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거짓말 [6] (6/28)

하얀 거짓말 [6]

정신없이 걷다 보니 시간은 벌써 11시를 넘고 있었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왔다. 집에 들어가면서 시계부터 확인했다.

 12시 05분. 재준의 전화가 왔을 수도 있다. 전화를 안 받았으니 금세 또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씻을 수가 없었다.

샤워 대신 냉장고의 시원한 물로 갈증을 채우고 현수는 자신도 정의 내릴 수 없는 혼돈에 답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아....이건 대체 뭐람. 내가 먼저 말해놓고서는..."

유치한 질투일 것이다. 정희와 헤어진 후 다른 사람과 선을 봐도 생뚱맞고 시시했다.

 그런 자신에 비해 눈에 확 띌만한 미모를 지닌 은영을 보고 난 다음이어서 질투를 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 질투라는 녀석의 방향이 현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은영에의 질투가 아닌 재준에의 질투였다.

항상 식당을 가면 현수의 음식을 잘 챙기던 재준이었다. 여태 익숙해져서 몰랐었는데 자신이 아닌 은영을 챙기는 모습을 보고서야 알았다.

 재준이 얼마나 다정하게 자신을 챙겨주었는지 또 재준의 다정함에 자신이 얼마나 물들여져 있었는지를.

"진짜.. 뭐야.. 유치하게스리.."

자신의 유치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어이가 없어 중얼거리면서도 현수는 계속 시계만 바라보았다. 전화가 오지 않는다. 

재준이 12시 10분이 넘을 때까지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다. 

현수가 보기에 은영은 재준과 아주 잘 어울렸다. 한눈에 와~라는 감탄사를 남발할 정도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였다. 

집안 내력까지는 모르겠지만 얼핏 들어본 말로는 재준처럼 자신의 가게도 가지고 있는 듯하니 재준과 일적인 면으로도 잘 어울릴 테다.

 아니 무엇보다도 은영이 재준을 사랑하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또 재준 역시 은영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행동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현수에게 적지않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당연한 일이다. 애인을 소개해달라고 했으니 사랑하는 연인을 데려오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현수에게 그 당연한 일이 낯설고 

어색하면서 적응을 하지 못해 헤어지고 난 다음에 집으로 향하지 못하고 어슬렁어슬렁 밤거리를 배회한 것이다.

"뭐가 혼란스러운 거냐 넌."

스탠드형 거울 앞에 앉아서 중얼거렸다. 만나기 전에는 진심으로 축하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만나는 재준이 소개해주는 연인이니 잘 보이고도 

싶었다. 그래서 작년에 거금을 들여 사 놓은 양복까지 입었다. 재준의 가장 친한 친구로 자신을 소개받는다는 게 자랑스러웠고 기뻤다.  

듬직한 모습을 보여서 은영의 친구까지 소개받아 더블데이트 같은 걸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은영을 보기 전까지는..아니 재준과 은영 

사이에 흐르는 사랑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폈다.

재준과 같이 저녁이나 술을 마시고 혼자 택시 타고 집으로 오는 것 역시 처음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술을 안 마시고 간단한 저녁만 하는 

경우에도 재준은 현수의 집으로 태워주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었다. 공기의 소중함을 희박한 공기가 목을 졸리는 상황이 되어서야 새삼 깨닫듯 

현수는 자신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재준의 영향력을 다시금 깨달았다.

"뭐야.. 은영씨 있다고 이젠 전화도 안 하냐?"

현수가 먼저 재준에게 전화를 안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현수는 전화기를 들었다가 놓았다. 스스로도 잘 안다. 빼앗기고 싶지 않은 감정이라는 

것이 서른 살이나 먹은 늙은 사내에게 어울리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꼭 품고 있던 장난감을 빼앗긴 것처럼 속이 상했다.

그리고 그 생각지도 못한 욕심에 놀라고 있는 것이다.

"바보. 이 현수"

손톱으로 톡톡 거울을 두드리니 소리가 난다. 마음이란 녀석도 거울처럼 생겼다면 지우고 싶은 마음 쓱싹 지우면 간단할 텐데 라는 마음이 들었다. 

부끄러운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게 싫어 다섯 손가락 다 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쓸어버렸다. 손자국이 바로 생기며 거울이 조금 

흐릿해졌지만 반사되는 모습을 다 감추지는 못한다.

"진짜 전화 안 하냐? 너.. 전화 안 하면.... 나 화낸다."

무선 전화기의 몸체를 들고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시계는 이미 12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난 말이야, 회식을 해도 11시 30분이면 자리에서 일어났고 늦어도 12시엔 도착했었다고. 정희랑 데이트해도 나 늦은 적 없었다. 

알지? 너 이러면 배신이야. 이건. 이러면 나 무지하게 섭섭해진다고. 알아? 그런데...."

울리지 않은 전화기는 마치 재준의 마음처럼 여겨졌다. 이젠...정말 자신이 귀찮아진건가..

"정말...사랑해? 은영씨..사랑해??"

그때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듯 전화기가 큰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전화가 울려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던 현수는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기다렸는데 이젠 못 받겠다. 자신의 질문에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을 들을 것만 같다.

"아아..나 오늘 왜 이러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머리를 맹렬히 저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디야?"

- 여기? 음.. 알아맞추어봐.

"야, 재미없다. 빨리 불어라."

- 어? 기분 안 좋아?

"어."

- 왜?

"나....사실은..."

- 왜. 무슨 일 있어??

"........"

- 이 현수. 무슨 일이야!!

현수는 이게 좋았다. 걱정이 잔뜩 스며든 격양된 목소리. 지가 최민수인줄 알고 낮은 저음으로 잔뜩 멋을 부리던 재준은 화가 나면 오히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 현수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목소리 톤이 올라가고 당장에라도 뛰어올 듯 흔들리는 감정을 전화기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이게 좋았다. 잠시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그건 제정신일 때의 일이다. 현수는 스스로 상태를 심각한 패닉상태로 결정을 내린 후였다. 

이른바 말을 하자면 살인을 자주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살인을 하지 않고 돈만 빼었었다고 해서 그게 정상은 아닐 것이다. 정상은 살인도 하지 않고 

강도짓도 하지 않는 거다.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정상적인 일반인의 패턴으로 돌아와야 했다. 비록 그것이 자신에게는 질투라는 낯선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고 해도. 여기서 정상이란 재준과 은영을 축복해주고 자신은 이제 재준의 울타리 안에서 한 발 빼는 것이다. 

정희의 말대로. 채 실장의 말대로. 그리고 재준의 피앙세의 말대로.

"여자였나 봐."

- 에..

재준답지 않은 멍청한 삑사리 나는 소리에 현수는 웃음을 터트렸다. 감정을 숨기는 일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30살이란 나이가 공으로 생긴 것은 아니었다. 

"생리하는 것 같아."

- 무슨 말이야  대체.

"뭐랄까.. 아무튼 성질이 더 더러워진 것 같아."

- 왜? 이유가 뭐야?

"이유는 무슨. 그냥 좀 그렇다는 거지. 어디야? 집에 온 거야?"

- 아니.

"그럼?"

- 알아 맞추어보라니깐

"아..직 은영씨랑 같이 있는 거야?"

- 은영이는 집으로 들어 갔고....여기는.... 

"..........."

- 내가 사랑하는 사람... 집 앞

가볍다 여긴 우정의 질투라는 것에 날카로운 송곳이 박혀있는 줄 몰랐었다. 현수는 재준의 말에 생각보다 더 아팠다. 그냥 빼앗기기 싫은 장난감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큰 장난감이었는가보다. 속이 쓰라렸다.

- 여보세요??

"험..어.."

- 오늘 왜 그래? 몸이 안 좋은 거야? 집으로 바로 들어갔어?

"어.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내가 그리로 갈까?

"아니, 괜찮아. 나 잘래. 준아."

- 음..그래 그럼. 내일 다시 통화해.  

"끊어."

- 그래.

기운이 쑥 빠져버렸다. 거울 앞에 비친 모습이 보기 싫어 거울을 휙 돌려버렸다. 그리고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망상들을 잊기 위해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눈이 부셔 불마저 꺼버렸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은영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정희와 채실장과 같은 말을. 그것도 재준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부드럽게 웃던 입가를 차갑게 얼리고서는 한 번은 

용서해도 두 번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엿보이는 눈매를 하고 야무지게 말을 했다.

'재준씨가 왜 그렇게 현수씨한테 매이는지 그 전에는 속상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네요.'

'무슨..'

'나이도 그만하시고 애인 만들 능력도 되실 테니 이제 그만 재준씨와 좀 떨어져 주시겠어요?'

'떨어지다니요.. 제가 재준이한테 매달린 애도 아니고..'

'네. 애도 아니죠. 애도 아닌 현수씨도 한 번 생각해보시죠. 운전을 못 한다는 핑계로 매번 술자리에서 재준씨 기사로 부르시는 건 애 같은 거 아닌가요?

 자기 몸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마시지를 말던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사람 기사로 부르지 마시던가요'

'보통 택시를 이용합니다.  그리고 재준이 부른 거 몇 번 안됩니다'

'그 몇 번도 제가 기분이 나쁘다면요?'

'아...저..'

은영은 배부른 페르시안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화사한 미소를 입에 매단 채 의상과 맞춘 듯한 짙은 핑크빛 매니큐어가 칠해진 집게 손가락으로 

현수를 지목했다. 

'다시 한 번 저를 실망시킨다면 저도 그쪽을 실망시켜드리죠.'

'은영씨?'

'왜요? 제 말 못 믿겠어요? 우리 힘겨루기 한 번 해볼까요?'

현수는 뒤척이며 억지로라도 잠들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은영의 말이 마지막 말이 귀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이 현수씨. 재준씨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할까요? 더 이상 재준씨에게 짐이 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

창가에 불이 켜졌다. 상준의 말에 의하면 한 시간 가량을 걸었다고 했는데 그 걸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다. 현수의 버릇 중에 하나가 고민되는 

일이 있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걷는다는 거다. 시동을 끄고 운전석의 의자를 뒤로 제쳤다. 아마 들어가자마자 씻고 있을 현수를 생각하면 지금 

시각이 12시가 넘어가지만 조금 더 있다가 전화를 해야 할 터다.

은영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내내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던 현수가 걱정이 되었다. 소개하는 자리라서 레스토랑이 나을 것 같아 골랐지만 그래도 

현수가 찾아오기도 쉽고 또 일전에 음식이 입에 맞다고 한 기억이 나서 일부러 그쪽으로 잡았는데 먹는 게 영 부실해 보였다.

차에서 내려 운전석에 기대면서 담배를 일부러 천천히 한 대 다 태우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0번을 길게 눌렀다.

목소리가 역시 안 좋다. 혹시 우리 집 앞이냐는 대답이 나온다면 씩씩하게 응! 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말을 돌렸다. 밤늦은 시간에 왜 왔느냐고 

구박으로 가장한 반가움이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그렇게 물었는데 대답이 시원치않다.

본인은 원하는 대답 안 들려주면서 끝까지 어디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현수의 음성을 들으며 불이 켜진 창가를 바라보았다.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을 시작한 지도 오래되었다. 그동안 현수는 한 번도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물론 신경을 써서 이층에서 잘 내려다보이지 

않은 골목에 차를 주차하지만 이렇게 차 밖으로 나와 창을 올려다볼 때도 종종 있었는데 그는 단 한 번도 창을 열지 않았다.

거실 창이 좋다고, 이건 베란다가 아니라 테라스라고 그렇게 이뻐하면서 어쩜 그리 야박하게 손도 안 대는지 ..

우연히라도 그가 테라스로 나온다면 그래서 이렇게 가로등에 기댄 채 해바라기처럼 올려다보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면 그때를 기회 삼아 

거짓으로 점철된 말 대신 진심 한 조각을 웃으며 건넬 수 있을 것이다.

'보고 싶어서 왔어' 라고.

그런 날을 상상하는 것과 동시에 심장이 격렬한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한다. 심호흡을 크게 해보지만 사랑을 의식한 심장이 곱게 가라앉을리 없다.

"여기는.........내가 사랑하는 사람... 집 앞"

더 물어본다면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 풀어헤칠 수 있는데 매정한 현수는 피곤하다고 전화를 끓어버렸다. 

현수와의 전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울려대는 전화. 발신자는 형준이었다.

"왜."

- 어디야?

"글쎄. 어딜까?"

- 웬 장난질이냐? 현수네 집 앞이야?

역시 현수는 꿈에도 모를 행동을 형준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현수는 평생 모를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신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사랑에 굶주린 

남자의 방황을.

- 맞나 보네. 그럼 지금 블루로 올래? 휴가도 끝났겠다. 술이나 한 잔 하자.

"그래"

블루는 재준이 가지고 있는 바 가운데 가장 작은 규모였지만 그래도 처음 시작했던 바여서 그런지 더 정이 가고 또 작은 규모인 만큼 편안했다. 

룸이 즐비한 큰 규모의 바가 아니라 단 한 개의 룸만 있으며 룸의 입구는 바의 입구와 달라 조용하다. 물론 그 룸의 용도는 손님용이라기 보다는 

재준의 개인적인 만남을 위한 용도였다.

평소에는 바에서 일하다가 재준이 오면 룸에서 바텐을 하는 병우가 재준과 형준에게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버번"

"나도 같은 걸로."

재준의 앞에는 샷잔으로 형준의 앞에는 언더락잔이 놓였다. 훌쩍 먼저 비우는 재준을 보며 형준도 한 모금 목을 축였다.

"기분 좀 안 좋아 보인다?"

"뭐..좀."

"왜."

"휴가는 재미있었냐?"

"어쭈. 말까지 돌리는 걸 보니 우리 별당아씨의 일인가보네?"

"......."

"휴가 끝내주게 방구석에서 뒹굴었다. 나 뒹굴 때 너 야마 돌아서 한바탕 난리 부린 거 다 듣고도 해결사 있으니 냅두었는데 그래, 그때는 왜 그렇게 

발광했어? 좀 맡아달라고 했더니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었더군."

"아.."

"이유 정도는 들을 권리가 있을 만큼 뒷수습하느라 혼쭐 뺐다고." 

"......결혼 반지 맞추었거든."

"허헉.. 겨..결혼 하는 거야? 그 정희라는 아가씨와?"

"아니. 좀 있다 헤어졌어."

"휴, 다행이네. 오늘도 만나고 오는 길이야? 어째 요즘은 자주 만나는 것 같네?"

"그러게. 자제 좀 해야할 것 같은데... 그게 잘 안 되네. 건수도 생기고.. 오늘은.. 은영이 소개했어."

"에에..은영이?? 왜?? 아니 왜가 아니라 뭘로? 원심각에 주인으로?"

"애인."

"뭐어?? 애, 애이이이인??? 허참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 너 드디어 요렇게 되었냐?"

형준의 빙글빙글 돌아가는 손가락을 보며 재준은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놀리던 형준도 금세 손을 내려 재준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알만하다. 현수가 애인 만들라고 했구나."

"아, 뭐.. 꼭 그렇다기 보다는.."

"야, 너 그러다가 현수가 말하면 결혼도 하겠다."

"설마."

"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야. 인마."

"후..그런가?"

"참, 그리고 이번 주 주말에 동창회 있는데 안 갈 거지?"

"응"

"웬만하면 한 번 나오지 그러냐? 애들 다 너 보고 싶어하던데."

".........."

"허긴 진짜 너 보고 싶어서 그러겠냐. 매튜의 오너 얼굴에 도장이나 찍으려고 하는 거겠지만."

"됐어"

"하여간 사회성이 없어요. 사회성이."

"형준아"

"왜"

"가끔..."

"??"

"가끔은 창을 열겠지?"

내용도 알 수 없고 뜻도 알 수 없는 뜬금없는 소리지만 어쩐지 알 것 같은 느낌에 형준을 재준을 바라보았다.

태연한 척, 대범한 척해도 그도 평범한 남자다.

"그런 동화 있었잖아. 해와 바람이야기."

말도 없는 녀석이 어쩐 일로 시키지도 않은 동화 이야기까지 꺼내는 것을 들으며 형준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 스며든 외로움과 

고독을 알 수 있어 더 속이 후끈 달아오는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세상에. 도 재준이 짝사랑을 십 년째 하고 있다니.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고 애쓰는 바람보다는 계속 햇살을 내리쬐어 주는 해에게 나그네는 옷을 벗어 주잖아. 더우면...언젠가는 창을 열겠지?"

'그런 날이 안 오면?' 이라는 말을 씹어 삼키는 형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꾸없는 친구를 타박하지도 않고 재준의 입은 물 밖으로 내동댕이 

쳐진 물고기의 입처럼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창을 열면 우리 아씨, 마당을 쓸고 있는 머슴에게 눈길은... 주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