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0)

7.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오르피어스는 동쪽 하늘로부터 말갛게 비치는 햇살이 하루를 열 무렵이 되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에 누운 지크하르트가 깨지 않도록 살그머니 슬리퍼에 발을 꿰고, 침대를 빙 돌아 침실을 나가려던 걸음을 잠깐 멈추었다. 지크하르트가 잠든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첫 관계를 가지며 호텔에 묵었을 때도, 동거를 시작하였을 때도, 같은 침대에서 자든, 침대와 소파에서 나누어서 자든, 항상 지크하르트가 먼저 일어나 그를 깨웠다.

입을 작게 벌리고 곤히 잠든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오르피어스는 지크하르트가 얕게 신음하며 뒤척이는 기척에 제 풀에 놀라 후다닥 침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마터면 깨울 뻔했다.

며칠 내내 제대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한 뱃속이 식사를 요구했지만 입맛이 없어 물 한 컵만 억지로 텅 빈 위장으로 넘기고 아파트를 나섰다. 정신을 다른 곳에 두지 않고 있던 사이에 어느덧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사령부로 등청하자 야간 당직을 서던 경비가 굉장히 놀란 얼굴로 인사하는 걸 무시하고 사무실로 올라왔다. 집에 있어 봤자 딱히 할 일도 없고 지크하르트를 마주하는 게 껄끄러워 근무 시간이 되기도 전에 등청하였으나 사무실에서도 할 일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은 하나였다. 레베카의 살해를 사주한 범인을 찾는 것. 그러나 그의 손에서 벗어나 있는 일이다.

책상에 앉아 의미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던 그는 슬슬 근무 시간이 시작되고 하나둘 소란이 깃들이자 의무실로 내려갔다. 평소라면 또 어딜 다쳐서 왔느냐고, 여긴 소령님 전용 여관이 아니라고 잔소리할 법한 샬럿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쉬려고 오셨어요?“

“응…….”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어디 편찮으세요?"

"두통이 좀.“

치료계 센티넬은 최소 간호학 이상의 수료가 보편적이다. 샬럿은 두통약을 꺼내 물과 함께 내밀었고 오르피어스는 빈속에 먹어도 되느냐 묻지 않고 꿀꺽 받아 삼켰다.

"크롤 소잠님의 일은 알고 있습니다. 좋은 분이셨지요……. 저도 처음 센티넬로 발현하였을 때 그분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조심스럽게 위로하려는 기색이 있었지만 오르피어스는 고개만 대강 끄덕이고는 안쪽의 침대로 가서 누웠다. 시시콜콜 긴 담화를 하는 것도 피곤했다. 샬럿은 두 번 말을 걸지 않고 말없이 침대 사이의 커튼을 쳐 주었다. 오르피어스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렁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었다.

눈을 뜨자 모니카의 화들짝 놀란 얼굴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소령님! 깨우려고 했던 건 아니고 오늘은 등청하셨다고 들어서 괜찮으신지 한 번 보러 왔다가,”

"몇 시야?”

어쩔 줄 모르며 길게 이어지려는 그녀의 변명을 짧게 끊었다.

“11시 조금 넘었습니다.”

눈을 붙이긴 하였으나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약이 효과는 있었는지 두통은 덜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현기증으로 시야가 뒤집어져서 휘청거리는 몸을 모니카가 눈치 빠르게 부축해 주었다. 오르피어스는 바닥에 발을 딛고 길게 숨을 토했다.

"줘"

“네?”

“결재할 게 있어서 찾아온 게 아니야?”

“아닙니다.”

모니카가 정색하며 부정했다.

"소령님이 며칠간 못 나오시는 걸 행정과에서 알고 있기도 하고, 급한 일은 제가 대신 서명 위조하고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소령님……. 오늘도 일찍 퇴청하셔서 쉬시는 게 어떠신가요? 얼굴빛이 말이 아니에요.“

오르피어스는 무심코 뺨을 문질렀다. 면도를 할 정신도 기력도 없었던지라 따끔거리며 돋아난 수염이 손바닥에 쓸렸다.

"내 얼굴이 어떻길래 보는 사람마다 얼굴 타령이야?”

“페인 중령님과 밤마다 술파티를 하실 때보다 더 안 좋으세요.”

정말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됐어……. 집에서 쉰다고 상황이 호전되는 것도 아니고…….”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녀의 염려를 떨쳐 낸 오르피어스는 커튼을 걷고 나갔다. 그리고 서명을 위조하느니 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않은 척하며 선반의 약통을 정리하는 살렷에게 말했다.

"전화 한 통만 쓸게.”

못내 걱정하는 모니카를 돌아가라며 반강제로 내보내고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는 곧 총독부의 보좌관실로 연결되었다.

"유안은?”

「휴게실에서 쉬고 계십니다. 일 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자고 있으면 됐어."

「아닙니다. 혹 벨포드 소령님께 연락이 오면 깨워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화기가 책상에 놓이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 유안이 전화를 받았다. 답하는 목소리는 완전히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어렴풋하게 흐렸다. 할 말도 많고 묻고 싶은 말도 많은데 샬럿도 있고 유안의 주변에도 사람이 있을 게 분명한 지라 오르피어스는 막상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많이 바빠?"

「바쁘긴 한데 한 시간 정도 식사할 짬은 낼 수 있어요. 같이 식사하실래요? 보나마나 며칠 내내 끼니도 제대로 안 드셨을 거 아니에요」

“……어제 저녁은 지크하르트가 챙겨 줘서 먹었어.”

「그러셨군요」

전파를 타고 넘어드는 목소리에는 어딘가 안도하는 기색마저 있었다.

「드시고 싶은 건 있으신가요?」

"입맛이 없어서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럼 예약은 제가 알아서 해 놓을게요. 이따 뵙겠습니다」

피차 눈이 많아 간략한 용건만 나눈 통화는 일찍 끝났다. 뭘 먹든 쓰러지지 않으려면 식사는 억지로라도 꼭 하라는 샬럿의 조언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귀로 흘리며 점심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를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갈 곳은 총독부로 정해져 있었다. 비단 업무량 때문만이 아니어도 유안은 지난 며칠 동안 총독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옆문 근처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자 오래 지나지 않아 유안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는 과장되게 놀라는 시늉을 하며 보자마자 안색 얘기부터 하였다.

“어이구, 얼굴이 이게 뭡니까. 아주 반쪽이 되셨잖아요. 툭 건드리면 픽 하고 그대로 쓰러지실 것 같은데요. 아, 레스토랑까지는 제가 운전할 게요. 배 많이 고프시죠?”

유안은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잡았고 차는 곧 출발하였다. 조수석에 자리를 바꿔 앉은 오르피어스는 머뭇거리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내가 집에만 있느라 너한테 신경을 못 썼어.”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뉴스를 혹시 먼저 받으셨어요?"

"무슨 말이야?”

"세상에나. 도련님이 사과를 하시다니 너무 놀라서 기절하겠네요. 저 지금도 휴게실에서 자고 있는 건 아니죠?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게 한 번만 꼬집어 주시겠어요?"

넉살 좋게 이죽거리는 유안의 허벅지를 오르피어스는 정말 꼬집어주었고 차는 하마터면 옆으로 꺾일 뻔하였다.

“살살 꼬집으셔야죠!”

"불로 지져주려다가 봐준 거야.”

유안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도련님 불은 눈물 나도록 아프니까 그것만큼은 참아주십쇼. 뭐, 친구 놈 차를 같이 타고 왔다 갔다 한 적도 있긴 했지만 거의 총독부에서 먹고 잤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마누라를 헤임 밖으로 여행가도록 한 건데 다행이었죠. 도련님 때문이 아니어도 업무가 산적해서 퇴근을 못한 거니까 사과는 안 하셔도 돼요. 제 부하들도 며칠 내내 줄줄이 야근에 철야를 밥 먹듯이 하고 있는 중인 걸요. 제가 밥 먹으러 밖에 나간다고 하니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보질 뭡니까. 돌아가는 길에 간식이라도 사들고 가줘야겠어요. 하하하.”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흘려주었기에 오르피어스도 살짝 안심하며 마음을 놓았다. 유안은 항상 그에게 너그러웠다.

"여행에서는 언제 돌아올 예정이래?”

“오랜만에 친정 부모님과 여행 중이라 좋긴 한데 걱정이 많은가 봐요. 하지만 안전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불러들이기가 영 불안해서요.”

“구실을 붙여서 본가에서 손님으로 지내게 하면 어때? 리모델링이라든가…….”

"그 방법은 4년 전에 써먹었어요. 그때는 애들도 같이 저택에서 지내게 되어서 록사나 님이 제일 신나셨고 보니 지난주에 둘째한테 편지가 왔는데 작문 대회에서 상을 받았대요.“

자식 자랑으로 시작된 시답잖은 한담을 잇다 보니 차는 번화가로 접어들었다. 테러가 발발한 지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지라 행인이 부쩍 줄어든 거리를 이리저리 꺾은 유안은 골목 언저리에 주차하였다.

"그랑데 하우스라는 레스토랑인데 오신 적 있으세요?”

"예전에 데이트할 때 들렀던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송아지 허벅지살 스테이크와 아이스크림 디저트가 죽여주는 곳이니까 이번에는 잊지 마세요.”

평소라면 북적거렸을 레스토랑에도 손님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유안이 전화하며 예약한 대로 홀이 아닌 방으로 안내받았다. 방음이 좋다. 축음기에서 돌아가는 음악 소리가 문을 닫음과 동시에 멈추었다. 자리에 앉자 곧 요리들이 하나씩 차례대로 테이블에 옮겨졌다.

입맛이 전혀 살아나지 않아 께적거리긴 하였으나 느리게나마 씹어서 위장 안으로 넣으려 애썼다. 아침까지 굶었으니 점심은 꼭 먹어야 했다. 식사를 하고 기운이 나야 일련의 사건의 배후를 찾는 데 일말이라도 조력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도록 끼니를 걸러 굶어 죽을 셈이냐는 지크하르트의 노성은 듣고 싶지 않았다.

식사를 거의 못한 지라 위장이 줄었는지 포만감은 금방 느꼈으나 마지막 디저트까지 입에 넣고, 입 속에서 부드럽게 녹은 아이스크림과 과육을 혀로 밀어 삼켰다.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속도에 맞추어서 천천히 식사를 끝마친 유안이 싱긋 웃었다.

"어떤 게 궁금하세요?”

“전부 다.”

"큰 진척은 없어요.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언론에는 공표되지 않은 부분이지만, 임시 가이드를 목표로 하였다는 건 짐작하고 있으시죠?"

"……응. 레베카가 암살당할 이유는 그것뿐이니까.”

"굳이 소장님의 댁에서 피격했을 정도니까요. 여튼 소장님 댁을 포함하여 총 5곳에서 테러가 발생되었는데 사망한 임시 가이드는 4명입니다."

"한 명은 목숨을 건졌어?”

“아니요. 애초에 피격받지도 않았어요. 해당 안가에서 사망한 사람은 다른 사건으로 보호되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르피어스는 유안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뜻이야?"

"저희 쪽 안가는 일반적으로 2년을 주기로 변경됩니다. 생존한 임시 가이드는 두 달 전에 변경된 안가에 피신하였고요,"

"……정보가 늦어도 두 달 전에는 새어나갔구나.”

"확증된 사실이 그것 하나뿐이지만요.”

유안이 반 정도 남은 오르피어스의 접시와는 다르게 깨끗이 비운 자신의 접시를 스푼으로 쿡쿡 찔렀다.

"누님 사건과 비슷해요. 소장님이 피격당하셨을 때 겨우 목숨을 건진 경호원의 증언에 따르면 군사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가일 확률은 거의 100%인데 사용한 폭탄은 사제 폭탄으로 정교함이 아니라 화력에만 치중한 물건입니다.

최초로 페어가 없는 가이드가 하룻밤만에 4명이 암살당하였던 때처럼 이번 또한 하루만에 5명 ― 이라고 일단 그들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 이 살해당한 수법으로 보아 최소한 인원수는 10명 이상으로 추정되고요. 대담무쌍하고 잔혹하죠."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공화국?”

공화국이 배후에 있고, 이가 밝혀진다면 훌륭한 개전의 이유가 된다. 전쟁터를 떠올린 오르피어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추측이지만 공화국은 아닐 겁니다. 그쪽도 전쟁 뒷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데다가 수법이 너무 잔인해요. 고관 몇 명이 암살된 게 아니라 민간인이 백 명 이상 사상자가 났습니다. 저회 쪽의 선전으로 얼마든지 과장되고 포장되기 쉬운 사안인데다가 국제 여론도 좋지 않아요.”

"하긴……. 센티넬 몇 명 죽여서 공화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없구."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근거를 말씀해 주셨네요. 노리는 게 센티넬임이 기정사실화된 이상 내부의 소행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중입니다. 뮈르달일지 입시니아일지 중앙일지 혹은, 글래스팅일지 어디라는 확답은 없지만요."

“복잡하네…….”

"복잡하죠. 정보부는 거의 전쟁이 났을 겁니다. 분 단위로 첩보가 쌓이고 있을 지도요.“

유안은 긴장을 풀라는 듯 웃었지만 오르피어스는 찌푸린 얼굴을 풀지 못했다. 자신이야 명령을 받으면 받는 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몸이라 책략이니 전략이니 첩보전이니 하는 쪽으로는 관심도 둔 적이 없지만 그도 군 경력이 있으니만큼 현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합동군사훈련이라는 큰 행사까지 당면하였다. 최악의 예상이지만, 국왕 부처에게 테러가 없으리란 보장은 하지 못한다.

웨이터가 문을 노크했다. 국왕이 확실히 방문하는 게 맞느냐는 질문을 하려던 오르피어스는 입술을 다물었다.

"페인 님. 실례합니다만 동석하신 분이 혹시 벨포드 소령님이십니까?"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벨포드 소령님께 프런트로 전화가 왔습니다.“

오르피어스는 반사적으로 유안을 돌아보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 가게에 오는 건 사무실에 말해 두었습니다. 급히 연락받아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요.”

"알았어. 전화 받고 올게.”

"같이 나가죠. 식사도 다 했고 남은 이야기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해도 될 것 같고요.“

유안이 계산하는 사이에 전화를 받았다. 혹 모니카가 샬럿과 보좌관실을 거쳐 연락하였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했지만 급박하게 외치는 목소리는 남자였다.

「27연대의 닉 마텐 중위입니다. 외부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급박한 사태로 인하여 연락을 드리게 된 점 죄송합니다!」

"뭔데.“

어떤 큰일이 있어도 레베카의 죽음보다 지금 그의 심장을 두드리는 사건은 없을 것이기에 트릿하게 대꾸했던 오르피어스의 낯은 이어지는 외침에 급속도로 핏기가 사라졌다.

「카시야스 대령님이 훈련 기지에서 유탄된 포탄의 폭발에 휩쓸려 중상을 입으셨습니다! 기지의 센티넬이 현재 치료 중입니다만 군병원으로 이송되기 전에 먼저 소령님이??」

오르피어스가 들을 수 있던 말은 거기까지였다. 수화기를 내팽개치고 붙잡는 유안의 팔을 뿌리치며 무작정 달려 나가다 어깨를 꽉 잡혔고, 냉정한 그의 다그침에 간신히 이성의 끄트머리나마 붙잡았다.

“도련님! 진정하세요! 이대로 운전하시면 사고 납니다.”

“하지만!! 지크하르트가!!!”

"일단은요, 침착하게 숨을 들이켜시고요, 네, 이제 내뱉으세요.“

다독거리는 소리에 맞춰 몇 번 심호흡하여 숨결은 한결 가라앉았지만 부여 잡힌 어깨는 여전히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전화 내용이 뭐였죠?"

“지크하르트가, 포탄에…… 사고가 났대…….” 

"누구 전화하였는지 관등 성명은 확인하셨고요?”

“27연대 닉 마텐 중위…….”

“카시야스 대령님의 부하 중에 그런 사람이 있어요?”

“으, 응. 있어……. 있었던 것 같아. 안경 쓰고…….”

“제가 확인 전화를 해 보겠습니다.”

유안이 가게 안으로 돌아가 양해를 구하고 전화하는 동안 오르피어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5분도 채 되지 않을 통화 시간이 억겁보다 무거웠다. 차임벨이 맑게 울리고 유안이 돌아 나왔다.

"통화가 안 되는군요."

“……그럼 어떻게 해?”

머릿속이 갈팡질팡 혼란했다. 그의 본능은 당장에라도 지크하르트에게 달려가라고 외치고 있지만 이성은 임무를 상기시켰다. 그는, 유안을 지켜야만 한다. 머리가 또 지끈거리기 시작하였다.

유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등을 밀었다.

"대령님께 가세요. 정말 큰 부상을 당하셨다면 도련님이 반드시 있으셔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넌 어쩌고……!”

"괜찮습니다. 여기에서 총독부까지는 멀지도 않고 전차로 가면 금방이에요. 대낮이기도 하고, 이제까지도 별 일 없었으니 염려 마세요. 꼭 페어로서의 책무나 본령이 아니어도 카시야스 대령님은 도련님께 둘도 없는 중요한 분이시잖아요.”

"……미안.“

더 사양하지 못한 오르피어스는 입술을 꼭 깨물고는 차로 달려갔다. 급발진한 차의 행로에 휩쓸릴 뻔한 행인의 욕설을 배경으로 쏜살같이 도로 위를 날아갔다. 저러다가 정작 본인이 사고가 나는 건 아니겠지. 유안은 입가에 올렸던 미소를 걱정스럽게 되돌리며 그를 배웅하였다.

이동 수단이 없어진데다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총독부로 귀환하여야하니 사무실에 간식은 들고 가지 못할 것 같았다. 내일을 기약하고 종종걸음으로 바삐 걷던 유안이 돌연 발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아.”

불길하리만큼 붉은 액체가 옆구리로부터 군복 상의를 침식하였다. 불로 지지는 것만 같은 뜨거운 아픔은 촌각 후에 감지하였다. 등 뒤의 남자가 옆구리로부터 손을 떼며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그의 입을 막으며 도로 옆에 주차된 차로 끌고 갔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출발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일 분도 채 되지 않았다.

콰앙一―! 방심하던 중에 포탄이 연이어 터지는 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어 지크하르트는 무심코 귀를 꽉 막으며 어깨를 경직시켰다. 망원경으로 훈련장을 주시하던 더글라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새 포탄이 낯설게 된 건가?”

“확실히 몸도 안 풀리고 게으르게 된 건 맞긴 합니다.”

지크하르트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로 예행 훈련은 끝난다. 종전 후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은 글래스팅 군의 사기는 높았고 이번 합동군사훈련도 문제없이 진행될 것 같았다.

단상 아래에 요란한 소동이 일어난 건 그 무렵이었다. 영현식 때 빌렸던 예복은 세탁이 끝나는 대로 즉시 돌려드리겠다는 말을 하던 지크하르트는 소란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군용이 아닌 일반 차량이 병사들의 제재를 무시하며 난폭하게 단상으로 질주하였다. 훈련장을 방비하는 철책이 없었다면 훈련장 안을 가로지르며 직행하고도 남았을 법한 거칠고 조급한 운전이었다. 미간이 슬몃 모였다. 오르피어스와 같은 차종인데, 설마.

설마는 정확했다.

“지크하르트!!”

차문이 벌컥 열리고 튀어나온 범인이 오르피어스라 제재하기 위해 달려왔던 병사들이 멈칫거리는 걸 뿌리친 이 소동의 장본인이 단번에 단상 위로 뛰어올라왔다. 그리고 시선이 일점으로 모여 있는 좌중의 주시하에 지크하르트에게 몸을 내던지다시피 끌어안았다. 매우 당황하였고 이유도 몰랐으나 오르피어스가 대경하였음은 확실하였기에 일단은 등을 다독거려주었다. "하하, 것 참. 누가 신혼 아니랄까봐 뜨겁구만.”라는 더글라스의 농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괜찮아? 안 다쳤어? 부상은? 아프지는 않고? 응?”

우다다다 두서없이 쏟아지는 질문과 걱정과 염려의 홍수 속에서 지크하르트는 애매하게 웃었다. 

"방금 너 때문에 조금 놀란 걸 제외하면 괜찮다. 다치지도 않았고.”

“전화가 와서, 네가 포탄에 맞아서, 중상이라고…….” 

"누가 그런 재수 없는 농담을 다 하냐.“

오르피어스가 헐떡거리며 중얼거린 닉 마텐 중위라는 말에 지크하르트는 닉이 어딘가에 있을 훈련장의 귀퉁이를 곁눈질했다. 아침부터 흙먼지 뒤집어쓰고 열심히 구르고 있는 놈이 전화할 틈이 어디 있다고?

“장난 전화 같은데. 중위는 훈련장을 떠난 적이 없어.”

“장난 전화……?”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얼굴로 중얼거리던 오르피어스의 낯이 하얗게 되었다.

"유, 유안……! 지크하르트! 여기 전화 어디 있어?!“

오르피어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인망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찾아봐도 없는 그이기에 고약한 장난 전화를 받았을 뿐이라고 여긴 지크하르트의 얼굴도 굳었다. 도청의 우려는 있어도 훈련장에서는 사무실까지 찾아가는 것보다 전화박스가 더 가깝다.

"따라와.“

주변에 양해를 구한 그는 오르피어스의 손을 잡고 뛰어갔다. 훈련장 안쪽의 건물은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 거의 비어 있었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쥐고 있던 오르피어스는 총독부 보좌관실로 연결이 되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

"유안은 도착했어?!"

「벨포드 소령님이십니까? 페인 중령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소령님과 함께 계신 것이 아닌……」

무어라 뒷말이 이어졌지만 손에서 툭 떨어져 바닥에 대롱대롱 늘어진 수화기에서 울리는 소리는 목소리가 아닌 소음에 가까운 형태가 되어 전화박스 안에 퍼졌다. 지크하르트는 얼른 허리를 안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오르피어스를 부축했다.

“어, 어떡하지……. 이미 도착했을 시간인데 유안이…… 유안이, 나 때문에…… 내가 없어서…….”

“침착해 봐. 페인 중령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거냐?”

“납치…… 납치되었을 거야, 아마도…….”

총독의 최측근이기는 하나 이등보좌관에 불과한 유안이 납치되었으리란 우려는 납득되지 않았으나, 일단은 오르피어스를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정보를 빼내려고 납치된 거라면 어느 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일단은," 

“없어! 시간 없어! 형이, 안 돼. 한참 제대로 못 만났을 텐데!”

“음? 형? 총독 각하? 그야 보좌관이 납치되었다면 심려가 크시겠지만.”

영문을 몰라 하는 그에게 오르피어스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니야! 유안이 형의 진짜 가이드란 말이야……!!”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유안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였다. 눈가리개로 시야가 봉쇄되었고, 손이 등 뒤에 결박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묶여 있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아 손목 아래쪽으로 감각이 거의 없다. 나이프에 찔렸던 부위도 응급처치가 되어 있어 당할 때 느꼈던 것만큼 큰 부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유안은 납치범들이 굳이 상처를 치료하며 살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불안감을 느꼈다.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하나뿐이었다. 문이나 벽을 사이에 둔 듯 낮게 뭉개진 음성만이 간헐적으로 흘러들었다. 유안은 한껏 숨을 죽이고 음성에 매달렸다. 띄엄띄엄 잘게 끊어지는 음성의 조각들을 필사적으로 그러모아 추측을 거듭하였다. 어떠한 대화를 나누는지는 명확한 파악이 불가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오시안 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입시니아는 아니었다. 군도로 형성되어 거반이 토착민인 입시니아의 방언과 억양은 외국어라 착각되리만큼 독특하다. 남은 건 뮈르달, 중앙, 글래스팅. 어느 쪽일까.

뚜벅뚜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유안은 얼른 긴장을 풀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의식을 잃은 척하였다. 오래된 경첩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어둠으로 덮인 눈가리개 위로 갈라진 빛살이 쏟아지는 듯하다가, 이내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어둠으로 되삼켰다.

“슬슬 깨어나실 때가 되었는데 일어나십시오.”

목소리의 주인은 젊은 남자였고, 침착하였으며, 냉정하였다. 냉정한 사람이라는 점이 제일 걸렸다. 그는 멍청하지만 정석적인 물음을 하였다.

"여기는 어디고 당신은 누굽니까?"

"대답은 보류하겠습니다. 물을 가져왔으니 드십시오.“

남자가 쓰러져 옆으로 누운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부축해 주었다. 그의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납치범들이 독이나 기타 약물을 음료에 섞을 이유는 없기에 一 차라리 독이라도 탔으면 싶었지만 一 유안은 의심 없이 물을 받아마셨다. 썩 목이 마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기갈이 들린 것처럼 그는 정신없이 물을 받아 마시며 한 통을 비웠다.

"식사는 준비되는 대로 가져올 테니 불편하시더라도 참아주십시오.“

“뭐든 제가 아는 대로 다 불 테니까 살려만 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고문을 견디는 훈련 따위는 받지도 못했고 보시다시피 책상머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텔리라 몸이 상하는 게 많이 무서워요.”

유안은 퍽 비굴하게 보이리만큼 남자에게 애걸하였다. 실제로 좀스럽다고 경멸 받아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 혼자만의 생명이 아니었고 남자의 구두를 핥아서라도 무사히 생존하여 아이릭에게 돌아가야 하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근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가 삐걱거렸다. 접는 의자라도 가져와서 앉은 모양이다. 유안에게는 요행이었다. 말 몇 마디로 해방될 수 있을 거란 멍청한 낙관은 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정보가 필요했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인지,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걱정은 마십시오. 죽이지는 않습니다, 유안 페인 중령."

“그럼 살려주시는 건가요?”

유안은 반색하는 척하며 되받았다. 남자는 웃음기 하나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대화를 계속하였다.

"중령님이 가장 잘 아시겠지만 아무리 늦어도 이 주일 후에는 돌아가실 수 있으리라 저희는 추측합니다.”

"이 주일이요?"

“네. 물론 귀하의 센티넬이 폭주하여 자멸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보내드리겠습니다.”

……최악이었다. 목숨을 붙여 놓고 있어 혹시나 하면서도 부정하고 있었지만 놈들은 그가 아이릭의 가이드임을 알고 납치한 것이다. 센티넬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은 가이드의 사망이 아닌 실종. 과하리만큼 꿀꺽꿀꺽 물을 마시어 목구멍 안쪽을 적셨지만 금세 긴장감이 까맣게 태웠다. 허나 순순히 수긍할 수는 없다.

"센티넬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가이드는 제가 아니라 제 누님이신데요?”

"총독의 가이드로 가장한 나오미 페인에게 모든 주의를 돌리고 본인은 무관한 양 시야의 밖에서 은신하는 게 아주 능숙하시더군요. 저희가 희생을 각오하고 나오미 페인을 암살, 또는 납치하려는 시늉을 하여도 전혀 방심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는 가족은 죄 헤임의 본가에 없고, 총독부와 벨포드 저 밖으로는 단 1초를 나오더라도 오르피어스 벨포드나 베른하르트 자이넷이 떨어지질 않는 걸 보고 솔직히 감탄까지 했습니다. 단일 전투력으로는 최상위인 원소계 센티넬을 두 명이나 호위로 거느리다니 이만한 호사가 어디 있습니까?“

“……오르피어스 님은 당신도 조사를 하셨겠지만 유소하셨을 때부터 저와 왕래가 잦으셨고, 베른하르트는 제 오랜 친굽니다.”

“네에, 끝까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억지로 정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 임무는 중령님을 논파하거나 가이드라는 증거를 찾는 게 아니니까요. 총독의 폭주와 사망이 확인되면 보내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있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충고를 해 드리자면 팔다리 하나 쯤 없어도 생존에는 지장이 없으니 섣부른 시도는 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희의 목적은 귀하의 안전한 보호가 아니라 '생명만' 유지하면 완수되니까요.“

섬뜩한 발언을 무심하게 내지른 남자가 들어왔을 때와 같은 보폭으로 뚜벅뚜벅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그가 용병은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얄밉도록 똑 부러지고 정확한 발음과 억양의 상류층어를 구사하였다. 또한 한 가지 착각하였던 점이 있다. 이주일이 아니라 일주일도 안 남았다. 가이드가 실종된 센티넬의 불안정한 정서를 고려하면 당장 내일 발작하여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시간이 없다.

경호 임무를 이행하지 못하였다고 문책 받을 오르피어스도 걱정이었다. 

‘도련님. 자책하시면 안 됩니다. 제발…….’

유안은 이를 악물었다.

"네가 무슨 염치로 얼굴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나!!"

“자, 잘못했…….”

불같은 노성이 오르피어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목이 콱 졸리며 숨이 막혔지만 오르피어스는 반항할 엄두도 못 내고 눈만 꾹 감았다. 아이릭이 평정을 잃고 언성을 높이는 건 처음 겪었다. 사태의 위중함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한, 날을 세웠고 몸이 덜덜 떨렸다. 이대로 아이릭의 손에 죽임당하여도 마땅하다. 공기가 그의 머리 위에서 응축되었다.

"아이릭 님. 유안은 살아 있습니다. 반드시 살아 있습니다! 지금 저희가 해야 할 일은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게 아니라 유안의 구출입니다! 일 분, 일 초도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나오미가 살기등등한 아이릭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외쳤다. "크……!!” 아이릭이 굵은 침음성을 냈다. 이가 빠드득 맞물리는 섬뜩한 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하였다. 가쁜 숨소리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고, 그는 오르피어스를 내던졌다. 동시에 방금까지 오르피어스가 있던 자리가 쿵 패이며 분진이 뿌옇게 일었다. 오르피어스는 기침하며 몸을 웅크렸다.

"……아서는 어디지?"

"2회의실에서 자이넷 중령님과 대기 중입니다.“

아이릭이 목을 감싸 안고 쿨럭거리는 오르피어스에게 외쳤다.

"당장 회의실로 와라!!”

총독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지크하르트는 문이 열리고 아이릭이 나오자 얼른 기대었던 등을 떼며 경례하였다. 아이릭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계단으로 내려갔다. 오르피어스가 따라 나오지 않아 불안한 기색으로 안을 둘러본 지크하르트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야. 괜찮냐?”

목에 시뻘건 손자국을 매달고 숨을 고르던 오르피어스가 헐떡이며 그에게 기대었다. 이마와 뺨이 진땀으로 흥건했다. 지크하르트는 그를 끌어안고 다독거렸다. 유안이 납치되었음을 확인하였을 때부터 이보다 더 심각해지지는 않으리라 여겼던 오르피어스의 정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물에 아이를 내놓은 것 마냥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아이릭을 탓할 수도 없었다. 1, 2년도 아니고 물경 20년 이상 교감하였던 가이드다. 오르피어스처럼 극단적으로 가이드가 단 기간에 갈려 나가지 않은 이상, 가이드가 실종된 센티넬의 정신 상태는 목전에서 새끼들이 참살당한 맹수보다 흉맹하다.

문득 피비린내가 비감을 자극하였다. 혹시 다치기라도 하였나 싶어 안고 있던 그의 몸을 떼고 시선을 내린 지크하르트는 기겁하였다. 그는 다급히 오르피어스의 손목을 잡아 낚아채었다. 엄지가 온통 피투성이었다. 크게 산개한 채 부들거리는 눈동자 아래로 손톱이 아니라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던 오르피어스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명령을 완수하지 못했어……. 내 임무였는데, 유안, 어떡하지……. 형의 명령을 내가…….”

아이릭의 ‘명령’이 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새삼 깨닫자, 망연해졌다.

「아버지는 잘하시는 거 하나도 없지만 세뇌만큼은 일품이지. 세뇌 하나로 천대 받던 사생아가 쟁쟁한 형과 누이를 몰살하고 종주권을 획득하였으니. 친자식이라도 일말의 거리낌 없이 살해하고 생살을 씹어 먹을 수 있을걸? 내가 당할 뻔하였고, 또한 오르피어스가 당한 건 바로 그거야」

힐라리아의 설명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던 광경을 앞에 둔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의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그의 손까지 적시자 퍼뜩 고개를 올렸다. 초점이 풀린 오르피어스의 시선은 그를 담지 못했다.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를 부둥켜안고 입을 맞췄다. 입술에서 피맛이 짙게 풍겼다. 들썩이던 어깨가 차츰 가라않았다. 지크하르트는 귓가에 속삭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다쳤다는 전갈을 받았으니 누구라도 당연히 나에게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페인 중령을 무사히 구출하면 각하의 '명령'을 수행한 것이 되지 않겠냐. 페인 중령의 시체가 발견되기 전까지 넌 명령을 어긴 게 아냐.”

"으응…….“

오르피어스를 진정시킨 게 키스였는지, 속삭임이었는지 어느 쪽일지는 애매하였으나 그는 더 이상 손을 물어뜯지도 않고 불안정한 시선이나마 지크하르트를 보았다. 손수건으로 오르피어스의 상처를 묶고 땀에 젖은 이마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총독부에도 상주하는 치료계 센티넬과 의무실이 있지만 회의실로 내려오라고 하였으니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일어설 수 있겠냐?”

오르피어스가 끄덕끄덕하고는 지크하르트의 팔을 붙잡고 일어섰다.

바로 아래층의 2회의실은 20명 남짓한 사람을 수용하는 작은 규모였음에도 자리를 채운 사람은 반절도 되지 않았다. 상석의 아이릭과 옆의 나오미, 정보부 제 1과장 아서 텐서워즈 대령과 기갑여단의 중령이자 오르피어스처럼 유사시 비밀리에 유안의 호위를 수행하는 베른하르트 자이넷, 그리고 오르피어스와 지크하르트가 전부였다. 그만큼 유안이 아이릭의 가이드라는 진실이 극비임을 뜻하리라.

냉정을 회복한 듯하던 아이릭은 오르피어스의 얼굴을 보자 다시 노염으로 벌게지더니 숫제 자리를 박차 창밖으로 눈을 박았다. 움켜쥔 창틀이 삐걱거리며 비틀리는 소리가 났지만 누구도 그쪽으로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카시야스 대령도 참석 허가를 받았나?”

이전부터 지크하르트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서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나오미에게 물었다. 나오미는 새파랗게 굳어 있는 아이릭의 등을 곁눈질하고는 대답했다.

"대령님도 유안이 아이릭 님의 가이드임을 알게 되셨습니다. 또한…… 오르피어스 님의 곁에도 대령님이 꼭 있으셔야 할 것 같고요.“

어느 정도 안정되기는 하였으나 지크하르트의 팔에 바짝 붙어서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오르피어스의 모습을 보건 데 가이드가 실종된 장본인인 아이릭보다 먼저 폭주하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 그를 신임하지 않는 아서도 도리 없이 납득하였다. 어쨌거나 착석이 허용된 분위기가 되었으므로 지크하르트는 낯 정도는 익힌 베른하르트에게 눈인사하며 오르피어스와 빈자리에 않았다.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하였으니 정리할 겸 자네에게 한 번 더 설명해 주겠네.”

아서가 급히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브리핑 자료를 건넸다.

"납치된 시각이 언제니 장소가 어디니 하는 세부적인 사항은 나중에 따로 읽어 보고, 백주 대낮에 발발한 사건인 지라 목격 증언은 무난히 확보하였네.”

빠르게 첫 페이지를 훑었다. 손님이 뚝 끊겨 한산하던 차에 무료히 밖만을 보고 있던 맞은편 카페의 종업원이 납치되어 차에 실리는 남자를 목격하고는 경찰에 신고한 기록이 있었다. 그러잖아도 테러 사건으로 인하여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경찰은 빠르게 현장을 탐문하였고 오르피어스의 연락도 비슷한 시기에 총독부에 닿았다.

"검은색의 6인승 차라……. 흔한 차종은 아니군요."

"현재 경찰이 경로를 추적 중이고, 유안의 사진과 목격된 납치범 한 명의 몽타주로 탐문도 시행 중일세.“

한낮의 대로에서 자행된 납치극이니만큼 유안도 허를 찔렸을 테지만 놈들도 무리한 건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자잘한 단서가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다.

"놈들의 목적이 각하의 폭주와 이어지는 사망임이 구 할 이상인 만큼 헤임을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야. 거리가 멀어진다면 헤임 내에 있을 스파이에게 보고 받는 게 느려지고, 혹 통화나 전신으로 보고한다 하여도 누출 되거나 도청당할 우려가 있으니 기껏 멀리 나가봐야 헤임 근교일 걸세. 정보부에서 도청 인력을 동원중이지만 이쪽으로는 일단 기대를 하지 않고 있네."

헤임 내로 한정되었다고 해 봤자 헤임은 인구 400만 명의 대도시다. 예상은 하였지만 퍽 난국이었다. 오르피어스가 이를 까득 악무는 소리가 났다. 지크하르트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오미가 차분한 어투로 뒤를 이었다.

"여러분이 맡으실 일은 많지 않습니다. 24시간 총독부에서 대기하시다가 은신처가 발각되면 즉시 공격하시면 됩니다. 군사훈련을 받은 사람이 소대 규모로 파악되어 있으며, 센티넬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구출 작전을 시행하는 건 세 분께 일임합니다. 혹 유안이 인질이 된다고 하여도 자이넷 중령님과 벨포드 소령님의 능력이시라면 인질이 무의미하기도 하고요.“

"실상 동원할 수 있는 인원도 얼마 없네. 지금 행적을 쫓고 있는 인원을 포함하여 최대한으로 움직이고 있는 걸세. 각하의 가이드가 실종되었음을 공개하고 수사한다면 가용 가능한 인원을 전부 동원할 수 있겠지만 유안이 가이드라는 건 앞으로도 기밀이어야 하고, 이등보좌관의 실종에 대응할 수 있는 수사 인원은 이 정도지.“

못마땅한 기색의 베른하르트가 말을 끊었다.

"이미 유안이 가이드라는 사실이 새어 나갔는데 이 상황에서까지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까? 차라리 공개수사로 돌리십시오."

"3일 안에 실마리를 잡지 못하면 물론 그렇게 할 걸세.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야.“

“3일이나요? 너무 늦습니다. 애초에 저는 나오미 씨를 가이드로 가장하고 유안을 그림자에 감추는 걸 반대했습니다. 정석적인 호위 병력이 유안에게 있었다면??.”

논쟁을 시작한 아서와 베른하르트의 옆에서 나오미가 당부하였다.

“들으셨다시피 수사본부를 따로 설치할 상황도 안 됩니다. 경찰 측에는 일련의 테러와 관련하여 센티넬이 일원일 가능성을 언질하고 범인의 체포는 전적으로 군부에서 맡기로 논의가 끝났습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지금부터 대기해 주십시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수사 및 구출 인원이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대령님이 합류하시어 다행입니다."

“그럼 부하에게 연락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네. 유사시에 총독부 비서실로 통화하시면 대령님께 연결해드린다는 전언은 남기서도 괜찮습니다.”

얼결에 말려들어 예정에도 없던 특무를 받은 셈이긴 하였으나 그의 의향과는 무관하다 하여도 한번 맡은 임무는 소홀히 방기하지 않았다. 유안이 생환할 때까지 기약 없이 대기해야 하니 부하들에게도 임시나아 업무 분장도 지시해야 했다. 나오미에게 양해를 구한 지크하르트는 의자를 빼고 일어났다.

“……아!”

반사적으로 그의 옷소매를 꽉 잡았던 오르피어스가 뺨을 붉히며 손을 놓았다. 지크하르트는 옷소매를 슬쩍 내려다보고는 머리를 토닥였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시선을 내리깐 오르피어스가 가만히 주억거렸다. 지크하르트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팔에 얼굴을 묻으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의지하기 싫은데, 자꾸만 기대게 된다. 이것이 자신의 가이드라는 필연적인 이유 때문인지 오랜 세월 가슴에만 품고 있던 감정을 본인에게도 알려 몰래 바라보기만 하였던 고착 상황이 깨진 이유에서 기인하였는지, 스스로의 안에서 피어난 감정임에도 자기 자신이 가장 모호하여 혼란하였다.

지크하르트가 좋았다. 여전히 좋았다. 은밀히 어둠에 잠겨 있던 죄책감이 빛살 아래로 끄집어내져 썩은 속살을 까발려지고, 명확한 거절의 대답을 받았음에도, 그가 좋았다. 확실한 건 그뿐이었다.

탕탕탕! 다급하게 울리는 노크 소리가 과거의 일까지 들먹이며 길게 이어지던 아서와 베른하르트의 논쟁을 끊었다. 들어온 사람은 정보부의 장교였다. 아서가 얼굴을 굳혔다.

"보고 드립니다! 각하의 영애이신 록사나 양이 유괴되었습니다. 범인의 요구 사항은 각하의 하야 및 헤임의 무장 해제입니다!”

여직 노염을 삭이고 있던 아이릭의 안색이 표변하였다.

"……지크하르트! 지크하르트는 어디에 있나!”

"통화 중입니다, 각하! 데려오겠습니다!"

"빨리!!”

딸의 유괴 소식을 들은 아이릭의 입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온 말이나 이를 받으며 전혀 의아해하지 않는 나오미의 태도에 영문을 알지 못한 건 아서와 베른하르트였다. 하지만 시급한 건 의문의 해결이 아니었다. 일단 정보부로 돌아가서 사태를 파악하겠다는 요지의 말을 하려던 아서는 매섭게 긴장하며 입을 꽉 다물었다. 베른하르트가 그를 보호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공기가 불온하게 꿈틀거린다. 오르피어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록사나가……? 유괴됐어?”

아이릭이 이를 사리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오르피어스! 진정해라. 유괴된 것이지 죽은 게 아니야. 나에게 요구 조건이 있으니만큼 록사나는 안전하게 보호 될 거다.”

그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울 동요로 가슴이 들끓고 있음에도 아이릭은 침착한 어조로 오르피어스를 다독거렸지만 그는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기만 하였다. 그의 귀에 아이릭의 목소리는 들리지 못했다.

“록사나……. 록사나가…….”

회의실에 남은 사람 중 유일한 일반인인 아서가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낮게 신음하였다. 그는 이 감각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센티넬 폭주의 전조다.

오르피어스의 몸에서 불길이 화륵 치솟은 것과 아이릭에 의하여 우두둑 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팔이 기이한 방향으로 비틀린 건 거의 동시였다. 팔이 부러지는 고통이 이성을 찰나나마 붙잡았는지 일순간에 천장까지 치솟았던 불길이 사그라졌지만 위협적으로 그의 발치에서 날름거렸다.

비서실로 올라가서 전화하던 지크하르트가 나오미에게 이끌려 회의실 안으로 달려왔다. 나오미로부터 폭주할 것 이라는 얘기를 들었던지라 크게 놀라지 않고 우선 그를 당겨 안았다. 힘없이 끌려오는 오르피어스의 숨소리가 몹시 거칠었다. 아이릭이 이마를 쓸며 침착하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마. 요구 조건을 말하였으니 당장 록사나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고, 유안과는 다르게 공개수사가 가능하다. 헤임에서 내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으니 록사나는 무사히 돌아온다. 내게 올라오는 정보는 너에게도 모두 공유하고 오픈할 테니 염려하지 마라.”

“……으, 응…….”

"내 말 뜻을 이해했나?”

“응……. 록사나는 아직 안전하고…… 정보를 숨기지, 않는다고…….” 

“좋아.”

아이릭의 눈짓에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를 안은 채 목례하고는 그를 데리고 회의실을 벗어났다. 나오미가 진땀을 닦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교악한 시간 끌기로군요…….”

"아버지의 재림이지!”

오르피어스를 진정시키느라 억지로 다잡고 있던 인내심이 다하였는지 아이릭이 주먹으로 벽을 쾅 쳤다. “……혼자 있으마.” 살갗이 찢어져 핏방울이 배어났음에도 붉으락푸르락하던 그는 거친 걸음으로 문을 넘었다. 이제야 폭주 직전의 두 센티넬을 오고가던 중압감에서 해방된 느낌이라 아서는 탈력한 숨을 뱉으며 몸을 기대었다. 베른하르트가 나오미를 보았다.

“록사나 양의 유괴 건으로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신 겁니까?”

"일전에…… 선대 벨포드 공, 체스터 님께서 비슷한 일을 행하셨던 바가 있습니다. 현재는 작고하셨지만 선왕의 시기에 1왕자이셨던 레오 크리스티앙 전하의 최측근 심복인 센티넬 테일러 경을 기억하십니까?”

"가이드의 부재로 폭주하여 사망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잠깐! 그때 테일러의 가이드를 납치한 측이 글래스팅의 요원인데, 설마?!”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는지 아서가 번연히 외웠다. 나오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맞습니다. 테일러 경의 두 아들도 같은 시기에 유괴되었죠. 가이드이냐 자식이냐 양자택일을 하라고 체스터 님은,강요하셨고, 테일러 경은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한 채 자멸하였습니다.”

"……가이드와 아이들은 무사 귀환하였습니까?"

"양쪽 모두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두 아이는 유괴되었을 당시에 살해되었고, 가이드는 테일러 경의 죽음이 확인되자마자 살해당했죠.”

극도로 감정을 절제하여 베른하르트에게 답한 나오미가, 나직이 첨언하였다.

"체스터 님이 행하시었으니까요.”

"……최악 이상의 최악이군.”

아서의 한탄에 동의하는 침묵만이 회의실을 점령하였다.

의무실에서 부러진 팔과 살점이 뜯긴 손가락을 센티넬에게 치료 받고 내일까지는 고정해 두는 게 좋다며 부목까지 덧대어 외견상의 부상은 없었으나, 육체가 아닌 정신의 고통은 변함없이 오르피어스를 닦아세우고 있었다. 빌어먹을 만큼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레베카가 폭심에서 중상을 입었던 밤과 똑같은 장면이 배경만을 바꾼 채 반복되고 있었다. 지크하르트는 멀찍이 떨어진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며 욕설을 담배 연기에 실어 창밖으로 날려 보냈다.

대기 기간 중에 배정받은 휴게실에는 그와 오르피어스, 단 둘뿐이었다. 본래 이 휴게실을 사용하던 부서의 직원들이 어디를 쓰고 있는지, 유안과 록사나의 수색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가이드와 자식을 동시에 잃은 아이릭이 과연 평정을 유지하고 있을지, 산적한 문제는 지극히 사소한 것부터 거시적인 범주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방대 하였으나 지크하르트의 머릿속을 가득 매우고 있는 문제는 하나뿐이었다. ……오르피어스.

오르피어스.

오르피어스.

지난 10년 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불렀던 이름을 곱씹다, 휴게실의 구석 자리에 초점이 없는 눈으로 앉은 오르피어스를 보다, 또 한 번 그의 이름을 곱씹다, 담배 연기를 뿜었다. 담배 한 개비는 의식도 못 하는 짧은 시간에 재가 되어 재떨이에 떨어졌다.

두 개비째의 담배를 꺼내려다, 다리 사이에 늘어진 오르피어스의 창백한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보고 도로 품에 담뱃갑을 넣었다.

"……오르피어스.“

어미의 부름에 이끌리는 새끼처럼 본능적으로 올려다보는 오르피어스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끌어안았다. 조곤조곤 위로해 주는 것처럼 등을 쓰다듬고 볼을 어루만지며, 이마와, 뺨과, 콧잔등에 키스했다. 위태로이 쿵쿵거리던 심장의 박동이 지크하르트의 심장 박동과 비슷한 울림으로 가라앉았다.

“어째서 네게 연거푸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모르겠다.”

막 페어가 되었을 때처럼, 또는 전후 그냥저냥 평화로웠던 6개월처럼, 또는 나는 살고 적은 죽인다는 단순한 논리가 지배하는 전장처럼, 과거의 그 어느 때라도 오르피어스와 페어가 되었다면 서로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직면하게 되었을지라도 생존을 요구하고 육체를 제공한다는 간단하고 명료한 논리를 문제없이 이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르피어스가 홀로 버티기 힘든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하며 그를 휘돌았다. 마치 세상 자체가 그에게 악의를 가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크하르트가 그런 오르피어스를 방치하는 건 불가능하였다.

오르피어스가 안정하며 긴 숨을 내쉬자 지크하르트는 옆자리에 앉아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렸던 오르피어스의 손이 머뭇거리며 그의 다리 위를 감돌았다. 그 스스로도 말하였던, 부모님과 동생을 죽인 살인자의 손. 원수의 손.

그 손은 화염 속에서 흐느끼며 고통스레 머리를 감싸 안았던 소년의 것처럼 창백했다.

"……나도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고.“

지크하르트는 무거운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손 안에 잡힌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록사나가…….”하고 말문을 떼려던 오르피어스가 건조한 목을 쿨럭거리며 갈라진 목소리를 다듬었다.

“록사나가 다치면 어떡하지. 많이 무서워하고 있을 텐데……. 그 애는 깜깜한 방에서는 잠을 잘 못 자서 수면등을 켜줘야 해……. 입도 짧고 투정도 심해서 잘 못 먹는 음식도 많고, 땅콩 알레르기도 있는데 식사는 무사히 먹을 수 있을까. 낯선 사람을 틈에서 많이 무서울 테고, 두려울 테고, 울면서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시끄럽게 보챈다고 그놈들에게 맞는 건 아닐지, 협박당하는 건 아닐지, 그 조그맣고 어린 애가 혼자서, 얼마나…….”

주섬주섬 정신없이 내뱉던 오르피어스는 기어이 격양된 감정에 침몰되어 온 몸을 떨었다. 이 일에서만큼은 섣부른 위안을 건넬 수 없어 지크하르트는 잠자코 그를 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진땀에 젖은 손가락을 깍지 끼고, 마디에 하나씩 입을 맞추며 포옹하였다.

오르피어스가 흐느낌인지 중얼거림인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연신 웅얼거렸다.

"록사나는……. 내 빛이고 생명이야. 이상했어, 형수님의 태 안에 있을 때에도 전혀 실감한 적이 없었고 갓 태어난 모습을 보았을 때도 신기하다는 생각만 했을 뿐인데, 그 애가 날 보며 웃어주었을 때 세상이 그 아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어. 내가 그때까지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고 살아 있었던 건 록사나를 만나기 위한 거였다는 걸 알았어. 그런데, 그런데……!!”

거친 호흡이 쌕쌕 가파르게 올라갔다. 지크하르트는 열에 들뜬 것처럼 외치는 오르피어스의 음성을 받아내며 어루만졌다.

"알아. 친딸처럼 아끼던 아이가 유괴되었는데 걱정하는 건 당연해."

“친딸처럼이 아니야…….”

오르피어스가 깍지 낀 손을 움켜쥐었다. “록사나는,” 그리고 몇 번이나 혀끝에만 걸리고 입술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는 단어를 더듬거리다, 힘겹게 맺었다.

“……록사나는, 친딸이야. 형의 딸이 아니라 내 딸인걸……. 내 아이야. 내가 지켜줘야 하는 내 아이…….”

지크하르트는 자신이 어떠한 반응을 해야 옳은지 어떠한 대답을 해야 옳은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유안이 20년 동안 아이릭의 가이드임을 숨겨 왔다는 진실보다 오르피어스가 느닷없이 토한 고백이 주관적인 놀라움의 강도는 더 컸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는 얼떨떨한 한마디만 흘렸다.

"그, 저……. 불륜? 되게 일찍 낳았네.”

숙인 채 있던 오르피어스의 얼굴이 비스듬히 올라오더니,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그리고는 희미한 웃음을 떨구었다. 언젠가의 힐라리아와 비슷한 웃음이었다.

"감상이 그것뿐이야?"

"각하도 알고 있으시고?"

딴에는 불복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아이릭의 귀에 들어갔다면, 감히 아내의 불륜 상대인 것으로도 모자라 친자인 양 자식까지 낳게 만든 오르피어스가 우려되어 한 말이었으나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형은 형수랑 같은 침실을 쓰지도 않았어. 애초에 그런 계약으로 한 결혼이었으니까…….”

사교계에 관심 없는 지크하르트도 아이릭의 결혼으로 떠들썩하였던 소란은 어렴풋이 기억하였다. 당시에는 총독으로 임명되지 않았을 때지만 당대의 벨포드 공이 중앙의 귀족도, 글래스팅의 문벌가도 아닌, 거칠거칠한 손을 가진 공장노동자과 결혼한다는 소식은 신문의 일 면을 충격적으로 뒤덮었고, 온갖 루머가 난무하였다. 우연히 마주친 그녀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졌다는 로맨스부터, 기실 그녀는 중앙에서 도피하여 몰락한 귀족가의 영예라는 그럴 듯한 이유를 가진 추리까지 갖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허나 아이릭은 모든 루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일가만 초대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2개월 후 록사나가 태어났다. 아이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게 아니냐는 루머가 한 번 더 불거졌지만 겉으로 내비치는 벨포드 공 부처는 스캔들이나 잡음 없이 부부로서의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하였다.

오르피어스는 아이릭의 결혼으로부터 일 년 전, 헤임을 가로지르는 리넨 강의 다리에서 투신자살을 하려는 실비아 포우를 만났다.

“한 번도 형의 명령에 이유가 필요한 적은 내게 없었으니까, 지금도 형이 왜 그런 명령을 하였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형은 어떤 여자든 상관 안 할 테니 아이를 낳아오라고 했어. 가문에 들여서, 형의 친자식으로 키워주겠다고.”

먼저 떠올린 사람은 자네트였지만 친자식을 낳자마자 형의 자식으로 보내야한다는 잔인한 현실을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릭은 기간을 두지 않았고, 훗날 네가 결혼하고 아내와 상의하여 자식 중의 한 명을 나에게 양자로 보내어도 된다고 하였지만 10대의 소년에게 결혼은 까마득한 일이었다.

실비아를 구한 건 그 무렵의 충동적인 변덕이었다. 그녀는 왜 나를 구했느냐며 울면서 오히려 그에게 화를 냈다. 인상을 쓰면서 어머니의 오랜 와병으로 빚이 산더미라든가, 몸을 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자신을 얼마에 팔아도 겨우 이자의 끄트머리만 변제될 부채라든가,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자살을 결심하였다든가, 빚을 대신 갚아줄 것도 아니면서 왜 말렸냐는가 하는 원망에 원망을 거듭한 적반하장의 울분을 듣던 오르피어스는 이따금 머리 한 구석을 스치던 형의 명령을 떠올렸다.

빚을 갚아줄 테니까 몸을 팔 거냐는 물음에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더니 더 불같이 노했다. 뺨을 후려갈기려는 실비아를 붙잡고 당장 은행으로 직행하여 돈을 인출해 주었다. 돈을 먼저 줄 테니까 생각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사관학교 위치와 오르피어스라는 이름을 알려주었다.

"솔직히 진짜 찾아올 거란 생각은 안 했어. 구해 줬는데 역정하는 소리가 듣기 귀찮기도 했고, 형의 명령도 당장 이행하라는 건 아니었으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었거든. ……그런데, 찾아오더라.“

빚은 다 갚았지만 어머니의 병원비는 앞으로도 계속 필요하니까, 자신의 몸에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비싸게 사 달라는 실비아의 등은 곧았지만 테이블 아래에 움켜쥔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오르피어스는 시내에 그녀를 위한 작은 방을 빌렸고, 몇 개월 후 실비아는 임신하였다.

「내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기는 싫어. 어머니도 많이 슬퍼하실 거야」

합당한 요구라고 판단하였기에 오르피어스는 아이릭에게 전달하였고, 결혼하겠다는 즉답을 받았다. 그녀의 모친은 결혼식 후 얼마 되지 않아 눈을 감았으며, 실비아는 무사히 록사나를 출산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장시간 어머니를 간병하고 공장을 전전하며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던 실비아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여 록사나가 4살이 되던 해에 숨을 거두었다.

“……록사나는 그렇게 형의 아이가 된 거야. 지금까지 주욱. 록사나를 위해서도 종주인 형의 적자인 편이 종아. 내 자식이 되어 봤자 사생아가 사생아를 낳은 형국밖에 안 돼. 형의 자식으로 있어도 곁에서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흐리마리 흐려진 말꼬리를 늘어뜨리던 오르피어스가 자조적으로 조소하였다.

"이게 전부야. 이번에는 감상이 어때?”

"솔직하게 말해도 되냐?”

“응…….”

“네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너희 집엔 제정신 박힌 사람이 어째 아무도 없냐.”

다분히 진심 어린 대꾸에 오르피어스는 짧게 끊어지는 웃음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쓰라린 고소 같기도 하고, 통렬한 조소 같기도 하였다.

"맞아. 다 미쳤어. 아버지는 강박증 정신병자에다가, 형은 자기 정부를 위해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고, 누나는 그런 형에게 안달이 났지. 그런데……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야. 나는 다르게 사는 방법을 몰라. 예전에 사관학교 입학하면서 깨달은 거지만, 나는 친구를 사귀는 방법도 모르더라구…….

……있지, 지크하르트. 만약에 내가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서 평범하게 자라고 평범하게 널 만났다면, 너도 날 조금은 좋아해줬을까?”

지크하르트는 흡사 그의 처분이라도 기다리는 양 창백한 시선을 숙인 오르피어스를 응시하다, 말없이 그의 어깨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더하였다.

***

2권

시내의 테러 사건으로 며칠 내내 저택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던 록사나는 정원에서 노는 것도 지겨우니 바깥공기를 쐬고 싶다며 유모를 졸랐고 금지옥엽 아가씨의 투정에 유모도 두 손을 들었다. 딱 한 시간만 놀고 오자고 새끼손가락까지 야무지게 걸어 약속한 두 사람은 경호원들의 호위 속에 저택 인근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경호원이 사살되고 록사나와 유모가 유괴되기까지는 5분도 채 소요되지 않았다.

범인들은 벨포드 저로 '총독의 하야와 헤임의 무장해제'라는 터무니없는 요구 조건을 전언함과 동시에 신문사에도 같은 성명을 전달하였고, 그날 석간지의 1면을 장식하였다.

록사나의 구출 작전과는 별개로, 불가능한 조건을 조율하기 위한 협상 전문가가 나섰지만 범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은 오직 그들이 지정한 특정 신문지상을 통해서만 소통하리라 통보하였고 최초의 요구에서 단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았다. 덕택에 소통의 창구가 되는 신문은 연일 매진 행보를 달렸고, 헤임의 전 시민이 협상 과정을 알게 되었으며, 조간과 석간이라는 하루 단 두 번의 의사 교환은 미적미적 답보 상태를 유지하였다. 전화나 무전 연락이 아니니 도청도 불가하거니와 신문사로 배달되는 우편 또한 항상 다른 지역구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협상 전문가나 수사본부의 사람들은 허황된 요구를 내세우고 있는 범인들의 진의를 파악하려 골머리를 앓았지만 아이릭을 비롯한 극소수의 측근은 짐작하였다. 요란하게 떠벌린 총독의 외동딸 유괴 사건에 경찰과 정보부는 최대한의 인원을 동원 하였고, 그만큼 이등보좌관의 납치 사건은 일선의 중요도에서 조금씩 하락하였다. 그들은 아이릭이 자멸할 때까지 시간을 끌고 있었다.

외부의 정보가 일체 차단된 유안은 록사나의 납치로 헤임이 발칵 뒤집혀졌다는 소식은 물론이거니와 납치 이후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창은 덧문까지 단단히 닫히고 두꺼운 커튼으로 쳐져 빛이 스며들지 않았으며, 시간 개념을 일그러트리려는지 식사는 불규칙하게 배달되었다. 하루에 다섯 번 식사를 하는지 두 번 식사를 하는지조차 모호하였다. 그와 대화하였던 냉정한 남자는 감금된 문을 두 번 열지 않았고 매번 식사를 가져다주는 남자는 말을 걸지도, 유안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꼬박꼬박 항생제가 주사되어 상처는 많이 나아 운신은 어렵지 않았지만 자신의 격투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안은 식사를 배달하는 남자를 제압하고 단신으로 탈출한다는 무모한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식사할 때 양손의 결박과 눈가리개가 풀릴 때 외에는 그는 항상 어둠 속에 있었지만 소리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일행은 확실히 용병이 아니었다. 대장으로 보였던 냉정한 남자와는 다르게 부하들은 주의를 기울이는 듯 하여도 가끔 서로의 직함을 부르는 말실수를 하거나 무의식중에 군대 용어를 섞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유안은 자신의 식사가 아니라 그들의 식사와 주기적으로 번을 서는 시간의 반복을 통화여 대략적인 시간을 추정하였다. 최초로 의식을 찾았을 때 공복감은 그리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길지 않은 시간 기절하였다고 가정하면 대략 이틀째 밤, 또는 삼일째 새벽이었다. 이따금 계단으로 삐걱거리며 올라오는 소리도 있었으므로 건물은 2층 이상. 인원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3명 이상은 반드시 그가 감금된 방 앞에 있는 듯하였다.

외벽에 바짝 귀를 대고 있으면 외부의 소리도 희미하게나마 벽을 투과하여 그의 고막에까지 전해진다. 이 건물은 슬럼가도 번화가도 아닌 민가에 있었다. 하나의 집단이 의심을 사지 않고 항시 건물 내에 상주하고 있다면 주인이 장기 여행을 떠나는 기간 중에 빌렸거나, 아예 매입하였다는 뜻이었다. 나오미를 암살 및 납치하려 가장하였을 때 사용된 무기도 물론이거니와 집을 매입할 정도라면 충분한 자금력이 동원되었음을 그에게 시사하였다. 자금이 뒷받침되는 군인이라니 상대하기 까다로운 조건들만 얽혀 있었다.

현재 그의 귀에 가장 익은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유안은 얼른 벽에서 몸을 떼고 구석 자리에 옹송그리고 앉아 있었던 척하였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눈가리개로 감싸인 검은 시야 너머로 희미한 광원이 커졌다. 식사 당번은 랜턴과 식사를 담은 쟁반을 그에게서 약간 떨어진 아래에 내려놓고 눈가리개와 결박을 풀어주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걸요. 갓 구운 빵인가요? 아, 라즈베리 잼은 오랜만에 먹어 보네요. 다음번에는 크림을 듬뿍 얹은 초콜릿 파이도 부탁합니다. 여기 오래 있다 보니까 스트레스가 쌓여서 당이 부족해요.”

식사 당번이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눈빛으로 노려보고는 한 걸음 물러나서 섰다. 그가 무방비하게 식사 중인 와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았다. 단 하나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면 남자의 허벅지 벨트에 고정된 나이프가 날아와 자신을 꿰뚫을 것이라는 점에 유안은 내기도 걸 수 있었다.

장시간 단단히 묶여 있던 손목이 얼얼하여 몇 번 주무르다, 쟁반에 성의 없이 놓인 빵에 잼을 발라 먹었다.

천우신조로 허락될지 모르는 기회를 위해 그는 체력을 온존하여야하였고,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구더기나 쥐를 잡아먹어서라도 버텨야 하였다. 동시에 유안은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오늘이 삼일째 오전이라 가정하고, 저녁 무렵까지 이곳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그는 자살할 작정이었다. 임시 가이드가 한 명 생존하여 있다는 것을 놈들은 알지 못한다. 임시 가이드가 지탱해 주는 기간이 있으면 헤임 밖으로 대피시킨 페어가 없는 가이드를 불러와 선별할 수 있었다.

새로운 가이드가 자신처럼 오르피어스에게 화재를 가장하여 각인이 새겨진 왼쪽 가슴은 물론이거니와 의혹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반신을 불에 일그러트릴 만큼 충성스러울지는 장담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아이릭은 폭주하지도, 자멸하지도 않을 것이다.

놈들이 제일 간과한 점은 유안을 물론이거니와 페인이 벨포드에 바치는 헌신이었다.

총독부에서 맞는 3일째 아침이었다.

불필요한 기물을 밖으로 빼내고 간이침대 두 개를 가져다 놓는 것만으로 꽉 찬 작은 휴게실이 지난 3일 동안 두 사람이 머물렀던 공간이었다. 식사는 부지 내 식당에서 해결하였고, 24시간 바쁘게 돌아가는 총독부는 이처럼 큰 사건이 발발할 때면 귀가도 하지 못하는 관원들을 위한 샤워 설비까지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큰 불편함은 없었다. 야전 막사에 비하면 호사스럽다고 칭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공간이었다.

3일 동안 지크하르트가 한 일은 유안의 납치 사건에 관한 진척도와 크루엘라에게 정기적으로 업무 보고를 전해 듣는 것 정도였다. 공론화되지는 않았으나 가이드 암살 기도로부터 연이어 사건이 발발한 탓에 합동군사훈련이 개최 가능한지나 의문이긴 하였지만 이를 제외한 연대의 업무는 무사히 잘 굴러가고 있는 반면에, 유안의 조사는 참담하리만큼 진척이 없었다. 좋은 단서라고 여겼던 차는 불에 타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뒷좌석에 남은 혈흔으로 그나마 유안이 납치되었던 차였다고 추측 가능한 정도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을 복잡하게 맴도는 생각이 골치 아파 흐트러진 머리칼을 벅벅 긁었다. 세수하고 면도까지 끝마치고 왔을 때도 옆 침대의 오르피어스는 잠들어있었다.

“…….”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의 침대 옆에 섰다. 얄미우리만큼 실실 웃음을 쪼개고 다니던 녀석의 얼굴에서는 그 날 이후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말수도 현저히 줄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멍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지크하르트가 말을 걸면 크게 흠칫하며 놀라기도 하였다. 매 끼니마다 지크하르트가 데리고 가지 않으면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밤에도 거의 잠을 자지 못하여 새벽까지 계속 뒤척였다. 나날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것이 보였다.

깊은 관계가 지속된 연인도 없었고, 힐라리아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말해 주었기에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지크하르트는 알지 못했다. 첫날처럼 눈에 띄게 동요하는 기척은 없어 한 걸음 옆에서 지켜봐주었으나 이게 과연 잘하고 있는 일인지도 애매했다.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대신, 내부로부터 조금씩 갉아 먹혀 마모되어가는 과정을 옆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족을 몰살한 하얀 악마가 오르피어스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직접 죽여 복수하고자 하였고, 그를 둘러싼 가혹한 환경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다 살인으로 내몰렸다는 진실을 알았을 때에는 죽이지 못하고 복수에서 배제하였다. 증오와 연민이 상쇄되어 제로로 돌아갔으니 이것으로 그와 자신의 관계는 모두 끝났다.

그 뒤에 취할 행동을 선택하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마무리된 관계이다. 새로운 감정이 싹터 덧칠될 이유도 무채색으로 완전히 단절된 감정이 새롭게 꿈틀거리며 형태를 바꿀 이유도 없었다. 썩 친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관학교의 동기. 지크하르트는 자신이 정립한 관계를 무던히 지속하였다.

오르피어스의 가이드가 되는 것도 감정적인 면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필요하면 포동하고, 키스하고, 섹스한다. 금전이나 물품의 거래와 다름없는 육체만의 거래였다. ……며칠 전까지만 하여도 어렵지 않은 거래였는데.

지크하르트는 초췌한 오르피어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오르피어스의 과거를 알면서 그를 죽이지 못하였는데, 오르피어스의 내면을 알아가고 있는 지금은 어떻게 될까. 끝없이 곱씹고 생각하여도 답을 얻지 못하는 구렁 속의 물음이었다.

누군가가 밖에서 휴게실을 노크하였다. 지크하르트는 상념을 거두며 침대에서 물러나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아래층 식당에서 아침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끌고 온 나오미였다.

"같이 식사라도 할 겸 올라왔는데 오르피어스 님은 여직 주무시고 계시는군요?”

나오미가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그녀와 단 둘이 식사할 만큼 교분이 깊은 건 아니지만 식사하자고 일부러 올라온 사람을 내치는 것도 예의가 아닌지라 지크하르트는 테이블에 그녀와 자신 몫의 식사를 올려놓았다. 의자도 없어 두 사람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지크하르트의 침대에 않았다. 오늘의 아침 식사는 크루아상, 바게트, 브리오슈 등 여러 종류의 빵과 두꺼운 팬케이크였다.

어색한 날씨 얘기라든가 무리하지 말라든가, 하는 안부 인사가 흘러가고 하루를 여는 아침의 식사와 함께 하기에는 무거운 주제들이 하나씩 튀어나와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각하는 어떠십니까?”

에둘러 표현하였으나 결국은 폭주할 기미가 보이느냐는 소리다. 나오미는 진하게 끓인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사무실이 아주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록사나 님의 유괴가 원인이라 여기고 있다는 점만이 위안이 된다고 할까요. 지난 20년 동안 왼쪽 가슴에 각인처럼 문신까지 새기고 각하의 가이드인 척 연기해 왔으나 정작 이 같은 상황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는 점이 쓸쓸하더군요.“

고단한 말투와는 다르게 그녀의 담담한 얼굴에서는 현재의 상황에 순응, 또는 체념하는 달관의 빛이 묻어났다. 

"대령님도 낯설고 불편한 곳에서 기약 없이 기다리시려니 많이 피곤하시지 않습니까?”

"저야 속 편하게 밥이나 축내고 있을 뿐인데요."

부러 내뱉은 실없는 소리에 나오미가 짧게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늦어도 오늘 밤까지만 이곳에 있으시면 될 겁니다."

"역시 공개수사로 돌리는 겁니까?"

“회의실에서야 공개수사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필요 없었습니다.”

나오미의 손이 커피잔을 접시 옆에 두었다. 식기가 부딪치는 달칵거리는 소리만큼이나 그녀의 목소리는 여상하였다.

"그 녀석은 제가 잘 압니다. 유안은 오늘 밤에 자살할 테니까요.“

그러며 놀란 지크하르트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오르피어스가 등을 돌리고 누운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오르피어스 님, 잠에서 깨셨다고 여겨 드리는 말씀입니다. 유안의 일은 괘념하지 마십시오. 저희 페인 가는 주가인 벨포드를 섬기는 영광과 홍복을 안고 있으며, 늦든 빠르든 벨포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건 아주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제 아버지와 언니가 최후까지 체스터 님을 수행하다 부탄베르트 요새에서 전사하였던 것처럼, 미래에 저희의 자식들이 록사나 님께 충성할 것처럼, 이번에는 유안이 아이릭 님께 헌신하는 것이고요. 그러니 가책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황송하오나 오르피어스 님을 감히 친아우처럼 아꼈던 유안이니 아이릭 님을 걱정하는 만큼이나 도련님을 마음에 두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유안은 각인을 숨기기 위하여 어린 오르피어스 님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부탁을 하였다고, 지금도 종종 후회를 합니다. 절대 오르피어스 님이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시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유안의 마지막 바람이기도 할 테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숨 한 번 크게 몰아쉬지 않고 단번에 이야기를 끝낸 나오미는 지크하르트에게 사과했다.

“식사 중이신데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지크하르트는 아이릭의 폭주를 막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리란 동생을 이야기하는 누이에게 오늘 안에 구출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과 위로는 하지 않았다. 그는 섣부른 한마디 대신 나오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였고, 그녀도 목례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지크하르트는 그녀의 침착함이 각오를 굳히고 있기 때문임을 알았다.

미동도 않던 오르피어스는 나오미가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가슴께까지 내려가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웅크렸다.

“나 때문에 또 유안이 죽을 지도 모르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내가 너무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아…….”

"……발버둥은 쳐 봐야지.“

자책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하여 온전히 죄책감을 떨쳐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이 무리하여 나설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으며 3일 후에는 유안이 가이드임을 밝히고 공개수사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믿어 여타의 행동 없이 대기하였던 지크하르트는 오트피어스를 위해, 발버둥이라도 치기 위하여 일어났다.

사무실의 전화를 빌렸다가는 그녀에게 폐가 될 수 있기에 지크하르트는 몇 분간 자리를 비우겠다는 언질을 남기고 총독부 부지 내의 전화박스에서 통화를 연결하였다. 엠마가 잔뜩 졸린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이 시간이 제게는 한밤중이나 다름없다고요. 안 그래도 연락할 참이긴 했지마는……. 도대체 어디에 계신 거예요? 벨포드 소령님 댁에도 전화를 받질 않고 사무실로 전화하니 기밀이라 못 알려준다고 하질 않나」

"미안, 미안. 임무 때문에 며칠 집을 비웠다. 급하게 할 말이라도 있었냐?”

「굳이 급하다고 하면 대령님 쪽이려나? 일전에 의뢰하셨던 정보의 조사가 완료되었어요」

“벌써?"

「유능한 부하들을 두고 있는 탓이죠. 짬 내실 수 있으면 여기까지 오실래요, 아니면 카페나 술집 같은 곳에서 뵐까요?」

"음, 내가 자리를 비우기가 곤란한 상황인데."

난처하게 대답하자 엠마는 대화의 흐름을 끊더니, 가라앉은 음성으로 재차 이었다.

「혹시 벨포드 소령님과 같이 있으세요?」

“비슷해.”

「……제 우려일 뿐이라고 여기고 싶지만, 대령님. 벨포드 소령님은 체스터 벨포드의 아들이고, 우리의 가족을 해한 그 하얀 불의 주인이에요. 제가 대령님의 선택에 일일이 간섭할 자격은 없고, 근래 벨포드 소령님의 주변에 안 좋은 일만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건 알지만 설마 동정을 다른 감정과 착각하고 있으신 건 아니죠?」

즉답할 수 없었다. 나직하게 전파를 타고 흘러들어온 그녀의 말은 그의 내심과 고민을 정확히 까발렸다.

"……글쎄, 나도 그걸 모르겠어.”

지크하르트가 내놓을 수 있었던 답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회색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같이 있는 건 임무 때문이야.”

엠마가 수화기에서 입술을 떼고 손바닥으로 가린 듯 소리가 멀어졌다. 몇 호흡 뒤에 그녀는 평연히 돌아온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애초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간섭할 일은 아니니까요. 의문을 숨기지 못하였을 뿐이니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됐어. 너랑 나 사이에 무슨.”

수화기 너머로 엷은 웃음이 들렸다.

「그럼 조사 자료는 제가 군무청에 우편으로 배송할게요. 소령님 댁으로 보냈다가 혹 소령님이 먼저 뜯어보시는 불의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것 보다는 낫겠죠? 물론 겉에 벨포드 소령님 조사 자료라고 큼지막하게 적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시고요」

“수고 많았다. 고마워. 그리고 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를 했다만…….”

「네에, 무슨 용건이신가요? 의뢰를 하실 거면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시고요」

"의뢰라기보다는, 으음, 네 정보 수집의 범위가 어느 정도까지인지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네가 속한 조직을 캐려는 의도는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고."

군부나 경찰과는 다른 영역의 정보 루트를 쥐고 있는 그녀이니만큼 말 그대로 지푸라기라도 잡으며 발버둥 치는 심정으로 신중하게 접근하였으나, 예상외로 엠마는 시원시원하였다.

「아하. 혹시 록사나 양 유괴 때문에 그러신가요? 신문 보니까 딱할 만큼 진척이 없던 걸요. 전혀 꼬리를 못 잡은 거예요?」

굳이 록사나 하나만의 사건은 아니었으나 넓은 의미로 연결되어 있음은 구 할 이상 확실하여 지크하르트는 수긍 하였다.

「대령님께 연락하려고 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요, 첫째는 아까 말씀드린 벨포드 소령님의 정보였고, 둘째는 록사나 양 유괴 때문이었어요.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요. 정확히는 유력한 용의자라 해야 옳겠지만」

“뭐? 그게 사실이야?”

발버둥 치며 붙잡은 지푸라기가 두꺼운 동아줄이 되어서 흔들렸다. 기겁하며 반문한 지크하르트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캐물으려다 후다닥 되삼켰다.

"아니, 아니지. 이건 내가 들어야 할 게 아니라……. 엠마. 그 말 정보부 사람에게도 똑같이 설명할 수 있겠냐?” 

「정부 관원이라니 내키지는 않지만 뭐어, 설명은 해 볼게요」

“좋아. 끊지 말고 기다려 줘.”

지크하르트는 수화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전화기 위에 얹고는 재빠르게 내달렸다. 어제 아서가 총독부를 방문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정이 넘어서야 아이릭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왔으니 지난밤은 총독부에서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았다. 요행히 당직 사관이 아서가 간밤에 묵은 휴게실을 알려주었다.

잠에서 깬 지 몇 분 되지 않았는지 세수도 안 한 부스스한 얼굴의 아서는 퍽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신문지상에 록사나의 유괴 사건이 알려지게 된 순간부터 경찰서와 신문사에는 온갖 거짓 제보가 판을 쳤으니까. 개중에는 내가 범인입네 큰소리치는 자들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지푸라기를 잡아야 하는 건 아서도 매한가지였으므로 자네 지인이니 한 번 믿어보겠다는 투로 부관을 대동하고 건물 밖의 전화박스까지 내려갔다.

"정보부의 텐서워즈 대령일세. 자네가 알고 있는 정보가 무엇인가?“

「어머나,1과 과장님이 직접 전화를 받으시다니 거물이 행차하셨네요. 안녕하세요. 익명의 제보자 A에요. 제가 말씀드리는 정보를 비공개로 처리해 주시겠다는 확답을 해 주지 않으시면 대답하지 않겠어요. 정보가 제 입에서 세어나갔다는 게 발각되면 위험하거든요」

“카시야스 대령이 군 회선이 아닌 외부 전화박스로 통화하여 녹취도 하지 못하네.”

「후후. 제게는 대령님이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으신 격이네요. 먼저 제 소개를 하자면요 암살, 납치, 협박 등의 일을 대행하는 청부업자랍니다」

"본론만 말하게.“

안 그래도 바쁜데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며 아서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아이. 여자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지도 못하는 남자라니 섭섭하네요. 본론만 말씀드리자면요 저도 록사나 양의 유괴 청부를 받았어요」

"잠깐! 확실한가? 언제, 누구에게 받았지?“

펄쩍 뛰기라도 할 것처럼 안색을 일변한 아서가 부관에게 손짓하여 수첩과 연필을 받았다.

"자세히 말해 보게."

「저번 주였던가, 저회 같은 청부업자를 의뢰인과 연결해 주는 중개업자가 있거든요. 나이가 꽤 많은 노인인데 본명도 모르고 보통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에요. 그 영감님이 록사나 양 유괴라는 큰 건수를 들고 오더라고요. 의뢰금이 통상 시세의 수십 배나 되는 거액이었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총독의 딸을 납치하는 데 가담하겠어요? 하지만 누굴 납치하겠다는 것까지 들었으니 바로 거절하면 뒤끝이 감당이 안 되겠다 싶었어요. 당장 결정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닌지라 하루만 유예를 달라고 했고, 그 영감님이 돌아가는 길에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하였어요. 걸 찾아온 흔적까지 싹 지우고요」

“그 영감님이라는 자에 대하여 알 수 있나?”

「어디에 사는지는 알지만 소용없어요. 영감님은 기억력이 기가 막히게 좋아서 청부업자 리스트를 장부가 아닌 머릿속에 저장해 두거든요. 영감님이 취급하는 청부업자는 일류뿐이라 기억해 둘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지만요. 아무른 그 뒤에 특별한 사건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록사나 양이 유괴되었다지 뭐예요. 여기부터는 제 추측이지만, 중개업자 중 제일 유명하고 성사 확률도 높은 영감님이 죽자 의뢰인은 직접 거래를 트려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자네는 누구와 거래를 텄다고 추측하는가?"

「당연히 마피아죠」

약자로 빠르게 필기하면서도 내도록 주름이 사라지지 않고 있던 아서의 미간에 주름이 두어 줄 더해 졌다.

"청부업자에서 마피아라니 너무 비약한 게 아닌가?"

「청부업자 중에서 총독 가족을 유괴한다는 무모하고 미친 짓에 발을 들일 사람은 없어요. 아무리 돈이 좋아도 살아야지 앞으로도 이 짓을 해 먹고 살 게 아니에요?」

"중개자가 청부업자들의 심리를 몰라서 자네에게 의사를 타진하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휴. 대령님이시라면 적당히 넘길 수 있었을 텐데 과장님은 빈틈이 없으시네요. 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영감님은 제 뒤에 조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절 찾아온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닌 총독의 가족을 유괴하고 은폐하는 작업을 일개 개인인 청부업자가 처리하기에는 힘들죠. 그리고 여기까지 말했으니 통화 경로를 추적하실 것 같아서 미리 고백하는 거지만 전 겉으로는 창녀로 위장 중이고 대령님은 제 오랜 손님이시죠. 제게 큰 손님이시라 이따금 소소한 정보를 드리기도 하였어요. 이제 의문은 다 해결되셨나요?」

정말 추적할 작정이었던 아서는 잠깐 메모하던 연필을 멈추기는 하였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얼추 짐작이 갔다.

“알겠네. 카시야스 대령은 연관하지 않겠네.”

「말씀이 통하시는 분이어서 다행이네요. 나중에 가게로 절 찾아오시면 잘 해 드릴게요」

"필요 없네.”

단호하게 대화를 단절한 아서가 수화기를 지크하르트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당장 경찰청장님께 연락하도록!”라고 부관을 다그치며 급히 사라졌다.

"뭔지 정확히 못 들었지만 얘기는 잘 끝났냐?"

「과장님이 먼저 전화를 끝내셨으니 아마도요?」

"고마워. 정보를 넘기는 거라면 자칫 너도 위험할 텐데."

「고마워하실 건 없어요. 제게도 이득이 있어서 충분히 고민하다가 선택한 행동이었으니까요. 헤임의 조직들이 흔들려야 저회도 쑤시고 파고 들어서 진출할 기회가 생기거든요」

"음? 조직이라니?"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엠마가 빙글빙글 웃었다.

웃음의 의미는 지크하르트도 곧 알게 되었다. 그와 오르피어스, 베른하르트는 아서가 경찰청장과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경찰청에 설치된 수사본부로 아서와 동행하였다.

헤임의 밤에 제 구역을 선포한 마피아는 총 네 개의 조직이다. 아서는 개중에서 자금난이 극심한 조직을 요구하였고, 마피아를 담당한다는 형사는 즉답하였다.

“베르바니 패밀리입니다. 한 달 전쯤에 돈줄을 쥐고 있던 카포레짐이 히트당하면서 새로 선출된 후계자가 대가리, 죄송합니다, 머리에 든 게 약이랑 여자밖에 없는 무식한 놈이라 돈줄이 단단히 꼬여 버렸습니다. 거기다가 보스까지 중풍으로 쓰러져 와병 중이라 지금 꽤 위태위태합니다.”

경찰청장이 무릎을 탁 쳤다.

"이놈들이군! 보스에게 걸고넘어질 죄목이 있나?"

"미결 사건 중 강간 교살 혐의가 있습니다."

"그걸로 가지. 총독 각하의 승인을 받아서 영장 필요 없으니 당장 출동해!“

베르바니 패밀리의 저항은 격렬하였지만, 군경의 합동 작전으로 보스의 자택과 조직의 사무실을 포위하고 진압을 시도한 지 한 시간 만에 사태는 종결되었다. 먼지가 쌓일 대로 쌓인 케케묵은 혐의로 보스를 체포하고 이송하기 직전에 클라우드는 단둘이 면담의 시간을 가졌고, 10분 후 안경을 쓰며 나왔다.

“정답입니다. 록사나 양이 감금된 장소를 알아냈습니다.”

실비아는 록사나에게 직접 모유를 먹이려 하였지만 쇠약한 그녀는 갓 낳은 딸을 배부르게 할 수 있을 만큼의 젖이 나오지 않았다. 손수 아이를 양육하려 하였던 실비아는 도리 없이 유모를 고용하였다. 사교계에서는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한다니 제아무리 반짝반짝 갈고 닦아도 하류층의 천한 피는 숨기지 못하는 것이라 은밀히 조소하였지만 유모는 신분이 고하를 떠나 그녀가 진심으로 딸을 사랑하였기 때문임을 알았다.

과거의 일은 절대 입에 올리지 않는 사용인이나 벨포드 공의 가족으로 짐작하건데 선대 공의 시절이 썩 밝지 만은 않다는 건 어렴풋이 느꼈지만 유모는 모르는 척 눈을 감고 귀를 닫는 것이 현명한 처세술임을 깨우치고 있었다. 다만 좋지 못한 과거를 가진 가문임에도 그녀가 돌보는 록사나가 구김살 없이 사랑 받으며 자라나고 있음에 안도하였다. 실비아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사람처럼 온 마음으로 딸에게 애정을 쏟았으며, 아이릭은 무뚝뚝하였지만 록사나가 안겨 오는 것을 내치지 않고 성이 찰 때까지 놀아 주었다. 록사나라면 끔뻑 죽는 오르피어스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릭의 쿠데타 후 중앙군으로 출사하여 리벡에 기반을 이룬 도젠도 가끔 헤임의 본가를 방문할 때마다 록사나에게 한 아름 선물을 안겨 주었다. 힐라리아만이 묘하게 냉랭하였으나 그녀는 주로 별채에서 머무는지라 아이릭의 가족과는 거의 맞닥뜨리지 않았다.

흘러넘치도록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감으로 가슴을 가득 채웠다. 록사나만 납치하였다가 시끄럽게 울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고 끌려온 덤이나 다름없는 유모는 사방이 적의로 가득한 낯선 자들 사이에서 오히려 록사나로 인하여 마음을 굳게 다잡을 수 있었다.

"아빠랑 삼촌이 꼭 구하러 올 거니까 하나도 안 무서워."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귓가에 속닥이는 록사나의 희망이 천진하였다. 유모는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록사나를 적의로부터 보호하려는 양 감싸 안았다.

"그럼요. 꼭 구하러 오실 거예요.”

"돌아가면 레몬 케이크 만들어 주기로 나랑 약속한 거다?"

"배가 불러서 못 드실 때까지 만들어 줄게요."

속닥속닥하다 작게 웃음까지 터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보초를 서던 사내가 시끄럽다는 노호성을 질렀다. 유모는 몸을 움츠리며 록사나를 더욱 꼭 안았다. 며칠 간 할 수 있는 일이 초조해하거나 록사나를 보살펴주거나 주변을 관찰하는 것뿐이었던지라 그녀는 범인 일행이 두 분류로 나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였다. 규율을 갖고 행동하며 말을 삼가며 또한 경호원들을 사살하기도 하였던 일부의 일행과, 상스럽고 거친 말을 뱉으며 난폭하게 무기를 휘두르는 대다수의 일행이라는 분류였다. 보초는 후자였고, 첫날 겁에 질려서 오들오들 떨다 미적거리는 통에 후자의 일행 중 한 명에게 후려 맞았던 그녀는 짐짓 주눅이 들었다. 록사나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범인들이 전혀 얼굴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도 못내 그녀를 불안하게 하였다. 록사나를 인질로 협상을 한다는 건 다 거짓말이고 처음부터 두 사람 전부 죽일 작정이었던 건 아닐까.

록사나가 콜록콜록 기침했다. 교외의 폐공장은 그들이 들이닥치기 전만 하여도 들쥐며 야생 동물들의 영역이었던 지라 불결하고 환경도 좋지 않았다. 기관지가 약한 록사나가 걱정이었다. 그나마 자신들이 갇힌 사무실로 사용하였던 듯한 공간은 벽지며 바닥재가 보존되어 있긴 하였으나 여름의 초입임에도 해가 떨어지면 으슬으슬 한기가 뼛속까지 치밀었다. 숄을 방석처럼 접어 록사나가 깔고 앉을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추위를 온전히 떨치는 건 무리였다.

폐공장에 노숙자도 몇 명 있었다며 일행이 시간을 죽이는 안줏거리로 삼아 떠드는 걸 들었는데 그 노숙자들의 행방은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막연히 록사나처럼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거듭 생각을 곱씹을수록 불안감에 쪼그라드는 것만 같아 시간이 째깍째깍 지날 때마다 수심만이 깊어졌다.

"엊그제 맞은 데가 많이 아파서 그래?"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의 부은 볼을 록사나가 빤히 올려다보았다. 유모는 애써 웃으며 ‘이젠 안 아파요.’라는 대답을 하려 했지만 벌린 입술에서는 "꺄악!"하는 새된 비명이 터졌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양 공장 건물 자체가 요란하게 뒤흔들렸다. 방치되어 있는 동안 못이 삭아 위태위태하게 불어 있던 선반이 떨어지고 범인들이 술을 들이키던 테이블이 쓰러졌다. "습격이다!” "씨발, 안 들킨다며!" "진정해!" 왁자한 외침이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고 총소리가 튀기 시작했다.

혼란에 휩쓸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유모는 그제야 록사나에게 눈이 미쳐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아빠랑 삼촌이야!"

록사나만이 유모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해맑게 웃었다.

베르바니 패밀리는 두 달 전에 문을 닫은 공장을 시체를 처리하는 작업장으로 개조하기 위하여 사들였으나 공사를 채 시작하기도 전에 카포레짐이 암살당하고 보스가 쓰러지는 불운이 연이어 발생하여 현재까지 방치 중이었다. 공장으로 통하는 길목을 포위한 채 도면을 펼치고 돌입 작전을 지시하던 수사본부장은 느닷없이 웅성거리는 소요를 따라 눈을 돌렸다. 바리케이트를 밀어내며 진입하는 차가 있었지만 경찰 부대는 이상하게도 머뭇거리며 제지하지 못하였다. 일 분도 지나기 전에 차는 굉음을 길게 찢으며 공장 방향으로 전속력 질주하였다. 본부장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자네들 제정신인가?! 지금 뭘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허나 총독 각하께서 친히 방문하셨습니다!"

본부장은 말문이 막혔다. 총독부로 록사나가 감금되어 있는 위치가 확보되었다는 보고가 올라가자마자 직접 차를 몰고 온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들은 오르피어스가 튕기듯이 일어나 자신의 차로 달려갔고 지크하르트도 얼결에 뒤를 따랐다.

이번 사건은 경찰청의 주관인지라 범인들이 체포되는 즉시 유안의 행방을 캐내고 직행하기 위하여 오르피어스와 대기 중이던 베른하르트가 싱긋 웃으며 경례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저도 이만."

클라우드도 슬며시 끼어들어 동행하였다. 네 사람이 떠나자 본부장은 짜증을 내며 도면을 집어던졌다.

"이래서 센티넬이란 것들은!!”

부하들은 본부장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말없이 주변을 정리했다. 명백한 월권 행위였으나 총독이 먼저 규율이고 뭐고 다 깨트리며 뚫고 나갔으니 본부장의 위치에서 책임 소재를 물을 방도도 없었다.

“이봐, 벨포드 소령. 나도 같이 가지.”

오르피어스의 차가 발진하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베른하르트와 클라우드가 뒷좌석에 올라탔다. 오르피어스는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액셀을 밟았다. 비포장도로의 거친 승차감을 마음껏 온몸으로 누리며 베른하르트는 경찰들의 눈이 저어되어 묻지 못하였던 사항을 질문하였다.

"베르바니 패밀리와 거래를 튼 남자의 부하로 직접 록사나 양을 납치하였던 놈들이 3명이라고 했죠? 놈들과 조직원의 구분 방법은 혹시 알고 있습니까?"

"근데 그 사람들이 중요…… 윽!”

명령하는 대로 정보를 캐내긴 하였으나 자세한 정황을 알지 못하는 클라우드가 어리둥절하게 질문하려다 하마터면 튕겨 오르는 차체 때문에 혀를 깨물 뻔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조수석의 지크하르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자살하려는 놈들 잡으면 됩니다.”

"명료해서 좋군요."

몇 마디 대화하는 사이 금세 폐공장이 보였다. 공장 정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아이릭의 뒷모습도 있었다. 동행도 없이 홀로 다가오는 아이릭을 위협적이라고 여기지 않았는지 망을 보는 듯하던 조직원이 하품하며 사유지니까 꺼지라는 말을 하자마자, 수박이 터지는 것처럼 조직원의 머리가 퍽 터졌다. 그의 옆에 앉아서 농담 따먹기를 하던 남자도 매한가지였다.

이어, 네 사람이 서둘러 차를 세우고 내렸을 때 두꺼운 철문도 공성 병기에 직격 당한 양 움쭉 패며 경첩째 뜯겨 반대편으로 콰앙 날아갔다. 느닷없는 사태에 공장 안쪽에서는 당혹감이 우왕좌왕 휩쓸었지만 개중에도 사태 파악에 빠른 자는 있었다. 난간 위에서 아이릭의 머리를 겨냥하였던 조직원은 오르피어스의 화염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을 도화선으로 여기저기에서 차례대로 단말마의 비명이 솟구쳤다.

"휘유. 여전히 가까이 가기 겁나는 능력이시구만. 그럼 나는 사냥하기 쉽게 살짝 흔들어 줄까."

어깨 근육을 풀면서 공장 부근까지 접근한 베른하르트가 허리를 굽히고 양 손바닥을 바닥에 댔다. 그의 손이 닿은 곳으로부터 시작된 땅의 진동은 미구에 공장 부지 전체를 뒤흔들었다. 손바닥의 흙을 탁탁 털어내고 훤히 뚫린 문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가 등을 돌렸다.

"대령님은 안에 안 들어가십니까?“

지크하르트는 쑥스럽게 미소하며 손을 저었다.

"전 연약한 일반인이니까 밖에 숨어 있겠습니다.”

그 말에 베른하르트가 짧게 웃더니 이내 그 웃음도 건물 안으로 묻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클라우드가 지크하르트의 등 뒤로 슬며시 발을 옮기며 물었다.

"록사나 양의 유괴를 의뢰하고 사주한 패거리에게 페인 중령님의 행방을 물으면 된다고 했지? 동일범의 소행인거 확실한가?"

“그렇다고 하더라. 근데 넌 왜 내 뒤에 숨냐?”

“혹시 유탄이라도 날아오면 안 되잖아.”

“…….”

“난 연약한 정신계 센티넬이라서.”

“…….”

지크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든 말든 클라우드는 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얼른 내 방패가 되라고 무언으로 요구하였고 그는 결국 "어휴."하는 한숨을 흘리며 공장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혹 클라우드의 기우처럼 유탄이 날아오는 걸 우려하여 군도를 빼들었다. 클라우드는 총알이 이쪽으로 날아오면 피하면 되지 굳이 칼로 쳐낼 필요가 있느냐는 핀잔을 주려고 입이 근질근질했으나 정말 유탄이 향하면 오랜만에 묘기를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참았다.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두 사람처럼 공장 내부는 빠르게 제압되어 갔다. 시야에 들어오는 조직원들을 모조리 죽이면서 나아가던 아이릭은 포로를 잡아야 한다는 오르피어스의 외침에 노선을 바꿔 팔다리를 부러트렸다. 거반이 죽거나 행동 불능이 되었을 때 거친 인상의 사내가 록사나의 머리에 총구를 댄 채 끌고 나왔다.

“당장 멈추지 않으면 이 꼬맹이의 목숨은…… 끄아악!!"

사내의 발치로부터 불길이 치솟으며 새하얗게 그를 덮었다. 함께 끌려나온 유모가 황황히 나동그라지는 록사나를 끌어안자마자 두 사람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불길의 장벽이 유모와 록사나를 주변으로부터 차단하였다. 목이 따끔거릴 정도의 열기가 두려웠지만 절대 그 날름거리는 사나운 혀를 향하지 않는 안전한 불길 속에서 유모는 덜덜 떨며 록사나가 사람이 살해당하는 참상이나 비명을 접하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막아주며 안았다. 그녀 자신의 눈도 꼭 감은 채 구출이라기보다는 살육에 가까운 작전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귓가를 마지막 총성과 마지막 비명이 날카롭게 긋고 지나갔다.

이윽고 불길이 사그라졌다. 슬그머니 고개를 올린 그녀의 앞에 오르피어스가 허리를 굽힌 채 서 있었다.

"록사나. 괜찮니? 다친 곳은 없고?”

“삼촌!”

안겨 있던 록사나가 튕겨나갈 듯이 오르피어스에게 안기려하다가, 그의 몇 걸음 뒤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는 달려갔다.

“아빠아!!”

구해 줄 거라는 철석같은 믿음은 지니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비명과 총성이 난무하는 광경이 무섭기도 하였거니와 막상 아이릭과 오르피어스를 보니 무사히 가족에게 돌아왔음이 실감되어 록사나는 아이릭에게 안긴 채 불현듯 소리 내어 울었다. 록사나가 부상이라도 입었는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하는 오르피어스에게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던 유모가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가씨가 많이 놀라셔서 그런 걸 거예요.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구해 주서서 감사합니다, 소령님.”

그리고 긴장이 풀려 정말 기절하여 쓰러진 유모의 곁에 오르피어스도 주저앉았다. 록사나를 무사히 구할 수 있었다. 며칠 간 아이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초를 겪었으니 정신 상담도 받아야 할 테고 후유증을 떨치기 위해서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무사히 구할 수 있었다. 다치지도 않았고 해를 입지도 않았다.

그 점 하나만으로 가슴이 북받쳐 양팔을 끌어안은 채 옹그린 그에게 언제 다가왔는지 지크하르트가 슬슬 등을 쓸어주었다. 오르피어스는 지크하르트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

“……록사나를 구했어.”

"알아. 네가 구한 거다, 잘했어. 잘했어.“

오르피어스의 시선 끝에서 아이릭에게 안긴 채 눈물 콧물을 훌쩍이며 아빠가 구해 주러 오는 걸 기다렸다며 앙앙 우는 록사나와 그런 딸을 말없이 토닥거려주는 아이릭이 있었다. 지크하르트가 눈짓했다.

"안 가봐도 되냐?”

오르피어스는 고개를 저었다.

“난 록사나의 아버지가 아니니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게 네가 선택한 길이군.”

“응…….”

희미한 미소가 오르피어스의 입가에 머물렀다. 씁쓸한 것 같기도 하였고 고통스러운 것 같기도 하였지만 분명한 만족감이었다. 지크하르트는 그런 그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볼을 양쪽으로 꾹 잡아당겼다. 괴상한 발음으로 아프다고 버둥거리는 오르피어스의 쭉 늘어진 입가에서 쓰라린 미소가 사라지고 나서야 지크하르트는 손을 놓고는 벌게진 볼을 문지르며 영문을 몰라 하는 그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다 오르피어스의 옆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왠지 낯이 익어 갸웃거리던 지크하르트는 곧 총독부에서 언뜻 스쳤던 유모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이릭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우느라 정신이 없는 록사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탁월한 오감을 지닌 오르피어스의 귀에는 천둥처럼 내꽂히는 소리였다.

“록사나를 구하였다. 그러니 내 이성이 한 톨이나마 남아 있을 때 유안을 구해 와. 당장.”

안도감으로 북받쳤던 가슴이 싸늘하게 굳었다. 오르피어스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기절한 유모를 양 팔로 안아 올리고 나가는 지크하르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랐다.

밖에서는 클라우드가 의식을 잃고 일렬로 뉘어진 세 명의 남녀에게서 정보를 읽어내고 있었다. 입 안에 들이찬 흙더미에서 누가 그들을 기절시키고 밖까지 운반하였는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구강 내에 소지 중이던 독을 깨무는 것보다 바닥에서 치솟은 흙이 날아드는 속도가 더 빨랐으리라.

대개 정신계 센티넬은 자신의 눈으로 직시하여야 정신을 파고드는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거반은 그러하나, 보다 상위의 능력자는 직시하지 않아도 가능하였다. 물론 육안으로 보는 시늉을 하면 정서가 중요한 센티넬의 능력이니만큼 보다 효율적인 건 사실이다. 클라우드도 정신계 센티넬의 힘을 꺼리는 사람을 위하여 검은 색유리로 만든 안경을 쓰고 있었으나 그 또한 상위 능력자였다.

센티넬로서의 힐라리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지크하르트도 내면세계를 파악하는 능력은 그녀보다 한참 우위에 두고 있을 만큼 뛰어난 능력자인 클라우드가 난처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이상한데……. 읽히지가 않아.”

“피곤해서 그런 건 아니고?”

“아니야. 다른 정신계 센티넬이 먼저 손을 써 놓은 것 같다. 한 달 전에 헤임의 기차역에서 내리기 전의 과거는 아주 새까매.”

"과거는 나중에 그놈들을 고문이라도 해서 불게 하면 되고, 시급한 건 유안이다. 단서는 없나?”

베른하르트가 설명을 이어가려는 클라우드의 말허리를 끊었다. 낙관적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페인 중령님을 납치한 팀과 같은 일행이 맞다면, 아주 철저하게 구분하여 움직인 것 같습니다. 가이드들을 암살하고, 폭탄 테러까지는 상호 협력하였는데 그 후는 일행에서 떨어져 나온 듯 이 세 사람만 분리되어 있습니다. 두 일행 중 하나가 포로로 잡힐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게 아닐까요.”

오르피어스의 낯이 창백해졌다. 겨우 잡은 단서가 끊어진 것이다.

***

아침 겸 점심으로 나온 듯한 식사를 먹은 지 꽤 긴 시간이 지났다. 추측이 옳다면 지금은 3일째 늦은 오후일 것이다. 이 이상 지체하면 아이릭이 위험하다. 양손이 등 뒤로 고정된 자세로 묶인 유안은 무릎을 꿇은 채 구두의 뒷굽을 분리하여 안쪽의 공간에서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칼날을 꺼냈다. 그리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칼날을 끼운 채 밧줄을 살살 긁어 조금씩 잘라내는 작업은 퍽 끈기를 소모했다. 탈출이 아니라 자살을 하기 위해 결박을 풀고 있다는 현실이 어처구니가 없기는 하였으나 유안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잘 알았고, 그의 능력으로 항시 문 앞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 세 명의 보초를 뚫고 탈출하는 건 불가능에 수렴했다. 0.001%의 희망을 붙잡은 무모한 만용보다는 안전하게 자살할 수 있는 방법을 그는 택하였다.

날이 무덥지는 않으나 긴장감으로 땀이 자꾸만 흘렀다. 몇 번 바닥에 미끄러져 칼날을 놓쳐 뒷손으로 더듬어 칼날을 집다 베인 살갗이 쓰라렸다. 당장 죽을 결심을 굳혔음에도 손가락의 상처에 신경이 쓰이다니 우스운 노릇이지만.

‘영화나 소설에서 볼 때는 잘 자르던데.’

칼날이 아니라 독약을 숨겨 놨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며 손가락이 저려서 아플 정도로 밧줄을 자르다가, 잠깐 쉬고, 다시 자르기를 반복했다. 손가락 두께의 긁은 밧줄을 자르는 동시에 외부의 동향에도 주의를 기울이느라 유안은 신경을 평소보다 바짝 곤두세웠고,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소리만 드문드문 문을 넘어오던 건너편의 공기가 긴장으로 꽉 죄이는 기척을 빠르게 감지하였다. 정시 연락, 두절, 확인, 보고, 소령님, 철수. 몇 마디의 단어들을 조합하여 유안은 명료하지는 않으나 이변이 발생했다는 것은 눈치 챘다. 놈들의 이변은 곧 자신의 기회다.

서둘러 남은 밧줄을 자르는데 성공한 그는 뒤통수에 묶인 눈가리개를 풀고 문가에 몸을 바짝 붙어 섰다. 몇 분간 부산하게 연락을 반복하는 듯하던 외부의 소란은 이윽고 철수 명령으로 바뀌었다. 몇 명인가의 사람이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삐걱삐걱 멀어졌다. 유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칼칼하고 따가웠다. 방 바깥의 인원도 많이 빠졌다. 한두 명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지난 며칠 간 귀를 곤두세우고 몇 번이나 들어 가장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탁탁 다가왔다. 항상 식사를 가져오던 자의 목소리는 남자였으니 신장은 자신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칼날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땀을 닦고 손가락 사이에서 꾹 쥐었다.

“이봐, 가이드 양반. 일어……?!”

문이 벌컥 열리며 처음으로 들은 남자의 목소리는 끄극거리는 비명으로도 화하지 못하고 핏덩이를 울컥울컥 쏟아 냈다. 목젖 어림에 칼날을 쑤셔 박는데 성공한 유안은 장기간 어둠에 가려 있던 시야에는 지나치게 밝은 외부의 빛에 눈을 가늘게 뜨며 쓰러진 남자의 손에서 총을 쥐곤 어렴풋한 형체를 향해 총을 쐈다. 타앙, 탕一! 소음기가 달려 있지 않은 총은 서서히 기울어지는 햇살로 엷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방 안을 찢었다. 유안은 총이 명중하였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얼른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상대가 응사한 총알이 그가 서 있던 곳에 명중하였다. 총성이 울려 퍼졌으니 밑에서 일행이 올라올 것이다. 유안은 시야가 조금 더 명확하게 확보되자마자 놈을 겨누어 트리거를 당겼다. 타앙.

그의 오랜 친구이자 뛰어난 군인이기도 한 베른하르트는 ‘명사수는 트리거를 당긴 순간 총이 명중하였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지. 네게는 백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불가능할 턱도 없는 소리지만.’이라며 좀체 늘지 않는 사격 실력을 비웃기는 하였으나 이번에는 유안도 직감했다. 명중이다. 사내가 뒤통수로 피를 뿜으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원래는 가슴을 노렸던 거지만 결과는 같으니 잘된 거겠지.

안도의 숨을 돌리기도 전에 계단을 밟으며 올라오는 고함소리가 있었다. 유안은 "이런 액션 활극은 내 취향이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창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는 순간 여기가 3층이라면 어떡하나, 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덮쳤으나 요행히 그가 감금되어 있던 곳은 2층이었다. 바닥에 떨어지면서 발을 헛디뎌 요란하게 구른 유안은 삔 발목에 아파할 틈도 없이 끙끙거리며 일어났다. 놈들은 민가에 은신하였고, 민가에서는 추적에 방해 요소가 많으며, 또한 근방에 순행하는 기마경관이 있으리란 계산이었다.

예상대로 느닷없는 총소리에 이어 웬 남자가 2층에서 뛰어내리자 지나가던 몇 명의 사람들이 대경실색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잖아도 마피아로 여겨지는 험상궂은 치들이 들락거려 주위에서 쉬쉬하며 경원시하던 건물 중 한 곳이다.

“실례합니다! 여기에서 가까운 경찰서가 어딘가요?”

아이를 데리고 장을 보고 오는 중인 듯한 주부는 놀란 얼굴이었지만 띄엄띄엄 대답을 해 주었다.

“저쪽 골목으로 가다가 세 번째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경찰서 방향이에요.”

“감사합니다!”

유안은 삔 발목으로 위태롭게나마 달려가며 감사 인사를 등 뒤로 날렸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의 주부는 이어 건물에서 총을 들고 뛰어나오는 몇 명의 사람들을 보곤 비명을 질렀다. 본래 달리기에 자신이 없는 유안은 불편한 다리로 추적을 따돌리며 경찰서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은 회의감이 부쩍 들긴 했지만 최소 한 명이라도 이 추격전을 보고 경찰에 신고를 한다면 반푼이나마 성공이다.

그리고 신은 아직 그를, 아이릭을 버리지 않았다. 저 건너편에서 말이 다그닥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순찰 중이던 기마경관이 총소리를 들은 것이다.

숨이 차서 온통 일그러졌던 유안의 얼굴이 화악 빛났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맞닥뜨린 피해자의 보편적이고 상투적인 어구를 외쳤다.

“살려주세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두 명의 경관은 확실히 우왕좌왕하던 일반인보다 침착하였다. 그들은 우선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총을 들고 쫓아오는 무리에게 위협사격을 가하였다.

“멈추십시오!!"

총소리가 허공에 타앙 울렸다. 잠시나마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놈들은 사람 한 명을 죽이자고 일 대를 날려버린 과격하고 잔인한 자들이었다. 경찰이라고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유안은 다급히 외쳤다.

“저는 총독 각하의 이등보좌관 유안 페인으로 저들에게 감금당해 있었습니다! 빨리 서로 연락을……!”

등 뒤로부터 서늘하게 다가오는 존재감이 그의 말허리를 냉랭하게 잘랐다. 그 남자였다. 납치되었던 첫 날에 그와 몇 마디의 대화를 하였던, 그 냉정한 남자. 불길한 한기가 등골을 쑤셨다. 유안은 우선 도망치고 지원 병력을 요청해야 된다는 요지의 말을 재촉하려 입을 열었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숨 막히는 비명이었다.

며칠 전, 남자의 목소리가 스며들어 인식되었던 귓가로부터 새하얀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며 그의 반신을 집어삼켰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능력을 쓰시는 걸 힘들어하시는 도련님께 이런 부탁을 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만 딱 한 번만 눈을 감고 능력을 써주십시오. 체스터 님께 아이릭 님이 센티넬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는 잘 숨겨 왔지만 앞으로도 완전히 비밀을 지킬 수 있을지 확신은 하지 못합니다.

그분과의 각인이 새겨진 제 왼쪽 가슴을 중심으로, 가급적 의심을 사지 않게끔 왼쪽 반신 전부를 불로 태워주십시오. 건물에 화재가 발생한 척 가장하는 건 제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요. 도련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힘으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해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를 붙잡고 더없이 잔인한 부탁을 하였다. 형과 관련된 이상 아이가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유안은 불길만 봐도 질겁하던 어린아이가 희게 질린 입술을 와들와들 떨면서도 손을 내뻗어 그의 육체에 불길을 지피던 때의 절박한 눈빛을 기억하였다. 그가 오르피어스를 친동생처럼 극진히 보살펴주면서도 끝내 떨치지 못하는 죄악감의 근원이었다.

살려 달라 외치더니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는 유안을 어리둥절하게 보는 경관에게 남자가 친근한 미소를 가장하며 접근하였다.

“이 분은 제 친척 형님이신데 보시는 것처럼 불운하게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셔서요. 때때로 발작이라도 일어나면 집 안에 난폭하게 총질을 하시는데 억지로 탈출하려 하시기에 소동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형님이 발작하실 때를 대비한 경호원입니다.”

미심쩍은 대답이었으나 느닷없는 유안의 상세를 설명하기에는 적합하게 들리기도 하였다.

“아니, 잠깐만.”

경관 한 명이 불현듯 남자에게 총을 겨누었다.

"유안 페인, 기억났어. 3일 전에 수색 공문이 내려온 이름과 인상 착의였지. 당장 무…… 아악!”

무장 해제를 하려고 외치려던 경관과, 파트너의 단정에 긴장을 굳히던 경관 두 명의 입에서 비슷하게 비명이 터졌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뇌리 깊숙이 숨어진 죄의식과 그로 인하여 빚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재현하는 환영을 보며 고통스럽게 바닥을 기었고 남자는 거짓으로 꾸민 웃음을 거두며 총을 올렸다.

탕! 탕!

두 경관의 머리를 관통한 두 번의 총성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을 아비규환으로 빠트리기에 충분하였다. "내 능력을 목격당하였다. 정리해!" 가까이에서 목격하였던 사람들의 가슴과 머리부터 차례대로 핏줄기가 빗발쳤다. 평일 오후의 민가에는 외출 중인 사람이 적었고, 소수의 사람들이 두 번 다시 증언할 수 없는 시체가 되기까지는 몇 분 소요되지 않았다.

"크으……!"

그를 좀먹는 불길이 환영임을 알면서도 쉬이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유안에게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귀하 덕분에 무의미한 살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능력도 쓰고 싶지 않았는데 큰일이군요. 이렇게 되었으니 귀하도 나중에 죽어주셔야겠습니다. "

전혀 급박함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대꾸하며 유안의 양 다리에 세 발의 총을 쏘았다.

“으아, 아아악!!"

"말씀 드렸죠? 목숨만 붙여 놓으면 된다고.”

직접 육체를 꿰뚫는 고통이 일말이나마 이성을 수습하게 하여 유안은 불길에 일렁일렁 휩싸여 역겨운 노린내를 내며 타들어가는 손목으로 남자의 팔을 움켜쥐었다.

“……헉, 크윽! 당신! 배후가 누구야!!”

"음, 뭐어……. 사랑과 정의의 편이라고 해 두지요.”

무성의하게 지껄인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 지혈만 하고는 유안을 어깨에 둘러업었다. 허벅지와 종아리를 적셨던 피가 금세 유안의 바짓단을 검붉게 적셨다.

남자가 바닥에 둥글게 떨어져 고이는 유안의 피를 밟으며 걸음을 뗄 무렵이었다. 차가 급정차하는 거북한 마찰음이 귓전을 예리하게 후벼 파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남자의 앞을 불길의 장벽이 화르륵 가로막았다.

유안은 환영이 아닌 실체감을 지닌 불길을 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도련님…….”

세 명의 센티넬과 한 명의 가이드는 유안의 납치 사건을 담당 중인 훌리오 토레스 형사와 머리를 맞대었다. 여직 아서의 부하를 통하여 정보가 오고 갔기에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인데다 센티넬이 세 명이나 수사에 관여하였다는 사실에 훌리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그는 현명하게도 불필요한 호기심은 드러내지 않았다.

유괴 사건의 공범이라고 절반의 진실을 말하며 그들의 의식에서 캐낸 몇 안 되는 정보나마 알려주자 훌리오는 고민하더니 서류철을 뒤져 한 장의 몽타주를 꺼냈다.

"에베르차 소령님. 공범들의 기억 속에 이 남자는 있었습니까?"

클라우드가 탄성을 질렀다.

"아, 있습니다! 네! 제일 많은 비중을 갖고 있던 자였습니다."

"누굽니까, 그 사람?”

의아해하는 모두에게 훌리오는 차분히 설명했다.

“범인들이 6인승 차를 몰았던 건 기억하시지요? 차는 버려진 채 발견되었습니다만 그만한 차는 외부에서 들이기보다 헤임에서 매입하였을 가능성이 커 헤임 내의 자동차 판매소에 사진과 구매 시기를 일일이 확인하였습니다. 이 주 전쯤 차를 구입한 사람을 찾았고, 그 사람의 몽타주가 이 남자입니다.”

30대로 추정되는 남자는 지금 당장에라도 어딘가의 클럽에 출입하여도 어색하지 않을 듯한 최신 유행의 고급 양복을 정갈하게 입고 몽타주 너머의 건너편을 매서운 눈매로 노려보고 있었다.

“상당히 고급스럽고 단정한 어휘를 쓰는 남자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값비싼 6인승 차를 구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에야 몽타주 복사본을 일선에 배부하여 탐문하라고는 하였으나 아시다시피 저희 쪽 인력이 너무나 부촉한 상황이라…….”

훌리오가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범위를 좁힐 다른 정보는 없으십니까?"

정황을 잘 모르는 클라우드를 제외한 세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아서가 있었다면 3일이 지나기 전에는 기밀 유지를 위하여 이등보좌관이 실종된 평범한 선에서의 수사를 지속하였을 터이나, 이 자리에는 아서가 없었고, 오르피어스는 1초라도 빨리 유안을 구하여야 했고,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에게 동의하였고, 베른하르트는 애초에 유안이 일반인으로 위장하는 것부터 반대한 오랜 친구였다.

암묵적인 동의가 오가고 베른하르트가 입술을 뗐다.

“우선 저희 쪽의 추정에 따르면 납치범 일행은 시내에 은신 중이고, 최소 인원이 10명 이상입니다. 또한 베르바니 패밀리와 이 외의 건으로 결탁하기도 하였습니다.”

“10명이 넘는 인원이 사람 하나를 감금한 채 은신 중이라면 어딘가 집을 빌리든가 해야 했을 텐데…….” 

"외부에서 유입된 자들이고요.”

곰곰이 생각에 잠긴 훌리오에게 클라우드가 첨언하였다.

"유입 초기에는 호텔이나 여관에 머물렀다고는 하여도 단기간에 적당한 집을 빌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번엔 부동산을 뒤져봐야 합니까?”

지크하르트가 염려하며 물었다. 단서가 끊겼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 오르피어스는 입을 열면 억누르고 있던 것이 폭발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손목을 움켜쥔 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피아가 관계되어 있다면……. 잠시만요,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습니다.”

훌리오가 회의실을 비우자 오르피어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초조감에 입술만 깨물 뿐 분위기를 누그러트릴 한담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10분 후에 돌아온 훌리오의 낯에는 약간이나마 화색이 돌았다.

“베르바니 패밀리가 보스가 쓰러진 후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지역구와 결탁한 마피아는 의외로 당장 허물어지지는 않는 법이죠. 현재로서는 놈들에게 베르바니가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을 가능성이 제일 큽니다. 베르바니를 잘 아는 동료에게 물어보니 조직의 주된 세력권은 리비에 거리와 팍세 거리입니다.”

40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를 하나씩 뒤져봐야 하는 형국에 비해서는 범위가 크게 축소되었다. 전투 능력이 일반 군인의 수준인 클라우드를 제외하고 오르피어스와 베른하르트가 두 구역을 한 명씩 나뉘어 조사팀에 합류하면 될 터이나 군의 월권행위를 훌리오에게 어떻게 납득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렇지만 훌리오는 베른하르트가 대표하여 설득을 시도하기 앞서 먼저 시원스럽게 말했다.

"윗선의 사정이 있으신 거겠지요? 자이넷 중령님과 벨포드 소령님이 센티넬이라고 하셨으니 저희 수색 팀에 한 분씩 와주십시오. 대신에 후일 책임 문제가 불거지면 저는 손을 때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처음 수색 명령이 떨어졌을 때부터 심상찮은 느낌은 있었으니까요."

훌리오는 고개를 내젓고는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하라고 당부하였다. 클라우드가 그 밖에 눈에 띈 두어 명의 몽타주를 몽타주 화가와 작성하는 동안 수색 팀은 정비를 갖췄고, 지원 병력도 서에서 대기를 끝냈다.

오르피어스와 지크하르트는 훌리오와 같은 팀에 배속되어 리비에 거리의 수색을 맡았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탄 차의 운전을 지크하르트가 하였다.

“……틀리지 않았겠지?”

지크하르트만이 옆에 남게 되자 오르피어스는 그제야 입술을 열었다. 록사나를 구하였다는 기쁨도 잠시, 다시금 착 가라앉은 음성이 씁쓸하여 지크하르트는 속력을 더하였다.

"맞길 바라야지."

"유안만 찾고 나면 앞으로 네게 크게 의지할 일은 없을 거야. 내가 많이 불편할 텐데 아파트에서 나가도 괜찮아."

창밖으로 향한 얼굴을 고정한 오르피어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지만 대신 헛숨만을 삼키며, "그래."하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필요하게 되면 연락할게."

"알았다."

대화의 끝에 서름한 침묵이 내렸다.

서로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한 채 엔진이 가동하는 소리만이 침묵에 무게를 더하였다. 잘게 떨리는 턱이 지그하르트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오르피어스는 리비에 거리에 가까워지자 느닷없이 외쳤다.

"총 소리……! 총 소리가 났어!"

센티넬의 오감은 범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지크하르트는 놀랐으나 두 번 캐묻지 않고 앞선 훌리오의 차를 앞서며 질주하였다. 다음번의 총소리는 지크하르트도 들었다. 총소리가 들린 골목으로 핸들을 꺾으며 들어간 그들은 주차하자마자 오르피어스는 나동그라지듯이 튕겨 나가 시야에 거리를 넣었다.

부상을 입은 유안을 발견한 건 반사적으로 길을 막은 후의 일이었다.

"유안! 이 멍청아!! 애도 아니고 납치 따위를 당하면 어떻게 해!!"

유안은 여전히 남자의 환영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지크하르트도 이어 차에서 내렸다. 몽타주와 같은 얼굴을 지닌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부하들과 유리되어 눈앞에 홀로 센티넬을 대적하고 있음에도 남자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평연히 말을 걸었다.

“귀하가 벨포드 공의 아우인 오르피어스 벨포드입니까?”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인질이 의미 없다는 것도 알겠지? 난 너만 깔끔하게 태워서 죽일 수 있어. 유안 내려 놔.”

"곤란한 일인데요. 벨포드 공만큼은 아니겠으나 저에게도 페인 중령은 절실히 필요한 분인지라."

남자가 짐짓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어깨에 둘러맨 유안의 다리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환상통과 육체의 직접적인 고통에 허덕이면서도 유안은 그 사실을 의아해 하였다. 시간을 끌면 불리해지는 건 이 남자일 텐데 왜 무의미한 신경전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자신만' 환염에 빠트렸던가. 정신계의 범위는 양 극단이다. 일정한 타깃, 또는 무작위의 광범위. 체스터나 힐라리아의 경우처럼 전자가 대다수이고 후자는 소수이다. 남자의 능력이 후자라면 유안만이 아니라 두 명의 경관도 동시에 환영을 겪었어야 옳았다. 그들과 자신의 차이점이라면??

유안은 번연히 외쳤다.

"도련님! 이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시면 안 됩니다!”

남자가 희소하였다.

“정신이 맑지 않을 텐데도 거기까지 눈치를 챈 겁니까? 역시 중령님은 살려서 보낼 수는 없겠군요. 칭찬해 드리고 싶지만 한 발 늦었습니다.”

오르피어스가 나선 이상 납치 건은 해결된 바나 다름없기에 다소 방심하던 지크하르트는 갑작스러운 유안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오르피어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렇게 쫓던 범인을 앞에 두고도 우뚝 굳은 채 아연한 눈동자만을 허공의 어딘가에 고정하였다.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가늘게 열리며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엄마?"

“젠장! 오르피어스!!”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를 확 당기며 몸을 숙였다. 오르피어스의 머리가 있던 곳 부근에 총알이 날아왔다. 홀스터 벨트에서 총을 빼들고 응사했다. "윽!" 오른손을 맞은 남자가 총을 떨어트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오르피어스의 의식이 산란하여 일렁이던 불길은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센티넬이냐?! 환영을 풀어!!"

총구가 정확히 머리를 겨누고 있음에도 남자는 반쯤 실신한 유안을 불길을 넘어 온 부하에게 건네며 피가 묻은 어깨를 툭툭 털었다.

“그보다는 당신은 아무린 이상이 없다는 점이 저에게는 더 놀랍군요. 흠결이 없는 단단한 정신이라니 제가 제일 꺼려하는 유형입니다.”

"헛소리 닥치고!”

지크하르트의 음성이 사나워졌지만 무기를 손에 쥔 사람은 이쪽이라는 양 남자는 여유롭게 명령했다.

"공격해. 5분 이내로 철수한다."

빌어먹을. 지크하르트는 욕설을 씹으며 속히 오르피어스를 안은 채 주차한 차 뒤로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차체로 총알이 쏟아졌다. 놈들을 처리하는 건 손쉬운 일이나 오르피어스가 문제였다. 오르피어스의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이 잡혀 있지 않고 다른 세계를 헤매는 양 열에 들뜬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엄마, 아빠, 미안해…….

"저 새끼 무슨 능력인거야! 제기랄!!”

착실하게 응사하여 한 명 씩 수는 줄이고 있었으나 그가 먼 곳에서 총질에 열중하는 사이 주범으로 짐작되는 놈과 유안이 먼저 도망치면 헛수고였다. 그렇다고 제정신이 아닌 오르피어스를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 방치하고 놈들을 추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안달복달 시간만 죽이는 사이에 음파가 높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일단의 경찰차가 도착하였다. 골목은 이내 총소리들이 요란하게 뒤엉켰다.

“저놈들이 맞는 거죠?"

무전으로 서둘러 지원 부대를 요청한 훌리오가 대피한 차 뒤로 허리를 굽히며 달려왔다.

"지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벨포드 소령님이 시간을 끌어주서야…… 하는데, 상태가 안 좋아보이십니다?” 

“놈들에게 센티넬이 있습니다.”

지크하르트는 이를 갈며 오르피어스를 흔들었다. 유안의 추측에 따르면 목소리가 매개체인 것 같으니 당장은 총 소리에 묻혀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겠지만 그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답답해 죽겠네! 이 자식아, 정신 좀 차려!! 정신이 나가려면 한가할 때 나가든가!! 여기 지금 총알 날아다니거든?!!"

복장이 터져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지크하르트에게 훌리오도 동감했다. 최소가 10명이라고 하더니, 젠장, 인원이 너무 많았다. 마피아는 놈들에게 집 한 채 정도가 아니라 세 채 이상을 내 준 모양이었다. 과연 지원 부대와 팍세 거리 수색 팀이 올 때까지 붙잡아둘 수 있을까. 훌리오는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하였다.

오르피어스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가 무한히 죽이고 살해하였던 어머니가 생전처럼 환한 웃음으로 양 팔을 벌렸다. 주체하지 못할 그리움이 다리를 움직이게 하여 한달음에 달려가 어머니의 품에 안겼지만 그는 이후의 수순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그에게 어머니를 직접 살해하게 한다.

‘엄마, 미안해. 미안. 나 때문에…….’

어머니가 울먹이는 어린 아들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품었다.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은 아버지가 온화하게 미소하였다.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남편이기도 한 ‘진짜’ 아버지였다. 두 동생이 까르륵 웃으며 그를 놀렸다. 오빠, 울어? 옛날엔 안 그랬는데 요새는 아주 그냥 울보가 되어서 돌아왔대요~

아버지의 수완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를 저주하며 끔찍하게 죽는 대신 변함없는 상냥함으로 보듬었다. 아가, 네 잘못이 아니란다.

어머니였다. 아버지의 일그러진 환상이 투영하는 어머니가 아닌, 진짜 그의 어머니였다.

‘엄마…….’

오르피어스는 간신히 경직되었던 마음을 느슨히 녹이며 마음껏 어머니의 따스한 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와 맞닿은 신체로부터 활활 타올랐다. 사방이 새하얀 화염으로 가득 차고, 여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울어대고, 아버지가 당황하여 도끼로 문을 쾅쾅 내려찍었지만 그 문 너머까지 불길이 넘실거렸다. 사방으로 확장된 감각이 제멋재로 날뛰며 아우성을 쳤다.

언제부터일까.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르피어스는 그것이 더 끔찍했다. 아버지와 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얗고 하얀 불길만이 참혹한 정적이 가라앉은 집 안을 너울너울 감돌았다.

‘넌 정말 쓸모라고는 없구나.’

최초의 공포와 최초의 두려움과 최초의 복종을 인식시킨 '아버지'가 비웃었다.

‘하다못해 내 눈을 10년 동안 속였던 네 어미의 요악스러움의 반이라도 닮아 보아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 자체가 그의 정신을 두드려 부수고 헤집으며 짓밟는 무기이자 흉기였다. 오르피어스는 그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 지도 모르면서 망연하게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을 반복하며 매달렸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는 잘할게요. 뭐든지 할 게요. 버리지만 마세요…….

‘난 널 이해할 수가 없다. 내 가족을 죽였으면서도 어떻게 날 좋아할 수 있지? 넌, 나를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잖아?’

미안해. 미안해. 오르피어스는 한 번도 그에게 닿지 못한 사죄를 반복했다. 미안해. 나를 용서하지 마. 증오하고 원망하고 혐오하고 나를 난도질 하여도 좋아.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너의 지당한 권리니까.

하지만 끝내지는 말아줘. 제발.

“지크하르트…….”

찬물에 얼굴을 처박으면 정신이 돌아올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지크하르트는 반색하며 화색이 도는 얼굴로 오르피어스를 바라보았다.

"정신 드냐?! 내가 누군지 알겠어?"

"지크하르트."

"그래, 인마! 네 얼굴이 이렇게 반가워 보이기는 처음이다!”

“소령님의 의식이 돌아오신 겁니까?”

훌리오마저도 기삐하며 빨리 작전에 나서달라고 재촉하였다. 오르피어스가 의식을 회복하였으니 자신과 합세하면 베른하르트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이유도 없다. 총탄을 장전하고 일어나려는 그의 팔을 오르피어스가 덥석 붙잡았다. 무심코 돌아본 지크하르트는 멈칫했다. 오르피어스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안 죽을 게. 네가 말하는 대로 절대 자살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어, 음? 으엉?”

급박한 와중에도 홀리오의 얼굴이 묘하게 되었다. 지크하르트는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오르피어스를 짤짤짤 흔들었다.

"무슨 헛소리야! 너 아직 정신 덜 돌아왔냐?!"

"사실은 누나한테 널 뺏기는 것도 싫었어. 네게 의지할 일이 없을 거란 말도 거짓말이야. 끝까지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널 좋아해서, 미안해."

지크하르트에게 증오 받는 건 당연했다. 그의 권리였으며, 마땅히 자신이 감수해야 할 업이었다.

그럼에도 제일 두려운 건, 모든 걸 결착하여 없던 것으로 되돌린 그의 무심이었다. 그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지 못하며, 삭막하고 건조한 문서상의 서명으로만 남게 되는 형식상의 관계였다. 과거에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며 구축하길 바랐던 관계였으나, 지금은 그의 고통을 알면서도 구축하기를 원하지 않는 관계다. 끝까지 지독한 이기심이었다. 그리고 그 이기심까지도, 지크하르트가 혐오하길 원했다. 무관심보다는 혐오일지언정 감정이 지속되는 게 나았다.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 앞으로도 계속 좋아하게만 해 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크하르트의 옷깃을 붙잡고 흐느끼는 오르피어스를 멍청히 응시하던 훌리오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가이드라고는 들었지만 두 분 그런 관계셨습니까? 분위기를 깨서 죄송합니다만, 상황 파악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 아니……. 그게…….”

오르피어스에게 절대 있을 수 없던 저돌적이기까지 한 진솔한 고백에 당황하여 버벅거리던 지크하르트는 목덜미까지 벌겋게 붉히며 훌리오에게 물었다.

"이 녀석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은데 어, 어떻게 하죠?”

그걸 왜 나한테 묻냐는 까칠한 대답이 마누라와 별거 중인 그의 입에서 튀어나갈 뻔하였지만 다년간의 사회 경험이 훌리오의 충동적인 반문을 잘 참게 해 주었다.

"잠자는 공주님을 깨우는 키스라도 해 주시던가요.”

대신에 시큰둥한 대답을 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지크하르트가 뭐라도 잡고 보자는 급한 심정으로 정말 오르피어스에게 키스하는 것까지 목격해 버린 훌리오는 두 사람에게서 신경을 끄고 현장에 집중하기로 작심하였다.

오르피어스가 눈썹을 깜빡였다.

"……하아."

제일 먼저 인식한 건 목덜미를 긁적이며 시선을 외면하는 지크하르트의 한숨이었다. 멍하니 눈썹만 깜빡이던 오르피어스의 뇌리로 방금 전까지 환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자신의 추태가 생생하게 살아났다.

잠시 후 실로 앙칼지기까지 한 살기등등한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저 자식, 죽일 거야!!!”

유안을 우선 후방으로 보내고 서서히 거리를 물리며 철수를 준비하던 자들의 머리 위로 느닷없이 수십 장의 유리가 동시에 깨지는 새된 소리와 동시에 수백 개의 유리 조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비명이 분분히 터지고 총설이 멎었다. 그들이 혼란에서 벗어나 시야를 확보하였을 때에는 오르피어스가 길목의 한중간에 서 있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하얀 불길을 갑주처럼 두른 그가 이 이변의 주인공임은 명백하였다.

"승패는 결정됐어. 유안을 넘겨."

사늘하게 직시하는 물색 눈동자에 화염이 일렁였다. 백염의 빛을 받아 더욱 흰 빛이 도드라진 그의 은발을 뒤에서 지켜보며 지크하르트는 내심 생각했다.

‘허세 잘 부리네.’

오르피어스의 장점은 강대한 화력이고, 단점도 강대한 화력이다. 단번에 죄 태우며 쓸어버리는 건 능하지만 한 명 씩 선별하며 세심하게 영역을 조절하는 건 익숙하지 못하다. 즉, 그의 힘을 본격적으로 발휘하면 놈들은 물론이거니와 유안까지 태워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남자가 엄폐물 뒤에서 상체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페인 중령은 이미 빼돌렸습니다만.”

"거짓말하지 마. 이곳은 이제 내 영역이야. 유안은 네 뒤에 있어."

단호하게 말을 받는 오르피어스의 발끝으로부터 손가락 한 마디에도 미치지 않는 높이의 불길이 잔디처럼 넓게 펼쳐져 있었다. 골목과 면한 집까지 뻗어나간 불길로 빈집을 감지하고는 안쪽에서 발화하여 유리를 전부 깨트린 오르피어스의 능력은 전장을 거치며 착실하게 다듬어진 성과였다. 이에 수반하는 어마무시한 손해배상은 차치하고도.

숨 가쁘게 오가던 총성이 멎고 양측은 모두 긴장한 채로 오르피어스와 남자의 대화를 들었다. 지크하르트는 언제라도 강습할 수 있도록 느슨히 손을 늘어트렸다.

"저에게도 영역은 있습니다. 귀하를 비롯하여 후방의 경관들까지 모두 제 힘이 미치는 영역 안입니다만……." 거기까지 말하다 남자가 오르피어스의 몇 발자국 뒤에 서 있는 지크하르트를 보았다. "이제야 생각이 났습니다만 그 유명한 지크하르트 카시야스 대령이군요. 하필이면 능력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카시야스 대령이라니 난감하게 됐습니다."

“난감할 거 없어. 항복해.”

이상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남자가 고의로 느적느적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불필요한 사설을 불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오르피어스도 직감하고 있으리라. 의도가 무엇이든 시간을 끌면 불리한 쪽은 자신들이었다. 지크하르트는 총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군도를 빼들었다. 이동하면서 쓸 무기는 총보다는 칼이 편했다. 오르피어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불길이 길섶에 화르륵 피어났다.

“마지막 경고야.”

남자가 짧게 웃었다.

"저도 그렇게 멋진 한마디를 하고 싶은데 생각이 안 나는군요.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 두겠습니다.”

오르피어스와 남자의 대화에 주의가 집중되어 있던지라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외곽에서 작업하는 부하의 모습을 지크하르트는 그제야 목격하였다. 놈의 목표는 저것이다. 인식이 닿자마자 지크하르트는 늘어트렸던 왼손을 올려 총을 쐈다.

"납치는 실패했지만 살려두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낫겠죠."

남자의 첫마디가 떨어졌을 때 탄환은 부하의 머리를 관통하였으나, 그가 피를 뿜으며 바닥에 채 쓰러지기도 전에 옆에 있던 다른 부하가 스위치를 눌렀다. 화약이 연쇄 폭발하며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골목 건너편에서 해일처럼 일어난 흙의 파도가 놈들을 덮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

단신으로 먼저 도착하여 유안을 탈환할 틈을 노리던 베른하르트가 한발 늦게나마 능력을 사용하여 폭발이 골목 전체로 번지며 오르피어스 일행까지 덮치는 것은 막았으나 폭심에 있던 납치의 주범들은 생존하지 못하였다. 놈들은 처음부터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있었다. 정체가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라지만 실로 광적이리만큼 극단적인 충성심이었다.

“아니면 절박한 이유가 존재할 수도 있지. 이를 테면 인질이라든가. 전원 세뇌는 힘들겠지만 놈들의 배후에 의식까지 손댈 수 있는 정신계 센티넬이 있는 건 확실하니, 머릿속의 스위치만 약간 다르게 켜 주면 단기적으로 사용할 맹목적인 광전사는 만들 법하다.”

베른하르트가 소견을 말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원 부대는 만약을 대비하여 주변을 순행한 후 돌아갈 예정이고 팍세 가의 수색 팀과 합류하여 흙더미에서 시체들을 한 구, 정확히는 파탄한 신체 부위를 하나씩 파냈다. 훌리오는 사정을 설명하고 새 지원 팀을 요청하였다. 그들을 지나치며 성큼성큼 걸어간 베른하르트가 반쯤 흙에 파묻힌 자동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흙이 반대편으로 우르르 무너져 내렸고 차체의 밑으로부터 한 쌍의 다리가 엿보였다.

“유안이에요?!”

오르피어스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이에 베른하르트는 다리를 붙잡고 끄집어냈다. 유안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상처에 흙이…… 잘못 들어가면…… 큰일, 나…….”

"조잘거리는 걸 보니 죽으려면 멀었구만."

그 말 한마디를 겨우 하고 기절한 유안을 바로 눕힌 베른하르트가 상처 부위의 흙을 툭툭 털어주었다. 놈들도 유안의 생명을 붙여야하는 목적은 동일하였던지라 응급처치는 잘 되어 있었다. 오르피어스가 숨을 헐떡이며 멍하니 물었다.

“살아있네요?"

“살아있어야지. 유안부터 차 밑으로 밀어 넣고 힘을 발동한 거니까. 길가의 흙바닥에 쓰러져 있어서 요행이었지. 그보다 각하께 빨리 연락해."

“……아! 네!!”

유안을 구하였다는 사실에만 의식을 쏟고 있던 오르피어스가 다시 헐레벌떡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자신이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흙더미에서 시체를 끄집어내기는 싫었기에 지크하르트도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유안의 몸에 묻은 흙이나 털어 주었다. 새 지원 팀과 함께 앰뷸런스도 도착할 것이다. 유안뿐만이 아니라 경관 중에서도 사상자가 많았다.

"그럼 다 끝난 겁니까?”

“유안도 록사나 양도 무사히 구출하였으니 일단은 끝나지 않았겠습니까. 뒷수습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야 이제부터 시작이겠지만요. 대령님도 벨포드 소령을 건사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마지막 한마디에 지크하르트는 애매하게 웃었다. 훌리오는 작전이 종결되고도 그들을 흰 눈으로 보고 있었다.

베른하르트의 말처럼 뒤처리는 산적해있었지만 거기까지는 지크하르트의 소관이 아닌지라 그는 쉽게 신경을 끊었다. 그보다 연봉을 더 많이 받는 위치에 있거나 행정적으로 더 똑똑한 사람들이 알아서 일을 처리할 것이다. 그가 받은 임무는 유안의 무사 구출이었고 앰뷸런스로 병원에 들어서기까지 호송하였으니 이만하면 성공적으로 귀결되었다고 자부해도 되리라.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오르피어스에게 키스한 것뿐인 느낌도 들었지만 결과가 좋으니 다 좋았다.

"수술은 잘 됐고?”

"응. 총알도 무사히 척출하고 응급처치가 빨라서 생명에 지장은 없대. 수술 끝나고 형이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나왔어."

"다행이네.“

지크하르트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팔다리를 쭉 폈다. 병원으로 직행하여 휴게실 의자에 내도록 않아 있었더니 뼈마디까지 쑤시는 것만 같았다. 놈들의 배후가 누구이며 어떻게 보안을 뚫고 기밀을 알게 되었는지 등등의 보다 심각한 사안들도 담당자들이 알아서 열심히 고뇌할 테니 지크하르트는 유안이 무사하다는 전언에 일체의 관심을 다 거둘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서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밀린 일거리를 처리하며 목전까지 당도한 합동군사훈련만 끝내면 한동안 여유롭다.

"……짐은, 내일 쌀 거야?”

오르피어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지크하르트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그전에 제일 중요한 문제가 여기 있었지.

“아까는 버리지 말라며.”

“그, 그건―――!!"

부지불식간에 소리를 꽥 질러 버린 오르피어스가 화닥닥 외면하며 뺨을 붉혔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래. 술주정이라고 생각하고 잊어줘.”

"……하긴, 네 술주정은 진저리가 나긴 하지."

정신없는 일들이 휘몰아쳐서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지크하르트의 미간에 어두운 기운을 떨어트렸다.

읏챠,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의사가 곡해 없이 전달될 수 있도록 또박또박 발음하였다.

"한 번만 더 확실하게 말해 봐. 내가 가길 원하는 거냐, 아니면 네 곁에 있길 원하는 거냐.”

“…….”

오르피어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것을 보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가길 원한다면 오늘 당장 짐 싸서 나오고 네가 연락할 때마다 안아줄 거고, 곁에 있길 원한다면 지금까지처럼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마. 간단한 말이야. 어렵게 생각하지 마.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크하르트는 헛기침을 한 번 하였다.

"나는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너에게 선택권을 미루는 거야. 네가 원하는 길을 선택하면 어느 쪽이든 따라 줄게. 복수든 보신이든 무엇이든, 평생을 이기적으로 오직 날 위해서 나 좋을 대로만 살아왔던 내가, 난생처음으로 이타적인 마음을 갖는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고."

그의 입술이 만들어 내는 단어 하나하나를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시선이 입술을 따라 움직이다, 천장으로도 향하고, 의미 없이 휴게실의 의자며 창문을 훑기도 하다가, 바닥으로 꺾이고, 재차 올라와 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는, 새빨갛게 물들며 그의 어깨에 파묻혔다. 옷깃을 꾹 부여잡은 손등에 파르란 핏줄이 돋았다.

지크하르트는 음, 하며 고개를 외로 슬쩍 꺾었다가 바짝 달라붙은 오르피어스의 뒤통수를 툭툭 두드렸다.

"집에 가자.”

“……으응.”

안으로 쪼그라드는 것 같은 희미한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그의 한 걸음 뒤에서 오르피어스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따라왔다. 정말 오랜만에 깨끗이 씻고 두 발 뻗고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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