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12]
"으...."
흐릿한 정신이 서서히 맑아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온몸의 감각이 독한 통각을 호소하는 정신없는 가운데 한 줄기의 빛처럼 초조함과 안타까움이
잔뜩 스며든 목소리 하나가 치열한 통각 가운데를 파고들었다.
점차 시야가 밝아오자 불쑥 드러난 얼굴은 자신이 마음 속으로 불렀던 그 사람임을 알고는 안도의 웃음을 흘러 나왔다.
재준이 싸움을 잘한다 못한다를 떠나서 이상하게 현수에게 있어서 재준은 완벽한 가드이자 튼실한 버팀목처럼 여겨졌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허락을 맡은 것처럼 재준만 보면 좋다.
"현수야."
걱정스러운 듯한 그의 음성에 현수는 힘겹게 손을 들었고 현수의 손만 노리고 있었는지 단번에 맞잡는 뜨거운 체온에 현수는 새삼 재준에게 미안했다.
자신은 재준에게 매번 이렇게 걱정만 끼친다. 그러니 그 아가씨들이 거추장스러운 짐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일 테다.
"정신 들어? 물 줄까? 필요한 거 없어?"
"응..괜..찮아. 아..병원...이네?"
깔끔한 화이트 톤으로 마감이 된 천장과 주위를 둘러보니 일 인실이다. 삭신이 쑤셔오기는 하지만 다행이 공중에 매달린 다리나 석고는 없으니
생각보다 심각한 중상은 아닌 듯싶었다. 다행이다. 만약 오래 입원을 하게 되는 경우라면 대구의 어머니께 말씀을 안 드리려야 안 드릴 수가 없다.
"놀랬지?"
"그걸 말이라고 해."
이미 꼼짝달싹 못하게 매인 몸이건만 어디로 달아나는 사람을 잡듯 현수의 두 손을 꼭 잡은 재준의 손이 전달하는 것은 진심어린 걱정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현수는 뼈마디마디가 쑤셔오건만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안하다. 현수야."
"응?"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한 사람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또 나왔다. 어쩐지 요즘은 자주 듣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현수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윽-하는 신음이 저절로 나오자 재준이 놀라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등을 받쳐주었다.
등에 푹신한 베개를 받혀주고 발을 삐죽 나오게 한 이불을 펴서 찬 공기 한 줌도 현수에게 미치지 못하게 한다.
"네가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다 내가 감초처럼 나서서 그런 건데."
"그래도..."
"블루에서 그래서 그런 거야?"
"뭐 그것도 있고. "
"응?"
"이사할래? 내가 가까이 있는 곳으로."
현수는 재준의 걱정을 덜기 위해 손을 붕붕 흔들어 보였다.
"나 말짱한데 무슨 소리야?"
"너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야. 아무래도 가까이에서 너 출퇴근도 시켜주고.."
한 번씩 보이는 이런 과잉보호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 곧 죽을 것 같대?"
"응?"
"아니지?"
"현수야.."
"어떨 땐 새가슴이라니깐 정말. 야, 너 없을 때 이 정도 다쳤다고 그렇게 놀란 얼굴로 당장 네 집 근처로 이사 오라고 하는 게 정상이냐?
생긴 건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하는 말보면 완전 영감탱이야. 진짜. 어이, 도 재준씨. 주름살 생긴다. 인상 펴. 응?"
이래서 가끔 다치는 순간 아픔보다는 재준이 먼저 생각나기도 한다. 이 녀석 이번에는 또 얼마나 놀랄까..라는.
비록 현수가 싸움질을 즐겨 자주 다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내가 되어 한 두 번씩 몸에 스크래치정도 나기 마련인데 그럴 때마다 펄쩍펄쩍 뛰면서
이렇게 놀라는 것이다. 대범하고 비정상적인 싸움 능력을 지닌 녀석의 반응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어울리지 않은 행동이었다.
"나 눈뜨고 바로 이렇게 앉을 정도면 썩 괜찮은 편 아냐?"
"그렇긴 하지만.."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어미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재준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것으로 현수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다가오는 검은 머리칼 위에
손을 뻗어 조용히 쓰다듬었다. 매번 재준이 현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바뀌어 현수가 재준을 위로하듯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런 맛에 머리를
쓰다듬는 구나..싶은 생각이 들었다.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지금 내가 누워있는 곳이 딱딱한 병원침대가 아닌 푸른 잔디가 깔린 공원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의자에 걸터앉아 시트에 머리를 숙이는 재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니 자신이 깨어나지 못한 시간 동안 재준이 보냈을 시간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안돼!!!"
현수의 손에 축 늘어져 있던 재준의 목이 치켜세우며 반발을 했다.
"최소한 이틀은 병원에서 조리해."
"조리는 무슨.. 그럼 내일. 좀 쑤시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몸은 개운해. 나 괜찮다고. 응?"
"일단 의사에게 한 번 물어보고. 하지만 의사가 오늘 퇴원하라고 해도 오늘은 절대 안돼!!"
"칫."
"이렇게....이렇게......다치게 하다니..."
솥뚜껑 같다고 놀린 큼지막한 손이 현수 얼굴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깃털로 간질이듯 살며시 쓰다듬는 손길에 현수는 가슴이 일렁거렸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무식한 깡패 녀석이라고 도무지 믿기지 않을 부드러운 손길이다. 걱정을 끼쳐 미안한 마음 가운데 기분이 좋았다.
비록 은영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주는 모습에 현수는 더 심하게 다쳤다면?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할 정도로 만족했다.
"은영씨는 어쩌고 이러고 있어? 데이트 안 해?"
"아..."
곰곰히 생각하니 우진과 술 마신 게 토요일이었다. 그럼 일요일 낮 시간일 것 같은 조도에 밤새 병실에 있었을 재준에게 물었지만 웃음만 돌아왔다.
"헤어졌어."
"뭐??? 왜?? 사귄 지 얼마 되었다고..."
"아.. 그게....."
"왜!! 왜 헤어졌어?"
예쁘고 조신 해보였다. 비록 말은 좀 앙칼스럽게 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 욕심도 없이 사랑을 말하나 싶어 속은 쓰리지만 다부진 여자라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재준과 더 없이 잘 어울리는 여자이기에 질투가 났지만 스스로 좁은 속을 나무래며 진심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헤어졌단다.
동창회 때 은영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그게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헤어졌단 말인가.
"은영씨가 헤어지자고 했어?"
"아니. 내가."
"미쳤다. 왜?? 사랑한다며."
재준의 입에서 나온 말의 무게를 짐작해보면 길거리에 널린 흔한 '사랑해'일지라도 묵직한데 벌써 돌아섰다고 생각하니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 현수는 재차 물었다.
"이유가 뭐야? 얼마 전까지 사랑한다고 했었잖아."
"아..그게....말이 많아서 말이야."
"에??"
말이 많은 건 오히려 현수였다. 어디로 보나 꾀가 많을 듯한 은영이 재준의 비위를 못 맞추어 조잘거리는 스타일은 아닌 듯했다.
더군다나 재준의 앞에서는 요조숙녀이지 않았던가. 현수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씨익 웃는 얼굴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가왔다.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딴 여자는. 물 줄까? 아, 의사한테 먼저 가보고 올게. 너 깨어났다고 말해줘야지. 잠깐 기다려."
병실을 나서는 재준의 뒷모습을 보며 현수는 웃음을 속으로 터뜨렸다. 친구의 이별에 이렇게 기뻐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웃음이 참아지질 않은 걸
어쩌겠는가.
똑똑
의사도 이제 괜찮다고 조리만 하면 낫는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걱정스런 듯 살피는 재준의 눈이 부담스러워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버티는 걸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두었다. 슬슬 무료해지는 시간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재준에게 사달라고 한 책을 보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병실로 들어섰다.
"아니, 어머니 아니세요??"
옆에 앉아 있던 재준이 눈에 띌 정도로 인상을 굳히며 일어섰지만 현수의 반색에 뭐라 불만을 토하지는 못했다.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방해라니요 무슨. 이리로 앉으세요."
재준이 마지못해 자리를 비꼈지만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는 여자의 뒤편에서 노려보는 걸 끝내지는 않았다.
"몸은 좀 어때? 지난번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도 못 와봐서 걱정했는데 이번에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마치 자신 때문인 양 꿈틀거리는 재준의 양미간에 주름이 더 생기는 것을 보며 현수는 재준에게 눈을 맞추었다.
"어머니 오셨는데 음료수라도 좀 사와."
"아니, 괜찮아. 곧 갈 건데 뭘. 재준아 괜찮으니.."
"괜찮긴요. 어머니 오셨는데 음료수라도 대접해드려야 제가 마음이 편한 걸요. 재준아. 뭐해."
"뭐하러. 곧 간다잖아."
"도 재준!!!"
".........."
"안 가?"
"내일 퇴원할 건데 음료수 사 놓아서 뭐하게."
"그럼 자판기에라도 갔다 오면 되잖아."
"칫."
제법 튕기다가 현수의 정색한 얼굴을 보고서야 어쩔 수 없이 병실을 나서는 재준의 뒷모습을 보며 재준의 계모인 손여사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후훗..역시 현수뿐이네?"
"네? 뭐가요??"
"재준일 다룰 수 있는 사람 말이야."
"다들 잘 몰라서 그러는데 준이 알고 보면 착하고 말도 잘 들어요. 뭐, 가끔 속 썩이기도 하지만"
"아냐. 그건 현수가 잘 몰라서 그래."
"네?"
'잘 모른다' 라는 말로 현수의 심장 한 가운데를 꾹 찌렀는 줄 모르는 손여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재준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아. 그 애가 귀를 기울이는 다른 사람의 말이란 현수 말 뿐일걸."
"헤어졌다고 하지만.. 은영씨도 있었는걸요. 뭘. 아무렴 제 말보다는 사랑했던 은영씨말에 더 귀를 기울였을 거예요."
"은영씨? 누구?"
"에..모르셨구나. 한 달 정도 사귄 재준이 애인요."
"......애인?? 누군지 모르겠지만 재준이에게는 현수가 그 애인보다 더 특별했을 거야."
숨겼던 욕심이 원하는 말에 두근거렸다. 현수가 내심 원했던 게 그거였다. 애인보다 자신을 우선으로 대해주는 것. 그것이 친한 친구를 빼앗긴
상실감 때문인지 정체 모를 질투심인지 알 수 없다. 마치 그런 현수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손여사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재준이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지. 그 양반이라고 해도 싫다는 녀석 저렇게 심부름시키지 못할 거야. 네가 말하는 그
애인이라는 여자도 마찬가지고. 이 세상에서 도 재준에게 심부름시킬 수 있는 사람은 네가 유일무이일 거다."
"그..그런가.."
"괜히 별당 아씨와 머슴이라고 놀리겠어?"
생각지도 못한 별명에 현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동창생들이나 형준이 가끔 놀리는 별명이었는데 재준의 어머니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
"어..어머니.."
"후훗. 그러니 우리 머슴 마음 졸이게 하지 말고 몸조심해."
"우우....제발 하지 마세요~웅.."
"어머, 내가 우리 아씨 마음 상하게 해버렸나??"
"어머니이~"
벌컥 문이 열리면서 저승사자와 같은 얼굴이 병실에 들어오자 화기 애매했던 분위기가 뚝 끊어지고 말았다.
"나 그만 가볼게."
"앗, 음료수라도 하나 드시고 가세요. 네?"
"괜찮아. 몸조리 잘하고 다 나으면 한 번 놀러 와."
"네. 가기 전에 미리 말씀드릴게요. 반찬 좀 주실 거죠?"
"후훗..그래. 걱정하지 말고 그럼 재준이도 수고하고"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린 재준의 옆구리를 찌르자 마지못해 재준이 고개만 까닥거리는 걸 웃는 얼굴로 바라보던 손여사가 병실에서 사라지자마자
재준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냐?"
"그런 너는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네 어머니잖아."
"어머니는 무슨"
"아니긴 뭐가 아냐. 나이 그만큼 먹어도 계모라고 구박하는 거야?"
"흠.."
"왜 그렇게 눈엣가시처럼 꼬와하는 거야? 좋은 분이잖아. 잘해드려. 나 같으면 업어 드리겠네 뭐."
"어머니... 외로우신 것 같아서 그래?"
눈치도 빠른 녀석의 말에 정곡이 찔러 현수는 난처하게 웃음을 지었다. 혼자가 되신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가까이에 살면 모를까 대구에 사시고 난
다음에는 어머니의 재혼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영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 드신 분들끼리 오붓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보기가 좋아. 나이가 들어서도 사랑할 수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사람 나름이겠지."
"응. 그렇겠지. 엄마가 생각이 없으니 나라도 빨리 장가가서 어머니 모셔야 할 텐데..."
"...........어. 그래...야지."
병실에서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던 재준이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밤 9시경에 병실을 나가고 난 뒤 현수는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갑자기 이틀 머무르게 된 병실치고는 손님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현수는 어딘가 낯익은 듯한 남자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들어서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누구??"
"아..진짜. 짱나네."
손님은 이 상황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은 지 연신 중얼거리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당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현수는 그냥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현수가 그 손님의 정체를 안 것과 느닷없이 나온 손님의 사과는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미안하게 되었어!! 블루에서의 일, 고의는 아니야. "
"아...그..사기꾼."
"야!! 사기꾼이라닛!!! 내가 뭘 사기 쳤다는 거야?"
"아니 그럼 사기꾼이 아니란 겁니까? 멀쩡한 사람 변태 게이 만들어 놓고도 사기꾼이 아닙니까?"
"그러니깐 그건 우연한 돌발사고와 같은 거라고!! 그러게 왜 남의 일에 끼어들고 그래? 그러지 않았음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기가 막혀. 그러니깐..그쪽에서 지금 저에게 사과하러 오신 거 맞지요?"
"흠. 미안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뻔뻔한 거죠?"
"뭐?"
"나이도 많아 보이지도 않은데 반말에다가 고함 수준의 사과가 정말 사과입니까? 댁의 말대로 제가 주제넘게 끼어든 게 맞으니 제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병원까지 찾아오게 된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돌아가 주십시요. 그리고 전 이런 사과 받지 않겠습니다."
"야!!! 너!!!"
짙은 갈색 톤의 가죽재킷에 유연하게 빠진 다리의 곡선이 여실히 드러나 보이는 가죽바지를 입었지만 머리칼은 지난번과 달리 얌전한 검은빛이었다.
아니 오히려 짙은 검은 색깔의 머리칼이 더 선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 미모의 얼굴이지만 현수는 이 사내의 사과에 진심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것에
불쾌해 외면했다.
잘 생긴 걸로 치자면 재준이 더 남성적이고 잘 빠졌다. 이 사내가 여우같이 화려하고 날렵하게 생겼다면 재준은 밀림의 그늘만 조용히 다니는 표범과
같은 분위기다. 조용하지만 이빨을 드러내면 날카롭고 잔인하다. 그리고 친구라는 입장에서 봐도 가끔 심장이 비정상적인 박동을 일으킬 만큼
매혹적이다. 평소 같으면 눈길이 갔을 재준과 대조적인 남성미지만 현수는 고개를 돌려 어두움으로 물들여져 밖이 보이기는커녕 거울처럼 병실 안이
훤히 보이는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내는 간접적인 축객령을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 나도 너 같은 놈에게 사과하기 싫었어!! 젠장!!! 안 오는 건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던 현수였지만 연이은 남자의 투덜거림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너 같은 놈보다 내가 백 배 낫지. 도대체 재준씨는 이런 녀석 뭘 보고 그렇게 끼고 도는 거야. 정말 참을 수가 없군!!! 얼굴이 괜찮기를 해.
몸매가 잘빠지길 해!!"
"당신, 재준이 알아?"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환자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방구석에서 자신의 행보가 들킬까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개미 한 마리를 보는 듯 조롱기가 잔뜩
서려있었다.
"당연하지! 물론 너보다는 오래되진 않았지만 최소한 너보다는 내가 더 재준씨를 잘 알고 있다는 건 확실하지."
격해진 감정에는 존대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듣기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짜증부터 솟구친다. 현수에게는 재준을 모른다는 말이 그랬다.
다들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몇 달 사이에 연달아 그 말을 일삼는다. 오늘만 해도 재준의 어머니가 그런 뉘앙스로 말을 했었다.
"이봐. 형씨. 나 그 말 상당히 기분 안 좋거든? 이래 봬도 난 재준이 십 년이 넘는 친구야.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로 말이지. 그런데 내가 댁보다
재준일 모른다고?? "
"훗, 같잖군. 그래, 말 한 번 해보시지? 재준씨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아니, 내가 말해볼까? 재준씨 회사 어디에 있는 줄이나 알아? 십년지기씨?
"청담동 쪽에 사무실 있는 거 알아."
불안하게 말이 흔들렸다. 재준이 원래 구구절절 말하는 스타일이 아닌데다가 현수 역시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이 아니어서 몇 년 전에 우연히 청담동
근처에서 민의 일행을 보게 되어 그쪽 사무실에 가본 게 다인 현수였다. 겨우 15평 정도의 사무실 용도를 물은 적이 있는데 재준은 블루에서도
가깝고 밑의 아이들 아지트라고 대답을 해 준 적이 있었다.
역시 깡패직업을 못 버렸다고 타박을 하자 웃으며 깡패는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번복을 하던 재준이었다.
"청담동?? 웃겨. 그 쥐구멍만한 사무실 말하는 건 아닐 테지?"
현수가 뭔가 숨겨진 듯한 이야기를 더 캐묻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 사내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훗. 그럼, 이것도 알겠네? 십년지기씨."
사내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서서히 다가오는 사내의 그림자가 현수의 다리를 덮는 것을 바라보던 현수는 불길한 예감에 사내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눈은 차갑고 불쾌감으로 잔뜩 얼려져 있었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 재준씨. 게이인 것도 알아?"
**
몇 달 만에 손에 피를 묻히지만 예전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기분이 나빠졌다. 이 더러운 것들이 현수의 몸에 손을
대었다고 생각을 하니 아무리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들어도 속이 시원해지지가 않는다.
"커....헉..죄....자...잘....못..."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가 된 두 사람은 무의식중에 잘못을 구하고 있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다.
무차별한 말 없는 폭력이 가끔 멈추어지지만 잠시 안도의 숨을 내돌리고 있자면 곧바로 다시 폭력이 가해진다. 차라리 연달아 맞는 게 낫지 잠깐
쉬었다가 다가오는 폭력은 그 전의 고통까지 그대로 안고 와 고통을 배로 느끼게 했다.
재준은 준비된 의자에 털썩 앉으며 두식이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묻은 피를 닦았다. 손을 내미니 민이 준비된 서류를 손위에 올려놓았다.
"흠.. 박 석수. 나이는 26세. 경남 마산출생. 호~ 어머니의 강압에 못 이겨 결혼까지 했지만 남자가 더 좋아 이태원 뒷골목을 전전하는 일용근로자라.
아이까지 있군. 세살박이라.. 한창 이쁠 때겠는 걸."
고통 속에서도 무엇을 상상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석수라는 사내의 눈이 재준에게 호소를 하고 있지만 재준의 눈은 서류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이 무식. 허. 진짜 무식한 이름이군. 박 석수와는 **고등학교 동창. 역시 일용근로자로 일하면서 여동생 대학교를 보내는 훌륭한 오빠라..좋아.
하지만 보통 사내 맛으로 만족을 못 할 만큼 골수 변태인가 보군. 동생도 알고 있나?"
눈물 콧물까지 줄줄 흘리는 두 사내를 내려다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보기도 역겨운 녀석들을 직접 다루느라 현수의 병실을 비워둘 수는 없다.
하지만 팔다리 조금(?) 부러뜨린 걸로 단죄를 하기에 부족한 느낌이 들어 민에게 지시를 내리려고 할 때 재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것도 핫라인의 핸드폰이다.
그 핸드폰을 이용하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현수. 형준. 민. 상준.
발신자는 병원에 있을 상준이었다.
"혀..형님."
"현수에게 무슨 일 생겼나?"
"그게.. 퇴원하신다고 막무가내로 옷을 갈아 입으셔서..제가 아무리 만류를 해도 듣지 않으십니다."
"현수 어딨어? 바꿔."
"네."
"현수야-"
전화가 바뀌는 소리가 들려오고 현수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지만 재준의 부름에 대답이 없었다.
"현수야-"
- .............
"이 현수!!!!"
재준은 초조함에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현수답지 않은 침묵의 원인을 알 길이 없어 재준은 급하게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뒤를 따르던 두식이 급하게 차문을 열어주면서 운전석에 앉았고 민도 재빨리 조수석에 앉으며 차문을 닫았다. 출발하라는 손 지시를 내리려고
할 때 재준의 귀에 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제로는 이, 삼분 정도 안 걸렸겠지만 그동안 재준은 마치 잃어버린 혈육을 찾는 사람처럼 조급하게
현수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렀다.
- 도 재준.
"왜? 무슨 일 있어? 너 목소리 왜 그래? 지금 출발하면.."
-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흔들리는 음성에 재준은 차를 출발시키려는 두식을 제재하고 차 밖으로 나왔다. 현수의 떨리는 음성보다 더 거세게 심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희망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한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그랬듯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직격탄을 날리고 있었다.
"...............거짓말하는 거."
- 그래, 알지? 알고 있지?
"그래. 알아. 현수야..너 왜.."
- 그럼 내가 묻는 질문에 너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겠네.
"무슨 일이야? 응? 무슨 일이야. 현수야. 전화하지 말고 내가 바로 갈게. 십 분도 안 걸리.."
- 너... 게이....야?
와장창 하고 꿈이 깨어졌다. 동화는 끝이 났다. 손에 잡힐 것만 같았던 무지개는 동그랗게 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태양에 의해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는 것처럼.
이제 머슴놀이가 끝났음을 재준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조바심내며 아씨를 훔쳐보던 가능성마저 빼앗긴 채 아씨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만 하는 그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조차 없이 갑작스럽게 닥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손이 떨릴 정도로 온몸은 잔뜩 긴장하고 있지만 진동을 일으키는 가슴 한구석에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달려드는 용기가 슬금 일어섰다.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고백하고 싶었던 용기가 이 불안한 기회를 잡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준은 현수에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게이가...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뜻하는 단어라면, 맞아. 나 게이야."
- ...........언제부터
"한.. 십 이년 되었지."
눈치채 주길 바란 과감한 숫자였다. 그 숫자와 만남의 숫자를 매치시킬 현수의 상상력에 기대해본다. 그래 본들 뭐가 달라지겠냐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알아주길 바라는 기대심이 아직까지 재준에게 남아 있었다. 소심함은 버리지 못하면서 말이다.
- 그..그렇게 오랫동안... 날 속인 거 였어?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오랫동안????
"현수야.."
- 나 병원에서 나갈 거야. 나중에 뒷수속해줘. 그리고 집으로도 찾아오지 마!!
"현수야!! 내 말 좀 들어줘!!"
- 네 말? 무슨 말? 게이라는 거 거짓말이라는 거야?
현수에게 수많은 거짓말을 하면서 살았었다. 친구라고 거짓말하고 현수네 집 앞을 서성거리면서 전화기로는 바쁘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마치 밥을 먹듯 그렇게 그를 기만하고 자신의 용기를 무시하면서 거짓말만을 일삼았었다. 하지만.. 현수를 사랑하는 사실만은 거짓말하고 싶지 않은
재준은 눈을 감으며 현수가 원하지 않을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아니, 남자를 사랑하는 건 맞아."
- 그것도 십 년이 넘게???
".........그래."
- 하. 그래라는 말이 지금 나온단 말이야?? 내가 어떻게 널... 내가 널 얼마나 믿고 신용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네가!! 내가 거짓말에 진절머리
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네가!!! 나에게!!!!!!!
"..............."
-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응?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도 재준이가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여자 소개해주고 사귀는 사람 없다고
한 거짓말들은 다 뭐냐고!! 뭐였어!! 날 그렇게 놀리니 재미있디? 응? 재미있었어? 그 사람처럼 나 가지고 노니깐 그게 그렇게 재미있디?? 그랬어????
"현수야.."
- 내가 몰랐다면..너 평생 나한테 거짓말할 작정이었지? 그렇지? 대답해 봐!!!!
".........."
- 하, 부정도 안 하는군. 내가..그렇게 너한테 가치가 없었어? 내가 그렇게 네 취향 이해 못 할 만큼 속이 좁은 친구였어? 도대체 날 얼마만큼
무시했기에 그렇게 뻔뻔하게 오랫동안 속인 거야? 아냐 아냐, 바보는 나지 누굴 탓해. 그래, 내가 바보였어. 넌 절대로 나에게 거짓말 따위 하지
않을 줄 알고 믿었던 내가 바보지. 이 세상에서 누굴 믿겠다고.. 하하하..우습다. 너마저 날 그렇게 우습게 보다니.
"널 우습게 본 게 아니라 그건.."
- 입 닥쳐!!! 내가 바보인 건 맞지만 아직도 내가 널 용서할 착한 네 친구라는 착각 하지 마!!! 전화도 하지 마!! 내가 나중에 전화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고!!!
겨우 기지개를 켜던 작은 용기가 연락도 하지 말라는 소리에 꼬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 두려움이 곱절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 전화도 하지 않을게. 언제..언제까지 기다리면...될까?"
- 나도 몰라!!!!
따뜻한 인사말도 없이 귀가 쩌렁 울리는 고함소리와 함께 끊어버린 핸드폰에서는 기계음만 들려오고 있지만 재준은 전화를 끊지 못하고 계속 귀에
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해줘. 다시 한 번만.. 다시 한 번 말해줘.
나 용서한다고, 나 이해한다고, 나 사랑한다고.....
나 잘못 들었거든? 잘 안 들리거든? 다시 말해줄래? 현수야...
넌 언제쯤 말해줄 수 있을까.
이 전화기를 끊지 않고 계속 들고 있으면 네 목소리가 다시 들려올까?
다시 나에게 그 봄볕 아지랑이와 같은 네 목소리 들을 수 있을까?
이걸 끊으면 네 목소리 다시 못 듣는 건 아니겠지?
나....너와 다시 이야기하고 웃고 장난치며...그런.. 날이 다시 올 수 있겠지?
그렇지? 현수야...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에 재준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