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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짓말 [7] (7/28)

하얀 거짓말 [7]

서서히 더워지기 시작하는 여름의 입구에서 현수가 동욱을 우연히 만난 것은 현수의 집에서 이십 여분 떨어진 대형마트에서였다. 

십 년 만에 만난 동창에 대한 반가움도 잠시 동욱은 대뜸 현수에게 호통부터 쳤다.

"아니, 도대체 넌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되었는 거야??"

"에? 왜 연락이 안 돼?"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안 되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연락이 안될만도 했다. 졸업과 거의 동시에 군에 갔었고 제대 후 즈음엔 어머니가 대구로 내려가시는 바람에 살던 집을 처분하고 

독립을 했다.

"우리 동창회 시작했단 말이야. 이 녀석아. 동창회 하면 제일 먼저 나올 것 같았던 녀석이 연락이 안 되니 애들이 한동안 너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오죽했으면 형준이한테 물어봤을까."

"형준이? 형준이도 동창회에 나와?"

"그럼. 사실 우리 학교 다닐 때는 형준이 다들 무서워했는데 사회인이 되다 보니 형준이도 별로 안 어렵더라. 형준이도 우리와 잘 어울리고 그래."

"어..형준이라면 내 연락처 알 텐데?"

"형준이가 네 주소 가르쳐주긴 하던데 매번 반송되던걸?"

"반송? 어디로 보냈는데? 나 최근에 이사한 적 없는데."

"현대빌라던가?"

"어. 맞는데."

우편사고에 의한 일이라 간단히 여기며 현수는 동욱에게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동창회 모임에도 참석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형준은 매번 참석하지만 삼 년 전엔가 딱 재준이 딱 한 번 참석했었다는 말에 - 동욱의 말에 의하면 그야말로 얼굴만 비쭉 

내밀고는 선 자리에서 다시 나갔다고 해도 - 더 의아해했다. 재준에게서 동창회란 말,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형준이야 자신이 참석한다고 

해도 현수와 자주 만나지는 않으니 그렇다 쳐도 재준의 경우엔 매일 통화를 하는데 그런 말을 안 했다는 게 괘씸했다.

그래서 12시에 전화가 울리자마자 따지듯이 말이 튀어나간 것이다.

"야, 너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어?"

- 뭐?

"동창회!!!"

- 아...

"너도 한 번 갔었다며? 내가 애들 가끔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할 때 너 왜 아무 말도 안 했냐? 그리고 형준이는 동창회 간다며? 

너 그것도 알고 있었어?"

- ........응

"그런데도 입도 벙긋 안 하다니..배신이야. 이건."

- 어떻게 안거야?

"지금 이 시국에 어떻게가 중요하냐. 넌. 하여튼 너 오늘 나 안 만나서 목숨 유지 한 줄이나 알어."

- ......미안.

"미안하면 같이 갈 거지?"

동창회에 같이 가고픈 마음과 더불어 동욱도 재준과 함께 나오라고 신신당부를 했기때문에 재준에게 협박 반 애원 반으로 졸랐고 언제나 그랬듯 

현수의 말이 먹혀들었다. 물론 떨떠름한 내색이 완연한 재준의 말을 현수는 귀 뒤로 넘겨 버렸다.

동창회가 한다는 고깃집은 고깃집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내부가 무슨 품격있는 한정식집처럼 방방으로 꾸며져 있고 입구에는 고풍스러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커다란 나무가 현수를 반겼다. 

십 년 만에 처음 보는 동창생이라고 해도 열 명 남짓한 고 3 때 같은 반을 지냈던 친구들이 다 인지라 어색한 느낌보다는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 편안하고 보는 얼굴들이 다 반가웠다. 그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지 여태 소식도 없었다며 타박을 하기는 하지만 건네는 것은 웃음기 가득한 

반가움이었다.

동창생들 만나면 으레 그렇듯 학창 시절 이야기가 종종 나왔다.

"너 아직까지 재준이랑 연락하고 지내고 있다고??"

"어. 왜?"

"어쩐지..재준이가 그럴 것 같더라니."

고 3 때 재준과 형준과도 가끔 어울리며 친하게 지냈던 성호의 말에 그를 보며 물었다.

자기 자신이 보낸 시간이지만 한 번씩 타인의 시선으로 그때를 돌이켜 보는 것은 쏠쏠한 재미를 느끼게 했다.

"재준이가 왜?"

"넌 특별했잖아."

"특별?"

각별히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이라는 특별난 단어를 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현수가 되물었지만 성호는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 

어이없어 하면서 건배를 청했다. 현수는 고기냄새와 담배연기로 자욱한 방문 틈 사이로 이야기의 주인공인 재준이 언제쯤 오려나 가끔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재준이한테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 너밖에 없었잖아. 오죽했으면 그때 동욱이가 너한테 돈 걷어 달라고 부탁을 했을까."

총무였던 동욱이 재준에게 반 회비 같은 걸 달라고 말하는 게 어려워 몇 번 부탁을 받고 대신 재준에게 말해 건네준 적이 있긴 있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현수에게 동욱이 당시 재준과 현수 사이를 못 박았다.

"너와 재준이는 고양이와 쥐. 아씨와 머슴. 독수리와 병아리였다고!"

"에엑?? 설마..내가 고양이고 아씨고 독수리란 말은 아니겠지? 조 성호!"

"이렇게 모른다니깐 정말! 너 쥐가 고양이한테 덤비는 거 봤냐? 머슴이 아씨한테 대드는 거 봤어? 병아리가 독수리 잡겠다고 나는 거 봤냐고!!"

"아니. 못 봤는데"

시큰둥한 현수의 대답에 성호가 거봐! 라는 말로 쇄기를 박았다.

"네가 뭐라 해도 그때 재준이 네 말 다 들어주었잖아. 기억 안 나? 유난히 너한테 약했다고. 체육대회때던가? 형준이 말해도 안 나가겠다고 하던걸 

네가 부탁해서 계주 나갔었잖아."

곰곰히 더듬어 보니 그런 적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동욱이 우는 소리를 하길래 재준에게 대신 부탁을 했었고 그 대가로 재준이 가지고 싶어하던 

현수의 인형을 준 적이 있었다. 현수가 잘 때 끌어안고 자는 이름까지 붙여준 커다란 곰 인형이어서 아까웠지만 재준이기에 선뜻 대가로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

"선생들도 안 건드리던 그 도 재준이가 말이야."

"흠..그래서 형준이가 아씨니 머슴이니 그런 말하는 거였나?"

"우리 다 그렇게 말했는 걸 뭐. 그나저나 둘이 뭔 일 있는 거 아니지?"

친한 친구 사이라고 보기엔 지나친감이 있었던 두 사람 사이가 어린 시절에는 음흉하게 발전하지 못한 의문형으로 남았지만 이제 성인이 되고 보니 

결과를 가진 확인형으로 남겨졌기에 성호는 대하기 쉬운 현수을 슬쩍 떠 보았다.

탐색하듯 성호의 눈초리가 야비하게 빛났지만 현수는 아무런 생각없이 동창의 질문을 되물었다. 

"뭔 일?"

"왜..그거 있잖아.. 그.. 요즘 유행한다던..."

"유행?? 뭐??"

"왜..있잖아.. 남자끼리..에.."

"남자끼리? 뭐?? 술??? 운동???"

순진하게 묻는 얼굴에는 가식이 없어 보였다. 학교 다닐 때부터 현수는 거짓말 안 하기로 유명한 친구였고 말을 돌린다던지 하는 고난도의 일에 

익숙한 편이 못 되었다. 그런 점을 알기에 성호는 현수의 아무 것도 모른다는 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닌가?  그럼 너 왜 결혼 안 하는데!!!"

"차였으니깐 그러지!!!"

제법 큰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오가고 있기는 했지만 관심이 있는 화젯거리 였는지 동창생들의 이목이 주목된 걸 느끼며 현수가 가방에 넣고 

다니던 반지를 꺼내 보였다. 이것도 안 보여주면 여자가 있었다는 말조차 안 믿을 기세였다. 

그렇게 여자가 없게 생겼나 라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던 현수는 이 망할 반지를 들고 곧 금방으로 가리라 다짐했다. 생각만 해도 돈이 아깝다.

"이 반지 주면서 프로포즈 하려는데 차였다 왜!!! 겨우 잊었는데 아우씨!! 생각만 해도 분하네. 진짜!!!"

"진짜로..결혼할 생각이었어?"

"그럼 너 같으면 가짜로 거금 들여서 반지 맞추냐? 거금 백 이십만 원 들었다. 백 이십만 원!!!!!"

"재준이는?"

"몰라. 그 녀석 나보다 먼저 결혼하기만 해 봐. 내 가만 안 놔둔다!!"

"재준이 결혼해?"

"할지도 몰라. 엄청난 여자 있거든"

"여자 있다고???? 재준이한테?"

마치 재준에게 여자가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현수는 자신에게 프로포즈할려는 여자가 있었다는 말보다 더 놀라는 성호와 동창들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재준이한테 여자 있으면 안되냐? 그만하면 여자 많을 것 같은 스타일 아닌가?"

"스..스타일이긴 하지만.."

"암튼 나 차인지 두 달이 넘었다고!!! 어이!! 조 내시. 술 한 잔 채워봐!!!"

"뭬야?? 네놈이 상궁도 아닌 아씨주제에 내시를 부려먹으려 하느냐!!! 네가 정녕 매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테냐??"

현수는 언젠가 유행했던 사극을 페러디하며 오버하는 성호의 뒤통수를 가차없이 내리치는 것으로 대답을 했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동창생들 

사이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때 재준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현수가 손을 들어 그를 반겼다.

동창들이 재준의 등장으로 놀라는 것을 느긋하게 보던 현수의 처음 생각은 '저놈, 참말로 어울릴 줄 모르네' 였다. 

현수의 자리가 동창 녀석들의 가운데 자리인데다가 재준이 형준과 같이 들어오는 바람에 중간에 끼기도 그렇고 잘 놀고 있는 현수를 부르기도 뭐한 

재준이 입구 쪽에 형준과 나란히 앉았다. 아는 척하며 인사를 건네는 동창들의 말에 간간이 대꾸를 해주기는 하지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매일 보는 친구인 형준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형준과 놀 바에야 왜 왔느냐는 말을 하고 싶은 걸 거리가 멀어 못한 채 현수는 성호와 동욱을 비롯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문제는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재준의 모습이 점점 불쾌해진다는 것이었다. 그가 못 어울려서 불쾌해지는 게 아니라 그 못 어울리는 게 너무 편해 

보여서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형준과 다정해 보였다.

"재준이는 역시 형준이 있으니깐 가끔 얼굴이라도 보는군."

"그..그래? 가끔 왔었어?"

"뭐, 자주는 아니지만 한 두어 번 왔을걸? 물론 형준이 있을 때만 같이 왔다가 먼저 일어섰지만. 오늘도 너나 형준이 없었다면 안 왔을 거야"

"아..그래."

"그런데 동창회 하는 줄 뻔히 알면서 술 마시자고 그러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나중에 네가 재준이한테 말 한 마디 해주라."

"뭐??"

오래간만에 보는 동창생들과의 만남이 주는 추억과 입담들이 현수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금방 곤두박질쳤다.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고

 눈은 재준과 형준에게 닿았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잘 웃지도 않는 재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재준이가..형준이한테 술을 마시자고 먼저 권했다는 거야??"

"그래. 그것도 지난번 동창회 때야. 이야기 잘하고 있는데 전화받더니 재준이라고 술 한 잔 하자고 그런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야.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하니깐 재준이가 나오라고 했다면서 가버리더군. 참내. 기가 막혀서. 동창이 아니면 몰라 지도 같은 동창이면서 오지는 

못할망정 훼방은 놓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야?"

현수와 재준사이에는 나름대로 룰이 있었다. 룰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적인 습관 같은 것들이 있었다. 밤늦게 전화할 때는 재준이 먼저 전화를 한다든가,

 현수가 재준에게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도 토요일만은 걸지 않는다는 거나 - 재준이 토요일만은 안된다고 몇 해 전부터 통보를 한 뒤로- 

현수가 술이 잔뜩 취하고는 재준이 현수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현수네 집에서 잠을 잔다는 것, 등등이 그랬다.

그리고 현수는 여태껏 깨닫지 못한 하나의 룰을 성호의 말에 의해 알게 되었다.

재준이 한 번도 현수에게 먼저 전화해 술을 마시자고 한다든가 집으로 쳐들어와 술이나 저녁을 권하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매일 밤 전화하고 또 현수가 종종 낮에 전화해서 저녁에 밥 먹자는 이야기를 해서 몰랐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재준이 먼저 약속을 잡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현수가 만나자는 권유에 바쁘다는 말로 거절을 한 것도 몇 번 되었다. 그러다가 현수의 청에 응하게 되고 또 가끔 몇 달간 사귀었던 여자들과 헤어지고

 난 다음에 술 생각이 나 전화를 하면 재준이 나와 같이 술을 한 잔 하게 되는 경우가 다였다.

현수는 몰랐었다. 재준이 먼저 전화를 해서 술이나 저녁을 먹자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여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형준에게는 적용되지 않은 재준의 습관인 모양이다.

현수는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하는 가슴을 느끼며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재준을 노려보았다.

한참을 노려봐도 현수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은 재준을 보는 것을 포기하고 술잔을 성호에게 내밀었다.

현수는 술이라도 마셔야지 이상한 감정이 안 생길 것 같았다.

"술 마신 사내놈이 이쁘면 얼마나 이쁘다고 그 말을 입에 다냐?"

"도영이 놈한테 일부러 술을 마시게 했다는 사람은 누구였지?"

"칫, 그래도 그 녀석은 얼굴이 이쁘잖아."

"이쁘기로 치자면.."

"아, 됐네요. 됐어. 내가 뭘 바래. 그만 실실 쪼개. 젠장. 그렇게 좋냐? 같은 지붕 아래에 있는 것만으로 좋냐고!!"

"아..뭐 그냥.. 다른 놈들한테 둘러싸인 것은 마음에 안 드는데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괜히 늦게 가르쳐주었나 싶기도 하고.."

형준은 이제 와서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미는 재준의 등을 철퍽 내리쳤다.

"이놈아, 이제 좀 정신 차렸냐? 시커먼 사내놈을 누가 업어 가기라도 한대? 이제 우편물 빼돌리는 치사한 짓은 좀 시키지 말지그래? 

넌 애들한테 쪽 팔리지도 않냐?"

"후후..그래야 할까보다."

"어?"

"음?"

"야, 현수 봐. 갑자기 오버해서 술 마시는 것 같은데?"

"아.. 안주도 제대로 안 먹는 것 같더니.."

"그래본들 가서 말리지도 못할 소심쟁이녀석이 걱정은. 어차피 네가 업고 갈 것 아니야. 냅둬. 모처럼 친구들이랑 술이나 진탕 마시게. 

쪼잔하게 친구들 만나 술 마시는 것까지 간섭하지 말라고. 추해보여."

"후후..그런가?"

"아암. 그래야 아씨한테 사랑을 받을 거다."

"칫."

"쿠쿡..승질이 나도 아씨한테 사랑을 받고 싶긴 받고 싶은가 보네? 하하핫. 재미있어. 정말."

재준이 술이 잔뜩 취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현수를 데리고 모임장소를 빠져나온 것은 두 시간 후의 일이었다.

**

"아아..취한다~"

속이 좋지 않은 듯한 안색에 급히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한바탕 속엣것을 비워내니 인제야 좀 편안해진 듯 길에 철퍼덕 앉은 현수가 풀린 눈동자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속은 좀 어때?"

느긋한 미소가 입가에 걸린 모습이 편해 보여 보기가 좋았다. 술 취한 모습조차 눈을 못 돌릴 만큼 흡족하니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중증이다. 

하지만 그게 싫을 일이 없는 재준은 아직도 곁에서 서성대는 두식에게 먼저 가라는 말로 방해꾼을 차와 함께 보내버렸다. 

현수네 집에서 크게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니 택시를 타는 것도 쉬울 것 같고 뭣하면 걸어가도 그만인 거리였다.

"괜찮아?"

연이은 질문에 풀린 눈동자가 재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초점이 없던 눈동자가 더 흐릿해지면서 눈가에 자잘한 주름이 잡힌다. 

손도 술에 취했는지 흐느적 힘이 빠진 손이 재준의 머리위에 턱 얹어졌다. 귀여운 강아지를 쓰다듬듯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아..우리 쭈니구나. 잘 생긴 쭈니..... 차칸...쭈니.."

"여기에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일어설 수 있겠어? 집에 가야지."

"아아.....집.....그래......가야지..암, 가야지잉~"

일어서는 현수의 팔을 잡아주었지만 반쯤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던 현수가 다시 무릎을 바닥에 먼저 대면서 고개를 저었다.

"왜 힘없어?"

"응. 쭈나.."

살짝 꼬인 발음이 귀엽다. 현수는 술 취하면 어김없이 준 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재준은 현수의 술 취한 모습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하긴 뭘 한들 안 예쁘랴.

"업어줘.쭌.."

"업어달라고?"

"응. 나 다리 풀린 것 같아. 응? 업어주라..... 쭌아..응?"

말없이 허리를 내렸다. 혹시 마음이 바뀔까 냉큼 등을 타고 오르는 현수의 엉덩이에 손을 받치고는 벌떡 일어섰다. 살짝 목에 감기는 손이 뜨겁다. 

"나 기분이 별로였는데 말이야.."

잘 놀고 잘 마신 사람의 변명치고는 박하여 낮게 웃었더니 그게 또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양쪽 귀를 주욱 잡아당긴다. 

신음 소리 참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현수에게선 항상 정상인의 행동이 나오는 재준의 입에서 금세 단말마의 앓는 소리가 나오자 현수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왜 사람 말은 안 믿냐고오~ 나 진짜 별로였는데.."

"믿을게. 믿어. 왜 기분이 안 좋았어??"

"아..그게 글쎄, 나도 기억이 안 나네. 엄청 안 좋았는데 말이야..쭈나..."

"응."

제법 무게가 나가긴 하지만 이 정도 무게쯤이야 거뜬하다. 그리고 설사 그 무게가 참을 수 없을 정도라고 해도 재준에게는 현수라는 사람의 몸에서 손

을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재준은 고개를 들어 앞에 길게 늘어져 있는 한가한 새벽녘의 인도를 바라보았다. 은은한 가로등이 길을 비추고 있었고 

확실히 저녁 무렵보다는 조용한 차들이 간간이 두 사람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현수의 술버릇은 일정한 양이 들어가면 잠을 자는 것이다. 잠을 안 잔 경우라고 해도 잠을 자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그가 주정을 부리던 

웬 낯선 여자와 블루스를 추던 기억을 못 한다는 점이다. 그런 자신의 버릇을 알기에 현수는 제법 잘 자제를 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동창생들이 많이

 반가웠는지 이렇게 취할 정도로 마셨다.

".......사랑해??"

누굴 묻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재준의 입에서 답부터 먼저 나갔다.

"응"

기억을 못 한다는 핑계로 그의 저 깊은 가슴 속에다가 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하지만 오늘도 재준은 슬쩍 비켜가면서 현수에게 자신의 숨겨둔 마음을 고백하였다.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고백을 한다. 만날 수 없을 때는 전화로, 만나면 이런 식으로라도. 하지만 현수는 모른다.

"정말...사랑해?"

"응."

"얼마만큼?"

귓가로 스며드는 현수의 깊은 숨소리,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현수의 통통한 엉덩잇살, 등으로 느껴지는 현수의 작은 심장 소리에 재준은 다시 한 번 

그의 존재에 감사했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어준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다시 태어나도 그 사람을 사랑할 만큼, 그 사람을 24시간 동안 내내 생각할 만큼 사랑하지. 내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을 만큼, 

그의 웃는 얼굴을 위해 내 눈물 드럼으로 뺄 수 있을 만큼, 그 사람이 원한다면 다른 사람 다 죽일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그 사람 곁에 있을수만 

있다면 그 어떤 거짓말도 다 할 수 있을만큼........그를 사랑해."

"아아...그래, 그래.."

어쩐지 기운을 잃은 듯한 힘없는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왜?"

"아니.. 은영씨를 사랑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누구? 은영이?"

재준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상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을 그리고 있었다. 

그제야 은영을 소개한 것이 생각나 재준은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그렇지 뭐."

심드렁한 목소리를 알아주길 바랬다. 하지만 알아준다고 해도 그건 심각한 일이다.

"많이...사랑하는구나"

"왜? 넌 마음에 안 들었어?"

"뭐 내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중요해."

"중요해."

"응?"

"중요하다고. 네 의견은 아주 중요해. 그래서 너한테 소개해준거야"

"정말? 정말 중요해?"

"몰랐어? 내가 이제껏 네 의견 존중하지 않은 적 한 번이라도 있었어?"

"아..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경우가 다르니깐.."

"다르긴 뭐가 다르다는 거야."

아마도 절친한 친구를 빼앗긴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재준은 어쩐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던 현수가 자신의 등에 얼굴을 묻고 키킥 낮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 질투라도 좋아서 재준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너에게만은 예외가 없어."

"히..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뭐가 마음에 안 들었었는 거야?"

"아.. 상당히 멋진 사람이긴 했는데.."

"그런데?"

"말이...많더라구"

"은영이가?"

"응"

"그래."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는지 곧 새근새근 소리가 들려왔다. 재준은 서서히 팔이 묵직하니 통증을 호소해왔지만 산책이라도 나온 양 느긋한 걸음으로 

현수네 집으로 향했다. 

환하게 둥근 달이 두 사람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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