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2]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젠장. 올해엔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봄이 되기 전부터 이 모양, 이 꼴인지 원."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되!!! 듣고도 몰라. 깨졌다고!!! 젠장. 넌 친구라는 놈이 꼭 내 입으로 그런 쪽팔리는 말해야 성이
풀리겠냐?"
버럭 성질을 내도 눈썹 하나 꿈틀거리는 게 없는 재준의 입가가 실실 풀리는 것을 보면서 현수는 눈앞에 놓여있는 술잔을 금세 비워
냈다.
"그래, 꼬왔다 이거지? 애인 있는 친구놈 눈엣가시 였다 이거냐?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실실 쪼개? 쪼개길."
"아, 뭐 별로."
"별로 긴. 내가 널 한두 해 봤냐? 기분 좋아 날아가시겠다? 칫. 그나저나 정희주려고 산 반지는 아까워서 어째. 지지배. 싫으면
반지 맞추기 전에나 말하지 꼭 프러포즈 하려고 작심한 날 초를 쳐요. 아아.. 비참해라.. "
"버려!"
"얀마, 버리긴 왜 버리냐. 두었다가 다른 여자 생기면 줘야지..얼마짜리인데.."
"그럼 그때 새로 맞추면 되잖아. 버려."
" 미쳤냐? 아까워 죽겠구먼. 아아..정희씨이~"
테이블위에 철퍼덕 엎드리며 통곡하는 현수를 내려다보며 재준이 딴지를 걸지 않고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원래 눈물이 많은 녀석이 아니어서 울지는 않고 있지만 가는 어깨가 외로워보였다. 대학생들 미팅하듯 매번 가벼운 마음으로 선을
보고 몇 번 만남을 가졌던 여자들과 헤어져도 별로 상처받는 기색이 없던 녀석이었는데 이번에는 역시 다른 때와는 달라 보인다.
역시 섹스까지 한 상대여서 그런가, 라는 생각을 하며 재준은 슬픈 자신의 얼굴을 능숙하게 감추며 걱정스레 물어보았다.
"정희씨.."
"응?"
"...많이.. 사랑했어?"
"그럼 넌 사랑 안 하는데 청혼하냐? 정희씨야말로 내 아내감으로 생각했다고 처음 봤을 때부터 말했었잖아. 휴, 어쩐지 오래간다
했지. 아아.. 엄마한테 이 소식 전하면 난 죽었다. 또 선 봐야 할꺼잖아. 그 지겨운 일 안 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칫."
"그런데 정희씨가 왜 헤어지자고 한 거야?"
"아..그게 말이야.."
현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재준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들이대던 정희였기에 그걸 재준에게 설명하기가 여
의치 않았다.
"뭐, 성격이 마음에 안 들었겠지. 아니면 테크닉인가? 히히.."
슬렁 농담으로 넘겼지만 현수는 정희의 말을 다시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 가을쯤에 선을 봤던 정희는 29살의 야무진 꽃집 사장님이었다. 일 년에 열두 번은 넘게 선을 보는 현수에게 있어서 여태 만났
던 그 어떤 여자보다 정희가 마음에 쏙 들었다. 얌전한 자태지만 모습대로 얌전하기만 한 여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바락바락 목청을 높일 만큼 경우가 없는 여자도 아니었다. 양보도 잘하지만 적정선의 고집도 있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장장 육 개월을 넘게 사귀던 정희였다.
그런 그녀에게 빠르면 5월에 늦어도 올 가을에는 결혼을 할 요량으로 반지를 몰래 맞추고 청혼을 하러 간 만남에서 이별을 선고받은 것이다.
선을 보고 몇 개월 사귀다가 헤어진 경우가 허다했지만 현수가 결혼을 생각하며 반지를 맞춘 여자는 정희가 처음이었다.
이별의 슬픔보다 정희가 말한 그 이유가 더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왜냐하면 그 이유라는 게 여태 만났던 여자들이 헤어질 때
했던 불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 네가 재준씨랑 인연 끊으면 다시 생각해볼게.
- 뭐?
- 말한 그대로야. 나 도 재준. 그 사람 마음에 안 들거든.
-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재준이는 내 불알친구와 다름이 없는 친구라고 몇 번을 말했어. 억지 부릴 걸 부려!!
- 그래? 그럼 현수씨는 윤 정희보다 도 재준이 더 가치있다는 말이네. 그럼 이야기는 끝났네! 뭐.
- 정희야. 너 왜 그래? 두 사람이 가진 색깔이 다른데 어떻게 같이 두고 저울질을 해?
요 근래 들어서 바빠지기 시작한 재준 때문에 현수도 한 달에 한 번 겨우 만나다시피 했기에 정희가 재준을 본 것은 육 개월동안
딱 두 번뿐이었다. 그것도 같이 식사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고 우연히 식당에서 봐서 목인사를 한 게 전부인 두 사람인데 정희는 유
난히 재준을 싫어했다. 말이 많은 것은 아니나 적당하게 예의바른 태도로 정희를 대했던 재준을 미워하는 것이 현수는 정희가 자
신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 색깔이 달라? 그거 어떻게 장담하는데?
- 무슨 소리야?
- 현수씨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잔머리 안 굴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생각을 하는 점이 귀엽고 보기 좋아서 좋아했어.
그런데 그게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었던 것 같아.
- 그래, 나 단순해서 재준이 한테서 아메바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처음엔 그게 좋았다며? 이젠 왜 싫은 건데?
- 휴..
- 정희야. 내 성격에 문제가 있다면 말해. 내가 고칠 수 있는 거라면 고칠게. 응? 너 그래서 요즘 기분이 계속 안 좋았던 거야?
응?
- 현수씨. 지금 내가 하는 말 잘 모르겠지?
- 성격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은 알겠어. 하지만..그건
- 현수씨 나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재준이란 이름 도대체 몇 번이나 나온다고 생각해?
- 응?
- 내 개인적인 이야기보다 재준이 그 사람과 있었던 일 이야기 하는 게 더 많은 거 알아?
- 그건.. 재준이와 매일 통화를..
- 그래. 재준씨랑 자주 만나진 않아도 매일 통화하지? 그런 습관 오래되었다고 나한테 자랑도 했었지? 그런데 일이 바쁘다고 하면서
나랑 통화를 안 한 게 삼 일 이상 된 적도 있었어. 알아?
- 친한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잖아.
- 친한 친구사이라도 애인이 생기면 애인이 먼저야. 안 그래? 나랑 있다가도 당신 11시 반이면 총알같이 집으로 가는 거, 정상이라고
생각해? 그게 애인 앞에 두고 할 짓이라고 생각하냐고. 당신의 모든 잣대는 도 재준이잖아. 아니라고 할 거야?
재준과 통화하는 시간은 항상 밤 12시였다.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들여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습관은 오래되었고 샐러리맨인 현수
에게 있어서는 그 시간이야말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상사의 욕을 하기도 하고 만나는 여자 이야기도 하고 때로
는 썰렁한 농담도 하면서 현수는 하루의 마침표를 찍었다.
문제는 재준이 현수의 핸드폰이 아닌 집 전화로 한다는데 있었다. 하지만 습관이 그렇하듯 현수에게는 불편함이 없었다. 술 약속이
있게 되어도 11시면 자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고 주위 다른 사람들도 익숙해져 11시가 되면 안 가냐고 먼저 말을 할 정
도였다.
그런데 정희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그것 때문에 몇 번 싸운 적이 있었다. 11시에 들어 가야하니
심야영화도 못 보고 늦은 데이트를 못 한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내일 만나면 되지 않느냐는 현수의 말에 더 화를 내던 정희였다.
정희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현수는 화를 내는 정희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일 저녁에 또 보면 되는 것을
왜 굳이 늦은 시간까지 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밤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새벽
한 두시면 헤어질 텐데 고작 두어 시간 더 볼 거라고 택시비 들이고 재준과의 통화도 못하는 건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재준씨도 그래. 그때 만났을 때 재준씨 어땠는지..
- 윤 정희. 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만이잖아. 재준이 욕 하지 마. 듣기 싫어.
- 하.
- 그래, 결론은 뭐야. 내 습관이나 성격 이해 못해서 헤어지자는 거야?
- 그래.
- 좋아. 내 성격 이해 못한다는 여자 붙잡고 싶은 마음 없어. 나 때문에 그동안 힘들었으면 미안하다. 그동안 고마웠어.
- 생각보다 간단하네? 역시..
- 싫다는 여자 붙잡는 취미 없다 난.
- 마지막으로 충고하나 할까? 당신 재준씨가 곁에 있는 한 결혼 못 할 거야.
- 재준이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지!!!
- 같은 색깔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두 사람 친구사이가 아냐.
- 뭐? 그럼 뭐라는 거야?
- 글쎄. 그건 현수씨가 알아 내야할 숙제겠지? 재준씨야 알고 있겠지만.
-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재준이와 내가 친구가 아니란 말이 네가 하는 마지막 충고라는 거야?
- 그 숙제를 풀지 못하면 당신 결혼 못 해.
- 누가 뭐라고 해도 재준은 나에게 있어 제일 소중한 친구야.
- 제일 소중한 친구?? 과연 재준씨도 그렇게 생각할까?
현수는 자신이 좋아하는 회를 추가로 더 주문하는 재준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알기로 재준에게 있어 친구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자신과 형준이라는 친구뿐이다. 정희말은 재준이 녀석이 날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건가??
하지만 그런 결론은 말도 안 되는 거다. 비록 자주 만나 술잔을 부딪치는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 잘 통하는 사이임엔 틀림이 없고 재준이 현수의 호출에 호응을 하지 않는 적 역시 한 번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이런 자리를 만들게 된 것도 현수의 호출에 삼십 분만에 재준이 나타났기에 가능한 것이다.
혼자 정희의 말을 곱씹다가 머리 아파서 재준에게 전화를 했는데 마치 대기하고 있었는 양 금세 턱 하니 나타난 것이다.
현수를 소중한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면 사전에 한 약속도 아니고 덜컥 한 통의 전화로 나타날 리가 없다.
"역시, 심란해?"
"응?"
"여태 만났던 여자들과 헤어졌을 때보다 심각해보여서.. 진심으로.. 사랑했던 거야?"
"참내, 여러 말 하게 만드네. 정희는 다른 여자들이랑 달랐다니깐. 체. 근데 그러면 뭐하냐? 헤어져 버린 걸. 에라, 모르겠다.
야. 술잔 비었잖아. 아그야, 형님이 입 대기전에 재깍재깍 채우지 않으련? 나 씨방 무지하게 기분 꿀꿀하거든? 응?"
"후후.. "
"역시 넌 성격파탄자였어. 친구놈 프로포즈하는 날 채였는데 비웃기나 하고 말이야. 야~ 너 그러면 안 되지~ 그럼 나 섭하지~"
원래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질색이었다. 현수는 정리되지 않은 정희의 말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재준이 스스로 자신의
입으로 현수를 친구가 아니라고 내치지 않는 바에야 정희의 말만 믿고 그에게 나 친구 맞아? 하는 것도 십 년이 넘는 우정을 먹칠
하는 꼴이다.
어찌 보면 여자의 말 한 마디에 우정을 고민하는 모양도 우스운 거였다. 그래서 현수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날 정도
로 술을 마시기로.
**
자신보다 키가 작다고 해서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재준은 170센티는 훌쩍 넘는 사내를 등 뒤에 업고도 숨 하나 흐트
러지지 않았다. 과음에 정신을 놓아버린 몸이 물 먹은 솜뭉치처럼 등을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지만 재준은 가뿐하게 이층 계단을
올랐다.
현수의 가방을 뒤져 열쇠를 찾는 것보다 자신의 열쇠가 빠를 것 같아 자신이 가진 현수집의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섰다. 침대에 조
심스럽게 현수를 눕히고 방을 돌아보니 역시나 방 모양이 가관이었다. 여전한 모습에 한숨보다는 가벼운 웃음이 먼저 새어나왔다.
물론 오늘 들은 희소식에 모든 것이 기분 좋게 보여서 그럴 테지만.
현수의 옷부터 갈아입히고 - 녀석의 잠옷습관 이라는 게 팬티만 입고 자는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일전에 사준 잠옷을 입혔다
- 팔부터 걷어붙였다. 겨우 19평에 불과한 원룸의 바닥은 그 바닥의 무늬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세탁을 해야 하는 옷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가늠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바닥에 흐트러져있는 옷 들은 몽땅 세탁기속에 넣었고 세탁
기가 가득 차자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세탁 버튼을 눌렀다. 자신이 누르지 않으면 현수가 분명 하루밖에 안 입었는데, 를 외
치며 몇 개의 옷을 꺼낼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 재준의 손길로 깨끗하던 욕실은 역시나 폭탄을 맞은 듯 제자리에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왜 베란다까지 갔는지 알 수없는 바구니를 다시 들고 와 샴푸와 린스 보디클랜저를 담기 시작하면서
욕실 청소가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재준의 눈에 만족스럽게 정리가 되자 커다란 거실 창으로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게으른 그에 대해 불만은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그가 게으른 게 반갑기까지 했다. 그래야 자신의 필요성을 느낄 테니깐.
현수의 말대로 머슴이면 어떻고, 친구면 어떤가. 그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상관이 없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어차피 잠을 자기는 걸렀기에 재준은 피곤을 느끼는 몸을 잠시 침대에 기대는 걸로 휴식을 취했다.
축 늘어진 현수의 손이 재준의 옆에서 덜렁거렸다. 온기만 느껴보자는 마음으로 손만 살짝 잡았는데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작게 벌려진 입속에는 붉은 혀가 슬쩍 내보였고 기분 좋은 꿈을 꾸는지 눈썹은 예쁘게 휘어져 있었다. 잠옷이라는 게 다 그런 건지
목 부분이 훤히 파인 잠옷 너머로 가슴 돌기가 보일듯 말듯 하다.
"하아.."
평생 모를 거다. 이 녀석은. 자신이 어떤 음심을 품고 있는지.
하지만 꼭 음심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짓을 하지 않은 채 그를 꼭 안고 단 한 번이라도 잠들고 싶기도 하다. 그러면 잠
이 잘 올 것도 같았다.
원래 잠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언제 발작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새우잠 자던 것이 버릇이 되어 길게 잠을 못 자게 되었다
. 그리고 잠을 자게 되더라도 신경은 예민하게 곤두서곤 했었다. 작은 소리에도 깨기 일쑤였고 그건 어머니가 아프기 전부터도 그래
서 어머니께서 꼭 동물과도 같다고 넌 천성으로 싸움꾼으로 태어났다고 아쉬움의 탄식을 하곤 했었다.
그런 자신이지만 현수를 안고 자면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게 가능할 때는 그를 안고도 아무런 욕망이 생기지 않을 때나 아
니면 하도 자주 해서 그냥 안고만 자도 만족할 수 있을 때일 테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경우가 생기는 일은 아마 평생을 가도 없을 것이다.
손을 만지작 거리며 살짝 입을 맞추었다.
한 번 자면 웬만하면 깨지 않는 현수의 둔한 감각이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의 손을 꾹 잡으며 물었다.
"야, 아메바. 결혼..꼭 해야겠냐?"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기에 재준의 목소리는 대답은 들은 사람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만족스럽지 않은 대답이지만 재준은 여태 그랬듯이 현수의 머리칼을 쓰다 듬으며 아침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