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10]
"뭐?? 오..온천??"
상상하지도 못한 단어에 재준은 어이가 없어 마치 현수가 베란다에 있는 듯 이층 난간을 올려다보았다.
- 응, 가자, 가자 응 재준아~
이런 나긋나긋한 음성에는 힘이 저절로 빠진다. 그러나..온천이란다. 재준은 길게 숨을 내쉬며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 뜨거운 거 싫어하는 거 알..."
- 알지!! 알지. 너 여태 나랑 목욕탕도 한 번 안 갔잖아.
목욕탕을 즐기지 않으니 안 갔지만 즐겼다고 한들 현수와 갈 리가 없는 재준으로서는 그의 말에 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하지만 여행이잖아!! 여행!!! 너 그 주먹만한 가게 차리면서 바빠서 나랑 여행 간 적 있어? 우리가 북한산 등산 간 게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간다고.
십 년!!!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응? 아니면 온천에는 안 들어가고 호텔에서 잠만 자고 주위 둘러봐도 괜찮잖아? 나 벌써 이틀 연차 냈단 말이야~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연차 냈단 말이지. 이 현수."
호텔이란다. 온천보다 더 위험하지 않을 리 없다.
- 너 사장이잖아. 응? 이틀 빠진다고 블루에 손님 안 오냐? 그리고 이틀쯤 주인 안 왔다고 해서 돈 삥땅 하겠냐? 그리고 민이도 있잖아.
그 애들한테 부탁하면 이틀 빠질 수 있잖아.
재준이 가진 일이라고는 블루만 있는 줄 아는 현수기에 일로는 반박을 할 수 없는 재준은 아예 대답을 안 하는 쪽을 택했다. 온천이나 호텔에 단둘이
가느니 차라리 일주일 물도 한 모금 안 마시고 일하는 게 훨씬 편하다. 물론 그와 둘이서 여행하는 것에 마음이 영 안 끌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감당해야 할 위험부담이 너무 큰 것이다.
- 재준아~ 응? 가자~ 가~ 응?
살살 녹는 듯한 현수의 어리광에 입맛만 다시며 재준은 이층 난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전화로 하는 게 다행이다. 눈앞에 보고 있었다면 아마 안
된다는 말 입도 벙긋 못하고 그저 좋아서 헬렐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법 견고했던 버티기도 잠시뿐이었다. 기다리다 안 되었는지 욱하고 내뱉은 현수의 말에 재준의 침묵의 부정도 금방 무너져버렸다.
- 좋아, 네가 안 간다면 할 수 없지. 우진이가 일부러 준 선물인데 썩힐 수는 없고 동욱이 한테나 전화 해 봐야겠다. 그럼 너 안 가는 걸로 안다.
"자, 잠깐!!"
- 왜?
".... 다시 생각 해 볼게"
- 안 간다며!! 이랬다 저랬다 할 거야? 확실하게 이야기해야지 나도 다른 사람을 구하든 말든 하지.
"안돼!!! ..............알았다. 알았어. 갈게. 가."
- 진짜? 진짜지?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히히..다행이다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로 야밤에 환호성을 지르는 현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준은 될 대로 되라, 는 식의 자포자기 심정이지만 웃을 수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뭐 고생 좀 한들 어떤가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그건 재준의 판단착오였다.
모처럼 같이 여행을 가는 것은 상상대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별 재미를 못 느껴 초등학교의 소풍조차 제대로 간 기억이 없는 재준에게 있어서
마음에 둔 사람과의 여행이 주는 들뜨는 가슴이 낯설기도 하면서 좋았다. 자신의 기분도 기분이지만 재준에게 있어서는 현수의 즐거운 마음을 숨기지
않은 웃음이 더 마음에 들었다. 가는 내내 차 안에서 재잘거리는 현수는 누가 후- 하고 불면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현수의 강압에 못
이긴 재준이 김밥마저 싸는 기행을 보인 결과물을 휴게소에 들러 컵라면과 함께 먹기도 했다. 아산에 도착한 것은 12시 즈음이었다.
"아, 몰랐네. 어떻게 할래? 수영복 빌릴까?"
"꼭 가고 싶으면 사지. 왜 빌려"
현수가 가진 입장권으로 사우나뿐만 아니라 바데풀과 실외온천을 이용할 수는 있으나 그 두 곳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수용복이 있어야 했다.
수영복을 대여한다기에 현수가 재준에게 물으니 남이 입던 것을 현수에게 입힐 리가 없는 재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가서 사고 오자."
"아, 아냐. 집에 있는 걸 일부러 왜 사. 그냥 사우나만 가자. 거기에 들어가도 구경할 거 많을 텐데 뭐."
"그러던지."
당장 들어가고픈 마음에 현수는 신발 키와 락커 키를 받자마자 후다닥 달려가 옷부터 훌훌 벗어 던졌다. 벗다 보니 멀뚱멀뚱 서 있는 재준이 보여
현수는 껄렁한 삼십대 노총각처럼 비딱한 자세로 팬티에 손가락을 걸치며 그를 재촉했다. 평일이라서 사람들이 많이 없어 미아가 되지는 않겠지만
같이 들어가야 될 것 같은데 재준은 단추 하나도 풀지 않은 셔츠차림 그대로다.
"뭐해?"
"어?"
"안 벗어? 아직 셔츠도 안 벗었고 뭐했냐? 왜 벗겨주랴?"
"아..아니."
고개를 쑥 내밀며 제안을 하자 당황하는 듯 재준이 허둥거리며 셔츠 벗는 것을 현수는 팔짱을 낀 채 바라보았다. 목욕탕이 낯설어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러기엔 행동이 너무 더디었다.
"야, 보는 사람 숨 넘어가겠다. 후딱후딱 좀 해."
"어..현수야"
"응?"
"먼저, 들어가지그래? 난 조금 있다가 들어갈게."
"조금은 무슨. 같이 가야 안 잃어버리지. 빨랑 가자. 응?"
그러면서 현수가 몸에 걸치고 있는 마지막 남은 옷을 훌렁 벗어 락카에 넣고 돌아다보니 아예 얼어붙은 듯 딱딱하게 경직된 재준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래? 그렇게 어색해?"
이번에는 아예 말도 못하고 있는 재준을 흘낏 보며 현수는 포기의 숨을 내쉬었다.
"오냐, 그렇게 적응이 안 되는데 낸들 어쩌겠어. 그럼 천천히 들어와. 음..어디보자. 오오..기포탕도 있네. 그럼 여기로 와. 알았지?"
각 탕별로 길게 설명이 적혀진 소개를 보면서 재준에게 당부를 하고 현수가 먼저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탱탱한 엉덩이의 볼륨을 자랑하는 현수의 뒷모습을 보며 재준은 모든 것을 감수하고 탕에 들어가야 할지 현수에게 욕을 얻어먹을 지언정 탕에
들어가지 않고 편안한 하루를 보낼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준아.너 언제 들어온 거야? 기포탕으로 들어오라고 했더니..또 말 안 듣네."
재준이 언제 들어오려나 문쪽을 자주 살폈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보이기에 안을 살폈더니 냉탕안에 목만 쭉 빼고 있는 재준을 발견하고 현수가
다가가 물었다. 현수는 재준이 더운 열기가 그렇게 견디기 힘이 든가 싶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더운 게 힘들어?"
"아..뭐 조금."
"괜히 오자고 했나.."
힘이 빠진 목소리로 난간에 앉으며 현수가 말하자 재준이 미안한 마음에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 같아서는 현수에게 힘을 주기 위해
기포탕이니 폭포탕이니 사우나 실이니 다 손을 잡고 가고 싶긴 하지만 문제는 더운 열기가 아니었기에 이 온천에 냉탕만 있는 듯 냉탕 안에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같이 오니깐 좋은걸."
"정말?"
난간에 팔을 걸치고 현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재준은 현수의 얼굴만 보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싱긋 웃으며 다가오는 얼굴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내가 너 아니면 언제 이렇게 온천이라는 거 구경이라도 하겠어. 안 그래?"
"허긴, 그런데 안 추워? 이햐~물이 정말 차갑다~"
"한참 있었더니 괜찮은데?"
"그래도 원래 냉탕과 온탕 번갈아 가면서 가야 된대.음.. 뭔...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떨어진다고 했는데."
"어."
"어제 내가 설명해줬지? 냉온 교대욕을 해야 한다니깐. 그러니깐 얼릉 나와. 응?"
"아..괜찮아. 난 이게 편하고 좋은걸."
"야아~ 얼릉. 나온 김에 나 등도 좀 밀어주고. 응? 얼릉~"
문제는 재준이 현수의 재촉에 못 이겨 엉거주춤한 자세로 냉탕에서 나오고 난 다음에 벌어졌다. 삼십여 분이나 있었던 냉탕 안에서도 식히지 못했던
재준의 한 곳의 열기가 현수의 눈에 띈 것이다. 장난스럽게 현수가 재준의 심벌과 얼굴을 번갈아 보자 재준의 얼굴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재준의 그곳 역시 현수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아 더 위용을 떨치며 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후후.....너 그래서 냉탕에 있었구나??"
"저.."
"하하.. 부끄러워 하는 도 재준이라. 이거 너무 재미있는 거 아냐? 이 녀석, 거참 튼실하게도 생겼네~"
장난으로 현수가 재준의 아래를 손으로 쓰윽 쓸자 안 그래도 난감한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방황하던 재준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하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현수의 벌거벗은 몸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몸이 그의 부드러운 손길 하나만으로도 사정감이 확 몰려왔다.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고 여태 느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숨도 못 쉴 것 같은 짜릿한 자극에 욕망이 솟구쳤다.
가까스로 이성으로 본능을 억누르고 있을 때 또다시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현수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현수의 손가락이 아닌 자신의 심장을 관통시킬 악마의 삼지창이었다.
당황한 재준은 자신도 모르게 현수를 세게 밀쳐버렸고 재준의 느닷없는 손길에 현수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엉덩방아까지 찧고 말았다.
하지만 자신의 상황이 너무 급박했는지라 재준은 그런 현수를 알면서도 대욕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부터 찾아 들어가 성난 녀석을 달래주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에 머무는 것 역시 스스로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그의 벌거벗은 몸을 보는 것은. 상상이야 많이 해보았지만 상상과는 천지차이였다. 생각만 해도 이렇게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치는 것
같은데 그의 손길이 닿았다. 잠깐의 회상만으로 기가 죽어버린 아랫도리가 또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자 재준은 망설임 없이 락커에서 옷을 꺼내입고
먼저 호텔로 와버렸다.
현수의 화가 두려웠지만 그래도 더 무서운 것은 다시 벌거벗은 현수를 바라보게 될 자신이었다. 소형 냉장고에서 꺼낸 작은 냉수 병을 한 모금에 다
비워내었지만 열기가 쉽게 가라앉지가 않았다.
"날...너무 믿지 말라고. 이 현수. 이러면 날더러 어쩌자는 거야"
무려 십 년이 넘은 세월이었다. 솟구치는 열기를 참지 못해 주먹으로 날뛰던 십대마저 무사히 보낸 시간이었다. 이제 와서 그 힘겨웠던 인내의
시간을 무너뜨릴 수 없는 일이다. 서른 살이면 성적충동에 잘 참을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십 년 동안 봐 왔던 인물에 대해 좀 더 무감각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서른 살이면 무얼하고 십 년이나 봐 왔으면 무얼하나.
나이가 들면서 참을성과 면역 쌓이는 것이 아니었다. 바닥을 드러내는 초조함과 작은 접촉에도 성을 알아버린 남자가 가진 붉은 욕망만이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밀어버리고도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줄 이성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건 위험하다. 재준은 자신이 쌓아올린 견고했던 벽이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럴 줄 알고 반대한 것이었는데.. 재준은 현수에게 미안하고 이 나이에도 컨트롤 되지 않은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치를 떨며 담배만 계속 피워댔다.
"어쭈? 지금 반항모드냐?"
"아, 현수야.."
"그래, 미안하지? 너 되게 미안할 거다. 도 재준!!!"
벌컥 열린 문에는 거만한 포즈의 현수가 서 있었다. 손가락질을 하며 따지듯 다가오는 현수. 아무런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음이 얼마나 힘차고
아름다운가.
재준은 그래서 현수를 사랑했다. 원래 마음속의 말을 밖으로 잘 표현해내는 성격이 못되었다. 그래서 항상 속으로 자책하고 미안해 한다.
어떤 식으로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먼저 해 상대에게 위로를 해야 하는지 자신은 모른다. 하지만 현수는 항상 먼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다. 다가와 잘잘못을 따져주며 재준이 먼저 사과할 수 있는 말미를 제공해주곤 했다.
"미안하지? 윽수로 미안하지? 너. 미안해? 미안 안 해?"
"미..미안해."
"우씨. 아무리 내가 장난 좀 쳤기로 그렇게 매몰차게 날 밀어뜨리고 거기에다가 엉덩방아까지 찧게 해? 아직까지 꼬리뼈가 아픈단 말이야~!!!"
"미안.."
"그것도 락커에서 기다린 것도 아니고 괘씸하게 호텔로 먼저 와 버렸단 말이지?? 난 또 얼마나 찾아댔는지 알아? 전화는 왜 또 안 받아?"
"아.."
진동으로 해 놓은 전화에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던 재준은 재킷 호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보았다. 부재 중 5통. 발신은 모두 현수였다.
어떻게 그의 화를 풀어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말할 변명도 없었고 사실대로 너에게 발정했다는 말 또한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일이다.
재준은 현수의 쏟아붓는 따가운 지적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대신!!!"
"?"
그 어떠한 무리한 요구 -물론 다시 같이 탕에 들어가자는 요구만 아니라면- 라도 들어줄 셈이었다. 그걸로 그의 화가 풀린다면.
하지만 현수가 말하는 대가를 듣고 한동안 재준은 멍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치사한 건 알아. 하지만 너도 잘못 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래. 어떻게 하면 되겠어?"
"좋아. 이걸로 오늘 일 다 잊겠어!!"
"말해."
"대신!!! 여기 호텔비 네가 다 내라!!!"
당연한 말을 아주 호기롭게 뱉어 내는 그를 보며 재준은 오랫동안 금기시켰던 손을 풀어 그를 확 끌어안으며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자신의 품에서 자신 만큼이나 놀랐는지 바둥거리는 현수를 더 꼭 안으며 속으로 다시 한 번 되내였다.
사랑해. 이 현수. 사랑해...
어쩜 자신의 연인은 이렇게도 욕심이 없을까. 물론 그것은 자신의 자리가 친구의 자리여서 그럴 테다. 조금 쓴 맛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재준은 이런
식으로 가볍게 자신의 조바심을 풀어주는 그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를 위해서라면 당장 심장이라도 꺼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가 원하는 것은
이렇게 작고 소박한 것이다. 결국 그는 호텔비를 더치페이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조금쯤은 기대어도 될 텐데 현수는 혼자 자라서 그런지 가끔
독립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어쭈? 이런 스킨쉽으로 나중에 배 째라, 나오는 거 아니지?"
"설마."
"그럼 네가 다 내는 거다?"
호텔방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이 가슴에 닿자 성급하게 안았던 것을 또 금방 떼버렸다. 물론 이번에는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해
그의 팔을 잡는 것으로 중심을 잡아주었다.
"네가 온천 무료 이용권을 가져왔는데 내가 내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가? 그래도 내가 돈을 낸 것도 아니니깐..뭐야, 그럼 너 원래 네가 호텔비 다 낼 생각 했던 거야??"
"물론."
"우... 손해 봤다. 음.. 그래도 호텔비가 더 비싸잖아. 온천은 자유출입권이라도 이만 오천 원이니깐 오만 원인걸. 호텔은..더 비싸지 않아?
그리고 차 기름도 들었고 통행료도 네가 냈고..."
덜렁대기는 하지만 금전적인 면에서는 꼼꼼하기도 한 현수의 계산법에 어이가 없다.
"이봐. 이 현수씨."
"응?"
"나 사장이라며? 나 사장이라고 매번 말하던 사람이 누구였어? 원래 사장이 말단직원보다 돈이 더 많은 법이야."
"말단이라니!!! 대리라고!! 대리!!!"
발끈하며 대드는 현수가 너무 사랑스러워 한 입 베어먹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재준은 영리하게 한 발 슬금 물러서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머리에
각인시켰다.
"그래 이 대리님. 그러니깐 호텔비와 오늘 저녁밥 값에 내일 풀 코스로 내가 쏠게. 불만 있어?"
"불만??"
"어."
"불만.........당연히 없지. 히히.."
안내하듯 한 손을 호텔방 문으로 향하게 하면서 눈짓을 주니 웃는 얼굴의 현수가 양반네들처럼 두 손을 뒤로 돌려 뒷짐을 지며 어슬렁 방을 나섰다.
이봐 머슴, 오늘 저녁 메뉴는 뭔가, 라는 농에 다소곳한 자세로 문을 닫으며 재준이 한정식이옵니다, 라는 말을 끝내고 잠깐 호흡을 멈춘 후
'아씨'라고 덪붙이자 현수가 불끈 쥔 주먹을 들고 뛰어왔다.
나이도 잊고 체면도 잊은 재준이 오래간만에 현수의 무섭지 않은 주먹을 피해 줄행랑을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쳤다. 그리고 가벼운 훅을 한 대
맞아주고는 현수와 함께 호텔 내 식당으로 향했다. 물론 밖에 보이는 온천 쪽으로는 아예 시선도 안 돌렸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는 또 발생이 되었다. 물론 호텔이라는 것에 긴장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온천의 일이 꽤 충격적이어서 재준은 그 다음의 일까지
신경을 뻗칠 여유가 없었다. 떡 하니 놓인 킹사이즈의 침대에서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 현수를 보면서 왜 방을 따로 잡지 않았는지 새삼 후회가
되었다. 따로 잡는 게 더 이상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편안한 밤을 보내기는 애초에 틀렸다.
"오오~ 섹쉬한 걸~!!"
그러니깐 현수의 이런 태평한 성격도 보탬이 되는 거다. 친구에게 일말의 경계심이 없는 - 현수는 남자와 남자가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 단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완벽한 노말이기에 - 현수의 장난이 이쪽에서는 치명적인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현수가 술 취한 후에나 가는 그의 집에서도 잠을 못 자는데 이렇게 말간 이쁜 눈을 호기심으로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곤욕이다.
"야아.. 이제보니 너 그 말로만 듣던 구릿빛이네? 햐..아.. 멋지다."
아, 그러니깐 말만 하라고. 이렇게 쓰다듬지만 말아줘!!!!
"이거 헬스 얼마나 해야 되는 거야? 응?"
가슴을 쓸던 손이 젖꼭지를 스쳐지나가자 몸이 움찔 떨렸다. 길게 숨을 내쉬며 배로 내려가는 현수의 손을 잡았다. 다가올 손을 기대하고 있을
아랫도리의 그 녀석을 내심 비웃었다. 넌 뭘 기대하고 있는 거야. 이 바보 녀석!!
"그만하고. 자자. 응?"
"벌써?"
"벌써는 무슨. 열 두 시가 넘었는데."
"야. 우리 밤새자. 응? 놀러 왔는데 자다니. 난 너무 억울해~!!!"
"후훗. 니가 애냐? 애야?"
"그래. 나 애다. 뭐!! 보태줬냐? 아..넌 보태줬겠다. 밥도 많이 사주고 회도 많이 사줬으니."
혼자 중얼중얼 거리면서도 잠이 오긴 오는지 눈가의 잠을 물리치기 위해 눈을 비비는 현수의 모습을 보며 재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스킨쉽인
현수의 머리 쓰다듬기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거 애 취급하는 거 맞지?"
다가오는 손길이 마음에 안 드는 듯 부루퉁한 모습이지만 익숙해져서 그런지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
"뭐야. 그 감탄사는!!!"
"답지 않게 똑똑해서."
"야!! 도 재준!!"
"내일 뭐 사달라고?"
"으으.. 돈이 운다. 돈이 울어~"
"잠 오지?"
"으응..조금"
"자."
"준이 넌 안 잘 거야?"
"자야지"
"그럼 이불 속으로 들어와. 우리 같이 자자."
"........"
"그러고보니 너 우리 집에 자도 난 만날 술 취한 후여서 그런지 같이 이렇게 잔 기억이 안 나네. 얼릉 들어와."
들치어진 이불과 현수의 얼굴을 보며 하는 수 없이 재준이 침대를 돌아 침대에 올랐다. 현수가 이불을 들치며 재준을 반기는 곳은 현수의 옆자리였다.
눕자마자 안겨드는 사랑스러운 몸. 두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니깐,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만 죽어나는 것이다.
"징그러."
"징그럽긴 뭐가 징그럽냐? 나 이렇게 뭘 꼭 안고 자야 잠이 잘 온다 말이야. 대구갈때마다 엄마 안고 자는 걸 뭐."
"그래도.......불편하잖아."
"불편은 무슨~ 단단하니 좋구먼. 꼭 목침 배는 것 같아.크큭.."
"그렇게..딱딱해?"
"응. 하지만 뭐 든든하니 좋아. 아..잠 온다."
"그래. 잘 자."
"응. 잘 자. 다음에도 우리 같이 자자. 응?"
"왜?"
잠결에 현수의 말은 점점 힘을 잃고 속으로만 파고들었지만 재준은 현수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며 한마디의 말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편하고 좋아서.."
"나보고 죽부인 하라고?"
"죽부인이면 어때..감지덕지지..안..그래?"
"그래. 죽부인이면 어떻고 목침이면 어때."
어느새 깊이 잠이 들어버린 현수를 보았기에 재준은 과감히 말할 수 있었다.
"네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난 상관없어."
**
잠은 안 오지만 현수의 곁을 떠나기 싫어 현수의 자는 모습만을 계속 보고 있을 때였다. 현수의 전화가 울렸다. 혹시 깰까 봐 현수를 힐끗 보았지만
깊은 꿈나라에 빠진 듯 일어날 기색은 없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두 시.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현수의 핸드폰 폴더를 여니 발신자는 김 정희다.
"이 현수씨 핸드폰입니다."
- 아.. 현수씨 없나요?
"네. 지금 자고 있습니다. 누구십니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꾸했다. 이 늦은 시간에 전화질을 하다니.. 상식이 있는 여자라 여겼건만.. 재준은 울컥 치미는 속을 겨우 달래어 냉정하게
말을 할 수가 있었다.
- 도..재준씨군요.
상대가 누구인지 감을 잡은 정희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침대를 바라보니 깊은 잠에 빠진 현수의 뽀얀 얼굴이 보였다.
이런 날이 드문데 단 일 분이라도 시간 할애할 가치조차도 없는 여자 때문에 방해받기 싫었다.
- 어디예요?
"알아서 뭐합니까. 별 용건이 없으면.."
- 자, 잠깐만요!!
"......."
- 현수씨 안 자면 좀 바꿔주세요
"현수 잡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 훗, 이제 드디어 소원 성취했나 보군요.
비꼬는 기색이 완연한 말투에 재준은 현수에게서 시선을 돌려 마치 창 너머에 정희가 있는 듯 창을 노려보면서 대답을 했다.
"무슨 말입니까?"
-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현수랑 같이 자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설마 제가 도 재준 당신의 검은 속 모르는 줄 알았나요?
"왜 갑자기 전화해서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지만 그쪽, 현수와 관계 끝났는 거 아닌가?"
- 그래요. 헤어졌죠. 그런데 오늘 가만히 생각해보니깐 억울해서 말이에요. 뭔가 이상한 점도 있고 해서 현수씨에게 도 재준이라는 친구에 대해 좀더
주의를 기울이라는 조언을 해주려고 전화를 했는데 이거 타이밍이 너무 안 맞았군요
"주의라.."
- 여태 주식 잘 돌리던 아버지가 제가 현수씨 만나고부터 계속 땅으로 곤두박질을 치는 거나.. 큰 형부 멀쩡하던 사업이 갑자기 흔들리는 거나..
뭔가 이상해서 말이죠. 도 재준씨. 현수씨 말대로 정말 블루라는 그 바만 있는 게 맞나요?
"대답할 가치도 없군."
- 그때 두 번째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 그거 우연이 아니죠? 그때 내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요? 아버지 주식 잘 되냐고 물었었죠?
후. 그게 이제 기억이 나지 뭐예요. 현수씨에게도 귀찮아서 그냥 직장에 다닌다고 했었는데 기껏해야 스물 평도 안 되는 바의 주인이 어떻게 알았나
모르겠군요.
혹시 현수가 깰지 몰라 재준은 조용히 테라스로 나왔다. 시원한 밤 공기를 맡으며 담배를 하나 물었다. 길게 내뿜는 연기가 눈앞에서 흐트러지는
것을 물끄러미 보면서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런 시덥지 않은 여자에게 시시콜콜 자신의 계획을 다 말하는 것도 우스운 것이다. 가치가 없는
여자였지만 여기서 전화를 끊어버리면 분명 또 전화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내하면서 핸드폰을 내려놓지 않고 들고 있었다.
- 당신! 현수씨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맞지요? 내 짐작이 틀림이 없어. 어쩜..세상에... 현수씨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이제 그만 입 다물지그래?"
-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맞나 보네? 어떻게... 어떻게..그런.. 어휴, 징그러워!!
머리가 열 달린 뱀이라도 본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어떻게만 연발하는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어냈다. 끊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의 갈등 후
전화기를 귀에 갖다대니 그 어떻게가 이번에는 징그럽다는 구체적인 감정표현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그쪽 아버지란 분.."
수다가 뚝 끊어져 버렸다. 예민한 부분임에 틀림이 없긴 없나 보다. 싸늘한 비소가 재준의 입가에 걸렸다.
"주식으로 그 퇴직금들 다 탕진하지 않으셨나 보군. 그래, 다 탕진하게 한 번 해볼까? 작은 형부는 직장 잘 다니고 있나? 그 작은 오퍼상에 제법 큰
바이어가 생겼다는 말은 하지 않았나보군. 남동생은 어때? 학교는 잘 다니고? 이거, 다들 잘 지내는지 안부가 궁금한 걸. 오늘의 안부인사와 내일의
안부인사가 반대되게 한 번 해볼까? 터진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 군."
-다..당신이 맞았어!!! 세상에.. 우리 아버지, 형부, 모두 당신이 한 짓이었어!!!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하다니. 설마 설마 했는데
그게 사실이었어!!! 세상에.. 무서운 사람이야 당신!!! 미쳤어. 당신 미쳤다고!!!!!
"사랑은 미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나만큼 현수에게 미칠 각오 안 되어있다면 포기해. 네 그 미치지도 않은 알량한 감정 하나 때문에
네 가족이 다치는 꼴 보기 싫으면 말이야."
- 남자끼리..사랑이라니.. 이건 사랑하는 게 아니라 미친 거라고!! 그게 정상이야?? 정상이냐고?? 그리고 뒷조사한 것도 기가 막히지만 손까지 쓰다니..
이건 집착이라고. 당신이 하는 건 모두 정상이 아니야!!! 멀쩡한 현수씨까지 게이 만들 셈이야?
".........."
- 현수씨 절대 게이 안 될 사람이야. 당신도 알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안 되는 일에 용을 쓰는 거야? 그럼 나 만나기 전 현수씨한테 접근하는
여자들 다 이런 식으로 처리했던 거야? 나처럼?? 왜??? 어차피 현수씨 안 되는 거 알면서 잘 살게 내버려두지 왜 그랬어? 자기 것이 안 되니 남도
못 준다. 그거야?
생존본능이니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으니깐.
목이 졸리면 목을 보호하기 위해 자동으로 손이 올라가고 물속에 오래 있으면 몸이 자동으로 공기를 찾아 움직인다.
이유 따위는 원래 없다. 본능이니깐.
멍하니 현수의 곁에 다가가는 여자들 보고 있으니 목이 아프고 숨이 가빠지는 걸 어떻게 하나.
몸이, 머리가 자동으로 생존을 위해 움직여질 뿐이었다.
"본능이니깐.."
- 뭐?
"내가 살아가는 본능이다. 그건. 나만큼 현수에게 미쳐있는 여자라면 양보할 거다. 속이 터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현수가 좋아하고 그 여자 현수에게
목숨이라도 내 놓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하면.. 양보해. 건드리지 않아."
- 요즘 세상에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 사람 어디에 있다고.. "
"..........있어."
- 맙소사.....
"그러니 앞으로 전화하지 마라. 김 정희. 앞으로 다시는 현수에게 전화하지 마. 나처럼 미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처럼 목숨 내놓지 않으면
전화도 하지 마."
현명한 여자니 다시 전화하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밧데리마저 분리를 하고서야 재준은 현수의 곁에 누울 수 있었다.
곤한 숨소리, 들썩이는 가슴, 흐트러진 머리칼, 기분 좋은 꿈을 꾸는 듯 살짝 미소 짓는 입가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언젠가는 놓아줄게. 양보할게. 꼭...보내줄게..현수야.. "
주인이 뱉은 말에 맹렬히 반대하는 가슴을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위로했다. 그리고 세뇌를 다시 시켜본다.
"네가 사랑하는 여자라면 절대 건드리지 않아. 보호해줄게. 네가 원하는 일 절대 거스르지 않아. 네 여자.. 지켜줄게....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줄게.. 그 여자가 생기기전까지만.. 내가 네 곁에 있는 거 괜찮지? 기분...안 나쁘지?"
대답대신 히죽 웃으며 가슴을 파고 드는 현수의 모습을 보며 재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얼그러지며 피었다.
"너 때문에 웃는다. 너 때문에 나 울어. 너 때문에 나 행복하고 너 때문에 나 슬프다. 너 때문에 나 살고 너 때문에...나 죽을 것 같아....."
언제나 그랬듯 재준은 현수의 곁에서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침 햇살이 쳐들어올 때까지 재준의 눈은 현수의 얼굴을 더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