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거짓말 [5] (5/28)

하얀 거짓말 [5]

현수는 침대에 느긋하게 기대고는 재준이 일전에 선물로 주었던 허브차를 스탠드 위에 놓으며 책을 펼쳤다. 두어줄 읽다가 몰래 숨어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격자무늬의 흰 거실 창을 바라보았다. 겨울에는 바람이 많이 들어와 두터운 이중커튼으로 바리케이드를 치지

만 이렇게 날이 따뜻해지면 커튼을 매일 걷어두었다. 처음 이 집을 보았을 때 넓은 거실 창과 베란다에 놓인 이인용 탁자가 눈에 딱 

들어 전세를 계약했었다.

재준은 거실 창과 전 주인이 버리고 간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덜컥 계약을 한다고 태클을 걸었지만 현수는 충분히 만족했다. 

재준도 그렇게 자주 오는 편이 아니어서 거의 혼자 베란다의 탁자를 이용하긴 하지만 한가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탁자와 손떼도 

묻지 않은 하얀 격자무늬의 거실 창은 이곳에 산지 5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흠..나갈까??"

책과 차를 들고나갈까 고민을 하던 현수는 울려오는 전화소리에 포기하고 무릎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끌어올리며 무선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나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인사도 없이 말이 나간 것은 발신표시가 되지 않은 전화기라도 발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 역시 익숙하게 인사도

 없는 대꾸가 돌아왔다.

-어딜?

"어디긴, 나으~ 발코니지.히히."

-발코니는 무슨.

"베란다 아니라니깐!!! 베란다라니.. 너무 촌스러워!!! 이건 발코니라고. 이런 예쁜 거실 창을 가진 베란다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창으로 봐서는 이건 발코니 수준이라고."

-후후. 알았다. 알았어. 오늘은 안 바빴어?

"응. 요즘은 어쩐지 좀 한가하네. 한참 바쁠 시기인데.."

-다행이다. 어머니와 통화했고?

"에휴.."

-왜?

"말마. 이번 주 일요일이다."

-음..그래..

"참, 오늘 아버지랑 통화했거든?"

-니가 왜!!

"뭐 어때서, 보현재에서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 응?"

-젠장.

"같이 가. 응?"

-...알았다. 7시?

"엉. 히히. 땡큐."

회를 즐기지만 한정식 또한 현수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재준의 아버지인 태현과 만날 때는 의례 한정식집이다.

현수가 큰 사랑채의 문을 여니 이미 재준과 태현이 먼저 도착해있었다. 보현재에는 방마다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태현과 함께 

일때는 항상 큰 사랑채였다. 

"어라? 제가 늦었네요. 아버지.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아들 복이 없다 싶어 애초에 포기하고 살았는데 뒤늦게 만난 현수라는 녀석 때문에 태현은 아들 키우는 재미에 빠져 살고 있는 

중이다.  슬쩍 아들로 삼고 싶다는 말을 재준에게 꺼내었다가 귀엽지 않은 아들의 사나운 눈을 보기도 했지만 생글생글 웃는 얼

굴은 여전히 아들로 삼고 싶을 만큼 귀여운 녀석이었다.

"그래. 넌 아픈 데는 없고?"

"네. 아버지는요?"

곁으로 조르르 방석을 껴안고 다가와 주저앉으며 말하는 뽄새가 어쩜 그리 예쁜가. 태현은 본받으라는 듯 재준을 노려보았지만 

재준은 현수의 자리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인상만 긋고 있을 뿐이다. 

"나야 건강 빼면 시체지."

"그래도 이제는 연세가 있으시니깐 감기 같은 것도 소홀히 하시면 안 돼요."

이뻐 머리를 쓰다듬으니 재준의 눈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태현은 아들이 사나운 눈빛을 보내고는 있지만 입 하나 벙긋하지 못한다

는 것을 알기에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물론 이 자리가 파하고 나면 아들은 퉁퉁 부은 얼굴로 불만을 터트리겠지만 옆에서 폭

탄이 터진다고 한 들 눈썹 하나 꿈틀이지 않을 아들 녀석을 놀리는 재미를 포기할 수는 없다.

개량한복을 곱게 입은 여자들이 노크와 함께 들어와 하나 둘씩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중에 뒤따라 들어온 지배인의 인사를 받던

 재준이 그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한다. 

"오늘은 누룽지 탕이 없습니까?"

"아..그렇긴 합니다만... 준비해드릴까요?"

"네. 일 인분으로 준비해주시고 구절판도 조금 더 준비해 주십시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더 필요하신 거나 불편하신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요."

태현은 현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재준이 개인 접시에 구절판을 싸는 것을 보았다. 말도 거의 하지 않고 묵묵히 구절판을 

싸서 현수에게 내밀고 현수가 하나 더 라고 손가락을 세우자 들릴만하게 투덜대면서 다시 전병을 접시에 들기 시작하는 아들이다.  

뒤이어 가져온 누룽지 탕을 현수앞으로 밀어주고 이번에는 랍스타를 쓸여주기 시작한다. 익숙한 듯 현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재준이

 주는 것을 어미에게 모이를 받아먹듯 야금야금 먹었다.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재준에게 차지한 현수의 크기를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그것도 이젠 벌써 십 년이 가까워지니 익숙

해질 법도 한데 아직까지 재준이 현수를 챙기는 것을 보면 낯설었다. 그만큼 같이 식사하는 일이 드문 일이기도 했고 재준의 성격을

 워낙 잘 알기 때문에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재준의 행동을 볼 때마다 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생각이란 현수의 무지

보다는 재준의 치밀함이었다.

얼마나 치밀하게 이쪽에서 밀어붙였으면 저렇게 의심조차 하지 않고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까. 재준의 계획대로 현수는 눈꼽만치도 

재준의 검은 속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계획의 성공유무를 떠난 남자, 재준의 속내는?

그런 쪽으로는 손이 빠를 것 같은 아들이 아예 포기한 듯 손을 놓고 있는 것을 의아하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건 뭔가 도가 지

나치다라는 생각을 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애인?"

"네. 분명 저에게 숨기고 있는 걸 거예요. 난 다 소개해줬는데 치사하게 자기만 꽁꽁 숨겨두다니. 제가 억울한 게 당연하겠죠?"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재준이 녀석 정말 애인이 있다냐?"

"모르죠? 안 가르쳐주니깐. 하지만 지가 수도승도 아니고 여태 애인하나 없었겠어요? 이건..배신이라고요!! 배신!!"

"그렇지. 넌 소개 다 시켜주었는데 저 녀석은 한 번도 소개 안 시켜주면 그건 배신이지. 아암 그렇고 말고."

마치 눈앞에 재준이 없는 것처럼 작당을 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재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떴다.

 역시 아버지와 함께 한 자리가 편할 리가 없다. 현수만 아니었다면 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는 일 없을 것이다.

 아예 식당 정원으로 나와 느긋하게 거닐며 재준은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불편한 자리인데 마음은 느긋하니 편하다.

 홀을 지나가던 보현재 사장이 재준을 보고 정원으로 나오며 인사를 건넸다.

"왔다는 말을 듣고도 불편할까 봐 인사를 못 했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나?"

"아, 박 사장님. 안녕하셨습니까?"

"하하..나야 자네 덕분에 잘 지내지. 그래 뭐 불편한 건 없고?"

"네. 지배인이 신경을 많이 써주어서 불편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 다행이군그래.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그냥 바람이나 좀 쐬려고 나왔습니다."

"참, 이번에 한금연(한국소비자금융연합회)의 회장후보로.."

"거절했습니다."

재준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잘라버렸다. 그제야 이 사람이 사적인 자리에서 공적인 이야기를 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난 박사장이 어색한 웃는 얼굴로 재준의 마음을 다듬었다.

"이런..늙으니 자꾸 잊어버리는군.  미안허이. 밖에서 이런 이야기하는 거 싫어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눈치는 있는 양반이다 싶어 재준은 경직된 얼굴을 풀며 괜찮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뭐 부탁할 거 있으면 이야기하게나. 그럼 편히 쉬다 가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억지로 발걸음을 돌리고 서너 걸음 떼었을 때 박사장의 등 뒤에서 재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참, 뭐 하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반색을 하며 박 사장은 등을 돌려 그에게 그 어떠한 부탁이라도 들어주고 싶은 눈빛으로 재준을 바라보았다.

"그래, 뭔가? 내 자네 부탁이라면 뭔들 못 들어주겠나? 하하하 그래. 뭘 부탁하고 싶은겐가?"

"주방장에게 말씀 좀 전해주십시요."

"주...주방장?? 뭐..뭘 말인가?"

"제게 레시피를 하나 전수해주라고요. 뭐..딴데서 배워도 상관이 없지만.."

"아니. 아니네!!! 내가 지금 바로 여기로 불러줌세. 그러면 되겠나?"

"네. 그래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따로 걸음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깐요."

"그런데.. 자네..무슨 레시피를..."

레시피란다. 도 재준과 레시피라는 단어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아 박 사장이 물으니 재준이 그 답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정원이 아닌 룸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었다.

"아, 별건 아닙니다만, 여기 요리사가 하는 누룽지 탕을 배우고 싶어서 그럽니다."

보현재의 정원 한 구석에서 누룽지탕 레시피의 전수가 진지하게 진행되는 동안 태현은 미운 아들녀석이지만 그를 위해 입을 놀

리고 있었다.

"그렇게 재준의 여자 보고 싶은 거야?"

"애인이 있다면 보고 싶죠.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흠..나도 궁금한 걸. 하하. 그런데 현수야.."

"네."

"내 너한테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에? 무슨 부탁요?"

"재준이 녀석.. 나중에 무슨 사고저지르면 말이다... 네가 한번만 용서해다오."

뜬금없는 말에 놀란 현수의 어리둥절한 속내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불효자식이라도 자식은 자식이었다. 재준을 위해 현수에게 

미리 연막을 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꺼라는 계산으로 태현은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이다.

"네에? 뭔 용서요? 준이 저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글쎄다. 나중에 말이다. 나중에 혹시 재준이가 너에게 잘못을 한다면 그때 딱 한 번만 재준이를 용서해주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재준이 저한테 용서를 빌 만큼 큰일 저지를 사람도 아니고..."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지. 혹시 그 성질 나쁜 녀석이 네게 주먹을 휘두를 수도 있을 테고 아니면 재준이가 네게 치명적인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

"에~ 별 걱정 다하시네요. 아버지. 준이가 저한테 주먹을 휘두를 정도로 화가 난 일이 있다면 뭐 까짓것 한 대 맞아주죠. 

그동안 저한테 잘해주었으니깐 설마하니 제가 그정도 아량도 못 베풀겠어요? 그리고 준이가 저한테 거짓말을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왜 그렇게 장담을 하는거지?"

"제가 얼마나 거짓말을 싫어하는지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녀석이 재준이예요. 그리구요~아버지께서 말씀 안 하셔도 저 재준이 용서해줄 만큼 아량이 넓다니깐요."

"하하. 나이가 들면 노파심이란 게 생기기 마련이거든. 현수야.."

"네"

"재준이에게 넌 아주 특별한 사람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들은 관계를 더 이상 발전시킬 생각조차도 못하는 모양이지만 태현은 그렇지 않았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한다. 

그 끝이라는 것이 상처투성이의 패잔병이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털끝 만한 가능성에 모험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 태반이다. 모험이란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것일 테다. 

"그럼요~ 제게도 재준인 아주 특별한 친구인걸요.  참, 어머니는 잘 계시죠? 같이 나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하지만 집사람마저 온다고 하면 재준이 녀석 정말 안 나올 것 같아서 말이지."

"하여간 애도 아니고.. 좋아하시는 화과 들고 조만간 한 번 들린다고 말씀 전해주세요."

"오냐. 고맙구나."

"고맙긴요. 뭘. 대신 반찬 싸서 갈껍니다.히히.."

재준의 마음을 차지에 두고서라도 태현은 현수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구김 없이 밝게 웃는 아이의 얼굴은 삼십대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동안이었고 붙임성 있는 성격은 착착 감기는 맛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근사근한 성격 덕분에 같이 식사라도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가족이 나중에 저녁을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다 현수때

문일 것이다. 생전 연락도 하지 않은 재준이 자신과의 식사시간에 나온 이유가 현수때문인 것처럼.

현수가 화장실 간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들어오는 재준을 보며 태현은 이제는 자극을 주기로 결정했다. 언제까지 밍기적 뜸을 들일 생각인 거냐. 넌. 

"여자 하나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치켜뜨는 눈매가 현수를 보는 눈빛과 어쩜 그리 다른지. 태현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할 정도로 박복한 자식 복에 끌끌 혀를 찼다.

"상관하지 마십시요."

"현수가 보고 싶다고 하잖아."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알아서 하는 녀석이 아직 이 모양, 이 꼴이냐?"

분을 참는 듯 재준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것을 태현은 아무런 긴장감 없이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놈 성질에 지 아비라고 안 치는 게 어딘가. 이런 걸로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자식 복에 또 한 번 혀를 찰 뿐이다.

"숨기고 싶은 감정이라면 확실하게 숨겨야지."

이렇게 대놓고 직접적으로 말 한적은 없는지라 재준의 눈이 귀찮은 듯 작게 찌그러졌지만 말을 자르지는 않았다.

"네 나이 되도록 여자 한 명 없다는 게 평범한 건 아니다 라는 거지. 숨기고 싶은 게 있을 때는 평범하게 행동하는 

게 제일 숨기기가 쉬운 법이다. 네 나이에 걸맞는 평범함이 무엇인지 생각 한 번 해봐. "

"그래서 결혼이라고 하라는 겁니까?"

"네놈이 어지간히 그러겠다. 결혼이 아니라 제스츄어라도 하란 거다. 바보 같은 녀석. 사내가 감정을 품었으면 

질질 흘리지를 말던가 아니면 확실하게 사로잡던가 해야지."

자신의 사람 제대로 지켜내지도 못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속에서 열기가 치밀어 올라왔다.

현수에 대해 누군가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듣기 싫은 재준이 쾅! 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아는 척하지 마십시요."

드르륵 문이 열리면서 현수가 들어오다가 멈추어서 버렸고 곧이어 아버지께 대든다고 재준의 머리통에 꿀밤을 내리꽂으면서 방 안의 살벌했던 기운이 물러났다.

식사를 마친 후 태현은 본가로 들어서자마자 형준을 불렀다.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내려다보며 

느긋하게 담배를 한 대 다 피워갈 때 즈음 형준이 노크와 함께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아, 앉게"

"네."

"자, 여기"

짙은 고동색 빛깔의 넓은 책상 위의 봉투가 스윽 형준의 앞으로 내밀어 졌다. 봉투를 열어본 형준이 무슨 일인가 싶어 태현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난생처음으로 휴가라는 것을 맛 본 형준에게 주는 물건은 분명 아닐 테다. 

"이제 더는 못 보고 있겠다."

오늘 점심 약속이 누구와 함께였는지 알고 있는 형준은 그제야 감을 잡으며 공감했다.

 언젠가 태현이 움직일 것이라 여겼는데 이제 그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다.

"보고 있기 힘들기는 하지요."

"다른 일에는 칼 같은 녀석이 어찌 그리 무른지 원. 결국 나까지 나서서 팔을 걷어붙여야 하는건가..나 참. 늘그막에 무슨 짓이야 이게."

"그래서 이걸 준비하셨습니까. 제게 말씀하셨으면 제 선에서 손을 봤을 텐데요."

"됐다. 이런 거 구하는 거야 일도 아니니깐. 별당아씨라고 부른다고?"

"아..네. 그냥 농담으로.."

"별당아씨와 머슴은 별당에서 만나는 법이 없지. 갈대밭은 아직 추워서 안될 테니 물레방앗간이라도 아비가 되어서 준비해줘야 하지 않겠나.

 주는 경로는 네가 알아서 하고."

"네. 걱정하지 마십시요."

지령을 받은 형준이 찾아간 곳은 현희였다. 느닷없는 형준의 호출에 현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용건부터 재촉했다.

 어릴 때부터 현희의 아버지와 재준의 아버지가 친분이 있어서 아는 얼굴이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뭐? 본심을 드러내고 재준을 포기하라니? 무슨 말이야."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닐 텐데. 채 현희."

"이봐. 네가 청솔의 후계자인 것은 알겠는데 너무 간섭하는 거 아냐? 내가 누굴 좋아하던 말던.."

"아아.. 이거 청솔의 후계자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네가 노 민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도 모를 줄 알았나 보지?"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던 현희의 안색이 금방 바뀌면서 당황하는 것을 형준은 즐겁게 바라보았다.

 설사 제 살이 집혀도 안색 하나 안 바뀌어야 상대를 속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말 한 마디에 얼굴색이 바뀔 정도로 당황하면 이쪽이 오히려 재미있어 지는 것이다.

"재준에게 다가가는 이유, 노 민에게 있지 않나?"

"그..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뭐, 서로 돕자는 거지. 이제 너도 네 사랑을 이루어야지? 안 그래?"

"노 민. 그 사람 성격 몰라서 그래?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안면만 믿고 그 재준이부터 건드렸을까. 

안되니깐 그런 거잖아. 난들 대쉬 안 해본 줄 알아. 그 사람.. 아예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아..그야 당연히 지켜야할 게 있는 사람이니깐."

"뭐?"

"자, 어때? 나랑 상부상조 하는 거. 관심있어? 넌 재준과 현수의 오작교가 되는 것이고 나는 네게 민에게 접근할 수 있는 카드를 하나 제공하지. 

손해를 보지는 않을 거다."

체념한 듯 현희는 동의했지만 약속을 받아내는 일은 잊지 않았다. 

"대신 확실한 카드가 아니라면 재미없다고. 알아?"

"아아..물론. 재미있을 만한 카드지. 그리고 그 카드를 이용하는 건 네 역량이야."

"더 이상은 바라지도 않아. 뭐야. 그 카드라는 게"

"노 경"

"뭐?"

"민이 언제부터 청솔에 들어왔는지 알아?"

확실하게 어릴 때부터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어서 언젠가 들어온 사람인데 몰라본 것이라 여겼었다.

 현희가 민을 처음 본 것은 18살 때였다.

"민에게 누나가 한 명있지. 바로 노 경."

"누나?  거짓말하지 마.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민에게는 누나  없다고."

"아아..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 민에게 노 경이라는 이름의 누나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재준과 상준. 두식이 정도일걸. 

아아..물론 어르신도 아시겠지만. 하여튼 이건 일급비밀이라고. 민이 열 살 되던 해 부모님 돌아가시고 길거리를 방황하던 남매에게 시련이 닥치지.

바로 몸이 약한 누나가 폐렴이 걸려버리고 말았거든. 그걸 우연하게 발견하게 된 재준이 어르신께 데려가게 되고 생판 모르는 애들까지 건사할 마음씨 

고운 어르신이 아닌 것쯤은 알겠지? 당장 내쫓으라는 어르신의 말에 우리의 터프한 머슴께서 칼을 들이대며 살려내라고 협박까지 하게 되었지.

 마음씨 곱지 않은 어르신이지만 아들만은 귀애하시는 어른은 그 누나를 병원에 보내주고 그 남매를 청솔의 식구로 거두어드리게 되었어."

"모..몰랐어."

"아, 당연하지. 재준이 강력하게 모두의 입을 막았으니깐. 재준이 독립할 때 민을 데리고 간 이유가 바로 그 누나때문이야. 

조직은 지킬 사람이 있는 사람이 머물 곳은 아니라고 재준이 종종 말했었거든."

"그래. 그 누나가 있다고 쳐. 그 누나가 카드라는 거야?"

"아아.. 중요한 건 그 누나를 끔찍이 위하는 노 민이라는 것이지. 그리고 그 누나는 건강한 편이 아니라서 집에서 

소일거리를 하면서 무료함을 달래고 있는데 민도 누나에게 일자리를 구해주고 싶기는 하지만 누나의 건강이 걱정이 되어서 

그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야. 누나에게 일거리를 주고 대화상대라도 되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엎드려 절이라도 할거라고."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데 두 연인을 엮어주는 큐피드의 화살이 된다고 생각하니 형준은 내심 속이 쓰렸다.

 이게 뭐하는 작당이란 말인가. 하지만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쓴 입맛 정도야 기쁘게 참을 수 있다. 잘 된다면 말이다.

"그러니깐 나보고 그 누나에게 다가가 일거리를 주고 대화상대를 하라는 거야?"

"사랑 앞에선 그렇게 다들 성질이 급해지는 모양이군. 좀 여유있게 듣지."

"지금 장난하는 거야??"

"그럴리가. 내 카드라는 게 아직 바닥을 보인 게 아니거든. 그 누나가 하는 소일거리가 바로 인형 옷을 만드는 거라는 게 내 카드야. 어때 이제야 흥미가 생겼어?"

놀란 눈을 하고 있는 현희를 놀리 듯 형준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협상에 들어갔다.

"자, 이쯤 하면 나와 상부상조할 마음 들었겠지?"

"어, 어떻게 알았어."

"이런..우리 청솔의 정보력을 무시하면 곤란한 걸"

"하지만 그건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은 우리 회사의 프로젝트란 말이야."

"청솔의 별당아씨가 계시는 곳이야. 우리 어르신께서 점지해둔 며느리가 있는 곳이라고.

 설마 그쪽에 우리 애들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이런.. 우리 아씨를 너무 무시했군그래."

"무서운..곳이군. 청솔은..."

"영광. 자, 지금 그쪽에서 기획하고 있는 인형 옷 브랜드 계획이 취소된 게 아니라면 그 누나에게 접근하는 건 

그 누나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네 입지에도 좋은 일 같은데 말이야. 숨겨진 보석 같은 디자이너 발굴에 넌 재준이라는 

성질 더러운 녀석의 비위를 안 맞추고도 민에게 점수를 따며 접근할 수도 있고..아아..이거 내가 영 손해를 보는 장사 같은 걸."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카드군. 좋아. 손잡지. 그래,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야?"

"이거 든든한 아군이 생겨서 기뻐. 자, 이걸 현수에게 전해주면 돼. 전달해주는 경로쯤이야 알아서 해줘"

"걱정 마. 그런데..이건?"

형준이 그랬던 것처럼 현희도 봉투 안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놀라 형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형준은 태현이 그랬던 것처럼 느끼한 웃음을 흘렸다.

"아아..물레방앗간."

"재준을 몰라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글쎄,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재준이 한 겨울에도 냉수마찰 하는 거 알잖아. 사우나 같은 건 질색인 사람한테 뭐, 온천 무료이용권?? 이걸 준다면 바로 눈앞에서 갈가리 찢을 사람이라고."

"오히려 모르는 사람은 그쪽이라구요. 아가씨!"

"모르다니. 재준이 뜨거운 거 싫어하는 걸 너도 알잖아."

"그거야 잘 알지. 네가 모른다는 건..."

현희의 머릿속에 이걸 받은 재준이 굳은 인상으로 산산조각낼 티켓을 떠올렸을 때 형준의 말이 들려왔다.

"바로 불가사의한 우리 아씨의 힘이라고."

**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재준이 은영을 바라보았다. 화장을 한 듯 안 한 듯 가볍게 보이는 뽀얀 얼굴의 은영은 재준의 시선으로 답을 들은 양 웃는 얼굴로 비워진 재준의 잔을 채워주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제 얼굴을 보시는 것이 뭔가 부탁할 게 있는데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허, 족집게군."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되었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한거지?"

"후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모든 신경이 예민한 더듬이로 변해서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게 되지요. 이 사람이 기분이 나쁜지 좋은지 우울한지 슬픈지를 관심 있게 지켜보면 알게 됩니다.

 특히나 상대가 저에게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답니다. 저에게 무얼 망설이고 계십니까. 이미 당신의 사람임을 잘 아시면서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사장님."

재준은 아버지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보았다. 아버지의 말만 들었다면 생각할 가치도 없이 쓰레기통으로 바로 던져버렸을 테지만 

문제는 현수도 그걸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호기심으로 그러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성격으로 봐서는 누구든 애인이라는

 명분으로 일면식을 해주지 않으면 계속 조를 테고 최악의 경우 아버지의 말대로 재준의 성향까지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적임자가 생각이 나지 않는군그래. 부탁 하나 하지."

원심각의 마담인 은영에게 몇 번 도움을 주었고 그 인연으로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조용하고 품격 있는 곳이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때 가끔 오곤 했다. 많은 사람들의 프로포즈를 거절한 은영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쯤은 들리는 소문을 통하지 않고서라도 은영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자리에 있더라도 재준이 오면 바로 달려와 술 시중을 들기도 하고 다른 손님과는 거의 하지 않은 잠자리도 재준과는 했다.

물론 화대는 절대 받지 않았다. 그게 부담스러워 걸음을 끊었더니 은영이 울면서 청한 적이 있었다.

감정 한 올도 원하지 않으니 부디 외면하지 말아달라 했었고 술 마시기가 여기만큼 편한 곳이 없어 알았다, 라고 말하고는 그 뒤로 다시 걸음을 했었다.

눈치도 있는 여자라 감정을 호소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단호한 성격을 아는지라 무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재준이 은영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다.

"저에게 처음으로 하는 부탁인 거, 아십니까? 그리고 이게 백번째의 부탁이 된들 사장님 부탁을 제가 감히 거절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요."

"기한은 모르겠지만, 애인이 필요해서"

"네에? "

"다른 여자들은 시끄러울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부탁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긍정의 뜻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던 은영이 이번에는 재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말 없는 은영의 시선에 재준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은영은 이 말이 나오게 된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그런 부탁을 하겠는가. 원인은 단 하나뿐이다.

"그분의 뜻인가 봅니다."

"흐음."

"그분의 뜻이 아닌 다음에야 사장님께서 이런 제안을 하실 턱이 없지요."

"은영."

날카로운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은영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이런, 제가 잠자는 사자를 건드렸군요. 그런 눈은 아무리 오래 봐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입을 다물지요. 

그래,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요."

은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갑을 꺼내드는 재준의 손을 은영이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은영은 이해할 수 없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재준에게 몇 년 전부터 했던 말을 또 입에 담았다.

 이 사람은 그 사람의 말이 아닌 다음에야 전혀 귀에 담지 않는 모양이다.

"사장님 모시면서 제가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사장님께 그 어떠한 경우라도 페이는 받지 않는다구요."

"이건 다르다. 이번에는 내가 부탁을.."

"제가 꼭 비교를 해야 합니까? 사장님은 그분의 부탁을 페이 받고 해드립니까?"

"....."

"설사 그 부탁이라는 게 명동 복판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라고 하셨다 한들 제가 마다하겠습니까? 

그 부탁이란 걸 하기 위해 절 만나러 오셨지 않습니까? 또 그분에게 선 보이기 위해 저를 다시 한 번 더 찾으실 거 아닙니까. 

전 그걸로 만족합니다. 부디 제 마음을 모른 척하지 말아주십시요."

그리고 은영은 재준의 앞에 깊이 부복을 하며 청하였다.

재준의 입에서 알았다 라는 말이 나오고서야 은영은 머리를 들었다.

부끄러운 듯 슬쩍 몸을 재준의 앞에 들이미니 재준이 마주 안아 주었다.

재준의 든든한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는 은영의 눈이 옅은 불빛아래 반짝 빛났다.

기회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할테다.

붉은 입술이 욕심으로 단호하게 맞물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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