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거짓말 [13] (13/28)

하얀 거짓말 [13]

"게이가...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뜻하는 단어라면, 맞아. 나 게이다."

"...........언제부터"

"한.. 십이년 되었지."

그렇게 말했었다. 인연이라는 붉은 실이 닿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믿고 의지하고 기대었던 사람이 십 이년 동안이나 자신의 신뢰를 비웃으며 

거짓말을 했다고 대답했다.

화가 솟구쳐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는 통보와 함께 연락이 끊어진 것이 벌써 일주일째다.

길들여진다는 것이, 습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깨달으며 현수는 시계를 향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들어왔건만 

습관처럼 샤워까지 마치고 침대에 앉은 시간은 칼 같이 11시 30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재준와의 12시 통화를 한 것도 기억이 안 날만큼 오래되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현수의 입에서 깨달음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맞다. 그때부터였지!"

언젠가 재준이 한 달 가까이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매일 병원에 가긴 했지만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왔었다. 하지만 밤 시간이 

심심하다고 투정부리는 녀석 때문에 집에 도착한 시간인 12시 즘에 현수가 전화를 해주었다. 그때부터 시작한 전화가 퇴원 후 재준이 그동안의 

답례라고 말하며 현수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삼일이 되면서 점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져버려서 

이제는 전화를 하지 않으면 어색하고 꼭 뭔가 빼먹은 듯한 느낌마저 들기까지 한다. 

집 전화기로 매번 통화하다보니 핸드폰의 잡음과 거리감이 있는 듯한 핸드폰의 통화감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렇게 뗄래야 뗄 수 없는 일상생활 속에 흠뻑 젖을 만큼 좋은 녀석이었다. 

따뜻하게 젖어들던 가슴이 화들짝 놀라며 짜증을 부린다.

"하지만 너...정말 심했어."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을 툭 밀치며 현수가 중얼거렸다. 배신도 그런 배신이 없다. 비록 일주일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 분노에 

현수는 부르르 떨었다.

믿음에 대한 배신으로 마음고생을 한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녀석이 그러니 더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잠이 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을 때 전화가 울려 무심결에 시계를 바라보았다. 12시 정각. 

하지만 재준은 아니었다. 재준이라면 집 전화로 할 테고 울려대는 핸드폰이 가르쳐준 발신자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네가 웬일이냐?"

"자고 있었어?"

"아니."

"잠깐 나올래? 집 앞으로 갈게"

"왜"

"재준이 때문에 그래."

형준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다. 자신의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은 판국에 재준의 친구인 형준을 

만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재준이 형준을 속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현수에게 있었고 그걸 확인해보고 싶었기에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도착한 지 꽤 되었는지 형준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빈 커피잔이 투명한 유리 테이블 위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여유로운지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기댄 채 가볍게 손을 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형준의 모습이 느긋해 보여 현수는 다시 돌아갈까 

라는 고민마저 했다. 이쪽은 감정적으로 바짝 메말라 가슴이 쩍쩍 갈라져 목을 축이지 않으면 한순간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긋 웃는 얼굴이 보기 싫었다.

제대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통유리로 된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현수는 자리에 앉았다.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해. 내일 휴무 내었다며?"

"모르는 게 없네."

말이 저절로 배배 꼬여졌다. 아마 일전에 느꼈던 재준이 가진 형준과 자신의 무게차이 때문일 것이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더 위세를 떠는 것처럼 

초라한 무게를 지닌 자신의 도발이 초라하게 여겨졌다.

"현희한테 들었어. 기분 안 나빴으면 좋겠다."

"사생활이 다 들통나는 게 좋기만 하겠어. 나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거든. 내가 좀 꼬깝게 이야기하더라도 네가 이해해."

"어. 사실 나 너한테 부탁 하나 할려고.."

"부탁이라니?"

"재준이 일로.."

"그전에..."

현수는 형준의 말부터 막으며 자신의 궁금증부터 먼저 풀었다. 아니 사실 이 자리는 오래전부터 현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자리일지도 모른다. 

극명한 차이를 몸으로 느끼기 싫어서 숨겼던 질문이었다. 

재준에게 있어서 이성을 좋아하는 것이 거짓이었고 동성을 좋아하는 것이 참이었다. 그렇다면.. 재준이 가장 의지하고 믿는 친구는 과연 누구일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유치한 저울놀이라 누군가 욕해도 상관이 없을 만큼 현수는 절박했다. 무엇이 절박한지 무얼 확인하고 싶은지 따위의 근본적인 물음표는 아예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눈앞에 놓인 명제의 해답을 얻고 싶었다.

도 재준, 네가 정말 좋아하고 믿는 친구는 형준이야, 아님 나야!!!!

재준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현수는 형준에게 물었다.

"내가 먼저 네게 물어봐도 될까?"

"아, 뭐 맘대로."

"너한테 재준이가 먼저 전화해서 술 마신 적 있어?"

"당연하지. 왜.."

"내가 기분이 좀 안 좋거든? 대답만 해줄래?"

"아효~ 우리 아씨 오늘 무서운데?"

"네 집에 아무 때나 들이닥칠 때도 있어? 연락도 없이 뜬금없이 말이야."

"음? 뭘 알고 싶은 거야?"

"대답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 깐죽거리는 얼굴에 뜨거운 커피라고 끼얹고 싶어졌다. 

뭐가 그리 여유가 있단 말인가. 자신은 애가 타서 죽겠는데.

"참내. 그래. 있어. 뭐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있는 일이야. 한 가지 양주도 아니고 골고루 섞어서 사들고 와서는 안주 내라고 생떼를 쓰기도 하고. 

그래서 언제 불시에 닥칠지 몰라서 여자들 집으로 안 데려와.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마지막이야."

"후훗, 우리 아씨는 정말 제멋대로라니깐. 네넵. 말씀하십쇼. 뭐든지 다 대답해드리지요."

"재준이..게이인거 너도 알아?"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상상했던 형준의 눈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현수를 바라보았다. 그 놀라움이 알고 있다는 건지 몰랐다는 건지 알 수 없어 

현수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되풀이했다.

"알았어? 몰랐어?"

"아....흠..."

"형준아!!"

"게이가....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재준이 게이 맞아. 알고 있었어."

똑같은 단어풀이에 현수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 불알친구란 건가.

"언제부터인지도 알아?"

"십 년도 더 되었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현수는 냉수 한 잔으로 진정되지 않은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가슴이 더워 연신 손부채 질을 해대었다.

재준에게 있어 형준의 각별함은 친구를 넘어선 형제와도 같았다. 스치듯 지나가는 말에 등을 맡길 수 있는 친구로 형준만을 꼽았었다. 

그 대답에 울컥해 재준에게 나도 등을 맡길 수 있는 친구냐고 묻자 난처한 듯 웃으며 넌 형준이만큼 싸움을 못하지 않느냐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던 

재준이었다.

싸움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성에 관한 질문이었는데 재준에게 있어 자신이 주는 믿음성이 그렇게 희박한가 싶어 섭섭하다고 말하며 한참 동안 그에게 

다그쳤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우야무야 넘어갔던 것들인데 동창회 때부터 불거져나온 불신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고 있는 것이다.

현희나  블루에서 만났던 말끔하게 생긴 사내나 심지어 재준의 어머니마저 입에 담았던 재준을 모른다는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래도 내가 재준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인 양 거들먹거린 게 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졌는지 알만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재준이 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현수에게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 녀석 지금 그러고 있는 원인은 알겠군."

"무슨 소리야."

"아아.. 뭐... 그 녀석도 썩 좋아 보이지 않더니 너도 마찬가지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기분 좋을 리가 있어? 믿음에 배신을 당했는데 너 같으면 기분이 좋겠어?"

"믿음이라.. 뭐에 대한 믿음?"

"십 년이나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그것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거짓말이라는 걸 아는 놈에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을 수도 있잖아."

"그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게 너한테는 말해도 되고 나한테는 말하면 안 되는 종류라는 거야?"

"뭐...그럴지도."

"그럼 나랑 친구를 왜 해!!!!"

"그러게 말이야."

"뭐????"

"아아..진정하라고. 결과만 보지 말고 과정도 가끔 보는 게 어때?"

"아무리 그럴싸한 과정이 있다고 해도 그 기간이 십 년이야. 십 년!!! 내가 요 근래 제일 많이 들었는 말이 뭔지 알아? 

나더러 다들 재준이를 모른대. 그게 말이 돼??"

"아무리 친한..음.. 사이라해도 백 프로 다 알 수는 없는 거잖아."

기가 막혀 현수는 형준을 노려보았다. 그럼 백 프로 다 아는 형준은 뭐란 말인가. 끓어오르는 감정을 삭히지 않고 현수는 따지듯 형준에게 대들었다.

"그래도 반은 알 만큼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어. 믿었다고!!! 다른 것도 아니고 그 정도면 재준이에게 중대한 일 아니야? 재준이네 집에 있는 수저 

개수를 몰라 섭섭하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 난 내가 오버해서 화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그 속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던가..그런 쪽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야. 나도 재준이가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이유? 이유가 뭔데?"

"에..그게 내가 말 할 수 있는..그런 게 아니라서..좀 곤란.."

"이유가 결과를 커버하는 것도 상한선이 있는 법이야. 얼마나 감추고 싶은 절실한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간이 한 두해라면 또 달라. 

자그마치 십 년이야. 십 년. 강산이 변한다는 그 세월 동안 내가 재준이와 보낸 시간이 다 농담만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해? 난 재준이에게 내 모든 

치부를 다 드러내었어. 그런데 그 믿음의 결과가 이거야. 그것도 재준이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가 재준이의 취향을 알 만큼 

재준이와 나의 우정이 작고 값어치 없는 거였어? 너도 그렇게 생각해???"

감출 생각 없이 화를 그대로 분출해내는 현수를 유심히 살피며 형준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일전에 온천여행권이 

물레방앗간이었다면 자신의 신분은 사랑의 가교 역할을 하는 삼월이쯤 될 것이다. 아씨와 머슴이 대놓고 만날 수는 없을 테니 사랑의 전령이 있어야 

할 텐데 바로 아씨의 몸종인 삼월이일 테다. 비록 자신은 머슴에 속해진 몸종이지만 말이다. 한가하게 이런 잡다한 생각에 빠질 수 있는 것은 현수가 

재준을 용서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형준에게 있어서였다. 그리고 잠자는 숲처럼 변할 줄 모르고 고요하기만 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치닫던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준은 그 방향에 파란 불이 들어온 것이라 여겼다.

"좀 진정해. 나도 질문 하나 하자. 넌 재준이 게이인 게 기분 나쁜거야? 아니면 너에게 숨겼다는 게 기분 나쁜 거야?"

"당연히 숨겼다는 게 기분 나쁘지!! 그걸 말이라고 해?"

보통 절친한 친구라 해도 게이라는 단어가 주는 혐오감에 몸을 흠찟 떨기 마련인데 최소한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배신감에 부르르 떨고 

나중에 새삼 더럽니 어쩌니 하는 말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첫 반응이 저렇다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형준은 생각했다.

"그럼 저번에 소개해준 은영씨는 도대체 뭐야??” 

“아..그건 재준이가..음..바이라고 해야하나?"

"바이?"

"응. 여자나 남자나 다 가능하다는 말이야. 만약에 말이야, 재준이 네게 게이임을 말했다면, 넌 재준을 이해해주었을까?” 

“그래도 이렇게 뒤통수 맞는 것보단 나을 거야.” 

그건 결과론이다. 뒤통수 맞았기에 하는 말인 거다. 뒤통수를 안 맞았다면 분명 현수는 오랜 친구의 느닷없는 커밍아웃에 눈을 부리라며 지금보다 

더 난리를 칠지도 모를 일이다. 결과란 때론 모든 과정을 깡그리 지워버리게도 하는 막강한 단순진리가 될 때가 있다. 단순진리. 겉모습만 보이는 

번드르한 그럴싸함. 과연 그것이 참일까, 거짓일까, 

재준에게 있어서는 사랑이 참이지만 겉은 거짓이다. 일전에 재준이 각혈을 하듯 토해낸 현수에 대한 감정을 떠올리며 형준은 여전히 재준의 겉만 

보고 부르르 떠는 현수를 바라보았다. 

“십 년 전에 커밍아웃을 했다면 지금 현재까지 네게 있어 재준이 과연 가장 친한 친구일까?” 

역시 현수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지만 부정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 그런 거라고, 재준의 가면을 탓하기 전에 그 이유를 생각해봐. 

“일어나지 않는 일 따위 몰라, 내겐 지금 현재가 중요할 뿐이야. 그리고 지금 현재는 내가 제일 친하고 믿고 100% 다 안다고 생각한 친구를 겨우 

반도 몰랐다는 거고, 또 내가 속았다는 점이야.” 

바보, 그러니깐 넌 재준에게 아메바란 소릴 듣는 거야. 그가 나에겐 다 말하고 네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점에 대해 분노만 느끼지 말고 이유를 

생각해봐. 네게 거짓을 말하면서도 네게서 ‘친구’로 머무르고 싶었던 재준의 마음을 이젠 제발 좀 눈치채 보란 말이야. 이 단순무식한 녀석아!!!!

“아메바!!” 

"지금 내가 이러는 게 장난으로 보여??"

둥그레진 눈을 보니 이 두 사람의 줄다리기 모양이 정말 재미가 쏠쏠해졌다. 

그 재미속에서 긍정적인 미래가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형준은 슬쩍 미끼를 던졌다.

"아니. 장난으로 보기엔 좀 심각하던걸?"

"뭐?"

"재준이 말이야.. "

싫니 좋니 해도 토끼처럼 귀가 쫑긋해져 자신이 모르는 재준의 동태를 살피려는 현수를 보며 웨이터를 불러 앉은 자리에서 차 값을 계산했다. 

조금 뜸을 들여도 될 것이다. 조바심이 나지만 웨이터가 사라지기를 기다린 듯 계산을 마친 웨이터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현수가 다급하게 물어왔다.

"재준이한테 가봤어?"

"엉. 거기서 오는 길이야."

"어..떻게 지내?"

"뭐라고 했길래 재준이 그 모양 그 꼴이야?"

"어떤데?"

"엉망...보다 더 심각해. 죽을지도 몰라!"

"뭐????"

"사람 죽는 거 참 어려운 일이면서 한순간이야. 급성 알콜중독으로도 죽을 수 있다고."

"재..재준이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도 모르겠더라. 애들이 옆에서 말렸는데도 어디 그 녀석이 현수 네가 아닌 다음에야 애들 말 들을 인간이야? 

한 일주일을 물도 안 모금 안 마시고 빈속에 술만 마셨나 보던데? 민이하고 놀라서 나한테 전화 와서 가보고는 놀라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어."

"왜..민이 나한테는 전화 안 하고.."

"민이 말로는 재준이 너한테는 네가 먼저 전화하기 전에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던데??"

"이 고지식한 녀석!!!!"

"내가 하려는 부탁이란 게 그거야. 네가 얼마만큼 화가 났는지 알겠는데.. 그래도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겠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술만 퍼마시는 

녀석 보고 있으니 폐인 되는 거 금방이다 싶더라. 일단 재준이부터 좀 진정 시켜주고 그 다음에 따져도 늦지 않다고 봐. 미우나 고우나 친구잖아."

친구잖아, 라는 말은 도무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말에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는 현수를 보며 형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뭇거리며 덩달아 

일어나는 녀석에게 한 마디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리 나한테 속내를 털어놓는다고 해도 너와 나는 레벨이 틀려. 난 폭주한 재준이 못 말려. 하지만 이 현수. 넌 그게 가능해. 

그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재준이에게는 네 목소리가 들려. 그 정도로 넌 재준이에게 특별한 존재야. 나 같은 시시껄렁한 친구가 아니라."

형준은 멍하니 서 있는 현수를 뒤로 하고 카페를 나왔다.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민에게 전화를 해 성과를 이야기해주는 걸로 뒷공작을 

펴고 아무래도 이 사태의 원인제공자인듯한 도영에게 벌을 내려야 하나 상을 주어야 하나 고민을 하며 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영은 재준을 사랑한다고 여기고 있지만 자신이 보기엔 어디까지나 선망의 대상일 뿐이고 또 재준과 현수가 해피엔딩으로 잘만 산다면 마음을 

접으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는 것이다.

물론 재준의 상태는 심각했다. 술고래인 재준은 얼마나 마셨는지 형준마저 못 알아볼 지경이었다. 민을 비롯한 애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 

나중에 현수를 만나게 되면 초췌한 모습을 더 싫어할 것이라는 설득이었다고 민이 말해 주었다. - 간단한 끼니를 억지로 때우기는 했지만 일주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그 이유라는 게 전화를 기다린다는 어이없는 이유여서 해롱거리는 재준이 녀석의 머리통을 쥐어박기도 했다.

형준은 자신의 전화를 받자마자 뭔가 꾸밀 게 틀림이 없는 민 일행을 상상하며 늦은 밤 하늘을 향해 큰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좋다라..."

말도 안 된다. 내 안에 품지 않고 어떻게 견뎌낸단 말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절대 만족할 수 없는 게 사랑이다.

하지만..그렇단다. 천하의 도 재준이가.. 그렇게 말했다. 말도 안 된다 생각하지만 그의 진심을 한 톨도 의심하지 않는다.

재준은 미친 거다. 현수에게 미쳤고 사랑에 미쳤기에 그런 로맨틱한 말을 하는 거다.

어쩌면 사랑은,  미쳐도 즐거운 것인지도 모른다.

**

전화가 오지 않는다. 

하루 이틀까지는 어떻게 세었는데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가끔 주위를 맴돌고 있는 민에게 물어볼 뿐이었다. 처음엔 일이야기를 하던 민이 

녀석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예 집에 들어앉았다. 가라고 그만큼 소리를 쳐도 꿈쩍도 하지 않기에 나중에는 기운이 빠져 관두었다. 

솔직히 술 심부름을 시키려고 집에 머무는 것을 간과했다.

"언제까지 빈속에 드실 겁니까? 간단하게 차렸으니 좀 드십시요"

내미는 쟁반 위에는 금방 지은 밥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전화가 올지 몰라 조바심이 난 상태에서 밥알이 목구멍을 통해 

넘어갈 리가 없다. 말로 해서 안 될 것 같아 손을 휙 저으니 민이 재빠르게 쟁반을 들어 밥을 사수했다. 몸이 빠른 녀석도 아닌데 그 넓은 쟁반바닥 

하나 일격에 넘어뜨리지 못하나 싶어 자조의 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정신으로 뭔들 제대로 하겠나, 라는 생각을 출발로 해서 왜 이 사태까지 오게 만들었나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끝은 언제나 깊은 우물에 

빠진 듯 우울한 상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드십시요. 형님."

"치우라고 했다."

"형님."

"내가 너 한 대 칠 힘이 없어서 이러는 줄 알아? 얼른 치우지 못해???"

"설마요. 삼일이나 식사를 안 하셔서 일어서실 때 현기증으로 휘.청.하신다고 한들 어디 제 멱살 잡을 힘!! 까지 없겠습니까?"

"노 민!!!"

"현수형님 모르십니까? 언제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실지도 모르는데 이런 모습으로 맞이하시 겠다구요? 아아..물론 현수형님께서는 깊.은.우.정으로 

형님을 곱게 봐주고 계신다고 하나 이런 악취가 나는 몸을...반갑게 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잡는 걸 빼먹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재준이 팔을 들어 킁킁 냄새까지 맡았다.

"악취..라니.."

"샤워 하신지 삼일이나 지났다는 말씀입니다. 식사도 좀 하시고 냄새 나는 머리도 감고 면도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삼일이나 지났으니 곧 연락 오지 않겠습니까?"

"그..그렇겠지? 삼일이나 지났는데.."

"그럼요. 현수형님도 오래 기다리는 일 답답해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곧 연락이 올 겁니다. 먼저 식사라도 하셔서 거칠어진 얼굴이나 좀 

다듬으세요. 이거..몰골이 영 엉망이라서 현수형님 오셨다가 다시 돌아가실 것 같은데요?"

"그..정도로 심해?"

"물론입니다. 두식아 네가 봐도 좀..아니지?"

"그럼요!!! 형님. 어서 식사부터 하십시요!!!"

방을 잘 치우지는 않지만 몸 하나만은 깨끗이 하던 현수가 행여나 자신의 엉망인 상태를 보고 돌아가는 사태를 상상하던 재준이 민이 내민 쟁반을 

받아 채가자 서있던 민과 두식이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졌다.

물론 먹으라고 한 말이지만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법한 돌리는 말이 이토록 효과를 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 번 세웠던 고집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세웠던 재준의 강단 있는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볼 수 없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환대만을 목매이게 기다리고 있는 사랑에 빠진 남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효과도 며칠 못 가고 7일째부터  재준이 다시 술만 입에 대기 시작했다. 형준의 전화가 오자마자 받았다가 이 번호로 다시 전화하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던 재준에게 놀라 형준이 민의 번호로 전화를 했다. 마침 형준에게 전화를 넣을려던 민이 반갑게 형준을 재준의 집으로 초대했다. 

자신을 못 알아볼 정도로 취해 잠을 자고 있는 재준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형준이 해결사로 나섰고 그 해결이 끝났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민은 작업에 

들어갔다.

일단 재준의 명에 의해 어거지로 가지고 왔던 술병들을 다 따서 재준의 몸과 거실에 뿌렸고 얌전한 자태를 뽐내던 장식장의 유리를 조심스럽게 깼다. 

파편에 재준이나 현수가 다칠까봐 작은 유리 조각들은 청소기로 다 빨아 들이고 눈에 띄일 큰 파편 두 개 정도만 바닥에 고이 모셨다.

비닐봉지에 밥솥의 밥과 냉장고에 음식들을 아낌없이 몽땅 버렸다. 그리고 재준을 먹었던 그릇들은 설거지하고 난 뒤 싱크대 안에 넣어두었고 휴지로 

개수대의 물기마저 깨끗하게 닦는 치밀함에 거들던 두식과 상준이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서재로 쓰고 있던 방으로 들어가 책 몇 개를 거실 바닥에 뿌렸고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은 지난 잡지들 몇 개를 찢어 바닥에 흩어놓았다. 

소파 한 개를 뒤로 넘어뜨리고 텔레비전도 바닥에 뒹굴게 하고 침실에 있던 스탠드도 들고 와 바닥에 헤딩시켰다. 마지막으로 잊지 않고 재준의 몸을 

덮고 있는 옷가지를 다 벗기고 옷장을 뒤져 민이 보기엔 평범한 것 같으면서 섹시해 보이는 팬티를 가져와 재준의 속옷까지 갈아입히는 수고까지 했다.

기겁을 하며 말리는 두식에게 별로 효과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일이란 어디서 물꼬가 트일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일장연설을 하며 민은 자신 

행동의 타당성을 동지에게 설명했다.

구토한 흔적이라도 만들어야 실감이 날 것 같았지만 차마 그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민은 눈으로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신발을 신었다. 

현관을 빠져나오며 혹시 현수가 열쇠가 없을까 봐 문을 빼꼼히 열어 두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열린 문틈으로 술 기운에 쓰러져 자고 있는 재준의 

모습을 보며 그가 듣든 말든 민은 재준에게 인사를 했다.

"좋은 밤 되십시요.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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