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0)

8.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어째서 일을 해도 해도 해도 안 줄어들지?’

단 3일, 3일 동안 휴가도 아니고 무단결근도 아니고 특무를 받아서 일을 하고 왔을 뿐인데 一 실질적으로 한 일은 키스뿐이라는 사실은 망각하기로 하였다 一 산더미처럼 쌓인 일감은 책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연봉 적게 받아도 되니까 강등당하고 싶다. 사실 내 몸뚱이 하나 가지고 생활하는데 대령 연봉까지는 필요 없는 데.’

군적은 박탈당하지 않고 대위 정도까지 3계급 강등만 가능한 실수가 뭐가 있을까 현실도피적인 망상을 거듭하였다. 하다못해 3일 간의 특별 수당이라도 나오면 좋을 테지만 기대하였다가 특별 수당의 끄트머리도 안 보이면 슬플 테니 그냥 기대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사병이 접수처에서 받아 온 우편물을 분류한 닉이 지크하르트의 앞으로 온 우편물들을 가지고 왔다.

"대령님. 우편물은 어디에 둘까요?"

지크하르트는 턱짓으로 3일 동안 쌓여있었지만 뜯어볼 여유가 없어 방치해 둔 책상 귀퉁이를 턱짓했다. 발신처를 읽으며 다시 차곡차곡 정리하던 닉이 두툼한 서류 봉투 크기의 우편물을 내밀었다.

“저, 이건 왠지 빨리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엉? 누가 보낸 건데?"

닉에게서 우편물을 받은 지크하르트는 침음하였다. 발신인은 E라고만 적혀 있었으나, 그 옆에 찍혀 있는 건 키스 마크다. 어딜 봐도 여자의 입술로 보이는 키스 마크. 범인이 누구인지는 뻔했으나, 닉이 빨리 확인하라고 할 만했다.

서류들을 밀어놓고 바로 우편물을 뜯으려다 부하들이 있는 사무실이 적당하지 못한 공간임을 자각하고는 반대편 손에 담뱃갑을 들고 일어섰다.

“담배 좀 피우고 오마.”

등청하고 처음으로 엉덩이를 뗀 지크하르트는 우두둑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뼈마디를 문지르며 사무실을 나왔다. 담배도 피울 수 있고 인적도 드물고 방해도 받지 않을 장소는 당장 한 군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령부 청사의 뒤뜰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대충 주저앉아 담배를 입에 물며 엠마가 보낸 우편물을 뜯었다. 정갈하게 타이핑이 된 조사 보고서를 주르륵 넘기며 눈으로 훑었다. 썩 기대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오르피어스의 신변에 관한 자질구레한 조사들이다.

자주 가는 음식점, 옷가게, 술집, 그동안의 가이드와 사귀었던 애인들의 신상 따위는 하등 궁금하지 않았다.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막지 않기로 유명한 오르피어스였으니 두 명, 세 명을 한꺼번에 만나고 다닐 때도 더러 있었다고 들었다. 본인은 한 명에게만 충실한 연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딱히 숨기지 않았던지라 애인들의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펼쳐지기도 하였고 가게에서 우연히 목격한 적도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애인들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싸우거나 말거나 따분하게 하품하며 아이스크림만 핥아 먹고 있는 모습이 기가 찼지만, 그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 멀찍이 돌아서 볼일을 보러 갔었다.

지크하르트로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심리이긴 하였으나 벨포드라는 이름으로 허영심이 충족되고 물질적으로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들어주는 오르피어스의 지갑 덕에 애인이 몇 명이 있든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만족하는 여자도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와는 지난 10년 동안 도드라진 교분을 하지 않았고, 또 하지 않으려 확실하게 선을 긋기는 하였으나 워낙에 여러 가지 소문을 뿌리고 다니는 녀석이라 본의 아니게 주워들은 정보는 제법 있었다. 그리고 아마 자신과의 관계 또한 호사가들의 귀와 입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을 것이다.

그간 타인이 무어라 입방아를 찧든 직접적인 피해만 없으면 무시하였던 지크하르트는 자신과 오르피어스를 둘러 싼 소문이 문득 궁금해졌다. 스스로도 오르피어스와의 관계를 설명하거나 정립할 수 없는데 타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 그것이 괜히 궁금했다.

‘하지만 사춘기 어린애도 아니고 나랑 오르피어스가 무슨 관계처럼 보이냐고 물을 수도 없잖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던 손이 딱 멎었다. 지크하르트는 담배를 물고 있다는 것마저 잊고 뚫어지게 종이를 응시하였다. 자신이 문맥을 잘못 파악한 건 아닌지 재차 확인하였으나 문장은 명료하였고 그의 문해력이 갑자기 퇴보한 것도 아니었다.

― 아이릭 벨포드와 다년간의 동침 정황이 있음.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정신계 센티넬의 능력을 동원하였을 법한 사용인의 증언과 몇 가지의 정황 증거들이 별첨 되어 있었으나 지크하르트의 눈은 그 하나의 문장에서 떨어지지 못하였다.

거의 필터까지 탄 담배로 손가락이 뜨거워져 흠칫 떨어트리고 나서야 정신을 돌린 그는 종이를 탁 덮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맙소사.”

이건 자신이 따로 뒷조사를 하여 몰래 알아내도 지당한 정보가 아니었다.

확증이나 목격자가 없어 정황이라는 애매한 단어로 뭉뚱그렸지만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간 미심쩍게 여겼던 오르피어스의 언행도 납득된다. 묘하게 남자와의 정사에 익숙한 듯한 모습이라든가, 정사 중에는 힘들고 버거워도 절대 싫다며 거부하지 않는 태도 같은 것들.

지크하르트는 번연히 벽에 기대었던 등을 바로 세우고 성냥을 지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성냥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지크하르트. 뭐해?"|

크게 놀라 심장이 덜컹 떨어졌으나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여상함을 가장하며 고개를 돌렸다.

“잘 왔다, 라이터. 불 좀 붙여줘.”

다행히 자신의 목소리에서 동요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르피어스는 "라이터가 아니래두.” 작게 투덜거리기는 하였으나 순순히 그가 내민 종이 뭉치에 손가락은 얹었다. 엠마의 조사 자료는 금세 잿가루로 화하여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뭐길래 몰래 숨어서 태워?"

"음, 클라우드의 부끄러운 17살의 기억들."

“그게 뭐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였지만 오르피어스는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킥킥 웃으며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않았다.

"그러는 너는 여기 어떻게 왔냐?”

“사무실에 가니까 담배 피우러 나갔다고 해서 찾으러 왔지.” 

"휴게실도 아닌데?"

"넌 혼자 담배 피우고 싶을 때는 여기에 오잖아.”

"으음?“

떠름한 소리였다. 뒤뜰이 출입 통제된 금지구역도 아니고 단순히 사람의 발길이 잘 닫지 않는 구석진 위치이긴 하였으나, 자신이 담배를 피우려 종종 발길을 옮긴다는 사실을 일부러 떠벌리고 다닌 적은 없었다. 물론 오르피어스에게 이야기할 리는 더더욱 없다.

“……내가 널 몇 년이나 봤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건네 들을 만큼 친한 사람이 있었나 싶어 큰 뜻 없이 바라보니 오르피어스가 제 풀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시선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별 것도 아닌데 무색해하니 괜스레 자신도 쑥스러워지는 기분이라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 녀석이, 제 형이랑 섹스를 했다고? 그것도 몇 년이나?

납득이 가면서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힐라리아의 성정은 지크하르트도 아주 많이 겪고 잘 안다. 아이릭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였던 그녀이니만큼 오르피어스가 아이릭과 단순한 형제가 아닌, 그녀로서는 절대 이루지 못할 관계를 구축하였다는 걸 눈치 채면 불 같이 노하여 오르피어스에게 되갚음해 줄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 옳고 그름이나 정당성을 떠나, 힐라리아이기에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고 지크하르트는 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르피어스는 분명히, 자신에게 경멸 받기 싫어서 대답해 주지 않을 거라 하였다. 아이릭과의 관계가 밝혀지면 경멸 받으리란 걸 알면서도 지속하였다는 뜻인가.

“…….”

아마도, 자의는 아닐 것이다. 그의 인생 전반에 자의는 하나도 없었듯이.

아이릭의 강요에 의하였다 하여도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면은 있었다. 아이릭은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었음에도 산속 깊은 곳의 수도승이 아닌가 싶을 만큼 염문이라고는 일체 없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욕정을 위하여 이복동생을 겁간한다는 건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화, 났어?"

지크하르트의 말이 없자 오르피어스가 핼끔 시선을 올렸다.

"일부러 너 쫓아다니면서 몰래 엿본 건 아니고, 여기에서 담배 피우는 건 우연히 목격한 건데, 그 뒤로도 네가 가끔 이쪽 방향으로 가는 걸 봐서, 응, 그래서 알게 된 거야. 진짜야. 이제 너한테 거짓말 안 해."

주섬주섬 이야기를 주워섬기며 그의 안색을 살피는 오르피어스의 머리에 손바닥을 턱 얹으며 한숨을 감추었다.

‘널 경멀하지 않아.’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그렇다면 몰래 그의 뒷조사를 하였으며 그가 밝히고 싶지 않았던 치부를 강제로 까발려 백일하에 드러냈다는 사실도 말해야 한다.

"화 안 났다."

"으응."

오르피어스가 슬며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걸 못 본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근데 나는 왜 찾았냐?”

“점심 같이 먹자구. 이따가 오후에 일찍 조퇴하고 형한테 가봐야 하거든. 저녁까지 먹고 오게 될 것 같아서 점심이라도 같이 먹었으면, 해서…….”

평연히 시작하였던 목소리는 본격적인 용건으로 접어들수록 점차 낮아지더니 말꼬리에 이르러서는 흐물흐물 잦아들었다.

"아, 안 돼?"

조심스럽게 물었다가, 번거로우면 거절하라는 둥 횡설수설 손을 내젖는 그의 머리를 꾹 눌렀다. 힘에 밀린 오르피어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야."

"어……. 어?"

"나중에 내가 엄청나게 밉거나 화가 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딱 한 번만 용서해 줘. 뺨을 치든 불로 태우든, 아 태우지는 못하겠구나, 아무른 뭘 해도 반항 안 할 테니까."

“너한테 그럴 일 없어.”

무슨 헛소리냐는 듯 그가 단호하게 내질렀으나 지크하르트는 굴하지 않고 대답을 재촉했다. 

"사람 사는 일은 모르잖냐.”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뭐어…….”

"고맙다."

미심적은 기색으로 끄덕거리는 오르피어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어디 갈래? 생각해 놓은 데는 있냐?”

"응?”

“밥 먹으러 가자며.”

"아, 응!”

오르피어스의 낯에 화색이 확 돌았다. 한 꺼풀만 벗기니 참 알기 쉬운 놈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와 나란히 뒤뜰을 벗어났다. 책상에서 그를 반겨주고 있을 일거리는 일단 식사 후로 전부 미뤄두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고, 그에게는 일보다 밥이 우선이었다.

이제까지 소파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마다 느끼는 거지만, 소파에서 낮잠도 아니고 밤마다 잠을 자는 건 잠을 자도 잠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허리도 아프고 온몸이 뻐근하니 쑤셨다.

그렇지만 지크하르트와 같은 침대에 자는 건 더 고역이었다. 또 밤새도록 잠을 못 잘 게 뻔하니까.

어젯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잘 채비를 하며 이불을 거실로 들고 가는 그의 어깨를 지크하르트가 붙잡고는 침대를 가리켰다.

「불편하게 소파에 눕지 말고 침대에서 같이 자자니까. 둘이 자기 좁은 침대도 아닌데 뭘 그렇게 피해 다니냐?」 

「안돼」

「손가락 하나 안 댄다니까」

「그게 아냐. 내가 널 덮칠 것 같단 말이야」

절반의 핑계와 절반의 진심이 깃든 변명에 지크하르트는 머쓱한 얼굴이 되더니 손을 놓았다. 잘자라는 인사만 하고 거실로 도망쳐 와서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 같은 일이 반복될 텐데 침대를 집에 하나 더 가져다 놓는 게 낫지 않을까. 침대 새로 넣는 김에 불필요한 물건들도 정리하고, 지크하르트의 용품도 사고…….

이것저것 상상하다 보니 이게 바로 동거 중의 살림살이 장만인 것 같아 오르피어스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에도 뺨을 슬쩍 붉혔다. 그리고 양뺨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욕심을 내면 안 된다. 지크하르트가 모든 걸 끝내지도 않고, 그를 무시하지도 않고, 지금까지처럼 지붕 아래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히 꿈만 같은 상황이었다. 이 이상을 바라는 건 감히 바라서는 안 될 과욕이었다. 세 시간 전만 하여도 지크하르트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함께 식사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냥……. 창고 대용으로 대충 쓰던 작은 방 정리하고 침대만 새로 갖다 놔야지.’

턱을 주억거리며 결심한 오르피어스는 남은 길을 빠르게 걸어갔다. 복도에서 마주친 사용인들이 허리 굽혀 인사하였다. 손님방의 문을 똑똑 두드리니 곧 들어오라는 대답이 넘어왔다.

"우와, 도련님. 이게 며칠 만이에요?"

"나는 널 어제도 봤거든?”

반가움이 뾰족한 빈정거림이 되어 튀어나왔다. 오르피어스는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 와서 앉았다.

수술이 끝나고 특별히 센티넬에게 치료까지 받아 후유증 없이 회복한 유안은 지난밤만 병원에서 보내고 오전 중에 퇴원하였다. 납치, 감금되었던 3일 동안 몸에 부담이 많이 갔으니 며칠 쉬라는 진단을 받아 퇴원 후 곧장 벨포드 저택으로 돌아온 유안은 착실히 의사의 말에 따라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먹고 자기를 반복하였다.

"오히려 피부에 윤기가 도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투실투실 살 쪘네."

시답잖은 한담에서 유안이 무사히 돌아왔음이 또 한 번 실감되었다. 대화의 끝에 망설이던 오르피어스가 입술을 떼려하자 유안이 입을 턱 막았다.

"아, 잠깐, 잠깐. 잠깐만요. 혹시라도 미안하다든가 잘못했다든가 그런 말씀을 하시려는 건 아니죠?”

널 혼자 두고 간 나 때문에 납치되었으니 미안하다, 라는 요지의 말을 꺼내려던 그는 샐쭉하니 입을 막은 손을 쳐냈다.

"이젠 말도 못하게 해?”

"도련님이 차 안에서 사과하셨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일찍 죽는다고 하니까 그런 짓 좀 하지 마세요. 굳이 저한테 사과 안 하셔도 아이릭 님이 엄청나게 닦아세우셨을 테니 그걸로 퉁치죠, 그냥. 도련님을 가시라고 보낸 건 저이기도 하고.”

"……진짜 형한테 죽는 줄 알았어."

"안 봐도 훤합니다.”

유안이 싱긋 웃었다. 오르피어스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하다는 듯 상체를 부르르 떨었다.

"형이 그렇게 화내는 것도 처음 봤구……. 형도 사람이었나 봐."

"이건 도련님께만 알려드리는 비밀인데, 그래 봬도 도련님이랑 같은 피가 절반은 흐르고 있어요.”

“거짓말이지?"

아이릭을 도마에 올려두고 시시덕거리고 있자니 정말 아이릭이 들어왔다. 유안이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었다.

"잘 오셨어요. 안 그래도 아이릭 님을 욕하던 참이었는데."

"계속 해."

유안 바로 옆의 침대가에 앉은 아이릭이 어깨를 으쓱했다. 싱글거리는 유안과는 달리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었음을 인식하고 있는 오르피어스는 그냥 입을 다물고 도리도리 저었다. 한동안은 꽤 아이릭의 눈치를 살피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가이드가 관련되었다고는 하여도, 아이릭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새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릭의 가이드가 유안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좋든 싫든 체스터의 아래에서 동고동락하였던 그의 아우들과 페인 남매, 엘빈, 베른하르트, 아서 등의 최측근이 전부다.

"정보가 어디에서 새었을 것 같나?"

"작은 형 아냐?”

오르피어스는 툭 내질렀다.

"아예 글래스팅에 없으니 수사망에서도 쉽게 벗어날 수 있겠다, 아이릭 형의 바로 아래니 계승권에서도 유리하겠다, 무어래도 작은 형은 벨포드를 싫어하잖아? 양자 입적도 원하지 않았다고 하고."

“도젠은 아니다.”

퍽 주관적인 오르피어스의 의혹을 유안은 단호하게 부정하였다.

"설마 가족이라서 믿는다는 밍숭맹숭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도젠 형이 배신했다면 내가 혼자 리벡에 가서 정리하고 올게."

“아버지를 숙청한 후에 도젠에게 원한다면 파양해 주겠다고 제의했던 적이 있었지만 녀석이 거절했다. 도젠은 욕심이 많은 만큼 영리하지. 벨포드라는 그늘 아래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걸 알고 있어. 그렇기에 녀석이 내 눈에서도 벗어나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도록 일부러 중앙으로 보낸 것이고.

게다가 불확실한 권력을 위하여 날 배신하는 위험을 감수할 녀석도 아니다. 나를 죽이는데 성공한다고 하여도 가문의 어르신들이 양자인 도젠을 새 종주로 인정할 것 같나? 록사나가 성인이 될 때까지 널 후견인으로 세우겠지. 물론 너보다는 도젠이 훨씬 유능하고 믿음직하다마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에 기인한 아이릭의 부정에 오르피어스는 "꼭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인다니까.”라고 구시렁거리면서도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다, 슬며시 고개를 외로 꼬았다.

“글래스팅에도 없고, 형 비밀도 아는 사람은 한 명 더 있잖아.”

“누구지?”

“형 애인.”

“…….”

팔짱을 낀 아이릭의 손가락이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오르피어스는 여차하면 몸을 피할 준비를 했고, 유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국왕 폐하의 지지 기반은 벨포드로 대표되는 글래스팅과 서거하신 전 1왕녀 전하의 세력인데, 1왕녀 전하를 섬기던 사람들의 완전한 충성은 얻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즉위하신 지 몇 년 되지 않았고 본래 3왕녀이셨던 만큼 정통성도 부족하신지라 여직 중앙에서 국왕 폐하 본인의 위신이 강고하지 못한데 구태여 글래스팅을 잘라낼 작정은 하지 않으실 거라 짐작되네요.”

"그건 국왕과 신하로서의 관점이고, 사적으로는 형 애인이잖아. 남녀 관계는 얼마든지 변심할 수 있다구.”

"한마디만 더 해라. 턱을 비틀어 주마.”

속삭임에 가까운 조용한 목소리였으나 상대가 아이릭이면 협박이 아니라 실질적인 위해가 가능하기에 오르피어스는 대번에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니베이아 님과 내 관계는 니베이아 님이 즉위하셨을 때 다 끝났다."

“문제는요…….”

분위기를 환기하며 유안이 넌지시 말을 붙였다.

"아이릭 님 개인의 신상에 관한 기밀만이 아니라 정보부의 보안까지 같은 사람에게 새어나갔다는 점입니다.”

"아서를 의심하는 건가?”

"반드시 과장님을 용의 선상에 놓기 보다는, 본의 아니게 흘러나갔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자는 뜻이에요."

"……정보의 유출에 센티넬이 관여하였다면 모두가 용의자잖아. 아, 난 아니야. 절대 아니야."

오르피어스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그런 동생을 무시하며 아이릭은 추측을 계속하였다.

"우선은 납치의 주범으로 추측되는 그 남자의 신상을 밝히는 게 급선무인가.”

"최근의 정보는 새지 않았으니 정보부에 당장 구멍이 뚫려 있는 건 아닐 테고요. 그 남자로부터 거꾸로 더듬으면 가닥이 잡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매우 낙관적이야."

"희망이 생기시죠?"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거행한 걸까? 기껏 빼낸 정보를 몇 개월 묵혀두기까지 하면서. 범인이 속한 곳의 정보부에서도 안가의 위치는 바뀔 거 아냐?”

빈정거림을 태연하게 받아치면서도 나름의 합당한 추측을 거듭하는 유안이나 아이릭과는 달리 머리 쓰는 일에는 영 자신도 없고, 훈련도 받지 못하였으며, 명령 이외의 것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기에 그냥 생각나는 대로 툭툭 내뱉기만 하던 오르피어스의 마지막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모였다.

"어, 아냐? 내가 뭘 또 잘못 말했어? 우리만 바뀌는 거야?"

두 사람이 빤히 쳐다보자 괜히 주눅이든 오르피어스가 알아서 백기를 들었지만 유안은 자못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목적과 배후만 추적하느라 미처 시기를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네가 구출되지 않았으면 요 며칠 안에 난 폭주하고, 죽었겠지. 그리고 근래에 있을 행사라면…….”

"합동군사훈련이네요. 국왕 폐하께서 친감하시는."

아이릭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누르며 침음하였다. 

"끝난 게 아니군.”

***

가이드 암살 사건은 공표되지 않았으나 세 자리의 사상자를 낸 테러부터 총독 가족의 유괴 사건이 연이은 헤임의 민심은 분분하였다. 일각에서는 합동군사훈련의 취소를 논의하였으나 국왕 부처의 친감 일정이 반년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으니 헤임의 사정만으로 쉬이 무산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국왕 베아트리체 2세는 헤임의 위문이라는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하였고, 합동군사훈련은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일 없이 예정대로 닷새 후에 거행되게 되었다. 범인들의 배후가 닷새 후에 무엇을 노리는지는 여전히 불명이었다.

오르피어스는 아이릭, 유안과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괜스레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지크하르트와의 일도 그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그 이상의 결과로 그의 현실이 되었고, 유안과 록사나도 무사히 구출하였다. 여전히 배후는 깜깜하였으나 본래 오르피어스는 머리로 생각하고 지휘하는 명령권자가 아니라 하달된 명령을 이행하는 수족에 불과하니 그가 구태여 고민할 사안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유 없이 머리가 자꾸 아파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난간에 기대어 잠시 쉬었다. 그간의 스트레스가 쌓였던 탓일까.

록사나를 유괴하였던 단 세 명의 포로는 정보부 별관의 지하에서 취조 중이었다. 완곡하게 취조라 표현하였지만, 실상은 고문이다. 계단을 내려가 사병이 열어주는 문 안쪽으로 들어가자마자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양 속이 뒤집어져 오르피어스는 입을 막고 몇 번 헛구역질을 하였다. 회반죽을 바른 벽과 바닥의 나뭇결 사이사이마다 긴 세월 밴 피냄새와 인간의 살점 따위가 끼여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몇 번을 와도 익숙해지지 않는 살벌한 내음이 오싹했다. 살인을 하면 살인을 하였지 고문은 영 내키지 않는다.

아이릭은 생존자 중 한 명과 마주앉아 있었다.

무자비한 고문에도 절도 있다든가 우아하다는 수식어를 담을 수 있다면 지금의 아이릭에게 어울리리라. 그는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앉아있기만 하였다. 그리고 정확히 1분 간격으로 의자에 결박된 남자의 뼈마디가 손가락 끝부터 하나씩 부러졌다. 뼈가 꺾이고, 부러진 뼈가 피부를 뚫는 소리는 인간의 본능적인 혐오감을 일으켰으며, 그럴 때마다 터지는 쉰 비명은 공포를 부채질하였다. 비명이 겨우 잦아들 무렵에 뼈가 부러지고, 새로운 비명이 천장을 긁는다. 그럼에도 남자는 실토하지 않았다. 팔뚝 어림까지 차근차근 부러트리고 난 후에는 뼈와 살을 곤죽이 되도록 짓뭉개는 수순임을 알고 있는 오르피어스는 그 광경까지 보기 전에 서둘러 아이릭의 어깨를 탁탁 쳤다.

"형. 갔다 왔어."

아이릭이 잠자코 의자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건너갔다. 겨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지만 피냄새와 어우러진 남자의 비명이 잦아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거북하게 벌렁거리던 심장이 일말 가라앉았다.

"명색이 총독인데 직접 고문하다니 부하들이 체통 없다고 안 해? 형이 해야 할 일은 아니잖아."

"시일이 촉박하니 기만 꺾어주고 갈 거다. 자료는?"

오르피어스는 옆구리에 끼고 온 서류 봉투를 건넸다. 오시안 왕국에서 센티넬과 가이드는 군속으로 센티넬 센터에 등재되고 관리된다. 오르피어스처럼 능력이 눈에 띄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는 원소계나 물리계 센티넬과는 다르게 정신계 센티넬은 그 능력의 활용성에 비례하여 기밀에 부친다. 체스터가 센티넬과 가이드의 자료를 압수하여 사적으로 활용하였던 이후로 센터는 더욱 철저히 자료를 관리하였고 오르피어스가 사본이나마 받아올 수 있었던 것도 아이릭이 친필 서명한 명령장이 아니었으면 불가하였다.

"센터에서는 정확한 능력을 모르니 확답은 못하겠지만 그 남자가 글래스팅의 센티넬은 아닐 거라고 추정했어."

"넌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나?”

"응.”

"한 명씩 확인해라. 그전에 아서에게 보고하고.”

"내가? 이 많은 사람들을?"

"싫으냐?”

아이릭은 그다지 언성을 높이거나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지은 죄가 있는 오르피어스는 알아서 꼬리를 내렸다.

“싫은 건 아니지만…….”

벨포드 저택에서 센티넬 센터에 들렀다가 정보부로 오니 땅거미가 으슥하게 퍼질 시간이었다. 지크하르트에게 저녁을 먹고 온다는 얘기는 했지만 되도록 일찍 들어가고 싶었는데 이래서야 이른 귀가는 물 건너갔다.

"형은 알아낸 거 있어?”

아이릭이 보지도 않은 서류 봉투를 도로 오르피어스에게 돌려주었다.

“고문에 견디는 훈련까지 받은 놈들이다. 쉽게 입을 열 것 같지는 않군.” 

대답하며 그는 다소 피곤한 기색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이런 경우에는 힐라리아가 심문에 적합한데 말이다."

"……누나라면, 아예 정신을 내키는 대로 휘저을 수 있으니까."

두통이 조금 더 심하게 머리를 울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힐라리아의 이야기까지 해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가 고막이 아닌 두개골 안에서 직접 뇌에 때려 박는 것처럼 울리는 듯하였다. 잊지 마, 오르피어스. 네가 해야 할 일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오르피어스는 가능하다면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를 야유하듯이 깔깔깔 희롱하며 뇌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죽었으면, 제발 사라져 줘. 내가 지크하르트의 센티넬이 되어서 비웃고 싶은 거야? 누나는 죽었어. 우스운 얘기를 하는구나. 너에게 너의 것이 존재하기는 했었니? 먹이를 받아먹으며, 발을 핥고 짖으며 명령대로 바닥을 기어 다니렴. 그게 너잖니?

“……어스. 오르피어스!”

얼음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오르피어스는 크게 몸을 떨며 창백한 시선을 올렸다. 아이릭이 가만히 인상을 찌푸렸다.

“많이 피곤하면 가서 쉬어라. 채근하지 않으마.”

오르피어스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마른세수를 하였다.

"아냐. 그냥 조금, 어지러워서……. 약 먹으면 될 거야."

그렇게 하면 상태가 호전되는 양, 스스로를 설득하며 되뇌고는 "텐서워즈 대령님한테 주라고 했지? 가서 일할게." 중얼거리며 벗어났다. 공기 중에 진득하게 가라앉은 피비린내 때문에 더 머리가 아픈 걸지도 몰라. 나가서 맑은 공기를 쐬면 나을 거야. 거듭하여 자신에게 속삭이며 급히 계단을 올라갔다. 두꺼운 철문이 등 뒤에서 닫히고 평시보다 많이 분주하다는 차이만 있을 뿐 큰 변화가 없는 일상의 틈으로 들어오자 비로소 꽉 막혔던 가슴이 트이며 큰 날숨이 나왔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두통도 덜했다. 힐라리아는 죽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어떠한 위해를 끼칠 수 없는 존재였다. 난 괜찮아. 두 번 다시 지크하르트를 빌미로 누나에게 조롱당하지 않아. 오르피어스는 이를 꾹 악물며 정보부 본관 건물로 갔다.

지크하르트의 책상에도 서류가 많이 쌓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아서의 책상은 더하였다. 과장을 보태자면 서류 너머에 사람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도 겉으로는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보관실의 자료들까지 꺼내다 옮겨 놓았는지 바닥에도 즐비하게 서류가 쌓였고, 종이 먼지로 공기가 탁했다. 오르피어스는 작게 기침하며 힐끔 힐끔 인사했다.

"오르El어스인데요, 형이 센터에서 받아온 자료를 보여드리라고 해서요."

“제기랄!! 어디에서 뚫린 거냐고!!”

아서가 책상을 쾅 내리치며 역정을 냈다. 그 서슬에 서류 더미의 옆에서 아슬아슬하게 책상 귀퉁이에 걸쳐져 있던 커피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요란한 쇳소리가 났다. 자신에게 노여워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무심코 어깨를 흠칫 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내심 오르피어스는 끄덕끄덕 동의하였다. 닷새라는 촉박한 시일 안에 어디까지 해결되고 어디까지 파악할 수 있을지 혼날 까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꽤 회의적이었다. 물론 아이릭이니만큼 순순히 당하고 있지는 않을 거란 믿음도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언제가 되었든 아이릭이라면 레베카를 살해한 배후를 밝혀낼 것이다. 자신은 그때까지 충실히 명령만 이행하면 되었다.

"그래서, 뭐라고?"

"센터에서 받아온 글래스팅의 센티넬과 가이드 자료요."

한 번 보기라도 하라고 서류 봉투를 서류의 산 중 하나의 꼭대기에 얹었지만 아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리저리 책상을 뒤지더니 오히려 서류철 두 개를 그에게 주었다. ……왠지 일거리가 더 늘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뭐예요?"

"정보부에서 파악 가능한 뮈르달과 중앙의 센티넬과 가이드다. 그리고 이건 에베르차 소령이 읽어낸 기억을 토대로 작성한 범인 일행의 몽타주이니 글래스팅 내의 센티넬을 확인할 때 함께 대조해라. 센티넬이 한 명 뿐이었다는 확증은 없질 않나? 외부 유출은 안 되니 이 자리에서 확인하도록."

퇴청이라는 단어는 이로서 완전히 사라졌다. 명령은 곧 복종이라는 인식이 확실히 뇌리에 새겨진 그이니만큼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괜히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건 역시 집에 지크하르트가 있기 때문일 터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풀려 있지는 않았는데, 지크하르트가 자신의 마음을 되돌려주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부정하지 않아주었다는 점만으로도 해이하게 느슨해진 마음이 지크하르트를 좇는다.

‘이런 건 안 돼.’

더 이상은 과욕이다. 오늘 내도록 자신에게 이른 한마디를 또 한 번 더 되새기며 오르피어스는 아서가 지정해 준 곁방으로 들어갔다. 평소에는 아서가 따로 서류를 정리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방인지 천장까지 높이 빡빡하게 쌓인 서류 보관함이 벽마다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지진이라도 나면 쏟아지는 서류들의 산에 파묻히기 십상인 위치에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그를 맞았다.

"클라우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온갖 인상을 쓰고 끙끙거리며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리던 클라우드의 표정이 오르피어스를 확인하고는 대번에 썩었다.

"이게 여기 왜 있어?”

숫제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려는 발언이었지만 그러한 반응에 일일이 세심하게 상처 입고 화를 낼 만큼 연약한 신경을 가졌다면 학교에서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잖아도 클라우드는 11년 전의 그 사건 이후로 오르피어스를 바퀴벌레나 들쥐라도 되는 양 질색하였으니 새삼스러운 반응도 아니었다.

오르피어스는 클라우드의 표정이 썩거나 말거나 책상에 난잡하게 널린 종이들을 슥슥 밀어내고는 자신의 서류를 턱 얹어 놓았다.

종이에는 다양한 스케치가 그려져 있었다. 시내의 특정 정경, 주로 기차역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스케치는 정밀 하지는 않았으나 이곳이 어디인지, 어떤 사람이 있는지는 파악이 가능하였다. 그림에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이번 사건의 범인들이다.

일전에도 목격하였던 작업이기에 어디에 쓰이는 용도의 스케치인지는 짐작이 갔다. 클라우드가 범인의 심상을 읽어낸 장면들을 종이에 그대로 베껴 그리고 있는 것이다. 빛이 어느 방향에서 어떠한 각도로 비치는지, 장소가 어디 인지, 날짜를 특정할 수 있는 기물이 있는지, 클라우드는 읽어낸 모든 것들을 그려 냈다. 무의식중에 놓칠 수도 있는 단서들을 따라가다 보면 적어도 놈들이 어느 지역을 지나는 기차를 타고 왔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을 위해 클라우드는 팔자에도 없던 드로잉 수업까지 이수해야 했다고 들었다.

"볼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엄청나게 아날로그라니까.”

“닥쳐. 네 일이나 해.”

지휘자 격이었던 남자의 옆에 곱슬곱슬한 머리를 늘어트린 여자를 그려 넣고, 금발이라는 첨언까지 작성하며 클라우드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죽거리기는 하였으나 자신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한두 마디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가 오고 갔던 방에는 이내 연필이 종이 위를 긁는 소리와 종이들이 팔랑팔랑 넘어가는 소리만이 잘게 떨어졌다.

범인들의 몽타주와 센티넬의 사진을 대조하는 작업은 퍽 단조롭고 평균적인 눈썰미만 있으면 특별한 기술도 필요 없는 작업이지만 기밀이라는 게 문제였다. 손이 비는 사병에게 명령할 수 없는 성질의 일인 것이다. 세심하게 살피고는 있지만 따분한 단순 작업에 하품이 나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배도 고파.’

"야."

멍청하니 저녁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호명되었기에 오르피어스는 무심코 ‘밥 먹고 할래?’라는 대답을 할 뻔하였다.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눈두덩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하품하고 있었지만 클라우드의 낯은 진지하였다.

"지크하르트는 잘 지내냐?”

"어제 직접 봤잖아."

“너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건 없는지 묻는 거라고.”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봐?"

오르피어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잡아먹는 게 아니라 지켜야지. 네 가이드잖아?"

"날아오는 총알까지 쳐내는 괴물을 내가 무슨 수로 지켜."

“등신아. 물리적으로 지키는 거 말고.”

원래 편하지도 않은 사람인데다 대화마저 자꾸 꼬이자 클라우드는 더 피곤한 얼굴이 되었다.

"네놈 뒤통수에 하나 불어 있는 거 있잖아. 가이드를 차례대로 죽이는 저주이니 뭐니 하는 거. 유령이든 저주든 뭐든 간에 지크하르트가 해가 될 일은 없도록 네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 새끼야."

아, 그렇지. 클라우드의 말을 성의 없이 받으며 사진을 읽던 눈이 뚝 멎었다. 오르피어스는 이마에 대고 있던 주먹을 꾹 쥐었다.

그날 조제가 자신의 아파트를 방문하였다면 아마도, 아이릭과 동침하던 걸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열쇠가 있었으니까. 어째서 자살까지 하였는지는 추측할 수 없었으나, 몇 시간 안 되는 사이에 그녀에게 발생하였을 일이라고는 이 외에는 짐작되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힐라리아가 알았다. 아이릭의 침실을 정돈하는 사용인에게 들었는지 정신을 훔쳤는지 그녀가 알아 낸 경로는 중요하지 않았다. 힐라리아의 귀에 정보가 들어갔고, 그녀가 자신을 캐물었을 때 바로 부정하지 못하고 새파랗게 굳은 기척을 감지하였다는 결과가 중요하였다.

힐라리아는 격노하였다. 오빠를 꾀어낸 남창이니 뭐니 하는 천박한 단어의 토설로 그녀의 분노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오르피어스는 아이릭에게 꽤 쓸모 있는 패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오르피어스의 가이드를 겨냥하였다. 직접 손을 써서 한 명을 죽게 만들어 아이릭에게 엄히 꾸중 들은 힐라리아는 다음부터는 교묘하게 스파이로 위장하여 오르피어스가 처단하게끔 수를 썼다. 그녀의 속셈을 알면서도 오르피어스는 자신의 가이드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네트가 알았다. 자신의 가이드를 해하던 힐라리아가 죽었으니 자네트와는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아이를 임신하기 전까지는.

일부러 임신을 노린 건 아니었지만 아이를 낳게만 해 달라고, 혼자서 잘 키우고 양육을 빌미로 협박하거나 친자식으로 받아달라고 애걸하지는 않을 테니 낳게만 해 달라는 그녀를 보며 조제에게 청혼하려 결심하였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사랑하며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겉으로나마 비슷하게 가정을 꾸리며 그녀와 지금까지처럼 평탄하게 함께 지낼 수 있을 거란 소박한 꿈이었다.

다음 날 새벽 무렵 귀가한 오르피어스는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그를 기다리던 자네트에게 청혼했다. 그러며 말했다. 난 어렸을 때 가족을 죽이면서 발현하였고 이 사건으로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벨포드 가로 끌려왔어. 아버지는 나를 아주 혹독하게 다루었지. 처음으로 사람의 피를 묻힌 게 겨우 10살 때야. 우습지 않아? 정말 단기간에 써먹고 폐기할 용도 겸 취미 생활로 날 키우신 것 같아. 감히 아버지의 뒤통수를 치고 달아난 여자의 아들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다가 형이 아버지에게 날 건네받았고 이번에는 형의 개가 되어 아버지를 죽였어. 내 가족은 내가 다 죽였다구. 이런 나와 내 자식을 감당할 수 있겠어? 흥분과 기쁨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었던 자네트의 뺨은 밀랍처럼 창백해졌다.

게다가 나는 여자보다 남자를 먼저 알았어. 첫 가이드가 나보다 어리기도 한데다 몸도 약해서 17살 때야 그 애를 안을 수 있었는데, 사실 그전에 남자를 알고 있었지. 누구였을 것 같아, 내 상대가? 거의 반사적으로 도리질하는 그녀에게 오르피어스는 짧게 말했다. 형이야.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던 반응이기도 하였다. 자네트의 얼굴에 머문 경멸과 혐오감과 거부감은 마치 그림과 같은 뚜렷한 색채를 지니고 그녀의 얼굴을 덧칠하였다. 오르피어스는 자신이 꾸었던 소박한 바람을, 실상 전혀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반응은 그에게 있어 충격적이지도 않았고 배신감도 들게 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이런 반응이 정상이라구. 내가 어떻게 겉모습뿐이나마 평범하게 살 수 있겠어. 속으로 끄덕끄덕하며 그녀를 보내었다. 가 봐.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그녀는 가라고 내젓는 그의 말에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주섬주섬 케이프를 걸치고는 지갑을 챙겼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곧장 밖으로 나가려다, 뒤를 돌아보았다. 죄송해요……. 오르피어스는 말없이 습관적인 미소로 그녀를 보내주었다. 그것이 자네트의 마지막이었다.

허황되기까지 한 평범한 바람과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기대가 아닌 기적이었다. 엉망으로 제조되어 단춧구멍조차 꿸 수 없는 단추가 번듯한 옷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시초부터 엉망으로 비틀린 자신이 평범하게 웃고 울고 떠들며 따분하기까지 한 평범한 일상을 영유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크하르트에게는 절대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경멸을 받기도 싫었다. 아이릭과 잦은 관계를 갖는 것도 아니었고 흔적이 남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테니 자신만 방심하지 않으면 그에게 발각될 리는 없었다.

지크하르트에게만은, 숨겨야 해. 오르피어스는 이를 사리물었다.

"지크하르트는 절대 안 죽어."

"네가 어떻게 장담하냐.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기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하필이면 너 같은 놈 가이드로 지크하르트가 되었다는 것 자체를 참을 수가 없어. 그 녀석 인생을 얼마나 망치려고 하는 거야?”

"……내가 뭘 어쨌는데."

"너도 양심이란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너랑 엮여서 잘된 사람이 있기나 해?"

“…….”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오르피어스의 고개가 슬몃 아래로 꺾였다.

"제기랄. 차라리 엉뚱한 여자에게 정신 팔려 있으면 헤어지라고 뜯어말리기나 하지 이건 그럴 수도 없고." 

"……지크하르트에겐 안 그럴 거야. 아니, 안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지킬게."

"그걸 어떻게 믿어?”

"내가 지크하르트를 좋아하니까.”

뒷말은 거반 충동에 휩싸인 채 튀어나갔다. 쪼아대고 의심하는 클라우드를 향한 반발심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클라우드는 눈앞에 삼두육비의 괴물이라도 튀어나온 양 놀란 대경실색한 기색을 전혀 숨기지도 못하며 입을 떡 벌렸고, 그가 충격을 수습하는 동안 오르피어스는 왠지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그 거짓말, 진짜야?"

"의심 가면 내 머리 읽어봐. 특기잖아?”

"맙소사. 지크하르트는 네 누나의 약혼자였다고.”

맞아, 이게 보편적인 반응이겠지. 씁쓸한 기분을 삼키며 고개를 올렸다.

"누나보다 내가 먼저 만났어."

“그렇게 따지자면 너보다 내가 먼저 그 녀석 만났는데……?”

“너도 지크하르트를 좋아한다는 소리야?”

"미쳤냐?!"

하도 기가 막힌 헛소리를 들어 빽 소리 지른 클라우드는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이 제일 놀라 흠칫했다.

"지크하르트의 인생을 망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조지려고 작정했냐? 무슨 원한이 그렇게 크길래? 그 자식이 너한테 대체 뭘 잘못했는데?“

“…….”

자신의 이미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박혀 있는지 아주 뼈저리게 재차 깨달은 오르피어스는 쳐들었던 얼굴을 도로 바닥으로 내깔았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바라는 것도 없고, 억지로 내 마음을 강요하지도 않을 거야."

“개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있네.”

오르피어스로서는 굳은 결심을 확인하며 대답해 준 것이지만 돌아온 건 가차 없는 비웃음이었다.

"넌 지금 지크하르트람 동거 중이잖아. 아예 멀리 떨어져서 지내는 것도 아니고 같은 집에서 날이면 날마다 부대끼면서 사는데 욕심이 안 생길 거라는 게 말이나 되냐? 사람 마음이 그렇게 자로 자른 듯 재단이 돼? 네가 진짜 바라는 게 없다면 제일 먼저 지크하르트랑 떨어져.”

바로 부정할 수 없었던 건 오늘 하루 내도록 자신의 머릿속을 왔다 갔다 몽글몽글 감돌던 어렴풋한 욕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음에도.

"……그럼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내가 여기서 네놈 연애 상담이나 해 주게 생겼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아니라 지크하르트에게 당장 짐 싸들고 나오라는 충고야. 젠장, 어쩌다가 저런 놈한테 걸려서.”

흡사 꽃뱀에게 잘못 물린 친구의 신세를 탓하는 어조라 더 할 말도 없고 변명할 기운도 없는 오르피어스는 잠자코 하던 작업을 계속하였고 클라우드도 툴툴거리기는 하였으나 연필을 다시 쥐었다.

연필이 사각거리고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정적을 매우고 있을 때, 오르피어스가 손끝으로 클라우드의 팔뚝을 툭특 건드렸다.

"저기, 클라우드. 물어볼 게 있는데."

"웃기지도 않은 연애 상담이라면 집어치워.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넌 안 돼. 다른 사람들 다 돼도 너만큼은 안 돼."

"그건 나도 알아. 묻고 싶은 건 지크하르트가 아니라 이 여자라구."

몽타주를 코앞까지 들이밀자 그제야 클라우드가 시선을 돌렸다. 예쁘장한 외모의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이 애도 범인 일행이야?”

“거기 그려져 있으면 그렇겠지.”

"하지만 좀 이상한 걸. 아무리 봐도 군인이 아닌 것 같아."

클라우드가 미간을 모으며 소녀의 몽타주를 살펴보았다. 외모의 묘사를 들으며 따라 그리기만 할 뿐이었던 몽타주 화가나, 단기간에 너무 많은 정보를 쏟아내어 세세한 곳에 눈을 돌릴 수 없었던 그가 간과하였던 점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범인 중에서도 물론 여자는 있었지만 그녀들은 머리를 짧게 치거나 행동에 불편함이 없게끔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다. 소녀는 홀로 굽슬굽슬한 머리칼을 허리께까지 길게 늘어트리고 있는데다, 무엇보다 나이가 어렸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스무 살이 되어 보이지 않는 앳된 용모다.

다급한 손이 그간 그려 둔 종이를 파라락 넘겼다. 소녀는 항상 놈들을 지휘하는 센티넬의 지근거리에서 목격되었다. 짐작되는 이유는 하나다. 클라우드는 중얼거렸다.

"……가이드였나.”

한 달 여의 작전을 나서며 센티넬이 가이드를 동행하지 않았을 리 없다.

"폭발에 휩쓸려서 죽은 사람 중에 이 여자애 있었나?"

“글쎄, 잘 모르겠어.”

"일단은 과장님께 보고 드리마."

클라우드가 급히 방을 나섰다. 오르피어스는 동글동글한 외모를 가진 소녀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 소녀가 가이드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센티넬이 자신의 가이드를 동반 자살에 동행시킬 리가 없다. 논리의 귀결이 아닌 센티넬로서의 본능적인 직감이 말했다.

결국 집에 돌아온 건 새벽 4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반쯤은 예상하였던 결과지만 몽타주의 그 누구도 자료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글래스팅의 정보부에서 뮈르달과 중앙의 모든 센티넬과 가이드의 신상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가이드로 추정되는 소녀는, 사체의 훼손이 심하고 폭발로 인해 말 그대로의 육편이 된 신체 부위도 존재하기에 그녀의 생사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며 부검의들이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애매한 대답으로 단서를 넘길 수는 없었으므로 소녀의 몽타주는 신속하게 복사되어 배부되었다. 이미 헤임을 떠났을 가능성도 우려하여 글래스팅 내의 모든 도시로 긴급 발송되었고, 헤임에서 발간되는 모든 조간신문의 1면에는 테러 주모자 용의로 소녀의 몽타주가 인쇄될 것이다. 글래스팅 내에 존재하기만 한다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래, 언제나 문제는 시간이었다.

전구가 아슬아슬하게 깜빡이는 가로등만이 반겨주는 어두침침한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온 오르피어스는 가급적 소리 나지 않게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차피 내일 아침에 정보부로 바로 가야 하니 예전이었다면 그냥 본관 휴게실 어딘가에서 잠을 잤을 테지만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적당히 널브러진 한 켤레의 구두가 그를 맞았다. 먼지가 묻고 그보다 반마디 정도 큰, 구두 한 켤레. 현관에서 지크하르트의 신발을 볼 수 있게 된 지 몇 년은 지난 것 같은데 계산하면 겨우 한 달도 되지 않는다. 이 한 달은, 그가 겪었던 지난 평생의 그 어떠한 한 달 보다 훨씬 길었다.

어둠에 눈이 익자 슬리퍼로 갈아 신고 살금살금 복도를 걸었다. 안쪽 침실문의 경첩이 삐익 하며 길게 끌리는 소리에 괜스레 가슴이 덜컹 내려않아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콩닥콩닥했다. 낮고 고른 숨소리가 잔잔하게 지크하르트의 존재감을 알렸다. 그도 퇴청이 늦었는지 옷은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그대로 침대 헤드에 걸쳐져 있었다.

발끝으로 살살 걸어 침대까지 다가간 오르피어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침대 아래의 바닥에 앉았다. 침대는 이 인용이었고, 지크하르트는 침대 안쪽에서 잠들어 있었으니 어느 정도 거리감은 있었지만 그에게는 이 거리가 적당했다. 반듯하고 선이 굵은 얼굴은 표정 없이 숙면 중이라 평소보다 나이든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고, 엄격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기도 하였다. ……역시 네가 좋아. 내도록 지끈지끈 머리를 울려대던 두통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오르피어스는 숨소리조차 닿지 않도록 침대에 얼굴을 기댄 채 조용히 잠이 들었다.

지크하르트는 자명종이 없어도 거의 비슷한 시각에 눈을 떴다. 반평생 익혔던 습관과 생활 리듬을 그의 육체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젯밤 늦게야 귀가한 탓에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아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지는 못하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그는 기지개를 주욱 켰다. 그 서슬에 손에 부딪힌 옷가지가 헤드에서 바닥으로 투둑 떨어졌다. 아, 이런. 요즘은 벨포드 가의 사용인들도 오지 않아서 빨래도 직접 해야 하는데. 바쁜 일이 끝나고 여유가 생기면 빨랫감을 담을 세탁바구니라도 하나 사 와야겠다고 하품하며 생각했다. 혼자 사는 주제에도 집안일은 전혀 안 하고 동거녀들이 정리할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했다던 놈은, 덕분에 가정부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해서인지 사람도 고용하지 않았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닌 놈이 왜 있는 돈을 제대로 쓰지를 못하나.

비몽사몽 중에 실없는 생각을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깬 지크하르트는 이러다가 진짜 늦겠다는 걱정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닥에 발을 딛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오르피어스?!”

아니 이 자식은 멀쩡한 침대 一 는 본인이 불편해서 못 자겠다고 발을 뺏으니 차치하고도 - 와 소파를 놔두고 왜 청승맞게 바닥에 웅크려서 자고 있는 걸까. 숨소리도 거의 나지 않아 죽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깜짝 놀란 심장이 벌렁거렸다. 어쨌든 이 녀석도 함께 등청해야 할 처지라 어깨를 흔들어 깨웠지만 인상만 찌푸릴 뿐 도무지 깨어나는 기색이 없었다. 지크하르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오르피어스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 군무청에는 한두 번 지각하거나 무단결근하는 게 아니니 상관없을 테고, 일련의 사건 때문에 바쁜 거라면 누군가 이 도련님을 깨우러 올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자니 번거로워서 가는 길에 샌드위치라도 하나 사서 먹자고 작정하고 욕실에서 몸을 씻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리하게 때려 대자 머리가 겨우 깨어나는 것 같았다. 훈련 기간은 열흘이니 앞으로 보름 정도만 죽었다고 생각하고 지내다 보면 어떻게든 견뎌내기는 할 것이다.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아주 혹~~시 만약에 특별 수당을 준다고 하면 수당 대신 3계급 강등 시켜 달라고 해야겠다.’

진심 어린 다짐 속에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3일 내내 총독부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예복과 정복은 완성되어 그의 사무실까지 재단사가 직접 갖다 주러 왔다고 들었다. 내도록 사무실을 비웠던 터라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어제 오후였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하지 않다 보니 잠깐 시간이 나서 정복을 걸쳤다. 신체에 딱 맞게 재단한 옷은 걸리적거리거나 불편하다는 느낌 없이 그의 움직임을 부드럽게 따라왔다. 지크하르트는 제복을 제외한 주문복이라는 것을 단 한 벌도 구비하지 못하였지만, 주문복을 맞추는 사람의 심리는 알 것 같았다.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비춰보던 그는 약간의 허전함을 느끼고는 아차 했다.

‘훈장이 없네.’

오르피어스가 제 형에게 말하여 수여하게 해 준다고 언급하긴 했었는데. 장본인이 곤히 잠들어 있는 침실문을 곁눈으로 본 지크하르트는 별다른 고민 없이 쉬이 결론을 내렸다. 사열식 때 필요하긴 할 터이나 훈장을 달지 않았다고 잘리는 것도 아니고, 그의 처소가 홀라당 다 탔다는 소문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접했으니 눈총도 덜 받을 터였다. 평소에는 얼굴 보기도 힘든 고위급 장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 고작해야 대령 하나의 존재감 따위는 모래알에 묻힌 돌멩이 하나 만큼이나 두드러지지 않는다. 있어야 하긴 하지만 없어도 나쁠 건 없다.

자신의 결론에 만족한 지크하르트는 평상 군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예복과 정복은 옷걸이에 잘 걸었다. 이번에는 불이 나지 않겠지, 설마.

기껏해야 점심 무렵에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였던 오르피어스는 예상 외로 10시가 좀 지난 시각에 어슬렁어슬렁 눈을 비비며 그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막 화장실을 가려고 나오던 참이라 문가에서 마주친 지크하르트는 놀랐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렇게 일찍 웬일이냐?”

"유안이 등청길에 집에 들러서 차에 짐짝처럼 실어다가 떨궈 놓고 갔어.”

말의 끝에 길게 이어진 하품으로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짐짝처럼 싣고 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지 세수도 제대로 안 한 부스스한 얼굴에 머리칼은 뻗쳐 있고, 억지로 꿰어 입은 듯한 군복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지크하르트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에 흡족해해야 하는 건지 그만큼 오르피어스에게 익숙해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졌다.

"페인 중령은 괜찮으시고?"

"응, 아주 팔팔해. 살이 1㎏은 찐 것 같다니까.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더니 하루만에 돼지가 됐어."

흉을 보는 건지 안심을 하는 건지 모호한 태도로 구시렁거린 오르피어스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검은 색 벨벳으로 싸고 금실과 금박으로 남부 글래스팅 성을 상징하는 사자와 한 쌍의 검을 수놓아 장식한 고급스러운 상자는 마치 떨이 상품이라도 취급하는 양 성의 없이 건네지기는 하였으나 지크하르트도 익히 잘 아는 것이었다. 오르피어스가 태운, 그것이다.

"훈장들이랑 훈장증이야. 유안이 받아 놓고 그간 경황이 없어서 너한테 주는 걸 깜빡했대.”

"아, 뭐……. 고맙다."

아예 수여식 같은 건 생략하기로 한 모양이다. 지크하르트로서도 그쪽이 훨씬 편했다. 애초에 훈장이니 서훈이니 하는 것에서 명예욕을 갖지도 못하였으니 말이다.

용건은 그뿐이었는지 인사하고 돌아가려는 오르피어스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중위, 이건 내 책상에 가져다 놔.” 닉에게 훈장함과 봉투를 휙 던진 지크하르트는 그의 군복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아예 잠그지를 말든가 이게 무슨 꼴이냐.”

정신이 없었는지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 엇나가게 채운 단추를 목깃부터 하나씩 바르게 잠갔다. 오르피어스가 급격히 숨을 들이켜는 기척이 났다. 단추를 다 잠근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가 제대로 채우지도 않고 숫제 손에 들고만 있는 벨트나 제대로 착용하라는 잔소리를 하려다 입술을 다물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이 자식 얼굴이 붉어졌을까.

"……이제 가도 되는데? 아니면 내가 갈까?"

손가락으로 화장실 방향을 가리키며 묻자니 오르피어스가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지크하르트는 갸웃했다. 생전에 하지도 않던 일을 어제 너무 많이 하더니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서 제정신이 아니게 된 건가? 스스로가 생각해도 같잖은 상상이긴 했다.

이대로 내도록 문간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우선 오르피어스부터 돌려보내려는 그에게 구원의 손길은 의외의 사람으로부터 뻗어왔다.

"오르피어스! 바빠 죽겠는데 여기서 시시덕거릴 시간이 어디 있냐!”

"엉? 클라우드?"

클라우드가 오르피어스의 팔뚝을 사납게 낚아채며 지크하르트에게도 인사했다. 오르피어스가 붉은 기가 남은 뺨을 손등으로 문댔다.

“페인 중령님은 네놈을 옛날에 떨어트려 놓고 갔다고 하시는데 코빼기도 안 내밀더니 여기서 놀고 있냐?”

"놀러 온 게 아니라 전해 줄 게 있어서 온 거란 말이야."

"아무른! 따라 와!”

비척비척 끌려가는 오르피어스의 뒤통수에 손을 흔들다 무심코 물었다. 클라우드는 오르피어스의 이름만 들어도 칠색 팔색 하는 녀석인데 이렇게 직접 끌고 가려 올 줄은.

"너네 언제부터 이렇게 친해졌냐?”

“대가리에 총 맞았어?!!!”

“어제부터.”

나란히 들려오는 대답마저 사이가 좋다. 클라우드는 두들겨 팰 것 같은 얼굴로 오르피어스를 매섭게 노려보았고 오르피어스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는 얼굴로 빤히 응시했다.

싱 대령님이 오르피어스를 볼 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지크하르트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라는 이름의 가이드 소녀가 체포된 건 몽타주가 배포되고 52시간이 지난 후였다. 특색적인 긴 곱슬머리도 어깨까지 짧게 자르고, 허름한 옷을 넝마주이에게서 구매하여 소년인 양 위장하고 빈민구제소에 숨어 있던 마리는 술 취한 부랑자에게 여자라는 게 들통이 나 욕을 당하기 직전에 경관에게 구출되었다. 배포된 몽타주와는 현저히 다른 인상착의였으나 인이 박히도록 몽타주를 들고 다니며 익혔던 경관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취조실로 끌려온 마리는 애처로우리만큼 벌벌 떨고 있었다. 저것마저 연기라면 그녀는 지금 당장 무대에 올라도 어색하지 않을 희대의 명배우일 것이다.

"이름은?"

“마, 마, 마리입니다. 나리.”

“나이는?"

"열, 열여섯이에요."

짐작하였던 것보다 두세 살이나 어린 소녀였다. 냉담한 어조로 심문하는 클라우드의 옆에 앉은 오르피어스는 콧잔등의 주근깨도 진하게 남은 앳된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뜻 없이 보고 있는 그 시선조차 바늘처럼 느끼는지 마리는 금세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누가 보아도 훈련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가이드임이 확실한가?”

“네, 네……. 원래 주인님을 섬기던 하, 하녀였는데 이 년 전에 발, 혀현해서 주인님의 가이드가, 되었어요." 

"일행이 모두 폭사하였는데 왜 너만 생존하였던 거지?”

햇볕에 그을어 엷은 갈색 빛을 띈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마리는 이까지 딱딱 부딪히며 되물었다.

"모, 모두 돌아가셨어요? 주인님까지, 전부? 다른 분들도 모두요?”

“그 주인님이라는 자가 네 일행의 유일한 센티넬이 맞다면.”

훈련을 받지 않은 평범한 소녀라는 것을 확신하여 넌지시 던진 미끼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마리가 비통한 울음을 터트렸다. 오르피어스는 허리를 깊이 숙여 탁자에 붙인 팔뚝에 턱을 괴며 물었다.

"테러 사건의 주모자들이 몰살당했다고 연일 떠들어 댔는데 신문도 안 봤어?”

“저는 그, 글을 잘 읽을 줄 몰라서…….”

클라우드가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의 발을 콱 밟았다. 진정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처 물은 질문에 마리는 정신없이 울면서도 슬픔보다 공포가 더 강하였는지 더듬거리며 대답하였다.

그녀의 센티넬은 정기 연락이 끊어져 철수하기 전에 그녀를 먼저 다음 집결지로 보내었다. 그녀 혼자 움직여야 덜 의심 받을 거란 이유였다. 은신처가 들통 날 것을 대비하여 착실하게 거듭 일러두었기에 마리는 몹시 걱정하기는 하였으나 우선 2차 은신처로 향했다. 이제까지 머물던 곳보다는 훨씬 좁고 허름한 곳이었으나 마피아의 손을 빌리지 않고 구한 집이었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렸으나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자정이 넘도록 문은 열리지 않았다. 공포감에 거의 질식하며 밤을 지새운 마리는 날이 밝자마자 원래의 은신처로 달려갔으나 그곳에서 목격한 건 사람의 통제를 엄금하는 경관들과 예의 테러범들이 폭사당하였다는 주민들의 수군거림이었다.

마리가 훈련 받은 스파이나 군인이었으면 지난밤에 일행이 돌아오지 않는 즉시 헤임을 벗어났을 테지만 두려움으로 감각이 마비된 그녀는 자신이라도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에까지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혹시 살아남은 사람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은신처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 다음날 그녀는 날이 밝자마자 자신의 얼굴이 인쇄된 신문을 보았다.

“그…… 그 뿐이에요. 저는 정말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처, 천한 계집이라…….”

“흠.”

클라우드는 짧게 코웃음 쳤다. 그녀의 사정이야 알 바 없다는 투였다.

"네 주인님이라는 자의 이름은? 그리고 넌 어디에서 왔지?“

이제까지 무엇을 물어도 곧이곧대로 대답하던 마리는 주먹마저 꾹 쥐며 도리질을 했다.

“마, 말, 말할 수 없어요. 나리, 이것만은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 주인님이 말씀을…….”

더듬거리면서도 연방 주변을 살피는 그녀의 겁먹은 모습은 절로 연민이 일 정도였으나 그러한 것에 마음이 흔들릴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잠시 그녀의 머릿속을 읽어 세 명의 생존자들처럼 정신의 방비가 되어 있음을 확인한 클라우드는 고문하는 대신 생존자들이 처참한 고문을 겪은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피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비틀거리며 따라간 마리는 피투성이가 된 그들을 목도하고는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까무러쳤다.

실신한 마리를 수감하도록 지시한 클라우드는 취조실로 돌아와 따분하게 기다리던 오르피어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

"응? 아까 걔? 죽은 센티넬은 서른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자기 나이 반 토막도 안 되는 어린 계집애랑 섹스하다니 양심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해. 나도 연하는 좋아하지만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거의 자식뻘인데 서기는 서?"

“그거 말고!!”

어처구니가 없는 대답에 왈칵 소리를 높였지만 오르피어스는 태연자약했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하긴, 그래. 너한테 뭘 바라겠냐. 내가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지.”

클라우드가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마리라는 저 애, 중앙 출신이다. 내가 읽은 기억 속에서도 허드렛일을 능숙하게 한 데다 손이 거칠고 굳은살이 박여 있으니 하녀라는 진술은 맞아. 말투는 뮈르달이 아닌 중앙의 사투리와 억양이었고. 나이도 어린 중앙 출신의 하녀가 구태여 뮈르달까지 가서 터를 잡는 일은 없지 않겠냐.”

오르피어스는 그냥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괜히 정보부가 아님을 증명하듯이 길지 않은 시간에 많은 걸 관찰한 모양이다. 허기사 학교 다닐 때도 머리는 좋아서 이론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더 이상은 심문해 봤자 알지도 못할 것 같군. 중앙이라는 게 밝혀졌으니 이제 와서 센티넬의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고."

오르피어스는 이번에도 끄덕끄덕했다.

"중앙에서 군을 움직일 수 있을 인물 중에 생각나는 사람 없어?”

"그런 걸 왜 나한테 물어?"

"총독 각하 배행하면서 주워들은 건 있을 거 아냐.”

"없는데."

클라우드가 노려보았지만 켕기는 게 없는 오르피어스는 까딱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대답하는 게 죄는 아니다.

'합동훈련 때 중앙군이 우리군 뒤통수라도 쳐서 요새를 점령할 예정일까?"

“말이 되냐. 전시도 아닌데 요새랑 군사기지 하나 점거하는 게 의미 없다는 건 전쟁터에서 그렇게 굴렸으면서도 모르냐? 설사 점거해 봤자 여긴 글래스팅이고 탈환되는 건 금방이다.”

"그치만 글래스팅 내부에서 찬동하여 들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든가, 그럴 수도 있잖아.”

"절대 없어. 요즘 경계가 얼마나 삼엄한지 아냐? 글래스팅의 문벌가나 고관, 장성의 자택에서는 바늘 하나가 없어져도 첩보가 올라올 지경이라고.”

"어제 우리 집에서 양말 한 짝이 없어졌다고 지크하르트가 투덜거리던데 혹시 범인이 누군지 알아?”

“…….”

클라우드는 이 자식과 머리 맞대고 논의하는 것보다 벽을 보고 떠드는 게 낫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새로운 정보 한 줄이 더 추가되었으나 포로들은 완강히 침묵하였고 그 이상의 결정적인 성과는 없이 중앙군과의 합동군사훈련 전일이 밝았다.

국왕 부처가 남부 글래스팅 성에 친림하는 날이었다.

***

국왕의 전용 열차가 헤임 역에 도착하고 감색의 정갈한 에스커브 실루엣 드레스를 입은 국왕 베아트리체 2세가 왕후 엔조 뒤아르와 나란히 차에 올랐다. 불의의 사건이 연이은 헤임을 조문하기 위하여 합동훈련 개막식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국왕 부처는 소박한 의장을 갖췄으나 기차역으로부터 헤임 시내를 가로지르는 국왕의 행차를 맞이하는 헤임의 시민들은 잠깐이나마 그들과 그들의 이웃에게 닥쳤던 불행을 잊고 열광적으로 환호하였다.

제아무리 눈이 밝은 사람이라도 신문지상에서만 보았을 뿐인 국왕 부처의 외모와, 경관에게 엄격히 대로가 통제 되어 먼 거리의 보도에서만 볼 수 있는 실물의 차이를 인식하지는 못할 것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헤임이 이렇게 어수선한데 국왕 부처가 요란하게 시내를 가로지르며 오겠느냐는 음모론을 주절거릴지도 모르지만 여타의 음모론이 그러하듯이 우스갯소리로 묻히리라. 시내를 행진하는 한 쌍의 남녀는 국왕 부처의 대행을 한두 번 가장한 것이 아닌 아주 능숙한 연기자였고, 차는 어떠한 의심도 없이 헤임의 주목을 한눈에 받으며 내빈관으로 나아갔다.

진짜 국왕 부처의 일행은 헤임 역이 아니라 그 이전의 정차역에서 하차하여 헤임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정복을 입고 대열의 중앙에 선 지크하르트는 지루함에 하품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전용차의 도착을 기다렸다. 헤임의 북문 너머에 있는 벨포드 가의 사유지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기에 이렇듯 귀빈을 비밀리에 영접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기 중인 경호 인력은 50명에 불과하지만 장교 중 반수가 센티넬이니만큼 특별히 엄선한 최정예였다.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너무 드러나지 않게끔 목이며 어깨를 조금의 꺾던 지크하르트의 시선이 문득 맞은편에 도열한 오르피어스에게 닿았다. 포마드 기름으로 단정하게 넘긴 머리에 군모를 깊이 눌러 써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래에 언뜻 비치는 낯빛이 몹시 창백했다. 지크하르트는 저 창백한 낯이 자신의 착각이 아님도 알고 있었다.

「열이 꽤 심한데?」

며칠 동안 서로 많이 바빠 얼굴을 오래 보고 이야기할 틈도 거의 없었기에 지크하르트가 그의 상세를 눈치 챈 건 오늘 아침이었다.

「며칠 전부터 두통이 계속 있었는데……. 오늘은 조금, 열까지 나」

오르피어스가 자신의 이마를 짚은 그의 손을 밀어내며 고개를 틀었다. 잠깐 체온을 쟀을 뿐인데 손바닥에 뜨끈뜨끈한 열감이 남았다.

「약은 먹었고?」

「응. 엊그제부터 먹고 있어」

「근무 설 수 있겠냐?」

이제 와서 여의대로 호위에서 빠지거나 변경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염려가 되는 건 막지 못했다. 오르피어스는 짐짓 가볍게 웃었다.

「별일이야 있으려구. 만약에 국왕 페하가 표적이 된다면 형이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지키라고 했고, 이번 명령만큼은 반드시 이행해야 해」

유안을 경호할 때 한 번 실수하였으니까, 중얼거림은 그의 입속에서만 사라졌지만 지크하르트는 그가 어떠한 말을 하였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명령. 그, 명령. 오르피어스의 인생 전반을 형성하며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강제로 밀어젖히며 등을 떠미는 명령. 이 녀석에게 단 하나라도 자신의 의지로 가진 자신의 것이 있기는 하였을까.

차로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있어 맞은편의 사선에 있는 오르피어스의 표정까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하얀 낯빛으로도 어떻게든 버티고 서 있었다. 빨리 끝나야 할 텐데. 지크하르트는 자신의 마음이 살짝 초조해 지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며 전용차가 당도할 방향을 응시했다. 너르게 닦인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은 지평선 너머는 잔잔하기만 하였다.

갖은 사고가 발생하였음에도 놈들의 정확한 배후는 물론이거니와 목적이 아이릭 개인인지 글래스팅의 전복인지, 최악의 경우로 국왕인지조차 확실시하지 못하고 있음은 정보부에게 있어 치욕스러운 결과였다. 하물며 표적의 대상으로 역시, ‘추정’만 되는 군사훈련이 바로 코앞에 앞둔 지금이라면 더욱이나.

정보부의 실질적인 수장이며 차기 정보부장이 확실시된 아서의 미간에 패인 골은 며칠 내내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번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승진이 영영 막히거나 옷을 벗어야 할 수도 있다는 그 개인의 사정은 차치하고도 왕국 내의 이목이 주목된 가운데 거행되는 군사훈련에서 결정적인 사고가 발발하면 아서가 문제가 아니라 책임을 진 아이릭이 경질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물론 그가 경질되어도 남부 글래스팅 성의 주인이 벨포드 가임은 변하지 않겠으나, 자칫 중앙이 입게 된 피해를 빌미로 글래스팅에 중앙의 입김이 뻗치는 총독이 임명되느니 차라리 아이릭이 암살되는 편이 낫다.

제도 입시니아, 남부 글래스팅 성, 북부 속령 뮈르달 이 세 지구가 받치는 중앙으로 대표되는 왕국 오시안의 균형은 물잔에서 넘실거리는 물처럼 위태로이 유지되고 있으나 단 한 번도 그 물잔의 물이 넘친 적은 없었다. 물잔의 물이 넘치고 균형이 붕괴되면 왕국은 분열한다. 배후가 중앙임이 밝혀진 이상 이 사태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기밀 사항이었던 아이릭의 진짜 가이드와 자식을 납치하였다는 점에서 암중에 놈들의 목적이 아이릭이라는 사실에 두고 수사하였으나 아이릭이 일개 개인이 아니라는 점과 공교로운 시기가 사건이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갈 여지를 만들어 두었다.

"그놈들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나?”

중앙에서도 군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의 인물은 한두 명이 아니다. 대대적인 규모도 아닌 소대 규모의 군을 움직였으니 그 범위는 더 넓어진다. 중앙에 잠입되어 있는 스파이들의 정보를 취합하여도 뾰족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 한 명의 유력한 인물을 알아내야 했다.

"죄송합니다.”

클라우드가 쉰 목소리로 사죄했다. 며칠간 쪽잠밖에 자지 못하여 핏발이 선 눈은 금세라도 쓰러질 것처럼 초췌했다. 클라우드뿐만이 아니라 정보부의 요원들은 잠시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가시방석이었다.

"……큰일이군요. 지금쯤 국왕 폐하가 오시고 있으신데.”

일의 경과를 살펴 물으러 왔던 유안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북쪽을 응시했다. 총독이 직접 국왕을 영접하고 수행하여 오는 자리다. 눈에 뜨이지 않는 소수의 최정예로 호위 병력을 편성하기는 하였으나 총독과 국왕이 동석하는 위기감을 상상만하여도 아서는 뱃속에 바늘 수십 개를 집어삼킨 것처럼 따끔거렸다.

세 명의 포로 중 유일한 여자는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남은 두 명의 생명도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죽이기 위해 고문하는 건 쉽지만 살려가며 원하는 정보를 빼내는 건 어렵다. 센티넬까지 동원되어 상처를 치료하며 고문을 반복하였으나 놈들의 입은 비명을 지를 때가 아니면 떨어지지 않았다. 반평생을 정보부에서 근무하였고 숱한 전장을 지나왔던 아서의 경험으로서도 이 만큼 독종인 자들은 드물었다.

"놈들의 표적은 팔 할 이상이 아이릭 님이겠죠?"

"적어도 각하의 죽음을 노리는 건 확실하지."

“그렇다면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유안이 아서에게 속닥속닥 귀엣말하였다. 아서의 표정은 미심쩍었다.

“확실히, 시간의 흐름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테지만 말처럼 잘 통할까?”

"어쩌면 그 소식만을 기다리며 버티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가 완료되어야만 비로소 받은 명령의 수행이 종결되는 것일 테니까요. ……비슷한 사람을 알고 있기도 하고요.“

마지막 말을 덧붙이는 유안의 낯에 다소 씁쓸한 기색이 머물렀으나 타인의 심경까지 헤아려 짚을 여력이 없는 아서는 되든 안 되든 일단 유안의 제안을 실행에 옮겨 보기로 하였다.

10분 후, 포로 중 한 명이 수감된 방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유안이 뛰어들었다.

"페인 중령님! 고정하십시오!!”

"이것 놓게!! 국왕 폐하의 어전에서 아이릭 님이 돌아가셨네! 어떻게 진정할 수 있단 말인가!!"

부드럽고 사람 좋은 호인으로 알려진 유안이 격노하자 정보부 요원들은 쩔쩔 매며 붙잡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죽은 듯이 널브러진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직전까지 취조당하다 겨우 풀려난 사내의 숨은 거칠었고 들숨과 날숨이 오갈 때마다 씩씩거리며 기관지를 쥐어짜고 긁는 소리가 났다.

"당장 말해!! 네놈들을 누가 보냈어?!! 흉수가 누구냐고!!"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려는 듯 제대로 뜨이지 않는 시선을 천장에 두던 사내는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날뛰는 유안을 보고는 크게 웃으려는 양 목소리를 밀어냈으나 그 웃음은 끅끅거리는 신음이 되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질 뿐이었다.

허나 분명한 승자의 미소를 덧그린 채, 사내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폐, 하…….“

수감실 안의 공기는 급속도로 경직되었다. 띄엄띄엄 몇 마디를 덧붙인 사내는 만족하며 절명했다. 국왕의 호위에도 센티넬은 있다. 유안은 주검이 된 사내를 내팽개치며 다급히 자리를 박찼다.

검은색 경호 차량이 사방을 호위하는 가운데 국왕 부처의 전용차가 정차하였다. 시종이 문을 열고 제일 먼저 왕후가 하차하였다. 시내를 행진 중인 가짜 국왕 부처처럼 짙은 색의 오버코트를 입은 왕후는 문 안쪽으로 손을 내밀었고, 그의 손바닥에 흰색 장갑을 낀 자그마한 손이 내려왔다. 손만큼이나 작은 구두가 또각또각 디딤판과 바닥을 차례대로 내려왔다.

국왕 니베이아 베아트리체 키르허는 오랜 승차로 굳어 있던 허리를 곧게 펴며 남편에게 빙긋 미소하였고, 부부를 마중 나온 아이릭에게도 웃음을 보냈다.

"얼굴 보는 건 오랜만이네, 벨포드 공.”

"강녕 하셨습니까."

아이릭은 정중하게 허리 굽혀 그녀와 남편 엔조 뒤아르의 손등에 차례대로 키스하였다.

선왕 폴코 5세는 겨우 일주일이라는 시간 차이를 두고 각자 다른 여인의 태에서 탄생한 아들과 딸 중 후계자를 지목하지 못하였다. 후계 구도가 불명확하자 중앙은 1왕녀와 1왕자의 대립구도가 나날이 악화일로를 달렸으며, 이 혼란에 글래스팅과 뮈르달이 각각 합세하였다. 당시의 그 누구도 1왕녀도 1왕자도 아닌 궁중에서 잊힌 존재나 다름없던 3왕녀가 옥좌에 앉아 왕홀을 쥘 것이란 예측은 하지 못했다. 선왕의 붕어 직후 1왕녀가 암살당하자 배후로 1왕자를 지목하며 언니의 유지를 잇겠노라 선언한 3왕녀의 행보는 곧 내전의 시작이었다.

3왕녀는 베아트리체 2세로써 스스로 왕관을 썼으며 1왕자를 지지하는 '반란'을 진압했다. 그녀의 즉위 후 궁중 귀족과 종실은 이제 그녀의 남편이며 왕세녀와 왕자의 친부이기도 한 왕후의 출신을 힐문하였다. 오시안의 역사에도 극히 드문 평민 출신의 왕후는 가합하지 않으니 이혼하고 온당한 신분의 남자와 국혼을 올리라는 상서가 빗발 쳤지만 국왕은 자식들의 아버지와 조강지부라는 이유로 모든 힐문을 완강히 물리쳤다.

그녀의 진의가 무엇이었든 국왕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자이자 어머니로서 남편과 아이의 아버지를 두둔하며 감싸는 국왕의 태도는 중앙의 평민에게 좋은 반향을 얻어냈고, 국왕 부처는 지금까지도 좋은 동반자이자 부부로써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숨 막히는 정적의 가운데 서로의 안부를 묻는 국왕 부처와 아이릭의 인사만이 낮게 오갔다. 지크하르트는 단 한 번 목격하였던 기억보다 한결 날씬하긴 하였으나 큰 변화가 없는 국왕을 곁눈으로 응시했다. 여전히 자그마한 체형에 소녀 같은 목소리였다. 거리에서 언뜻 스치면 큰 감회 없이 금방 잊힐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인상의 여인은 그녀의 오랜 지지자이기도 한 아이릭과 담소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힐라리아는 왜 국왕을 알현한 후에 동요하였을까. 그녀의 까다로운 성정을 하루 이틀 겪은 게 아니라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잊었던 기억이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하자 불현듯 되살아났다. 힐라리아에 대한 기억은 곧잘 그녀의 자살로 이어지곤 하였으므로 지크하르트는 고소를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그 때문이리라. 아이릭을 비롯하여 대열 한 모든 사람의 주의가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누구도 목격하지 못하였던 오르피어스의 이변을 눈치 챈 것은.

지크하르트는 오르피어스의 저 얼굴을 알았다.

초점이 없고 간헐적으로 입술을 떨며 중얼거리는 창백한 낯빛.

10년 전에도, 그리고 16년 전에도 화염 속에서 그는 저 같은 얼굴을 한 오르피어스와 조우하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며 달려 나갔다. 자신의 힘으로 오르피어스의 폭주를 진정시킬 수는 있어도 자의로 행하는 힘까지는 막지 못한다. 허면 표적은 누구? 찰나의 순간 빠른 계산이 그의 머릿속을 맹렬하게 짓쳐갔다. 지크하르트는 유사시에 오르피어스의 화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아이릭이 아닌, 특별한 힘이 없어 가장 무력하게 당할 터이나 가장 넓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택하였다.

지크하르트가 왕후를 밀쳐내며 국왕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 바닥에 쓰러트리고, 새하얀 화염이 그의 등을 덮친 건 동시에 발발한 일이었다.

“국왕 폐하!!”

“벨포드 소령!! 이게 무슨 짓인가!!”

경악의 외침이 분분하게 사방을 울렸지만 오르피어스의 화염은 가이드인 지크하르트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 채 그와, 그에게 안긴 국왕의 주변에서만 불타올랐다. 지크하르트의 뒷목에 식은땀이 흘렀다. 1초라도 늦었으면 끝장이었다.

“어머나.”

소녀 같은 탄성이 아래에서 들려와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국왕이 어깨 너머로 푸르른 하늘과 이에 어우러진 백색의 화염을 보며 나른하게 미소했다.

"아주 예쁜 불꽃놀이네?“

그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당혹감을 빠르게 수습한 글래스팅의 센티넬들이 힘을 발동하려 하였지만 베른하르트가 가로막으며 냉정하게 속삭였다.

"안 돼. 이 일은 우리가아니라 총독 각하가 제어하서야 한다."

그와 비슷하게 아이릭의 능력이 발현하였다.

“오르피어스! 힘을 거두어라!”

멍하니 서 있는 오르피어스의 복부 언저리가 꽉 당겨지며 단추가 빠짓빠짓 뜯어졌다. 오르피어스의 상체가 크게 경련했다.

"아이릭 님! 왕후 폐하입니다!!"

그때 저 멀리에서 들려온 외침에 동요한 아이릭은 세밀하게 조정하던 균형을 놓쳤고, 그 수순으로 오르피어스는 왈칵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늑골이 부러지며 폐를 찢는 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돌아온 그는 대경실색하여 눈앞의 화염을 응시했다.

"뭐, 뭐야?!"

"오르피어스!!"

화염 너머에서 지크하르트가 외쳤다. 그 외침에 오르피어스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행한 기억이 없는 자신의 화염을 거두었다. 불길이 사그라지자마자 베른하르트를 비롯한 글래스팅 측의 센티넬 세 명이 바요넷으로 그를 난폭하게 짓누르며 바닥에 결박시켰다.

“오르피어스 벨포드. 귀하를 국왕 폐하 시해 혐의로 체포한다!"

“아니, 난……!”

무어라 변명을 하려던 오르피어스는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기는 고통에 더 이상 말을 잇지도 못하고 힘겹게 씩씩 거리며 바닥을 긁었다. 먼발치에서 오르피어스의 힘을 목격하고 전투가 벌어졌다고 지레짐작하여 헐레벌떡 외치며 달려온 유안은 사색이 되었다.

아이릭이 주먹을 꾹 쥐었다. 오르피어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은 안다. 허나 이를 증명할 수도 없으며 글래스팅의 군관만이 아닌 국왕 부처를 비롯한 중앙의 사람까지 목도하였다. 그가 내리지 않은 명령을, 도대체 누가? 뿐만 아니라 느닷없이 외친 왕후라는 이름자도 이해할 수가 없어 유안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눈치 챈 유안이 가까이 다가와 다급히 보고하려 하였지만 작은 웃음소리가 모두의 머릿속을 팽팽하게 오가던 사고의 흐름을 끊으며 자신에게 주목시켰다.

“후후. 됐어, 됐어. 구태여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장된 체포는 되었으니 그만두렴.”

지크하르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국왕은 직전에 암살의 위험에 노출된 당사자답지 않게 마치 자신의 아이에게 도닥이는 것처럼 웃었다.

"힘겨워 보이는데 우선 치료부터 하는 게 어떨까? 이러다 저 아이가 죽으면 벨포드 공의 심정이 어떻겠니."

그녀가 손짓하자 국왕의 경호원 중 치료계 센티넬이 황황히 달려왔다. 베른하르트도 국왕과 아이릭의 낯을 번갈아 보고는 결박을 풀었다. 오르피어스가 치료를 받기 시작하자 지크하르트는 겨우 굳었던 표정을 풀며 안도의 숨을 돌렸다.

시종들이 바닥에 넘어트려지며 구겨지고 더러워진 그녀의 드레스를 정돈하는 동안 국왕은 왕후도 벨포드 공도 아닌 지크하르트를 먼저 돌아보았다.

"귀관은 무척 젊어 보이는데 몇 살이지?"

“스물일곱입니다, 폐하.”

“어머, 나보다 한참 어리잖아. 오랜만에 연하남의 가슴에 안길 수 있어서 즐거웠어.”

지크하르트의 어깨 어림에 올까 말까한 국왕은 그의 팔을 잡아당겨 얼결에 허리를 굽힌 지크하르트의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당신이 나와 만날 때도 비슷한 나이였죠. 그렇지 않아요, 엔조?”

지크하르트의 어깨 너머로 남편을 건너다보며 국왕이 싱글거렸다. 좌중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왕후에게 쏠렸다. 왕후는 창백하게 동요한 기색을 온전히 다스리지 못하며 주춤거렸다. 유안이 급히 아이릭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이릭 님. 배후는 왕후 폐하였습니다."

국왕이 여전한 미소로 웃었다.

"글래스팅에는 그동안 참 안 좋은 일들이 발생했고 그 여파가 나에게까지 미쳤어요. 이젠 글래스팅이 감당해야 하는 영역을 넘어선 일이에요. 어째서 벨포드 공의 보좌관이 이 타이밍에 당신을 호명하였는지, 난 몹시 급금해요. 엔조, 당신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겠죠?”

“하, 하지만 니베이아 님. 당신을 공격한 사람은 벨포드 공의 아우입니다……~”

"아하하. 이 남자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람? 벨포드 공은 날 배신하고 시해할 바에는 스스로 자살할 아주 충직한 신하에요. 하물며 이렇게 멍청하고도 뻔한 수법으로? 그가 시행하였다면 아주 교묘하게 처리하였을 걸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행간에 숨은 어의를 파악한 왕후는 더 이상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1왕녀를 암살하여 1왕자에게 누명을 씌워 내전을 촉발시키고 그녀가 옥좌로 나아가는 문을 힘껏 열어젖힌 장본인인 벨포드 공이 이 같이 허술한 암살 기도를 하였을 리가 없다는 건 왕후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애초에, 국왕의 시해는 그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다. 본래대로라면 오르피어스가 죽여야 할 사람은 국왕이 아니라 아이릭이었는데. 어째서?

국왕의 발언에는 왕후를 배후자로 지목함과 동시에 글래스팅에 책임을 묻지 않으리란 뜻도 내포되어 있었다.

묵직한 경악이 덧깔린 침묵을 홀로 비껴내며 왕후에게 다가간 국왕은 상냥하게 미소하며 그의 팔짱을 꼈다. 왕후의 팔뚝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수년간 살을 섞고 부대낀 아내다. 나른한 웃음 너머에 감춰진 그녀의 진노를 그는 감지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일단은 오늘의 일과를 끝내도록 하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아주 많은 시간이 있잖아요? 그럼, 벨포드 공. 그때는 공도 우리 부부의 다과회에 초대하도록 하지."

넋이 나간 얼굴로 비틀비틀 끌려가는 왕후, 엔조 뒤아르라는 이름을 가진 일개 남자의 머릿속에 이 모든 일의 시초가 되었던 여인과의 만남이 떠올랐다.

「폐하. 소녀의 보원을 도와주십시오」

그녀는 반년 전 아주 은밀히 그를 찾아왔다. 아내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남자의 속내를 샅샅이 뒤집으며 헤집듯이 접근한 그녀는 맹인이었음에도 눈이 보이는 사람보다 훨씬 더 그를 잘 파악하였다.

「소녀에게 공식적인 직함은 없으나 수년 전부터 정보부에 속하여 가문의 행사에 조력하였습니다. 소녀가 드릴 수 있는 일체의 정보와 이를 토대로 수립한 계획안입니다. 세부적인 틀은 폐하께서 조정해 주십시오」

이를 통하여 바라는 게 무어냐는 떨리는 질문에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아버님은 친자식의 손에 비참하게 운명하셨습니다. 가문의 일원으로서, 또한 아버님의 자식으로써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니, 용서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폐하, 소녀가 바라는 건 단 하나뿐입니다」

엔조는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가에 머문 참혹한 상흔은 그녀의 시선이 빛을 담을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음에도 그는 그녀가 자신을 발가벗기어 오래도록 속으로만 앓아온 추악한 의심암귀를 조각하여 욕망이라는 뚜렷한 이름을 갖게 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가슴에 얹은 손을 꼭 쥐며 결연히 입술을 움직였다.

「소녀의 오라비, 아이릭 벨포드를 죽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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