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9]
현수가 피투성이로 발견된 것은 어이없게도 블루의 뒷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 어귀의 쓰레기통 옆이었다. 재준이 현수를 찾았을 때는 다행이
어디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린치를 많이 당한 탓에 온몸은 이미 제 색깔을 잃어버린 후였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현수를 병원으로 데리고 오고도 6시간이 넘어서야 현수는 제정신을 차렸다.
"으윽.."
흐릿한 정신이 점점 맑아지면서 제일 먼저 오는 것은 온몸의 통증이었다.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오자 금방 손 하나가 나타나 방향을 잃은 현수의
손을 잡아주었다.
"누..."
"나야. 괜찮아?"
익숙한 음성에 현수는 힘겹게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재..준아.."
"아픈 데는 없고? 어디 불편해? 물이라도 줄까? 응?"
답지 않은 성급한 말에는 초조함이 배어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현수의 상태가 괜찮을 걸 의사를 통해서 알게 된 재준의 눈이 번뜩인다
싶더니 바로 추궁을 해온다.
"누군지 기억이 나? 인상착의라도 말해 봐. "
"뭐하러."
"아니다. 일단 어떻게 된건지 말해 봐."
"그냥 돈이나 빼앗으려는 양아치들이었지 뭐긴 뭐냐."
"돈이나 빼앗는 양아치들이 그래 얌전히 지갑은 손도 안 대었더라. 그리고 네가 쓰러져 있던 곳이 어디였는지는 기억 나?"
"아.."
블루의 뒷문에서 그를 만난 것을 떠올리며 현수는 장소로 변명을 하기엔 틀렸다 싶었다. 다름 아닌 블루의 뒷문이라 함은 그의 관할 아래 -
재준이 깡패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을 했으니 최소한 재준과 우호관계가 있거나 형준의 관할은 될 법한 - 있다는 말이었다. 거기서 블루에 자주
들리곤 하는 현수에게 무지막지하게 린치를 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록 현수는 얼굴과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현수는 블루의 근처에서는 제법 유명한 얼굴이었다.
"처음 봤던 자들은 기억나겠지? 기억 나는대로만 말해줘."
"몽타주라도 그리려고?"
"안그럼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고?"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건데?"
"이 현수. 똑똑히 들어라."
딱딱한 경직된 자세로 허리를 펴고 현수를 노려보는 재준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평소에 가벼운 미소를 곁들인 부드러운 눈빛에 익숙해져
있던 현수가 놀라 그를 올려보았다.
"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 손가락이라도 함부로 놀리는 자가 있다면 절대 참지 않을 거다. 네가 맞은 일의 타당성따위는 다 개나 처먹으라고
해!! 중요한 건 네가 맞았다는 거다. 알아? 그리고 난 잊지 않고 백 배로 갚아준다. 그게 백 년이 걸리던 천 년이 걸리던. 꼭 갚아줄거다.
왜 피하는지 알 수 없지만 네가 똑바로 말 안 한다고 해서 내가 알아볼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길 바래. 자, 널 이렇게 만든 사람 누구였어?
네가 아는 사람이었던 거야? 모른 사람이었다면 생각나는 대로만 말해. 기억 안 나는 것까지 말하라고 하지 않아."
한 번씩 과도하다고 여길 정도의 현수에 대한 우정의 과시는 가끔 강한 남성미를 느끼게 하였다. 자기 것을 절대적으로 지키려는 맹수의 사나운 포효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현수는 내심 허탈해 스스로 생각을 비웃었다. 이젠 그의 이런 오버된 우정의 표현은 은영에게로 갈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렇게 자신의 일에 흥분하는 그가 고맙다. 하지만....
"부탁 하나 하자. 친구"
부탁이라는 말에 솟구친 눈썹이 꿈틀 거렸는지 친구라는 말에 인상을 썼는지 아니면 뒤에 나올 현수의 말을 상상했는지 재준의 얼굴은 더 굳어졌다.
"안 듣고 싶어."
"그냥 나 지나가던 양아치한테 당했다고 생각해 줘"
"그 말은 지나가던 양아치는 아니란 말이군"
"묻어줘"
"뭘 묻어. 정작 묻어야 할 놈은 널 이렇게 만든 놈인데 무얼 묻어!"
"재준아"
"그래. 나 도 재준이다."
침대에 걸터앉으며 재준이 현수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프다는 소리가 절로 입에서 나오려고 했지만 평소 조심스럽던 그의 악력이 절제 없이
나오는 게 화난 그의 본심 같아 현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바보냐? 응? 네 눈에는 내가 바보로 보여? 너 블루에서 과음하지 않은 거 다 알아. 네가 길에서 시비 같은 거 붙을 사람이야?
사람 좋은 웃음 허허거리며 슬렁 넘어가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린치를 당해. 그리고 그놈이 널 기다렸다는 말이 되는 거잖아.
블루 가는 것까지 알고 또 네가 뒷문으로 집으로 가는 것까지 알고 너 작정하고 기다린 거야. 틀려? 블루가 누구 가게라고 생각하는 거야?
거기가 천왕성이라도 돼? 명왕성이라도 돼? 내 코앞이야.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곳이라고. 그런 곳에서 너 당했는데 나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해?"
"너 오늘 되게 말 많다?"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여!!!!!"
"아니. 장난으로 안 보여."
"너 언제부터 나한테 비밀이 생긴 거야. 그놈 도대체 누구야??"
"글쎄, 누굴까?"
"이 현수!!!!"
"그래, 네 말대로 나 이 현수야. 이 현수가 네게 부탁을 하고 있는 중이야."
이번에는 재준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사나운 눈빛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나 말 많고 수다스러운 놈인 거 너 잘 알잖아. 아무리 그런 나지만 말 못할만한 사정이란 거 하나쯤은 있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누군가에게 말을
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면 그 처음이 바로 너야. 알지? 나 솔직히 지금 매우 혼란스럽거든? 생각지도 못한 린치에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사람
만나버렸어. 그래서 나 지금 마음이 힘들어."
힘들다는 말에 조금 풀어진 눈빛으로 재준이 말없이 현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수가 그런 재준의 손을 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청했다.
"넌 내가 무릎이라고 꿇고 빌어야 내 부탁을 들어줄 거야?"
"현수야.."
"네게 맛있는 것도 많이 얻어먹었고 선물도 많이 받았어. 하지만 난 네게 뭔가를 제대로 해 준 기억이 없네. 그래도 난 네게 소중한 친구지?
그렇지? 내가 네게 소중한 친구라면.. 부탁 들어줘. 무릎이라도 꿇을까? 묻어줘. 묻어줘. 재준아. 응? "
"휴...넌 정말..."
"나한테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뒷조사하는 거 아니지?"
"알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고마워. 준아.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는.."
"다시?? 다시는 없을 거다."
"준아.."
"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네가 발가벗고 부탁을 해도 절대로 들어주지 않아!! 꼭 명심해!! 알았어??"
느닷없는 큰 소리에 현수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재준의 말에 배시시 웃었다.
"뭐..명심하긴 하겠지만 내가 발가벗고 부탁을 한다는 게 제법...강하긴 한가 봐? 난 상상도 안 해봤는데 말이야."
뭔가 되받아치는 말을 예상하던 현수는 일언의 대꾸도 없이 병실을 뛰쳐나가는 재준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귓불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는데..역시..너무 화나게 했나?
이틀간 병원에서 조리를 해서 그런지 몸은 많이 나아졌지만 마음이 어수선해 요양차 현수는 대구에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태워준다고 길길이 날뛰는 한 마리의 말을 겨우 달래놓고서 현수가 대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경이었다.
중학교 교사인 어머니가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니기에 당연히 열쇠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빈 공간이어야 할 어머니의 집에는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왔어?"
"어, 엄마??"
"왜 놀래."
"나 일부러 엄마한테 전화 안 하고 온 건데, 나 오늘 오는 거 알았어?"
"어"
"어떻게?"
"재준이가 전화 했던데. 오늘 너 출발했다고."
"재준이 자식..내가 분명히 몰래 갈 거라고 했는데..이 배신자."
아들에게 다가온 최여사가 지난 설에 보고는 처음 보는 아들의 머리를 한 대 쥐어 막았다. 나이가 그만하면 먹을 만큼 먹었건만 아직도 어미에게
장난칠 생각만 하는 아들은 그 녀석과는 달리 한참 어린 녀석 같다.
"아얏."
"아파서 병가 내서 내려오는 놈이 깜짝쇼까지 할 작정이었어? 보자. 병원에서 다른 말은 안 하고?"
"응. 사내놈이 치고박고 하다 보면 얼굴에 기스 좀 날 수도 있는 거지 뭐."
"학교 다닐 때도 안 그랬던 아들이 서른 나이에 그러니 걱정인 거지. 자 들어와서 씻고 와. 밥 안 먹고 출발했다며"
"어. 참, 근데 엄마."
"왜."
"원래 재준이랑 통화하고 그랬어?"
대답하기 난감해서 최여사가 말을 얼버무리자 현수는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닌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재준이는 나한테 엄마랑 통화한다는 말 안 했지?"
"안 씻을 거야?"
"아, 알았다구요. 하여간 성질은 급해서.."
"뭐야? 너~"
"아~ 네네~ 올라가요~ 올라가~"
현수는 별일 아닌데 뭔가 이상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다 싶었는데 점점 뭔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준이라는 인물이라는 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아마 재준을 다 모른다는 채 실장의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수는 또 다시 의심하기 시작하는 우정에 의심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의 불손한
마음 때문이라 여기며 그 냄새만 풍기는 더러운 찌꺼기를 씻기 위해 샤워부터 시작했다.
매일 전화를 하다 보면 으레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하게 되는 법이다. 실제로 현수는 그러했다. 그래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나 오늘 만났던 사람이나
다른 사람에게 들은 또 다른 사람의 일까지 말하곤 했었다. 그리고 대화라는 게 주도권이 누군가에게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듣는 사람도 한마디씩
하게 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재준은 자신의 일이나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야박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어머니와 통화 한 것까지 말을 안 했다는 건 어딘가 좀 그랬다. 딱히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현수는 자신의 마음속에
검은 오오라가 슬금 피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따져 묻기는 머쓱하다. 아마 그 출발은 동창회일 것이다.
샤워까지 마치고 일층의 주방으로 내려가니 그리운 어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이 현수를 반겼다.
동창회 문제는 형준에게 물어봐야 하니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어머니이니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다.
"재준이가 뭐래?"
"뭐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면서도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가볍게 인상을 쓰는 어머니의 안색을 살폈다. 예전부터 어쩐지 어머니는 재준을 달가워하지
않은 기억이 현수에게 있었다. 그걸 재준도 아는 듯했는데 전화를 한단다.
"나 어떻게 다쳤는지 이야기 들었어?"
"동네 깡패한테 당했다면서? 아니야?"
"아니. 맞어. 그런데 그거 언제 들었어?"
"뭘 꼬치꼬치 캐묻는 거냐. 밥 안 먹어?"
"엄마. 궁금해서 그래. 준이 녀석 나한테 엄마랑 통화했다는 이야기 안 했단 말이야. 왜 그런 이야기를 안 하나 몰라. 쓸데없는 말 안 하는 거 알지만
어떨 땐 너무 한다니깐."
"네가 말이 많은 건 아니고?"
"엄마!!"
"국 식어. 그래, 언제 휴가는 언제까지야?"
"어, 일주일."
"잘 되었네. 그럼 이번 주 일요일에 선이나 봐라."
"엄마!!!"
그리고 현수가 재준의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가 그날 밤 만났던 사람을 떠올린 것은 잠을 자기 위해 자신의 옛 방에서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벽에 걸려 있는 어머니와 자신이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골목에서도 훤히 보이는 밝은 형광 빛으로 물들인 머리칼을 하기엔 나이가
좀 들어 보였다. 그리고 한쪽의 입꼬리만 비쭉 올라간 그의 입에서 '효자동'이라는 말이 뜬금없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효자동에 사는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을 떠올려 보았지만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머릿속을 굴리다가 갑자기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분명 그들은 효자동에서 산다고 했었다. 잠깐 스쳐 지나가듯 들은 말이 머리에 남아 있었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이제야 알아챈 듯한 먹잇감을 싸늘하게 비웃으며 그는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주위 동료에게 시켜 린치를 가했었다.
생각하기 싫은 일이 자꾸 떠올라 혼자 있기 우울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노크와 함께 들어가니 이미 이불까지 깐 어머니가 무슨 일인가 돌아다보았다.
"에, 모처럼 엄마랑 같이 자려고"
"뭐? 징그럽게 무슨 소리야. 올라가."
"아이~ 엄마아~"
"손 안 치워? 어여 올라가!"
말만 하고서는 허리에 감긴 아들의 손은 뿌리치지 않은 엄마의 마음을 눈치챈 현수는 엄마의 옆 자리에 누워버렸다.
쯧 거리면서도 엄마는 불을 끄신다.
"엄마.."
"왜."
"재혼 안 할 거야?"
하고픈 말을 바로 꺼내지 못하자 다른 말이 헛 나온다. 현수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보이지 않은 큰 방의 천장을 보았다. 처음에는 깜깜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천장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서서히 엄마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여자 혼자 아들을 키우는 일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테다.
"이 나이에 무슨 재혼이야. 왜 새삼 아버지라도 만들고 싶어서 그래?"
"어디 나 때문이유? 엄마 때문에 그러지. 밤이...외롭잖아..흐흐흐."
"못하는 말이 없다 진짜. 너나 빨리 장가가서 이쁜 손주나 하나 안아보면 되는 거야. 더 이상 욕심 안 낸다."
"그래서 나 군소리 안 하고 선 보잖아. 뭐."
그래도 대구까지 내려와서 행패를 부린 것은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현수는 혼자 고생하시는 엄마를 생각하며 그날 밤 만났던
사람에 대해서 마음속에 묻어 두기로 다시 한 번 결정을 내렸다. 들쑤셔서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저번에 정희랑은 왜 헤어진 거야?"
"몰라. 나 싫대."
"정희와는 결혼 할 것처럼 말하더니."
"그러게. 나도 하고 싶었거든."
"근데?'
"그런데..."
재준때문이라고 말을 하려다가 현수는 잠시 입을 닫았다. 전화를 서로 한다고 해서 엄마가 재준에 대해 호감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말을 아끼기로 했다.
"내 성격을 이해 못 하겠대."
"네가 어때서?"
"하하..그러게 말이야. 나 정도면 아주~ 양호한 건데 말이지. 눈이 삐었어요. 눈이 삐었어"
"재준이는 뭐래?"
"뭐라긴. 겉으로는 안되었다며 위로해주었는데 분명 속으로는 좋아했을 거야."
"왜."
"왜긴 자기도 애인이 없으니깐. 아..아니다 있구나."
"재준이..애인..있어?"
"응. 눈이 확~ 돌아가게 이쁜 여자더라. 처음엔 웬 영화배우나 나타나는 줄 알았어."
"허참, 개도 속이 많이 썩는구나. 쯧."
"음? 왜?"
"아, 아니. 자자."
"엄마 아직도 재준이 싫어해?"
"그래."
"왜?"
"너처럼 단순한 녀석이 아니니깐."
"뭐야, 언제는 나보고 단순해서 싫다며?"
"그리고..."
"그리고 뭐?"
"됐다. 이번 주에 약속 잡을 테니 그 전에 올라갈 생각하지 마."
"으...."
그리고 돌아오는 일요일에 선을 봤던 여자는 만날 때부터 명품이야기로 시작해서 헤어질 때까지 명품을 들먹거리는 여자였고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해 들은 최여사도 아들이 오늘 봤던 여자 더 이상 안 만난다는 통보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을 서울로 군말 없이 보내주었다.
**
"현수가 아직 안 왔구나? 너 이러고 있는 거 보면"
"내가 뭘?"
"이렇게 삐친 아이처럼 퉁명스러운 거 하며 이 술병들이 증명해주지. 넌 현수가 곁에 없어도 전화 때문이라도 과음하지 않잖아. 안 그래?"
"같이 마시기 싫으면 가던가."
"봐봐. 이거 같이 안 놀아준다고 삐친 거잖아."
"야!"
"네넵. 쭈그러들겠습니다. 자, 소인의 한 잔 받으시지요. 대감마님."
"놀고 있네."
"아..대감이 아니지? 너 돌쇠지?"
"흥."
"쇠돌인가?"
"재미없다. 그만해라. 형준아."
"머슴의 이름이 뭐가 있더라? 돌쇠밖에 생각이 안 나네.쩝.."
자신의 오버하는 너스레에도 재준의 얼굴이 펴지지 않아 형준은 그의 빈 잔만 채워줄 뿐이었다.
"역시..머슴에게는 별당 아씨가 최고인가?"
별 반응이 없다가 부릅뜨지는 검은 눈. 이건 완전히 자동이다. 자동. 자다가도 현수의 이름만 들리면 눈을 번뜩 치켜세울 녀석이다.
"쯧쯧..그렇게 좋으냐? 넌?"
"뭐..."
어깨를 으쓱 이는 게 긍정이다. 형준은 이 기회를 삼아 물어보고 싶은 말을 꺼내었다. 왠지 오늘은 다 대답해 줄 것만 같은 외로움이 재준을 감싸고
있었다.
"왜 그렇게 자신이 없는 거야? 비록 현수가 스트레이트라고는 하지만 너 정말 징하다고. 알아? 그 정도 노력으로 대쉬해보지 그래? 안 되더라도....."
"안 되면?"
"응?"
"거절당하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해?"
"뭐..그야..."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
"현수가 네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것?"
재준은 흐릿한 불빛을 받고 있는 술잔을 빙글 돌리고 있었는데 그의 마음은 어디 멀리 가 있는지 몽롱했다. 형준은 재준의 말을 끈기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재준이 입을 열었을 때 그는 그의 왼쪽 손으로 핸드폰을 연신 만지고 있었다. 마치 그 핸드폰이 누구라도 되는 양.
"아니, 난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게 두려운 게 아냐. 그리고 내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생각도 없고."
"그럼 이대로 있겠다는 거야? 이렇게 평생 짝사랑만 하면서??"
"그래."
"그럼 현수의 마음을 못 얻는 것도 아니면 네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뭐라는 거야?"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와 재준은 술잔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런 재준을 형준은 빤히 바라보았다. 두려움이라고는 한 톨도 없을 것 같은 녀석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는 역시 현수 뿐인 거다. 그런 현수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형준은 재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으로 그의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
"그건.. 현수가 내 곁을 떠나는 거."
형준은 재준의 떨린 음성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보통은 넘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절박하게 그를 원하고 있는 줄은 몰랐었다.
이렇게 절박하게 원하고 있건만.. 그 마음 한 자락 표현해내지 않은 그의 인내의 끝은 어디인가.
"그런 거 알아?"
"무..뭐?"
"살아 있어서 기쁘다는 것. 현수가..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나와 통화를 하고..나와 밥을 먹을 때마다 정말 기뻐. 기뻐서..눈물이 날 만큼.........
.난 그가 좋아. 그렇게 좋은 사람이 나를 향해 경멸 어린 눈빛을 하고 등을 돌린다면 정말...죽을지도 모른다.
그 녀석은 엄청난 효자라서 말이야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여자와 결혼해서 살 놈이야.
그리고 속없이 웃어대지만 냉정할 때는 얼마나 냉정한지.. 용기? 모험? 다 헛소리야 그건.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헤어질 각오를 하고 해야 하는거지. 하지만 난 어떤 경우에라도 그 녀석과 등 돌릴 생각 없어.
절대로 그 녀석 없이는...난 못 산다. 아니, 살지 못할 거다. 난."
형준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채워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