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1]
"후후후.."
낮은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집에서 살 사람보다 더 닦달을 해가며 남향을 부르짖던 누구 덕분에 공기가 차가워
진다고 여겨질 늦은 오후의 햇살이 작은 평수의 집에 들어차 있는 한가로운 일요일이었다. 절대적으로 부지런하지 않은 현수가 이렇
게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발장난을 하면서 햇살이 들어오는지 바람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삼매경에 빠져있는 것은 낡은 한 권의
앨범이었다.
사실 현수는 앨범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사진이 생길 때마다 나름대로 바지런을 떨어 컴퓨터 책상 두 번째 서랍에 고이
모아두었는데 그걸 볼 때마다 어딘가에 있을 앨범을 찾아야겠다, 라고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기란 재준의 표현에
의하면 토끼머리에 뿔이 날 때다.
그런 현수가 그나마 하는 일이란 계절이 바뀔 때 좁은 옷장에 다 개여 놓지 못한 철 지난 옷들을 종이박스에 정리할 때인데 슬슬 따
뜻해져 오는 봄기운에 봄철 옷과 여름철 옷을 좀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꺼내놓을까 하고 붙박이장 안에서 옷이 든 종이박스를 끌어
당겼다.
그때 밑에 깔려있었던 앨범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잊었던 앨범의 부재에 반가움을 표하면서 펼쳐진 면을 보았는데 그게 눈에 딱 들
어온 것이다.
그래서 원래의 목적은 까맣게 잊은 채 한가롭게 앨범을 뒤적이며 추억에 잠겨 들었다.
고 2 때부터의 거의 모든 사진은 재준과 함께였다. 유독 사진찍기를 싫어하는 녀석이 현수와 함께라면 찍는 것을 마다하지 않기에
- 아니 어떨 땐 다른 친구들과 찍고 있을 때 멀리서 뛰어와 찍은 적도 허다했다. 그런 녀석이 다른 녀석들이 찍자고 하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었다.- 그 이후의 사진은 모두 함께인 것이다. 스물 여남은 살이 넘어서는 거의 사진이 없기는 하지만.
처음 재준을 만난 것은 학교 옥상이었다.
웬만해선 수업을 빼먹지 않던 현수지만 감기 몸살에 탓인지 오전부터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해 급기야 체육수업까지 마치고는 도무지
졸음을 참지 못해 다음 수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저절로 하향곡선을 그리는 목을 주체하지를 못해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양호실로
향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디에 가셨는지 양호선생님은 부재중이고 양호실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양호실에서 제법 먼 교무실로 가 양호실의 열쇠를 받는 번거로움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옥상을 택했었다. 졸고 있던 현수에게 동욱이
차라리 옥상으로 가라, 라는 말을 들은 탓인지 옥상은 자유와 안락한 수면을 위한 공간이 될 듯 싶었기 때문이다.
성큼성큼 졸린 눈을 억지로 비비며 올라가니 선객이 있었다. 보아하니 삼 학년이 아닌 이 학년 뱃지길래 수면에 지장이 없겠다 싶어
웬 덩치 큰 녀석 옆에 길게 펴져 있는 반가운 박스 위에 엉덩이부터 대었다. 우연하게 고개를 숙여 땅을 보았는데 십 만원 짜리 수
표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제법 두툼한 게 침대가 따로 없다. 햇살도 따사롭겠다, 달콤한 수면을 위해 누군가 일부러 잠자리를 마련
해 놓은 듯해서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누우면 오 초 이내로 잠이 들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예의상 박스의 주인에게 양해를 구했
다.
"야, 나 여기 누워도 되겠냐?"
"너......"
초면에 실례라는 걸 알지만 잠이 우선이었다. 역광인 탓에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놀란 모습이어서 신분부터 밝혔다.
"나? 2반에 이 현수. 와.. 여기 자리 좋다. 나 무지하게 졸려서 말이야. 나 좀 잘게. 응? "
"그..그렇게 해."
"고마워. 대신 가는 길에 생크림 빵 하나 사줄게. 단지 우유도."
덩치의 주위에 있는 인물들이 가볍게 웅성거렸지만 잠결인데다가 시력도 좋지 않은 현수는 태클 거는 사람이 없는 걸로 봐서는 삼
학년은 다행이 없다 싶어 덩치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날름 누웠다. 기댈곳만 있다면 잠 땡!이라는 주문으로 당장이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주변의 상황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선생님이 안 오는 누울 수 있는 자리만을 원했을 뿐이다.
누웠다가 잠결에 뭔가가 퍼뜩 생각이 나 현수는 벌떡 앉아 얼굴이 자세히 들여다보이지는 않지만 박스의 주인일게 분명한 덩치를 바
라보며 부탁을 했다.
"나 부탁이 있는데, 망 좀 봐주면 안 되겠냐? 나 지금 자면 두어 시간은 잘 것 같은데 쌤이 오는지 안 오는지 망 좀 봐주라. 응?"
어이가 없는 듯한 낮은 탄식에 현수는 배시시 웃음부터 흘렸다.
"헤헤헤..., 미안미안. "
그리고는 벌렁 누워 잠이 들었는데 잠에서 깨어나니 무려 세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몸에는 주인 모를 교복 재킷이 덮여져 있었다.
앉아 주위를 살펴보니 아까 웅성거리던 여러 명의 인물은 보이지 않고 박스의 주인인 덩치만 곁에 앉아있었다. 아마 재킷의 주인인
듯했다.
현수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이제 선명히 보이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살짝 명찰을 흘겨보면서 말이다.
"야, 반갑다. 도 재준. 너 배 안 고프냐? 난 배 고파 죽겠다. 아..더 잘 수 있었는데 배 고파서 깼다는 거 아냐. 내가 약속한 것도
있으니 매점 가자. 내가 사줄게. 남아일언은 중천금 아니겠냐? 갈꺼지?"
".......어."
그렇게 해서 처음 잡은 재준의 손이었다.
그때부터 우연히 보게 되면 인사를 하게 되었고 옥상에도 한 번 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매점에도 같이 가게 되었고 점심도 가끔 같이
먹기도 했다.
유난히 말이 없고 인상이 좀 사나운 재준을 다른 친구들은 꺼렸지만 그런 친구들에게 현수는 아니라고, 저놈이 말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그런거라고 입이 닳도록 말을 했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전혀 믿어주지를 않았다. 그렇게 되다 보니
재준과 말을 트고 지내는 친구는 손가락에 꼽히게 되었는데 그 중 제일 거리낌없이 말하고 지내는 사람은 현수뿐이었다.
덩치에 어울리게끔 힘은 또 장사라 현수는 그런 재준을 보며 대근이 아저씨 같다고 머슴이라 놀려대어도 재준은 별당 아씨를 눈앞에
두고 침을 질질 흘리던 대근이 아저씨처럼 헤벌쭉하게 미소를 지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삼 학년때 같은 반이 되었고 두 사람은 자연스레 짝이 되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안 보이면 다른 친구들
이 찾을 정도로 가깝게 지내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18살의 재준이 30살이 될 때까지 두 사람은 그렇게 구구절절 말을 다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때는 그래도 피부도 탱탱하니 인물이 훤~ 했는데 말이야."
지금의 인물이 죽은 건 아닌데 지금은 안 그래도 심술궂던 인상이 더 날카롭게 변해서 현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 주변사람
들이 더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성격을 알고 나면 안 그럴 텐데 선입견이란 게 그렇게 바뀌기 힘든 것인가 살짝 생각을 하며 현수는
마지막까지 넘겼던 앨범을 다시 첫 장으로 넘겼다.
"에이고~ 지금의 상판떼기는 험악해서 어디 이놈 장가나 보낼 수 있으려나 몰라. 인물이 험하면 말이라도 고분고분하게 하던가, 아님
말이라도 많던가, 쳇. 지가 최민수라도 되는 줄 아는 놈이니 원. 나랑 있을 땐 쫑알쫑알 잘 짖기는 녀석이 다른 사람들 앞에선 말을
안 해요. 말을. 낯을 가리는 건가?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하여튼 그놈의 카리스마 없애지 않으면 넌 장가 다 갔다. 도 재준. 알어
? 응? 그러니깐 이 형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니깐. 쯧쯧. "
결국 하고자 했던 옷 정리는 하지도 못하고 다시 장에 넣기도 귀찮아서 발로 쓱 거실 한구석에 옷 박스를 밀어넣고는 라면으로 저녁
을 때우고 느긋하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있던 찰나에 현수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어대었다. 침대선반까지 가기가 귀
찮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을 하며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라면 세 손가락 안
에 꼽힌다. 그리고 그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의 전화는 다 꼭 받아야 하는 사람들일 테다. 구시렁구시렁 거리며 침대의 선반까
지 가 핸드폰을 손에 쥐었을 땐 벨은 이미 열 번을 넘게 울고 있었다. 원래 밤늦게 전화하는 인간들이 꼭 집요하게 하는 법이다.
"어라? 이놈은 또 웬일이래? 뭔 일 터진 거 아냐?"
자주는 아니지만 일 년에 한 두 번쯤 부탁을 해오는 녀석의 이름이 뜨자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폴더를 열었다.
"오래간만이다. 쫄병."
"혀..형님."
"그래, 니네 형님은 어쩌고 이 별 볼일 없는 형님 찾고 있냐?"
형도 아니고 선배도 아닌 형님이라는 말이 처음만 어색했을 뿐 그 세월이 십년을 넘다보니 이제는 거부감없이 들려왔다.
"저..그게.."
"왜, 그 녀석 또 오버냐?"
"네. 죄송합니다.형님."
"이번엔 뭔데?"
"저희도 그걸 잘.."
"쯧쯧.. 니가 쫄병이면 쫄병답게 대장의 기분이 왜 떡인지 알아야 할 꺼 아냐? 니가 모른다면 말이 돼? 형준이 없어?"
"네. 형준이 형님도 안 계신데 저러시니..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서.. 부탁드립니다 형님."
"에고~ 내 팔자에 무슨 티비야. 티비가. 그래 어딘데?"
"이미 차 보냈습니다. 아마 상준이가 도착했을겁니다."
"허이고. 너 잔머리 굴리네? 내가 안 간다고 하면 어쩌려고 차부터 보내? 순서가 틀린 거 아냐? 인마"
"죄..죄송합니다. 형님. 워낙 급해서.."
"알았어. 그 새끼 다른 데로 안 튀게 잘 붙잡고나 있어!!!"
"고..고맙습니다. 형님."
"말로만 고맙다 고맙다 하지 말고 술이나 사. 끊어"
"네. 형님."
불안한 마음에 입고 있던 운동복위에 점퍼만 걸치고 내려가니 이 동네 산다던 안면 있는 덩치 있는 녀석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다가가 뒤통수를 내리 갈기니 가려운 듯 머리만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는 폼을 보아하니 미안하긴 미안한 모양이다.
"어째 너네들은 애 마음하나 못 맞추어서 만날 이 모양이냐. 이 모양이. 느그들이 그 녀석 뒤를 한두 해 쫓아다녀? 그러고도 그놈
왜 지랄 떠는지, 어떻게 하면 꼬인 심사 풀리는지도 몰라 매번 이 불쌍한 서민 초청하냐?"
"저..그게 아시다시피 워낙 형님이 과묵하셔서.."
"잘났다. 잘났어!! 죽어도 잘못했다는 말은 안 하지? 기분 안 좋은 일 있습니까? 가서 그냥 술이나 한 잔 하시지요.형님. 그 말 한
마디면 될 일을 이 늙은 내가 꼭 가야되? "
"그게.."
"또 무섭다느니 그런 변명하려면 입 자크 채워라. 응? 그 선입견 버릴 때도 되지 않았냐? 이 화상들 때문에 내가 편할 날이 없어요.
편할 날이. 빨리 가!!!"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어두운 거리를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현수는 낮에 보았던 사진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재준을 못 본 게 거진 한 달이 넘었다. 물론 전화는 매일 하지만. 제법 급한지 빠른 속도로 차를 모는 상준이녀석의 뒤통수를 수박
고르듯 통통 치자 억울한 듯한 눈빛이 룸미러를 통해 넘어왔다. 하지만,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 눈빛으로 호소해 본들 그게 불쌍해
보일 일이 전혀 없는 현수의 손놀림은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재준이 녀석 왜 야마 돌았데?"
민이 녀석이 모를 일을 상준이가 알 리는 없을 테지만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만 역시나 그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어댄다. 그때를 기
회 삼아 뒤통수를 제법 세게 내리치면서 민이 녀석에게 했던 잔소리를 상준에게 퍼부었다.
"느그들은 말이야, 여태 뭐하고 살았길래 대장 마음 하나 못 맞추고 이 연약하고 불쌍한 서민 이 현수를 홍길동으로 만드는거얏!!!"
**
우글우글 끓던 가슴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맨주먹으로 책상을 과도하게 꽝 내리친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형준이 사무실을 잠시 맡긴다고 했을 때 흔쾌히 받아 준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스트레스해소 용도의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 온몸을 정신없이 흔들어댈 필요가 있는 과민해진 신경줄에 딱 일이 걸려버린 것이다.
"직접 간다."
"네?? 혀..형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녀석들이 헤매고 있는 동안 재준은 걸어두었던 양복 윗도리를 꺼내 팔을 꿰었다.
"형님께서 굳이 안 가셔도, 형준이 형님도 안 계시고.."
말이 필요 없다. 재준은 민의 멱살부터 잡아채었다. 누구에게 제재를 받는 건 질색이다. 특히나 이런 기분일 때는 더더욱.
"불만 있나?"
낮은 음성에 민이 몸을 움츠리는 것을 보며 그를 내동댕이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따라나오는 두식을 한 번 째려보는 걸로 직접 운
전한다는 의사를 표한 것까지만 기억에 남아있다.
싫은 일을 상상할 때는 당연히 기분이 안 좋다. 하지만, 그 상상했던 일이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눈앞에 깜깜해질 만큼 절망적이었
다. 조만간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음침하게 흐르는 백 뮤직도 없이 들이닥칠 줄 몰랐다.
"후훗"
나오는 것은 허탈한 웃음뿐이다. 작심을 하면 뭐하나. 다짐에 다짐을 하고 스스로 세뇌를 시키고 골을 파 각인을 시키면 뭐하나. 이
렇게 현실이라는 차가운 놈이 제 모습을 드러내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픈 것을. 알면서 선택한 길 후회는 한 점 없다. 절대 후회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다.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라도 열을 발산하지 않으면 애꿎은 사람에게 화를 뿜어댈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째서 참는다는 것은 가면 갈수록 어려워지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일은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십 년을 넘게 해온 일이 왜
아직까지 익숙해지지 않고 이렇게 온몸의 여린 살을 다 긁어내는 것처럼 아프기만 한지.
보이는 것은 없고 들리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릿속이 복잡한 것도 아니다. 그저 윙윙대는 잡음뿐.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
태와도 같은 패닉에 빠진 재준의 귀에 무언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악~!!! 야, 도 재준. 너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어 나까지 치려고 하는 거야? 씨방? 너, 죽을래???"
마치 붕대로 칭칭 감았던 눈에 붕대가 풀리면서 개안을 하듯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너 오늘 단단히 미쳤구나. 응? 미쳤어. 미쳤어. 너 저번에 나랑 이런 무식한 짓 한다고 했어? 안 했어? 엉?? 내 말을 귀로 들은
거야 콧구멍으로 들은 거야? 네 입으로 이젠 깡패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니가 한 번씩 이러니깐
애들이 겁 먹는 거잖아!!!"
어깨너머까지 올라갔던 손이 아래로 축 쳐졌다. 움켜쥐고 있었던 파이프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땡그랑 소리를 낸다.
턱밑에 겨우 오는 녀석이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재준은 빤히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먼저 뛰기 시작했다.
"이 불쌍한 셀러리맨의 황금 같은 휴일에 내가 눈 버려서 되겠냐? 니가 책임져. 인마. 야. 야. 도 재준!!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가볍게 뺨을 두드리는 차가운 손. 아버지조차 재준의 뺨에 손을 갖다대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재준의 뺨을 두려운 마음 하나 없이
가볍게 두들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재준은 손을 들어 그 손의 손목을 잡았다. 뺨을 두드리는 게 결코 싫어서가 아니
다. 이 손이 가진 체온이 너무 좋아서였다. 오래도록 잡고 싶어서 손목을 쥔 것이다.
"허이고, 이 화상을 어쩔꼬. 야, 술이나 푸러 가자. 오늘은 이 형님이 쏘마. 대신 포장마차로. 오케??"
그제야 입이 벌려지고 미소가 지어졌다. 이건 형준의 말대로 자동이다. 자동. 종달새처럼 끊임없이 쫑알거리는 이 사람만 보면 저절
로 입이 벌려지면서 웃고 싶어진다.
숨어서 보는 모습이 아닌 서로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손안에 꼼지락 손의 주인이 가진 체온은 너무 따뜻해서 무엇 때문에 열이 뻗쳤
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이렇게 사랑스럽기만 한 사람이다. 비록 머릿속이 텅 빌 만큼 화를 솟구치게 한 인물일
지라도.
"내가 못살아. 못살아. 술 고프면 고프다고 할 것이지 왜 애꿎은 사람 잡냐? 니가 백정이야? 응?"
아마 잔소리는 한동안 계속 될 터이다. 어쩌면 저 깊은 마음속에서는 이 사람의 잔소리가 듣고 싶어서 이런 무모한 짓을 한지도 모른
다.
재준은 자신의 뒤에 널브러져 있는 피갑칠을 한 몇몇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에 잠시 눈을 두었다가 그 순간조차 아깝다는 듯 금방
옆의 사람에게로 돌렸다.
"가? 말어? 갈 거지?"
"응"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도 재준이."
마치 도덕선생 같다. 그는. 또박또박 잘못을 되짚는 그의 앞에선 이상하리만큼 반박을 못 했다. 그런 재준을 보며 형준은 그러니
니가 머슴이란 말을 듣는다며 웃어대곤 했다.
"다시 한 번 이런 꼴 내 눈에 보였단 봐. 너 내 손에 죽어. 엉?"
제법 암팡지게 주먹 쥔 손을 눈앞에 흔들어 대는 현수를 보며 재준은 아까부터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벼르고 별러서, 몇 번 참고 참았다가 작심을 하고 겨우 만나던 사람을 느닷없이 눈앞에 두게 되니 상황이 어찌되었건 기분이 좋기만
했다. 이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헐레벌떡 뛰어왔다는 것도 상승하는 기분에 한 몫을 한다.
"어라? 웃어? 야!! 니가 지금 뭘 잘했다고 웃어? 웃길.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거야 뭐야??"
이 작은 주먹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그대로 말로 표현하면 어떨까.
하지만, 재준은 그런 말 한 톨도 밖으로 내뱉지 않고 서서히 화가 나는 듯한 현수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설마. 그럴 리가. 다시는 안 그러마. 약속해. 현수야."
"어이구!! 이 말 안 듣는 화상. 술 마시러나 가. 그나저나 너, 오늘도 오버한 이유 제대로 안 불면 진짜 나한테 죽을 줄 알아."
"네네. "
그리고 현수를 데리고 왔을 주범인 민과 상준을 스쳐 지나가며 잠시 노려보고는 현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자리를 떴다. 선물과도
같은 현수를 데리고 온 것은 좋지만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끔찍이도 싫었기 때문이다. 좀 더 주위를 줘야겠다 생각을 하
며 재준은 현수의 조잘거리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으며 대꾸를 했다. 오른쪽 손바닥으로 전해져오는 체온이 데일듯이 뜨거
웠지만 재준은 현수가 의아하게 볼 정도로 현수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 이거면 되었잖아. 도 재준.
더 이상 욕심내면 이 체온마저 잃어버릴지도 몰라. 욕심내지 않기로 12년 전에 다짐했었잖아.
과욕은 언제나 화를 부르는 법. 잊지 말자. 도 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