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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짓말 [3] (3/28)

하얀 거짓말 [3]

지끈거리는 두통 속에서도 통통 경쾌한 박자의 도마 소리와 부글부글 콩나물국-분명 콩나물 국일 것이다- 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슴츠레 눈을 떠보니 역시 재준이 부엌 조리대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비딱하게 선 자세에서 비딱하게 담배를 물고서. 

실내에서 담배 피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지 못하는 순간은 바로 재준이 싱크대 앞에 있을 때 뿐이었고 재준은 그때를 기회로 삼아 

줄담배를 피는 영악함을 종종 보였다.

현수는 스탠드에 놓인 차가운 물 한 컵을 마시며 자신이 깬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채 콩나물 국의 간을 보는 재준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조폭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얼마 전 자신의 당부는 콧바람으로 날려버리고 손에 파이프를 든 재준은 엄연히 깡패였다. 물론

 재준은 깡패란 말을 끔찍이도 듣기 싫어했지만 아무리 적군이라지만 생사불명일 정도로 사람을 두들겨 패는 건 깡패뿐이라는 게 현

수의 지론이었다.

피를 보고 무서운 줄 모르는 제법 유명한 깡패님께서 저렇게 부엌에 서서 요리를 하는 모습은 아무리 눈에 익었다 해도 어색하게 보

였다.

재준의 밑에 있는 민이나 두식이 녀석이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을 하자 즐거워졌다. 재준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하는 

거나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리던 녀석들이 요리까지 하는 재준을 보면 아마 실물

을 보고도 믿지 않을 것이다. 

술 마시고 전화하면 퉁명스러운 얼굴이지만 번개같이 달려왔고 아침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방은 깨끗하게 빛나고 냉장고는 그가 가

고 난 뒤 일주일은 풍성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가득 차졌다. 그리고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시원한 콩나물국의 맛은 분명 

어머니의 솜씨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냉정해 보이는 얼굴과 시니컬한 말투와 전혀 다른 가정적인 재준의 모습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어, 일어났어?"

재준이 웃으며 다가오자 현수는 마주 웃어주었다. 매번 폐를 끼치는 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안, 이라는 말을 하기

엔 안 미안한 것이 사실이다. 당연하다고나 할까, 매번 여자들과의 관계가 끝나고 난 다음엔 그를 불러 술을 마시고 다음날 재준이 

끓여준 콩나물국은 어느새 일상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일과가 되어버린 탓이다.

그리고 현수는 자신의 부엌에 익숙하게 서 있는 재준의 모습이 마치 제자리를 찾은 듯 안정감이 있어 보여 언제나 보기가 좋았다.

재준이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와 현수의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다듬어 주었다. 은은한 바디크랜져의 향에 현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 편안함을 만끽하였다. 이런 멋진 친구의 우정을 잠시나마 여자의 한 마디 말에 의심을 품었다는 것이 재준은 모르겠지만 내심 현

수는 미안해졌다.

뭐가 친구가 아니란 거야? 윤 정희. 이렇게 완벽한 친구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이런..이번엔 충격 좀 먹었나 봐? 다른 때는 술 마시고 난 뒤 금방 잊었었잖아." 

눈을 감고 재준의 듬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손놀림의 스킨십을 즐기며 눈을 감고 있던 모습이 상심의 표출이라 여겼는지 재준의 걱정스

러운 목소리에 현수는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살 탓인지 금방 씻고 나온 사람처럼 뽀얗게 웃고 있는 재준의 얼굴을 보며 현수는 새삼 친구의 훤칠한 이목구비에 시선을 

빼앗겼다.

평범하게 생긴 자신과 달리 재준은 어디를 가더라도 눈에 띄는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만으로도 눈이 가는데 

지극히 남성적으로 생긴 얼굴은 남자인 자신이 봐도 생각을 잊어버리고 볼만큼 멋졌다. 그리고 그렇게 잘난 도 재준이 제 일 번으로

 꼽는 친구가 자신이라는 건 종종 우월감마저 느끼게 한다.

"아직까지......속상하냐?"

"아........"

그제야 현수는 자신이 바로  몇 시간 전에 정희와의 이별 때문에 재준과 술을 마신 것을 기억해냈다.

 그런데 그게 아주 오래전의 일인 양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재준과 있으면 항상 그랬듯이 말이다.

그와 있으면 제법 심각했던 슬픔도 술 한 잔과 함께 가벼운 추억거리로 전락을 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어제의 경우는 정희와의 이

별이 주는 충격보다는 그녀가 남긴 말이 신경이 쓰여 술을 마신 경우였지만.

"너 정말 심각했었구나??"

말없는 현수를 보며 나름대로 정희와의 결별에 충격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는 재준을 보며 현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에게는 좀 퉁명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최소한 현수에겐 다정다감, 그 자체인 재준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 만해서 

그의 걱정을 들어주기 위해 가볍게 그의 배를 툭 치니 재준의 손이 다시 현수의 머리칼 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은 따뜻하기만 하다.

언젠가 생일선물로 요구해왔었다. 머리 기르기. 어이없는 주문이었지만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여자처럼 치렁치렁한 길이도 아닌 조금 긴 정도여서 선물로 땜방을 한 후 쓰다듬기가 시작되었다. 

이유를 물으니 손이 심심하단다. 너 성격 참 이상하다는 말로 타박을 주었었다.

"심각은 무슨 심각!! 야, 밥 다 되었어?? 우웅..배고파......."

"후훗. 그래 씻고 와. 밥 차릴게."

숙취로 머리가 아팠지만 분명 이 두통은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시원한 콩나물국으로 해결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분명 어젠 괴로웠고 아팠었다.

그건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제대로 된 연인이라고 연애다운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핑크빛 미래가 무참히 깨어졌을 땐 정말 아득했었다. 

나이 서른이 아닌가.

어머니는 26살 때부터 결혼과 여자를 입에 달고 다니시기 시작했고 4년의 세월동안 만나본 여자, 셀 수도 없었다.

사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양각색의 여자들을 만났었고 헤어졌었다. 그리고 이제는 선이 아닌 자급자족도 가능하게 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면 뭘 하나.. 육개월 이상을 가는 연인이 없는데..

그 와중에 만난 정희씨는 처음으로 육 개월씩이나 만난 사람인데다가 결혼까지 생각한 사람이어서 헤어짐이 많이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아쉬움뿐이다. 참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다름 아닌 이 소식을 듣고 당장 아침마다 선 이야기로 모닝콜을 하실 어머니의 잔소리다. 

"요즘도 바빠?"

"왜?"

"야, 정희씨도 안 만나는데 나 그럼 매일 뭐하고 노냐? 재준아, 나랑 놀자? 응?"

"후훗. 나랑 뭐하고 놀고 싶은데?"

"뭐 영화나 보고 회도 먹고~"

슬쩍 얼굴을 돌리자 수저를 놓은 재준의 손이 현수의 얼굴을 잡고 마주보게 원위치시켰다.

"그래, 그 횟값은 네가 내고?"

"야, 쪼잔 머슴!!!  그렇게 아깝냐? 아까워?? 너 사장이라매? 사장이 쪼잔하게 불쌍한 샐러리맨 이 대리가 내는 회 먹고 싶냐? 응?"

"불쌍하긴, 매일 땡땡이 치는 샐러리맨이 뭐가 불쌍해"

"니가 몰라서 그런거지.그건. 아흑~ 우리 회사가 얼마나 빡빡하게 일 시키는 줄이나 알고 그런 말을 해라. 어떨 땐 커피 마실 시간도

 없다니깐. 퇴근시간이 되면 온몸이 쑤셔서 안 아픈 곳이 없다. 안 아픈 곳이 없어. 컴퓨터 앞에서 하루종일 앉아있는 게 얼마나.."

딱딱하게 안면을 굳힌 재준의 표정을 보며 현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건 머슴이 아니라 완전히 엄마다 엄마. 조금만 아프다는 소

리가 입 밖으로 나오면 머리도 잘 굴러가는 녀석의 머릿속에 시멘트를 들이부었는지 농담인지 진담인지도 구분 못 하고 걱정으로 경직

되고 마는 것이다.

"힘들어?? 너, 일 그만 둬"

"내가 말을 말아야지.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말이. 그 정도도 힘 안 들고 일 다니는 사람 어디에 있어!!!"

"어깨 또 뭉친 거야?? 주물러 줘??"

고개를 조금만 끄덕였다가는 먹던 밥도 팽개치고 일어날 것 같아 현수는 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다니깐. 밥이나 마저 먹자. 응? 대신 회는 네가 사는 거다."

"그래. 그런데 일이 힘들어? 내가 다른 자리 알아봐 줄까?"

"됐다니깐 그러네. 내가 이 정도 일도 못하는 애냐? 이게 은근히 날 무시하고 있어. 진짜."

"그럴 리가. 음..저녁이라....."

"왜 요즘도 계속 그렇게 바빠? 나랑 저녁도 못 먹을 만큼?"

"아..아냐. 그럼 오늘 저녁?"

"그러엄!!! 쇳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늘. 오케이?"

"그래. 그럼 대해에서 7시에 보자."

아침을 둘이서 가볍게 먹고 출퇴근을 지하철로 하는 현수를 위해 재준이 차로 회사까지 

바래다주는 동안 차 안은 재잘 거리는 현수의 말과 간간이 대꾸하며 가볍게 웃음 짓는 재준의 낮은 듣기 좋은 울림으로 가득 채워졌다.

"나 좀 볼까요? 이 대리"

기획1팀의 실장인 현희의 호출에 현수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리 칸막이 너머 현희가 상담실을 손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며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희는 그녀를 사모하는 직장동료 우진의 말에 의하면 장미와도 같은 여자였다. 

화려한 배경과 눈에 띄게 아름답지만 오만하였고, 그 오만함마저 자신감으로 표출이 될 만큼 당당한 완벽했다. 단세포다,

 라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인 현수지만 평범에는 절대 눈을 돌리지 않을 것 같은 현희가 최소한 현수를 싫어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현수로서는 그녀와의 면담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사의 부름에 꼬리를 마는 건 당연지사다.

상담실의 문을 열자마자 반기는 것은 매캐한 담배연기였다. 손가락을 하나 까닥이는 것으로 맞은 편에 앉을 것을 권하는

 현희의 지시대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면서도 현수의 인상이 담배연기로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담배에는 질색을 하는 것을 현희 역시 잘 알면서 통풍도 제대로 안 되는 밀실에서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너 진짜 싫어한다' 라는 말과 별다를 게 없는 의사표현이었다.

"실장님?"

한참이 지나도 말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담배만 피워대며 자신을 노려보는 현희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조심스럽게 현수가 먼저 말

을 꺼내었다.

"그 사귄다는 분과는 헤어졌나 봅니다."

"아..어떻게. 아... 재준이한테서 들으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재준과 현희는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재준과 아침에 헤어졌는데 그새 소식을 들었나 싶어 현

희를 바라보니 가소로운 듯 비웃는 입의 꼬리가 위로 치켜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짜증밖에 안 나는 현수를 노려보며 현희는 여태 참았던 울분을 터져나와 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현수를 빌미삼기는 

했지만 그를 겨우 한 달 만에 꼬여내 호텔로 들어갔던 어제가 아닌가.

물론 마음에 둔 사람은 따로 있지만 재준정도면 썩 훌륭한 먹잇감이라고 여겼고 까다롭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능력으로 넘어

올 것 같던 사내였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과도하게 흥분하여 룸에 들어서자마자 입술부터 더듬었었다.

재준도 그럴 생각이 있는지 호응을 하며 허겁지겁 그가 주는 달콤함에 빠져들려는 찰나 재준의 핸드폰이 울리고 만 것이다.

그가 가진 핸드폰 가운데 꺼두지 않는 핸드폰이란  2년이나 지난 구형 핸드폰으로 현수와 같이 기종의 핸드폰이다.

그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 대외적으로 알려진 핸드폰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회의 시간조차 그 핸드폰을 꺼두지 않는다. 

물론 여자와 함께 있더라도 말이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밀치고 전화를 받는 재준이 미워 약올리려는 심산으로 벗지 않은 그의 아랫도리를 움켜쥐자 목소리는 상냥하지

만 눈으로는 분노를 내뿜던 재준이 자신을 밀쳐 결국 바닥에 뒹굴게 하였었다.

그리고는 언제나 그랬듯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방을 나갔다. 그게 지난 한달동안 공들여 겨우 만났던 재준과 함께 보낸 한 시간의 

내용이다. 어제 그 시간에 전화한 사람이 누군지 왜 전화를 했는지 현희는 아무것도 듣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 어제의 일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다시 만날 수 있는 빌미가 될 터이다. 하지만 아침에 받은 전화

가 현희를 참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약아빠진 세상물정 모르는 사내는 무슨 일을 과도하게 시킨다고 일이 많네 적네 하면서 투덜거린단 말인가. 

"뭐, 그정도로 가벼운 이야기는 재준씨가 말해주니깐요. 그나저나 이 현수씨."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라는 생각에 빠져있던 현수의 대답이 채 들려오기도 전에 현희는 꼬인 다리를 풀며 현수에게로 상체

를 들이밀었다.

현희는  긴 팔의 블라우스와 실크 팬츠를 한 벌로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상의는 매듭도 없는 여밈 형식이어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가

슴이 훤히 보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른쪽 골반 쪽에서 편안하게 묶인 상의 자락은 무난해 보이기도 하였지만 손만

 대어도 풀릴 것 같이 아슬아슬 하게 관능적이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붉은색 꽃이 정교하게 프린터 되어 있어 그녀의 

이미지와 잘 조화를 이루어 강렬하면서  섹시한 느낌이 들었다.

현수의 머릿속에는 외모로 본다면 이런 여자야말로 재준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전적으로 외모만 본다면 말이다.

"이제 그만 놓아주는 게 어떤가요?"

그러니깐 미운 것이다. 재준에게 무슨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둘이서 숨바꼭질하는 걸 보니 자꾸 쑤셔보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한

다. 어딘가 모르게 괴롭히고 싶은 커플이랄까..

"네? 놓아준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실장님?"

"재준씨요. 너무 잡아둔다는 생각, 안 해요? 그렇게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처럼 재준이 다리를 잡고 칭얼거려야 되겠어요?

 한두살 먹은 애도 아니고."

적의감이 잔뜩 배인 말투보다 알아 들을 수 없는 현희의 말에 현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 재준이의 다리를 잡고 있다구요?"

"그럼, 아니란 겁니까? 현수씨 때문에 재준씨가 도대체 무얼 얼마나 더 포기해야 다리를 놓아줄 수 있나요?"

"포기?? 아니 그게 무슨 말.."

"이봐요. 이 현수씨. 비록 두 사람이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한 친구라고 하지만 보통 친구들은 안 그렇거든요."

뭔가 오버랩되는 말에 현수의 귀가 번쩍 열렸다. 

"아아..물론 내가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재준의 오래된 파트너로서 재준이 

좀 안타까워서 말이에요. 재준이 워낙 약하고 불쌍한 것에 약해서 떼고 싶어도 못 떼낸다 싶어서 제가 악역을 자청하고 있는 겁니다.

 현수씨. 당신이 재준이의 자유를 뺏고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나요? 현수씨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까?"

"시..실장님.."

"재준이가 당신 취직자리까지 알아봐 주었으면 이쯤에서 떨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정도 우려먹었으면 되었잖아요."

"아니..저 재준이는 저와 오래된 친구.."

"후..친구. 좋지요. 그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는 친구. 생각해보세요.현수씨. 재준이가 현수씨 전화 한 번 이라도 안 받은 적 있나

요? 또 현수씨 그 수 많았던 여자들과 헤어질 때마다 뒷 수발 들은 적 없다고 할 셈인가요? 재준이는 개인 생활 없답니까? "

모두 맞는 말이기에 반박의 여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수긍을 하기엔 뭔가 이상해 입을 열었지만 현수는 한 마디로 할 수가 없었다. 자

신이 당연하다 여긴 친구 간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렇게 이상한 것들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방적인 관계라고 생각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금전적인 문제야 재준에게 의지를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것도 다 재준이 먼저 원해서 하는

 경우고 기껏해야 회 한 번 사는 것 정도이고 그 외는 거의 없었다. 

"현수씨 전화에 친구라는 핑계로 모든 사생활 던지고 재준이 달려가요. 그게 재준이 앞을 방해하는 거지 뭡니까? 재준이 인물이 못났

나요? 돈이 없나요. 그런 그가 여태 현수씨한테 애인이라고 소개해준 사람 있었습니까?"

그제야 가슴이 허걱하고 놀란 소리를 내었다. 매번 애인 없다 구박만 했었지 왜 애인이 없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

었다. 그걸 지금 현희가 꼬집고 있는 것이다.

"다, 현수씨 때문입니다. 일전에 잠시 사귀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왜 헤어졌는지 알아요? 데이트하다가 친구 전화받고 쪼르르 달려가

는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좋다고 합니까? 진정한 우정이니, 죽마고우니 하는 친구놀음은 고등학교 때 졸업해야 하는 거 아니었나요? 

그러니 현수씨가 사회성이 없다는 말 듣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제 말?"

사회성이 없다는 말은 처음 듣지만 자신이 재준에게 연애마저 방해받을 정도로 성가시게 굴었나 싶었다.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호출에는 반드시 오고 안 좋은 일에는 꼭 함께하고 종종 집안 청소에 식사까지 해준다. 

그리고 매일 전화를 한다. 그런 재준에게 현수가 해주는 것이라고는 가벼운 음식 투정과 가끔 폭주를 할 때 가서 몇 마디 말로 말려준다는 것뿐이다. 

생각을 안 해봐서 몰랐는데 곰곰이 따져보면 재준이 현수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있다. 그런 줄은 알고 있었지만 

뻔뻔할 수 있었던 것은 재준도 원하고 즐기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건 상당한 

폐가 되는 것이다. 하긴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집안 청소해주고 밥도 해주고 좋아하는 음식 매번 사주진 않는다. 

역시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 번도 느닷없는 현수의 호출에 응하지 않는 적이 없다는 게 제일 크다.

누구를 만나고 있을 수도 있고 -현희의 말대로 그 상대가 여자일 수도 있다 - 

운동을 하고 있을수도 있고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십 년 동안 자신이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매번 전화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역시나, 우정을 중시하는 녀석이라 거절하고 싶지만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건가.

"겉보기엔 험해 보여도 실제로는 다정하잖아요. 그래서 여태 현수씨한테 싫다는 말 못하고 자신의 생활 다 버리고 현수씨 하자는 대

로 다 해주었으면 이젠 현수씨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재준이 지켜봐 주어야 할 때 아닐까요? 알고 있죠? 재준이 다정한 성격인 거."

"여태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역시 재준이와 오래 알고 계셨던 분이 다르군요. 재준이 다정한 성격인 것도 알고. 형준이 녀석도 냉

정한 놈이라고 매도하는데..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장님."

"이렇게 이해해주니 내가 오히려 고맙네요 현수씨. 그럼 그만 일 보러 가세요."

축 쳐진 어깨의 근육이 문을 돌리기 위해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보며 현희는 선심을 쓰듯 한 마디를 던졌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알려드릴까요? 이 현수씨."

대답은 없지만 멈추어진 몸동작으로 대답을 들은 양 현희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이 현수씨가 얼마만큼 재준이와 친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었는지 모르겠지만 한 쪽면 만으로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랍니다. 옛 속담

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옛 속담 중 그른 것은 하나도 없지요. 재준이를 백 프로 다 알

고 있다고 자만하지 않은게 좋을 겁니다. 장담하건대 언젠가는 그 깊어 보이던 우정이라는 게 사실 풍선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풍선이란 그렇잖아요? 작은 바늘 하나에 뻥! 하고 터져버려 그 몸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터지는 게 싫다면 한 발 물러서는

 게 좋을 거예요. 더 이상 가까이 가면 터져버릴지도 모르니. 아아..내가 너무 오버했나요? 후후.. 내가 하고픈 말은 현수씨가 아는

 그 다정한 재준이와 조금 떨어지는 것이 재준이를 위해서도 현수씨를 위해서도 좋다는 겁니다. 내 말 아시겠어요? "

경직된 채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 현수가 상담실에서 나가자 현희는 느긋하게 새 담배를 하나 꺼집어 내며 현수가 사라진 문을 바라

보았다. 저런 시시한 남자 따위가 왜 재준의 아킬레스건인지 이해할 수 없다.

"후후후.. 정말 바보 아냐? 누가 다정해?? 도 재준이? 하.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지. 그 인간이 다정한 인간이면 세상 사람들 다 

부처겠네. 기가 막혀. 내가 말하고도 닭살 돋네. 그나저나, 도 재준씨. 그 비싼 얼굴 감추니깐 내가 편법을 쓰는 거잖아. 귀한 사람

 다치기 싫으면 어제처럼 날 그렇게 밀치면 안되지. 암, 그렇고 말고. 후후후... 아무리 잘 났다고 뛰어봐야 이 현수가 내 손안에 

 있는 이상 당신 못 날게 되어있다고. 그러게 왜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겨? 맡기길. 날 무시하면 재미없어. 다정한 도 재준씨."

**

"저..그게.."

아마 재준이 타인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냉정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원래 욕

심이 없는 성격이라기 보다는 딱히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칠 일이나 슬퍼할 만큼 애착이 가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는 냉정보다

는 심심한 성격이라 여기고 있다. 그러나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웃음을 가진 사람이 16살 때 가슴속에 들어온 뒤로는 예외가 생겨

버렸다.

"놓쳤다?"

"네..형님. 분명 퇴근하신 후 집 쪽으로 걸어가신 걸 보긴 했는데 사람이 워낙 많은 곳이다보니... 죄송합니다 형님!!!!"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상준은 뭔가 깨어지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놀라 재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혀..형님!!!"

재준의 손안에는 깨어진 유리컵의 잔해가 그의 손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곁에 있던 민과 두식이 달려와 그의 손을 잡으려 하자 성난 손짓으로 재준이 거부하였다.

"찾아라. 행여 오늘 내로 못 찾는다면 넌 죽은 목숨이다 이 상준. 찾아서 데려와!!! 지금 당장!!!!!"

붉게 번뜩이는 눈은 상준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고 목소리는 다금질이 잘 되어있는 칼날 위에 서 있는 양 날카로웠다.

민을 제외한 방 안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은 민의 눈짓에 모두 잔뜩 긴장한 채 방을 나서고야 제대로 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대해의 지배인은 알아서 홀의 손님을 보내버리고 현관에는 금일휴업 팻말을 내걸었다. 

여닫이 문이 닫히자 민은 재준의 뒤에서 조용히 그의 걱정을 덜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마 약속을 잊으셨나 봅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요. 형님."

재준에게 있어 '친구'라는 단어가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냥저냥한 친구로 만들기 위해 보고 싶어도 참고 또 참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만났던 현수였다. 물론 다른 뜻도 있었지만.

적이 없다고는 못하나 그렇다고 해서 재준의 '친구'인 현수를 어찌해서 이쪽의 관심을 끌 정도의 모험을 하는 사람까지는 없을 것이

다. 합법적으로 방향을 튼 것에는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탓도 있겠지만 그렇게 양지사업을 하는 것으로 현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때문이다.

그런 것을 알고 있지만 재준의 입 안은 빠작 타 들어갔다. 몇 번이나 눌러보았던 핸드폰으로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답지 않게 초조해 보이는 재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은 방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약속시간은 7시라 하였건만

 시계추는 속타는 재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10시로 향하고 있었다.

손에서 흐르던 피가 핸드폰에 묻고 급기야 화를 못 이긴 재준이 핸드폰을 벽을 향해 던지고 그 벽에 붉은 핏자국이

 남는 것을 보며 민은 재준이 눈치채지 못하게 길게 숨을 내뿜었다.

누가 도 재준에게 냉정하다 말했던가. 

그건 엉터리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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