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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짓말 [4] (4/28)

하얀 거짓말 [4]

"진짜..난 방해꾼밖에 안 되었는 건가?? 실장님 말대로.. 하지만.."

누가 가볍게 한 방 때렸는데 그걸 피하려다가 넘어져 머리가 깨어진 기분이었다. 실상 생각해보면 크게 심란할 일도 아닌데 마치 번

지점프를 하기 위해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양 정신은 아득하고 가슴은 심하게 벌렁거리는 것을 진정 시킬 수가 없었다.

"하아..나 왜 이러지??"

평소의 자신이라면 재준에게 다가가 정말 내가 방해가 되었냐? 라고 물었을 것이다. 가볍게 웃으며 그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방해라는 글자가 처음부터 자꾸 가슴속을 맴돌더니 급기야 푹 파고들었다. 아프다. 재준에게 방해란 단어로 자신이 정의

되는 것이 현수는 너무 아픈 것이다. 

자신이 재준에게 조금 더 소중한 존재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 있어 방해꾼으로 명명된다고 생각하니 속이 상한다.

"하아..."

재준에게 아메바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단순 쾌활하게 사는 게 목적인 현수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자괴감이 섞인 한숨이 계속 나왔다.

익숙한 거리에 눈을 들어보니 어느새 집 앞 공원까지 온 것을 보고서야 현수는 자신이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 온 것을 깨달았다. 그제

야 다리가 조금 아픈 것을 느끼며 털썩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들썩이는 마음이 아직까지 진정되지 않아 바깥공기가 나을 것이다. 이

럴 때 담배라도 하나 태우면 좀 진정이 되려나? 라고 생각을 한 것은 집 앞에 서성대는 몇 남자들이 피우는 담뱃불 때문이었다. 

"어?? 두식이??"

무심결에 보다가 눈에 익은 인물이다 싶어 설렁설렁 걸어가며 두식이의 이름을 불렀다.

"형니임~~~~!!!!!"

마치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듯 두식이 현수의 손부터 성큼 잡자 현수가 오히려 놀랐다.

"어? 왜?? 근데 너 왜 여기에.."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닙니다. 빨리 가셔야 해요."

"왜? 그 녀석 또 사고쳤냐? "

"그게 아니라, 참네 형님 오늘 약속하셨다면서요!! 대해에서!!!"

"아..맞다.."

"휴..오늘 내로 찾았기 망정이지.."

"응?"

"아, 아닙니다. 지금 기다리고 계시니 빨리 가시죠. 야, 큰 형님과 상준이 형님께 전화 넣어."

뒤에 따라오는 똘마니에게 지시를 한 뒤 두식은 현수가 도망이라도 가는 듯 손목을 꽉 잡고 차로 뛰어갔다.

대해는 꽤 넓고 유명한 일식집이었다. 처음 재준이 현수를 데리고 갔을 때 현수는 다른 그 무엇보다 싱싱한 회 맛에 격찬을 하였

고 그때부터 회를 먹을 일이 있을 때 두 사람은 매번 대해를 찾았다. 다행히 손님이 많을 때도 그들이 머물던 제일 안쪽의 룸이 항

상 비어있어 기다린 적은 없었지만 종종 사람들이 많아 대기하던 손님이 있었던 걸 기억하기에 현수는 대해의 텅 빈 홀을 보며 다

가오는 지배인에게 물었다.

"어? 오늘은 어째 손님이 없네요? 이렇게 한 명도 없을수가.."

"아..네. 뭐 요즘 불경기다보니..하하.. 사장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들어가 보시지요."

"네. 그럼."

몇몇 눈에 익은 덩치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을 받으며 재준이 홀을 지나자 그들이 항상 머물던 룸에서 민와 상준이 나왔다. 

역시나 두식이만큼 반가워하는 얼굴로.

"호라. 너희도 내가 그렇게 보고팠냐?"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얼른요."

두식이처럼 민이 현수의 손목을 잡고 방 안으로 끌다시피 데리고 들어갔다. 고개 숙인 채 찻잔을 쥐고 있던 재준이 고개를 들었다. 

민과 상준은 재준이 무슨 말을 할런지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고 현수는 미안한 마음에 손을 가볍게 들면서 미소부터 지었다.

"헤헤..미안미안.."

"노 민."

"예!!"

"놔라."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재준의 차가운 눈빛에 잔뜩 얼어붙은 민은 재준의 말을 이해 못해 그를 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예??"

"그 손, 놓으라 했다."

그제야 재준의 말을 알아들은 민이 자신이 아직까지 현수의 손목을 잡고 있는 것을 깨닫고 뿌리치듯 현수의 손을 놓았고 재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난 뒤 상준과 방에서 나갔다.

현수는 화가 난 듯한 재준의 얼굴을 살피며 맞은 편에 앉았다.

"어야, 진짜 미안. 나 잠깐 잊었버렸어. 핸드폰 밧데리 다 된지도 모르고. 헤..대신 내가 오늘 회 쏘마. 기분 풀어. 응? 화 많이 났

어??"

"회는 내가 사마. 대신.."

현수는 벌을 받는 학생처럼 쭈뼛쭈뼛 재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신 뭐. 말만 해. 오늘은 내가 죄인이니 다 들어준다!!! "

현수의 호언에 재준의 경직된 얼굴이 슬금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수의 얼굴이 재준의 엄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려졌

다. 보이는 것은 허연 벽뿐이다. 

"응? 뭐, 어쩌라고."

대답도 없이 재준의 손가락은 까닥 움직이며 계속 한쪽 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수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흐음.. 벽에 머리를 박으라는 거는 아니고, 헉.. 설마..네가 회를 다 먹을 동안 난 면벽이라는 벌이라는 거야?? 우와~ 말도 안돼!!! 

이건 부당한 처사라고!!! 차라리 내게 콘푸라이크 찌꺼기를 먹으라고 해!!!"

"하하하하.."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뜬 현수가 회를 못 먹는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포즈를 취하자 재준의 웃음보가 터졌다.

재준에게 있어서 현수는 화를 내지 못하는 상대다. 화가 났다가도 얼굴만 보면 슬슬 가슴속이 간지러워지면서 행복해지는데 무슨 

강심장으로 화를 낸단 말인가. 재준은 현수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 감사히 여겼다. 가만히 있어도 이쁜 녀석이 늦은것에

 대해 미안한지 눈가에 주름을 자글자글 만들며 웃는 모습을 선물로 보여주더니 이번에는 오버하는 연기마저 보여주니 웃음보가 안 

터질 리가 없다.

"뭐야. 뭐!!! 말을 해야 알지!!!"

"후훗.. 내 말은 늦은 벌로 여기 앉지 말고 요기에 앉으란 말이다. 이 아메바야."

"칫, 그러게 처음부터 말로 하면 되잖아. 말로. 입 놔두었다가 뭐에 써. 지가 무슨 최민수라고 말 아끼고 손가락질이야. 손가락질이."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현수는 재준이 가리킨 재준의 옆 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때 즈음에 회를 비롯한 음식이 줄줄 나오기 시

작했고 문틈으로 민과 상준, 두식을 비롯한 동생들이 그 도 재준의 화를 그만큼 돋우고도 웃음을 터트리게 한 현수를 외계인 보듯 힐

끔 바라보는 것을 현수는 알지 못했다.

"어? 손이 왜 이래?"

현수가 곁에 있는 재준의 붉은 손을 잡으며 재준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 손바닥에는 실선으로 피가 묻어 있었다. 

"아..그게 어쩌다보니.."

"어쩌다보니? 변명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나 기다리다가 승질나서 컵 깨부순 거지? 그렇지?"

"어? 누구야?"

"무슨 소리야. 민아~ 잠깐 일로 와봐"

"우리 아메바는 어딜 갔나?"

"이 바보야!! 내가 공으로 너랑 십 년을 붙어 있었냐? 아니 근데 이 자식은 왜 안 들어와. 야~ 미..."

"내가 부를게. 근데 민은 왜?"

"이렇게 다쳤는데 그럼 아까진끼라도 바르고 대일밴드라도 붙여야 할 꺼 아냐."

"그걸로 민이 부르는 거면 되었다."

"되긴 뭘 돼. 내가 안 된다. 야. 노 민!!!"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민이 들어서자 현수는 구급약을 찾았고 민이 나갔다가 다시 구급약을 들고 들어서자 현수가 뺏듯이 구급약 

상자를 들고 재준의 앞에 앉았다. 제대로 된 응급조치도 못 하는 주제에 걱정이 많이 되는 양 눈앞에 놓인 좋아하는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의 손바닥만 내려보는 현수의 정수리를 보며 재준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텅 빈

 가슴속이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힘이 들지만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그리고 마치 보상이라도 하듯 가끔 이런 달콤한 선물까지 주는 현수다. 어찌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고개를 숙인 현수의 머리칼에 대고 입을 벙긋 벌려보았다.

'사랑해'

현수가 못 들었을 말이 끝나고 그 다음에 입에서 나온 말은 현수의 귀까지 전달이 되게 목에 힘을 주었다.

"음식 식어."

"움직이지 마. 내가 누차 말했지만 생긴 게 이 꼴이면 승질이라도 좀 참아봐라. 응? 평소엔 착한 녀석이 왜 가끔 픽픽 도냐? 그것

도 별일 아닌 일에."

재준이 말을 많이 하는 것도 희귀한 구경이지만 꾸지람을 듣는 범생이 모드는 더 신기하기에 구급약을 

핑계로 슬쩍 재준이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민은 급기야 '착한 녀석'이란 깜찍한 현수의 말에 쿡, 하고 웃고 말았다. 

그제야 민의 존재를 본 듯 재준이 민을 노려보았고 재준의 눈짓으로 축객령이 내려지자 민은 어쩔 수 없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방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화나디? 내가 약속 펑크낸 게?"

"뭐, 조금은. 펑크보다는 연락이 안 되니깐"

"그렇게 승질 부린 놈이 나 보자 헬렐레 웃어대고 옆에 앉으라 하냐? 흉기인 네 주먹은 참는다 하더라도 화라도 내야하는 거 아냐

 그러고 보면 너도 참 순둥이야. 나 보고 웃음이 나오디?"

"너니깐."

"응?"

재준은 무슨 말인가 싶어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현수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자신이 거의 조르다시피 해서 현수의 머리칼은 얼굴을 가릴 정도로 길다. 

어찌 보면 어중간한 길이의 머리칼은 가늘어서 그런지 덥수룩해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짧은 머리칼보다 현수에게 더 잘 어울렸다. 

그리고 머리칼을 핑계 삼아 이렇게 얼굴에 손도 갖다댈 수 있다.

"이 현수니깐."

"에에~ 그럼 나한테는 승질도 안 낸다는 거야?"

"뭐, 안 낸다기보다는 못 낸다고 봐야지."

"왜에??"

나름대로 치료가 끝이 났는지 구급상자를 구석으로 밀치고 본격적인 음식과의 전쟁을 하려는 듯 자리를 잡는 현수를 바라보며 재준

은 웃는 얼굴로 하고픈 말을 능숙하게 숨겼다.

"아메바한테 성질 내봐야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이씨!!!! 야, 도 재준. 너어~"

"하핫. 자, 아- 해봐."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놓으며 대들려는 입에 회 한 입을 넣어주니 금세 배시시 웃는 얼굴을 하는 현수를 보며 재준은 계속 현수의

 음식을 챙겨주면서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자신 역시 점심 이후로는 아무것도 입에 대질 않았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새 모이

를 받아먹는 새끼 새처럼 입을 방긋방긋 잘도 벌리는 녀석의 입에 연방 모이를 갖다 주는 걸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그게.. 잊었지 뭐. 헤헤.... 쏘리데쓰요~"

회를 먹을 때만 대식가가 되어버리는 현수가 눈앞에 보이는 회를 말끔히 없애고 부른 배를 두드리고 있을 때 재준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뭐했는데?"

"그냥 걸었지 뭐. 이제 내가 애인이 있냐~ 뭐 하겠어? 안 그래?"

가벼운 말투지만 재준의 눈빛이 더 검게 가라앉았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엉키는 것을 싫어하는 녀석이지만 약속 따위를 잊어버리

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재준이었다. 오히려 약속 지키는 것을 의리와 신의로 보는 편이어서 사전에 상의 없이 약속을 

어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현수였다. 단순하지만 색깔이 분명한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약속을 잊었다는 것은.. 

그리고 두식의 보고로 들은 바에 의하면 세 시간을 넘게 멍하니 길거리를 걸었다는 것이 되는데..

 재준은 모든 촉각이 예민하게 곤두섰지만 지나가는 말인 듯 가벼운 톤으로 현수를 슬쩍 떠보았다.

"고민 있어?"

"흠.. 고민이라.. "

"말해봐. 뭐야?"

"아..그냥. 음.. 야, 재준아. 나 솔직하게 물을게. 너도 솔직하게 대답해 줘."

재준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 빤히 보는 투명한 눈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거침없이 맞받아치며 바라볼 수 있는 데 이 눈만은 오래도록 바라보는 게 힘들다

 생각하며 면역이 전혀 되지 않은 현수가 주는 가슴속 소용돌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들썩이며 그의 물음을 재촉하였다.

"가끔..정말 가끔이겠지만, 한 번이라도.. 나 귀찮은 적 있었냐?"

"무슨 말이야. 그게."

"예를 들면 말이야. 어제처럼 내가 뜬금없이 전화했을 때 너 바로 왔잖아. 너 바쁠 때나 볼일 보고 있을 때 내가 전화했을 수도 

있잖아. 그럴 땐 전화 한 내가 안 귀찮았어? "

"누구한테 무슨 말 들은 거야. 너."

누군가, 감히 누가 이 사람에게 엉뚱한 소리를 해서 고민하게 하였는가. 세 시간이나 걷게 했는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속내를 감추며 재준은 현수를 다그쳤다.

"아..그게.. 뭐 누구한테 뭘 들었다기보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한번쯤은 너 사정이 있어서 못 나올 상황도 있었을

 텐데 매번 나왔으니깐 거절하고 싶은데 마음이 약해서 못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적 있었지? 응? 그렇지?"

"내가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나올 사람으로 보여?"

"응."

"왜?"

"너 안 그런 척하기는 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다정하잖아. 결혼하면 마누라한테 잘 할거야. 넌."

"하핫."

짧은 웃음이 나왔다. 재준은 현수의 얼굴을 돌려 자신의 코앞에 세워두고 낮은 목소리로 진심을 말했다. 

물론 진심을 말해도 제대로 흡수를 못 하는 현수지만 가끔 지금처럼 어이없는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면 솔직해지고 싶어진다. 

"이봐. 아메바군. 난 절대 귀찮은 일 하지 않아. 그리고 네 일은 단 한 번도 귀찮은 적 없었어.  

단 한 번도. 지금까지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럴 꺼야. 그러니 무슨 일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연락하지 말고 꼭 나에게 해.

 알았어? 혹시 내가 통화가 안 되면 상준이나 민이한테라도 꼭 전화해. 내가 죽는 순간까지 널 귀찮아 할 일은 없을 거다."

"이야~ 이거 영광인걸. 야, 근데 죽는 순간까지라니..뭐가 그렇게 거창하냐? "

"채 현희겠군."

"어엇."

"그래. 채 현희가 뭐라든. 내가 널 귀찮게 생각하고 있으니 좀 떨어지라고 하든?"

"이햐..너.."

"이 아메바 녀석."

재준의 매운 꿀밤에 현수도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반격에 들어갔지만 금세 양 손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그것도 한 손에. 남자로서의 

자존심도 상하기도 해서 발길질까지 해보았지만 재준은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우씨. 이거 안 놔??"

"그러니깐 나한테서 아메바란 소리를 듣는 거야. 넌."

"왜에!!!!"

"남자가 귀가 그렇게 얇아서 어째. 그딴 년이 그런 말 지껄이면 그래도 재준이는 내 것이니 신경 끄라고 소리지르면 되는 거잖아. 

시시껄렁한 소리에 일일이 반응해서 살면 나한테서 좋은 소리 듣겠다. 응?"

"뭐?? 내..것?"

"후. 그럼 내가 니 꺼지 채 현희꺼냐?"

"음..그런가?"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고 일어나. 집에 가자. 데려다 줄게."

대해에서 나와 집까지 다다르는 동안 현수의 머릿속은 개운하기는커녕 뭔가 더 복잡하게 꼬이는 것 같았다.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몸

속에 침투한 듯 간질간질 거리는 게 분명 있기는 한데 실체를 알 수가 없었다.

"아~ 몇 잔 안 마셨는데도 좀 취하네"

웅얼거리는 말투로 현수가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말을 하자 재준은 현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안색을 살폈다.

"잘래? 속이 안 좋아?"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여기 기대 그럼. 잠시 눈 붙이던가."

"여기 말고 여기 누워도 되지?"

허락이라도 받을 듯 양해를 구하며 재준의 허벅지를 가리키던 현수지만 대답이 채 나오기도 전에 벌렁 재준의 다리를 베고 누었다.

 그런 현수를 내려다보며 재준의 손가락은 또 현수의 머리칼로 갔다.

"재밌냐?"

"뭐가?"

"매번 내 머리카락으로 장난치는 거 말이야. 오늘 유난히 그러네"

"응. 좋아."

"칫. 그런데 너 여자 진짜 없어?"

"여자?"

"어. 애인씩이나 되면 나한테 말했겠지만...음 예를 들자면 뭐 지금 작업 중인 여자라든가.. 너 좋다고 하는 여자라든가..그런 사람

말이야"

"뜬금없이 왜."

"그냥. 너 있을 법한데 나한테 소개 안 시켜줘서. 짜식. 알고 보면 있는데 나한테 빼앗길까 봐 쫄아서 소개 안 시켜주는 거지?"

"설마"

"설마는 무슨!!! 아..다 왔네. 으쌰!!!! 암튼 태워줘서 고맙고 여자 생기면 제일 먼저 이 형님한테 보고 안 했단 봐. 너 죽어!!!"

"후후..알았다. 아직 좀 춥다. 빨리 들어가."

"응. 어? 시간이..벌써 12시 넘었네. 너도 빨리 가. 나 간다~"

"어."

현수의 이층집에 불이 켜지고 베란다로 나와 재준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재준은 차에 올랐다. 

수다스러웠던 대화들이 사라진 차 안은 조용하게 어둠을 가르며 재준의 집으로 향했다. 

"민."

"네 형님."

무슨 일인가 싶어 운전을 하던 두식이 룸미러로 재준을 바라보았고 조수석에 앉아있던 민이 몸을 돌려 재준의 말을 기다렸다.

"아까 대해에서 현수가 불렀을 때 왜 금방 들어오지 않았지?"

"아..현수형님이 부르셨지만 형님께서 같이 계시니.."

"둘 다 명심해서 들어라"

"네."

동시에 나온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재준의 입에서 두 사람에게 향한 경고의 말이 현수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무심한 말투로 나왔다.

"현수의 말이 우리 회사나 현수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이 아닌 이상 그의 말을 내 말처럼 따라야 한다. 그가 어떤 요구를 하던 내가 

있든 말든 그의 부름에 다시 한 번 오늘 같이 지체하는 일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는다. 알았나."

"네. 형님."

"네."

현수는 샤워를 하면서 뿌옇게 보이는 거울을 손으로 쓱쓱 닦았다. 거품기때문에 깨끗하게 닦이지 않은 거울은 

현수의 모습을 일그러지게 보여 주고 있었다. 현수는 자신의 모습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거울 앞에 얼굴을 들이대었다.

"내..것이라..."

현희보다는 더 가깝다는 말이겠지만 어쩐지 그 단어가 자꾸 입 안을 맴돌았다. 그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지는 않았나

 갈등했던 것이 까마득한 오래전의 일이었는 양 재준의 말 한 마디에 기분이 상승곡선을 타고 있는 것이다.

씹고 되새김질하고 또 해도 기분 좋은 말이었다. 현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으며 샤워를 마쳤다.

**

재준은 자신의 오피스텔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여자의 얼굴을 정확히 보았지만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다. 스쳐 지나자마자 여자가

 벌떡 일어서며 재준의 앞을 양팔을 벌리며 막아섰다. 뒤따르던 두식이 나서려고 하는 것을 재준은 손짓으로 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내가 연락할 때까지 먼저 연락 안 하기로 한 거 아닌가?"

"당신, 이렇게 나 무시해도 되는 거야?"

"무시라.."

"어제 그렇게 바람 맞힌 거 사과까지는 안 바래. 하지만 최소한 여기서 몇 시간을 기다린 나를 무시하고 지나가면 안 되는 거 아냐?"

"계약파기다. 채 현희. 다시 보는 일 없을 거다."

무심하게 말을 뱉고서 재준이 지나가버리자 현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날 그런 식으로 무시해서는 좋은 일 없을 텐데. 재준이 네가 이런 식으로 나를 자극해서는 좋은 결과 보기 힘들 거야. 애지중지하

는 생선 맡겼으면...으윽..."

어느새 다가온 재준이 현희의 목을 움켜쥐며 속삭이듯 귀를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너야말로 나를 자극하는 짓 그만하지. 네년의 아버지 따위야 네 싸가지로 봐서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고 청평에 사는 네 친모도 

신경 끄고 사는 건가?  가게 한다고 네 어머니 들떠 있지 않으시던가?? 그 돈 어디서 융통했다고 생각해?  내가 그정도 줄도 안

 잡고 네게 손을 내밀었다고 생각했나? "

"재..재준.."

"훗, 뭐? 생선??? 감히 그를 빗대어 생선이라고 했나????  보는 눈이 없나 보군. 채 현희. 네가 잠시 맡고 있는 건 생선 따위인 줄 

알았나?"

"으으윽..."

"네 간은 얼마나 커서 감히 내 목숨 줄을 쥐고 흔들고 있어?  나한테 거는 명백한 도전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뭐?"

"그 녀석이 쥐고 있는 것이 내 목숨 줄이라고 말하는 거다. 현수에게 말장난한 것은 안면을 봐서 너그러이 접어두지. 하지만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말길 바래. 누구나 목줄기에 장난으로라도 스치는 걸 좋아하지는 않으니깐 말이야. 명심해. 두 번은 없다."

현희는 놀란 눈으로 재준을 바라보았다. 각별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재준이 이렇게까지 진심일 줄을 몰랐던 것이다. 

목숨 줄이라고 했던가..그 답지 않은 뜨거운 발언에 현희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잔머리 굴릴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행여 그 녀석이 그 회사를 나와버리게 되면 너야말로 완전히 끝이다. 알겠나. 칼자루를

 쥔 건 처음부터 그 녀석뿐이었어. 쓸데없는 소리를 다시 한 번 더 지껄인다면 그 땐 내가 어디까지 진심인지 아낌없이 보여주지."

맨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현희를 뒤로하고 오피스텔로 향하던 재준은 뭔가 생각이 난 듯 잠시 멈추어서서 현희에게 마지막으로 당부

의 말을 덧붙였다.

"아아..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그 녀석 무리시키지 마."

재준이 사라지고 난 뒤 현희의 히스테리컬한 웃음소리가 조용한 새벽에 한참 울려 퍼졌다.

역시 사랑하기 힘든 남자였다. 자신이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현수를 가지고 재준을 움직일 

생각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움직일 만한 키워드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 적정선을 넘는 정도다.

괜한 벌집을 건드려 임도 못 보고 뽕도 못 딸 바에야 일찌감치 계획을 수정하는 게 빠르다고 생각하며 현희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봄날이지만 밤에는 제법 쌀쌀했다. 조바심 날 정도로 조심스러운 상대에게 그럼 어떻게 대쉬를 해야 하는지 돌아가는 

길에 고민을 하던 현희의 머리에는 이미 현수라는 키워드는 지워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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