을 위험도 무릅쓰고 오르피어스를 살려냈니? 그 아이의 성격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러잖아도 병실에서 한바탕했다고 ‘훔쳤어’」
지크하르트는 교집합의 사람을 알았다. 동시에 그녀가 누구인지도 어렴풋이 짐작했다. 클라우드는 담배를 피우러 가기 전에 그녀를 만난 모양이다.
「오르피어스의 성격이야 알지만 설마 목숨을 구해도 비웃음을 당할지는 몰랐습니다」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했다. 지크하르트는 감정을 꾹 눌러 참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대답하려 신중히 언어를 골랐다. 거짓을 꾸민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거짓은 통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구했는데 이제 와서 같이 대거리하며 널 괜히 살려 냈다는 둥 도로 돌아가서 죽으라는 둥하면 그때 녀석을 살리려 굳힌 제 결심마저 의미를 잃고 퇴락하게 되는 거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내던지고 싶지만요」
내던지고 싶다는 건 반쯤 진심이었기에 지크하르트는 머쓱하게 헛기침했다.
「거기다 순수한 선의만으로 제 목숨을 걸 만큼 착한 놈은 아닙니다. 저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풍문에 따르면, 또한 방금의 언행으로 증명된 바와 같이 그녀는 정신계의 센티넬이다.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를 구명할 때처럼 도박을 했다. 그녀가 이유를 캐물을 것인지, 머리속을 휘저을 것인지, 그를 마음에 들어 한 것처럼 넘길지.
「멍청한 건 아니라 안심했어」
소녀가 진득이 미소했다. 아예 관심조차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도박은 성공이었다.
안도하는 기색을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으려 이불 아래에 감춰진 주먹을 꾹 쥐고 있자니 그녀가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왔다.
「알고 있니? 큰 오빠는 나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만을 선사한단다. 넌 가이드로서의 능력도 인품도 아주 흡의해」
영문을 모르고 반문하는 그에게 소녀가 오연히 턱 끝을 치켜올렸다.
「내 가이드가 되렴」
힐라리아 벨포드와의 첫 만남이었다.
***
퇴청 후 처참한 화재의 흔적만 남은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챙겨가야 할 게 있는지 찾아보던 一 물론 성과는 전무했다 一 지크하르트는 다 타서 시커먼 잿더미만 남은, 그나마도 창이 터져 바람에 흐트러진, 과거에 이불과 시트와 빨랫줄의 흔적이었던 잔해에서 뒷목이 또 땅기는 것을 느꼈다. 내가 저걸 어떻게 빨았는데. 가슴 안쪽주머니를 묵직하게 해 주고 있는 오르피어스의 통장과 오르피어스의 은행 금고 열쇠와 오르피어스의 인감이 정서적으로 안정을 갖게 해 주지 않았다면 오르피어스에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협탁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찧으라는 저주를 퍼부었을 것이다.
글래스팅 군부 관할의 관사는 독신자를 비롯한 해당 본인 일인만 입사가 허용된다. 결혼하면 벨포드 본가로 들어갈 예정이기도 하였거니와 ?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차치하여도 시중인의 존재에 익숙한 힐라리아가 고작 대령의 연봉으로 가능한 생활에 만족할 리는 만무하였다 一 일가가 몰살당한 후 자신의 집이라거나 일정한 거처라는 개념을 갖지 못한 그는 자신의 소유하는 물건이라는 개념도 크게 없었다. 필요할 때 구입하여 사용한 후 더 이상 용도가 없어지면 버리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나 그것도 아니면 잊어버렸다. 그나마 옷가지 정도는 꾸준히 사는 편인데도 불에 타서 입을 만한 게 전혀 없었다.
무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베란다를 지나 주방과 트인 거실의 스탠드의 잔해 앞에서 군도를 살펴본 그는 칼집에서 뽑아보지도 않고 도로 잿더미로 미련 없이 던져 넣었다. 오르피어스가 이번에는 얼마나 높은 온도의 불길을 일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칼집의 장식 일부가 열에 의해 뒤틀렸을 정도이니 칼날도 성하리라고는 짐작되지 않았다.
군인답지 않게 그는 무기에 애착이 없었다. 입대 후 군에서 지급되는 총과 칼이면 충분했고 전투 중에 고장나거나 손상이 있으면 시체나 더 이상 무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된 부상병에게서 충당했다. 무엇을 취하든 그는 손에 쥔 일체의 것을 한 몸처럼 익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평범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친구들과 칼싸움을 하든 전쟁놀이를 하든 다섯 살 위의 깡패와 주먹다짐을 하든 꼭꼭 이기고 돌아오는 아들에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너무 다치지는 말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퇴역한 군인인 어머니는 못내 마뜩잖아했다. 년 절대 군인은 되지 말아라, 라며 억지로 책상 앞에 붙들어 앉혀 잘 읽히지도 않은 책 따위를 억지로 보게 하곤 하였다. 그나마 갖고 있는 재능이 이뿐이었고, 일가를 살해한 흉수에게 접근할 수 있을 다른 방법도 찾지 못했기에 사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군인이 되었지만 어머니의 당부를 지키지 못한 건 지금도 면목이 없었다.
전장에 투입되는 즉시 소령의 직위로 자신의 부대를 지휘하는 센티넬과는 달리 가이드로서의 능력만 있는 그가 서른이 되기도 전에 대령이 될 수 있었던 시작점인 프렌슈발트 요새에서 센티넬 세 명의 목을 쳤던 전투도 다를 바 없었다. 본래 갖고 있던 온전한 사베르 한 자루와 소총 한 정, 소드 벨트에 꽂아두었던 나이프 세 자루, 바닥에서 주운 부러진 사베르 한 자루, 시체의 손을 자르고 가져 온 바요넷 한 정이 그가 사용한 무기였다.
물리계 센티넬 1명과 대적하며 시작하였던 근접전은 물리계 2명과 원소계 1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은밀히 백업하던 정신계 센티넬의 공격을 힐라리아가 방어해 주지 않았다면, 一 자신이 패하였으리란 가정은 하지 않았지만 一 전투는 장시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센티넬 한두 명의 무력이 전황을 좌우하는 시대는 저물었고 이 승리 또한 국지적인 전황의 성과에 불과하였지만 군은 영웅이 필요했다. 3명의 센티넬과 대적하여 승리한 일개 대위를 군은 기꺼이 선전에 활용하였고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전쟁으로 지쳐 있던 글래스팅의 사람들은 영웅의 탄생을 환호하였다. 지나치게 전공이 과장되어 머쓱해하는 그에게 할라리아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높였다.
「내 약혼자라는 점까지 감안하여 떠드는 거니까 닥치고 지금을 누리렴. 전쟁이 끝나면 네 용도도 끝이야. 그러니 그전에 열심히 승진해서 내게 걸맞은 남자가 되어야지?」
모질긴 했지만 현실을 깨우쳐 주기에 적절한 조소였고, 그는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얌전히 한낱 군인으로 돌아갔다.
지크하르트는 일전에 관사를 사용하던 장교가 쓰면서 그대로 남겨 두고 갔던 책장의 잿더미를 스탠드의 파편으로 쿡쿡 헤집어 보았다. 한창 고민하며 구매하였던 동성애 잡지가 남들이 보기 전에 다 탄 건 잘된 일이긴 하지만 도서관에서 심심풀이로 빌린 추리 소설 시리즈 다섯 권마저 홀랑 탔다. 절판 도서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오르피어스의 돈이 어떻게든 해결해 줄 것이다.
거실 전체를 확인차 휘둘러보고 침실로 들어갔다. 오르피어스가 폭주를 시작한 지점이기도 하였거니와 워낙 야무지게 구석구석까지 잘 태운 탓에 챙길 물건은 없을 데지만 잠깐 시간을 할애하는 것 정도야 어려운 건 아니었다.
기실 오르피어스가 어째서 폭주하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관계를 가진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데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바로 몇 시간 전에 삽입 직전까지 갔었다. 오르피어스는 가이드 없이도 꽤 장시간을 버텼고 지크하르트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감정적인 요인이 분명한데 술 잘 처먹고 잘 토하고 잘 잠든 놈이 왜 날뛰기 시작했던 것일까. 술 마시고 저지른 일들을 새삼 쪽팔려 할 만큼 섬세한 녀석은 절대 아닌데, 따위의 시답잖은 상념의 가닥을 좇던 지크하르트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
처음 오르피어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침실로 들어왔을 때는 불길이 워낙 거세기도 하였거니와 정황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가라앉고 한결 맑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시야에는, 마치 그 주위만 방화벽이 생긴 것처럼 전혀 손상 입지 않은 콘솔과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아가씨에게 받은 시든 꽃다발과, 가족이 찍은 마지막 사진이 보관된 액자가 들어왔다. 잿빛으로 검게 탄 침실에서 그곳만 선명한 색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크하르트는 잿가루 하나 침범하지 못한 액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를 꾹 사리물며 품에 갈무리했다. 더는 둘러볼 의지도, 필요도 사라진 그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방을 나왔다.
***
“뭐? 남는 방이 없어?!”
대경실색한 외침과는 대조적으로 받아치는 대답은 평이하기 짝이 없었다.
“네, 영관 관사에 남는 방은 없습니다. 카시야스 대령님.”
“어째서! 며칠 전만 해도 빈방이 있는 걸 봤는데!”
“불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으나 대령님께서 쓰시던 305호실 주변의 숙실도 임시 점검을 하게 되어 그분들의 거처를 비어 있는 숙실에 먼저 임시 배정하였습니다.”
관사의 관리원은 극히 감정적으로 절망하는 지크하르트와는 다르게 매우 사무적인 어조로 일관했다. 고운 말이 안 나가는 것도 당연했다. 관리실에서 급히 업자들을 수배하고 화재 현장의 뒷수습을 위한 일폭탄을 터트린 원흉 중의 하나였으니까.
또박또박한 정론 앞에서 지크하르트는 할 말이 궁해졌다. 직접 방화한 장본인도 아닌데 싸늘한 눈총을 받으니 억울하기 그지없었지만 센티넬미 폭주하게 된 과오는 가이드도 함께 지는 지라 꿀 먹은 병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센티넬의 폭주로 인한 사건으로 문책받는다면 모를까 이 상황에서 몇 시간 전에 떡 칠 뻔하였다. 내 책임이 아니다 운운하지는 못한다.
“큰일났네 ……. 오늘 밤부터 잘 곳도 없잖아. 정말 한 곳도 없나? 진짜? 단 하나도?”
끈덕지게 물어오는 지크하르트가 성가셨든 짜증이 났든 관리원은 아예 명부까지 꺼내어 눈앞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우선 대령님께도 말씀드렸다시피 305호실을 수리하는 데는 적어도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예상됩니다. 배관과 배선까지 다 망가져서 건물을 전체적으로 손 봐야 합니다. 一 지크하르트는 “으음.”하고 조금 쪼그라들었다 一 참, 구체적인 손해 견적은 나중에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여하튼 현재 남은 방에는 임시 점검을 해야 하는 숙실을 쓰던 분들이 배정되었고, 그 방들은 점검이 끝난 후에,”
지크하르트가 말을 끊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래. 점검 끝난 후에라도 내가 쓸 수는 없나?”
“점검 끝난 후에는??”
똑같이 되받아 반복하는 관리원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중앙군과 합동군사훈련이 있습니다.”
확인사살이었다. 지크하르트는 절망적으로 머리를 싸맸다. 합동훈련의 시행을 위하여 글래스팅까지 내려오는 중앙군에도 물론 영관은 있고 그들은 관사에서 머무르게 된다.
식사를 할 정신도 시간도 없어 저녁까지 굶은 지크하르트는 당장 머물 방조차 없다는 현실에 남은 힘까지 탕진되는 기분이라 데스크에 얼굴을 푹 처박았다. 다른 방문객이 있었다면 폐가 되었을 데지만 현재 관리원 외에 있는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기에 그는 마음껏 데스크에서 절망하였고 관리원들도 곧 없는 취급하고 본인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 달 남짓한 기간만 머물 하숙은 찾을 수 없다. 신세 질 수 있는 친구도 없었다. 미혼은 저렴하고 여건도 좋든 관사에서 살고 있고, 제 집을 갖고 있다면 가정을 꾸린 녀석이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동안 머물 수는 없었다.
허면 남은 선택지는 호텔이나 여관인데 문제는, 돈이다. 평범한 소시민으로 자라온 지크하르트는 단순히 먹고 자고 집 대신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장기간 호텔에 숙식한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생활비보다 턱없이 비싸니까.
더욱이 등청이 용이한 그레이트 홀 근방의 숙박업소는 헤임 시가지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가장 값비싼 곳 중의 하나였다. 수준을 낮추어 가격대를 타협하면 차로 운전하더라도 사령부까지 오고가는데 시간미 너무 많이 소모된다. 안 그래도 차 열쇠까지 그 빌어먹을 불 때문에 휘어 영락없이 새로 맞춰야 할 판국이었다. 또 생각하니 혈압이 오를 것 같았기에 지크하르트는 침착하게 심호흡했다.
‘……호텔갈까. 내 돈 쓰는 것도 아닌데.’
한 달 동안의 숙식비를 사비로 통용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는 지크하르트는 통장의 무게감을 재차 확인했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 펑펑 써버려? 날이면 날마다 호텔 레스토랑과 호텔 바에서 탕진하면서?
“아 참.”
명부를 보던 관리원이 시선을 올렸다. 지크하르트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딱 하나 남아 있는 방이 있긴 했는데 대령님이 오시기 세 시간 전에 입사 절차를 하신 분이 있습니다.”
“겨우 세 시간?”
잿더미가 된 방이 아른아른 눈앞을 어지럽게 하여 일에 집중도 못하고 전전긍긍 시간미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무렵이다. 불 난 걸 알았을 때 방부터 재빨리 잡았어야 하는 건데.
후회는 뒤늦게 하기에 후회인 것이다. 끝장나게 운이 없는 하루였다고 자조하며 한숨을 내쉬는데 낯익은 음성이 머리 뒤쪽에서 들려왔다.
“제 얘기인 것 같습니다?”
지크하르트는 그제야 정신을 수습하고 뒤돌아보다, 반사적으로 확 찌푸려지려는 얼굴을 겨우 다듬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모든 사태의 시초이기도 한 남자였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유안의 낯은 하룻밤 사이에 10년은 늙은 듯 퀭했다.
“어제 너무 과음했습니다. 죽을 거 같네요.”
관리원의 인사를 가벼이 받은 그는 방의 전구가 많이 희미해졌으니 갈아달라는 말을 하고는 관리실을 나왔다. 더 관리원을 붙들고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없었으므로 지크하르트도 따라 나왔다.
“결혼은 하신 걸로 아는데 댁은 어쩌시고 관사에 입사하셨습니까?”
유안이 아구구 죽는 소리를 내며 벽에 등을 기댔다.
“안사람이 장기간 여행을 가게 되어서요. 온자 청승맞게 마누라 없는 집을 지키고 있느니 관사에 머물면서 친구도 좀 만나고 그러려고요.”
경황이 없어서 깜빡했지만 새벽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혹 부인과 싸우고 가출을 했다거나 하는 이유였다면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는 심산이었으나 사유가 정당하니 말을 꽃을 여지도 없었다.
“듣자하니 대령님이 쓰실 방이 없는 겁니까?”
“상황이 그렇게 됐습니다.”
“으음.”
속이 편치 않아 괴로운 와중에도 유안은 무언가 고심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 길게 말을 이을 화제도 없고 관계도 아니었기에 헤어지려던 지크하르트는 혹시나 그에게 묘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리에 붙었다.
유안이 끄응, 침음하더니 언성을 높였다.
“막내 도련님. 거기에 숨어있으신 거 아니까 나와주십쇼.”
반사적으로 사방을 훑었다. 사람이 숨을 수 있으며, 동시에 유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범위라면 이 근방에 한 곳뿐이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벌게진 얼굴의 오르피어스가 슬며시 나왔다.
“숨어 있었던 게 아니라 볼일이 있었던 거야.”
“관사 화장실에서요?”
“입사 안 하면 화장실도 못 써?”
“관사비에 다 포함되는 금액이니까 쓰시면 안 되죠. 나가시기 전에 화장실 썼다고 사용료 관리실에 내고 가십쇼.”
그러잖아도 찾던 얼굴이었다.
투덕투덕 입씨름하는 오르피어스를 말없이 웅시하자니 그가 매우 켕기는 눈치로 힐끔힐끔 안색을 살피고는 오히려 가슴을 뻣뻣하게 폈다.
“뭐, 뭐, 뭐뭐!”
평소였다면 네가 지금 잘난 게 뭐가 있다고 큰소리를 치는 거냐며 한소리 쏘아줄 법도 하건만, 지크하르트는 가만히 그를 살펴보기만 하였다. 불에 타지 않은 콘솔. 불에 타지 않은 액자. 불에 타지 않은 사진. 머릿속이 복잡했다.
“야.”
“어, 어?”
“나한데 할 말 없냐?”
오르피어스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통장 줬잖아.”
통장 말고, 라는 대꾸를 하려다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삼켰다. 섣부르게 꺼내기에는 불확실한 요소가 많았다. 무엇보다 그 자신도 확신을 하지 못했다.
짧은 문답이 오가는 동안 방관자처럼 대화에서 물러나 있던 유안이 끼어들었다.
“도련님. 아직 아파트 안 나갔죠?”
“응. 이번 주말에 집 보러 온다는 사람은 있어.”
“잘됐네요.”
유안이 여전히 속이 쓰라려 일그러진 얼굴로 대수롭잖게 상황을 정리했다.
“두 분이 도련님 댁에서 같이 지내시면 되잖습니까?”
비단 지크하르트뿐만이 아니라 오르피어스라는 사람의 인품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궁금해 하는 것이 있다. 저 작자에게도 인간미 지니는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을까. 지크하르트는 물론 양심이 없다는 쪽으로 돈을 걸었으며 내기에 참여했던 사람들 모두 같은 쪽에 걸었기에 내기는 성립도 되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지크하르트는 그때 양심이 있다는 쪽에 돈을 걸었다면 지금 짭짤한 수익이 생겼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유감스럽게도, 오르피어스에게도 양심은 있었다.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임시 거처야 구했지만 갖고 있는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이라 새로 갖춰야 할 것들이 많았다. 시가지에서 살 게 많은데 차를 쓸 수가 없으니 누구에게 차를 빌려야 하나 고심하는 그에게 오르피어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내가 데려다 줄게.” 알아서 운전기사 노릇을 해 주시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디부터 들를 거야? 뭐 필요한데?”
시내로 차를 몰며 오르피어스가 힐끔힐끔 눈치\를 살폈지만 지크하르트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짤막하게 잘랐다.
“옷.”
“난 옷가게는 여자 옷밖에 모르는데 ……. 자주 가는 데 있어?”
“…….”
무시했다. 오르피어스는 두 번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 운전하는 와중에도 안 그린 척하면서도 연신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지크하르트는 부러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외면했다. 안하무인으로 도도하게 제 갈 길만 가는 놈이 꼬리 내린 개가 되어서 끙끙거리고 있으니 굉장히 짜릿했다. 저 놈 때문에 어제 오늘 쌓였던 체증이 뻥 뚫리는 상쾌한 기분이었다.
알아서 행인에게 길을 묻고 알아서 운전하며 알아서 번듯한 남성복 가게 근처에 차를 세운 오르피어스가 먼저 내렸다. 팔짱을 낀 채 꿈적하지 않고 있노라니 얼른 내려오라고 손짓했지만 손가락 하나 미동하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불안한 얼굴로 슬금슬금 다가온 그가 눈치를 보고는 차문을 열어주었다. 그제야 지크하르트는 차에서 내렸다. 여전히 말은 한마디도 붙이지 않았다. 냉기가 묻어날 것 같은 쌀쌀맞은 무뚝뚝한 표정을 관리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는 올해 들어 최고로 신났다.
말을 걸 엄두도 못 내고 지크하르트의 뒤를 주춤거리며 가게로 따라 들어온 오르피어스는 점원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고는 장내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평상복이 진열된 진열대 네 곳을 가리켰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얘 사이즈 얼추 눈대중하고 사이즈 맞는 거 종류별로 한 벌씩 다 줘.”
접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렇게 손이 큰 손님은 주문복을 맞추지 기성복 가게에 방문하지 않는다. 적어도 오늘 남은 하루만이라도 턱 끝으로 부려먹겠다는 지크하르트의 다짐도 소시민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앞에서 깨졌다.
“야, 야. 무슨 옷을 그렇게 많이 사냐? 옷가게 차릴 거냐?”
오르피어스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떳다.
“지금 우리 집에 세탁할 사람 없어. 한 번씩 갈아입고 버리려면 한꺼번에 많이 사두는 게 낫지.”
“……한번 입은 옷을 왜 버려?”
“응? 넌 네 손으로 직접 세탁도 해?”
“…….”
할 말이 없거나 화가 나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맞아, 이 자식 연행에 품위가 전혀 없어서 그렇게 안 보이지만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었지.
“내 빨래 너한테 맡길 생각 없으니까 냅둬.”
오르피어스는 옆으로 밀어내고 직접 편해 보이는 옷을 몇 벌 골라 오르피어스의 지갑으로 셈을 치렀다. 그를 짐꾼으로 데리고 가게 몇 곳을 순례하며 속옷과 구두, 일용품 등을 장만했다. 짐이 하나씩 늘 때마다 오르피어스의 인상도 하나씩 구겨졌지만 아직까지는 고분고분히 머슴이 되어 주었다.
마지막 잡화점에서 오르피어스의 짐을 더 늘리기 위해 쓸데없는 커다란 인형까지 사서 겹겹이 쌓인 짐들 위에 턱 올려놓고 그 반동으로 그의 다리가 휘청하는 것까지 즐겁게 감상해 주었다. 앙증맞은 곰인형의 엉덩이와 꼬리 뒤에서 오르피어스가 구시렁거렸다.
“다 사긴 했어?”
더 사고 싶은 걸 생각해 봤지만 평소에도 사치를 하지 않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마땅히 쓸모없는 물품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으음, 꽃병이라든가 액자라든가……. 아, 그러고 보니 제일 급한 건 평상 군복이야. 예복과 정복은 바로 내일 입을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니 천천히 맞추면 된다고는 해도 군복이 입고 있는 것 한 벌 뿐이라 난감하군.”
“내 옷이라도 빌려줄까?”
“나한데 맞겠냐. 길이도 품도 짧고 좁겠구만.”
“너보다 그렇게 작지는 않거든?”
짐꾼으로 따라 다니며 예전의 기세를 일말 회복했는지 오르피어스가 울컥 언성을 높이다가 눈을 한 번 부릅떠 주니 다시 얌전해졌다.
오르피어스가 결코 빈약한 단신은 아니지만 장신인 지크하르트보다는 확실히 작고 마른 체형이다. 그의 옷을 못 입을 거야 없겠지만 상당히 우스운 몰골이 될 것이다. 새로 맞춘 군복이 장만될 때까지는 한 벌로 어떻게든 버터야 할 것 같다. 정 급하면 방에 빨고 오르피어스에게 능력으로 불을 피워서 건조하게 하라고 하면 되겠지.
“통장도 재발급 받아야 하고……. 참. 훈장도 다 탔겠다.”
이건 조금 곤란했다. 지크하르트 자신은 훈장이니 공적미니 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명색이 장교인지라 예복이나 정복을 착용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약장을 패용해야 한다. 개인 과실로 인한 분실이라는 변명은 허용되지 않는다.
의외로 해결책은 오르피어스가 내놓았다.
“훈장 문제는 내가 형한테 따로 사정을 설명할게. 비공식적인 루트로 새로 수여해 줄 거야.”
“…….”
“왜 그렇게 봐?”
“권력의 맛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빽이라는 건 확실히 있으면 매우 좋고 편리한 것이다. 새삼스러운 진리 하나를 실감한 지크하르트는 권력의 맛도 느꼈으니 쇼핑은 끝내 주기로 했다. 너그러이 작심하여 곰인형도 대신 들어주었다.
저녁과 밤의 경계에서 슬슬 밤으로 기울어가는 시점이었다. 양손 가득 한아름 짐을 든 청년과 그 옆에서 커다란 인형을 안고 가는 군인이라는 기이한 조합을 보며 마주치는 행인들이 어떠한 생각을 할지는 미지수였으나 두 사람은 사고 없이 무탈히 차로 돌아왔다.
시영 아파트까지는 그리 긴 시간미 걸리지 않았다. 계단을 걸어 4층까지 올라와 현관 앞에 서자 기이한 감회가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여도 오르피어스와 한정된 기간이나마 동거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유안의 제의에 두 사람 다 펄쩍 뛰었지만 극명한 반대 의사를 표한 사람은 오르피어스였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미쳤어?! 내가 뭣 때문에 아파트를 내놨……. 아무튼 절대 안 돼! 싫어!」
지크하르트로서는 단지 오르피어스가 껄끄러워서 내키지 않았을 뿐이지만 그가 저렇게 뻗대면서 고자세로 나오니 오히려 더 언짢아졌다.
「누구는 너랑 사는 게 좋을 거 같냐? 됐어, 됐다고. 위관 관사에는 자리가 남는다는 거 같던데 너랑 사느니 거기에 비벼 보겠다」
「아이고, 대령님. 대령님이 그쪽 관사로 가시면 애들 부담스러워서 숨도 못 쉽니다」
밤 10시만 되면 자진하여 불이 다 꺼지고 새벽 5시 30분에 칼 같이 기상하여 구보 훈련을 나갈 거라며 유안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며 할 말이 있다고 오르피어스를 잡아끌고 구석으로 가서 속닥속닥하니 어떤 마술을 썻는지 거짓말처럼 오르피어스가 집 열쇠를 내밀었다. 못마땅하고 불만 어린 빛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지만 일단 수긍은 했다.
지크하르트는 네 통장을 갖고 호텔에서 묵을 거라며 튕겼지만 유안이 오르피어스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고개를 숙이게 했다.
「도련님도 이렇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시니까 ? 오르피어스가 놓으라고 바락바락 외쳤지만 두 사람 다 듣지 않았다 ? 사과도 받으실 겸 같이 머물러 주세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유안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내정하게 자르기도 쉽지 않아 도리 없이 응했다. 며칠 지내다가 도저히 버티기 힘들면 집을 나와서 호텔에 묵는다는 선택지까지 없어진 건 아니었으니.
오르피어스가 거의 곡예를 하다시피 하며 용케 짐을 한 손으로 받치고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지크하르트에게 대신 열어달라는 말도 차마 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니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천장의 얼룩을 갑자기 흥미롭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과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 눈치만 보지 말고 사과를 하라고, 사과를.”
“내가 뭘 눈치를 봤다고…….”
“미안합니다. 더 이상은 절대 다른 사람의 집을 태우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알겠냐? 자, 따라해. 미안합니다.”
“…….”
“미안합니다.”
“……미…….”
“미안합니다!”
“미, 미, 미……. 통장 줬으면 됐지! 거기서 더 뭘 바라?!”
아니. 이 새끼가 끝까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자식 멱살을 잡아다가 집어던질까 심각하게 고민하며 살벌하게 눈을 치켜뜬 지크하르트와 천장의 얼룩을 심도 있게 고찰하는 오르피어스의 앞에서 갑자기 문이 벌컥 젖혔다.
“헉!”
기겁한 오르피어스가 뒷걸음질하다 휘청 균형을 잃었기에 얼결에 등 뒤에서 그를 안아 부축했다. 그 와중에도 오르피어스는 짐을 놓치지 않았다. 유안이 늘어지게 하품하며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문 앞에서 시끄럽게 뭔 얘기를 오래 하십니까? 사랑싸움 그만하고 들어오십쇼.”
유안이 왜 오르피어스의 집에서 튀어나왔는지와 사랑싸움 중 어느 부분에 태클을 걸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사이에 오르피어스가 그 대신 버럭 소리를 질러 주었다.
“너, 너! 내 집 열쇠 어떻게 갖고 있어?!”
“도련님이 처음 분가하실 때 복사했죠, 당연히. 리벡의 작은 도련님 댁 열쇠도 갖고 있으니까 도련님만 특별대우 한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예사하게 설명한 유안은 왼쪽 뺨의 화상흔을 습관처럼 문지르며 도로 쏙 들어갔다. 누가 집 주인인지 모를 지경이다. 오르피어스가 씩씩거리며 뒤따라갔다.
페인 가는 대대로 벨포드 가에 종속되어 섬기는 종인이라고 알고 있는데 잠깐이나마 가까이에서 두 사람을 겪어 본 감상에 따르면 어쩐지 자신의 지식을 대폭 수정해야 하지 않나 싶은 상념이 생겼다. 말 그대로 쓸모없는 상념이라 지크하르트는 곧 머리를 저어 털어내곤 마지막으로 현관에 들어섰다. 오르피어스가 실종되었을 당시에 행정과에 주소를 물어 집까지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안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식욕을 상실하여 저녁 식사도 하지 않기는 하였지만 막상 냄새를 맡으니 위장이 요란하게 요동을 쳤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인데다 이사 준비 중미라고 알고 있어서 난잡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대강 둘러봐도 잘 정리된 집은 깔끔했다. 세탁도 혼자 안 한다는 놈이니 자기가 치웠을리는 없을 테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이제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오르피어스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지크하르트는 그를 붙잡고 하나씩 명령했다. 짐은 빨리 풀어야지. 옷은 옷걸이에 잘 걸어서 옷장에 넣고, 나머지는 잘 개키고, 넌 옷 한 벌 네 손으로 갠 적이 없냐, 신발도 신발장에 정리하고, 칫솔은 네 것과 섞이지 않게 따로 두고, 분무기 저기 있으니 화분에 물도 주고, 인형이랑 책은 아주 중요한 거니까 먼지 한 톨 묻지 않도록 조심히 들어서 거실에,아니 선반에, 아니 테이블에, 지금 똥개 훈련 시키냐고? 당연한 걸 묻냐.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던 유안이 배를 잡고 웃었다.
“도련님이 집안일을 하시다니 17년만에 처음 보는 진귀한 구경인데요. 보는 저야 즐겁지만 식사라도 먼저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지 도련님도 힘을 내서 또 치우시죠,”
“형만 아니었으면 넌 내 손에 죽었어.”
좁지도 않은 집을 부산하게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느라 진이 빠진 오르피어스가 씨근거리면서도 그의 권유를 핑계 삼아 식탁 앞으로 냉큼 달려갔다. 더 뺑뺑이 돌리고 싶었지만 뱃속에서 항의 중인 건 지크하르트도 마찬가지였던지라 슬렁슬렁 빈자리에 앉았다.
저녁 식사는 훌륭했다. 부야베스를 메인으로 호박과 감자를 재료로 한 아라크렘과 코키유, 그라탱 등이 곁들어진 3인 분의 정찬이었다. 오르피어스와 유안의 상태를 고려하였는지 자극적이지 않고 소화가 잘 되는 식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것이 결혼한 남자의 생활력인가 하는 감탄이 일었지만 오르피어스는 통명스러웠다.
“집에 누굴 데리고 온 거야?”
“본가의 하인이랑 하녀 다섯 명이요. 알아서 척척 식사 준비하고 집 청소하고 잘 하던데요?”
“직접 요리하신 게 아니셨습니까?”
“하하. 웬걸요.”
유안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만지는 족족 그릇이며 접시를 다 깨트려 먹어서 마나님께도 주방 출입 금지 엄명을 받은 몸입니다.”
“저 화상이 주방에서 살림하기 싫어서 일부러 수 쓴 거야.”
오르피어스가 영 못마땅한 기색으로 마늘빵을 찢어 수프에 적셔 먹었다. 빵이며 식재 등도 벨포드 본가의 주방을 털어왔다고 했다. 도련님이 혼자 집에서 식사를 직접 해 드실 리가요, 라는 유안의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아까 잠깐 열어본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증거 있습니까? 중상모략은 삼가해 주십쇼. 유연비어 퍼트리시면 고소할 겁니다.”
“나오미한테 들었는데 결혼하기 전만 해도 설거지 정도는 할 수 있었다며?”
“누님은 제가 아니라 마누라 편을 드시니까 증언에 공정성이 떨어집니다.”
늦은 저녁이라 허기지기도 하였고, 시답잖은 말다툼이 티격태격 이어지는 걸 배경 음악 삼아 포크와 나이프를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접시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맛있는 식사였다. 오르피어스와 유안이 시끄럽게 입씨름을 해서 생각만큼 분위기가 어색하지도 않은데다 유안은 사교성미 좋고 견식도 풍부하여 대화 나누기 좋은 평범한 화제를 이곳저곳에서 잘 가져왔다. 누구와는 비교하는 게 미안할 만큼 천양지차다.
“……저녁 먹자마자 또 뭘 시키려구.”
물끄러미 쳐다보자 당사자가 흠칫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유안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식탁 밑에서 술병과 술잔을 꺼냈다.
“자, 자! 기념비적인 동거 첫날인데 이게 없으면 됩니까? 안주도 따로 있으니까 안심하고 맛있게 드십쇼.”
그런 기념일 따위는 챙기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몇 시간 전만 해도 술병이 나서 반 시체의 몰골로 기어다니는 걸 봤는데 금세 또 술 생각이 나다니 어떤 의미로는 경이로웠다.
“속 괜찮으십니까?”
“해장술은 술 아니랬습니다.”
당당하게 대꾸한 유안이 먼저 지크하르트의 잔을 채웠다. 이어 오르피어스에게 눈을 돌렸으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난 안 마셔.”
술병만 봐도 토할 것 같다는 지긋지긋한 얼굴이었다. 지크하르트는 술잔을 돌려 술 냄새를 맡았다. 꽤 좋은 향기가 나는 과일주였다. 라벨이 궁금하여 식탁 밑에서 다른 병을 찾아 읽고 있는데 유안이 문득 음험하게 웃었다.
“대령님. 저희 막내 도련님이 왜 술을 완전히 끊으신 건지 아세요?”
“사소한 신변잡기 얘기할 만큼 친하지 않았습니다,”
라벨을 훑어보느라 대답은 건성으로 나왔다. 오르피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얌전히 술이나 마시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그래?”
물론 유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술은 잘 안 마시긴 하셨지만요, 연제였더라, 록사나 아가씨가 말도 제대로 못할 만큼 어리셨을 때의 일인데……. 그 무렵에 도련님이 술에 진탕 취해서 귀가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 뭐? 유안, 너! 야!”
어떤 얘기가 나올지 그제야 퍼뜩 깨달았는지 오르피어스가 뺨을 신경질적으로 붉히며 외쳤다. 흥미 없이 듣고 있던 지크하르트는 그의 반응에 무척이나 뒷얘기가 궁금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안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말을 멈추게 하려는 오르피어스를 뒤에서 붙잡아 끝어 당기곤 시끄러운 입을 틀어막았다. 팔 안에 갇힌 그가 버둥거렸지만 지크하르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친절하게 웃어 주었다.
“그래서요?”
“읍, 읍읍!”
“오 이런. 감사합니다, 대령님. 주정뱅이답게 새근새근 잘 주무시던 록사나 아가씨를 깨워서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만 아가씨가 울음을 터트리신 거예요. 삼쵸온, 냄새 시져시져~ 하고요.”
“으으으읍!!!”
생동감 있는 혀 짧은 소리 흉내에 지크하르트도 실소했고 오르피어스의 발버둥은 더 심해졌다.
“여기에서 끝났으면 도련님이 지금 이렇게 난리 치실 일도 없었을 텐데 말미에요. 아가씨의 울음보가 터지니까 술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도련님도 당황해서 같이 마주 엉엉 울면서 삼촌이 잘못했다고 절대 술 안마시겠다고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끌어안고 달래셨는데, 술 냄새는 당연히 점점 더 지독해지고 아가씨는 숨이 막히고 울음소리는 더 커지고 도련님도 덩달아 더 크게 우시고…….”
유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로 가관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아이릭 님이 막내 도련님의 뒷목을 내리처서 기절시키지 않으셨다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밤새도록 그러섰을걸요.”
“멍청해질까봐 술을 안 마시는 거였군요?”
우스갯소리를 하며 품에 꽉 갇혀 발버둥마저 포기한 오르피어스를 내려다보니 쪽팔림 때문인지 숨이 막혔기 때문인지 귓불까지 벌겋게 되어 있었다.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른 유안이 오르피어스를 결박하고 있느라 술을 마시지 못하는 지크하르트의 잔에 건배하듯 맞부딪치고는 쭉 들이켰다.
“도련님이 담배를 끊으신 이유도 못 들으셨겠죠?”
“담배도 설마 록사나 양 때문에 끊었, 악!”
지크하르트가 기겁하여 입을 풀었다. 손바닥을 탁 깨물어 겨우 탈출한 오르피어스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버력 외쳤다.
“차라리 내 입으로 얘기할 거야! 담배는 형수님이 록사나 임신했을 때 앞에서 피우다가 호되게 혼나면서 끊었어! 이제 됐어?”
“생각보다 시시한 이유로구만.”
“뭘 바란 거야?”
“네 꼴사나운 모습.”
오르피어스가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꿀릴 게 없는 지크하르트도 마주 노려봐주었다. 연제까지 방을 태운 효과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오늘 만큼은 한없이 지고 들어가야 하는 죄인이기에 먼저 꼬리를 내린 쪽은 오르피어스였다. 뾰로통한 얼굴이었으나 별다른 군말은 않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이유가 록사나였다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신기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재미있었다.
“조카가 그렇게나 좋냐?”
“융.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사랑스러워.”
오르피어스의 입에서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말이 나오다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지크하르트는 며칠 전에 보았던 록사나의 얼굴을 회상했다. 울던 모습만 봐서 그런지 실물은 썩…….
“아가씨 처음 뵀을 때는 쭈글쭈글 원숭이처럼 못 생겼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새 세 잔째의 술을 독작 중인 유안이 이죽거렸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그는 원기 회복이 되고 있었다. 오르피어스가 뱁새눈으로 흘겨 보았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다 못생겼다더라, 뭐. 네 자식들도 마찬가지 아냐? 막 첫울음을 터트렸을 때는 아주 못생겼을걸?”
“우리 애들은 지금도 딱히 미인은 아니니까 상관없죠. 도련님도 얼마나 못생기셨을까.”
“너보다는 예뻤을 테니까 문제없어. 그리고 난 지금도 예뻐.”
“미인이시면 뭘 합니까. 도련님은 실속이 전혀 없으신데.”
다 큰 성인 남자 둘이 앉아서 못생긴 걸로 싸우다니 같잖기도 했지만 술안주로는 제법이었다. 지크하르트는 술잔을 홀짝이며 이 무의미한 말싸움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구경했고 승패는 유안이 “도련님이 11살이셨을 때의 일인데요.”라며 과거를 들먹이자 허무하게 끝났다.
아무리 뻔뻔한 오르피어스라도 과거의 흑역사를 낱낱이 꿰고 있는 연상의 어른은 당해낼 수 없었다.
‘저 자식의 천적이네. 앞으로 친해져야지.’
지크하르트는 유안에게 무한한 호의와 우정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다음날 아침, 지크하르트가 거실에 나갔을 때 목격한 것은 두 구의 시체였다. 지독한 술 냄새에 코를 틀어쥐며 시체 둘의 상태를 살폈다. 전날 밤에 거의 수면하지 못하여 피곤한 탓에 자신은 일찍 잠들었지만 이 둘은 결국 이틀 연이어서 밤새 술판을 벌린 모양이다. 끝끝내 안마시겠다고 지크하르트의 뒤를 따라 다른 빈방으로 들어가려던 오르피어스를 유안이 붙잡아 억지로 술병을 들게 하는 게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도중에 술이 떨어지는 통에 밖에서 사 왔는지 식탁 밑에 있던 술병보다 더 많은 빈 술병들이 주방과 거실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바닥에 엎질러진 술이며 안주까지 다 치울 엄두는 나지 않아 빈 술병들만 구석으로 몰아 세워두었다. 유안은 그나마 소파를 차지하고 코를 골고 있는데 오르피어스는 테이블 밑에 구겨져 있었다. 원래 혈색이 좋은 편이 아닌 얼굴은 술에 취한 탓에 핏기가 더 빠져서 창백했다.
오르피어스야 무슨 짓을 해도 해임되지 않을 총독 아우에다 센티넬이지만 유안은 사정이 다르다. 등청하라며 흔들어서 깨워주었지만 코고는 소리만 커질 뿐 요지부동이었다. 총독부 보조관실로 전화까지 하는 건 오지랖인 것 같아 그만두고 이불을 가져다가 덮어 주었다.
그럼 이제 문제는 오르피어스다.
“……,”
선심 쓴다고 이불 덮어주다가 깨어나서 또 울면서 헛소리를 하거나 토하는 건 아닐까 매우 저어되었기에 여차하면 몸을 뺄 준비를 하고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잠잠했다.
“야, 야. 자냐? 죽었냐?”
“……으으음.”
뒤척이며 팔을 들어 올렸기에 후다닥 벽에 등을 붙였지만 목을 긁고는 다시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 정도면 깨지 않는다고 봐도 좋을까. 어느 정도 안도하고 오르피어스의 발을 잡아 끌어 테이블 밖으로 꺼내놓았다. 깨고 나면 숙취로 괴로워할 테지만 지금은 잘 자고 있었다.
“쳇.”
이대로 이불이나 덮어주면 되겠거니 싶어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지크하르트는 혀를 차고는 무릎 밑과 어깨 아래에 손을 넣어 안아 올렸다.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몸은 어렵잖게 안겼다. 토할 기미가 보이면 이대로 팔을 풀어 떨어트리리란 다짐을 하며 침실로 데려다가 눕혔다. 요행히 침대에 안착할 때까지 오르피어스는 소록소록 잠만 잤다. 베개에 얼굴이 뉘여도 미동 없이 잠든 그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주고는 주정뱅이들의 소굴을 완전히 빠져 나왔다.
아파트 밖에 나와 술 냄새가 없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켜자 겨우 머리가 맑아졌다. 술 냄새가 텁텁하게 찌든 오르피어스의 집에서 아침을 찾아 먹느니 도중에 노점에 들러 적당히 때우는 게 나을 것이다. 어차피 오르피어스가 등청하기는 글렀으니까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가지고 온 오르피어스의 차 열쇠를 허공에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하며 유유히 주차장으로 향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소리가 헤임의 아침을 밝혔다.
***
십년 여 전, 아이릭 벨포드가 부친이자 선대 벨포드 종주인 체스터 벨포드를 축출하여 쿠데타에 성공하고 선왕으로부터 신임 총독에 임명되었을 때부터, 벨포드 가를 종가로서 섬기는 페인 가의 가주이자 아이릭의 일등비서관인 나오미 페인의 일과는 변함없었다. 총독부에 등청 후 보좌관실과 연락하여 지난밤에 총독부로 올라온 보고를 중요도에 따라 선별하여 정리한다. 그리고 아이릭이 등청하면 구두로 먼저 보고하였다. 그녀가 총독부의 숨겨진 실세라 불리는 까닭이었다.
평소보다 아이릭의 등청이 한 시간 이상 늦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오늘도 나오미의 일과는 같은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의자에 깊숙이 파묻힌 아이릭은 드물게도 피곤한 기색을 얼굴 가득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노골적으로 피로를 드러내는 원인은 몇 가지 없었고 평생을 그에게 헌신한 나오미는 어렵잖게 이유를 짐작하였다.
“록사나가…….”
그녀의 짐작대로 아이릭이 무거운 눈 밑을 문지르며 탄식했다. 진하게 끓인 커피도 피로를 쫓아주지는 못하였다.
“간밤에 잠을 전혀 못 자는 바람에 밤새 안고 달래주느라…….”
차라리 일 때문에 밤을 지새웠다면 덜 피곤한 기색이었을 텐데. 나오미는 짧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은 록사나는 어리광이 심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상의 아이릭을 꺼리는데, 아버지이기 때문인지 본래 넉살이 좋은 건지 록사나는 곧잘 그에게 애교 있게 매달렸다, 오르피어스마저도 녹인 소녀이니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하고 나오미는 실없이 생각했다. 천하의 아이릭 벨포드가 제일 지난해하는 일이 외동딸과 놀아주는 것이라는 정보가 정적들의 귀에 들어가면 비웃음을 당하리라.
“오르피어스 님을 부르시지 않고요? 좋아라하며 달려오실 텐데요.”
“유안에게 어제는 관사가 아니라 오르피어스의 집으로 갈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
나오미가 짧게 탄성하며 납득했다.
“지크하르트와도 같이 지내게 될 것이라고 하더군.”
“미숙한 녀석이지만 제 앞가림은 알아서 잘 할 겁니다.”
아이릭이 나른하게 졸린 얼굴로 끄덕끄덕했다. 그러다 문득 허벅지 옆으로 늘어뜨린 나오미의 손을 잡아 손등에 살짝 키스하고는 이마를 댔다. 그녀는 반응 없이 가만히 손을 맡긴 채 서 있었다. 미구에 집무실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있었다.
“실례합니다, 각하. 정보부 제2과장님의 지급 알현 요청이 있습니다.”
비서는 두 사람의 스킨십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보고하였다. 나오미가 20년째 아이릭의 가이드라는 사실과, 센티넬은 가이드의 접촉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이릭은 양손으로 잡은 그녀의 손등에 이마를 댄 채 말했다.
“나오미. 시간은?”
나오미가 한 손으로 수첩을 펼쳐서 확인했다.
“한 시간 후에 카나트 경과 점심 식사 일정이 있으시고, 오후에는 쥐르트 전 추모회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내일 점심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십니다.”
“카나트 경의 약속을 내일로 연기하고, 과장에게는 삼십 분 후에 오라고 전하게.”
비서가 나간 후에야 아이릭은 손을 놓고 일어섰다. 묵직한 수마를 떨쳐 내기 위해 얕게 하품하며 너른 창밖으로 떨쳐진 총독부 부지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그의 등 뒤에서 나오미가 차분히 화두를 꺼냈다.
“새벽에 페어가 없는 가이드 4명이 암살되었습니다.”
“잠 깨기에 적절한 뉴스로군.”
아이릭이 여전히 창밖에 눈을 둔 채 중얼거렸다.
“헤임에 남은 가이드는 몇 명인가?”
“4명이 살해당하여 현재는 임시 가이드 5명, 페어가 없는 가이드 7명, 총 12명입니다. 우선은 경호 인력을 증대하였습니다만 안전은 불확실합니다. 안가에 머물도록 할까요?”
센티넬이 암살자로 파견되면 일반 병력으로는 경호가 어렵거니와 모든 가이드에게 센티넬을 붙여서 경호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임시 가이드만 안가에서 보호하고, 페어가 없는 가이드는 당분간 헤임을 떠나도록 조치해라. 놈들의 목적이 불확실하니 변수를 두는 게 좋겠지.”
센티넬을 암살하기 위한 타깃을 센티넬 본인이 아닌 가이드로 겨냥하는 것은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사항이다. 특히나 새로운 가이드의 각인이 어려운 전쟁터라면 가이드의 위험은 더욱 커진다. 지크하르트를 비롯하여 몇몇 주요 센티넬의 페어인 가이드의 암살 기도가 있었기에 그쪽으로 주의를 기울인 사이에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다.
페어가 없는 가이드부터 하나씩 처리하여 발밑을 좁혀 나간다. 음습하고 비효율적이지만, 잔인하다. 아이릭은 이러한 수를 택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똑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이 동시대에 더 있을 줄은 몰랐군.”
“유사 이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질 않습니까.”
나오미가 쓴웃음을 떨어트렸다.
“혹시……. 오르피어스님의 이전 가이드인 자네트의 사고사도 관련이 있는 겁니까?”
“글쎄, 모르지.”
아이릭이 무심히 답하며 시선을 조금 올렸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적어도 사고는 아니야. 브레이크가 조작된 흔적이 있었어. 자네트는 오르피어스와 동거 중이었고 새벽녘에 갑자기 아파트를 나갔지.”
마른침이 나오미의 목 안쪽으로 꿀꺽 넘어갔다.
“……오르피어스 님이 손을 쓰셨다고 판단하십니까?”
아이릭이 고개를 저었다. 짤막한 대답이 반복되었다.
“모른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누구든 접근할 수 있지만 혼자 자고 있던 오르피어스의 알리바이도 없지. 조사는 거기까지만 하도록 중단시켰다.”
게다가 가이드의 암살을 거리낌 없이 해치운 자들이 자네트만 사고사로 위장할 가능성은 적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나오미의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었다. 유안이라면 넉살 좋게 입 밖으로 꺼낼 만도 하건만 그녀는 말없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다. 아이릭이 여상히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지크하르트를 가이드로 붙여준 거다. 암살이든, 스파이였든, 혹은 오르피어스가 살해하였든 지크하르트라면 절대 죽지 않을 테니까. 그 녀석은 지크하르트를 못 죽여.”
센티넬의 발현부터 불운의 시작이었던 오르피어스는 가이드 운도 지독하게 없었다. 첫 가이드는 자살하였고 사고사로 묻은 나머지 세 가이드들도 힐라리아에게 살해당하거나 공화국의 스파이임이 발각되어 오르피어스가 직접 죽였다. 병적으로 아이릭에게 집착하였던 힐라리아는 아이릭이 부친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직접 거둔 오르피어스를 끔찍하게 혐오했다. 그의 가이드를 살해한 이유도 이 감정의 연장선이었다. 힐라리아에 의하여 정신이 엉망으로 헤집어진 그녀는 목적 없이 대로를 배회하다 차사고로 숨졌다. 혹여 스파이였던 가이드에게도 힐라리아의 입김이 묻어 있었던 건 아닌지 우려되었으나 이야말로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섣부른 억측이었다.
‘차라리 체스터 님이 센티넬이 아니셨다면 그분이 종주가 되지도 않으셨을 텐데…….’
그랬다면 사욕이 없는 아이릭은 벨포드 가의 일원으로서의 평범한 권리와 책임을 지었을 테고, 힐라리아도 오빠를 많이 좋아할 따름인 여동생으로 평범한 삶을 지냈을 테고, 오르피어스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오미는 한탄을 삼키며 죽은 전 주인을 향한 불경한 감상도 함께 넘겼다. 빗방울이 하나둘 씩 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